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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나의 정체에 대하여 본문
sfxx--나의-정체에-대하여.txt.htx
sfxx--나의-정체에-대하여.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745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게송을 외우는데 찰이라는 한자어가 많이 등장한다.
不可言說諸佛剎, 皆悉碎末為微塵,
一塵中剎不可說, 如一一切皆如是。
불가언설제불찰, 개실쇄말위미진,
일진중찰불가설, 여일일체개여시。
말할 수 없는 온갖 부처 세계를
모두 다 부수어서 티끌 만들어
한 티끌에 있는 세계 말할 수 없어
하나처럼 온갖 티끌 다 그러하니
이런 게송에서 찰剎 이란 글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삼천대천세계를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한 세계가 1000개면 소천세계
소천세계가 1000개면 중천세계
중천세계가 1000 개면 대천세계
이렇게 말하고
3계 6 도 즉 무색계 색계 욕계의 하늘과
욕계의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계가 갖추어진 것을
하나의 세계라고 칭한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는 몇 개의 세계인가.
이런 퀴즈가 제출될 수 있고
삼천대천세계에는 몇개의 지옥계가 있는가.
이런 것도 퀴즈로 제출될만 한다.
대천세계는 십억개의 세계를 말하므로
삼천 대천 세계는 3 조개의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데
대천세계앞에 붙어 있는 삼천은
소천 중천 대천의 3 개의 천세계가 중첩되어 있다는
의미로 붙였다고 이해하므로
10 억 세계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왜 이 삼천대천세계가 중요한가하는 것은
1 부처님의 교화가 미치는 영역이 이와 같고
그래서 앞과 같은 게송에서 불찰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곧 이런 삼천대천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1 부처님의 세계나 영역이 이와 같다는 의미다.
오늘날 천문학적인 지식의 입장에서는
우리은하 이정도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여하튼 이 정도가 한 부처님의 국토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상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열반에 드셨는데
이 부처님이 언제 이렇게 광할한 영역을
국토로 삼아 사바세계로 칭하신 것인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일단 게송에서 찰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이 다시 티끌의 부분으로 나뉠 때
그 티끌 안에도 또 그런 삼천대천세계가 들어 있고
그것이 찰나찰날 그런 비례관계로 미분해 들어가도
한없이 그런 세계가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한 번만 그런 비율로 미분해 들어가도 어지러운데
찰나 찰나마다 그 비율로 미분해간다고 하면
얼마나 어지러운가.
그리고 그런 미세 공간에 다시 그런 큰 우주와 같은
세계가 다시 들어가고 나온다는 내용도 제시되는데
오늘날 널리 알려진 가수 빅뱅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여하튼
경전의 게송은 믿기 힘들지만,
과학계에서 말하는 빅뱅이론은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이는데
여기서는 그런 빅뱅이 일념마다 계속 되었다고 가정해도
처음의 그 출발점을 찾기 힘든 상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빅뱅이론을 주장하게 된 근거는
우주 관측에 의해서라고 한다.
현재 우주가 팽창해가는 중인데
그것을 기초로 비례해 추리하다보면
결국 빅뱅이 우주 작은 공간에서 그렇게 시작되어서
우주가 팽창중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빛의 속도가 대단히 빠른데
빛의 속도가 이런 팽창해 가는 속도보다 빠르다면
오늘날 이 지구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외에도 먼 우주에서의 폭발 내용들도
다 볼 수 있을텐데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에
보지 못한다는 설이 있다.
현재 자신이 이 지구상에 정지되어 있다고
평안하게 여기지만,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우주공간 속을
이동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보지 않아도
태앙이 우주 공간을 움직이는 속도
그리고 지구가 이 태양 주변을 다시 공전하는 속도
그리고 지구자체의 자전속도
이런 것을 다 합쳐 생각하다보면
이것만으로도 시속 100 만 KM로 우주공간을
여하튼 움직이는 중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 엄청난 속도로 이동중인데도
전혀 멀미가 나지 않는 것은
이런 속도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 부처님의 국토가 왜 그렇게 넓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보는 자신의 정체가
어떤가부터 천천히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이미 앞 조각글에서 격자이론을 살폈는데
여기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격자이론에서 그림 하나를 붙여 이 내용을 살펴보자.
현실에서 눈을 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 모르는가.
대부분 그것을 잘 안다고 여긴다.
그래서 a 와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눈을 떠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왜 자신이라고 여기는가 하면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여가야겠다고 하고
움직이면 그렇게 그 부분이 움직인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예를 들어 책상이나 의자 책장
이런 것은 그대로 있는데
앞과 같은 부분만 자신의 뜻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7#3302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이는 시루떡 올려 놓은 것 같은데
현실에서 존재를 문제삼는 영역의 내용을
위와 같이 그려 놓은 것이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실다운 자신으로 보게 되는 요소(상락아정항목)
이 그림은 1 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대강 그린 것이다.
1 은 자신의 눈이나 이마 그리고 뒷머리를 보지 못한 가운데
다른 사람 2 가 보는 내용이 5 ^ 와 같은 형태로 2 안에 맺히리라고
나름 그럴듯하게 그러나 엉터리로 저처럼 추리하고
저렇게 자신이 보는 자신과 세계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는 상황을
그려 본 것이다.
현실에서 1 이 눈을 떠 세계를 대할 때
대강 저처럼 세계와 자신을 파악할 때
여기서 1 이 가장 집착을 갖고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역시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1 부분이다.
그리고 그외 자신이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들은 대부분
이런 1 자신과 관련된 것들이다.
즉 1 자신의 생명, 신체, 목숨, 재산, 가족, 지위, 명예....
이런 식으로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것들을 계속 나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앞과 같이 파악한 1 자신과 관련된
그 어떤 것들이다.
그래서 그림에서 1로 표시한 부분이
과연 자기자신인가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현실에서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이런 것 가운데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추면
그 이후 그는 한마리의 지렁이처럼
그 세계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그에 접착되어 빨려 들어가
그가 계속 희희낙락 즐겁고 좋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전도몽상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그를 말릴 이유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나 남이나 그런 상태에서
그 이후 지극한 고통을 받게 되므로
이것을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이 대하는 현실에서
무엇을 자신의 본 정체로 파악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1이 눈을 떠서 위와 같은 상황을 대했을 때
왜 처음 1 에 해당하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자.
처음 이런 전도몽상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는
조금 엉뚱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자가 얻는
상-락-아-정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다고 본인은 해석하게 된다.
이미 아래글에서
격자분석법을 제시했는데
그 격자분석에서도 설명했지만,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으로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 A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라고 하겠지만,
바로 그처럼 엉뚱한 전도몽상을 일으켜 갖고
그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갖고
이에 바탕해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행위해나가기에
그가 고통의 세계로 묶여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번 생에 그것을 시정하고
자신의 본 정체인 상락아정의
청정한 니르바나 상태를 얻어야 하는데
이번 생에 그것이 실패하면
확률상 앞으로 무량 아승기겁을 걸치더라도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전 조각글에서 그 사정을 자세히 보았지만,
다시 격자이론에서 사용한 그림 하나를 붙여 이 내용을 살펴보자.
08pfl--image/grid_03.jpg
눈을 떠서 얻는 감각현실의 전체에서
A 와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이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집착하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
기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찾아
헤메 돌아다니게 되는데
이것이 삼천대천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리의 지렁이가 되어
계속 살아가겠다는 입장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렁이가 흙속에서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다닐 때
그 지렁이의 입장도
이 입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지렁이가 많이 활동함으로써
그 땅이 기름지고
아욱씨를 뿌리면 아욱이 잘 자라나게 된다고는 보지만,
그 지렁이의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아주 작고 미미하고 가치가 없는 것에
어느 순간 그렇게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집착을 일으켜서 반응하고 생활해 가면서
잠시 잠시 얻는 좋음에 만족하게 되면
바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A 와 같은 부분을 놓고
그것이 A( 나 또는 나의 것) 이런 식으로
관념분별을 행하고 그에 집착할 때
그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빨리 이해하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 그림은 그렇게 A 부분을 놓고
무엇이라고 생각할 때
다른 부분들을 하나하나 제시하면서
그것이 과연 A 인가를 물어서
A가 아닌 것을 모두 검게 칠해 나갈 때
위 전체부분이 다 검게 칠해지게 되는 사정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저런 A 와 같은 부분은 사실은
자신의 본 정체가 아니라는 것을
빨리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이
그러면 수행자는 어떻게 걷고
무엇으로 물건을 잡고
무엇을 어떻게 해서 수행하는가.
결국 저런 A 와 같은 부분을
수행자 자신이라고 보면서
수행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그래서 prince 님의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고
앞으로 prince 님의 활동으로
삼천대천 세계 어느 부분이
상당히 기름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prince 님 개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안타깝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도몽상 증세가 일으키는 폐해는
그 안에 그가 그로 인해 얻는 좋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엉뚱한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극히 심한 고통의 세계에
묶여서 무량하게 헤메 돌아다니게 된다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전에는 이런 상황을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의
'문' 이라는 글자를
전도몽상상태에서 뒤집어 보아
스스로 곰이 되어 활동해 나가거나
또는 곰을 훈련해 수입을 얻으려는 조련사나
곰이 재주피우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얻으려는 관중들로
하나같이 한심한 상태임을 설명했는데
이제는 아무래도 그 정도의 비유로는
치유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지렁이로 비유해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스스로 이해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취지는 마찬가지다.
현재 부품을 구하는 과정에서
현미경 카메라도 하나 구해볼까 생각 중인데
800 배 1200 배 이런식으로
물체를 확대해 사진을 찍어 제시하면
이런 논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이다.
만일 어떤 이가 무언가에 집착해서
그것을 죽 붙잡고 추구해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바로 이처럼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도움을 받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왜 처음
자신이 그런 집착을 일으키게 되었는가를
잘 스스로 분별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001,
다시 그림을 붙여보자.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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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눈을 떠서 세상을 보면
우선 1 과 같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 부분이라고
여기게 되는 부분이 보이게 된다.
자신이 눈을 떠 이 전체 모습을 마음에 얻게 된 것인데
그 가운데 왜 유독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보게 된 것인가.
이것부터 잘 생각해보자.
그렇게 전도몽상 편집증을 일으키게 된데에는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1 자신이 그럴 때
2 나 3 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들이 한 군락을 이루고
서로 그런 전도몽상 분별 바탕에서 생활해가면서
이들이 서로 얽혀 묶어나가기에
한 주체가 이 상태가 벗어나오기가 상당히 힘든 것이다.
전체적으로 삼천대천세계에서 한 생명의 군락이 형성되는
사정이 이와 같은 것이다.
1이 자신이라고 보는 1 부분에서
손이라고 보는 부분을 내 뻗으면
꽃도 잡고
사람과 악수도 하고
발은 걸어다닐 수 있고
기타 모든 활동을 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좋다고 보는 것도 얻고
잘 살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상하다고 하는가.
[...]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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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선 앞과 같은 상태에 동조해서
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고
전도몽상 증상을 일으키게 되는가
그 사정을 살펴보자.
그 사정으로 우선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나열할 수 있다.
