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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4-11-15_속고금역경도기_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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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4-11-15_속고금역경도기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07. 4. 4. 06:59



®

『속고금역경도기』
K1060
T2152

속고금역경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속고금역경도기_K1060_T2152 핵심요약





♣1060-001♧
『속고금역경도기』




속고금역경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속고금역경도기



속고금역경도기(續古今譯經圖紀)



지승(智昇) 지음

주법장 번역




■ 『역경도기(譯經圖紀)』는

본래 대자은사(大慈恩寺)에 있는
번경원(飜經院)의 당 벽[堂]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당 벽에는 고금(古今)에 전역(傳譯)한 승속[緇素]들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맨 처음 가섭마등(迦葉摩騰)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당삼장(大唐三藏)에서 끝을 맺었다. 


정매[邁]스님은 이로 의거해, 

그 벽화를 보고서
『역경도기』를 지었다. 


■ 그 뒤로 잇달아 전역(傳譯)이 있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업적들을 기술(紀述)한 적이 없었다. 

이에 나는[昇:智昇]
비록 영특하지 못하고 감히 찬양받을 만한 일이 없지만, 

서로 이어져 단절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역경도기』를 찬술한다. 

열람하는 모든 이들이 질책하지 말기를 바란다.




대당전역(大唐傳譯) 나머지 부분


1) 석지통(釋智通)


사문 석지통은 율행(律行)1)에 있어서, 

철저한 고행으로 잘 지켰다. 

또한 경(經)과 논(論)에도 밝았는데, 

특히 총지문(總持門)2)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지통[通]은 수(隋)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출가하여 수도[京]의 대총지사(大總持寺)에 머물면서, 

여러 지방을 유행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낙경(洛京)의 번경관(飜經舘)에서 범서(梵書)와 범어[語]를 배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이치에 정통하게 되었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북천축(北天竺)의 승려가 『천비천안경(千臂千眼經)』의 범본(梵本)을 가지고 와서 진상하자, 

문제(文帝)가 지통에게 칙령을 내려 범승(梵僧)과 함께 대조하여 번역하게 하니, 

그 이름은 『천안천비관세음보살다라니신주경(千眼千臂觀世音菩薩陁羅尼神呪經)』 1부2권이다.

그 뒤 천황(天皇) 영휘(永徽) 4년(653) 계축(癸丑)에 총지사(總持寺)에서, 

또 『천전다라니관세음보살주경(千轉陀羅尼觀世音菩薩呪經)』[1권]ㆍ『관자재보살수심주경(觀自在菩薩隨心呪經)』1권ㆍ『청정관세음보현다라니경(淸淨觀世音普賢陀羅尼經)』1권 등 모두 4부 5권을 번역했다.


2) 가범달마(伽梵達摩)

사문 가범달마는 당(唐)나라 말로, 

존법(尊法)이라고 한다. 

서인도(西印度) 사람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陁羅尼經)』1권을 번역했는데, 

경(經)의 제목에 “서천축(西天竺) 가범달마(伽梵達摩) 역(譯)”이라고만 했고, 

연대(年代)는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본말(本末)을 미루어 보면 황조(皇朝)3) 때, 

신역(新譯)인 것 같다. 

그리고 『천비경(千臂經)』의 서문(序文)을 또한 참고해보면, 

“지통(智通) 공역(共譯)”이라고 되어 있다.



3) 아지구다(阿地瞿多)


사문 아지구다는 당나라 말로, 

무극고(無極高)라고 한다. 

중인도(中印度) 사람이다. 

오직 만자교[滿字:大乘敎]만 연구했고, 

깨끗한 행(行)의 원만함이 마니주[珠]와 같았다. 

또한 오명(五明)4)을 세세하게 연구했고, 

3장(藏)을 섬세하게 통달했다.

천황(天皇) 영휘(永徽) 3년(652) 임자(壬子) 정월에 범본경전(梵本經典)을 가지고 장안(長安)으로 오자, 

칙령(勅令)으로 자은사(慈恩寺)에 안치(安置)토록 했다. 

사문 대승(大乘)과 언종[琮] 등 16인과 영공(英公)과 악공(鄂公) 등 12인이, 

무극고(無極高)를 혜일사(慧日寺)의 부도원(浮圖院)에 초청해서, 

다라니보집회단(陁羅尼普集會壇)을 건립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단(壇)을 건립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모두 공급해 주었다. 

법회를 하는 날 신령하고 기이한 일들이 여러 번 나타나자, 

수도[京] 안에 있던 도속(道俗)들 모두 흔하지 않은 일을 만난 것에 감탄했다. 

사문 현해(玄楷) 등이 법본(法本)을 번역해 달라고 간곡히 청하자, 

4년(653) 계축(癸丑)부터 5년(654) 갑인(甲寅)까지, 

혜일사(慧日寺)의 금강대도량(金剛大道場)에서 『경중촬요초역집성(經中撮要鈔譯集成)』 1부를 번역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다라니집경(陁羅尼集經)』12권이라고 하였다. 

사문 현해 등이 필수(筆受)하였다. 

그리고 그 때, 

중인도(中印度) 대보리사(大菩提寺)의 승려 아난율목차(阿難律木叉)와 가섭(迦葉) 등이 경행사(經行寺)에서, 

공덕천법(功德天法)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 제10권속에 엮어 넣었기 때문에, 

따로 보존하지 않았다.


4) 나제(那提)

사문 나제는 당(唐)나라 말로, 

복생(福生)이라고 한다. 

범어[梵言]로 갖추어 말하면, 

포여오벌야(布如烏伐耶)라고 한다. 

따라서 말하기 번거롭기 때문에, 

이곳에서 잘못 줄여 나제(那提)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래 중인도(中印度) 사람으로, 

뜻과 기개가 웅대하고 원대하였다. 

그리하여 불도를 널리 펼 생각을 품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중생들을 개도[開]하는 일에 힘썼다. 

또 성명학[聲明]5)에도 심히 통달했고, 

모든 훈고학[訓詁]에도 통달했다. 

그리고 깨달음과 관련된 말을 들으면, 

멀고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아 일찍이 집사자국(執師子國)에 간 적도 있었다. 

또 동남(東南)으로, 

능가산(楞伽山)에 올라가기도 했었다. 

남해(南海)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인연을 따라 교화하는가 하면, 

지나(支那)라는 동쪽 나라에서 대승(大乘)을 성대하게 펼치고, 

불법(佛法)을 숭상하여 그 성대함이 남섬부주에서 최고라고 일컬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또 곧 대소승(大小乘)의 경(經)ㆍ율(律)ㆍ논(論) 500여 협(夾) 등, 

도합 1, 

500여 부를 찾아 모아, 

천황(天皇) 영휘(永徽) 6년(655)에 처음으로 수도[京師]에 도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칙령(勅令)으로 자은사(慈恩寺)에 머물도록 하고, 

담당 관리를 두어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게 했다.

현경(顯慶) 원년(656)에 칙명으로, 

곤륜산[崑崙] 부근의 여러 나라에 가서 기이한 약(藥)을 채취하게 하였는데, 

남해(南海)에 도착하자 여러 왕들이 귀의하여 공경했다. 

이에 널리 교화하는 일이, 

전에 왔을 때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용삭(龍朔) 3년(663)에 옛 절로 되돌아왔는데, 

그가 가지고 온 모든 경을 현장[奘]이 가지고 북쪽 땅으로 가서, 

번역하여 전도하고자 생각했으나, 

근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오직 『사자장엄왕보살청문경(師子莊嚴王菩薩請問經)』1권, 

일명 『팔만다라경(八曼茶羅經)』이라고도 함ㆍ『이구혜보살소문예불법경(離垢慧菩薩所問禮佛法經)』1권ㆍ
『아타나지주경(阿吒那智呪經)』1권 등, 

모두 3부 3권만 번역했다. 


그리고 가장 정밀한 부분을 요약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배우고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선림사(禪林寺) 사문 혜택(慧澤)이 당나라 말로 바꿨고, 

풍덕사(豊德寺) 사문 도선(道宣)이 문장을 엮고, 

서문(序文)을 지었다.



