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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0-26_성유식론-K0614-002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기2564-10-26_성유식론-K0614-002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10. 26. 14:46



®


『성유식론』
K0614
T1585

제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성유식론』 ♣0614-002♧





제2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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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成唯識論卷第二
K0614
성유식론 제2권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논주 문】 또한 모든 유위상(有爲相)이 
색법과 심법 등과 달리 
실재의 자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1)

【논주 문】 경전에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세 가지 유위상이 있으며, 
2) 나아가 자세히 많이 설명한다.3)



【논파】 이 경전에서는 
색법과 심법 등과 달리 실재의 자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증명이 되지 못한다.4) 

제6의 소리5)가 곧 별개의 본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6) 
색법과 심법의 본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색법과 심법이기 때문이다. 

양상의 주체[能相]인 본체가 
반드시 만들어진 양상[所相]과 다른 것도 아니다. 

땅의 견고한 양상 등이 땅 등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위상이 만약 만들어진 것의 본체와 다르다고 말하면, 
무위법의 양상의 본체도 만들어진 것[所相]과 달라야 한다.

또한 생生 등의 양상이 만약 본체와 함께 존재한다고 말하면, 
언제나 항상 (生ㆍ住ㆍ異ㆍ滅의 네 가지 양상이) 일제히 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만약 서로 거스르기 때문에 
작용이 단박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네 가지 양상의) 본체도 역시 서로 거스르는데, 
어떻게 함께 존재하겠는가?7)

또한 머물고 변화하고 멸하는 것은 작용이 함께하지 않아야 한다. 

양상의 주체와 만들어진 것은 
본체가 모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작용도 역시 그러해서 별도의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8)

만약 그것의 작용이 다시 원인[因]과 조건[緣]9)을 기다린다고 말하면, 
기다려지는 원인과 조건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집착된 생(生) 등이 곧 쓸데없는 것이 된다.10) 
만들어진 것은 항상 존재하면서 생(生) 등과 합한다고 말하면, 
무위법에도 역시 생 등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이것이 원인을 달리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세와 미래세는 현재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허공 꽃과 같이 실유의 자성이 아니어야 한다. 

★★생겨남을 존재하는 것[有]이라고 이름하는데, 
어떻게 미래에 있겠는가? 

소멸함을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고 이름하므로 
현재가 아니어야 한다. 

소멸함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생겨남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11) 

또한 소멸은 머무름[住]에 거스르는데, 
어찌 동시(同時)라고 집착하고, 
머무름은 생겨남에 거스르지 않는데, 
어찌 다른 시간으로 인정하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집착은 나아가서도[進] 물러나서도[退] 바른 논리가 아니다.12)



【정의】 그런데 유위법은 인연의 세력 때문에 
본래 없던 것이 현재 존재하는 것이다. 
잠시 존재하다가[住ㆍ異]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무위법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네 가지 양상을 가립한다. 

본래 없던 것이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단계를 생(生)이라고 이름한다. 

생겨남의 단계에서 잠시 머무는 것을 주(住)라고 이름한다. 

머무름이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달라지므로 
다시 이(異)라는 명칭을 건립한다. 

잠시 존재하다가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존재하지 않는 때를 멸(滅)이라고 이름한다. 

앞의 세 가지는 존재하는 것이므로 다 같이 현재에 있다. 
뒷부분의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과거에 있다.




【문】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법을 
존재하는 법과 함께 양상[相]이라고 하는가?

【답】 이것이 나중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기 때문에, 
양상[相]이라고 말하는 데 무슨 허물이 있는가? 

생(生)은 존재하는 법이 이전에는 있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멸(滅)은 존재하는 법이 나중에 없게 됨을 나타낸다. 
이(異)는 이 법이 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주(住)는 이 법이 잠시 작용이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네 가지 양상은 유위법에 대해서 모두 나타낸다고 이름하는데, 
나타내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찰나13)에 의거해서 네 가지 양상을 가립한다.14)
한평생의 분위(分位)에서도 역시 가립할 수 있다.15) 
처음에 존재하게 됨을 생(生)이라 이름하고, 
나중에 존재하지 않게 됨을 멸(滅)이라고 이름한다. 
태어나서 서로 비슷하게 상속함을 주(住)라고 이름한다. 
곧 이 상속이 전변함을 이(異)라고 이름한다. 
이 때문에 네 가지 양상은 모두 가립이다.


【논주 문】 또한 색법과 심법 등과 달리 뜻을 나타내는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의 법16)이 실재함을 어떻게 아는가?17)


【외인 답】 경전에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희유한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성취하신다고 말씀한다.

【논파】 이 경전에서는 색법과 심법 등과 달리 
실재의 명신(名身) 등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따라서 증명으로 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명신ㆍ구신ㆍ문신 등이 소리와 달리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면, 
색법 등과 같이 참으로 능전(能詮)이 아니어야 한다. 
소리가 능히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생겨나게 하므로, 
이 소리는 반드시 음운(音韻)의 굴곡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음운의 굴곡)이 능히 뜻을 나타내기에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명신 등을 사용하겠는가?

만약 소리의 음운굴곡이 곧 명신ㆍ구신ㆍ문신이고, 
소리와 달리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면, 
보이는 색경(色境)의 형상과 크기의 굴곡도 색처(色處)와 달리 별도로 실체가 있어야 한다.

만약 소리의 음운굴곡이 현악기나 관악기의 소리처럼 능전이 아니라고 말하면, 18) 
이것(말소리)도 그것(악기)의 소리와 같이 별도로 명신(名身) 등을 생겨나게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누가 그것(악기의 소리)은 반드시 능전이 아니고, 
현악기 등처럼 소리를 내는 것이 능전이라고 말하면, 

바람이나 풍경[鈴] 소리 등에도 능전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19) 
이것(바람 등의 소리)도 그것이 별도로 참다운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생겨나게 하지 않음과 같아야 한다. 
만약 오직 언어의 소리만이 능히 명신 등을 생겨나게 한다고 말하면, 
어째서 오직 언어만이 능전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문】 능전이 곧 언어라는 것을 무슨 논리로써 결정적으로 아는가?
【답】 정녕 알라. 
언어와 달리 별도로 능전(能詮)이 있다. 
언어가 능전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도 하늘 사람들도 모두 안다. 
능전이 언어와 다르다고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天愛]20)뿐이지,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정의】 언어의 소리의 분위의 차별에 의거해서 가정적으로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을 건립한다. 
명신은 자성을 나타내고, 
구신은 차별을 나타낸다. 
문(文)은 곧 글자[字]이고, 
두 가지(名ㆍ句)의 의지처[所依]가 된다. 
이 세 가지는 소리를 떠나서 별도의 본체가 없지만, 
임시적인 것[假]과 참된 것[實]의 차이가 있으며, 21) 역시 곧 소리는 아니다. 
이 때문에 법과 말[詞]의 두 가지 걸림 없는22) 지혜가 대상의 차별이 있다. 
소리는 명신 등과 온(蘊)ㆍ처(處)ㆍ계(界)에 포함되는 것도 역시 각기 다르다.23) 

또한 이 국토에 의지해서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소리에 의지해서 가립한다고 말한다. 

모든 국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불국토에서는 또한 광명과 미묘한 향기와 맛 등에 의거해서 셋을 가립하기 때문이다.24)
다음과 같은 집착된 견해가 있다.25) 수면(隨眠)26)은 심왕과 심소법과 다르고, 
불상응행법이며 행온(行蘊)에 포함된다고 말한다.그것도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니다. 

탐욕 등으로 이름하기 때문에 현행된 탐욕 등과 같이 불상응행법이 아니다.

별도로 다른 불상응행법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27)도 
앞의 논리의 취지[理趣]에 견주어서 모두 부정되어야 한다.

모든 무위법은 색법과 심법 등을 떠나서 
반드시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바른 논리가 있을 수 없다.28)


또한 반드시 존재하는 법에 대략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현량심(現量心)으로 아는 법29)이니, 
색법ㆍ심법 등과 같다. 

둘째는 현재에 수용하는 법이니, 
병이나 의복 등과 같다. 
이러한 두 법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재한다고 알고 있으며, 
비량(比量)으로써 성립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셋째는 작용이 있는 법이니, 
눈이나 귀 등과 같다. 

이러저러한 작용 때문에30) 이것이 존재함을 깨달아 안다.
무위법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있다고 아는 것도 아니다. 
또한 눈[眼根]이나 귀[耳根] 등과 같은 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설사 무위법이 작용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무상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무위법은 반드시 실재한다고 집착할 수 없다.


【정의】 모든 무위법은 인식대상들의 체성이기 때문이고, 
혹은 색법ㆍ심법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 본성이기 때문에, 
색법ㆍ심법 등과 같이 색법ㆍ심법 등에서 떠난 
실재의 무위성(無爲性)이라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허공 등은 하나인가, 
다수[多]인가?31) 만약 본체가 하나라고 말하면, 
모든 곳에 두루 해야 한다.32) 허공은 색법 등을 수용하기 때문에, 
능히 합하는 법에 따라서 본체가 다수가 되어야 한다. 
한 장소의 합하는 곳에는 다른 것은 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모든 법은 서로 두루해야 한다.


만약 허공이 법과 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다른 무위법(택멸ㆍ비택멸)과 같이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색법 등에는 허공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고 말하면, 
서로 섞여야 한다. 
없다고 말하면, 
두루하지 않아야 한다.

한 부류[部]와 한 품류[品]의 번뇌를 끊을 때에 
다른 부류와 다른 품류의 택멸(擇滅)을 얻어야 한다.33) 


한 법의 연(緣)이 부족해서 생겨나지 못할 때에, 
모든 곳에서도 비택멸(非擇滅)을 얻어야 한다. 
그것의 본체가 하나라고 집착하므로, 
논리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본체가 다수라고 말하면, 
곧 품류(品類)가 존재해야 하므로 
색법 등과 같이 실재의 무위법이 아니어야 한다.34) 

허공은 또한 두루하는 것도, 
수용하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다른 부파에서 집착하듯이, 


심왕과 심소법에서 떠나서 
참으로 무위법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도 
앞의 내용에 견주어서 논파되어야 한다.35)


또한 모든 무위법은 원인ㆍ결과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므로, 
토끼의 뿔처럼 심왕 등과 달리 실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36)


그런데 경전에서 허공 등의 모든 무위법이 있다고 말한다.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식이 전변된 것에 의거해서 가정적으로 존재한다고 시설한다. 
예전에 허공 등이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따라서 분별하여 허공 등의 양상이 존재한다고 누차 훈습한 세력 때문에, 
심왕 등이 일어날 때에 허공 등의 무위법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이 나타난 모습이 전찰나와 후찰나에 서로 비슷해서 변화가 없다면, 
가정적으로 시설하여 상주하는 것으로 삼는다.


둘째는 법성에 의거해서 가정적으로 존재한다고 시설한다. 
공(空)ㆍ무아에서 나타난 진여이다. 
존재[有], 
비존재[無], 
존재이기도 하고 비존재이기도 한 것[俱],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非]이라는 마음작용의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모든 법과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 등도 아니다. 
이것은 법의 진리이다. 
따라서 법성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장애를 여의었기 때문에 허공이라고 이름한다.37) 

간택(簡擇)의 힘38)에 의해서 모든 잡염을 소멸하여 구경에 이르러 깨달아 안다. 
따라서 택멸(擇滅)39)이라고 이름한다. 

택멸의 힘에 의하지 않고 본성이 청정하고 혹은 연(緣)40)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므로 비택멸이라고 이름한다.41) 


괴로운 느낌[苦受]과 즐거운 느낌[樂受]이 멸했기 때문에 부동무위(不動無爲)42)라고 이름한다. 
상(想)ㆍ수(受) 심소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상수멸무위(想受滅無爲)43)라고 이름한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진여(眞如)에 의거해서 가립한다. 


진여라고 말해도 역시 가정적으로 명칭을 시설한 것이다.44)
부정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말함을 막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집착해서 실재하는 것으로 말함을 막기 위해서 공(空)이라고 말한다. 
허공이나 환상이라고 말함을 막기 위해서 참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치가 허망되게 전도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여(眞如)라고 이름한다. 

다른 부파에서 근본진리[宗]로 주장하듯이, 
색법과 심법 등에서 떠나서 실재의 상주하는 법이 있고, 
이것을 이름하여 진여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모든 무위법도 반드시 실유가 아니다.
외도와 다른 부파에서 집착하는 여러 법45)은 
심왕ㆍ심소법과 달리 참으로 자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46) 
인식대상[所取]이기 때문이니 심왕ㆍ심소법의 경우와 같다.47) 

능히 그것(색법 등)을 취한다고 말하는 인식의 주체[覺:
심왕과 심소]도 역시 그것(색법 등)을 반연하지 않는다. 
이것은 능취(能取)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식의 주체[覺]와 같다. 
모든 심왕과 심소는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역시 허깨비와 같이 참다운 존재가 아니다. 

▸ 심왕ㆍ심소와 독립적으로 
외부에 참으로 대상이 존재한다고 집착함을 막기 위해서 
오직 식뿐이라고 말한다. ◂
 

만약 오직 식만이 참다운 존재라고 집착한다면, 
외부대상을 집착하는 것처럼 이 역시 법집(法執)이다.


그런데 모든 법집에 대략 두 종류가 있다.48) 
하나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법집[俱生起法執]은, 
아득한 옛적부터 허망하게 훈습한 내부의 원인[種子]의 세력 때문에 
항상 신체와 함께한다. 

▸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일어난다. 
따라서 구생기법집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항상 상속하고, 
제7식이 제8식을 반연하여 
자기 마음의 모습을 일으키고 집착해서 실법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는 잠시 단절됨이 있으며, 
식이 전변된 5온ㆍ12처ㆍ18계의 모습을 
제6식이 반연하여, 
총체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자기 마음의 모습을 일으키고 집착해서 
실법으로 삼는다.
이 두 가지 법집은 미세하기 때문에 끊기 어렵다. ◂
 


견도 이후의 10지(地) 중에서 뛰어난 법공관(法空觀)을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비로소 없앨 수 있다.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법집[分別起法執]은, 
역시 현재 외부 연(緣)의 세력에서도 비롯되기 때문에 
신체와 함께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만난 이후에 비로소 일어난다. 
따라서 분별기법집이라고 이름한다. 


오직 제6의식에만 있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삿된 가르침에서 말한 온(蘊)ㆍ처(處)ㆍ계(界)의 양상을 반연하여, 
자기 마음의 양상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계탁해서 집착하여 실법으로 삼는다. 
둘째는 삿된 가르침에서 설한 자성(自性) 등49)의 모습을 반연하여, 
자기 마음의 모습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계탁해서 집착하여 실법으로 삼는다.이 두 가지 법집은 두드러지기 때문에 끊기 쉽다. 
초지(初地)에 들어갈 때 모든 법의 법공진여를 관찰하여 곧 능히 없앤다.50)
이상과 같이 말한 모든 법집의, 
자기 마음의 외부 법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자기 마음의 내부 법은 모두가 다 존재한다. 
이 때문에 법집은 모두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사현된 법[似法]을 반연하여 집착해서 실법(實法)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현된 법의 양상은 연(緣:
종자)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허깨비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 
집착된 실법은 허망하게 계탁한 것이므로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씨보살이여, 
마땅히 알라. 
모든 식[見分]의 인식대상[所緣:
상분]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다. 
의타기성은 허깨비와 같다. 
운운(云云)51)”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외도와 다른 교법[乘]에서 집착하듯이, 
식에서 떠난 자아와 법은 모두 실유가 아니다. 
따라서 심왕과 심소는 결정적으로 외부의 색법 등의 법을 사용해서 소연연(所緣緣)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연(緣)의 작용은 반드시 실유의 자체52)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현재 타인[彼聚]의 심왕ㆍ심소법은 자기[此聚] 식의 친소연연(親所緣緣)이 아니어야 한다.53) 소연이 아닌 것처럼 타인에게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기[同聚]의 심소도 역시 친소연연이 아니다. 
심왕의 자체와 다르므로 소취(所取)가 아닌 다른 것과 같다.54)이에 근거해서 마땅히 알라. 
참으로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내부의 식만이 존재하여 외부대상으로 사현(似現)한다.그러므로 경전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분별하는 것 같은
외부대상은 참으로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습기가 마음을 어지럽혀서 혼탁하게 한다.
따라서 그것(외부대상)에 비슷하게 생겨난다.55)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56) 

만약 식에서 떠나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이 없다면, 
임시적인 존재[假:似我似法]도 역시 없어야 한다. 

임시적인 존재는 반드시 참된 사물[眞事:자아와 법], 사현된 사물[似事:식이 전변된 것], 
공통의 법[共法:작용]에 의지해서 건립한다. 

비유하면 진짜 불[火:眞事]이 있고, 
불과 비슷한 사람[似事]57)이 있으며, 
불의 맹렬하고 붉은 법[共法]이 있기 때문에 
곧 가정적으로 이 사람을 불[火]이라고 말할 수 있음과 같다. 

가정적으로 소[牛] 등으로 말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58) 

자아와 법이 만약 실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가설하겠는가? 

가정적으로 말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슷한 것[似]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어떻게 마음이 외부대상으로 사현(似現)한다고 말하는가?59)


그들의 비판은 바른 논리가 아니다. 
식에서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자아와 법은 앞에서 이미 논파되었기 때문이다. 

특수성[類]에 의거하고 실체[實]에 의거해서60) 불 등을 가설하는 것은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수성에 의거해서 가설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선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맹렬함과 붉음 등의 속성[德]61)은 특수성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작용의 속성[共德]62)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정적으로 그것을 말한다고 하면, 
역시 물[水] 등에 대해서도 불 등의 명칭을 가설해야 한다.


만약 맹렬함 등은 비록 보편성의 속성은 아니지만,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가설할 수 있다고 말하면, 63) 이것도 역시 그렇지 않다. 
현재 볼 때에 사람과 맹렬함 등은 역시 서로 떠나 있기 때문이다. 


특수성은 이미 속성이 없고, 
또한 서로 떠나 있다. 

