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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인과판단의 오류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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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눈으로 척 보아서 얻는 모습이
진실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입장이 많다.
그 전도몽상을 치유해주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그렇게 감관을 통해 곧바로 얻는 내용을
인명론에서 현량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앞과 같이 자신이 척 보고 난 다음
눈을 감아도 무언가가 얻어지는 잔상이 있다면
그것은 또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자신이 어떤 추리나 관념분별을 행해서
얻는 내용도 아닌데
그러나 그 직전에 감각해 얻은 모습도 아니다.
여하튼 이런 내용을 놓고
자신이 진실한 모습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입장에서는
또 한편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기차나 비행기에서
어떤 모습을 스쳐 지나가며 본 것은
착각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진실한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로 사진을 처리해 놓고
어떤 것이 과연 진실된 모습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과학의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이 진리인가의 판단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내용을 하나 놓고
그것이 참된 진실한 모습이라고 주장할 때
그가 그것을 그렇게 옳다고 보는 기준과
반대로 이와 관련해 다른 내용은 엉터리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또 무엇인가를 찾아서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전도몽상 상태에서는
도무지 그런 근거나 기준을 제시해 내지 못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내용임에 분명하다고
고집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다 보면
그 사람은 자신의 손가락보다 작다.
그런 가운데 그 사람을 생각하면
자신은 킹콩 정도이고
상대는 난장이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멀리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큰 소리로 욕이나 비난을 해서
그 사람에게 소리치기를
조그만 분 이리와서 따져보라고 하니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마구 달려오는데
점점 모습이 커지더니
자신에게 와서 서니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2m 거인이라고 하자.
이것을 어떡하는가.
그래서 멀리 있을 때
그래서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을 때
돌을 던져서 정확히 맞추는 기술이
다윗에게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처음 손가락만한 크기의 모습에서
2m에 달하는 거구의 모습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 모습이 각 순간에 달라지는데
다 이것을 눈을 통해 직접 그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 현량이라고 하면 현량인데
이 가운데 어느 모습이 참되고 진실한 모습이고
어느 모습이 착각이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한 모습이
참된 진실한 모습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진리의 논의에서는
처음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충 자신이 참되다고 생각하니
참되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고
넘어가면 그 이후 대단히 곤란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그런 논의에 대해
모든 상은 참된 실상이 아니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 파악해야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제시하는데
이렇게 설명하면
여래를 보아서 무엇하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이도 있다.
전도몽상상태에서 그런 내용들이
다 의문으로 제기된다는 것이다.
본인도 prince 님을 상대로
그것을 설명해주려다가
너무 복잡해서
포기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마음안의 내용들은
언어로 표현해도
그 언어에 걸려서
서로 그 언어표현으로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지 못하고 헤매 도는 경우가 많다.
특이한 커피를 끓여 커피맛을 보았는데
그 특이한 맛을 다른 이에게
언어표현으로만 전달해주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그래도 언어표현을 빌리기는 하는데
이제 이 언어표현에 걸려서
상대가 엉뚱한 내용을
그 커피맛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대화가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영어 단어를 전혀 이해못하는 이에게
어떤 이가 그 단어를 영영사전의 내용을 통해서
설명해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그 설명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답답하게 느끼게 하는 사정이 많은데
그런데 그런 언어에 붙잡혀서
논의에 임하면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가 상당히 곤란함을
보게 된다.
이전 조각글에서 주역의 괘 가운데
건곤감이란 괘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태극기에서 이것이 어떻게 위치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잘 그릴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이것을 막대기 숫자를 세서
3456 이렇게 세고
35
46
이렇게 외우는 경우도 있고
건 감
이 곤
이렇게 외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되는가하면
과거에 공자와 같은 분이
이런 괘를 통해서 점을 치면서
이 내용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상당히 동양권에서는
중요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괘로 점을 치면
그것이 현실에서 미래의 내용을
알게 해준다고 보는가.
알고보면 그럴 것 같지 않다.
그 괘란 것이 2 진법으로 나오는 음양의 괘를
6 개 나열한 것이어서
전부 합쳐보아도 64 괘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일이
64 괘 즉 64 종류만 되겠는가.
그런데 이것을 놓고
천하의 흐름이나 장차의 일을
점친다고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맞지 않는다고 보는 이는
엉터리라고 보지만,
맞는다고 보는 이는 대단히
잘 맞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가수행자의 유가나
상응의 의미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주역에 적힌 구절들은
모호한 내용들이다.
그 모호한 내용이
각 구체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놓고
음미하면
매 경우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
주역의 여러 괘가 있는데
전도된 상태에서는
위에 땅이 있고
아래에 하늘이 있게 되면
별로 안 좋다고 보는데
주역에서는 이 괘를 놓고
지천태 괘라고 하고
상당히 좋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세돌 선수와 바둑을 두면서
이 주역괘를 의존해서
매번 어디에 돌을 둘까를 결정해나간다면
백전 백패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니다.
본인도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다닐 때
여기도 같고 저기도 같은데
어디로 갈까 망설여질 때는
점을 친다.
[...]
>>>
처음 눈을 떠 세상의 모습을 얻는 과정을
안식의 자성, 소의, 소연, 조반, 작업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
prince 님과 같은 경우는
그런 내용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답게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이해를 하기 마련이다.
자성 소의 소연 조반 작업 이런 용어들이
하나같이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기에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쉽게 표현하면
a + b => C
이런 관계로 안식(눈의정신작용)이 나타난
관계를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C 라는 내용이 a b 등을 의지하고 의존해서
그런 내용을 얻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어떤 모습을 얻을 때마다
위와 같은 관계를 반복해 보게 되니
이 C 라는 내용도 실다운 것이고
이 관계도 실답다고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심지어 유가사지론을 비롯하여 부처님도
그처럼 그 관계를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것을 실다운 내용으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또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에서 매번 이런 관계를 보고
그런 내용을 반복해 대하게 되니
어떻게 이것을 실답다고 보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비록 그런 내용이 마음 안에 얻는 내용이라고 해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함께
마음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을 경험하게 되니
실재에도 그런 내용에 상응한 something special 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prince 님의 주장에 대해
본인이 과거에 답변을 한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또 유가사지론과 같은 논서에서 제시한
내용이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논서의 체계는
처음 수행자가 대하게 되는 현실세계의
기본 내용을 잘 파악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가
수행해 나가게 되는 내용을 차례차례 나열한 다음
수행목표를 성취한 상태까지 기술하는 것이지만,
각 항목을 사전식으로 나열해 설명하기에
방대한 이 내용을 처음부터 살피는 입장은
어떤 백과사전을 놓고 차례차례 읽어나가는
입장이 되어 흥미를 갖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살펴 보려하면
내용이 이해가 안 되고
졸립고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불교 논서에는 유명한 논서가 많은데
세친의 구사론이나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이나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이나 중관론
그리고 미륵보살의 유가사지론
이런 논서들이 상당히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전 내용도 방대한데
경전 내용을 설명한다는 논서도 논서대로
상당히 이해하기 쉽지 않고 내용도 방대한 것이 사실이다.
