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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9-30_출요경-K0982-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기2564-09-30_출요경-K0982-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9. 30. 10:51



®


『출요경』
K0982
T0212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출요경』 ♣0982-001♧
제1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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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요경(出曜經) 제1권

요진(姚秦) 양주(凉州) 사문 축불념(竺佛念) 한역

1. 무상품(無常品) ①

옛날 부처님께서는 바라날국(波羅捺國)1)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미래 세상의 중생들은 그 수명이 8만 4천 세가 될 것이다. 
그때의 그 중생들은 이 염부리(閻浮利)2) 안에서 함께 살게 될 것이니, 
곡식은 풍성하고 백성들은 번성하여서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다 같이 듣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때의 백성들은 여자 나이 5백 세가 되어서야 시집을 갈 것이다.
그때에 상가(蠰佉)라는 왕이 있을 것이니, 
7보(寶)를 지니고 법으로써 다스리매 어긋남이 없으리라. 
또 그는 우보(羽寶)의 수레를 타고 다니는데, 
그 높이가 1천 주(肘)에 너비는 16주로서 온갖 보배와 영락(瓔珞)으로 장엄된 것이다.
그는 대중 가운데서 보시를 하되, 
아끼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없으며 공덕을 지어서 대중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이나 도를 얻은 이들이 멀리 가거나, 
머무르거나 지나갈 때에는 거처할 곳을 다 제공할 것이며, 
그들의 구함이 있으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중생의 수명이 8만 4천 세가 될 그때에 여래가 세상에 출현할 것이니, 
그 명호(名號)는 미륵(彌勒) 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明行成)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 내가 위없이 바르고 참된 정등각을 이루어 10호(號)를 완전히 갖춘 것과 같을 것이다. 
또 그는 항상 무수한 백천 비구들을 보호할 것이니, 
그것은 마치 지금 내가 무수한 백천의 비구와 대중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 그는 대중을 위해 깊은 법을 널리 설할 것이니, 
그 법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고 이치와 맛이 미묘하며, 
청정함을 완전히 갖추어서 범행을 닦게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 내가 대중을 위해 깊은 법을 널리 설할 때에 그 법이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고 이치와 맛이 미묘하며 청정함을 완전히 갖추어서 범행을 닦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서 부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다.)
『육경낙도(六更樂道)』라는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그곳에 태어나면, 
눈으로 색을 보아도 좋은 색만을 보고 나쁜 색은 보지 않으며, 
사랑스런 것만을 보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보지 않으며, 
공경할 만한 것만을 보고 공경할 만하지 않은 것은 보지 않으며, 
생각할 만한 것만을 보고 생각할 만하지 않은 것은 보지 않으며, 
아름다운 색만을 보고 아름답지 않은 색은 보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중생이 귀로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촉감을 느끼거나 뜻으로 법을 분별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제석천[天帝]까지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비사리(毘舍離)3)의 미후지(獼猴池) 옆에 있는 대강당(大講堂)에 계셨다.
많은 비사리의 소년들은 각기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들은 마땅히 모두 모여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문안을 드려야 한다.’
그 중의 한 소년은 푸른 말을 탔는데 일산[蓋]과 옷도 모두 푸르렀다. 
혹 누렇거나 붉거나 흰색의 말을 탄 소년은 그 의복이 다 흰색이었다.
그들은 종을 치고 북을 울리며 흥겨운 가락 속에 앞뒤로 줄을 지어서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갔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천인[天]들이 뒷동산이나 연못에 놀러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이가 있다면, 
지금 저 동자들을 보아라. 
왜냐 하면, 
저들이 입고 있는 법복(法服)이나 타고 있는 수레들은 천인들의 것과 다름이 없으니, 
천인들이 입고 있는 옷과 이것과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수백천의 중생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는 마땅히 진실로 참된 서원을 세우자. 
그래서 다음 생(生)에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면, 
언제나 저런 법복을 입어 영원히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또 미래 세상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면, 
그 깊고 심오한 법문을 들어서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 열반에 들게 하겠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마음으로 3유(有)4)에 나기를 구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아시고, 
곧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1
모든 행은 덧없으니
닳아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은 의지할 수 없으니
변하고 바뀌어 머무르지 않는다.

그때에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중생들은 이 한 구절의 게송을 듣고 현재에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려서 모두 도(道)의 과(果)를 얻었다.
옛날에 바라문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통을 얻었기 때문에 능히 하늘을 날 수 있어서 신족(神足)이 걸림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맛난 음식을 구담(瞿曇) 사문께 보시하고는 천상에 나서 복된 곳을 떠나지 않게 되고, 
또 어떤 이는 그 법을 듣고 해탈문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늘 복을 탐하지만 해탈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법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달고 맛있는 석밀(石蜜) 네 개씩을 가지고 가서 한 사람이 먼저 부처님께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그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모든 행은 덧없으니

그는 이 게송을 듣자 곧 손으로 귀를 가렸다.
이어 두 번째 사람이 부처님께 나아가 석밀을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이른바 흥했다가 쇠퇴하는 법이니라.

그도 이 게송을 듣자 곧 손으로 귀를 가렸다.
이어 세 번째 사람이 부처님께 나아가 석밀을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무릇 났다가 곧 사라지니

그도 이 게송을 듣자 곧 손으로 귀를 가렸다. 
이어 네 번째 사람이 부처님께 나아가 석밀을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다.

