厂 ■ ( 기슭 한 / 기슭 엄, 공장 창 )
008▲ 丁七八勹厂 ■ 정칠팔포한 8 ( 고무래 정/장정 정 --CF* 고무래( 곡식을 그러모으고 펴거나, 밭의 흙을 고르거나 아궁이의 재를 긁어모으는 데에 쓰는 丁 자 모양의 기구) )( 일곱 칠 )( 여덟 팔 )( 쌀 포 )( 기슭 한 / 기슭 엄, 공장 창 )
021▲ 丹斗屯六丏 ■ 단두둔륙면 21 (붉을 단 / 란, 난 )(말 두 / 구기 주, 싸울 투 ) (진 칠 둔 / 어려울 준 )( 여섯 륙 / 죽이다 륙, 육 )( 가릴 면 )
재춘법한자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Kalachakra [san-chn]
pra-dūṣaya 恨 [san-eng]
taistaiḥ $ 범어 various [pali-chn]
ceteti 思量 [pal-eng]
nivi.t.tha $ 팔리어 pp. of nivisatisettled; established in; devoted to. [Eng-Ch-Eng]
受持七佛名號經 An alternative title for the 受持七佛名號所生功德經. [Muller-jpn-Eng]
竹林寺 チクリンジ (temple) Chikurinji [Glossary_of_Buddhism-Eng]
SELFPOWER☞ Syn: Jiriki. See also: Difficult Path of Practice; Other Power. “I. One’s own power, merit, intelligence, discrimination, etc. II. The term is generally used to indicate the attempt to attain enlightenment through one’s own efforts rather than by relying upon the compassion of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in addition to one’s own efforts].” Dait: 153 “ ‘One’s own power’; an expression referring to the endeavor to attain enlightenment through one’s own efforts (for example, sitting in meditation). jiriki (Self-Power) is generally used in contradistinction to tariki (Other-Power), which roughly means ‘the power of the other.’ This refers to the fact that the adherents of some Buddhist schools (Pure Land for example) place their trust in the notion that belief in Buddha (generally, his manifestation as Amitabha) and calling upon 【book-page-672 673】 his name will bring about rebirth in a Buddha paradise (Pure Land) and thus the liberation of the believer. This is an approach that places the power of the Buddha principle to liberate human beings in the foreground. In contrast, other schools of Buddhism, such as Zen, place the emphasis on the ability to actualize enlightenment and achieve liberation through one’s own efforts, i.e., through meditative training. This is characterized as jiriki. On a deeper level, as is stressed in Mahayana Buddhism, every sentient being and thing from the very beginning is endowed with the Buddha-Nature. From this point of view, the opposition of jiriki and tariki must be regarded as an artificial one [which simply indicates a different emphasis in religious practice].” Sham: 104 #0147
87 슬개골 [ =무릎 뼈)
21 큰 마름 [엄지쪽 큰마름(뼈) ~ 트러피지엄trapezium]
8 큰 창자,【대장】
11 위팔 upper arm
■ 오늘의 경전 [이야기, 게송,선시 등] 2568_0326_231936 :
대장경 내 이야기
제목 : 불타야사는 제(齊)나라 말로는 각명(覺明)이라 하며 계빈 사람이다.
바라문 종족으로서 대대로 외도를 섬겼다. 한 사문이 그의 집에 와서 걸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성을 내며 사람을 시켜 사문을 구타하게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의 수족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인(賢人)을 범한 죄에 걸려 귀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즉시에 사문을 청하여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였더니 며칠 후 문득 병이 나았다. 이에 불타야사를 출가시켜 그 사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당시 불타야사의 나이는 13세였다. 언젠가 스승을 따라 멀리 행각하다가 광야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스승은 빨리 달아나 피하려고 하였으나 불타야사는 말하였다. “이 호랑이는 이미 배가 부릅니다. 필시 사람을 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 호랑이는 사라졌다. 앞으로 가다 보니 과연 호랑이가 먹다 남긴 것이 보였다. 스승은 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15세가 되어 경을 외우게 되었는데, 하루에 5, 6만 언(言)을 암송하였다. 그러나 거주하는 사찰에서 항상 밖으로 탁발(托鉢)을 나갔기 때문에 읽고 외우는 일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에 한 나한이 그의 총명함을 소중히 여겨 항상 밥을 얻어다가 그에게 공양하자 19세가 되었을 때는 대소승(大小乘) 경전 2백여 만 언(言)을 암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오만하여 지견(知見)을 상당히 자처(自處)하여 자기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여러 스님들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여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에 대한 깊은 원한을 잊어버렸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되어도 계단(戒壇)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3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사미(沙彌)로 있었다. 이에 외삼촌에게서 오명(五明)의 여러 논(論)들을 배우고 세간의 법술(法術)을 많이 익혔다.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항상 독송(讀誦)으로 업을 삼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언제나 단정히 앉아서 뜻을 사유하여 허공 속에서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의 전일하고 정밀함이 이와 같았다. 그 후에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렀다. 그 당시 태자는 달마불다(達摩弗多)였는데 제나라 말로는 법자(法子)라고 하였다. 그는 불타야사의 용모와 복장이 단아(端雅)한 것을 보고 지내온 내력을 물었다. 불타야사의 응답이 청아하여 태자를 기쁘게 하였기 때문에 궁궐로 청하여 머무르게 하고 공양하였는데 대우가 융숭하였다. 