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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공의 효용 본문
● 공의 효용
○ 가을이 되면 날씨도 선선해지면서 낙엽도 보게 되고,
세월이 흘러감을 느끼고 무상함을 느낀다.
논의 주제가 불교이다 보니, 어제도
깨달음과 미혹이란 글을 올렸는데,
대강 불교 논의는 종국적으로는 공의 미스테리로 넘어가게 된다.
○ 현상의 발생에 대한 인과관계적 해석의 오류 |
어제의 논의의 귀결은 다음이다. [참고] 어제의 논의- ▩[ 디스크 ]▩ DISK D:G\G\08\budr\budr-0010.htm // ж[ 웹 ]ж web http://buddhism007.tistory.com/136
(old http://blog.paran.com/buddhism007/45782205 )
즉, 현상의 발생과정에 대해서 우리는 요소간의 화합과정 또는 인과 관계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잘못이고 결국은 미스테리(불가사의)한 실재의 공함으로 귀결되게 된다.
어제의 논의에서 현상의 발생에 대해 올바른 해석은 "여래장의 미묘한 공덕"이란 표현으로 표현함을 보았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재의 공함"과 같은 내용을 뜻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을 떠 무언가를 보는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인과관계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의 눈이 그것을 대할 때,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빛을 전달받고 시신경이 흥분하고 뇌 세포가 흥분한 내용이 우리가 보는 영상(모습)이다.
이것이 '우리가 늘 자연스럽게 행하는 감각과 인식과정' 에 대한 기본적이고 과학적인 일반적 해석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이 기본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어제 적은
수능엄경[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 수능엄경]에서의 부처님 설법 내용이다.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 무엇이 잘못이라는 것인가?간단히 이해하면, 위 내용은 제 3자가 눈을 떠서 어떤 물체를 대하여 보고 그가 무언가를 보았다고 외칠 때
그 과정을 관찰자가 관찰하고 기록한 내용과 같다. 그렇게 그렇게 보이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무엇이 잘못인가?
이런 해석에 담겨 있는 오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우선 위에 기술한 내용들 즉 눈, 대상, 빛..등으로 나열한 각 요소들은 모두 우리(관찰자)의 마음안의 영상으로 얻어지는 내용들이다.
그렇게 마음의 영상에서 얻은 모습을 통해 생각할 때,
어떤 사람이 외부 대상을 대해 눈을 떠 무언가를 보는 과정은 그와 같은 요소들간의 인과작용, 내지는 화합반응이 있음이 분명한 것 같처럼 생각된다.
즉, 그 대상과 그 사람의 눈이 관계하고, 또 그 사람 내부에서 빛과 시신경이 관계하여 그 사람의 신경이 흥분하고 그 사람의 뇌안에서 무언가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해석이 오류이며 잘못이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앞에 나열한 요소들 ( 눈, 대상, 빛) 은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게 되는데에 '실재로' 관계하고 작용하는 내용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그런 내용들이 아니고 단지 관찰자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으로 얻은 관찰자 마음안의 내용물이다.
그래서 관찰자의 생각에는 그런 것들이 관계하여 보는 것처럼 이해되지만, 그러나 관찰자의 마음안의 내용이, 직접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예들로 이해해보기로 한다.
만화나 영화를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만화나 영화 화면에서, 여러 그림을 연달아 보여주면
어떤 내용간에서 서로 연달아 반응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화면 안의 내용 사물들이 서로 접촉하고 작용하고 화합하고 반응하고 결과를 일으킨 것처럼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만화나 영화에서 망치로 그릇을 깨는 모습을 본다면, 영화속의 망치가 정말 그릇을 깬 것처럼 여겨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만화나 영화를 통해 이 관계를 이해해보면 사실은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가 바로 앞과 같이 사람이 눈을 떠 모습을 보는 관계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적용된다.
○ 잠깐 LAB님의 자료사진의 도움을 받아 그 오류를 다음과 같이 이해해보기로 하자.
우선 위와 같은 TV 화면에서 칼이 무우를 닿아 무우를 써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화면속의 무우와 칼은 서로 닿거나 떨어짐이 없다.
그리고 화면에 비추인 그 칼과 무우의 모습 사이에는 그런 반응과 화합이나 작용의 관계가 없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저 화면의 점[화소, DOT]들이 그런 관계를 서로간에 갖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이 상황에서 이렇게 이해한다.
저 화면의 점[화소]들은 물론 그렇게 서로 상대하여 반응하고 원인과 결과관계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점[화소]들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배경에는 그런 내용들과 비례관계에 있는 무언가가 있다.
예를 들어 그 화면을 촬영한 현장에 있던 실제 인물(배우)들과 실제의 칼과 무우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런 작용 화합의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이 관계를 일으키고 그리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이 화면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화면에서 칼이 무우를 썬다고 보이는 것은 그와 동등한 실제의 칼과 무우의 관계로 옮겨 이해하여,
결국 같은 내용이 된다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대강 우리가 이해하는 과학적 이해방식도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쌓아 올려진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는 여러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보는 현상의 내용은 우리가 마음으로 얻은 영상안에서 일정한 요소가 다른 일정요소와의 사이에 갖는 관계다.
그런데 엄밀히 말할 때 우리가 우리의 마음안에서 얻어 놓은 영상안의 내용들은 서로 그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즉, 우리 마음안의 내용물이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떤 물체를 보는 과정을 일으키게 하는 진짜 요소는 아니다.)
그렇지만, 앞의 영화화면과 실제 배우의 관계처럼 이 내용을 놓고 이에 대해 다시 재해석을 하게 된다.
