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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1-27_성유식보생론-K0605-001 본문
『성유식보생론』
K0605
T1591
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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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보생론』
♣0605-001♧
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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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1권
일명(一名) 유식이십순석론(唯識二十順釋論)
호법보살(護法菩薩) 지음
대당(大唐)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이 명(命)을 받들어 한역
현성주 번역
중생들이 끊임없이 괴로움에 쫓기면서
활활 타는 모진 불이 마음속을 태우는데
보살께서 건지려고 자비심을 일으킴은
저들의 아픈 마음 자신으로 여김일세.
지혜로 부처 이룰 보살님께 경례하오니
많고 많은 온갖 번뇌 남김없이 없애시고
의지할 곳 없는 이의 귀의처가 되시면서
두려움에 떠는 이를 포근하게 안으셨네.
미소를 지으면서 마의 무리 항복시켜
밝은 지혜 깨달아 온갖 욕심 벗어나고
크게 건질 이 대승에 훌륭하게 머무시어
애욕 번뇌 그 뿌리가 마음임을 아셨구려.
논(論)36)에서 말하기를
ᖰ “대승에 의지해서 말한다면,
삼계(三界)의 성립은 오직 식(識)뿐이다”37)라고 하였다.ᖱ
해석해서 말하리라.
또 무슨 뜻에서,
대뜸 대승이라 하였는가.
본래 보살께서 온갖 생명을 건지려는 큰마음을 품고,
금지한 계법[禁戒]을 굳게 지키면서,
온갖 종류의 생명에게 고루 미치어 유정(有情:중생)들을 건진다.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매우 훌륭하고 흠이 없는 행을 이루었다.
지극히 미묘한 길상(吉祥)은,
모든 부처님[善逝]께서 가신 길이며,
또 따라가야 할 한없이 큰길이다.
아울러 이룩한 결과도 지극히 높고 원만하니,
부처님 외에 알 수 없는 경지다.
이 뜻을 근거로 대승이라고 이름하였다.
경에서 말한 대로
“대승은 보리살타(菩提薩埵)가 가야 할 길이며,
부처님의 훌륭한 과위(果位)”이기도 하다.
이 대승을 이루기 위하여 유식관(唯識觀)38)을 닦는 것이다.
유식관은 흠잡을 데 없는 방편의 바른 길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저 방편을 밝혔으니,
모든 경에는 가지가지 행상(行相)39)으로 널리 설한 내용이 들어 있다.
마치 흙ㆍ물ㆍ불ㆍ바람과 그에 딸린 물건들과 같다.
그 물건의 종류는 알 수 없이 많고,
방위와 장소도 한없이 넓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서 모양이 나타남을 살펴 알고,
드디어 모든 곳에서 바깥 모양을 버리고,
기쁨과 슬픔 따위를 멀리 여읜다.
또 넓은 존재의 바다[有海]에는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차별이 없음을 관찰하고,
저 작은 길을 버린다.
대승의 길을 포기하였거나,
온갖 존재를 즐겨 집착한 무리라면,
대승의 길을 마치 높고 험한 벼랑을 보듯 깊이 두려움을 일으키리라.
올바르게 중도(中道)로 나아가서,
만일 단지 이것이 자기 마음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한량없는 양식[無邊資糧]을 쉽게 쌓아 모으게 된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니,
마치 작은 노력으로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과 같고,
부처님이 밟아간 길도 오히려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
이러한 이치에서 마음속의 소원은 마땅히 뚜렷하게 채워질 수 있어서,
마음을 따라 진행되어 간다.
비록 인정한 바와 같이 바깥 일이 있더라도,
마음속의 의욕이 진실하고 소중한 큰 서원의 힘이기 때문에,
무변한 6바라밀[六度]의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베풀 수 있는 물건을 다 가지고 보시를 행할지라도,
베풀어야 할 온갖 생명에게 어찌 고루 미치어 그들을 기쁘게 하며,
구하는 마음을 따라 맞출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문득 끝없는 경계를 지으리니,
베푸는 일은 끝날 기약이 없으리라.
또다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계율 등을 가지고,
지장이 없이 지킬 수 있는 중생들에게,
저들의 욕구를 따라 다 뜻에 부합하도록 저들의 희망하는 것을 들어 바르게 보시 등을 행한다면,
빠르게 곧 바른 깨달음의 양식을 거둬 모으리라.
이에 따르면 단지 자신의 마음뿐이니,
또 어찌 바깥 경계에서 찾으랴.
만일 바깥 일을 인정한다면,
역시 바른 이치와 뜻이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라.
경계는 이 훌륭하고 미묘함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만일 자기 마음을 의지하여,
허망하게 분별을 낸다면,
색 등의 견해를 지어 몸이 나라는 생각[身見] 등을 일으킨다.
실제로는 자기 이외의 모든 유정(有情)을 상대로,
인식의 대상(所緣)을 짓지 않음이 없어야만,
오염(汚染)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생기리라.
그러나 보시 등에서 각기 그 일을 따라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식(識) 이외에 경계의 일을 빌리지 않는다.
만일 식 외에 다른 경계가 있다고 한다면,
결국 경계에 의지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킨다.
이미 꽉 붙들려 얽매였으니 따라 구르면서 머물게 된다.
이 잘못을 보아야만 벗어날 마음이 생겨서,
깊이 싫어하며 버릴 생각을 품으리라.
큰 깨달음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미 유정세간(有情世間)을 버린 것이니,
어찌 큰 이로움을 베풀려고 하겠는가.
모든 중생을 거둬 주지 않기 때문에 작은 마음으로 자기만을 건질 뿐이요,
큰 행을 이루기는 어려우리라.
그러니 모든 보살[覺情]들은 이를 의지하여 변해야만,
비로소 보리(菩提)의 양식을 길러낼 수 있다.
객진(客塵)40)의 조작된 일[有爲之事]을,
마음속에 싫어하여 등지기 때문에,
조작됨이 없는 법[無爲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작됨이 없는 법 자체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소승의 적멸[小寂]을 구한 결과,
치우쳐 한쪽만을 깨닫게 되고.
위없는 깨달음의 산은 무너지고 만다.
만일 바깥 경계를 벗어난다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모두 없어져서,
바른 깨달음은 쉽게 이뤄지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大悲]을 항상 마음속에 품었다면,
어찌 보리살타의 최고 과위(果位)가 비로소 성취되지 않으랴.
유식(唯識)이란 말도 곧 어긋나며 해롭다고 하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이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의탁해서 인연을 맺는 성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바깥 경계를 없애 버리고,
단지 자신의 식(識)만을 인연할 뿐이라면,
이야말로 곧 자신만을 가엾게 여김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뜻을 품어야만,
큰 행이 비로소 세워지는데도,
오직 자기 몸만을 돌아볼 뿐이라면,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이치에 어긋나리라.
비록 바른 책임[雅責]을 진술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허물이 없어지리라.
밖의 상속(相續)을 빌려서,
더욱 불어나는 연[增上緣]이 되면,
자기의 식(識) 가운데에서 중생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를 연(緣)으로 경계를 삼고,
중생의 경계에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널리 이롭게 한다면,
이는 어긋나지 않는다.
결정해서 이와 같이 마땅히 믿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리라.
가령 저 물질의 모양이나 소리 등의 경계에서 낱낱이 추구해 보아도,
거기에는 ‘나’가 없다.
냄새ㆍ맛ㆍ촉각ㆍ법을 다 모아 찾아보아도 역시 ‘나’는 없다.
그렇지만 ‘나’를 찾는 본래의 성품은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똑같이 인정한 무아(無我)로 종(宗)을 삼았다면,
앞으로 어디에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세상에서 공동으로 인정하는 그 감각의 허망한 집착[情妄執]을 인식 대상의 모양[所緣相]으로 삼고,
그것을 중생[有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니 또한 감각으로 허망하게 집착한 일을,
곧 바깥 경계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리라.
이를 근거로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가령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이치로는 반드시 그렇다고 인정해야 하리라.
단지 자기의 식(識)에서만 유정의 형상[有情相]이 나타날 뿐이며,
이 일을 의지하여 색의 모양[色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식(識)을 떠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으니,
이는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뒤바뀜이란 무엇인가.
원래 바깥 경계가 없으나,
보고는 실제의 사물로 여겼으니,
허망하게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위없이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해야,
이치에 맞다,
유식(唯識)의 견해는 진실하기 때문에 위없이 높은 경지[彼]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
깊이 도리에 부합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진실한 견해임을 알 수 있겠는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을 경전에 밝혀 설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투는 일이 있어서,
결정을 내리려면,
반드시 두 문(門)을 의지해야 한다.
첫째는 아급마(阿笈摩)41)를 따라야 하고,
둘째는 바른 이치에 부합해야 한다.
성인(聖人)께서 진실[無倒]하게 베푼 말씀이 간직된 전교(傳敎)를
상대에게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하려면,
아급마를 이끈다.
만일 이를 믿지 않는 그 밖의 사람을 위한다면,
마땅히 바른 이치를 펼쳐야 한다.
때로는 두 종류의 사람을 위해서 아급마와 바른 이치 두 가지를 함께 피력하기도 한다.
믿을 수 있는 방법이라야 편안하게 자리를 잡아 머물기 때문에,
그 바른 이치를 펼치는 것이다.
또 그 논설의 바른 이치를 밝히는 데 의지할 곳이 있으면,
아급마를 설한다.
그 바른 이치를 전래된 교리에 의지하지 않음에 따라
아직 참다움을 보지 못한 자는,
그의 온갖 언설이 잘못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억지 생각으로 끼어 맞춤[强思搆]’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아급마란 곧 바른 이치를 성립시키는 데 의탁해야 할 곳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자기가 소속된 부파(部派)에 힘을 쓰기 때문에,
이를 위해 먼저 아급마의 가르침을 편 이래로 뜻을 의지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대승(大乘)에 의하여 설했다”는 것은,
곧 제7성(第七聲)42)으로서,
그 해야 할 일을 지목한 것이다.
말하자면 저 대승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고,
유식관(唯識觀)을 설한다는 뜻이다.