사람에 대해서 가정적으로 불 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가설은 특수성에 의거해서는 성립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실체의 범주[實]에 의거해서 가설한다고 말함은 바른 논리가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맹렬함ㆍ붉음 등의 속성은 함께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맹렬함ㆍ붉음 등은 불에 있을 경우와 사람에 있을 경우에 그 본체가 각기 다르다. 
의지처[所依:實句]가 다르기 때문이다.
작용[共]은 없지만 가설한다고 말하면, 
과실이 있는 것이 앞에서와 같다.64)

만약 사람과 불의 속성이 서로 비슷하므로 가설할 수 있다고 말하면, 
이치가 역시 그렇지 않다. 
불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5) 

이 때문에 가설은 실체의 범주에 의거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임시적인 존재는 반드시 참된 사물에 의거해서 건립한다고 말하면,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니다.66) 참된 사물이라는 것은 자상(自相)이고, 
임시적인 존재를 아는 지혜[假智]와 임시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것[假詮]에 있어서, 
모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시적인 존재를 아는 지혜와 임시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자상이 없다. 
오직 모든 법의 공상(共相)에서만 일어난다.67)
또한 이것(假智와 假詮)에서 떠나서 별도의 방편이 있고, 
자상을 시설하여 임시적인 것의 의지처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임시적 존재를 아는 지혜와 임시적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반드시 소리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소리는 자상에는 미치지 못하며, 
이것이 일어나지 않는다.68) 

표현의 주체[能詮]도 표현의 대상[所詮]도 모두 자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알라. 
가설은 참된 사물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때문에 다만 사현된 사물69)에 의지해서만 일어난다. 

사현된 것은 공상(共相:增益)의 실유가 아닌 양상이다. 
소리는 공상의 사현된 양상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따라서 허망한 것을 표현하는 것은, 
반드시 참된 것(자상)에 의지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비판은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식전변에 의거해서 참다운 자아와 법이라고 허망되게 집착함을 없애기 위해70) 
임시적 존재[假]와 사현된 존재[似]라는 말을 한다.


이에 근거해서 경전(『후엄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어리석은 범부가 참다운 자아와 법이라고
집착함을 없애기 위해
식이 전변한 것(見分ㆍ相分)에 대해서
가정적으로 자아와 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 ‘식이 전변한 것[識所變]’71)의 양상은 많은 종류가 있으나, 
능변(能變)인 식의 종류를 구별하면 오직 세 가지이다.72) 

첫째는 이숙식(異熟識)이니, 
곧 제8식이다. 
대부분73) 이숙성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량식(思量識)이니, 
곧 제7식이다. 
항상 살피고 사량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니, 
곧 전6식(前六識)이다.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의 제2게송에서) ‘및[及]’이라는 말은 여섯 가지 식을 합해서 한 종류가 됨을 나타낸다. 
이 세 종류를 모두 능변의 식이라고 이름한다.◂
 


능변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인능변(因能變)74)이니, 

제8식 중의 등류습기와 이숙습기의 두 가지 원인[因:업종자]의 습기를 말한다. 

등류습기(等流習氣)75)를 
7식 중의 선ㆍ악ㆍ무기에 의해 훈습하여 
생성ㆍ증장하게 한다. 

이숙습기(異熟習氣)76)를 
6식 중의 유루의 선ㆍ악에 의해 훈습하여 
생성ㆍ증장하게 한다.


둘째는 과능변(果能變)77)이니,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습기의 세력에 의해 8식[自體分]이 생겨나서 
갖가지 양상을 나타냄을 말한다. 

등류습기를 인연으로 함으로써 
8식의 체상이 차별적으로 생겨난다. 
이것을 등류과라고 이름하니, 
결과가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숙습기를 증상연으로 하여, 
제8식을 초감(招感)한다. 

인업(引業)78)의 힘에 응하여 항상 상속하기 때문에 
이숙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 

전6식도 초감한다. 
만업(滿業)79)에 응하는 것은 이숙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숙생(異熟生)이라고 이름한다.80) 

이숙이라고는 이름하지 않으니, 
잠시 단절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81) 
곧 앞의 이숙(제8식)과 이숙생을 이숙과라고 이름한다. 
결과가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아애(我愛)로써 집착되고, 
잡염의 종자를 지니는 능변의 과식(果識)을 말하며, 
이름하여 이숙식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능변의 세 가지 명칭을 간략하게 말했는데, 
능변의 세 가지 체상을 자세하게 판별하지 않았다. 
우선 초능변식(初能變識)의 체상은 어떠한가?82)




게송(『삼십송」의 제2ㆍ3ㆍ4 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 번째는 아뢰야식이고, 
이숙식이며, 
일체종자식이니라.

감지하기 어려운 집수(執受)와 기세간[處]의
요별을 갖네.
항상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심소와 상응한다.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하네.

이것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니, 

촉 등도 역시 그러하다.
항상 폭류(暴流)의 흐름처럼 유전(流轉)한다.
아라한위에서 버리네.83)



논하여 말한다.84) 

첫 번째 능변식[初能變識]은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에서 아뢰야식이라고 이름한다.85) 

이 식에 구체적으로 능장(能藏)ㆍ소장(所藏)ㆍ집장(執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능장ㆍ소장의 뜻은) 잡염법과 서로 연(緣)이 되기 때문이며, 
(집장의 뜻은) 유정(제7식)이 집착해서 자기 내면의 자아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초능변식에 있는 자체의 양상[自相]을 나타낸다.86) 

원인ㆍ결과를 거두어 지녀서 자상을 삼기 때문이다. 




이 식의 자상은 분위(分位)가 많지만 장식(藏識)이라 이름하는 것은, 
첫 번째 지위이면서 과실이 크기 때문에 이에 비중을 두어 이름한 것이다.87)

이것은 능히 모든 계(界)ㆍ취(趣)ㆍ생(生)을 이끄는 선업ㆍ불선업의 이숙과이므로88) 
이숙식(異熟識)이라고 이름한다.


이것 이외에는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 등 
항상 상속하여 뛰어난 이숙과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초능변식에 있는 과보로서의 체상[果相]을 나타내 보인다.89) 

이 식의 과상(果相)은 지위도 많고 종류도 많지만, 90) 
널리 통하고[寬] 함께하지 않으므로[不共], 91) 
이에 비중을 두어 이숙식이라고 말한다.92)



이것이 능히 일체법의 종자를 유지해서[執持] 잃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일체종자식이라고 이름한다. 


이것 이외에 다른 법이 능히 두루 일체법의 종자를 지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93) 이것은 곧 초능변식에 있는 원인으로서의 체상[因相]을 나타내 보인다.94) 이것의 인상(因相)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종자를 지니는 것이 공통되지 않으므로, 
이에 비중을 두어 일체종자식이라고 말한다.95) 초능변식의 체상이 많긴 하지만, 
간략히 말해서 오직 이와 같은 세 가지 체상96)이 있다고 말한다.
일체종자식의 체상을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97) 이 가운데에서 어떤 법을 종자라고 이름하는가? 
근본식 안에서 직접 자기 결과를 일으키는 공능차별(功能差別)98)을 말한다. 
이것은 근본식이 현행된 결과(7식 등)와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不一不異].99) 체성(근본식)과 작용(종자), 
원인ㆍ결과의 이치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100)
비록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지만, 
이것은 실유(實有)이다.101) 임시적인 존재[假法]는 존재하지 않음[無]과 같아서 인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102)이것은 일체법과 이미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므로 병(甁) 등의 경우처럼 가유(假有)이지 실유가 아니라고 말한다.103) 만약 그렇다면 진여도 임시적 존재이어야 한다. 


그렇게 인정한다면 곧 문득 참다운 승의제(勝義諦)가 아닌 것이 된다.104)
그런데 모든 종자는 오직 세속제(世俗諦)에 근거해서 실유라고 말한 것이니, 
진여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105) 종자는 비록 제8식의 자체에 의지하지만, 
이 식의 상분일 뿐 다른 것(見分 등)이 아니다.106) 견분이 항상 이것을 취해서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107)모든 유루종자는 이숙식과 체성이 다른 것[體別]이 아니므로 무기성에 포함된다.108) 원인도 결과도 모두 선(善) 등 세 가지 성품이 있으므로 역시 선종자(善種子) 등이라고 이름한다.109)
모든 무루종자는 이숙식의 성품에 포함되지 않고, 
110) 원인도 결과도 모두 선(善)의 성품이기 때문에 오직 선종자라고 이름한다.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유가사지론」 제57권의) 『섭결택분」에서 22근(根)111)을 설명하여, 
일체가 다 이숙종자가 있다고 하며 모두 이숙생(異熟生)이라고 하는가? 
비록 이숙이라고 이름하더라도 무기성은 아니다. 
이숙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숙종자라고 이름한다. 
성품을 달리하면서 서로 의지하는 것이 안식 등과 같다.112) 또한 무루종자는 훈습력에 의해 전변ㆍ성숙되기 때문에 이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무기성에 섭수되는 이숙이 아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13) 

일체 종자는 모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지, 
훈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훈습력에 의해 다만 증장할 뿐이다.경전114)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유정은 아득한 옛적부터 갖가지 계(界)가 있어서, 
비유하면 악차(惡次) 열매가 쌓여 있는 것과 같이115) 본래부터 존재한다”116)고 한다. 
여기서 계(界)는 종자의 다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전에서 말씀하기를 “아득한 옛적부터 계는 일체법 등의 의지처이다”117)라고 한다. 
여기서 계는 원인[因]의 뜻이다.
『유가사지론」에서 역시 말하기를 “모든 종자의 자체는 아득한 옛적부터 체성이 비록 본유(本有)이지만, 
잡염과 청정한 업으로 인해 새롭게 훈습된다”118)고 한다. 
또한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 
모든 유정의 무리 중에서 아득한 옛적부터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般涅槃法]가 있는 사람은 일체(有漏ㆍ無漏) 종자가 모두 다 구족해 있으며,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가 없는 사람은 곧 세 가지 보리종자119)가 없다고 말한다.120) 이와 같은 문장으로 증명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또한 (『능가경』에서) 모든 유정은 이미 본래 다섯 종성[五種姓]121)의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122) 그러므로 반드시 본래부터 존재하는 종자가 있으며, 
훈습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또한 『유가사지론』에서 말하기를 “지옥에서 세 가지 무루근(無漏根)을 성취하는데, 
이것은 종자이지 현행이 아니다”123)라고 한다. 
또한 (『유가론」 제35권 등에서) 아득한 옛적부터 전전(展轉)히 전래하여 본래부터 존재하는 본성에 안주하는 종성[本性住姓:
본유종자]이라고 말한다.124)
이와 같은 종류의 증명문장에 의거해 볼 때, 
무루종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지, 
훈습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다. 
유루종자도 역시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훈습을 받아 증장하는 것이지, 
따로 훈습을 받아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건립하여 원인(종자)과 결과(현행)가 정연하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25) 종자는 모두 훈습을 받아서 생겨난다. 
훈습을 받아들이는 것과 훈습하는 것이 모두 아득한 옛적부터 있기 때문에 종자는 아득한 옛적부터 이루어진다.126)종자는 습기의 다른 명칭이고, 
습기는 반드시 훈습에 의해 있게 된다. 
삼[麻]의 냄새가 꽃에 의해 훈습해서 생기는 것과 같다.127)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유정의 마음은 잡염과 청정의 여러 법에 의해 훈습을 받아서, 
한량없는 종자가 모여진 곳이라고128) 한다.
논서에서 말하기를 “내면세계의 종자는 반드시 훈습이 있고, 
외부세계의 종자는 훈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129)고 한다.또한 명언종자 등 세 가지 훈습130)에 모든 유루법의 종자를 전체적으로 포함한다. 
그 세 가지는 훈습에 의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유루종자는 반드시 훈습에 의해 생겨난다.
무루종자가 생겨나는 것도 역시 훈습에 의해서이다. 
(『섭대승론』 상권에서) 문훈습(聞熏習)은 청정법계로부터 평등하게 흘러나오는 바른 법을 듣고 훈습되어 일어난다131)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간을 벗어난 마음[無漏心]의 종자 성품이기 때문이다. 
유정이 본래 종성의 차별이 있는 것은 무루종자의 있고 없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장애(번뇌장ㆍ소지장)의 있고 없음에 의해서 건립한다.132)
『유가사지론」에서 말하기를 “만약 진여의 경지에 대해서 궁극적인 두 가지 장애의 종자가 있는 사람은,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가 없는 종성[不般涅槃法姓]133)이다”134)라고 한다. 
만약 궁극적인 소지장의 종자가 있고 번뇌장의 종자가 없으면, 
한 부류[鈍根]는 성문종성으로 하고, 
또 한 부류[利根]는 독각종성으로 한다. 
만약 궁극적인 두 장애의 종자가 없으면, 
곧 여래종성(보살종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래 종성(種姓)의 차별은 장애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지, 
무루종자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유가사지론」에서 지옥의 세 가지) 무루종자를 성취한다고 말한 것은 장차 생겨날 가능성에 의한 것이지, 
이미 무루종자의 본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135)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36) 종자는 각기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본래부터 있는 종자[本有種子]이니, 
아득한 옛적부터 이숙식 중에서 본래부터 존재하여 온(蘊)ㆍ처(處)ㆍ계(界)를 일으키는 공능차별(功能差別)을 말한다.세존께서 이에 근거해서, 
모든 유정은 아득한 옛적부터 갖가지 계(界)가 있어서, 
마치 악차 열매가 모여 있는 것처럼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외에 앞에서 인용한 증명 문장을 자세히 말하면, 
앞(호월의 주장)에서와 같다. 
이것을 본성주종자(本性住種子)라고 이름한다.
둘째는 비로소 생겨난 종자[始起種子]이니, 
아득한 옛적부터 누누이 현행에 훈습 받아서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세존께서 이에 근거하여 (『다계경』에서) 유정의 마음이 잡염과 청정의 모든 법에 훈습되어, 
한량없는 종자가 모여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 논서에서도 역시 잡염ㆍ청정법의 종자는 잡염ㆍ청정법의 훈습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것을 곧 훈습에 의해 이루어진 종자[習所成種子]라고 이름한다.만약 오직 본유종자라면, 
전식(轉識)이 아뢰야식과 인연성이 될 수 없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모든 법(현행의 7전식)은 장식(藏識)에 대해서
장식도 법에 대해서 역시 그러하다.
다시 서로 결과의 성질이 되고
역시 항상 원인의 성질이 된다.137)

이 게송의 의미는,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이 어느 때나 전전하여138) 서로 생겨나게 함으로써,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됨을 말한다.『섭대승론석』에서 말하기를 “아뢰야식은 잡염법과 서로 인연이 된다. 
비유하면 심지와 불꽃이 전전하여 일어나서 타오르는 것과 같고, 
갈대 묶은 다발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다”139)고 한다.오직 이 둘(종자ㆍ현행)에 의지해서 인연을 건립한다. 
이외에 다른 인연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종자가 훈습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식(轉識)이 아뢰야식과 인연의 뜻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훈습해서 증장케 하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40) 선악의 업이 이숙과와 인연이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41)
또한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어떤 종자는 훈습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씀한다. 
모두 그 뜻[本有說]과 다르다. 
따라서 오직 본유종자라고 말하면, 
바른 논리[理]와 성스러운 가르침[敎]에 위배된다. 
만약 오직 비로소 생겨난 종자뿐이라면, 
142) 유위의 무루법143)은 인연이 없기 때문에 생겨날 수 없어야 한다. 
유루는 무루의 종자가 될 수 없다. 
무루종자가 유루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44) 그렇다면 모든 부처님에게 유루종자가 다시는 생겨나지 말아야 하고, 
선(善) 등을 불선 등의 종자로 삼지 말아야 한다.
분별론자145)는, 
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한데 객진번뇌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잡염이라고 이름하며, 
번뇌를 여의었을 때에 바뀌어 무루를 이루므로 무루법은 원인이 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의 본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만약 공의 진리[空理:
진여]라고 말하면, 
146) 공은 마음의 원인이 아니다. 
상주하는 법은 반드시 일체법의 종자가 아니므로 본체가 전후하여 전변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심왕[心]이라고 말하면, 
수론파(數論派)에서 말하듯이 양상(大 등)은 전변하지만 본체는 상주불변[常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147)악(惡)과 무기의 마음도 역시 선(善)이어야 한다.148) 그렇다고 인정하면, 
곧 신(信)심소 등과 상응해야 한다.149) 인정하지 않으면, 
문득 착한 마음의 본체가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선이라고도 이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무루이겠는가? 
유루의 착한 마음은 이미 잡염과 칭합(稱合)하므로, 
150) 악한 마음 등처럼 본성이 무루가 아니어야 한다.따라서 무루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선과 악 등은 서로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유루심의 본성이 무루라면, 
무루심의 본성이 유루이어야 한다. 
차별된 인연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151)
만약 중생의 마음이 무루라고 말하면, 
곧 중생의 지위에서 무루가현행하여, 
성자(聖者)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만약 중생심이 본성은 무루지만, 
양상이 잡염이 있으므로 무루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이것이 과실이 없다면, 
곧 마음의 종자도 역시 무루가 아니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논서에서 어떤 중생은 오직 무루종자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152) 종자와 현행의 본성[無漏]과 양상[有漏]이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고 말씀한 것은, 
153) 마음의 공성(空性)에서 나타난 진여를 말한다. 
진여는 마음의 참다운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는 마음의 본체[心體]154)가 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본성이 본래 청정하다고 이름한 것이지, 
유루심의 본성155)이 무루이기 때문에 본성청정[本淨]이라고 이름한 것은 아니다.