즉, 비록 관찰자가 본 관찰자의 마음안 내용물들 '자체'에는 그런 관계가 없지만,
그러나 그런 영상(모습)을 얻어 보게 된 배경에는
관찰자가 보고 감각한 내용들에 상응해 비례하는 '무언가 실재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재내용들이 그렇게 관찰자가 본 내용과 관계처럼 관계를 맺고 반응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인과관계로 믿는 내용도 그런 철학적 추리를 바탕으로 제시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현상에서 A와 B가 서로 원인 결과관계를 갖는다고 이해하는 것은
결국 그런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크게 잘못은 아니라고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선, tv 화면의 각 내용 예를들어 칼과 무우 배우들은 서로 원인-결과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런 화면안의 내용들과 달리, 그 화면을 찍은 촬영 현장에 있는 진짜 칼과 무우 배우들은 서로 원인-결과관계에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대하는 현상을 앞의 tv 화면처럼 이해한다면,
우리가 본 내용들은 우리의 마음안에 맺혀진 영상이다.
그래서 그 현상안의 내용들은 앞의 tv 화면의 각 내용들처럼 하나의 영상일 뿐이며
이들 내용 자체가 서로 원인 결과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실재의 요소는 서로 원인-결과 관계에 있는가.
그런데 공한 실재의 세계에서 위와 같은 추리를 적용하려고 하다 보면, 하나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앞의 TV 화면에서는 tv 화면 영상과 그 화면을 찍은 촬영현장의 배우나 칼 등등이 그런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대하는 영상[현실,현상]과 실재는 그런 관계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본다, 느낀다, 경험한다, 생각도 한다. 그러면 이것들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미스테리(불가사의)한데
그러나 우리가 보는 현실은 그렇다.
그것을 어제 수능엄경에서는 ' 여래장의 미묘한 공덕~~' 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실재는 공하여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도 하고, 희망도 갖고 두려움도 갖고 만족도 느끼고 불만도 느끼고
여러가지로 살아가는 그 모든 내용이 우리에게 마치 진짜인 것 처럼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굳건하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또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사라지기에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기 힘든 것이다.
○ 그러면 실재가 공하다는 내용이 주는 효용이 무엇이길래
계속 반복하여 강조하는가. 그것이 의문이라면 의문이다.
이 부분에서 과거에 어디선가 본 글이 생각나 찾았는데 찾지 못하던 중
LAB님이 긴급히 도와주어 찾아냈다.
덕분에 자료사진도 얻고,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우리가 보는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마음 안의 내용물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안에 그런 내용물을 얻게 해주는 실재는 그것이 아니고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들의 실재는 공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가 눈을 떠 모습을 보는 과정을
대상- 빛 - 눈 - 뇌 이런 대강의 관계를 갖고 이해한다.
만일 앞 내용과 뒤 내용을 상응 비례 결합시키면
실재의 대상[공]- 실재의 빛[공] - 실재의 눈[공] - 실재의 뇌 안의 영상[공]
이렇게 각각의 실재가 관계하여
우리가 보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 실재의 상태에서는
위와 같은 '비례'나 '분리' 관계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대상-빛-눈 이렇게 현상에서 분리해 관념짓지만,
그것은 이미 일종의 최면에 걸려 있는 우리의 의식에서만 그런 것이지,
실재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공함의 상태에서
대상의 공함, 빛에 대응한 공함, 눈에 대응한 공함 그런 식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공함이 얻을 수도 없는 가운데
어떤 자료를 하등 주는 것도 없으면서 공하다고만 말하니,
답답해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것이라고 본다.
● 우선 왜 현상에서 대상-빛 - 눈 - 뇌 이런 관계로 분할 된다면,
이 각각에 상응해서 실재도 대상의 실재 - 빛의 실재...등등으로 비례해 분할할 수 없는가.
이것부터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하나 그 실재는 공하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얻지 못하는 공으로 직접 들어가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얻는 현상 내용들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본다.
굳이 직접 공의 상태에서 해결하려면 -앞에 말한 ' 얻지 못한다'가 바로 그 대답이다.
얻지 못하기에 비례한다 안한다. 하나다 둘이다. 여럿이다 등등 일체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의 편의를 위해 비유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여러 감각기관이 있다. 그 각각으로 여러 내용을 얻는데
눈으로 얻는 색의 상태를
귀로 얻는 소리의 상태로 비례해서 변환하지 못한다.
예를들어 눈으로 본 빨간 색 또는 노란 색은 소리의 세계에서는 무엇인가.
또 귀로 들은 피아노 소리, 바이올린 소리는 또 눈으로 보는 색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색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색깔의 있고 없음, 진하고 옅음,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무지개 색깔은
각기 소리의 세계에서는, 향의 세계에서는, 맛의 세계에서는, 촉감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비례하고 관계가 성립하는가 부터 차근차근 검토해봐야 한다.
비록 여기서 일부 비례관계가 성립한다해도
그것이 현실과 실재의 내용간에서도 그처럼 비례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밝히는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현상과 현상들의 관계에서부터 그런 비례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현실과 실재가 그런 관계에 있다고 할 근거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실재의 내용을 하나도 얻지 못하므로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 물론 과학자들은 일부의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근거로 내세울 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적어도 앞에서 본 tv 화면이나 사진기로 얻는 사진영상들은
서로 다른 내용들간에 갖는 비례 변조의 관계를 기초로 우리가 얻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리는 빛으로 보면 그래프에 그려진 파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리는 전파로 변환되고 전파는 다시 스피커의 진동을 울려 소리로 다시 변해 나오게 된다.