유식관이 진실함으로 헛된 성질이 아님은,
아급마에 잘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오직 언설(言說)로서의 대승(大乘)만을 의지한다면,
마치 뜻에서 임시로 탄다[乘]라고 이름한 것과 같이 제7성의 설한 소리[第七聲所說聲]를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대승의 말과 가르침이 모여 있는 곳의 진실한 구절과 내용[眞實句義]에 의탁하여,
이를 성립시킨 것이다.
단지 “오직 이 식 뿐(唯識)”이라고 함은,
그 세운 바 종(宗)의 뜻(義)을 대승교(大乘敎)에서 밝히려고 하였으며,
한 모퉁이만을 이끌어서,
세운 바 종(宗)이 자신의 교에 위배되는 일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무엇 때문에 아급마(阿笈摩: 傳敎)라고 이름하였으며,
갑자기 인증(引證)을 시작으로 이 말들을 늘어놓았는가.
말하자면 이치에 맞는 교(敎)를 능숙하게 설하는 이로부터,
저 상속을 빌려서 더욱 불어나는 연[增上緣]이 되어야만,
이 교법(敎法)은 비로소 받아들이는 이로부터 생긴다.
식(識)의 차별은,
자체에 공능(功能)이 있어서,
뚜렷하게 앞에 머문다.
어떤 이는 몸소 듣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하여 설하기도 한다.
말로 밝히는 일에서,
그 느낌의 모양과 상태가 차례로 발생함은,
마치 붓이 획을 그어 가는 대로 문장과 글귀가 그 생김새와 단락이 밝고 환하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로부터 나왔기 때문에[從他來故] 아급마라고 이름한다.
만일 또 어떤 때는 저절로 마음속의 기억이 되살아나,
본래의 모습을 따라서 식(識)이 비로소 발생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나왔으므로[從彼生故],
아급마의 이름을 얻으리니,
오히려 자기의 말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이름함과 같으리라.
듣는 이의 뜻 모양이 지혜의 원인이기 때문에,
지혜의 양식[智資糧]이라고 이름하니,
어찌 일체가 단지 오직 식뿐이라고 하지 않으리요.
이것이 인정한 바와 틀리기 때문에,
자신의 말 자체에 서로 어긋남이 있다 하리라.
이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색(色)에 별도의 다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식(識)의 차별에 의하여 색이 건립되었으니,
마치 무색계(無色界)가 소유한 차별과 같다.
무색계는 실로 색(色)이 없으니,
단지 식(識)만을 의지하고 네 종류로 나뉘어,
공무변처(空無邊處) 등을 세운 것과 같다.
나머지 세계43)도 마찬가지다.
가령 또 셋이라고 말한들,
식(識)에 무슨 방해가 있으랴.
오히려 유정(有情)은 비록 차이가 없을지라도,
그러나 욕계(欲界),
색계(色界)의 다름을 확실하게 건립함과 같다.
그 묶인 바를 따라서 색이 차별되었기 때문에,
색(色)이 비록 달라짐이 없을지라도,
별도로 건립함은 잘못이 없다.44)
어째서 경교(經敎)에서 밝힌 “오직 마음 뿐[唯心]”이라 하지 않고,
이제 종을 세우면서 “오직 식뿐[唯識]”이라고 하는가.45)
본교(本敎)와 어긋나게 설하니,
참으로 허공을 잡는 듯하다.
뜻이 돌아갈 자리가 있으니,
참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미 먼저 “심(心)ㆍ의(意)ㆍ식(識)ㆍ요(了)는 이름의 차별(差別)이다”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체[同體]의 일이므로,
이름을 다 갖추어 진술하지 않았다.
때문에 달라진 이름으로 그 뜻을 선양한 것이다.
곧 오직 알 뿐[唯了]이란 말은,
일반 대중이 공동으로 인정하여 쓰는 말이 아니다.
뜻을 이해시키려고 할진댄,
공동으로 아는 소리를 가지고,
다시 그 외 다른 이름을 펼쳐나가면서,
또다시 경과 서로 틀리지 않음을 밝혀야 한다.
의(意)와 식(識)의 두 소리를 겹쳐 설해서,
저 두[心ㆍ了] 뜻에 견주어 보면,
체(體)도 다르지 않고,
그 과(果)도 그대로임을 알 것이다.
만일 반드시 경과 틀리지 않은 점을 밝히기 바란다면,
심(心)과 요(了)의 두 소리는 똑같이 하나의 뜻이다.
경교(經敎)와 틀리지 않음을 밝히면서,
이미 두루 막힌 곳을 풀었으니,
어찌 의(意)와 식(識)을 다시 설해 주기를 바라리요.
그러나 만일 요(了)라는 소리가 심(心)의 달라진 이름이라고 한다면,
심(心)이 심소(心所)를 마주 대할 때,
여기에 별도로 체(體)가 있으리라.
이것은 마치 어떤 경계에서 같이 태어난 무리들이 예전에 잠잤던 일 등을 생각하면,
문득 없어짐과 같다.
이것은 앞과 뒤의 이치가 서로 어긋난다.
참으로 여기에는 잘못이 없다.
근거할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심(心)이란 말은,
서로 응함이 있음을 인정함이요.
이 요(了)란 말은 겸해서 그것들을 포섭한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식(識) 외의 경계를 심의(心意)라고 밝힌 것이므로,
그 심(心)의 자리에는 유(唯) 소리를 두었고,
의(意)에는 취함과 버림을 두어서 이로써 과(果)를 삼았으니,
만일 경계가 없다면 결국 그것은 소용이 없게 되리라.
오직[唯]이란 소리는 부정하지 못하리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질책하리라.
당장에 인식 대상의 경계[所緣境]마저 버린다면,
무엇을 가지고 소용없다고 말하랴.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동일하게 생기는 법[同生法]과
인식 대상의 경계가 함께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그 자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쪽은 부정해서 버리고,
한쪽은 남겨 둠을 보리라.
어찌 일에 유래[由]의 단서도 없이,
쓸데없는 말로 혼자 즐길 수 있겠는가.
만일 다른 뜻이 없다면,
참으로 힐난한 바와 같으리라.
그러나 경계에 마음이 모여서 공동으로 인연하는 결단(決斷) 등의 일이,
‘똑같은 종류의 성질’임을 근거로,
심소(心所)의 경계에서 심(心)이라는 소리를 임시로 말하고,
또 인정해선 안 될 일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의 경계에 다시 오직[唯]이란 소리를 둔 것이다.
비록 말할 일이 있더라도,
이는 되레 이치에 맞지 않음이 성립한다.
또한 심(心)이라는 말을 취하지 않으면,
한 곳에서 참과 거짓[眞假]의 두 일을 밝히지 못한다.
함께 분명하게 밝히는 데 힘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牛] 등의 소리처럼 심소(心所)의 자리에 이 심이라는 말을 두어,
심이라는 소리로 말할 때에는,
참된 사실은 곧 버려지게 된다.
마치 시골에서 임시로 소라고 말할 때,
소의 턱이 처져 늘어진 것[垂胡] 등의 일이,
이치로서는 반드시 마땅히 버려야만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본(本: 실제의 일)과 의(意:사물의 내용)를 함께 말함도,
또한 마땅히 다시 한 종류의 다른 소리를 만드니,
이를 사용하여 이 뜻을 나타낸다.
혹은 포섭한 소리[攝聲]로 줄여서 나타낼 수도 있다.
세속의 논법(論法)에 의지하여,
마치 하고 싶은 소리로 변론하고 해석하는 것과 같다.
오직 자기의 뜻으로 교묘하게 해석할 수 있을 뿐 아니니,
순서의 실마리[緖系]를 바탕으로,
결정하는 일이 생기는 것인가”라고 한다.
역시 또 염(染) 등이 있는 말에 근거하지 않는다.
소달라(蘇呾囉)46) 가운데 오염(汚染) 등의 설(說)이 있다.
그 부정해서 버리는 데,
그만한 힘의 작용이 없으니,
저기[彼: 곧 緖系]에 또한 있다면,
경계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계 또한 버리지 못하면,
앞서 말한 오직[唯]이란 소리는,
문득 쓸모가 없어진다.
만일 바깥 경계가 이치에 맞지 않아서 반드시 부정해야 된다고 말한다면,
아급마(阿笈摩)에 마달라(摩呾羅)47)의 소리가 없으니,
두 곳이 똑같기 때문에,
따라서 어느 한 일을 부정하려면,
결정할 인(因)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른 종(宗)의 견해를 의지해야 하리라.
심왕(心王: 心)과 심소(心所)는 법체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단지 위치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곧 이 오직[唯]이란 소리는 바깥 일을 부정할 수 있으니,
동일하게 생기는 법은 부정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전체적 양상의 소리를 가지고 밝힌 이름은,
그 자체의 일에서 반드시 차별이 없어야 한다.
결정되어 모두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치로는 곧 전체적으로 포섭한다.
이러한 도리를 서술해서 깨우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마음이란 말을 설하여 서로 응함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만일 심소를 떠난다면,
심왕만이 홀로 남아 있지 않는다.
때문에 마땅히 힐난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부정할 적에도 똑같이 부정해야 한다.
이 석(釋)을 지을 때,
오직 바깥 경계만을 부정하는 일에 참으로 공능(功能)이 있으니,
서술한 뜻이 이미 성립하였다.
때문에 오직[唯]이란 말을 하였으니,
이치에 따라 그 외 다른 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단지 경계의 일만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찌 이끌어 증명한 바가 아니랴.
이 가운데 할 말이 있다.
그 외 다른 데에서 제외된 심소가 있음을 분명히 아는데,
또 이것이 있음을 용납하니,
마치 여섯 식의 모임[六識身]을 식의 모임[識聚]이라고 이름함과 같으리라.
만일 여기서 식의 모임[識蘊]을 말할 때에,
겸하여 심소를 포섭한다면,
이치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상(想),48) 수(受)49)와 그리고 사(思)50)의 모든 심소법(心所法)은
그 외 다른 모임[餘蘊]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오히려 색의 모임[色蘊]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 비야나(仳喏那)51)의 몫을 취하여,
색의 모임이라고 주장함과 같기 때문에,
상(想) 등도 똑같이 그러니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취함을 인정하여 색의 차별에 근거한다고 말한다면.,
곧바로 식의 소리[識聲]를 가지고 식의 모임을 설해야 한다.