【정의】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한다. 
모든 유정은 아득한 옛적부터 무루의 종자가 있으며, 
훈습에 의하지 않고 본래부터 성취된 것이다. 
이후에 승진하는 지위156)에서 훈습해서 증장하게 한다. 
무루법이 일어나는 것도 이것(본유무루종자)이 원인이 된다. 
무루가 일어날 때157)에, 
다시 종자(신훈종자)를 훈습해서 이룬다. 
유루법의 종자도 이에 비추어서 본유ㆍ신훈 종자의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비록 내부세계의 종자에 반드시 훈습이 있다고 말씀하지만, 
모든 종자가 결정적으로 훈습에 의해 생겨난다는 뜻은 아니다. 
어째서 본유종자가 전혀 없다고 부정하는가? 
그러나 본유종자도 역시 훈습에 의해 증성(增盛)되어 비로소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내부세계의 종자에 반드시 훈습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문훈습(聞熏習)은 오직 유루종자는 아니다. 
정법을 들을 때에 역시 본유의 무루종자를 훈습하여 점차 증성하게 해서, 
전전하여 나아가 출세간의 마음을 일으킨다. 
따라서 역시 이것(본유무루종자)을 문훈습이라고 이름한다.
문훈습 중에서 유루성품은 수도(修道)에서 단멸되어야 할 성질의 것[修所斷]이다.158) 뛰어난 이숙을 초감하고, 
출세간법을 위한 뛰어난 증상연(增上緣)이다.무루성품은 수도에서 단멸시켜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非所斷], 
출세간법의 진정한 인연이 된다. 
이 진정한 인연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알기 어렵다. 
어떤 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뛰어난 증상연이 됨에 의거해서, 
방편으로 출세간심의 종자[非正因緣]라고 말한다.159)
(『유가사지론』 제52권에서) 장애에 의해 종성의 차별을 건립한다고 말한 의미는, 
무루종자가 있고 없음을 나타낸다. 
만약 전혀 무루종자가 없는 사람이 그 두 가지 장애(번뇌장ㆍ소지장)를 영원히 없앨 수 없다면, 
곧 그를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가 없는 종성[非涅槃法姓:
無性闡提]이라고 말한다. 
만약 오직 2승(乘)의 무루종자만 있는 사람이 그 소지장의 종자를 영원히 없애지 못하면, 
한 부류[鈍根]는 성문종성이라고 하고, 
또 한 부류[利根]는 독각종성이라고 건립한다. 
만약 역시 부처님의 무루종자가 있는 사람이 그 두 가지 장애의 종자를 영원히 없앨 수 있으면, 
곧 그를 여래종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루종자의 있고 없음에 의거해서, 
장애에 끊을 수 있고 끊을 수 없는 뜻이 있게 된다.
그런데 무루종자는 미세하고 은밀해서 알기 어려우므로, 
그 장애에 연결 지어서 종성의 차별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장애에 어떤 차이가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그러나 끊을 수 있고 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만약 본래부터 이 장애의 차별이 있다고 말하면, 
무루법의 종자는 어째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만약 본래부터 전혀 무루법의 종자가 없다면, 
곧 모든 성도(聖道)는 영원히 생겨날 수 없어야 한다. 
누가 장차 능히 두 가지 장애의 종자를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대들은 장애에 의해서 종성의 차이를 건립한다고 말한다. 
이미 그 성도가 반드시 생겨나는 의미가 없다. 
장차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반드시 바른 논리가 아니다.
그런데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의 여러 곳에서 본유종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주장과160) 다르다.161) 따라서 오직 비로소 생겨난 종자뿐이라는 주장은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된다.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모든 법의 종자는 각각 본래부터 있는 종자와 훈습에 의해 비로소 생겨난 종자의 두 종류가 있다.
그런데 종자의 개념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찰나에 생멸한다[刹那滅]. 
종자의 자체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다음 순간에 반드시 멸함으로써 뛰어난 세력이 있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 
이것은 상주불변의 법162)을 부정한다. 
상주불변해서 전변이 없는 것은 능히 생겨나게 하는 작용이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결과와 함께 존재한다[果俱有]. 
일어난 현행의 결과법과 함께 현현하여 화합하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 
이것은 (원인ㆍ결과가) 앞과 뒤로 시간을 달리한다는 주장163)과 반드시 별개로 존재한다[相離]는 주장164)을 부정한다. 
현행과 종자는 다른 종류이므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165) 한 몸에 함께할 때 능히 생겨나게 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종자가 자기 부류를 서로 생겨나게 해서, 
전법과 후법이 서로 달라 반드시 함께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166) 원인과 결과는 함께하는 것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 있지만, 
167) 현행할 때에 원인의 작용이 있을 수 있으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미래)과 이미 멸한 것(과거)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결과를 일으키는 데서 종자라는 명칭을 붙임에 의하는 것이지, 
자기 부류를 이끌어 내는 것을 종자라고 이름함에 의하지 않는다.168) 그러므로 다만 결과와 함께 있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恒隨轉]. 
반드시 오래도록 한 종류로 상속해서 구경위에 이르는 것169)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 
이것은 종자가 전식(轉識)이 아니라는 뜻이다. 
(전식은 三性이) 바뀌고[轉易]170) 잠시 중단됨이 있어서, 
종자의 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자가 자기 부류를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自類相生]을 나타낸다.
넷째, 
성품이 결정적이다[性決定]. 
원인의 세력에 따라 선과 악 등을 일으키는 능력이 결정되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 
이것은 다른 부파(설일체유부 등)에서 다른 성질의 원인이 다른 성질의 결과를 일으키는 데 인연의 뜻이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부정한다.
다섯째, 
여러 가지 연(緣)을 기다린다[待衆緣]. 
반드시 자기의 여러 연(緣)의 화합을 기다려서 작용의 능력이 뛰어나게 되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 
이것은 외도가 집착하듯이, 
자연히 존재하는 원인[自然因]이 여러 연(緣)을 기다리지 않고 항상 단박에 결과를 일으킨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또한 다른 부파에서 연(緣)이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하고, 
필요로 하는 연이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171) 따라서 종자는 결과에 대해서 항상 단박에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섯째, 
자신의 결과를 이끌어 낸다[引自果]. 
갖가지 색법ㆍ심법 등의 결과를 각각 이끌어 내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 
이것은 외도가 오직 하나의 원인(대자재천)이 모든 결과를 일으킨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부정한다. 
또한 다른 부파172)가 색법과 심법이 서로 인연이 된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부정한다.
오직 근본식 중의 공능차별(功能差別)이 이 여섯 가지 뜻을 갖추어 종자를 이룬다.173)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외부세계의 곡식ㆍ보리 등은 식이 전변한 것이기 때문에 종자라는 이름을 가립하지만, 
174) 참다운 의미의 종자는 아니다. 
이 종자의 세력이 가까운 결과[近果]와 진정한 결과[正果]를 일으키는 것을 생인(生因)이라 이름하고, 
먼 결과[遠果]와 나머지 결과[殘果]를 이끌어 갑자기 단절되지 않게 하는 것을 인인(引因)이라고 한다.175)
내부세계의 종자는 반드시 훈습에 의해 생겨나고[新熏種子] 증장해서[本有種子] 직접 결과를 일으킨다. 
이것이 인연의 속성이다.176) 외부세계의 종자에는 훈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외부세계의 종자는 증상연이 되어 생겨난 결과를 판별한다. 
반드시 내부세계의 종자로써 그것[外種]의 인연으로 삼는다. 
이것은 공상(共相)의 종자177)가 생겨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떤 뜻에 근거해서 훈습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가? 
훈습을 받는 것[所熏]과 능히 훈습하는 것[能熏]에 각기 네 가지 의미가 있다.178) 종자를 생겨나고 증장케 하므로 훈습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소훈(所熏)의 네 가지 뜻이라고 이름하는가? 
첫째, 
견고하게 머무는 속성[堅住性]이다. 
만약 법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종류로 상속해서 능히 습기를 유지한다면, 
이것이 곧 소훈이다. 
이것은 전식(轉識)과 소리ㆍ바람 등179)이 아님을 말한다.180) 그것들은 체성이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에 소훈이 되지 못한다.
둘째, 
무기의 성품[無記性]이다. 
만약 법이 평등하여181) 거스르는[違逆] 것이 없어서, 
능히 습기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곧 소훈이다. 
선(善)과 잡염의 성품은 세력이 강성해서 (다른 성질의 법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훈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제8청정식은 오직 본래의 종자[舊種:
무루종자]를 유지하며 새롭게 훈습을 받지 않는다.
셋째, 
훈습을 받을 수 있는 속성[可熏性]이다. 
만약 법이 자재하고182) 체성이 응연상주(凝然常住:
堅密)하지 않아서183) 능히 습기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곧 소훈이다. 
심소법 및 무위법은 다른 것에 의지하고[心所法], 
응연상주하기[無爲法] 때문에 소훈이 아니다.
넷째, 
능훈과 함께 화합하는 속성[和合性]이다. 
만약 능훈과 시간을 같이하고 장소를 같이하여 하나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不卽不離] 것이라면, 
이것이 곧 소훈이다.다른 사람[他身]184)이나 원인ㆍ결과가 전찰나와 후찰나에 존재하는 것은, 
185) 화합의 뜻이 없기 때문에 소훈이 되지 못한다.오직 이숙식만이 이 네 가지 뜻을 갖추어 소훈이 될 수 있다. 
심소186) 등187)은 아니다
무엇을 능훈(能熏)의 네 가지 뜻이라고 이름하는가?첫째, 
생멸이 있는 것이다[有生滅]. 
만약 법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고 능히 작용188)을 지녀서, 
습기를 생겨나게 하고(신훈종자) 증장케 하는(본유종자) 것이라면, 
이것이 곧 능훈이다. 
무위법은 전후로 변함이 없어서 생겨남ㆍ증장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능훈이 아니다.
둘째, 
뛰어난 작용이 있는 것이다[有勝用]. 
만약 생멸함이 있고 세력이 증성(增盛)해서 능히 습기를 이끌어 낸다면, 
이것이 곧 능훈이다. 
이숙의 심왕과 심소[見分] 등189)은 세력이 미약해서 능훈이 되지 못한다.
셋째, 
증감이 있는 것이다[有增減]. 
만약 뛰어난 작용이 있어 증성(增盛)할 수 있고 감소할 수 있어서 습기를 거두어 이식한다면, 
이것이 곧 능훈이다. 
부처님의 지위[佛果]에서 원만한 선법(善法)은 증가도 감소도 없기 때문에 능훈이 아니다. 
그것이 능훈이라면 곧 원만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 지위에서 전찰나와 후찰나에 뛰어남과 열등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190)
넷째, 
소훈과 화합하여 전전하는 것이다[和合性]. 
만약 소훈과 시간을 같이하고 장소를 같이해서 하나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이 곧 능훈이다.다른 사람이나 원인ㆍ결과가 전찰나와 후찰나에 존재하는 것은, 
화합의 뜻이 없기 때문에 능훈이 아니다. 
오직 7전식과 그 심소가 뛰어난 작용이 있어서 증성하고 감소하므로 이 네 가지 뜻을 갖춤으로써 곧 능훈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능훈식과 소훈식이 함께 생멸해서 훈습의 뜻이 성립된다. 
훈습을 받아들이는 곳[所熏處:
제8식]에 있는 종자를 생겨나게 하고 증장케 하는 것이, 
거승(苣藤)의 훈습과 같기 때문에 훈습이라고 이름한다.
능훈식 등이 종자에서 현행할 때에 곧 능히 원인이 되어 다시 종자를 훈습한다.191) 세 가지 법(본유ㆍ현행ㆍ신훈종자)이 전전해서 원인과 결과가 시간을 같이한다.192) 비유하면 심지가 불꽃을 일으키고, 
불꽃이 심지를 타오르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갈대 묶은 다발이 다시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 
원인과 결과가 시간을 함께한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가 기울어지지 않는다.
능훈이 종자를 생겨나게 하고 종자가 현행을 일으키는 것은, 
소승에서 주장하듯이 구유인(俱有因)으로써 사용과(士用果)를 얻는다고193) 말함과 같다. 
종자가 전후하여 자기 부류로서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은, 
대승에서 주장하듯이 동류인(同類因)으로써 등류과(等流果)를 이끈다194)고 말함과 같다. 
이 두 가지195)는 결과에 대해서 인연성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법은 모두 인연이 아니다. 
비록 인연이라고 이름하더라도, 
그것은 가설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96) 이상과 같이 일체종자의 양상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 식의 인식작용[行相]197)과 인식대상[所緣]은 어떠한가?(『삼십송」의 제3게송에서) “감지하기 어려운 집수(執受)와 기세간[處]의 요별[了]을 갖네”라고 말한다. 
‘요(了)’는 요별이니, 
곧 인식작용[行相]이다. 
식(자체분)은 요별로써 행상(行相:
견분)을 삼기 때문이다. 
‘처(處)’는 처소이니, 
곧 기세간(器世間)이다. 
이것은 모든 유정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집수(執受)’에 두 가지가 있으니, 
곧 모든 종자와 신체[有根身]이다.198) 모든 종자는 형상ㆍ명칭ㆍ분별의 습기이다. 
유근신(有根身)은 바로 모든 감각기관[色根:
승의근]과 부진근(扶塵根:
根依處)이다.199) 이 둘은 모두 식에 집수(執受)되고 거두어서 자체로 삼는다. 
양호한 상태[安]와 좋지 못한 상태[危]를 함께하기 때문이다.200)
집수와 자연계는 모두 인식대상이다. 
아뢰야식은 인(因)과 연(緣)의 세력에 의해 자체가 현행할 때, 
201) 안으로는 종자와 신체를 변현하고, 
밖으로는 자연계를 변현한다. 
곧 전변된 것으로써 자신의 인식대상(상분)을 삼고, 
인식작용(견분)은 그것(상분)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별’이란, 
이숙식이 자기의 인식대상[所緣]202)에 대해서 요별의 작용이 있음을 말한다.203) 이 요별의 작용은 견분에 포함된다.
그런데 유루식의 자체가 일어날 때에 모두 인식대상과 인식주관의 모습으로 사현(似現)한다.204) 그것의 상응법(심소)도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205) 인식대상으로 사현하는 양상을 상분이라 하고, 
인식주관으로 사현하는 양상을 견분이라 이름한다.
만약 심왕과 심소가 소연(所緣)의 양상이 없다면, 
자기의 소연인 대상[所緣境]을 능히 반연할 수 없어야 한다.206) 혹은 하나하나가 능히 모두를 반연해야 하고 자기의 외부대상도 다른 사람의 대상과 같으며, 
다른 사람의 대상도 자신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207)
만약 심왕과 심소에 능연(能緣)의 양상이 없다면, 
능히 반연할 수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허공 등과 같다. 
혹은 허공 등도 역시 능연이어야 한다.따라서 심왕과 심소는 반드시 두 가지 양상이 있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일체는 오직 인식하는 것[覺]208)이 있을 뿐이다.
인식대상[所覺:
心外實境]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인식주체[能覺分:
견분]와 인식대상[所覺分:
상분]이
각기 다르게 자연히 전전한다.209)

식에서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은 외부대상을 소연(所緣)으로, 
210) 상분을 행상(行相)으로, 
견분을 자체[事]라고 이름한다.이것은 심왕과 심소의 자체상이기 때문이다.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所依]와 인식대상[所緣]을 함께하고 인식작용[行相]이 서로 비슷하다. 
자체[事]211)는 비록 수(數)가 같지만212) 행상이 각기 다르다. 
식(識)ㆍ수(受)ㆍ상(想) 등의 행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식에서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없음을 통달한 사람은 상분을 소연으로, 
견분을 행상이라고 이름한다. 
상분과 견분이 의지하는 자체분을 사(事)라고 이름하니, 
곧 자증분이다. 
이것(자체분)이 만약 없다면, 
스스로 심왕과 심소법을 기억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 인식하지 않았던 대상을 반드시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인 감각기관이 같고 인식대상이 서로 비슷하며 인식작용은 각기 다르다.213) 요별하고[識] 받아들이는[受] 등의 작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자체[事]는 비록 수(數)가 같지만214) 행상이 각기 다르다. 
식(識)ㆍ수(受) 등의 자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왕과 심소는 하나하나 일어날 때에,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각기 세 가지 심분[三分]이 있다. 
인식되는 것[所量]과 인식하는 것[能量]과 인식의 결과[量果]가 다르기 때문이다.215) 상분과 견분은 반드시 의지처인 자체분이 있기 때문이다. 
『집량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상으로 사현한 형상은 인식대상[所量]이다.
능히 형상을 취하고 자증(自證)하는 것이
곧 인식주체[能量]와 인식결과[量果]이다.
이 셋은 자체[體]가 다르지 않다.216)

또한 심왕과 심소를 상세하게 분석하면, 
4분(分)이 있어야 마땅하다.217) 3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다시 제4의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무엇이 제3분을 증명하겠는가? 
심분(心分)이란 이미 같은 것으로써 모두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증분은 인식결과[量果]가 있지 않아야 한다. 
모든 인식하는 것[能量]은 반드시 인식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견분이 제3분의 인식결과[果]이어서는 안 된다. 
견분은 어느 때는 잘못된 인식[非量]에 포함되기 때문이다.218) 따라서 견분은 제3분을 증명하지 못한다. 
자체분을 증명하는 것은 반드시 현량(現量)이기 때문이다.
이 4분 중에서 앞의 둘(상분과 견분)은 외부[外]이고 나머지 둘(자증분과 증자증분)은 내부[內]이다.219) 처음의 하나(상분)는 오직 소연이고, 
나머지 셋은 둘(능연ㆍ소연)에 통한다.제2분은 다만 제1분을 반연한다. 
바른 인식[量]이기도 하고 잘못된 인식이기도 하며, 
현량이기도 하고 비량(比量)이기도 하다. 
제3분은 능히 제2분과 제4분을 반연한다. 
증자증분은 오직 제3분을 반연한다. 
제2분이 아닌 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제3분과 제4분은 모두 현량에 포함된다.
따라서 심왕과 심소는 4분이 합해서 이루어지고, 
소연과 능연을 갖추므로 끝없이 소급해 들어가는 과실이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므로 유식의 도리가 성립된다.그리하여 경전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중생의 마음은 두 가지[內外] 체성이 있다.
내부(자증분ㆍ증자증분)와 외부(상분ㆍ견분)의 일체분이
소취[相縛]와 능취[麤重縛]의 계박[纏]220)이 있다.
견분[見]은 갖가지 차별이 있다.221)

위 게송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중생의 심성은 2분(分)이 합해서 이룬 것이다. 
내부이든 외부이든 모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계박(繫縛)이 있다. 
견분은 갖가지 바른 인식, 
잘못된 인식[非量], 
현량, 
비량(比量) 등 여러 차이가 있다. 
게송에서 ‘견(見)’은 견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4분을 어떤 곳222)에서는 포괄적으로 3분(分)으로 한다. 
제4분을 자증분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어떤 곳223)에서는 거두어 2분(分)으로 한다. 
뒤의 셋은 모두 능연의 성질이기 때문에 모두 견분에 포함시켜서이다. 
여기서(위 게송) ‘견(見)’이라고 말한 것은 능연의 의미이다. 
어떤 곳에서는 거두어 일분(一分)으로 한다.224) 자체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입능가경』의 게송에서 아래처럼 말씀한 것과 같다.

