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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유쟁기2564-02-28_불설삼전법륜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유쟁기2564-02-28_불설삼전법륜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2. 27. 21:54



®

『불설삼전법륜경』
K0730
T0110

삼전법륜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불설삼전법륜경_K0730_T0110 핵심요약





♣0730-001♧
『불설삼전법륜경』




삼전법륜



불설삼전법륜경(佛說三轉法輪經)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이 명을 받들어 한역

최민자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 한때 박가범(薄伽梵)께서 바라닐사(波羅泥斯)의 선인이 떨어진 곳인 시록림(施鹿林:鹿野苑)에 계셨다.

그때 세존(世尊)께서 다섯 필추(苾蒭)들에게 말씀하셨다.


■ “그대들 필추여, 

■ 고성제(苦聖諦)에 대하여

들은 법(法)을 이치대로 생각하여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내어야 한다.


그대들 필추여, 


■ 이 괴로움의 쌓임[苦集], 

괴로움의 사라짐[苦滅], 

괴로움이 사라짐에 이어지는 도성제(道聖諦)


■■ 의 법을 이치(理致)대로 생각하여 

눈[眼]ㆍ지혜[智]ㆍ증명[明]ㆍ깨달음[覺]을 내어야 한다. ★★

 




그대들 필추여, 


■ 이 고성제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서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대로 생각하여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내어야 한다.


그대들 필추여, 

■ 이 고집성제(苦集聖諦)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끊어서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대로 생각하여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내어야 한다.


그대들 필추여, 


■ 이 고멸성제(苦滅聖諦)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증득하여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대로 생각하여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내어야 한다.


그대들 필추여, 

■ 이 괴로움이 사라짐에 이어지는 도성제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닦아서



■■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理致)대로 생각하여 

눈[眼]ㆍ지혜[智]ㆍ증명[明]ㆍ깨달음[覺]을 내어야 한다. ★★


 


그대들 필추여, 



■ 이 고성제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이미 알았다면,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대로 생각하여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내어야 한다.


그대들 필추여, 

■ 이 고집성제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이미 끊었다면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대로 생각하여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내어야 한다.

그대들 필추여, 


■ 이 고멸성제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이미 증득하였다면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대로 생각하여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내어야 한다.

그대들 필추여, 


■ 이 괴로움이 사라짐에 이어지는 도성제는 알아야 할 법이니, 

이와 같이 이미 닦았다면


■■ 들은 법에 대하여 
이치(理致)대로 생각하여 

눈[眼]ㆍ지혜[智]ㆍ증명[明]ㆍ깨달음[覺]을 내어야 한다. ★★



 


그대들 필추여, 

만일 내가 이 4성제법(聖諦法)에 대하여
3전(轉)하는 12상(相)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면,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모두 내지 못하여
나는 곧 모든 천인ㆍ마구니ㆍ범천(梵天)ㆍ사문(沙門)ㆍ바라문(婆羅門)ㆍ모든 세간에 대하여
번뇌를 떠나 마음이 해탈을 얻지 못하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들 필추여, 


■ 나는 이 4성제법에 대하여 3전하는 12상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눈ㆍ지혜ㆍ증명ㆍ깨달음을 모두 내어 모든 천인ㆍ마구니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ㆍ모든 세간에 대하여
번뇌를 떠나 마음이 해탈을 얻어 곧 무상보리를 증득할 수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 이 법을 말씀하실 때
구수(具壽) 교진여(憍陳如)와 8만의 모든 천인들이 번뇌에서 멀리 벗어나 법안(法眼)이 청정하게 되었다.

 


■ 부처님께서 교진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법을 알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이미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가 이 법을 알았느냐?”


교진여가 대답하였다.

“이미 알았습니다, 

선서(善逝)시여.”



