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서 수행목표로서 마음의 해탈 지혜의 해탈을 얻고 생사윤회를 벗어난다거나, 번뇌장과 소지장을 제거하여 보리를 성취한다거나,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번뇌를 제거하고 일체지지를 증득하여 성불을 한다거나, 등의 수행목표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행에 계율과 선정[정려] 지혜의 3 학을 말하기도 하고 4 념처 4 의단 4여의족 5 근 5 력 7 각지 8 정도 등의 37 보리분법[조도품]의 수행이나 보시 - 정계 - 안인 - 정진 - 정려 -반야 - 방편 - 원 -격- 지의 10 바라밀의 수행을 제시하고 수행계위에도 십신 - 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 - 등각 - 묘각 등의 수행단계를 설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처럼 수행해야 할 내용도 많고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내용도 많은 것 같은데 이런 수행의 목표로서 깨달음과 수행등의 관계나 그 순서 등에 대하여 돈오점수 돈오돈수 등의 논의가 있어 왔다.
특히 이치적 깨달음과 실천적 수행 가운데 무엇이 앞서야 하는가에 관련하여 수 - 오 오 - 수 이렇게 순서의 선후를 나누고 각 내용이 갑자기 성취되는가 차례차례 순서와 단계를 밟아 성취되는가를 놓고 돈 점을 붙여 구분하여 다양한 수행의 방식을 나열하고 이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좋은가. 또는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수행자에게 적절한가 등에 대해 논의가 있어왔다.
당나라 때 종밀선사가 분류하기를 5 가지를 분류했다고 하는데 이론상은
[수 -> 오]
점수 돈오 점수 점오
돈수 점오 ( * 돈수 돈오 )
[오 -> 수]
( * 점오점수 ) ( * 점오돈수 )
돈오점수 돈오돈수
이런 식으로 8 가지 방식을 분류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 표시한 내용은 나열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논의에서는 무엇보다도 돈과 점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명확하지 않다.
불교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이번 생만 수행을 한다고 보지 않는데 언제부터 수행을 시작했다고 볼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만일 어떤 깨달음을 놓고 생각하면 그것을 깨닫기 전을 출발점이나 기산점이라고 놓고 보면 깨달음은 늘 순간 갑자기 깨닫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윤회과정을 바탕으로 이번 생 한번이 아니고 오래 전 생부터 수행을 했다고 본다거나, 이번 생에서도 태어날 때부터 깨닫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노력을 한 후 깨달았다고 보고 수행이 시작된 기산점을 소급해 잡으면 깨달음이란 일정한 차례에 의해 점차적으로 깨달았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놓고 보는가에 따라서 하나의 깨달음을 놓고도 돈인가 점인가의 판단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 기준부터 명확하지 않으면 서로 논의할 바탕이 마련되지 않게 된다.
또한 깨달음이나 수행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불교 수행자가 깨달아야 할 내용이 단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무자성 일체개공 열반적정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 뿐인가. 아니면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한 무량한 방편 지혜를 포함하여 예를 들어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놓고서도 반야경에서 제시하듯 인간이 사용하는 각국의 다양한 언어를 다 이해하고 심지어 각 생명의 언어까지 다 이해하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가.
또 더 나아가 증득할 내용도 예를 들어 먼 세계의 일을 보는 능력과 숙명을 관하는 능력 등과 같은 6 신통을 얻고 여환삼매를 증득하여 자신과 세계를 뜻과 같이 변화시키는 자재한 능력을 얻는 상태를 의미하는가.
또는 외울 수 있는 경전이나 다라니의 분량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가. 자신이 들어 머물 수 있는 삼매의 깊이나 정도가 어떠한가. 이런 것을 놓고 수행의 완성여부를 따질 수도 있고 그리고 금강경에 제시된 것처럼 가리왕의 고문을 평안히 참고 견딜 정도로 안인의 수행을 성취한 상태에 도달해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계율을 이해하고 지키는 정도의 수행을 의미하는가 등등에 따라서 성취를 이룬 상태인가 아닌가등을 모두 달리 따질 수 있게 된다.
또 이런 논의를 위해서는 수행자가 닦고 익혀 성취해야 할 내용은 어떤 것인가부터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서도 단순히 해탈을 얻은 상태를 의미한다거나, 단순히 일체개공 제법무아의 내용만 이해하고 알면 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을 수 있지만, 경전에 제시되는 것처럼 법신을 증득하고 중생제도를 위한 온갖 방편지혜나 수행의 방편에 대해 샅샅이 다 알고 어떤 경우는 중생제도를 위해서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방안까지도 모두 아는 상태를 성불한 상태로 보는 입장은 서로 논의하는 기준이나 내용이 다르게 된다.
그래서 이런 논의가 전개되려면 문제삼는 깨달음이나 수행의 범위나 내용에 대해 그 기준이나 개념 자체도 명확하게 해야 하고 또 과연 깨달음을 구해 얻는 과정과 수행을 하는 과정은 서로 그렇게 따로 구분해야만 할 내용인가도 명확히 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고 수행의 범위에서 제외해야 한다면 모르되 이 역시 수행이라면 깨달음과 수행을 나누어 놓고 순서를 따지기도 곤란하다.