이 같은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tv로 영상을 보는 관계도 그처럼 무수한 변조 관계를 거쳐서 우리가 그런 영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들어 색깔은 전파로 전파가 화소로 변하고,
음성 소리는 전파로 변하고 전파가 스피커를 울려 다시 소리로 나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나 보이는 것이 우리가 지금 보는 tv 화면과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우선 여기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간에 그런 대응관계를 딱딱 분리시켜 성립시킬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네가 본 노랑색이 직접 이 아~~~아의 소리인가?
아니면 네가 본 파랑색이 이 으~~~~~윽의 소리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현상과 현상 안에서도 그런 대응 분리관계는 제시할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현상과 '실재하는 내용'의 관계에서 무엇을 근거로 그런 대응 분리관계를 내세울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다만 현상들 사이에서도 이런 대응, 비례, 분리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현상과 실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현상과 실재의 관계는 엄밀히 말해 현상 a와 현상 b의 관계와 완전히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상과 실재와의 사이에 대응 비례, 분리관계를 성립시킬 수 없는 직접적인 이유는
실재에 대해서는 그 실재의 내용을 하나도 얻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과 실재의 내용에서는 앞처럼 대응시키거나, 분리하거나, 비례시켜 이해할 하나의 근거도 얻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상에서는 눈으로 대상을 본다고 말하지만,
그 눈, 대상의 관계가 실재에서도 그처럼 대응한다거나, 적어도 비례해 성립한다거나, 그렇게 분리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는 우리가 현상에서 얻는 여러 관념들을 가지고
그 가운데 a 를 하나 정한다면
실재의 내용이 그 a 이다, a 가 아니다. a와 같다. a와 다르다, 하나다, 여럿이다.. 등등의 일체 분별을 성립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 이렇게 실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아무도
이에 대해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하나다. 여럿이다. 등등 여러 이분법적인 판단을 대응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함(sunyata)"이라는 단어가 나타내고자 하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런 결론이 우리의 답답함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도무지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실재의 바탕에서 그러면 어떻게, 이런 현실의 여러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인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실재의 공함이 그리고 그 깨달음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주는 효용이 무엇인가.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가 서론인데 이미 서론이 너무 길어서 더 보기를 포기하는 분들이 속출할 것 같다.
그러나 글을 나눈다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보기에 무리해서라도 한 페이지로 모두 써보려고 한다.
○ 공함은 허무주의를 말하는가. |
○ 가을의 날씨가 주는 허무함, 무상함...이런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에게 누구나 아주 가끔식은 느껴지는 감상이다.
어릴 때 딱지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에게
딱지란 그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일뿐이고 큰 가치가 없다. 의미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어린이가 그 딱지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는 상태이고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이미 큰 의미와 기쁨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 다시 수많은 놀이 재료- 권력, 부, 명예, 건강, 시간, 지식...등등에 집착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다시 옆에서 그것은 모두 관념이고, 실재는 공하고 그런 현상은 별 의미없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열심히 말을 해도
상황은 앞과 비슷하다.
그 이유도 같다.
그런데 스스로 누군가는 그 정점에 다달아서 다 맛을 본 후이거나, 아니면 그 도중이거나,
그 무의미함을 깨닫고 우울해지거 무기력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것은 재벌가의 재벌이거나, 대 권력자거나 대학자거나 다 마찬가지다.
실제로 몇몇 우울증에 시달린 사람은 이 모든 것에서 의미를 잃고 자살을 하게끔 몰리는 경우도 있다.
그 실례는 신문을 살펴보면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비극임은 누구나 다 알기에
차라리 무언가에 집착하여 그래도 삶을 계속하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집착이 일으키는 독의 폐해를 말하고
공은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음을 말하므로, 결국 앞의 우울증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공의 의미나 효용을 그렇게 생각하여 불교를 허무주의 비관주의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 집착의 병과 공함 |
● 공의 효용은 그렇지 않다.
공은 거짓환상이 아니고 참된 실재다.
현실은 그 현실 내용에 집착하는 이에게 가끔씩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일으키는 이 집착의 독은
당장 재미와 즐거움과 기쁨을 줄 때는 그 독의 폐해를 느끼지 못한다.
마치 딱지놀이에 광분하여 초등학교 시절을 광란의 재미에 빠져 지내다
나머지 인생을 이상하게 살아가는 이처럼,
독의 폐해는 그 뒤에 천천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현실 그 자체와 현실에 투영해 갖는 희망과
그에 관한 집착이
또 한편으로는 고통과 불만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지독하게 비통함을 느끼게 되는 슬픔은 무엇이든 언젠가 거기에 대해 강하게 애착을 가졌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의 자식이 죽어서 지극한 고통을 누군가 느낀다고 하자.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그 자식은 그가 지극하게 애착을 가졌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어느 다른 나라에서 수백만 수십만 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어떤 이는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약간의 슬픔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이 사실은 반대로 말하면 그가 그들에 대해서 전혀 애착이나 집착을 갖지 않았다는 것도 말해준다.
대강 위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갖는 집착, 탐욕 분노 어리석음은
어느 순간은 당장 재미와 즐거움 통쾌함 등을 가져다 주기는 하지만,
또 반면에 지극한 고통과 두려움 걱정 번민을 가져다 주는
종합 선물 세트와 같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선물 세트에서 좋은 것만 취하고자 하지만,
집착을 갖는 이상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반대로 위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좋은 것만 얻어 내는 방안은
그 반대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묶이지 않고 벗어나 풀려나서
집착을 갖지 않고 대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도 말해준다.