■ 교진여가 이 법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을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아야(阿若)는 깨달아 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지거(地居) 약차(藥叉)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큰 소리를 내어 사람들과 천인들에게 알렸다.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바라닐사의 선인이 떨어진 곳인 시록림에서
3전(轉)하는 12행상(行相)의 법륜(法轉)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천인ㆍ사람ㆍ마구니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과 모든 세간에 큰 이익을 주시고, 

또한 범행(梵行)을 닦는 이들이 편안한 열반(湟槃)에 빨리 이르게 하셨으니, 

사람과 천인은 더욱 늘어나고
아소라(阿蘇羅)는 줄어들 것입니다.”


그 약차가 이렇게 알리니, 

허공에 있는 모든 하늘과 사천왕(四天王)들이 모두 다 듣고 알았다. 

이렇게 차츰차츰 전해져서 찰나 사이에
모든 6욕천(欲天)과 잠깐 동안에 범천까지 그 소리가 두루 들렸다. 

범천들이 듣고 나서 다시 앞에서와 같이 자세히 말하였다. 

그로 인하여 이 경의 이름을 『삼전법륜경』이라고 하였다.

 

그때 다섯 필추와 사람들과 천인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1 대당용흥삼장성교서(大唐龍興三藏聖教序) :

 당나라 용흥 연간에 번역 간행된 삼장의 성교에 붙인 서문이란 뜻이다. 

이 서문은 용흥신룡(龍興神龍) 원년(705)에 의정삼장(義淨三藏)이 『공작왕경(孔雀王經)』 등을 번역하자
중종(中宗)이 이를 치하하며 지은 것이다. 

성교(聖教)는 성자께서 말씀하신 교법이란 뜻으로, 

곧 경률론(經律論) 삼장과 기타 여러 성현들의 저서를 지칭한다.


○ [pt op tr]










● 삼전법륜 
4제, ~ 시示,권(勸,증證, ~ 안(眼),지(智),명(明),각(覺)

3* 4 = 12 전상   

참고 

‡삼전법륜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Lab value 불기2564/02/28/금/12:27




● 4성제는 무엇인가



4 제는 수행을 해야 하는 현실 상황의 인과적 이해와 함께
수행의 목표와 방안을 인과를 바탕으로 제시한 기본 가르침이다. 

간단히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고는 무엇인가.  -> 3계(욕계 색계 무색계)내 고고(당장의 몸과 마음의 괴로움), 괴고(좋음의 무너짐), 행고(변천을 통한 괴로움), + 욕계내 3 악도 [축생, 아귀, 지옥세계]의 장구하고 심한 괴로움 + (현생내 )생, 노, 병, 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8고]
고는 왜 생기는가. -> 근본 무명[어리석음)에 바탕해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탐욕, 분노, 사견 번뇌에 집착해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해서다.  

고가 없어진 상태는 무언가 .=> 니르바나,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남, 생사를 초월함, 죽지 않음, 죽음을 초월한 상태, 생사 즉 열반, 
어떻게 고를 벗어나는가  -> 올바로 관하고 계, 정, 혜 3학 8정도 37도품 6 바라밀 수행을 닦아서 성취한다. 




○ 생사고통과 그 발생 원인 

대부분 한번 태어난 이상 죽어야만 한다고 여긴다. 
이 생사과정 안에 고통이 들어 있다. 
또한 생사과정은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무량겁에 걸쳐 
무명(어리석음) 탐진치 번뇌 - 업 - 생사고통[혹-업-고]의 관계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행을 통해 죽음에서 벗어나고 해탈 열반을 얻는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의아하게 여긴다. 
한번 태어난 이상 죽지 않은 사례를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고 하는가. 

그런데 그렇게 못 벗어나면 
그런 상태로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를 반복한다. 

현실 단면 하나를 놓고 여기에 처음 갈래길이 있다. 

자신이 대하는 이 현실 한 단면에서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취하고 나머지는 외부 세상이라고 잘못 취한다. 
눈을 떠서 자신이 실험해보면 이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다. 
눈을 떠서 무엇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가를 찾아본다. 
그리고 또 무엇을 세상이라고 여기는가를 찾아본다. 
예를 들어  책상은 무엇이고 벽이나 집은 무엇인가를 찾아본다. 

