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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9-13_무극보삼매경-K0170-002 본문
『무극보삼매경』
K0170
T0636
하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무극보삼매경』
♣0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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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無極寶三昧經卷下
K0170
무극보삼매경 하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김혜경 번역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여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곧 두 가지 법이 됩니다.
보살이란
그 가운데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그 위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며,
떠남을 해탈한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에서 떠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작용하는 것에서 영원히 작용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작용으로 일으키는 것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허깨비로써 허깨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허깨비 가운데엔 허깨비도 없고
허깨비 가운데엔 이름도 없습니다.
이와 같아서 또한 법을 좇아 득도(得度)하는 것도 아니고,
법을 떠나서 득도하는 것도 아니며
해탈한 가운데에서 또한 해탈하는 것이니,
이것은 주인도 없고 다만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글자에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곧 법륜(法輪)을 끊은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법륜은 본래 맑고 깨끗하여 존재하는 것이 없는데
누가 법륜을 단절합니까?”
보래(寶來)가 말하였다.
“법륜에 처소가 있음을 모르는 것이 곧 법륜을 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탐욕을 일으켜 법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곧 나고 죽는 근본이 되나니,
법을 멸하는 것도 또한 결(結)이 없는 작용이니라.
작용이 없는 작용이 곧 작용을 여의지 못한 것이니,
탐욕을 일으켜 인정하고 있는 모든 법을 여의면 곧 단절하지 못한 것이니라.
탐욕이 없어서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도이고,
가(可)하고 불가(不可)함이 없는 것,
생겨나고 생겨나지 아니함이 없는 것,
인식하고 인식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
죽고 죽지 아니함이 없는 것,
끊고 끊지 아니함이 없는 것,
멀거나 멀지 아니함이 없는 것,
모든 가(可)와 불가(不可)함,
머무는 바에 생각이 없는 것,
생각 없는 데에서 떠나는 것,
기억하는 것과 기억함이 없는 것,
말한 것과 말한 것이 없는 것,
니원(泥洹)엔 멸할 것이 없지만 그 멸할 것이 없는 것까지도 여의는 것,
니원엔 형상이 없지만 그 형상 없는 것까지도 여의는 것,
니원을 멸진(滅盡)이라 말하지만 멸하여 다할 것도 없는 것이 도이니라.
모든 법이 적연(寂然)한 것이나 적연한 것까지도 여의는 것,
모든 법은 가함도 없고 가하지 않은 것도 없으며 잃어버릴 것도 없는 것,
지혜에 대하여 그 근본을 여의는 것,
이름할 것도 아니고 생각도 없는 것,
밝힐 것이거나 밝힐 것도 없는 것,
밝고 어두움이 서로 간섭함이 없는 것,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서로 상관함이 없는 것,
도에 대하여 도를 얻을 것이 없는 것,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인식함이 없는 것,
일어나는 것에 생각함이 없는 것,
맑고 깨끗하여 어렵거나 쉬움이 없는 것,
제도할 대상에 주인이 없는 것,
이른 곳에 서로 떠나감이 없는 것,
모든 법은 이름이 없지만 그 이름이 없는 것까지도 다 여읜 것,
제도하는 바가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이름에 대하여 마음이 바뀌지 않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이 다 곧 도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삼매로써 사람들의 뜻에 맞게 제도하시고
온갖 물질로 스스로를 웅장하게 꾸미시지만,
다만 그 장엄은 형상이 없나니,
장엄이라 하는 것은 전도된 견해이며,
장엄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의왕(意王)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장엄이라는 것은 상(想)이며 비상(非想)일 뿐이니라.”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모임에 온 여러 천인(天人)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이 삼매를 증득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 모임에 있는 여러 하늘과 사람들 모두가 다 이 삼매를 증득하였고
이 공덕을 얻었으므로
미래에 모두 부처가 되어 마땅히 존경받을 것이고,
다섯 갈래 세계에 대하여 결단할 것이니라.”
그때 그 모임에 있던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었는데,
8천억이나 되는 모든 하늘과 사람들이
모두 다 어디부터든 생겨남이 없는 법인[無所從生法忍]을 증득하였고,
곧바로 땅에서 3백 장(丈)쯤 떨어진 허공에 올라가니 그 몸 위에 각각 만억 개의 꽃과 향이 있었다.
곧바로 그것들을 가지고 내려와서 부처님 발에 머리를 대고 예를 올렸다.
아루(阿樓)보살과 가제(呵提)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모든 상인(上人)들이 날아 올라가서 허공에 있을 때 생겨난 몸 위의 꽃과 향들은 어느 곳에서 나온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깨끗한 비단은 본래부터 정결(淨潔)한 것인데
선명하고 좋은 다섯 가지 색깔에 물들게 되는 것처럼,
비단도 본래 스스로 깨끗한 것이고
색깔도 본래 깨끗한 것이지만
이 두 가지 물질이 서로 인연이 된 까닭에 맑고 좋게 된 것이지
색깔이 비단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비단이 또한 색깔에 들어간 것도 아니니라.
깨끗한 인연으로써 밝음을 내게 되었느니라.
보살들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꽃과 향을 초치(招致)한 것이니
그 인연 또한 이와 같으니라.
보살도 그 꽃과 향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꽃과 향이 또한 보살에게 붙었던 것도 아니니라.
모든 하늘과 사람들이 염상(念想)을 끊을 수 있었기에
혜법(慧法)을 밝히는 데 미쳐서
곧 꽃을 볼 수 있었고
꽃도 깨끗했기 때문에 인연이 일어났을 뿐이니라.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머무름이 없는 사람은
모든 공덕을 성취하지만
상(想)과 행(行)에 머무는 사람은 나고 죽는 문이 열리게 되느니라.
아라한과 벽지불은 그런 까닭에 다섯 갈래의 길을 멀리하거니와
그들에게는 다만 열 가지 거꾸로 된 견해가 있느니라.
첫째는 여러 가지 공덕을 보고 다들 해탈했다고 말하니 이것이 다 전도된 견해이고,
둘째는 다섯 갈래 세계에서 수고롭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니원을 취하고 싶어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며,
셋째는 온갖 물질이 항상함이 없음을 보고 미워하여 떠나고 싶어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고,
넷째는 편안한 근본을 구하면서도 스스로는 그 근본은 없는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며,
다섯째는 무간지옥에서 벗어나 처소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구하기를 멈추지 못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니라.
여섯째는 아라한이 니원을 집착할 때 몸속에서 저절로 불이 일어나는데 그 불도 또한 처소가 없다고 하면서 문득 생각을 일으키므로 몸속에서 불이 나와 스스로를 태우느니라.
그런 까닭에 나고 죽음이 끊어지지 않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가 되고,
일곱째는 본말(本末)은 다함이 없는 것이건만 스스로 다하기를 구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며,
여덟째는 니원에 들어 모든 악을 멸하여 다하기를 바라면서도 주인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멸하려고만 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며,
아홉째는 베풀어주긴 하면서도 일체 사람들의 마음을 발심시키지 못하고 다만 법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고,
열째는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하여 평등하고 깨끗한 실천을 하지 않고 두 가지 법이 있다고 말을 하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견해이니라.
보살의 도를 수행하려면 마땅히 이런 일들을 알아서 빨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루보살과 마제(摩提)보살 등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여러 하늘들과 이 법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 아가루(阿呵樓)부처님 시대의 사람들이니라.
지금 내 앞에서 기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숙명(宿命:과거세)에
이미 6만 부처님의 처소에서 이 삼매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여기에서 기별을 받을 뿐이니라.
이 뒤로 나의 법이 단절되려고 할 때 틀림없이 이들 40만 사람이 마땅히 법을 가지고 머물러 있어서 이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런 뒤에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악한 사문이 있어서 계율을 지키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마땅히 내 법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느 곳에 있는 보살들이 법을 보호하여 그 법이 단절되지 않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40만 보살들이 모두 제8지 이하에 머물러 있으면서 법에 대하여 번뇌의 생각이 없으니 이들이 법을 보호하고 가져서 그 법을 단절되지 않게 하리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무리들이 법을 무너뜨립니까?