그도 이 게송을 듣자 손으로 귀를 가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부처님을 두고 제각기 떠나 버렸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마땅히 제도받을 수 있음을 아셨다. 
그래서 방편으로 몸을 숨기어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들 네 사람은 모두 한곳에 모여 서로 말하였다.
“우리는 구담 사문께 보시하였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앞서 먼저 간 사람에게 물었다.
“석밀을 올릴 때 무슨 말씀이 있었느냐? 
또는 법을 듣지 않았느냐?”
“나는 부처님에게서 ‘모든 행은 덧없으니’라고 하신 한 구절의 이치를 들었다. 
그 이치를 듣고는 곧 손으로 귀를 가려서 더 듣지 않았다.”
이어 두 번째 사람에게 물었다.
“너는 부처님께 가서 어떤 말씀을 들었느냐?”
그는 상세히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께 나아가 석밀을 바칠 때,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이른바 흥했다가 쇠퇴하는 법이니라’라는 게송을 읊으셨다. 
나는 그것을 듣고 곧 손으로 귀를 가려서 더 듣지 않았다.”
이어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다.
“너는 부처님께 나아가 어떤 말씀을 들었느냐?”
그는 상세히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께 나아가 석밀을 바칠 때,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무릇 났다가 곧 사라지니’라고 하는 게송을 읊으셨다. 
나는 그것을 듣고 곧 손으로 귀를 가려서 더 듣지 않았다.”
이어 네 번째 사람에게 물었다.
“너는 부처님께 나아가 어떤 말씀을 들었느냐?”
“내가 부처님께 나아가 석밀을 바칠 때,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이 적멸이 즐거움이다’라는 게송을 들려 주셨다.”
그들은 각기 그 게송을 말하고는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려서 아나함(阿那含)5)의 도를 얻었다.
그때에 그 네 사람은 각기 자기가 도를 깨쳤음을 알고, 
지금까지의 자기들의 잘못을 한없이 자책하였다. 
그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 아래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 있다가 조금 뒤에 다시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이 그 도 안에서 사문이 되는 것을 허락하여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잘 왔다, 
비구들이여, 
범행을 잘 닦아라.”
그러자 그들의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고 입고 있던 옷이 변해서 가사가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서 이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려고 할 때에 대가섭(大迦葉)과 아나율(阿那律)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비구들은 나의 가르침을 잘 받들고 부처의 말을 공경하고 섬겨라. 
너희 두 비구는 바로 열반에 들지 말고, 
먼저 계경(契經)과 계율과 아비담(阿毘曇)6)과 보잡장(寶雜藏)을 집성한 뒤에 열반에 들어라.”
이와 같은 말씀이 있고 나서 사리(舍利) 공양을 열흘 만에 모두 마쳤다.
그들은 함께 모여 이 경전들을 집성하였으며 5백의 아라한들은 모두 다 해탈을 얻었다. 
그리하여 빠르고 예민한 근기와 온갖 덕을 갖춘 이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아난(阿難)을 위해 높은 사자좌(師子座)를 만들고 아난에게 청하여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아난이 자리에 올라앉자, 
그들은 아난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어느 곳에서 설법하셨습니까?”
아난이 곧 말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그러자 5백의 아라한은 모두 승상(繩床)에서 일어나 맨땅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우리는 직접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 아난님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소리를 내어 마주 보고 슬피 울었다.
이 때 가섭이 아난에게 말하였다.
“지금부터 비로소 깊이 감추어진 법이 드러날 것이오. 
항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말해야지, 
‘보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난이 이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바라날(波羅捺)의 선인(仙人)이 살던 녹야원(鹿野苑)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근본이다. 
이것은 일찍이 듣지도 못한 것이요, 
보지도 못하던 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전과 같다.)
그때에 비구들은 이미 경전을 다 집성하였다.
가섭 존자가 다시 아난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어느 곳에서 계율을 말씀하셨습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나는 부처님에게서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라열성(羅閱城)7)의 가란타죽원(伽蘭陀竹園)8)에 계셨습니다.
그때에 가란타(迦蘭陀)의 아들 수진나(須陳那)는 집을 떠나 도를 배워서 비구의 경계 안에 있었으나 최초로 계율을 범하여서 제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계율과 같다.)
가섭이 다시 아난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어느 곳에서 아비담(阿毘曇)을 말씀하셨습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나는 부처님에게서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비사리(毘舍離)의 미후지(獼猴池) 옆에 있는 보집강당(普集講堂)에 계셨습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발기자(拔耆子)의 내력을 보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두려움과 성내고 한탄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고 지옥에도 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아비담과 같다.)
그래서 초저녁에 아비담을 집성하고 새벽에 『출요경』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라.

무엇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세존ㆍ등정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대개 잠자는 이는 수명이 줄어들고 어리석고 미혹하여 마음을 해치기 때문에 도의 결과를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목숨을 마치고는 구제될 수가 없어서 밝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왜냐 하면, 
사람이 깨어 있으면 덕을 닦아 선의 근본을 지어 세울 수 있지만, 
잠에 빠져 있으면 이 법을 잃기 때문에 어리석고 미혹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어떤 중생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온갖 일을 생각하지만 잠자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잠만 자고 깨어 있지 않으면 그가 어떻게 도를 통하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잠을 없애고 항상 깨어 있기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게송에서 ‘잠에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디 기뻐하며 그 말씀을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뛸 듯이 기쁘고 즐거워서 선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기뻐하며 들은 것을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되, 
뜻을 굳게 하고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면, 
뜻이 고요하고 틀림이 없어서 능히 그것을 이어 받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출요(出曜)를 찬술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요’라고 말씀하신 것은 항하의 모래알 같은 과거의 부처님도 모두 이 출요의 이치를 찬탄하셨고, 
현재의 부처님도 가장 훌륭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불선법(不善法)을 이기고,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이기며, 
모든 생사의 속박을 이기고, 
외도(外道)인 니건자(尼乾子) 등의 아흔여섯 종류의 술수(術數)를 이길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나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연설이 유창하여 막힘이 없고, 
여러 천인들과 인간을 위해 널리 펴고 나타내어서 그 이치를 성취시켰기 때문에 ‘출요를 찬술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연설처럼 유창하여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2

부처님의 말씀은
일체에 통달하며
선인(仙人)은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의 한 몸은 남음이 없다.

“부처님의 말씀”이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의 연설은 유창하여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 것이다.
“일체에 통달하며”란 무슨 뜻인가?
일체의 지혜를 통달하여 일체를 나타내 보이고 일체를 환히 알며 일체의 이치를 분별하는 것이다. 
또한 6신통(神通)을 부리고 위없는 도를 이루었으므로 여래의 신통은 저 아라한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제도 중에서 부처님의 제도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제일이며 모든 법의 모양을 모두 분별하신다. 
그러므로 “일체에 통달하며”라고 하신 것이다.
“선인은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란 무슨 뜻인가?
그 마음은 중생들 일체의 생사에 충만하여서 중생들에게 바라는 것이, 
마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생각처럼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을 선인이라고도 하니, 
신통의 도를 닦은 이도 선인이라 하고, 
온갖 공덕을 완전히 갖춘 이도 선인이라 하며, 
오랫동안 선을 닦은 이도 선인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인은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라고 하신 것이다.
“그의 한 몸은 남음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몸이란, 
4대(大)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근본도 없고 또 끝도 없으며 또 태어남도 없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직접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아난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최후의 경계에 있어서 다시는 태(胎)를 받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받은 이 몸이 가장 최후니라. 
아난이여, 
나는 천지의 방위와 경계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다시 이런 몸을 받더라도 그것은 괴로움의 끝이다.”
그러므로 “그의 한 몸은 남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3

모든 행은 덧없으니
이른바 흥했다가 쇠퇴하는 법이다.
무릇 났다가 곧 사라지니
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다.