경전과 논서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대하는 것이
좋은가는 각각에 따라 다르지만,
내용이 상충할 때는 그래도 경전을 기준으로 놓고
살펴야 하기에 경전을 본인은 먼저 살피게 되는데
때로는 경전 내용이 논서 설명보다 더 쉽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중관론을 보면 용수보살이 도대체
무엇을 입증하려고 무슨 논의를 하는지
파악하기 힘든데
그냥 대반야바라밀다경을 보면
오히려 실상이 공하고 그 실재를 얻지 못한다는
사정을 더 쉽게 이해하고
그리고 그런 이해에 바탕해서
수행해야 할 내용도 훨씬 풍부하게
배우게 된다고 보는데
정작 논서를 보다 보면
지엽적인 문제에 너무 깊이 들어가고
내용은 내용대로 일반적인 입장에서나
전문 수행자의 입장이거나
어느 입장에서건
그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형태로
복잡하게 서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떤 내용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그것을 알았다고 할 때
그 상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놓고 생각하다보면
너무 깊이 논서에서 다루는 주제를
살피는 것은 오히려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유가사지론은 수행과 관련해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한번은 살펴야 한다고 보는데
여하튼 현재 첫 부분에서 막혀서
잘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단 정리가 잘 안 되는 부분은
그냥 넘기고 계속 내용을 살피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게 된다.
본인이 생각할 때
유가사지론이던 중론이던
또는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 내용이던
시설한다는 내용을 파악해야
prince 님과 같은 오해를 하지 않게 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시설(施設)이란 불교용어로서,
또 다른 표현으로는
가명(假名)이나 안립(安立)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고
그것은 실재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설명을 위해서
그런 내용을 임시로 방편으로 잠정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 시설(施設)이란
생활에 필요한 도구, 장치 따위를 베풀고 설비함. 또는 그런 설비자체를
가리키는데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공시설은 본래 자연에 그렇게 있던 것이 아니고
필요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에서 어떤 내용을 시설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고
샐재한다고 할 수 없는데
그러한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방편상 임시적으로 일단 그런 내용을 있다고 제시하고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는 그런 의미다.
그래서 중관론이던 유가사지론이던 논의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제시할 때
그 내용이 그처럼 실재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고
상대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게
그렇게 일단 시설해 놓고
그에 바탕해서 내용을 설명해 나가
최종적으로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은 이 경우
그런 결론이
처음 그렇게 시설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끌어진 것이니,
결국 그 첫 바탕이 실답지 않다면
그 결론이 타당하다고 볼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결국 그 결론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이런 비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입장은 그런 문제가 있지만,
그런 주장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 가운데
상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제시해준다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문제가 처음부터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이 조금 복잡하다.
그래서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살피기로 하고
현실적으로 이런 논의가 어느 부분에서
중요한가를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러 복잡한 논의를 다 살피더라도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다음 문제와 관련된다.
본인도 지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은 것 같은데도
다 마치지 못하고
시급하게 죽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죽음이 예견되는 문제에 부딪히거나,
그것은 아니더라도
신체에 큰 질병이 생긴다거나
생계해결이 당장 걱정된다거나
기타 등등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
이런 식으로
평소 자신이 집착하는 것과 관련해
온갖 번뇌가 다 일어나게 마련인데
그런 문제를 놓고 이 문제가
무엇을 제시해주기에
그 논의가 중요한가를 늘 되살펴보아야 한다고 본다.
지금 자신의 생명, 신체가 문제되는 상황인데
왜 이런 한가한 논의가 문제된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사실 이 논의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관련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심각하게 문제되는 사건이나
내용에는
그 당사자가 의식하던 하지 못하던
언제나 위 문제가 함께 들어 있다.
사실 위 문제는 현실에서 각 사람들이 각 내용을 대할 때
잘 의식되지 않고 숨어 있는 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람들이 이것을 취해서
사용하면
고통의 생사 현장에 묶여 들어가지 않게 될 수 있고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는 반면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취해서 사용하지 못하면
현실에서 자극을 주는대로
그대로 그에 접착되고
그런 상태로 반응해나간 끝에
고통의 생사를 묶여 받아나가게 된다는 점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여하튼 '시설'이란 내용을 설명했는데
이것이 각 논의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설명하기로 한다.
현실에서는 무엇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놓고 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행해 나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의 생사를 받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그렇게 있다고 문제삼는 것이
그 당사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좋음과 나쁨을 많이 가져다 준다고 보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자기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기본은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자신이고
그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이런 식으로 그 번뇌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실답게 자신이라고 보아야 할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고
그래서 그에 관해 일으키는 모든 망상분별과 집착과
그에 바탕해 갖는 일체의 쓸데없는 희망을
다 제거해야 함을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보살의 성품으로 제시되는
첫 부분에 제시되는
공 무상 무분별원(住空 無相 無分別願 )에 머묾
이런 내용도 그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는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의 내용으로서
결국 망상분별과 그에 바탕한 쓸데없는 희망을 제거해서 없게 해야
기본적으로 해탈을 이룰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수행자는 다시 현실에서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함에 대한 서원으로
그것을 대체할 것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내용이 과연 실답게 있는 것인가 아닌가의 논의에서
앞과 같은 시설이 모두 문제되는 것이다.
이는 소송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정적 항변'을 생각하면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이란 소송용어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이 상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소송에서 어떤 이들이 a 라는 사실이 있다 없다를 놓고
다툰다고 하자.
그런데 A 라는 사실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는
재판관이 그런 사실을 인정할 만한
그 근거나 증거를 제시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근거없이 그런 주장을 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또 상대가
a 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할 때
그것을 부인한다면
그 역시 그 사실을 입증할 책임을 부담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간에
갑이 을에게 어떤 돈을 빌려줬다 안 줬다를 놓고
다툰다고 하자.
그런데 갑이 자신이 을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주장할 때
을은 먼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함과 동시에
설령 갑이 자신에게 돈을 준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자신이 과거에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은 것이었다거나,
다른 손해 배상액을 받은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소송에서 어떤 사실을 놓고
각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은
현실에서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여러 내용을
놓고서도 같이 문제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놓고 이것이 자신이다.
자신의 생명이고 신체고
또 자신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그 내용을 집착하고
온갖 전도망상과 번뇌를 그로부터 일으켜 갖고
그리고 그에 바탕해 각종 생각과 말과 행위 자세를 취하고
그리고 지옥과 아귀 축생의 고통세계에 골인해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제시한 것은
그런 내용을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런 내용은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에서도 얻지 못하고
또 그런 생각을 대응시키는 감각현실에서도 역시 얻지 못하고
또 그런 생각안에는 그런 내용이 역시 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할 때 그 근거도 이미 밝힌 것이다.
일단 다음 실험을 할 수 있다.
어떤 모습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런 생각은 눈을 감고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
눈을 감기 직전에 보았던 그 모습을
그 생각 내용 안에서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는가.
스스로 실험을 해보라.
이렇게 요구한 것이다.
생각 내용 안에는 그 생각으로 가리키는 내용이 없음을
이로써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살펴보라.
그런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그에 대해 행한 그런 분별내용을
찾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감각현실 그 자체가 그대로 그 분별내용인가.
이렇게 질문을 하여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한 것이다.
또 그 사정은 그런 내용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에서도 마찬가지임을
또 그런 형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을 하나 놓고
그것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의 내용인가.
물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들은 모두 실재가 아닌 것이다.
또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 실재는
진짜라고 할 내용도 없고
공한 것이다 (무아 무자성, 공 )
그래서
무엇을 얻을 수 없고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와 같이 제시함과 함께
그런 여러 분별을 행하는 그 분별 내용에는
또 이를 통해 구하는 내용이 없음을 그렇게 제시함으로써
그 입증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그 망상분별을 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
그 모든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집착하면서
그 주장을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망상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하게 되는데에는
나름 사정이 있다.
