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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55-11-01_여실론반질난품_001 본문
『여실론반질난품』
K0626
T1633
반질난품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여실론반질난품_K0626_T1633 핵심요약
♣0626-001♧
『여실론반질난품』
반질난품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여실론반질난품
여실론반질난품(如實論反質難品)
진제(眞諦) 한역
김철수 번역
■ 1. 무도리난품(無道理難品)
■ 【論】그대는 나의 주장[言說]이 도리(道理)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만약 그와 같다면 그대의 주장 또한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그대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면
나의 주장이 곧 도리에 맞을 것이다.
만약 그대의 주장이 도리에 맞고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또다시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는 것 그 자체 가운데
도리에 맞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도리에 맞는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자체 가운데에서도 도리에 맞지 않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 또한 마땅히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 그러므로 그대가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 또다시 만약 그대가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대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은 도리에 맞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주장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에
일치하기도[一] 하고
일치하지 않기도[異] 한다.
만약 일치한다고 하면
주장 또한 없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는가?
만약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주장이 도리에 맞을 것이다.
■ 또한 그대는 어찌하여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는가?
또다시 주장은 그 모습을 파하기 때문에
그대가 힐난하는 주장은
나의 주장과 동시(同時)가 되기도 하고,
동시가 아니기도[不同時] 하다.
동시라면 곧 나의 주장을 파할 수가 없을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소의 뿔과 말의 귀가 동시에 생하기 때문에
능히 그 모습을 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동시가 아니라면
그대의 힐난은 앞에 있고
나의 주장은 뒤에 있으므로
나의 주장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그대가 무엇을 힐난하겠는가.
■ 그러므로 힐난은 성립되지 못한다.
만약 나의 주장이 앞에 있고
그대의 힐난이 뒤에 있다면
나의 주장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다시 무엇을 힐난하겠는가.
만약 동시라면
나의 주장에 대하여 그대가 힐난하는 것이
논란할 만한 것을 논란하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다.
비유하면 마치 강물과 바닷물이
동시에 화합하여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또한 그대의 힐난은
자의(自義)를 힐난하는 것인가,
자의를 힐난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자의를 힐난한다면
자의가 스스로 무너져서
나의 주장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 자의를 힐난하지 않는다면
힐난은 곧 성취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의 가운데에서 힐난은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 만약 힐난이 성취된다면
자의는 곧 무너지고
타의(他義)는 곧 이루어질 것이다.
■ 또다시 그대는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주장이 아니다.
만약 주장이 있다면
도리에 맞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장은 있으나 도리는 없는 이 둘은
서로 어기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동녀(童女)에게 아이가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동녀라면 아이가 있을 수 없고,
아이가 있다면 이는 곧 동녀가 아니다.
동녀와 아이가 함께 있다는 이 둘은 서로 어기는 것이므로
주장은 있는데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는 말은
옳지 않다.
■ 또다시 지혜의 증득[證智]과 서로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나의 주장을 듣고서도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미 듣고 나면
곧 지혜의 증득이 성취되는바
지혜를 증득한 힘은 크므로
그대의 말은 곧 무너질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소리[聲]를 설하여
이식(耳識)으로 얻는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식은 이미 이루어져서
지혜의 증득이 성취되는 것이다.
지혜를 증득한 힘은 크므로
이 주장은 곧 무너진다.
또다시 추리지[比智]와
서로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나의 주장이 있는데 추리지를 얻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도리에 맞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만약 도리에 맞지 않다면
주장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장이 있다면
도리에 맞다고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소리[聲]는 원인[因]으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원인으로부터 생한 일체는 곧 상주함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은
원인으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상주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소리가 원인으로부터 생한다면 상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상주한다면 원인으로부터 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주하지 않는 것은 추리지가 성취되는 것이며,
추리지의 힘이 크므로 상주함이 곧 무너진다.
만약 도리에 맞는다는 주장이 있으면
곧 도리에 맞는 것이다.
도리에 맞으면 추리지가 성취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은 곧 무너진다.
■ 또다시 세간(世間)과 서로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그대가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는데
이 말은 세간과 서로 어기는 것이다.
■ 왜냐하면 세간 가운데 네 가지 도리를 세운다.
첫째는 인과(因果)의 도리고,
둘째는 상대(相待)의 도리이며,
셋째는 성취(成就)의 도리고,
넷째는 여여(如如)의 도리이다.
■ 인과의 도리는 종자와 싹과 같고,
상대의 도리는 길고 짧음이나 부자(父子)와 같고,
성취의 도리는 오분(五分)의 뜻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여여의 도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아여여(無我如如)요,
둘째는 무상여여(無常如如)이며,
셋째는 적정여여(寂靜如如)이다.
■ 세간 속에서는
주장을 결과[果]라 하고,
도리를 원인[因]이라고 한다.
세간 가운데 만약 결과를 보면 곧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주장을 보면 곧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 그대가 나의 주장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뜻은 세간과 서로 어기는 것이 된다.
만약 주장이 있는데 도리에 맞지 않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나의 주장과는 달리 상응하지 않다고 말하므로
나는 이제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달리 설한다면 곧 잘못이 있다.
그대 스스로 세운 뜻이 나의 뜻[義]과 다르므로
곧 이것은 자설(自說)이고,
곧 이것은 이설(異說)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잘못한 것이다.
만약 그대의 뜻이 나의 자설과 다르다면
곧 다른 허물이 그대에게 있는 것이지,
나와는 관계가 없다.
만약 그대와 주장이 다르지 않다면
곧 나와 같아서 곧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나의 주장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삿된 말이다.
또다시 다름[異]과 다름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름이 없다.
만약 다름과 다름이 다르다면 곧 이것은 다름이 아닐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사람이 소[牛]와 다른 것과 같으므로 사람은 소가 아니다.
만약 다름과 다름이 다르지 않다면 곧 이것은 같은 것[一]이다.
만약 같은 것이라면 곧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나의 주장이 다르다고 말하는가?
또다시 이 도리는 내가 그대의 도리와 논쟁하기 때문에 나는 다름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나와 다르지 않다면 곧 그대와 함께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대의 뜻을 설하므로 만약 일체의 설한 바가 다르다면
그대도 또한 설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다름을 설하였고,
그 과실은 그대에게 있다.
만약 그대가 다름을 설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도 또한 다름을 설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대는 내가 다른 것을 설한다고 말하는데
그 뜻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대는 바로 삿된 말을 하는 것이며,
나머지 뜻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그대는 내가 뜻을 설하는 것이 성취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이제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만약 성취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설한 바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설한 바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면 곧 설한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설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나의 설한 바가 성취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만약 설한 바대로 설하는 것을 얻는다면 곧 성취할 것이다.