자기 마음의 집착에 의해
마음이 외부대상으로 사현하여 전변한다.
그 인식대상[所見]225)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마음이라고 말한다.226)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오직 한마음[一心]뿐이라고 말한다. 
이 한마음이라는 말에는 또한 심소도 포함된다.따라서 식의 행상(行相)은 요별이고, 
요별은 곧 식의 견분이다.
(『삼십송」의 제3게송에서 말하는) ‘처(處)’는 이숙식이 공상(共相)의 종자를 성숙시킨 세력에 의해 색법 등 기세간의 양상으로 변현된 것을 말한다. 
곧 외부세계227)의 네 가지 요소[四大種]와 그것으로 만들어진 색법이다.
비록 모든 유정의 전변된 것[所變]이 각기 다르지만 양상이 서로 비슷하며, 
처소가 다르지 않다. 
비유하면 많은 등불이 밝기가 각기 두루하여 하나의 등불과 비슷한 이치인 것과 같다.
누구의 이숙식이 이러한 양상을 변현하는가?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그것은 일체228)이다. 
무슨 까닭인가?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229) 모든 유정의 업이 증상력(增上力)에서 함께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불보살(8지 이상)은 실제로 이 잡염ㆍ부정한 국토[雜穢土]를 변현해야 한다. 
중생들은 실제로 다른 세계230)와 이 세계의 모든 청정ㆍ승묘한 국토231)를 변현해야 한다. 
또한 모든 성자는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서 무색계에 태어나서는 반드시 하계에 태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이 국토를 변현해서 다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따라서 현재 거주하는 자와 장차 태어날 자의 그 이숙식이 이 세계를 변현한다. 
경전에서는 일부분에 의거해서 일체라는 말을 한 것이고, 
업이 같은 자는 모두 함께 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32) 만약 그렇다면 기세간이 무너지려 할 때에는 이미 현재 거주하는 자와 장차 태어나는 자가 없는데, 
누구의 이숙식이 이 세계를 변현하는가? 
또한 모든 중생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서 무색계에 태어나면, 
현재 신체[色身]가 없는데, 
장래의 국토를 변현하는 것이 다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설사 신체가 있어도 다른 곳의 기세간과는 두드러짐과 미세함이 현저히 달라서233) 서로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것을 변현하면, 
역시 무슨 도움 되는 것이 있겠는가?
【정의】 변현된 국토는 본래 신체를 의지하고 수용하기 때문에, 
만약 신체에서 의지와 수용이 있을 수 있으면 문득 그것을 변현한다. 
따라서 설사 다른 세계[他三千界]의 자기 지위[自他]에 태어나도 그 식이 역시 이 국토를 변현할 수 있다.234) 그러므로 기세간이 무너지려 할 때나 처음 만들어질 때에도 비록 유정이 없어도 역시 현재 있게 된다. 
이것은 일체가 함께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별도로 수용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것에 견주어서 알아야 한다. 
아귀와 인간과 천인이 본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235)
(앞에서 말한) 모든 종자란, 
이숙식이 지니는 일체 유루법의 종자이다. 
이것은 식의 체성에 포함되기 때문에 소연이다. 
무루법의 종자는 비록 이 식에 의탁하지만, 
이것의 체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소연이 아니다. 
비록 소연은 아니지만, 
서로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여의 성품처럼 유식(唯識)에 위배되지 않는다.
유근신(有根身)이란, 
이숙식이 불공상(不共相)의 종자를 성숙시킨 세력에 의해 색근(승의근)과 부진근을 변현한 것이다. 
곧 내부의 4대(大)와 그것으로 만들어진 색법이다. 
공상의 종자를 성숙시키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장소에서도 역시 그것을 현현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을 수용한다는 뜻이 없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36) 역시 승의근(勝義根)도 변현한다. 
『변중변론(辯中邊論)』에서 자신과 타인의 다섯 감각기관을 변현한다237)고 말하기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38) 오직 부진근[依處]을 변현할 수 있다. 
타인의 감각기관은 자신에게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과 타인의 다섯 감각기관을 변현한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식이 각기 스스로 전변한다는 의미이다.239) 따라서 다른 곳에 태어나도 또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도, 
그 남는 시체는 오히려 남의 눈[見]240)에 상속케 된다.이상 말한 내용은 우선 업력이 전변한 자연계와 신체의 계(界)와 지(地)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만약 선정 등의 힘으로 전변한 자연계와 신체라면 자신과 타인의 세계[界]와 지(地)에 있어서 결정적이지 않다. 
전변한 신체와 기세간은 대부분 항상 상속한다. 
소리나 빛 등을 변현하면, 
대부분 잠시만 존재한다. 
현재 연(緣)의 세력이 격발함에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이다.이 식의 인식대상의 경계[所緣境]를 간략히 말하면241) 유루종자, 
열 가지 색법, 
242) 법처(法處)에 포함되며 현현된 참다운 색법(기세간)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식은 심왕과 심소 등을 변현하여 소연으로 삼을 수 없는가?
【답】 유루식의 전변에 간략히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인연의 세력에 따르기 때문에 전변한다.243) 다른 하나는 분별의 세력에 따르기 때문에 전변한다.244) 앞의 것은 반드시 작용이 있고, 
뒤의 것은 다만 대상을 삼을 뿐이다.
이숙식이 전변하는 것은 다만 인연에 따르고, 
변현된 색법 등은 반드시 실제의 작용이 있다. 
만약 심왕 등을 변현하면, 
문득 실제의 작용이 없다. 
상분의 심왕 등은 능히 반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7식)은 실제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제8식)으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무위법 등을 변현하면, 
역시 실제의 작용이 없다.따라서 이숙식은 심왕 등을 반연하지 않는다. 
무루위에 이를 때에는 뛰어난 지혜와 상응한다. 
비록 분별이 없지만 맑고 청정하기 때문이다. 
설사 실제의 작용은 없어도 역시 그것(무위법)의 영상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부처님에게는 두루하는 지혜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유루위에서 이 이숙식은 다만 자연계ㆍ신체[有根身]ㆍ유루종자를 인식대상으로 한다. 
욕계와 색계에 있을 때는 세 가지 대상(종자ㆍ유근신ㆍ기세간)을 갖춘다. 
무색계 중에서는 유루종자만을 반연하고 물질을 싫어해서 떠나기 때문에 업의 과보로서의 색법이 없다.
선정의 과보로서의 색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 식도 역시 이 색법을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는다.
『삼십송」의 제3게송에서 ‘감지하기 어렵다[不可知]’라는 것은 바로 이것의 인식작용이 매우 미세하므로 감지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또는 이것의 인식대상인 내부세계의 집수대상[執受境]이 역시 미세하기 때문이고, 
외부세계의 자연계도 크기가 광대해서 측량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245)
어째서 이 식의 대상을 취하는 인식작용[行相:
견분]이 알기 어렵다는 것인가? 
멸진정 중에서 신체를 떠나지 않는 식이 있는 것처럼, 
마땅히 믿어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246) 그런데 반드시 멸진정에는 식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247)(멸진정에 든 자도) 역시 유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제6식이 활동하는 지위[有心位]의 기간처럼 무상정 등의 지위에서도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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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01) 이하 불상응행법 가운데 설일체유부 등에서 유위법(有爲法, 
saṃskṛṭa-dharma)의 4상(相:
生ㆍ住ㆍ異ㆍ滅)이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논파한다. 
우선 논주가 묻는다.
2)
002) 유위법은 양상이 속한[所相] 법체(法體)를 말한다. 
유위상(有爲相)은 ‘변화 양상’의 의미로서, 
양상의 주체[能相]인 4상(相)을 가리킨다. 
즉 유위의 법체[所相]에는 그것으로 하여금 능히 생(生, 
jati), 
주(住, 
sthiti), 
이(異, 
jarā), 
멸(滅, 
anityatā)하게 하는 양상[能相]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네 가지 양상 중 주상(住相)을 빼고 세 가지 모습만을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머무름[住]은 변화ㆍ생멸의 뜻이 없어서 무위법으로 오해받기 쉽고, 
유정들이 영원히 머무는 것을 좋아하여 애착심을 낼까 염려되어 말하지 않은 것이다.
3)
003)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12권(『고려대장경』 18, 
p.394中:
『대정장』 2, 
p.607下).
4)
004) 총체적으로 논파한다[廣破]. 
대승에서는 유위법의 네 가지 양상이 색법ㆍ심법 등과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닌[非一非異] 관계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5)
005) 산스끄리뜨 문법에서 명사ㆍ대명사ㆍ수사(數詞)ㆍ형용사의 격변화에 여덟 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한역본에서는 8전성(轉聲)이라고 한다. 
8격(格)은 주격(主格)ㆍ목적격(目的格)ㆍ구격(具格)ㆍ위격(爲格)ㆍ종격(從格)ㆍ속격(屬格)ㆍ처소격(處所格)ㆍ호격(呼格)이다. 
제6의 소리란 제6속격을 말하며, 
6합석(合釋) 중에서는 의주석(依主釋)에 해당한다. 
의주석에는 동체(同體)와 별체(別體)가 있다. 
예를 들면 심체(心體)라고 할 때, 
마음 밖에 별도로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같은 경우를 동체의 의주석이라고 한다. 
또한 산사(山寺)는 산 속의 절이라는 뜻으로서, 
소의(所依)인 산(山)과 능의(能依)인 사(寺)가 자체가 다르므로 별체(別體)의 의주석이라고 한다.
6)
006) 이하 일곱 가지로 부분적으로 하나하나 논파한다[別破]. 
우선 외인(外人)들의 ‘유위법의 유위상(有爲相)’이라는 말을 유위법[所相]과 유위상[能相]의 별체(別體)의 의주석(依主釋)으로 해석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동체(同體)의 의주석도 있다면, 
그대들의 주장은 온당하지 않다고 논파한다.
7)
007) 설일체유부의 본파[古派]를 논파한다. 
그들은 세 가지 양상이 자체는 동시이고 작용은 전후라고 말한다.
8)
008) 설일체유부의 신파(新派)를 논파한다. 
그들은 세 가지 양상이 자체도 작용도 동시라고 주장한다.
9)
009) 원인은 6인(因)을 말하고, 
조건은 4연(緣) 중에서 인연(因緣)을 뺀 나머지 셋을 가리킨다. 
현상계 일체법의 현기(現起)와 운행 원리에 대하여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6인(因) 4연설(緣說)을, 
유식학에서는 10인(因) 4연설(緣說)로 설명한다. 
여섯 가지 원인[因, 
원동력]은 능작인(能作因)ㆍ구유인(俱有因)ㆍ동류인(同類因)ㆍ상응인(相應因)ㆍ변행인(遍行因)ㆍ이숙인(異熟因)이다. 
네 가지 연(緣)은 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이다.
10)
010) 설일체유부에서 동류(同類)의 친인연(親因緣)의 자체가 있고 다른 연(緣)도 역시 합하여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겨남[生] 등의 네 가지 양상은 쓸데없는 것이 된다고 논파한다.
11)
011) 유부에서 네 가지 유위상을 3세에 배대하여, 
생(生)은 미래세에 있고 나머지 셋은 현재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논파한다. 
즉 생과 멸의 유무(有無)를 논하면, 
생은 유이고 멸은 무인데, 
그렇다면 유인 생이 어떻게 아직 현전하지 않은 미래에 있겠으며, 
무인 멸이 어떻게 현재에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12)
012) 진퇴(進退)가 모두 바른 논리가 아니라는 것에 관하여,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제2권 말(末)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 
나아가서[進] 위배되는 것은 체(體)가 함께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설일체유부의 고파(古派)를 비판하는 것이다. 
물러나서[退] 어긋난다고 말하면, 
작용[用]이 어찌 일제히 생겨나지 않겠는가? 
이것은 유부의 신파(新派)를 비판한다. 
둘째, 
나아가서도[進] 바른 논리가 아니라고 말하면, 
멸(滅)이 주(住)와 동시(同時)가 아니어야 한다. 
물러나서도 바른 논리가 아니라고 말하면, 
생과 멸이 이세(異世)라고 말하면, 
곧 자신의 근본교의에 위배된다. 
물러나서도 주(住)와 멸과 동세(同世)라고 말하면, 
곧 정리(正理)에 어긋난다.
13)
013) 찰나(刹那)는 kṣaṇa의 음역(音譯)으로서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한다. 
간혹 차나(叉拏)로 음역하기도 하고, 
염경(念頃)으로 의역(意譯)한다. 
시간의 극소단위를 나타내기 위한 술어인데, 
다분히 관념론적인 극소단위이다. 
실제 그 길이에 대해서는 1초의 1/75이라고도 하고,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것의 1/65이라고도 한다.
14)
014) 찰나에 의거해서 네 가지 유위상을 가립한 것은 설일체유부와 맥락을 같이한다. 
유부에서는 한평생의 네 가지 상[一期四相]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유위법은 찰나마다 모두 네 가지 상을 갖추며, 
한평생의 네 가지 상은 중동분(衆同分)의 상(相)이지 유위상이 아니라고 한다.
15)
015) 한평생의 분위에서 네 가지 유위상을 가립한 것은 정량부(正量部)와 맥락을 같이한다. 
찰나와 한평생의 분위로 가립한 것은 경량부(經量部)와 같이한다.
16)
016) 명(名, 
nāma)은 명칭ㆍ단어ㆍ낱말이라는 뜻이다. 
어떤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의 단어로서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언어표현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구(句, 
pada)는 문구ㆍ문장이라는 뜻으로서 단어로 구성된 문장 전체이다. 
문(文, 
vyañjana)은 글자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오직 식(識)의 표상이다”에서 ‘오’ㆍ‘직’ㆍ‘식(識)’ 등 한 자 한 자가 글자[文]이고, 
‘오직’ㆍ‘식’ㆍ‘표상’ 등의 단어가 명칭[名]이며, 
이들 단어로 구성된 문장 전체가 문구[句]이다. 
명칭의 법신[名身, 
nāma-kāya]은 낱말의 의미를 나타내는 힘이고, 
문구의 법[句身, 
pada-kāya]은 문장의 의미를 나타내는 힘이며, 
글자의 법[文身, 
vyañjana- kāya]은 글자의 의미를 나타내는 힘을 말한다.
17)
017) 다음에 불상응행법 중에서 명칭[名身]ㆍ문구[句身]ㆍ글자[文身]가 실유(實有)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우선 논주가 묻는다.
18)
018) 설일체유부의 견해를 논파한다. 
그들은 현악기나 관악기 소리의 굴곡이 명칭 등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19)
019) 유부에 의하면 바람이나 풍경 등의 소리는 별도로 실재의 명칭 등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승에서도 역시 그것들의 소리는 뜻을 나타냄[詮表]이 없다고 한다.
20)
020) 천애(天愛)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을 의미한다. 
하늘의 사랑을 받아서만이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조롱조의 말투이다.
21)
021) 명칭ㆍ문구ㆍ글자는 가(假)이고, 
소리는 실(實)이다. 
또한 전자는 불상응행법이고 후자는 색법이다.
22)
022) 사무애(事無礙) 중에서 법무애(法無礙)와 사무애(詞無礙)를 말한다. 
법무애는 하나의 명칭ㆍ문구ㆍ글자 중에 모든 명칭ㆍ문구ㆍ글자를 나타내는 것을 자재하게 함을 얻는 것이다. 
사무애는 하나의 음성 중에 일체의 음성을 나타내는 것을 자재하게 함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명칭ㆍ문구ㆍ글자는 법무애의 대상이고, 
소리는 사무애의 대상이다.
23)
023) 5온(蘊)의 분류에서 소리는 색온(色蘊)에, 
명칭 등은 행온(行蘊)에 포함된다. 
12처(處)와 18계(界)에서 소리는 성처(聲處)와 성계(聲界)에, 
명칭 등은 법처(法處)와 법계(法界)에 포함된다.
24)
024) 외인의 비판에 대한 해명이다. 
그들은 향적세계(香積世界)에서는 향(香) 등으로 설법한다고 비판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색법의 굴곡도 역시 명칭 등의 가르침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답변이다.
25)
025) 다음에 대중부(大衆部) 등에서 수면(隨眠)을 불상응행법에 포함시키는 것을 논파한다.
26)
026) 수면(隨眠, 
anuśaya)은 유정의 내부에서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 
세력을 말한다. 
대중부(大衆部는 인간의 심성이 본래 청정하지만, 
객진번뇌(客塵煩惱)에 의해 오염되어 청정하지 않게 된다고 말하고, 
객진번뇌를 현재 작용하는 전(纏, 
parya- vasthāna)과 잠재적인 수면(隨眠)으로 구분한다. 
대중부ㆍ화지부 등에서는 수면이 현행적인 심왕ㆍ심소(心所)가 아니라, 
번뇌를 일으키는 잠재적인 세력이라고 말한다. 
설일체유부에서 수면은 현세태(現勢態)이며 심심소상응법으로 설명한다.
27)
027) 다른 부파와 성실론(成實論) 등의 주장을 논파한다.
28)
028) 이하 무위법(無爲法, 
asaṃskṛta-dharma)의 실유(實有)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설일체유부 등에서 색심(色心)을 떠나서 별도로 무위법의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논파한다.
29)
029) 현량심으로 아는 법이란 5식(識)과 타심지(他心智)의 대상, 
즉 색(色) 등의 5경(境)과 심왕ㆍ심소이다.
30)
030) 안근(眼根) 등 감각기관[根]은 승의근(勝義根)이므로 현량이나 타심지(他心智)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5근(根)의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에 의해 그것의 존재를 추리로써 아는 것[比量]이다.
31)
031) 유부에서 주장하는 세 가지 무위법(허공ㆍ택멸ㆍ비택멸)을 논파한다.
32)
032) 세 가지 무위법의 체일설(體一說)을 논파한다.
33)
033) 유부에서는 모든 번뇌[結法]를 4성제(聖諦) 각각에 있어서 끊는 미혹과 수도(修道)에서 끊는 미혹의 5부로 나누고, 
각 부(部)마다 각각 9품으로 나누어 끊는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택멸(擇滅)의 체일(體一)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한 부 또한 한 품의 미혹을 끊을 때에 아직 끊어지지 않은 나머지 4부 또는 8품의 미혹도 모두 택멸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논파하고 있다.
34)
034) 세 가지 무위법의 체다설(體多說)을 논파한다.
35)
035) 대중부ㆍ일설부(一說部)ㆍ설출세부(說出世部)ㆍ계윤부(鷄胤部)의 9무위설을 논파한다.