즉, 그런 망상분별을 반복시키고
그래서 굳건한 내용이라고 믿게 만드는 여러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는 망상분별이 반복되고
감관을 열어 세상의 내용을 그처럼 얻는 일이 반복되니 ,
이제 그에 바탕해 그런 내용이 그처럼 실답게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일단 1이 눈을 떠 대하는 세계의 모습을 대강 위와 같다고 하자.
이 때 대부분 1 의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보게 되는 부분을
꽃을 향하여 꽃을 잡으면
그 꽃이 꺽이고
그런 가운데
꽃이 꺽여지는 소리도 듣게 되고
향까지 얻게 되고
꽃에 대한 촉감도 얻게 된다고 해보자.
그리고 꽃에 있는 가시가 있는데
그 가시를 뽑아 여기저기 찔러 보는데
1 부분에서는 통증을 느끼게 되는데
적어도 1 부분 외에서는
자신이 직접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2 나 3 을 그 가시로 찔러 대면
2 나 3 도 비명을 지르겠지만,
여하튼 1 은 그 통증은 직접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부정해보려고 해도
1 은 자기 자신이고
그리고 그런 1 자신은
그림에서 4 와 같은 꽃을 대상으로 삼아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만져 그런 촉감도 얻고
그런 소리도 듣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것은
이런 각 경우에
1 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갖는 1 부분이
허물어지고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생존을 걱정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고통스런 병에 걸리고 늙고 죽는 현상을 가장 걱정하게 되는 것이
현실의 삶인데
그것은 모두 위 1 과 관련되어 갖게 되는 문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가시나 바늘을 가지고
1 의 부분을 찔러 대면
그 누구라도 비명을 질러대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그래서 이것이 모든 이론이
최종적으로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현장에 앞에서 제시한
'시설'의 문제도 관련되는 것이다.
여하튼 망상분별을 전개하고
그에 접착된 입장에서는
바로 위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위와 같은 내용이 비록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고
또 그에 대해 매 순간 집착을 굳건히 갖고
이를 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려는 입장에서는
이에 대해 무엇을 제시하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그런 내용을 주장할 때
그런 내용자체가 관념분별이고
그것은 위와 같은 감각현실이나
그 본바탕이 된다고 하는 실재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관념분별을 그처럼 일으켜 행한 것은 인정하지만,
정작 그 관념분별을 놓고 살피면
그 관념분별이 가리키고자 하는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도
그 안에 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각 내용에서 실답게 보아야 할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사정을 충분히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이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소송과정에서 당사자가 사용하는 방식처럼
두번째 논의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일단 그것이 무엇이던
상대가 무언가를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하고
꽃이라고 하고
주장을 마구 전개해나가니,
그렇다고 하자.
이렇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고
상대가 주장하는 여러 체계를 다 받아들인다면
그런 경우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게 되지 않는가.
이런 주장을 다시 덧붙이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처음 a 가 있다 없다
그것이 없다가 있게 된다.(생한다)
또 있다가 없게 된다. ( 멸한다. )
늘 그것은 있다. 늘 그것은 없다. ( 영원하다 )
또 그런 것이 한번 있어서 A라고 하지만,
그것이 있다가 없으면 이후로는 무한히 없다. ( 단멸 )
이런 각종 주장을 할 때
처음에 문제삼는 영역에서는
그런 A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그런 바탕에서는
다시 그런 A 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근거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 경우 그에 대해 문제삼는
'있음 없음' 생멸, 영원함 단멸함 등도
또 그런 A와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렇게 문제삼는 A를 얻을 수 없고
또 문제삼는 유무 생멸 상단을 모두 얻을 수 없는데
다시 그 A 가 무엇때문에 무엇을 원인으로
생겨났는가는
또 무엇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처음 a 를 얻을 수 없고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입장에서는
이 논의 대부분이 논의할 바탕 자체가
없음을 제시한 것이고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그 망상분별과
그에 바탕한 집착과
그에 바탕한 업과
그에 바탕해 받는 고통을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상대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여
그렇다고 하고
그래서 그런 A 도 있고
a 의 생멸도 있고
그것이 생멸하는 관계도 그렇다고 하고
이제 논의를 시작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각 내용은 언어로 시설해 가리키면서
논의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시설이라고 하는 부분인 것이다.
.
그처럼 방편으로
세속에서 대하는 그 일체 내용을 놓고
일체가 무상하다
고통이다.
무아, 무아소(나와 나의 것이 없음), 무자성이다.
열반적정이다.
공하다.
이런 내용을 시설해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를 통해
그런 망상분별을 비우고
그에 대한 집착을 없애서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를 얻게 될 것을
기본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또 세속에서 수행자가 행할
각종 수행망안을
앞의 시설에 바탕해서 계속 제시하게 되는 데에는
또 사정이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앞과 같은 바탕에서
부처님은 각 수행방안도 시설하고
보살이나 보살의 수행방안 등도 시설하게 되는데
왜 처음 그런 내용들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그런 여러 수행방안과 수행목표를
세간에 시설해 제시하는가가
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우선 앞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통해
기본적으로 번뇌와 생사고통의 묶임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본래 생멸을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에 이르러
그 당사자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 환자는 그렇게 기본적으로 치유가 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나머지 무량한 환자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 상태에 안주해서는 안 되고
그런 상태를 본전으로 확보한 수행자는
그에 바탕해서 다시 현실에서 무량한 수행을 해나갈 필요를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음 문제가 그대로 똑같은 형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 사정을 이렇게
겅젼에서 밝히시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하는 내용은
방편시설이고 희론인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설하지 않으면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그 전도몽상 상태를 스스로 벗어나올 이가
거의 드물다.
그래서 부처님이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그런 전도몽상 분별 상태에 들어가
그런 내용을 시설해서 설하게 되는 것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처님으로부터
제도를 받는 수행자들도
또 그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병원에서 환자가 치료를 받고
생사에 관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제 그 환자입장에서는 자신의 모든 최고 목적이
다 성취되고
자신은 이후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의사로부터 치료받는 매 환자가
그렇게 그 수준에만 그치고 머문다면, 되겠는가.
결국 의사는 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치유한 이후에는
그에 머물지 말고
그 환자들 각각이 모두
다른 의사들처럼 또 다른 환자를
그와 같이 치유해나갈 것을 권유받게 되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처음 의사가
이들 환자를 치유시키기 위해 취했던 방안처럼
현실에서 이들을 제도할 방편을 찾아
무량한 수행을 해나갈 필요성을 제시받는 것이다.
중론과 유가사지론 등에서도
그 논의의 사정이 이와 같다고 이해할 수 있다.
상대가 A 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것이 실재하다거나,
그것이 진짜로 있다거나 이런 식으로
주장을 제시하고 고집을 할 때
일단 그렇다고 하자.