거기에 이 공함의 진리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공함의 진리는 우울증 무의미함을 선물하기 위함이 아니다.
집착의 재미 즐거움에 빠져서 독을 쌓아가는 이들에게
그 집착의 독을 해소하고,
광대무변한 번뇌없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함이고
또 그런 효용을 갖는 진리인 것이다.
● 공함의 깨달음이 갖는 효용에 대해서
아마 PUN님 아니면 TOK님 아니면 LAB님이 써 놓은 비교적 체계적인 글이 있는데
이는 끝에 링크를 달기로 하고, 여기에 다시 변형해 옮겨보면 다음이다.
크게
1 진리 그 자체의 측면에서,
2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의 측면에서
3 추구과정의 원리의 측면에서
4 추구과정과
5 결과의 평가에 대한 심리의 측면에서
공의 진리, 그 깨달음이 효용을 갖는다고 본다.
( 길게 쓰고 똑같이 4가지만 제시하면 똑같게 되므로 내용도 줄이고 분류도 5가지로 늘여서^^)
○ 진리의 측면에서의 공함 |
● [ 진리의 측면]
○ 우선 진리의 측면에서는
현실의 언어, 관념, 감각 등 현상에 고착되어 그것이 진짜 진리라고 믿기 쉽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한계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이들이 오류의 진리판단들이기 때문이다.
공함의 진리는 이런 잘못된 진리판단을 벗어나게 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진리를 올바로 봄으로써 실재를 생각하고 실재와 현상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시작하게 된다.
우리가 대하는 내용은 일시적이고 진짜가 아닌 가상이다. 진짜는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실세계 즉 [감각, 관념, 언어~]로 구축된 현실세계는
사실은 환영과 같고 아지랭이 같고 물에 비친 달 그림자 같고 허공에 눈병 걸려 잘못보는 꽃이나 메아리 그림자 꿈과 같고
진짜가 아닌데 마치 진짜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내용들이다-라고 인식하면서 봐야 옳다.
좀 더 부연하면
우리가 대상이나 주체로 보는 것은 사실은 실재 대상이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얻지 못하는 공한 실재의 내용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에 그런 모습으로 투영해 맺히고 우리의 정신이 감각한 결과물이거나,
아니면 그런 감각을 통해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그에 대해 생각을 일으켜 관념을 갖고 분별한 내용물들인 것이다.
우리가 얻는 현상의 모든 것(감각한 내용물, 관념내용, 언어..)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실재의 내용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얻어지는 관계도 마음안의 어떤 내용물(자신이 대상으로 보는 것)을 마음안의 또 다른 내용물(자신이 주체나 감각기관으로 보는 것)이 대하여 얻는 내용물이 아니다.
실재는 공하고 얻지 못하고 모든 현상은 그 실재를 바탕으로 얻어낸 결과물들이고 내용물이다.
○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의 측면 |
● [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의 측면]
○ 이렇게 진리를 있는 그대로 올바로 보면 그를 바탕으로 한 가치평가가 달라진다.
진짜와 가짜, 진짜와 환영에 대한 가치평가가 달라지듯 달라진다.
잘못 사실을 판단하면 가치판단과 목표 설정이 왜곡된다.
우물안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빠지지 않았는데 만일 빠져있다고 생각하면
그 우물 안에 들어가거나 다 물을 퍼 올리거나 하는 수고를 행하게 된다.
허위는 가치가 없고 힘을 갖지 못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허위를 받아들이면 이후 그것은 가치를 갖는 것처럼 힘을 갖는 것처럼 우리를 메이게 하고 묶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진리를 올바로 보고 묶임에서 풀러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진리로 봐야 한다.
그런데 공함의 진리는 사실 우리에게 구체적인 a 나 b와 같은 값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무력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공함은 실재가 그와 같이 그렇다는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것과 모순되는 많은 허위와 형이상학적 허구를 깨뜨려주는 힘을 갖는다.
앞의 비유에서 우물안에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믿는 허위와 형이상학적 허구적 믿음을 모두 깨뜨려 그 수고를 덜어주는 힘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의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의 단계에서 갖는 효용이다.
○ 한편 공은 진리의 토대에서 가치판단을 하고 목표를 설정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목표에 대한 실현의 원리를 말해준다.
공은 사실 가치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평등한 평가를 해주게 하는 바탕이 되는 진리판단이다.
즉, 가치가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 모두가 공한 것이다.
그래서 모두를 평등하게 차별없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공함의 진리이기도 하다.
한편,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판단이 나오기도 한다.
어차피 평등하게 공한데 왜 굳이 선하고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것을 악취 공견 즉 나쁘게 공을 취해 사용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악취공견도 이론상은 공과 모순되지 않는 입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앞과는 정반대의 입장 즉 선취 공견도 가능하다.
즉, 어차피 평등하게 공한데 왜 굳이 나쁘고 불행함을 고집하고 향해 나가려고 하는가.
선도 행복도 가능한데, 왜 굳이 악과 불행을 향해 가려 하는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선취 공견에서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어차피 차별없고 공한데 선하고 행복한 방향을 취해서 실현시키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바로 이 입장이 공에 대해 역설하는 보살들과 부처님들의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선취공견이나 악취공견이나, 공 자체의 입장에서는 차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선이나 악, 가치가 있는 것 없는 것, 좋은 것 나쁜 것등의 구별과 차이는 다만 현상적인 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선취 공견에서는 현상적인 부분의 차별과 실재의 차별없는 공함의 관계에서 앞과 같은 결론을 취하게 된다.