옛날 여러 범지(梵志)들은 자신들의 스승의 법에 따라 두 파로 나뉘었는데, 
한 파는 만물은 모두 있는 것이라 하였고, 
또 한 파는 만물은 모두 없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 ‘있다’고 하는 이들을 분별하여 그 의심을 버리고 미련이 없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모든 행은 덧없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날카로운 바퀴와 칼로써
중생들을 죽이더라도
언제나 보시를 행할 줄 알면
거기에는 그 어떤 선악도 없다.

몸은 죽어도 정신은 변치 않으니
이 몸뚱이 구석구석을
날카로운 칼날이 오고 가더라도
그 목숨만은 해치지 못한다.

지(地)의 요소는 일정하고
풍(風)의 요소는 머무름이 없다.
이들9)도 괴로움과 즐거움을 누리니
목숨의 근본도 또한 그렇다.

비록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거침없이 다니며 해치더라도
선악의 과보가 있음을
또한 보지 못하였다.

비록 그 부모를 해치더라도
선악의 과보가 없으니
하물며 그 외의 사람들에게
무슨 과보가 있겠는가.

그들은 생각하길, 
‘마치 병에 새를 잡아 넣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병을 부수면 새가 곧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중생이 죽더라도 그 목숨은 멀리 날아가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삿된 소견을 없애기 위하여 “모든 행은 덧없으니 의지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모든 것은 자꾸 변하여 머무르지 않고 닳아 없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의 목숨은 아침 이슬과 같아서 잠깐 있다가 어느새 없어지므로 “모든 행은 덧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또 한 파의 사람들은 말하길, 
“우리 주장이 성취되었다”라고 하며 서로 기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른바 흥했다가 쇠퇴하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흥했다가 쇠퇴하는 법”이란 무슨 뜻인가?
대개 성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 
몸이 없으면 상관없지만 몸을 받고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범지들은 다시 생각하길, 
‘비록 쇠퇴하여 없어지는 법이라 하더라도 다시 생기지 않으면 우리 주장이 성취된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거듭 그 이치를 말씀하시기를, 
“무릇 났다가 곧 사라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수레바퀴처럼 생사에 헤매는 중생들은 모두 5음(陰)10)을 받아서 서로 같은 모양의 몸을 받으니, 
그것은 지혜의 눈이라야 관찰하여 분별할 수 있다.
마치 햇빛에 티끌이 흘러 다니면 그것을 셀 수 없는 것처럼, 
5음으로 된 몸이 온갖 행의 핍박을 받으며 생과 사를 되풀이하되, 
잠깐도 쉬지 않기 때문에 “무릇 났다가 곧 사라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적멸이 즐거움이다”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번뇌가 다하여 남음이 없기 때문에 욕심을 내거나 집착하는 뜻이 없고 언제나 편안하고 안락하여서 가장 즐거운 것이다. 
나고 사라지는 생각이 없이 제일의 이치를 성취하여서 욕심이 없는 즐거움, 
무위(無爲)의 즐거움, 
번뇌가 없는 즐거움, 
번뇌가 다한 즐거움, 
모든 것이 사라진 즐거움이기 때문에 “이 적멸이 즐거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웃는가.
생각은 항상 불타 오르고
어둠에 깊이 묻혀 있는데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공양을 마치고 해질녘이 되자, 
여러 비구들과 임금, 
신하, 
백성 등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부처님의 감로법(甘露法)을 들으려 하였다.
그때에 다른 지방의 도사(道士)와 외도의 바라문 일곱 사람이 하얀 머리와 수염에 지팡이를 짚은 채 숨을 몰아 쉬면서 부처님께 나아갔다. 
그들은 땅에 엎드려 발 아래에 예배한 다음 합장하고 말씀을 드렸다.
“저희들은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거룩한 교화를 엎드려 받들고 있었습니다. 
진작 귀의하여야 옳았지만, 
도술에 구별이 있어서 이제야 거룩한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제자가 되어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자 하나이다.”
부처님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모두 사문으로 만드신 다음 그 일곱 비구들로 하여금 한방에 같이 있게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부처님을 뵙고 도를 닦게 되었지만, 
덧없이 변하는 법에 대해서는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한방에 같이 앉아 세상 일을 생각하며 소곤거리기도 하고 크게 웃기도 하면서 일의 성패(成敗)와 목숨을 날로 재촉하여 사람과 기약하지 않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희롱해 웃으며 자만심으로 나태해져서 덧없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일어나 그 방으로 가셔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도를 닦는 것은 세상을 제도할 무위(無爲)의 도를 구하는 데 있는데, 
어찌하여 웃고 떠들기만 하느냐?
모든 중생들은 다섯 가지를 믿는다. 
그 다섯이란, 
첫째는 젊음을 믿으며, 
둘째는 아름다움을 믿고, 
셋째는 세력을 믿으며, 
넷째는 재주를 믿고, 
다섯째는 귀한 종족임을 믿는 것이다. 
지금 그대들은 소곤거리기도 하고 크게 웃기도 하였는데, 
대체 그대들은 무엇을 믿는가?”
부처님께서는 곧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웃는가.
생각은 항상 불타 오르고
어둠에 깊이 묻혀 있는데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웃는가”란 무슨 뜻인가?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그 일곱 바라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도의 경계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역시 수다원(須陀洹),11) 사다함(斯陀含),12)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도 되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번뇌를 없애지 못하면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고 가르쳐 주었다. 
너희들은 몸을 받아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사와 같이 있으면서 5음을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가운데서 소곤거리며 크게 웃을 수 있느냐? 
부디 그 괴로움은 영원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그런데 실없는 웃음으로써 번뇌를 짓는구나. 
괴롭도다. 
깨닫기 어려운 사람들이 바로 그대들이구나.”
그러므로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웃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생각은 항상 불타 오르고”란 무슨 뜻인가?
무엇이 불타 오르고 있는가? 
덧없음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고, 
괴로움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며, 
근심 걱정과 고뇌의 불길이 타 오르고 있다. 
또 무엇으로써 불타 오르고 있는 것을 보는가? 
애욕, 
분노, 
어리석음, 
교만, 
질투, 
의심으로 불타 오르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생각은 항상 불타 오르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둠에 깊이 묻혀 있는데”란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이 밤에 다니면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나면서부터 장님이 되어 하늘 빛과 땅 빛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그런 어둠도 있지만 그것은 말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른바 큰 어둠이란 무명(無明)으로서, 
사람의 온몸을 두루 속박하는데 조금의 빈틈이나 허술함도 없다. 
이 큰 어둠은 중생들을 가려서 중생들이 선악의 중요한 근본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시시비비의 속박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道)와 세속적인 법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며, 
역시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어둠에 깊이 묻혀 있는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란 무슨 뜻인가?
등불이란, 
지혜의 등불이니, 
지혜의 등불로써 무엇을 비추는가? 
대답한다면, 
번뇌의 일어나는 원인과 도로써 그것을 멸하는 법을 알고, 
선취와 악취에서 벗어나는 근본을 분별하며, 
시시비비의 속박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와 세속적인 법을 분별하고, 
역시 선취와 악취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잘 분별하는 것이니, 
즉 모든 법을 비추지 않는 곳 없이 두루 밝게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어둠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에,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이 몸뚱이의 모든 기관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때
해골은 비둘기 빛깔 같으니
거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랴.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어떤 비구가 날마다 성 밖 넓은 들판의 무덤 샛길에 있는 남의 밭을 밟고 지나다녔다. 
밭 주인은 그것을 보고 화가 나서, 
‘저 도사는 도는 닦지 않고 날마다 여기를 왔다갔다하는가’라고 생각하고, 
그 도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걸사(乞士)길래, 
나의 밭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발자국을 내십니까?”
도인은 대답하였다.
“나는 송사(訟事)가 있어서 여기 와서 증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때 밭 주인은 전생의 인연에 끌려 제도를 받을 인연이 되었다. 
그는 가만히 도인을 쫓아가서 황량한 무덤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보았다. 
심하게 부어 오르거나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날짐승들이 먹다가 다른 곳에 흩어 놓거나, 
혹은 먹다가 남기기도 하였고, 
또한 비둘기나 구더기 같은 것이 파먹어서 역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할 수 없었으며, 
까마귀, 
까치, 
여우, 
개, 
독수리, 
솔개, 
부엉이 따위들도 시체를 파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구가 손을 들고 그에게 말하였다.
“이 짐승들이 모두 나의 증인입니다.”
그는 물었다.
“그 짐승들이 증인이라면, 
당신은 지금 비구인데 누구와 송사를 하는 것입니까?”
비구는 대답하였다.
“나는 마음의 병이 되어 온갖 번뇌와 근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해골들을 보면 오로(惡露)13)를 분별하게 됩니다. 
곧 내 방으로 돌아가 내 몸을 관찰하면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저 해골들과 다름이 없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끝간 데 없이 흩어져 하나의 허깨비인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 따위를 쫓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마음의 근본에 대해 경계합니다. 
즉,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나를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 빠지게 하지 말아라’라고 말입니다.
나는 지금 범부로서 모든 속박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의 도적은 내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 광야에 와서 마음을 위해, 
불결한 오로(惡露)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거듭 마음을 위해 설명하지만, 
마음은 경솔하고 사나우며 혼란스러워서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고쳐서 다시는 나쁜 인연을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밭 주인은 이 도인의 말을 듣고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흐느끼고 한숨지었다.
그런데 그 밭 주인은 이미 가섭불(迦葉佛) 때의 만 년 동안에, 
“이 몸은 더럽다”는 관(觀)을 닦다가 이내 서른여섯 가지 오로의 더러움을 분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비구와 밭 주인은 그 광야의 두려운 무덤 사이에서 수다원(須陀洹)의 도를 얻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티없이 맑은 천안(天眼)으로 그 두 사람이 전생의 인연에 의해 도를 증득한 것을 보시고는, 
이후의 도를 닦는 이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미래 세상에 큰 광명을 보이며, 
바른 법이 오래도록 전하여 중간에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곧 스스로 찬탄하시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이 몸뚱이의 모든 기관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때
해골은 비둘기 빛깔 같으니
거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랴.14)