『유가사지론』 등에서는 복덕을 닦는 보시- 정계 - 안인 등의 수행이 먼저 성취되어 복덕자량이 성취된 바탕에서 정려 반야 등의 수행을 통해 지혜자량을 닦을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노력도 역시 수행은 수행이다. 그래서 수행과 깨달음을 2분해서 이 선후를 나누어 도식화해 수행과정을 살핀다거나, 이 가운데 어떤 방안만이 바람직하다는 등의 논의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형식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각 개별 수행자가 자신이 장차 어떤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서원을 일으켜 갖고 있고 그런 상태를 위해 다시 어떤 목표를 성취해 나가야 하는가 등을 명확히 하고 그런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현재 상태는 무엇이 부족하고 또 그런 목표를 성취해나가기 위해 어떤 것부터 하나하나 익히고 닦아 나가는 것이 더 나은가 그리고 더 쉽고 편하고 잘 성취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해보는 것이 더 낫다.
비유하면 덧셈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수학의 미적분이나 삼각함수부터 붙들고 공부하려고 하면 수학을 잘 하 힘들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각 경우마다 어떤 방안이 더 나은가는 일률적으로 제시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
한편 중생은 본래 부처와 그 실재가 다 차별없이 공하여 다름이 없다는 입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다만 이는 본래 실재가 그러하다는 것이어서 여기에는 다시 돈점이나 선후의 구분을 할 여지도 본래 없다.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고려의 승려인 지눌(知訥: 1158-1210)이 주창한 사상으로, 수행과 깨달음(각오 · 覺悟)에 있어서 그 차제(次第)와 단계에 관한 문제에 대한 사상이다.[20]
다시 말해서 깨달음이 먼저냐 수행이 먼저냐, 아니면 수행(修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냐, 깨달은 후에 단계적인 수행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사상이다.[20]
지눌은 돈오에 대하여,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번뇌가 없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오라고 말한다"라고 하였고,
또한 "네가 만일 믿어 의정(疑情)이 대번에 쉬고 장부의 뜻을 내어서 진정한 견해를 발하여 친히 그 맛을 맛보아 스스로 자긍(自肯)하는 데 이르면 곧 수심인(修心人)의 해오처(解悟處)가 되나니 다시 계급과 차제가 없으므로 돈오라고 말한다(初無級漸階次 故云頓悟也)"라고 하였다. [20]
그러나 수행자가 자신의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쳤다 하더라도 무시습기(無始習氣)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이 돈오를 기반으로 점차로 수행해야 한다고 지눌은 주장하였다.[20]
이와 같이 하여 점차로 훈화(薰化)되기 때문에 점수(漸修)라고 했다.[20]
마치 얼음이 물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곧 그것이 얼음이 물로 변한 것은 아니며 열기가 가해져야 비로소 얼음이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였다.[20]
그러므로 미(迷)로부터 깨치는 것은 돈오요, 점점 성화(聖化)되는 것은 점수라 할 수 있다.[20]
돈오돈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돈오돈수, 성철입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승 중의 한 명인 성철이 주장한 선사상이다.
돈오돈수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이다.
성철은 자신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남종선의 조사 육조 혜능의 사상은 돈오돈수이며
지금까지 한국 선종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박에 깨치고 점차로 닦는다)는 육조 혜능의 종지를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21][22]
불교에서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 한마디로 더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깨달음이 진정한 득도(得道)의 경지라는 뜻이다.
깨닫고도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만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이념과 반대되는 말.
2. 상세[편집]
돈오돈수의 주장은 깨닫고도 수행을 해야한다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성철스님이 주장하여 과거 불교계에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성철스님이 법문에서 마당에 잘라내버려야할 나무가 있다라는 말을 한바 있는데 이게 바로 돈오점수를 가리킨다.
우리나라 불교 교단은 조계종 중심으로, 조계종을 개창한 지눌국사가 바로 돈오점수를 주장한 일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성철 스님은 심지어 '지눌은 마구니다'라고까지 표현했다. 게다가 지눌을 이토록 공격한 성철 스님이 바로 지눌 국사를 개창자로 받드는 조계종 종정이기도 했다.
흔히 "깨달음도 인생 한방이냐" 는 오해를 사고 있지만 간격이 막대하게 큰 계단식 성장일 뿐이지 우연과는 전혀 무관하다.
선종의 제6대 조사 혜능은 돈오법이 근기가 높은 사람에게 맞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미리 수행해 놓은 기반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일깨워 주면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는 것.
그리고 성철 스님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아직 더 수행할 무언가가 남아있다면 그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라는 것이며, 이에 따라 어설프게 자신이 뭔가 깨우쳤다고 착각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수행하고 참선하라는 것.