그대가 성취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 뜻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약 일체의 설한 바대로 성취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힐난을 설하여 나를 힐난하더라도 이 힐난은 곧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힐난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주장 또한 이와 같이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내가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 뜻은 옳지 않은 것이다.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 가운데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만약 자체 가운데에서 성취하지 못한다면 성취되는 것은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성취되는 것이 있다면 곧 성취되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내가 성취하지 못한다고 설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대는 ‘만약 내가 힐난을 외우지 못한다면 곧 나의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뜻을 얻지 못한다면 곧 나를 힐난하지 못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이제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만약 아직 내가 힐난을 외우지 못했다면
곧 그대의 힐난을 설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힐난을 외우더라도 능히 힐난한다고 하고,
힐난을 외우지 않는다고 하여도 힐난한다고 한다.
만약 그대가 외우지 않고서 힐난한다면
나 또한 외우지 않고서 힐난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힐난을 외워서 힐난한다면
곧 항상 힐난을 외울 것이다.
왜냐하면 힐난 가운데 다시 힐난이 일어나므로
힐난은 곧 다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힐난을 외우지 않을 때가 있지 않으며,
힐난을 설하는 것을 얻을 때가 있지 않다.
또다시 힐난의 이름으로부터 곧 힐난이라는 이름이 있다.
만약 이런 힐난의 이름을 외운다면 힐난의 이름을 얻을 것이다.
힐난의 이름을 외우지 않는다면 설함을 얻지 못하고,
다만 뒤에서 앞에 있는 힐난의 이름을 외워서 얻고,
다음에 있는 힐난의 이름은 아직 외워서 얻지 못한다.
세 번째 위치에서 두 번째 힐난의 이름을 외워서 얻으며,
네 번째 위치에서 세 번째 힐난의 이름을 외워서 얻는다.
이와 같이 곧 언제나 외워서는 다함이 없다.
만약 그대가 지금 외우지 않고서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는다면
첫 번째 힐난의 이름도 또한 마땅히 외우지 않고서도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만약 첫 번째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두 번째도 또한 마땅히 힐난의 이름을 외우지 않고서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두 번째에서 힐난의 이름을 외우지 않고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는다면
첫 번째 또한 마땅히 힐난의 이름을 외우지 않고서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첫 번째 힐난의 이름은 반드시 외워서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게 되므로,
두 번째 힐난의 이름도 또한 반드시 외워서 힐난의 이름을 설하는 것을 얻게 되며,
마땅히 외우지 않고서 설해서는 안 된다.
또다시 만약 힐난을 외우지 않고서
힐난을 설한다면 곧 논쟁에서 지고 말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 힐난을 외우지 않으면
그대의 힐난을 설하는 것도 또한 논쟁에 지고 말 것이다.
만약 그대가 힐난을 외우지 않고서 힐난을 설하여도 논쟁에 지지 않는다면
나 또한 힐난을 외우지 않고서 힐난을 설하는 것도 또한 논쟁에 지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만약 그대의 주장으로 나를 힐난한다면 나는 모두 외울 것이며,
나의 힐난이 그대를 힐난한다면 그대는 모두 장차 외워야 할 것이다.
오직 서로 영송(領誦)하는 것을 얻을 뿐이면
곧 별도로 힐난을 세우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언제나 서로 영송한다면 곧 바른 뜻을 잃게 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두 배가 서로 묶여 있을 때
큰물이 닿으면 서로 당겨서 오고 가는 것과 같다.
또다시 그대가 말하기를,
“이 모든 음성은 입에서 나오면 곧 사라져 버린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나의 말을 외울 수 있겠는가.
음성은 이미 사라져 버리는 법이며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거듭 외우는 것을 얻지 못한다.
만약 음성이 있다면 바로 능히 외울 수 없으므로
그것은 항상한 음성[常聲]인 것이다.
만약 말이 사라져 버린다면
곧 외울 수 없으므로 그것은 없는 것이다.
만약 음성이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
그대가 나에게 외우도록 한다면
그대의 이 말은 바로 삿된 사유라고 할 것이다.
그대는 “나의 앞말이 뒤의 것을 파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제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만약 내가 앞의 말이 뒤를 파한다고 설한다면 이것은 도리이다.
왜냐하면 나의 앞말은 그대의 뒷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말이 뒤의 말을 파한다면
나의 뜻은 곧 이긴 것이고 그대의 말은 곧 파하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만약 그대가 일체의 앞말이 뒤를 파한다고 설한다면 그대도 또한 먼저 한 말이 마땅히 뒤를 파할 것이다.
만약 그대의 앞말이 뒤를 파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말한 것이 또한 뒤를 파하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앞이 뒤를 파한다는 것은
자체에 있어서는 앞이 뒤를 파하는 일이 없다.
만약 자체에 있어서 앞이 뒤를 파하는 것이 있다면
곧 앞과 뒤가 함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이 뒤를 파한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만약 자체에 있어서 앞의 것이 뒤를 파하는 일이 없다면
원인이 있지 않으므로 앞이 뒤를 파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의 앞말이 뒤를 파한다고 설한 것은 바로 삿된 사유다.
그대는 내가 다른 원인[別因]을 설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앞의 원인[前因]을 버리고 다른 원인을 세워서 논쟁에 진다면
그대는 곧 논쟁에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도 또한 앞의 원인을 버리고 다른 원인을 세웠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다른 원인을 세워서 논쟁에 지지 않는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다.
또다시 내가 설한 원인[因]과 그대가 설한 원인은 다르다.
만약 내가 다른 원인[異因]을 설한다면 이것은 곧 도리이다.
만약 다른 원인을 설하지 않는다면
나는 곧 그대의 원인을 설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반대되거나 서로 어긋나는 것[對治相違]이 되지 않으므로,
곧 그대의 설과 같아진다.
내가 다른 원인을 설한다고 하는 그대의 말은 바로 삿된 사유다.
만약 나의 설이 그대가 세운 원인[立因]과 같다면,
그대가 나의 원인을 파하는 것은 곧 그대 스스로 원인을 파하는 것이 된다.
