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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자신의 정체에 대한 판단오류와 수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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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자신의 정체에 대한 논의의 실익
최근에 미국의 한 여고생이
전철 철로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으러 내려갔다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어린이가 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서
공을 가지고 놀 때
공이 차도로 들어가면
그 공만 바라보고 뛰어들어
자동차에 받혀 이후
사망하거나 평생을 장애의 상태로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나중에 보면
그 사고가 일어나게 된 연유를 알게 되는데
당시 그 현장에서는
그런 핸드폰이나 공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집착해 임하고
동시에 그로 인해 다른 더 가치있는 내용이나
전반적인 사정에 대해 판단을 못한 상태로
그렇게 임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인에게도
대부분 같은 형태로 일어닌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에 대한 전도망상분별 현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사건사고를 놓고 회계장부를 놓고
잘 따져 보기로 하자.
핸드폰을 줍지 않는다 .
그러면 핸드폰이 최악의 경우 파손되어 100 만원 정도의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잘 주으면 그 손해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잘 줍지 못하고 달려오는 열차에 자신이 받혀 죽으면
우주보다 가치있는 자신이 그렇게 사망에 이르고 사라진 것이다.
이 때 손해는 핸드폰 가격에 비교할 도리가 없는 막대한 손해다.
이런 가치 회계평가를 우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치회계에서는
가치평가는 크게
돈 이상의 가치와
돈 이하의 가치를 생명을 기준으로 나뉘게 된다.
여기서 돈 이하의 가치란
생명 보다 이하의 가치를 갖는 것들에 대한 가치평가로
대부분 돈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여 그 돈 액수의 숫자를 적어 낼 수 있고
또 현실에서 그런 돈을 주고
구할 수 있는 가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돈 이상의 가치는
생명이나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의미하고
돈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돈으로 구할 수 없는 가치를
의미한다.
자신의 생명을 돈으로 평가해 그 가치를 적어보려고 해보자.
숫자를 적어 나가는 이가 그 만큼 어리석거나
상당히 겸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도 그렇지만,
자신의 두 눈이나 심장 콩팥 간 이런 기관을 또
그렇게 평가해보자.
두 눈이 빠지고 자신의 심장이나 콩팥 간 등이
훼손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얼마를 주어야 이를 다시 복구할 수 있는가.
또 그렇게 복구될 수 있다면
그 가격을 받으면 바꿀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그 가치를 비교 검토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경우를 놓고 보자.
그 여고생이 그런 사고에서 사망하지 않고
계속 다음날도 산다고 할 때
그 하루가 얼마인가를 따진다고 하면
그 여고생은 그날 한 푼도 벌지 못했기에
별로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앞의 사건 사고에서
대부분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은
핸드폰이 떨어지지 않고
그냥 평안하게 하루를 보낸 경우에 있어서
그날 하루 수익이 별로 없으면
그런 사정으로 그렇게 하루를 보낸 것도
역시 별로 아무 가치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런데 위 내용을 놓고 비교하면 어떤가.
어떤 한 여고생이 죽은 사건을 놓고
그렇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하루를 보낸 것을
서로 비교하면
그 하루가 얼마의 가치를 갖는가를
다시 평가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각 경우에
하루에 그렇게 얻는 가치를
일일히 돈으로 평가하고자 할 때
그 가치가 숫자로 명확하게 표시되어 나타나지 않고
또 그 숫자에 해당한 금액을
누군가가 돈으로 현실적으로 지급해주지 않으면
그런 경우는 그런 사정으로 인해
평안하게 하루를 또 이어 보낸 것을 놓고
정말 아무 가치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어디선가 100 만원에 해당하는 핸드폰을 하나
공짜로 얻었다면
이제 그것을 벌었다고 대단히 환희하고 좋아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가치평가를 하면서
매번 선택의 방향을 취하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 상태에서 행하게 되는 일반적인
가치평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도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일으키는 폐해가 대단히 심각하다.
그래서 경전에서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명과 바꿀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가치 평가과정에서도 이런 내용을
여러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추로 삼아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에서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사실은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 가치
돈 이상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야 하는데
정작 무엇이 생명보다 더 가치있고
돈이나 숫자로는 도저히 표시할 도리가 없는
엄청난 가치의 것인지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그런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덤덤하게
현실에 임하기 마련이다.
본인도
주식도 투자하고
보험도 들고
적금도 들고 여러가지 형태로 투자를 하게 되는데
어떤 이가 경제생활을 하고 무언가에 투자를 한다면
어떤 물건을 사고자 할 때
그것이 같은 질의 같은 물건이라면
되도록 싼 가격에 쉽게 빨리 그것을
얻으려고 방안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도 하면서
가격도 비교하고 그렇게 하게 된다.
또 어떤 종목에 투자를 하려고 한다면
투자금을 기준으로 놓고
장차 그것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상태를
얻어내려고 그런 투자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현재 보유해보았자
가치가 별로 없다고 보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보는 것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꾸준히 하면
점차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높은 상태를
얻게 된다고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 이상의 가치와 돈 이하의 가치를 갖는 것들이
현실에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 가치가 커도
그 가치를 숫자로 기재해서 표시할 수 있다고 보는
돈 이하의 가치를 갖는 것들을 가지고
가치가 대단히 높아서
그 가치액을 숫자로 기재해보고 싶어도
도저히 숫자로 표기할 도리가 없다고 보는
엄청난 가치를 갖는
돈 이상의 가치를 갖는 품목을 바꿔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량한 가치를 얻어내는
기본 방식인 것이다.
직접 생산을 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생산에 들어가는 각 재료의 가격을 다 합쳐보면
별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이것을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를 하여서
새로운 형태로 바꾸면
시장에서 대단히 높은 가격을 평가받는 상태가 되게
노력하는 것이 곧 상품의 생산과정인 것이다.
원 재료는 모래값인데
일정한 노력을 가하면
시장에서 금값보다 비싼 반도체를 만들어내게 된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그처럼 가치를 증대시키는 생산노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 방향으로 하여
무언가를 쉬지 않고 열심히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눈 것은 사실인데
그로 인해 원래의 재료보다 가치가 더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를 만들어내면
그것은 고려청자를 가지고 망치로 부수어서
어디에도 사용할 수 없는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처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가치관련 사항을 잘 판단하고
현실에 임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누구나 생활하면서
일정한 노력을 하고 시간을 소모하는데
매 순간 돈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을 투입해서
돈 이하의 가치를 갖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 돈이하의 가치의 화폐액을 적어 놓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으로 수익을 크게 거두었다고 임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돈 이하의 가치를 갖는 품목을
마구 투입시켜서
매번 돈 이상의 가치를 갖는 품목을 바꾸어 놓는다면
비록 화폐액을 기준으로 보면
그 숫자가 기록이 될 수 없기에
손해를 보는 활동을 한 것처럼 평가가 될 수 있는데
앞에서 나열한 이유로 인해
그 사정이 오히려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정체를 잘 파악하는 것과 함께
각 세계에서 환전 평가가 되는 자산의 항목과
그렇지 못한 자산 항목을 구분하는 지혜도
다시 요구된다고 보게 된다.
쉽게 이 사정을 살펴보자.
어떤 이가 상대를 위해
방안의 벽지를 전부 노란 색으로
칠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나서 이제 그 내용을
소리의 세계로 가서
찾아보려고 한다고 해보자.
소리의 세계에서는 그 상대는
도대체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 것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노란 색은 소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평가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돈 이상의 가치와 돈 이하의 가치도
같은 성격의 차이가 있다.
생명과 생명이상의 가치는
한 생명이 각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다 높은 평가를 받고
그래서 자산항목에 들어가는 가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돈 이하의 가치에 들어가는 항목은
사정이 그렇지 못한 것이다.
우선 현실에서 아무리 화폐액을
많이 적어 놓아도
그것으로 생명을 바꿔 얻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세계가 조금만 달라져도
그것은 아무 평가자체를 받지 못하는 자산항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마치 패망한 독일정부가 찍어 낸 화폐처럼
산더미처럼 들고 가도
성냥 하나 바꿔가질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부터 잘 파악해야
가치 회계를 잘 행하고
현명하다고 평가받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현실에서
생명보다 가치 없는 것을 놓고
매달리면
이는 대단히 어리석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현재 본 연구소에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한카드와 무한화폐를 제작하여
연구소 연구원들을 포함하여
보유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모두 무상 제공해주고 있는데
그 사정이 또 그와 같은 것이다.
이 무한카드로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로서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다 구매해 보유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무한카드인 것이다.
그런데
이 카드의 한계점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 부분은 결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바로 수행자가 어느 상황에서든지
무한카드가 있거나 없거나
스스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최소한의 의식주와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자신이
먹고 입고 어디선가 누워 쉬고 자고 하는 그런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무한카드가 있거나 없거나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부처님도 그런 문제를
그래서 옷 세벌과 구걸로서 해결했고
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도
그처럼 수행에 필요한 그런 최소한의 생계문제를
어느 경우에서나 해결하라고 가르친 것이고
그래서 무덤가에서 옷 3 벌을 갖추고
구걸할 그릇이 있으면
그것으로
세속에서의 생활은 끝이고
바로 그 상태에서 무한한 수행을
시작해나가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직업이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가르침을 설한 예수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또 이 부분은 무한카드로 해결할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최소한의 생계도
거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노력하면
그런 것은 지렁이나 새나 달팽이를 비롯하여
곤충이나 축생도 다 노력하면
해결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새도 알고 보면 나무에 집을 짓기 위해
부지런히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어 집을 짓고
노력이 힘든 것은 사실인데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런 문제는 다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최소한의 생존문제가 해결되게 되면
그 상태에서
즐거운 맛도 아주 쉽게 곧바로 즉시 즉시 얻어 내고
또 이후
돈 이상의 가치를 획득해 내기 위해서
이런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이 보유한 돈 이하의 가치항목에 약간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그런 것을 모두 이런 부분에 쏟아 붓고
그리고 이후
자신의 삶에서 들이는 시간이나 노력을
모두 이와 같이 높은 가치를 갖는
수행에 쏟아 붓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얻어내는
가장 현명한 가치 투자 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문제삼고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고
주로 돈 이하의 가치를 놓고
수많은 번뇌를 일으켜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의식주라고 해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를 놓고
문제삼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 더 좋은 옷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집 이런 식으로
그 문제의 성격을 달리해서
번뇌를 일으켜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하다 보면
그런 문제가 한도 끝도 없이
나타나게 되는 것도 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 이런 부분에서
쓸데없는 번뇌를 수행자가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 연구원에서
무한 카드와 무한 화폐를 지급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카드와 화폐 제조기계가
아주 오래 전에 제작되어
현재 본 연구소 한 구석에 비치되어 있다.
그 위치를 다른 분들은 잘 모르는데
본인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무한카드 사용시 핵심 주의사항은
그렇게 다 우주의 재화를 자신의 소유로 한 다음
정작 그 당사자가
그것으로 최종적으로 무엇을 바꿔 얻는가를
잘 파악하고 무한카드를 사용하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내용이 바로
무한카드 사용시
핵심 주의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내용에 대해
무한카드로 우주의 무한한 품목들을
구매해서 최종적으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주로 자신의 즐거운 맛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최소한의 의식주가 하루하루의 생존과 관련된다면
그 이상의 것들은 모두
자신 아니면 다른 이의 즐거운 맛과 관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무한카드로
한 벡화점에 진열된 모든 것을
다 구매해서
자신의 창고로 옮겨 놓았다고 하면
이제
그 많은 것들은 다 누가 먹고
또 누가 입는가.
이것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또 그렇게
자신이나 그 누군가가
다 먹고 다 입고 사용했다고 할 때
그런데 그렇게 해서
결국 그 각각은 그로 인해 무엇을
최종적으로 얻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그런 것을 얻은 상태에서는
다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그래서 결국
그것을 왜 그렇게 자신이 원한 것인가.
이 답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간절한 소원을 자신이 가질 때는
늘
앞과 같은 질문부터 자신이 자신에게 먼저 해보고
그애 대한 답을 먼저 잘 제시해보라고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런 소원을 왜 성취하기를 원하는가.
그런 소원이 성취되면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먼저 잘 생각하고 그 답을 제시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은 맹목적으로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놓고
그저 자신이 망상을 바탕으로
소원을 일으켜 갖고나서
그 성취에 갈증을 일으키고 임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위 답을 자신이 잘 적게 된다면
정작 그 내용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대단히 많고
그것부터 하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100 억의 복권이 당첨되면
다른 이를 돕는 복지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이는
사실은 지금도 그냥 마음만 일으키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사실은
그렇게 그 소원이 성취된 다음에야
할 수 있다고 보는 일들 가운데
지금 당장 할 수 있다고 보는 일들부터
하나씩 하다보면
그 소원 역시 또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것도
스스로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길어도 한 3 일이면
스스로 자신의 소원이 이미 다 성취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스스로 파악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카드가 갖는 실제 효용은
바로 그 내용을
그처럼 잘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
제작 발급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여하튼 현실에서
수많은 재화나 화폐를 갈구하거나
기타 수많은 지위를 갈구하고 나서는 동기는
일단은 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즐거운 맛을 얻는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것은 결국
자신의 즐거운 맛을 얻는 것이
그 동기이고 취지이기도 한 것이다.
즉, 최소한의 의식주 문제는
일단 생존 자체를 위한 것이지만,
좋고 아름답고 비싼 옷이나 음식이나 집
또는 명품 브랜드가 찍혀서 남들이 부러워 할 만한
상품 등은
생존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를 통해 자신이 즐거운 맛을 얻는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이다.
나머지도 다 같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자신의 생존이나 즐거운 맛에
도움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고
고통을 주는 경우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범죄 사건 사고의 희생자들이
사건 사고의 피해자로 되는 과정도
이런 요인이 많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즐거운 맛을 위해서
그런 무한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는
사실은 그만큼 어리석다고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수십조원의 공원과 주택시설
각종 문화시설을 곳곳에 마련해 놓고
무료로 거저 마음껏 사용하라고 하는데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고
자신이 일일히 그것을 소유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그래서 그와 관련된
온갖 회계 장부의 숫자를 다 일일히 살펴보면서
그 사정을 따져보고
또 관리 보존 행위를 해나가고
그런 가운데 온갖 번뇌를 일으켜가면서
그래서 그런 즐거운 맛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사실은 자신이 그 만큼 어리석은 상태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한마디로
자신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거대한 자락도구를 찾아 사용하고자 하는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락도구란 표현은
자신의 즐거움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를
줄인 말인데
얼마나 큰 자락도구를 통해
그런 즐거운 맛을 추구하려 하는가를 살피기 위해서
자주 노르웨이와 스웨덴 핀란드를 놓고
노르웨이 국왕이 누구인지 아는가.
스웨덴 국회의장이 누구인지 아는가.
핀란드의 가장 돈 많은 재벌이 누구인지 아는가.
이것부터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 나라가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나라와 멀리 떨어져
그들이 누구인지 대부분 모르고
또 알아도 큰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것들은 놓고 보면
대부분 그 내용이 위의 내용보다는 그 수준이 낮은
내용들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희망들을 확장시켜나가서
최고 수준이 되는 상태가
앞의 나라에서는 그런 상태라고 할 것인데
설령 그런 상태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에 관련된 각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관계된 이들이 즐거운 맛을 얻고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이던 먼 미래던
그런 왕이나 부자의 이름이나 그 생활의 내용을 굳이 몰라도
삶에 하등 지장을 받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된다해도 그것이
앞에서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노르웨이의 국왕이나
스웨덴의 국회의장이나
핀란드의 최고 부자가 되는 것처럼
별 의미가 없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즐거운 맛을 얻기 위해
별 필요없는 과도한 도구를 그렇게
추구했던 것임을 이해시키기 위한 비유로
그런 내용을 그렇게 든 것이다.
그래서 사실 알고보면
이들이 모두 전철에 떨어진 핸드폰이
그 주인에게 준다고 보는 즐거운 맛과
그 사정이 같은데
그런데 여기에 각 당사자가 매 순간
돈 이상의 가치를 희생시켜가면서
매달리고 뛰어든다는 것이 바로
가치의 전도현상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집착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그런 시간과 노력을
돈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게 되고
그래서 훨씬 가치있는 상태를 얻어나가게 된다고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와 반대가 되면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단순히 즐거운 맛을 준 것 외에는
아무 쓸데없는 것이고
돈 이하의 가치밖에 갖지 못하는 것들에
자신의 몸과 삶과 시간과 같은
돈 이상의 막대한 가치를 갖는 것들을 희생시켜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대부분 이 문제에서부터
그렇게 묶여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살피는
자신의 정체에 대한 올바른 파악문제는
이와 다시 깊게 관련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잘못 판단하고
현실에 임하기에
매 상황마다
그런 잘못된 가치판단을 행하고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
앞에서 각 논의가 얻고자 하는 효용과 관련해서
일단 돈 이하의 가치가 현실에서 준다고 보는
재미나 즐거운 맛
그리고 총체적으로 복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에 대해
일정한 메세지를 전달한다고 보게 된다.
지금 자신의 정체를 현실에서
전도몽상에 바탕해 잘못 판단하는 문제가
이와 관련이 깊다고 제시하였는데
이런 논의가 왜 앞과 같이
현실에서 구하는 즐거운 맛과 복과 같이
다양한 가치와 관련이 깊은가를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나가야 한다고 본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현실에서
1 이 눈을 떠서 자신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앞과 같은 형태로 세상의 내용을 보고 얻게 된다고 할 때
그 가운데 위 그림에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의 정체로 보고
대한다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 증상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잘 헤아려 보기로 하자.
처음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사정을
수행자가 구하는 상락아정의 상태와 대비시켜
그 사정을 나열하면서
그런 판단들이 하나같이 엉터리임을 제시했는데
아직 논의가 다 마쳐지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이 조각글에서는 처음
핸드폰을 주으려다가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몰고간
한 여고생의 사건을 언급한 바 있다.
위 그림을 놓고 보면
보통 1 을 자신으로 보고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여고생은 4 와 같은 위치에 있는 핸드폰에 초점을 맞춘 다음
그것을 줍기 위해 1 과 같은 부분을 희생시켜 버린 사례인 것이다.
이 사고를 보고 받는 이는
대부분 그 여고생이 그런 4 에 초점을 맞추고 집착한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킨 일을 상당히 어리석다고 보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 사건에서 여고생이
4 와 같은 핸드폰에 초점을 맞추고 집착을 가진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보듯
현실에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에 초점을 맞추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이
그처럼 어리석은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는
주요한 근본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광대무변한 복덕자량과 지혜 자량을
얻지 못하고
돈 이하의 가치 밖에 갖지 못하는 쓸데 없는 것에
막대한 가치를 갖는 것들을 살아가면서 다 쏟아 붓고
그로 인해 장래의 업의 장애만 무량하게 만들어 놓고
삶을 허망하게 마치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정부터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미 앞 조각글에서 그 사정을 자세히 살폈는데
그래도 여전히 1 과 같은 부분에
현실에서 초점을 맞추고
집중을 하게 되는 또 다른 사정이 있음을
앞 조각글에서 살폈던 것이다.
즉 비록 이런 저런 사정으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엉터리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전히 1 과 같은 부분에
바늘이 꼽히면
지극한 고통을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소에 행하던 반응을 할 도리 밖에는 없게 된다고
대부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더라도
휴대폰을 주으려고 철로에 뛰어들수 밖에는 없게 된다고
보는 여고생의 입장과 하등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전도 몽상 상태에서는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되면
그 가운데 1 과 같은 부분은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늘 그렇게 얻는 내용으로서
그래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
자신이 한 5 살 정도 였던 당시를 회상해보기로 하자.
그 당시 5 살된 아이도 당시
현재의 자신처럼
그런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시점의 내용을 서로 놓고
비교를 해보자.
여기에 그 부분을 구성한다고 보는 재료에
어떤 공통점이라도 발견되는가.
물질이나 정신의 측면에서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각 상황마다
왜 1 부분과 같은 부분에 바늘이 꼽히면
왜 고통을 느끼게 되고
또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으면
왜 1 부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가.
또 자신이 손을 뻗어 4 와 같은 꽃을 만지려고 하면
그 꽃이 만져지고
동시에 촉감도 느껴지고
또 향기도 맡아지고 하는가.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어떻게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잘 검토해보자.
자신이 현실에서 위와 같이 시각감각기관을
통해 얻게 되는 시각정보를 비롯하여
다양한 감각현실을 얻는데
왜 이들 상호간에 이런 관계성이 파악되게 된 것인가.
즉 왜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1 부분만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인가.
또 왜 1 부분에 바늘을 꼽으면 통증을 느끼게 되게 되고
나머지 부분은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읺게 된 것인가.
또 왜 눈을 뜨면 그런 1 과 같은 부분을 늘 보게 되는가.
또 왜 손을 꽃에 대고 그것을 쥐면
눈으로도 그것을 쥐는 모습을 보고
동시에 촉감도 느껴지고 그러는가.
자신이 그런 사유들로 1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었다고 하니
왜 처음 그런 현상들이 각 감관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인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된 사정은 사실은
그런 감각을 하기 이전에
그런 감각을 하지 않더라도
그 이전부터 그렇게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강한 집착을 갖고 대하면서
생체를 구성했던 보다 근본적인
정신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림을 하나 제시해서 이것을 설명하면
설명이 쉽다고 보는데
일단 그림을 그리기도 쉽지 않고
이전에 그린 그림을 다시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일단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보기로 하자.