[1] 문제는 불교 전기를 보면 돈오돈수파와 돈오점수파가 갈리며, 깨달은 뒤에 한 번 더 깨달았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많다는 것.
미묘하다. 사상의학처럼 체질에 맞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교 철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논쟁으로, 심지어 불교계 정통이 누구냐에 대한 논쟁으로도 이어진다.
지눌의 돈오점수와 대항하여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던 인물인 고려시대의 원종국사 태고 보우[2]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정통 문제는 보우와 지눌의 대립이다.
역사적으로 이 둘의 지위는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결국 지눌로 굳어졌다.
하지만 태고 보우의 직통을 주장하는 태고종의 인지도는 조계종에 비하면 안습한 수준이다.
물론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내세우며 탄생한 조계종도 지눌과 함께 보우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조계종의 공식적인 입장은 분명히 지눌 쪽 주장에 가깝다. 이러한 깨달음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원효가 있다.
수행하러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물 한방에 더 이상의 수행은 무의미할 만큼 정점을 찍고 깨달았다.
선종 계통의 본래 교리가 바로 돈오돈수이기도 하고. 그러나 원효 당대에는 아직 신라에 선종 자체가 없었고,[3]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는 소성거사를 자처하며 염불 수행을 중시하는 정토종을 전파했고, (때문에 현존 한국 정토종 계열에선 원효를 중요시한다.) 더불어 교종인 화엄종의 사상을 많이 연구했다.
태고 보우의 경우는 중국 선종의 직통 중 하나인 임제종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일부러 중국 임제종 고승을 찾아가서 깨달음을 인가받았을 정도다.
때문에 현재 한국 조계종에서는 임제종의 직통을 자처하고 있으며, 조계종*에서 최상승 수행법으로 보는 간화선도 임제종의 수행법이다.
이 문제는 한국 불교계에서 예민한 문제인 법맥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성철 스님은 중국 임제종에서 인가를 받아온 태고 보우가 한국 불교의 가장 정통 법맥이며,
지눌은 단지 방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돈오돈수/돈오점수 논쟁과 법맥 문제는 성철 스님 사후에도 한국 불교계에서 승려간, 학자들간에 예민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는 태고종과 조계종이 대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무협지에서 가끔 고수라는 인간들이 뭔 단어 하나 듣고 더 갈 수 없는 경지까지 올라가는 이유가 괜히 있는게 아니라, 이 개념 덕분에 생긴 것.
[1] 여담으로 성철 스님한테는 '나 깨달았소'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찾아왔다고 한다.
대부분은 성철스님과 대화 후 자신이 아직 깨달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돌아가지만, 소란을 피우거나 성철 스님을 비방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서 아주 골머리를 앓았다고. 소란을 피우거나 남을 비방하는 모습에서 일단 저들이 깨우친 자들이 아닌건 확실히 알 수 있다
성철 스님은 저렇게 잘못 깨달은 자들이 대중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우려하였다고 한다. 불교에서 이렇게 어설프게 깨우친 것은 지해(知解)라고 해서 진정한 깨달음으로 가는 것을 막는 큰 장애물으로 본다.
[2] 조선 중기 문정왕후 윤씨와의 관계로 유명한 승려 보우와는 다른 사람이다.
[3] 원효가 의천과 같이 당나라로 입국을 시도한 해는 기원후 650년과 661년인데,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종이 들어온 해는 748년이다.
신속하게 곧 바로 깨닫는 것으로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선종 특히 남종선(南宗禪)에 있어서 돈오를 강조한다.
돈오(頓悟) 돈(頓)은 갑자기 頓자 이고, 오(悟)는 깨달음 悟입니다. 그러므로 어느날 갑자기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돈오를「단순한 대각(大覺), 즉 깨달음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고 중생의 근기대로 깨닫는, 차별을 설명한 용어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깨달음 ⇒「돈오돈수(頓悟頓修) : 깨닫는 순간 닦는 것도 마침(이를 상근기라 함)」 「돈오점수(頓悟漸修) : 먼저 깨닫고 미진한 것을 닦아서 합일함」 「점수돈오(漸修頓悟) : 점점 닦아서 깨닫고, 미진한 것을 마져 닦아 깨달아 마침」 「점수점오(漸修漸悟) : 점점 닦아서 깨달음」》
부처가 되기 위해서 진심(眞心)의 이치를 먼저 깨친 뒤에 오랜 습기(習氣)를 제거하여 가는 수행방법이다.
즉, 수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가, 마음의 이치를 먼저 밝혀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로
이 논의는 당나라 종밀(宗密) 이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종밀은 다섯 가지의 돈점설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단계를 밟아서 차례대로 닦아 일시에 깨닫는 점수돈오(漸修頓悟), ② 닦기는 일시에 닦지만 공행(功行)이 익은 뒤에 차차 깨닫는 돈수점오(頓修漸悟), ③ 차츰 닦아가면서 차츰 깨닫는 점수점오(漸修漸悟), ④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와 습기를 차차 소멸시켜가는 돈오점수(頓悟漸修), ⑤ 일시에 깨치고 더 닦을 것이 없이 공행을 다 이루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이 가운데에서 돈오돈수는 과거부터 닦아온 결과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일반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설 가운데에서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은 돈오점수설을 채택하여 우리 나라 선종에 정착시켰다.