이 때 스스로 눈을 떠서 보는 내용 가운데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즉 그 부분은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자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그렇게 취한 부분을 가리킨다. 
영희가 무엇이냐고 물어도 마찬가지다. 
저기 서 있는 것이 영희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책상이나 바위, 산, 강도 마찬가지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상을 취하는 과정이다. 


이 현상이 망집현상이다. 
이 망집현상은 현실 단면의 정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근본 어리석음(무명) 증상이다. 

이 가운데 가장 스스로 집착을 갖는 부분은 물론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이다. 
한 주체가 현실에서 일으키는 모든 집착은 이를 근원으로 한다. 

그리고 눈을 떠서 보는 내용 하나가 이렇듯, 
귀, 코, 입, 몸으로 얻는 감각내용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넓게 보아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서도 이처럼 자신을 취한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자신에 대해 좋은 것에 대해 탐착심을 일으킨다. 
그리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현실단면의 정체와 그 것이 변화하는 인과에 대해서 엉뚱하고 잘못된 견해를 일으켜 갖는다. [탐진치 3 독]

그리고 이런 망상분별이 현실단면에서 본래 얻을 수 없는 생멸이나 생사를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되는 사정이다. 


생사를 벗어나고 죽지 않는다는 것은 
위와 같이 일반적인 입장에서 태어나거나 죽는다고 보는 그 각 현실단면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것을 깨달으면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떠난 상태' 그대로가 된다. [이계과, 택멸, 생사즉 열반 ] 

영희가 죽어서 화장터에 간다는 현실단면은 하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망집을 일으키는 이는
그 상황에서 영희가 그렇게 있었고 그렇게 죽었다고 잘못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진짜처럼 잘못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현실단면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일반인이 생사현실로 여기는 그 내용을 니르바나로 대한다. [생사 즉 => 열반]
여기서 니르바나는 생사고통을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반대로 대한다.
현실은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 상태다. 
그런데 이런 니르바나 상태를 붙잡고 거꾸로 생사고통을 받는 생사현실로 여긴다. [ 열반 즉 => 생사]

그래서 그 차이가 크다. 


그리고 이것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임한 입장은 매 상황마다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도저히 어쩔 도리 없이 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는 행위를 매순간 행하면서 그것을 축적시킨다. 
이것이 그를 생사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다. 

그래서 이후 그는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이후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욕계내 3 악도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도 그 본질은 앞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망집에 바탕해서 대하면 그는 그런 상황을 도저히 고통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 자신의 뜻과 달리 강제로 장구하게 묶이게 된다. 
이것이 그가 행해 쌓아 놓은 업에 의한 장애현상이다. [업장]
그 사정은 그가 살아가면서 
그렇게 3 악도에 처하게 되는 업을 꾸준히 분주하게 행해왔기 때문이다. 


이 사정을 단순하게 살펴보자.

가장 단순하게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 있더라도 현실의 정체를 잘못 파악하면 사정이 마찬가지다. 
앞에 절벽이 있는데 발을 내딛어 구르면 다음 순간의 자신이 그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된다. 
지금 자신이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어리석음]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업 ]
절벽에서 굴러 다리나 허리가 부러지고 장애를 겪으며 장구히 고통받는다. [고통]

그러나 욕계내에 자신만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욕계내 모든 생명이 다 엇비슷한 상태로 
망집을 일으켜서 제각각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을 추구한다. 

그런 가운데 각 생명은 망집에 바탕해서 
무언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열심히 집착하고 추구한다. 
그리고 좋은 것을 얻으면 아끼고 다른 생명에게 베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재산, 가족, 명예, 지위...) 를 
함부로 침해하고 나쁨을 가한다. 

그러다가 다른 생명이 자신에게 그런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면 
불같이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갖는다.  
상대를 해치고 보복한다. 