36)
036) 이상의 여러 부파를 거듭 총체적으로 논파한다.
37)
037) 이하 여섯 가지 무위법(허공ㆍ택멸ㆍ비택멸ㆍ不動ㆍ想受滅ㆍ진여 무위)을 판별한다. 
소승에서는 무위법이 유위법과 관계없이 별존(別存)한다고 말한다. 
대승에서는 무위법이 역시 일체법의 체성(體性)이라고 말한다. 
먼저 허공(虛空, 
ākāśa)무위에 관하여 말하는데, 
소승에서 허공무위가 다른 것에게 장애되지 않고 또한 다른 것을 장애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일체법을 능히 포용하여 자유자재하게 행동케 하는 상주불변의 공간적 실체를 말한다. 
따라서 이것을 논파하고, 
유식학에서 허공무위는 무위법의 이체(理體)가 번뇌장ㆍ소지장을 멀리 떠나서 현현되기 때문에 비유로서 허공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38)
038) 무루지혜의 간택력(簡擇力)이다.
39)
039) 택멸(擇滅, 
pratisankhyā-nirodha)에서 택(擇)은 간택(簡擇)의 의미로서 무루의 지혜력을 말하고, 
멸(滅)은 적멸(寂滅)의 뜻으로서 모든 번뇌의 계박(繫縛)을 벗어난 열반(涅槃)을 가리킨다. 
즉 무루의 지혜력으로써 진리를 간택해서 번뇌의 계박을 벗어나면, 
거기에 나타난 유선무루(唯善無漏)의 상주법을 택멸이라고 이름한다.
40)
040) 유위법이 생겨나는 연(緣)을 가리킨다.
41)
041) 비택멸(非擇滅, 
apratisankhyā-nirodha)무위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루지혜의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 본래자성청정(本來自性淸淨)한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유위법이 생겨나는 연(緣)이 없어서[缺] 생겨나지 않을 때에 현현되는 것이다.
42)
042) 색계(色界)의 제3선(禪)의 번뇌를 멀리 여의고 제4선에 태어날 때에 모든 고수(苦受)ㆍ낙수(樂受)가 멸하고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한다. 
이것을 부동(不動)이라 하고, 
이때 현현되는 진리는 부동무위라고 말한다.
43)
043) 상수멸무위(想受滅無爲)는 상(想)심소와 수(受)심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멸진정(滅盡定) 중에서 현현된다. 
무색계 제3선(禪)의 번뇌를 멀리 여읠 때, 
즉 유정천(有頂天)에 태어날 때이다.
44)
044) 진여(眞如, 
tathatā)에서 ‘진(眞)’은 진실, 
허망하지 않은 것[不虛妄]을 말하고, 
‘여(如)’는 상주일여 무변역법(常住一如無變易法)을 가리킨다. 
앞의 5무위는 진여에 의해 가립하는 것으로서 원래 별체(別體)가 없다. 
진여라고 말하는 것도 의전문(依詮門)에서 가립하는 명칭이다. 
폐전문(閉詮門)에서는 영원히 명언(名言)을 멀리 여읜다.
45)
045) 색법ㆍ불상응행법ㆍ무위법을 가리킨다.
46)
046) 다음으로 외도와 소승에서 실유(實有)라고 주장되는 색법ㆍ불상응행법ㆍ무위법은 소취(所取)일 뿐이고 실체가 아니며, 
심왕과 심소법도 역시 능취(能取)일 뿐 실체가 아님을 밝힌다.
47)
047) 심왕과 심소도 타심지(他心智)의 소취(所取)이다.
48)
048) 이하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법집[俱生起法執]과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법집[分別起法執]을 복단(伏斷)하는 지위를 밝힌다.
49)
049) 수론(數論)의 근본자성 등이나 승론(勝論)의 실체[實]와 속성[德] 등을 말한다.
50)
050) 나머지 일곱 가지 비유를 가리킨다.
51)
051) 『해심밀경(解深密經)』 제3권(『고려대장경』 10, 
p.723中:
『대정장』 16, 
p.698中).
52)
052)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상분을 가리킨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허망함에 대하여 실유(實有)라고 말한 것이다.
53)
053) 이하 별도로 상좌부(上座部) 등의 주장을 논파한다.
54)
054) 여기서 피취(彼聚)는 타취(他聚)의 것, 
즉 타인의 심왕ㆍ심소를 가리킨다. 
상좌부에서 비판하기를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가 인식대상[所緣]인 타인의 심왕ㆍ심소를 반연하는 것은, 
심외(心外)의 실재의 심법이 아닌가? 
어째서 심외(心外)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라고 한다. 
본문은 그것에 대한 답변이다. 
즉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의 인식대상인 타인의 심왕ㆍ심소[彼聚]는 자기의 심왕ㆍ심소[此聚]에서의 식(識)의 친소연연이 아니다. 
마치 인식대상이 아닌 것, 
즉 소리가 안식의 인식대상이 아닌 것과 같다. 
자체에 있어서도 심왕과 심소는 체성이 다르기[體別] 때문에 자취(自聚)의 심소는 심왕의 친소연연(親所緣緣)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논파한다.
55)
055) 『후엄경(厚嚴經)』에 설해져 있다고 한다.
56)
056) 이하 외도가 비판하기를, 
실아실법(實我實法)이 없다면 역시 사아사법(似我似法)도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논파한다. 
먼저 그들의 주장을 서술한 뒤에, 
가법(假法)의 근거는 실법(實法)이 아님을 논증하고, 
바로 식이 전변된 것[識所變]임을 밝힌다.
57)
057) 바라문(婆羅門)을 가리킨다. 
그들의 얼굴이 붉으므로 황적성(黃赤性)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58)
058) 무겁게 짐을 진 사람의 모습이 소[牛]와 같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소 같다고 말한다. 
이것은 소라는 진짜 사물[眞事]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자아와 법의 참된 사물[眞事]이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다.
59)
059) 승론(勝論)학파로부터의 비판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60)
060) 여기서 유(類)는 특수성(viśeṣa, 
異 또는 同異性)을 말하고, 
실(實)은 실체(dravya)의 범주[實句義]이다.
61)
061) 맹렬함은 불[火]의 속성이고, 
붉은 것은 색(色의 속성이다. 
불에 있어서 동이성(同異性:
類)은 속성[德]이 아니다. 
따라서 동이성에 의해서 가설할 수 없다는 뜻이다.
62)
062) 맹렬하고 붉은 것을 가리킨다.
63)
063) 상좌부에서 주장하기를, 
사람의 특수성은 반드시 불의 속성인 맹렬함ㆍ붉음 등의 법과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불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한다. 
논주가 그것을 논파하여 말하기를, 
사람 중에 맹적(猛敵:
바라문)이 아닌 사람이 있으니, 
곧 사람[人類]과 맹적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64)
064) 앞에서 물[水]에 있어서도 불 등으로 이름해야 하는 과실을 가리킨다.
65)
065) 세상에서는 다만 사람이 불과 비슷하다고만 말하지, 
속성[德]이 불과 비슷하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66)
066) 소승을 논파한다.
67)
067)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은 모든 법에 갖추어져 있는 모습이다. 
자체에 한정된 모습을 자상이라고 하고, 
다른 것[他]에 공통되는 모습을 공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5온(蘊)에 있어서 5온의 각각은 자상이고, 
공무아(空無我) 등의 도리나 생주이멸(生住異滅) 등의 양상과 같은 것은 공상이 된다. 
여기서 자상이라는 것은 언설을 떠난[離言] 자상으로서, 
가지(假智)가 능히 알고 가전(假詮)의 대상이라면, 
‘불[火]’ 하고 부르면 입을 태우고, 
‘물[水]’ 하고 부르면 입을 적셔야 할 것이 아닌가? 
따라서 가지(假智)와 가전(假詮)은 오직 공상(共相)의 대상에서만 전전한다.
68)
068) 가지(假智)와 가전(假詮)은 자상에 미쳐서 전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69)
069) 의타기성의 공상(共相)을 말한다.
70)
070) 유식학에서 사현된 자아[似我]와 사현된 법[似法]으로 말하는 근거를 밝힌다.
71)
071) 의타기성의 상분과 견분이다.
72)
072) 이하 능변(能變)의 뜻을 해설한다. 
먼저 유식삼십송의 제1ㆍ2 게송 중 앞(본 논서 제1권)에서 말한 “이 능변식……”의 세 구(句를 설명한다.
73)
073) 이숙식이라는 명칭은 범부로부터 보살은 제10지(地)의 맨 나중인 금강심보살까지, 
2승(乘)은 무학과의 성자(아라한)까지의 지위에서의 제8식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숙식이라는 명칭이 뇌야삼위(賴耶三位) 중에서 초위(初位:
藏識)와 제2선(선악업과위)에 통하고 다위(多位)에서 항상 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74)
074) 인(因)은 제8식이 집지(執持)하는 종자를 말한다. 
이 인(因)의 종자로부터 전변해서 만법을 생겨나게 하므로 종자를 능변의 체(體)로 한다. 
여기서 변(變)은 전변(轉變, 
parinama)의 뜻으로서 원인이 전변하여 결과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낸다.
75)
075) 등류(等流)에서 등(等)은 상사(相似)의 뜻으로서 원인[因]이 과성(果性)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유(流)는 유류(流類)의 의미로서 결과가 원인의 부류[類]이므로 류(流)라고 한다. 
등류(等流)는 같은 종류라는 뜻으로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결과를 내는 종자를 말한다. 
선인(善因)에서 선과(善果)를 내고, 
악인(惡因)에서 악과(惡果)를 내는 것처럼, 
종자로부터 일어나는 결과인 현행법과 비슷할 때, 
그것을 등류습기라고 한다.
76)
076) 이숙(異熟)은 성류(性類)를 달리해서 성숙되는 것을 뜻한다. 
이숙습기(異熟習氣)는 이숙과(異熟果)를 가져오는 습기이다. 
원인은 선이나 악이지만, 
그 과체(果體)는 무기인 것을 말한다. 
무기성(無記性)인 신체[有根身]를 나게 한 선ㆍ악업의 종자이다.
77)
077) 여기서 과(果)는 8식의 현행(現行)을 말한다. 
과능변(果能變)은 현행식을 능변의 체(體)로 한다. 
과능변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변이 포함된다. 
첫째는 과거의 업력(業力)이 증장됨으로써 이숙습기가 활동할 수 있게 되어, 
아뢰야식이 다른 중동분(衆同分)으로 태어난다. 
둘째는 등류습기가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아뢰야식으로부터 전식(轉識)이 생기된다. 
셋째는 현행된 8식의 자체분에서 견분과 상분이 변현된다.
78)
078) 총보업(總報業)을 가리킨다. 
이숙과(異熟果)를 초래하는 선ㆍ악업에 총보업ㆍ별보업(別報業)이 있다. 
총보업은 총체적인 과체(果體)로서의 제8식을 이끌어 내므로 인업(引業)이라고도 한다.
79)
079) 별보업(別報業)은 6식을 이끌어 내는 업으로서, 
총보의 과체(果體:
제8식)를 장엄 원만하게 하므로 만업(滿業)이라고도 한다.
80)
080) 총보업에 이끌려 생기된[引生] 제8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하고, 
별보업에 이끌려 생기된 6식을 이숙생(異熟生)이라고 이름한다. 
총보업과 별보업은 별개의 체가 아니라 총보의 과체(果體) 위에 별보의 결과[果]도 감득(感得)한다.
81)
081) 진정한 이숙[眞異熟]인 것은 선악업의 결과이고, 
부단(不斷)이며, 
3계에 두루하는 것의 세 가지 뜻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5식(識)은 잠시 단절됨이 있고, 
제6식도 5위무심(位無心)이라 하여 5위[位:
無想天ㆍ無想定ㆍ滅盡定ㆍ極睡眠ㆍ極悶絶]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6식은 잠시 단절됨이 있으므로, 
이숙(異熟)의 조건인 부단(不斷)의 의미를 결(缺)한다. 
이것은 이숙식에서 생겨난 것[異熟生]이지, 
진이숙(眞異熟)이 아님을 밝힌다.
82)
082) 이하 초능변식(初能變識)에 관한 게송을 총체적으로 열거한다.
83)
083) 이 게송들의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유식론 2ㆍ3ㆍ4 권에 걸쳐 8단(段) 10의문(義門)으로 설명한다. 
우선 10의문은, 
①자상문(自相門:
아뢰야식), 
②과상문(果相門:
이숙식), 
③인상문(因相門:
일체종자식), 
④소연문(所緣門:
執受와 處), 
⑤행상문(行相門:
요별), 
⑥상응문(相應門:
촉ㆍ작의ㆍ수ㆍ상ㆍ사), 
⑦수구문(受俱門:
捨受), 
⑧3성문(性門:
무부무기성ㆍ촉 등도 그러함), 
⑨인과비유문(因果譬喩門:
항상 폭류의 흐름처럼 유전함), 
⑩복단위차문(伏斷位次門:
아라한위이다)이고, 
다음에 8단문(段門)은, 
①②③을 합하여 3상문(相門)으로 하고, 
④⑤를 합하여 소연행상문(所緣行相門)으로 한다. 
그리고 제6에 심소동례문(心所同例門)을 첨가하여 총 여덟 가지로 분단(分段)한다.
84)
084) 이하 제8식의 세 가지 체상[三相]을 총체적으로 설명한다.
85)
085) 능변의 식[能變識]은 전변의 주체[能變]가 되는 식(識)이라는 뜻이다. 
초능변식(初能變識:
제8식)을 아뢰야식(阿賴耶識)ㆍ일체종자심식ㆍ이숙식(異熟識)ㆍ아타나식(阿陀那識)ㆍ심(心) 등으로 이름한다. 
이들 명칭 중에서 아뢰야식(ālaya-vijñāna)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ālaya는 a-√lī(집착하다, 
저장하다, 
저장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 용어는 『숫따니빠따』ㆍ『증일아함경』 등 초기경전에서 ālaya는 ‘집착’, 
‘애(愛)ㆍ낙(樂)ㆍ흔(欣)ㆍ희(喜) 하는 집착의 대상’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비달마구사론』 제16권에는 탐욕ㆍ욕망 등과 나란히 열거되며,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6권에는 애욕의 의미로 사용된다. 
유가유식학파에서는 집착의 근원적인 대상으로서 이 식을 들고―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자아[我, 
ātman]로 착각해서 집착하므로―아뢰야식으로 명명하였다. 
유식학파에서는 ‘집착’의 뜻 이외에 ‘저장’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접두어 a를 첨가한 것은 ‘무몰(無沒)’의 의미, 
즉 이 식이 아득한 옛적부터 끊임없이 항상 작용하기[恒轉如暴流] 때문이다.
86)
086) 자상(自相)은 자체의 양상이라는 의미로서, 
제8식이 뇌야삼장(賴耶三藏), 
즉 능장(能藏:
持種義)ㆍ소장(所藏:
受薰義)ㆍ집장(執藏:
我愛所執義)의 세 가지 뜻을 갖추므로 아뢰야식[藏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말한다. 
유정의 정신적ㆍ신체적 행위는 모두 종자(種子, 
bīja)의 형태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능장(能藏)은 제8식이 능히 모든 잡염법(선ㆍ악ㆍ무기)의 종자를 저장ㆍ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잡염품은 아뢰야식에 결과[異性]로서 저장된다. 
소장(所藏)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8식이 7전식에 의해 모든 잡염법의 훈습을 받아들이는 소훈처(所熏處)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잡염품의 법, 
즉 구체적인 경험세계 속에 그것을 발생한 아뢰야식이 원인[因性]으로서 내재하는 것을 말한다. 
집장(執藏)은 말나식이 아득한 옛적부터 아뢰야식을 자아로 착각하여 아애(我愛)를 일으켜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87)
087) 뇌야삼위(賴耶三位) 중에서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의 제8식을 장식(藏識), 
즉 아뢰야식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말한다. 
뇌야삼위는 수행기간[因位]에서 불과(佛果)의 지위[果位]에 이르는 사이에 제8식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서, 
이외에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가 있다. 
아애집장현행위는 제7식이 제8식의 견분을 인식대상[所緣]으로 하여,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실제적 주체[我, 
ātman]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기간이다. 
범부로부터 보살은 제7지[遠行地]까지, 
2승(乘)은 유학의 성자까지의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고 이름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물론 선악업과위[異熟識]와 상속집지위[阿陀那識]도 병행하지만, 
아애집장현행의 뜻이 가장 강하고 그 과실이 크므로 아뢰야식이라고 부른다. 
제8지[不動地] 이상의 보살과 2승의 무학위(아라한)에서는 순(純)무루종자가 상속해서 아집을 영원히 일으키지 않으므로, 
제8식에 대해서 아뢰야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88)
088) 총보업(總報業)을 가리킨다.
89)
089) 과상(果相)은 과보로서의 체상을 밝힌 것으로서, 
제8식은 유정이 전생에 지은 선악의 업의 과보[異熟果]를 받은 총보(總報)의 주체임을 말한다. 
이 식은 3계(界)ㆍ5취(趣)ㆍ4생(生) 중 어디라도 전생할 종자를 모두 지니고 있는데, 
선이나 악의 강성한 업종자의 조력이 있어야 한다.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성유식론술기』 제1권본에서 ‘성류(性類)를 달리해서 성숙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즉 현재의 제8식을 초래한 전생의 원인[因]은 반드시 강성한 선업이나 악업이고, 
초감(招感)된 제8식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
90)
090) 지위가 많다는 것은 뇌야삼위(賴耶三位) 중 앞의 2위에 통하고, 
또한 5위(位:
범부ㆍ二乘有學ㆍ無學ㆍ十地ㆍ여래지) 중 앞의 4위에 통하는 것을 말한다. 
종류가 많다는 것은 5과(果) 중에서 이숙과ㆍ증상과(增上果)ㆍ등류과의 세 가지 결과[果]를, 
또는 여기에 사용과(士用果)를 더하여 네 가지 결과에 통하는 것을 가리킨다.
91)
091) 이 식의 과상(果相)은 지위도 많고 종류도 많지만, 
이숙식이라는 명칭이 널리 두 가지 지위(뇌야삼위 중 앞의 2위)와 증과의 5위(位) 중 네 가지 지위에 통한다[寬]. 
또한 제8식뿐으로서 다른 법과 함께하지 않는다[不共]. 
따라서 이숙식으로서 과상을 삼는다.
92)
092) 3위(位) 중에서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즉 아득한 옛적부터 선악의 이숙업에 의해 초감된 총보(總報)ㆍ무기(無記)의 과체(果體)의 명칭을 이숙식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밝힌다. 
범부로부터 보살은 금강심보살까지, 
2승은 무학과의 성자(아라한)까지의 지위에서는 제8식을 이숙식(vipāka-vijñāna)이라고 부른다.
93)
093) 경량부의 비유사(譬喩師) 등의 주장을 논파한다. 
그들은 색심호지설(色心互持說)을 집착해서 말하기를, 
유색계에 태어나면 색근(色根) 속에 심왕ㆍ심소의 종자가 있고, 
무색계에 태어나면 심왕ㆍ심소의 종자 등이 있게 되며, 
이와 같이 색법ㆍ심법이 서로 집지(執持)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기서 그것을 논파하여, 
제8식을 떠나서 다른 법이 널리 일체법의 종자를 집지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94)
094) 인상(因相)은 원인으로서의 체상을 밝힌 것이다. 
제8식에 유위(有爲)ㆍ무위(無爲)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색법ㆍ심법 등 모든 법을 현행시키는 원인으로서의 종자를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잃지 않고 보존하다가 그 종자가 현행할 조건을 만나면 결과[果]로서 현행한다.
95)
095)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의 제8식을 일체종자식(sarvabījaka-vijñāna), 
즉 집지식(執持識, 
ādāna-vijñāna)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밝힌다. 
제8식은 아득한 옛적부터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상속하면서 종자를 저장ㆍ보존하고 신체[有根身]를 유지한다. 
수행기간[因位]에서는 유루ㆍ무루의 종자를 지니고, 
깨달음의 지위[佛果位]에서는 무루의 종자를 지닌다.
96)
096) 자상(自相)ㆍ과상(果相)ㆍ인상(因相)의 3상(相)을 가리킨다.
97)