그는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번뇌가 없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오라 한다.”고 하였고, 또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서 의정(疑情)을 대번에 쉬고 스스로 자긍(自肯)하는 데 이르면 곧 수심인(修心人)의 해오처(解悟處)가 되나니, 다시 계급과 차제가 없으므로 돈오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쳤다 하더라도 무시(無始) 이래로 쌓아온 습기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습기를 없애는 수행을 하여야 하며, 점차로 훈화(薰化)하여야 하기 때문에 ‘점수’라고 하였다.
마치 얼음이 물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열기를 얻어서 녹아야 비로소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얼음이 물인 줄 아는 것을 돈오라 하고, 얼음을 녹이는 것을 점수로 본 것이며, 먼저 본성을 알고 행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깨치기 이전에도 수행을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수행은 바른 길이 아니며 항상 의심이 따른다고 하였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진심(眞心)의 이치를 먼저 깨친 뒤에 오랜 습기(習氣)를 제거하여 가는 수행방법이다.
즉, 수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가, 마음의 이치를 먼저 밝혀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로
이 논의는 당나라 종밀(宗密) 이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종밀은 다섯 가지의 돈점설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단계를 밟아서 차례대로 닦아 일시에 깨닫는 점수돈오(漸修頓悟), ② 닦기는 일시에 닦지만 공행(功行)이 익은 뒤에 차차 깨닫는 돈수점오(頓修漸悟), ③ 차츰 닦아가면서 차츰 깨닫는 점수점오(漸修漸悟), ④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와 습기를 차차 소멸시켜가는 돈오점수(頓悟漸修), ⑤ 일시에 깨치고 더 닦을 것이 없이 공행을 다 이루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이 가운데에서 돈오돈수는 과거부터 닦아온 결과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일반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설 가운데에서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은 돈오점수설을 채택하여 우리 나라 선종에 정착시켰다.
그는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번뇌가 없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오라 한다.”고 하였고,
또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서 의정(疑情)을 대번에 쉬고 스스로 자긍(自肯)하는 데 이르면 곧 수심인(修心人)의 해오처(解悟處)가 되나니, 다시 계급과 차제가 없으므로 돈오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쳤다 하더라도 무시(無始) 이래로 쌓아온 습기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습기를 없애는 수행을 하여야 하며, 점차로 훈화(薰化)하여야 하기 때문에 ‘점수’라고 하였다.
마치 얼음이 물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열기를 얻어서 녹아야 비로소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얼음이 물인 줄 아는 것을 돈오라 하고, 얼음을 녹이는 것을 점수로 본 것이며, 먼저 본성을 알고 행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깨치기 이전에도 수행을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수행은 바른 길이 아니며 항상 의심이 따른다고 하였다.
돈오(頓悟) 돈(頓)은 갑자기 頓자 이고, 오(悟)는 깨달음 悟입니다. 그러므로 어느날 갑자기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돈오를「단순한 대각(大覺), 즉 깨달음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고 중생의 근기대로 깨닫는, 차별을 설명한 용어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깨달음 ⇒「돈오돈수(頓悟頓修) : 깨닫는 순간 닦는 것도 마침(이를 상근기라 함)」 「돈오점수(頓悟漸修) : 먼저 깨닫고 미진한 것을 닦아서 합일함」 「점수돈오(漸修頓悟) : 점점 닦아서 깨닫고, 미진한 것을 마져 닦아 깨달아 마침」 「점수점오(漸修漸悟) : 점점 닦아서 깨달음」》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말.
이에는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선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과 닦음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인 돈점론은 '깨달은 뒤에도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깨달음 뒤에 더 이상 깨달음은 이미 깨달음이 아니다.'라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요약된다. 돈점 논쟁은 1980년대 초 조계종 정종인 고(故) 성철 스님이 그의 저서 <선문정로>에서 처음으로 돈오점수에 대해 정면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후기의 불교는 거의 국가종교화해 있었다. 거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사찰은 고리대금업에다 양조장까지 경영할 정도로 세속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군사행동을 통해 권력을 직접 장악하려 나서기도 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무신난의 주역들과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였다.
불교의 정신은 위태롭게 흔들렸고 진리의 등불은 시험대에 있었다. 하여 "더 이상 구원은 없다"는 말세(末世)의 비관의식이 불교계에 만연되었다. 지눌(知訥)은 타성화된 불교에 맞서, 수행(修行)을 통해 불교의 근본진리를 회복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고, 그 평생의 고투가 새로운 불교 전통을 만들었다.