우선 어떤 이가 현실을 살아갈 때
늘 1과 같은 모습을 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1 부분은 그림처럼 한 구석에 늘 파악이 되는데 반해
나머지 부분은 그렇지 않다. 수시로 상황따라 바뀐다.
그러니 1 부분은 방 주인이고
나머지 부분은 방에 잠시 왔다가는 손님이나 티끌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고
그래서 1 부분이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1과 같은 부분을 대하면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사정은
감각할 때마다 그 부분이 늘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이런 망상증상이 상락아정의 '상'과 관련된다고
본인이 엉뚱하게 시감상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사정이 있다.
저 상태에서 자신이 뜻을 일으켜
어떤 희망을 갖고 움직인다던지
무엇을 붙잡고자 한다던지 하면
바로 저 부분이 그렇게 따라 움직여주어서
뜻을 이루게 하고
소원 성취하고 그래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쉽게 말해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고 싶다고 뜻을 일으키고
움직이고자 할 때
1 과 같은 부분만 따라 움직이고
나머지 부분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1 이고
나머지는 그렇게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차이가 있다고 보게 된다.
=> 그래서 이런 전도몽상 증상이 일어나게 된
또 하나의 사정을 상락아정의 '낙(즐거움)'에 강제로 배당해보았다.
또 하나 사정이 있다고 본다.
앞과 같이 행동을 한다고 할 때
1 과 같은 부분이 주체가 되고
나머지는 대상이 된다고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저 그림과 같은 상황에서 1 자신이
손을 내밀어 무엇을 잡아 촉감을 얻게 된다면,
그렇게 잡힌 꽃이나 꽃병 물건 등은
자신이 손을 내밀어 붙잡은 대상이고
자신의 손은 그런 동작을 한 주체의 부분이며
그 손은 그런 감각을 얻게 된 주관에 해당한다고 보게 된다.
이런 구조는 다른 감각을 얻는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한다.
시각과 관련해서는
눈은 주관의 감관이고 눈이 본 저 모습들은 대상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감관이 모두 1 에 구비되어 있고
그래서 1 은 자신이고
나머지는 그런 1 이 대하는 외부 대상들이다.
이런 전도몽상 증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또 이런 전도몽상 증상의 요소를
상락아정의 '아'에 배당해보았다.
물론 이런 배당은 본인이 이런 증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억에 편하게 하기 위한 시감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럴 듯하다고 보게 된다.
또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또 하나 사정이 있다.
수행자가 얻는 청정한 니르바나와
상락아정의 상태에서
상락아정이란 구절을 놓고 배당시키다 보니
억지로 찾아내게 되는 느낌이 있는데
위와 같은 상태에서
1 자신은 자신이라고 보는 1 부분을 놓고
지극히 애착을 갖고 좋다고 여기면서
머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mun 님이 자주 활용하는
암파리 화두가 필요하다고도 본다.
사람이 파리를 볼 때는
그 형태가 대단히 흉칙하다고 보게 된다.
지렁이나 문어나 바퀴벌레나 여타 생명들이
다 그렇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을 대할 때는 어떤가하면, .
그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 나열한 파리나
지렁이나 문어 바퀴벌레 등
여타 생명에게 다시 위 질문을 던져본다고 하자.
상황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파리도 자신의 앞발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이다.
또 수파리는 문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암파리를 좋아하는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수파리가 황** 양을 좋아하지 않고
암파리도 소** 군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1 이 1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길 때
그런 부분을 다른 부분과 달리
상당히 깨끗하고 좋은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게 되는 현상이
각 생명마다 공통적으로 파악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것을 상락아정의 정에 배당해 보고
이런 요소로
각 생명이 갖는 전도몽상증상 증세의 내용을 살폈는데
이것이 결국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강한 집착을 갖고
평생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계속 해가면서
살아가는 주요 동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미 기존 조각글에서
왜 위와 같은 분별들이 하나같이
엉터리이고
전도몽상 증세인가를 낱낱이 설명해왔다고 보는데
그러나 현실에서 눈을 뜨고 세상을 대하면서
생활하게 되면
도저히 저런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 아니라고
거부하기 힘들다고 본다.
설명을 들을 때는 그럴 듯한데
그러나 당장 차를 한 번 타려고 하거나
무언가 식사를 한번 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그런 증상을 극복하고 벗어나오기 쉽지 않다
그 증상을 벗어나오려면
그렇게 자신을 묶어 놓고 있는 전도몽상증상을 풀어야 하고,
그 이전에 그렇게 자신을 그런 상태에 묶어 놓고 있는
강한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기 위하여
기본적인 계-정-혜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인데
상태가 이와 같으니
이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보시-정계-안인-정진과 같은 계의 수행항목조차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악순환을 밟아 나갈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이번 기회에 자세히 좀 더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앞과 같이 전도몽상을 일으키게 되는
현실사정을 놓고
앞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이것부터 하나하나 따져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
무상 - 고 - 무아,무자성 - 열반적정 - 공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
일체개공
이런 내용들인데
이 내용들이 다 위와 관련된다.
우선 앞에 나열한 내용을 놓고
그런 사정에서 그와 같이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처음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활해 오는 가운데
매 현실에서 1 과 같은 모습을 보았다고 우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
당연히 엉터리 주장이다.
그렇다면 본인이 과거 연구실에서 생활하다
어느 순간 행방불명되어 없어져 버린 인턴연구원의 사진을
올려 놓고 공개수배를 할 이유도 없다고 할 것이다.
https://lh3.googleusercontent.com/-ULEWE_ZC2bI/VZCUgxWQiKI/AAAAAAAAFHo/BmULPV_wSaQ/w1035-h1340-no/DSCN8069-cut.jpg
이런 사진을 올려 놓으면
엉뚱한 한 소년이 나타나
저 아이가 과거의 자신이라면서
이 사건 자체에 대해서 터무니 없다고 여기면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런 주장을 하는 소년과 저 아이는
아무런 공통점이 파악되지 않는다.
따라서 앞과 같은 판단은 잘못인 것이다.
사실이 아닌데도 단지 그렇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진을 놓고
현재의 상태와 비교하면 쉽게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기에
사진을 놓고 이 사정을 제시하지만,
더 간단하면서도 핵심적인 근거가 있다.
우선 이런 사정은 한 찰나 전후를 놓고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위에서 1 과 같은 모습을 볼 때
다시 눈을 감으면 어떤가.
그 모습이 얻어지는가 .
그렇지 않다.
제행무상이란 내용은
바로 이 사실 하나로도
쉽게 밝힐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머지 전 시간대에 어떤 것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더라도
바로 이 실험하나로 그것이 부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경험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
처음 어떤 이가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 부분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나머지는 손님처럼 들락날락하고 변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런 사실을 근거로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주장하였다면,
어떤 이가 보는 내용 일체가 다 그렇게 일정하지 않고
변화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나마 눈을 감고 뜨는 그 양 순간에도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보는 것은
사실은 그런 내용을 파악하는 정신이라고 할 것인데
그것은 한 주체가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기에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고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 상락아정인 상태라고 할
자신의 근본 정신과 같은 존재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손님으로서 잠시 티끌로서 들어와 있는 것을 붙잡고
그 속으로 쭉 빨려 들어가 묶여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다.
참고로 눈으로 보는 내용이 어느 영역에 있다고 하는가는
다음 그림을 참조해 보는 것이 낫다고 본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위 그림에서 눈을 뜰 때 보게 되는 내용은
모두 1! 영역에 자리잡는다.
그 1! 영역에 있는 내용은 매 순간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얻더라도 매 순간 얻는 내용이 변화한다고 보지만,
그러나 위에서 1,2,3,4,5,6,7,8 과 같은 정신 자체는
한 생에 걸쳐서는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입장에서
일정하게 계속 유지되는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고
매 순간 달라지고 변화하는 내용을 손님이라고 보고자 한다면
위 그림에서 갑A@ 가 가리키는 부분과 같은 것을
'차라리'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낫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다만 각 생마다 분화생성되는 정신과 함께
세세생생 유지되는 근본정신도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적 존재는 아니므로
여전히 그에 대해 그것이 참된 나의 존재라고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앞에서 '차라리'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해야 한다고 '차라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여하튼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평소의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잡고
이런 내용을 괘변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데
그 자신이 생사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모두 이런 전도몽상분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임을
스스로 파악해야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두번째 문제를 보자.
자신이 어떤 뜻을 가질 때
자신의 뜻에 따라 변화되는 부분을 놓고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이런 현실사정을 놓고
과연 사정이 그런가를 살피기로 하자.
경전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사정을 밝히기도 한다.
일체는 무상하다.
그것이 낙인가 고인가. => 일체는 고다.
고통스런 것이 나이겠는가
이렇게 제시하는데
처음 무상한 것은 낙인가 고인가 이런 부분부터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입장이 대단히 많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원하지 않다고 해도
그 가운데 좋은 것이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는 일체는 고통이다라는 사실부터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통곡을 하는 경우가 있다면
왜 그런다고 보는가.
좋다고 보고 강하게 집착을 갖고 대하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어느 순간 허물어지고 사라지고
파괴되고 허물어 지기에 그런 것이다.
문제가 아닌가.
그런 사정을 괴고(壞苦), 행고(行苦), 고고(苦苦)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는 일체가
다 그런 사정에 있다는 것부터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이후 이 전도망상으로 인한 생사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잠시 좋음을 주는 것은 그 순간은 좋다고 여기지만,
그에 대해 집착을 갖는 경우
그것이 나중에 지극히 심한 고통을 주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 사정을
함께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이런 가운데
다시 부처님은 다음 내용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고통스런 것이 나이겠는가'라고 또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도 일반인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본다.
자신은 즐거움도 얻고 고통도 때로 받는 것인데
고통이 있다고 왜 그것이 나가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음을 살펴야 한다.
처음에 자신이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고
그 가운데 왜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겼는가.
어떤 부분은 자신이 뜻을 일으킬 때
그렇게 자신이 뜻을 가져도
자신이 보는 내용 대부분이 그렇게 뜻대로 변화하지 않음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 이것은 자신과는 무관한 자신 외부라고 처음 보게 되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와는 달리 자신의 뜻에 따라 변화하고 움직이는 부분은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부분이라고 여기고
이런 부분을 통해 자신의 뜻과 맞는 상태를 얻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어떤 부분이 자신의 뜻대로 변화해서 자신의 뜻에 맞게 되기에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본다면
현실에서 그런 부분이 생노병사 과정을 겪는 것을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인가.
또 자신이 그런 부분으로 고통을 받을 때
그런 고통을 받기 원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앞의 전제가 맞다면
그렇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자신 뜻대로 그렇게 되지 못해서
고통을 그로 인해 받을 이치가 없다고 보야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고통을 주는 것을 놓고
그것을 과연 자신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처음 부처님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평소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그런 부분이 바로 그런 사정으로
자신이라고 여길 때
그런 내용이 과연 정말 그런가를 놓고
자세히 살피고
이런 사정으로
그런 부분에는 '진짜의 나'라고 할 내용이 없다는 사정[무아]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내용은
격자이론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
08pfl--image/grid_03.jpg
격자이론 설명을 할 때 사용한 그림을 다시 놓고 보자.