또다시 만약 일체의 말이 곧 다른 원인이라면
그대 또한 말을 입밖에 내면 이것은 곧 다른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논쟁에서 지고 말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입 밖으로 낸 말이 논쟁에서 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가 세운 원인이 논쟁에서 질 것이라고 그대가 설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약 내가 별의(別義)를 설한다고 그대가 말한다면
지금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내가 세운 뜻과 그대의 뜻이 다르면 곧 이것은 도리이다.
내가 지금 그대와 반대되거나 서로 어긋나므로 다른 뜻을 설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나의 뜻과 그대의 뜻이 다르지 않다고 사유한다면
나의 뜻은 곧 그대의 뜻과 반대되거나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나의 뜻을 파한다면 곧 이것은 스스로를 파하는 것이다.
또다시 이의(異義)는 자체 가운데에서 이의가 없으므로 이의는 곧 없는 것이다.
만약 이의가 자체 가운데에서 이의가 있다고 해도 이의는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의를 설한다고 하는 그대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또다시 만약 일체의 설한 바가 이의라면
그대가 설한 바도 마땅히 이의일 것이다.
만약 그대가 설한 바가 이의를 설한 것이 아니라면
그대의 모든 설한 바가 이의이어서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대는 지금의 나의 말이 마치 바로 앞의 말처럼 이어(異語)가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이제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내가 세운 뜻[立義]과 그대가 세운 뜻은 반대되거나 어긋난다.
만약 내 스스로 세운 뜻과 그대의 뜻이 반대된다면 이것은 바로 도리이다.
왜냐하면 내가 모든 곳에서 설한 것은
그대의 뜻을 파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름이 있지 않다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마땅히 다른 뜻을 설하였다면
그대가 세운 뜻과 나의 뜻은 다를 것이다.
만약 내가 다른 뜻을 설한다면
곧 그대의 뜻을 설하는 것이며,
곧 그대와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나를 힐난하는 것은
곧 이런 스스로의 뜻을 힐난하는 것이다.
또다시 내가 앞에서 설하기를,
“소리는 무상하다는 이 말[語]은 저절로 멸하고 저절로 없어진다”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곧 달리 말하면 그대는 내가 앞의 말[前語]을 설한다고 하면
이것은 삿된 사유이다.
또다시 만약 그대가 나의 설한 바가 무이(無異)라고 할 때
만약 내가 다름을 설한다면 곧 이것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무이를 설하지 않는다면
곧 이것은 불이(不異)이다.
만약 내가 이것으로 이룰 수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해
그대가 나와 무이를 설한다면 이 뜻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약 그대가 설한 모든 것을 내가 전부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대가 말한다면
나는 지금 그대와 함께 이 이치를 판가름하겠다.
그대가 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설은
일체(一切)에 들어가는가,
일체에 들어가지 않는가?
만약 일체에 들어간다면
그대는 곧 스스로 그대가 설한 바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의 뜻을 곧 그대가 인정하는 바이며,
나의 뜻은 스스로 이루어지며,
그대의 말은 곧 무너지는 것이다.
만약 일체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곧 일체는 없다.
만약 일체가 없다면
그대는 일체를 인정할 수 없다.
만약 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그대는 나의 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뜻이 또한 이루어지며
그대의 말은 끝내 무너진다.
■ 2. 도리난품(道理難品)
■ 【論】힐난[難]에는 세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전도(顚倒)된 힐난이요,
둘째는 불실의(不實義)의 힐난이며,
셋째는 서로 어기는 힐난이다.
만약 힐난에 이러한 세 종류의 과실이 있으면 곧 이치에 어긋나게 된다.
전도된 힐난이란 입난정의(立難正義)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전도된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 전도된 힐난에는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상(同相)의 힐난이요,
둘째는 이상(異相)의 힐난이며,
셋째는 장상(長相)의 힐난이요,
넷째는 무이(無異)의 힐난이며,
다섯째는 지부지(至不至)의 힐난이요,
여섯째는 무인(無因)의 힐난이며,
일곱째는 현별인(顯別因)의 힐난이요,
여덟째는 의(疑)의 힐난이며,
아홉째는 미설(未說)의 힐난이요,
열째는 사이(事異)의 힐난이다.
■ 첫째, 동상(同相)의 힐난이란 사물의 동상에 대해서 힐난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동상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소리[聲]는 항상한 원인이 없나니,
그것은 공력(功力)으로 인하여 생하며 중간(中間)에서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 그릇이 공력으로 인하여 생하고,
생하고 나면 부서지고 멸하는 것과 같다.
소리도 이와 같으므로 항상함이 없다.
이런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소리가 무상하며 그릇과 동상이라면 소리는 곧 상주(常住)해야 할 것이다.
허공[空]과 동상이기 때문에 허공과 같이 소리도 또한 무상하다.
동상이란 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論】또다시 소리는 공력으로 인하여 생하고 중간 없이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만약 사물이 상주한다면 공력으로 인하여 생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상주하는데 공력으로 인하여 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소리는 이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다.
이런 논리가 이미 선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소리가 상주하는 허공과 동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리가 무상하다면 곧 어느 곳에 이르겠는가?
만약 허공과 동상이라면 소리는 곧 항상하며,
동상이란 몸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다”고 한다.
【論】이 두 가지 힐난은 모두가 뒤바뀐 생각[顚倒]으로써 힐난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미의 법을 결정하여 세우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일체의 사물은 공력에 인하여 생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무상의 원인이 일미의 법을 결정하여 나타내므로 무상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
그 동류(同類)를 나타내고자 하므로 오지 그릇 등의 비유를 설하는 것이다.
외도는 결정되지 않은 일미에 의지해서 힐난을 세워서 말한다.
만약 그대가 동상에 의지해서 소리의 무상함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동상에 의지해서 소리의 항상함을 세울 것이다.
만약 그대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나의 뜻도 또한 이루어진다고 한다.
【論】그대의 힐난은 이와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세운 원인은 항상함과 무상함을 두루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세운 원인에 세 종류의 모습[相]이 있다.
이것은 근본법(根本法)ㆍ동류소섭(同類所攝)ㆍ이류상리(異類相離)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운 원인이 이루어져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원인은 이러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세운 원인이 나의 원인과 같다면 그대의 힐난은 곧 바른 힐난이 될 것이다.
만약 무상한 뜻을 세워서 항상한 뜻을 힐난한다면 이 힐난은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상인(常因)을 세우는 것은 어렵고,
무상인(無常因)을 세우는 것은 더욱 무상하여 전도된 과실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상인은 일미를 결정할 수 없으므로 무상인으로 일미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 둘째, 이상(異相)의 힐난이란
사물의 부동상(不同相)에 대해서 힐난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소리는 인연으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만약 어떤 사물이 있어서 인연으로 생한다면 곧 이것은 무상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은 상주하며 인연에 의지하여 생하지 않는다.