지눌에게는 여러 과제가 있었다. 조직이 아니라 구원을 불교의 중심으로 설정한 점에서 그는 근본주의자였다. 그는 당대에 전해진 수많은 불교의 방법적 전통과 씨름해야 했다. 크게는 둘로 갈라진다. 교(敎)와 선(禪)이 그것이다.
교는 불교가 오랫동안 축적한 경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경전을 읽고 그것에 따라 살아나가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선은 그러나 이 방법이 "결코 도달하려는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면서 새롭고 혁신적 방법을 제창했다. 익히 들은 대로 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경전 밖에, 내 마음을 곧바로 파고들어가, 내 본성을 보고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고 외쳤다. 선은 교에 대해 지리멸렬, 글자나 하세월로 파고 있다면서 한심해 했으며, 교는 선을 웬 황당한 잠꼬대냐면서 비웃었다.
고려시대 후기, 의천이 천태(天台)의 교학을 축으로 선(禪)을 포섭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만족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 과제는 지눌의 것으로 남겨졌다. 그는 선을 축으로 하여 교학을 포섭하는 방향을 택했다. 이는 '자기 혁명'으로서의 불교였다. 그는 제도를 넘어, 의존을 넘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전 저작은 그가 삶을 통해 보여준, 수행의 목표와 방법에 관한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너는 이미 구원되어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폈던 것이다. 이 선언은 그의 독창이라기보다 혜능 이래 전해져온 돈교(頓敎)의 일반적 전통이다. 지눌은 선의 길이 스스로에 대한 전폭적 믿음과 이해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빌고 구걸해왔다. 저기 저 위대한 성현(聖賢)들이 중생인 나를 용서하기를, 그리하여 서방정토로 이끌어주기를 바랐고, 혹은 위대한 경전이 있어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되는 줄로 알았다. 물론, 대체로 그것도 잘하지는 못했지만.
지눌은 인과(因果)에 대한 기대를 접으라고 했다. 인과란 인간이 받는 고통이나 환희는 그 전의 삶의 축적에서 온 결과라는 믿음, 그리고 지금 일정한 수행과 공덕을 쌓아 보다 좋은 과(果)를 얻겠다는 공리적 생각을 말한다.
"더 이상 인과는 없다"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선가의 일화가 있다. 달마가 양(梁)의 무제(武帝)를 찾았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호불(好佛)의 군주인 무제는 자신의 공덕을 서역(西域)의 달인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다. "내가 이렇게 절간도 짓고 간경(刊經)도 펴며, 승려들을 보호·후원하고 있으니 그 공덕이 대체 얼마나 될 것이요?" 달마는 한 마디로 잘랐다. "전혀 없소." 양무제는 "아니, 나는 부처의 가르침이 공덕을 쌓아 좋은 과보를 받는 데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부처의 가르침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요?" 이에 대해 달마는 "확연무성!"이라고 대답했다. 성속(聖俗)이 없으니 당연히 인과(因果)는 없다. 우리에게는 벗어나야 할 짐도, 이루어야 할 공업도 없다고 달마는 일갈했던 것이다.
궁극적 지평에서 우리는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 그럼, 무엇이 있는가? 지금부터 지눌의 길을 알아볼 참인데, 변죽을 울리거나 내 해석을 붙이기보다, 지눌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의 글은 제목처럼 인용이나 주석보다 '핵심[訣]'과 요점을 직접 파고드는 간결함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수심결』의 내용 리뷰
『수심결(修心訣)』은 '결(訣)', 즉 '핵심'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리 길지 않고, 스타일 또한 소크라테스처럼 문답식으로 되어 있다. 맨 처음 제시한 것은 그 첫머리에 실린, 선(禪)의 강령에 해당하며 거기에 이어진 글은 이 강령에 놀란 사람들의 의혹과 그 해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가 바로 부처다!
"네 마음 안에 불성이 있다!"고 하자, 질문이 쏟아졌다. "그게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돌아보아도 없는데." 지눌은 답한다.
"네 몸에 있는데, 다만 네가 못 볼 뿐이다. 너는 하루 내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알고 춥고 뜨거운 것을 알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질내지 않느냐. 그게 바로 '그것'이다." 지눌은 여기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렇다면, 당연히 너는 곧 부처다!"
왜 신통변화를 볼 수 없는가
다른 학인이 나서, 열기를 한 소큼 뺀다. "우리 각자가 부처라면, 왜 신통변화(神通變化)를 부릴 수 없는 겁니까?"
지눌은 신통변화가 수행의 일정 단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게 근본적 동기여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일렀다. "수행이 근본이고 신통이 말절이다." 그리고 선후로 보아서도 수행이 점점 익어서 신통이 발현할 것인데, 다짜고짜 신통만 찾고 묻느냐면서, "공부는 않고 이런 붕 뜬 생각만 하고 앉았으니, 무슨 성취를 기약하겠느냐?"고 썼다.