즉 본질상 실재의 내용에서는 어차피 선과 악이 차별없고 공한데
그런데, 굳이 선하고 행복한 방향을 취하지 않고 또 선을 실현시키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바로 이 입장이 공에 대해 역설하는 보살들과 부처님들의 입장인 것이다.
○ 추구과정의 원리의 측면 |
● [ 추구과정의 원리의 측면]
○ 만일 앞의 가치판단과정에서 선취공견을 따라, 그와 같이 선하고 착한 목표가 설정되면,
이것이 실현될 수 있는 원리 역시 바로 공함의 진리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간단히 말해 A란 현실상태 가 B 라는 목표상태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은
A나 B가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일 A나 B가 영원불변한 실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A가 어떤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없음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A가 B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A나 B는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어야 한다.
실재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실재는그런 영원불변한 실체도 아니며 실체가 없음도 함께 포함해 말하는 것이 된다.
만일 그런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면, 실재의 내용으로 바로 그 실체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함을 말함은 그렇게 제시할 실체의 내용이 없고, 실재가 실체가 아님도 함께 포함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이는
A란 현실상태 가 B 라는 목표상태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이론을 제시해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공의 원리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우리는 현실의 판단에서 모든 제한이 있는 과학법칙을 믿는 한편
그 한계속에 갇혀 살아간다.
불에다 종이를 던진다. 연기가 난다. 그것이다.
이 말은 연기를 일으켜 내는데 이용할 수 있지만, 다른 것을 일으키게 하는 데는 이용할 수 없다.
그런데 공함의 진리는 그런 내용이 진짜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 그 한계를 풀려 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의 신통력이 가능하게 되는 원리가 여기에 숨어 있기도 하다.
나무와 사람을 비유로 놓고 생각해 보자.
나무 주변에 독극물을 뿌려 나무를 말라 죽이려고 한다고 해보자.
나무가 알 것인가.
나무에게는 그 독극물은 없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나무는 그 독극물로 인해 말라 죽는다.
반대의 비유를 해보자.
나무 주변에 비료나 영양소를 뿌려 놓는다고 해보자.
역시 나무가 이를 알 것인가.
나무에게는 그런 비료나 영양소는 없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나무는 그 영양소로 인해 성장하게 된다.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은 나무가 뿌려대는 산소나 이산화탄소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역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산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무수히 일파만파로 많이 다른 형태로 설정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종이에 불을 붙인다.
우리가 아는 내용은 그저 그로 인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소리는 뿌지직 불 타는 소리다. 매케하다.
따뜻하다...
등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짜의 제한된 화면 몇가지인 것이다.
만일 이 과정을 박쥐의 눈을 가지고 보면, 달리 보일 것이다.
또 만일 메뚜기의 귀로 대하면 또 다를 것이다.
이처럼 현상의 세계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 속에 숨겨진 다른 내용들이
일파 만파로 수없이 많이 설정되어진다.
그런데 다시 이 현상을 '실재의 바탕에서 보면' 또 다른 것이다.
무엇을 변화시켜서 이 현상이 나타나는가.
무엇을 가장 실다운 바탕으로 하여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가.
바로 진리와 실재의 바탕에서 이 현상이 얻어진 것이다.
이렇게 바로 봄으로써 비로소 그 올바른 변화방안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거짓의 최면에 묶여 지낼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a 가 b가 될 수 있는 원리와 함께
a 가 실재는 a 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공함의 진리는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한 인간이 노력하여 하나의 세계로 극락세계를 만들었다거나,
한 수행자가 한 은하계를 충돌을 피해 저 먼 우주 공간으로 좌표 이동을 시킨다던지 하는 것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그런 불가능이 제시되는가하면
현실의 모든 제한된 물리 법칙을 믿고 따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하나다 여럿이다 등등의 사실을 모두 고착시켜 받아들일 때
그런 한계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감각한 것만 존재하고, 감각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처럼 우리가 현상에서 얻은 내용들로 생각하고 분별하여 관념을 갖고 설정해낸 그런 한계다.
그러나 반야의 진리를 꿰뚫어 그 실상을 관하는 바탕에서는
그것이 가능한 원리가 보이는 것이다.
적어도 경전에는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것을 닫힌 지식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볼 때는 신통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 추구과정에서의 심리의 측면 |
● [추구과정에서의 심리의 측면]
공함은 협소한 현상인식에 바탕하지 않는다.
실재의 광대무변한 세계를 열어준다.
우리는 단멸관(斷滅觀), 즉 죽거나 무엇이 한 번 없어지면 그 이후로 아무것도 없고 그 뿐이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살아서 목표를 정하는 것은 길어야 자식대까지의 걱정 아주 길어도 3대 4 대의 걱정 계획에 지나지 않고
또 대부분은 살아 있을 동안의 일들에 대해서 기획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실재는 어떠한 내용을 우리에게 주는가.
죽어도 끝이 아니다.
진짜는 현상에서 살고 죽는 것과 관계없다.
시간은 또 어떠한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공간은 또 어떠한가. 끝도 없이 무한하다.
현상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렇게 시작도 없이 앞과 뒤가 광대무변하게 뚫려 있다.
모든 것에 그 최초의 처음이 없다고 하면 불안증세를 느끼는 이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을 처음으로 향해 가도 앞으로 무한히 뚫려 있고
끝을 향해 가도 뒤로 무한히 뚫려 있다.
그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누가 실재로 존재하는가.