눈으로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눈에 의한 시각정보로서 안식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감관을 통해 얻는 정보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자신이 눈이 없다고 가정하고
촉감으로만 세계를 파악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는 사실 대단히 답답하게 여기고
대단히 생활하기에도 불편함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하는 그렇게 촉감을 통해
세상을 파악한다고 할 때
그것은 위 내용과 성격이 같은 것임을 잘 생각하면서
그 내용을 다시 검토해보자는 의미다.
손을 뻗쳐 마구 나아가는데
별 감각이 안 느껴지다가
무언가를 닿는 순간
촉감을 느낀다.
이 촉감을 놓고
이 내용에서 어떤 것이 자신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어떤 것이 자신 외의 다른 세상의 부분이라고 여기는가.
이것부터 잘 검토해보자.
이 실험에서는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닿아서 촉감이 느껴지는데
그 내용을 무엇이라고 보게 되는가.
대부분은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의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촉감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거나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인가가
또 문제된다.
이미 그 문제를 살핀 바 있는데
여기서 그런 촉감을 자신의 정신안에 손님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관계없이 늘 자신에게 있다고 할
정신으로 촉감을 담당하는 정신을
하나 시설해 넣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다른 실험을 또 해보자.
자신이 한 손가락을 길게 내밀고
자신의 다른 손바닥을 찔러 본다고 하자.
이 경우는 손이 벽을 닿는 경우와는 사정이
다르게 된다.
손바닥은 뾰족한 촉감을 느낀다면
손가락은 약간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게 된다.
이 경우는 앞에서 벽에 해당한 부분과 달리
그런 손바닥도 또 다른 촉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자신의 몸을
자신이 만지고 있구나라고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각 부분에서 느낀 촉감은
서로 상대쪽의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손바닥이 느낀 뾰족하고 단단한 촉감은
손바닥 자신의 내용이 아니고
손바닥을 찌른 손가락 쪽의 어떤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손가락 쪽도 마찬가지다.
손가락에 느낀 부드러운 촉감은
손가락 자신의 것이 아니고
손바닥이 갖고 있는 어떤 내용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파악할 때
이 내용은 결국 다 무엇이 되는가 하면
다 자신의 한 부분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실험을 놓고
또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그렇게 처음 되어 있는가부터
잘 헤아려야 한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처음 이번 생에 이런 형태로 태어나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근본정신이 어느 생명체의 시작부분에
얽혀 들어간 다음
분화시킨 하나의 정신이
일정한 부분을 그처럼 자기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킨 다음
그 부분을 놓고
이런 각 정신을 분화 파생시켰다는 것이
그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출발 기원으로 보면 두번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감각을 맡는 정신부터
문제삼게 되므로
감각을 담당하는 정신을 1-2-3-4-5 개를 나열한 다음
이런 내용을 다시 놓고
각 부분을 묶고 나누고 하면서 헤아리는
분별을 담당하는 정신을 제 6 의식이라고 시설하고
그리고 생명이 출발할 때
처음 그처럼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고
집착을 가졌던 정신을 제 7 식(말나식)이라고 표현하는 한편
이런 정신을 모두 분화 생성시킨 근본정신을
제 8 식(아뢰야식)이라고 달리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왜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에서
그러그러한 관계가 나타나고
자신이 무언가 뜻을 갖고 움직이려고 하면
일정 부분이 그렇게 따라 움직이는가는
사실은 제 7 식에서부터
그 사정을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현실에서
표면적으로 감각을 하고
분별을 하면서
각 정신이 받아들여 얻어낸 내용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을 일으켜
전도된 망상 분별에 바탕해 행위하고
엉뚱한 세계로 그에 묶여 끌려 다니는 사정은
사실은 바로 이 처음의 제 7 식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단 쉬고
가능하면 이 사정을 표현할 그림도 찾아보면서
이 문제를 다시 이어서 검토하기로 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과거 그림을 찾아내는데 너무 시간이 걸려서
포기하고
과거의 8 식의 관계를 대강 그린 그림을 붙여 넣기로 한다.
현실에서 존재가 문제되는 내용들이
발생하는 관계를 생각하면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런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실재란 어떤 주관과 관련하지 않더라도
그대로 실재한다고 보는 내용을 놓고
실재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놓고
어떤 주체가 감관을 통해 얻는 내용이
감각현실이고
이제 이를 다시 바탕으로 해서
이것을 나누고 묶어 가면서 헤아려
분별해 내는 내용이 곧 관념분별인 것이다.
그리고 감각현실은
각 감관별로 달리 그 내용을 얻기에
대표적으로 5 감관에서 얻는 내용을
나열하게 된다.
그래서 발생 순서로만 따지면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의 순서라고 보아야 하는데
현실에서 각 존재의 정체를 따지는 과정에서는
이 순서와는 반대로
자신이 생각을 해 일으켜 낸 관념분별의 내용들을 놓고
이 각각을 문제삼는 형태가 된다.
정신의 정체를 살필 때도 사정이 비슷하다.
원래는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놓고
이 근본 정신이 각 세계에서
처음 생명이 삶을 시작할 때
분화생성시킨 순서는
제 8 식이 근본이라고 할 것인데
그 관계를 살필 때는
현실에서 표면적으로 활동하는 정신
즉 감각을 담당하는 전 5 식과
분별을 담당하는 제 6 의식을 먼저 놓고
점차 그 근본이 되는 정신을 살펴나가는 형태가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주체가
외부 대상을 놓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관계성을
5 형태로 분류하는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다.
[img2-08] 8pfl--image/sense01.png
우리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세상의 내용을 파악한다고 하는 것을
위와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 감관이 얻어낸 각 내용과
그 상호 관계를 놓고
제 6 의식에서
이렇게 저렇게 세상과 자신의 정체를
판단해 가는 것이라고
현실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앞에서 간단한 실험을 해보았는데
눈이 없다고 하는 상태에서
5와 같은 촉각만으로 세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실험을
처음 행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놓고 생각하면
원래는 자신의 정신 안에 들어온 그 모든 내용을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하면
그 정신에 들어온 외부 손님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무언가를 얻을 때는
그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나
이런 감각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촉각이 있다고 보는 신체부분을 서로
맞 대보면서 자신이 처음 파악한 내용의 의미가
무언가도 다시 살핀 것이다.
이제 손가락을 손바닥에 서로 맞대어서
손바닥에서 손가락의 내용을 딱딱한 내용이라고
파악했다고 하자.
그러니 이제 그 손가락은 촉감의 영역에서는
딱딱한 그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손가락이 허공을 향해 나아갈 때
아무 촉감을 못 느끼다가
벽을 닿아 감촉을 느낀다면
그렇게 얻은 촉감 가운데
어느 부분은 외부의 벽의 내용이고
어느 부분은 자신에 대한 내용인가를
앞을 놓고 구분해보자.
이런 것이 위 실험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가.
자신이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만질 때
부드럽다면
거기에서 원래 손가락에 해당한 딱딱함을 빼낼 수 있고
그렇게 빼낸 나머지만 손바닥의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또 벽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검토해보자는 의미다.
촉감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그 안에서 촉감을 담당하는 자신에 해당하는 부분과
외부를 구분하는 문제가 이런 성격인 것이다.
이제 눈을 떠서 얻는 내용에서
자신과 외부를 구분하는 것도 사정이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눈이 멀리 양쪽에 떨어져 있어서
때로는 서로 눈이 다른 쪽 눈을 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자신의 왼쪽 눈 하나는
거울 위치에 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 문제를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쉽다.
그래서 왼쪽 눈이 본 모습은
사실은 왼쪽 눈의 내용이 아니고
다른 쪽 오른 쪽의 상태를 그렇게 파악한 것이다.
그렇다고 가정하고
현재 자신이 눈을 떠서 모습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자신에 해당한 부분은 어느 부분이고
그 외부에 해당한 부분은 어느 부분인가.
이런 것을 헤아려 보자는 의미다.
그러데 왜 자신이 몸을 움직여보자고 생각하고
무언가 힘을 쓰면
일정한 부분이 따라 움직인다고
현실에서 보게 되어 있는가.
또 그 부분은 왜 바늘을 꼽으면
통증이 느껴지게 되어 있는 것인가.
그리고 눈에서 보이는 손을 일정 부분에 내밀면
그 때 촉감도 같이 얻게 되고
어떤 때는 향기도 얻고
소리도 얻게 되는가.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처음에 왜 생명이 그런 형태로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해
근본정신과 함께 그런 사정을 살펴보자는 의미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사정에 놓여 있는데
단순히
자신이 이런 각 감관과
분별 기능만으로
매번 그런 내용을 대해
그렇게 자신의 부분을 파악하게 된 것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현실에서 대햐는 내용들을
놓고 잘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의의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처음 핸드폰을 주으러 철로에 뛰어 내린
여고생의 엉뚱한 판단과 집착이 불러 일으킨
사고처럼
현실에서 근본정신이
처음 과거 생에서 일으킨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이 세계에서 들어와
생명이 시작되는 형태에 처음 얽혀서
각 정신을 분화생성시키는 가운데
제 7 식이 자신과 외부를 그렇게 망상을 바탕으로 구분하여
처음 일정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집착을 가져서
이후 분화 생성된 각 기관과 정신도
그처럼 각 내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정을
잘 헤아리고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사실은 자신이라고 할 수 없는 핸드폰과 같은 내용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기에
이후 각종 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여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핸드폰이 철로에 떨어졌을 때
그 여고생이
큰일이다. 빨리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핸드폰을 그냥 두어도 상관없다.
그냥 두어도 나중에 주으려면 주을 수도 있고
다른 전문가에 도움을 요청해
집게를 사용해서 주어도 되고
심지어 그런 것을 그냥 두면 또 어떻겠는가.
그런다고 자신이 죽기라도 하겠는가.
그래서 큰 일이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임했다면
사실은 더 좋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핸드폰도 또 필요하면
다시 찾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여고생은 순간 그렇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비극의 결과는
현실에서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그런 부분에 아상을 일으키고
대하는 일반인의 상황과
모두 같은 내용인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 제시되는 사정은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을 놓고
그것이 나라고 생각을 일으키고
그리고 나서
그 모습에 대해 나라는 생각을 대응시키면서
아상을 갖고 임하는 것은
망상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온갖 다른 번뇌망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고
그에 바탕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하면 할수록
그로 인해 업의 장애가 증폭되고
또 그로 인해 고통의 세계에 그 근본정신까지
같이 끌려가서
그 세계에서 또 이번 생과 같은 구조로
고통을 받는 생을 무한히 이어나가게 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번뇌망상에 묶여 접착된 이가
그로 인해 받아나가는 생사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잘 관찰해서
처음 그런 망상을 일으킨
제 7 식 부터 평등하게 이 모두를 관하는 평등성지의 상태로
전환을 시켜야 한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감각을 담당한 안식이나 이식...등을 놓고
그 정신이 얻어 놓은 내용을 놓고
판단을 잘 해야 하는 것이 출발점인 것이다.
[img2-89]
08pfl--image/제8식의구조.png
다시 1~8 식의 관계를 살펴보자.
근본정신이라고 할 아뢰야식이
각 세계에서 처음 각 생을 시작하게 될 때
위와 같은 정신을 분화생성시킨다고 한다면
사실 그 생 동안 그 각 정신이
받아들이는 내용은 매 순간 달라지고 변화가 있다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위와 같은 정신 자체는
적어도 그 생이 마쳐질 때까지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보게 된다.
그러니 처음 눈으로 보는 내용을 놓고
매 순간 그 모습이 달라지고
눈을 감으면 또 없어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가운데 살아 있는 동안
늘 유지되는 주인이자,
그런 내용을 얻는 주관은
사실은 눈을 뜰 때 세상모습을 전체 그 안에 담아 놓는
어떤 그릇과 같은 것을 잡고
자신이라고 보았어야 할 만하다.
그런데 거꾸로 전도 망상의 상태에서는
그런 그릇에 들어온 내용을 놓고
그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라고 보고
임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사실은 눈을 떠 보는 내용을 얻는
안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처음 제 7 식 말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만,
그러나 눈을 떠서 내용을 얻고
그 내용을 놓고 분별을 행할 때에서도
그 내용이 올바르게 시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 정신마다 내용을 얻는 범위가 다 차이가 있는데
소리나 냄새 등에서는 그런 현상이 잘 발생하지 않는데
눈이 천냥이라고 하듯
대단히 풍부한 내용을 얻고
그래서 망상의 소재의 90 %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안식에서는
그런 망상이 대단히 증폭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다른 감각기관의 사정과도
잘 대비시켜 비교해가면서
잘 헤아려야 한다고 보게 된다.
저런 정신만 끌고 다니면서
그 안에 아무 내용도 얻지 못하면
사실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쉬운데
그렇게 올바로 관한다고 해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
그런데 이런 올바른 이해가 무슨 차이를 일으키는가 하면
앞과 같이 철도에 핸드폰이 떨어질 때
올바로 정체를 판단하고 현실에 임하는 이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된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실다운 자신이라고 보지 않는 입장은
또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 한가지 차이는 그런 바탕에서
수행에 임하게 되면
이제 수행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위와 같은 전체의 근본 정신을
이끌고 각 생을 원하는 형태로
받아나갈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이는
그렇지 못한 다른 생명들과 함께
업의 장애를 일으켜 얽히고 묶여서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점이
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핸드폰에 집착하고 얽힌 이가
그 핸드폰이 떨어진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사망사고에 이르고 그 이후
연쇄적으로 사건을 만들어 나가게 되는 것처럼
처음 엉뚱한 것을 놓고 자신이라고 집착한 경우
그에 의해 전 5 식과 제 6 의식과
7 식과 근본정신까지 다 함꼐
이상하게 고통을 전문적으로 받게 되는
세계로 묶여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점이
차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일으킨 업의 장애현상인 것이다.
이렇게 각 세계를 근본정신이 묶여 돌아가면서
생사를 겪는 것을 분단생사라고 하고
수행자가 이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매 상황 매 순간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수행을 올바로 정진해서 임하면서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를 받는 과정은
변역생사라고 구분하게 되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근본정신이 어떤 세계에서
처음 생을 시작할 때 어떤 형태로
시작하는가부터가 달라짐을 의미한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해보자.
나이가 든 사람은
5 살 때 자신을 떠올릴 수 있다고 보는데
그 당시 보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과 같은가
그런데 왜 그 5 살 때의 모습과
지금의 다른 모습을
다 함께 자신이라고 여기는가.
그 육체를 구성한 재료 물질이나
정신 안에 들어왔던 내용들이나
하나도 같다고 할 바가 없는데
왜 그런가.
그래서 이것을 보고
나중에 근본정신이 각 세계에서
각기 다른 생명형태로 삶을 시작하고 살아가는 것도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7 식이 사실은
이들 각 생명이 서로 나와 남 또는 외부로서 서로 다르고
또 자신이 집착하는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고집하고 임하면
앞에서 어른이 5 살 때 보던 자신의 모습은
그 형태가 그 구성물질 재료가 다 다른 것이므로
자신이 아니고
지금의 자신만 자신이라고 고집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해진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이 차별이 없다는 사정부터
잘 파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핸드폰을 떨어뜨린 여고생은
그 핸드폰을 놓고 그것이 파손되거나
줍지 못하면 큰일이라고 여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도 마찬가지다.
망상분별 상태에서
눈을 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아상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그 부분이 파괴되고 사라지고
그런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것이 모두
없어지게 되면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각종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위 관계를 통해서
잘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런 집착을 일으킬 만한
내용이 없거나 얻어지지 않는다
이런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야
근본정신이
그런 고통을 받는 세계로 끌려가지 않게 되고
또 그 근본정신이 각 세계로 진입할 때도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고
각 정신에 좋고 좋은 내용을 얻게 될 수 있다는 점이
현실에서 수행자가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인 것이다.
이제 이것을 다시 가치의 문제를 따지는
영역에서 살펴보자.
처음 가치를 잘 얻는 방안은
가치가 덜한 재료를 가지고
그것을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고 해서
가치가 더 높은 것으로 형태를 꾸준히 바꾸어 가고
또 그런 자산을
이곳에서만 평가를 받는 형태로 보관하지 않고
어느 세계에서나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형태의 자산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현명한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방향으로 행하면
그 만큼 어리석은 것이 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처음 어떤 것이 다른 어떤것보다
가치가 얼마나 높고 낮은가를 문제삼을 때
가치를 일정하게 잴 수 있는 가치추를 마련해 놓고
이것을 비교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저울 한쪽에 생명이나 두 눈을 빼 놓고
문제되는 다른 것의 가치를 비교하여
그것의 비율을 그 가치로 평가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연구실 전자렌지가 하나 고장 났다.
그래서 퓨즈가 나갔는가 하고 분해를 해보았는데
결국 퓨즈에는 이상이 없다고 보고
다시 방치해두었는데
연구실 비품을 담당하는 숙왕화님이 사정을 살피고
그 전자렌지를 자신이 아주 싸게 구입했던 것이니
더 이상 시간을 들이지 말고 그만두라고
말렸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기전까지는
다시 전기흐름을 측정하는 측정기를 동원해서
어느 선이 잘못되었는가까지 살펴보려고 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이것이 가치저울을 잘 사용하지 않고
문제가 일어날 때 마다
초점을 이동시키면서
그것이 마치 우주의 중대사인 것처럼 대하는
잘못된 생활습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희생되는 가치가
젼혀 없다면 모르는데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전자렌지 값이라도 수리해 벌어 들이면
그것이 낫다고 보게도 되지만,
앞의 가치저울을 잘 사용할 때는
생명이나 두 눈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또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렇게 하면
그런 내용들이 무량하게 찾아지기 때문이다.
이제 비율을 놓고 이것을 계산해보면
그 차이가 엄청나게 되는 것이다.
전자렌지가 십만원이라고 하면
한쪽 저울에 전자렌지를 놓고
다른 쪽에 자신의 두 눈이나 심장을 놓고
그 가치를 평가한다면
도대체 얼마라고 그 가격을 적어낼 것인가.
적어 내기 힘드므로 생략하는데
이렇게 하면 실감이 잘 안난다고 하는 입장이 많으므로
우주 전체보다 자신은 자신이 더 가치있다고 느끼는 것이 일반이지만,
제 각각 겸손하게
그 가격을 우주에 비해 형편없이 저렴하게
한 3000 조원이라고 평가해 놓고
음미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그 30000 조원의 자신이
그것을 재료로 삼아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또 무량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수행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수행을 그 일로 하지 못하고
십만원을 얻는데 그쳤다고 한다면
얼마나 손해인가를 스스로 잘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자신이 보는 자신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리고 이 자신이 유지되는 시점까지만
자신의 삶이고
그런 가운데 이렇게 보는 자신이
허물어지면 큰 일이라고 보고 임하는 입장은
어떤가하면
처음 3000 조원이라고 본 그 자신의 생명이
그 가치의 최대점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만 놓고 매 순간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다른 것이다.
왜 그런가가
이미 앞에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그리고 앞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눈을 떠서 보고
소리로 듣고 하는 것만
그런 자산의 항목으로 놓고
그 크기를 키우려고 노력을 했다면 노력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알고보면
이런 것들은
다른 세계에서는 하등 환가가 안 되는
가치항목일 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것을 얻느라고
노력한 만큼
그 반대의 내용으로 업의 장애를 일으키고
거꾸로 다른 세계에서
환가가 되는 자산은
모두 마이너스 형태의 부채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그 문제점인 것이다.
그것이 모두 처음에
자신과 세계의 정체를 엉뚱하게 잘못 판단하고
현실에 임한 것이 그 근본 원인인 것이다.
현실에서 수행자가
매 생 출발시마다 과거의 내용을 다 포맷 삭제당하고
끊겨서 새로 출발하게 되는 분단 생사과정을 밟지 않고
이런 변역생사를 행할 수 있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렇게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기본 요소로
유가사지론에서는
근본 상태와
보리심
그리고 수행내용으로서 보리분법 등
세가지 요소를 제시하게 되는데
여기서 먼저 근본 상태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되고
그냥 아무나
온 생명을 제한없이 제도하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는
보리심자체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보는 것은
사정이 과거에 이미 앞과 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면
지금 인터넷에 올린 조각글을 보는 이는
적어도 사람이겠지만,
이 글을 다른 생명
예를 들어 다람쥐나
곰에게 보여준다면
그 내용을 보고 이해하겠는가.
그런데 왜 같은 생명이라면서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그 사정을 또 앞과 같이 살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는 그렇지만,
앞 미래도 또 사정이 그와 같은 것이다.