색 등이 아닌 법은,
이 마음자리[心位]의 차별이니,
오히려 상(想)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자리를 가지고 차별한다면,
가려서 차등을 둘 때,
그 색의 종류를 따라서 가리고 나면,
색 등의 소리를 가지고 식에서 건립해야 하니,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이것은 이에 곧 식의 모임을 부정하는 격이다.
저로 인해서 색(色)ㆍ수(受) 등의 소리가 그 몫이 잘려졌으므로,
위치의 차별 외에 별도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야나의 위치 차별을 떠난 외에,
따로 색의 자리가 있으니,
마치 즐거움 등을 나타낸 모양의 상태가,
근심과 고뇌인 것과 같다.
이 모양의 경계에다 식의 소리[識聲]를 안치하였으니,
소가 송아지를 따르는 이치다.
만일 이와 같다면,
식(識)과 여섯 식의 모임[六識身]은,
모두 식의 모임(識蘊)이 되니,
뜻이 서로 어긋난다.
안(眼) 등의 모든 식이 색 등의 형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모두 이 색의 모임이 거둬들인 격이니,
또다시 그 외 다른 뒤섞이고 어지러운 잘못이 있다.
만일 푸른 색깔 등의 모양이 나타날 때,
어기기도 하고,
따르기도 한다면 색(色)과 행(行)의 두 모임[二蘊]은,
곧 어지럽게 뒤섞여진다.
이와 같이 또 즐거움등의 자리에서도 수(受) 등이 서로 뒤섞이게 된다.
이 도리에 준하여 또한 총체와 개별의 뜻을 파(破)하리라.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식은 고르게 미칠 수 있으므로,
총체양상(總體樣相)의 소리이니,
오히려 처음의 양상과 마찬가지다.
이의 개별양상(個別樣相)은 색 등이라고 말하리라.
저것은 이에 현재의 양상[現相]에서,
위치를 차별하는 데 근거가 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앞의 수(受) 등과 마찬가지로 곧바로 뒤섞이고 어지러운 잘못이 있다.
그러므로 그 심소의 성질을 제외한다는 말은 오히려 소유한 색의 모임을 성립시킨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유심(唯心)의 소리는 유식(唯識)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 역시 그 심소에서 인식의 대상[所緣]을 가지고 의심을 없앨 수 없으니,
오직이란 글자[唯字]는 무엇을 부정하려는 말인가.
비록 심소가 심왕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허망한 말이 되고 만다.
그 모양과 상태로 인하여 자체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말한바 식이란 것은,
오직 현재의 경계와 뒤섞인 염오[雜染] 등의 성질로서,
단지 애착한다고 관찰하였을 뿐이다.
자체는 밝게 살피지 않았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곧 저것에 대해 자체가 특별히 다르니,
번갈아 엇갈리게 된다.
위에서 서술한 도리(道理)가 이미 많았으나,
그럼에도 본종(本宗)에 대해서는 아직 알맞은 도리를 밝히지 못하였다.
이제 곁가지 논란[傍論]은 그만두고,
마땅히 올바른 종지(宗旨)를 말하리라.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가령 체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심자(心字)를 가지고 서로 거둬들일 수 있다.
마땅히 이 뜻이 함께 이뤄진 지 이미 오래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곳의 온갖 심소법(心所法)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밝혀 말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이 가운데 총목(摠目)이 소유한 마음의 모임[心聚]은,
마치 조심(調心) 등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지 그 마음만을 말하여 이것이 함께 이뤄졌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이란 소리[唯聲]는 단지 그 경계만을 부정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52)
만일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푸른 색깔,
단맛 등을 분명하게 가려서 알겠는가.53)
이치로는 현재 보이는 것을 부정할 길이 없기 때문에,
누가 감히 현재 보이는 경계를 부정한다고 말하겠는가.
단지 자기의 식(識)에서 경계의 모습이 생겼을 뿐이다.
자기 식의 모양이 받아들일 때,
드디어 곧 보이는 푸른 색깔 등을 헤아리고 집착하여,
바깥 경계처럼 여기면서 머물기 때문이다.
단지 거짓되고 허망한 견해일 뿐이니,
마치 눈어질병자가 머리털ㆍ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에 단지 이 식(識)의 모양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 파리 등의 모습이 나타남은,
곧바로 허망한 집착으로 파리가 있게 되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밖에서는 일찍이 파리 등의 자체 성질이 있을 수 없는데도,
어떻게 경계로 여겨서 식을 따로 생겨나게 하는가.
이것이 만약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이것을 얻고,
식이 저 모양의 상태와 유사(類似)하게 생기는가.
반드시 본 모습이 있어야만 저 모습과 유사하게 생겨나리라.
마땅히 이럴 때에만 저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세상이 모두 함께 인정한다.
마치 아지랑이를 두고 물과 유사하다고 말함과 같다.
그 경계가 없지 아니하며,
실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살타(薩埵: 有情)에서 깨달아 아는 상(相)이 생겨남과 같다 하리라.
그러나 색 등의 자체를 떠나서는 별다른 살타의 실제 일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색 등은 전체적이든 개별적이든 그 자체의 성품에 변하고 무너지는 등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나,
가려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실제 일에 대해서도 또한 그 본성(本性)을 버릴 능력이 없다.
어떤 이는 “당연히 살타를 세속에 뒤덮인 존재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리로는 나도 똑같이 그렇다.
말하자면 색 등의 경계[處]에서,
식을 따라 차별의 성질을 일으킴은 세속에 뒤덮였기 때문이다.
마치 색의 경계를 의지하여 수레 등이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단지 감각만이 헤아리며 집착하므로,
그 색 등에 참 성품[實性]이 덮이고 가려졌을 뿐이다.
여러 인연하는 경계에서 자기의 모양과 상태를 만들며,
이를 안치하여 밖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이 경계에서 수레 등을 보기 때문이다.
모르겠노라.
세속에 뒤덮임은 무엇을 뜻하는가.
덮여 가렸다는 뜻이다.
세속의 감각을 따르기 때문에,
저로 인해 수레를 타는 등의 경계에서 자기 성품이라고 헤아려 집착하니,
이를 ‘세속에 뒤덮인 존재’라고 한다.
그 참다운 자체[實體]를 덮고,
다른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허망한 감각이 그 형상을 시설해 놓고,
우선적으로 이 일에 대해,
이것을 집착하여 취한다.
비록 실제의 모습이 없을지라도 허망하게 경계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이다.
또 항상하다고 여기는 것 등 감각이 나타낸 모양도 마찬가지니,
무슨 본래의 모양이 있다고 이것을 따라 좇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식 외(識外)에 참다운 경계가 없을지라도,
식이 나타낸 모양은 그 이치가 잘 이뤄진다고 해야 하리라.
어떤 이는 “이 가운데 유사한 모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에 바로 뒤바뀐 일을 따른다는 뜻이니,
마치 아지랑이의 경계를 반대로 물인 줄 알고,
당장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식 또한 그 색 등 모양의 경계에서 뒤바뀐 감각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현상(現相)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 뒤바뀐 경계도 역시 실제의 일을 의지해야만,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역시 앞에서 모두 다 추궁하여 힐책한 것과 똑같다.
또 어떤 이는 “바깥 법칙이 이 달라진 집착을 일으켜서,
색 등을 떠난 외에 별도로 ‘나’의 자체가 있으니,
이것은 또 무엇을 의지하여 뒤바뀜을 일으킨 것인가”라고 하였다.
경에서 “안에 의지한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어긋남이 없다.
몸과 함께 자연히 생긴 번뇌[俱生]에서 일으킨 거짓 몸을 실제로 여기는 견해[身見]를 숨은 뜻[密意]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 대해서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한다.
장차 보게 되든지,
현재에 보고 있든지,
가깝게 지내야 할 나쁜 벗 등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은,
곧 나에 대해 일렀으니,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저 범부와 소인은 허망하게 그 식(識)을 내고,
결국 뒤바뀜을 일으켜서,
바깥 경계의 모양으로 여긴다.
혹은 다른 것을 따라서 공동으로 일을 만들고 의견을 말할 수도 있으니,
마치 세상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일을 가지고 경계를 삼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 일에서 유식(唯識)이 생겨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유사한 경계의 모양을 따르기 때문에,
색 등을 인연하는 식은 바깥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
마치 눈 어질 병자가 머리털ㆍ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
이 바깥 경계는 텅 비어 단지 오직 식뿐이란 것은,
바로 종(宗: 唯識宗)의 뜻이다.54)
그러자 이 뜻을 근거로 따져 말하기를 “이 비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광명(光明)의 몫(分)에서 허망하게 머리털이라는 생각이 일어남은,
눈의 감각기관[眼根] 자체에 힘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한다.55)
어떤 이는 말하기를 “특별한 대종[別大種]56)이 생겨서 볼 수 있게 되자,
결국 감각으로 하여금 집착케 해서,
머리털 따위로 여기게 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유사한 경계의 모양이 나타남을 내세워서,
단지 오직 식뿐[唯識]이라고 한다면,
장소와 시간 등의 결정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되리라.
만일 그 소유(所有)한 색 등의 온갖 경계가 식을 떠나서 별도로 있다면,
당장 색 등에서 그 장소가 나타난 형체의 크기와 따로 나뉜 자리를 정해야 한다.
그 식이 저기에서 형체의 크기를 결단하고,
경계선[方隅]을 결정하여,
저와 유사한 모습이 생긴다면,
이것은 알맞은 이치를 성립하리라.
만일 인정한 바와 같이,
바깥 경계와 상관없이 단지 오직 내부의 식[內識]만으로,
허망한 집착을 일으켜서 색의 모양이 생긴다고 한다면,
그 외 다른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어째서 형체의 크기를 따라서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는 식의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가.
장소에 따라서 그 곳을 결정으로 보는 것은,
마치 곳을 따라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체의 곳이 아니다.
경계에 이미 결정이 없으니,
그 외 다른 곳에서는 또한 마땅히 볼 수가 있거나,
혹은 볼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저 세운 대상은 결코 바깥 경계에서 식이 생김을 취하지 않았다.
