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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6-18_중아함경-k0648-042 본문
『중아함경』
K0648
T0026
제4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중아함경』
♣0648-042♧
제42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중아함경 제42권
승가제바 한역
13. 근본분별품(根本分別品) 제2①
이 품에는 모두 10개의 소경이 수록되어 있다.
분별육계경(分別六界經)ㆍ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과
분별관법경(分別觀法經)ㆍ온천림천경(溫泉林天經)과
석중선실존경(釋中禪室尊經)과
아난설경(阿難說經)ㆍ의행경(意行經)과
구루수무쟁경(拘樓瘦無諍經)과
앵무경(鸚鵡經)ㆍ분별대업경(分別大業經)이다.
162) 분별육계경(分別六界經) 제1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타국(摩竭陁國)을 유행하실 적에 왕사성에 들어가 묵으시게 되었다.
그 때 세존께서 어느 질그릇 만드는 집에 가셔서 말씀하셨다.
“도사(陶師)1)여,
내가 저 질그릇 굽는 방에서 하룻밤 묵고 싶은데 들어주겠는가?”
질그릇 굽는 기술자가 대답하였다.
“저에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비구가 먼저 그 방에 묵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허락한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때 존자 불가라사리(弗迦邏娑利)2)가
이미 그 질그릇 굽는 방에 먼저 묵고 있었다.
이에 세존께서는 도사(陶師)의 집에서 나와
그 질그릇 굽는 방으로 가서 존자 불가라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나는 이 질그릇 굽는 방에서 하룻밤을 묵고자 하는데 그대는 허락해 주겠는가?”
존자 불가라사리가 대답하였다.
“그대여,
나에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 질그릇 굽는 방에는 풀자리가 이미 깔려져 있습니다.
그대가 묵고자 하거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때 세존께서는 그 질그릇 굽는 방에서 밖으로 나와
발을 씻으시고 도로 안으로 들어가
풀 자리 위에 니사단(尼師檀)을 펴고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
밤이 새도록 조용히 선정에 드셨다.
존자 불가라사리도 또한 밤이 새도록 조용히 선정에 들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다.
‘이 비구는 선정에 머물러 있다.
참으로 기특하다.
나는 이제 저 비구에게
〈너의 스승은 누구며 너는 누구를 의지하여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누구에게 법을 받았는가〉고 물어 보리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시고 곧 물으셨다.
“비구여,
너의 스승은 누구인가?
너는 누구를 의지하여 출가하여 도를 배우며 누구에게 법을 받았는가?”
존자 불가라사리가 대답하였다.
“현자여,
사문 구담(瞿曇)이라는 석가 종족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석가 종족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워
위없는 정진각(正盡覺)을 얻었습니다.
그 분이 제 스승입니다.
나는 그 분을 의지하여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습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물으셨다.
“비구여,
스승을 뵌 일이 있는가?”
“뵙지 못했습니다.”
“만일 스승을 뵌다면 알아보겠는가?”
존자 불가라사리가 대답하였다.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자여,
나는 그 분이 세존ㆍ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ㆍ
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ㆍ불중우(佛衆祐)라고
호칭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내 스승입니다.
나는 그 분을 의지하여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셨다.
‘이 족성자는 나를 의지해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다.
내가 지금 어찌 그를 위해 설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시고 존자 불가라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내가 너를 위해 설법해 주리라.
이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마지막도 또한 좋다.
뜻도 있고 문체도 있으며 청정함을 구족하였고 범행(梵行)을 나타낸다.
이른바 육계(六界)를 분별하는 것이니 너는 마땅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존자 불가라사리가 대답하였다.
“예.”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사람에게는 6계취(界聚)ㆍ6촉처(觸處)ㆍ18의행(意行)ㆍ4주처(住處)가 있다.
만일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근심스럽고 슬픈 일을 듣지 않을 것이요
근심스럽고 슬픈 일을 듣지 않은 뒤에
마음은 곧 미워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을 것이며 수고롭지도 않고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있으면
지혜에 게으르지 않게 되고
참된 진리를 지켜 보호하게 되며
은혜로운 보시를 기르게 되느니라.
비구여,
마땅히 이 최상을 배우고 지극히 고요함을 배워 6계를 분별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여,
사람에게는 6계취(界聚)가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ㆍ공계(空界)ㆍ식계(識界)이다.
비구여,
사람에게 6계취가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여,
사람에게는 6촉처(觸處)가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비구여,
안촉(眼觸)은 빛깔을 보고
이촉(耳觸)은 소리를 들으며
비촉(鼻觸)은 냄새를 맡고
설촉(舌觸)은 맛을 보며
신촉(身觸)은 촉감을 느끼고
의촉(意觸)은 법을 아느니라.
비구여,
사람에게 6촉처가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여,
사람에게는 18의행(意行)이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비구여,
눈이 빛깔을 보아 빛깔에 기쁨[喜]이 있다고 관찰하고
빛깔에 근심[憂]이 있다고 관찰하며
빛깔에 기쁘지도 근심하지도 않음[捨]이 있다고 관찰한다.
이렇게 귀ㆍ코ㆍ혀ㆍ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뜻이 법을 알아
법에 희가 있다고 관찰하고
법에 우가 있다고 관찰하며
법에 사가 있다고 관찰한다.
비구여,
이 6희관(喜觀)과 6우관(憂觀)과 6사관(捨觀)을 합하면 18행이 된다.