자신이 좋음을 다른 생명에게 베풀지 않고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하고 해치고
또 다른 생명이 그런 침해를 할 때
이를 평안히 참고 미움과 원망을 제거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켜 다시 그 상대를 해치면
이것이 모두 업의 장애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업의 장애를 가진 주체는
그로 인해 더 좋고 좋은 상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을 갖겠지만,
그 희망과 달리
그 근본정신은 자꾸 번뇌의 장애와 지적 장애가 근본적으로
장착된 상태로 고통을 받는 세계에 들어가
삶을 이어가게끔 자꾸 묶여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다른 이를 해친 범죄자가
이후 그 상태에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그러나 자꾸 수사관이 나타나 그를 체포하려고 계속 추적하고
그리고 끝내 수갑을 채워 교도소로 끌고 가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는
그 업의 장애를 청산할 때까지
별 도리가 없이 묶여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의 삶이 그렇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이는
현재의 삶이 왜 이렇게 전개되는가를
설명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양자를 잘 살피면
현재의 상황을 놓고
무한한 과거의 사정도 이해하고
무한한 미래의 자신의 사정도 함께 파악할 수 있다고
부처님이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각 고통의 생사과정을 벗어날 열쇠로서
해탈문이 함께 들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과 같은 내용을 잘 음미하고
핸드폰이 떨어져도
집착을 갖고 그 방향으로 뛰어 내리지 않도록
평소에 마음의 훈련을 잘 해야 하는 한편
평소 눈을 뜨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도
그런 핸드폰 처럼 관해서
자신이 몸이 다 허물어지고 고통을 주는 상황에서도
이것을 강 건너 불타는 나무처럼 관하여서
그에 따라 반응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업의 장애가 자신을 묶어 끌고 다니지 않게 되고
그 바탕에서
수행의 방안을 잘 행함으로써
이제 그런 묶임에서 풀려나
무량한 복덕과 지혜 자량을 얻고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과 성불을 향하는
무량한 수행을 무량한 기간 동안
유희자재 신통력을 바탕으로
행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대단히 큰데
그 경계점에 바로
공해탈문과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이 서 있는 것이다.
[...]
여하튼 수행자는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엉뚱한 선택을 하지 않고
매 순간 가치를 무량하게 쌓아 저축해나가는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데
그런 자산을 잘 보관해둘 창고와
그 창고내 자산품목도
경전에 자제히 제시되고 있다.
그것이 왜 어느 세계에서도 다 통용되는
무량한 가치를 갖는 자산이 되는가는
앞의 8 식이 어떻게 매 생에
생사를 전개해나가는가를 잘 음미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눈의 세계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 좋은 것을
가져와서 다른 이에게 주었다면
나중에 그 다른 이가 소리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그 상대에게 무엇을 돌려주는가 하면
그 상대가 거기에서 무언가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소중한 무언가를 주었다는 것을 가지고
환가를 해서
이제 소리 가운데 그런 가치를 갖는 소리
독경 소리를 대신 위기의 순간에 들려주게 된다고
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데
사정이 그 반대면 그 반대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는 다 쓰고 이제 자신에게
쓸모없다고 보는 어떤 것을 하나 던져 주거나
또 어떤 경우는
그 세계에서 가장 끔직하다고 보는 것을
하나 주게도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업으로 만든 장애를 의미하기도 하고
수행자가 수행자의 10 가지 다함이 없는 창고에
보관해두는 자산항목과도
다 관련이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은 화엄경 십무진장품 제 22 부분을
참조하면 그 사정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다고 보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여하튼
이제 어떤 이가 국내에서 자산을 모두 달러로 바꾸어
스위스 은행에 무언가를 보관한다면
여러 각 사정에서는 그저 부동산과 보물만 몽땅 쥐고 있던 상태보다는
상당히 현명했다고 현실에서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어떤 점에서 판단을 크게 잘못한 것인가를
앞에서 자신과 정신의 관계를 제시한 내용을 놓고
그런 관점에서 그 사정을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
현실에서 대부분 행하는 것을 중지하고 반대로 행하면
매 순간 당첨이 된 복권와 수표를 줍고 다니게 되고
또 폭발이 임박한 시한폭탄과 지뢰의 뇌관을 해체하게 되는데
그 반대가 되면
매 순간 좋다고 보면서 하는 것마다
그 반대 내용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1~ 8 식의 관계를 놓고
어디에 다함이 없는 창고를 비치하고
그 창고에 어떤 가치 있는 자산들을 모아 보관해두어야 할 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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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처음
1 은 눈을 떠 세상을 보면 위 그림처럼
자신의 눈썹이나 눈이나 이마도 직접 보지 못하는 가운데
대강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애착을 갖는 모든 것을
이처럼 파악한 1 자신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조각글에서는
이런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며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사정을
수행자가 추구하는 상-락-아-정의 상태에
배당해서 제시한 바 있다.
우선 눈을 뜨고 대하면 저런 1 의 부분은 '늘' 보는데
나머지는 손님처럼 있다가 없다가 한다. [=> 상 ]
또 자신이 뜻을 일으키면
뜻과 같이 따라 변화하고 움직여주는 부분은 저 1 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즉 움직이자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저 부분이 따라오고
나머지는 일정하지 않고 제각각이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는 저런 부분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 락 ]
한편 저 부분이 바로
자신이 모든 세계의 내용을 얻는 주관이나 정신이 있는 부분이고
정신작용도 저 부분에서 이뤄지고
나머지는 그 정신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다.
그리고 이처럼 주관과 객관 대상을 구분할 때
1과 같은 부분이 바로 나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 아 ]
그리고 종합적으로
저 부분이 좋다고 보고
또 저부분이 허물어지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에 반해 자신과 다른 생명체는
흉칙스럽기도 하고 자신과 매번 대립하면서
자신을 해치는 존재들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대강 이전글에서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prince 님이
자신과 남을 분별하면서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하는 가운데
그런 망상분별을 견고하게 매순간 유지해나가게 만드는
기본 사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와 같이 망상을 일으키게 되는 사정을 제시했으면
그런 사정 때문에 망상이 일어났구나 하고
자기 증상을 스스로 이해하고
그 망상편집증을 벗어나와야 하는데
바로 위와 같은 사정이 정말 그렇기에
그런 사정으로 그런 1 과 같은 부분이
정말 실다운 자신으로 보아야 한다고
오히려 거꾸로 생각하고 머물려고 하는 경향마저 갖는다.
즉, 본인은 저 사정이 하나같이 엉터리라고 제시했는데
이제 prince 님은 이를 놓고
사실이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것이 바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그에 바탕해 생각하고 희망하고 추구한
그 모든 내용도 역시 올바른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저 그림에는 1 이 추리하는
다른 사람의 사정도 2 의 상황으로
표시되고 있는데
그 내용만 잠깐 살펴보아도
앞과 같이 망상분별을 행하는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갖는 생각이 왜 엉터리인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데
여하튼 설명이 부족한지
전도몽상을 쉬지 않고 이어가는 것이다.
우선 1 이 2 를 놓고 생각할 때
2 가 생각하는 내용이 5 ^ 와 같은 부분에 그렇게 얻어지는 가운데
이제 2 ^ 라는 부분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이 엉터리임을 쉽게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2 의 생각이 엉터리라고 할 때
그 내용은
바로 1 이 눈을 떠 대하는 내용과 사정이 같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눈으로 얻는 시각정보만 그런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감관을 통해서 얻는 내용도 그와 같은 것이다.
조금 설명이 부족하다면
다시 위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인턴연구원이 어느 순간 연구실에서 행방불명된 사건을
놓고 보자.
그런데 누구나 상황이 같다.
어릴 때 사진을 하나 놓고
그것이 지금 5 년 10 년 20 년 지난 이 시점까지
계속 늘 있는 내용인가를 검토해보자.
그렇지 않으니 앞의 생각은 엉터리인 것이다.
알고보면 현재 순간에 주인이라고 보는 1 부분도
다른 부분처럼 마음에 들어온 손님과 같은 내용이라면 같은 손님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정하게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사실은 따로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
이것이 또 수행자가 달리 초점을 맟주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2 번째 내용도 다시 보자.
자신의 뜻에 따라 그것이 변화하고 움직여서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신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왜 자신의 뜻과 달리 그렇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는가.
심지어 그런 생각을 연장하면
버스를 타고 갈 때
버스 운전사가 운전하는대로 따라 이동해가는 자신은
그 때는 버스나 버스 운전사의 몸이 된 것인가.
또 지구가 움직이는 대로 자신이 늘 붙어서 이동해 가니
자신은 이제 또 지구인가.
그렇지 않다고 볼 것인데
그러나 자신은 1과 같은 부분을 놓고
그렇게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고집한다는 것이
바로 여기서 문제인 것이다.
알고보면 자신의 몸 안에
자신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생명체가 무수하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몸은 그런
수많은 생명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 생명들이 빙의되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안 대장내 세균 분포가 달라지거나
자신에 기생하는 기생충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자신의 식성도 달라진다는 보고도 다 그런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움직이고자 하면
자신의 뜻에 따라 1과 같은 부분이 뜻대로 움직여서
좋음을 주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은
엉터리라고 지적한 것이다.
자신의 뜻과 달리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것이 왜 자신인가.
이것을 놓고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그런 것을 자신이라고 집착하면
그에 바탕해 행위를 해가면서
그처럼 고통의 생사현장에 묶여 끌려가게 되므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잘 관하고
집착을 떠나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1 과 2 내용을 놓고 좀 더 심하게 살피면
자신을 지금 구성하는 육체는
이전에는 배추밭이나 축사에 있었던 물질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나중에는 지금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또 그처럼 다시 강가나 배추밭에 가 있을 수 있다.
육체도 그렇듯 정신안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떤 내용은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가져온 것도 있고
어느 것은 어떤 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것도 있고
또 자신의 현 순간의 내용은 그처럼 다시
밖에 나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앞과 같이 고집하고 이것을 집착해 쫒아가면
엉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취해 한없이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가
그런 것을 자신이라고 보고 집착을 갖고 대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손톱을 깍고 그 떨어진 손톱을 놓고
그렇게 행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보지만,
이미 죽어서 영혼이 된 이가 생각하기를
자신의 과거의 몸이나 자신이 과거에 입던 옷이나 신던 신발을 놓고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
계속 그런 것을 놓고 집착을 갖고
그에 접착되어 묶여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과연 그런 것 하나하나가 다
정말 그런가부터 다시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선비가 어떤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가 죽어 무덤에 묻혀있어 무덤가에서 풀을 뜯으면서
술을 따르고 시를 읊는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만일 그 무덤의 풀을 그 여인으로 보고
그렇게 집착한다면 왜 배추밭의 배추에 대해서는
그렇게 대하지 못하는가도 문제인 것이다.
여하튼 앞의 내용은 그것들을 잘 헤아려 보면
하나같이 엉터리라고 제시한 것이다.
3 번째 내용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마음에서 얻어낸 내용을 놓고
그 가운데 한 부분은 그 내용을 본 주체고
다른 부분들은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그런데 현실에서 거의 대부분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모습이 곧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촉감을 얻게 한 대상은 시각정보로 그처럼 마음에서 얻은 한 내용이
그 대상이다.
다른 감관으로 얻는 내용도 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이런 식의 생각이 과연 이치에 맞겠는가.
이제 위 그림을 다시 살피는 가운데
2 의 마음에 맺힌 내용이
과연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인가
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정신은
그렇게 마음에 얻어진 한 부분에
그처럼 머물고
그렇게 작용하는 것인가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그렇지 않다고 잘 이해해야 하는데
이제 엉뚱하게 생각하고 집착을 가진 이는
이를 뒤바뀌어 생각하고
그에 바탕해
뒤바뀐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으켜 행하여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올바로 보지 못한 가운데
진정한 자신이라고 할 내용은 잃어 버리고
엉뚱한 것을 놓고 집착한 가운데
쫒아 다니다가
지옥이나 동물 축사에 갇혀 고통을 받으며
주인과 손님이 서로 위치가 뒤바뀐 삶을 살아가는
이상한 현상이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4 번째도 마찬가지다.
좋고 나쁨의 분별을 놓고
자신에 대한 집착을 갖는데
그런데 물을 하나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지만,
물은 어떤 곳에서는 지극히 좋음을 주고 값도 비싼 것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지극한 고통을 주는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물고문을 행하는 곳에서의 물은 그런 것이다.
현실에서 엉뚱한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고
매 순간 집착을 갖고 임하다보면
이제 이 몸으로 인해 어떤 순간은 지극히 좋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그런 사유로 이 몸에 집착을 갖고 머무는 가운데
이 몸이 허물어져감에 따라
지극한 고통을 다 받아나가고
또 그에 바탕해 집착된 반응을 해나가
그로 인해 지옥이나 아귀 축생 세계에도
그처럼 묶여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이가 소를 묶어 끌고 가고자 할 때
코에 고삐를 뚫어 이를 묶어 끌고 가면
이로 인해 소 전체가
다 묶여 끌려가는 현상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각 생명이
고통의 생사를 받는 세계로 묶어 끌려 가는 과정도
이런 망상분별과 그에 대한 집착을 갖고 대하는 이가
그에 접착되어 붙어 버리는 현상이
가장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위 내용을 이처럼 제시한 것이다.
하나하나 보면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이에 바탕해서
평소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 논의는
그렇게 그런 내용이 엉터리라고 이론적으로 이해해도
그런 이해를 통해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가 잘 성취되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누구나
1 의 부분을 가지고
1 의 부분을 이리저리 이동시켜가며
무엇도 마시고 먹고
또 일도 하게 된다고 여기고
또 현실에서 생활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막상 그런 부분 어느 하나가 사고로 허물어지거나
병들거나
현실에서 1 과 같은 부분 하나에
바늘이 꼽히거나
그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 톱으로 잘리워지는 상황에서는
예외없이 누구나 비명을 지르고
공포에 질러 노랗게 되게 된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자신 외의 사람인
2 나 3 이 그렇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을 수없이 본다지만,
그런 경우는 자신도
아주 담담하고 대범하게 이를 무시할 수 있다고 여기고
심지어 그런 가운데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쳐 섭취하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
정작 자신의 손톱 하나라도 다치고 빠지거나
손가락 하나라도 톱으로 잘려질 위험에 처하면
노랗게 얼굴색이 변하고
고통을 겪으며 사색이 되는 것은
대부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일체의 행위는
또 다시 이에 집중해 나가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묶여서 나머지 무량한 시간대에
그처럼 매순간 그렇게 묶여
번뇌의 사역을 받고
각 세계를 이동해 가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수행과 이론의 초점은
이 부분에 그 효용을 집결시켜야 하는 것이다.
중관론의 복잡한 논의를 다 이해하고
이제 그래서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를
말하고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런 내용을 음미한다고 해도
결국 마찬가지다.
여하튼 앞의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평소 자신에 대해 스스로 갖기 쉬운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앞과 같이 자신에 집착된 반응을 하게 되기 쉬운
그런 현실 상황에서
그것을 떠나 올바른 수행방안을 취해
임해야 하는 것이 요구되는데
이론은 이해해도
그런 현실에 닥치면 이론은 이론일 뿐
현실에서 행위는 그와 달리 행해나가게 되면
결국 이론만 밖에 남고 자기 자신은
엉뚱한 내용에 묶여서
지옥에 끌려 들어가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앞의 내용을 놓고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여전히 앞과 같은 주장이
잘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정은 또 다음이다.
우선 앞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자신의 마음안의 내용인데
그런데 왜 자신이 막대를 잡아 꺾으면
그와 함께 소리가 들리고
손에는 그 막대의 촉감이 느껴지는가.
그리고 막대를 쥐었을 때 촉감과
자신의 손가락을 자신이 쥐었을 때
양 부분에서 느끼는 촉감은
왜 또 차이가 나는가.
그리고 왜 자신이 막대를 꺽어
소리를 들을 때
자신의 마음 안 내용이라면
자신만 그것을 그렇게 대하고 끝나야 하는데
왜 다른 제 3 자들도 그 모습을 함께 보고
또 그 소리를 함께 듣게 되는가.
이런 문제를 앞의 바탕에서 또 제기하게 된다.
그래서 이에 관한 논의를 또 진행해야 한다.
우선 앞의 내용들은 마치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의 주장
즉 마음안에서 그런 내용을 얻으면
그에 상응한 내용이 그처럼 각 영역에 있다고 하는 주장을
타당하게 여기게 하는
유력한 근거인 것처럼 보게 된다.
현실적으로
정신 안의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를 일으키게 하거나
촉각정보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이해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면
그런 소리를 반복해 듣게 되고
또 그런 촉감을 얻는 등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그런 내용을 마음에 얻을 때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그 정신 밖에 각기 실재 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이 내용을 놓고 각 주체가 그것을 대하기에
또 그런 엇비슷한 내용을 서로 같이 얻고
그 내용을 대화를 통해 서로 나누게 되는 것이 아닌가.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그러면 각 주체의 정신이
혼자 그렇게 자체분열을 일으켜 그런 내용을 얻는 것 뿐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왜 여러 사람이 같은 증상을 그렇게 일으키게 되는가.
이런 식으로 prince 님은 주장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논의에서는
처음 정신이 파악한 위 그림 같은 내용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먼저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그런 외부대상이 전혀 없다거나
있다라는 식으로
어떤 한쪽 방향의 극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다 없다의 이분법에 바탕해서 논의하는 입장은
늘 이 어느 한 극단을 붙잡고
망상분별을 행하고 그에 집착해 나가기 마련이다.
처음 실재가 그대로 감각현실인가.
또는 감각현실이 그대로 관념분별인가.
이런 것을 검토할 때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것이 곧 그 각 내용이
그런 영역에 전혀 없다고 내세운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래서 다시 다음을 함께 검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감각현실은 그런 실재를 떠나서 얻은 것인가.
또 그런 관념분별은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얻은 것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어느 부분이 꽃이다 바위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내용을 놓고
이 각 문제를 각 방면에서 함께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있고 없음을 논의할 때
각기 어떤 입장에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가 부터
잘 헤아려야 한다.
우선 있고 없음 자체가 분별의 한 내용이어서
이는 분별 영역에서 일으켜 얻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감관이나 정신과의 관계에 의존해 각 내용을 얻는 입장에서는
그런 관계를 떠나 있다고 할 실재영역에 대해서는
그런 있고 없음을 따질 내용자체를 얻어낼 도리가 없고
또 있다 없다의 분별 자체가 행할 수 없기에
본래 그런 판단을 떠나야 하는 문제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실재란
아주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또 감각현실의 영역에서는
분별이 행해지는 것도 아니고
분별영역에서 행한 내용을 얻어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전혀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형태로 그런 감각현실은 얻는 것이다.
또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에는 감각현실에서 얻는 것과 같은 내용이
그 안에 없다고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생각을 전혀 못 일으킨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또 꿈은 깨보면 허망하고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때
꿈을 꾸지 못한다거나,
잘 때 그런 꿈을 꾸어서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이런 모든 내용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진여는
자신이 이 내용을 직접 얻어낼 도리는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 할 것인가.
이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실재대로 그렇게 있다고 할 만하여
진여 실재라고 하거나 원성실상이라고 이름붙여 시설하게 되고
또 어떤 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도 그처럼
감관이 관계하여 얻는 내용이므로 의타기상이라고 이름붙여 시설하게 되는 것이고
또 그에 대해 생각하고 이리저리 묶고 나누어가면서
헤아려 분별하는 내용도 그렇게 일으켜 얻을 수 있기에
그것을 변계소집상이라고 이름붙여 시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문제삼는가 하면
그것들이 과연 실답게 보고 집착을 가질만한 어떤 내용인가를
다시 문제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어떤 모습을 눈을 떠서 보고
그런 감각현실에는 그런 모습을 얻게 한 대상이 없다고 할 때는
그런 감각현실을 전혀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런 감각현실을 놓고
그것이 곧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내용이 곧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다고 한 것 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은 사실은
그 모두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이고
이 안에는 그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없다는 사실을
유식무경이란 표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정신 밖에 정신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외부 실재는 무엇인가를 놓고 따질 때
그런 실재는 얻을 수 없어 공하고
또 어느 영역에도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다(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는 사실을 먼저 제시하게 된다.
즉, 모든 존재의 본바탕이라고 할 공한 실재는
진짜라고 볼 내용이 없는 것이다. ( 원성실상의 승의무자성)
그리고 감각현실은 그런 실재도 아닌 것이다. ( 의타기상의 생무자성)
그리고 관념분별은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도 그 안에 없는 것이다.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그래서 이 각 영역은
실답게 볼 요소가 각기 다 결여되어 있다고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어떤 내용을 얻고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할 때는
그 분별내용이 마치 실재나 감각현실 각 영역에도
그처럼 얻어지고 실답게 있는 내용이라고 여기고
그에 바탕해 그에 접착되어
머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해나가고
그로 인해 생사 과정에 묶여 고통을 받아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있다고 하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실답게 볼 요소가 없음을 올바로 관해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 그 문제를 시정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또 한편 비록 실답지는 않지만,
그처럼 일으켜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는 각 내용은
또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 바탕이라면
그 자체로 그 하나하나가 생사 고통과 같은 문제현상을 떠나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할 것이므로
그런 사정으로
생사현실 즉 열반임을 관한 가운데
중생제도를 위해 그것이 모두 좋고 좋은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있다 없다가 문제될 때는
어느 극단에 치우쳐 논의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정리하면
각 영역의 내용에서는 진짜이며 실답게 볼 요소가 없는 것이고
그러나 한편
그렇게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에서처럼 생생하게 얻고 그래서 진짜'처럼' 여겨지는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은 그런 측면에서 그렇게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꿈을 놓고 이 사정을 이해하면 쉽다.