A 라고 표시한 부분이 자신의 몸이라고 해보자 .
자신이 눈을 떠서 볼 때 저와 같은 일정한 부분을 묶어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 부분이 바로 위 그림에서 A 의 부분이라고 가정하자.
이런 경우 그런 망상을 갖는 것은 자유라고 할 것이지만,
과연 그 부분이 그런 자신인가.
이제 자신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기생충이나 암세포나 세균 바이러스 등을 하나 놓고 생각해보자.
이것을 자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해서
그렇게 활동하게 한 것인가.
그래서 자신이 몸도 아프고 고통받고 그러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라고 볼 수 없는
이런 미생물을 다 제거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처음 자신이라고 본 부분에는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이미 격자이론 설명에서는
사람이라면
손을 놓고 이 손이 너인가.
또는 손에 나있는 털 하나를 놓고 이 털이 너인가.
이렇게 하나하나 물어가면서
그 부분이 그렇지 않음을 살폈다.
그래서 그렇게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이 아닌 부분을 검은 색으로 칠해가게 되면,
처음 자신이라고 본 A 전체부분을
모두 검은 색으로 칠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앞과 같은 방식으로
처음 자신이라고 본 부분을 놓고
이 부분에서
자신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없고
또 자신의 뜻과는 별개로 활동한다고 보게 되는 부분들을 찾아
하나하나 검은 색으로 칠해간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모두 모아 놓고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현실에 임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놓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어떤 비행기 조종사가 승객 999 명을 태우고 가고 있는데
조종사가 생각하기를
자신이 핸들을 꺽거나 조종을 하면
이 비행기가 모두 자신의 뜻대로 다 함께 움직인다고 여기면서
이 비행기가 전부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오늘 자신이 더 이상 살기 싫으니
비행기를 폭파시켜 자살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떤가.
그렇게 조종사가 비행기를 놓고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가 .
이 때는 앞과 같이 처음 주장한 이가
그런 주장에 대해 극구반대를 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사실은 무수한 생명들이 그안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어서
자세히 보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몸은
이들 수많은 생명체가 빙의되어 있어
그에 지배받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앞에서 비행기 조종사가 주장하는 내용이
잘못이듯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 뜻처럼 이동시키거나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다음 경우를 또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집이나 정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안에 나무는 나무대로
그리고 그 나무 밑에 개미들은 개미들대로
그 정원을 가진 이가 그 땅을 등기를 하고 살던 말던
그와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입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애매하다.
여하튼 기본 사정이 위와 같은데
평소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은
어떻게 보면
마치 자신이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탄 손님들과 같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놓고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자신이라고 고집해 머무는 상태임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이 내용을 처음에 살핀 내용과 함께 같이 음미하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평소 자신으로 보는 부분에 있는
그런 손님이나
정신 안의 그런 손님들의 내용이
다 다른 내용으로 바뀌고
그래서 전체 모양이나 내용도 다 달라지는데
여전히 앞과 같은 주장을 고집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내용들이
모두 자신의 뜻에 따라서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렇다면 세상에 성형외과에 가서
미용 성형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손님들은 손님들대로
자신의 뜻에 그렇게 따라주지 않고
그래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생노병사현상에 노출되고
그렇게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현실인 것이어서
처음에 앞과 같은 사정으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긴 것은
잘못인 것이다.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부처님의 가르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고
그런 바탕에서 또 수행으로 전환해서
고통의 생사 과정의 묶임에서도 풀려날 계기를
잘 마련하게 된다고 본다.
[...]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위 그림처럼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세상을 볼 때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상락아정의 아에 베당시켜 놓은 내용인데
이제 이 부분을 보자.
1 이 눈을 떠 위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되고
그 가운데 1 부분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데에는
대상과 주관
또는 객체와 주체
이런 관념분별이 다시 행해져서 그렇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대상과 주관의 문제와 관련하여
1을 자신이라고 전도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많은 실험이 동원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실험은 다음이다.
1 의 손을 뻗어서 꽃에 닿고 꽃병을 들어 책상에 옮긴다.
이런 실험을 해보자.
여기서 4 와 같은 꽃이 그런 동작으로 옮겨질 때
그것이 1의 손이 닿는 대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망상분별을 행하게 된다.
또 실험을 해보자.
바늘을 가지고 위와 같이 얻은 모습
각 부분을 한번씩 살짝 찔러 보는 실험을 해본다고 하자.
이런 실험을 하면
책상이나 다른 부분은 별로 별 변화가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 이와 달리
소리를 지르고 반응하는 변화를 일으키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2 나 3 처럼 다른 영희나 철수로 보는 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물론 이들이 1 과 마찬가지로
전도몽상 상태에 있는 동류의 생명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1 의 부분에 그런 실험을 하면 또 사정이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앞 실험에서
왜 2 와 3 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놀라는 반응을 하는가를 스스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는 이런 실험을 하는 이 자신이
바로 그런 감각이나 통증을 경험하게 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1 부분은
적어도 다른 부분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1과 같은 부분을 바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전도몽상 증상이 깊어지고
여기에서 벗어나오는 것도 그만큼 힘이 들게 된다.
또 실험을 해보자 .
이제는 바늘대신 손을 사용해보자.
이 경우도 앞과 비슷한 결과를 얻는데
바늘 실험과 다른 점은
바늘로 일정부분을 닿을 때
바늘 부분에서는 어떤 특별한 감각을 느끼지 못했는데
손을 사용할 때는 손 부분에서는 어떤 촉감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시각의 문제만 다루다가
이제 촉감으로 옮겨 온 셈인데
시각과 사정이 비슷하니 특별히 다른 문제는 아니다.
또 실험을 해보자.
이제 손으로 책상과 같은 사물들을 만지는 경우와
손과 손을 서로 부딪혀 보는 실험을 해보자.
앞의 경우와 뒤의 경우가 무엇인가 다르다.
즉
손으로 책상을 만질 때는 손 부분만 촉감을 느끼고
책상 부분에서는 촉감을 못 느꼈다면
이제 손과 손을 부딪힐 때는
이 양 손 부분에서 함께 촉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처럼 1 의 부분에서는
그런 차이를 경험할 수가 있기에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망상분별을 행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또 실험을 해보자.
이제 이런 손으로 의자를 뻗쳐 만지면
이 때 손에서 그 순간 촉감을 얻게 된다.
이는 대단한 실험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이 전도몽상증상을 강화시키는 상당한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놓고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단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손이 대상이 되는 의자에 닿아서
그런 촉감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망상분별을 하게 되는 사정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또 실험해보자 .
자신이 나무 젓가락을 가지고
계속 부러뜨린다고 해보자.
그 때마다 똑똑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모습을 그처럼 보는 가운데
그 젖가락을 만지면서 촉감은 또 그렇게 느끼고
이제 그런 상황에서 소리까지 그 때마다 듣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런 소리를 얻게 한 대상이 무엇이고
어떤 과정으로 그것을 얻게 되었는가가 문제되면
또 앞과 같은 형태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입장은 상당히
어리둥절하게 여길 수 있다.
사실이 그런데 왜 이것을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그런데 지금 제시한 내용 가운데
손이나 젓가락 의자 이런 내용들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확인해보자.
자신이 눈으로 본 시각정보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시각정보가
다른 촉각정보나 청각정보를 얻게 하는 원인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적절한가.
시각정보는 촉각정보를 일으키는 원인도 아니고
이들은 별개의 정신 영역의 내용이라,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고
서로 각 내용이 닿아서 작용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위 실험에서는 마치
시각을 맡는 정신으로 얻은 그 안의 어떤 내용이
촉각을 맡는 정신안의 어떤 내용(촉감)을 일으키고
청각을 맡는 정신안의 어떤 내용(소리)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이들 각 정신 안의 내용이
서로 그처럼 원인과 결과관계가 있고
서로 그처럼 작용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는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그런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만 더 실험을 해보자.
자신의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손바닥을 간지럽힌다고 해보자.
둘 다 자신의 손과 손바닥인데
한쪽은 간지럽고
한쪽은 부드럽다고 하자.
이 두 내용을 놓고 서로 어떻게 이해하는가.
여기서 초점은
간지러움을 느끼는 손바닥은
그 간지러움이 무엇의 내용이라고 보는가.
그 손바닥 자신의 내용이라고 그것을 보는가.
아니면 그 손바닥이 대한 내용이 그것이라고 보는가.
이런 의미다.
또 간지럽게 하는 그 손에서 느끼는
손바닥의 부드러움은
또 이 내용을 어떤 것의 내용이라고 보는가.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간지럽게 한 그 손가락의 내용인가.
아니면 그 손가락이 대한 대상의 내용인가.
이 문제다.
조금 더 이 내용을 덧붙이면
만일 그 자신의 내용이라면 왜 다른 것과 관계할 때만 그 내용을 얻는가.
그런데 또 다른 것의 내용이라면 정작 그 다른 손도 감각을 느끼는 부분인데
왜 그것은 그 상황에서 그렇게 못 느끼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생각해볼 문제라고 본다.
다시 하나 추가해보자.
이제 눈을 감고
위와 같이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는 등의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눈을 떠서 보던 상태에서 보던 그 내용들이
눈을 감아서 얻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손으로 얻는 그런 촉감을 이제 못 얻는가.
그리고 눈을 떠서 본 내용들이 있거나 없거나
만일 그런 손으로 촉감을 얻는데 별 지장이 없다면
처음에 그런 촉감을 얻는데 관여한다고 본
그런 모습들은
촉감을 얻는데 본래 무슨 의미를 가졌던 것인가를 놓고
다시 검토해보자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눈을 감고 어떤 물체를 만진다고 해보자.
만지지 않았을 때는 별 촉감을 못 느끼는데
어떤 것을 만지면 매끄럽거나 거친 느낌을 달리 받게 된다.
현실에서 눈먼 이들이 글자로 사용하는 점자가 있는데
글자에 해당한 부분이 점으로 올라와 있다.
이제 이런 것을 자신이 만진다고 생각하고
한 부분에서 그 느낌이 과연 무엇인가를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촉감도 사실은
처음에 살핀 시각과 그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 촉감의 내용을 놓고서도
일반적으로 그 촉감 안에는
대상에 해당하는 내용이 하나 있고
또 그 안에 늘 꾸준히 얻는 자신의 손 즉 주관의 부분에 해당한 내용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섞여 있다고 보게 된다.
미세하지만,
오돌도톨한 부분을 손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것을 잘 구분해보기로 하자.
처음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볼 때
눈으로 보게 된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다 같은데
어느 부분은 자신
그리고 그 나머지 부분은 외부 세계 이렇게
전도된 망상분별을 행한 것을 여기서
문제로 삼고 있는데
촉감도 사정이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음을
여기서 살피자는 의미다.