부디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아라한이나 벽지불법을 증득한 사람이나 사문과 천인[天],
또는 사람들이 번뇌의 생각을 일으키고 법에서 명예나 구하며 근본 지혜를 무너뜨리거나 혼란시키고 부질없이 법을 늘리고 줄이며,
지액경(枝掖經)을 해설하여 거짓을 가지고 참된 것을 어긋나게 하며,
말로 도를 혼란하게 함으로써 오직 지혜를 공(空)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엄하게 꾸미는 일에만 힘쓰고,
부처님 법을 듣고 얻어서 그들의 뜻을 초획(超獲)하는 일에만 두어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
善巧方便)를 알지 못하고 덕행을 부지런히 증식시키지 않으면 이들이 곧 법을 해치고 나의 도를 깨뜨리는 자이니라.”
아수이천(阿須夷天)과 반나제천(潘那提天),
제루니천(提樓尼天),
구속제천(拘屬提天),
시나리천(施那利天)이 다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바라옵건대 형상과 수명을 가진 채로 귀의하여 법을 지닌 사람들이 천억만 겁 동안 휴식함이 없을 때 항상 저희들로 하여금 이 삼매를 증득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어떤 덕 있는 사람이 삼매를 받들어 실천하는데 법과 같이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면 신속히 부처를 증득할 것이니라.
그들이 마음을 내어 이 삼매를 수행하면,
비유컨대 니원천(泥洹天)에 어떤 보물이 있는데 그 보물은 모든 보물 가운데 왕이니라.
천상(天上)이나 천하(天下)의 보물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것으로서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시게 되면 그 보배가 곧 나타날 뿐이니라.
그 보배의 이름은 정마니주(精摩尼珠)인데,
이 구슬을 얻어서 그릇 안에 담아두거나 또는 손 안에 놓아두고 사면(四面)의 공중을 보면서 며칠 동안 비가 내리기를 바라면 그 진귀한 보배 구슬이 향하는 곳마다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 존귀한 보배 구슬을 항상 탐내거나 아까워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삼계에 쏟아져 내려 누구든지 그 보물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 삼매의 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나열기(羅閱祇) 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존귀하시고 세상을 도우시며 큰 인도자이십니다.
항상 큰 사랑으로 시방세계를 구제하시나니 바라옵건대 그 보배 구슬을 우리나라에 쏟아져 내리게 하시어 우리나라 인민들로 하여금 누구든지 복덕과 이익을 얻게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곧 웃으시니 신비한 광명이 휘황찬란하였다.
아난이 옷을 바로잡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부질없이 웃지 않으십니다.
부디 웃으신 의미를 들려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왕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이 왕은 니원천상(泥洹天上)으로부터 가장 으뜸가는 보배 구슬을 얻고 싶어하느니라.
그 구슬이 나열기에 비 오듯 쏟아져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부자가 되고 넉넉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보래삼매(寶來三昧)에서 이미 그 구슬을 얻은 줄도 모르고 있느니라.”
“어찌 보았겠습니까?
인민들이 백 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도 두루 안온함을 얻었으니 법으로 맛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여인들이 변화하여 남자가 되었으니 이 법의 이익됨이 또한 크지 않습니까?”
왕은 마음에 기쁨이 생겨 곧바로 보배 구슬들을 떼 내어 부처님과 보살의 위에 뿌리니 그 구슬이 변화하여 꽃 일산이 되어 공중에 벌려 있었는데,
그 사이마다 백천 가지 음악이 퍼져 나왔다.
왕은 배로 더 기뻐하며 펄쩍펄쩍 뛰면서 밥 먹을 생각조차 잊어버린 채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꽃 일산은 어느 곳에서 나온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느 곳으로부터 나온 곳이 없습니다.”
“처소가 없다면 어느 곳으로부터 나왔습니까?”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 온 곳이 없습니다.”
“일어난 곳이 없다면 어느 곳에서 왔습니까?”
“어느 곳으로부터도 온 곳이 없습니다.”
“생겨난 곳이 없다면 어느 곳에서 왔습니까?”
“부동(不動)을 좇아서 왔습니다.”
“부동은 어느 곳으로부터 옵니까?”
“지음이 없는 데[無造]로부터 왔습니다.”
“지음이 없는 것은 어느 곳에서 왔습니까?”
“이름이 없는 데에서 왔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옵니까?”
“생겨남이 없는 데에서 왔습니다.”
“생겨남이 없는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옵니까?”
“아무 소리도 없는 데에서 옵니다.”
“소리 없는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옵니까?”
“두 가지 법이 없는 데에서 왔습니다.”
“두 가지 법이 없는 것은 어느 곳에서 왔습니까?”
“아무 형체도 없는 데에서 왔습니다.”
“형체가 없는 것은 어느 곳에서 왔습니까?”
“자연(自然)에서 왔습니다.”
“자연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습니까?”
“변화로부터 왔습니다.”
“변화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습니까?”
“변화를 여읜 곳에서 왔습니다.”
“변화를 여읜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습니까?”
“변화하지 않은 것을 여의어서 서로 아는 것이 없는 처소에서 왔습니다.”
“서로 아는 것이 없는 처소는 어느 곳에서 왔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한 까닭에 모든 법이 됩니다.”
왕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배나 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모든 보살들은 아주 먼 곳에서 왔으니 바라옵건대 모두 초청하고 싶사오니 내일 궁중으로 오셨으면 합니다.”
부처님께서 곧 허락하시자 다른 이들도 다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왕이 곧 궁중으로 돌아가 공양거리를 장만해 놓고 길 양쪽에 장막과 당기,
번기를 찬란하고 화려하게 베풀어 놓고 궁중에는 모두 귀중한 보배로써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부인들과 채녀들은 재계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다음날 문수와 보래(寶來) 등이 여러 보살들과 함께 왕궁에 나아갔다.
보래보살이 문수보살에게 상석(上席)을 사양하며 말하였다.
“지금 모든 상인(上人)들께서 마땅히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 보살들이 말하였다.
“지혜에는 처소가 없고 뜻에는 형체가 없으며 기억에 생각이 없고 법에 베푸는 바가 없으며 베푸는 바가 도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미 법륜을 끊었고 법에는 염상(念想)이 없고 다소(多少)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여러 높으신 분께서 권세에 들어가야 합니다.
살운야(薩芸若)에 대하여 서로 아는 것이 없고 이미 법의 갑옷[法鎧]을 입었고 삼매에 대하여 증감이 없어 높으시니,
마땅히 앞에 자리해야 합니다.”
보래보살이 대답하였다.
“지금 여러 상인은 연세도 많으시고 덕도 높으시어 존귀하시니,
마땅히 앞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여러 보살들이 말하였다.
“우리들의 나이는 마치 마른 고목과 같아서 근본이 이미 죽었으므로 꽃도 피지 않고 잎사귀도 나오지 않으니,
그늘이 너무 적어 세상에 별로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어지신 분께서는 비록 어리시지만 깊고 심오한 지혜의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비유하면 보배 나무가 세상에 크고 많은 이익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높으시니,
마땅히 앞에 있으셔야 합니다.”
이미 모두 궁중에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가 앉았다.
여러 천인들이 하늘 위에 있으면서 악기로 음악을 연주했고 왕은 부인과 여러 채녀들을 시켜서 이름 있는 숱한 향을 사르고 공양거리를 내놓았다.
밥 먹기를 다 마치고 보래에게 물었다.
“제가 지금 시방에 계신 여러 부처님을 뵙고 싶사온데 마땅히 어떤 법을 행해야 뵈올 수 있겠습니까?”
보래가 대답하였다.