소리는 이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소리와 상주하는 허공은 부동상(不同相)이기 때문에 무상이라면 다시 어느 곳에 이를 것인가?
만약 오지그릇과 부동상이라면 소리는 곧 상주하는 것이다.
부동상이란 소리는 몸이 없고 오지그릇은 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지그릇은 무상하고 소리는 곧 항상하다”고 한다.
【論】소리는 인연에 의지해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왜냐하면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이 인연에 의지해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소리도 또한 이와 같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그대가 소리의 무상함이 오지그릇과 동상(同相)이라고 주장한다면,
또한 어느 곳에 이를 것인가?
소리는 곧 상주하여 오지그릇과 부동상이다.
부동상이란 소리는 몸이 없고 오지그릇은 몸이 있다는 것이다”고 한다.
【論】이러한 두 가지 힐난은 모두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무상인(無常因)을 세워서 일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상인(常因)을 주장하는 것은 일미를 결정하여 항상하게 하고,
무상한 것이 두루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인(不定因)은 결정인(決定因)을 힐난할 수 없다.
내가 세운 원인은 바로 인연에 의지하여 생하기 때문에 소리는 무상하다.
이러한 원인은 근본법ㆍ동류소섭ㆍ이류상리이다.
세 가지 모습이 모두 결정된 까닭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세운 원인은 바로 무상하기 때문에 소리는 상주하며,
이 원인은 근본법,
동류이류소섭(同類異類所攝)이다.
그러므로 원인을 이루지 않는다.
■ 셋째, 장상(長相)의 힐난이란 동상에 있어서 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을 장상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소리는 공력으로 인하여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다.
외도가 말하기를,
“그대는 소리와 오지그릇이 동상으로써 공력으로 인하여 생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다른 원인이 있다.
첫째는 태우고 익혀야 하는 것과 태우고 익혀서는 안 되는 것이요,
둘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등이다.1)
이런 까닭에 소리와 오지그릇은 각각 다른 원인이 있다.
소리는 공력으로 인해서 생하기 때문에 상주하고,
오지그릇은 공력으로 인해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그러므로 소리는 상주하다”고 한다.
【論】이러한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세운 원인은 무상과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항상함과 서로 떨어진다.
이러한 인무상(因無常)의 추리지[比智]인 것을 나타낸다.
비유하면 마치 불의 추리지 때문에 연기를 나타내는 것과 같으며 연기는 불과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세운 원인은 이루어지며 흔들리지 않는다.
그대는 소리를 태우거나 익힐 수 없으므로 항상하다고 하며,
탐욕ㆍ성냄ㆍ괴로움ㆍ즐거움ㆍ바람 등도 태우거나 익혀지지 않으므로 이것은 무상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태우거나 익힐 수 없는 것을 상인(常因)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주장해서 또한 상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탐욕ㆍ성냄ㆍ괴로움ㆍ즐거움ㆍ바람 등도 또한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이것은 무상하다.
그대의 원인은 바로 동류이류소섭(同類異類所攝)이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대의 원인과 나의 원인이 같다면 능히 내가 세운 뜻을 힐난할 것이다.
내가 세운 뜻에는 세 가지 모습의 원인에 의지하므로 같지 않은 것이다.
같지 않다는 것은 그대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 넷째, 무이(無異)의 힐난이란
하나의 동상을 나타내므로 일체의 다른 원인은 없음을 주장한다.
이것을 무이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소리는 인연이 다름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곧 소리는 다르다.
비유하면 마치 등불과 같다.
만약 심지가 크면 밝기가 크고,
심지가 작으면 밝기가 작다.
이런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동상에 의해서 오지 그릇 등이 무상하고 소리 또한 이와 같다면
곧 일체의 사물과 일체의 사물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일체의 사물과 다른 사물은 동상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동상이라고 하는가?
하나의 가지(可知)2) 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동상이라고 한다.
만약 동상인데도 일체의 사물과 다른 사물이 다르다면 소리 또한 이와 같으며,
오지 그릇 등도 동상일 것이다.
소리는 바로 항상하며 오지 그릇 등은 무상하다.
왜냐하면 일체의 존재[有] 등이 동상 속에 있어서 자성(自性)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등불과 소리와 사람과 말 등이 만약 동상에 의지한다면 추리지는 곧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論】이러한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에서 사물의 존재 등이 동상이면 아(我)도 또한 버릴 수 없으므로 아의 다른 존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상도 세 가지 모습을 구족한다면 무상의 뜻을 세울 것이다.
이것을 설하여 무상인[無常因]이라고 하며,
오직 동상만을 취하지는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도리를 결정하여 생각[思擇]하지 않는다면 곧 다른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사물[一物]과 다른 사물[異物]이 부동불별(不同不別)인 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동상이 있으면 곧 동류소섭(同類所攝)이고,
일체가 이류상리(異類相離)이다.
만약 이렇게 세워진 인을 취한다면 이 원인은 이루어진다.
오직 동상이 세워진 원인만이라면 곧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도된 것이다.
【論】또다시 소리는 인연에 의지하여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다.
외도가 말하기를,
“원인과 입의(立義)의 둘은 없으므로 무이(無異)이다.
왜냐하면 원인에 의지하여 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인이 아직 화합하지 않으면 소리도 아직 생하지 않고,
아직 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있지 않다.
이것이 그 뜻이다.
소리가 무상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소리가 아직 생하지 않았는데 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생한 뒤에 곧 멸하고 멸하기 때문에 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 뜻이다.
원인과 입의(立義)가 똑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세운 원인이 있지 않으므로 사라짐과 소멸이 있지 않는 것이다.
내가 세운 원인이 있지 않으면 아직 생하지 않았고,
아직 생하지 않았지만 일체 세간이 많이 믿기 때문에 성취되어 무상인으로 세운다.
사라짐과 소멸이 있지 않다는 것은 승거(僧佉)3) 등이 믿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뜻을 세운다.
만약 뜻의 세움이 성취된다면 원인을 성취하지 못함이 되어서 그대의 힐난은 이긴 것이고 전도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일체의 사물이 전세(前世)에 아직 있지 않으면 후세(後世)에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리는 전세에도 없고 후세에도 역시 없다.
만약 전세에 없다는 것을 그대가 믿지 못한다면 그대 스스로 사유해 보라.