여하튼 현실에서는 이런 여러 실험을 통해서
자신이 감각해 얻는 내용을 놓고
이 안에서
그런 감각내용을 얻게 한 대상과
또 그것을 느끼는 주관이나 주체를 나누면서
다양한 망상분별을 일으킬 만한 기본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여기에 걸려서
이런 과정으로
자신이라고 본 부분을 놓고
죽을 때까지 집착하여 임하고
또 이를 기본으로 하여
그런 자신의 것에 해당한다고 보는 온갖 것을 나열하면서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묶여
헤메 돌아다니는 여정을 시작하고
무량한 겁에 걸쳐서 이 상태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벗어나오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부분에서
평소 망상분별에 바탕한 오해(誤解)를 중지하고
다른 의미의 오해(悟解 깨달음과 이해)를 올바로 해서
이처럼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전도된 망상분별의 상태에서
벗어나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
○ [pt op tr]
▼mus0fl--Joe Dassin - L'ete Indien.lrc
앞 내용에 대해서 보충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앞에 제시한 내용들은
처음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보는 내용 가운데
일부분은 앞과 같은 사정으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곧
자신 외부의 세계내용이고
또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외부대상이고
또 그것은 정신과는 구분되는 외부물질이고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도 다 같이 보고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기게 되는 사정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앞 부분에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만질 때 촉감을 얻는 과정을
실험하는 것은 이와 관련되어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사정을 살피는데 상당히 의미가 깊다.
그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대하면
손이 내밀어 닿는 컵이 그 대상이고
그 손이 그런 감각을 얻는 주관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눈으로 무엇을 보는 과정에도 같은 형태로
적용하기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이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관찰하거나
자신이 스스로 거울을 놓고 자신을 볼 때
앞과 같은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잘 살펴보기로 한다.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반복하면서
눈을 감을 때는 보지 못하다가
눈을 뜨는 순간 그때 얻게 되는 내용을 잘 붙잡아 두려고
노력하자고 제시했다.
그 내용을 그린 그림이 다음 그림인 것이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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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위 그림은 그리고
이제 1 이 자신과 유사한 상태에 있는
다른 영희나 철수를 앞에 놓고 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1은 자신의 눈이나 눈썹이나 이마도 보지 못하기에
그림에서 1 과 같이 대강 그려 놓았다.
그런데 1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하면서
눈을 뜰 때 얻는 모습이 위와 같다고 하고,
그런 상태에서
다시 2 와 같은 철수에게 눈을 뜨고 감으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보고하게 하면서
그 상황을 관찰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실험을 하면
1은 다음과 같은 망상을 일으키게 되기 쉬운 것이다.
우선 2 에게 실험을 행하게 하면
2가 눈을 감으면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고 보고하고
또 눈을 뜨면 무언가를 본다고 보고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이를 지켜보는 1 의 입장에서는
계속 눈을 뜨고 이를 지켜 보는 상태인데
별다른 변화를 보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2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무엇이 보이고
안 보이고 하는 변화는 어느 부분에서 있는 내용이겠는가를
1이 추리한다면 여하튼 그것은
1 안에서 있는 변화라고 추리하게 되고
2 가 눈을 떠서 그 순간 보게 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위 그림에서처럼 2의 머리에 5^ 부분에서 있는 변화일 것이라고
추리하고 위 그림처럼 표시한 것이다.
기존에 많이 반복했지만,
이렇게 추리하고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나타내는 것은
잘못된 추리다.
그런데 2 가 그처럼 눈을 감고 뜨는 실험을 하면서 보고하는 내용을 대하는 1은
위 그림처럼 일단 망상적 추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을 위 그림처럼 그려 놓고
그 상태에서 가정적 항변방식으로서
만일 그런 추리가 옳다면
어떤 문제가 있게 되는가를 살펴보자는 의미다.
그런데 1이
2의 상황을 위와 같은 그림형태처럼 파악했다면
처음 1이 눈을 뜨고 감을 때 얻게 되는 변화 내용인 위 그림 전체내용도
사실은 2 와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2 를 놓고 이 내용을 잘 검토해보자.
위 그림에서 만일 2 가 생각하기를
2 가 꽃과 같은 4 ^ 의 모습을 보는 것은
2 가 4^ 의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서 2^ 부분에 달려 있는 눈을 통해
그런 모습을 얻게 된다고 이해한다면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가.
이는 이상한 해석인 것이다.
그 사정은 1 이 이 내용을 검토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 이 볼 때는 2 는 2 가 눈을 떠 본 내용 안의 어떤 내용
즉 4^ 와 같은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모습을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2 가 이해하는 내용이
바로 1 의 상황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1 이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된 5 와 같은 전체 내용을 놓고서
그 안에서 4 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4 를 대상으로 자신이 보는 1 부분에 달린 눈이 대해서
그런 모습을 얻게 되었다고 이해하면
앞에서 2 가 해석한 내용처럼 엉터리가 된다는 의미다.
또 다음의 엉터리 견해를 살펴보자.
일단 쉬기로 한다.
○ [pt op tr]
▼mus0fl--Corneille - Le Bon Dieu Est Une Femme.lrc
담배 피는 것이 도피성이라고 하는데
쉬지 않고 글을 정리하면 몸에 무리가 생긴다고 보게 된다.
지금 정리하는 페이지에는 이런 내용은 나중에 모두 삭제하게 되는데
일단 본인의 넋두리도 조금은 적는 것이 좋다고 본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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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일단 앞과 같은 판단이 전도된 망상분별인 사정을 보았는데
또 다른 엉터리 전도망상분별의 내용을 보자.
현실에서 2가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하면서 보고를 하는 상황을
놓고 1이 어떤 망상을 다시 일으키게 되는가하면
다음과 같은 망상분별을 또 행할 수 있다.
우선 1 은 2 가 눈을 뜬다고 할 때 지켜보면
2 의 부분에 달린 눈을 뜨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2 는 2 자신의 눈을 직접 보지 못하고
눈을 뜬다는 것은 자신의 촉감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2는 거울을 통해서 보거나 하여
2^ 부분에 달린 눈이 그런 내용을 본다고 여기고
앞과 같이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1은 이 상태에서
2^는 또 보지 못하고
1이 보는 2 부분에 달린 눈을 뜨는 가운데 무언가를 본다고 보고하고
그리고 2 부분에 달린 눈을 감으면서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고
보고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1이 다시 추리하기를
2 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2 가 2에 달린 눈을 통해서
1이 보는 4 와 같은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5^ 같은 부분에 무슨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또 망상적 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누가 무언가를 보는 것을 지켜보면서
또 상대방의 눈까지 바라보면
바로 그런 부분이 상대가 무엇을 보게 하는 눈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인데
왜 이것이 망상분별인가.
그래서 위 그림을 놓고 잘 이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1 이 그처럼 보는 내용 자체가
1이 눈을 떠서 보게 된 내용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해석은
2 를 놓고 생각하면 2 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경우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즉 2 가 입장을 바꾸어서 앞과는 거꾸로
1 에게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하면서
그 변화를 보고하게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관찰하는 가운데 생각하기를
1 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2 가 보게 되는
1 의 몸에 달린 눈을 가지고
2 가 보는 4^ 와 같은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무언가를 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제시하면 과연 이것이 적절하다고 보겠는가.
2는 그렇게 관찰해서 그런 해석을 할 지 모르지만,
이 내용을 1 이 위 그림처럼 놓고 생각하면
대단히 엉터리이고 거꾸로 뒤집힌 해석을 하고 있다고
쉽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2 의 그런 주장이 엉터리인 것처럼
1이 처음 2 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1 자신이 본 4와 같은 꽃을 대상으로 2 에 달려 있는 눈이
무언가를 보고 그 내용이 5 ^ 안에 머물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엉터리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다시 말하면
처음에 1 이 추리하기를
2 가 무언가를 보게 되면
그 내용은 저 그림처럼 5^ 영역에 머물게 된다고 이해한 것도
잘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이 상황을 음미하면
1 이 그렇게 추리하는 내용은
마치 2 가 1이 무언가를 보는 것에 대해 추리하기를
1 은 4 ^ 와 같은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무언가를 보고
그 내용은 2 자신이 본 1 ^ 부분에서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에
그 내용이 그렇게 머물게 될 것이라고 추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엉터리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실험을 할 때
2 나 1 이나 그 상태가 서로 엇비슷한 상태인 점을
잘 생각해서
이 두 입장을 계속 입장을 바꾸어 가면서
역지사지해가면서
이 상황을 잘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와 같이 대강 내용을 살피면
처음 1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저 그림처럼 얻게 될 때
그 내용을 놓고
그 안에 그런 모습을 보게 한 외부대상이 있고
또 그 모습은 자신이 거울을 통해서 보게 되는
그런 눈이나
또는 위 상황에서 자신이 손으로 만져서
파악하게 되는 그런 눈 부분이
그 내용을 그처럼 얻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이것은 잘못된 전도몽상분별이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을 전제로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 가운데
일부는 이런 자신의 감관이나 주관이 위치하는 부분이고
그 나머지는 이런 주관이 대하는
외부 세계나 외부 대상이고 또
이들은 정신 밖에 있고 정신과는 구분되는 외부물질이라고 이해한다거나,
또는 이들 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와 같은 다른 이들도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이해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앞과 같은 전도몽상분별을 엉터리로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에 바탕해서 또 다른 엉터리 분별을 행하기 쉽다.
우선 2 가 무엇을 볼 때
그 내용은 5^ 와 같은 형태가 된다고 처음 1이 추리한다면
그 바탕에서는
2 가 얻는 5^ 안에는
그런 내용을 보는 2 자신의 눈도 직접 얻지 못하고
2 자신의 눈이 대한 대상도 직접 얻지 못한다고 보게 된다.
단지 이를 통해서 5^ 안의 4^ 와 같은 꽃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대상이라고 잘못 오해하는 상황이 된다고 처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1이 잘못 생각하면
그처럼 2 가 직접 보지 못하는
2 의 눈이나 2 의 눈이 상대하는 대상인 4와 같은 꽃을
자신은 직접 본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2 가 5^ 와 같은 내용을 얻을 때
그런 내용을 얻게 한 2 외부의 어떤 대상이나 2 의 감관 자체는
2 는 직접 보지 못하지만,
1 자신은 이것을 직접 볼 수 있다고 오해하고
그 내용이 바로 자신이 보는
4 나 위 그림의 2와 같은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처음에 제시했듯
2 의 상황이나 1의 상황이나
사정이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오해는
처음 2 가 1 이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놓고 관찰할 때
1 은 4^와 같은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서
무언가를 보지만,
4^ 는 직접 보지 못하고
단지 그를 통해 얻는 모습을 1^ 내부에 얻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처럼 엉터리 해석이 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1이 어떻게 2 가 보아서 2 의 마음 속에 얻어지는 내용에서
4^ 와 같은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서
1^ 와 같은 부분에 무언가를 얻는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이것은 엉터리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엉터리 해석이듯,
1 이 2 가 보는 과정을 놓고 관찰할 때에도
2 는 '1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4 와 같은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서
무언가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2 는 4를 직접 보지 못하고
단지 4^ 와 같은 내용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리해서
위 그림처럼 표시하면 잘못이 되는 것이다.