비구여,
사람에게 18의행이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여,
사람에게 4주처(住處)가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참된 진리의 주처[眞諦住處]와
지혜의 주처[慧住處]와
보시의 주처[施住處]와
쉼의 주처[息住處]니라.
비구여,
사람에게 4주처가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여,
어떤 것이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不放逸慧]’인가?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지금 내 이 몸에는 태어나면서 받은
안의 지계[內地界]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머리털과 몸털ㆍ손톱ㆍ이ㆍ거칠고 섬세한 살갗ㆍ껍질ㆍ살ㆍ뼈ㆍ힘줄ㆍ콩팥ㆍ염통ㆍ간ㆍ허파ㆍ지라ㆍ대장ㆍ위ㆍ똥 등이다.
또 이와 비슷한 것들로 태어나면서 받은 몸속의 단단한 것,
단단한 성질로 몸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다.’
비구여,
이것을 안의 지계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지계와 바깥의 지계[外地界]가 있는데
그 일체를 통틀어 지계(地界)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것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神)도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비구여,
이것을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란,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지금 나의 이 몸에는 태어나면서 받은 안의 수계(水界)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뇌막(腦膜)3)ㆍ눈물ㆍ땀ㆍ콧물ㆍ가래침ㆍ고름ㆍ피ㆍ기름ㆍ골수ㆍ침ㆍ담(痰)ㆍ오줌 따위이다.
또 이와 비슷한 것들로 태어나면서 받은 몸 속의 물 종류와 물의 성질로 몸 안을 적시는 다른 모든 것들이다.’
비구여,
이것을 안의 수계[內水界]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수계와 바깥 수계[外水界]가 있는데 그 일체를 통틀어 수계(水界)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것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神)도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수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비구여,
이것을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또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지혜란,
만일 어떤 비구가 이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지금 내 이 몸에는 태어나면서 받은 안의 화계[內火界]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뜨거운 몸ㆍ따뜻한 몸ㆍ번민하는 몸ㆍ온장(溫莊)한 몸으로서 곧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또 이와 비슷한 것들로 태어나면서 받은 몸속의 불과 불의 성질로 몸 안을 뜨겁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이다.’
비구여,
이것을 안의 화계라 한다.
비구여,
안의 화계와 바깥 화계[外火界]가 있는데 그 일체를 통틀어 화계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내가 그것의 소유도 아니며 또한 신도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화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비구여,
이것을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또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란,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지금 내 이 몸에는 태어나면서 받은 안의 풍계[內風界]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상풍(上風)ㆍ하풍(下風)ㆍ협풍(脇風)ㆍ제축풍(掣縮風)ㆍ축풍(蹴風)ㆍ비도풍(非道風)ㆍ절절풍(節節風)ㆍ식출풍(息出風)ㆍ식입풍(息入風)4) 등이다.
또 이와 비슷한 것들로 태어나면서 받은 몸속의 바람과 바람의 성질로 몸 안을 움직이는 다른 모든 것들이다.’
비구여,
이것을 안의 풍계라 한다.
비구여,
안의 풍계와 바깥 풍계[外風界]가 있는데 그 일체를 통틀어 풍계(風界)라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것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도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풍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비구여,
이것을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또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란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지금 내 이 몸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안의 공계[內空界]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눈구멍ㆍ귓구멍ㆍ콧구멍ㆍ입구멍과 목구멍을 움직여 먹은 것과 마신 것이 조용히 목구멍에 머물거나 혹은 밑으로 내려가 나오는 것 등이다.
또 이와 비슷한 것들로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몸속의 공간,
살과 살갗과 뼈와 힘줄에 덮이지 않은 다른 모든 빈 공간들이다.’
비구여,
이것을 안의 공계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공계와 바깥 공계[外空界]가 있는데 그 일체를 통틀어 공계(空界)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도 그것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도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공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비구여,
이것을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만일 어떤 비구가 이 5계(界)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를 알고 사실 그대로를 안 뒤에 마음이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해탈하면 오직 식(識)만이 남는다.
그것은 어떠한 식인가?
즐거워하는 식[樂識]ㆍ괴로워하는 식[苦識]ㆍ기뻐하는 식[喜識]ㆍ근심하는 식[憂識]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식[捨識]5)이니라.
비구여,
낙갱락(樂更樂)6)으로 인하여 즐거운 감각[樂覺]이 생기고 그는 즐거운 감각을 느낀다.
즐거운 감각을 느낀 뒤에는 곧 즐거운 감각을 느낀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낙갱락(樂更樂)을 멸하고 이 낙갱락을 멸한 뒤에 혹 낙갱락으로부터 생긴 즐거운 감각이 있을 때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친다면 그는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알게 되느니라.
비구여,
고갱락(苦更樂)으로 인하여 괴로운 감각[苦覺]이 생기고 그는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
괴로운 감각을 느낀 뒤에는 곧 괴로운 감각을 느낀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고갱락을 멸하고 이 고갱락을 멸한 뒤에 혹 고갱락으로부터 생긴 괴로운 감각이 있을 때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친다면 그는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알게 되느니라.
비구여,
희갱락(喜更樂)으로 인하여 기쁜 감각[喜覺]이 생기고 그는 기쁜 감각을 느낀다.
기쁜 감각을 느낀 뒤에는 곧 기쁜 감각을 느낀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희갱락을 멸하고 이 희갱락을 멸한 뒤에 혹 희갱락으로부터 생긴 기쁜 감각이 있을 때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친다면 그는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알게 되느니라.
비구여,
우갱락(憂更樂)으로 인하여 근심의 감각[憂覺]이 생기고 그는 근심의 감각을 느낀다.