이런 업을 꾸준히 쉬지 않고 평생 행한다. 

이것이 망집에 바탕해서 욕계내애서 서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으면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황에 묶이게 되는 원인이다. 

그렇게 서로 고통을 무량하게 주고 받는 사정이 있다. 
위 상황에서 그 반대 입장에 자신을 위치해 놓고 헤아리면 
그렇게 되는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한 현실 단면에도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앞처럼 망집을 일으켜 임한 각 생명들은 
그렇게 업을 행하는 가운데 서로 생사현실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각 주체는 망집에 바탕해서 자신에게 좋은 것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자신의 뜻과 달리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남과  그 방안 


생사고통의 해결이 문제될 경우 
먼저 생사고통의 정체와 그 인과를 넒고 길고 깊게 관찰해서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 단면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가장 간단하게 파악하려면 다음처럼 실험하면 된다. 

지금 눈을 뜨고 자신이라고 본 것을 잘 취해서 붙잡아 보자. 
그리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은 존재한다. 

또  의식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하자. 
그래서 감각도 못하고 분별도 못한다고 하자. 
그래도 다음날 깰 때까지 그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는 화장터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에서도 한번 더 살펴야 한다. 
만일 화장터를 들어가 매장하고 나서는 
그와 관련된 존재가 전혀 없다면 자신의 삶과 관련한 인과문제를 살필 때 
거기까지만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 판단하는 것을 단멸관이라고 한다. 
단멸관에 바탕하면 그 시점까지만 자신이 존재하고 그 이후는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각 순간에 모두 공통적으로 파악되는 자신의 정체를 
먼저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 평소 자신이 감각하고 분별해서 자신이라고 여긴 내용은 
사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임시로 걸친 옷과 같은 내용일 뿐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임시적인 내용은 갓난아이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쉼없이 바뀐다. 
자세히 보면 호흡한 번 들이키고 내쉬면서 그 전후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각기 모습과 내용이 다른 각 내용을 
하나의 주체의 일로 관하게 하는 바탕이 있다. 
그것을 근본정신 아뢰야식[제 8식]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생사과정을 이와 관련시켜 기본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과정을 밟는다고 제시할 때는 
이 내용을 기준으로 잡고 그렇게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는 그렇게 망집에 바탕해서 생사윤회를 그처럼 무량겁에 걸쳐 한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에 걸쳐서 사라지지 않고 과보를 받게 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 어느 경우나 
진짜라고 할 자신이 이 어디에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러그러한 현실 내용이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사정을 또 한편 잘 살펴야 한다. 

이들 내용은 모두 현실단면 하나를 놓고 그 전후과정에서 모두 잘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눈을 뜨고 얻는 내용은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일정 부분이 자신이나 영희, 바위라고 분별하는 내용은 분별 내용이다. 
그리고 눈을 뜨거나 감거나 생각하거나 않거나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의 내용이 또 있다. 
이들은 각기 서로 엉뚱한 관계다. 

그리고 각 감각현실은 각 감각현실대로 서로 엉뚱하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본 내용은 소리와 대조해보면 엉뚱하다. 
색, 성, 향, 미, 촉의 관계가 다 마찬가지다. 

한편,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감각현실은 본 바탕인 실재가 아니다. 
또 본 바탕인 실재는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관념분별은 본 바탕인 실재가 아니다. 
또 본 바탕인 실재는 관념분별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을 설령 얻더라도 
그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처럼 얻는 것뿐이다. 

마치 침대에 누어서,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관계와 같다. 
그래서 그 내용을 비록 생생하게 매순간 얻지만,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이 어느 것이나 꿈과 달리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 [무아. 무자성]
꿈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내용일 뿐이다. 
이런 꿈과 달리 언제나 그 모습과 성품을 그대로 갖고 
각 내용을 얻는 뼈대가 된다고 할 진짜에 해당하는 고정 불변된 실체가 없다. 