“이 몸뚱이의 모든 기관”이란 무슨 뜻인가?
즉, 
손, 
발, 
다리, 
팔, 
팔꿈치, 
허리, 
척추, 
장딴지, 
넓적다리, 
무릎, 
봉숭아뼈, 
발꿈치, 
두개골, 
사지의 뼈마디가 제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몸뚱이의 모든 기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때”란 무슨 뜻인가?
해골은 나무처럼 의식이 없지만, 
본래부터 사람들은 그 몸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향과 꽃과 연지와 분으로 장엄하고 꾸민다. 
그러나 그 몸은 지금 모두 다른 곳에 각각 흩어져 있다는 뜻이다.
“해골은 비둘기 빛깔 같으니”란 무슨 뜻인가?
본래는 여러 백천억의 중생들이 보고 사랑하여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여러 백천억 중생들이 그것을 보고는 모두 두려워하여 온몸의 터럭이 다 일어선다. 
그러므로 “해골은 비둘기 빛깔 같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랴”란 무슨 뜻인가?’
세상에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바로 미련한 범부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사랑을 받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비루하게 생각하여 부끄러워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즐겨 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추어 숨겨 두며 담아 둔다.

6

만약 첫날 밤에
의식이 어머니의 태(胎)에 들어가게 되면
날마다 변하고 변하니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세 가지 유위(有爲)를 말씀하신 것과 같이 유위의 모양은 흥하고 쇠하며 변하고 바뀌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만일 만물이 언제나 한결같이 존재한다면, 
시체의 해골은 왜 항상 존재하지 않겠는가? 
1백20시간을 하루 낮 하룻밤이라 하는데, 
만일 해골이 이 세상에 오래도록 존재한다면 한 사람의 몸이 이 세계에 가득 찰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답하였다.
“중생은 감각기관과 함께 나고 감각기관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므로 해골은 오래 존재하지 못한다.”
“비록 중생이 감각기관과 함께 사라지더라도 감각기관과 함께 생기면, 
해골은 오랫동안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중생은 의식과 함께 생기고 의식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므로 해골은 이 세상에 오래 존재하지 못한다.”
“만일 중생이 의식과 함께 사라지더라도 의식과 함께 생기면, 
해골은 오랫동안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또 물었다.
“만일 중생이 늙어서도 이 세상에 오래 존재할 수 있다면, 
처음 태(胎)에서 나올 때부터 머리털은 항상 희지 않았겠는가?”
“이른바 머리털이 희다는 것은 그가 늙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가 몸을 받을 때부터 퇴색의 변화로 말미암아 흰 털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술이나 소(酥)나 마유(麻油)에는 반드시 흐린 찌꺼기가 있는 것처럼 중생이 몸을 받을 때에도 이와 같아서 퇴색의 변화로 말미암아 흰 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첫날밤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게 되면’이란 무슨 뜻인가?
남자의 의식이나 여자의 의식이 어머니 태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잠깐 동안 의지해 있는 것으로서,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여 백천 가지의 변화를 겪으면서 일고 사라짐이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수레바퀴 도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오직 천안(天眼)이라야 볼 수 있는 것이니, 
때로 그 의식이 지나가고 돌아오는 것 역시 신비한 주문이나 기술로도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나가거나 스스로 아주 갔다 왔다 하더라도 또한 자취가 없다. 
의식이 어머니 태에 있으면서 생기고 사라지기를 그치지 않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또 마치 강물이 동으로 흐르면서 결국은 서쪽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태 안에 있는 의식도 지나가면 결국은 돌아보지 않으니, 
오직 천안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태 안의 의식이 오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7

새벽에 보던 것도
밤에는 볼 수 없고
어제 보던 것도
오늘은 볼 수 없네.

