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 ■ ( 이제 금 )
020▲ 斤今旡气內 ■ 근금기기내 20 ( 근 근/ 도끼 근 )( 이제 금 )( 목멜 기 / . 목메다( 기쁨이나 설움 따위의 감정이 북받쳐 솟아올라 그 기운이 목에 엉기어 막히다) )( 기운 기 / 빌 걸 ) )( 안 내, / 들일 납, 장부 예 )
021▲ 丹斗屯六丏 ■ 단두둔륙면 21 (붉을 단 / 란, 난 )(말 두 / 구기 주, 싸울 투 ) (진 칠 둔 / 어려울 준 )( 여섯 륙 / 죽이다 륙, 육 )( 가릴 면 )
재춘법한자
[fra-eng]
travailla $ 불어 worked [chn_eng_soothil]
通教 Tiantai classified Buddhist schools into four periods 藏, 通, 別, and 圓. The 藏 Piṭaka school was that of Hīnayāna. The 通Tong, interrelated or intermediate school, was the first stage of Mahāyāna, having in it elements of all the three vehicles, śrāvaka, pratyekabuddha, and bodhisattva. Its developing doctrine linked it with Hīnayāna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with the two further developments of the 別 'separate', or 'differentiated' Mahāyāna teaching, and the 圓 full-orbed, complete, or perfect Mahāyāna. The 通教 held the doctrine of the Void, but had not arrived at the doctrine of the Mean.
20 법의 밝음[법명法明][주-63]을 증장시키며, 비아 도수 타, 毘阿<去聲>荼素<上聲>咤<二十知戒反> Vyada su jya (이하~)악한이의 마음을 조복하여 평온케 하고,
『대승대집지장십륜경』
♣0057-001♧
20 만약 모든 여인이 여자의 몸을 싫어해서 남자 몸을 얻으려고 대비심 다라니(大悲心陀羅尼)를 외우고 지녀도 만약 남자 몸을 이루지 못한다면 나는 맹서코 정각을 이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의심을 내는 자는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노가제 盧迦帝<二十> lo ka te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21 큰 마름 [엄지쪽 큰마름(뼈) ~ 트러피지엄trapezium]
20 가운데(손가락) (MIDDLE)
■ 오늘의 경전 [이야기, 게송,선시 등] 2568_0120_234157 :
대장경 내 이야기
제목 : 20) 수나라 형주 청계산(靑溪山) 석도열전(釋道悅傳)
도열은 속성이 장씨(張氏)이며 형주(荊州) 소구(昭丘) 사람이다. 그는 열두 살에 출가하여 계를 받았는데 가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는 절조가 있었으며, 특히 『대품경(大品經)』과 『법화경(法華經)』을 받아 가지고 염송하는 데 뛰어나 항상 이 경들을 독송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계(經戒)가 있는 대로 하루에 한 권씩 외우니 사람들은 모두 남다르다고 여겼다.
처음 지자(智者)대사가 옥천사(玉泉寺)에 들어갔을 때
이 절에 종과 경쇠가 없어서 샘터에서 얻은 괴석(怪石) 한 조각을 매달아놓고
종 대신 이것을 쳤는데 그 소리가 맑게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도열은 이 절에서 한 권의 경을 다 외울 때마다 경쇠를 한 번씩 쳤는데, 그 소리를 들은 자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또한 그가 외우는 소리는 맑고 유창하며 운(韻)에 맞아 듣는 사람들이 피곤함을 잊었다. 이 때문에 유명(幽明)을 오가면서 여러 번 상서로운 감응이 일어났다.
한때 도열은 배에 물이 차는 병을 앓아 배가 북통처럼 불어났으나,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오직 『반야경』만을 염송하였다.
어느 날 밤에 한창 경을 외우고 있는데 배가 갑자기 찢어지는 듯하더니 물이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이에 손으로 닦아내 보았더니 큰 종기가 완전히 없어지고 병도 말끔하게 나았다.
이것이 이른바 장애가 바뀌어 몸과 마음이 경쾌한 느낌을 준다[轉障輕受]는 것이다.
예전에 주찬 (朱粲)의 도적 떼가 나라를 어지럽혔을 때 오직 도열만이 산을 지키고 있었는데 도적들이 달려들어 식량을 요구하였다. 도열은 식량을 덜어 그들에게 주었는데 도적들은 남겨둔 식량까지 모두 털어 가지고 갔다. 도적들은 약탈한 곡식으로 밥을 지으려고 끓였으나 곡식이 익지 않자 참회하면서 이를 되돌려 주었다.
그후 어느 날 도적 떼들이 또 와서 목숨을 해치려고 하니 도열은 땅바닥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였다. “나를 해친다 하더라도 나는 이곳에 머물러 스스로를 성찰하며 절에서 생을 마치려고 한다.” 그러자 도적들은 그를 놓아주고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그는 몇 발자국 가다가 다시 주저앉아서 말하였다. “나는 사문(沙門)이지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거품이나 허깨비와 같은 이 몸뚱이를 너희들의 서슬 푸른 칼에 내맡긴다.” 도적들은 그의 고상한 뜻을 훌륭하게 여겨 살던 절로 돌려보내 주었다.
도열은 일생 동안 비단옷을 입지 않고 베나 무명옷만 입었다. 한양왕(漢陽王)이 산에 왔다가 도열의 풍모와 기풍이 남다르면서 너그러운 것을 보고 계품을 받기를 청하였고 또 공양하는 물건을 후하게 보내었으나, 그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굵은 베로 지은 3의(衣) 한 벌을 주고는 이어서 “왜 비단옷을 입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누에고치의 실로 지은 옷은 목숨을 손상시킨 것이니 인욕(忍辱)이란 명목에 어긋납니다. 이에 반해 무명옷은 검소하여 자비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이 “중유(仲由)가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 공자(孔子)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자비롭고 인욕하는 사문은 진실로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도열은 한낮이 되어서야 식사를 하였는데 그것마저 아주 소량만을 먹고는 일부를 남겨서 새와 짐승 그리고 물고기들에게 먹였다. 때문에 그의 자비심에 익숙해진 새들은 날아와 어깨 위에 앉기도 하고 물고기들은 떠올라 손바닥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는 낡은 옷을 입었지만 벼룩[蚤]이나 이[虱] 같은 것은 전혀 없었는데, 어떤 때는 마을로 돌아다니며 이를 구걸하여 기르기도 하였고
죽이지 말라고 훈계하기도 하였다.
도열은 50여 년간 산에서 살았으며 나이 72세 때 암소(巖所)에서 생을 마쳤다.
영휘(永幑) 연간에 어떤 사람이 청계산에서 석장을 짚고 맨발로 걸어다니는 한 스님을 만났는데, 자신을 반야사(般若師)라고 하였으며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고 한다. 그 사람은 바로 도열일 것이니, 그는 살아 있을 때 항상 『반야경』을 외웠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