돈오와 점수에 대해서
지눌이 말한 '수행의 방법'에 대해 요약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그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돈오가 우선이다. 이 문을 거치지 않으면 점수는 의미가 없다. 일을 한꺼번에 마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극히 예외적인 사람들인데다, 그들도 아마 전생에 이미 돈오에 점수를 꽤 해온 사람들일 것이라고 한다.
돈오 후에 점수가 필요한 이유
"왜 돈오를 해 놓고도 또 점수가 필요한지요?"
"그동안 내 몸이 전부인 줄 알고, 내 온갖 망상분별이 바로 나이겠거니 하고 살아왔다. 내 존재의 근본이 바로 부처이고, 내 신비한 마음의 활동인 영지(靈知)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선지식의 지도로 내 마음의 바탕을 보았다. 거기는 번뇌도 없고 장애도 없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 여러 부처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것이 왈, 돈오다."
그런데 왜 점수가 필요한가? "내 본 바탕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인류가 생긴 이래 오랜 습관의 때가 돈제(頓除), 즉 한꺼번에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돈오한 깨달음에 따라 점차 닦아 나가면, 그 효과가 몸에 젖고 익숙해져 장양성태(長養聖胎), 즉 오래 성스런 태를 기르다가 마침내 성인을 이룰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가 감각기관을 태어날 때 갖추고 태어나지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해야 돈오를 할 수 있는가?
돈오부터 해야 한다는데, 대체 "일념을 돌려, 자성을 깨닫자면 무슨 수를 써야합니까?"
"네 마음이 이미 그렇다니까, 못 알아듣고선 무슨 수를 써야 하느냐고 묻느냐? 무슨 수를 쓰자고 들면 지식이 개입되고, 그럼 일은 어그러져 버린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제 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으니, 사물이 보이는 것으로, '내 눈이 있구나'하면 되지, 다시 그걸 찾아다닐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찾을 생각도 말고, 안 보이네 어쩌네 하는 생각도 하지 말게. 내 마음의 신령스런 작용도 이와 마찬가지라, 이미 활동하고 있는데 어디서 다시 찾을것인가. 찾으려고 들면 못 찾을 것이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바로 견성(見性)한 것이야."
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똑똑한 사람은 알아듣겠지만, 당최, 무슨 소린지···. 좀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도(道)는 알고 모르는 데 달려 있지 않다. 너는 제발, '나는 지금 모른다.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하는 마음부터 접고, 내 말을 새겨들어라. 네게 보이는 사물은 다들 이미지에 불과하고 너의 수많은 생각 또한 본시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렇게 안팎이 비어 있는 곳에, 신령스런 지식, 즉 영지(靈知)의 작용이 환하게 밝다! 알거라, 이것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아울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역대 조사(祖師)와 천하 선지식들이 저들끼리 전해온 진리의 도장[印]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다리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의 지위에 오른다. '걸음걸음이 삼계를 건너 있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의심이 끊어졌네.' 그때 너는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갖추어 인천의 공양을 받을지니, 하루 만 냥의 황금을 흩어 쓸 것이다. 네가 이리 된다면 진정 대장부이니 일생 해야 할 일을 마쳤다!"
'비어 있되 신령스런 마음[空寂靈知之心]'에 대하여
"그 위대한 물건이 나한테도 있다 하시는데, 뭡니까? 그게."
"그놈, 아직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나한테 묻는구나. 네 본심을 바로 가리켜 줄 테이니, 깨끗한 마음으로 잘 들어라. 다시 말하마. 하루 내내 보고 듣고 웃고 떠들며, 화도 내고 좋아라고도 하며,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가르고, 이런 저런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는데, 물어보자. 이게 대체 누가 하는 일이냐. 몸이 한다고? 시체는 냄새도 못 맡고, 눈도 끔뻑거리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 몸이 그것을 한다고는 못하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필시 너의 본심(本心)이다! 그 밝은 신령이 있어 감이수통(感而遂通), 즉 사물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줄 안다. 그래서 방거사가 왈, '신통하구나, 묘한 작용이여, 내가 물을 긷고 섶을 져 나르다니'라고 했던 것이다. 그럼, 이 자리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여러 문이 있지만 하나만 가르쳐 주마. 저기 나무 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예!", "그 듣는 것의 바탕으로 들어서면, 거기 수많은 소리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수많은 소리들, 그것들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기특하구나. 여기가 소리를 통해 진리로 들어서는 곳, 즉 관음입리지문(觀音入理之門)이다. 내친 김에 하나 더 물어보자. 거기 일체의 소리들도, 일체의 분별도 없다고 했겠다. 그럼 그건 맹탕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겠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환하게 밝고, 어둡지 않습니다." "그 맹탕 아니고 환한 무엇은 어떤 몸을 하고 있는고?" "형태가 없어, 말로는 그릴 수 없습니다." "옳지, 거기가 여러 부처와 조사들의 목숨이 달린 곳이다. 다시 의심하지 마라."
지눌은 덧붙인다.