“여러 부처님을 뵙고 싶으면 마땅히 아홉 가지 법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시방세계 부처님이 이와 더불어 다름이 없다고 보아야 하고,
둘째는 마땅히 도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보아야 하며,
셋째는 모든 사람은 해탈시킬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넷째는 음식을 보되 변화로 만든 것을 보는 것과 같이 해야 하고,
다섯째는 마땅히 5음(陰)엔 식상(識想)이 없음을 알아야 하며,
여섯째는 6정(情)에 대하여 알기를 허깨비와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곱째는 마땅히 관찰한 바는 다만 거꾸로 된 소견임을 알아야 하고,
여덟째는 법 가운데에서 크게 보시해야 하며,
아홉째는 마땅히 보시한 것도 보시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
이것이 그 아홉 가지입니다.
그 뜻 따위가 공(空)하여 없음은 보는 바가 모두 피차(彼此)가 없기 때문이니,
뜻이 적연해야 깨끗한 선정을 얻으며 보는 바가 없으면 널리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보래를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시원하고 시원하구나.
관찰한 것이 말한 것과 같도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항상 마땅히 이 겁이 다하고 나서
태어나는 곳마다 언제나 세존을 만나서
그를 따라 큰 지혜를 받고 나서
늘 애욕의 뿌리를 제거하기 원해야 하네.
탐하지도 않고 또한 질투하지도 않으며
악한 마음을 다시는 내지 않아
마침내 수없이 많은 부처님에게서
이 삼매를 들었다네.
삼천이나 되는 국토에 들어가서
항상 존귀한 삼매를 실천하고
일체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진귀한 보배를 귀하게 여기지 않네.
법은 5음을 따르지 않고
또한 그 처소를 떠나지도 않네.
관(觀)함으로부터 이름[名]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일체가 다 이와 같다네.
관찰함을 따라 환희를 얻고
태어나는 바가 없기를 발의하였네.
그곳이 이미 이와 같으니
그런 까닭에 천중천이 되었네.
만약 삼계에 있다 해도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네.
니원과 니왈(泥曰)에서도
일체에 이런 것이 없다네.
마음에 마땅히 사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법이 아니면 실천하지 않으며
만약 삼계에 있다고 해도
마음을 지켜 일어나지 않게 하네.
음향이 되돌아와 대답하듯이
안과 밖이 모두 다 서로 호응한다네.
일어남이 없어야 모두가 고요하나니
모든 법이 또한 이와 같다네.
삼천세계 모든 부처님 국토의
명자(名字)가 또한 이와 같으니
듣는 것도 없고 또한 보는 것도 없으며
법에 대해 마땅히 의론하는 바 없다네.
삼매는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으로
많은 복을 지었네.
지혜 있는 사람은 이 말 뜻을 알아서
부처님의 항상함 없는 이치를 얻었네.
법이란 모두 맑고 깨끗한 것이어서
넓고 크기가 짝할 것이 없다네.
언제나 무변수(無邊水)를 지어
싣고 있는 것으로 삼천세계를 가리네.
마음속에 다린니를 원하고
앞 다투어 마음을 내었네.
법이란 이미 이와 같나니
일체 중생들 모두 봉행해야만 하네.
내가 기억해 보니 법을 구할 때에
종래 약간 겁이 지나도록
마음엔 언제나 집을 버리려 했고
탐욕스러워 구한 것이 없었네.
항상 선지식만 의지했고
바른 법을 정립하여 머물렀다네.
그때 큰 모임에서
존귀한 삼매법을 얻어 들었네.
마음속에 크게 기뻐하여서
곧바로 허공에 머물렀으니
땅에서부터 140장(丈)이나 떨어졌으며
합장하고 부처님 곁에 있었네.
지금 이 자리의 모든 보살들
기별 받음도 이와 같나니
그 마음에 기쁨이 늘어나고
모든 삼매를 들을 수가 있었네.
문득 한 부처님의 국토에서부터
여러 부처님 앞에 날아서 이르렀네.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니
여러 국토가 진동(震動)하였네.
용왕도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온갖 종류 향을 내리고
변화로 여러 곳에 연못을 만들어
위로 삼천세계까지 이르게 했네.
꽃과 향이 저절로 오고
산란한 바람이 저절로 불어왔네.
온갖 종류의 모든 음악이
공중에 흘러 퍼졌네.
그때 보래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지금 저 향과 꽃은 다른 국토에서 이르고 또한 모든 음악이 이 모임 속에 연주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위신력입니까?
보살의 힘입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과 보살이 힘을 얻어 신통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보아서 알 수 없는 것이니,
이 음악은 이름 없는 음악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생겨난 법음은 명처(名處)가 없으며,
또한 즐거움이 바로 음악의 처소일 뿐 모든 존재는 변화와 같나니,
이것이 곧 음악입니다.
둘이 없는 법이 곧 음악이며,
나한과 벽지불을 제도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 음악이고,
이도(異道)를 보면 그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를 증득하게 하는 것이 그 음악입니다.
제도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주인도 없으니 이것이 음악이고,
일체의 처소에는 처소도 없고 일어나는 것이 없으며 삼매에 대하여 어떤 번뇌도 없는 것이 그 음악이며,
일체처(一切處)에 아무 이름도 없으니 이것이 그 음악이고,
모든 존재하는 물질은 다 변화와 같은 것이니 이것이 음악이며,
소리의 처소도 아니요 생겨나는 처소도 없는 것이 곧 음악이고,
법을 베풀었으나 베푼 바 없는 것이 곧 음악입니다.
대천 국토에 항상한 처소가 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신심을 얻게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며,
미래ㆍ과거ㆍ현재의 세 처소가 다해도 다한 것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게 하였으나 볼 것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입니다.
법륜을 보았지만 이것에도 볼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삼천세계에 일체가 동등한 것이 바로 그 음악이며,
시방 삼천세계에 법의 창고를 수립한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시방세계는 오직 이름만 있는 것이니 이것이 그 음악이며,
색욕(色欲)과 합해지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명자(名字)에 주인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입니다.
변폭(邊幅)이 따로 없고 일체가 고요하니 이것이 그 음악이고,
일체의 밝음과 어둠은 합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그 음악이며,
모든 행동에 계율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모든 생각하는 바에 삼매를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며,
허공의 보배 도무극(度無極:
波羅蜜)이 바로 그 음악이고,
모든 지혜와 깨달음에 처소가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며,
모든 인가할 만한 대상이 바로 그 음악이고,
일체를 결정코 받아들임이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입니다.
삼계 가운데 아무것도 동등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그 음악이고,
법에 대하여 탐할 때에는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나니 이것이 그 음악이며,
일체의 밝음을 다시 더 밝게 하나니 이것이 그 음악이고,
보는 존재는 다만 거꾸로 된 견해이니 바른 것을 보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며,
보시를 하고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뜻이 다함이 없어서 대선사(大船師)가 되는 것이 바로 그 음악입니다.
변원(邊園)이 없고 무극(無極)까지도 해탈한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마음이 적정(寂靖)한 것이 바로 그 음악이며,
결정한 것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모든 삼매문(三昧門)은 전도가 없으니 이것이 그 음악이며,
또한 들음도 없고 또한 들리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곧 그 음악이고,
모든 기억하는 바는 정의(政意)가 아니니 이것이 그 음악이며,
모든 사람 해탈함이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모든 해탈할 대상은 비유하면 허깨비와 같나니 이것이 그 음악이며,
처음 발의하여 삼매를 갖추니 이것이 곧 그 음악이고,
모든 보살은 어느 곳으로부터도 온 곳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그 음악이며,
모든 보살은 마음만 먹으면 시방 어느 곳이든 이르나니 이것이 바로 그 음악이고,
푸르고ㆍ누렇고ㆍ희고ㆍ검은 것이 아니고 도경(道徑)이 없는 것이 곧 그 음악입니다.
이와 같아서 보래여,
부처님과 보살의 위신력과 음악을 알고자 하면 즐겁기가 이와 같습니다.”
보래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문수사리의 마음에
지혜롭고 존귀함이 이전엔 없었네.
베푼 것이 삼천 세계를 덮으니
그 지혜에 존귀하지 않음이 없네.
위신력으로 보시를 실천한 바
삼천세계를 다 제멸(除滅)하였네.