실재의 공함이 그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에는 두가지 경향이 있는데 현실에서의 삶이 유한하고 짧고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뜻대로 되는 하늘에서 살아가는 것을 종교적 목표로 설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반대다.
이미 삶이 태어나고 죽음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보고, 그렇게 윤회하는 과정이 무한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윤회과정에서 하늘의 즐거움과 지옥의 극심한 고통이 무한히 반복되는 상태임을 전제로
각각의 윤회과정이 주는 고통만이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윤회 과정에서의 내용을 고통, 즐거움, 고통도 즐거움도 아닌 상태로 나눌 때 무엇만 해결하면 되는가.
바로 고통만 제거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간단히 말해서 고통의 소멸 상태를 목표상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불교의 4성제가 고제, 고집제, 고멸제, 고멸도제로 제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수행하고 도를 닦는 이유도 바로 이 고통의 해결이 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윤회과정 전반에서 고통이 사라진 상태
해탈 열반을 찾는 입장이 불교인 것이다.
그래서 이미 다른 종교가 도달할 목표로 제시하는 상태는 어떻게 보면
불교가 벗어나려고 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과 상황이 같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 무종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지 문제는 이 광할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윤회 과정 속의 고통을 끊고
이 윤회의 고통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유희 신통해나갈 수 있는가.
즉 해탈[解脫]과 열반이 목표인 것이다.
불교가 얼마나 광대무변함 속에서 가치평가를 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제시하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우선 부처님은 하늘 가운데에서는 그 수명이 몇 백억년을 넘는 하늘도 있고
심지어 헤아리기 힘든 몇 겁 무량 겁을 넘는 하늘도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을 목표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하늘의 삶을 추구하지 말고 해탈을 구하라고 제자에게 권유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아무리 하늘의 삶이 길고 길어도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의 향락이 얼마나 좋았던지간에
다시 그 이후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하늘과 지옥의 종합선물세트를 받지 않는 방안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과보를 불러 들이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집착에 묶이지 않고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선을 지혜롭게 올바로 수행해나감으로써
어느 세계에서든 모두 열반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해탈과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 것
그리고 그런 상태에 다른 생명들 모두를 이르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광대무변한 실재의 바탕에서 시설되는 올바른 가치 평가와 목표점은 이와 같다.
그리고 그 이전의 현상세계에서 세운 목표에서 집착을 풀어 벗어던지게 하는
진리판단과 가치평가, 그리고 목표설정과 그것을 실현하게 해주는 방안을 얻는 바탕도
모두 바로 실재의 공함의 진리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광대무변한 중생 제도의 목표나 성불의 목표가 실현되는가.
바로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고 공한다는 진리가 바로 그 실현원리이다.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고 공하기에
역으로 광대무변한 목표가 실현되고 성취될 수 있다.
그 원리가 바로 실현이 가능한 원리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내용들은 현실의 상식적인 바탕에서 생각하면
공상과 허풍의 극대화인 것 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엄격한 진리와 가치의 판단을 통해 제시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은 작은 생에 닫혀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하지 않고
광대무변한 시간과 공간속에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공함의 진리가
한 보살로 하여금 그런 목표를 향해 물러 나지 않고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당면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적어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풀려나 변화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자재 보살의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유공포의 상태가
바로 이 공함의 진리가 주는 효용의 하나인 것이다.
살면서 무엇인가가 공포스러운가. 무언가가 염려되고 걱정스러운가.
예를 들어 죽음, 아니면 죽을 것 같은 고통, 극심한 괴로움, 번뇌, 손해, 위험, 질병 그런 것들이 모두 두려운가.
그것은 가짜다. 환이다.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공함의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공을 깨달은 보살들은 그 자신의 삶의 계획을
숫자로 나타내면 십진법의 단위의 0을 추가해 나열하는데 그 0을 인간의 평생 그려나간다해도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숫자
즉 3 아승기 + 겁을 통해서 목표를 정하고 추구할 수 있게 된다.
3 아승기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다시 겁이라는 시간 단위를 붙이고 나서도
그 기간내에 성취해 낼 목표를 향하고 유희 신통 속에 추구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바탕은 바로 이 실재의 공함의 진리이다.
○ 결과의 평가에 대한 심리의 측면 |
● [ 결과의 평가에 대한 심리의 측면]
공함의 진리는 일체의 모든 희망을 무엇이나 가능하게 해주는가?
예를 들어 공함이 영원불변한 실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는 않다.
공함은 진리이지, 우리에게 무엇이나 만들어 준다고 약속하는 환상적 믿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공함의 진리가 즉시즉시 우리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비밀 원리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 공함은 진리이지 환상적 주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하다고 하여
종이에 불을 붙여 종이가 곧바로 금이 되게 할 도리는 없는 것이다.
결국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만일 그런 한계가 없다면 부처님이나 보살이 생로병사의 모습을 보이거나,
보살이 3 아승기겁을 굳이 수행할 이유가 무엇인가.
적어도 그렇지는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공함의 진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지는 않기에
결국 최종적으로 무용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실 현실이 이렇든, 또는 실재가 저렇든 그와 관계없이 여하튼
우리가 당장 원하고 집착하는 내용을 만들어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즉시 즉시 그것이 얻어지지 않기에
그것이 무용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 뿐이다.
공함의 진리는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공함의 진리가 열어 주는 실재의 세계는 닫힌 현상세계에 비해 광대 무변하다.
그리고 공함은 어떤 효용을 최종적으도 또 하나 준다.