이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용수보살님이나 미륵보살님이
정말 그렇다고 본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 상대의 주장이나 논의 체계를 받아들이면
그 바탕에서 그것이 이러이러한 결론을 끌어내고
그래서 문제가 있게 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상대가 스스로 그 문제점을
볼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 같은 경우는
그것을 놓고
그렇게 주장했으니
오히려 그것이 처음 주장한 내용이
실답다고 밝히는 내용이 아닌가 하고
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송에서 행하는
가정적 항변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처음 그런 엉터리 주장을 고집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나는 그런 문제도
그 주장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항변을 제출하는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렇게 억지 주장을 반복하니
이제 그런 상대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또 그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을
상대가 그 입장에서 해결해 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 중관론은 이런 내용을 통해
상대가 무엇이 있다 없다 생한다 멸한다
무엇이 실재한다 등으로 분별할 때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한 것인데
그런데 한편
중관론의 근거 경전이라고 할 대반야바라밀다경이나
또는 유가사지론 등에서는
다시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가 현실에서 수행해나가야 할 내용을
다양하게 시설해 제시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런 내용은
또 앞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 얻을 것이 본래 없고
제도할 중생이나 제도하는 이나 제도하는 행위나
보시하는 중생이나 받는 중생이나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가
모두 일체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처럼 시설한 여러 수행방안을 행하면
또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고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여 그 모든 수행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가.
이 부분이 또 시설과 관련되어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의사가
prince 님과 같은 전도몽상 편집증상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그런 바탕에서 행해야 할 내용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다 문제가 안 되는데
prince 님이 이 두 내용을 다 붙잡고
하나하나 문제로 삼고 비판을 행하는 것이다.
조금 쉬면서
천천히 이 문제를 다시 살펴나가기로 한다.
[...]
하나의 현실에는 앞에 나열한 여러 측면의
내용이 다 그렇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는 문이 있는 반면
그 반대로 생사 고통을 깊게 받아나가는 문도 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사즉 열반에서 열반의 측면을 취하면
니르바나를 얻는데
이를 거꾸로 취하면
열반 즉 생사 고통이 되어서
청정한 니르바나를 놓고서
생사 고통이라고 여기고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위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이 바늘이 발에 꼽힐 때
중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현재 인과 문제에 대해서
논서의 내용을 공부 중이다.
인과의 문제를 놓고
간단한데 뭐 그렇게 복잡하게
연구하는가
이런 입장이 많은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부처님부터 강조하는 내용을 경전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 설법을 다 명료하게
기억하는 아난존자가
인과 문제로 단순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부처님에게 말씀을 올렸다가
그런 준엄한 주의사항을 들었다고 경전에 적혀 있다.
한마디로 인과를 올바로 이해한 경우에는
생사 윤회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므로
엉뚱하게 보고
엉뚱한 것을 붙잡고 행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사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
본인이 잘 모르니까
매번 복권 번호를 엉터리로 적어서
매주 복권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지
알면 그렇게 엉터리로 적겠는가.
복권 문제도 그렇지만,
나머지 문제도 다 마찬가지다.
본인이 잘 모르니까
매번 올라가기 전에 주식을 팔고
떨어지기 전에 주식을 사고
그래서 CAN 상태가 된 것이지
잘 알면 그 반대로 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사실 더 잘 알면
그렇게 복권이나 주식에
잠시라도 시간을 보냈을 것인가.
여하튼 결론만 보면
그 시간에
경전에 나오는 게송 하나라도 붙잡고
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매주 복권 1 등에 당첨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놓고
숫자로 그 비율을 적을 수 없을 만큼
가치를 얻게 된다고 제시된다.
아침에 허공경계무변제
이런 게송을 놓고
한 1 시간 동안 깊이있게 생각했는데
이것은 허공이 무위법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신축이 자재로와서
허공을 재는 기준이 되는 일정한 부피의 물체가
한없이 들고 날 수 있는 유위법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까지 제기하는 어려운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을 놓고
허공 내지는 공간이라고 보게 되는가를 생각하면
그런 어려운 문제까지
또 생각해보게 된다고 본다.
원래는 어떤가 하면
자신이 눈을 떠 본 것이 한계가 있는 만큼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마음 안에 맺힌 내용인 만큼
결국 한계가 있다고 보기 쉬운데
그런데 자신이 허공이라고 보는 그 부분이 그런 허공 내지 공간이라는 것은
어떤 기준되는 물체가 그 안에 자리잡을 수도 있고
비어 있을 수도 있다고 보기에
그에 대해 공간 개념을 갖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동적인 문제가 된다고 본다.
경전에서는 일정한 공간을 구획할 때
그 안에 일정한 부피의 물건이 겨우
그 자리에 들어간다고 일단 생각했는데
예를 들어 어떤 아파트의 한 부분을 놓고
그 안에 하나의 집만 들어간다고 생각한 것인데
경전에서 보면
그 안에 원하는 대로 세계 자체가 다 들어갈 수도 있고
그런데도 불편이 없다는 내용이 반복해서 나온다.
유마경에서도 그렇고
화엄경에서도 그렇고
다만 그렇게 하고 못하고는
수행자의 수준 문제에 달린 것이라고 제시되는 것이다.
오늘날 물리학에서 빅뱅 이론이 제시되는 것도
같은 사정과 관련되는 문제라고 본다.
빅뱅이론이란 우주 전체가 사실은
아주 작은 미세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누가 보았는가.
여하튼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본인이 과거 빅뱅의 탑의 눈이
그 최초의 빅뱅 순간을 보고
여기에 도착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고
팬클럽 회원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뻔 했는데
그것이 항의를 받을 일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 내용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본다.
여하튼 그런 가운데
유가사지론에서
인과 문제를 다시 살펴보고 있는데
조금 복잡하다.
그래도 매번 같은 내용만 적는다고
비난을 받기에
일단 연구중인 주제를 여기에 옮겨 놓고
같이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첫째 수설인(隨說因)이요, => 어인語因
둘째 관대인(觀待因)이요, => 영수인領受因
셋째 견인인(牽引因)이요, => * 습기인習氣因
넷째 생기인(生起因)이요, => * 유윤종자인有潤種子因
다섯째 섭수인(攝受因)이요, => * 무간멸인(無間滅因)... * 진실견인[眞實見因]
여섯째 인발인(引發因)이요, => * 수순인隨順因
일곱째 정이인(定異因)이요, => 차별공능인差別功能因
여덟째 동사인(同事因)이요, => 화합인和合因
아홉째 상위인(相違因)이요, => 장애인 障礙因
열째 불상위인(不相違因)이다. => 무장애인無障礙因
인연 => 종자연(種子緣)
등무간연(等無間緣)=> 무간멸연(無間滅緣)
소연연(所緣緣)=> 경계연(境界緣)
증상연(增上緣) => 조연
이숙과(異熟果)와 등류과(等流果) => 습기인習氣因, 수순인隨順因
이계과(離繫果) => 진실견[眞實見]
사용과(士用果) => 사용인士用
증상과(增上果) => 그밖의 인연
인 = 순익
연 = 건립
과 = 성변
원인을 세우는 데 다섯 가지 모양(5種相)
첫째는 능생인(能生因)이요, = 생기인(生起因)
둘째는 방편인(方便因)이요, = 그 밖의 연
셋째는 구유인(俱有因)이요, = 섭수인[攝受因]의 1 부분
넷째는 무간멸인(無間滅因)이요, = 생기인(生起因)
다섯째 구원멸인(久遠滅因)이다. = 견인인(牽引因)
또, 원인을 세우는데 다섯 가지 모양이 있나니,
첫째는 사랑할 만함의 원인[可愛因]이요,
둘째는 사랑할 만하지 못함의 원인[不可愛因]이요,
셋째는 늘고 자람의 원인[增長因]이요,
넷째는 헤맴의 원인[流轉因]이요,
다섯째는 적멸에 돌아감의 원인[還滅因]이다.