나는 지금 젊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으니
젊어서 죽는
남녀의 수를 헤아릴 수 없네.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아난 존자는 탁발할 때가 되어서 가사를 두르고 발우를 지닌 채 사위성으로 걸식하러 들어갔다. 
그는 성문 앞에서 많은 남자들이 흥겹게 노는 것을 보았다. 
아난 존자가 성 안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다시 성을 나올 때, 
그 광대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어서 여러 사람들이 그를 부둥켜안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아난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기이하다. 
변괴가 닥치는 것이 어찌 이리도 빠른가? 
내가 아침에 걸식하러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저 남자는 5락(樂)15)으로 스스로 즐거워서 그 얼굴이 마치 천인과 같더니, 
어찌 지금은 저렇게 죽게 되었는가?’
그래서 아난 존자는 사위성을 나와 기수급고독원으로 가서 가사를 두르고 손발을 깨끗이 씻은 뒤에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섰다.
그리고 나서 아난은 꿇어앉아 합장하고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아침에 가사를 두르고 발우를 지닌 채 사위성으로 걸식하러 들어가다가 어떤 남자가 흥겹게 5욕(欲)을 스스로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 안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되돌아올 때, 
그 남자가 갑자기 죽어서 여러 사람들이 그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에 생각하길, 
‘기이하다. 
변괴가 닥치는 것이 어찌 이리도 빠른가? 
내가 아침에 걸식하러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저 남자는 5락으로 스스로 즐거워서 그 얼굴이 마치 천인과 같더니, 
어찌 지금은 저렇게 죽게 되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본 것은 너무 놀라워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지금 네가 본 것을 놀랍다고 하는가? 
내가 과거에 본 것은 네가 지금 본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다.
나도 옛날, 
탁발할 때가 되어 가사를 두르고 발우를 지닌 채 사위성 안으로 걸식하러 들어간 적이 있었다. 
아난이여, 
그때에 나는 어떤 남자가 기원문(祇洹門) 밖에서 흥겹게 놀며 5욕(欲)을 스스로 즐기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나는 성 안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다시 성 밖으로 나왔는데, 
그 남자는 조금 전처럼 흥겨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너보다 더 놀라운 일을 본 것이다.”
그러자 아난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 
어찌하여 놀랍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목숨은 바람보다 빨라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너는 지금 무엇이 놀랍다고 말하는가?”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그 이치의 처음과 끝을 관찰하시고는 비구들에게 이 법을 널리 알리고, 
미래의 중생들을 위하여 큰 광명을 나타내 보이며, 
또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출요(出曜)의 게송을 읊으셨다.

새벽에 보던 것도
밤에는 볼 수 없고
어제 보던 것도
오늘은 볼 수 없네.

나는 지금 젊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으니
젊어서 죽는
남녀의 수를 헤아릴 수 없네.

“새벽에 보던 것도 밤에는 볼 수 없고”란 무슨 뜻인가?
새벽에 보이던 중생들이 수천백이나 되었지만 날이 저물어서는 그들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많은 중생들이 잘 생각하고 헤아려서 선의 근본을 완전히 갖추고 그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으면,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은 마치 돌을 쪼을 때에 번쩍 일어났다 사라지는 불꽃과 같은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마땅히 누가 마음을 내어 그것에 탐착하겠는가?
그러나 무지한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을 내어 목숨에 탐착한다.
“어제 보던 것도 오늘은 볼 수 없네”란 무슨 뜻인가?
어제 보던 것도 나아가고 멈추며 또 가고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유념하여 선의 근본을 잘 생각하고 여러 가지 공덕을 심으면, 
마음에 용기가 생겨서 스스로 뉘우치며 마음속으로는 ‘즐거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새벽에 보던 것도 밤에는 볼 수 없고, 
어제 보던 것도 오늘은 볼 수 없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지금 젊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으니”란 무슨 뜻인가?
저 무지한 사람이 아는 것도 들은 것도 없이 스스로 힘센 것과 기운이 왕성한 것만을 믿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여서 뒷걱정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스스로 말하길, 
“나는 용모가 단정하고 뛰어나지만 남은 비천하여서 내가 지닌 용모와 재력 그리고 인물의 출중함을 따르지 못한다”고 한다. 
스스로 힘이 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으뜸이어서 상대할 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거역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서 어떤 강한 상대라 할지라도 피하지 않는다. 
또 갑자기 닥칠 죽음에 대해서도, 
나고 죽는 괴로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젊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젊어서 죽는 남녀의 수를 헤아릴 수 없네”란 무슨 뜻인가?
비록 무수한 남녀와 크고 작은 몸을 받은 이 가운데 혈기가 왕성하고 재물이 많아서 무엇이나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모두 젊었을 때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젊어서 목숨을 바치는 이가 늙은이보다 많기 때문에 다 덧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남에게 짓밟히면서 목숨을 마치는 이들은 전생에 공덕을 닦지 않은 이들이며, 
모든 선의 근본에도 의지하지 않던 이들이다. 
그래서 이승이나 저승이나 5취(趣)를 돌아다니면서 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어서 죽는 남녀의 수를 헤아릴 수 없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8

태(胎) 안에서 죽거나
태어나자마자 이내 죽거나
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죽거나
어머니 품에 안겨서도 죽는다.