꿈은 실답다고 할 내용으로서는 없다고 해야 하지만,
그러나 꿈으로서는 그렇게 얻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 과정을
a + b => C
의 관계로 얻는다고 제시할 때
바로 이 내용은
그렇게 얻는 C 를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라고 볼 수 없다는
것도 함께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위 내용은 위 관계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제시한 것이므로
그런 관계를 떠나서 실재하는 내용이 아님도 제시한 것이라는 의미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관계로 얻는 C 의 내용을
a, b 에서 찾는 것도 곤란함을 함께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정을 쉽게 설명한다면
눈으로 보는 색깔과 같은 내용을 놓고
이를 귀로 듣는 소리 가운데에서 찾으면 찾아지겠는가.
막대를 부러뜨릴 때마다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 이는
막대 모습에서 그 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또 다른 비유로
침대에서 잠을 자면서 금광의 꿈을 꾼다고 할 때
그 금광의 꿈을 침대에서 꾸었다고 해서
침대에서 그 금광을 찾아내려고 하면 찾아지겠는가.
이런 비유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한 것이다.
침대에서 꾼 금광과 침대를 놓고 분별한다면
그 꿈속의 금광이 곧 그 침대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그 꿈속의 금광모습은 그 침대를 떠나서 얻은 것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 관계를 살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꿈에서 꾼 금광의 모습이
침대에 들어 있다고 고집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각 존재가 문제되는 중요한 영역을 나열할 때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영역을 나열하고 살핀다면
이 각각의 상호 관계가 위 비유와 사정이 다 같은 것이다.
각 존재 영역에 내용이 전혀 아무것이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각각의 관계와 사정이 위와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중관론에서도 사정이 같다.
무엇이 있고 없음을 놓고 문제삼을 때
있다고 해도 이러이러한 관계로 그런 주장은 문제가 된다고 제시하고
없다고 해도 또 이러이러한 관계로 그런 주장은 문제가 된다고 제시하고
그런 망상분별을 다 함께 떠나라고 제시하는 것인데
그러나 상대는
있음을 부정하면 다시 없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고
없음을 부정하면 다시 있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들 논의는
실재영역에 대해
무언가가 그처럼 있다 없다라고 분별하는 양 극단 전체가
다 함께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를 통해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키는 현상을 제거하면
실재나 감각현실 관념분별 각 내용은 그로써
생사가 곧 니르바나인 것이어서
이 내용을 버리지 않고 모두 좋고 좋게
잘 사용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한편,
1 의 부분에서 통증을 느낀다거나
시각정보의 변화가
청각이나 후각 촉각 등등의 정보와 서로 관련이
된다고 보고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은
이들 각 정신이
처음에 다 어떤 사정에서
그런 관계를 형성내 나가게 된 것인가를 또 살펴야 한다.
그래서 감각을 맡은 정신이나
관념분별을 맡은 정신이
다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런 것인가를
또 살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을 하던 않던
감각을 하던 않던
일정하게 일정부분의 일정한 내용을
자신이라고 집착하고 임하는 기본적인 정신이
또 있는데
이것부터가 사실은 엉터리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삶을 시작하는 모든 생명은
이런 바탕에서 삶을 출발하고
시작하고 또 그 안에서 삶을 마쳐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는 어떻다는 것인가 하면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나서는
계속해서 매 생마다
그런 형태로 새로운 세계에 가서
또 매 순간순간
그런 식으로 임하면서
무량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간다는 것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보면 이렇다.
처음 한 주체는 태어날 때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남인가를 구분하기
곤란하다고 할 것인데
처음 태어날 때 자신이라고 본 부분은 자신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남이라고 보고
삶을 시작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아무 해가 없다고 보게 되는
밀가루거나 꽃가루거나 땅콩이거나 세균이거나 한 것인데
처음에 이와 관계를 잘못 형성한 어떤 이는
평생 그것을 대하면
지독한 거부반응이나 알레르기 현상을 일으키거나
면역체가 흥분해서
과잉 반응을 하는 현상이 현실에서 있다.
그것은 처음 그가 태어날 때
그가 어느 부분은 나라고 분별을 행하고
자신과 외부를 분별해 구분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그런 내용들을
자신의 한 부분이라고 평안하게 대하고
받아줄 관계가 형성되지 않음으로써
그 이후 이들을 모두
외부의 적이나 자신에게 해를 주는 이물질로 여기는 가운데
그런 과잉반응 현상이 이후 계속 일어나게 된다고 보는데
이 과정이 바로 정신의 분화과정에서도
똑같이 문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에 바탕해서
감각을 담당하는 정신과
분별을 담당하는 정신이 형성되고
이들 정신이 그에 기여하는 활동을 계속 하게 되니
현실에서 보듯
그렇게 생활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그런 망상분별을 형성시킨 정신을 기준으로 하면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그런 망상분별을 떠나서도
과연 정말 본래 그런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나와 남의 분별이
과연 그 주체를 길게 좋고 좋은 상태로
이끌어가는 것인가.
이런 것을 잘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도 기본적으로는
일반적인 상태와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그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고
그래서 아상을 갖지 않고
나와 남의 분별을 행하고
그에 집착을 갖지 않도록
수행에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수행자도 그 수행자체를
다시 일반입장과 같이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서
그 내용을 그렇게 관하고
수행을 하는 사정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본래 그렇지 않은데
왜 그런 내용들을 하나하나 시설해서
그처럼 현실에서 수행자가
그런 수행을 해나가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앞에 제시한 것이다.
>>>
나의 정체에 대한
전도망상과 집착의 문제에 대해 살피고 있는데
이 증상이 현실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사정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좀 더 문제를 이어서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하면서
이 복잡한 논의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에
늘 초점을 잘 맞추고
논의를 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 속에 들어가
내용을 살피고 난 후에도
논의의 본 취지를 잃어 버리고
현실에서는 또 다시 원래의 전도몽상상태에 다시 바탕해
생활해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이 논의의 초점은
현실에서 망상에 바탕해서
자신이나 남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엉터리 내용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본래 생멸과 생사고통을 떠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늘 머물고 있는
상락아정의 상태라고 할 본래의 자신을 잘 찾아냄으로써
이에 바탕해서
현실에서 생사 고통에서 벗어나
무량한 기간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는
무량행문을 잘 닦아
그 모든 수행목표를 원만히 잘 성취해낼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상락아정이란 표현은
시적인 표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본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해
행하는 모든 언어표현이
다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보게 되는데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진리의 내용으로 제시되는
일체가 무상하다 일체가 고통이다. 일체가 공하다 등등의 내용도
또한 사정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언어표현을 통해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사정은
이미 이전 조각글에서
'시설'(안립)이란 내용을 통해 밝힌 바 있다.
여하튼 여기서 수행자가 확보하는
상락아정의 상태란,
수행자가 수행과정에서 확보하게 되는
영원히 즐겁고 진짜의 나로서 깨끗한 상태
를 의미하는데
부처님께서
그런 영원한 것은 없다.
현실 일체가 고통이다.
일체가 무아 무자성이다.
일체가 열반적정이다.
일체가 공하다.
등과 같은 내용을
기본적인 진리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러나
상락아정이란 내용은
이와 정면으로 모순된 내용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설명하자면
수행자가 무량한 기간 무량한 수행을 하게 되는 기본적인 상태는
언어 분별을 떠나지만
굳이 언어로 표현을 하자면
상락아정이라는 표현에 준하는 상태라고 보아야 하기에
이런 상태를 상락아정이라고 표현하고
수행에 임한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사정은
처음 현실이나 실재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할 때도
마찬가지다.
실재에 대해 원칙적으로 표현하면 어떤가하면
그런 실재에는 청정함이나 더러움과 같은
분별이 아예 행해질 도리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실재를 놓고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는가는
경전에 그 사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그렇게 표현하게 되는 사정을
본래 진여 실재에는
그런 청정함이나 더러움 자체를 얻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러나 현실에서 중생들이
생사 고통을 겪고
더러움에 물든 현실을 놓고 본다면
이런 실재 진여의 상태는
상대적으로 이와 같이 표현하게 된다고 그 사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가
무량한 기간 무량행문을 닦고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 나간다고 할 때
정작 그런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무엇을 자신으로 놓고 보기에
그처럼 무량한 기간 동안
그런 수행을 해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도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그렇게 무량한 기간 동안
수행을 할 수 있는 수행자는
결국 현실에서 전도몽상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상태와는 달리 임하는 것이므로
그런 수행자의 상태를 놓고
이를 상락아정의 상태로
표현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본다면
이 모든 경우 그런 언어표현은 그렇게 시설한 것 뿐이라고
다시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상락아정의 표현은
현실에서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내용에 집착을 갖고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는 상태와 달리
수행자는 그런 무량한 기간에 걸쳐
유희자재신통력을 바탕으로
생사를 초월해
수행에 임하게 되는 사정을 그처럼 서술한 것이고
엄밀하게 본다면
수행자만 다른 상태와 달리
어떤 진짜의 내용이 고정불변된 상태로 영원하게 존재하기에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벗어나
무량한 기간 그렇게 수행자가 임한다는 사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런데 다시 이에 대해 주의할 점은
현실에서 가졌던 망상과 집착을
다시 이런 수행자의 상락아정의 상태에 일으키면
원래 현실에서 있던 문제가
또 다시 여기로 옮겨 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행자의 상락아정의 상태는
수행자 스스로 이에 집착을 갖지 않고
그리고 수행역시도
무소득(얻을 것 없음)을 방편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지 않고
무량한 기간 수행에 임한다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여하튼 이 논의가 복잡한데
그 논의의 취지와
그 논의를 통해 얻는 효용이 위와 같은 것임을
잘 이해하고
논의 내용을 살펴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미 이전 조각글에서
철로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으려다
목숨을 잃은 여고생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그 여고생이
핸드폰을 대하면서 그것을 당장 줍지 않으면 큰 일이 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철로에 뛰어들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이런 핸드폰과 같은 역할을 해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게 한다고
앞 조각글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파괴되고 없어지면
큰 일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게 되는데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바로 이 문제가
수행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올바로 관하고
올바로 수행방안을 취하지 못하게 되면
마치 핸드폰에 집착해 사고를 당한 여고생의 상황처럼
결국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생사 고통에 묶여서
고통을 받는 세계를 무한히 돌고 돌게 된다는 사정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런 상태에서는
수행자가 무량한 기간 생사를 초월하여
추구하게 되는 생명보다 더 광대무변한 가치들을
하나도 찾아내지도 못하고
그래서 매 순간
생사에 묶인 자신에 집착을 갖고 임한 가운데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갈 도리밖에는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이 집착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잠깐 보자.
그 사고를 당한 여고생이 핸드폰에 집착하여
그 핸드폰을 얻고 그 효용을 얻기는 했는가.
사실은 그렇지 못하고
그에 그치지 않고
더 소중한 자신의 생명까지도 그렇게
희생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집착을 갖는 일반 상태에
모두 적용된다.
그렇게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엉터리로 망상과 집착을 갖고 임해
그로부터 좋음을 얻기는 했는가.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고
얼마간 좋음을 얻었다하더라도
다른 세계로 떠나면
역시 그 좋음을 갖고 떠나지도 못하고
그에 그치지 않고 그런 망상 집착으로 인해
업의 장애에 묶이고
생사 고통을 그대로 무한히 받아나가게 된
결과만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지 않고
올바로 자신의 정체를 관하고 임하는 입장은
그런 생사를 벗어나
무량한 수행을 행하여
복덕과 지혜를 모두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차이가 상당히 큰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고
집착을 갖는 내용에 바늘이 꼽혀서
고통이 밀려올 때
어떻게 그것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고
또 그에 바탕해 반응을 하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것이 실다운 자신이 아님을 올바로 관하고
또 그에 바탕해 올바른 수행자세를 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앞에 나열한 차이와
곧바로 관련되는 문제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다시 그림을 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 세상을 보면
위 그림과 같은 내용을 대하게 된다고 할 때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2 나 3 과 같은 이를 남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1 이나 2 나 3 이나
서로 상황이 엇비슷한 것이다.
현재 대통령 선거가 가까와서
각기 자신을 대통령으로 일하게 해달라고 동의서를
받으러 다니는 중임을 제시했는데
본래 정치 문제는 본 사이트에서 취급하지 않는다.
현실문제를 배경으로 놓고
글을 대하게 되면
무슨 내용을 대하더라도
그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대하게 되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연예계에서 아이돌 스타별로 각기 팬클럽 회원들이 있는데
이 팬클럽 활동을 하는 이들 간에
자신의 아이돌에 대해서 서로 좋다 나쁘다 등의
의견을 주고 받다 보면
이제 팬클럽회원들 사이에서
이로 인해 감정을 서로 상하고
이후 패싸움이 쉽게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원래 수행자가
안락하게 수행을 임하는 데 있어서는
이처럼 망상증상을 심하게 일으키는 문제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수행에 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런 시각에서 글이나 노래를 듣는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결국 본인이 뽑혀 나오는 노래에서도
오래 듣다 보면 그런 시감상이 가능하게 되는 곡들이
몇몇 발견되는데
그런 곡들은 다시 제거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지만,
그런 망상을 일으키고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해도
또 다른 망상분별 편집증세가 있는 입장에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해
갑자기 글들이 통편집 처리되는 문제가 있는데
현실에서 첨예하게 시시비비를 따지고
서로 대립하게 되는 문제를
직접 언급하면 그 상태가 어떻게 되겠는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현실의 모습이
이렇게 되는가하는 사정은
일단 고난탐정으로서
기본적으로 진단을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어떤 지위를 어떤 이가 차지하여 활동하는가는
예를 들어 그 지위가 대통령이라면
그로 인해
이후 자신이 전보다 세금을 더 많이 부담할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지원이나 혜택을 받다가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어떤 수사를 갑자기 받고 감옥에 갈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익을 얻는 지위에서 갑자기 원치 않게 물러나야 할 수도 있고
심지어 갑자기 전쟁 상황이 되어
전투현장에 임해야 할 수도 있게 된다는 등등으로
다양한 영향을 현실적으로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간단하게 살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놓고 서로 입장이 다른 이들이
서로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한 순간도 편할 도리가 없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런 문제들을 하나같이
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로 보는 것이다.
누가 이런 기본 사정을 잘 모르겠는가만은
본 사이트나 본 연구원들은
일단 이런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다고 보기에
그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 것임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이런 문제를 사례로 놓고 논의하다보면
역시 본 논의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또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이로 인하여
안락한 수행 자체를 할 수 없고
함께 장애를 겪게 되기에
이런 현실 문제를 취급하지 않게 된다는 사정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이런 사정은 법화경 안락행품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래서 수행자는 논의를 하더라도
현실문제와는 약간 거리를 두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그런데 나와 남의 정체 확인 문제는
이 모든 현실의 문제와 다 관련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번뇌를 일으키고
시시비비의 문제를 일으키고
견해의 대립을 일으키는
그 온갖 문제와
생사고통이
다 이 문제를 근본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역시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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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다시 그림을 놓고 보자.
현실에서 제각각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에 임하게 된다.
이것은 거의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1 과 2 와 3 등의 사람이
다 입장이 엇비슷한 상태이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아주
진귀한 꽃 4 가 저렇게 있는 것이다.
그 꽃을 1 이 차지하면 2 와 3 이 불만이고
또 2 가 차지하면 1 과 3 이 불만이고
또 3 이 차지하면 1 과 2 가 불만인 것이다.
현실 문제는 다 이와 성격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기본 사정에서는
세상의 문제가 쉴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에
처음 각 생명이 이처럼
각기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또 2 나 3 과 같은 부분은 남이라고 보고
그런 가운데 현실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그 근본원인인 것이다.
그러니 이 근본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방안은
찾아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찾는 어떤 상태는
역시 생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즉 생사를 초월해서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 바탕에서는 행해질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처음부터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망상을 갖고
이에 집착하게 되는 기본 사정을
수행자의 상락아정의 상태에 준해서
각기 나열하고
그 하나하나가 엉터리임을
이전 조각글에서 이미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여전히 그 망상을 제거해내지 못하는
사정이 또 있기에
이런 내용만으로는 쉽게 앞과 같은 망상 집착을
현실에서 제거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논의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 문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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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눈을 떠 대하는 세상의 모습은
시각적 감각현실로서
그 내용이 상당히 풍부하기에
대단히 망상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현실에서 저런 상태에서
1 이 손을 뻗쳐 꽃을 만지고 쥐려 하면
그에 따라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되고
또 그 손에 꽃이 닿고
꽃이 잡힌다.
이 상태에서 1 자신은 촉감도 느끼고
그리고 향도 맡고
꽃이 꺽이는 소리도 듣는다고 하자.
그리고 꽃의 가시에 1 부분이 찔리면
아픔을 느낀다.
현실에서 매번 이런 경험을 하는데
어떻게 1 부분을 실다운 자신이라고 보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그래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현실에서 그런 망상분별에 매여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증상을 해결하고
이제 무량한 기간에
무량한 복덕과 지헤를 얻는
상락아정의 상태를 얻어나가는 수행자로
변신하는 게기가 여기에 마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저 상태에서 저 내용들이
마음 안 내용임을 이해한다면
위와 같이 저렇게 눈을 떠서 본 내용들이
서로 대상과 주관이 되어 서로 관계한다고 본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엉터리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사정을 TV 모니터나 그림을 놓고
과거에 설명한 바 있다.
TV 화면에서 어떤 배우가 손을 뻗어
꽃을 잡는 모습을 비춰 보여준다면
그 화면에서 손에 해당하는 화소가
꽃에 해당하는 화소를 붙잡는 것인가.
그리고 그 때 스피커에서 꽃 꺽이는 소리가 났다면
그 모니터 화면의 변화 때문에
그렇게 소리가 난 것인가 .
이렇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prince 님을 지켜본 결과
이런 설명만으로는
그 망상문제가 잘 해소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또 달리
보충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글을 짧게 써야 한다고 보고
올려진 노래에서도
mun 님이나 prince 님이 이해가 되게 하려면
글을 짧게 써야 하고
긴 글은 싫어한다는 시감상을 하게 되는데
여하튼 사정이 어렵다고 보고
쉬면서 이어가기로 한다.
쉬기전에 금강경에 나오는 게송을
하나 올려 놓고 쉬기로 하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一切有為法 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런 게송이다.
유위법이란 생멸 변화하는 현상 일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일체 변화하는 현상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그래서 일체 변화하는 현실 내용들은
그 만큼 실답게 볼 수 없는 것이므로
마땅히 이처럼 관하고
현실에 임해야 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그것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에
모두 해당되는 내용임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자신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바늘이 꼽히면 지독하게 아프고
또 움직이자고 하면 그 부분이 따라 움직이고
손을 마주치면 촉감도 그에 따라 느껴지고
소리도 나고 그런데
어떻게 이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지 않고
꿈이나 물거품과 같이 실답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고
집착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무량한 수행자의 상락아정의 상태와
현실의 생사고통과의 경계선에
위치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더 자세히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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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그림을 반복하는데
현실 상황 파악에 도움을 받기 위해 어쩔 도리가 없다고 본다.
현실에서는 4 와 같은 꽃이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내용인데
이것을 자신 외부에 있는 대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1 도 사실은 그런 것인데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잘못된 전도망상인 것은 이미 살폈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뒤집혀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을
바다에서 물방울 하나를 놓고 바다라고 취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 사정을 1 이 눈을 뜨고 세상을 대할 때는
잘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이제 그가 2 를 놓고 실험을 할 때
2 가 눈을 떠 보는 내용이 5 ^ 처럼 그의 마음 안에
맺히게 되리라 추리하고 생각하면
조금 그 사정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위 그림에서 2 역시 그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5 ^ 안에 그려진 내용을 놓고
2 ^ 가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의 손이 뻗쳐서 4 ^ 를 불잡으면
4^ 가 그런 행위를 한 대상이고
또 자신의 눈이 대한 대상이고
또 자신의 손이 촉감을 얻은 대상이고
또 꽃이 꺽인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소리를 일으킨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2 의 그런 생각이 엉터리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나 1 자신의 상황이 사실은 그와 같다는 것은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 의 입장에서는
1이 자신이고 4 는 그런 여러 감각을 얻게 한 대상이고
행위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 쉽다.
이제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해보자.
1 이 4 라는 꽃을 손을 내밀어
붙잡고 다른 장소에 치워 버리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다음 실험을 해보자.
1이나 2 나 3 이나 서로 엇비슷한 입장인데
그 사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이제 2 나 3 의 자리에 1이 매번 그 자리에 들어가
그런 실험을 하는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 1 이 그렇게 분신을 만들어서
동시에 위치할 수는 없는데
그냥 2 가 1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이 실험을 하면 조금 더 사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2 의 자리에 1 이 들어가서
꽃을 붙잡아서 다른 장소로 치워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꽃을
보거나 만지거나 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그 꽃을 일단 제거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2 가 꽃을 치우고 나니
원래 1 의 입장에서 꽃을 볼 수가 있겠는가.
현실 실험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꽃을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어떤 이가 꽃을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꽃이 안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과정에서 2는
여전히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가운데
손을 내밀어 그 꽃을 붙잡고
촉감도 느껴가면서
그렇게 꽃을 치워 버린 것이다.
이 상황에서 2 는 결코
1 의 마음 안에 들어와
1 이 마음 안의 꽃을 그렇게 만지고
움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는가.