...
또, 원인을 세우는 데 일곱 가지 모양이 있다.
무상의 법[無常法]이 원인이며
항상함의 법[常法]은 법의 원인이 될 수 없나니,
혹은 남의 원인[生因]이 되기도 하고
혹은 얻음의 원인[得因]이 되기도 하고
혹은 성립의 원인[成立因]이 되기도 하고
혹은 갖춰 이루는 원인[成辦因]인 되기도 하고
혹은 작용의 원인[作用因]이 되기도한다.
...
유가사지론에서 10 가지 원인을 제시하는데
자세히 보면 20 가지가 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는 일단 이유가 있다고 본다.
씨 - 싹 - 꽃 - 열매
이렇게만 간단히 보기로 하자.
그런데 꽃은 씨의 결과이기도 하면서
다시 열매의 원인이기도 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원인을 제시하라고 하면
씨도 원인인데
씨의 결과로 보는 꽃도 또 다른 것과는 원인이 된다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수설인은 어인의 원인이라고 제시하면서
결과에도 인이라는 글자를 붙여 제시하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 아닌가
일단 가설을 세워보게 된다.
수설인 어인만 놓고 보면
지금 논의처럼 논의하고 생각하는데
모두 언어를 통해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언어는 무엇에 의해 이렇게
생겨난 것인가.
그런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중요한가.
현실에서 망상분별이 시작되고
그래서 생사과정이 시작되고
각 세계를 옮겨 다니면서 생사고통을 받는 과정도
바로 이와 같다고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그 문제 발생의
첫 부분은 결국 생각 분별인 것이다.
일단 용어도 낯설고
이렇게 복잡하게 인과를 따져
무슨 효용이 있는가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결국
유전인을 취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환멸인을 취해 해탈문을 열고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와
유희자재하게 임할 것인가.
그런 차이 때문에
이 논의가 필요한 것이라고 보게 된다.
● [pt op tr] fr
>>>
현재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이런 내용이
망상적 분별임을 이해함으로써
현실에서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찾아 들어가
생사 고통을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얻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에 대해 갖는
다양한 망상분별을 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행할 때
이들이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면
비록 그것이 실재의 내용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현실에서 갖는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그래도 살아 있는 동안만은 유효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자신인 것이고
다만 실재 영역에서만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실답지 않다고 여기고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대하는 꽃이나 사과도 역시
그렇다고 여기고 그것이 객관적인 대상이라고
또 여기는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
실재가 공하다고 제시하거나,
실재가 생사를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이고
생사 현실은 이런 실재를 떠난 것이 아니어서
실재는 곧 생사 현실가 다르지 않아 니르바나라고 제시할 때
이 말을 통해
생사현실을 그대로 실다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처럼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본다.
한편, 눈과 같은 감관으로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 내용들은 곧바로 감각을 통해 직접 얻었기에
그 자체로 올바르고
어떤 진리의 내용을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이미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적어도 자신의 생애 동안 늘 계속되는 어떤 내용이라거나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되는 내용이라거나
또는 자신의 주관이 자리잡고 있고 나머지는 이 주관이 대하는 대상이라거나,
그래서 자신은 다른 생명과 달리 깨끗하고 좋은 내용이라는 등으로 보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게 되는
연유와 사정을 제시했는데
그러나 그런 내용이 망상이라고 보는 것은
실재를 고려할 때만 실재와의 관계에서 그런 것이고
현실에서는 이런 견해가 계속 타당하고
적절한 입장인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또 이미 앞에서 제시했지만,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나는 관계도
역시 올바른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어도 현실에서는 올바르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또 비록 현실에서 a 를 얻을 수 없고
더 나아가 a 의 생멸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생멸을 떠나서 a 가 어떻게 무엇을 원인으로 생겨나는가를
논의할 수 없다고 제시하면
그것은 단지 실재의 영역과의 관계에서만 그렇다는 것이고
적어도 현실에서만은 그런 내용이 적절한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또는 수행에 있어서 제시한 수행목표와 방안만은
다른 것들과 사정이 달라서
그것은 무언가 실다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정도가 심한 망상상태는
자신이 현실에서 생각하는 내용이
현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감각현실 영역에도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고,
또 사정이 그렇기에
비로 실재를 직접 얻지는 못해도
여하튼 실재 영역에도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은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가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일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이들에 대해 상을 갖고 집착해 대하지 말고,
그런 모습을 취하지 말고
그에 머물려 행하지 말라고 하거나,
이들 일체의 것은 단지 분별뿐이고 명칭일 뿐이라고
경전에서 제시되는 경우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대하기 쉽다고 본다.
이런 상황을 비유하면
어떤 야구 운동선수가 아침에 운동화끈이 풀려졌는데
그날 홈런을 쳤다고 하고
다음 날도 또 운동화 끈이 풀렸는데 또 홈런을 치자
이제 운동화 끈이 풀리면 홈런을 치게 된다고 여기고
매번 운동화 끈을 일부로 풀어서 홈런을 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런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또 비유하면
병원에 입원한 망상증 환자가 치솔을 애완견으로 보고
메리라고 이름붙이고 끌고 다니기에
의사가 환자의 치유를 위해서
환자 상태에 맞추어 치솔을 보면서
요즘 메리가 건강이 좋은가 물으니
환자가 의사가 개를 빼앗아 갈까봐
이것은 개가 아니라 치솔이라고 우겼다는 그런 이야기와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게 된다.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할 때
손을 마주치는 것이 소리를 내는 것이 망상이라고 하면
그것은 실재의 영역에서만 그렇고
현실에서는 그런 관계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여기고
번개가 소리를 내는 것도
실재와의 관계에서는 설령 그런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만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이나 관계를
실다운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생사 현실이 니르바나라고 할 때
이 의미는 생사현실의 내용이 실답다거나
그것을 옳다고 볼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실다운 생사 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고
생멸을 얻을 수 없기에
그것을 니르바나라고 칭하는 것이다.
실재가 공하다고 할 때도
실재가 실답다고 하는 의미에서 실재의 공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공하다는 것은 이미 그런
실재 영역에서 진짜라고 할 실다운 내용을 얻을 수 없음(무아, 무자성)을 바탕으로
공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진짜라고 할 내용을 얻을 수 있다면
실재가 무언가라고 문제가 제기되면
공하다라고 답을 제시하지 않고
그런 내용을 제시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없고 (무소유, 무아, 무자성)
또 문제되는 실재 내용은 직접 얻을 수 없기에 (불가득, 공)
그런 사정을 언어로서 시설해 나타내기 위해서
공이라고 하는 명칭을 빌려 표현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현재 현실에서 대하는 것의
본 정체를 파악할 때
현실에서 대하고 생각하는 내용이
망상분별이고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혼동을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공한 실재를 바탕으로
어떤 이가 감각현실을 얻고
또 그에 대해 어떤 관념분별을 행한다고 할 때
그렇게 무언가 감각현실을 각 부분이 구분된 형태로 생생하게 얻었다는 사실이나
그를 놓고 이렇게 저렇게 묶어서 각 부분을 a 나 b 라는 분별을 일으킨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분별은 어디까지나
관념 영역에서 일으킨 것으로서
그런 내용은 그것뿐이다.