근심의 감각을 느낀 뒤에는 곧 근심의 감각을 느낀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우갱락을 멸하고 이 우갱락을 멸한 뒤에 혹 우갱락으로부터 생긴 근심스런 감각이 있을 때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친다면 그는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알게 되느니라.
비구여,
사갱락(捨更樂)으로 인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捨覺]이 생기고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 뒤에는 곧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 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사갱락을 멸하고 이 사갱락을 멸한 뒤에 혹 사갱락으로부터 생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 있을 때 그것도 또한 멸하고 그친다면,
그는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알게 되느니라.
비구여,
이런저런 갱락(更樂) 때문에 이런저런 감각[覺]이 생기고 이런저런 갱락이 멸한 뒤에는 이런저런 감각도 또한 멸한다.
그는 이 감각은 갱락으로부터 생기고 갱락이 근본이요 갱락이 원인이며 갱락으로부터 생기고 갱락이 우두머리가 되며 갱락에 의지하여 행해진다는 것을 안다.
비구여,
마치 불씨는 찬목(鑽木)7)과 사람의 방편으로 말미암아 열이 생기기 때문에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비구여,
저 많은 나무를 서로 떨어뜨려 흩어 놓으면 거기서 생겨나던 불은 다 꺼져서 차가운 나무토막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비구여,
이런저런 갱락 때문에 이런저런 감각이 생기고 이런저런 갱락이 멸한 뒤에는 이런저런 감각도 또한 멸한다.
그는 이 감각은 갱락으로부터 생기고 갱락이 근본이요 갱락이 원인이며 갱락으로부터 생기고 갱락이 우두머리가 되며 갱락을 의지하여 행해진다는 것을 안다.
만일 비구가 이 3각(覺)8)에 물들지 않고 해탈한다면 그 비구에게는 오직 평정[捨]만 있어 지극히 청정할 것이다.
비구여,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청정한 평정[捨]으로 한량이 없는 공처(空處)로 옮겨 들어가고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며 그것에 묶이리라.
나는 이 청정한 평정으로 한량없는 식처(識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로 옮겨 들어가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며 그것에 묶이리라.’
비구여,
마치 쇠붙이를 제련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불로 쇠붙이를 달구어 극히 얇게 만들고 또 화람(火燣)으로 자꾸 불기운을 더해 여러 차례 단련하여 깨끗하게 하며 지극히 부드럽고 광명이 나게 하는 것과 같다.
비구여,
이 쇠붙이가 그 장인에게서 여러 차례 불기운이 가해가고 여러 차례 단련되어 깨끗해지고 지극히 부드럽고 광명이 나게 된 뒤에 그 장인은 자기가 만들고 싶은 대로 혹은 오색 비단을 잇기도 하고 새 옷을 꾸미기도 하며 가락지ㆍ팔찌ㆍ영락ㆍ보만 등 만들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만든다.
이와 같아서 비구여,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청정한 평정으로 한량없는 공처로 옮겨 들어가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며 그것에 묶이리라.
나는 이 청정한 평정으로 한량없는 식처ㆍ무소유처ㆍ비유상비무상처로 옮겨 들어가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며 그것에 묶이리라.’
그 비구는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청정한 평정으로 한량없는 공처를 의지한다면 이것은 바로 유위(有爲)이다.
만일 그것이 유위라면 그것은 곧 무상(無常)한 것이다.
만일 그것이 무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곧 괴로운 것이다.’
만일 그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곧 괴로운 것인 줄 알 것이요,
괴로운 것인 줄 안 뒤에 그는 다시는 이 평정을 옮겨 한량없는 공처(空處)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청정한 평정으로 한량없는 식처ㆍ무소유처ㆍ비유상비무상처를 의지한다면 이것은 바로 유위이다.
만일 그것이 유위라면 그것은 곧 무상한 것이요,
만일 그것이 무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곧 괴로운 것이다.’
만일 그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곧 괴로운 것인 줄 알 것이요,
괴로운 것인 줄 안 뒤에 그는 다시는 이 평정을 옮겨 한량없는 식처ㆍ무소유처ㆍ비유상비무상처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비구여,
만일 어떤 비구가 이 네 곳을 지혜로 관찰하여 진실 그대로를 알아 마음으로 성취하지 않고 옮겨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는 그 때에는 다시는 유위가 아니요,
또한 있다거나 없다고 생각할 대상도 없을 것이다.
그는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알 것이요,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알 것이다.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수명을 이미 마친 뒤에는 그가 깨달은 모든 것들도 멸하고 쉬고 그쳐 차갑게 되는 줄을 알 것이다.
비구여,
비유컨대 타오르는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의지하나니,
만일 기름을 계속해서 더해 주지 않고 심지를 이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것은 이미 다 타고 뒤의 것은 계속 이어지지 않아 다시 받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알고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안다.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수명을 이미 마친 뒤에는 그가 깨달은 모든 것들도 멸하고 쉬고 그쳐 차갑게 되는 줄을 안다.
비구여,
이것을 비구의 제일 바른 지혜라 한다.
이른바 최후의 경지까지 멸한 데 이른 것이니 누(漏)가 다한 비구가 이것을 성취한다면 제일 바른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니라.
비구여,
이 해탈은 참다운 진리[眞諦]에 머물러 이동하지 않게 되나니 참다운 진리란 법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고,
거짓말이란 허망한 법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여,
그는 그 제일 참다운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비구여,
그 비구는 보시를 베푸는데,
보시 받는 사람들 중에 혹 옛날 원수가 있더라도 그는 그 때의 일을 놓아버리고 토하고 떠나서 해탈하고 멸해 없앤다.