그래서 사실 1 이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인 4 라는 꽃을
그렇게 다른 장소로 옮기면
현실에서
2 도 역시 그 꽃을 그렇게 보지 못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내용을
지금 실험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가는
지금 여기서 1 이 대하는 내용이
실다운 자신도 아니고
그 자신이 대하는 대상도 아니라고
제시했기에
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라면
어떻게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인 손부분이
자신의 마음안의 내용인 꽃을
그렇게 붙잡을 수 있고
이동시키고
그리고 나면 또 왜 이후
그 꽃은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서만 있는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왜 다른 2 나 3 까지도 그렇게
이후 꽃을 보지 못하는가.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이런 내용이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에서 설명을 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하다고 보는 내용인데
앞과 같이 이들 내용이 모두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이라고 제시하고
여기에는 그런 외부대상도 없고
어떤 주체도 없다.
다 그 내용이 꿈과 같은 것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왜 그 꿈과 같은 내용이 매번 하필이면
이런 형태로 반복해 일어나게 되는가를
설명을 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손이 눈으로 보이는 꽃을 만지면
촉감을 얻는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왜 손을 꽃에 대면
하필이면 그런 촉감을 얻게 되는가?
또 손바닥을 부딪히거나
손으로 가지를 꺽으면
왜 엉뚱하게 그런 소리가 나는가?
이런 것도
마찬가지 문제다.
현실에서는 매번 반복하는 경험이므로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은 손을 꽃에 대면
금가루가 나온다거나,
경전 읽는 소리가 나는 것이 일반인 현실에서는
이상한 일이다.
왜 손을 갖다대면 금가루가 흘러나오지 않고
이상한 촉감이 엉뚱하게 느껴지고
또 경전 내용을 읽는 소리는 나지 않고
엉뚱하게 '뚝' 하는 소리가 나는가.
그리고 왜 여기선 손바닥을 부딪히면
허공에서 천녀들이 내려오지 않고
엉뚱하게 '딱딱' 하는 소리가 나는가.
누군가 이렇게 질문하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사실은 왜 그렇게 되는가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매번 그런 내용을 그런 관계로
얻게 되니 그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는 한편
그래서 자신이 1 을 자신으로 보고
4 를 그런 행위를 하는 대상이나
자신이 감각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뿐이다.
TV 를 볼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TV 에서 어떤 이가 손을 뻗어 나무가지를 꺽는 모습을 본다면
그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때 동시에
딱 하는 나무가지 꺽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매번 경험하다보면
모니터 화면이 그렇게 변하면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화면 내용과 다른 것을
그렇게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정이 정말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TV 화면의 비유는 비유고
현실에서 경험하는 이런 내용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기 위한 기초로서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을
이 부분에서 찾아서 들어갈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수행자는 복덕자량을 얻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 바라밀다도 중요한데
실상을 관하는 반야바라밀다도 대단히 중요하다.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도
이처럼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반야바라밀다 수행과
대단히 밀접하다고 보는데
이것을 잘 닦아 수행하지 못하면
그런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대하고도
이 '문'이라는 글자를 뒤집어 대하고
'곰'이라고 읽고
마치 현실에서 조련사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곰처럼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런데 자꾸 이 비유를 들게 되니
한 연구원이 자신의 상태를 그런 말로 비난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이런 비유 자체를 싫어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최근 다른 비유를 또 들었더니
그것은 더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찾아
들어가서 기본적으로 청정한 니르바나를 확보해내지 못하면
현실에서는 반대로 망상분별과 번뇌에 묶여
곰처럼 번뇌에 묶여 그 번뇌에 의한 사역을 당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을 놓고 지금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이런 바라밀다를 닦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고
해탈문을 거꾸로 대해 곰처럼 번뇌와 생사에 묶여 사역을 당하게 되는 상태에
대해 대단히 걱정하는 메세지를 들을 수 있다고 본다.
[...]
[...]
다시 앞의 실험을 이어서 살피기로 하자.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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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은 사실 간단하다.
1 이 눈을 떠 4 라는 꽃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2 가 4 라는 꽃을 집어서 보이지 않는 다른 장소로 치워 버리는 실험이다.
그런데 그런 2 가 사실은 1 과 마찬가지다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1 이 2 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 이 실험 목적이다.
1 은 그런 상황에서 2 를 대하면서
2 가 저 그림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추리하게 된다.
이미 수없이 반복했는데
이 그림은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이나
현실에서 전도몽상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추리하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설명을 하는 것이어서
엉터리 추리다.
그런데 1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이해하는데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저 그림처럼 놓고
2의 상태를 추리해보는 것이다.
2 가 눈을 떠 무엇을 본다고 하고
눈을 감으면 무엇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1이 옆에서 관찰하면 2 에서만 있는 현상이다.
즉 1 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
꽃이 나타나거나 사라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2 만 눈을 뜨고 감으면서 그런 변화가 있다고 보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은 2 의 몸 안에서 저런 5^ 와 같은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면서 2 가 그런 보고를 한다고 추리하고
저런 식으로 그려 넣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사나 과학자나 안경사가
추리하게 되는 내용도 이와 사정이 같다.
그런데 이 추리가 무엇이 엉터리인가.
그것을 이해하자면
1 이 직접 2 의 위치에 가서 그런 실험을 하고
자꾸 자신의 원래 위치와 오가면서
그 내용을 검토를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2 가 저런 식으로 2 의 마음안에 그 내용을 얻는다고 한다면
2는 2 ^와 같은 내용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4 ^와 같은 내용을 놓고
자신의 손이 만지는 대상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것이 엉터리 해석이고
이치에 맞는 이야기가 아님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그런데 그 2 의 상황이
바로 1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의 모습을 볼 때의
상황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1 이 자꾸 2 의 위치에 가서
그런 실험도 하고
다시 돌아와서 자신도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병행해야 한다고 처음에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1 이 눈을 떠서 보는 위 그림과 같은 내용이
사실은 2 의 5 ^와 같은 상태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1 이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보고
1 의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일단 엉터리인 것이다.
그 모두는 사실 자신의 마음에서 얻어진 마음 안 내용임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실 확인은 이런 실험으로 굳이
얻을 필요는 없다.
이미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이
자신의 마음 안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간단한 실험방법을 소개했는데
무인도에서 혼자만 있는 경우는
그런 실험으로도
위와 같은 내용이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얻어진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눌러본다거나, 가린다거나
또는 돗수가 심한 색안경을 하나 구해
썼다 벗었다 한다거나
하는 실험만 해도
자신이 외부 세계의 내용이라고 본 내용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제 3 자를 놓고
실험하면 더 이해가 쉽다고 제시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1이 2 를 놓고 저 그림처럼 추리하면
무엇이 엉터리인가부터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2가 얻는 내용을 놓고
1이 이를 살펴보면 더 이해가 쉽다.
2 가 1을 생각할 때
2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내용 1 ^을
1 이라고 여기고
1 이 눈을 떠 얻는 모든 내용은
그런 1 ^ 부분에 머문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1 이 다시 살펴보면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가.
한마디로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1 자신은
저 그림처럼
2 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위치를 번갈아 바꾸어가면서
이 사정을 헤아려 보면
자신이 저 그림처럼 2 를 보고
그 2 가 얻는 내용이나 그 마음이
그 2 부분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역시 터무니없는 엉터리 견해임을 스스로
기본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1 이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보는 것도 엉터리이지만
또 자신이 보게 되는 2 나 3 과 같은 모습을 놓고
그것이 곧 2 나 3 의 본 정체라고 여기거나,
더 나아가 이런 모습을 얻을 때
그것들이 하나같이 감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얻었기에
참된 상이라고 여기는 것도
똑같이 엉터리인 것이다.
자신의 감각으로 직접적으로 얻는 내용을
인명론 등에서 진리를 얻는 방안 가운데 '현량'이라고 표현하고
이렇게 얻는 내용 가운데 명백한 착각에 포함되지 않는 한
그렇게 현량으로 얻는 내용들은
진실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는데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같이 확인해 두는 것도 필요하다.
그보다는
금강경에서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구절을
잘 기억해서
자신이 보는 모든 모습은 실로 상이 아니라는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
공해탈문과 무상해탈문의
입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위 실험은
1 자신의 현 상태를 스스로
객관적으로 음미하는 데에는
조금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저그림처럼 상황을 그려 놓고
자꾸 1 이 위치를 바꿔 가면서
이 실험을 반복해보자고 제시한 것이다.
설명을 하다 보면
대단히 복잡한 실험을 지금 진행한다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보는데
바로 이 현장이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과
자신이 전도몽상 번뇌에 묶여 사역을 곰처럼 받아가면서
생사 고통에 묶여 살게 되는
생사고통문의 경계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잘 파악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생사 즉 열반이란 말이 불교계에서 널리 제시되는데
이는 해탈문에 들어가서 보면
생사 고통이라고 일반인이 보는 그 모든 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게 된다는 의미이지만,
문을 거꾸로 들어가면
그 반대가 되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인데도
매번 이런 고통 저런 고통을 다양하게 받아나가면서
쉼없이 돌고 돌아야 하는 생사 고통의 현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살펴서 이해해야 하는데
일단 기본적으로 망상 상태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을 놓고
전도망상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임하게 된 기본 사정을
지금 살핀 것이다.
그래서 이 실험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실험이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또 잠깐 쉬기로 한다.
계속 논의를 해나가야 하는 사정은
앞과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에서는
해탈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번뇌에 묶여 도는 생사고통문으로 들어가서
이후 전도몽상과 번뇌에 묶여
고통의 사역을
곰처럼 계속 당하며 돌고 도는 상태가 되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조금 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게되는 것이다.
[...]
현실에서 전도몽상 상태에서 자신이 집착하고
좋다고 보는 것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다 보면
결국 이런 상태가 된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간단히 말하면 업의 장애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은 그것으로 좋은 상태로 나아가려고 희망을 갖는 것인데
사실은 자신이 지옥에 들어갈 씨를 열심히
밭에 뿌리고
자신의 주변에 결국 언젠가 자신에게 터질
지뢰나 시한폭탄을 열심히 묻어 두고
또 반대로 자신이 줍기만 하면
곧바로 당첨을 확인할 수 있는 복권증서나 수표는
보이는대로 찢어 버리는 행위를
자신은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여 해탈문에 들어서서 수행에 임하는 것과
생사 고통문에 들어가 전도몽상 상태에서
집착을 갖고 좋음을 추구하는 내용의 차이라면 차이다.
결국 여기서 복잡한 이론적 설명을 행하지만,
그 내용을 통해
현실에서 취해야 할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전도몽상 상태에서
생사 고통의 현장에 집착을 갖고 임하는 이는
자신이 지혜를 발휘해서 이것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열심히 씨를 뿌리는 것이기도 한데
사실 그 상황은
장님이 소리만 듣고 좋은 소리를 마구 취하기 위해
다른 이를 해치면서 다른 이의 밭에 들어가 함부로
행위하는 것과 같다.
그 때 동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그를 잡으려고 그 주변에서 톱도 준비하고
끓는 솥도 준비하고 물도 담아 끓이고
그를 묶어 데리고 올 줄도 찾아서
그를 잡아올 만하고 그가 집착하는 것을
장치를 열심히 하는 중인데
그 장님은 자신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런 내용이 소리로 전혀 들리지 않기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데
현실에서 전도몽상과 집착에 바탕해
행위해나간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정과 그 사정이 같다는 것을
미루어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현실 세계라고 이해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부터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눈을 떠서 보면 이렇게 세상이 보이는데
귀로 대하면 그런 내용은 전혀 얻지 못하고
또 엉뚱한 소리를 듣게 되는가.
이런 것부터 하나하나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
글이 이미 긴데
전도몽상의 사정을 설명하고
또 이를 통해 그런 상태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사정이 그렇다고
사정을 이해하고
천천히 앞의 실험을 다시
이어서 살펴야 한다고 본다.
다시 앞의 실험을 이어서 살피기로 하자.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prince 님을 놓고
이 상황을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게 된다.
그렇다.
2는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그의 마음안에
5 ^ 처럼 받아들인다.
그것은 1 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저 그림에서 보듯
2 가 그 마음에서 얻는 내용은
사실은 그 마음 밖에
그런 내용에 상응한 내용을 놓고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4 나 4 ^나
서로 그 내용이
일치하거나
또는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어떤 내용이라고 보아야 하고
바로 사정이 그렇기에
그 내용을 놓고
눈은 그런 시각정보를 얻고
귀는 귀대로 그런 소리를 얻고
손은 그런 촉감을 얻고
또 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도 또 그렇게 같은 내용을 얻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 그림만 놓고 보면
그 주장이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 자체를 저렇게 그려 놓고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1 이 2 의 위치로 오고 가면서
저 그림을 저렇게 그렸다고 생각하면
더 그 사정이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2 가 그 마음에 얻는 내용들은
그 마음 밖에 있다고 보는 내용들과
비슷한 형태로 그려 놓고
이 관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내용이
1 자신이 손을 뻗어 꽃을 잡고 꺽어
다른 장소로 치울 때
귀는 그 순간에 소리를 듣고
손은 촉감을 느끼고
또 다른 이들도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상황을 설명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1 자신이 보는 그런 내용은
비록 자신의 마음 안 내용이지만,
그 마음 밖에는 그런 마음에서 얻는 내용과
상응하는 내용으로서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서 something special 한 것이
그렇게 있기에
그런 내용을 각 주체가 또 각 감관으로 얻는 것이므로
결국 마음안에서 파악한 각 감각내용의 관계를
그대로 실재의 영역에 밀어 넣으면
그 관계가 그렇게 파악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니
굳이 마음 안 내용을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이
그것이 곧 실재의 내용이고
실재에서의 관계라고 보고
해석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음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실재는 그에 상응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결국 마음안의 그런 내용들은
외부의 실재와 별 관계없이
그저 마음이 혼자 독립적으로 자체분열해서
그런 내용을 일으킨 것으로 보게 되고
또 그런 가운데
왜 매번 자신이 손을 내밀면 그런 꽃도 장소를 이동시킬 수 있고
또 그 순간 촉감도 느끼고
또 소리도 듣고 하게 되는가를 설명하기 곤란하고
또 한편
그 모두가 자신 마음안 내용일 뿐인데
왜 그 순간에
또 다른 이들도 같이
그런 내용을 경험하게 되는가를
설명하기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prince 님의 주장이
현실에서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입장도 많다.
불교내 논사 가운데에서도
이런 입장으로 해석을 취하려는 입장도 있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가볍게 취급하면 곤란하고
진지하게 잘 음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불교 논사라고 해서
현재의 prince 님과 상태가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출가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대하고 익히기 전까지는
세속에서 열심히 생업에 힘쓰기도 하고
세속 학문도 열심히 익힌 가운데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부처님법을 대하고 수행을 시작한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정리해 발표하는 것이
논서인 것이므로
오늘날 물리학자가 출가 수행해서
불교 경전을 대하면
자신의 기존 학문적 입장을 바탕으로 놓고
또 경전 구절을 대하고 해석을 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각 수행자마다
제 각각 다른 입장을 취하고 해석을 하는 것 자체는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하튼 앞의 논의에서
현실에서 눈을 떠 얻는 그 내용을 놓고
이것이 모두 마음 안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하더라도
다시 이 내용이 실재의 내용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놓고는
또 해석이 각기 나뉘게 되는 사정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론상 이런 여러 입장을 생각하면
이외에도 여러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처음 전도몽상 상태에서
자신이 눈을 떠 대하는 세상의 모습과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을 놓고
이 정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있다.
● 일반적으로
그 자체가 곧 자신이 눈을 떠 얻는 그 내용 그대로가
곧 외부의 실재이고 또 자신의 실재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는 자신의 눈이 대한 내용이 곧 자신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그리고 이와 상대적으로 파악되는 자신의 몸 부분이 곧 자신 자체라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에 대해
그렇게 눈을 떠 얻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 안 내용이어서
그 안에 자신의 눈이 대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마음이 얻어 놓은 결과 내용일 뿐이다.
이렇게 보는 입장이 크게 나뉜다.
그런데 뒤의 입장에서
다시 마음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때
이제 어떤 주체가 그런 감관을 관계시키지 않더라도
본래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놓고
실재의 내용을 찾게 되고
다시 그 실재의 내용은
자신이 눈을 떠 얻게 되는 현실 내용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놓고
다시 다양한 입장이 나뉠 수 있다
● 그 첫번째 입장으로는
자신의 마음 안 내용과 그대로 일치하는 내용이
바로 그런 실재의 내용으로 그대로 따로 있다고 보는 입장이 하나 있을 수 있다.
● 더 나아가
이런 실재의 내용을 그대로 놓고
눈을 떠 자신이 마음안에서 얻는 내용은
그런 실재의 내용을 거울처럼 그대로 투영시켜 비추어주는 것 뿐이라고 볼 입장도 있다.
여하튼 이들 입장은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그런 내용은
곧 자신의 감관이 관계하지 않더라도
실재영역에서 그렇게 그대로 일치한 형태로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처음 현실의 일반입장이
자신이 눈을 떠 얻는 그 내용 그대로가
곧 외부의 실재이고 또 자신의 실재라고 본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그렇게 얻는 현실이 곧 실재는 아니지만,
이런 내용을 얻는 실재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일반인의 입장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감으면 보던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눈을 감더라도 눈을 떠서 보던 꽃 모습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바로 이와 같다.
- 비판 -
그런데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하는 또 다른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우선 앞과 같은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실재를 놓고 감관이 관계해서 그 내용을 조금 다르게 얻는 것이 감각현실이므로
실재가 감각현실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재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고 주장하거나
투영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마음 내용임을 확인하는 실험내용이
그대로 다 문제점이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으로 볼 때
그 눈을 손으로 눌러 물체가 두개로 보이게 된다거나,
돗수가 다른 안경을 쓰고 벗을 때마다 달리 보이는 경우
이런 경우에도 그에 맞추어 외부 실재도 그처럼 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자신과 관련이 없이 실재한다는 실재내용이
하나같이 자신의 상태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 되어 문제가 된다.
또 자신과 유사한 다른 이를 옆에 놓고 관찰해도 그 사정을 살필 수 있다.
특히 다른 제 3 자 무엇을 보는 상황에서
가운데 안경역할을 하는 유리를 넣었다 뺏다 한다거나 해보아도
앞과 같은 주장이 갖게 되는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다른 제 3자가 보면서 보고하는 내용은
그 제 3 자의 외부 상황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보기 힘들다.
● 한편 마음에서 얻은 내용과 실재는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해야하지만,
그러나 그렇다해도 이 두 내용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서로 유사하거나 서로 비례관계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앞에서 관찰자 1이 다른 제 3 자가 무언가를 보는 것을 관찰하는 상황을 놓고
이 관계를 추리하면 이런 입장을 취하기 쉽다.
어떤 제 3 자의 머리 안에 그가 보게 되는 내용이 맺힌다고 추리하고
그 제 3 자의 외부이 내용과 그가 보는 내용이 서로 엇비슷하다고 보게 되면
이에 따라 세계의 내용으로 보는 내용과 그 제 3 자의 분량과 크기처럼
그 내용도 그 분량이나 크기ㅏ 서로 비례관계가 있다고 추리하게 된다.
그런데
만일 그처럼 비례해 크기를 추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학적으로 비례관계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제 3 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관찰자 1 자기 자신도 그런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산에 올라가 눈을 떠서 도시를 바라본다면
그 화면 밖에 실재하는 자신의 눈동자 크기는 얼마만하다고 보겠는가.
여하튼 그 모습이 엇비슷하리라고 추리하더라도, 그 크기와 비례관계는
자신이 본 세상 모습이 결국 하나의 머리 속의 대뇌 피질 정도에 들어간다고 보는 가운데
비례관계를 찾아서 본 실재의 눈동자의 크기 등을 추리하면
어마어마한 눈 동자가 밖에 자신이 본 세계의 크기에 비례해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고 추리해야 할 것이다.
- 비판
앞과 같은 주장들에 대해서는 우선 다음과 같은 비판을 생각할 수 있다.
일단 현실에서 얻는 각 감관을 통해 얻는 내용들을 놓고 그 상호관계를 파악해보면
앞의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우선 비례하거나 유사하다는 입장은
처음 실재가 감각한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입장이 갖는 문제도 함께 갖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마음 내용임을 확인하는 실험내용이 역시 그대로 다 문제점이 된다.
왜냐하면 실재도 역시 이에 비례하거나 유사하다고 하므로
눈을 손으로 눌러 사물이 두개로 보인다거나
안경을 쓰고 벗고 함에 따라 자신이 감각하는 내용이 변화한다면
역시 실재도 이에 비례하는 것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소리를 놓고 본다면
소리는 눈으로 보는 색과 어느 부분이 비슷하고 비례관계가 파악되는가.
소리만 그렇지 않고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얻는 이들 각 내용이 어느 것이나 내용 사이에서 비례관계가 확인되지 않고
때로는 유무 판단 자체가 엇갈리는데
왜 이들 각 내용이 실재 영역과의 관계에서는 유독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 가운데 어떤 하나의 내용을
그대로 실재에 밀어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나머지 감각은 역시 앞처럼 일치나 비례관계가 파악되지 않는다.
이 모두를 실재를 밀어 넣어도 역시 문제점이 있다.