앞에서 무량겁에 걸쳐 생사를 이어가는 근본정신을 제시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여러 관계는 이런 근본 아뢰야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단지 그러한 내용이 그렇게 있을 뿐, 진짜라고 할 내용으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무아, 무자성]


현실에서 생멸이라고 여기는 현상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감각을 할때 무언가 내용이 들고 나고 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생멸이라고 여긴다. 

무언가 일정부분은 a 다. 
그리고 그 a가 없다가 있다 [ 생 ]
그리고 그 a가 있다가 없다. [ 멸 ]
이렇게 관념을 행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얻는 현실 내용안에서 
이런 a가 생멸하는 원인요소를 관련시켜 인과를 찾는다. [원인, 결과] 

그런데 정작 그런 관념으로 가리키는 그 감각현실에서부터  
이들 내용 일체가 얻어지지 않는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한편, 자신이 걸어간다고 여기는 그 상황 하나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렇게 여기고 대하는 그 상황은 그처럼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걸어간다고 여기는 분별내용도 있다. 

그런데 그런 분별내용은 일단 그 현실상황에서 얻을 수 없다. 
그저 그러한 현실상황만 그렇게 있는 것 뿐이다. 

걸어간다. 또는 오고간다는 것은 변화와 관련된 분별내용이다.
이는 여러 현실단면을 묶어서 일으키는 관념분별이다. 
그래서 이런 변화와 관련된 관념은 당연히 
현실 한 단면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위치 기준이 되는 3 각점을 설정하고 
여기에 있었다. 저기에 있다. 이런 내용을 묶어서 
여기에서 저기로 왔다거나 갔다고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처럼 감각현실에서 비록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사정이 그렇지만, 그런 감각현실에 그런 관념분별은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 일정부분이 그런 관념분별도 아니다. 

이 관계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와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 공해탈삼매 ]


그리고 현실에서는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 다음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붙잡고 그 부분이 그런 분별내용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면 안된다. 

예를 들어 바나나란 생각을 통해 기차를 연상해 일으켰다고 하자. 
바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이런 식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바나나란 관념 안에 기차란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나나가 기차인 것도 아니다. 

이런 비유와 마찬가지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감각현실 일정부분에 그런 관념분별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 일정부분이 그런 관념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일정부분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영희다 바위다.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임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평소 일정부분을 자신이 여기는 '영희'나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 부분을 취하면 안된다. [무상해탈삼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평소 그렇게 머무르고 그렇게 업을 행해서도 안된다. 

더 나아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쓸데없는 소원을 일으키고 
그것을 추구하는 업을 행해나가면 안 된다. [무원무작해탈삼매]





그런데 위와 같이만 제시하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각 내용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망집현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눈을 떠고 일정부분을 영희라고 여긴다고 하자. 
이런 망집을 일으킨 상태는 다음과 같다. 
그가 영희라고 여기는 부분에서도 영희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부분에도 그가 생각하는 영희는 얻을 수 없다.
이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입장에서는 
그가 영희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영희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른 부분을 대할 때는 또 다른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 관계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관념분별은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 얻는 것도 아니다.' 

현실은 이런 관계다. 

이는 실재와 감각현실
실재와 관념분별 
기타 감각현실내용과 그에 대해 느끼는 좋고 나쁨의 느낌
그리고 마음과 마음안 내용 등등에도 준용된다. 


마치 거울과 거울면안의 내용과도 같다. 
거울에 책상이 비추일 수 있다. 

책상모습은 거울이 아니다. 
거울은 책상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책상모습은 거울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형태로 이들 관계를 모두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보는 그 일체는 
그렇게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각 부분을 묶고 나무며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들 재료를 바탕으로 관념영역에서 다양한 망집을 일으킨다. 
가장 기본적인 망집은 다음이다.
감각현실 일정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여긴다. 
그리고 그 부분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이제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망상분별이 증폭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자신이 손을 뻗어 컵을 만지거나 공을 잡아 굴린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를 옆에 있는 영희나 철수가 다시 받고 던진다고 해보자. 
그 상항에서 컵이나 공이나, 그런 동작을 하는 자신이나 영희 철수에 대해 
망집에 바탕하면 다음과 같이 잘못 판단한다. 