모든 음악을 탐한 바 없으며
다만 불탈시(不脫施)를 실천했네.
음악의 법이 가장 크며
변화하는 것에는 제도할 게 없네.
베푼 바 음악의 법시(法施)도
또한 공한 것이라 제도할 것이 없네.
법과 음악을 함께 실천하니
그 무엇도 이 보배보다 더한 것이 없다네.
음악에는 주인이 있지 않으니
공과 같아 처소가 없네.
모든 미묘한 법에 깊이 들어가
일체 사람들을 밝게 깨닫게 하네.
그들로 하여금 큰 법을 얻게 하여
수고롭고 괴로운 뿌리를 끊어 없애게 하네.
일체 세간의 사람들은
모두 다 마음에 알지 못하네.
법으로써 각의(覺意)를 삼고
지혜로써 일체 중생을 구원한다네.
부처님께서 그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여의어 공한 것은 생각 아니고
이 생각도 공한 것이 아니라네.
법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마음을 일으키게 하네.
항상 마땅히 뜻을 부드럽게 하고
깨끗하여 소유(所有)함이 없네.
색계와 욕계가 함께 합하여
서로 간섭함이 없네.
설한 바 형체 없으니
형상 있음을 여의지 않네.
모든 법은 꿈과 같으니
인가하는 바가 끝이 없다네.
이 적멸과 적멸을 여읜 것
여읨도 없고 조작하지도 않네.
모든 법은 주인이 없어서
인가하는 법이 변화와 같네.
전혀 받아들이는 것이 없으니
그 법엔 버릴 것도 없다네.
조작하는 것은 전도된 견해 때문이니
일체가 모두 그러하다네.
물질도 아니고 물질을 여읜 것도 아니니
이것이 색을 여의는 것이 아니라네.
그 법은 색과 같으며
그 처소 또한 이와 같다네.
음성[音]도 아니고 메아리도 아니며
듣는 것도 없고 보지도 않는다네.
듣지도 않고 관찰하지도 않나니
모든 존재는 이와 같다네.
변화하는 것에는 이름도 없거늘
스스로 말하기를 이것이라 하네.
법에는 이렇게 헤아림이 없으니
제도할 바도 이와 같다네.
허깨비 같아 볼 것이 없나니
보이는 것에서 봄을 여의네.
탐함과 모든 욕망 여의어야 하니
법은 행동하는 것이 아닐세.
욕망에 아무런 때가 없느니
집착하지도 않고 여읠 것도 없다네.
이와 같은 진리를 보면
아무것도 볼 것이 없네.
깨끗한 것에서 깨끗함을 여의니
시방세계에 조작이 없다네.
인가하는 것이 실상과 같지만
변화로 만든 것에 주인이 없는 것과 같네.
보래보살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알고 문득 궁중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근본을 의심하여 알지 못하니
법은 모두 자연이라 말씀하셨네.
근본엔 항상 머무름이 없으니
지혜를 의심함이 이와 같다네.
생각에 번뇌[勞]가 없으며
식념(識念)에는 괴로움이 없네.
이름을 날리고 글자에 머묾은
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근본은 그렇지 않나니
돌아오지도 않고 옳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네.
가(可)함과 무가(無可)함을
멀리 여의어 인정할 것 없네.
생(生)을 벗어나면 멸할 것도 없나니
이것이 곧 멸이 된다네.
적멸에는 생각도 없으니
이것이 곧 멸하지 않는 것이 되네.
모든 법엔 생겨남이 없으며
또한 성취하기를 생각지도 않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법은 다 공한 것이기 때문이라네.
또한 말[言]을 구하지도 않고
나는 니원까지도 여읜다네.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근본과 끝이 모두 깨끗하기 때문일세.
다함이 없는 시방세계를
들어서 증명하리라.
이것이 나[我]라고 말들 하나니
이것이 바로 그 증거라네.
마땅히 영원토록 생각하지 않아야 하나니
시방에 대한 생각을 말함일세.
법에는 두 가지 법이 없나니
곧 거기에는 아무 이름도 없기 때문이네.
법에는 고정관념이 없나니
마땅히 깨달아 알아야 하네.
기행(起行)이 이와 같으면
존귀한 법을 보지 못하리.
마땅히 지혜를 알아야 하니
미묘한 이치엔 두렵지 않네.
심오한 수행에 주인이 없으면
이것을 멸문(滅門)이라 한다네.
보래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지금 이 모임 가운데 서로 마음을 낸 사람에게 다함이 없는 법을 증득하게 하고 싶은데 마땅히 어떤 법으로 성취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생각에 대하여 작용이 없으면 곧 다함이 없는 법을 증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무엇을 생각에 작용이 없다고 말합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마땅히 아홉 가지 법의 보배에 이르러야 합니다.
첫째는 뜻에 처소가 없으면 이것이 곧 보배이고,
둘째는 법에는 주인이 없으니 이것이 곧 보배며,
셋째는 현재와 미래와 과거가 있음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곧 보배이고,
넷째는 법에는 조작이 없으니 이것이 곧 보배며,
다섯째는 베푸는 것은 오직 경법(經法)만을 베푸나니 이것이 곧 보배이고,
여섯째는 다섯 갈래 세계의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보고 그 가운데에서 마음이 변하지 않나니 이것이 곧 보배이며,
일곱째 깨달은 것은 구화구사라에 멀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보배이고,
여덟째는 다만 모든 법을 보되 법에 머물지 않나니 이것이 곧 보배며,
아홉째는 니원에 이르러도 역시 변화와 같나니 이것이 곧 보배입니다.
이것이 곧 아홉 가지 보배입니다.”
그러자 문수사리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가(可)에 대하여 바라는 바도 없고
머무는 바에도 항상한 이름이 없다네.
허공과 같아 아무 때도 없나니
부처님의 미소엔 불가(不可)함이 없네.
웃음도 공한 것이어서 말(末)을 여읠 필요가 없고
본래와 같아 웃을 것도 없네.
이미 여러 가지 법의 이름에 머물렀으니
일체는 모두 미소와 같다네.
본말(本末)은 다 자연 그대로여서
가고 오는 것이 없고
웃음에는 돌아오는 보답이 있지만
돌아올 것도 없고 미소도 없네.
법은 모두가 하나이어서
이미 웃었다면 문득 두 가지 법이 있다네.
그 두 가지엔 명자(名字)가 없나니
그런 까닭에 이것은 존귀하네.
웃으신 것에 집착할 것도 없고
오직 모든 법을 베푸셨을 뿐
움직이는 것에 움직인 것도 없나니
그런 까닭에 무상존(無上尊)이라네.
웃으신 이에게 돌아가는 과보는 없으며
일체 것엔 주인이 없기 때문이네.
그 미소는 근본을 여의지 않았나니
그런 까닭에 천중천(天中天)이라네.
웃으신 것엔 일어나는 바가 없으며
다만 거꾸로 된 견해일 뿐
모든 법은 다 고요한 것이지만
고요한 것에도 본래 아무것도 없다네.
웃으신 것은 변화를 여읜 것이 아니니
변화로써 크게 베푸셨을 뿐이네.
변화에 대하여 거명할 것 없나니
그런 까닭에 그것이 곧 법이 된다네.
법에는 이것이라 할 것도 없나니
다만 불탈시(不脫施)만을 할 뿐이네.
해탈한 것도 벗어난 것이 아니니
부처님도 이와 같다네.
그런 까닭에 큰 법회에서
해탈을 의론하지만 해탈도 없는 것이라네.
법만을 베푸실 뿐이기에
비교가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
사리불이 보래에게 물었다.
“시방세계에 일체의 학자(學者)들로 하여금 총지인 모든 다린니(陀隣尼)를 얻게 하려면 어떤 법을 수행하여야 마땅히 성취할 수 있습니까?”
보래가 대답하였다.
“마땅히 서른두 가지 법보(法寶)를 수행하여야만 됩니다.