비구여,
이것을 비구의 제일 올바른 혜시(惠施)라 한다.
이른바 일체의 세간을 모두 버리고 욕심이 없으며 멸하고 쉬고 그치나니 비구여,
이것을 성취한다면 제일의 혜시를 성취하는 것이니라.
비구여,
그 비구의 마음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더럽혀진다면 그는 해탈을 얻지 못한다.
비구여,
이 일체의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해 탐욕이 없어지고 멸하고 쉬고 그치면 제일의 쉼[息]9)을 얻게 된다.
비구여,
이것을 성취한다면 제일의 쉼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비구여,
‘나[我]’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색유(色有)가 될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무색유(無色有)가 될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며,
‘나는 색유도 무색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想]이 있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생각이 없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며,
‘나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뽐내는 것[貢高]이요,
이것은 교만[憍慠]이며,
이것은 방일(放逸)이다.
비구여,
만일 이 일체의 자랑과 뽐냄과 교만과 방일이 없으면 그것을 마음의 쉼[意息]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만일 그 마음이 쉬면 곧 미워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고달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 비구는 법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밉다고 말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미워하지 않으면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걱정하지 않으면 시름하지 않을 것이며,
시름하지 않으면 고달파하지 않을 것이요,
고달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곧 반열반(般涅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진실 그대로 알게 될 것이니라.”
이렇게 설법을 마치자 존자 불가라사리는 티끌을 멀리 하고 때[垢]를 여의어 모든 법안(法眼)이 생겼다.
이에 존자 불가라사리는 법을 보아 법을 얻고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을 깨달아 의심을 끊고 의혹을 벗어나 다시는 더 이상 존경할 사람이 없고 다시는 남을 의지할 것도 없어 아무 망설임 없이 이미 과증(果證)에 머물러 세존의 법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드리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잘못을 뉘우칩니다.
선서(善逝)시여,
저는 고백합니다.
미련한 사람처럼 미친 사람처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바보처럼 좋은 밭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저는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을 일컬어 ‘그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세존이시여,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
저는 이제 참회한 뒤에는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여,
너는 진실로 미련하고 어리석었으며 너는 진실로 정신이 나간 바보였다.
너는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을 일컬어 ‘그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비구여,
만일 네가 스스로 참회하고 잘못을 알아 드러내며 조심해 다시는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면 비구여,
그와 같이 한다면 곧 거룩한 법(法)과 율(律)에 있어서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능히 스스로 참회하고 잘못을 알아 드러내었으며 조심하여 다시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불가라사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분별육계경의 경문 글자 수는 3,
131자이다.
163)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 제2 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라.
그것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의미도 있고 문체도 있으며 청정(淸淨)을 구족하고 범행(梵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이라고 하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도록 하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6처(處)의 안[內]을 알아야 하고10) 6갱락처(更樂處)의 안을 알아야 하며11) 18의행(意行)의 안을 알아야 하고 36도(刀)의 안을 알아야 한다.
그 중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하고 한량없는 설법에서 마땅히 안[內]을 알아야 한다.
또 3의지(意止)는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히고 나서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
또 위없는 조어사[無上調御士]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하나니 이것을 분별육처경의 일이라 하느니라.
마땅히 6처(處)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이다.
마땅히 6처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6갱락처(更樂處)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눈의 갱락은 빛깔[色]을 보는 것이요,
귀의 갱락은 소리[聲]를 듣는 것이며,
코의 갱락은 냄새[香]를 맡는 것이요,
혀의 갱락은 맛[味]을 보는 것이며,
몸의 갱락은 촉감[觸]을 느끼는 것이고,
뜻의 갱락(更樂)은 법(法)을 아는 것이니,
6갱락처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18의행(意行)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비구는 눈으로 빛깔을 본 뒤에 그 빛깔을 기뻐할 만한 것[喜住]이라고 분별하고 그 빛깔을 근심할 만한 것[憂住]이라고 분별하며 그 빛깔을 덤덤한 것[捨住]이라고 분별한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도 또한 그러하며 뜻이 법을 안 뒤에는 그 법을 기뻐할 만한 것이라고 분별하고 그 법을 근심할 만한 것이라고 분별하며 그 법을 무덤덤한 것이라고 분별한다.
이것을 6희(喜)를 분별하고 6우(憂)를 분별하고 6사(捨)를 분별하는 것이라 하며 통틀어 18의행이라고 말한다.
마땅히 18의행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마땅히 36도(刀)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집착을 의지하는 6희(喜)가 있고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희도 있으며 집착을 의지하는 6우(憂)가 있고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우도 있으며 집착을 의지하는 6사(捨)가 있고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사도 있다.
어떤 것이 6희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6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는 기쁨[喜]을 내는 데에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기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빛깔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은 기억하며 기뻐한다면 이러한 기쁨을 ‘집착에 의지하는 기쁨’이라 한다.
어떤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무상한 것이라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빛깔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움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쁨을 낸다면 이러한 기쁨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기쁨’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기쁨을 내는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기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법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은 기억하며 기뻐한다면 이러한 기쁨을 ‘집착을 의지하는 기쁨’이라 한다.