--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
먼저 눈으로 보는 내용을 기준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눈으로 본 색상을 실재영역에 그대로 또는 비례관계가 있는 상태로 밀어 놓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눈으로 사물을 대하는 가운데
그 사물을 눈으로 '보는' 손부분을 갖다 대어 두드리며 귀로 소리를 듣거나
그 사물을 눈으로 '보는' 코로 냄새를 맡거나
그 사물을 눈으로 '보는' 혀로 맛을 보거나
그 사물을 눈으로 '보는' 손을 대어 촉감을 얻거나 하는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사과를 하나 책상에 놓고 위와 같은 실험을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눈으로 이 상황을 보면
자신이 '보는' 그 사물 모습에 눈으로 보는 '손' 부분이 접촉해 두드릴 때 소리를 듣고
그 부분에 눈으로 '보는' 코 부분이 가까이 접촉하거나
눈으로 '보는' 혀나 손이 그 사물에 접촉하는 것을 '보게 되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각기 다른 감각을 얻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내용을 놓고 보면
이들이 모두 눈으로 보게 되는 그 하나의 사물 모습을 대상으로 그런 감각을 얻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 문제들이 제기된다.
우선 눈으로 '보는' 사물 모습은 눈이 본 감각내용이어서
그 모습 자체는 앞에서처럼 눈과의 관계에서부터 실재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한편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그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촉각 정보안에서는 우선 촉각이 그 촉각을 얻게 한 실재대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 정보안의 내용들이 그런 촉각을 얻게 한 대상이나 감관도 아니다.
즉 자신이 눈으로 본 '사물'과 '손'모습이 서로 관계해서 촉각을 얻게 한 것으로 보기 곤란하다.
결국 시각정보 안의 내용들이 서로 관계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보를 얻게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그렇게 눈으로 본 모습과 일치하는 내용들이 모두
외부에 그대로 또는 그와 비례하는 형태로 있다고 가정하고
다시 앞 내용을 살피면 앞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입장에서는 눈으로 본 내용을 기준으로 하여
눈으로 본 사물모습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외부에 실재하고
다시 눈으로 본 손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외부에 실재하고
이들이 자신이 눈으로 본 내용처럼 서로 상대하여 관계하면
그 상황에서 그런 촉감을 얻는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 경우 결국 자신의 눈으로 보는 그런 모습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을
상대해 그런 촉감을 얻는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비록 눈으로 본 내용과 실재는 그처럼 일치하거나 비례한다지만,
왜 촉감은 그처럼 눈으로 본 내용과 일치하지도 않고 비례하지도 않는가.
나머지 감각의 경우도 다 사정이 같다.
이런 경우 처음 주장한 시각 정보와 실재는 일치나 비례관계가 있다고 해도
이들 내용과 나머지 사이에서는 그런 관계를 보기 힘들다.
그런데 오직 시각만 실재와 일치나 비례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아야 할 근거가 별도로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
이제 눈과는 다른 감각기관으로 얻는 내용을 기준으로
이 문제를 또 살펴보자.
즉 앞과는 달리 이제 다른 감각을 기준으로 놓고
실재에 그런 감각 내용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자신이 손으로 얻는 촉감이 실재영역에 그대로 또는 비례관계가 있다고 밀어 놓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도 앞과 같이 관계를 볼 수 있다.
자신이 손으로 촉감을 얻거나 하는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 상황에서 촉감을 기준으로 파악한 어떤 부분을 두드리면 소리를 듣고
그 부분을 촉감으로 파악하는 코 부분을 대어 냄새를 맡거나
그 부분을 촉감으로 파악하는 혀 부분을 대어 맛을 볼 수도 있다.
눈도 마찬가지다.
일반현실에서는 눈을 통해 얻는 시각정보에 비중을 많이 두게 되므로,
일단 눈을 감고 마치 장님이 된 것처럼 상황을 놓고
위와 같은 실험을 하여 각 촉감을 기준으로 그 관계를 살필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도 손을 통해 얻는 '촉감'을 놓고 보면
이들이 모두 손으로 닿는 하나의 부분을 대상으로 각기 그런 감각을 얻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도 앞과 비슷한 다음 문제들이 제기된다.
우선 손으로 닿는 하나의 부분의 촉감은 손을 통해 얻는 감각내용이어서
그런 촉감 자체는 앞에서처럼 손과의 관계에서 부터 실재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한편 이 내용은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청각 정보안에서는 우선 듣게 된 소리가 그런 소리를 얻게 한 실재대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감각 내용이 그런 청각을 얻게 한 대상이나 감관도 아니다.
즉 자신이 손을 대 얻는 각 '촉감'이 서로 관계해서 청각을 얻게 한 것으로 보기 곤란하다.
결국 촉각정보 안의 내용들이 서로 관계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보를 얻게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처음 손으로 얻는 촉각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들이 모두
외부에 그대로 또는 그와 비례하는 형태로 있다고 가정하고
다시 앞 내용을 살피면 앞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이 경우 손으로 얻는 촉감을 기준으로 하여
그와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외부에 실재하고
다시 손으로 얻는 귀나 코부분의 촉감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외부에 실재하고
이들이 자신이 촉감을 통해 파악하는 형태로 서로 상대하여 관계하면
그 상황에서 그런 청각이나 후각을 얻는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 경우 결국 자신이 얻는 촉감들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실재한다면,
이것들이 서로 상대해 그런 청각이나 후각 등을 얻는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비록 손으로 얻는 촉감과 실재는 그처럼 일치하거나 비례한다고 하지만,
다른 감각은 그런 촉감과 일치하지도 않고 비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역시 이 경우도 촉각만 실재와 일치나 비례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아야 할 근거가 별도로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일단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이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얻는 내용을
모두 실재영역에 그와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있다고 밀어 넣어보자.
이 경우는 현실에서 각 감각관에 일치하지 않고 비례하지도 않는 문제가
그대로 실재영역에서 나타나고,
앞에서 살핀 문제들이 중첩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이들 내용이 하나의 대상이라고 이해할 때
발생한다.
비유하여 만일 시각은 벽돌을 상대해 얻고
청각은 도로에서 얻고
후각은 정원에서 얻고
미각은 음식에서 얻고
촉각은 책상에서 얻는다면
이들이 서로 비례하거나 일치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과를 하나 책상에 놓고
그 사과를 눈으로 보고, 또 손을 대어 두드려 소리를 듣고, 코를 대 냄새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져 촉감을 얻는 경우는
이 가운데 어느 한 내용을 기준으로 살필 때
이는 하나의 부분에 대해 이처럼 각기 다른 내용을 얻는다고 보기에
앞에 제시한 것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감각한 내용들은 그 자체로
서로간에 어느 부분 하나도 일치하거나 비례한다고 보기 힘들기에
역시 같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즉 눈으로 보는 색은 소리 영역에서는 전혀 그 존재를 얻을 수 없고
따라서 비례관계도 세울 수 없다.
예를 들어 노란색과 흰색의 관계를 놓고 보면 이들이 제각각 달라 구분되는데
소리 영역에서 이와 일치한다거나 이에 비례하는 형태나 구분을 얻기 힘들다.
또한 아예 내용이 있고 없음도 각 영역마다 달리 판단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색 영역에서 무언가 있다는 경우에도 소리는 없다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이들 각기 다른 감각내용이
정신 밖의 어떤 특정한 하나의 내용을 대상으로 하여 얻는다고 해도 앞과 같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가 된다.
그것은 이들 각 감각내용간에 일치와 유사함 또는 그 비례관계자체를 생각할 수 없기에
만일 실재영역이 각 감각내용과 그대로 일치하거나 비례한다면
감각내용들이 서로간에 완연히 구분되듯
실재영역도 이처럼 완전히 별개로 구분되고
각 감각은 별개의 실재 대상을 상대해 이런 내용을 각기 얻는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반대로 앞에서 사과 하나를 놓고 다양한 감각을 얻는 경우처럼
어느 한 감각을 기준으로 해서 살필 때
다른 감각 역시 하나의 같은 대상을 놓고 감각하는 것으로 파악되기에
현실의 이런 내용과 실재가 그대로 일치하거나 비례한다고 보는 경우
이들 앞 뒤 내용이 서로 양립하기 곤란하게 된다.
또 한편 현실 감각내용은
한 주체내에서도 각 감관마다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눈에 안경을 쓴다거나 누른다거나, 귀를 손으로 덮거나 또는 손에 장갑을 낀다거나 하는 등으로
그 감관이 놓인 상태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고
더 나아가 각 생명체마다 각기 다른 감관마다 얻는 내용이 다르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입장에서는 역시 이 각 경우마다 실재 영역의 내용이
그에 일치하거나 비례한다고 해야 하므로
앞에서 기본적으로 살핀 문제가 점점 중첩되게 된다.
이들 각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도 않고 비례하지도 않고 유사하지도 않은데
실재는 이런 각 감각내용에 일치하거나 비례한다면,
결국 수많은 생명의 수많은 감각 내용에 대응한 실재가 별도로 그렇게 다 달리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결코 같은 하나의 대상을 함께 대하는 경우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각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현실에 맞지 않다.
예를 들어 사과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동물에게 건네거나 주고 받고 한다는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런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주장을 세우려면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외에
실재 영역의 내용을 직접 얻어서
감각내용과 그 실재 내용을 대조해서 일치나 비례 유사관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보지만,
실재영역에서 단 하나의 내용도 얻지 못하기에 문제가 있다.
● 다시 다른 입장도 또 이론상 생각할 수 있다.
실재가 무언가를 따진다면
그런 실재는 전혀 아무 내용도 없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무에 치우친 주장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실재에 대해서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 주체는 일정한 조건에서만 내용을 얻는데
실재는 그런 관계를 떠나서도 있다고 할 내용을 찾는 것이기에
그 실재를 어떤 주체는 도저히 얻어낼 도리가 없다.
그러니 곧 이런 사정으로
실재는 전혀 내용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내용이 마음안에 머무는 한편
그것과 관련이 되는 내용이 외부실재에는 전혀 없다고 하면
마음안 내용은 여하튼 마음안에서 자체 분열을 해서 얻는다거나
마음이 다른 마음을 상대해서 내용을 얻는다고 보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는
각 주체가 어떤 공통적인 내용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각 주체들의 정신들의 상태가 공통하기에 그런 것 뿐이다.
그렇게 보게 된다.
그래서 메뚜기떼들은 메뚜기들끼리 서로 같은 내용을 얻고
박쥐는 박쥐들끼리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무언가를 같이 경험한다는 것도
그런 사정일 뿐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 비판 -
한 주체가 감각한 내용이 마음내용임을 제시할 때
이런 입장을 취하기 쉬운데
그런데 여기에는 난점이 있다.
우선 실재를 '얻을 수 없다'고 하여
이를 통해 실재 영역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에 문제가 된다.
비유하면 장님의 입장에서 그 소리 영역을 기준으로 하면
눈이 정상인 이가 보는 노란 색이나 하얀 색은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얻을 수 없다고 해서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소리 영역을 기준으로 하면 그것이 소리 영역내의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고 따라서 무엇이다. 무엇이 있다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반대로 무엇이 아니다 무성이 없다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한편 이렇게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의 정신 안에만 머물고
그 외부에는 전혀 내용이 '없다'고 하게 되면
한 주체가 비록 현실에서 여러 사물과 함께 온갖 생명들을 보지만,
이런 생명도 역시 사정이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즉 그것은 모두 그것을 보는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고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보게 된다.
결국 이 입장에서는
오직 세계에 자신의 정신 하나만 있다고 보아야 하고
다른 주체의 존재를 인정하기 곤란하다.
이런 것을 독아론이라고도 하는데
현실 사정에 맞지않고 그 근거도 부족하다.
이것은 자신 마음이 마음 밖의 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아무 것도 '없다'로 단정하는 입장에서만 가능한 주장이다.
이런 경우 부처님이 성불했으면 세상에 하나 있는 마음이 성불한 것이므로
다른 중생을 제도할 필요도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처럼 세상에 부처님 자신의 마음외에는 없는데도
그러나 다른 존재를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는 것이 된다.
이 때 각 주체의 마음들은 모두 하나의 마음에 다 포함되고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게 된다는 식으로 주장할 수 있지만,
이 경우도 역시 앞과 같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 가운데 한 주체가 성불한다고 할 때
왜 다른 주체는 그렇지 않은가 등이 역시 문제된다.
그런데 만일 위 입장에서도
마음 밖에 별도의 다른 주체의 마음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면,
처음 일체가 마음안 내용이고 마음 밖에 없다고 한 주장에서
다른 주체의 마음만은 예외로 하는 것이 된다.
즉 한 주체의 마음 밖에 사물에 해당한 내용은 없지만,
그러나 다른 주체의 마음만은 예외적으로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세상에 수많은 생명이 있다면
세상은 이처럼 수많은 생명들의 마음으로만 구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 경우 다음 난점이 있게 된다.
이는 한 주체의 정신 밖에, 다른 생명의 정신은 있지만,
그러나 정신 아닌 것은 없다는 특이한 주장이 된다.
그런데 한 주체가 다른 생명들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현실에서 어떤 이가 다른 주체의 마음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서
그것을 확인해 그렇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나 다른 생명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이가 다른 생명의 몸과 그 활동을 보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정신은 오히려 이런 내용을 바탕해 추리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결국 바위나 물과는 달리
다른 생명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그런 주체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이 아닌 일반 무정물과 다른 생명은 그런 특성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한 주체는 현실에서 이들을 모두 감각을 통해
그 내용을 얻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달리 취급받아야 하는가가 명확하지 않게 된다.
이는 한 주체의 마음이 다른 생명들의 정신을 대해서
현실에서 그렇게 다른 생명의 몸을 보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생명이라고 해도
생명의 몸 부분은 일반 사물과 마찬가지로 외부에 전혀 없고
다만 그 생명의 정신만 있다는 주장이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
생명으로 볼 수 없는 바위나 모래 물은
왜 외부에 그런 마음도 없는데
그렇게 보게 되는가를 설명하기 곤란하다.
이런 경우 논리를 일관되게 하기 위해
세상에서 생명이 아닌 무정물 일체도
다 알고보면 마음을 갖는 존재라고 해야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아니면 생명은 마음 밖의 정신을 대상으로 얻고
사물은 자신의 마음안에서 자체 분열한 내용이거나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대상으로 얻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각 주체마다 서로 구별되는 마음이 각기 따로 있다면,
결국 처음에 마음 밖에는 일체 다른 내용은 없다고 전제한 내용이
마음에 한해서는 예외를 둔 것이 된다.
특히 이런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와 함께 그릇을 주고 받는다거나
공을 던지고 받는 행위를 할 때 이 현상을 설명하기가 대단히 곤란하다.
즉 현실에서 자신만 그런 그릇을 대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 영희나 철수도 역시 자신이 그릇으로 여긴 것에 상응한 내용을
대하는 것을 보고하는데
각 주체마다 마음은 따로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그릇이나 공에 해당하는 것은
각 주체의 마음이 도대체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서로 함께 얻는가를 설명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이 입장이 마음만 존재하고
마음은 마음 밖의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는 사정을 바탕으로
마음 밖으로는 전혀 아무것도 '없다'고 독단적으로 전제하기에
이런 난점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유식학파에서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얻는 내용 일체는
그것이 감각현실이던 관념분별이던
모두 마음 안의 내용일 뿐이고
거기에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한 대상은 없다고
유식무경이란 내용을 제시할 때
이 내용이 곧 네번째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한 주체가 얻는 현실 내용에는
그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 그 안에는 없다고 제시한 것이지,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라고 할 공한 실재가
전혀 아무 것도 내용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자세히 대상의 문제를 살피면
관념은 관념대로 관념을 일으키는 대상을 정할 수 있고
그 대상은 감각현실이나 다른 관념분별 내용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현실에서 flower 란 단어를 놓고 생각을 하면
그 flowwer 란 단어가 그 관념분별을 행하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런 대상까지 마음에서 얻는 내용에 전혀 없다고 제시한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눈을 떠서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런 내용을 놓고
일반적으로 그것이 곧 외부 세상으로서
그런 모습을 얻게 한 대상 그 자체이고
또 그 가운데 한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망상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이므로
우선 그 일체 내용이 다 정신 안의 내용이고
그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유식학의 기본 논서라고 할
유가사지론이나 성유식론에서도
그렇게 사정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실재가 공하다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잘못 생각하고
악취공견의 입장을 함부로 취해
지옥의 공 수행자가 되는 경우를 놓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을
논의할 때 앞과 같은 사정으로
감각현실을 얻게 한 외부 대상
관념분별을 행할 때의 내부 대상 이런 식으로
각 내용을 구분해가면서 설명을 행하고 있다 .
그래서 그런 입장이 아니지만,
여하튼 이론상은 앞과 같이
네번째 주장도 주장 가능하다고 볼 수는 있다.
일단 이렇게 주장 가능한 여러 주장을 놓고
자신이 눈을 떠 얻는 내용은
도대체 실재는 어떻기에
매번 현실에서 그런 경험을 반복하게 되는가를
잘 헤아릴 필요가 있다.
● 이제 또 다른 다음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실재가 무엇인가를 따진다면
그 실재는 어떤 주체가 얻지 못하는 것이기에
근거없이 위처럼 일치한다 유사하고 비례관계가 있다는 등으로
주장하면 곤란하고
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이런 식으로 어느 쪽으로
단정지어 제시하는 것은 곤란하고
그런 입장을 모두 떠나
그렇게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상태 그대로
실재의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하고 그쳐야 한다고
제시하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실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그 내용을 어떤 주체가 얻지 못하기에
그런 상태 그대로 실재를 파악하면 충분하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앞에서 각 감각이 하나의 대상을 얻는 내용이라고 본다면
서로가 마치 라면에서 벽돌을 얻어내는 관계처럼 엉뚱한 관계라고 보게 되는데
또 사정이 그렇기에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그와 일치하거나 비례하고 유사한 내용이라고 실재 영역에 밀어 넣지 못하는 한편,
그 내용을 어떤 주체가 직접 얻지 못하므로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 다르다. 등등의
판단을 모두 행할 수 없다고 제시하는 입장이다.
굳이 추리한다면, 자신이 벽돌을 현실에서 얻으면
실재는 라면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 ~와 같다거나, ~이다라고 단정하지 못한다.]
또는 그대로 벽돌과 일치하거나 유사하고 비례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 ~와 다르다거나, ~이 아니다라고 단정하지 못한다.]
여하튼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한편,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지금 문제삼는 실재 영역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일단 아니고
또 실재도 현실 내용은 아닌 것이다.
다만 현실 내용과 실재는 서로 떠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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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실험은 간단한데
그 상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놓고 생각하자면
얼마나 복잡해지는가.
그래서 자꾸 쉬면서 이 내용을 검토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나 또 이 논의가 취하고자 하는
결론이나
그 결론을 통해서 현실에서
취할 수행방안이 무엇인가가
본 논의의 핵심사항이므로
늘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이 논의 내용을 검토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내용만 알고
현실 수행을 행하지 않으면
곡식 창고만 살피고
정작 자신의 창고에
복덕과 지혜의 식량은 저장하지 않고
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점을 늘 주의하고
나중에 이론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면
그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켜
정말 지옥에서도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얻어
머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무생법인이란
현실에서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수행자 스스로 인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내용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뭐 그렇게 힘들다고
그렇게 장구한 세월 수행을 해야 얻는다고
제시하는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이론이 무엇을 현실에서 제시하는가 하면
자신이 고문대에 묶여
손과 팔을 하나하나 잘라가는 상황에서
그런 것을 그 현장에서 얻을 수 없다고
이론처럼 잘 관하고
그 이론대로 평안히 임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이론만 이해한다고
그렇게 되겠는가.
그런데 금강경에서 그렇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고 임해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안인을 성취했다고
내용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부분이 수행자가 넘어야 할 안인 수행의 고지이고
그것을 넘으면 말 그대로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올라서
무량한 방편을 닦아 나가는 무량행문의 수행에
진입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또 반대로 말하면
그런 상태에 수행자가 도달하지 못하면
선배 수행자들이 광선검 하나조차도
그 수행자에게는
전해 줄 수도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그 수행자가 조금만 고통을 겪게 되면
곧바로 수행이전 상태로 물러나서
그 방편지혜들을 곧바로 이전 상태처럼
사용해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선검을 갖고 있다면 광선검으로 그렇게 행하고
온갖 방편을 주면 그 방편으로
그렇게 행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그 수행자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까지
더 증폭된 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원래 수행을 시작하기전의
전도몽상 상태에서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가던 상황 그 자체이고
그 수행자가 취득한 방편지혜의 수준만큼
오히려 더 그 고통과 해악이 더 증폭된 상태가 되는 것뿐이다.
현실에서 미움과 분노를 갖는 어떤 이가
별로 현실에서 방편 지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눈에 보이는 돌을 하나 주어 상대에게 던졌다면
이제 점차 다른 방편지혜를 갖추게 된 이후엔느
이제 그런 경우
점차 돌도끼나 돌창으로 형태가 바뀌다가
나중에는 쇠화살 쇠창 이런 것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폭탄 대포 이런 것으로
내용이 바뀌는 것 뿐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를 놓고
문명이 발달했다고 보는 것이기도 한데
그러나 각 주체의 기본 상태가 달라지지 않은 이상
그런 방편적 지혜의 내용으로서 문명이나 기술의 발달은
그로 인해 각 주체가 겪는 폐해나 고통이 더 범위가 넓어지고
증폭된 것 뿐이고
그 근본문제가 그로 인해 해결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더 이상 과거의 전도몽상 집착 상태로 물러나지 않게 되는
불퇴전위에 오르고 못 오르고는
수행자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계점이 되는 것이다.