결국 1 이나 2 나 그 사정이 매마찬가지여서
어떤 주체가 무언가를 보게 될 때
그렇게 보게 되는 내용안에는
그것을 보게 한 외부대상은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음 엉터리 추론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곧
그렇다면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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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 이 그림을 위와 같이 그려 놓고
2가 눈을 떠 보는 과정을 추리하게 되면
다음과 같이 추리하게 되기 쉽다.
언어로 보고한 내용이라
2 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무엇을 보고 보지 못하게 되는가는
직접 그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여하튼 2 가 보고하는 내용을 죽 들어보니
그것은 1이 처음 혼자 눈을 뜨고 감으면서
보게 되는 변화내용과 유사하다.
이렇게 일단 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추리하기를
2가 무언가를 볼 때 얻는 변화는 2에서만 있는 변화이므로
2의 머리부분에 5 ^ 부분처럼 그 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내용이 자신이 보는 내용과 같다고 일단 또 추리한다.
그런데 2 가 본 꽃의 모습은 4^ 와 같다고 할 때
그것은 결국 자신이 보는 4 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이가 4^ 와 같은 모습을 본다면
그렇게 보게 된 외부대상은 이런 내용과 같을 것이라고
엉터리 망상분별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우선 1 은 2 가 본 내용이 무엇인가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설령 1 자신이 본 4 와 같은 모습이라고 해도
여기서 2는 결코 그처럼 1이 본 1 마음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서
어떤 내용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1이나 2 나 어떤 모습을 보게 되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는지는
어떤 주체도 직접 확인을 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1 이 추리하기를
2가 대한 대상은 4 와 같은 내용이라고 추리하고
2 가 대한 실재가 그와 같다고 추리하는 것은
결국 처음에 본 문제와 같아진다.
즉 2 가 1이 보는 과정을 놓고 추리하기를
1 은 2 가 본 4^ 와 같은 것을 그 외부대상으로 놓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기에
1 이 대하는 실재는 4^ 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엉터리 해석인 것이다.
여하튼 1 이나 2 가 무언가를 볼 때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이와 관련해서 문제가 제기되는데
1이나 2 의 상황이 다 마찬가지이므로
그것은 1 이나 2 가 본 내용에서 찾으면 곤란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실재가 무언가 하는 논의는
앞과 같이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생생하게 보고 얻을 때
그것을 과연 실답다고 할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그 본 바탕의 실재를 확인하는 문제로 제기되는데
그것은 별도로 살핀 바와 같다.
그것은 꿈을 생생하게 꾸지만,
현실과 그 꿈내용을 대조해 검토하여
그 꿈이 실답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1 이나 2 나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내용이 아무리 생생해도
그것을 과연 실답다고 볼 것인가는
그 내용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고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를 살펴서
위와 관련해서 판단하게 되는데
적어도 실재는 1 과 2 가 보는 그런 내용은 아닌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반대로 말하면
현실에서 눈을 떠서 1과 2 가 얻게 되는 내용은
실답지 않다고 보게 되는 사정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일단 조금 복잡하지만,
위 그림을 놓고 이런 사정들을
기본적으로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하튼
앞에서 살핀 내용들은
하나같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그리고 그 가운데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런 내용이 정말 자신인것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하는 사정들인 것이다.
그래서 앞과 같이 설령 사정이 그러하여서
이들 내용이 서로 전혀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고 볼
사정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내용을 위와 같이 이해하면
대단히 곤란하다는 사정도 함게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사정이 그런데도
왜 그렇게 보게 되게끔 사정이 되어 있는가는
처음 한 주체가 생을 시작하면서
어떤 상태로 근본 무명을 바탕으로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놓고
또 다시 별도로 살펴야 할 문제다.
거꾸로 말하면
그 부분이 바로 위에 제시한 것과 같이
현생에서 걸치는 옷과 같다고 할 일정한 부분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게끔 만든 기본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또 그 기본 바탕에서도 역시
지금 살핀 것과 유사한 잘못된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그렇게 된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이 문제는 별도로 다시 살펴야 할 문제지만,
미리 이렇게 대강의 사정을 파악한 가운데
우선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놓고
위와 같이 분별하면 잘못이 된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
- 재정리 작업중 표현 및 오타부분을 수정중입니다. - 불기2562-01-06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글 작성 중입니다. -
그리고 그렇게 전도망상분별을 그런 사정으로
일으킨 사정 때문에
어떤 이가
스스로 자신의 장례식을 치루는 모습을 보고
화장터에서 자신의 몸이 불타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이렇게 되는 순간까지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매 순간 임하는 것이 현실이다 .
그런데 그 다음 생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전도망상을 일으켜
매 순간 임하는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1 이 1 부분을 자신이라고 본다면
2 도 사정이 그와 같고
3 도 그와 사정이 그와 같다.
거의 대부분 생명이 그와 같은 상태인 것이다 .
다만 예외가 있다면
초발심을 일으켜 수행자 라이센스를 지급받고
계 정 혜를 닦아 나가는 수행자는 예외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 경우가 현실에서는 대단히 드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본다면
대부분 생명이 다 1 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그렇게 보고 활동하는 것이고
또 1은 자신이 보는 2 나 3 의 모습을
놓고 반대로 남이나 다른 생명이라고 여기면서
또 임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1이 삶을 고려하는 것은
마치 2 나 3을 계속 지켜보는데
2 나 3 이
조금씩 변화해가지만,
꾸준히 무언가 활동을 하는 가운데
그 모습이 점차 변하다가
어느 순간 병이 들고
그리고 활동을 못하는데
자세히 꾸준히 살펴보니
몸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오고 썩고
팽창하고 나중에는 뼈만 남고
이렇게 되면
이제 그가 죽어버렸다.
이렇게 보고 그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사람은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발부하고
장례를 치루고 매장하거나
화장터에서 소각하면
그의 삶은 그로써 끝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2 나 3 에 대해서 그렇게 판단했듯
1 은 1 대로
앞에서 본 것과 같은 부분을 놓고
그런 상태가 되면
자신의 삶은 끝나는 것이다.
이렇게 망상속에서 헤아리는 것이다.
그렇게만 끝나면 또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최소한 무간지옥에서 새로 그런 식으로
활동하면서
자신 외부는 모두 자신에게
공포와 고통을 주는 것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비명을 지르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니
참으로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앞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그처럼 1 의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긴 전도몽상 증상을
일으킨 환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런 상황에서 또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받을 도리 밖에는 없다는 것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얼마나 수행에 부담이 줄겠는가.
안락사를 시술해줄 수 있는 이만
주변에서 잘 만나면
수행은 대단히 편하게 마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삶을 이해하고
그런 무지에 바탕해서
사실 겁을 상실하고
온갖 것을 행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위 그림 하나를 놓고서라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 이런 전도몽상증상에 묶여서
고통의 생사를 받아 나가게 된 데에는
사정이 있다.
그것을 설명하자면
또 그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간단히 다음과 같이 표시해보기로 하자.
▲-○-○-○-○
현재 ▲ 부분을 위 그림에서 1 부분을
나타낸다고 이해하자.
이것은 결국 눈과 관련된 정신에서 얻어진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는 이런 내용을 얻게 하는데 관여하는
여러 다른 정신을 표시한 것이다.
처음의 ○ 는 시각을 담당한 정신기관 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담당한 정신을 모두 표시한 것이라고
이해하자.
그렇게 각 감관이 얻어 놓은 내용을 놓고
각 부분을 나눠 ▲과 같은 부분은 자신이고
어떤 부분은 책상이고 이런 분별을 행하는
정신 영역은 또 따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 로 표시해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각이나 분별을 행하지 않아도
한 생 동안 일정하게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정신영역도 또 따로 있다.
이것이 그런 명확한 분별을 행하지 않는다해도
그 정신은 그 정신 나름대로
피아 구분을 정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또 하나의 ○ 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각 정신은
매 생에 근본정신이라고 표현하는 ○에서
파생 분화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인정하던 않던
일단 이것을 또 하나의 정신으로 ○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상황은
알고보면
▲-○-○-○-○
이런 형태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묶여 있는 상태는
그런 상태에서 그런 눈으로 보면
▲ 부분과 같은 내용을 얻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서 행해나가게끔 되어 있는 상황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앞과 같은
▲-○-○-○-○ 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반복해서
▲ 이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집착하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나가는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각 세계마다 묶여서
고통을 받아 나가는 삶을 전개해나가는 상태라고
진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판단하는 여러 내용이
왜 옳지 않다고 하는가는
자세히 살피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미 오랜 기간 조각글에서
그 사정을 하나 하나 살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상황이 이런 상태에서
수행의 목표는 무엇인가.
첫번째는 자신을 그렇게 묶어서
매 생에 고통을 받아나가게끔
묶고 있는 업의 장애부터 해소시키는 것이
최우선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얻어서 이 묶임에서 일단 풀려 나와야 하는 것이다.
살인자가 있다고 하는데
자신이 어느 순간
이제 자신은 그런 자신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자신을 수사하고 추격하는 수사관들이
그를 석방해주는 일은 별로 없다.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던 않던
자신이 행한 업이 그런 내용이었다면
그만한 고통을 상응해 받는
상태에 묶여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자신이
이제 이런 사정을 알았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자신이 업의 장애와 묶임에서 풀려 나는 것은 아니다.
그 묶임이 죽음으로 풀려난다면
수행은 상당히 간단한 것이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무시무종의 시간대에서
과거에 무지 무명 근본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무량하게 행해오고 쌓아온 그런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는 방안으로서
수행방안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서 그 이후가 또 문제가 된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과 세계의 본 정체도 잘 파악하고
세계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과정에서
결국 자신의 이전 상태와 비슷한 상태로
계속 묶여 여기저기 생사 고통의 현장에
끌려다니는 다른 생명을 또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시
이를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고
이전 상태와 같이
▲-○-○-○-○
로 들어가 생사를 받아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prince 님이 이 부분을 문제삼는 것이다.
▲-○-○-○-○ 이 부분이
전도몽상인데
왜 수행을 그 상태에서 하는가
매 마찬가지아닌가
이런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끈에 묶여 있는데
끈에서 풀려나는 노력을
그러면 어디에서 행하는가.
끈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풀려나서 다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것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자신이 구출하고자 하는 중생이 하나도 없는
그러한 세계에서
그런 수행을 할 것인가.
의사라면 환자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
병원을 열고 진료를 할 것인가.
사정이 그렇지 않으므로
그렇게 임하는 것을 놓고
왜 그런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답답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본인은 담배부터 구해야 한다고 보는데
수행은 내용은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그러나 하나같이 현실에서 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간단하다고 생각하면
묶인 상태에서
발가락을 하나 옆으로 꼼지락 거리면서
살짝 움직이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점차 그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이다.
가위에 눌렸을 때 손과 발이 안 움직여서
답답할 때도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조금 움직일 수 있으면
그런 가위로부터 풀려날 수 있는 것과 사정이 같다.
계_정_혜의 수행으로 압축해 제시하는데
늘려 말하면
계에 해당한 내용은
+를 아끼지 않고 베풀고
-를 다른 생명에게 가하지 않고
자신이 -로 생각되는 내용을 받을 경우에는
이에 대해 앞과 같은 전도몽상분별을 일으켜 반응하지 않고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을 제거해서
평안하게 참고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수행이
가장 기본이다.