5) 야나발타라(若那跋陁羅)

사문 야나발타라는 당나라 말로, 

지현(智賢)이라고 한다. 

남해(南海) 파릉(波淩:訶陵)국 사람으로, 

3장(藏)의 학문에 능통하였다. 

지난 인덕(麟德) 연중에, 

익부(益府)의 성도(成都) 사문 회녕(會寧)이 천축(天竺)국을 유행하며, 

성인의 사적[跡]을 참배[觀禮]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서천(西天)으로 가는 길에, 

파릉국(波淩國)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이때 지현과 함께 『대반열반경다비분(大般涅槃經茶毘分)』 1부2권를 번역했다. 

그리고 지현은 교주(交州)에 잠깐 머물렀고, 

회녕(會寧)은 바로 천축으로 갔다.

그 뒤 의봉(儀鳳) 연초(年初, 

676)에, 

교주의 도독(都督) 양난적(梁難敵)이 사신편에, 

경(經)을 보내왔다. 

경사[京]에 들어온 지 3년(678) 무인(戊寅)년에, 

대자은사(大慈恩寺) 사문 영회(靈會)가 동궁(東宮)에서, 

경을 강설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6) 지바하라(地婆訶羅)

사문 지바하라는 당나라 말로, 

일조(日照)라고 한다. 

중인도(中印度) 사람이다. 

8장(藏)6)에 통달[洞明]했고, 

사함(四含)에 해박하게 밝았다. 

아울러 계행(戒行)이 맑고 고결하며, 

학식이 풍부하였다. 

주술(呪術)엔 더욱 능했고, 

오명(五明)에 통달하였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당나라에 와서 천황(天皇) 의봉(儀鳳) 초년[初:676]부터, 

천후(天后) 수공(垂拱) 말년[末:688)에 이르기까지, 

양경(兩京) 즉 동경(東京)의 태원사(太原寺)와 서경(西京)의 홍복사(弘福寺)에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1부22권ㆍ『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 1부3권ㆍ『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1부2권ㆍ『증계대승경(證契大乘經)』 1부2권ㆍ『대방광불화엄경속입법계품(大方廣佛花嚴經續入法界品)』1권ㆍ『대승이문자보광명장경(大乘離文字普光明藏經)』1권ㆍ『대승변조광명장무자법문경(大乘遍照光明藏無字法門經)』1권ㆍ『대방광사자후경(大方廣師子吼經)』1권ㆍ『대승백복상경(大乘百福相經)』1권ㆍ『대승백복장엄상경(大乘百福莊嚴相經)』1권ㆍ『대승사법경(大乘四法經)』1권ㆍ『보살수행사법경(菩薩修行四法經)』1권ㆍ『칠구지불대심준제다라니경(七俱胝佛大心准提陁羅尼經)』1권ㆍ『불정최승다라니경(佛頂最勝陁羅尼經)』1권ㆍ『최승불정다라니정제업장경(最勝佛頂陁羅尼淨除業障經)』1권ㆍ『조탑공덕경(造塔功德經)』1권ㆍ『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1부2권ㆍ『대승광오온론(大乘廣五蘊論)』1권 등 모두 18부 34권을 번역했다. 


사문 전타반야제바(戰陁般若提婆)가 당나라 말로 바꾸고, 

사문 혜지(慧智)가 범어(梵語)를 증의[證]했다. 

또 칙명으로, 

학덕(學德)으로 이름난 10인을 불러서, 

그 법화(法化)를 돕게 했다. 

이에 사문 도성(道成)ㆍ박진(薄塵)ㆍ가상(嘉尙)ㆍ원측(圓測)ㆍ영변(靈辯)ㆍ명순(明恂)ㆍ회도(懷度) 등이 증의했고, 

사문 사현(思玄)ㆍ복례(復禮) 등이 문장을 엮고, 

필수(筆受)했다. 

천후(天后: 측천무후)가 몸소, 

예조(睿藻 : 임금이 지은 詩文)를 베풀어, 

서문(序文)을 지어 첫머리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빛나게 되고,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다.


7) 두행의(杜行顗)

청신사(淸信士) 두행의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의봉(儀鳳) 연중(年中, 

676~678)에 홍려사(鴻臚寺) 전객서령(典客署令)에 임명되었다. 

두행의는 천축의 말에 밝았고, 

문조(文藻:詩文을 짓는 재주)까지 겸비하여, 

모든 번역 경전을 미묘하게 참조하여 가려내었다. 

그때 계빈국 승려 불타파리(佛陁波利)가, 

범본 경전 일협(一夾)을 싸가지고 와서, 

궁궐에 바쳤다. 

이에 천황(天皇)이 두행의를 시켜, 

번역케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1권이라고 했다. 

영원장군(寧遠將軍) 도파(度婆)와 중인도 삼장법사(三藏法師) 지바하라가, 

번역을 증의[證]하였다. 

그리고 이때가, 

의봉(儀鳳) 4년(679) 정월 5일이었다.

이 두행의의 번역은 묘휘(廟諱)와 국휘(國諱)를 모두 기피하였는데, 

이를테면 세존(世尊)을 성존(聖尊)이라 하고, 

세계(世界)를 생계(生界)라 하였으며, 

대세(大勢)를 대취(大趣)라 하고, 

구치(救治)를 구제(救除)라고 한 것 따위이다. 

번역을 마치고 황상[皇]에게 바치자, 

황상이 읽어 보고 두행의에게 말했다.

“이미 성인의 말씀인데, 

휘자[諱]를 기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때 두행의는 조칙을 받들어 바로잡았고, 

이런 까닭에 휘자를 피하는 일이 그치게[寢] 되었다. 

그 뒤 일조삼장(日照三藏)이 조칙을 받들어, 

다시 번역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불정최승다라니(佛頂最勝陁羅尼)』라고 했다.



8) 불타다라(佛陁多羅)

사문 불타다라는 당나라 말로, 

각구(覺救)라고 한다. 

북인도(北印度) 계빈국[罽賓] 사람이다. 

동도(東都) 백마사(白馬寺)에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1권을 번역했다. 

이 경은 근래에 나왔는데, 

어느 연대[年]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우선 불도를 널리 펴는 데 관심을 가지고서 거짓되고 삿된 것을 분별해, 

다만 진전(眞詮)7)이 잘못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썼을 뿐이다. 

따라서 연월(年月)을 자세히 알아낼 수 있었겠는가?


9) 불타파리(佛陁波利)

사문 불타파리는 당나라 말로, 

각호(覺護)라고 한다. 

북인도 계빈국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잊고 불도를 따랐으며,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사적을 두루 참배했다. 

그리고 문수사리보살이 청량산(淸涼山)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멀리 사막을 지나 몸소 참배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다 천황(天皇) 의봉(儀鳳) 원년(676) 경자(景子)에 오대산에 석장(錫杖)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고 슬픔에 복바쳐 눈물을 흘리니, 

마치 비 오듯 흘리면서 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한 노인이 산 속에서 나와 바라문(婆羅門)의 말로 불타파리에게 말했다.

“스님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모습이 측은해 보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타파리가 대답했다.

“문수대사(文殊大士)께서 이 산에 자취를 숨기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인도로부터 와서 우러러 예배하고자 합니다.”

노인이 말했다.

“스님은 그 나라에서 오실 적에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는지요? 

이 국토의 중생들은 죄업을 많이 지었고, 

출가한 무리들도 파계한 이가 많습니다. 

불정신주(佛頂神呪)는 죄업을 제거하는 비밀스런 방술인데, 

만약 『불정존승다라니경』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으며,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한들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인도[西國]로 돌아가 그 경전을 가지고 오셔서 이 국토에 유전(流傳)케 하신다면, 

이는 바로 뭇 성인을 두루 받들고, 

널리 중생들을 이롭게 하여 3악도(惡道)에서 건져 주는 것이 될 터이니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또한 스님께서 그 경전을 가지고 여기에 오시면, 

제자는 마땅히 문수사리보살이 계시는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불타파리는 이 말을 듣고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산을 향하여 예배하고, 

머리를 드는 사이에 노인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불타파리는 깜짝 놀라 더욱더 경건한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가 경전을 가지고 제성(帝城:황제가 사는 長安)에 도착하여, 

곧바로 황제를 뵙고자 했다. 