첫째는 아직 마음을 내지 못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 마땅히 해탈하게 하여 변화와 같음을 알게 하고 걸림이 없게 하려 함이고,
둘째는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의 마음을 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다 바른 법에 머물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삼천대천세계를 보되 모두 동등하여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고,
넷째는 만약 한(限)에 머무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모든 욕망을 영원히 여의고 지혜의 문에 있게 하여 동요함도 없고 바뀌지도 않으며 니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사람들이 ‘하늘이 있다느니 하늘이 없다느니’ 하고 말하면 마음이 동요되어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도에 대한 마음이 견고하여 뜻에 겁약하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와서 생(生)을 받지 않는 일체 중생들이 현재ㆍ미래ㆍ과거를 보되 두 가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모든 삼매 선정은 적연하여 처소가 없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모든 제도할 대상에는 주인이 없어서 일체 것은 공(空)을 좇아 공을 이루는 것이고,
열째는 나는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다 따라 법을 받는 것이며,
열한째는 다른 지방의 국토에서 감히 와서 경을 듣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다 결정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고,
열두째는 여러 부처님의 국토에서 꽃이나 향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어도 또한 기뻐하지 않고 오지 않는다 해도 또한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셋째는 마음을 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법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열넷째는 현재ㆍ미래ㆍ과거에 대하여 뜻에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근본엔 두 가지 법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열다섯째는 시방세계의 연비연동(蜎飛蠕動)으로 하여금 모두 금계(禁戒)를 받들어 지녀서 마침내 훼범(毁犯)함이 없게 하는 것이고,
열여섯째는 삿된 생각이 없이 시방세계에 있으면서 마음을 바꾸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곧 지혜의 문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열일곱째는 인욕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항상 삿된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고,
열여덟째는 관(觀)으로부터 다른 관에 이르기까지 제도함이 없는 것이며,
열아홉째는 본래 머무름이 없는 것처럼 항상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이고,
스무째는 제도할 대상에 주인 없기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아무 염상(念想)이 없는 것입니다.
스물한째는 지혜 있는 이에게 보시하되 거명함이 없고,
탐욕에 대하여 집착함이 없으면 곧바로 이를 따라 해탈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스물두째는 법을 말하면 대상을 여의지 않고 인하여 보시하기 때문에 큰 나라의 대중들 가운데 제도하여 더 이상 해탈할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며,
스물셋째는 무수히 많은 국토에서 또 다른 국토에 날아서 이르러 여러 부처님 앞에 나타나되 걸릴 것이 없는 것이고,
스물넷째는 여러 국토를 보아도 해탈할 사람이 더 이상 없게 하는 것입니다.
스물다섯째는 깨끗함과 어리석음이 한군데에 합하여 근본이 깨끗한 것처럼 그와 다름이 없는 것이고,
스물여섯째는 대천세계에 머물러서 주로 다리를 놓고 아직 깨닫지 못한 이를 정진하도록 권유하여 어두운 사람으로 하여금 밝음을 보게 하는 것이며,
스물일곱째는 넓은 바다의 큰 선사(船師)가 되어 여러 군생(群生)들을 건네주면서 싫어함이 없는 것이고,
스물여덟째는 끝없는 일산을 만들어 모든 더러움을 막는 것입니다.
스물아홉째는 다함이 없는 은혜를 지어 시방을 떠나지 않는 것이고,
서른째는 큰 자애로움을 지어 일체 중생들을 다 거두어 윤택하게 하고 아직 해탈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마땅히 모두 제도하는 까닭에 그를 천중천(天中天)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서른한째는 평등심을 항상 행하여 치우침이 없고 구제하되 짝이 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호를 무상존우(無上尊祐)라 하는 것이고,
서른두째는 보살이 말하는 것은 경법(經法)을 떠나지 않고 대천 국토에 두루 소문이 들리지 않음이 없나니,
그런 까닭에 공중에서 저절로 꽃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서른두 가지 법보가 됩니다.”
그때 보래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넓고 넓은 시방세계 변화와 같아
일체 것은 모두 항상함이 없다네.
참다운 법과 바른 진리는 고요하다고
연설하여 중생들을 제도하네.
고정관념은 생각을 여의지 못하지만
일체는 진실로 본래 공한 것이라네.
꽃은 잎사귀를 베풀지 못하고
그 색깔을 감당할 수도 없네.
일체의 모든 탐욕을
세우면 의왕(意王)이 된다네.
모든 보배이자 무상존(無上尊)이기에
호(號)를 천중천(天中天)이라 한다네.
그런 까닭에 큰 모임 가운데에서
아직 해탈하지 못한 사람을 제도하려 의론 한다네.
그 근본은 항상 머무름이 없나니
그런 까닭에 십력존(十力尊)이라 한다네.
일체의 거꾸로 된 견해를
세간에선 깜깜하다 말하네.
인가하는 것은 변화와 같아
시방세계에서 해탈할 수 있다네.
허공은 항상한 처소가 없나니
부처님의 법장(法藏)이 다 그 가운데 있다네.
해탈함이 없음을 해탈함으로써
시방세계 중생들을 교화한다네.
시방의 여러 부처님 국토를
합하여 한나라로 만드니
저절로 대중들 크게 모여들어
시방세계를 가득 메웠네.
부처님께선 일체를 깨달으신 분으로
웃으셔도 그 모습을 여의지 않네.
황금 색깔도 여의지 않은 채로
아직까지 해탈하지 못한 사람에게 보여 주셨네.
시방세계를 인도하는 사람이 되어
마음에 법왕을 여의지 않네.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꽃을 시방세계에 보시하였네.
금색의 커다란 연꽃이
모든 허공을 두루 가득 채웠네.
생각 일으키고 행동하여도
모든 하늘에 머물지 않네.
문수사리의 마음 넓고 커서 짝할 사람이 없네.
그로 하여금 득도(得道)케 하여
기별(記莂)을 주어
허공에 머물러 있게 하였네.
보래보살 지혜의 마음 존귀하여
밝은 빛이 궁중에 두루 비추네.
마음을 낸 여러 천인들
모두 다 법문에 이르게 했네.
시방세계 여러 보살들
여러 국토에서 감동하였네.
여기 모인 여러 천자들
이 귀중한 경전을 들을 수 있었네.
일체에 다 통해 볼 수 있으며
마침내 마음먹은 궁전이면 어디든 갈 수 있네.
변화로 교로좌(交露坐)를 만드니
온갖 하늘의 꽃과 향이 이르네.
모든 삼매를 듣고 받아서
대중 가운데 앉아서 보네.
여러 곳에서 온 공덕 높으신 분들
마음 내어 높은 분께 공양하네.
도 있는 사람이 바르게 보지 못하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와 같다네.
해탈한 모든 사람이 수없이 많아
삼계에 다함이 없네.
문수사리보살이 보래에게 물었다.
“모든 음성은 변화와 같고 지은 법이 생각할 수 없음도 또한 다함이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무엇으로써 해탈해야 합니까?”
보래가 대답하였다.
“아홉 가지 법의 보배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이 처소가 없는 것도 또한 변화와 같은 것이고,
둘째는 모든 법이 처소가 없는 것도 변화와 같은 것이며,
셋째는 당래(當來)에 처소가 없는 것도 변화와 같은 것이고,
넷째는 모든 물질세계의 처소도 변화와 같은 것이며,
다섯째는 과거의 처소도 또한 변화와 같다고 보는 것이고,
여섯째는 모든 법을 보되 허깨비와 같다고 볼 뿐이지만 그 또한 처소가 없음도 변화와 같은 것이며,
일곱째는 보는 처소가 없음도 또한 변화와 같은 것이고,
여덟째는 도를 증득하여 벗어날 곳이 없는 것도 변화와 같은 것이며,
아홉째는 본래 머무는 처소가 없는 니원을 증득한 것도 변화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홉 가지 법으로서 해탈의 지혜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문수가 또 물었다.
“니원에 이른 것도 모두가 자연이라면 무엇이 이 변화의 근본이 되며,
또 무엇이 이 변화의 주인입니까?
변화는 근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변화가 일어난 처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도에는 처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보래가 대답하였다.