이렇게 정리해야 한다고 본다.
쉽게 이 문제를 보면 사정이 이렇다.
자신이 영희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그것을 그렇게 묶어 영희라고 생각하면
그 감각현실에 그런 영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때 영희의 손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영희의 손을 따로 묶어 관념하는 가운데
그것은 영희의 손이라고 생각하면
이제 없던 영희의 손이 새로 생겨난 것인가.
그리고 그 영희의 손을 놓고 그 손이 영희인가라고
물으면 어떤가.
조금 더 알기 쉽게 비유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시인을 동원해서 이 상황을 보기로 하자.
이제 어떤 시인이 그 영희를 바라보면서
이 영희는 한 떨기 수선화다.
이런 시를 읊었다고 하자.
이 때 그 부분에 없던 수선화가 새로 생겨난 것인가.
그리고 그 수선화는 이제 영희인가 아닌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제 또 상황을 알기 쉽게 다시 비유를 들어보자.
앞에서 치솔을 끌고 다니면서 그것이 메리라는 개라고
주장하던 이를 이 현장에 다시 동원해 보는 것이다.
그 환자가 영희를 대하면서
이제 영희는 메리를 체포하려 화성에서 온 우주인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그로 인해 거기에 또 우주인이 하나 없다가 생겨나는가.
그리고 그 우주인은 영희인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여기서 병원에 입원한 망상증 환자는 상태가 심한 것이고
시인은 그렇지는 않아도 이런 시인의 시는
진리판단에서 문제삼기 곤란한 별도의 내용이고
그에 반해서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런 관념분별은
이와는 달리 상당히 옳고 적절한 판단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영희를 영희라고 하고
영희는 지금 나이가 20 살이고
키는 170 cm 이고
이런 등등의 판단은 모두
최소한 현실에서는 올바른 판단이다.
심지어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된 옇희 모습은
그런 영희에 대해 옳게 얻는 내용이고
또 그 부분을 놓고 영희라고 생각하는 것도
옳은 판단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망상증세라고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재와의 관계에서
그런 내용이 실재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도 망상분별이고
또 그런 내용은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망상분별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앞과 같은 주장들도
역시 망상분별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모두 사정이 그렇지 않고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다만 그처럼 진짜가 아니고
실답지 않은데
마치 진짜인 것처럼
그렇게 실답지 않은 내용을
현실에서 얻고
또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은 이런 사정을 그렇게 올바로
관한 가운데
경전에서 제시되는 그런 수행에 정진해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 이들 각 내용은
그런 내용이 진짜의 내용이 있고
얻을 바가 있고
그래서 그렇게 제시되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또 금강경 등에서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현실에서 그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고
그것이 하나같이 얻을 바 없음을 잘 이해하고
대해야
생사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그 수행들 역시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왜 현실에서 그렇게 얻는 감각현실이나
그에 대해 생각하는 분별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를
또 자세히 실펴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한 번 태어나면 죽지 않는 이가 없다.
다 생멸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누군가 최면을 걸고
여기에 걸려서 살아가는 이가 거의 99.99 % 이라고 보기에
사실 현실에서 생사를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또 손을 마주치면서 소리를 듣는 가운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들리지 않던 소리가 지금 새로 생겨나
듣게 되는데
왜 여기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지
누가 도대체 정상이 아니고
망상증에 걸린 상태인지를 잘 헤아려 보아야 한다고 본다.
○ [pt op tr] 손을 마주칠 때 소리가 난다고 하면 누가 망상증인가의 문제
● [pt op tr] fr
비유하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이렇게 섞여 있을 때
원래는 대학원 입장에서는 문제가 안 되는 내용이더라도
유치원 생이 문제를 제기하면
문제라고 보아야 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유치원생과 대학원생이 시비가 일어났다.
이 경우 유치원생에게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유치원생과 시비를 일으킨
대학원생이 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사정에서
수행자가 현실에서 임하게 된다는
사정을 잘 이해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인터넷상에서 어떻게 일일히
통제를 해야 하는가.
사실은 그것이 수행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본인 상태가 그렇지 못해서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원래 부처님도 그런 상태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수많은 각 개인의 입장이 다른데
다 부처님이 자신에게만 말하고
또 그 입장에서 가장 좋은 내용을 제시한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는 하나인데
나무에서부터 작은 풀까지 다 자신이 알아서
좋음을 얻어가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수행자의 수준이 낮아서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거꾸로
나무에서부터 작은 풀까지 다
좋지 않다고 여기고
그로 인해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현실에서 사람들이 예민해 하는
종교문제나 정치문제 이런 내용을 주제로 삼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시시비비에 말려들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이런 문제를 원칙적으로 본다면
사실은 그렇게 대하는 상대가
오히려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각 문제를 대하는
그 상대의 전도망상과 집착 증상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행자 간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수행자가 일반 입장과 상대할 때는
그 반대로 그렇게 현실에서 임하는
수행자를 문제로 보게 되는 것이다.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렇게 인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을
선후관계를 통한 인과판단의 오류라고
보통 말한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면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맺어도
열매를 맺기전 참새가 날았다거나 하면
참새가 열매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어떤 원인을 행해도
그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는 가운데
관계를 살피지 않고
어떤 일이 있기 전 직전에 무엇이 있었나 없었나의 차이만으로
원인과 결과를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데
어떤 것이 보이면 그에 따른 결과라고 오해하는 한편
반대로 그런 관찰을 해도 그런 것이 보이지 않게 되면
어떤 원인에 해당하는 일을 하고도
그에 따른 아무런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후 관계의 내용을 살피는 가운데
서로 관계가 없는 것을
자신이 그것을 반복해 본 것 같다면서
서로 원인과 결과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운동선수가 자신이 홈런을 칠 때마다
그 전에 비둘기를 보았다면
비둘기를 보는 것이 자신이 홈런 치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징크스를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판단이 사실은 삶을 엉터리로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각 경우를 놓고 보면 정확한 인과관계 파악이
매 경우 쉽지 않으므로
이런 해석을 놓고 그럴듯하다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과를 이해하고
때로는 점술에 의존하게 되면
이세돌 선수와 바둑을 두는 경우가 아니라,
동네 초등학교 바둑을 두는 아이와 바둑을 두더라도
이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매번 수를 둘 때마다 주역괘를 뽑고 둔다거나
주사위를 던지면서 수를 정한다면
아무리 신통한 점술가라고 해도
바둑시합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인과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것은 그 주체가 이를 계기로
축생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복권을 살 때 워낙 복권당첨번호를 미리 알기 힘드므로
과거의 당첨번호를 놓고 분석을 하는 경우도
이에 준하는 인과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번호가 이번 주 당첨번호를 나타나게 하는 어떤 힘이
있다거나 영향력이 있다고 할 것인가.
어떤 투자를 할 때에도
과거 시세 자료가 현재 시세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것은 아닌데
이 경우도 앞 상황에 준해서
얼마나 관계가 있는가를 잘 따져 볼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과학적 인과 판단 분야에서도
시각으로 얻는 정보가
청각이나 촉각으로 얻는 정보를 일으킨다는
믿음이 강하다.