만약 전세에 소리가 있었어도 걸림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귀에 들리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대는 전세에도 없었음을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뱀의 발과 같이 어떤 사람이 다투어 이기려는 마음이 있으면 뜻을 능히 성취하지 못하며,
성취하려고 욕심을 내지만 도리에 맞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 뜻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
다섯째,
지부지(至不至)의 힐난이란 원인이 소립의(所立義)에 이르는가,
원인이 소립의에 이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원인이 소립의에 이른다면 곧 원인을 이루지 못하며,
만약 원인이 소립의를 이루지 못하면 또한 원인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을 지부지의 힐난이라고 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원인이 소립의에 이르고 소립의와 함께 뒤섞인다면 곧 입의(立義)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강물이 바닷물에 들어가면 다시 강물의 원인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원인을 이루지 못한다.
만약 소립의 뜻을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다면 원인을 능히 이르지 못하며,
만약 소립의에 이르렀다면 성취인을 이용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원인은 성취되지 못한다.
만약 원인이 소립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곧 다른 사물과 같이 원인을 능히 이룰 수 없으므로 원인이 성취되지 못한다.
만약 원인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곧 대상과 주체가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능히 태울 수 없으며,
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능히 자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원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인(生因)이고,
둘째는 현불상리인(顯不相離因)이다.
그대의 힐난이 만약 생인에 의지하면 곧 힐난은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 현불상리인에 의지한다면 이것은 곧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원인은 소립의를 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신(他信)을 얻기 위해서 능히 소립의가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입의가 이미 있고,
입의 가운데에서 뜻과 같이 지혜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능현(能顯)의 원인을 설한다.
비유하면 마치 이미 색이 있는데 등불을 이용하는 것은 이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지,
생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생인(生因)을 힐난한다.
현인(顯因) 가운데에서 이런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 여섯째, 무인(無因)의 힐난이란
삼세(三世)에 있어서 무인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인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원인은 소립의(所立義)의 전세(前世)에 있는 것인가,
후세(後世)에 있는 것인가,
동세(同世)에 있는 것인가?
만약 원인이 전세에 있고 입의가 후세에 있다면 입의는 아직 있지 않으므로 무엇 때문인가?
만약 후세에 원인이 있고 입의가 전세에 있다면 입의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 다시 원인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만약 동세에 같이 생하였다면 이것은 곧 원인이 아닐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소의 뿔과 씨앗과 싹 등이 일시에 있을지라도 좌우(左右)에 상생(相生)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동시(同時)라면 곧 원인이 있지 않는 것이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전세에 이미 생한 것은 원인에 의해서 생한 것이 된다.
비유하면 마치 등불과 같아서 이미 있는 사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
아직 있지 않은 사물을 낳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대가 생인(生因)으로써 나의 현인(顯因)을 힐난하는데,
이러한 힐난은 전도된 것으로서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그대가 힐난하여 말한다면,
만약 이 원인이 현인이라면,
지혜에는 아직 이 원인이 아니며,
이 원인은 다른 원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인을 이루지 못한다고 힐난한다면 아직 원인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며,
나아가 현상이 아직 있지 않는 것이다.
만약 현상이 있으면 곧 원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것은 능히 현상을 나타내며 이 때 원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 말이 앞에 있어서는 아직 원인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지만 뒤에서야 비로소 원인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만약 원인이 앞이고 현상이 뒤라고 설한다면 곧 허물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현상은 원인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라고 힐난한다면,
또한 힐난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앞의 사물은 뒤에서 원인이라는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이 이미 멸하고서 뒤에 현상이 생한다면 이 힐난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이와 같지 않아서 앞에서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고 뒤에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으므로 결과는 원인으로부터 생한 것이다.
■ 일곱째, 현별인(顯別因)의 힐난이란
다른 원인에 의지해서 무상법(無常法)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것은 곧 원인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현별인의 힐난이라고 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공력(功力)에 의지하므로 소리가 무상하다”고 한다면,
공력이 없는 곳에서는 곧 마땅히 이것은 항상해야만 할 것이다.
마치 번개와 빛과 바람 등과 같은 것은 공력에 의지하지 않고서 생하여도 또한 무상(無常)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무상을 주장하는 데 공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으며,
공력은 원인이 아닌 것이다.
만약 원인이라면 공력을 잃어버리며,
다른 곳은 마땅히 무상이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불을 떠나서 연기를 주장하는 것과 같으므로 연기는 바로 불의 정인(正因)이며,
연기와 불이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공력은 곧 이와 같지 않으므로 원인을 이루지 않는다”고 한다.
또다시 공력은 무상의 뜻을 능히 내세울 수 없다.
왜냐하면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공력에 의지하여 생한다.
만약 두루한다면 무상을 내세울 수 있으며,
두루하지 않다면 곧 무상을 내세울 수 없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세운 뜻이 모든 나무에는 신식(神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나무는 마치 시리사(尸利沙) 나무와 같이 능히 잠자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힐난하여 말하기를,
“나무의 신식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원인이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시리사 나무는 잠들어도 다른 나무는 잠들지 않는다.
이 잠은 모든 나무에 두루하지 않으므로 잠으로써 일체의 나무에 신식이 있다고 능히 주장할 수가 없다.
공력에 의지해서 생하는 것 또한 이와 같아서 일체의 무상에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을 능히 내세울 수 없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나의 주장은 이와 같지 않다.
나는 공력에 의지하여 생한 이 원인은 능히 일체의 무상을 나타내지만 다른 원인은 능히 나타내지 못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만약 별인(別因)이 있어서 능히 무상을 나타낸다면 나는 곧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주장한 뜻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의 입인(立因) 또한 능히 나타나며 나머지 원인도 또한 능히 나타나므로 나의 입의(立義)가 이루어진다.
비유하면 마치 연기에 의해서 불을 아는 것과 같다.
만약 빛을 보면 불도 또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나의 뜻도 또한 이와 같아서 공력에 의지하여 생하는 것은 능히 무상을 나타낸다.
만약 다른 원인이 있다면 능히 무상을 나타내고,
무상의 뜻도 또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힐난은 전도된 것이므로 나의 뜻을 힐난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일체의 무상은 공력에 의지해서 생한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힐난할 것이다.
공력에 의해서 생하는 이 원인은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이 힐난은 곧 이긴다.
나는 소리 등이 공력에 의해서 생하는 것은 모두 무상하다고 설하며,
일체의 무상이 공력에 의해서 생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 여덟째,
의(疑)의 힐난이란 이류(異類)에 있어서
동상(同相)이 있음을 의심하는 힐난을 말한다.