어떤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법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법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쁨을 낸다면 이러한 기쁨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기쁨’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6우(憂)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근심하는 데에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근심[憂]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으로 빛깔을 보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빛깔을 사랑하면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하고 이미 얻은 것이 오래되어 흩어져 무너지고 멸하거나 변하고 바뀌면 근심이 생긴다.
이러한 근심을 ‘집착을 의지하는 근심’이라 한다.
어떤 근심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빛깔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성취하여 저곳에서 노닐 수 있을까?
모든 성인들이 성취하여 노니신 저곳에서.’
이는 위로 구족하려는 바람에서 생기는 두려움이고 괴롭고 근심스러움을 알아서 생긴 근심이다.
이러한 근심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근심’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근심하는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기도 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하기도 한다.
어떤 근심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법을 사랑하면,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하고,
이미 얻은 것이 오래되어 흩어져 무너지고 멸하며 변하고 바뀌면 근심이 생긴다.
이러한 근심을 ‘집착을 의지하는 근심’이라 한다.
어떤 근심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법이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모든 법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성취하여 저곳에서 노닐 수 있을까?
모든 성인들이 성취하여 노니신 저곳에서.’
이것은 위로 구족하려는 바람에서 생기는 두려움이고 괴롭고 근심스러움을 알므로 생겨나는 근심이다.
이러한 근심을 ‘욕심 없음을 의지한 근심’이라 한다.
어떤 것이 6사(捨)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6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담담한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담담함[捨]12)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는 그것에 담담하지만 그가 평등하고 많이 듣지 않았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범부라서 빛깔에 대해 담담하더라도 빛깔[色]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면 이것을 ‘집착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한다.
어떤 담담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빛깔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담담함에 머무르며,
만일 지극한 뜻이 있더라도 담담함을 닦아 익힌다면 이것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그것에 담담한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담담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는 그것에 담담하지만 그가 평등하고 많이 듣지 않았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범부라서 법에 대해 담담하더라도 법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면 이것을 ‘집착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한다.
어떤 담담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법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담담함에 머무르며 또 만일 지극한 뜻이 있더라도 담담함을 닦아 익힌다면 이것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하느니라.
이것을 집착을 의지하는 6희(喜),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희,
집착을 의지하는 6우(憂),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우,
집착을 의지하는 6사(捨),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사라 하나니,
이를 통틀어 36도(刀)라고 한다.
‘마땅히 안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이로 인해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이 가운데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6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희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우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사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평정[捨]에는 한량없는 갱락(更樂),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는 것이 있다.
또 평정에는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는 것도 있다.
어떤 평정에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는가?
만일 평정이 빛깔이나,
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을 버리는 것이라면,
그 평정에는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다.
어떤 평정에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는가?
이른바 평정이 한량없는 공처(空處)를 의지하거나 혹은 한량없는 식처(識處)를 의지하거나 혹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의지하거나 혹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의지한다면 이 평정에는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다.
이른바 그 평정에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으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그 평정에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으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한량이 없음을 취하고 한량이 없음에 의지하며 한량이 없음에 머무는 것,
이른바 이런 평정에는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으니,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그 평정에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으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그 중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마땅히 한량없는 설법에서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래에게는 네 부류의 제자가 있으니,
그들에게는 증상하는 행[增上行]이 있고 증상하는 뜻[增上意]이 있으며,
증상하는 생각[增上念]이 있고 증상하는 지혜[增上慧]가 있다.
그리고 변재가 있어서 제일가는 변재를 성취하였으며 수명은 백 세이니라.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백 년 동안을 설법하였다.
다만 음식을 먹을 때와 대소변을 볼 때와 잠잘 때 및 모임이 있을 때는 제외된다.
그들은 여래가 말하는 법의 문구와 법의 글귀에 대해서 그 뜻을 관찰하는데 지혜로써 얼른 그 뜻을 관찰하고 다시는 여래의 법을 묻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설법은 끝이 없고 그 법을 다할 수가 없기에 그 많은 문구와 법구(法句)의 뜻을 관찰하다가는 결국 네 부류의 제자가 목숨을 마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활 잘 쏘는 네 사람이 활줄을 세게 당겨 화살을 한꺼번에 쏘면 잘 배우고 잘 알고 또 방편도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꿰뚫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세존에게는 네 부류의 제자가 있으니,
그들에게는 증상하는 행이 있고 증상하는 뜻이 있으며 증상하는 생각이 있고 증상하는 지혜가 있다.
변재가 있어서 제일가는 변재를 성취하였으며 수명은 백 세이니라.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백 년 동안을 설법하였다.
다만 음식 먹을 때와 대소변을 볼 때와 잠잘 때 및 모임이 있을 때는 제외된다.
그들은 여래가 말하는 문구와 법의 글귀에 대해서 그 뜻을 관찰하는데 지혜로써 얼른 그 뜻을 관찰하고 다시는 여래의 법을 묻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설법은 끝이 없고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마땅히 한량없는 설법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3의지(意止)13)는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여래가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이는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다.
혹 그 제자들이 공경하지 않고 또한 순종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겨 선정[定]을 얻지 못하더라도 세존은 그것 때문에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세존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평등함[捨]으로 항상 생각하고 항상 지혜로울 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의지(意止)로서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히고 나서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
또 여래가 제자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은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다.
혹 그 제자들이 공경하고 또한 순종하며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 능히 선정을 얻더라도 세존은 그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
그저 세존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고 항상 지혜로울 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의지로서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
또 여래가 제자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은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하여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은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다.
그러나 혹 어떤 제자들은 공경하지 않고 또한 순종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겨 선정을 얻지 못한다.