모든 늙은이나 젊은이
중년의 사람들도
차례대로 죽어 가니
과일이 익어 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육십천 생(生)이나 육십백 생이나 태 안에서 죽는 것은 전생에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이다. 
이른바 국왕이나, 
일억의 재산을 가진 부자나, 
도사, 
상인, 
부모,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을 해친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해치고 아비(阿鼻)지옥이나 혹은 열(熱)지옥, 
대열(大熱)지옥, 
제곡(啼哭)지옥, 
대제곡(大啼哭)지옥, 
등활(等活)지옥, 
흑승(黑繩)지옥 등에 들어가고, 
그 지옥에서 죄가 끝나면 또 6축(畜)으로 태어나 여러 겁 동안 오가며 맴도는데, 
다시 사람의 몸을 받더라도 그 동안에 태 안에서 죽어 그 수명을 다 마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태 안에서 죽거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이내 죽거나”란 무슨 뜻인가?
어떤 중생은 처음으로 어머니의 태 문(門)을 나서자마자 이내 죽으며, 
어떤 중생은 처음으로 복을 지으려다가 공업(功業)16)을 마치기 전에 태 문에서 일찍 죽는다. 
그것은 다 전생에 나쁜 마음을 내어 복을 짓는 사람을 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자마자 이내 죽거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죽거나”란 무슨 뜻인가?
어떤 중생은 공업을 베풀고 덕을 세우고자, 
여러 절에 과수원과 연못과 다리와 깨끗한 해우소[淸厠]를 만들려고 했다가 그 공업을 이루기도 전에 남의 해침을 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 전생에 복덕을 지은 사람을 해친 까닭이니, 
죽어서는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에 들어가 오랜 시간을 헤매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이미 태를 떠났더라도 중간에 일찍 죽게 된다. 
그러므로 “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죽거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머니 품에 안겨서도 죽는다”란 무슨 뜻인가?
어떤 중생은 공업을 베풀고 덕을 세우고자 여러 절에 과수원과 연못과 다리와 깨끗한 해우소를 만들려고 했다가 그 공업을 이루기도 전에 남의 해침을 받아 죽는다. 
그것은 다 전생에 나쁜 마음을 내어 복을 지은 사람을 해쳤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망가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는 지옥에 들어가며, 
지옥에서 죄가 끝나면 다시 축생 세계에 나는데, 
비록 사람이 되더라도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어린이로서 어머니 품에 안긴 채 명을 마친다.

모든 늙은이나 젊은이
중년의 사람들도
차례대로 죽어 가니
과일이 익어 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옛날 마성(馬聲) 존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어머니 태 안에서 죽기도 하고
이미 나서 밖에서 죽기도 한다.
젊어서도 죽음을 면치 못하고
늙어서는 그것을 달게 받는다.

마치 나무에 광화(狂花)가 피어도
열매를 맺는 것은 아주 드문 것처럼
죽음을 잊어버리려고 하나
죽음의 영을 받아 어쩔 줄을 모른다.

마치 저 철따라 무성한 과일 나무에 광화(狂花)가 피어나더라도, 
바람을 만나면 힘없이 떨어져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주 드물고, 
열매를 맺었다고 하더라도 우박을 만나면 이내 떨어진다. 
미처 꽃이 피기도 전에 떨어지기도 하며, 
혹은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열매가 맺힌 다음 익어서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아주 작다.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백천 생(生)을 지나는 동안에 그 몸이 1생(生)이거나 혹은 2생(生)이거나, 
태 안에 있거나, 
태에서 나왔거나, 
젊었거나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간에 모두 이 길을 되돌아가 그 재앙을 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 백천 생 동안에 대개는 늙어서 목숨을 마치지만, 
1생이나 2생 동안에 젊어서 죽는 이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늙은이나 젊은이
중년의 사람들도
차례대로 죽어 가니
과일이 익어 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9

목숨은 익기를 기다리는 과일처럼
일찍 떨어질까 언제나 두려워한다.
이미 나면 다 괴로움이니
그 누가 죽음을 면하겠는가.

옛날 악생명왕(惡生明王)은 수레를 타고 시중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나갔다. 
많은 과일 나무가 줄을 지어 그 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예(禮)는 익은 과일만을 먹고 절대로 풋것은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왕이 정원사에게 명령하였다.
“땅에 떨어진 과일은 내게 올리지 말아라. 
만일 이 명령을 어기면 목을 베리라.”
그러자 정원사는 가만히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이 악생명왕은 자비심이 없고 포악무도하여 중생을 함부로 죽인다. 
만일 내가 이 명령을 어기면 그 화를 면치 못하여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과수원에는 과일 나무가 많지만, 
나무에 달려 있는 과일은 적고 땅에 떨어진 것이 많다. 
아무리 나를 책망하더라도 과일이 다시 열릴 리가 없다. 
우선 여기서 도망친 다음 출가하여 도를 배우리라.’
그는 곧 담을 넘어 도망가 버렸다. 
그는 부처님께 나아가 온몸을 땅에 던지고 사문이 되기를 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곧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는 도를 닦는 사람이 되었으나, 
아무 하는 일이 없이 고요히 있으면서 묘한 방편으로써 참선하거나 경전을 외우지도 않았으며, 
또 계율이나 아비담(阿毘曇)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도를 행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만 황량한 광야를 거닐다가 12부(部) 경전을 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 울력에 대해 모르면서 스스로 3사(事)를 빙자하고 뒷 일을 염려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나는 이미 이 몸뚱이의 급한 걱정을 벗어났으니 이제 우선 편히 지내자. 
다른 일이나 알아 보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는, 
온갖 괴로움과 액난에서 그를 제도하여 선법(善法)의 묘당(妙堂)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자 하셨다. 
또한 번뇌의 근본을 뽑고 생사의 광야에서 벗어나 장차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해탈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출요의 게송을 읊으셨다.

목숨은 익기를 기다리는 과일처럼
일찍 떨어질까 언제나 두려워한다.
이미 나면 다 괴로움이니
그 누가 목숨을 면하겠는가.

그때에 그 비구는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꾸짖고 부끄러워하여 고요한 곳에서 악로지관(惡露止觀)의 도를 깊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다.