097) 이하 일체 종자의 체상을 구체적으로 10문(門), 
즉 출체문(出體門), 
일이분별문(一異分別門),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 
이제분별문(二諦分別門), 
사분분별문(四分分別門), 
삼성분별문(三性分別門), 
신훈본유분별문(新熏本有分別門), 
구의다소설문(具義多少說門), 
내외종(內外種)의 생인이인(生引二因)을 분별하는 문, 
내외종의 4연(緣)을 판별하는 문으로 나누어 해설한다. 
먼저 종자의 체(體)를 밝힌다.
98)
098) 공능차별(功能差別)의 산스끄리뜨는 śakti-viśeṣa이다. 
또는 sāmarthya- viśeṣa이다. 
śakti, sāmarthya는 ‘힘’ㆍ‘세력’, 
viśeṣa는 ‘특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자는 ‘특별한 힘’, 
곧 ‘특수한 정신적인 에너지’를 뜻한다.
99)
099) 다음에 일이분별문(一異分別門), 
즉 제8식과 종자의 관계가 하나도 아니고 별개의 것도 아님을 밝힌다.
100)
100) 아뢰야식은 자체 안에 종자를 저장ㆍ유지하는데, 
둘은 창고나 저장물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여기서 둘이 어떤 관계인가, 
즉 자체가 별개인가 하나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유식학에서 아뢰야식과 종자는 자체[體]가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라고[不一不異] 설명된다. 
근본식은 자체[體]이고 종자는 작용[用]이기 때문에, 
본체와 작용의 관계에서 둘이 완전히 하나라고도 전혀 다른 것이라도 말할 수 없다. 
또한 종자는 원인[因]이고 생겨난 현행은 결과[果]이기 때문에, 
인과관계에서 둘이 완전히 하나라고도 전혀 다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근본식과 종자는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의 관계임을 밝힌다.
101)
101) 다음에 종자의 가실(假實)을 판별한다[假實分別門].
102)
102) 경량부(經量部)의 비유사(譬喩師)나 중관학파의 청변(淸辯) 등의 비판에 대한 답변이다. 
그 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자에 실체가 있다면 현행법과 전혀 달라야 한다. 
그런데 둘(종자와 현행의 제8식)이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말하기 때문에, 
종자는 실(實)이 아니라 가(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 문장은 그에 대한 답변이다.
103)
103) 안혜(安慧) 등의 비판내용이다.
104)
104) 안혜의 비판에 대한 논주의 논박이다. 
그대의 논리대로라면 진여도 일체법과 불일불이(不一不異)이므로 진여도 가유(假有)이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참다운 승의제(勝義諦)가 없어야 하고, 
무엇에 배대[望]해서 세속제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승의제가 없으므로 열반도 없고, 
무엇 때문에 성불하고자 수행할 것인가 하는 논지이다.
105)
105) 다음에 종자의 가실(假實)을 판별한다. 
이것은 앞에서 안혜(安慧) 등이 종자가 실(實)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므로, 
진여를 예로 들어 종자가 유(有)라는 말을 성립시킨다. 
그리고 종자도 진여와 같은 실유(實有)라고 오해할까 두려워 다시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종자의 유(有)는 세속제에 의거해서 실유이고, 
진여는 승의제에서의 승의(勝義)이다.
106)
106) 다음에 4분(分)을 판별한다.
107)
107) 제8식의 자체분이 소훈처(所熏處)이므로, 
모든 유루종자는 제8식의 자체분을 의지처로 하여 상분이 된다. 
무루종자는 유루의 제8식의 상분이 아니다.
108)
108) 이하 종자의 3성을 판별한다[三性分別門]. 
종자의 작용을 제8식의 자체에 귀속시켜 말하여서 무기성이라고 한 것이다.
109)
109) 앞에서 종자의 성품을 무기성(無記性)이라고 말했지만, 
종자가 항상 오직 무기성만은 아니다. 
종자의 작용과 제8식의 자체를 나누어 따로 논하면[體用別論門], 
능훈의 현행이 3성(性)에 통하므로 훈습되는 종자도 역시 3성에 통한다. 
또한 종자로부터 현행된 일체법이 3성에 통하므로, 
그 원인인 종자도 3성에 통한다.
110)
110) 여기서 성(性)은 체성(體性)과 성류(性類)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체성의 의미로 말하면, 
무루종자의 체성은 다만 선(善)이고 이숙식의 체성은 다만 무기(無記)이므로, 
두 체성이 달라서 무루종자를 이숙식의 성(性)에 포함시킬 수 없다. 
다음에 성류(性類)로 말하면, 
무루종자는 다스리는 주체[能對治] 쪽의 법이고 유루의 이숙식은 다스려지는[所待治] 법이므로 그 성류가 달라서 무루종자를 제8식의 성(性)에 포함시킬 수 없다.
111)
111) 22근(根)은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ㆍ남근(男根)ㆍ여근(女根)ㆍ명근(命根)ㆍ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우근(憂根)ㆍ희근(喜根)ㆍ고근(苦根)ㆍ낙근(樂根)ㆍ사근(捨根)ㆍ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이다. 
이 가운데에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 이하 셋은 무루근(無漏根)이므로 제8식의 성(性)에 포함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들을 모두 이숙의 종자이고 이숙생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는 물음이다.
112)
112) 『유가사지론』 제57권의 「섭결택분」에서 이숙(異熟)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종자의 체(體)가 이숙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8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지처[所依]인 제8식에 따라서 이숙이라고 말할 뿐이다. 
소의인 제8식은 무기(無記)이고 능의(能依)인 종자는 무루로서 성품이 달라도 지장은 없다. 
예를 들면 안식 등은 소의근(所依根)에 따라 그 명칭을 붙이는데, 
소의인 감각기관은 무기이고 능의인 식(識)은 제6식에 따라 3성(性)에 두루한다. 
이와 같이 능의ㆍ소의가 성품이 달라도 지장 없이 식(識)이 감각기관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113)
113) 이하 종자의 신훈본유(新熏本有)를 판별한다. 
우선 유본유설(唯本有說)의 내용을 서술한다. 
이것은 호월(護月, 
Candrapāla)의 주장이라고 한다.
114)
114) 다음에 본유종자를 증명하기 위해 몇몇 경론(經論)을 인용한다.
115)
115) 악차(惡叉, 
rudra-akṣa)는 과일 이름이다. 
속에 있는 씨로 염주를 만들며, 
이것을 금강자(金剛子)ㆍ천목구(天目球)라고 부른다. 
이 과일이 땅에 떨어지면 한 장소에 많이 쌓이므로,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등에서 한 장소에 많이 있는 것을 설명할 때 흔히 이것으로 비유한다.
116)
116)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제2권 말(末)에 의하면, 
『대승장엄경론』에서도 『무진의경(無盡意經)』이라는 명칭으로 이 경전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3승(乘에서 공통적으로 믿는 경전이라고 한다.
117)
117)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에 나와 있다고 한다.
118)
118)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2권(『고려대장경』 15, 
p.473下:
『대정장』 30, 
p.284中).
119)
119) 세 가지 보리종자는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 
즉 3승(乘)의 무루종자를 말한다.
120)
120) 『유가사지론』 제2권(『고려대장경』 15, p.473中:『대정장』 30, p.284上中).
121)
121) 다섯 가지 종성(種姓)은 성문정성(聲聞定姓)ㆍ독각정성(獨覺定姓)ㆍ보살정성(菩薩定姓)ㆍ무성유정(無性有情, 
즉 無性闡提)ㆍ부정성(不定姓)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본 논서 9권에서 다룬다.
122)
122) 『입능가경(入楞伽經)』 제2권(『고려대장경』 10, p.846上:『대정장』 16, p.526下).
123)
123) 『유가사지론』 제57권(『고려대장경』 15, p.954下:『대정장』 30, p.615上).
124)
124) 『유가사지론』 제35권(『고려대장경』 15, p.756中:『대정장』 30, p.478下),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제1권(『고려대장경』 14, 
p.71中:
『대정장』 30, 
p.888中),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제1권(『고려대장경』 14, p.165上:『대정장』 30, p.962下).
125)
125) 다음에 유신훈설(唯新熏說)의 내용을 서술한다. 
이것은 십대논사 중에서 난타(難陀)ㆍ승군(勝軍)의 주장이라고 한다.
126)
126) 유본유가(唯本有家)가 앞에서 일체 종자는 아득한 옛적부터 존재한다는 경문(經文)을 인용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에 답하여 말한다. 
즉 능훈(能熏)과 소훈(所熏)이 모두 아득한 옛적부터 있기 때문에, 
모든 종자가 아득한 옛적부터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지, 
종자 그 자체가 본유(本有)라는 뜻은 아니라고 회통한다.
127)
127) 여기서 삼[麻]은 호마(胡麻)이다. 
인도에서는 호마의 기름으로 향유(香油)를 만들어 피부에 바르는 풍습이 있다. 
그 방향(芳香)을 내는 기름의 원료는 호마에 꽃의 향기를 쬔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그런 비유를 든 것이다.
128)
128) 『성유식론술기』 제2권 말(末에 의하면, 
『다계경(多界經)』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129)
129) 『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 상권(『고려대장경』 16, p.1341上:『대정장』 31, p.135中).
130)
130) 명언종자(名言種子)ㆍ아집종자(我執種子)ㆍ유지종자(有支種子)를 말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본 논서 제8권에 있다.
131)
131) 『섭대승론본』 상권(『고려대장경』 16, p.1343上:『대정장』 31, 
p.136下).
132)
132) 만약 오직 신훈(新熏)뿐이라면, 
어떻게 다섯 가지 종성(種姓)이 차별이 있다고 성교(聖敎)에서 말씀하셨겠는가라는 비판에 대해, 
경문(經文)의 뜻을 회통해서 답변한다.
133)
133)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가 없는 종성[不般涅槃法姓]이란 무성종성(無性種姓), 
즉 무성천제(無性闡提)를 가리킨다.
134)
134) 『유가사지론』 제52권(『고려대장경』 15, p.916下:『대정장』 30, 
p.589上).
135)
135)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유가사지론』 제57권에 의하면, 
지옥에서 세 가지 무루근(無漏根)을 성취하는데, 
이것은 종자이지 현행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오직 신훈설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는 비판에 대한 답변이다. 
즉 장차 번뇌를 끊어 무루종자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며, 
아직 종자를 훈습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종자의 체(體)가 있지 않으며, 
따라서 오직 신훈설이 맞는다는 내용이다.
136)
136) 이하 종자의 신훈본유설(新熏本有說)의 내용을 서술한다. 
이것은 호법(護法)의 주장이다.
137)
137)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에 설해져 있다고 한다. 
『섭대승론』 제2권에 인용되어 있다. 
7전식(轉識)과 제8식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경문에서 모든 법은 7전식을, 
식은 제8식을 가리킨다. 
제1구의 뜻은 다음과 같다. 
제8식은 소훈처(所熏處)로서 7전식의 종자를 함장하고, 
이 종자로부터 일체법, 즉 7전식을 현행한다. 
다음에 제8식이 5근(根)을 집지(執持)함으로써 5식(識)이 생겨나고, 
제8식이 제7식의 소의(所依)가 됨으로써 제7식이 생겨나고, 
제7식이 제6식의 소의가 됨으로써 제6식이 생겨난다. 
제2구의 뜻은 다음과 같다. 
제8식의 견분의 종자는 제7식과 제6식으로써 훈습되므로 능훈과 소훈의 인과관계이다. 
다음 선악업의 종자도 제6식의 현행으로부터 훈습되므로 능훈과 소훈의 인과관계이다. 
이와 같이 7전식과 제8식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138)
138) 전전(展轉)에는 차제전전(次第展轉)과 상호전전(相互展轉)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이다.
139)
139) 세친, 『섭대승론석』 제2권(『고려대장경』 17, p.86中:『대정장』 31,
p.328中).
140)
140) 오직 종자본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만 훈습으로써 증장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인연이라고 말한다고 하므로 여기서 그것을 논파한다.
141)
141) 선악업의 종자가 증장됨으로써 제8식의 이숙과가 감득(感得)될 경우, 
만약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그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인연은 인과동류(因果同類)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숙의 원인은 선악이고, 
결과는 무기(無記)로서 인과이성(因果異性)인 것을 어떻게 인연이라고 하겠는가? 
이 선악업의 종자는 이숙과의 증상연(增上緣)이지, 
인연이 아니라는 취지이다.
142)
142) 이하 오직 신훈(新熏)이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143)
143) 견도(見道)에서 비로소 일어나는 무루를 가리킨다.
144)
144) 만약 유루선심(有漏善心)의 최후로서 최상구경인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인연으로 삼는다고 말한다면,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세제일법은 아무리 뛰어나도 유루인데, 
유루가 어떻게 무루의 종자가 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반대로 무루의 종자로부터 유루를 생겨나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논지이다.
145)
145) 분별론자란 갖가지 삿된 분별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말한다. 
소승의 대중부, 
일설부(一說部) 등 또는 대승 중에서 일부 삿된 분별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146)
146)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을 논파하는 취지이다.
147)
147) 만약 심성(心性)을 의타기의 심(心)이라고 말한다면, 
상(相)은 전변하고 체(體)는 상주불변인 것이 된다는 비판이다. 
수론(數論)에서는 쁘라끄리띠[自性冥諦]로부터 23원리가 전변되어 나오며, 
그 쁘라끄리띠는 체(體)로서 상주이고 23원리는 상(相)으로서 무상(無常)이라고 인정하므로, 
마치 그 주장과 같다는 비판이다. 
왜냐하면 심성(心性)이 곧 심체(心體)이고 번뇌 때문에 오염되어 상(相)이 전변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148)
148) 심성(心性)이 만약 선(善)이라면 악과 무기심도 역시 선이어야 한다. 
3성(性)의 상(相)은 달라도 체(體)는 청정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49)
149) 만약 유루의 불선심(不善心) 등의 체성도 역시 선이라고 인정한다면, 
불선심이 일어날 때에 신(信)심소 등 열한 가지 선심소(善心所)도 상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150)
150) 잡염은 모든 삼마지(三摩地)의 유루에 통하기 때문에, 
선성(善性)도 포함한다.
151)
151) 유루는 다스려지는[所對治] 장애이고, 
무루는 다스리는[能對治] 지혜이다. 
그런데 유루심의 본성이 무루라고 말하면, 
무루심의 본성은 또한 유루가 되므로 인연이 차별ㆍ혼동되어 논리가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152)
152) 『유가사지론』 제57권(『고려대장경』 15, p.954下:『대정장』 30, p.615上).
153)
153)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고려대장경』 6, p.1368下:
『대정장』 12, 
p.222中) 등.
154)
154) 심성(心性)을 의타기의 심체(心體)로 설명하는 취지이다.
155)
155) 진여를 가리킨다. 
유루심의 본성인 진여는 무루이며, 
그것으로부터 일체법을 연기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논파한다.
156)
156) 5위(位) 중에서 자량위(資糧位)를 가리킨다.
157)
157)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를 말한다.
158)
158) 문훈습은 부처님의 정법을 들어 훈습시키는 선근이지만, 
그 선법(善法)이 아직 열등하여 전위(前位)의 선(善)이 후위의 장애가 되면 수도에서 단멸되어야 한다.
159)
159)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루의 문훈습이 곧 무루의 뛰어난 증상연이 되는 것에 의거해서 『섭대승론』 등에서 방편으로 출세심의 종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인연[正因緣]은 아니다.
160)
160) 오직 신훈뿐이라는 주장을 가리킨다.
161)
161) 문장을 바꾸어 총체적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162)
162) 무위법 또는 외도의 자성(自性) 등을 말한다. 
그들 상주법은 생멸이 없으므로 종자의 속성이 없다. 
그 진여로부터 일체법을 연기한다는 주장을 논파한다.
163)
163) 경량부와 상좌부 등의 주장이다. 
반드시 원인은 앞에 있고 결과는 뒤에 있어야 한다는 인과이시(因果異時)의 견해이다.
164)
164) 대자재천외도의 견해이다.
165)
165) 현행과 종자는 다른 종류이므로 동시에 병존하여 인과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색법의 현행은 장애[質礙]가 있고, 
종자는 장애가 없어서 다른 종류이므로 동시에 병존할 수 있다.
166)
166) 아뢰야식 속에서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경우는, 
능생(能生)의 종자도 소생(所生)의 종자도 같은 종류이므로 동시에 병존할 수 없다. 
이것은 반드시 전후 두 찰나에 인과(因果)가 되므로 진정한 인과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에 인과라는 명칭을 부여할 뿐이다.
167)
167) 종자와 현행의 인과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이고, 
종자와 종자의 인과는 인과이시(因果異時)인 것을 가리킨다.
168)
168)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인연에 종자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한편 종자생종자에도 종자로서의 뜻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169)
169) 여기서 구경위(究竟位)는 그 종자에 따라 달라진다. 
종자가 초지(初地)에서 견도에 들어갈 때 끊어지면 전도가 구경위가 된다. 
또한 금강유정(金剛喩定)에서 끊어질 때는 금강유정이 구경위가 된다.
170)
170) 3수(受)가 바뀌고[轉易], 
3성(性)이 바뀐다[改轉].
171)
171) 설일체유부에서 삼세실유(三世實有)ㆍ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을 주장하여, 
필요로 하는[所待] 연(緣)이 항상 존재한다는 견해를 논파한다.
172)
172) 유부 등의 견해이다.
173)
173) 위에서 열거한 여섯 가지는 종자의 속성인 동시에 종자가 종자로서 작용하기 위한 조건 자격이다. 
모든 종자는 찰나멸(刹那滅)ㆍ과구유(果俱有)ㆍ항수전(恒隨轉)ㆍ성결정(性決定)ㆍ대중연(待衆緣)ㆍ인자과(引自果)의 여섯 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비로소 종자로서의 작용이 가능해진다. 
다만 순간순간 반드시 여섯 가지를 구비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 순간에 함께 구비한다.
174)
174) 보리 등 곡식은 식소변(識所變)의 현행법으로서 그것에서 다시 보리 등의 싹을 내므로 종변(種變)이지만, 
그 현행법은 종자가 아니다. 
따라서 증상연으로서 친인연(親因緣)의 뜻은 없지만, 
다만 가(假)로 종자라고 이름한다.
175)
175) 쌍(雙)으로 내부의 종자와 외부의 종자인 생인(生因)과 인인(引因)을 판별한다.
176)
176) 이하 종자의 4연(緣)을 분별한다.
177)
177) 종자에 공상종자(共相種子)와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가 있다. 
다른 유정과 함께 수용하는 모든 대상의 종자는 공상종자이다. 