또 어떤 제자는 공경하고 순종하며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 능히 선정을 얻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존은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거나 또는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저 세존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고 항상 지혜로울 뿐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의지로서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
‘3의지는 이른바 성인이 의지하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니라.
‘위없는 조어사(調御士)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조어사는 사람들을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ㆍ남방ㆍ서방ㆍ북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은 코끼리를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ㆍ남방ㆍ서방ㆍ북방으로 나아가게 한다.
말을 다루는 사람은 말을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ㆍ남방ㆍ서방ㆍ북방으로 나아가게 한다.
소를 다루는 사람은 소를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ㆍ남방ㆍ서방ㆍ북방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와 같이 위없는 조어사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
그 중에 방위[方]란,
색(色)을 색으로 관찰하면 이것을 첫 번째 방위라 한다.
안으로 색이란 생각[想]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찰하면 이것을 두 번째 방위라 한다.
깨끗하게 해탈하여 몸의 촉감을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세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색이라는 생각을 넘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애고 약간의 생각도 기억하지 않으면 곧 한량없는 공(空)이다.
이 한량없는 공처[無量空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네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한량없는 공처를 넘으면 곧 한량없는 식(識)이다.
이 한량없는 식처[無量識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다섯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한량없는 식처를 넘으면 곧 무소유이다.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여섯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으면 곧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이다.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일곱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넘어 상(想)과 지(知)가 멸해 다한 몸의 촉감을 성취하여 노니는 것,
지혜로 관찰해 번뇌[漏]가 완전히 끊어진 지혜,
이것을 여덟 번째 방위라 한다.
‘위없는 조어사가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분별육처경의 경문 글자 수는 2,
512자이다.
164)분별관법경(分別觀法經) 제3제4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14)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라.
그것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청정을 구족하고 범행(梵行)을 나타낸다.
이를 분별관법경(分別六處經)이라 하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그러자 모든 비구들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법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觀)하고 나면 비구들아,
너희들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못하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게 된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법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하고 나면 비구들아,
너희들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고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ㆍ노ㆍ병ㆍ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고통의 끝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편안히 앉으셨다.
이에 모든 비구들은 곧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러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런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편안히 앉으셨습니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법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하고 나면 비구들아,
너희들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못하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게 된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법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하고 나면 비구들아,
마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고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ㆍ노ㆍ병ㆍ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고통의 끝이라 하느니라.〉’
그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러분,
누가 능히 조금 전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자세하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존자 대가전연(大迦旃延)은 항상 부처님과 여러 지혜로운 범행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존자 대가전연이라면 조금 전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자세히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존자 대가전을 찾아가 이 뜻을 설명해 달라고 간청해 봅시다.
만일 존자 대가전연이 그것을 분별해 주거든 우리들은 그것을 잘 받아가집시다.’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대가전연을 찾아가 문안드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아뢰었다.
“존자 대가전연이여,
세존께서는 간략히 이런 이치를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편안히 않으셨습니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법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하고 나면 비구들아,
너희들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게 된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법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하고 나면 비구들아,
너희들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고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ㆍ노ㆍ병ㆍ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고통의 끝이라 하느니라.’
저희들은 곧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조금 전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누가 자세하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존자 대가전연은 항상 부처님과 여러 지혜로운 범행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존자 대가전연이라면 조금 전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자세하게 분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존자 대가전연이여,
저희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그 때 존자 대가전연이 말했다.
“여러분,
제가 비유를 들어 말할 터이니 들어 보십시오.
슬기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어 말하면 곧 그 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나무 심[實]15)을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무 심을 구하기 위하여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큰 나무가 뿌리와 줄기ㆍ마디ㆍ가지ㆍ잎ㆍ꽃ㆍ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고 뿌리와 줄기ㆍ마디와 심은 건드리지 않고 그저 가지와 잎만 건드렸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말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세존께서 현재 계시는데 그 분을 내버려두고 제게 와서 그 뜻을 묻다니요.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은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세존은 곧 눈이요 지혜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이십니다.
진리[眞諦]의 이치를 말씀하시고 일체의 이치를 나타내심은 오직 세존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세존께 나아가 ‘세존이시여,
이것은 무엇이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그 이치를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시거든 여러분은 마땅히 잘 받아 가지십시오.”
그러자 비구들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존자 대가전연이여.
세존께서는 눈이요 지혜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이십니다.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의 이치를 나타내심은 오직 세존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마땅히 세존께 나아가 ‘세존이시여,
이것은 무엇이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그 뜻을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시면 저희들은 마땅히 잘 받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존자 대가전연께서는 항상 세존과 여러 지혜로운 범행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존자 대가전연이시라면 조금 전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자세히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존자 대가전연이여,
저희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존자 대가전연이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모두 제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의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는가?
여러분,
어떤 비구는 눈으로 색(色)을 보면 식(識)은 색의 모양을 먹고[食] 식은 색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며 식은 색의 즐거운 모양에 묶입니다.
그리고 그 색의 모양[相]과 맛[味]은 마음을 결박해 밖으로 나가 흩어지게 합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합니다.
또 뜻으로 법을 알면 식은 법의 모양을 먹고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며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묶입니다.
그리고 그 법의 모양과 맛은 마음을 결박해 밖으로 나가 흩어지게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집니다.
여러분,
어떻게 비구의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는가?
여러분,
어떤 비구는 눈으로 색을 보아도 식은 색의 모양을 먹지 않고 식은 색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며 식은 색의 즐거운 모양에 묶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색의 모양과 맛은 마음을 결박하지 않고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합니다.