10

비유하면 옹기장이는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것은 반드시 깨어지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한 옹기장이가 있었는데, 
그는 어떤 주문도 물리치지 않고 그릇의 형상을 만들어 내되,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구살라국(拘薩羅國)17)의 바사닉왕(波斯匿王)18)이 그 옹기장이에게 명령하여 그릇을 만들게 하였다. 
그런데 그는 일이 너무 바빠서 마침내 기일에 대지 못하였다. 
그래서 바사닉왕은 화가 잔뜩 나서 곁의 신하에게 옹기장이 집에 가서 그릇들을 모두 부숴 버리라고 하였다.
옹기장이는 생명에 두려움을 느껴 몰래 가시국(迦尸國)19) 국경 근처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다시 옹기를 만들며 살았다. 
왕은 그가 그곳에서 다시 그릇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또 신하를 그 나라로 보내어서 그가 만든 그릇을 모두 부숴 버리게 하였다.
옹기장이는 다시 구살라국으로 도망쳐 와서 그곳에서 그릇을 만들며 살았다. 
그러나 왕은 그가 그릇을 다시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또 신하를 보내어 그릇을 부숴 버리게 하였다. 
그래서 옹기장이는 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살아갈 도리가 없어서 헐벗고 굶주리며 지냈다. 
또 항상 왕에게 잡혀 죽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다시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서 부처님께 나아가 사문이 되기를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그의 수도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나는 이제 액운에서 영원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다시는 왕에게 잡혀 죽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도 도덕을 생각하지 않았고, 
경전이나 계율이나 아비담도 공부하지 않았으며, 
또 그 이치도 분별하지 못하였고 세상을 제도할 도도 익히지 않았다. 
그리고는 참선과 경전을 외우는 것과 대중 울력 등과 같은 3사(事)에 힘쓰지 않고 아예 그만두었으며, 
‘도를 행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하고, 
만용을 부려서 상인(上人)의 법을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도를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증득하기를 힘쓰지 않고, 
과(果)를 얻지 못했으면서도 과를 얻으려 힘쓰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지혜[三達智]로 그 마음을 관찰하시고는 차츰 그를 교화하여서 의심의 그물을 없애 주고자 하셨다.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미 옹기 만드는 일을 그만두었으니,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직 5음[五盛陰]이 옹기의 형상을 이룬 것이니,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것으로 그 근심만은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옹기가 부서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ㆍ마귀ㆍ축생의 길에 떨어질 것이다.
5음은 옹기를 본뜬 것이므로 먼저 온갖 공덕의 복된 업을 짓거나 선의 근본을 닦지 않으면 의지할 곳도 없고 또 돌아갈 곳[趣]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라.”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이 이치를 관찰하셔서 처음과 끝을 살피시고는, 
비구들로 하여금 의심을 영원히 여의게 하고, 
미래 중생들로 하여금 큰 광명을 보게 하고,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비유하면 옹기장이는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것은 반드시 깨어지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다.

굽지 않은 것이나 구운 것이나 간에 그릇이란 반드시 깨어져서 끝내는 티끌 더미가 되고 마는 것으로 탐할 만한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5음을 받으니, 
그들은 이 날기와 그릇 같은 것들이다. 
찰리(刹利)20)거나 바라문이거나 전다라(栴陀羅)21)거나 몸을 받은 사람들은 수명이 길거나 짧거나, 
재물이 많거나 적거나, 
몸이 단정하거나 누추하거나, 
종족이 귀하거나 비천하거나, 
얼굴이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지혜롭거나 어리석거나 모두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마땅히 덧없어 변하는 것은 모두 버려서 광야의 무덤 사이에 묻어야 한다.
그때에 그 비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무상함을 깨닫고 죄와 복의 근원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흥했다가 쇠퇴하는 법에 대해서도 깨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열반의 행을 따라 부처님 앞에서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11

마치 잉아[綜]를 밀치고
북[杼]을 보내어 베를 짤 때에
차츰 그 날실이 줄어드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다.

옛날 고기 그물을 잘 뜨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 몹시 게을렀다. 
그래서 자주 아들에게 부지런하기를 권하였지만, 
그는 대답하였다.
“천천히 하지요. 
그렇게 바쁘게 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이 일을 마치고 나면 다른 일도 없을 텐데…….”
아버지는 말하였다.
“이 일이 끝나더라도 또 다른 일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십 번씩 말이 오고 갔다. 
마침내 아들은 정신이 착란되어 그 아버지 앞에서 간이 터져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자, 
곧 집안 살림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웠다. 
그는 비록 사문이 되었으나 아들 생각에 마음이 빠져 있어서 그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덕을 생각하거나 참선에 전념하여서 보다 훌륭한 법을 구하지도 않았고, 
또 경전이나 계율이나 아비담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또 좌선을 하거나 경전을 외우거나 대중 울력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마음은 죽은 아들에게만 있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지혜로써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관찰하시고는 처음과 끝을 살피셔서 그 이치를 밝히셨다. 
그리고 비구들로 하여금 의심을 영원히 여의게 하고, 
미래의 중생들로 하여금 큰 광명을 보게 하고, 
또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출요의 게송을 읊으셨다.

마치 잉아를 밀치고
북을 보내어 베를 짤 때에
차츰 그 날실이 줄어드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다.

모든 만물은 모두 죽음으로 돌아가기에 덧없이 변하는 것들은 다 버려서 광야의 무덤 사이에 묻어야 한다.
그때에 그 비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무상함을 깨닫고, 
죄와 복의 근원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며, 
흥했다가 쇠퇴하는 법에 대해서도 깨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열반의 행을 따라 부처님 앞에서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12

마치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에
죽음의 길로 향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어느 때 구살라국의 바사닉왕이 전옥(典獄)에게 명령하였다.
“도적질한 자들은 모두 죄를 물어 형장으로 끌고 가서 죽여라.”
그러자 대중 가운데 있던 한 도적이 그곳을 빠져 나와 거짓으로 법복(法服)을 입고 사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나는 이제 액운에서 영원히 벗어났다’고 생각하고는 왕에게 잡혀 죽을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도덕을 생각하지 않고 경전과 계율과 아비담도 공부하지 않았으며, 
또 그 이치도 분별하지 못하였고, 
세상을 제도할 도(道)도 익히지 않았다. 
그리고는 참선과 경전을 외우는 것과 대중 울력 등과 같은 3사(事)에 힘쓰지 않고 아예 그만두었으며, 
‘도를 행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하고, 
만용을 부려 상인(上人)의 법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증득하기를 힘쓰지 않았고, 
과(果)를 얻지 못했으면서도 과를 얻으려 힘쓰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의 지혜로 그 마음을 관찰하시고는 차츰 그를 교화하여 의심의 그물을 없애 주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사느냐, 
죽느냐는 도적의 재난은 면하였으나 아직 남은 것이 있다. 
즉, 
5음으로 된 몸이 5취(趣)를 떠돌아서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번뇌의 해침을 받아서 장차 아귀나 축생의 길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이 이치를 관찰하시고는 처음과 끝을 살피셨다. 
그래서 비구들로 하여금 의심을 멀리 여의게 하고, 
미래 중생들로 하여금 큰 광명을 보게 하며,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마치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에
죽음의 길로 향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다.