【論】소리는 공력에 의해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만약 어떤 사물이 공력에 의해서 생한다면 이 사물은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다.
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이생(已生)은 공력에 의지하여 나타나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근수(根水) 등은 공력에 의지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과 같다.
공력에 의해서 생함을 얻지 않는 것은 소리가 또한 다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공력에 의해서 원인을 세우는 것은 일정하지 않으므로 미생(未生)ㆍ이생(已生)ㆍ중유(中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원인에 의해서 소리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므로 이 소리는 반드시 어떤 것인가?
오지그릇과 같이 미생이 생함을 얻는 것이다.
마치 근수(根水)와 같이 이유(已有)가 나타나는 데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생인(生因)에 의지한다면 의심을 일으킬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입의의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능생능현(能生能顯)이기 때문이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소리는 공력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설하지 않고,4) 소리는 공력에 의해서 생할 수 있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므로 그대는 무엇을 힐난한다는 것인가?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공력의 현상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함[生]이고,
둘째는 나타남[顯]이다.
생함이란 오지 그릇과 같은 것이고,
나타남이란 근수와 같은 것이다.
소리는 바로 공력의 현상이므로 이 속에 있어서 항상하고 무상한 의심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근수 등은 바로 공력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근수의 공력의 현상을 현료(顯了)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나의 뜻을 힐난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료는 아직 생하지 않고 공력에 의해서 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력의 현상은 한 가지로서 이것은 무상과 같기 때문에 그대의 힐난은 그렇지 못하다.
만약 그대가 또한 공력의 현상을 나타낼 때에 두 가지 무상함이 있다.
오지그릇의 생함은 바로 무상이고,
오지 그릇의 소멸은 바로 항상한 것이며,
소리 또한 이와 같다.
이 힐난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성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오지그릇이 소멸하는데 이 존재는 멸함 속에 있다고 한다면,
존재하기 때문에 멸함의 뜻이 곧 있지 않는 것이다.
만약 멸함 중에 있지 않다면 곧 이 멸함도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본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설하기를,
“마치 어둠과 같다면 어둠 속에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둠이 있다.
멸함도 또한 이와 같아서 멸함 속에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멸함이 있다”고 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공화(空華)와 석녀(石女)의 아이나 토끼의 뿔 등은 있지 않은데 이것을 곧 있다고 한다.
만약 그대가 공화 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지 그릇 등의 멸함도 마찬가지여서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공력의 현상은 한 종류로서 이것은 무상과 같기 때문에 그대의 의심은 옳지 못하다.
그대는 불신하는 것이 되며 그대가 믿음을 얻기 위해서 나는 원인을 깨치고 소리가 무상하다고 설한다.
왜냐하면 전세(前世)가 장애 없이 공력에 의해서 현생(顯生)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리는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다.
그대는 공력소득(功力所得)과 공력소조(功力所造)의 두 가지 뜻에 의해서 다름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뜻은 옳지 못하다.
무엇을 뜻으로 삼는가?
일체는 공력소득에 의해서 곧 이것은 무상하다.
왜냐하면 미생(未生)이 생하는 것을 얻고,
이생(已生)은 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수 등도 또한 이와 같아서 무상하므로 무엇으로써 그대는 현료(顯了)를 항상하다고 주장하는가?
■ 아홉 번째,
미설(未說)의 힐난이란 미설의 앞에는 아직 무상이 있지 않다.
이것을 미설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뜻의 근본은 앞에서와 같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공력이 언어에 의해서 원인이 되면 소리는 무상한 것이다.
곧 무엇이 항상한가?
아직 공력이 언어에 의지한다고 설하지 않았으며,
앞의 소리는 바로 항상하고 이 뜻은 이름을 얻는다.
전세(前世)의 소리가 이미 항상한데 어찌하여 지금은 무상한 것인가?”라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세운 원인은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므로 생함을 위한 것이 아니고 멸함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입인이 무너져 멸한다면 그대의 힐난은 곧 이길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나를 미설(未說)의 앞에 아직 소리의 무상함을 알지 못한다고 힐난한다면 이 힐난은 비슷하다.
만약 무너지고 멸하는 원인으로써 나를 힐난한다면 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 열 번째, 사이(事異)의 힐난이란
현상이 다르기 때문에 오지그릇과 소리는 같지 않다.
이것을 사이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소리는 인연에 의해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다.
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사이(事異)이고,
오지그릇도 사이이다.
현상이 이미 다름에 있어서는 똑같이 무상함을 얻는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릇과 동사(同事)이기 때문에 소리는 무상하다고 설하지 않았으며,
일체의 사물은 같은 원인에 의해서 생하는 것을 얻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설한다.
동사에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기 때문에 소리는 무상하며,
연기는 바로 이물(異物)로써 더구나 능히 불을 나타내므로 오지그릇도 역시 이와 같이 능히 소리의 무상함을 나타낸다.
또한 다른 사람 사이의 힐난을 설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으므로 소리의 상주함을 설하고자 하고,
허공에 의하는 까닭에 허공은 바로 상주한다.
만약 달리 사물이 있어서 허공에 의지한다면 사물은 곧 상주한다.
비유하면 마치 인허원(隣虛圓)과 같으므로 인허(隣虛)5)는 상주하며 원(圓)은 인허에 의지하므로 원은 곧 상주한다.
소리도 또한 이와 같아서 허공에 의지하기 때문에 상주한다.
또다시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한다.
비유하면 마치 소리의 동이성(同異性)은 귀가 집착하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과 같다.
소리도 또한 이와 같으므로 상주한다.
이것은 이(異)의 입의(立義)이다.
비세사(鞞世師)6)가 말하기를,
“만약 상주인(常住因)으로 말미암아 주장할 수 있다면 현상을 원인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원인은 무상을 낳는다고 설하지 않았으며 원인은 무상을 나타낸다고 설하였다.
다른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알게 해주는 것을 얻는다.
나의 입인은 바로 요인(了因)이며,
이것은 생인(生因)이 아니다.
그대는 생인에 의해서 힐난하는 까닭에 이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論】또다시 그대가 설한 입의(立義) 또한 이런 힐난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상주(常住)의 뜻을 믿거나 좋아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런 뜻을 설한다.
이 열 가지를 동상 등의 전도된 힐난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뒤바뀐 생각이라고 그 잘못을 주장한다.
만약 힐난이 있는데 이것과 비슷하다면 곧 전도된 힐난 속으로 떨어진다.