이에 유사(有司)가 문서를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자, 

천황(天皇)이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비전(秘典:불정존승다라니경)을 존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칙령을 내려
홍려시(鴻臚寺) 전객령(典客令)인
두행의(杜行顗)와 일조(日照) 삼장으로 하여금 궁중에서 함께 번역케 했다. 


번역을 마치자, 

비단 30필을 하사하고, 

경전을 모두 궁중에 두도록 했다. 


이에 불타파리가 울먹이며, 

아뢰었다.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은, 

그 뜻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서입니다. 

청컨대, 간절히 바라오니 경전을 널리 유통시켜 주십시오.”


이에 황제가 그 지극한 마음을 가엾게 여기어서
마침내 번역한 경전은 궁중에 두고, 

범본(梵本)은 돌려주어 유포하게 했다. 


불타파리는 경전을 얻고서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리고 서명사(西明寺)로 가서
범어(梵語)를 잘 하는 승려 순정(順貞)을 만났고, 

곧 그와 함께 번역할 것을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가 그 청을 윤허하였다. 


마침내 대덕(大德) 원측(圓測) 스님과 순정이 함께 번역하였고, 

경전의 이름을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1권이라고 했다.


불타파리는 소원을 이룬 다음에
범본 경전을 가지고 오대산으로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아 그 소재지를 알 수 없다.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 볼 때, 

이것이 가장 많이 유포되었다.
그 경전의 서문은 영창(永昌, 689) 이후에 어떤 사람이 기술한 것이다. 

여러 역본(譯本)은 연월(年月) 차이가 나는데, 

자세히는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기술한 것과 같다.



10) 제운반야(提雲般若)

사문 제운반야는 혹은 제운타야나(提雲陁若那)라고도 하는데, 

당나라 말로는 천지(天智)라고 한다. 

우전국(于闐國) 사람이다. 

학문은 대승과 소승에 달통했고, 

지혜는 진제[眞]와 속제[俗]에 달통했다. 

천후(天后) 영창(永昌) 원년(689)에 도읍(都邑)에 도착했다. 

아울러 칙명으로, 

위국동사(魏國東寺)에서 번역하게 했다. 

그리하여 영창(永昌)원년(689) 기축(己丑)부터, 

천수(天授) 2년(691) 신묘(辛卯)에 이르기까지, 

『대승조상공덕경(大乘造像功德經)』 1부2권ㆍ『대방광불화엄경불사의불경계분(大方廣佛花嚴經不思議佛境界分)』1권ㆍ『대방광불화엄경수자분(大方廣佛花嚴經修慈分)』[1권]ㆍ『지거다라니경(智炬陁羅尼經)』1권ㆍ『제불집회다라니경(諸佛集會陁羅尼經)』1권ㆍ『대승법계무차별론(大乘法界無差別論)』1권 등 모두 6부 7권을 번역했다. 

그리고 사문전타(戰陁)와 혜지(慧智) 등이 당나라 말로 바꾸었고, 

사문 처일(處一) 등이 필수했으며, 

사문 복례(復禮) 등이 문장을 엮었다. 

아울러 사문 덕감(德感)ㆍ혜엄(慧儼)ㆍ법명(法明)ㆍ홍경(弘景) 등이 증의(證義)했다.


11) 석혜지(釋慧智)

사문 석혜지는 아버지가 바라문종(婆羅門種)인 인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나라에 사신[使]으로 왔다가, 

혜지를 낳았다. 

혜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치밀하여, 

범서(梵書)와 범어[語]를 잘했다. 

그래서 삼장(三藏) 지바하라(地婆訶羅)ㆍ제운야나(提雲若那)ㆍ보사유(寶思惟) 등도 혜지를 불러서, 

가지고 있던 번역본을 모두 증의(證義)하게 했다. 

아울러 당나라 말로 바꾸게도 했다. 

혜지는 천후(天后) 장수(長壽) 2년(693) 계사(癸巳)에 이르기까지 동도(東都)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직접 『찬관세음보살송(讚觀世音菩薩頌)』1권을 번역했다.



12) 실차난타(實叉難陁)

사문 실차난타는 당나라 말로, 

학희(學喜)라고 한다. 

우전국(于闐國) 사람이다. 

지혜와 도량이 크고 넓었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뜻을 두었다. 

대승과 소승에 매우 통달했고, 

아울러 이학(異學)의 논서[論]에도 통달했다. 

천후(天后)는 불일(佛日)8)을 밝게 드날리고, 

대승(大乘)을 공경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화엄구경(華嚴舊經)』의 처(處)와 회(會)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멀리 우전국에 완전한 범본(梵本:80화엄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그것을 찾아오게 하였다. 

아울러 번역할 사람을 초빙하도록 했다. 

이에 실차난타[實叉]와 경(經)이 함께 낙양[洛]에 도착하니, 

천후(天后) 증성(證聖) 원년(695) 을미(乙未)였다. 

곧바로 동도(東都) 대내(大內)의 변공사(遍空寺)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花嚴經)』 1부80권를 번역했다. 

그리고 천후(天后)가 번역하는 법좌(法座)에 몸소 나아가서 서문(序文)을 찬란하게 짓고, 

스스로 선호(仙毫)를 들어 경명과 품명을 썼다.

그리고 남인도(南印度) 사문 보리류지(菩提流志)와 사문 의정(義淨)이 함께 범본(梵本:80화엄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사문 복례(復禮)와 법장(法藏) 등에게 부탁하여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번역하되, 

성력(聖曆) 2년(699) 기해(己亥)에 이르러 번역을 끝냈다.

또 구시(久視) 원년(700) 경자(庚子)에 삼양궁(三陽宮)에서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1부7권를 번역했고, 


서경(西京) 청선사(淸禪寺)와 동도(東都) 수기사(授記寺)에서
『문수사리수기경(文殊師利授記經)』 1부3권ㆍ『대방광입여래지덕불사의경(大方廣入如來智德不思議經)』1권ㆍ『대방광여래불사의경계경(大方廣如來不思議境界經)』1권ㆍ『대방광보현소설경(大方廣普賢所說經)』1권ㆍ『관세음보살비밀장신주경(觀世音菩薩秘密藏神呪經)』1권ㆍ『묘비인당다라니경(妙臂印幢陁羅尼經)』1권ㆍ『백천인다라니경(百千印陁羅尼經)』1권ㆍ『구면연아귀다라니신주경(救面然餓鬼陁羅尼神呪經)』1권ㆍ『우요불탑공덕경(右繞佛塔功德經)』1권ㆍ『대승사법경(大乘四法經)』1권, 일조(日照) 삼장과 함께 번역한 것은 경명(經名)이 같지만 문의(文意)는 전혀 다르다.ㆍ

『십선업도경(十善業道經)』1권ㆍ『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1부2권ㆍ『마하반야수심경(摩訶般若隨心經)』1권ㆍ『대방광불생불멸경(大方廣不生不滅經)』1권ㆍ『대방광여래난사의경계경(大方廣如來難思議境界經)』1권ㆍ『이구정광다라니경(離垢淨光陁羅尼經)』1권ㆍ『보살출생사법경(菩薩出生四法經)』1권 등 모두 19부 107권을 번역했다. 


그리고 사문 파륜(波崙)ㆍ현궤(玄軌) 등이 필수했고, 

사문 복례(復禮) 등이 문장을 엮었으며, 

사문법보(法寶)ㆍ홍경(弘景) 등이 증의(證義)했다. 

아울러 태자(太子) 중사(中舍)인 가응복(賈膺福)이, 

번역하는 일을 감독했다.


13) 이무첨(李無諂)

바라문 이무첨은 북인도 남파국(嵐波國) 사람이다. 