그때에 그 비구는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 마음속 깊이 스스로를 꾸짖고는, 
‘만물은 모두 덧없는 것이어서 한번 난 것은 오래 존재하지 못하고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흥했다가 쇠퇴하는 변화는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것으로서 바로 지금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 앞에서 참회하여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

13

세차게 흐르는 저 강물이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옛날 어떤 많은 사람들이 강 기슭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면서 강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해쳤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그 끝이 없었다. 
혹 부모나 처자나 아들이나 딸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이가 한량이 없었다. 
그 중에서 살아 남은 이는 만분의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 깊은 물 속에서 살아 남은 한 사람이 부처님께 나아가 사문이 되기를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허락하시고 도인들의 끝자리에 있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는 이제 액운에서 영원히 벗어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시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도 도덕을 생각하지 않고 경전이나 계율이나 아비담도 익히지 않았으며, 
세상을 제도할 도(道)도 익히지 않았다. 
그리고는 참선과 경전을 외우는 것과 대중 울력 등과 같은 3사(事)에 힘쓰지 않고 아예 그만두었으며, 
‘도를 행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하고 만용을 부려 상인(上人)의 법을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서 증득하기를 힘쓰지도 않았고, 
과(果)를 얻지 못했으면서 과를 얻으려고 힘쓰지도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의 지혜로 그 마음을 관찰하시고는 차츰 그를 교화하여 의심의 그물을 없애 주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물에 빠져 죽는 재난은 면하였지만22) 아직도 남은 것이 있다. 
즉, 
5음으로 된 몸이 5취(趣)를 떠돌아서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번뇌의 해침을 받아서 장차 아귀나 축생의 길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이 이치를 관찰하시고는 처음과 끝을 살피셨다. 
그래서 비구들로 하여금 의심을 멀리 여의게 하고, 
미래 중생들로 하여금 큰 광명을 보게 하며,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2권에 있음)을 읊으셨다.

----------------

1)
1)부처님의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bārāṇasī의 음사이다.
2)
2)염부찰(閻浮刹:
jambudvīpa) 혹은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세계를 4주(州)로 나누어서 자신들이 있는 곳을 염부제(閻浮提)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인간 세계를 가fl키게 되었다.
3)
3)중인도에 있는 vaiśālī의 음사이다. 
비야리(毘耶離)라고도 번역한다.
4)
4)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뜻하는 삼계(三界)와 동일어이다.
5)
5)불환(不還), 
불래(不來)를 뜻하는 anāgāmin의 음사로서, 
번뇌를 끊어서 다시는 미혹된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
6)
6)각각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삼장(三藏)을 뜻한다.
7)
7)마가다국(magadha)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을 가리킨다.
8)
8)죽림정사(竹林精舍, 
karaṇḍa veṇuvana)를 가리킨다.
9)
9)고려대장경에는 화(火)로 되어 있지만, 
대구가 되는 구절이므로 요소를 뜻하는 대(大)를 취하여 번역하였다.
10)
10)5온(蘊)인 skandha와 동의어이다.
11)
11)입류(入流), 
역류(逆流), 
예류(預流)를 뜻하는 srota āpanna의 음사로서, 
성문(聲聞)의 수행의 네 계위(階位) 가운데 초과(初果)를 가리킨다.
12)
12)일래(一來)를 뜻하는 sakṛd-āgāmin의 음사로서, 
성문(聲聞)의 수행의 네 계위(階位) 가운데 두 번째 과(果)를 가리킨다. 
오직 한 번 더 생을 받되, 
종국에는 미혹을 완전히 끊어서 다시는 생을 받지 않는다.
13)
13)사람의 몸에 있는 불결한 진액(津液)이다.
14)
14)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없으나, 
번역자가 내용편의상 게송을 넣었다.
15)
15)출가(出家)의 즐거움, 
멀리 떠난 즐거움, 
적정(寂靜)의 즐거움, 
보리(菩提)의 즐거움, 
열반의 즐거움이라는 다섯 가지 즐거움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탐욕의 마음을 일으키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5경(境)을 뜻하는 5욕(欲)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16)
16)공들여 얻는 업적인 공덕업적(功德業績)의 줄임말이다.
17)
17)고대 인도의 16국(國)의 하나로서 사위(舍衛)라고도 한다.
18)
18)파리명(巴梨名)으로는 pasenadi이고, 
범명(梵名)으로는 prasenajit이다.
19)
19)고대 인도의 16국의 하나이며, 
구살라국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20)
20)인도 사성(四姓)계급의 하나로서 왕족인 kṣatriya의 음사이다.
21)
21)사성계급에 속하지 않은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인 caṇḍāla의 음사이다.
22)
22)고려대장경에는 “이면생사적구지난(以免生死賊寇之難)”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이전 문맥을 반복하여 내려오다가 생긴 착오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이 문맥에 맞게 고쳐 번역하였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Veronique Sanson - Delices D'hollywood.lrc




◆vwlj1056
◈Lab value 불기256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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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enoir nini-lopez-1876




○ 2016_1008_132231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sangbongsa_11-05262




♥Moldova ,Tiraspol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nglish: Railway and bus station in Tiraspol (Transnistria) Date 2 March 2008 Source Own work Author Alexander Sokol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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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street front of the Sheriff stadion complex (from the street leading in to Tiraspol from Chisinau, I think) in Tiraspol, 


English: The Orthodox church in Shevchenko Street in central Tiraspol, Moldova/Transnistria Date 31 July 2005 Source Own work by uploader, https://bjornfree.com/galleries.html Author Bjørn Christian Tørrissen Camera location 46° 50′ 20″ N, 29° 36′ 51″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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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Keen'v - Petite Emilie.lrc








♥단상♥

오늘 숙왕화님이 사찰을 다녀오자고 해서 나섰다. 
처음에 봉녕사를 갔다. 


그런데 정문이 폐쇄되어 있다. 
아마도 코로나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사찰 앞에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표지판도 붙여 있다. 

그래서 아쉽게 사찰 참배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돌아오기 섭섭해서 
핸드폰으로 검색해 다른 사찰을 들렀다.  
다행히 여기는 사진 활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단히 만족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원래는 사찰 풍경 사진 촬영이 대부분 허용된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 촬영 금지 푯말을 보고 난 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니 왠지 감회가 새롭다. 

절 참배를 다 마치고  출발하자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편, 원래는 숙왕화님이 식사를 사준다고 했다. 
그런데 비도 쏟아지고 일찍 끝나서 식사는 먹지 못했다. 
돌아오니 상당히 피곤하다. 


○ 2020_0930_123857_ni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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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출요경_K0982_T0212.txt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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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9-30
θθ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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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혹(惑)의 하나. 생득(生得)의 혹. 선천적으로 갖추어 있는 번뇌.

답 후보
● 구생혹(俱生惑)
구주심(九住心)

권교(權敎)
궤범사(軌範師)
규기(窺基)
근(根)
근본식(根本識)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출요경_K0982_T0212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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