[...]
>>>
핸드폰이란 중요한 것이다.
이런 결론을 얻게 되고
전철 철로에 혹시 떨어지면
전철에 부딪히지 않게 최선을 다해
빨리 주어야 하고
그러려면 평소 근육을 잘 단련해 놓아야 한다고 본다.
주식투자도 해보면 아는데
처음에 투자액의 90 % 가 떨어지면
다음에 다시 곧 원상회복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몇십년을 기다려도 회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100 원에서 90 %가 떨어졌다고 하면
10 원이 된 경우를 말하는데
10 원이 원래 상태대로 100 원이 되려면
몇 %가 앞으로 올라야 하는가 하면
1000 %가 올라야 하는 것이다.
감정에 어긋나는
이상한 계산인 것 같은데
이상하기는 해도
여하튼 현실적으로 원상회복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전철에서 뛰어 내릴 때도 비슷한 상황이 된다고 본다
아래로 내려 갈 때는 쉬운데
그 상태에서 곧바로 올라오기가 조금 힘든 것이라고 본다.
순식간에 내려가고 올라가고 했으면
사고가 안 났을텐데
잘 안 되어서 그런 사고를 당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 과거에 CAN 상태가 된 주식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한 때 상당히 올라서 그래도
다시 원상회복을 할 것인가 하고 기대를 가졌는데
그 동안 살펴보지 않았더니
다시 죽 떨어져 있다.
그 당시도 앞으로 한 3 배만 더 올르면 원상회복이 될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투자 현장에서의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보유한 주식도 내일 어떻게 될 지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인데
이것을 판다고 해도
또 어떤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 옮겨 본다고 해서
반드시 잘 하는 일이라고 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마냥 그대로 두자니 또 손해가 심해지는 측면도 있고
도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그런다고 이것을 자세히 알자면
아예 경영 최전선에 나서서 경영을 해야 할 지
모른다고 보는 것이다.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원칙을 제시했는데
현실에서도 정치 문제를 놓고 시시비비를 다투는 이들이 많은데
그 심정이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럴 줄 알았다거나 그럴 줄 몰랐다거나
그런 식으로 문제를 삼는데
한 마디로 다른 이에게 중요한 일들을 다 맡기고
자신은 리모콘만 누르고 편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만이면 직접 자신이 해야 하는데
자신이 직접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닌 것이다.
권투 경기를 보거나
축구 경기를 보거나
tV 에서 보면 왜 저 선수 저 순간에 저렇게 힘을 못 쓰는가
이렇게 말하면서 구경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보는 입장이 답답한데
막상 자신이 그 경기장에서 그 정도 뛰면
들 것에 실려가야 할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각 선수는 그 순간 전력을 다해서 그렇게 임하는 것이고
상대 선수도 그렇게 임하는데
그것은 그 선수가 평소 그렇게 열심히 훈련을 해서
겨우 그 정도로 뛰는 것임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냥 구경만 하면서 온갖 불만을 갖는 입장에서는
권투 시합이라면 한 3 분만 뛰면
다리가 휘청거리고 곧 상대선수에게 ko 당한다고
보아야 하고
축구도 한 5 분 뛰고 다리에 쥐가 나서
실려 나가거나 코치에 의해서 질책을 받고
강제 퇴장당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관중은 관중대로
자신의 코치에 일일히 부응해주지 못하는 선수를 놓고
열이 받히게 되는 법이다.
아니 왜 그 순간에 헛발질인가.
매일 축구만 하면서...
다른 종목도 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
매일 눈 뜨고 보고
몸을 움직이면서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가.
이것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냥 보이면 보이는 것이고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이고
그러다가 어느날 잘 안 된다 하면
잘 안 되는 것이다.
>>>
핸드폰이 전철 철로에 떨어져
그것을 주으려 내려갔다가
전철에 받혀 사망한 여고생의 사례를 놓고 보면
그 여고생이 그날 그 장소에서 그 핸드폰을 파손당한다고해서
그렇게 큰 문제가 된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또 한편 그렇게 주으려 내려가서
핸드폰은 잘 주어 그 이후 잘 사용하게 되었는가.
결과를 보면
정작 핸드폰은 사용하지도 못하게 되고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 자신도 그렇고
그 가족들이 겪는 슬픔이나 고통이
얼마나 큰가.
이런 것을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례와 같이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도
그로 인해 생사 고통을 겪게 하는 사정이
이와 아주 동일하다고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이라고 보는 것은
이런 핸드폰과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그것은 대단히 실다운 것이고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현실에서 마땅히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 것이라는 것이
prince 님의 입장인 것이다 .
그렇게 보게 되는 다양한 근거를
이미 이전 조각글들에서 자세히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간략하게 제시하다보니
몇몇 내용은 빠진 것 같은데
doctr 님이 또 하나를 추가한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는
인과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고
그리고 과거의 자신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
세세하게 모르지만,
기억상실증이 아닌 경우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이 겪은 경험에 대해
대강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이어주는 요소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몸을 움직이겠다고 하면
일정한 부분이 움직여서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듯
시간을 놓고 보면
그처럼 과거의 일정한 내용과 현재의 일정한 내용이
그처럼 묶여 이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고
장차 이를 것이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망에 이르면
그 연결이 끝난다고 본다는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은 결국 두번째 내용과 함께 포함시켜
엉터리 견해라고 볼 수 있다고 본다.
이미 격자이론을 통해
정지된 한 단면이던
시간의 연속선에서 살피던
어떤 것을 놓고 일반적으로 a 라고 생각할 때
사실은 거기에서 어떤 a 라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했는데
그 내용이 이 모두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본인이나 불교의 입장은
이렇게 해서 일정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을 일으키고
그에 집착을 갖고 이에 바탕해 행위를 해나가는 그 일체가
전도된 망상분별이고
바로 그런 망상분별에 의해
매 생에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바로 생사 고통을 받는 출입구와
생사 고통을 벗어나는 해탈문의 경계점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이 문제를 살펴 나가면
점점 논의가 복잡해지게 된다.
이전 조각글에서는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이
사실은 소리나 냄새 맛 촉감을 얻는 내용과
그 성격이 같아서
이 모두가 자신의 정신안에 들어온 손님과 같은 내용이어서
이 내용을 놓고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분별을 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 아닌데
그러나 그렇게 자꾸 생각할 도리 밖에는 없다고
보게 만드는 현실 사정이 또 있음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우선 이에 대해
현실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안에는
객관대상과 주관의 주체가 들어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래도 그 각 내용이 서로 상호관계를
갖는 것으로 현실에서 파악되는 것은
무언가 그에 상응한 내용이
실재에 그렇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짙게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의 내용과 현실에서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을
놓고 이들 관계를 살피려다가
이것이 과거에 반복해 논의한 내용이기에
너무 지쳐서
중지하고 일단 논의를 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 논의를 한다면 다시
이 부분부터 이어서 논의를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과거에 제시된 논의를 또 반복하기 보다는
여기서 일단 prince 님의 입장을 취해서
이 문제를 이렇게 다시 살펴보자.
이제 그렇게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내용을
그 내용이 그대로 실재에도 있는 것이어서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것에 집착을 갖고 대해서
정말 자신이나 자신의 것을 잘 얻고 유지하고
그리고 그로부터 좋음을 많이 얻는가.
그리고 그런 자세로 인해
누구나 살면서 병목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생사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가.
이것을 문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는 상태에서는
그렇게 실다운 자신으로 보는 내용이
결국 언젠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병에 걸려 허물어지게 되면
대단히 고통을 받게 되고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 죽게 되면
자신은 그렇게 해서 사라져 버린다고 보기에
평소에도 대단히 두려움을 갖고
이를 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렇게 실답다고 보는 자신이나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의 신체나 재산 가족 명예 지위...등등
자신이 평소 대단히 집착을 갖는 것들을 놓고
그것이 허물어지거나 사라지는 사태에 대해
앞의 사례에 든 것처럼
마치 핸드폰 하나가 부서지거나 생기거나 하는 문제처럼
결코 평안하게 이 문제를 대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또 바로 그런 자세때문에
사실 핸드폰이 문제가 되면
핸드폰 역시도 대단히 그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마음 상태에서는
이후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신이 존재하는 기간 동안
그런 내용들을 꼭 자신의 뜻대로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단히 집착을 갖고 임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로 인해 생사의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런 뜻을 집착해 갈구하는데
그 뜻이 성취되기 까지는
그런 갈증으로 평안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것이 막상 성취되면
또 그 좋음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그 상태가 파생시키는 온갖 문제를 놓고
또 다시 번뇌를 일으키고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또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될까봐
두려움을 갖고 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귀세계에서 아귀가 받는
고통의 구조로서
현실에 임하는 과정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또 그런 가운데
자신이 갈구하는 뜻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내용을 함부로
침해하게 되고
또 그 상대도 상태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그런 자신을 해치고 보복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또 자신이 반대의 상태가 되면
그런 고통을 평안히 참지도 못하고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깊이 일으킨 다음
분노를 일으켜 상대를 해치려는 노력을 해나가게 마련이다.
이런 결과가 또 지옥세계에서
각 생명이 장구한 고통을 받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처음에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 실답다고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면
현실에서 그것을 뜻대로 잘 성취하고
좋음을 얻게 되었는가를 물었을 때
그렇게 실답게 여겨지는 것을
실답다고 여기므로
정말 자신이 현실에서 그것을 잘 성취해나갈 것처럼
여기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좋음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생사의 기간 안에 닫혀지고
다른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징검다리로서
약간의 좋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결과 대부분 생명 이하
그래서 돈이하의 가치를 갖는 것을 놓고
그렇게 평생 매달리고 살아가는 상태임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을
실다운 자신이라고 본다면
자신이 죽음 이후의 내용을
또 달리 또 다른 자신이라고 볼 근거가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란성 쌍동이가
아주 똑같지만, 서로가 다른 쌍동이를 자신이라고
여기지는 않듯
현재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실다운 자신이라고 여기면
그로 인해서
사실은 수행자가 수행에 임해
확보하는 상락아정의 자신은
허구적인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잘 살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가장 기본적인 수행자의 본전으로서
생사고통과 생멸을 얻을 수 없고 청정한 니르바나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 이후 무량한 기간 무량한 수행을 통해서
무량한 복덕과 무량한 지혜를 성취하는 수행은
한마디로 가능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회계나 가치의 비교가
많이 문제되는데
집착을 갖고 임하는 상태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그 모든 것을 합해도
수행자가 본전으로 취득하는 가치를
초월할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생명과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실답다고 보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
모두 그런 바탕에서 찾아낸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이 가능하지 못한 것이다.
각 경전에서는 각 수행을 통해 얻는
가치를 다양한 형태로 비교해서
제시하는데
기본적인 수행덕목으로 보시나 정계 안인 등을 통해서
얻는 복덕이 무량하다고 제시해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는
경전의 한 게송을 읽고 지녀서
그것을 위타인설 한다면
그 가치는 앞의 가치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제시한다.
이것이 결국 가치저울로 문제되는 각 가치를
서로 비교해서
평가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10 억 세계에 가득 금은 다이아몬드 등을 다 채워서
보시를 한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
이렇게 처음 높은 가치의 상태를 제시한 다음
경전의 게송을 하나 외우는 것은
이보다 훨씬 그 공덕이 뛰어나다고 제시하는데
왜 그런가를 헤아려 보자.
그것은 사정이 바로 위와 같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취한다해도
그것은 결국
제한된 생사기간내에서 일정한 생존의 유지와 계속을
성취해주는 것이거나
아니면 무언가 즐거운 맛을 주는 것 뿐이다.
이것이 끝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생명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고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가치저울에 이것을 놓고 숫자로 그 가치의 크기를
비교하려고 하면
가치를 비교하는 가장 기본적 가치추라고 할 생명만 놓고
평가하려고 해도
도저히 숫자로 일일히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그 차이가 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현실에서 소대변이 마려울 때
그것을 한 3 일 참으면
수천조원을 주겠다고 누가 제의하면
이것을 받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가치저울의 문제는 결국 이런 문제와 같다.
그래서 현실에서 집착을 갖는 것은
대부분 이런 가치의 차이를 갖는 것들로서
비교하면 우주와 티끌을 놓고
비교하는 것과 같은데
문제는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문제점이다.
그래서 핸드폰이 떨어지면 핸드폰이 떨어진 방향으로
접착되어 끌려가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이 접착된 것이
자신을 그렇게 각 세계로 묶어 끌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받게 되는 것이
바로 무한한 생사의 고통인 것이고
희생되는 것은
대신 무량한 기간
기본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청정한 니르바나와 함께
또 무량한 기간 얻을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이 되는 것이다.
왜 경전 게송이 가치 비교 평가에서
그렇게 높은 가치를 갖는다고 제시되는가를
헤아려보면
현실에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출입구와
생사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의 사이에서
해탈문을 열고 들어가
본전으로 청정한 니르바나를 얻고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무한한 기간 동안
청정한 니르바나에 상응해 여여하게 머물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그 게송의 힘이기 때문이라고 보게 된다.
경전 각 구절이 다 그런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보지만,
게송은 다시 그 내용을 압축해서
짧게 줄인 것인데
그 게송을 한 구절이라도 외운 이는
지옥에 들어가서라도
그 게송을 의존해서
그 지옥 안에서도 그런 해탈문을 잧아내서
그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반해
그렇지 못한 이는
정말 그렇지 못하고
그대로 생사 고통에 묶여 그것을
하나하나 다 받을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돈이 많은 이라도
고문대에서 거꾸로 매달고
한 10 분 고통을 겪게 한 다음
재산을 포기하면 고통을 그만 멈추겠다고 하면
다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고통이 없는 상태로 그저 평안함을 누리는 상태가 갖는 가치는
현실에서 왠만한 것들을 모두 쌓아 모은 상태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저울과 가치회계 계산법부터
잘 익히지 못하면
공연히 엉뚱한 것을 붙잡고
삶을 허비하게 마련이다.
이제 조금 더 복잡한 논의를 전개해야 하는데
글을 타이핑하는 입장도 힘들지만,
평소에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내용이
하나같이 대단히 실답게 여겨지는데
그것이 전도몽상 편집증상에 의한 증상이라고
왜 제시하게 되는가를 설명하자면
상당히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조금씩 시간을 들여가면서
천천히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처음 자신이 눈을 떠 대하는 세상 모습과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는 온갖 관념분별 내용이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온 손님과 같은 내용이고
사실 그 주인은 그런 내용을 매 순간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사실부터
잘 확인한 다음
이것이 왜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를
천천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반대로 그 본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도대체 무엇이고
이 실재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무슨 관계인가
이런 것을 살펴보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왜 자신은 a 가 현실에 있고
그것이 생겨나고 멸하는 모습을 보고
그래서 생멸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망상증상이라고 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현실에서 찾아내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중관론과 같은 논서에서는
이미 앞에서 실재와 현실의 관계를 살필 때
주장된 약간 근거가 없고
엉터리라고 보게 되는 다양한 주장들을 놓고
그것을 논파하는 논의인데
불교를 오래 연구한 전문가도
사실 그 논서를 쫒아가면서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보게 된다.
학자마다 구구한 해석을 하면서
시시비비의 논의가 많은데
복잡하게 보면 그래서 이 문제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라고 보지만,
간단히 보면 대단히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 쉬면서
천천히 살펴나가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쉬기 전에 일단
무량한 가치를 기본적으로 하나 확보를 하면서
쉬는 것이 훨씬 낫다고 보게 된다.
금강경에서 나오는 게송 하나를
앞에 설명한 것처럼 하나 외우고
쉬는 것이다.
범소유상개시허망
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
온갖 상(相)은
모두가 허망하니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이 말은 현재 자신과 자신의 것을
a, b, c , d
이런 식으로 자신의 회계 장부에 나열해 놓고
집착을 갖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성취하는가 이런 것을 놓고
번뇌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 일체를 놓고
다 그것이 엉터리 전도몽상인 것이어서
그런 것들은 다 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이 게송을 일단 잘 외우면
기본적으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의
열쇠를 자신이 어느 세계에 가도
자신 안에 장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열쇠가 장착되면
이제 생사에 묶여서
자신에게 장차 폭발할 지뢰나 시한폭탄을
엉뚱하게 껴안고
그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준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여기서 마련이 되게 되고
말 그대로 생사를 초월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렇게 게송을 대할 때
적절한 게송 하나를 붙잡고
외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조문도석사가의라고 한 공자나
게송 한 부분을 얻어 듣기 위해
몸을 희생시켜 절벽에서 뛰어 내린 설산동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그 가치가 대단히 중요한 사정이 있음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논서의 내용이 복잡하지만,
그것은 저 게송으로 해결이 안 되는
악성 증상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 prince 님 같은 경우를 놓고
소송에서 가정적 항변을 통해
그것을 논파시키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고
경전 게송으로 해결이 되면
굳이 그런 논의에 매달리지 않고
곧바로 무량한 수행단계로
넘어가면 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수행자의 자산 창고를
그런 수행을 통해
실질적으로 채우는 것이 중요하지
공연히 논의만 일삼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보게 된다.
[...]
그런데 여하튼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들어서려면
일단 현실에서 다음 문제를 살펴보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부처님 당시
한 왕이 부처님을 찾아가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것을 질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에 왕에게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아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릴 때 강 모습을 보았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지금 다 늙은 상태에서는 또 어떤가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입장은
대부분 이 왕과 상황이 비슷하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고
또 그렇게 죽게 되면
자신이 애착을 갖고 집착한 그런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것들이
이제 다 의미가 없게 되고
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
대단히 큰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경우 집착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잠깐의 살아 있는 순간에 대해서도
기존에 집착을 갖고 대하던 것들을 놓고
더 강하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증상은 더 악화되고
그 예후 결과도 더 나빠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문제를 잘 살펴서
평소에 해탈문에 들어가서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의 부처님이 왕에게 한 질문은
지금 자신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의 논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눈을 뜨면 세상의 모습이 보이고
그 안에 자신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고
그 내용안에 또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보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손님 티끌[객진]을 놓고
그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고
이에 묶여 생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 문제를 잘 살펴서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과거 조각글에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모두 a + b => C 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할 때
바로 이 관계식을 통해서
그렇게 현실에서 얻는 내용 일체가 그런 사정으로 곧 실재가 아니고
그리고 현실 일체는 무상하고 고통이고
또 여기에 해당하는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어서 무아 무자성이고
그리고 그 본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그런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는 한편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고 분별을 행할 수 없어 공하다고 표현하게 되고
또 그런 가운데 현실 일체는 열반적정이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실재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의 관계를
파악해도 간단하다고 보고
또 한편 엉터리 견해를 고집할 때는
그 견해를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받아들인 다음
격자 이론과 같은 방식으로
그 엉터리 견해를 받아들이면
그로 인해 다시 어떤 엉터리 내용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제시하여
그것을 버리게 하는 방식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실재가 공함에 대해 논의하는 논서에서 취하는 방식은
주로 뒷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상대가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실답게 실재한다고 고집하므로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그런 상태가 어떤 문제점을 갖게 되는가를
거꾸로 보여주어서
스스로 그 주장을 폐기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그런 방식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처럼 엉터리로 주장하는
견해가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논의 방식은 상당히 번잡하고
상대가 어떤 체계로 어떤 주장을 하는가를 먼저
살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바탕에서 그런 문제점을 지적해주어야 하므로
복잡한 논의가 이어지게 되는 사정이 있다.
격자논의도 사정이 같다.
누군가 무엇을 놓고 A 라고 보고
또 다른 한편 또 다른 무엇을 그런 A 가 아닌 것으로 본다면
그 양쪽을 한 번 씩 취해서
처음에 A 라고 본 부분을 포함해 전체부분이
다 A 가 아닌 것이 되는 사정을 제시해주고
또 반대로
A 가 아닌 부분도 또 그처럼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어서
스스로 그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렇게 각 부분을 놓고
'A 이다' 또는 'A 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망상을 일으켜 갖는 증세를
스스로 치유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쉽게 이 방안을 사용할 수도 있다.
현재 눈을 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그 한 부분 한 부분을 나누어서
그것이 자신인가 이렇게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검게 칠한다고 한다면
자신이 감각한 현실 모든 부분이
다 검게 칠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정지된 단면 하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시간상 연속해서 이어진다고 여기는 각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논의하면
그것은 A 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A 가 아니거나
둘 중의 어느 하나여야 한다고 고집하는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궤변을
상대가 주장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또 살펴보면
그 망상증상이 쉽게 해소가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다른 부분과 다르고
그 부분에 바늘이 꼽히면 고통스럽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고
또 손을 뻗치면
나무를 잡아 끌어당길 수 있고
그런 가운데 촉감도 느끼고
또 부러뜨리면 그 순간에 소리도 듣게 되는데
어떻게 이것을 실다운 자신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하고
계속 그 망상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감각한 현실 부분을
묶고 나누어
일정 부분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한 다음
그런 부분에 머물고 집착하는 자세가
바로 상을 취하고 머물고 집착을 갖는
증상인 것이다.