"그것은 크기도 따질 수 없고 끝도 없으며, 안팎이나 오고 감, 나고 죽음도 말할 수 없다. 깨끗하고 더럽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시간이 없으므로 변화도 없고, 그러므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전환도 우스운 말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도 없고, 형태도 이름도 없기에, 그래서 '본래공적(本來空寂)'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무정(無情)한 벽돌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거기 신비로운 이해와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돈오 이후에 왜 다시 점수가 필요한가?
"다시 묻습니다. 돈오라, 단계도 점진도 없다면서 왜 다시 '나중 닦음[後修]'이 필요합니까?"
"앞에서 말했는데, 다시 의심을 내니, 한 번 더 설명해도 무방하겠지.
잘 들어라. 범부들은 무시의 오랜 광대(廣大) 겁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도(五途) - 윤회의 다섯 길,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을 가리킨다. 여기 인간보다 더 행복한 신들의 세계를 더해 육도라고 부른다 - 를 윤회하며, 살아오고 죽어감에, 아상(我相)에 붙들려 망상과 무명(無明)에 길들여져 왔다.
비록 오늘 이번 생에, 내 자성(自性)이 본래 공적(空寂)하여 여러 부처와 같음을 돈오했다고 해도, 이 오래된 습성은 졸지 한꺼번에 잘라내기 어려운 거라.
그래서 순역(順逆)의 사태를 만나면 일희일비하고, 시비선악을 가리는 분별이 불같이 일어났다 사라지니, '바깥의 경계로 인한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이 늘 그대로인 것이다.
반야(般若)로 적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무명을 대치하여 위대한 휴식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래서 말한다. '돈오라, 나 부처와 같지만 다생의 습기가 깊어 바람은 그쳤으나 파도는 아직 흉용하고, 진리가 드러났어도 정념은 여전히 침노한다.'
그래서 깨달은 이후의 수련이 필요하다.
핵심은 주시와 성찰이다. 망념이 문득 일거든, 거기 끌려가지 말기를 노력하여, '덜고 덜어내 마침내 무위(無爲)에 이르러야' 비로소 궁극처라 할 수 있다. 천하 선지식의 '깨달음 이후의 소 먹이기'가 이것이다. 나중 닦는다고는 하나, 이미 망념이 본래 공(空)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돈오했으므로, 악을 끊는다지만 끊어도 끊음이 아니요, 선을 닦는다지만 닦아도 닦음이 아니니 이것이 진정한 끊음이고 닦음이다. 요컨대 이 일은 만행(萬行)을 갖추어 닦으나 오직 무념(無念)을 근본(宗)으로 한다!"
지눌은 덧붙인다.
"혹 어떤 사람들은 돌로 풀을 내리눌러 놓듯이 심신을 억압한다. 그것은 선악의 본질이 공하다는 것을 모른 소치다. 예컨대 성문(聲聞)들이 일일이 마음을 내어 미혹을 잘라내고자 하는데, 이렇게 자르려하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다만 깊이 주시하고 관찰하라. 살인과 도적, 음란과 사치가 다들 불성(佛性)에서 일어나는데, 일어나지만 일어남이 없다. 그 당체(當體)는 고요하니, 다시 자르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말한다. '생각과 정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말고, 다만 자각이 늦어지는 것을 걱정하라. 자각하면 곧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은 없다.' 하여 깨달은 사람에게는 객진번뇌가 다 제호(醍醐)같은 꿀맛이 된다. 미혹에 근본 뿌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우리를 괴롭히는 이 이미지의 세상이 바람에 연기 걷히듯 사라질 것이고, 환상을 조장하는 이 감각이 끊는 물에 얼음 녹듯 할 것이다. 이렇게 염념(念念)이 수습(修習)하고 '비추어 나가기[照顧]'를 잊지 않고 정혜(定慧)를 등지(等持)하면, 집착과 증오가 자연히 담박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커지고 밝아진다. 불행과 업은 자연히 잘려나가고, 내적 힘은 자연히 충실해진다. 그렇게 번뇌가 다할 때 생사가 끊어진다! 만약 미세한 무의식적인 의지의 흐름이 영원히 끊기고, 원각(圓覺)의 큰 지혜가 뚜렷이 독존한다면, 즉 천백억 화신(化身)을 나투어, 수많은 나라에 교감하고 요청에 부응함이, 마치 달이 밝은 하늘에 떠서 그 그림자가 수많은 물과 호수에 비추듯,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중생을 구제하는 데, 쾌락만 있고 근심 없으리니. 이를 일러 대각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지눌의 선에 대한 개요
『수심결』의 짧은 글로 지눌은 할 이야기를 다 했다. 이 어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다시 정리가 필요한 듯하다.
"내가 부처이다[卽心卽佛]!" 지눌은 우리 모두가 완전하다는 폭탄선언으로 출발한다. 이 선언으로 하여, 그동안 배워온 것들이 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이미 완전하기에, 좋은 일을 해서 복을 받는다거나, 나아가 나쁜 일을 해서 타락할 수가 없다. 인과(因果)의 어법은 소승이 주고받는 잠정적이고 초보적 가르침이지, 대승의 최상승(最上乘)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눌이 수많은 도반(道伴)과 함께 불도(佛道)의 근본수련을 실천했던 송광사 전경.