우선 자신이 눈을 떠 보게 된 그 현실내용은 
자신과는 떨어져 있는 외부세상의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 현실내용은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 현실 내용은 자신의 마음과는 떨어져 있는 별개의 외부물질로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 현실 내용은 자신 뿐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모든 이가 함께 같이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한편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부분을 또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이 부분은 앞부분과 달리 
자신이 대할 때마다 늘 그런 형태로 얻는다고 잘못 여긴다. [ 상 ]
그리고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겠다고 뜻을 일으키면 
그 부분만 같이 변화해 움직인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자신의 뜻대로 되는 부분이고 즐거움을 준다고 잘못 여긴다. [락]
그리고 그 부분은 다른 나머지 부분을 대상을 삼아 관계하여 
감각현실을 얻게 해주는 주관이 위치한 부분이라고 잘못 여긴다. [ 아]
그런 가운데 이런 부분은 대단히 깨끗하고 좋은 부분이라고 잘못 여기고 집착을 갖는다 [정]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늙을 때까지 수없이 그 내용이 변화해왔다. 
육체나 정신내용이나 사정이 같다. [무상]

그리고 평소는 모르지만 고통에 처할 때 
예를 들어 생노병사를 겪는 것이 자신의 뜻에 의해 그렇게 겪는 것이 아니다. [고]
또 자신이 대상이나 주관이라고 본 것은 착각이고 그 각 부분의 정체가 그렇지 않다. [무아]
그리고 자신이 애착을 갖는 부분은 단지 더러운 대변이나 썩어 없어질 살을
가죽으로 덮어 놓은 것과 그 사정이 같다. [부정]
그래서 이 사정부터 잘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대하는 현실상황의 정체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컵이나 공이나 영희 철수로 여기고 대하는 각 부분이 있다. 
그런 각 부분 내용은 그 일체가 자신 마음 내용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 사정부터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이는 돗수가 다른 색안경하나만 구해서 쓰고 벗고 해보아도 그것을 바로 알 수 있다 .
자신이 안경 하나 바꿔 쓰면 달까지도 그 크기나 색상을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이것만 생각하면 자신이 그렇게 외부세상을 쉽게 변화시키는 초능력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옆에 철수를 세워 놓고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시키고 
그 상황을 보고하게 하면서 관찰해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도 사실은 그 철수의 상태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컵을 만져도 촉감을 얻는 경험을 해보자.
그러면 자신이 눈으로 본 그 컵 모습은 그런 외부대상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촉감은 그 상황에서 얻는다. 
따라서 인과관련성이 없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눈으로 본 시각 정보는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을 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다. 

더욱이 눈으로 얻는 시각정보 안의 내용이 그 시각을 일으킨 대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각 감각과정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런 결과 마음안에 들어온 마음 내용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해하여 현실 내용에 외부대상이 있다는 등의 잘못된 분별을 떠나야 한다.
즉, 한 주체가 대하는 일체는 마음 내용이고,
그 안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없다. [유식무경 ]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얻는 이들 색,성,향,미,촉은
같은 상황에서 함께 얻는 내용으로서 상호 부대상황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런 부대상황이 함께 반복되는 가운데 위와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즉 사과를 눈으로 대하는 상황에서 
소리나, 냄새나 맛 촉감을 얻는 것은 부대상황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그렇게 관련시켜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한편 자신의 마음 밖 본 바탕의 실재내용도 잘 파악해야 한다.
본 바탕인 실재에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이런 내용과 
일치하거나, 비례하거나 유사한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우선 현실안 내용에서 색,성,향,미,촉, 그리고 관념내용은 
서로 마치 벽돌과 라면의 관계처럼 엉뚱하다. 
어느 하나 예를 들어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있다고 할 내용은 
다른 것 예를 들어 청각을 기준으로 하면 아예 얻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에서부터 
그런 일치나 비례 유사관계는 찾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관계로만 내용을 얻는 한 주체는 
본 바탕의 실재는 끝내 얻지 못한다. 
여기서 본 바탕은 자신이나 자신의 마음과의 관계를 떠나서도 
그대로 있다고 할 그 무엇을 찾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는 모든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고 
언설을 떠나 끝내 얻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이런 사정으로 어떤 주체도 끝내 얻을 수 없기에 
무엇이 적극적으로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여하튼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은 
이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적어도 아니다. 
그리고 실재도 이런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실재를 떠나 이런 감각현실을 얻는 것도 아니다. 
이 관계를 앞에서도 이미 살폈다. 