경계가 없이 생긴 감각에는 일찍이 결정된 장소와 시간이 있을 수 없다.
또 그 실제의 일도,
그 경계가 텅 비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결정된 시간과 장소가 나타난 모양은 당장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하리라.
그러나 이와 같지 않다.
여기에 이미 결정이 없으니,
색 등을 보는 마음은 저와 더불어 이에 서로 떠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경계가 텅 비어 없다고 집착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미 없는데도 거듭 집착하여 존재의 몫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세운 종(宗: 唯識宗)의 자체에 서로 어긋난 잘못이 있음을 밝히는 격이다.
만일 그 비유는 성립할 이치가 있다고 말한다면,
몸은 결정에 속하지 않으니,
이치에 서로 어긋남이 있다.
상응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한데 모여서 함께 본다면,
홀로 치우쳐 한쪽에 속하지 않고 이 경계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땅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경계가 없음을 인정하였으므로 이것은 이미 경계가 없으니,
혹은 이류(異類: 別種)라고도 하리라.
이류라고 말함은,
유별난 모양을 볼 때에 그 무너진 감각기관[根: 眼根]으로 연(緣)을 삼았기 때문에,
마치 눈어질병에 걸린 사람과 같다.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보는 사람 모두를,
마땅히 다 눈어질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에서 현재 상응한다면.
온갖 몸의 경계에 결정이 아니면서 생기고,
아울러 색 등에 대해 볼 수 있는 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비교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깥 경계가 없으므로,
인식해야 할 일에 불결정(不決定)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종(宗)의 허물을 따져서 물리친 일과 똑같다.
또 온갖 일의 작용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모든 실제의 머리털 등은 눈앞에 보이며,
거울을 닦는 등 작용할 수 있는데.
어째서 이 식의 머리털 모양은 쓰지 못하는가.
비록 진실한 일이 없을지라도 작용하여 굴러 생긴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공능(功能)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식의 몫[識分]에 공능이 있다고 한다면,
눈어질병으로 보는 일인들 어찌하여 머리털로 쓰지 못하겠는가.
여기에는 똑같이 유사한 머리털의 모양이 있으므로,
이 역시 앞서 헤아려 살핀 경계와 똑같이 작용의 공능(功能)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종(宗)의 허물을 벗어나는 데,
세 가지 비유를 의지할 대상으로 삼는다.
세 가지 일은 똑같지 않다.
진실하지 않는 경계에서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감각기관[根]과 바깥 경계[境]의 공능차별(功能差別)을 따르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감각기관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색의 감각기관[色根]이요,
둘째는 색이 아닌 감각기능[非色根]이다.
첫째는 감각기관의 손실로 어두워졌기 때문에 허망하게 그 일을 본다.
때문에 첫 비유로 삼았다.
다음 둘째의 색이 아닌 감각기능은,
저 꿈속에서 차별이 있는 경계를 보니,
둘째 비유로 서술하였다.
저 경계에 공력(功力)이 있으므로,
뒤바뀐 견해를 일으킬 수 있으니 셋째 비유로 이끌었다.
이것은 어느 한 학파[一家]의 다른 해석이다.
어떤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장소와 시간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색 등을 인연하는 마음은,
마음이 바로 의탁한다.
그러니 안에서 일을 나타내어 경계를 삼지 않는다.
마치 문장의 글귀를 인연하는 마음과 같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맨 처음에 일으킨 것을 의지하고 현재에 존재한 일을 따라서 집착하여 취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감각은 결정된 시간을 용납할 수 있지만,
마음에서 어떻게 장소를 결정할 수 있으랴.
장소는 없지 않다.
사물에는 장소가 있으나 결정되기도 하고 결정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계상에 소유한 법(法)을 의지하여 그 마음의 경계에서 가정으로 말하였으니,
이 또한 잘못이 없으리라.
이 경계가 현상(現相)의 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결정된 곳이라고 말하며,
보통 저 일로 마음이 생길 수 있다면 경계라 이름한다.
이것은 바깥 경계가 따로 있음을 성립시켜 공동의 인정을 취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장차 비유를 들어 보리라.
그 서로 응하는 시간과 장소에 머무는 자는 다 함께 다르지 않는 모양이 생기기 때문에,
색 등을 인연하는 마음은 밖의 하나의 일로 그 원인이 되게 마련이다.
비유하면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을 따라서,
더욱 불어난 식[增上識]에,
‘공동의 인정’이 생겨 일어남은,
그 자체의 모양을 따라서 작용이 생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식을 떠나 따로 색 등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
또 마땅히 털 등의 작용이 없다는 것을 성립시킨다.
저 모양의 감각(感覺)은 꿈의 감각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진술해온 내용이 서로 도리에 어긋남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불결정(不決定)의 잘못을 막으려고 생각하였다.
ᖰ 어느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곧 이 시간과 장소,
두 가지에 실의(實義)가 있다. ᖱ
이 경계에 대해서
시간과 장소의 결정은,
마땅히 있지 않아야 한다.
그대가 이미 경계의 일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고,
저에 따른 차별 또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수고롭게 그들로 하여금 문득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가.
이것이 만일 있지 않아서 곧바로 서로 부합한다면,
마치 붙잡힌 도적이 종기의 아픔을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억지로 앞의 종(宗)이라고 해도,
참으로 거칠고 얕아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식에서 나타난 모양의 상태를
인정할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비록 바른 생각을 드러내 보일지라도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또 시간과 장소의 차별이 소유한 일을 따라,
곧 이곳에서 그 시간과 장소를 보고 결정으로 인정한다.
비록 인정한 일에 실제의 바깥 경계가 있더라도,
영원히 색 등의 결정이라고 여긴다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달라진 시간이나 달라진 장소를 어떤 때는 보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에 어느 때이고 있음을 보면서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어찌 그들에게 공동으로 인정하는 경계가 아니라고 하며,
이 분별의 능력[能別]으로 결정하는 도리를 어떻게 부정하랴.
때문에 단지 식에서 그 상(相)이 나타날 뿐이다.
또 어떤 이는 따로 상위인(相違因)57)의 논란을 일으켜 힐책하기를
“오히려 경계가 텅 비어 없음을 성립시킴과 마찬가지로
나는 되려 시간과 장소의 결정을 성립시키리라.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시간과 장소를 공동으로 인정한다면,
곧 공동의 인정을 성립시키면서 이를 부정하여 버리리라.
그로 인해서 어김이 없어야만 비로소 서로 어긴다고 말을 할 수 있다.
만일 대중이 공동으로 인정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전혀 그럴 리 없으니,
내가 좋아할 대상이 아니다.
이 이치 때문에 무력한 논란이 되리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스스로 인정하기를
“단지 경계가 없는 곳에서 부정하여 버릴 뿐이다.
공(空)을 인연하는 식은 결정된 시간과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저의 결정은 색 등의 경계에서 공동으로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깥 경계가 실제로 있음을 성립시켰다.
이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것을 떠난다 해도 따라서 이뤄지리라.
단지 부정하여 버릴 뿐이라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 하나만을 사용할 뿐이라면,
그들을 바르게 이해시켜 줄 수 없다.
이것은 앞서 종이 내세운 뜻과 같다.
저밀라(底蜜欏)58)의 손상(損傷)이기 때문에
눈동자의 막(膜)이 성글어짐은 마치 그물코가 얽혀서 밖으로 흰색을 보는 것과 같다.
그 틈 속에서 밝은 모양이 나타나자 문득 허망한 견해를 일으켜서,
오히려 털 등으로 여긴 것이다.
곧 이 비유는 그 세운 대상의 ‘따라서 이뤄지는 이치’가 잘못임을 말한다.
이제 저들에게 물으리라.
만일 광명의 모양이 털 등의 형상이라면,
이치에 맞겠는가.
이 광명의 모양을 어떤 이는 황색으로 보는가 하면,
혹은 적색으로 보는 이도 있다.
더욱이 털 등을 순수한 흑색으로 보거나,
혹은 온갖 채색이 마치 삭갈라궁(鑠羯羅弓)59) 등처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밝은 눈으로 모든 사물을 잘 보는 사람은
저 광명의 주변에서 색다른 모양을 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이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틈 빛의 경계에서 뒤바뀌어 털로 여겼다”고 말하리라.
이는 곧바로 털 등을 보는 마음의 경계는 텅 비어 없는 성질임을 성립시킨다.
광명의 제 몫[支分]은 털 모양의 성질이 아님에도 이 털 등과 유사한 모양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단지 원인이 되어 능히 생길 뿐만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그 인식 대상의 성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색 등을 인연하는 모든 식(識)을 곧 눈 등을 인연하는 모든 감관[根]으로 성립시키지 말라.
원인의 뜻은 똑같기 때문이다.
혹은 또 다음과 같이 “실제 일의 원인[實事因]을 의탁해야만 비로소 뒤바뀜이 생기고,
그 외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사실이다.
이 또한 곧 안에서 잘 깔린 종자(種子)를 의지하여 성취하면,
바깥 경계를 기다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경계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자체의 상[自相]을 잘 깔아서 마음에 둔 뒤에야
비로소 인식 대상의 성질[所緣性]을 이룰 수 있다.
그 광명의 몫[光明分]이 일어날지라도,
마음에 상관하지 않으면 어찌 인식 대상의 성질을 일으킬 수 있으랴.
이 역시 발생하는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다음 어떤 이는 헤아려 말하기를 “그 눈병 걸린 사람이 눈 기관[眼根]의 대종(大種)60)이 정도를 잃고,
눈동자에서 생긴 가림과 어지러움으로,
눈의 기능[眼分]이 손실되었다.
저 손실된 힘 때문에 곧 다른 모양이 생겨났으며.
바깥 경계에서 유별난 대종[別大種]을 발생케 하였으니,
손상된 눈 기관의 식이 문득 저 모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저밀리가(羝蜜梨迦: 眩瞖, 곧 눈어질병)가
소유한 감각의 슬기[覺慧]는 실제의 바깥 경계를 인연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큰 과실이 있다.
보통 허망하게 뒤바뀐 일에서 일어난 감각의 마음은 다 앞으로 논란을 펴리라.