그것은 우리가 집착하는 어떤 구체적인 현상 A 나B 를 떠난다면,
결국 이 모두가 과정이나 결과면에서
실재는 차별없이 다 같이 공하다는 측면이다.
사실 이는 다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공을 말하는 보살을 생각할 때,
그 공의 보살은 마치 어떤 신비한 마술사처럼 상자에서 사과를 집어 넣었다가 손을 뺄 때는 비둘기를 꺼내 올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공을 이야기하는 보살은 그런 모습을 현실에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단지 상자에서 원래 들어갔던 사과를 그냥 다시 꺼내 보여 줄 뿐이다.
그렇다면 공을 이야기하는 보살은 무엇이 다른 현실의 사람들과 다른가.
그러나 그 공을 깨달은 보살은 유희 신통 속에
원하는 목표를 무한한 시간대에 걸쳐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매번 상자에 사과를 넣고 다음 순간 비둘기를 꺼내기를 원한다고 할 때,
그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사과를 다시 꺼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보살은 그 순간에
그 사과나 그가 말하는 비둘기나 사실 차별없이 공한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 좀 싱겁다..^^
연구가 더 필요합니다..3 아승기겁에 걸친~~~
그러나 바로 앞과 같은 관(觀)이
그 보살에게 마음에서 번뇌를 씻어주는 역할을 하는 점은 중요한 점이라고 본다.
Ω♠문서정보♠Ω™[작성자]™ Prajna Ci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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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의 효용: 실체없음 공[空]의 효용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131644553532927
○ 진리의 차원과 공[空]의 의미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131641466866569
○ 진리의 차원에 대하여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131090530254996
진리의 효용: 실체없음 공[空]의 효용
작성: Truth and Value(진리와 가치) 2010년 7월 1일 목요일 오전 3:13
진리에 대한 탐색(009_) [ 과거 노트 백업 정리분]
2010년 5월 29일 토요일, 오전 1:42:49 |
* 논리학과 진리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그 실체$는 없음
실재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대략 살폈다
(수정보완한 내용이 다 날러가서 부족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계속 다시 쓰고 싶지는 않다. ....)
개인적으로 이는 불교에서는 무아, 무자성, 공 등에 관련된 내용이고,
이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살폈다고 보기에
여기서 자세히 논의하면 중복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관해 조금 더 덧붙인다면, 사실
실재내용을 얻지 못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
왜 그리 불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가 하는 점이다.
또 그 얻지 못하는 공을 깨닫는다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또 그 얻지 못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어떤 이용 가능성을 갖는가
즉 그런 진리의 효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들이다.
우선, 이 공, 무아, 무자성의 진리는,
1 우리가 대하는 현상( 감각내용+개념내용+언어내용)이 절대적인 내용이 결코 아니며
또한 실재의 내용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해준다.
- 만일 실재내용의 공함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이 얻는 감각내용을
세계의 실재, 세계의 참모습으로 알고 살게 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가 정신에 이미 얻어 놓은 감각내용 자체를
자기가 감각하는 대상 그 자체인 것으로 평생 알고 산다. (사실 아무런 지장없이,,,)
그리고 대부분 이렇게 살고 이것을 아주 정상적인 것으로 알고 산다.
즉 눈을 뜨고 꽃!을 본다면, 자기가 본 꽃!을 놓고
자기가 바라보는 대상이 바로 그 꽃!이라고 여기는 한편
자기가 그 대상인 꽃!을 바라보아
그 꽃!의 모습을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대부분 사람이 갖는 (건전한?) 상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뒤바뀐(전도된)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옳은 것-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이 관계가 잘못임을 정확히 깨닫고 알고,
뒤바뀐 것을 뒤바뀌었다고 바로 알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정확히 아는 것이 다음의 다른 진리내용을 알아내는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대하는 현상은 실재내용이 아니며, 실재내용은 사실은 공하다--라는 깨달음이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대하는 현상에 대해 갖는 전도된(뒤바뀐) 인식을
이처럼 시정해주는 힘을 갖는 것이다.
1 실재내용은 현상에서 얻는 내용 그 자체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그러나 정작 그 실재내용 자체는 아무도
(경전 표현상- 삼세 제불-즉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통틀어 그 부처님들)마저도 끝내 얻지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실재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다시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 이에 대해 아무것도 얻어낸 것이 없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끝내 얻지 못하고, 존재하지 않는 실체의 내용에 대해
그간 무수한 사견(잘못된 견해,주장)들이 무수히 제시되어 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실재내용은 사실 우리가 본 모습과 똑같다거나, 비슷하다거나, 또는 이러이러하다거나,,,등등,,
실체는 있으며 우리가 대하는 현상은 그것의 그림자라거나,,,
우리는 그 영원불변한 실체가 언젠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거나,
이런 견해가 옳지 않음에도
전에도 말했듯이 허위의 사실이
현실에서 오히려 힘을 더 막강하게 발휘하듯
현실의 사람들에게 실제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
( 보물이 이 섬에 묻혀 있다는 거짓말이
많은 사람을 그 섬에 몰려들게 하는 것처럼,,)
그래서 엉뚱한 결과로 사람을 이끌어간다..
따라서 공하다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비록 그 자체에서 어떤 내용을 얻어 이용함은 없다 하더라도
반대로 다른 잘못된 견해를 무너뜨리고 부수는 힘을 갖고
또 그런 잘못된 주장에 이끌려 잘못된 행위를 일삼는 것을 방지해주는 효과를 갖는 것이다.