이는 관념분별과 실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결국 침대에 누어 잘 때 꾼 바다나 황금꿈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런 내용을 그런 조건에서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 바탕과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처럼 그런 조건에서 얻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들 현실을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한다. 
즉  현실내용은 그처럼 매순산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고 분별해 얻는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다른 영역이나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망집을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이 분별한 내용이 다른 영역에 그처럼 그대로 실답게 여긴다.
그런 가운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 업을 행한다.
그러면 생사현실에 묶이고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 혹-업-고]



그리고 그 차이는 크다.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 경우는 
자신이 뜻과 달리 생사를 받아나가게 된다. [분단생사]

그런데 비록 외관은 위와 차이가 없지만,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하는 경우는 이와 다르다. 

각 현실단면은 서로 차이가 없고 비슷할 수 있다. 
그런데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하는 경우는 
그 현실단면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고 대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생사현실을 생사를 떠난 니르바나로 관한다.
그런 바탕에서 여여하게 생사현실에 임한다. [ 생사즉 열반 ]

그리고 망집에 바탕한 업을 끊는다. 
대신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수행을 행한다. 
그렇게 임하면 업의 장애가 해소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이후 다시 생사현실에 묶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하더라도 
수행자가 받아가는 생사는 앞의 경우와 다르다.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자는 3 해탈문을 반대로 해서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즉 중생제도를 위해 공해탈문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의 '공'한 법에 자리잡는다. [ <= 공해탈문]
중생제도를 위한 무상해탈문에서 성취한 '안인'을 갑옷으로 걸쳐 입고 생사현실에 임한다. [ <= 무상해탈문]
중생제도를 위해 무원무작해탈문을 통해 망집을 바탕으로 일으킨 쓸데없는 소원을 다 제거한다.
그리고 다시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자비'를 거처하는 방으로 한다.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한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키고 무량한 방편지혜를 닦아나간다.  [<= 무원무작해탈문]  [법화경 법사품] 


그래서 생사에 묶이지 않고 생사전후가 끊기지 않고 수행과 관련해 이어진다. [변역생사] 
무량겁에 걸쳐 광대무변한 서원을 성취해 가는 수행자의 수행이 이에 바탕한다.


같은 현실단면을 하나 놓고서도 
기본적으로 거기에서 영희나 영희의 생사가 있다고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 입장과 
그렇지 않은 입장이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런 입장의 차이는 이후 무량겁을 걸쳐서도 큰 차이를 낳는다. 

망집을 제거하고 중생을 제도하려고 임하는 입장은 
앞에서 제시한 반응과는 반대로 행한다. 