부실의(不實義)의 힐난이란 거짓말이기 때문에 참답지 않으며,
거짓말이란 진실한 뜻이 아니므로 뜻이 있지 않다.
이것을 부실의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 부실의의 힐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불허의난(顯不許義難)이고,
둘째는 현의지난(顯義至難)이며,
셋째는 현대비의난(顯對譬義難)이다.
■ 첫째, 현불허의난이란 견해를 증득하는 곳에서 다시 원인을 찾는다.
이것을 현불허의 난이라고 이름한다.
【論】소리는 인연에 의해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다.
이 논거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나는 오지그릇이 인연에 의해서 생하는 것으로 본다.
어떤 원인 때문에 그것이 무상한가?
만약 원인이 없고서 오지그릇이 무상하다고 주장한다면 소리도 또한 마땅히 상인(常因)에 의지하지 않고 항상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미 다시 원인으로써 성취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음으로써 현재에 오지그릇을 보는 데에 원인이 있어서 항상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시 무상인을 찾으려고 하는가?
이 까닭에 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 둘째, 현의지난이란 소대(所對)의 뜻에 있어서 이 뜻은 뜻이 지극하다.
이것을 의지난이라고 한다.
【論】아(我)는 없다.
왜냐하면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다.
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이 뜻은 뜻이 지극하다.
만약 나타낼 수 있어 반드시 있는 것이고,
나타낼 수 없어서 반드시 없는 것이라면 나타낼 수 있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나타낼 수 없는 것 또한 그러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화륜(火輪)ㆍ아지랑이ㆍ건달바성과 같이 이것은 나타낼 수 있어도 있다고 능히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나타낼 수 있어서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능히 주장할 수 없다면
곧 나타낼 수 없는 것도 반드시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능히 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무슨 도리가 있어서 이 뜻은 뜻이 지극한가?
나타낼 수 없는 사물은 반드시 있지 않다.
이것은 뜻이 지극하지 않고,
나타낼 수 있는 사물은 두 종류가 있다.
뜻이 지극함이 있고,
비의(非義)의 지극함이 있다.
뜻의 지극함이 있다는 것은 만약 비가 있으면 반드시 구름이 있지만,
구름이 있을 때는 비가 있기도 하고 비가 없기도 한다.
연기로 말미암아 불을 아는 것도 이 속에 있으므로 반드시 뜻이 지극함이 있지 않다.
만약 연기를 보면 불이 있음을 알고 연기가 없으면 불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 뜻은 지극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철이나 붉은 재에서 불이 있는 것은 보이지만 연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사물의 뜻의 지극함의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또다시 오직 색만이 있고 화륜이라고 이름하거나 아지랑이라고 이름하거나 건달바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근(根)이 미혹되고 마음이 뒤바뀐 까닭에 현세에는 있고 후세에는 없다.
오직 색만이 실유(實有)인데 근이 미혹되고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대는 가히 나타나는 사물도 반드시 있지 않다고 설하므로 이러한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또다시 나는 석녀(石女)의 아이를 비유로 삼아서 이 뜻을 판가름한다.
본 처[處]는 나타낼 수 없으며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 사물은 반드시 있다고 설한다.
화륜 등의 차이에 있어서는 오직 윤(輪)만이 일정하지 않다.
윤의 일정하지 않음이란 구를 때는 있으며 머물 때는 없다.
그러므로 이 뜻은 지극하지 않다.
그대는 비의(非義)의 지극함을 취하여 뜻의 지극함의 힐난을 이루므로 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또다시 다른 사람은 의지(義至)의 힐난을 말하기를,
“만약 소리와 오지 그릇이 동상이기 때문에 소리가 무상하다면 이것은 뜻의 지극함이다.
만약 부동상(不同相)이라면 곧 마땅히 이것은 항상해야 할 것이다.
부동(不同)이란 소리는 귀에 집착되는 바로써 몸이 없고,
오지 그릇은 눈에 집착되는 바이므로 몸이 있다.
이미 부동상인 까닭에 소리는 항상한 것이다”고 한다.
【論】만약 이와 같이 힐난한다면 동상의 힐난과 의지의 힐난은 각기 본체가 없기 때문에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 셋째, 현대비의(顯對譬義)의 힐난이란
대비(對譬)7)의 힘 때문에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대비의의 힐난이라고 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무상한 그릇과 동상인 까닭에 소리가 무상하다고 한다면 나[我]도 또한 상주함을 나타낸다.
비유하면 마치 상주하는 허공과 동상인 까닭에 소리는 상주한다.
만약 항상함과 동상으로써 항상함을 얻지 못한다면 무상과 동상인 것이 어떻게 무상일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論】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오직 사물이 있지 않은 것을 허공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이 있어서 상주한다면 이 비유는 곧 힐난을 이루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진실함은 이미 사물이 있지 않으며,
상주하는 허공에는 사물이 있지 않아서 항상하다고 설해서는 안 되며,
무상하다고 설해서도 안 된다.
이런 힐난은 비유를 이루지 못하며 비유가 아닌 것을 비유라고 하기 때문에 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물이 허공이라고 이름 지으면 곧 이것은 상주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전도된 힐난이고 진실한 뜻의 힐난이 아니다.
왜냐하면 몸이 없고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공은 몸이 없고 상주하며 몸ㆍ괴로움ㆍ즐거움ㆍ바람[欲] 등은 몸이 없는데도 이것은 무상하다.
소리는 이미 몸이 없으므로 허공과 같이 이것은 항상하겠는가,
마음 등과 같이 무상하겠는가?
몸이 없고 일정하지 않으면 원인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힐난은 전도된 것이다.
또다시 소리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
만약 사물이 있다면 곧 무상함을 알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 등과 같다.
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이런 뜻은 의심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릇이 생하는 원인이 있으면 이것은 무상하며,
그릇이 멸하는 원인이 있으면 이것은 항상하다.
소리는 이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소리에 있어서 의심을 일으키며,
그릇의 생함과 같은 원인이 있어서 무상하고,
그릇의 멸함과 같은 원인이 있어서 이것은 항상함이 된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물이 있는데도 멸함이라고 이름 짓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막대기 등으로 두드려서 사물이 부서지고 멸하는 까닭에 항상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또다시 소리는 근(根)에 집착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다.
이런 논리가 이미 있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이것 또한 의심해야 한다.
근소집의 동이성과 같은 것은 곧 마땅히 이것은 항상해야만 하므로 소리는 근소집으로서 동이성인 것과 같고,
소리는 마땅히 항상해야 한다.