뜻으로 법을 알아도 식은 법의 모양을 먹지 않고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며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묶이지 않습니다.
그 법의 모양과 맛은 마음을 결박하지 않고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비구의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는가?
여러분,
어떤 비구는 욕심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읩니다.
그리하여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악을 여의는 맛에 집착해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또 여러분,
비구는 각과 관을 이미 쉬고 안이 고요하여 한마음이 됩니다.
그리하여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선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識)이 선정의 맛에 집착해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기쁨의 욕심을 여의고 평정하여 구함 없이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몸에 즐거움을 깨닫습니다.
이는 저 성인께서 말씀하신 성인의 평정[捨]ㆍ기억[念]ㆍ즐거움에 머묾[樂住]ㆍ공(空)입니다.
바로 이 제3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기쁨이 없는 맛[無喜味]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즐거움이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는데 기쁨과 걱정의 뿌리[本]는 이미 멸한 상태이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捨]ㆍ기억[念]ㆍ청정(淸淨)이 있는 제4선을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평정과 기억과 청정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색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서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공(空)으로 들어가 이 한량없는 공처(空處)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공의 지혜[空智]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없는 공처를 벗어나서 한량없는 식으로 들어가고 이 한량없는 식처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식의 지혜[識智]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없는 식처를 벗어나서 무소유로 들어가고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무소유의 지혜[無所有智]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나서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으로 들어가고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무상의 지혜[無想智]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의 마음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비구 마음이 안에 머무르는가?
여러분,
어떤 비구는 욕심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읩니다.
그리하여 각이 있고 관도 있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닙니다.
그러나 그의 식이 떠나는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각과 관을 이미 쉬고 안이 고요해져 한마음이 됩니다.
그리하여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닙니다.
이 때 그의 식이 선정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기쁨의 욕심을 여의고 평정하여 구함 없이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몸에 즐거움을 깨닫습니다.
이는 저 성인께서 말씀하신 성인의 평정ㆍ기억ㆍ즐거움에 머묾ㆍ공입니다.
바로 이 제3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닙니다.
이 때 그의 식이 기쁨이 없는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즐거움이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는데 기쁨과 걱정의 뿌리는 이미 멸한 상태이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과 기억ㆍ 청정이 있는 제4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닙니다.
이 때 그의 식이 평정과 기억과 청정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색이라는 생각을 벗어나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공(空)으로 들어가 이 한량없는 공처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이 때 그의 식이 공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없는 공처를 넘어 한량없는 식으로 들어가고 이 한량없는 식처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이 때 그의 식이 식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없는 식처를 벗어나 무소유로 들어가고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이 때 그의 식이 무소유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어 비유상비무상으로 들어가고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닙니다.
이 때 그의 식이 무상의 지혜[無常智]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으면 그 식은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의 마음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게 되는가?16) 여러분,
어떤 비구는 색염(色染)을 떠나지 않고 색욕(色欲)을 떠나지 않으며 색애(色愛)를 떠나지 않고 색갈(色渴)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일 어떤 비구가 색염을 떠나지 않고 색욕을 떠나지 않으며 색애(色愛)를 떠나지 않고 색갈(色渴)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색을 얻고자 하여 색을 구하고 색에 집착하며 색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색은 곧 나[我]요,
색은 내 소유다’라고 생각합니다.
색을 얻고자 하여 색에 집착하고 색에 머물러 ‘색은 곧 나요 색은 내 소유다’라고 생각한 뒤에는 식은 색에 대하여 집착하게 됩니다.
식이 색을 집착한 뒤에는 그 색이 변하고 바뀔 때마다 식도 색을 따라 바뀝니다.
식이 색을 따라 바뀐 뒤에 그는 두려움을 일으켜서 마음이 그 가운데 머무르게 됩니다.
마음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나니 이것이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覺)17)ㆍ상(想)ㆍ행(行)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떤 비구는 식염(識染)을 떠나지 않고 식욕(識欲)을 떠나지 않으며 식애(識愛)를 떠나지 않고 식갈(識渴)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일 어떤 비구가 식염을 떠나지 않고 식욕을 떠나지 않으며 식애를 떠나지 않고 식갈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식을 구하고자 하여 식을 구하고 식에 집착하며 식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식은 곧 나요,
식은 내 소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식을 얻고자 하여 식을 구하고 식에 집착하며 식에 머물러 ‘식은 곧 나요,
식은 내 소유다’라고 생각한 뒤에는 식(識)은 식(識)에 대하여 집착하게 됩니다.
식이 식을 집착한 뒤에는 그 식이 변하고 바뀔 때마다 식도 식을 따라 바뀝니다.
식이 식을 따라 바뀐 뒤에 그는 두려움을 일으켜서 마음이 그 가운데 머무르게 됩니다.
마음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나니 이것이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것이 비구가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가?
여러분,
어떤 비구는 색염을 떠나고 색욕을 떠나며 색애를 떠나고 색갈을 떠납니다.
여러분,
만일 어떤 비구가 색염을 떠나고 색욕을 떠나며 색애를 떠나고 색갈을 떠난다면 그는 색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서 색을 찾지도 않고 색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색에 머무르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색은 나가 아니요,
색은 내 소유도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색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서 색을 구하지도 않고 색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색에 머무르지도 않아 ‘색은 나가 아니요,
색은 내 소유도 아니다’라고 생각한 뒤에는 식은 색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습니다.