좋은 것을 얻으면 아끼지 않고 다른 생명에게 아낌없이 베푼다. [보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 

그리고 그런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재산, 가족, 명예, 지위...) 를 
함부로 침해하지 '않고' 나쁨을 가하지 않는다. [ 정계, 살도음망,...등의 계율]

그러다가 다른 생명이 자신에게 그런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면 
상을 취하지 않고 
분노를 일으지 않고 평안히 참는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갖지 않는다. 
상대를 해치고 보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비심을 일으키고 상대를 포함해 온 생명을 차별없이 사랑한다. [ 안인 ]

그리고 그런 안타까운 생명을 제도하기 위해 서원을 일으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실천해간다. 
이런 업을 꾸준히 쉬지 않고 평생 행한다. [ 정진 ]


이런 수행을 꾸준히 행하면 
기본적으로 자신을 생사에 묶게 하는 업의 장애가 해소된다. 
그리고 이후는 복덕자량이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면 이후
정려, 반야, 방편, 원, 력, 지바라밀다를 닦아가면서 
지혜자량을 쌓을 수 있게 되고 
무량한 방편지혜를 얻게 된다.
그래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무량하게 제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차이가 크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 등이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다는 측면을 99 % 붙잡고 
현실을 1% 정도 취해 대하면
우선 극심한 생사고통에 직면하는 상황에서도 이를 원만히 극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바탕에서는 
그처럼 1%를 취한 생사현실 측면에서도 생사고통을 받게끔 하는 원인단계에서 
그런 원인을 원만히 잘 중단하고 끊을 수도 있다. 

또 생사현실에서 각 상황에서 도저히 수행덕목을 행하기 힘들다고 여긴다.
그런데 수행자는 위와 같은 바탕에서 이런 수행을 반대로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 본 바탕 99% 의 측면으로는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한편 
1 % 취한 생사현실에서는 그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수행을 행해가게 된다. 


그런데 망집에 바탕할 때는 다음처럼 임하게 된다. 
자신이 대단히 집착하는 이것만은 너무 아까워서 도저히 남에게 베풀 수없다
자신이 대단히 집착하는 이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저 생명을 침해할 도리 밖에는 없다.
자신이 대단히 집착하는 이것을 침해하면 도저히 평안히 참을 수 없다. 침해한 상대에게 보복을 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각 현실단면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하고 망집을 제거하면 이와 달라진다. 

=>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 잘 베푼다. 침해를 하지 않는다. 평안히 임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꾸준히 임한다. 
이런 보시, 정계, 안인, 정진의 수행을 기본적으로 원만히 잘 성취하게 된다. 

이런 계의 덕목에 속하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면 
1 % 취한 현실 안에서는 무량겁에 걸쳐 쌓은 업의 장애가 해소되어 간다. 
그리고 생사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가 다 해소되면 이후 복덕자량이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면 이후 무량한 지혜 자량과 방편지혜를 쌓게 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가운데 
중생제도를 원만히 잘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99%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측면에서는 무량한 번뇌 업 생사고통을 제거한다.
그리고 한편 그런 바탕에서 1 % 취해 임하는 생사현실 측면에서는 
무량한 선법을 닦아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함께 구족하게 된다. 

이것이 한마디로 수행이다. 


4 성제의 가르침은 
처음 생사현실에서 대하게 되는 생사고통의 정체와 그 발생원인을 똑바로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한 상태와 이를 성취할 수 있는 방안을 잘 파악해서 
잘 닦아 실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4 성제의 가르침은 결국 위와 같은 내용이다. 





















































◆vdga8382

◈Lab value 불기256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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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생사를 얻을 수 없는 생사현실내 생일잔치와 장례식 



대략 1 주일 째 생일 장례식 등이 이어지고 있다. 
숙왕화님이 오늘 또 생일을 축하한다고 해서 
가까운 절을 다녀오기로 했다. 

마침 오늘 4 성제에 대한 글을 마치고 나서
연락을 받아서 쓴 글 부분을 복사해 보내줬다. 
그런데 절에 가보니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절에 사람이 없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경전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절에서 핸드폰을 꺼내 경전을 한 부분 읽고 돌아왔다. 
생일 축하를 절을 방문해서 하니 조금 기분이 더 좋은 것 같다. 
돌아오면서 시레기 국밥을 한 그릇 얻어 먹고 돌아왔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4081#8382 
sfed--불설삼전법륜경_K0730_T0110.txt ☞삼전법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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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2-28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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