즉 엉터리 주장에 결코 현혹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3 한편 이와 같은 진리가 갖는 기본적인 효과는
다시 현상에 고착되어 고집하고 집착하는 마음
또 현실에 얽매여 괴로움과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효과를 갖는다.
사실 예를 들어 벽돌을 망치로 부수어 보자.
전기톱으로 잘라도보고 ,,, 산산조각이 난다.
그래도 벽돌은 아프다고도 괴롭다고도 하지 않는다.
비유가 적절한 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체가 만일 그 벽돌과 같은 상태에 처한다면,
심한 공포와 통증, 괴로움 등에 시달려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 실재가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비록 감각적으로 느끼는 그 감각적 통증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관념상, 벽돌과 같이 그 통증을 대할 수 있는 관(觀)을 얻게 해준다.
사실 석존은 제자가 죽기 전 심하게 통증에 시달릴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무가 불 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때 넌 어떠했는가
->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너의 몸을 관하라,, 너의 몸은 너의 실체가 아니고,,,,
사실 석존의 말씀대로 그렇게 자신의 신체에 대해 해석하고 관한다고 하여
통증을 못느끼게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통증은 통증대로 느끼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통증(감각)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만일 150년전에 태어난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지금 현재 아마 그 전부가 다 그런 생노병사의 고통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다 돌아가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도 장차 100 년 정도 지나면,
모두 그와 같은 상태로 된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다 평등하게 공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 주체는 자신의 삶에 집착하고 또 고통에 예민해 있다.
그 삶의 주체에 정말 떳떳하고 실다운 영원불변한 자신의 실체가 담겨 있거나,
아니면 그 실재내용을 얻거나 하지도 못하면서,,
피상적으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얽매여 묶여 지내고
그 고통을 전부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내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하면, 그 현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고집하고 얽매이는 심리 때문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집착하기에,,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묶여 지내고 오히려 중요한 것을 지나치게 된다.
공 무자성 무아에 대한 진리는
부수적으로 이런 잘못된 가치판단을 시정해주는 효과도 갖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묶이고 구속받는 상태 특히
악(악마-번뇌)에 묶이고 구속받는 상태에서 벗어나 풀리우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일체가 그 실재내용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런 해탈(번뇌에 묶여 사는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비유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집착하는 딱지나 만화를 실답지 않다고 안다.
그래서 딱지가 없어진다고 통곡을 하지도 않고,
딱지를 누가 가져갔다가 분통을 터뜨리지도 않고
만화 주인공이 죽었다고 통곡을 하지도 않는다.
만화주인공이 죽을것 같다고 하여 두려워하지도 않고, 병들었다고 근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그렇지 않다.
심하게 슬퍼하고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대하는 딱지는 딱지에 불과한 실답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
반대로 자신이 대하는 현실이 그와 같이 실답지 않다는 사실은 모르고
다시 어린아이가 딱지에 집착하듯 현실에 집착하고 매인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것이 무자성 무아 공으로서 실체가 없고
그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는 가운데
환영처럼 나타난 것이어서 실답지 않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관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달리 실다운 것-
얻어야 할 실재내용 또는 실체가 따로 있어서
현실에 대한 관심은 이제 다 버리고
그런 새로운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처럼 그렇게 매이지 않은 상태에서
즉 앞과 같이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면서
모든 번뇌에 시달리는 생명들을 위해
선한 뜻을 추구하고 지혜를 추구하는 자세를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런 올바른 깨달음을 기초로 현실에 매이지 않는 가운데
올바로 선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집착없이 잘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어른이 딱지는 사실 딱지에 불과함을 알 때,
그 사실을 알기에 어린아이를 위해서 즐겁고 유익하게 놀아주면서
어린아이를 진정 올바른 상태로 잘 이끌어 가는 것에 유사하다고나 할까,,
즉, 이런 기초 진리위에서 보살의 기본자세
- 즉 선한 뜻을 집착없이 그러나 지혜롭게 잘 실현하면서
사바세계에서 유희 신통하는 (=즐겁게 아주 잘 해내는) 기본자세가 얻어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4 한편 올바른 가치목표점을 얻기 위해 노력할 때
이 목표상태가 변화를 통해 얻어질 기초 이론적 근거도
이 무자성 무아 공의 진리는 함께 제시해준다.
그것은 만일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면,
어떤 목표 상태를 자신이 변화를 통해 이루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데 반해,
실체가 없어 무자성 무아이며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다는 진리는
자신이 지향하는 최고의 상태를 자신이 앞으로 변화를 통해 얻어낼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해주는 것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바람직한 상태를 향해 노력해야 할 당위성도 함께 제시해주는 것이다.
여하튼 이처럼 공이나 무자성 무아의 진리는 최종적으로
가장 올바른 가치목표를 세우고, 다시 번뇌를 끊고 집착을 없애고 하는 데에 이용될 수 있다.
이상 공 무자성 무아에 대한 논의를 마친다.
결국 어떤 진리든, 그 실재내용, 실체와 관련해서는
적극적으로 그리 만족할 내용을 얻는 것은 아니다.
- 얻지 못하고 없다 - 이것이 그 내용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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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후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바로 현상내 진리, 즉 예를 들어 현실에서 '저꽃은 붉다'라는 말을
옳다고 하고 진리라고 할 때
그것이 왜 진리라고 하는가의 문제로 초점을 옮기고자 한다.
우선 어떤 명제(판단)가 참이라고 할 때 왜 그것이 참이라고 하는가
그 근거를 밝혀줘야 한다.
=> 오늘은 이만 피곤하니 마치고,,, 자려 함,,,
아름다운 범어로 된 반야심경의 선율
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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