즐거움 등에서 뒤바뀜은 무엇을 의탁하여 인연하기에,
이 모양이 생겨서 그 경계로 여겼겠는가.
비록 바깥 경계가 없을지라도 허망한 견해를 둔 것이다.
이것은 뒤바뀜이니.
곧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한다.
만일 세속이 공동으로 인정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곧 이것을 가지고 ‘허망한 뒤바뀜’으로 여기리니,
되려 큰 허물이 있다고 하리라.
‘괴롭다[苦]’ㆍ‘텅 비었다’[空] 등의 견해[見]로,
살제(薩帝)61)를 인연할 때에는 바로 저기에 해당된 무리이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는 노력으로 뒤바뀌지 않음을 볼 수 있으리라.
번뇌에 묶인 온갖 중생이 다 진리를 깨친다면,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바른 법을 선양했다고 하나,
이것은 곧 결과의 이익이 전혀 없음이 성립하리라.
어디에 이렇게 결정이란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치우쳐 눈어질 병자에게만 홀로 거짓과 미혹을 받게 하였다는 말인가.
또다시 저들에게도,
느낌에 모양과 상태가 있다.
그 유정(有情)이 날아다니며 가고 옴을 보면,
온갖 깨친 이에게 힘찬 약동[搖颺]을 관찰케 한다.
이 모든 살타(薩埵: 有情 혹은 衆生)에게 대종(大種: 四大)의 생김을 인정하셨으니,
어찌 생명으로 헤아리지 아니하랴.
가령 백천의 수많은 눈어질 병자들이 함께 모여,
어느 한 곳에서 각기 다른 형상을 보더라도,
이때 어째서 마주 걸리는 물건이 있거나,
또 서로 함께 물리쳐 몰아내지 않는가.
만일 이것이 또한 눈어질병의 힘에서 나온다고 말할지라도,
저밀라(底蜜欏)가 배워 익히는 문에서 공력(功力)을 많이 들여 훌륭하게 환술(幻術)을 닦았다면,
모든 법의 자체 성질을 옮겨 바꿀 수 있다.
혹은 마땅히 보고 저것이 걸리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걸리지 않으므로,
욕(欲) 등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색의 성질이 아니니 이에 어찌 유식론자(唯識論者)와 다르겠는가.
또다시 어찌 수고롭게 옳지 못한 곳62)에서 힘을 써 드러내 보이겠는가.
저들은 대종(大種)이 그 하나 하나에서는 푸른 색 등의 성질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단지 종(種: 地 등 四大種)이 합한 인연의 힘이기 때문이다.
눈 등의 모든 식은 저 모양을 인연하여 생길 뿐이다.
이것은 본 종(本宗: 唯識宗)의 뜻이다.
일반적으로 모여 합한 것은 실제의 물건[實物]이 존재하지 않는다.
곧 이 식은 실제의 물건이 아닌 것을 인연하니,
수고롭게 깊이 짜 맞추려고 하지 말라.
어긋나거나 다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수고롭고 번거롭게 성립시키려 하는가.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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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성(性)과 상(相)으로서,
성(性)은 절대불변(絶對不變)의 진실한 체성(體性)을,
상(相)은 상대변화(相對變化)의 차별된 현상(現相)을 말한다.
2)
2) 남쪽을 가르치는 신선의 목상(木像)이 새겨진 중국 고대의 지남거(指南車: 혹은 司南車)를 사방(司方)이라고 한다.
3)
3) 육신통(六神通)으로서,
신족통(神足通)ㆍ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누진통(漏盡通)을 말한다.
4)
4) 중국 고대에 태산(泰山)에서 땅을 높이 쌓아서 제단(祭壇)을 만들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올리던 일[封禪]로서,
여기에 모신 72의 인군(人君)을 말한다.
5)
5) 목성(木星)이 하늘을 한 바퀴 도는 사이로서,
열두 해 동안을 말한다.
6)
6) 한없이 많은 티끌과 모래와 같이 긴 시간을 말한다.
7)
7) 부처님의 미간백호(眉間白毫)를 말한다.
8)
8) 부처님의 입을 귀한 황금에 비유하여 금구(金口)라고 칭한다.
9)
9) 중인도 마갈타국 사람으로서,
불멸후 6백 년경에 대승(大乘)을 제창한 논사(論師)이다.
10)
10) 불멸후 6,7백 년경의 남인도(南印度: 혹은 西印度) 사람.
공종(空宗)의 시조로서 대승불교(大乘佛敎)를 크게 선양하였다.
11)
11) 반자교(半字敎)는 만자교(滿字敎) 이전에 배우고 닦는 교리이며,
만자교는 반자교를 바탕으로 배우고 닦는 교리를 말한다.
『열반경(涅槃經)』의 “아버지가 어리석은 자제에게 먼저 만자(滿字)를 가르치지 않고,
반자(半字)부터 가르친다”는 비유에서 유래한다.
뒤에는 반자교(半字敎)를 소승교(小乘敎)에,
만자교(滿字敎)를 대승교(大乘敎)에 비교하는 등 많은 설이 나왔다.
12)
12) (231~348) 서역(西域) 구자국(龜玆國)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백(帛)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경문(經文)을 잘 외우고 문리(文理)에 밝았다.
310년에 중국 낙양(洛陽)으로 온 뒤,
신비한 행적을 보였다.
후조(後趙)의 석륵(石勒)ㆍ석호(石虎) 등의 비호(庇護)를 받으면서 대법(大法)을 전하였고,
도안(道安)등 1만의 제자를 두었다.
13)
13) (314~385) 중국 부류(扶柳)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위(魏)씨며,
불도징(佛圖澄) 등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 개척에 앞장섰다.
『반야경(般若經)』ㆍ『도행경(道行經)』ㆍ『밀적경(密跡經)』ㆍ『안반경(安般經)』 등의 문구를 자세히 비교하여 시종(始終)의 뜻을 소상히 밝혔고,
처음으로 경문(經文)에 「서분(序分)」ㆍ「정종분(正宗分)」ㆍ「유통분(流通分)」의 과목을 정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으며,
반야(般若)의 공론(空論)을 제창하여 초기 인도인 중심의 포교를 중국인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
『반야절의략(般若折疑略)』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14)
14) (572~640) 중국 영천(潁川) 사람으로서,
속성(俗姓)은 진(陳)씨며 어려서 출가하였다.
유석백가(儒釋百家)의 학문을 널리 연구하였고,
특히 삼론(三論)에 정통하였다.
601년에 장안(長安)에 들어가서 도술(道術)을 연마한 뒤 의녕(義寧) 원년(元年ː617)에 도복(道服)을 입고,
노장(老莊)의 학문을 더욱 깊이 통달하니 따르는 도속(道俗)이 많았다.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618)에 다시 불교로 돌아와,
경사(京師)의 제법사(濟法寺)에서 살았다.
때에 태사(太史) 부혁(傅奕)이 11조의 항목을 들어 불법의 폐지를 주장하자.
『파사론(破邪論)』 1권을 지어 그 부당성을 논파한 결과,
부혁은 그 이치에 굴복하게 되었고,
고조(高祖)는 폐불(廢佛)의 뜻을 거두었다.
그 뒤에도 이중경(李仲卿)의 『배불론(排佛論)』을 상대로 『변정론(辯正論)』 8권을 지어 그의 주장을 물리쳤다.
정관(貞觀) 연중에 칙명(勅命)으로 용전사(龍田寺)에 머물면서 역경(譯經)의 필수(筆受)직을 맡아 참여하기도 하였다.
69세에 입적(入寂)하니,
도속(道俗)이 통곡하는 가운데 동산(東山)에 장사지냈다.
저서(著書)로는 『시부(詩賦)』ㆍ『찬송(讚頌)』ㆍ『비지(碑誌)』ㆍ『기전(記傳)』ㆍ『삼교계보(三敎系譜)』ㆍ『대승교법(大乘敎法)』 등 30여 권을 남겼다.
언종(彦悰)은 법림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법림별전(法琳別傳)』 3권을 지었는데,
그 안에 불법 수호[護法]에 관한 사적(事蹟)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5)
15) (334~416) 중국 안문누번(雁門樓煩)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가(賈)씨다.
13세부터 허창(許昌)과 낙양(洛陽)을 번갈아 유학(遊學)하여 널리 육경(六經)과 노장(老莊)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21세 때 아우 혜지(慧持)와 함께 태행산맥(太行山脈)의 항산사(恒山寺)로 갔다가 도안(道安)의 법석(法席)에서 반야경(般若經)의 강설을 듣고,
크게 깨달아서 동생과 함께 출가를 결심,
도안 문하에 들어갔다.
그 뒤 30년 동안 여산(廬山)에 살면서,
법정(法淨)ㆍ법령(法領)을 서역으로 보내어 범본(梵本)을 찾아오게 하고,
계빈국의 승가바제(僧伽婆提)를 청하여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ㆍ『삼법도론(三法度論)』을 다시 번역케 하였고,
또 담마류지(曇摩流支)를 청하여 『십송률(十誦律)』을 완전하게 번역케 하는 등 불교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83세에 입적하니 송대의 제왕(帝王)들은 변각대사(辯覺大師),
정각대사(正覺大師),
원오대사(圓悟大師),
등변정각대사(等徧正覺大師)의 시호를 내렸다.
저서는 『여산집(廬山集)』 10권,
『대지도론요략(大智度論要略)』 20권,
『문대승중심의십팔과(問大乘中深義十八科)』 3권,
『명보응론(明報應論)』 1권,
『석삼보론(釋三寶論)』 1권,
『변심식론(辯心識論)』 1권,
『사문단복론(沙門袒服論)』 1권,
『법성론(法性論)』 2권,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등을 남겼다.
16)
16)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560~578)가 황제에 오른 시기를 말하며,
곧 이어 폐불정책(廢佛政策)을 단행하였기 때문에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17)
17) 수 문제(隋文帝: 581~604)의 연호를 말한다.
18)
18) 수 양제(隋煬帝: 604~617)의 연호(年號)를 말한다.