오직 자기에만 국한되고 다른 것에 통하지 않는 5근(根) 등의 종자는 불공상종자이다.
178)
178) 아뢰야식이 종자를 저장하려면, 
즉 소훈처(所熏處)의 역할을 하려면 견주성(堅住性)ㆍ무기성(無記性)ㆍ가훈성(可熏性)ㆍ화합성(和合性)의 네 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7전식(轉識)이 능훈식으로서 작용하려면 역시 유생멸(有生滅)ㆍ유승용(有勝用)ㆍ유증감(有增減)ㆍ화합성의 네 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한다. 
아뢰야식과 7전식은 각각 그러한 속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소훈처와 능훈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179)
179) ‘등(等)’은 감각기관ㆍ외부대상ㆍ12처 중에서 법처색(法處色) 등을 가리킨다.
180)
180) 무색계에 태어날 때는 곧 색법이 없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갈 때는 심법이 없다. 
이와 같이 그것들은 체성이 견주(堅住)하지 못하므로 소훈이 될 수 없다.
181)
181) 무기(無記)는 선이나 악에 거스르지 않으므로 ‘평등’이라고 한 것이다.
182)
182) 자재하다는 것은 제8식이 심왕으로서 자체가 자재함을 말한다. 
심소는 자재하지 못하므로 소훈이 아니다.
183)
183) 소훈으로서 제8식의 체성이 응연상주(凝然常住:
堅密)가 아니라는 것은, 
무위법은 응연상주하여 소훈이 되지 못함을 나타낸다.
184)
184) 자신이 지은 선악 등을 다른 사람의 식(識)에 훈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185)
185) 경량부 등에서 주장하는 인과이시(因果異時)를 부정한다.
186)
186) 제8식에 상응하는 심소를 가리킨다.
187)
187) 7전식(轉識)의 심왕과 상응 심소를 가리킨다.
188)
188) 유위법으로서 생멸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189)
189) 제8식의 상분 및 6식 중에서 이숙생(異熟生)의 무기를 말한다.
190)
190) 만약 불과(佛果)에서 새로운 종자를 훈습ㆍ증장시킨다면, 
네 가지 지혜의 심품[四智心品]에서 차등이 생겨서 원만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불과의 전후에 우열(優劣)이 있게 된다.
191)
191) 종자는 갖가지 정신현상의 주체와 작용이 발생ㆍ존재하게 되는 원동력이다. 
종자의 동력인(動力因) 역할은 훈습과 현행(現行)의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종자가 아뢰야식 속에서 찰나마다 생멸하면서 성숙되는 과정에서[種子生種子] 생연(生緣), 
즉 7전식(轉識)ㆍ심리작용[心所]ㆍ감각기관[根]ㆍ대상[境]의 작용이라는 연(緣)을 만나면 생기한다[種子生現行]. 
모태에서 아뢰야식으로부터 7식이 전변ㆍ생기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그리하여 현행의 영향 아래 7식ㆍ심소ㆍ근(根)ㆍ경(境)의 화합으로 인식작용이 이루어지면, 
그 정신적ㆍ신체적 행위가 아뢰야식에 이식되며 기존의 종자를 증장시킨다[現行熏種子].
192)
192) 세 가지 법은 ①현행하게 된 종자[因:
本有], 
②현행(果인 동시에 能熏의 因), 
③현행에 의해 훈습된 종자[果:
新熏]를 말한다. 
이 세 가지가 같은 순간에 전전(展轉)하면서 인과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해야만 ②가 ①의, 
또한 ③이 ②의 속성을 온전히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동시(同時)의 개념은 시간적으로 완전히 같은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단계적으로는 종자ㆍ현행ㆍ훈습 종자의 순서로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이 ‘한 찰나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193)
193) 소승에 6인(因)ㆍ4연(緣)ㆍ5과설(果說)이 있다. 
구유인(俱有因)은 6인 중의 하나로서, 
동일한 시간에 자타가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어 돕는 것을 말한다. 
사용과(士用果)는 5과(果) 중의 하나로서, 
구유인과 상응인(相應因)의 작용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를 말한다. 
사용(士用)은 사대부의 작용이라는 뜻으로서, 
사대부의 힘에 의해 모든 사업을 성취하는 것과 같이, 
구유인과 상응인의 작용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이므로 비유로써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194)
194) 동류인(同類因)은 6인 중의 하나이며, 
동일한 부류로서 전시(前時)의 것이 후시(後時)의 것에 대하여 원인[因]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전시(前時)의 선심(善心)이 후시(後時)의 선심의 원인인 것 등이다. 
등류과(等流果)는 5과(果) 중의 하나로서 6인 중 동류인과 변행인(遍行因)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를 말한다. 
후시(後時)의 결과가 전시(前時)의 원인과 동등 등류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
195)
195)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ㆍ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동시인과(同時因果)와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이시인과(異時因果)를 가리킨다.
196)
196) 예를 들면 『대법론(對法論)』 제4권에서 12연기(緣起)를 인연으로 이름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가설(假說)이지, 
직접 자기 결과를 판별하는 친인연(親因緣)이 아니다.
197)
197) 행상(行相)에서 행(行)은 유이(遊履), 
상(相)은 체상(體相)의 뜻이다. 
능연(能緣)인 견분이 소연경(所緣境)인 체상(體相)에 유이(遊履)하는 것, 
즉 인식작용의 의미이다.
198)
198) 집수(執受)의 산스끄리뜨 원어인 upātta는 upā-√dā(to receive, 
gain, 
seize)의 과거분사로 만들어진 명사로서 ‘받아들여진 것’, 
‘유지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비달마불교에서 집수는 감각기관[五根] 또는 신체[有根身]를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ㆍ보존된다고 보므로 집수에 종자를 포함시킨다. 
집수에는 능생각수(能生覺受)와 안위동일(安危同一)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안위동일은 다음 항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각수(覺受)의 뜻에서 보면 신체는 집수이고, 
종자와 기세간은 비집수(非執受)이다. 
그리고 유근신 중에서도 오직 신근(身根)뿐이고, 
나머지 4근(根)과 부진근은 신근(身根)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있으므로 역시 그것도 각수(覺受)라고 한다.
199)
199) 색근(色根)은 5근(根), 
즉 승의근(勝義根)을 가리킨다. 
근의처(根依處)는 부진근(扶塵根)을 말한다. 
신체는 이 두 가지로써 이루어지므로 신체를 유근신(有根身)이라고 한다. 
승의근은 바로 5근의 체(體)이고 이른바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으로서, 
곧 5관신경(官神經)에 해당된다. 
부진근은 승의근의 의지처[根依處]로서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4경(境)을 그 자체로 한다. 
이것은 곧 눈ㆍ귀 등 5관의 기능이다.
200)
200) 아뢰야식은 신체 속에 내재하면서 그것의 작용을 유지하는 근원적인 생명체이다.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과 신체의 유기적 생리적인 상응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안위동일(安危同一, 
ekayogakṣema)’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원래 yogakṣema는 nirvāṇa(열반)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성안(成安)ㆍ안온(安穩)ㆍ적정ㆍ해탈 등으로 번역된다. 
유가행파에서는 yoga를 실천해서 얻어지는 평안ㆍ안온(kṣema)을 강조하기 위해 yogakṣema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처럼 yogakṣema는 ‘성(成)ㆍ안(安)ㆍ리(利)’의 의미뿐인데, 
한역서에서 upaghata(損)의 측면도 고려하여 ‘위(危)ㆍ괴(壞)ㆍ쇠(衰)ㆍ부(否)’를 첨가하였다. 
그리하여 ekayogaks-ema는 안위동일(安危同一), 
안위등(安危等), 
안위공동(安危共同), 
동성괴(同成壞) 등으로 한역하였다. 
이것은 둘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양호한 상태[安] 또는 좋지 못한 상태[危]이면, 
다른 한쪽도 그에 대응해서 같이 양호 또는 불량한 상태가 되는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201)
201) 인(因)은 명언친인연(名言親因緣)의 종자이고, 
연(緣)은 선악업의 증상연의 종자이다. 
이것들에 의해 제8식의 자체가 현행한다.
202)
202) 여기서 소연(所緣)은 제8식의 상분(相分)으로서, 
곧 종자와 신체 및 기세간을 말한다.
203)
203)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은 종자ㆍ신체[有根身]ㆍ자연계[器世間]이다. 
아뢰야식은 자체 안의 종자를 대상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작용이 발생된다. 
또한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대사(代謝) 작용의 흐름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한다. 
사실 아뢰야식이 종자와 신체를 유지하는 작용은, 
그것들을 인식대상으로 끊임없이 요별함으로써 가능해진다.
204)
204) 이하 4분의(分儀)를 밝힌다. 
안혜(安慧)와 정량부(正量部) 등이 소연의 모습이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다. 
또한 설일체유부 등이 행상(行相)은 있지만 심외(心外)의 대상을 취한다고 하는 것과도 다르다.
205)
205) 심왕의 상응법인 심소(心所)도 역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심분(心分)이 있다.
206)
206) 안혜와 정량부의 주장을 논파한다.
207)
207) 능연식(能緣識)이 자신의 상분을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이 자신의 상분인 색경(色境)을 반연하고, 
이식(耳識)이 자신의 상분인 성경(聲境)을 반연하는 등의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일체의 대상을 반연하고, 
자신의 대상[自境]을 다른 이의 감각기관[他根]이 반연하고, 
다른 이의 대상[他境]을 자신의 감각기관[自根]이 반연함 등이 된다.
208)
208) 여기서 각(覺)은 심왕(心)王ㆍ심소(心所)의 총명(總名)이다
209)
209) 이것은 『후엄경(厚嚴經)』에 설해져 있다고 한다. 
견분과 상분이 각각 자연히 그 인연화합에 따라 일어나므로, 
마음과 독립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心外實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10)
210) 이하 4분(分)에 대한 소승과 대승의 견해 차이를 열거하였다.
211)
211) 여기서 사(事)는 사체(事體), 
즉 심왕과 심소의 자체를 가리킨다.
212)
212) 심왕과 심소의 자체가 하나 뿐으로서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213)
213) 소연(所緣)이 비슷하다는 것은 심왕과 심소가 변현한 상분(相分)이 서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행상(行相)이 다르다는 것은, 
예를 들면 심왕과 심소가 하나의 대상을 반연할 때 심왕은 요별의 행상으로 대상을 반연하고 작의(作意)심소는 경각(警覺)의 행상으로 반연하며, 
수(受)는 영납(領納)의 행상으로 반연하는 등이다.
214)
214) 심왕과 심소의 자체가 각기 하나씩이라는 뜻이다.
215)
215) 진나(陳那)는 식의 3분설(分說)을 주창하였다. 
이것은 어느 하나의 인식[量, 
pramāṇa]이 성립하는 데는 인식되는 것[所量, 
prameya], 
인식하는 것[能量, 
pramāṇa], 
인식의 결과[量果, 
pramāṇa-phala]의 세 요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면 옷감의 길이를 자로 재는 경우에 옷감이라는 사물, 
자[尺]라는 계량기, 
치수를 읽는 인간의 인지력(認知力)이 필요하다. 
이 셋을 차례로 말하면 소량(所量)ㆍ능량(能量)ㆍ양과(量果)이고, 
4분(分)에서 말하면 상분ㆍ견분 자증분이다.
216)
216) 자체[體]는 하나의 식이지만, 
작용의 힘[功能]이 각기 다르므로 셋으로 구분한다.
217)
217) 호법(護法)의 주장이다. 
그는 진나(陳那)의 이론에서 양과(量果), 
즉 확인 작용을 증명하는 제4의 심분(心分)인 증자증분(證自證分)을 설정하였고, 
이 이론을 4분설(分說)이라고 한다. 
호법은 인식을 상분ㆍ견분ㆍ자증분ㆍ증자증분의 네 부분으로 나누고 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하나의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 
상분ㆍ견분은 식의 자체(자증분)에서 마치 달팽이가 자기 몸에서 두 뿔을 내밀듯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증분ㆍ증자증분이 서로 동시에 상응하여 증명하고 그 작용을 증지(證知)한다. 
그리하여 확인 작용이 무한히 소급되는 모순을 해결한다.
218)
218) 제7식의 견분은 항상 비량(非量)이다. 
제6식의 견분은 3량(量)에 통하므로 비량(非量)일 때도 있다.
219)
219) 상분은 외부 본질[境]의 영상을 떠올리므로 외부라고, 
견분은 이 상분을 반연하기 때문에 역시 외부이다. 
외부라고 해도 물론 체(體)가 외부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오직 체내(體內)이며 외부를 향해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내부[內]라고 한다.
220)
220) 유루심(有漏心)의 4분(分)은 계박(繫縛)이고, 
무루심에는 이런 계박이 없다.
221)
221) 이 게송은 『후엄경(厚嚴經)』에 설해져 있다고 한다. 
『불지론(佛地論)』 제3권에 인용되어 있다.
222)
222) 『집량론(集量論)』을 가리킨다.
223)
223) 『후엄경(厚嚴經)』이라고 한다.
224)
224) 안혜의 일분설(一分說)과는 다르다. 
여기서는 넷을 합해서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225)
225) 마음과 독립적으로 외부에 실재한다는 대상[心外實境]을 가리킨다.
226)
226) 『입능가경(入楞伽經)』 제9권(『고려대장경』 10, p.901上:『대정장』 16,p.567下).
227)
227) 여기서는 심외(心外), 
즉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의 외부[外]가 아니다.
228)
228) 여기서 일체는 범(凡)ㆍ성(聖)ㆍ5취(趣)의 유정ㆍ자타(自他)의 계지(界地)ㆍ내신(內身) 등에 통한다.
229)
229) 『불설입세아비담론(佛說立世阿毘曇論)』 제10권(『고려대장경』 28, p.1005上:『대정장』 32, p.223下).
230)
230) 삼천세계[三千界] 밖의 극락세계 등을 가리킨다.
231)
231) 사바세계의 영산(靈山) 등을 가리킨다.
232)
232) 불교에서는 세계의 성립으로부터 공무(空無)에 이르기까지를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의 네 가지 겁[四劫]으로 나눈다. 
이 문단의 내용은 그 중에서 괴겁의 장소에서이다.
233)
233) 상지(上地)는 미세, 
하지(下地)는 허소(虛疎)의 차이가 있다.
234)
234) 설사 삼천계(三千界)나 떨어진 세계라 할지라도 욕계는 욕계, 
색계는 색계의 모습으로 자타(自他)의 기세간을 변현한다. 
욕계의 유정은 욕계 자신의 지위[地]를 변현하고, 
색계와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235)
235)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餓鬼)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본다. 
천인(天人)은 보석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곳으로 보고, 
인간은 그냥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기 다르게 인식한다.
236)
236) 안혜 등의 주장이라고 한다. 
거기서는 다만 남의 부진근(扶塵根)만이 아니라 승의근(勝義根)도 변현한다.
237)
237) 『변중변론(辯中邊論)』 상권(『고려대장경』 17, 
p.397中:
『대정장』 31, 
p.464下).
238)
238) 호법 등의 주장이다.
239)
239) 『변중변론』에서 자신과 남의 5근(根)으로 사현(似現)한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식(識)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타인의 식은 타인의 감각기관을 각각 스스로 변현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240)
240) 여기서 견(見)은 타인의 부진근[依處]을 가리킨다.
241)
241) 아뢰야식의 소연경을 총체적으로 간략히 진술한다.
242)
242) 여기서 열 가지 색법[有色處]은 유근신(有根身)을 가리킨다. 
열 가지는 내부[內]의 5근(根)과 내외에 통하는 5진(塵)으로서, 
총체적으로 유근신으로 한 것이다.
243)
243) 유루식(有漏識)의 전변에 인연변(因緣變)과 분별변(分別變)의 두 가지가 있다. 
인연변에서 인연이라는 참된 세력이 있는 종자를 가리킨다.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사물을 인연변이라고 한다. 
즉 제8심왕과 5식의 심왕ㆍ심소, 
5구의식(俱意識)의 심왕ㆍ심소, 
선정에 들어 있을 때의 마음[定心]과 소연(所緣)의, 
실제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을 말한다.
244)
244) 여기서 분별은 심왕과 심소의 다른 명칭으로서, 
능연(能緣)의 분별력으로부터 전변된 상분(相分)을 분별변(分別變)의 상분이라고 한다. 
이 상분을 일으키는 능생(能生)의 종자에 실제 종자가 없는 것도 있고 또한 생겨난 상분에 작용이 없는 것도 있다. 
즉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심왕ㆍ심소의 상분, 
제7식의 심왕ㆍ심소의 상분, 
제8식의 심소의 상분 등은 다만 임시적인 종자[假種]로부터 생겨난 것이지 실제 종자가 아니다. 
다만 대상으로 할 뿐으로서 실제의 작용이 없다.
245)
245) 보고 듣는 등 6식의 작용은 쉽게 느낄 수 있으나, 
아뢰야식의 경우는 감지(感知)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식의 인식작용은 일반인들이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미세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세(微細, 
sūkṣma)’라고 한 것은 웬만큼 총명한 사람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다.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인 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신체[有根身]의 경우도 알기 어렵다. 
여기서 ‘근(根)’은 미세하고 투명한 물질인 승의근(勝義根)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측량하기 어려우므로―색경(色境)이나 성경(聲境)처럼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아뢰야식이 자연계를 인식대상으로 하여 끊임없이 미세한 인식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일반인에게는 감지되기 어렵다.
246)
246) 상좌부와 경량부 말파(末派)의 주장을 가리킨다. 
그들에 의하면 멸진정은 무심(無心)이지만, 
미세한 의식이 있어서 몸에서 떠나지 않고 상속한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그것을 예로 들어서, 
그대들이 멸진정에서 미세한 의식이 있고 유정에 소속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8식도 비록 그대들의 분별지혜가 미치지는 않지만, 
세존께서 매우 심오하고 미세한 식이 있어서 유전(流轉)과 장애를 끊는 것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대들도 역시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247)
247) 이것은 바른 논리[正理]로써 설일체유부에 대해 답변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두 가지 무심정에는 식(識)이 존재하지 않지만,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을 유지하므로 유정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여기서 멸진정 중에 식(識)이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Pierre Perret - La Porte De Ta Douche Est Restee Entrou'verte.lrc