“아홉 가지 법이 있어서 변화에 처소가 없음을 압니다.
첫째는 도 아닌 것이 처소가 없나니 이것이 곧 변화이고,
둘째는 변화엔 처소도 없고 생각도 없나니 이것이 그 변화며,
셋째는 변화로 된 것은 일어나는 것도 없고 변화한 곳엔 처소도 없나니 이것이 곧 변화이고,
넷째는 항상하는 이름도 아니요 다할 때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변화이며,
다섯째는 변화하는 처소는 처소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변화이고,
여섯째는 도에는 생각이 없나니 이것이 곧 변화이며,
일곱째는 변화가 일어난 것에는 일어남도 없나니 이것이 곧 변화이고,
여덟째는 변화한 것이 모든 욕망에 대하여 아무 처소도 없나니 이것이 곧 변화이며,
아홉째는 변화한 것은 제도한 것에 대하여 처소가 없나니 이것이 곧 변화입니다.
이것이 아홉 가지 법으로서 변화의 근본을 아는 것입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시방엔 변화한 것이 없나니
변화하고 변화함에 아무 형상이 없다네.
일체 것은 항상함이 없는 보배이니
그런 까닭에 변화의 주인이라 한다네.
도라는 것은 변화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 처소를 여의는 것도 아니라네.
말씀하신 바는 항상 존재하는 형상도 없고
자연(自然) 그 처소에 있는 것이라 하네.
모든 보배는 변화를 좇아 얻는 것이기에
근본을 여의고 무유(無有)를 따라야 한다네.
그 근본도 똑같은 변화로 생겨나나니
그런 까닭에 인중존(人中尊)이라 부르네.
탐욕은 변화를 따라 일어나지만
법에는 본래 이런 것이 없다네.
변화해서 다섯 갈래 세계에 머물지만
변화에서는 주인을 볼 수 없다네.
다섯 갈래 세계에서 나고 죽음은
변화와는 서로 상관하지 않네.
세간의 탐욕을 끊지 못하니
그러므로 정각께서 나타나셨네.
여래와 변화의 주인은
시방세계에 높기가 그지없네.
변화를 가져 세상에 크게 베풀지만
세간에 아는 사람이 없네.
법륜은 물질이 없이 구르는 것이고
변화에는 구르는 것마저 없다네.
물질에 얽매이면 고정관념이 생기니
심오한 법은 굴릴 것도 없다네.
생각과 물질로 시방세계를 교화하니
그 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베푸신 큰 지혜는
세간에선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네.
모두 아라한에 이르고자 하지만
이 보배를 깨닫지 못하네.
그런 까닭에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둘도 없는 보배를 자세히 말하였네.
지혜는 다함이 없으니
광명이 가장 커서 이만한 것이 없네.
시방세계의 다리가 되어
두 가지 법이 없음을 말하였네.
시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살고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평등하게 하였네.
또한 그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내어 다른 마음 있지 않게 하였네.
시방세계 모든 법 동산[法園]에 있는 사람들
일체 법으로 번뇌를 해탈케 했네.
또한 세간법을 따르지 않게 하여
법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네.
지혜에서 벗어남이 없게 하고
가고 오는 것도 보지 않게 하네.
고요한 데서 다시 고요함을 보고
밝음 가운데 또한 밝음을 보네.
법이란 지혜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 그대로여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네.
지혜와 어두움이 모두 한군데에 합하니
그런 까닭에 서로 간섭하지 않네.
어리석음과 지혜는 함께 합할 수 없으니
저 지혜로 많은 어둠을 밝히네.
베푸는 것은 다만 법뿐이니
높은 산에 꽃이 있는 것과 같다네.
모든 악함이 다함이 없고
색욕(色欲)도 다함이 없네.
니원과 생사도 그렇고
일체가 다 이와 같다네.
시방의 모든 부처님 지혜를
아는 사람도 없고 깨달은 사람도 없네.
그런 까닭에 깨끗한 법을 보셨나니
그러므로 세무유(世無有)라 말한다네.
담마보살이 다시 보래보살에게 물었다.
“변화에 일어남도 없고 여읨도 없다면 어떤 것이 주인이 됩니까?
니원은 나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섯 갈래 세계를 멀리하지도 않으니,
당래(當來)에 마음을 내어 법륜을 굴리고 머물러서 깨끗하고 모든 때가 없다면 일체 중생들은 누가 제도합니까?”
보래가 대답하였다.
“질문하신 말씀이 훌륭합니다.
일체 생사의 뿌리를 결단하고 싶으면 마침내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보살에겐 아홉 가지 법의 보배가 있습니다.
첫째는 변화에는 변화시킨 주인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니원과 생사에는 애당초부터 서로 앎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생사와 적멸에는 모두 멸함이 없는 것이고,
넷째는 일체 천상으로 하여금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고 생겨나는 곳이 없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마땅히 마음을 일으켰든지 아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든지 간에 여여(如如)한 처소에 머무는 것이고,
여섯째는 삼천대천 부처님의 국토를 관찰하지만 득도(得度)할 대상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며,
일곱째는 기억에 대하여 일어나는 곳이 없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삼천대천세계의 부처님 국토로 하여금 다 니원을 취하고도 마음으로 또한 기뻐하지 않게 하고 취하지 않고도 또한 성내지 않게 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법은 처소가 없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소원을 따라 아라한을 취하기를 원하면 나는 그들로 하여금 모두 마음을 말하게 하여 만약 마음을 내어 소원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모든 생(生)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고 소원하는 것에 되돌아감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홉 가지 법입니다.”
또 게송으로 말하였다.
가(可)에 대하여 불가(不可)함이 없고
욕망에 대하여 욕망할 것도 없네.
제도할 바에 볼 것이 없으며
법륜에도 항상한 처소가 없다네.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말한 바 없고
해탈[度]로 인하여 가는 것도 없다네.
그런 까닭에 크고 바른 법을 보았나니
세간에 제일가는 무유(無有)라네.
도라는 것엔 항상한 이름이 없나니
그런 까닭에 시방세계의 보배라네.
얻었거나 얻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고 죽음에 도가 없다네.
사마(四馬)가 다함이 없나니
뜻에 가한 것도 만족함이 없다네.
세간에서 다 즐거워하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리라.
두려움이 생겨도 해탈하지 않고
두렵지 않아도 해탈함이 없다네.
나고 죽음을 마땅히 거명하여
그것을 세우면 다섯 갈래 세계가 되네.
보(報)는 있고 답(答)은 없는 것을
옳은 법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법에는 본래 두 가지가 없으니
존재의 진리 깨달았기 때문일세.
가장자리도 없고 또한 중앙도 없으며
다함도 없고 헤아려서도 안 되네.
본제(本際)는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아서
가고 옴이 없는 것이라네.
일어난 것에도 일어난 것이 없고
법에도 모든 욕망이 없다네.
나고 죽음에 본래 처소가 없으니
생사와 변화 이와 같다네.
깨끗한 것에도 깨끗함이 없고
더러운 것에도 더러움이 없다네.
모든 시방세계 사람들을 위하여
다섯 갈래 세계로 모두 끊어 없앴네.
깨끗한 마음은 물과 같아서
일체의 더러운 때가 없으니
푸르고 누런 것과 희고 검은 것
그 형상을 모두 볼 수 있다네.
모든 법에는 번뇌가 없으니
곧 무상(無上)의 보배를 얻으리라.
나라는 것과 남이라는 것을
세간에선 얻을 것이 없다네.
머무름 없는 진리에도 머물지 않으니
소유(所有)의 진리가 이와 같다네.
깨달음이라는 것에 볼 것도 없으니
세간의 진리가 이와 같다네.
제도할 것도 없고 제도하지 않을 것도 없으면
세시(世時)에 어느 것인들 존재함이 아니리라.
시방에 바른 깨달음을 건립하면
모두가 무상보(無上寶)를 얻으리라.
담마보살이 보래보살에게 물었다.
“시방세계 여러 하늘의 인민들로 하여금 자연히 그 처소와 같음을 증득하게 하려면 마땅히 어떤 등류의 법을 수행하여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보래가 대답하였다.