학식이 높고 도량이 넓으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내외(內外)의 학문에 널리 통달했다. 

또한 당나라 말과 범어에도 밝게 통달하여 막힘이 없었다. 

삼장(三藏) 아이진나(阿你眞那)와 보리류지(菩提流志) 등이 여러 경전을 번역하고, 

이무첨(李無諂)이 당나라 말로 바꾸었다.

천후(天后) 성력(聖曆) 3년(700) 경자(庚子)에 신라승(新羅僧) 명효(明曉)를 위하여, 

불수기사(佛授記寺) 번경원(飜經院)에서 『불공견삭다라니경(不空羂索陁羅尼經)』1권을 번역했다. 

사문 파륜(波崙)이 필수하고, 

서문을 지었다.



14) 미타산(彌陁山)

사문 미타산은 당나라 말로, 

적우(寂友)라고 한다. 

도화라국(覩貨邏國)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오인도(五印度)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경(經)ㆍ논(論)을 배웠다. 

특히 『능가경[楞伽]』과 『구사론[俱舍]』에 대해서 세세하게 꿰뚫었다. 

처음에 실차난타(實叉難陁)와 함께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을 번역했고, 

그 후 천후(天后) 말년에 사문 법장(法藏) 등과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陁羅尼經)』1권을 번역했다.


15) 아이진나(阿你眞那)

사문 아이진나는 당나라 말로, 

보사유(寶思惟)라고 한다. 

북인도 가습밀라국(迦濕蜜羅國) 사람이고, 

찰제리종(刹帝利種)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습선[禪]과 송경[誦]으로 업(業)을 삼다가, 

구족계를 받은 뒤로는 오로지 율품(律品)을 세밀하게 연구했다. 

지혜가 대중들보다 뛰어났고, 

진제[眞]와 속제[俗]를 겸하고 있었다.

장수(長壽) 2년(693)에 낙도(洛都)에 도착하였다. 

아울러 칙명으로 천궁사(天宮寺)에 머물도록 하고서, 

곧바로 천후(天后) 장수(長壽) 2년(693) 계사(癸巳)부터, 

중종(中宗) 신룡(神龍) 2년(706) 경오(景午)9)까지, 

불수기사[佛授記]ㆍ천궁사[天宮]ㆍ복선사[福先] 등에서 『불공견삭다라니자재왕주경(不空羂索陁羅尼自在王呪經)』 1부3권ㆍ『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1권ㆍ『교량수주공덕경(校量數珠功德經)』1권ㆍ『관세음보살여의마니다라니경(觀世音菩薩如意摩尼陁羅尼經)』1권ㆍ『문수사리근본일자다라니경(文殊師利根本一字陁羅尼經)』1권ㆍ『대다라니말법중일자심주경(大陁羅尼末法中一字心呪經)』1권ㆍ『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신주경(隨求卽得大自在陁羅尼神呪經)』1권 등 7부 9권을 번역했다. 

계빈국(罽賓國) 사문 시리난타(尸利難陁)가 풀이하고, 

사문 혜지(慧智) 등이 함께 범문(梵文)과 대조하여 증의하였다. 

또한 바라문 이무첨(李無諂)이 당나라 말로 바꾸고, 

사문 덕감(德感)과 직중서(直中書) 이무애(李無碍) 등이 필수(筆受)했다.


16) 석의정(釋義淨)

사문 석의정(635~713)은 제주(齊州)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장씨[張氏]이고, 

자(字)는 문명(文明)이다. 

어린 나이에 영화를 버리고 머리를 깍고, 

출가하였다. 

명망 높은 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묻고, 

여러 서적을 널리 탐구했다. 

아울러 내외의 전적에도 모두 밝아, 

고금(古今)의 일을 두루 알았다. 

15세에 서역(西域)을 유행하고자 뜻을 세웠고, 

법현(法顯)스님의 맑은 지조를 우러르고 현장(玄奘)법사의 뛰어난 풍모를 사모했다. 

이에 더욱더 부지런히 공부하여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는 더욱 굳게 지켜 정직하게 행동하였다.

함형(咸亨) 2년(671) 37세에, 

비로소 전에 마음먹었던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마침내 광주부[廣府]에서 처음 맹세했던, 

동지(同志) 10여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정박했던 범선을 띄우자, 

함께 갔던 사람들이 모두 되돌아갔다. 

하지만 오직 의정(義淨)만은 인도에 가고자 하는 굳은 마음이 더욱 치성해졌고, 

마침내 혼자 출발하여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는 지역마다 그곳의 말을 다 통달했고, 

만나는 왕(王)과 신하들도 모두 의정을 존중하고 예우해 주었다. 

취봉산[鷲峯:영취산]과 계족산[鷄足]에도 직접 올라가 보았고, 

기원정사[祇園]와 녹야원[鹿苑]을 모두 순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란타사[那爛陁]에 머물면서 공부하고, 

보리수(菩提樹)10)

에 예배했다. 

아울러 학문에 뛰어난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대승과 소승을 배우기도 했다. 

배울 것을 다배우고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0여 나라를 거쳤고, 

왕래하면서 불도(佛道)를 물은 세월도 20년이 넘었다.

천후(天后) 증성(證聖) 원년(695) 을미(乙未) 중하(仲夏:음력 5월)에 낙양[洛]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적에 가지고 온 범본(梵本) 경ㆍ율ㆍ논이 400부 가까이 되었는데, 

모두 50만 게송이었다. 

아울러 금강좌진용(金剛座眞容) 1포(鋪)와 사리(舍利) 300립(粒)을 가지고 왔다. 

천후(天后)는 불법[法]을 공경하고 사람을 존중했으므로, 

몸소 동문(東門) 밖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했다. 

그리고 낙양(洛陽)의 승려들은 깃대와 깃발을 갖추어 시설하고, 

줄지어서 악기를 연주하며 앞에서 인도해 나아갔다. 

칙명으로 불수기사(佛授記寺)에 편안히 머물게 하고, 

가지고 온 범본(梵本)을 번역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우전국[于闐] 삼장(三藏:實叉難陁)과 함께 『화엄경(花嚴經:80화엄)』을 번역했으나, 

구시(久視:700) 이후로는 직접 번역했으니, 

곧 구시 원년(700) 경자(庚子)부터, 

장안(長安) 3년(703) 계묘(癸卯)에 이르기까지, 

동도(東都) 복선사(福先寺)와 서경(西京) 서명사(西明寺)에서 『금강명최승왕경(金剛明最勝王經)』 1부10권ㆍ『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1권ㆍ『입정부정인경(入定不定印經)』1권ㆍ『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1권ㆍ『만수실리보살주장중일자주왕경(曼殊室利菩薩呪藏中一字呪王經)』1권ㆍ『장엄왕다라니주경(莊嚴王陁羅尼呪經)』1권ㆍ『선야경(善夜經)』1권ㆍ『대승유전제유경(大乘流轉諸有經)』1권ㆍ『묘색왕인연경(妙色王因緣經)』1권ㆍ『무상경(無常經)』1권ㆍ『팔무가유가경(八無暇有暇經)』1권ㆍ『장조범지청문경(長爪梵志請問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1부50권ㆍ『근본살바다부율섭(根本薩婆多部律攝)』 1부20권ㆍ『근본설일체유부니타나목득가(根本說一切有部尼陁那目得迦)』 1부10권ㆍ『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根本說一切有部百一羯磨)』 1부10권ㆍ『장중론(掌中論)』1권ㆍ『취인가설론(取因假設論)』1권ㆍ『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1권ㆍ『용수보살권계왕송(龍樹菩薩勸誡王頌)』1권 등을 번역하여 엮어 베껴서 궁궐에 바치자, 

천후(天后)가 새로 번역한 성교(聖敎)에 서문(序文)을 지어 경문 첫머리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는 또 화제용흥(和帝龍興) 신룡(神龍) 원년(705) 을사(乙巳)에 동도(東都) 내도량(內道場)에서 『대공작주왕경(大孔雀呪王經)』 1부3권를 번역했고, 

또 대복선사(大福先寺)에서 『불위승광천자설왕법경(佛爲勝光天子說王法經)』1권ㆍ『향왕보살다라니주경(香王菩薩陁羅尼呪經)』1권ㆍ『일체공덕장엄왕경(一切功德莊嚴王經)』1권 등을 번역했다. 