식이 색을 집착하지 않은 뒤에는 그 색이 변하고 바뀔 때에도 식은 색을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식이 색을 따라 변하지 않은 뒤에는 그는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도 그 가운데 머무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알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나니 이것이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ㆍ상ㆍ행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떤 비구는 식염을 떠나고 식욕을 떠나며 식애를 떠나고 식갈을 떠납니다.
여러분,
만일 어떤 비구가 식염을 떠나고 식욕을 떠나며 식애를 떠나고 식갈을 떠난다면 그는 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 식을 구하지도 않고 식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식에 머무르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식은 나가 아니요,
식은 내 소유도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 식을 구하지도 않고 식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식에 머물지도 않아 ‘식은 나가 아니요 식은 내 소유도 아니다’라고 생각한 뒤에는 식은 식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습니다.
식이 식을 집착하지 않은 뒤에는 그 식이 변하고 바뀔 때에도 식은 식을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식이 식을 따라 변하지 않은 뒤에는 그는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도 그 가운데 머무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알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나니 이것이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것이 비구가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존께서는 이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하지 않은 채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앉으셨습니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찰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찰한다면 비구들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게 된다.
비구들아,
이러이러한 관찰이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관찰한다면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고 집착하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끝[苦邊]이라 하느니라.’
이처럼 세존께서는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이 글귀와 이 글로써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
부처님께 나아가 이 말을 자세하게 말씀드리고 나서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이치와 같거든 여러분은 마땅히 받아 가지십시오.”
이에 여러 비구들은 존자 대가전연의 말을 듣고 잘 받아 외우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존자 대가전연을 세 번 돌고 떠났다.
그들은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까 이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앉으셨습니다.
이에 존자 대가전연은 이러한 글귀와 이러한 글로써 그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들으시고 찬탄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그는 내 제자 중에서 눈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법이 있고 이치가 있는 사람이다.
왜냐 하면 스승이 제자들에게 그 이치를 간략히 말하고 자세히 분별하지 않자 그 제자가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써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가전연 비구가 설명한 그대로를 너희들은 마땅히 받아 가져라.
왜냐 하면 이치를 살펴 설명한다면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분별관법경에 수록된 경문 글자 수는 2,
751자이다.
『중아함경』 제42권에 수록된 경문 글자 수는 모두 8,
394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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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팔리본에는 도사(陶師)의 이름이 Bhaggava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역본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2)
2)팔리어로는 Pukkusāti이고 불가사(弗加沙) 또는 불가라바리(弗加羅婆利)라고도 한다.
3)
3)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에는 모두 뇌수(腦膸)로 되어 있다.
4)
4) 한역본에는 9종의 풍(風)이 나오지만 팔리본에는 7종풍으로 되어 있다.
7종풍은 다음과 같다.
상행풍(上行風,
uddhaṃgamā vātā:
구토나 딸꾹질)ㆍ하행풍(下行風,
adhogamā vātā:
대ㆍ소변)ㆍ장외풍(腸外風,
kucchisayā vātā)ㆍ장내풍(腸內風,
koṭṭhāsayā vātā)ㆍ지체순환풍(支體循環風,
aṅgamoṅgānusārino vātā:
몸을 굽혔다 펴고 혈액이 순환하는 것)ㆍ식입풍(息入風,
assāso:
들숨)ㆍ식출풍(息出風,
passāso:
날숨)이다.
5)
5)사식(捨識)은 고(苦)ㆍ락(樂)과 구별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식[不苦不樂識]을 말한다.
6)
6)낙갱락은 곧 낙촉(樂觸)이다.
즉 즐거움[樂]을 감수(感受)하는 촉(觸)을 말한다.
이하 고갱락(苦更樂)ㆍ희갱락(喜更樂)ㆍ우갱락(憂更樂)ㆍ사갱락(捨更樂) 또한 괴로움ㆍ기쁨 등을 감수하는 촉(觸)을 말한다.
7)
7)나무에 구멍을 뚫고 다른 나무로 비벼 불을 얻는 일,
또는 그럴 때 쓰는 나무를 말한다.
8)
8) 3수(受)라고도 한다.
고각(苦覺)ㆍ낙각(樂覺)ㆍ사각(捨覺)이다.
9)
9)팔리어로는 upasama이고,
지식(止息) 또는 적정(寂靜)으로 한역하기도 한다.
10)
10)팔리본에는 이 부분이 ‘6내처(內處)를 알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 팔리본에는 6외처(外處:
六境)와 6식신(識身)도 거론하고 있으나 한역본에는 없다.
11)
11)팔리본에는 ‘6촉신(觸身)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갱락(更樂)은 후대에 촉(觸)으로 번역되었다.
12)
12) 다른 부분에서는 주로 사(捨)를 평정으로 번역을 했는데,
여기에서는 ‘평정’보다는 ‘담담함’이라고 번역했다.
13)
13)의지(意止)는 팔리본에 satipahn 즉 염처(念處)ㆍ염주(念住)로 되어 있다.
14)
14)승림급고독원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도 한다.
15)
15)팔리본에는 sāra 즉 진수(眞髓)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나무의 심[樹心]을 가리킨다.
16)
16)한역에는 ‘불수이공포(不受而恐怖)’로 되어 있는데 팔리본에는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공포가 있다[不取着而有恐怖,
anupādā paritassanā hoti]로 되어 있다.
17)
17) 5온(蘊)의 수(受)에 해당한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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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천자(天子)
천태사교(天台四敎)
첨(諂)
체공(體空)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중아함경_K0648_T002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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