그래서
번개가 천둥소리를 일으켰다고 보는 입장과
손뼉을 치는 손이 손뼉소리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현실에서 설득력이 강한데
이 경우도 정말 그런가 하는 것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있으면 뒤와 같은 내용을 얻는 것도
경험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 시각 정보가
청각 정보의 원인이 된다는 입장도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해석도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본래 진짜가 없고
어떤 것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는
사실 무엇이 생겨난다는 내용도 제시할 수 없고
다시 어떤 것이 생겨나는 원인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살필 전제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앞과 같은 바탕에서
현실에서는 그러한 감각현실을 생생하게 얻고
무엇이 거기에 있다 없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이런 문제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생멸을 문제삼고
원인을 따지는 것은 바로 이 바탕에서부터
그것이 시작되는 일임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는
또 왜 a 가 생겨났는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또 이에 바탕해서 a 를 장차 얻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유무논의의 효용과 관련해서
무원무작삼매와 서원의 실천방안의
문제로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무원무작삼매란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일으켜
집착하는 가운데
현실에서 설정하고 추구하는 모든 희망이
자신과 다른 생명을 광범위하게
생사고통을 받게 하고
그에 묶이게 하는 것이 되니
일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수행내용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현실에서 수행자는
중생제도와 불국토 건설과 장엄 그리고 성불에 대한
무량한 대원을 세우고 이를 성취해야 함을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결국 어떤 희망을 설정하고
추구하는 성격 자체는 같아 보이는데
왜 한 부류는 남김없이 제거해야 한다고 하고
그에 반해 서원은
반대로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수행자가
유희자재 신통력을 통해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잘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킨 바탕에서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바탕해
당장 자신에게 단순히 좋은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경우와
실상을 올바로 꿰뚫어 관하는 가운데 현상을 관하고
그리고 그에 진짜의 내용과 실재에 얻을 바가 없음을 잘 관하여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는 넓고 길고 깊은 관찰에 바탕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무한히 오래오래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두 좋은
그런 상태를 추구하는 것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차이의 경계선이
곧 현실에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좋음을 집착해 추구하는 방안과
현실에서 수행자가 보리심을 일으키고
서원을 일으켜 추구하는 수행의 방안의
경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차이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차별이고 구분이며
그에 해당한 진짜의 내용이나
실재에서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수행자는 이 사정을 잘 관하고
서원 역시도 바로 그런 바탕에서
생멸과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 본
상태와 상응하게 현실에서도
청정한 니르바나에 여여하게 임할 수 있도록 하고
다시 이 바탕에서
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기 위하여
무소득(얻을 바 없음)을 방편으로 집착없이
수행에 임해야 함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 문제를 역시 유무의 논의의 효용으로
살펴나가기로 한다.
>>>
현실에서 어떤 희망에 집착을 일으키고 추구하는 것을
모두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사정이 간단하다.
그것이 바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낳네
라는 민요가 전해주는 메세지라고
일찍히 그 사정을 제시한 바가 있다.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게 되는 내용
그리고 좋다고 보게 되는 내용을 놓고
집착을 일으켜서
그것을 자신의 위와 같은 협단천 관찰방식에 의해
얻을 수 있다고 보는 방안이나 그 원인을 찾아서
추구하게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그 자신이나 다른 생명이
아리고 쓰린 고통을 받게 되는 결과를 낳는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를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 보게 되는
바탕에서는 그렇게 행하면
그 바탕에서 고통이나 나쁨으로 보게 되는
내용을 그렇게 얻게 되는 관계가 파악되기에
그런 것이다.
앞에서 유무 논의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한 내용은
진짜의 내용이 없고
실재를 얻을 수 없어 공하고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그렇게 실답지 않은 것임을 관하고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라고
기본적으로 제시했는데
그 사정을 그렇게 보지 못하면
결국 현실에서 무언가 엉뚱한 것을
엉뚱한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고
그 가운데 무엇인가를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고
임하고 위와 같이 엉터리 관계를 파악해서
그것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래서 그 생사고통의 전개 과정의
근본 원인은 바로 이런 기본 바탕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근본 무명을 그런 관계가
나타나는 관계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이것을 제거하고
그 대신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통해서
앞과 같은 사정을
실상을 꿰뚫어 밝게 비추어 보는 가운데
그 사정을 파악하고
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해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얻는 수행을
집착없이 정진해나갈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짜가 없고
실재에서 얻을 바가 없음만을 강조하면
현실에서 수행자가 그런 서원을 일으키고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본 바탕 사정이 그런데도
근본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그것을 밝게 비추어 보지 못하고
그렇게 망상을 일으키고 임하면
현실에서 무수한 축생들이 손과 발이 잘려지는
고통을 겪는 것처럼
각 생명이 그렇게 실답지 않은 내용인데도
반복해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는 사정 때문에
수행자가 홀로 무여열반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중생이 망상을 일으켜 대하는
생사 현실에 들어가서
중생을 이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수행을 해나가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는 본래 그렇게 잘 되지 않는
상대에게 곧바로 그런 사실을 관하고
무여열반에 직접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려운 사정이 있기에
중생이 그 입장에서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을
놓고 수행자가 수행을 하고
복덕자량을 얻고
그 바탕에서 무량방편과 지혜자량을 닦아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내용이다.
비유하면 최면에 걸려서 없는 생사고통을 겪을 때
관객이 관객의 상태로 상대가 나오라고 아무리
요구해보았자 그 상대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게 되므로
관객이 그 상대 입장에 들어가서
그 상대의 바탕에서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노력을 하게 된다는 그런 상황으로
이 사정을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나 촉각정보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과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취하는 입장이다.
번개가 치면 천둥소리가 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밤은 낮이 만들어 낸다거나
까마귀가 날아서 배가 떨어진 것이다.
이런 이해와 비슷한데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관계를 매번 반복해서
대하니 이 이해가 적절하다고 이해하고
대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무엇과 무엇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는가를
따질 때는
결국 어떤 상황에서
원인으로 혐의를 두는 것을 하나 잡고
그것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그에 따라 자신이 결과로 혐의를 두는 것이
변화가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이 관계를 따지게 된다.
그래서 그런 관계가 파악되면
그 상황에서 그 둘이 그런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게 된다.
우선 그런 관계가 구체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고 보기 힘든 것이기도 하고
또 이와 같은 관계가 파악이 되도
실험을 하는 상황이 매번 유동적이면
다른 내용이 개입해서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관계가 곧 인과의 관계라고 속단하기가 어렵게 된다.
한 예를 들면 이렇다.
석유로 인해 불이 타는데
그 상황에서 나무를 빼고 넣고 해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가 불과 관련이 없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또 하나
매번 자신이 A 가 있으면 b 가 나타나고
그 상황에서 A 가 없으면 b 가 없는 관계를 보는 것 같지만,
그 상황에서 사실은 C 가 그렇게 매번 있고 없고 해서
그런 변화를 일으킨 경우도 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결국 운동선수가 자신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승부와 관련시키는 징크스를 만드는 한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인과 판단을 잘 하려면
사실은 많은 것을 엄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이다.
위에서 번개가 천둥소리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보자.
자신이 눈을 감고 그 상황을 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번개를 보지 못한다해도
천둥소리는 듣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 상황에서
자신이 번개를 보거나 보지 않거나 관계없이
천둥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파악하면
이 이해가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앞 뒤 관계를 나열해 놓고
무조건 앞에 있는 것이 원인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은
만화책 비유를 통해 그런 해석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또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만화책이 뒤 페이지의 내용이
앞 페이지에 그려진 내용 때문이라고 보는가가 문제되면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기는 힘든데
그러나 여하튼 앞 페이지에 낙서를 하던
찢어버리던 뒤 페이지가 그로 인해서
변화하는 관계는 보기 힘든 것이다.