그러자 화제(和帝)가 진심으로 불경[釋典]을 숭상하여 서문을 지어 찬양했으니, 

이것이 대당용흥삼장성교서(大唐龍興三藏聖敎序)이다. 

황제가 낙성(洛城)의 서문(西門)에 행차하여, 

군벽(群辟)11)에게 의정이 새로 번역한 경전을 알리고 드날리게 했다.

의정은 신룡 2년(706) 병오(丙午)에 어가를 따라서 수도[京]로 돌아왔고, 

칙령으로 대천복사(大薦福寺)에 번경원(飜經院)을 특별히 설치케 했으며, 

3년(707) 정미(丁未)에는 황제가 궁궐로 불러들여서 번경사문(飜經沙門)들과 함께 90일 동안의 하안거를 지냈다.

황제가 옛적에 살던 방에 유폐[幽]되어 돌아올 수 없게 되었을 땐 약사여래부처님께 기원하여, 

마침내 내려 주는 복덕을 입고 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지난날의 은택을 가상히 여겨, 

넓고 큰 불법을 다시 밝히려고 법도(法徒)들에게 칙명하여, 

또 번역하도록 했다. 

이에 불광내사(佛光內寺)에서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七佛本願功德經)』 1부2권를 번역했다. 

그리고 황제가 법연(法筵)에 행차하여, 

손수 필수했다.

또 경룡(景龍) 4년(710) 경술(庚戌)에 대천복사(大薦福寺)에서 『불위난타설출가입태경(佛爲難陁說出家入胎經)』 1부1권ㆍ『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1권ㆍ『수주공덕경(數珠功德經)』1권ㆍ『관자재보살여의심다라니주경(觀自在菩薩如意心陁羅尼呪經)』1권ㆍ『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1권ㆍ『발제죄장주왕경(拔除罪障呪王經)』1권ㆍ『오온개공경(五蘊皆空經)』1권ㆍ『삼전법륜경(三轉法輪經)』1권ㆍ『비유경(譬喩經)』1권ㆍ『요치병경(療痔病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필추니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苾蒭尼毘柰耶)』 1부20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柰耶雜事)』 1부40권ㆍ『근본설일체유부계경(根本說一切有部戒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필추니계경(根本說一切有部苾蒭尼戒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냐야송(根本說一切有部毘柰耶頌)』 1부5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섭송(根本說一切有部毘柰耶雜事攝頌)』1권ㆍ『근본설일체유부니타나목득가섭송(根本說一切有部尼陀那目得迦攝頌)』1권ㆍ『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1부5권ㆍ『관소연론석(觀所緣論釋)』1권 등을 번역했다.

또 예종(睿宗) 경운(景雲) 2년(711) 신해(辛亥)에 다시 『칭찬여래공덕신주경(稱讚如來功德神呪經)』1권ㆍ『불위해룡왕설법인경(佛爲海龍王說法印經)』1권ㆍ『약교계경(略敎誡經)』1권ㆍ『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1부3권ㆍ『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송(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頌)』1권ㆍ『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1권ㆍ『관총상론송(觀總相論頌)』1권ㆍ『지관문론송(止觀門論頌)』1권ㆍ『수장론(手杖論)』1권ㆍ『일백오십찬불송(一百五十讚佛頌)』1권ㆍ『법화론(法華論)』 1부5권ㆍ『집량론(集量論)』 1부4권 등을 번역했다.

천후(天后) 구시(久視) 원년(700) 경자(庚子)부터, 

예종(睿宗) 경운(景雲) 2년(711) 신해(辛亥)에 이르기까지, 

모두 56부 230권을 번역했다. 

북인도 사문 아이진나(阿你眞那)와 토화라(吐火羅)12) 사문 달마말마(達磨末磨) 등이 범의(梵義)를 증의했고, 

계빈국[罽賓] 사문 달마난타(達摩難陁)와 거사 동인도(東印度) 수령(首領) 이사라(伊舍羅) 등이 범문(梵文)을 증의했다. 

사문 갈리말저오제제바(曷利末底烏帝提婆)와 중인도(中印度) 거사 이석가도파다(李釋迦度頗多) 등이 범본(梵本)을 읽었고, 

동인도 거사 구담금강(瞿曇金剛)과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왕자 아순(阿順) 등이 번역된 말을 증의했다.

사문 파륜(波崙)ㆍ복례(復禮)ㆍ혜표(慧表)ㆍ현산(玄傘) 등이 필수(筆受)했고, 

사문 법보(法寶)ㆍ승장(勝莊)ㆍ신영(神英)ㆍ인량(仁亮)ㆍ혜소(慧沼)ㆍ법장(法藏) 등이 증의했으며, 

수문관대학사특진조국공(修文舘大學士特進趙國公) 이교(李嶠)ㆍ병부상서소요공(兵部尙書逍遙公) 위사립(韋嗣立)과 조언소(趙彦昭)ㆍ노장용(盧藏用)ㆍ장열(張說)ㆍ이예(李乂)ㆍ소정(蘇頲)ㆍ서견(徐堅) 등이 문장을 윤색(潤色)했다. 

좌복야(左僕射) 서국공(舒國公) 위거원(韋巨源)ㆍ우복야(右僕射) 허국공(許國公) 소괴(蘇瑰) 등이 번역하는 일을 감독했고, 

부마도위(駙馬都尉) 양신교(楊愼交)ㆍ사호(嗣號) 왕옹(王邕)ㆍ태상경(太常卿) 설숭윤(薛崇胤) 등이 앞뒤에서 보호하고, 

감독했다.

또한 따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1부2권ㆍ『대당남해기귀내법전(大唐南海寄歸內法傳)』 1부4권ㆍ『별설죄요행법(別說罪要行法)』1권ㆍ『수용삼수요법(受用三水要法)』1권ㆍ『호명방생궤의(護命放生軌儀)』 1권 등 모두 5부 9권을 번역했다. 

또 『설일체유부발솔도(說一切有部跋窣堵)』곧 모든 율(律) 중에 건도(健度)와 발거(跋渠) 같은 부류이다. 

범음(梵音)의 초하(楚夏) 언어에서 초래된 언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를 번역했는데, 

약 70~80권이나 된다. 

다만 진본(眞本)과 대조하여 정리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열반에 들고 말았기 때문에, 

번역문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게 되었다.

의정은 또 일체유부율(一切有部律) 중에서, 

모든 연기(緣起) 부분만을 초록[抄]하여 별부(別部)를 만들어 유행(流行)시켰으니, 

『마갈어인연경(摩竭魚因緣經)』 등 42경(經) 49권이다. 

그러나 이미 따로 초록한 경전은 번역한 경전의 정수(正數)에 합산되지 않았다.지금 모두 『개원석교록開元釋敎』「별생(別生)」편에 수록되어 있다. 

의정이 비록 3장(藏)을 골고루 번역했으나, 

특히 율부(律部)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다. 

때문에 번역한 글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학도(學徒)들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으니, 

즉 모든 일을 하는 중에서 녹랑[漉]으로 물을 거르고 더러움을 씻어내는 일을 급선무로 하여, 

보통의 사람들보다 특이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이에 배우는 무리들이 서로 전하여 경락(京洛)에서 두루 행하게 되었으니, 

아름다운 일이요 또한 남기신 법(法)이 성대하게 행해짐이로다.


17) 보리류지(菩提流志)

사문 보리류지는 본명이 달마류지(達摩流支)이다. 

당나라 말로, 

법희(法希)라고 한다. 

천후(天后)가 칙명하여, 

보리류지(菩提流志)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나라 말로, 

각애(覺愛)라고 한다. 

남인도(南印度) 사람이다. 