“여섯 가지 일이 있어서 이 법을 체득할 수 있으니,
첫째는 이 법회가 있는 때를 듣고 아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보배가 되고,
둘째는 이 경을 들었으니 이것이 곧 그 보배가 되며,
셋째는 본래의 공덕에 미쳤으니 이것이 곧 그 보배가 되고,
넷째는 이 경법(經法)을 들은 사람은 모두 육만삼매를 증득하나니 이것이 곧 보배가 되며,
다섯째는 이미 육만삼매를 얻고서는 시방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무상의(無上意)를 내게 하려고 하나니 이것이 곧 그 보배가 되고,
여섯째는 시방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리수 아래 모이게 하나니 이것이 곧 그 보배가 됩니다.”
이 경전을 말씀하실 때에 90억 보살들과 60억 여러 하늘의 인민들이 무소종생법(無所從生法)의 처소를 얻었으며,
9억이나 되는 보살이 이 삼매를 얻었고 삼천대천 부처님 국토가 여섯 가지로 반복해서 진동하였다.
모든 하늘이 공중에서 크게 기악(伎樂)을 연주하였고 모든 용과 아수륜(阿須倫)들이 다 이 심오한 삼매를 듣고 보았다.
아난이 의복을 바로잡고 꿇어앉아서[長跪]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경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며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을 무극보(無極寶)라 하고서 마땅히 그것을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자 여러 천인과 아수륜과 인비인(人非人)들이 모두 환희하면서 각각 부처님의 앞에서 예를 올리고 떠나갔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9/13 |
수행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경전 자체에서 불생불멸을 제시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결코 죽지 않고 단지 사라질 뿐이다. 그런데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 같던 연구원들이 그간 오랫동안 행방불명 상태로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말을 만들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단지 행방만 묘연하게 될 뿐이다.
1 단락 고비를 넘기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이 말끔히 해결되면 곧 복귀할 수 있으리라 한다. mun 님은 현업에서 일단 공식적으로 은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만간 곧 연구에 복귀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 가운데 본인은 이번에 mun님과 함께 대략 전국 14 곳 정도의 사찰을 보고 왔다. 본인은 여행을 떠날 생각이나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mun 님이 자신이 은퇴 기념으로 전국사찰 순례를 떠나니 옆 빈자리에 몸만 실으면 된다고 해 동참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위해 숙왕화님은 자동차까지 빌려주었다. 그래서 자동차, 교통비, 숙박비, 사찰입장료, 식비 일체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여행을 다녔다. 그래서 여행 다니는 전반이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물들게 된다. 여행 중 태풍들로 인해 곳곳에서 비를 많이 만났다. 경주에서는 2번째 태풍이 마침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내 일정은 취소하게 되었다. 경주 지역에 사찰이 많은데 아쉽다. 그리고 일정을 바꾸어서 양산 통도사쪽으로 갔다. 이후 창녕 우포 늪도 들렀었다. 그런데 태풍이 지나간 직후여서 우포늪은 폐쇄되었다. 그래서 바깥쪽 길만 거닐고 돌아 왔다. 여행 도중 차를 탈 때마다 비를 많이 만났다. 다만, 차를 내려 사찰 순례할 때마다 비가 그쳐 문제는 없었다. 단지 딱 한번 mun 님이 합천에서 길상암을 올라가는 도중 잠깐 번개를 한번 맞았을 뿐이다. 이후로는 날씨가 좋아도 갑자기 비를 맞을 지 몰라 우산을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법주사 근처에서 결국 들고 다니던 우산을 분실했다. 한편 본인 카메라 렌즈 캡이 하나 깨뜨려졌다. 돌아와서 프라스틱 조각을 덧대 수리해 사용할까 아니면 인터넷에서 5000 원 정도하니 그냥 구매해 사용할까 고민 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총 9000 원 정도 비용으로 전국 사찰 순례를 다녀온 셈이다. 이번 전국 사찰 순례시 촬영한 사진이 대략 3000 장 정도가 된다. 이것을 다시 대략 14 방식을 골라 변형처리하게 된다., 그리고 블로그 사이트에 올려 놓고 앞으로 기존 사찰 사진과 함께 랜덤 추출해 사용할 예정이다. 그간 오랫동안 연구소에 갇혀 지냈다. 코로나 영향도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하루에 1번씩은 핑계를 만들어 1시간씩이라도 거리를 거닐어야겠다. 시간을 내 거리를 거닐면 기분전환도 되고 건강에도 좋다. 그리고 무엇이던지 쉬엄 쉬엄 할 때 오히려 더 오래 잘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활동도 보리심을 바탕으로 서원의 성취과정이라고 갖다 붙이면 역시 연구과정에 넣을 수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사찰 순례시에는 다라니 몇 구절 밖에는 외우기 힘들다. 그래도 사찰에서 부처님과 스님모습을 보게 되면 수행에 도움이 된다. 한편 여행에는 교통비, 숙박비 등이 들게 마련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경우 전체 비용을 1/n 로 분담하게 된다. 그런 경우 혼자 부담해야 할 경비보다는 적을 수 있다. 그러나 그래보았자, 분담으로 줄어드는 비용만큼만 수익을 얻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그냥 베푸는 형식으로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여행 전체의 분위기나 의미도 달라지게 된다. 처음 분담 형태는 풍광을 단지 비용을 적게 들여 구경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뒷 형태는 여행중 만나는 풍광까지 포함해 베풀어 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수행의 기본 실천행위인 보시행위가 된다. 그러면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무량한 공덕을 얻게끔 된다. 설령 비용을 분담하는 경우에도 형식을 바꾸어 서로간에 상호 보시하는 형태로 갖다 붙이면 마찬가지가 된다. 일반적으로 행하는 1/n 분담형식은 전체 경비에서 각자 몫을 계산해 자신 몫만 부담한다. 그런데 이 경우 서로간에 다른 이의 1/n 몫을 서로 베풀겠다고 임하면 실질 내용은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는 아귀 형태의 분담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 형태의 상호 베품이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 과보도 달라지게 된다. 이런 비유가 있다. 지옥이나 하늘이나 재료나 상태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팔이 굽혀지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그런 상태로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기 위해 애쓰지만 고통만 받는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그런 상태로 서로 상대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어서 서로 평안하게 지낸다. 따라서 실질 재료와 상태가 같아도 임하는 자세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임하는 1/n 분담형태는 외관상 공평해 보인다. 그런데 이후 가격에 초점을 맞추고 매사에 서로 계산으로 임하기 쉽다. 함께 같은 곳을 방문하고 음식을 함께 주문해 먹어도 그것이 누구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준 것인가를 놓고 다투기도 쉽다. 어떤 이는 보고 싶지 않은 곳에서 먹기 싫은 음식을 어쩔 수 없이 먹고 비용만 같이 부담했다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서로 이익을 얻었다해도 매사에 장삿꾼처럼 계산으로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는 거래행위를 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서로가 거래행위로 이익을 제각각 얻게 되었다해도 계산을 통해 거래를 통해 이익을 얻었기에 서로에게 공덕이 남지 않게 된다. 이는 예를 들어 어떤 좋은 물건을 싸게 구입한 경우와 같다. 그 물건이 구매자에게 이후 많은 편익과 좋음을 줄 수 있다. 그렇다해도 정작 그 물건을 싸게 판 상대에게는 큰 공덕이 생기지 않는다. 여하튼 서로 계산해 값을 치루고 거래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이 설령 이와 같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보시하고 베푸는 형태라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쪽은 좋은 물건을 그냥 베풀어 건넨다. 그리고 또 한쪽은 그와 관련없이 상대에게 또 다른 좋음을 베푼다.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경우다. 그러면 각각 행한 그런 업은 조건없이 좋음을 다른 이에게 베푸는 보시행위가 된다. 그래서 이 작은 하나의 행위는 이후 무량한 공덕을 얻게 한다. 이번 여행 기간 mun님이 기름값, 사찰입장료, 음식비, 숙박비 일체를 mun 님이 매 경우 카드로 모두 결제를 했다. 그런 결과 여행비을 결산해 보면 본인은 9000 원의 비용만으로 전국사찰 여행을 하였다고 보고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실질적으로는 본인도 1/n 에 해당하는 비용을 현금으로 지출하게 된다. 또 현금 지출 액외로도 본인이 서둘러 마쳐야 할 작업이 여행으로 10 일이상 미뤄진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다르기에 회계 처리하는 항목이 다른 것 뿐이다. 그래서 여행 경비 지출비용은 9000 원만 올려지게 된다. 