또 인과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는
앞 뒤로만 대하는 내용들이 그런 관계가 있고
동시에 파악되는 내용들에서는
그런 관계가 있기 곤란하다고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앉아 있는 것은
동시간대에 있는 의자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하지 않고
바로 찰나전의 의자 때문에 그 찰나 후의 자신이
앉아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런가하면
인과관계를 선후 관계로 파악되는 내용들 안에서
앞과 같이 무언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다른 것이 있고 없고 하는 차이가 있게 되는 관계로
이해하고 고집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과학 상식을 동원하면
한 낮에 밝게 보는 빛 안에는
지금 불을 켜서 비추는 빛도 있을 수 있지만,
100 년전에 어느 먼 별에서 출발한 빛도 있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것이 여하튼 자신의 삶에
지금 다 관계한다고 이해하는 것인데
이들 문제는 사실은 상당히 복잡한 논의를
따로 요하는 사정이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한 정지단면을 놓고
거기에서 한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무언가 A 가 있다고 판단하는 과정부터
잘 검토를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교과서에는
사람이 물체를 보는 과정을
사물 -> 빛 파장반사 -> 시신경의 흥분 로돕신 단백질의 변화 -> 대뇌 신경의 흥분 (그 부분의 혈류의 증가)
이런 식으로 관계를 제시한다.
과학을 연구하는 관찰자가 보기에 이런 관계가 파악이 되기에
그런 내용을 과학계에 보고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해서 C 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이 C 를 이 단계 각 단계에 배당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물 C -> 빛 파장반사 C -> 시신경의 흥분 로돕신 단백질의 변화 C -> 대뇌 신경의 흥분 C (그 부분의 혈류의 증가)
이렇게 이해하고 그림도 그렇게 그려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안에서 C의 모습을 얻었다면
그것은 외부 사물 C 때문에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이해하면
본 유무 논의에서 결론으로 제시하는
실재의 문제에서
실재는 C 라고 제시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므로
그런 결론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뒤에 다시 자세히 살피겠지만,
위 내용만 놓고 보아도 쉽게 추리할 수 있다.
사물이 어떤 빛을 반사해서 그렇다면
그런 내용을 반사시킨 어떤 사물이
반사된 파장과 내용이 같다고 할 것인가.
또 그런 파장에 의해 시신경이 흥분하고
로돕신 양이 태도를 바꾼다고 한다면
그것이 빛의 파장과 같은 내용이겠는가.
또 그것은 말단부의 사정이라고 할 것인데
그래서 대뇌에서 얻는 변화가 또 그 자체이겠는가.
그러면 소금은 소금에서 얻고
물은 물에서 얻는가.
나트륨과 염소가 화학반응을 하면 나트륨과 염소가 나타나고
수소와 산소가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수소와 산소가 나오는가.
그리고
나트륨과 염소가 화학반응을 해서 소금을 얻었다면
소금은 나트륨과 염소에서 찾아낼 수 있는가.
수소와 산소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물이 되었다면
그 물은 수소와 산소를 샅샅이 찾아보면 나오는가.
이 부분에서 조금 답답해지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과학자가 여하튼 이 관계를 관찰할 때
매 순간 순간 빠뜨리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 역시 과학자가 그런 눈으로
그런 내용을 마음에서 얻고
그 내용을 위와 같이 보고한다는 점을
매 순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돼지가 소풍가서 돌아올 때
인원점검을 위해서 수를 세는데
매번 자신은 빠뜨리고 수를 세어서
결국 인원이 부족해서
없어진 돼지를 찾느라 헤매고
돌아오지 못했다는 동화가 전해지는데
지금 한 단면에서 무엇이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과학자가 행하는 보고 안에도
이런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단면을 놓고서부터
거기에 무엇이 있고 없음의 문제를
잘 파악하지 않고
그 이후 계속 연속화면을 대하면서
무엇을 관찰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얻었다고 하고
비유하면
자신이 배를 매번 쉽게 얻는 것은
까마귀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큰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적당하게 대충 관찰하면
그런 해석이 맞는 것 같은데
현실에서 바로 그와 같이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서
어떤 관계를 파악하는 그런 입장 때문에
욱 스타일 행동모드와
장발쟌 스타일 행동모드와
루팡 스타일 행동모드가 나타나고
이것이 그 입장에서는 그럴듯하게 여겨지기에
그런 방안을 취해 임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그 내용이 바로
지옥과
아귀와
축생세계에
그 중생이 각기 묶여 들어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한 정지단면부터 놓고
여기에서 문제되는 A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 A 의 유무문제부터 면밀하게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 수행자가 임할 때는
바로 이처럼 깊게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서
관계를 살피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방안에서 제시되는 방안은
현실에서
복덕과 지혜를 얻는 방안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안과는
대부분 반대의 내용을 그 방안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도 있다고 보게 된다.
일단 앞처럼 각 생명이
지옥 아귀 축생세계로 진입하는형태로 행하는 것은 중지하고
그리고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는 방안은
계와 정과 혜의 3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고
자세히 나열하면
보정안정정반방원역지의 바라밀다 수행이
그 내용으로 제시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일단 기본적인 문제점만 대강 제시하고
이런 유무 논의가 이 부분에서
어떤 효용을 갖는가를 살펴나가기로 하자.
현실에서 배가 먹고 싶을 때
감각현실에서 그처럼 희망을 그릴 때 관념분별 형태로 그려내는 배는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지만,
그렇다고 모래나 바위를 놓고 그것을 배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모래나 바위를 섭취해서 배맛을 얻거나 배가 부르게 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무 논의에서
이것이 어떤 성격을 갖는 문제인가를 잘 살피고
기본적으로 수행자가
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갖는 희망을 모두 제거해야 하고
보리심을 일으키고 서원을 장착한 가운데
집착없이 위와 같은 수행방안을 취해 수행을 해야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게 된다고 제시하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 인과문제에 대해서 대충 쉽게 생각하게 되면
대부분 협단천 관찰방식에 임해서
엉터리로 판단하기 쉽다.
그래서 대부분 축생 아귀 지옥 세계의 포로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세상에서 그렇게 덩치가 큰 소나 곰이나
코끼리가 왜 동물원에 수용되는가 하는 사정을
굳이 설명하라고 한다면
협단천
즉 대충 좁고 짧고 얕게 관계를 파악하면서
현실에서 활동하기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
최소한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는 관계조차
소나 곰이나 코끼리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다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대부분 생명이
축생이나 아귀 지옥 세계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과정도
그 사정이 사실은 위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계에 해당하는 수행을 완성하지 않으면
무한한 시간에 걸쳐
그런 지혜 자량을 얻을 상태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 선악과와 영생과의 관계가 제시된다고 하는데
사실 수행 단계에서도
먼저 보정안정 즉 보시 정계 안인 정진라는
계의 수행부터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면
이후 생사의 묶임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도 해소시키지 못하고
그 바탕에서는 생사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그 상태에서는 복덕자량을 구족하지도 못하게 되므로
지혜 자량을 구족할 바탕도 없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 생사과정에서 포맷을 당하면서
분단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매 생을 치매환자처럼 대할 도리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변역생사를 통해
무량한 방편을 닦아
지혜자량을 구족하는 수행 자체가
이뤄지기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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