바라문종(婆羅門種)으로, 

성(姓)은 가섭씨(迦葉氏)이다.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대중들보다 뛰어났고, 

풍채가 훤칠하고 신이(神異)했다. 

12세에 외도(外道)에게 출가하여, 

바라사라(波羅奢羅)를 스승으로 받들고, 

그곳의 경술(經術)을 배웠다. 

이에 성명(聲明)에 통달해 밝았고, 

특히 수론(數論)에 더욱 능했다. 

아울러 음양(陰陽)ㆍ역수(曆數)ㆍ지리(地理)ㆍ천문(天文)ㆍ주술(呪術)ㆍ의방(醫方) 따위도 모두 꿰뚫어, 

손바닥 들여다보듯 능숙했다. 

그러다 60세[耳順]가 되자, 

스스로 생각하였다.

‘홀로 승려를 찾아가 논의(論議)하는 것으로, 

나의 일을 삼으리라.’

그때 대승상좌부(大乘上座部)에 삼장이 있었는데, 

이름이 야사구사(耶舍瞿沙)였다. 

야사구사는 보리류지의 근기가 성숙된 것을 알고서, 

서로 사귀며 논의했다. 

그러나 보리류지는 몇 개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말과 이치에 있어 모두 굴복하고 말았다. 


이에 비로소, 

불일(佛日)이 높이 떠서 비추는 광명은, 

반딧불과 등불로 비추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법(法)의 바다는 깊고도 넓으니, 

어찌 방울 물로 적실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야사구사에게 몸을 의지하고 공손히 섬기면서, 

오로지 불법만을 배우고 계(戒)를 받들어 범하지 않았으며, 

지조와 절개가 매우 높고 준엄하였다. 

지혜가 뛰어나고 견해와 학식이 넓고 깊어서, 

5년이 채 넘지 않아 삼장에 통달하게 되었다. 

천황(天皇)이 멀리 청아한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맞이해 오도록 했는데, 

사신이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갑자기 흰 구름이 수레를 감돌았다. 


천후(天后)가 재위하는 기간에 비로소 제경(帝京)에 도착했으니, 

즉 장수(長壽) 2년(693) 계사(癸巳)에 비로소 도읍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그 해(693)에 불수기사에서, 

『보우경(寶雨經)』 1부10권를 번역했다. 

한편 중인도(中印度)의 왕(王)도 같은 시기에, 

사문 범마(梵摩)로 하여금 범본(梵本)을 펴도록 했다.


그는 또 대주(大周) 동사(東寺)와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문수사리소설불사의불경계경(文殊師利所說不思議佛境界經)』 1부2권ㆍ『실상반야바라밀경(實相般若波羅蜜經)』1권ㆍ『대승금강계주보살수행분(大乘金剛髻珠菩薩修行分)』1권ㆍ『대승가야산정경(大乘伽耶山頂經)』1권ㆍ『육자신주경(六字神呪經)』1권ㆍ『호명법문신주경(護命法門神呪經)』1권ㆍ『유덕녀소문대승경(有德女所問大乘經)』1권ㆍ『반야바라밀다나경(般若波羅蜜多那經)』1권ㆍ『묘혜동녀소문경(妙慧童女所問經)』1권ㆍ『불공견삭주심경(不空羂索呪心經)』1권ㆍ『묘덕바라문녀문불전하법륜경(妙德婆羅門女問佛轉何法輪經)』1권ㆍ『지맹장자문경(智猛長者問經)』1권ㆍ『불입비야리제일체귀병경(佛入毘耶離除一切鬼病經)』1권ㆍ『나야경(那耶經)』1권ㆍ『대다라니경(大陁羅尼經)』1권ㆍ『문수사리주법장경(文殊師利呪法藏經)』1권ㆍ『일자주왕경(一字呪王經)』1권ㆍ『무가략예보살조광대마니비밀선주경(無迦略曳菩薩造廣大摩尼秘密善住經)』1권ㆍ『석반야육자삼구론(釋般若六字三句論)』1권 등을 번역했다. 

이상은 모두 20부 30권이다.



사문 행감(行感) 등이 함께 번역했고, 

사문 전타(戰陁)와 바라문 이무첨(李無諂)이 당나라 말로 바꾸었다. 

또한 사문 혜지(慧智)가 번역된 말을 증의했고, 

사문 처일(處一) 등이 필수(筆受)했다. 

그리고 사문 사현(思玄) 등이 문장을 엮었고, 

사문 원측(圓測)과 신영(神英) 등이 증의하였으며, 

사빈시(司賓寺) 승(丞) 손벽(孫僻)이 번역하는 일을 감독했다. 

그 후로 화제용흥(和帝龍興) 신룡(神龍) 2년(706) 경오(景午)에 어가[駕]를 따라 경사[京]에 들어와서는 황제의 칙명으로, 

서숭복사(西崇福寺)에 머물면서 『대보적경(大寶積經)』 1부120권를 번역했다. 

이 경은 모두 49회(會)로 되어 있다.49회 가운데 26회 39권은 보리류지가 신역(新譯)한 것이고, 

나머지는 옛 경전을 감교勘하여 편입한 것이다. 

상대(上代)의 번역은 회(會)를 적출[摘]하여 따로 번역했으나, 

끝내 부질(部帙)13)을 마치지 못했다. 

따라서 지난 인덕(麟德) 원년(664)에 현장(玄奘) 법사가 옥화사(玉華寺)에서, 

『대반야경(大般若經)』을 번역하여 마쳤다. 

이에 여러 대덕(大德) 스님들이 『보적경[寶積]』을 번역해줄 것을 넌지시 청했다. 

따라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마침내 범본을 펴고 몇 줄 번역하다가, 

이내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 『보적경』은, 

이 땅의 중생들과는 인연이 없구나. 

나의 기력이 쇠약하여, 

다 마칠 수가 없도다.”

그리고는 번역을 중단했다. 


그리하여 화제(和帝)가 보리류지에게 칙명하여, 

현장법사가 번역하지 않은 『보적경』의 나머지 부분을 이어서 번역하도록 했다. 


이에 마침내 현장이 번역한 『보적경』을 펼쳐들고, 

새로 가지고 온 범본(梵本)과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하지만 상대(上代)에 번역한 것 중에 내용이 같은 것은 그대로 두고, 

내용이 같지 않은 범본만을 살펴서, 

꼼꼼하게 번역했다. 

아울러 본래의 뜻을 드러내지 못한 부분은 문장을 견주어 고찰해, 

다시 번역했다. 


그리하여 예종(睿宗) 선천(先天) 2년(713) 계축(癸丑)에야 비로소 번역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목을 쓰던 날, 

대내(大內)의 불광전(佛光殿)에 화제(和帝)가 몸소 행차하여, 

법연(法筵)에서 경의 요지를 필수했다. 


이때 조정의 많은 관료들이 모시고 앉아 있었고, 

황후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고인(古人)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예종(睿宗)이 등극하자, 

다시 북원(北苑)의 백련화정(白蓮花亭)과 대내(大內)의 감로정[甘露] 등의 전각에 특별히 역경법회를 열고, 

맨 처음은 황제가 몸소 필수했다. 


사문 사충(思忠)과 동인도(東印度)의 대수령(大首領) 이사라(伊舍羅)와 직중서(直中書) 도파구(度頗具) 등이 범문(梵文)을 번역했고, 

북인도(北印度) 사문 달마(達摩)와 남인도(南印度) 사문 파야구다(波若丘多) 등이 범의(梵義)를 증의했다. 

사문 혜각(慧覺)ㆍ종일(宗一)ㆍ보경(普敬)ㆍ이방(履方) 등이 필수했고, 

사문 승장(勝莊)ㆍ법장(法藏)ㆍ진외(塵外)ㆍ무착(無著) 등이 증의했다. 