보시-정계-안인이 이 내용이다.
이것을 꾸준히 정진하면
업의 장애가 해소되고
묶임에서 풀리고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생활해가는 현실에서
복덕이라고 보이게 되는 내용을 무량하게 얻게 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복덕자량을 얻으면
이제 정려와 반야수행을 할 바탕이 마련되고
그래서 이런 계와 정과 혜의 수행을 꾸준히 하여 성취하면
이제 무량행문을 닦아나가는
수행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보정안정정반방원역지 이런 내용이 그것이다.
길게 풀면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
의 내용이 그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이런 수행을 할 바탕이 다 되어 있는데
거의 대부분 이것을 전혀 하지 못하고
삶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매일 꾸준히 해도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러나 평생에 1 번도 안 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사정은 야마가 돌아서
이런 통속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야마천 즉 염라대왕이 질문할 때
스스로 생각할 때
하늘에 올라갈 만한 일을 한 것이
스스로 기억이 나는가
이런 질문을 할 때
스스로 이런 일 자체가 있고
야마님을 만나게 되는 상황이 있을지
그 자체를 몰랐다고 대답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정말 있던 없던
홀로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해보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생만 놓고 보면
긍정적인 경우에도
그 결과가 반드시 좋지 않은 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한 생만 놓고
그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산에서 한 줌의 손바닥 안의 흙의 비율처럼
전혀 낙관할 수 없는데
대부분 낙관하고 태평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글을 마치고
또 쉬고 난 다음에 이어서 앞의 내용을 잘 살피기로 하자.
현실에서 ▲-○-○-○-○ 의 상태로 묶인 상태에서
또 앞과 같은 여러 사정을 통해
▲-과 같은 부분을 얻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매 생을 그렇게 임해 나가는 것인데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
이 묶임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이다.
▲-○-○-○-○ 과 같은
사정을 그렇게 올바로 관할 때
▲-○-○-○-○의 묶임에서 가졌던 일체의 희망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야 그 안에 서원을 채워서
무량행문의 수행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쓸데없고 쓰레기 같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소재로 한 희망만
가득 담아 놓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의 묶임이 풀리면
현실에서 ▲-○-○-○-○의 상태에 같이 들어 있어도
그 성격이나 내용이 모두 그 반대로 되는 것이다.
묶인 상태에서는 하지 못하던
그런 것들이 모두 그 반대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로
상락아정의 상태인 본 정체를
본전으로 확보하고 나서
수행방안을 취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세계 여행도 떠나고
자신이 성불할 시점에
자신이 성취할 불국토를 놓고
서원을 만들고
삼천대천세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이런 것을 자유롭게 구상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된다는 차이를 낳는 것이다.
그러니 지극히 안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앞에서 계속 자신(나)의 본 정체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데
prince 님을 비롯한 일부 연구원이
그런 내용들이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실답고 정당한 판단이라는 근거가 되는 내용이지
어떻게 그것이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근거가 되는 내용인가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설명을 반복했는데도
이런 질문을 받으니 본인도
상당히 답답한데
또 설명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예상해보건대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길어지고
더 나아가 수행을 통해서 결국
수행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보게 된다.
지금 논의의 핵심은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내용을 놓고
어떤 이가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면
바로 그런 전도망상증상으로 인해서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그 결과로 고통의 생사를 받고
고통의 세계로 묶여 강제 여행을 다니게 된다
그것도 한 시간 두 시간 그렇게 묶여 지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무량겁에 걸쳐서 그렇게 묶여 다니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전도몽상 분별 + 집착 => 이에 바탕한 업 => 고통의 생사
이런 간단한 관계식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반대로 말하면 그런 전도몽상증상을
벗어나야 이런 고통의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한편,
또 바로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통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성취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또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고
그리고 자신의 불국토에 해당하는
삼천대천세계도 그렇게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일단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가부터 잘 파악해야
이후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제시한 내용들이
현실에서 대부분이 그런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그런 전도몽상을 전개하게 된 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계속 그런 내용을
제시해서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 안에
왜 그것이 엉터리 생각이고 망상분별인가 하는
힌트나 단서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그렇게 해서
그런 전도몽상을 일으켜 갖고
집착을 갖게 되는데
바로 그런 사정들이
바로 엉터리로 뒤집힌 전도몽상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분별하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게 한 사정이고
따라서 그것이 그렇게 엉터리인만큼
그런 내용 역시 실답지 않은 내용임을 잘 이해하여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할 사정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집착을 제거하고
망상분별을 제거하면
이제 어떻게 되기에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가 하면
기존에 그런 자신을 중심으로
집착을 갖고 묶여 있었던 것들로부터
풀려나는 해탈을 얻게 된다고
1차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그 전에는 어떠했는가하면
그렇게 자신이라고 보는 것을 놓고
그런 자신에게 무언가 좋은 상태라고 보게 되면,
그런 좋음을 집착해 추구하거나
또는 그런 자신이나 그처럼 좋음이 된다고 본 것들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상태가 되면,
그것을 놓고 고통받거나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중심으로
온갖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든 집착의 핵심이 되었던 자신에 대한 분별이
엉터리임을 알고
이후 그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면
이런 엉터리 망상분별에 묶여있던 상태로부터
풀려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1 차적으로 이와 같이 묶임에서 풀려난 해탈의
상태를 얻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후로는 그와는 달리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바탕으로
고통의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난 상태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고 성취하는
상태가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행을 통해
도대체 무엇이 그런 상태가 된다고 하는 가하면
적어도 앞과 같이 평소에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인데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가가 이 논의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
우선 현실에서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잘 파악하기로 하자.
앞에서 어떤 이가 살인을 행하고 30 년이 지나서
그 정신과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 달라져
자신은 과거 30 년전의 어떤 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수사관은 그렇게 보지 않고
그를 체포해서 감옥에 데려가려고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엄격히 보면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 이는
억울하다고 여길만하다.
왜 배추밭이나 취퀸집에서 막 새로
이 방으로 이사온 자신을
다른 이의 사건과 관련시키는가.
이런 식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설득력있게 비유를 든다면
그는 또 한편 그 사건 이후 또 다른 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치매상태라고 해보자.
그러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그는
전혀 자신의 과거를 모르고
사정을 이해못하는데
수사관은 자신을 범인이라고 체포해서
감옥으로 묶어 끌고 가는 것이다.
수행자가 처음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대부분 이해하는 내용이
사실은 그렇지 않고
실다운 자신은 여기에 없다고 여기는 상황은
어떻게 보면 이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그가 현실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이 상황을 원만히 해결하고 벗어날 수 있는가가
수행자가 첫번째 수행과 관련해 행할 문제이기도 하다.
비록 그런 상황에서 그는
그 자신이 과거의 어떤 이와는 전혀 달라진 다른 주체일 뿐 아니라,
이 어느 경우에서나,
자신이나 남이라는 등으로 분별할만한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사람들이 자신이나 남이라고 분별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자신이나 남이나 모두
과거의 어떤 이로부터 계속 그 지위와 특성을 상속을 받아
변화되어 온 동일한 주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상황이다.
그러니 이런 현실에서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잘 해결할 것인가가
수행과정에서 처음 문제되는 내용이 된다는 의미다.
경전에서 나오는 앙굴마라라는 수행자도
사정이 이와 비슷하였다고 한다.
999 명을 살해하고
부처님을 만나 수행을 시작하게 되고
나중에 아라한도 되었는데
문제는 그가 마을을 돌아다니면
그를 모두 흉악한 살인자로 보고
돌을 던지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를 놓고 앙굴마라에게
앙굴마라는 전혀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라고
가르침을 주시는 내용도 나오는데
비슷한 사례가 많다.
여하튼 일반적인 현실상황이란,
수사관뿐만 아니라, 보통의 대부분의 사람이나
또 그 자신까지도
모두 처음에 제시한 내용처럼
그렇게 자신과 남을 보고 대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현실에서
무엇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부스럼이 있을 때
이것을 자꾸 긁어 더 악화가 되는 점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거나
또는 남이라고 보는 내용들을 놓고서
그처럼 전도몽상 분별을 일으켜
이를 계속 집착하고 반응을 해나가게 되면
원래 있던 문제는
계속 악화되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입장에서
이런 상태를 벗어나려면
우선 앞의 비유에 나오는 수행자처럼
처음에는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나
또는 남이라고 보는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는 내용임부터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은
앞의 비유와 상황이 같다.
따라서 일단 그 사정을 잘 이해한 바탕에서
다시 수행자가 취해야 하는 방안은
곧 경전에서 제시되는
계 정 혜의 수행방안을 잘 지키고 행해 나가야
비로소 부스럼을 진정시키고
과거의 업의 장애가 불러 일으키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자신이나 남이나 하나같이
그런 내용이 사실이 아닌데도
각기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그처럼 얽혀
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황에서
그가 이를 억울하게 여길지라도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 비록
수행자는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본인만은 잘 이해하게 되었더라도,
현실에서 수행은 그처럼
방향을 잡고 정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현재 연구실에서 행방불명된 인턴연구원도
사정이 비슷하다.
과거의 어린 인턴연구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육체나 정신의 구성요소도 크게 다른 어떤 소년이
자꾸 연구실에 자신이 그 과거 인턴연구원이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나는데
이 경우가 처리가 문제된다.
이 경우 본인만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상대의 그런 주장에 동조해주면서
그에 맞추어 대우해줄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자가 각 경우에 취하는 기본 방향이다.
원래 본 바탕을 놓고 본다면,
이들이 모두 전도몽상상태에서 그런 분별을 행하는 것이므로
이들을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지만,
수행자가 현실에 임할 때는
우선 자신부터 그런 업의 장애에서 벗어나야 하기도 하고
또 이후 업의 장애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다시 전도몽상증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얽히고 묶여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중생의 상태를 기준으로 놓고
수행자가 이에 맞춰 방안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복덕자량을 얻는 수행을 행하지만,
이런 복덕을 얻는 것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되므로
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계속 해나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prince 님이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전도몽상분별이라고 하면서
수행자가 일정 부분을 수행자라고 하고
또 다른 이를 다른 이라고 여기면서
수행을 행하는 것은
왜 수행이라고 하는가 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데
그 사정이 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도 대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
그 사정을 그와 같이 밝히고 계신 것이기도 하다.
비록 깨달아야 할 내용이
언어를 떠난 것이지만,
그렇다고 언어를 통해 그 사정을 그처럼 제시해주지 않으면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전도몽상분별과 고통의 상태를 벗어나지도 못하므로
자비심을 일으켜
그렇게 언어로 설법도 하고
가르침도 베푸시게 된 기본 사정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불국토의 장엄이나 극락정토와 같은 것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를 놓고 보면
성불이나 중생제도 불국토장엄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쓸데없는 일이라고 할 만한데
그러나 수행자가 그렇게 해야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바탕에서
엉뚱한 전도몽상분별을 일으켜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서로 얽혀 고통을 무량하게 증폭해 받아나가는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기에
방편상 그렇게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사정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각 주체가 처음 어떻게 해서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또 다른 부분은 남이라고 보고
그렇게 집착하면서
업을 행하여 나가게 되었는가 그 사정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잘 이해하고
이 내용들에서 무엇이 엉터리이고 잘못된 분별인가를 이해하고
이런 이해를 통해
이후 엉터리 분별과 그에 바탕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미 그 내용을 상-락-아-정이란 내용과
관련시켜 나열했는데
이런 사정들 때문에
현실에서 어떤 이가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집착을 갖게 되고
이에 대해 집착을 도저히 버리지 못하고
힘들어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이미 앞에서 살폈는데
자신이 바늘을 들고 여기저기 찔러 보는데
벽이나 책상은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고
심지어 다른 이라고 보는 경우는 별로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데
그러나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서만은
전혀 그렇지 않고 견디기 힘들게 된다.