19)
19) 중국 상고(上古)의 전설적 성인(聖人) 또는 황제(皇帝)로서,
소(巢)는 사람에게 집 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유소씨(有巢氏)를,
수(燧)는 처음으로 불을 피워 사람들에게 화식법(火食法)을 가르쳤다는 수인씨(燧人氏)를 말한다.
20)
20) 중국 상고(上古)의 전설적 제왕(帝王)으로서,
희(羲)는 처음으로 백성에게 고기잡이,
사냥,
목축(牧畜)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만들었다는 복희(伏羲)를,
헌(軒)은 치우(蚩尤)의 난을 평정하고,
처음으로 의복,
배와 수레,
궁시(弓矢),
약초의 사용,
의술 등을 베풀었다는 황제(黃帝)를 말한다.
21)
21) 당(唐)의 고조(高祖)ㆍ태종(太宗)ㆍ고종(高宗)을 말한다.
22)
22) 변이지세(辯李之歲)를 떠들며[辯] 돌아다니는[李] 나이로 해석한다면,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정편(義淨篇)」에는 초츤지세(髫齔之歲)로 되어 있으니 7,
8세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23)
23) 유락지년(遊洛之年)을 배움을 좇아[遊] 돌아다니는[洛] 나이로 해석한다면,
『송고승전』의 「의정편」에는 15세로 되어 있으니,
지학지년(志學之年)이 아닐까 생각된다.
24)
24)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서 여름 3개월 동안 모친(母親) 마야부인(摩耶夫人)을 위하여 법회(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부처님이 편히 내려오실 수 있도록 제석천(帝釋天)이 놓은 금(金)ㆍ은(銀)ㆍ유리(琉璃)의 삼도의 보배계단[三道寶階]을 말한다.
25)
25)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말한다.
26)
26) 생황(笙簧),
퉁소 등 세악(細樂)을 말한다.
27)
27) 6수의(銖衣)로서 매우 가볍고 엷은 옷을 말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는 “도리천의 옷 무게가 6수(銖)”라고 하였다.
28)
28) 우전(于闐)은 나라 이름이다.
여기 우전삼장(于闐三藏)은 실차난타(實叉難陀)를 말한다.
29)
29) 복례(復禮)는 2인으로 똑같이 중국 당대(唐代)의 고승이란 점,
번역의 일이 유사한 점,
생몰년(生沒年)의 미상인 점 때문에,
정확한 해당 인물을 참고하기 위하여 2인의 사적(事蹟)을 다 싣는다.
중국 당대(唐代)의 고승.
경조(京兆)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황보(皇甫)씨며,
생몰년대(生沒年代)는 미상(未詳)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머물면서 불전(佛典)과 함께 유학(儒學),
시가(詩歌)도 깊이 연구하여 일찍이 지바하라(地婆訶羅)ㆍ실차난타(實叉難陀)를 따라서 『대장엄경(大藏嚴經)』과 『화엄경(華嚴經)』을 번역하였다.
고종(高宗) 영융(永隆) 2년(681)에 태자문학(太子文學: 唐代의 經籍官吏) 권무이(權無二)가 불전(佛典)에 대한 10조의 질의[釋典稽疑]를 제출하자,
복례는 여기에 『십문변혹론(十門辯惑論)』 2권을 지어 답변하니,
권무이는 굴복하고 제자가 되었다.
저서는 『진망송(眞妄頌)』을 남겼다.
이 책은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의 관계를 논설한 것으로서,
당대의 고승들에게 의심을 들어 해답하여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것은 징관(澄觀)과 종밀(宗密)의 답변뿐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복례는 법장(法藏)의 설한 가명보살(假名菩薩)의 교의(敎義)에 반대,
글을 올려 법장을 강남(江南)으로 쫓아낼 것을 주청(奏請)하였다고 한다.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참조.
당대의 고승으로서 당시에 고결한 덕(德)과 행(行)으로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칙명(勅命)으로 현수법장(賢首法藏)의 역장(譯場)에 참여하여,
법장(法藏)ㆍ도성(道成)과 공동으로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入法界品)」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 외 사적(事蹟)과 생몰년대(生沒年代)는 미상(未詳)이다.
30)
30) 중국 화엄종의 제3조(祖) 현수(賢首)를 말한다.
31)
31) 5범취(犯聚),
5중죄(衆罪),
5종제(種制)라고도 하며,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의 계(戒)를 5과(科)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는 바라이(波羅夷)로서,
비구들과 함께 살지 못하는 가장 무거운 죄이다.
둘째는 승잔(僧殘)으로서,
참회하여 겨우 용서되는 죄이다.
셋째는 바일제(波逸提)로서,
지옥에 떨어지는 죄[捨墮와 墮의 2종이 있음]이다.
넷재는 바라제제사니(爬羅提提舍尼)로서,
참회하면 없어지는 죄이다.
다섯째는 돌길라(突吉羅)로서,
앞의 4종에 비해 가장 가벼운 죄를 말한다.
32)
32)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의 계(戒)를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서,
바라이(波羅夷)ㆍ승잔(僧殘)ㆍ부정(不定)ㆍ사타(捨墮)ㆍ단제(單提)ㆍ제사니(提舍尼)ㆍ중학(衆學)ㆍ멸쟁(滅諍)을 말한다.
33)
33) 한 비구가 탁발하던 중 구슬 만드는 집에 갔다가,
주인이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 거위가 귀중한 구슬을 삼켜버렸다.
주인이 비구를 의심하여 고발하였다.
잡혀간 비구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바른 대로 말하면 거위가 죽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면 망어죄를 짓게 되니,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고통을 참았다.
뒤에 거위의 배설물에서 구슬이 나오자 혐의를 벗었다는 고사(故事)이다.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11권 참조.
34)
34)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물에 뜨는 주머니로서,
이것을 의지하여 위험을 벗어난다는 뜻으로 계율(戒律)에 비유된다.
열반경(涅槃經)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금계(禁戒)를 지킴은 바다를 건널 때 뜨는 주머니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35)
35) 계율을 지키는 바른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을 말한다.
『열반경(涅槃經)』 22권에 “비유하면 25리에 걸쳐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서,
국왕이 한 신하에게 기름이 가득 담긴 발우를 주며,
‘한 방울의 기름도 흘림이 없이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 속을 헤쳐가라.
만일 어기면 그대의 목숨은 없으리라’ 하고 칼을 든 신하를 딸려 보낸다면,
기름 발우를 든 신하는 중간에서 비록 다섯 가지 나쁜 욕망의 유혹을 받더라도,
목숨 때문에 방일하지 않으리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도 이와 같이 나고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바른 생각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다.
36)
36) 이 논은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을 말한다.
이하 『이십론(二十論)』으로 약칭한다.
37)
37) 『이십론』이 경전(經典)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을 근거로 대승(大乘)의 삼계유식(三界唯識)을 세운 데 대해,
본서는 그 뜻을 설명하려고 첫머리를 열었다.
여기서부터『이십론』의 “대승의 삼계유식을 안립하노라[安立大乘三界唯識]”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38)
38) 유식삼성관(唯識三性觀)이라고도 하는데,
삼성(三性: 遍計所執性ㆍ依他起性ㆍ圓成實性)을 유식으로 관하여 체득한다는 뜻이다.
39)
39) 『유식론(唯識論)』 권2에는 “식의 판별(判別)은 행상(行相) 때문”이라 하였고,
또 『성유식술기(成唯識述記)』3본(本)에는 “마음에 인식의 대상이 떠오름을 행상이라 한다”고 하였으며,『구사론광기(俱舍論光記)』제1에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체(體)가 청정하면,
앞경계를 대할 때 마음이 작용하지 않더라도,
법대로 자유롭게 영상(影像)이 드러나니,
마치 맑은 호수나 밝은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와 같다.
이를 행상이라 한다”고 하였다.
곧 이 마음속의 영상을 표현한 말의 모임을 행상이라고 한다.
40)
40) 객진번뇌(客塵煩惱)로서,
번뇌를 나그네[客]와 티끌[塵]에 비유,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음을 나타낸 말이다.
41)
41) 아함(阿含)이라고도 하며,
교(敎)ㆍ전래(傳來)ㆍ전교(傳敎) 등으로 번역한다.
42)
42) 귀로 듣는 소리에 열한 가지가 있으니,
그 가운데 일곱째인 ‘세속에서 공통으로 쓰는 말[世所共成]을 가리킨다.『잡집론(雜集論)』권1 참조.
43)
43)공무변처(空無邊處)외에 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44)
44) 이상은『이십론』의 “대승의 삼계유식을 안립하노라[安立大乘三界唯識]”에 대한 해석이다.
45)
45) 여기서부터『이십론』의 “경전에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라고 하였다.
심(心)ㆍ의(意)ㆍ식(識)ㆍ요(了)는 이름의 차별이다.
이 가운데 심(心)이라고 말한 것은 의(意)가 심소(心所)를 겸했다는 뜻이다[以契經說 三界唯心 心意識了 名之差別 此中說心 意兼心所]”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46)
46) 수다라(修多羅)라고도 하며,
경(經) 또는 경전(經典)으로 번역한다.
47)
47) 마다라(摩多羅)라고도 하며,
유(唯)로 번역한다.
48)
48) 유식종(唯識宗)의 5변행(遍行) 가운데 하나.
마주한 경계의 모습을 마음에 끌어들여 구획(構劃)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49)
49) 유식종(唯識宗)의 5변행 가운데 하나.
받아들인다는 뜻[領納]으로,
바깥 경계를 감수(感受)하는 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捨]를 말한다.
범어 vedanā로서 통(痛),
각(覺) 등으로 번역한다.
50)
50) 유식종(唯識宗)의 5변행의 하나.
신(身)ㆍ어(語)ㆍ의(意) 3업(業)을 만드는 심작용(心作用)을 말한다.
51)
51) 바사나(毘闍那)라고도 하며,
식(識),
요별(了別)로 번역한다.
52)
52) 이상은 『이십론』의 “경전에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라고 하였다.
심(心)ㆍ의(意)ㆍ식(識)ㆍ요(了)는 이름의 차별이다.
이 가운데 심(心)이라고 말한 것은 의(意)가 심소(心所)를 겸했다는 뜻이다[以契經說 三界唯心 心意識了 名之差別 此中說心 意兼心所]”에 대한 해석이다.