사문 승례(承禮:復禮가 맞다)ㆍ신간(神暕)ㆍ운관(雲觀)ㆍ도본(道本) 등이 문장을 차례대로 엮었고, 

태자첨사(太子詹事) 동해군공(東海郡公) 서견(徐堅)ㆍ빈왕부고(邠王傅固) 안백(安伯) 노찬(盧粲)ㆍ상서우승(尙書右丞) 동해남(東海男) 노장용(盧藏用)ㆍ중서사인(中書舍人) 야왕남(野王男) 소진(蘇瑨)ㆍ예부랑중(禮部郞中) 팽경(彭景)ㆍ직좌보궐(直左補闕) 기현남(祁縣男) 왕진(王瑨)ㆍ태부승(太府丞) 안온지(顔溫之)ㆍ태상박사(太常博士) 하지장(賀知章) 등이 윤색(潤色)했다.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여후(平與侯) 육상선(陸象先)ㆍ시중(侍中) 거록공(鉅鹿公) 위지고(魏知古) 등이 번역하는 일을 감독했다. 

전(前) 태상경(太常卿) 설숭윤(薛崇胤)ㆍ통사사인(通事舍人) 홍농남(弘農男) 양중(楊仲)이 이어서 감독하고 보호했다. 

번역한 경전을 베껴 엮어서 궁궐에 바치자, 


예종(睿宗)과 나라 안팎에서 3보(寶)를 숭상했다. 


이에 어필(御筆)로 서문을 지어, 

경의 첫머리에 기록했다. 

또 틈틈이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 1부30권ㆍ『일자불정륜왕경(一字佛頂輪王經)』 1부5권ㆍ『광대보루각선주비밀다라니경(廣大寶樓閣善住秘密陁羅尼經)』1부3권ㆍ『천수천안관세음보살모다라니신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姥陁羅尼身經)』1권ㆍ『여의륜다라니경(如意輪陁羅尼經)』1권ㆍ『문수사리보장다라니경(文殊師利寶藏陁羅尼經)』1권ㆍ『금강광염지풍우다라니경(金剛光焰止風雨陁羅尼經)』1권 등 이상 7부를 번역했다.

제자 반야구다(般若丘多)가 범본(梵本)의 번역을 도왔고, 

사문 운관(雲觀) 등이 필수했다. 

앞뒤로 모두 28부 192권을 번역했다.


18) 반랄밀제(般剌蜜帝)

사문 반랄밀제는 당나라 말로, 

극량(極量)이라고 한다. 

중인도(中印度) 사람이다. 

불도를 마음에 품고 여러 지방을 유행하면서, 

인연을 따라 제도했다. 

계속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다가, 

우리 지나(支那)인도의 풍습에 광부(廣府)를 지나(支那)라고 부르고, 

제경(帝京)을 마하지나(摩訶支那)라고 이름하였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광주(廣州)의 제지사[制旨] 도량(道場)에 머물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식이 넓고 아는 것이 많아서, 

통달한 줄을 알았다. 

따라서 사정하며 청하는 일이 많았다. 

이에 그는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심오한 이치를 폈다.

신룡(神龍) 원년(705) 세차[龍集] 을사(乙巳) 5월 초하루[己卯朔]부터, 

23일[辛丑日]에 이르기까지, 

관정부(灌頂部) 가운데서 한 품[一品]을 외워 출간했는데, 

곧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1부10권이다. 

오장국(烏萇國) 사문 미가석가(彌伽釋迦)석가(釋迦)는 잘못된 말이다. 

삭가(鑠佉)가 바른 말이고, 

운봉(雲峯)이라고 번역한다.가 당나라 말로 바꾸었고, 

보살계(菩薩戒) 제자 전(前) 정간대부동중서문하평장사(正諫大夫同中書門下平章事) 청하(淸河) 방융(房融)이 필수했으며, 

순주(循州) 나부산(羅浮山)의 남루사(南樓寺) 사문 회적(懷迪)이 번역된 말을 증의했다.

반랄밀제는 경을 전해 주는 일을 마치고서, 

범선을 타고서 서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후일 남쪽에서 사신이 낙경(洛京)으로 왔는데, 

이때부터 경전이 유통되었다.


19) 석지엄(釋智嚴)

사문 석지엄은, 

우전왕(于闐王)이 볼모[質]로 보낸 아들이었다. 

성(姓)은 위지(尉持)이고, 

이름은 낙(樂)노(盧)와 각(各)의 반절이다.이다. 

당(唐)나라 조정에서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을 제수[授]하고, 

금만군공(金滿郡公)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질박하며, 

곧고 신의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청하였다.

“출가하여, 

깊은 은택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경룡(景龍) 원년(707) 11월 5일 화제(和帝)의 생일에, 

집을 떠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종남산[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정사[蘭若]에 머물면서, 

도를 닦았다. 

마음을 텅 비우고 선정[靜慮]에 들어 좌선하고, 

경행(經行)하고 애써 정진하며, 

조용한 곳에 살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는 경전에도 해박했고, 

당나라 말과 범어[梵]에도 능통했다. 

아울러 지혜가 깊고 미묘한 이치에 다 통달하여, 

진리의 말씀이 보배처럼 쌓인 여래의 비밀스런 게송을 빠르게 깨달았다. 

따라서 임금의 칙령을 받고[綸旨] 오랫동안 번역에 참여했으며, 

자주 윤언(綸言)을 받들어 번역된 말을 증의하기도 했다. 

항상 석별곡(石鼈谷)의 아련야(阿練若)에 거주하면서, 

두타행(頭陁行)을 익혔다.

개원(開元) 9년(721) 신유(辛酉)부터, 

석별곡의 아련야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설묘법결정업장경(說妙法決定業障經)』1권ㆍ『출생무변문다라니경(出生無邊門陁羅尼經)』1권ㆍ『사자소태사왕단육경(師子素駄娑王斷肉經)』1권ㆍ『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大乘修行菩薩行門諸經要集)』 1부3권 등 모두 4부 6권을 번역했는데, 

문채의 내용과 외관을 갖추었고, 

그 깊은 취지[趣]를 얻었다. 

또 『존승다라니주(尊勝陁羅尼呪)』1수(首)와 『법화경약왕보살등주(法華經藥王菩薩等呪)』6수를 번역했다. 

그때 경본(經本)에 새로운 주(呪)를 베껴 넣었는데, 

괴이하게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20) 수바게라승하(戍婆揭羅僧訶)


사문 수바게라승하는 당음(唐音)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정사자(淨師子)다. 

의역(義譯)하면, 

선무외(善無畏)라고 한다. 

중인도 마가타국(摩伽陀國) 사람이다. 

왕사성(王舍城)에 있는 나란타사(那爛陁寺)에 머물렀다. 

종성(種姓)은 찰제리(刹帝利)이고, 

귀족의 신분으로 출가했다.

그는 정신과 기상이 맑았고 도업(道業)이 넓었으며, 

선혜(禪慧)14)에 세세하게 꿰뚫었고 총지(總持)15)에 섬세하게 통달했다. 

아울러 3장(藏)의 교문(敎門)에 일심으로 들어가 노닐었다. 

이에 오천축(五天竺)의 모든 나라에 아름다운 명성이 오래도록 퍼져 나갔다.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할 인연이 동쪽에 있어서 동쪽을 향하여 오다가, 

북인도의 국경에 이르렀을 때, 

선무외의 명성이 이미 마하지나(摩訶支那)에 진동했다. 

이에 우리 황상(皇上)께서 학식과 덕행이 높은 현량(賢良)을 찾아 모아 사신(使臣)으로 보내어, 

선무외를 영접하도록 했다. 

개원(開元) 4년(716) 경진(景辰)16)에 범본(梵本) 경전을 많이 가지고, 

장안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흥복사(興福寺)의 남원(南院)에 머물렀으나, 

나중에는 칙령으로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렀다.

개원 5년(717) 정사(丁巳)에 보리원(菩提院)에서, 

『허공장보살능만제원최승심다라니구문지법(虛空藏菩薩能滿諸願最勝心陁羅尼求聞持法)』1권을 번역했는데, 

사문 실달(悉達)이 당나라 말로 바꾸었고, 

사문 무착(無著)이 문장을 엮고 필수했다.