전남 순천에 있다.
지눌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뢰 없이, 즉 돈오없이 하는 모든 방편들, 예를 들면 경전을 베끼고 염불을 하며, 계율을 지키고 자선을 베푸는 그 모든 일이 사상누각,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생각한다.
돈오라니, 어떻게 자신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지눌은 그저 믿으라고 권한다. 누구나 숨쉬고 느끼고 생각하며, 활동하고 살지 않는가. 그 작용(作用) 바로 그것이 위대한 기적이고 우주의 선물이다! 그것 자체가 이미 축복이고, 또한 전부이니 그 안을 뒤집어보거나, 그 밖을 기웃거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지눌은 이를 "눈을 볼 수 없지만 사물을 보는 것으로 우리는 눈이 있음을 알고 믿는 것"에 비유했다. "제 눈을 찾아 헤메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니, 너 또한 우리 육신 안에 거하는 불성(佛性)을 의심하지 말라!"
지눌의 선언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동안 우리는 지금 이 남루한 삶보다 더 크고 위대한 무엇을 찾아 헤매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눌은 이 오래된 관행에 제동을 건다. "그런 것은 없다. 네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 '무의미'의 소식을 화들짝 깨닫는 것이 곧 돈오다.
여기 무슨 특별한 훈련이나, 심각한 논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돈오는 잊고 있던 그 무엇에 대한 아주 단순한, 힘들일 것 없는 '통찰'에 불과하다. 여기 수십 년 토굴의 법랍도, 장좌불와 같은 기벽한 자세도, 대장경을 한 눈에 꿰는 학식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선가의 표현을 빌면, "발뒤꿈치 한번 돌리고," "내 발등을 그냥 내려다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돈오는 너무나 쉽지만, 또한 너무나 어렵다. 누구나 먹고 마신다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지만, 그 단순한 몸의 작용 자체가 곧 불성이라니, 고개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다.
지눌 회상(會上)에 모였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곤혹스럽게 묻는다. "누구나 보고 듣고 말하고 활동하면서 산다. 그것을 또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 왜 어떤 사람은 부처가 되고, 우리는 여전히 중생인가?"
문제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활동하는 작용(作用)이 오염되고 뒤틀려있는 데서 온다! 점수(漸修)는 바로 오염을 정화하고, 뒤틀린 것을 교정해 나가는 작업이다.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 그것이 불교의 인식이다. 우리는 사물을 나 자신의 유용성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인간을 적과 아군의 관점에서 구분하는 오랜 습성을 갖고 있다. 그 분별(分別)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머리 속을 오가는 상념들, 그리고 그 의지적 반응인 정념은 대체로 이 무의식적 작동기제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점수는 바로 그 상념과 정념을 정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이때 유의할 것이 있다. 지눌은 심신의 반응을 "돌로 풀을 눌러놓듯이" 억압하지는 말라고 한다. 선이든 악이든, 그동안의 반응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그저 '관찰'하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억압하지 말고, 정신의 풍경에 무엇이 오가는지를 그저 바라보는 것, 그것 하나면 된다고 그는 장담한다. 그와 더불어 어지러운 상념들이 가라앉고, 거친 정념의 반응들이 예각을 잃고 순치된다. 그만큼 사물을 보는 직관이 커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스러워진다. 이 훈련이 지속되면, 보다 미세한 상념의 흐름들까지 잡히고, 자연 밖의 정념들이 저절로 자취를 감춘다. 사물의 영향력이 감소되는 그만큼, 자신의 본래 힘이 스스로의 빛과 힘을 발산하게 된다.
돈오도 싱겁더니, 점수도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그렇다. 불법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 너무 쉽다고 외려 사람들이 걱정을 해서 그렇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지눌은 자신을 믿고, 마음의 반응을 그저 관찰하는 것이 묘법(妙法)이라고 했다. 그럼 의도적 노력은 필요없는가. 가령 전통적으로 좌선의 포즈를 취하거나, 세계의 구조에 대한 지적 접근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가?
2. 『수심결』은 돈오점수의 한 길을 제시했다. 지눌은 이 밖에 화두를 듦으로서 목표에 이르는 간화의 길을 별도로 열어놓았다. 두 길은 서로 다른 길인가, 같은 길인가?
3. 지눌 스님은 돈오점수를 제창했고, 얼마 전 입적하신 성철 스님은 이것이 '여우의 삿된 견해'라면서 돈오돈수를 창도했다.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은 두 길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논점과 득실을 각자 생각해보자.
추천할 만한 텍스트
『보조법어』, 지눌 지음, 김탄허 옮김, 교림출판사, 1996.
[네이버 지식백과] 수심결 [修心訣] - '돈오점수', 오직 너 자신을 믿어라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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