이런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이 부분에서
이것을 극복해 나오지 못하고
다시 묶여 끌려 내려가게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내용이
수행자가 넘기 힘든 최대의 고비라고 할
안인 고지에서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즉 수행자가
왠만한 이론은 다 이치상으로는 이해했다고 해도
현실에서 막상 누군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고
톱으로 잘라대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그런 상태에 닥치면
자신이 그 이전까지 어떤 신통한 방편이라도
취득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모두를 다 발휘해서
그 상대를 해치고 벗어나려고 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바로 이런 반응 자세가
앞에서 예를 든 기억 상실된 범인이
수사관에 대해 취하기 쉬운 반응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결국 이런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안인 고지를 넘지 못하고
안인의 수행을 성취하지 못하면
결국 부스럼이 일어나면 이를 다시 긁어
또 다시 서로 집착에 얽혀
부스럼이 무량하게 악화되가는 상태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안인을 성취하여 무생법인을 얻고
다시는 이전의 상태
즉 전도몽상분별에 바탕해 업을 행해 나가던 상태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사정을 보면
결국 그 사정은 앞과 같은 것이다.
결국 무엇이 잘 안 되어서
그렇게 되는가하면,
앞에서 처음에 제시한 것과 같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에
어떤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오게 되면
그처럼 이전의 전도몽상 상태로
물러나 그에 바탕해 행하면서 머물게 되기에
그런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일반적인 전도몽상 상태에서
대부분 자기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것을
수행자 역시 실다운 자신으로 여기고
전도몽상을 일으킨 일반 중생과 똑같이 반응하기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이에 바탕해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본인이 다음 캐릭터를 사용한다.
쉬었다가 다시 글 쓸때마다
이 캐릭터를 붙이는 것은
이 부분이 쉰 다음 새로 시작하는 부분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한데
이렇게 캐릭터를 반복해 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캐릭터가 본인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prince 님이 본인 글을 보다가
기분이 나쁘다고
이 캐릭터에 이 x 는 xxxx다 이런 식으로
모욕적인 내용을 적어 올리면
본인이 어떻게 반응하게 된다고 일반적으로 보는가.
대부분 분노를 일으키고
다른 보복 방안을 찾아 나서기 쉽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앞의 문제가
이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캐릭터로 비유한 상황은
사실은 현실에서 각 생명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들이 바로 그와 같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캐릭터나 자신의 몸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부분에 대해 침해가 있게 되면,
대부분 일반적으로
그것을 잘 평안히 참고 벗어나오지 못하고
부스럼을 긁어
그 문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삼계 육도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자신의 몸을 위 캐릭터처럼 관하고
그리고 그 실재가 공함을 관하고
그 캐릭터나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집착을 제거하고
벗어나와야 하고
그리고 그에 바탕해
수행을 정진해나가야 하는 것인데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자신의 몸이 아니라,
자신의 캐릭터나 이름이 적힌 명함 이런 것까지
일일히 다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임하면
그 상황은 더욱 악화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수행방안이란
결국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행하는 행위를 중지하는 것이고
또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일반적으로 행하기 쉬운 내용과는 반대로
좋음(+)을 아끼지 말고 다른 생명에게 베풀고
나쁨(-)을 다른 생명에게 가하지 말고
나쁨(-)을 받더라도 이에 대해 상을 취하지 말고 이를 평안히 참는 등의
수행부터 원만히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 바탕으로서,
먼저 수행자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부터
올바로 잘 판단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즉, 자신은 지금까지
앞에서 나열한 그러그러한 여러 사정으로
매 순간 그처럼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는 내용을 놓고
매 순간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가운데
과거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렇게 그렇게 끌려 왔는데
그런데 왜 그것이 그렇지 않고
그런 내용이 모두 전도된 몽상분별이라고 하는가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평소에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실답게 나라고 할 내용이 아님을 살피고 있는데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그렇게 보는 자신에 집착을 갖고
또 그런 바탕에서 나와 남을 분별하는 가운데
고통의 생사를 받아 나가게 된다.
그런데 prince 님처럼
분명히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컵을 두드릴 때
그 촉감도 느끼고
그 소리도 듣게 되므로
이런 내용이 실다운 대상이기도 하고
그런 감각을 하는 그것들이
실다운 주관 즉 자신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기껏 그런 경험을 반복하는 사정으로
그런 내용이 자신이라고 전도망상을 일으키게 됨을
제시했는데
오히려 그런 내용이 자신의 전도망상이
올바르고 정당한 내용이라고 반대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인과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기로 하자.
왜 컵을 손에 대면 그런 촉감이 느껴지게 되는가.
또 왜 컵을 손으로 두드리면 소리가 나야만 하는가.
이것은 대부분의 인과관계에서 같은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왜 종이를 불로 태우면 연기가 나는가.
전도몽상상태에서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그것을 왜 거꾸로 묻는가
이렇게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종이에서 연기가 나야 한다는 법이
원래 있었는가.
종이에 연기가 포함되어 포장되어 들어 있기라도
했는가.
컵에는 그런 소리가 보관되어 있기라도 했었는가.
이상한 일 아닌가.
컵을 두드렸는데 왜 연기가 나오지 않고
소리가 나는가.
이처럼 이상한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바로 이것이 전도몽상 증상인 것이기도 하다.
prince 님은 다행히
자신이 눈을 떠서
손을 컵으로 만지는 모습을 볼 때
손과 컵과 같은 모습이
자신이 마음에서 얻어낸 내용임은 이해한다.
그래서 그 마음안의 내용으로서 그 모습들이
직접 서로 대상과 주관이나 감관으로 관계해서
그런 소리를 얻게 된다거나
그런 촉감을 얻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일반인의 입장보다는 상당히 나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눈으로
본 그 내용들이 곧바로 외부 대상이고
또 자신이 그런 감각을 얻게 되는
주관적 감각기관인 것으로 오해한다.
즉 자신이 컵을 손으로 두드릴 때
자신이 보는 자신의 손이 촉감을 얻게 한
촉감기관인 것으로 일반인들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prince 님은 적어도 그렇지 않다는 것만은
이해하는 것이다.
다만 prince 님은 마음에서 이런 모습을 얻고
소리도 듣고 촉감도 얻을 때는
그에 상응한 something special 한 내용이
실재의 영역에 있는 것이어서
이런 실재의 대상과 실재의 주관이 서로 관계하여
마음에 그런 각 내용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prince 님이 실재에 대해 주장하는 내용은 다시
논의의 대상이 되지만,
적어도 prince 님이
자신이 보는 컵이나 손이 외부대상이나 감각기관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그런 의미에서 주관이 아니라는 것만은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사정을 다음그림을 통해서 잘 이해해보기로 하자.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처음 1 이라는 주체가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되면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손이 4와 같은 곳에 있는 컵을 만지고 두드리면
소리도 듣게 되고
촉감을 느끼게 되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경우에
그런 4 와 같은 컵이 외부대상이고
이 컵에 댄 손은 자신의 촉감을 담당하는 감각기관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만져보는 눈은 자신의 시각을
담당하는 기관이고
귀는 청각을 담당하는 기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앞 조각글에서 살핀 것처럼
다양한 실험을 하면
1 이란 부분은 다른 부분과는 서로 차이가 난다는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이 상황을 설명하면
자신이 눈을 떠 보는 세상의 모습들을 놓고
바늘을 가지고 여기저기 찔러 본다고 한다면
위 그림에서 1 의 부분에서는
통증을 느끼게 되는데
나머지 부분은 적어도 자신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차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2 나 3 을 찌른다면 그 사람이 비명을 지르기는 하겠지만,
여하튼 1 자신은 직접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1 의 부분과 나머지부분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여러 실험을 통해서
결국 1 은 나 자신이고
나머지는 외부 대상의 내용이라고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경험이
결국 1 과 같은 부분이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행하게 하고
이에 집착을 갖고 현실에서 임하게 만드는
사정이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부처님이 무아, 무자성, 공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위와 같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에는
실다운 나가 없다고 반복해 제시해도
현실에서 경험하는
위와 같은 내용들때문에
그런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지
못하고 계속 묶여 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 실험과 함께
또 다른 실험을 추가해 보아야 한다.
저렇게 모습을 보는 가운데
일단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나머지는 똑같이 실험을 해보자.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나머지 부분은 마찬가지다.
컵을 만진다면 촉감도 느끼고
소리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본 모습은 그런 촉감을 얻거나
소리를 듣게 한 원인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보면 촉감을 얻고 소리를 듣는 상황에서
동시에 함께 얻게 된 시각정보일 뿐이다.
그래서 먼저 앞에서
자신이 본 모습 가운데
컵의 부분과 손의 부분이 서로 관계해서
그런 소리나 촉감을 얻었다고 이해하는 망상부터
잘 정리를 해야 한다.
컵의 모습과 손의 모습이 서로 닿았다고
왜 촉감이 느껴져야 하는가.
그것은 종이를 불에 태우면 왜 종이에서 보이지 않던
연기가 나오는가의 질문과 성격이 같다.
그런데 전도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자신이 그 내용을 반복해 경험했기에
이 이상한 관계를
너무나 당연한 내용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컵에 손을 댈 때 왜 연기가 안 나고
소리가 나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놓고
처음부터 잘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다시 그림을 보자.
1 이 컵에 손을 대고 두드릴 때
촉감도 느끼고
소리도 듣게 된다고 하면서
그것이 외부대상이고 자신의 감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은
2 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2 가 무엇을 본다고 하면 그 내용은
5 ^ 와 같은 상태로 그 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하게 된다.
이 때 2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림을 잘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2^ 에 달려 있는 손이 4 ^ 부분에 있는 컵을 만져서
그래서 촉감을 얻고
그래서 소리를 듣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이야기가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검토하고 쉬기로 한다.
사실 자신이 눈을 떠서 본 내용에
그런 외부대상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그 동안 많이 검토했는데
그렇게 외부대상을 판단한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 가운데
그런 외부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나머지 부분을
자신이라고 분별하고 망상을 일으키는 주된 사정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잘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엉터리로 망상 분별을 행하면서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분별하면서
집착을 갖게 되기에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본인이 자는데
어떤 한 수행자가 다가와
더 이상 당신의 글을 볼 수가 없다.
이러면서 총을 본인의 귀에 대고 쐈다.
그러니까 피가 머리에서 흘렀는데
그 촉감을 자면서 느꼈다.