선무외가가지고 온 범본은 칙명으로 궁궐에 바치게 했으나, 

가지고 온 모든 경전을 다 번역할 인연을 아직 얻지 못했다. 

옛적에 사문 무행(無行)이 서역을 유행하다, 

천축으로 가서 불교학을 다 배우고 동쪽으로 돌아오던 중에, 

북천축에서 불행하게도 입적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행이 가지고 오던 범본을 칙명으로 맞이해 와서, 

서경(西京)의 화엄사(華嚴寺)에 보관하게 하였다. 

선무외는 사문 일행(一行)과 함께 그 경전을 가려서, 

몇 개의 범본경전과 이제껏 번역되지 않은 총지묘문(總持妙門)을 얻었다. 

12년(724)에는 어가를 따라 낙경(洛京)에 들어와서 대복선사(大福先寺)에 머물다가, 

마침내 사문 일행과 함께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1부 7권을 번역했다. 

이 경의 범본(梵本)은 십만 개의 게송을 갖추었으나, 

지금 번역한 것은 그 요점만을 추려 모은 것이다.

또 『소바호동자경(蘇婆呼童子經)』 1부3권ㆍ『소실지갈라경(蘇悉地羯羅經)』 1부3권 등을 번역했다. 

그리고 사문 보월(寶月)이 당나라 말로 바꾸고, 

사문 일행이 뜻을 받들어 필수했다. 

아울러 말과 이치를 다듬어 엮으니, 

문채의 내용과 외관이 갖추어졌고, 

깊은 취지(趣旨)가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전후로, 

모두 4부 14권을 번역했다.

선무외는 타고난 성품이 자애롭고 조용하면서도 대범했으며, 

선정(禪定)에 들어 정신을 편안하게 했다. 

때때로 선정을 닦는 관법(觀法)을 초학자들에게 권장하되,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끌어 주어 잘못되는 일이 없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분석하여 설명해 주는 데, 

막힘이 없었다.


21) 바왈라보리(跋曰羅菩提)

사문 바왈라보리는 당나라 말로, 

금강지(金剛智)라고 한다. 

남인도(南印度) 마뢰야국(摩賴耶國) 사람으로,여기 말로는, 

광명국(光明國)이다. 

그 나라는 관음궁전보타락가산(觀音宮殿補陁落伽山)에 가깝다. 

바라문종(婆羅門種)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인도전역을 유행하였다. 

아울러 내외(內外)의 학문에도, 

널리 통달했다. 

특히 총지(總持)를 뛰어나게 잘했다. 

따라서 이 총지문(總持門)에 있어서는, 

필적할만한 상대가 없었다. 

인연을 따라서 돌아다니며 교화하고, 

가는 곳마다 중생을 이롭게 하였다. 

한편 대지나(大支那)에서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또 왕성하다는 말을 들었다. 

따라서 마침내 범선을 타고 동쪽을 향해 갔다. 

그러나 바다의 외진 곳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개원 8년(720)에 비로소 경읍(京邑)으로 왔다. 

여기서 비밀스런 교리[秘敎]를 널리 펴기 위해, 

만다라(曼茶羅)를 건립하였다. 

또 비밀법(秘密法)에 의거하여 만들자, 

모두 상서로운 영험을 감득(感得)했다. 

사문 일행(一行)이 비밀법을 흠모하여 자주 질문하였고, 

그때마다 금강지(金剛智)는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단(壇)을 세워, 

관정(灌頂)의 도량을 차렸다. 

그러자 일행이 비밀법을 공경히 받고 번역하여, 

유통시킬 것을 청했다. 


이에 개원 11년(723) 계해(癸亥)에
자성사(資聖寺)에서 『금강정유가중략출염송법(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法)』 1부4권ㆍ『칠구지불모준니대명다라니경(七俱胝佛母准泥大明陁羅尼經)』1권 등을 번역했다.


동인도 바라문 대수령직중서(大首領直中書) 이사라(伊舍羅)가, 

당나라 말로 바꾸었고, 

숭악(嵩岳) 사문 온고(溫古)가 필수했다. 

그리고 개원 18년(730) 경오(庚午)에 대천복사(大薦福寺)에서, 

다시 『금강정경만수실리보살오자심다라니품(金剛頂經曼殊室利菩薩五字心陁羅尼品)』1권ㆍ『관자재여의륜보살유가법요(觀自在如意輪菩薩瑜伽法要)』1권 등을 번역했는데, 

사문 지장(智藏)이, 

당나라 말로 바꾸었다. 

모두 4부 7권이다. 

또한 구본[舊] 가운데 누락된 항목을 채워 넣으려던 곳은, 

신주(新呪)를 넣어 장구(章句)를 이어 주었다.

금강지는 번역한 총지인계(總持印契)를 지니고, 

이르는 곳마다 모두 신비한 영험을 보였다. 

따라서 비밀교를 널리 전파한 이는 진실로 이 사람이다.전기(前紀)에 기재된 바가 구록(舊錄)을 의지하여, 

편집하는 중간에 잘못되었다. 

그러나 빼거나 보충한 적이 없었다. 

만약 제벽(題壁)하고자 하거든, 

『개원석교록』에 의거하기를 바란다. 

이 지방의 찬집(撰集)을 제외하고, 

그 밖의 것은 실록(實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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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율에 적합한 행위를 말한다.

2 총지의 법문, 

즉 법(法)ㆍ의(義)ㆍ주(呪)ㆍ인(忍) 등의 4종 법문. 

밀교에서는 주(呪)만을 가리켜 말한다.

3 황제의 조정이라는 뜻이니, 

당나라의 황제 조정을 일컫는 말이다.

4 고대 인도의 다섯 가지 학문, 

즉 성명(聲明)ㆍ인명(因明)ㆍ내명(內明)ㆍ의방명(醫方明)ㆍ공교명(工巧明)을 말한다.

5 언어(言語)ㆍ문자(文字)ㆍ음운(音韻)ㆍ문법(文法)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6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을 8종으로 나눈 것. 

즉 태화장(胎化藏)ㆍ중음장(中陰藏)ㆍ마하연방등장(摩訶衍方等藏)ㆍ계율장(戒律藏)ㆍ십주보살장(十住菩薩藏)ㆍ잡장(雜藏)ㆍ금강장(金剛藏)ㆍ불장(佛藏)이다.

7 참된 깨달음을 말한다.

8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광명을 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9 『고려대장경』경문에는 “경오(景午)는 병오(丙午)와 같다”고 하였다. 

이하 같음.

10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변함없이 진리를 깨달아 불도(佛道)를 이루었다고 하는 나무를 말한다.

11 사방의 제후, 

또는 왕후(王侯)ㆍ공경(公卿)ㆍ대부(大夫)ㆍ사(士)의 총칭이다.

12 토호라(吐呼羅)라고도 한다. 

육조(六朝) 때의 서역의 국명(國名)이다.

13 종류별로 나누어 놓은 서적을 말한다.

14 선정(禪定)과 지혜를 말한다.

15 선을 지켜 잃지 않도록 하고, 

악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를 말한다.

16 『고려대장경』경문에는 “경진(景辰)은 병진(丙辰)과 같다”고 하였다.


○ [pt op tr]



◆vgcp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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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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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속고금역경도기_K1060_T2152.txt ☞속고금역경
sfd8--불교단상_2554_11.txt ☞◆vgcp5713
불기2554-11-15
θθ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인도 왕사성의 국법으로 5전 이상을 훔치면 사형에 처하는 것이므로 4전까지는 훔치는 이가 있었으나,
불교의 계율에서는 이것마저 금했다.
5전을 훔친 이는 빈척을 받고, 4전 아래로는 다시 배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답 후보
도사전(盜四錢)
돈교(頓敎)
돈점이교(頓漸二敎)
동불바제(東弗婆堤)

동체대비(同體大悲)
득(得)
등각(等覺)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04gfl--mun_단상_2010_1115.txt

http://idealsociety007.tistory.com/139

mun_단상_2010_11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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