● 실재의 자성의 유무와 일상의 유무의 차이 

『성유식론』에서 먼저 실재의 자성의 유무를 살핀다. 
그런데 이 논의가 일반적으로 혼동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이미 유무 논의와 관련해서는 
자세히 살폈다.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5/k1501t1730.html#069
sfed--금강삼매경론_K1501_T1730.txt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sfd8--불교단상_2562_08.txt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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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의 각 영역이 다르다. 
크게 본바탕(실재) - 감각현실(색성향미촉) - 관념분별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이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의 구분과 같다. 

이를 기호로 % - ○  -  ■ 로 표시해보자.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 
그리고 일정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앞 부분에 보이는 것은 꽃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일반적으로 거기에 꽃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삼는 것들은 그런 성격의 논의가 아니다,. 

앞의 기호를 놓고 보면 
우선 다음이 문제된다. 

○ 영역에 ■ 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다시 본 바탕 % 영역에 ■ 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렇지 않다. 

그런데 자성의 논의는 다시 이런 바탕에서 
다음 논의와 관련된다. 

침대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 
이 경우 침대에는 바다나 황금을 얻을 수없다. 
그런데도 꿈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꾼다.

이 상황이 갖는 성격 때문에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꿈에서 바다나 황금이 갖는다는 속성은 실다운 속성이 아니다. 

반대로 어떤 것이실다운 속성이라고 하려면 
이런 성격이 아니어야 한다. 

그래서 꿈과 같은 속성이 아닌 진짜의 참된 성품을 문제삼게;된다. 
그래서 먼저 꿈과 다른, 참된 진짜의 성품을 몽타쥬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몽타쥬에 해당한 것이 정말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침대에 바다나 황금이 있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또 그런 상태에서 그런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에 참된 성품이 있다고 여겨도 안 된다. 

여기서 문제삼는 참된 진짜성품을 $  라고 다시 표시해보자. 

이 경우 문제는 앞에서 나열한 여러 영역 안에 
그런 참된 진짜 성품을 갖는 것 $이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무아 무자성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된다. 




● 자신의 본 정체와 시공간 이동 

『성유식론』에서 제 7 식 제 8 식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이것은 또 일상생활에서 파악하는 자신의 정체와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것을 살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생사과정에서 겪는 시공간 이동과 생체의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무엇이 자신의 참된 핵심요소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오늘 이가 하나 빠졌다고 하자. 
그래서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시술전과 시술후 상태를 다른 남이라고 하는가를 보자. 
관계없다고 일반적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먼 불국토로 떠나야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곳에 다른 것들이 다 구비되어있다고 하자.
즉 임플란트 시술처럼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하자. 
그래도 이 가운데 무엇만은 갖고 떠나야 자신이 그곳에갔다고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또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것을 갖고 가면 
곤란함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성유식론』에 나오는 설명을 참조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내용과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어떤 이가 벽돌을 붙잡고 늘 자신으로 여기고 대했다고 하자. 
현실에서 그런 벽돌을 자신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사정이 있다. 

그것은 일정한 기제 (정신의 구조, 체계)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임을 이제 이해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벽돌을 자신으로 여기게 만든 기제를 이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면 될 것인가. 

처음 현실에서 그런 벽돌을 자신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그 사정을 놓고 하나하나 판단하면 
오히려 그런 기제가 그런 속성을 더 많이 갖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는 이제 그런 기제를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데 처음 그런 기제로 인해 그런 엉터리 판단을 행하게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엉터리 내용을 자신으로 여기고 붙들고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엉터리 판단을 하고 임하게 만드는 것이 그 기제다. 
그런데 이제 거꾸로 그렇게 만든 그런 기제를 실질적인 자신이라고 여기면 될것인가. 
처음 판단이 잘못이라면 두번째 판단도 잘못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기제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상태에서 이 기제는 무량하게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윤회를 무량하게 이어 나가게 된다. 
따라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올바로 사정을 파악하고 이런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또 한편 이들 내용을 놓고 
다시 앞에서 문제삼는 참된 진짜의 자신을 찾으면 더더욱 곤란하다. 

그러면 평소 벽돌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주체는 
이제 대신 무엇을 자신으로 여기고 임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런 활동은 과연 누가 무엇을 한 것인가를 놓고 다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과 관련된다. 
그런 수행을 통해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그런 상태로 묶여 무량하게 받아가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난다. 










[img9]
08pfl--image/8식-9.jpg




위 그림에서 1! 는 눈을 떠 얻는 내용이다. 
그것이 1! 라는 마음부분에 맺힘을 나타낸다. 
이런 마음을 시설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도로 살폈다. 
그래서 원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평소 눈을 떠서 a!와 같은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된다. 

그것이 엉터리다. 
이 상황에서 그런 a!와 같은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관념영역 6 @에서는 그에 해당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이것을 a@로 표시했다. 
이것도 당연히 엉터리 분별이다. 
그래도 관념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일으킨다. 

이제 이것이 엉터리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대신 무엇을 실다운 자신으로 판단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물론 그런 감각이나 분별은 위와 같은 정신 기제(구조)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행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여기서 실다운 자신으로 볼만한 것들을 우선 나열해볼 수 있다. 

마음에서 위과 같은 감각이나 분별을 한다. 
그러려면 본바탕 실재에 그에 해당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이런 추리를 먼저 행하게 된다. 

그것을 #실재 영역에 시설해 넣는다고 하자. 
그것도 실다운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하나의 후보가 된다. 



그 다음 위 그림에서와 같은 각 마음이 하나의 후보가 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1,2,3,4,5,6,7,8 식 가운데 하나를 특정해 후보로 삼을 수도 있다.

또는 그런 마음에 얻어진 일정한 내용을 또 실질적 자신의 후보로 여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처음 눈을 통해 본 내용 가운데 일정 내용을 자신으로 보는 경우와 같다. 

또는 아예 위와 같은 마음들의 각 체계와 구조 자체를 후보로삼을 수도 있다. 

또 이들 영역 어딘가에 자신이 찾는 진짜 참된 실체로서의 자신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후보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우선 실다운 자신을 찾아보아야 한다. 



● 정려 수행과 세계의 이동 

이전에 『대비바사론』에 무상정과 정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각 세계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도 있다. 

이 역시 그간 많이 반복했다. 





간단히 살피면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투명한 수정에 노란 빛을 비추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마치 노란 금처럼 보일 수 있다. 

이 상황에 수정과 노란 빛 외에 금은 없다. 
그러나 그 상황을 대하는 이는 재료에는 본래 없는 
금이 있다고 여기고 그 상황을 계속 대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 비닐 마술의 비유로 많이 들었다. 
비닐 하나에 ○ 를 그려 놓고 또 다른 하나에 △ 를 그려 놓는다. 
그리고 이 둘을 겹쳐 놓으면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 보인다. 

△            ○              ㋰   = 비닐마술에서 나타나게 된 안이 세모인 도너츠
그러나 이런 도너츠는 어느 비닐에도 본래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은 대부분 
그 상황에 그런 도너츠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각 비닐을 대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계속 임하고 
그것이 그런 상태의 중생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경우 
그것은 별도의 세계라고 하게 된다. 
이것이 욕계의 망집 상황에 해당한다. 



●비닐마술과 현실의 관계
http://buddhism007.tistory.com/4623#084
sfed--자비도량참법_K1512_T1909.txt
sfd8--불교단상_2562_06.txt ☞ ☞●비닐마술과 현실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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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환과 같음을 이해하기 위한 비닐마술
http://buddhism007.tistory.com/4633#004
sfed--마하반야바라밀경_K0003_T0223.txt
sfd8--불교단상_2562_06.txt ☞ ☞●현실이 환과 같음을 이해하기 위한 비닐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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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list--editing_text.TXT
출처: https://buddhism007.tistory.com/entry/마음-현상의-이해#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현실에서 대하는 자신의 정체와도 이는 관련된다. 
 
그런데 비록 현실에서 행하는 판단이 엉터리라고 하자. 
그렇다 해도 현실에서 각 내용을 그처럼 얻는다. 

이런 가운데 그가 대하는 세계도 존재한다. 

그런데 정려 수행은 평상시 망집을 떠나는 수행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려 수행을 행하면 평상시와는 다른 상태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지만 처음 일상생활에서 대한 그 재료 자체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려 수행을 행하면 그 주체가 임하는 세계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래서 욕계 내 선정과 색계, 무색계 선정을 구분한다. 
이는 수행 주체가 욕계라는 세계에서 색계로 이동하고
다시 무색계로 이동한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해도 처음의 재로 자체가 크게다르지는 않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각 정려 수행단계에서 
그런 차이가 있는가를 다시 위 그림을 통해이해해야 한다. 








한편 위 내용을 통해 분신 수행방안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분신 수행 방안 


한 주체가 자신의 본 정체를 파악한다고 하자. 
여기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생략한다. 
그리고 단지 그것을 u 라고만 일단 표시하자. 

어떤 이가 생사과정에서 시공간을 통해 다른 형태로 변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노인이 되는 과정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때 이들을 모두 한 주체의 일로 여기게 되는 것은 바로 이 u 때문이다. 
그리고 이 u 이외의 나머지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런 경우 현실에서 평소 자신으로 여긴 내용은 이런 u 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u 와 비교하면 평소 자신의 몸에 걸치는 하나의 옷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바람직한 형태로 생사과정을 통해 
시공간 이동(윤회)를 해나가라면 
현실에서 무엇이 u 에 해당한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이 이런 과정에서 유지되고 보관되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끝내 생사를 벗어나려면 이 역시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성취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한 집착을 놓고 살피면 쉽다. 
평소 자신의 손을 톱으로 잘라야 한다고 하자. 
그것이 실질적 자신이 아니라고 이론상 이해해도 이는 쉽지 않다. 

즉 실답지 않지만, 이것이 진짜처럼 여겨지는 만큼 
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에서 갖는 망집을 전제로 할 때는 
이런 상태에서 계속 이어지는 생사과정을 우선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생사고통을 예방하는 계의 수행이 기초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이를 통해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이후 복덕자량을 구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지혜자량을 구족해나가게 된다. 
또한 이런 계의 수행은 이후 다시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과정에서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다른 중생을 제도하려고 하면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임해서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래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위해서 계의 원만한 성취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생사현실에 처해 자신부터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러나 여하튼 이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아니다. 
또 마찬가지로 다른 중생도 실질적인 중생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구호 중생 이 중생상회향의 내용도 이와 같다. 
또한 금강경에서 설하는 내용도 이와 같다. 
이는 결국 다음 내용이다.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 
그러나 중생을 하나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여기서 분신 수행을 살필 필요가 있다. 


생사과정에서는 자신이 먼 미래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가 되고자 노력한다. 

여기에서도 앞에 살핀 U 가 핵심이다. 
이 U 를 바탕으로 생사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나머지 내용들이 모두 바람직한 상태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될 때 바람직한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상태도 역시 그 주체다. 
이런 모든 경우에 U 가 있기에 이를 그 주체의 핵심으로 보게 된다. 

그것은 U +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 =>  U + 바람직한 요소
의 형태로 변화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간단히 변화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마음안 내용이다. 
그래서 마음에 보리심을 일으키고 서원을 구체적으로 그려 내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이 역시 쉽지 않다. 
그러나 벽돌을 하나씩 쌓아 성을 만드는 것과 비교하면 이것이 훨씬 쉽다. 

현실에서 가치 없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마음에 그런 내용만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마음은 전 우주를 담을 수도 있다. 
또 이에 덧붙여 그에 가장 가치있는 내용들만 가득 담을 수 있다. 

이것이 결국 보리심과 관련된다. 
그래서 일단 이렇게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보리심을 가장 현실에서 잘 성취해가는 상태를 
또 본받아 각 부분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신구의 3 업을 각기 그런 형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임하면 점차 그런 상태로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분신이 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부처님이나 어떤 대력보살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늘 자신이 그런 부처님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해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를 념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그런 부처님이나 그 부처님의 분신인 것처럼 여기면서 
수행에 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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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dc1448
◈Lab value 불기256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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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ivan-aivazovsky-the-bay-of-naples-at-moonlit-night-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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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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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安寺(だいあんじ)(奈良県奈良市) ,Japan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日本語: 大安寺南門(奈良市大安寺2丁目) English: The South Gate of Daian-ji. 日付 2015年4月4日 原典 投稿者自身による作品 作者 Degueulasse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Fran7oise Hardy - L'amitie.lrc



Fran7oise Hardy - L'amitie




♥단상♥세탁기 평형유지 문제  


노안이 점점 더 심해진 듯 하다. 
평소 근시 안경 쓰던 상태에서 노안증세가 진행되면 
안경이 오히려 불편해진다. 
그래서 자주 안경을 벗게 된다. 
그리고 자주 안경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또 가까운 곳을 보기 위해 별도로 
안경을 맞추어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안경도 또 잘 안보인다. 

그래도 사람 신체만큼 오래 사용하는 
기기는 드물다. 
보통 기계를 한 10 년 사용하면 망가진다. 

세탁기가 오래되었다. 
세탁기가 20년 된 듯 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물 흔적이 밖에 있다. 
그래서 내부를 들여다보니.배수 호스에 틈이 있다. 
그래서 일단 테이프로 감아 처리했다. 

그런데 왜 호스가 끊어졌는가. 
요즘 세탁기가 탈수시 요동과 소리가 심하다. 

이것은 세탁기가 평형을 유지하지 않은 가운데 
세탁조가 돌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탁기가 요동하면서 세탁기 위치도 다시 영향받는다. 

지구가 23.,5 도가 기울어지게 된 사정과 비슷하다. 

그래서 과거에 밑에 고인 것을 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비닐류를 동원해서 높이를 맞추었다. 

오늘 아발로 연구원이 숙왕화님과 함께 연구소를 떠났다. 
당분간 보기 힘들 듯 하다. 

숙왕화님이 떠나기전 제발 선풍기좀 정리해달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있을 때 잘 해야 한다. 
잘 안 해준 경우 그런 것이 마음에 오래 걸리게 된다. 
선풍기 정도는 치워주어도 된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바빠서 미루다 보면 1 주일 정도는 그냥 지나치게 된다. 
떠나고 나니 가슴이 조금 걸려 오늘 선풍기까지 함께 정리를 마쳤다. 

그러다보니 연구는 미뤄졌다. 

이전 『대비바사론』에서는 
정려의 각 단계의 차별, 
외도의 선정과의 구별 문제가 나온다. 

이를 위해서는 이론적으로라도 정려가 
평상시 마음상태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야 한다. 

물론 직접 수행하지 않으면 
피상적인 내용으로 그치게 된다. 

그래서 직접 수행해 연구하려다 보면 
어느새 잠에 빠져들기도 쉽다. 

이런 저런 문제로 연구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10/2564-10-26-k0614-002.html#1448
sfed--성유식론_K0614_T1585.txt ☞제2권
sfd8--불교단상_2564_10.txt ☞◆vpdc1448
불기2564-10-26
θθ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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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Nanda 가비라성의 왕자. 석존의 배다른 동생. 목우(牧牛)난타와 구별하기 위해서 손타라(孫陀羅)난타(Sundarananda)라 함. 그는 아내 손타라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출가를 좋아하지 않고 자꾸만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려는 것을, 부처님이 방편으로 천상의 즐거움과 지옥의 괴로운 모양을 보여, 그를 인도하여 불도에 귀의케 함.

답 후보
● 난타(難陀)
남악(南嶽)

남전겸자(南泉鎌子)
납골당(納骨堂)
녹야원(鹿野苑)
누계(漏戒)
능득인다라니(能得忍陀羅尼)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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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식론_K0614_T1585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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