구마라집이 뒤에 사륵국에 이르러 불타야사에게 『아비담(阿毘曇)』과 『십송률(十誦律)』을 수학하였는데, 서로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구자국으로 돌아갔으나 불타야사는 그대로 사륵국에 머물렀다. 얼마 후 사륵왕이 붕어하였으므로 달마불다태자가 임금자리에 올랐고 왕손(王孫)이 태자가 되었다. 그 당시 부견(符堅)은 여광(呂光)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구자국을 정벌하게 하였다. 구자왕이 급히 사륵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므로 사륵왕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도와주었다. 불타야사에게는 남아서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고 후사(後事)를 위임하였다.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구자국이 패하였는데, 왕은 돌아와서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이에 불타야사가 탄식하였다. “내가 구마라집과 서로 만난 지는 오래이지만 아직 회포를 다 풀지 못했는데 그가 갑자기 타향의 포로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서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불타야사는 사륵국에 10여 년을 머물렀다. 왕이 죽자 이에 구자국에 가서 매우 성대하게 불법을 교화하였다. 그 때 구마라집은 고장(姑臧)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 불타야사를 청하였다. 이에 양식을 싸 가지고 떠나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이 만류하여 다시 1년 가량 더 머무른 후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구마라집을 찾아가고자 한다. 비밀리에 행장을 꾸려 밤중에 출발하려 하니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된다.” 제자는 말하였다. “내일 추격해 와서 다시 송환되는 것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불타야사는 곧 맑은 물 한 사발을 가져다 약을 타고서 수십 언(言)의 주문을 외운 뒤 제자와 함께 물로 발을 씻고는 곧바로 야밤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수백 리를 갔다.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제자가 대답했다. “몹시 거센 바람소리만 들리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뿐입니다.” 불타야사는 또 주문을 외운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고는 머물러 쉬었다. 다음 날 아침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였으나 거리가 이미 수백 리나 떨어져 미치지 못했다. 걸어서 고장(姑臧)에 도착하였으나 구마라집은 이미 장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요흥이 구마라집을 핍박하여 여자를 두게 하고 정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권한다는 소문을 듣고, 불타야사는 탄식하였다. “구마라집은 고운 비단과 같은 존재인데, 어찌하여 그를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게 하는가?” 구마라집은 그가 고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흥에게 권하여 그를 맞아오게 하였다. 요흥은 구마라집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구마라집에게 명하여 경장(經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교법(敎法)을 널리 선양하려면 문장의 의미를 통달하게 하여야 됩니다. 빈도(貧道)는 비록 경전의 글을 외울 수는 있지만 아직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오직 불타야사만이 그윽한 이치를 깊이 통달하고 있는데 지금 그가 고장에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불러 한마디 말을 세 번 상세하게 살핀 뒤에 붓을 대어 미묘한 말씀을 망실하지 않게 하여 천 년의 오랜 세월 뒤에도 신뢰를 받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흥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라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불타야사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초빙하였다. 그러나 불타야사는 모두 다 받지 않고 웃으며 말하였다. “임금의 밝으신 성지(聖旨)가 내려져, 수레 가득 싣고 사신이 달려 이르렀으니, 단월(檀越)께서 소승을 대우하심이 이미 후하시지만 현재 구마라집이 처해 있는 것을 보니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대로 자세히 아뢰니, 요흥은 기미를 살피고 삼가하는 모습에 탄복하여 거듭 편지를 보내 돈독히 타일러서야 비로소 장안에 도착하였다. 요흥이 몸소 나가 안부를 물었다. 별도로 소요원에 신성(新省)을 세우고 4사(事)를 공양하였으나 모두 받지 않고 때가 되면 탁발하여 하루에 한 끼만 먹을 뿐이었다. 당시 구마라집은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한 달 남짓을 의문이 생겨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붓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타야사가 도착하고 나서는 함께 명백하게 밝히고 결정을 하니, 문장의 이치가 방정하게 바로잡혀서 도인(출가자)과 속인(재가자) 3천여 명이 모두 그 대요(大要)에 딱 들어맞음에 감탄하였다. 불타야사는 콧수염이 붉고 『비바사(毘婆沙)』를 능숙하게 해석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붉은 콧수염의 비바사[赤髭毘婆沙]라고 불렀으며, 또 구마라집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도 칭하였다. 의발(衣鉢)과 와구(臥具) 등의 네 가지[四事] 공양이 세 칸 집에 가득하였지만, 불타야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흥은 그 공양물들을 팔아서 성 남쪽에 절을 지었다. 그 전에 불타야사가 『담무덕률(曇無德律)』을 암송하였는데, 위사례교위(僞司隸校尉) 요상(姚爽)이 불타야사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요흥은 누락되거나 잘못된 것이 있을까 의심하여 불타야사에게 시험삼아 민적(民籍)과 약방문 각각 40여 지(紙)를 암송하게 하고 3일 후에 문장을 잡고 암송해 보게 하였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모두 그의 기억력이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곧바로 홍시(弘始) 12년(410)에 44권으로 역출하였고, 아울러 『장아함경(長阿含經)』을 역출하니 모두 백만 언(言)이었다.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진나라 말[秦言]로 번역하였고, 도함(道含)이 받아 적었으며, 15년(413)에 이르러 역장(譯場)을 해산하였다. 요흥은 불타야사에게 비단 만 필을 보시하였는데 모두 받지 않았다. 도함과 축불념에게는 각각 비단 천 필을 보시하고 명덕(明德) 사문 5백 명에게도 모두 후하게 보시하였다. 불타야사는 뒤에 외국에 돌아갔다. 계빈국에 이르러 얼마 후에 『허공장경(虛空藏經)』 한 권을 구하여 상인에게 부쳐 양주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했으나 후에 그가 어느 곳에서 입적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