이 증상이
그런 증상을 일으켜 갖게 된 그 주체의 정신 일체를
고통의 생사과정으로 묶어 끌고 가게 되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즉,
핸드폰에 대한 집착이
한 여고생을 철로 아래로 끌고 간 것처럼
어떤 이가
이렇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머물면
바로 그런 상태가
그런 망상을 일으킨 이를
장구하게 생사 고통을 겪는 세계로
묶어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문제점을 잘 보고
이 증상을 해결한 다음
다시 현실에 들어가 수행에 임해야
이 문제가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다 원만하게 잘 성취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도망상과 집착에 바탕해서 좋음을 추구하는 경우와
해탈문에 들어가 청정한 니르바나를 얻고
그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하는 경우의
차이를
이전 조각글에서 가치저울로 비교를 했는데
그런 내용이 미륵보살님의
유가사지론에서도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을 놓고
가치를 비교할 때는
늘 이런 가치 평가 기준을
잘 확보하고
그리고
가치가 적은 것을 투여해서
그것을 훨씬 가치가 높고 무량한 가치를 갖는 형태의 것이 되도록
매 순간 노력하고 임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현실대로 투자를 잘 하는 것이고
무량한 기간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고
수행을 통해 수행목표를 성취하는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유가사지론에서는 대강 다음과 같이
그 차이를 구분하고 있다.
.....
또 성스럽지 않은 재보에서 나게 되는 즐거움은
온갖 자리에 있지 아니하나니
욕계에서만 그것을 얻는 것 뿐이고
성스러운 재보에서 나게되는 즐거움은
온갖 자리에 있게 되나니
삼계[3界繫]에 묶여 있는 상태와 그렇지 않는 상태 모두에
공통하기 때문이다.
또, 성스럽지 않은 재보에서 나게 되는 즐거움은
뒤 세상의 성스러움과 성스럽지 않은 재보를 끌어낼 수 없고
성스러운 재보에서 나게 되는 즐거움은
뒤 세상의 성스러움과 성스럽지 않은 재보를 끌어낼 수 있으며
또 성스럽지 않은 재보에서 나게 되는 즐거움은
만약 수용할 적이면 끝이 있고 다함이 있거니와
성스러운 재보에서 나게 되는 즐거움은
만약 수용할 적이면 더욱 더 차고 왕성하여 늘고 자라고 넓고 크다.
또, 성스럽지 않은 재보에서 얻게 되는 즐거움은
남에게 겁탈을 당하나니
왕과 도둑·원수· 물 및 불 따위에게요,
성스러운 재보에서 나게 되는 즐거움은
빼앗길 수가 없으며,
또 성스럽지 않은 재보에서 얻게 되는 즐거움은
이 세상으로부터 뒤의 세상까지 갈 수가 없거니와
성스러운 재보에서 나게 되는 즐거움은
이 세상으로부터 뒤의 세상까지 갈 수가 있다.
....
그러니 이런 것을 서로 놓고
가치저울 양쪽에 올려 놓고
가치를 비교하면
어떻게 그 가치의 비율을 숫자로 표기해낼 도리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것은 생사 안에서만
그 차이를 보아도 그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집착하고 추구하는 입장이 갖는
축생과 아귀 지옥세계 중생의 특성을
앞에 나열했는데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들어서서 그것을 제거하면
그런 증상 자체가 현실에서부터 제거되는 것이다.
그 가치는 한 순간 한 순간
가치저울에 올려 놓고 재면
역시 또 숫자로 그 비율을 표기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고문대에서 거꾸로 철봉에 매달려 있을 때
그런 고통이 없는 상태가 갖는 가치는
도대체 얼마만한 화폐액으로 표시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 숫자로 적어 보려고 한다면
그것도 숫자로 적기가 힘이 들것이다.
적당히 적으면 그 돈을 주고 고통을 가하기 시작하면
또 다시 올려 적어야 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대변을 참는 것 하나만 놓고 실험해도
숫자로 아무리 많이 화폐액을 적어도
그것과 균형을 이루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런 것 하나가 갖는 가치도 대단한 것인데
그런데 현실에서 살아가는 매 순간이
그렇게 높은 가치로 반대로 채워지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을 굳이 일일히 옆에서 숫자로 표기해주지 않아도
수행자는 그런 상태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 부분을 잘 살펴서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의 열쇠를
잘 확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에 공 무상 해탈문에 들어서면
이후 현실에서
A 를 놓고 그것이
어떻게 생하는가 멸하는가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논의를
더 진행할 필요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처럼
증상이 상당히 심해서
그 내용들이 마음에 들어온 손님이고 티끌임을 이해해도
여전히 그 증상이 가라앉지 않으므로
조금 더 복잡한 논의를 계속 진행해서
증세를 완화시키려고 노력할 필요는
또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이 손을 대서 나무를 만지거나 부러뜨리면
촉감이 느껴지고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눈을 뜨고 감는 것은
자신이 촉감으로 확인하는데
그렇게 눈을 뜨면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는
그것이 마음 안에 들어온 손님과 같은 내용임을 잘 이해한 다음
그 관계를
a + b => C 로 일단 추상적으로 표기해 놓고
이 관계식이 이 C 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잘 음미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것은 그런 조건에서 그 C 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그런 망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 꿈과 같이 실답지 않다.
=> 그것들 일체는 그런 조건에서 나타난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번 사라지면
이후 무한히 없게 되는 것이 아닌 사정도
위 식이 또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원하지도 않고
단멸함도 아니라는 것을
위 식이 다 이미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제행무상 ]
그런 가운데
그 C 가 좋거나 나쁘거나
그 양 경우에
그것이 이처럼 나타나고 사라지고
있고 없음에 따라
매번 좋음과 나쁨을 번갈아 줄 수 밖에 없다.
그런 사정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전문용어로
괴고 고고 행고라고 표현하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렇게 얻는 그 일체의 현실의 것은
그렇게 다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 사정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일체개고]
더 나아가 만일 세계에 C 와 관련해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위와 같은 관계식 하나도
내세울 도리가 없다는 것도
또 함께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곧 무아 무자성을 나타내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제법무아]
참고로 여기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가 있으면
왜 그렇게 단 하나의 그런 관계식도 허용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는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관련 전문적 논의를 또 따로 참조해야 하지만,
미리 사정이 그와 같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C 와 같은 것이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나 고통과 같은 내용이라면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1 차적으로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게 된다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열반적정 ]
그리고
위 식이
그 C 는
그런 조건을 떠나서도 실재하는 실재 내용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님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음을
또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위 식이 현실에서 얻은 C는
바로 그런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내용이 아니고
그렇게 얻게 된 C 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늘 모든 내용을
그런 상태에서만 얻는 것이니,
그런 관계를 떠난 실재 자체는
끝내 얻지 못한다(불가득 필경리)라는
사실도 위 식이 이미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체개공]
그래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기본 진리는
위와 같은 현실 내용을 바탕으로
모두 다 밝힐 수 있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 식이
그 C 가 그런 사정으로
꿈과 같은 성격을 갖고
실답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게 얻어진다는 것도 함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측면을 잘 취해서
음미를 해야 하는 것이다.
꿈을 놓고
꿈에서 어떤 좋은 내용을 얻었다거나
또는 반대로 그 좋은 내용을 잃었다거나
극심하게 심한 나쁜 내용을 얻었다고 해서
이를 두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이는 드물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 꿈 내용을 꿈에서 얻지 못해서 그런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 내용을 꿈 꿀때 생생하게 얻지만,
그것이 실답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꿈을 깨고 얻는 다른 영역에서
그 내용을 찾을 도리도 없고
그것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고
그 조건이 사라지면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답지 못한 성격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나
꿈이 위처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 내용을 생생하게 얻지만,
그것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반응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을 놓고
그것이 침해받고 사라지려고 할 때
큰 일이라고 보는 것은
여전히 망상과 집착을 갖고
그것을 대하기에 그런 것이다.
사실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현실을 대하면
그 상태로
세세생생 같은 증상을
반복해 받고
더 악화된 상태가 된다는
기본 사정이 더 문제이고
사실은 이 부분을 더 걱정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못하지만,
그것을 얻는 순간은 대단히 생생한 것이라는 점이
비슷하지만,
현실이 꿈과 '같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렇다고
현실이 완전히 꿈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꿈보다는 그 반복도가 많고
그 망상이 반복되는 기간도
한 100 년 정도로
상당히 긴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자신으로 보고
또 다른 생명이나 남을 남으로 보게 되는 것은
그 각각의 근본정신이 처음 근본무명에 바탕해
생을 출발할 때 그런 생명형태에 얽혀 활동을 시작하고
그런 가운데 분화시킨 제 7 말나식부터
그렇게 자신에 대한 망상 집착을 갖고 임해서
그렇다고 이전 조각글에 제시했는데
참고로 이처럼 제 7 식이 갖게 되는 내용을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각 생명이 현실에서 임하여
삶을 시작하고
그런 각 정신과 감관들을 그렇게 분화생성시켜 놓은 관계로
그런 상태에서는 또 매 순간
그렇게 자신이 움직이고
또 그렇게 움직이는 또 다른 생명들의 모습들을
그렇게 매번 그런 감각현실의 내용으로 얻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본 조건이 해체되지 않는한
실답지 않은 현실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실답지 않은데
그 내용이 그 상태에서는 그렇게 반복이 되니
그로 인해서 그것이 마치 실다운 것처럼
그 상태에서 서로간에 망상을 지속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주체는 한 생에서 그런 것처럼
다음 생도 또 그렇게 시작되면
또 그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그 기본성격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점은
꿈과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을 잘 관하고
생사 고통을 그런 형태로 반복해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동안 계속 반복해
그 내용을 얻는다고 하지만,
하나하나 따지면 다 엉터리인 것이다.
그리고 눈을 떠서 보는 순간은
자신의 생각에 계속 같은 망상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여겨도
그러나 자신이 또 눈을 감는 순간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둘을 잘 놓고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순간에
각기 그렇게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그와 관계없이
또 일정하게 주인으로서 그러한 각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
정작 무엇인가도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하튼 prince 님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망상을 계속 상속받아서
나름대로 몇만년 역사소설이나 과학소설을
자신이 인간세계에나 자연에 대해 다 쓸 수 있다고 여긴다지만,
그런데 문제는 증감도 없고 생멸도 없는
본 바탕에서는 그런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구성하는 한 단면 한 단면
하나하나가 다 엉터리라는 것이
본 논의가 지적하는 기본 내용인 것이다.
한 정지 단면을 놓고
어떤 과학자나 어떤 이가
A 라고 제시하는 것마다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위에서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의 제상비상의 내용도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위 관계식을 통해서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된다고 할 수 있는 무량한 현실 기간을
다시 놓고 따지면
그런 내용 역시
찰나에 가까운 빈약한 내용이고
대부분 적당히 잠깐 살피고 억측을 행하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 측면에서 다 함께
현실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
실답지 않다고 해야 할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실답지 않은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고
그 안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잃고 얻는 것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 만큼 손해가 되고
고통을 받고
자신이 결과적으로 우습게 된다는 사정을
자신 스스로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현실에서 전도망상에 바탕해 일으킨
소원이나 희망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임하면
결국 현실에서 아무 쓸모없는
폐인으로 간주되기가 쉽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당시 수행자도
가끔 농사짓는 이에게 멸시를 당하기도 하고
구걸을 요청해도 거절당하기도 하는 등
여러 수모를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세속에서 학교도 다 마치고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가족도 부양하고 그런 식으로
할 일을 거의 다 마치고
이제 죽음이 가까워지고 삶을 정리할 무렵
비로소 수행을 시작하는 입장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정을 미리 간파하고
일찍 수행을 시작하는 경우는
현실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세속적으로 바라는 내용들은
대부분 생략하고 건너뛰는 관계로
한마디로 세속에서는 준 폐인처럼 별 쓸모가 없는 존재로
취급당할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위 노래에서는 그것을
반대로 보아야 할 사정이 깊이 있음을
또 시감상을 통해서 감상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원무작 삼매 해탈문의 의미인 것인데
그렇게 되면 큰 일 아닌가 하는 것이
전도몽상 상태의 걱정이고
수행자는 바로 그런 상태를 기본으로 놓고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에 들어간 다음
생사를 벗어나서
청정한 니르바나를 본전으로 확보하고
그 상태에서
이후 다시 생사 현실에 들어와
이후 무량한 기간
실천하고 성취해나갈 서원을 일으켜 세우고
무소득을 방편으로 하여 이후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외관은 다 엇비슷해보이는데
외관만 비슷할 뿐
그 실질 의미가 다 다른 것이다.
매 생마다 치매 증상을 반복해 일으키며
앞 뒤가 끊겨 매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임하지 않아 업의 장애가 해소되지 않아서
그렇게 분단생사과정을 겪으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 기본 상태부터 잘 해결해야 한다고
위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과 관련해
간단히 내용을 정리하기로 한다.
앞에서 a + b => C 의 관계로 제시해서
그것이 일체가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하다는
진리를 제시하는 내용임을 보았는데
또 그것은 곧 현실에서 수행을 하면
위와 같이 무아 무자성 공한 바탕에서
그런 수행목표를 그런 수행으로 성취하게 된다는
사정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바로 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
제시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얻을 것이 없기에 그렇게
반야바라밀다를 닦고 수행을 하면
바로 그런 까닭에
그 모든 것을 성취한다.
그래서 머리카락하나로
우주를 이동시킬 수도 있게 되고
기타 등등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래서 그렇게 그 내용이
심한 구라라고 여기게 되지만,
그러나 사정을 올바로 잘 이해하면
그래서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이고
수행에 정진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위에서는 a + b => C 의 관계를 통해서
그 내용을 그렇게 살폈는데
여기서는 조금 다르게 또 살펴볼 수도 있다고 본다.
단지 자신이 현실에서 눈을 떠
자신의 마음에 그런 내용을 얻고
또 그 다음 이후 눈을 감으면
그 내용이 사라진다는 단순한 내용을 놓고
굳이 위와 같은 관계식을 만들지 않아도
앞의 내용은 모두 도출해 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처음 A 를 감각현실에 있다고 할 때
그것부터가 옳지 않고
생멸이나 오고감 이런 내용도 사정이 그렇고
그래서 그 A 의 생멸이나 오고감을 문제삼을 수도 없고
더 나아가 그 A 가 왜 그렇게 생멸하고 오고가는가를 따질 수도 없고
그래서 그 A 가 어떤 관계로 그렇게 나타나는가에 관해
a + b => C 의 관계식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기도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 제상비상의 내용이기도 한데
앞에서는 그렇게 prince 님이 그런 내용을 주장하고
그래서 실답다고 주장하니
바로 그 관계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제시하는 12 연기는
현실에서 왜 그런 내용들의 생사나 생멸이 나타나고
고통을 겪는 현상이 왜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바로 그런 전도몽상 근본 어리석음 때문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근본 무명을 제거하면
처음 그런 상태로 태어나지도 않고
또 그런 전도몽상 증상을 겪으면서
그런 엉뚱한 주장 자체도 하지 않게 되고
그대로 생멸이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인과문제는
일단 위와 같은 여러 전제를 바탕으로
주장되는 것인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그처럼 마음에 얻어지고
사라진다는 내용을 놓고도
무상 고 무아무자성 공 열반적정과 같은
기본적인 진리의 내용은 다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의 본 정체를 문제삼을 때
본바탕이 되는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내용을
놓고
이들 각 관계를 잘 헤아려 살피는 것이
또 필요하다.
이것도 기존에 많이 반복했는데
여기에 꿈을 하나 더 추가시켜 놓고
현실~ 꿈의 관계를 잘 음미해보는 방식을 놓고
실험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침대에 누워서 산에 들어가 금광에서 금을 잔뜩 깨내고
나중에 그것을 도적을 만나 얻어 맞고 뺏기는 꿈을 꾸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꿈의 내용을 놓고 현실과 대비시켜가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서를 작성해서 그 관계를 음미해보는 것이다.
그 꿈을 침대에서 자면서 꾸었는데
1 그 침대가 그 금광인가.
1 그런데 그 침대를 떠나서 그런 금광의 꿈을 꾸었던 것인가.
그리고 침대에서 꿈에서 꾼 금광이나 금을 찾으면 찾을 수 있다고보는가.
이제 이렇게 실험을 하고 나서
현실의 침대와 꿈속의 금광은 무슨 관계라고 보아야 하는가를
잘 음미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감각현실을 놓고 일정 부분을 나라고 보고 어떤 부분은 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위 형식으로 똑같이 물어보아야 한다.
1 그런 감각현실과 그 부분 그 자체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인가.
1 그러나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런 관념분별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또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한 그 분별 내용을
그대로 찾을 수 있는가를 또 음미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격자이론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고
그냥 찾아보고 얻을 수 없으면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관계가 그와 같다고 알면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런 감각현실을 얻는 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실재를 추리해 놓고
또 실재와 감각현실도 그렇게 한 번 살펴보고
또 그런 문제는 늘 관념분별에서 만들어낸 A 나 자신 자신의 것과
같은 관념내용들을 놓고 문제삼으므로
실재와 그런 관념분별의 내용도 위 형식으로
또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 관계를 음미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 각각의 영역에서 얻는 내용을 못 얻거나
그 내용이 생생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각 내용을 생생하게 얻는 것은
꿈꿀 때 꿈이 생생한 것과 그 성격이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을 각 영역에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가가 이 문제의 초점인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은 생생하게 진짜처럼 여겨질 정도로
현실에서 얻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하나같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달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신기루 같은 것이서
진짜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실다운 것이 아니라고
잘 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착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 그 내용들도
또 그 내용대로 그 각 영역에서
그런 측면에서 좋고 좋게 얻어나갈 수 있도록
수행을 현실에서 잘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그러니 아무렇게 해도 된다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이 논의의 결론이 아닌 것이다.
무량한 기간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해서
성불하기 위해
무량한 수행을 해나가는 기본을 확보하는 것이
이 논의의 취지인 것이다.
따라서 논의를 마치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더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주공, 무상 무분별원
(住空 無相 無分別願)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데
존재가 문제되는
실재~ 감각현실~ 관념분별 영역
각 측면에서
수행자가 취할 기본 자세가
이렇게 제시된다고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감각현실을 얻고
거기에 무언가 실다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 있다고
여기기에
조련사에 묶인 곰처럼
번뇌에 묶여 생사고통을 겪고 사역을 받아나가게 되는데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반대로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해
무량한 기간 유희자재 신통력을 바탕으로
무량한 수행을 닦고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각 내용을 놓고
매번 질문을 잘 하면서
그 관계를 검토하고
그 각 내용을 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제 그 일체가 다시
그런 사정으로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의 실질을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청정한 니르바나가
거꾸로 생사 고통에 묶이는 현실로 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이
한편으로는 일체가 고통이다라는 내용이 제시되는 사정인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체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되는
사정인 것이다.
일체가 고통인 생사현실에서는
생멸도 있고 오고감도 있다고 망상을 갖고 대하는 것이지만,
해탈문에 들어서면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위와 같은 관계를 놓고
그 사정을 이해하고
그 바탕에서 수행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 안 내용도 똑같은 관계로
그 내용을 음미할 필요도 있다.
눈을 떠 마음 안에 일정한 내용을 얻으면
그 내용을 놓고 마음과 대비시켜
앞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또 그 관계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마음 그 자체인가.
즉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들이 마음에 들어 있지만,
그래서 그것이 마음과 같은 작용을 하고
이런 내용을 얻어 담아 놓는 마음 자체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또 마음을 떠나서 얻는 것인가.
그런 가운데
자신이 마음으로 얻어 본 그런 손님과 같고 티끌 먼지와 같은 내용은
마음과 무슨 관계인가.
또 그 마음에서 그런 내용을 찾으면 찾아지는가.
이런 여러 문제를 잘 검토해서
그런 손님 티끌[객진] 안에서 자신이라고 본 내용이 있다면
또 그 내용을 놓고 마음과의 관계를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런 가운데
무량한 기간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기본 토대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수행자 자신의 정체가 아니라면
이제 그런 티끌 손님과 관계없이
매 생마다 수행자가 생사를 받아가면서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과 성불을 위해
수행한다고 할 때
그런 수행을 행해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무아 무자성 공한 것이지만,
사정이 이와 같은 바탕에서
그런한 근본 정신을 바탕으로
무량한 기간 수행자가 수행에 임하고
또 성취하고
또 법신을 증득해 성불하여 그런 상태에 머물게 되므로
그 사정을 놓고
비록 세상에서는
수행자가 여기서 태어나 저기서 죽어간다고
망상 속에서 분별을 행하더라도
그와 관계없이
수행자는
살아 있다고 남들이 다 생각할 때부터
자신의 생은 이미 다 마쳤다고 해탈지견을 얻고
이후 상락아정의 상태에 무량하게 머문다고
시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사정도 함께 헤아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내용마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등과 같이
말을 가지고 분별을 행하면
그 시적 표현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도리가
처음부터 없게 되는데
그런 경우는 다시 처음부터
실재~ 감각현실 ~ 관념분별 ~ 그리고 꿈의 내용을 놓고
현실에서 자신이 문제삼는 것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것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잘 헤아려 보는 작업을
다시 해보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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