꿈에서 총을 쏴 머리를 맞고
피가 흐른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
그런데 그렇게 꿈에서 여겨지는 것이다.
이제 일반인이 갖는 전도몽상은
앞의 그림을 잘 살펴서
해결하기로 하고
다시 prince 님의 문제로 들어가면
자신이 현실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얻고
또 이상하지만,
매번 그와 병행하여
일종의 부대상황의 내용으로서
촉감도 함께 얻고
소리도 함께 반복해 얻게 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재에 그런 내용에 상응하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그에 비례하거나
유사한 형태로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현실에서 얻는 그 모든 내용을
실재 영역으로 밀어 넣으면
prince 님의 주장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다시 비유를 들어보자.
TV 나 그림책이나 만화책 등에서
어떤 주인공이 손을 내밀어
컵을 쥐고 두드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앞에서 지적한 것은 그런 장면이 나타날 때
어떤 모니터 한 부분의 화소(손에 해당하는 부분)가
다른 모니터 한 부분(컵)을 닿거나 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 모니터 화소가 그렇게 변화했다고 해서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눈을 떠서
손을 내밀어 컵을 만지고 두드릴 때
자신이 보는 그런 내용이
그런 소리를 내고
그런 촉감을 얻게 한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은 위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위 비유를 통해
평소에 갖던 망상분별을 잘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은 그런 내용이
마음안의 내용이어서
그것이 외부대상이거나 한 주체의 감관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모니터에서 그런 모습이 보일 때에는
그에 상응하여
그런 모습이 모니터에 나타나게 한
실재의 배우가 손을 내밀어 실재의 컵을 만지는 상황이기에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모니터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그대로 실재 영역으로 집어 넣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가 또 문제되는 것이다.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a + b => C 의 관계로 설명한 것이고
또 앞에서 본인이 꾼 꿈 이야기를
비유로 든 것이기도 하다.
자주 든 비유이지만,
침대에 누어서 바다꿈을 꾸는데
헤엄을 치다가 섬에 도착했다.
거기에 컵이 있어서
자신의 손을 내밀어 두드리니
소리가 났다.
이제 꿈을 깨었다.
침대에 그 바다와 그 섬과
그런 컵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그런 고민을 잘 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본인이 오늘 쉬는 동안
음악을 들으면서 잠을 잤는데
음악소리에 본인이 빨려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잠깐 놀란 적이 있었다.
다양한 꿈을 꾸지만,
소리 안에 본인이 들어가는 그런
이상한 경험은 본인도 처음이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는 문제는
사실은
평소에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이것이 송두리채 다 없어지는
그런 상황
또는 그렇게 된다고 예견되는 상황
예를 들어 중병이 들어
이제 죽을 순간만 기다리게 되는 순간
그런 경우 이 문제가 바로 직결되는 문제다.
그렇게 통증을 주고
손으로 만지면 촉감도 주고
그런 각 부분이
정말 자기 자신인가.
아닌가.
바로 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잘 깨달으면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곧바로 도일체고액 하고
무유공포 원리 전도몽상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그 상태는 계속 그렇게 유지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싸여
지내다 죽은 영혼은
설령 귀신이 되어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에 바탕해서 또 같은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또 그에 바탕해서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해 업의 장애에 묶인
귀신이 되어 활동하는 것이다.
사정이 달라져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정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따뜻해서
운동삼아 가까운 거리를 자전거로 달리고
돌아왔는데
나이가 들어서 무릎도 많이 아프다.
위 문제를 놓고 간단히 실험하는 방안을
여러가지로 소개했는데
자주 반복하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간단하므로 추가 소개하고 일단 글을 마치기로 한다.
1 눈을 감고 뜨고 하는 운동을 스스로 반복한다.
1 그런 가운데 눈을 떴을 때 얻는 내용을 잘 확보하고
감을 때 사라지는 내용도 잘 확보하면서
앞의 내용을 잘 검토한다.
1 그러나 무인도에서 혼자 있는 상황이 아니면
위와 같은 실험을 다른 이에게 하게 하고
자신은 그를 잘 관찰한다.
그가 눈을 감고 뜰때마다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보고하는지도 잘 듣고
그것이 무슨 상황인지
그리고 앞에서 자신이 행한 실험에서는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 것인지
잘 헤아려 보는 것이다.
1 그 다음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볼 때
자신의 손가락으로 눈을 지긋히 눌러 본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 눌러서
왜 자신 외부의 세상이 모습이 달라지는지
잘 헤아려 본다.
1 짙은 색으로 된 선글래스
돗수가 매우 높은 안경들을 구해
썼다 벗었다를 하면서
또 앞과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왜 자신이 안경하나 바꾸어 쓸 때마다
외부 세상이 다 그렇게 변하는가.
이런 실험은
자신이 외부대상이나 자신의 감각기관이라고 이해한 내용이
사실은 그런 내용이 아님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힌트다.
그러니 실험은 간단하지만,
위 실험을 반복해 행하면서
위 내용을 잘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추가로 살필 것은
a + b => C 의 관계로
자신이 파악하는 인과문제를 놓고
다시 잘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제시한 내용이 모두 이와 관련된다.
이상하지만,
자신이 보는 손의 모습이 컵의 모습에 닿으면
그 모습에는 없다고 보는
촉감이 느껴지고
소리도 들린다.
이런 내용들이 모두
자신이 a + b => C 의 관계로
정리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왜 손을 컵에 대면 연기가 나지 않고
소리가 나는가는 상당히 이상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매우 빈번하게 반복되는 일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a + b => C 의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추가로 필요하다.
위 a + b => C 의 관계식은
현실에서 C 라는 내용을 얻었는데
그것이 그런 조건에서 얻는
임시적이고 실답지 않는 내용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C 를 현실에서 얻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얻는 것이므로 그것이
실다운 것이 아님을 위 식의 나타내는 것이다.
꿈을 다시 생각해보면 쉽다.
꿈을 꿀 때 꿈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꿈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
그런 상태에서만 임시적으로 얻고
그 조건이 사라지면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꿈을 깨고 나서
꿈을 놓고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꿈 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꿈 내용을 꿈 꾸는 동안 얻고
꿈 안에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피도 흘리고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런 내용들이어서
실답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a + b => C 의 관계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일체개공
그리고 열반적정을
모두 그 안에 포함해 설명하는 내용이라는 사실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이 내용을 반복해 설명했기에
생략하지만,
위 a + b => C 의 관계식은
그렇게 얻는 C 는
결국 그런 관계를 떠나서 실재하는 내용이 아니고
또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님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 없다가 나타났다고 제시한 것이므로
그런 C 는 무상하다는 것도 함께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 자체가
영원불변한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같이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현실에서 보는 자신이나 세상의 모습을 놓고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놓고
이 내용의 상호관계를 살피면
자신이 감각현실에 A 가 있다 없다고 생각한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는 하등 얻어지지 않는 내용들임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판단을 통해
평소 전도몽상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가진 내용에 대해서
그것을 제거하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실다운 자신이 아님을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놓고 생각하면
현실에서 온갖 생사 고통에 노출되는 자신을
대하게 마련이다.
화엄경 보살문명품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재수보살이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이것은 적멸함을 좋아하면서
많이 들은 이들의 경계거니와
내 이제 당신 위해
말을 하리니
어진 이여,
자세히 잘 들으시오.
분별하여
이 몸을 관찰하시라
이 가운데
무엇을 나[我]라 하리요.
만일 능히 이렇게 이해한다면
나랄 것 있고 없음
통달하리라.
이 몸은 거짓으로 되어 있는 것
머물러 있는 곳도
방소(方所) 없나니
진실하게 이 몸을 분명히 안 이는
이 속에 집착하지 아니하리라.
이 몸을 분명하게 관찰한 이는
온갖 것을 모두 다 밝게 보리니
모든 법이 허망한 줄 알게 되어서
마음 내어 분별하지 아니하리라.
수명(壽命)은 어찌하여
일어났으며
무엇으로 인하여
멸해지는가
불 돌리는 바퀴와 흡사하여서
처음이나
나중을 알지 못하리.
지혜가 있는 이는
온갖 법들이
무상한 것인 줄을 관찰하리니
모든 법이 공하고
나가 없어서
영원히 온갖 모양 떠났느니라.
모든 과보 업을 따라
나는 것이니
진실치 아니함이 꿈과 같아서
언제나
잠깐잠깐 멸해지는 것
지나간 것과 같이 앞도
그러해.
세간에서
보는 바 모든 법들이
마음으로 주재[主]가 되는 것이라
소견 따라
모든 모양 취하게 되면
전도하여
실제와 같지 않으리.
세간에서
언론으로 따지는 것은
온갖 것이 모두 다 분별뿐이니
이 가운데
본래부터 한 법이라도
법성(法性)에
들어가지 못하느니라.
능연[能緣] 소연[所緣] *
그런 힘으로
가지가지 모든 법이 생기거니와
곧 멸하고
잠깐도 못 머무나니
찰나찰나
모두 다 그러하니라.
...
대방광불화엄경80권본 K0080 T0279 보살문명품 제 10
[...]
수행자는 보리심을 일으킨 다음
이와 같은 보리자량을 얻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무량한 수행을 행해 나가면
다시 이를 통해 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고
경전에서 제시한다.
[참고 대반야바라밀다경 초분 정토방편품 제 73 ]
그래서 보리 가운데 가장 수승한 보리라고 할 수 있는
삼먁삼보리를 얻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런 보리자량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보리자량의 핵심적인 내용은
세간의 온갖 선법임을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삼먁삼보리에서
삼먁삼이 무슨 말인가를 보면
한자어로 정등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올바른 정 - 평등한 등 - 올바른 정
이런 말이 연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를 놓고 생각하면
차별을 세울 수 없는 실재의 평등한 측면에 대한
차별없는 무분별의 올바른 지혜의 측면과
다시 현실의 차별상을 놓고 분별하는 가운데
얻는 세속적이고 방편적인 분별적 지혜가운데
올바른 지혜를 아울러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정등정'과 비슷한 형태의 구문에는
무등등이라는 표현도 자주 경전에서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이것도 결국 이런 두 측면을 함께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삼먁삼보리로서
부처님이 얻는 위없는 깨달음의 상태를
무상정등정각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칭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런 다양한 형태의 보리가
현실 생활에 대단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리는 수행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 그런 깨달음을 얻는 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
이와 별도로
대지도론에서 제시하는 5 종 보리란 내용이 있음도 함께 살피게 되는데
이는 조금 전문적인 내용이다.
대지도론에서는
발심(發心) 복심(伏心) 명심(明心) 출도(出到) 무상(無上)보리의
5 가지 보리를 나열하는데
이는
처음 수행자가 보리심을 일으켜 깨달음을 구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이후 번뇌를 제거하고 마음을 항복받는 과정
그리고 모든 현상의 실재가 본래 청정함을 깨닫고 관하는 과정
그리고 다시 현실에서 3계의 속박을 벗어난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는데 필요한 방편지혜를 얻는 과정
그리고 성불하여 얻는 구극의 무상정등정각의 상태를
이처럼 5 단계로 나누어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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