그런 결과 여행시 대한 풍광과 사건들의 의미도 다 함께 다른 항목으로 올려지게 된다. 이는 결국 일상 생활의 모든 것을 보리심과 서원 성취 과정에 모두 갖다 붙이는 방식과 마찬가지다. 이런 방식은 화엄경 정행품에서 문수보살님이 알려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평소 생활에서 잘 응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회생활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을 위처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추 친한 경우에도 행하기 힘들다. 거리에서 마켓에 들러 빵 하나만 구하려고 해도 거래를 해야 구할 수 있다. 앞 방식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 무량한 공덕을 얻는 것도 극히 힘들다. 그렇다고 세상만 한탄하면 곤란하다. 이런 경우에도 자신이 먼저 행하면 된다. 그런데 외관은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그 실질을 그처럼 관하고 현실 거래에 임하는 것도 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다. 거리에 자신이 전혀 필요하지 않는 물건을 놓고 파는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상대가 심하게 궁핍해보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상대에게 무언가를 베풀고자 한다. 그런데 상대는 결코 거저 받지는 않으려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거래를 하는 경우는 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이 베풀려는 취지로 거래를 하는 것도 한 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현실에서 이뤄지는 일체의 거래행위를 관하고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또 일체의 거래행위의 의미가 그렇게 바뀌게 된다. 물론 거래시에는 자신 뿐 아니라 상대도 역시 그만한 이익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 의미가 수행으로 바뀌는 것은 서로가 각기 그런 의식을 갖고 행하는 경우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수행마저도 거꾸로 거래행위로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사찰을 방문해 부처님앞에 공양을 올린다고 하자. 이 경우 자신이 공양을 올렸으니 부처님이 자신에게 복을 줄 것이다. 이런 의식을 갖고 보시함에 돈을 넣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수행행위를 한 것처럼 외관상 보인다. 그러나 그 실질은 장삿꾼의 거래가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공덕이 쌓이지 않게 된다. 자신이 그런 생각으로 만원을 보시함에 넣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사실은 만원에 해당한 물건만 받을 것을 기대해야 옳다. 그런데 부처님에게 온갖 소원을 성취해달라거나 치료가 불가능한 질환을 고쳐달라고 소원을 갖기 쉽다. 그것은 엉터리 장사꾼이 기대하는 거래행위다. 그런 일은 기대하기 힘들다. 또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런 생각을 갖지 않고 보시함에 단돈 천원을 넣었다면 그렇다. 그래서 이 차이를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왜 공덕이 되어 복덕을 받게 되고 어떤 경우는 왜 그렇지 않은가. 쉽게 생각하면 흥보와 놀보의 차이와 같다. 제비가 다리가 다쳤다. 흥보도 다리를 고쳐주고 놀보도 고쳐준다. 그런데 흥보는 단지 제비가 안타까워서 고통을 없애주러는 뜻에서 고쳐준 것이다. 그러나 놀보는 그렇게 하면 복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한 것뿐이다. 그래서 그 행위에 담기는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 그 행위가 갖는 셩걱도 달라진다. 놀보가 한 행위는 결국 장래 얻을 이익을 기대하고 거래를 한 것과 실질이 같다. 흥보가 복을 받는 것은 그 행위 성격이 선업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복을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이익을 주고자, 즐겁게 잘 그런 행위를 한 것이다. 그래서 행위에 담긴 이 의미 차이를 잘 구별해야 한다. 외관상 같아 보이는 행위를 해도 그 과보가 달라지는 사정이다. 본인이 여행 중 우산을 분실한 사정도 잘 살펴보면 마찬가지다. 사찰에 들르는데 주차비를 따로 받는다. 그래서 본인이 그냥 도로 길가 빈 곳에 주차하고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4000 원 정도를 절약했다. 그래서 사찰 관람을 잘 하고 나왔다. 그런데 결국 우산을 분실한 것이다. 알고보면 같다. 그런데 그 각 행위나 과보에 담기는 성격이 다르다. 이런 사례도 있다. mun 님이 마시려 한 음료수를 잠깐 내게 맡겼다. 들고 다니다가 무거워서, 사찰에서 일보는 할머니 옆에 살짝 놓고 왔다. 그런데 한참 후에 mun 님이 떡을 받았다고 자랑을 한다. 사정을 들어보니 한 할머니가 자신에게 떡을 건넸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마시려한 음료수가 할머니 옆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음료수가 특이해서 쉽게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웃음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mun 님이 가방이 없어서인지 또 자신이 들고 다니던 책자와 떡을 내게 맡긴다. 그러쟎아도 무거운 상태라 다시 떡을 지나가는 다른 분에게 건넸다. 책자도 적당한 곳에 두고 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앞과 같은 좋은 일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처음 경우와 달라서라고 본다. 그리고 이번에는 mun 님도 식사대신 먹을 떡까지 왜 없앴냐고 항의조로 묻는다. 그리고 자신이 볼 책자들까지 없앴냐고 불평을 한다. 그런데 대신 좋아진 점이 이후 생겼다. 가방이 없다고 자신의 물건을 대신 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런데 보시도 성격이 다르다.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는 보시가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그런 보시를 한다고 의식하고 행하는 보시도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일정한 좋은 과보를 받으리라고 계산하며 행하는 보시도 있다. 또 보시한 후에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또 이와는 달리 남의 물건인데 그 다른 이가 복덕을 받으라고 대신 행해주는 사무관리형 보시도 있다. 또는 남의 물건인데 함부로 자신이 행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물건이라고 상을 취하지 않고 행하는 보시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마다 그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그 성격따라 받는 과보도 다르다. 그 중에는 공덕을 전혀 받지 못하고 반대로 화를 당하는 보시도 있다. 상대가 불쾌감을 받는 형태로 행하는 보시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 복덕을 받지만 그로 인해 이후 번뇌가 증폭되게 되는 보시도 있다[유루복] 그래서 수행의 가장 기초항목인 보시 하나만 원만히 성취하려고 해도 살펴야 항목이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 무량한 공덕을 받게 되는 보시 형태가 따로 있다. 상에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가운데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좋음을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가 그에 해당한다. 이것이 곧 취함도 없고 그렇다고 버림도 없이 행하는 수행이 된다. 취사가 없이 행하는 보시다. 상을 취함도 없고 그렇다고 생사현실의 내용을 버림도 없이 행하는 경우다. 그 내용이 『무극보삼매경』에서도 그처럼 제시되고 있다. ... 그 가운데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그 위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며, 떠남을 해탈한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에서 떠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작용하는 것에서 영원히 작용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작용으로 일으키는 것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허깨비로써 허깨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 『무극보삼매경』 하권, K0170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9/2564-09-13-k0170-002.html#1208 sfed--무극보삼매경_K0170_T0636.txt ☞하권 sfd8--불교단상_2564_09.txt ☞◆vapi1208 불기2564-09-13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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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mātaṅga 작악업(作惡業)이라 번역. 인도의 하층 계급으로 전타라(旃陀羅)와 같은 지위. 길거리를 청소하는 등 비천한 직업을 가진 남자의 통칭. 여자는 마등기(摩登祇). ⇒<유사어>마등기<참조어>마등기(摩登祇)
답 후보
● 마등가(摩登伽)
마하살(摩訶薩)
만(卍)
만달라(漫怛摞)
말리부인(末利夫人)
멸과(滅果)
멸상(滅相)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무극보삼매경_K0170_T063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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