53)
53) 여기서부터『이십론』의 “오직 바깥 경계만을 부정할 뿐이요,
상응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내부의 식이 생길 때에 바깥 경계와 유사하게 나타남은,
마치 눈어질병자가 머리털과 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이,
여기에는 조금이라도 실재한 뜻이 전혀 없다[唯遮外境 不遣相應 內識生時 似外境現 如有眩瞖 見髮蠅等 此中都無小分實義]”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54)
54) 이상은『이십론』의 “오직 바깥 경계만을 부정할 뿐이요,
상응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내부의 식이 생길 때에 바깥 경계와 유사하게 나타남은,
마치 눈어질 병자가 머리털과 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이,
여기에는 조금이라도 실재한 뜻이 전혀 없다[唯遮外境 不遣相應 內識生時 似外境現 如有眩瞖 見髮蠅等 此中都無小分實義]”에 대한 해석이다.
55)
55) 여기서부터『이십론』의 “만일 식에 실제의 경계가 없다면,
장소와 시간의 결정과 상속의 불결정과 작용하는 것은 마땅히 성립되지 않으리라[若識無實境 則處時決定 相續不決定 作用不應成]”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등 소승과 대부분의 외도(外道)는 현상계의 실재[外境]에 집착하였으므로,
유식관(唯識觀)을 부정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위의 게송은 그들이 내세운 네 가지 논란이다.
그 네 가지는 처결정에 대한 논란[處決定難]ㆍ시결정에 대한 논란[時決定難]ㆍ상속은 결정되지 않는다는 논란[相續不決定難]ㆍ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란[作用不成難]이다.
이 논란은 이 뒤로 계속 이어진다.
56)
56) 동공망막(瞳孔網膜)의 손상 때문에,
유별나게 나타난 물질[大種: 四大]의 현상을 말한다.
57)
57) 10인(因)의 하나.
사물의 발생을 막아 나지 못하게 하는 인(因)을 말한다.
58)
58) 예막(翳膜)ㆍ현예(眩瞖) 등으로 번역한다.
곧 눈어질병을 말한다.
59)
59) 삭갈라(鑠羯羅)는 제석천(帝釋天)으로 번역,
궁(弓)은 활,
곧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된 제석천의 활을 말한다.
60)
60) 물질을 구성하는 4대요소(大要素) 가운데,
별도로 안근(眼根)만을 구성하는 4대요소를 말한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제127권에 “【문】안처의 의지 대상인 대종은 만들 대상의 물질을 얼마나 만들 수 있고,
내지 법처의 의지 대상인 대종은 만들 대상의 물질을 얼마나 만들 수 있는가.【답】마땅히 안처의 의지 대상인 대종은 오직 안처만을 만들고,
나아가 법처의 의지 대상인 대종은 오직 법처만을 만든다[問眼處所依大種 能造幾所造色 乃至法處所依大種 能造幾所造色 答應作是說 眼處所依大種 唯造眼處 乃至法處所依大種 唯造法處]”고 하였다.
61)
61) 법(法)ㆍ이치(理致)ㆍ도리(道理) 등으로 번역한다.
62)
62) 눈어질 병자가 머리털ㆍ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如眩瞖人 見髮蠅等]는 옳지 않는 곳을 비유하였다는 뜻이다.
63)
63) 이상은 『이십론』의 “만일 식에 실재하는 경계가 없다면,
장소와 시간의 결정과 상속의 불결정과 작용하는 것은 마땅히 성립되지 않으리라[若識無實境 則處時決定 相續不決定 作用不應成]“에 대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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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용흥삼장성교서(大唐龍興三藏聖敎序)
應天神龍(응천신룡) 황제(皇帝) 지음
들으니 드높아 창창함이여.
하늘이 별자리를 벌려 모양을 드러냈고,
드넓어 망망함이여,
대지가 산천을 두어 모습을 이루었다.
우러러 천문(天文)을 살펴봐도 이미 저러하고,
구부려 지리(地理)를 돌아봐도,
역시 이러하다.
대개 묘지(妙旨)가 깊고 그윽하니 명언(名言)의 길이 저 멀리 끊겼으며,
진여(眞如)가 맑고 고요하니 성상(性相)1)의 뜻이 모두 다 사라졌다.
처음으로 마음의 용틀임을 일으키니 법문의 우레가 메아리쳐 울렸고,
미혹한 무리들을 권장하여 인도하니 깨침의 머리는 우러러 바른 길[司方]2)을 기다렸다.
분명히 알라.
변하는 거짓 이름이 변치 않는 이름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걸림이 없는 말씀은 말씀이 떠난 데서 밝혀진다.
더욱이 모양을 벗어난 모양이니 홀로 삼계(三界)의 으뜸이라 칭하고,
하늘 가운데 하늘이니 이에 6통(通)3)의 성인이라 부른다.
법왕(法王)은 예리한 견해로 일흔 두 임금4)을 품어 길렀으며,
범왕[梵]과 제석[帝]은 시기를 타서 만 팔천 년을 굳게 지켜왔다.
주행하는 별[周星]5)이 채색을 안았으니 말은 성인 탄생의 징조와 부합하고,
한나라의 해[漢日]에 상서가 흘렀으니 일은 신비로운 현몽(現夢)과 일치한다.
때문에 위세가 진사겁(塵沙劫)6)에 떨칠 수 있으며,
교화가 세속 경계를 덮을 수 있었다.
옥과 같은 하얀 털7)이 빛을 놓아 어둠을 없애고,
금과 같이 귀한 입8)을 크게 열어 막힘을 뚫었다.
번뇌의 도적[煩惱賊]을 무찌르는 데 어찌 방패와 창을 빌리겠는가.
생사의 마군[生死軍]을 무너뜨림은 오직 지혜의 힘을 의지할 뿐이다.
뚜렷이 밝은 경지를 열어 널리 끝없는 세계를 거둬들였고,
영원히 기쁜 문을 터서 두루 유정(有情)의 생명을 끌어안았다.
비록 하늘에 넘치는 욕심의 물결일지라도,
경계의 바람이 멈추니 어느새 맑아졌고,
햇빛을 가리는 마음의 티끌일지라도,
법문의 비가 적시니 곧바로 걷히었다.
돌아가 의지하는 자는 재앙을 녹이어 복덕을 이루고,
되돌려 베푸는 자는 위험을 버리어 안정을 얻는다.
참으로 “더없이 높구려,
그 이룬 공덕이여,
더없이 넓구려.
무어라 이름하랴!”고 말하리라.
단지 어리석고 무지한 4생(生)이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하여 한량없이 아득한 6취(趣)에 함께 묶였을 뿐이니,
어찌 허망한 꽃이 진실이 아니며,
물 속의 달이 견고치 않음을 알겠는가.
5음(陰) 가운데를 치달아 좇으며,
3계(界)의 지경에서 허덕인다.
이들 중생을 거둬들이니,
결국 법문을 기다렸다.
흰말이 서쪽에서 오니 심오한 말씀이 동쪽을 덮었다.
세존께서 근기를 따라 널리 펴시니 중생들은 성품을 좇아 미혹을 벗는다.
마명(馬鳴)9)은 귀중한 편서(編書)로 아름다움을 선양하였으며,
용수(龍樹)10)는 보배의 게송(偈頌)으로 꽃다움을 드날렸다.
이에 멀리 진단(震旦)에 알려지고,
두루 염부(閻浮)에 퍼지면서,
반자(半字)ㆍ만자(滿字)11)의 교가 따로 나뉘고,
대승(大乘)ㆍ소승(小乘)의 법이 함께 달렸다.
뛰어난 법덕을 갖춘 불도징(佛圖澄)12)과 도안(道安)13)은 발맞춰 훌륭한 도량에 머물고,
고상한 인품을 지닌 법림(法琳)14)과 혜원(慧遠)15)은 나란히 법다운 사찰에 자취를 보이니.
드디어 미묘한 말씀으로 모범이 드러나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훌륭한 영예를 남겼으며,
지극한 수행으로 법규가 흘러나와 시방 곳곳이 다 차도록 무성한 열매를 드날렸다.
마침내 후주(後周)의 시대가 열리면서[膺運]16) 크게 마(魔)의 바람이 몰아치니,
드디어 천하의 사찰은 모두 헐렸거나 폐지되고 말았으며,
도량의 승려는 함께 세속으로 내몰려 섞여 버렸다.
한심하구나.
적막한 선정(禪定)의 터전에는 쓸쓸히 좌선(坐禪)의 자리만을 남겨 놓았으며,
황량한 지혜의 동산에는 더 이상 경행(經行)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에 개황(開皇)17)에 이르러 거듭 사원(寺院)을 고쳐 세우는 일이 진행되었으나.
오히려 대업(大業)18)을 만나서 다시 찢겨 흩어져 종잡을 수 없는 일을 당하니,
귀신은 통곡하고 신령은 신음하며,
산악이 울부짖고,
바다가 들끓었다.
이미 도탄에 빠졌으니,
어찌 가람(伽藍)인들 온전하겠는가.
바른 법은 몰락하고,
사견(邪見)만 더욱 자랄 뿐이다.
여기에 사람은 깨침의 길목을 알지 못하여,
고통과 쌓임[集]의 구역에서 허덕이고,
세속은 참다운 종지가 파묻혀서,
덮고 묶는 번뇌 가운데에 얽히고 말았다.
이에 우리 큰 당나라에 천하를 두었으니,
위로는 소수(巢燧)19)를 능멸하고,
아래로 희헌(羲軒)20)을 내려다본다.
세 분 성인21)이 다시 빛나니,
온 세상이 하나가 되었다.
위엄은 다스림을 더하고,
덕택은 한없이 덮였다.
대지의 맥락이 잡혀 두터운 덕을 돌렸고,
하늘의 벼리가 뻗쳐 진실한 덕을 보냈다.
다시 부처님의 해가 밝아졌고,
거듭 청정한 하늘을 수놓았다.
용궁(龍宮)이 여덟 버팀목을 떠 받혔으니 사해가 고루 안정되고,
영취(靈鷲)가 다섯 봉우리와 함께 하니 어찌 높음을 다투랴.
크게 불교를 선양하여 넓힘은,
진실로 황실조정에 속한 일이다.
대선복사(大先福寺)의 역경을 맡으신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은 범양(范陽)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장씨(張氏)다.
5대(代)가 한나라에 봉직한 뒤로 삼태(三台)가 진(晉)나라에 벼슬하기 전까지는,
높은 벼슬은 나눠 광채를 발했고,
군자의 덕은 합쳐 채색을 떨쳤다.
고조(高祖)께서 동쪽 제(齊)나라 군수(郡守)에 오르니,
인풍(仁風)은 부채를 좇았고,
단비는 수레를 따랐다.
교화는 육조(六條)를 선양하였고,
정사는 십부(十部)를 행하였다.
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함께 세속의 영화를 싫어하여,
은자(隱者)의 한 언덕에서 자유롭게 지내고,
은자의 세 뜰에서 마음대로 거닐면서,
조화(調和)를 품어 본질을 체득하고,
심성(心性)을 닦아 정신을 길렀으며,
지초의 꽃[芝秀]은 동쪽 산에서 따왔으며,
맑은 물은 남쪽 샘에서 길어왔다.
당연히 신선의 경계에 깊숙이 들어 하얀 구름에 깃들어 묻힌 이라고 하리라.
연못가의 두루미도 여기서는 소리를 삼켰으며,
논두렁의 망아지도 이 때문에 그림자를 멈추었다.
법사(法師)는 어려서 이미 사리 판단이 빼어나서,
일찍부터 뛰어난 총명이 알려졌다.
겨우 떠들며 돌아다니는 나이[辯李之歲]22)를 넘기자,
마음에 출가(出家)를 원했으며,
겨우 배움을 좇아 돌아다니는 나이[遊洛之年]23)를 지내자,
서국(西國: 인도)을 탐방하려고 결심하였다.
이에 경사(經史)를 해박하게 연구하였고,
옛날과 지금을 배워 환히 알았으며,
삼장(三藏)의 그윽한 요점을 총괄하였고,
일승(一乘)의 심오한 내용을 널리 밝혔다.
이뿐이랴,
고요히 머물러 정려(靜慮)를 닦고,
복잡한 생각을 쉬어 선정(禪定)에 들었으니,
저 산 속의 숲을 의지하여 이 쌓인 번뇌를 멀리 떠난 것이다.
3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속에 품은 뜻을 이루게 되었다.
함형(咸亨) 2년에 광부(廣府: 廣州)로 갔다.
뜻을 같이한 사람이 처음에는 열 명이 되었으나,
돛대를 올려 배가 떠날 때는,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남쪽의 큰 바다를 돌며 멀리 떠나서,
서쪽의 먼 나라를 향하여 오래 달렸다.
천 겹 암초(暗礁)를 겪고,
만리 파도를 능멸하며,
점차 천축(天竺)에 이르렀고,
다음에 왕사성(王舍城)에 도착하였다.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신 신령한 봉우리[靈峰]는 아직 그대로 있고,
여래께서 도(道)를 이루신 신성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폐사성(吠舍城: 毘舍離城)중에 번개(幡蓋)를 드리운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으며,
급고원(給孤園) 안에 황금을 흩은 자리도 여태껏 남아 있다.
삼도의 보배 계단[三道寶階]24)은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하고,
팔대의 신령한 탑[八大靈塔]은 저 멀리 아득히 직접 보는 듯하다.
서른이 넘어 나라를 돌아보는 사이,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을 지냈다.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얼마나 잡아끌어 오래 머물었으며,
아뇩지(阿耨池) 변에서 얼마나 세속의 때를 씻어 비췄던가.
법사(法師)는 자비(慈悲)를 방으로 삼았고,
인욕(忍辱)을 옷으로 여겼다.
오래도록 재계(齋戒)하여 한 끼니의 밥으로 몸을 돌보았으며,
오래도록 좌선(坐禪)하여 종일토록 게으르지 않았다.
또 예부터 번역하는 이들은 먼저 범문(梵文)을 근거한 뒤에 한역(漢譯)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말을 정리할 때 비로소 학자(學者)에게 의지하였고,
뜻을 밝혀낼 때 별도로 승도(僧徒)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제 법사는 이와 다르다.
이미 5천축의 말에 능통하였고,
2제(諦)25)의 심오한 종지를 상세히 알았다.
뜻을 번역하고 글을 엮는 일은 다 자기로부터 나왔고,
말을 지시(指示)하고 이치를 결정하는 일은 옆에서 구하지 않았으니,
한(漢)나라의 마등(摩騰)보다 뛰어나고,
진(秦)나라의 라집(羅什)보다 훌륭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증성(證聖) 원년(元年) 여름 5월에,
4백 부에 가까운 50만 송(頌)의 범본경(梵本經)과 금강좌 진용(金剛座眞容) 1포(鋪)와 사리(舍利) 3백 립(粒)을 가지고 도읍에 도착했다.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께서 하늘의 진동으로 황제의 시기를 알리자,
하늘의 뜻을 받들어 기강(紀綱)을 바로 잡게 되면서,
불법계승(佛法繼承)을 임무(任務)로 삼았고,
중생제도(衆生濟度)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에 모든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고,
겸하여 4부대중(部大衆)에게 교시하니,
무지개 깃발은 햇빛을 지웠고,
환영의 예악[鳳吹]26)에 구름도 멈췄다.
향은 6수(銖)27)에 흩어지고,
꽃은 5색(色)으로 나부낀다.
쟁쟁한 금옥의 소리는 장중하고,
휘황한 광채의 빛깔은 찬란하다.
이 가운데 법사(法師)는 상동(上東)의 문에서 영접되어 수기사(授記寺)로 모셔졌다.
여기서 우전삼장(于闐三藏)28)과 대선복사 사주(大先福寺寺主) 사문 복례(復禮)29)와 서숭복사주(西崇福寺主) 법장(法藏)30) 등과 『화엄경(花嚴經)』을 번역하였다.
그 뒤 대복선사(大福先寺)로 가서 천축삼장(天竺三藏) 보사말다(寶思末多)와 수기사주(授記寺主) 혜표(惠表),
사문 승장(勝莊),
자훈(慈訓) 등과 더불어 근본부율(根本部律)을 번역하였다.
그 대덕(大德)들은 4선(禪)의 선정(禪定)에 마음을 집중하여 6도(度)의 실천에 생각을 합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법의 거울[法鏡]을 마음의 바탕에 달고,
계의 구슬을 성품의 바다에 밝혔다.
문장의 숲이 우뚝 빼어나니,
깨침의 나무에 향기가 그윽하고,
지혜의 횃불을 환히 밝혔으니,
계수의 달빛은 그림자와 똑같다.
본래의 황금과 순박한 구슬은 바로 이 분들이 아니고 누구랴.
참으로 사원(寺院)의 동량(棟梁)이요,
진정 법문(法門)의 용상(龍象)이로다.
이미 제잡경율(諸雜經律) 2백여 권을 번역하여 다 책으로 만들고 이내 모두 황실(皇室)에 바쳤으므로,
그 외 다른 계율(戒律)의 모든 논서도 비로소 뒤 이은 번역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5편(篇)31)의 교(敎)도 자세히 밝아지고,
8법(法)32)의 인(因)도 상세히 드러나리라.
거위의 구슬33)을 모범 삼아 지키니,
벌레의 목숨도 다치지 않고,
뜨는 주머니[浮囊]34)를 반드시 결점이 없는 데서 취한다면,
기름 발우[油鉢]35)는 끝내 쏟아지지 않음을 기약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의 기강(紀綱)을 숭상한다면,
중생의 이목(耳目)은 열려지리라.
엎드려 원하오니,
위로는 먼저 떠나신 성조(聖祖)를 도와 영원히 칠묘(七廟)의 터전이 이어지게 하시고,
아래로 이 미천한 몸에 닿아서 항상 하늘[九天]의 수명을 누리게 하소서.
가련한 생명을 장수(長壽)의 경계로 옮겨주시고,
야박한 세속을 후덕(厚德)한 원천에 이르게 하시며,
세월마다 풍년이 들어 시절마다 화기가 넘치게 하시고,
머나먼 변방(邊方)이 안정되고어 가까운 도회(都會)를 정숙케 하옵소서,
돌아보니 조정의 일이 급하고 나라의 일이 많아,
밤중의 여가를 타서 하늘에 가득한 덕을 기리다 보니,
허공을 헤아려 고요를 두드리는 듯,
부족하나마 머리말을 지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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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4/11/27 |
팬백나무숲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와서 컴퓨터 시스템을 교채했다. 그간 작업하는 컴퓨터가 빈번하게 갑자기 꺼지곤 했다. 그 때마다 수리해서 다시 사용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그 시스템을 교체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새 시트템으로 교체한 것은 아니다. 대략 8년전 시트템이다. 그래도 이전 시스템보다는 4 년 정도 뒤모델이다. 조금 사양이 낫다. 다만 문서작업이 주된 작업이기에 어느 경우는 큰 믄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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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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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Mahādeva 마하제바(摩訶堤婆)라 음역. 대중부(大衆部)의 시조. B.C. 4세기 경 인도 말토라국(末土羅國) 사람. 어머니와 간통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나한(羅漢)을 죽이고 또 어머니도 죽였다. 뒤에 그릇됨을 뉘우치고 불문에 들어와 3장(藏)의 뜻을 통달. 말솜씨가 교묘하여 파타리성을 교화, 아육왕과 일반인의 귀의를 받았다. 5개조의 새로운 주장[五事妄語]을 발표, 전통적 보수주의의 불교를 반대하였다. 그때의 노덕 스님들을 가습미라(迦濕彌羅)로 쫓아내고, 5개조를 옳다고 하는 자유주의의 일파로서 대중부를 창설하였다. ⇒<유사어>마하제바<참조어>마하제바(摩訶提婆)
답 후보
● 대천(大天)
도(道)
도사다천(覩史多天)
독각(獨覺)
돈교(頓敎)
돈점(頓漸)
동분망견(同分妄見)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성유식보생론_K0605_T1591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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