만약 동이성이 바로 항상하지 않는 것과 같다면 오지그릇과 같이 마땅히 무상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한다.
【論】이 힐난은 진실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소 등의 동이성이 만약 실로 있다면 소 등을 떠나서 마땅히 다른 본체가 집착되어야 하고 보여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소의 동이성을 떠나서는 집착할 만하거나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다른 본체가 없으므로 무상함을 안다.
또다시 아(我)는 없다.
왜냐하면 가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뱀의 귀와 같다.
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바닷물의 물방울의 양과 설산의 눈 알갱이의 양[斤양]은 있기는 하지만 가히 나타낼 수 없다.
아(我)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은 있어도 가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가히 나타낼 수 없는 원인은 무아(無我)를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論】수량과 덩어리는 다른 본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수량이 쌓여서 차례로 나타나 약간 있게 되며 약간은 바로 수량이다.
그리고 두루 포섭하여 생각하는 까닭에 일ㆍ십ㆍ백ㆍ천ㆍ만 등의 이름을 짓는다.
물방울의 양과 눈 알갱이의 양이 이미 다른 본체가 없기 때문에 참된 존재가 아니다.
만약 다른 힐난과 이 힐난이 동상이라면 그 허물의 이름을 내세워 부실의(不實義)의 힐난이라고 한다.
■ 상위(相違)8)의 힐난이란
뜻이 나란히 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상위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마치 밝음과 어둠,
앉음과 일어섬 등은 병립하지 못한다.
이것을 상위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 상위의 힐난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미생(未生)의 힐난이고,
둘째는 상(常)의 힐난이며,
셋째는 자의상위(自義相違)의 힐난이다.
■ 첫째, 미생의 힐난이란
전세(前世)가 미생(未生)일 때에 공력에 관련되지 않으면 곧 마땅히 이것은 항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생의 힐난이다.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공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소리 등이 무상하다면 아직 생하지 않았을 때에 아직 공력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소리는 마땅히 항상한 것이다.’
【論】이 힐난은 서로 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생하지 않았을[未生] 때 소리가 아직 있지 않으므로 아직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항상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석녀(石女)의 사내아이가 검고 여자아이가 희다”고 한다면 이 뜻 또한 마땅히 성취된다.
만약 있지 않다면 항상할 수가 없으며,
항상하다면 있지 않을 수 없다.
있지 않으면서 항상하다면 곧 스스로 서로 어기는 것이다.
이 힐난은 의지(義至)의 힐난과 부실(不實)의 힐난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실한 힐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력에 의해서 소리는 무상하며,
이 뜻이 이미 세워지므로 이 뜻은 의지(義至)를 얻는다.
만약 공력에 의하지 않는다면 곧 마땅히 이것은 항상할 것이므로,
이 뜻은 진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력에 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 종류가 있다.
항상함과 무상함과 불유(不有)이다.
항상함이란 허공과 같고,
무상함이란 번개 등과 같으며,
불유란 공화(空華) 등과 같아서 이 세 가지가 모두 공력에 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이용해서 항상하다고 하고 있으므로 진실하지 않다.
■ 둘째, 상(常)의 힐난이란
언제나 무상한 까닭에 이 소리가 항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상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무상한 곳에는 언제나 무상함이 있고,
일체의 법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무상한 속에 항상함이 있고 무상에 의지하는 까닭에 항상함을 얻는다”고 한다.
【論】이 뜻은 서로 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미 무상하다면 어떻게 항상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설하기를,
“어둠 속에 빛이 있다”고 한다면 이 말도 또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힐난은 서로 어기는 것이 되어 진실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법이 있어서 무상하다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곳에 있어서 상응하여 다시 주장하여 항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무상이라는 것은 다른 본체가 없는 것이다.
만약 사물이 ‘미생(未生)은 생함을 얻고,
이생(已生)이면서도 멸하는 것’을 무상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무상이 진실하지 않다면 무상에 의해서 항상함을 주장하여 항상함도 또한 진실하지 않다.
■ 셋째, 자의상위(自義相違)의 힐난이란
다른 이의 뜻을 힐난하면서도 스스로의 뜻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것을 자의상위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소리는 인연에 의해서 생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싹 등과 같다.
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원인이 무상함에 이르면 곧 무상함과 같아지고,
무상에 이르지 않는다면 무상을 능히 이룰 수 없으므로 이 원인은 곧 원인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論】그대의 힐난이 만약 나의 입의(立義)에 이르면 나의 입의와 같아서 곧 나의 뜻을 능히 파할 수 없다.
만약 나의 입의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역시 나의 뜻을 능히 파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대의 힐난은 곧 도리어 그대의 뜻을 파할 뿐이다.
또다시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원인이 앞에 있고 입의(立義)가 뒤에 있다면 입의가 아직 있지 못한 것이므로 이것은 어떤 원인인가?
만약 입의가 앞에 있고 원인이 뒤에 있다면 입의는 이미 이루어졌는데 무슨 원인이 필요하겠는가?
이것 또한 원인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고 한다.
【論】만약 그대의 힐난이 앞에 있고 나의 입의가 뒤에 있다면 나의 뜻이 아직 있지 않는데 그대는 무엇을 힐난하겠다는 것인가?
만약 나의 입의가 앞에 있고 그대의 힐난이 뒤에 있다면 나의 뜻이 이미 섰거늘 그대의 힐난은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나의 힐난을 믿지 않는데 나의 힐난을 취하여 다시 나를 힐난하겠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의 힐난을 나타내어 그대의 뜻을 파하고,
그대의 힐난에 의지함으로써 나의 뜻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힐난이 있어서 이 힐난과 동상이라면 그 허물을 내세워서 상위의 힐난이라고 이름한다.
【論】바른 힐난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파소락의(破所樂義)이고,
둘째는 현불락의(顯不樂義)이며,
셋째는 현도의(顯倒義)이고,
넷째는 현부동의(顯不同義)이며,
다섯째는 현일체무도리득성취의(顯一切無道理得成就義)이다.
외도가 말하기를,
“아(我)는 있다.
왜냐하면 쌓고 모여서[聚集]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9) 비유하면 마치 와구(臥具) 등과 같이 다른 이를 위하여 쌓고 모이는 것과 같다.
눈 등의 근 또한 이와 같아서 다른 이를 위하여 쌓고 모인다.
다른 이란 아[我]이므로 아가 있음을 안다”고 한다.
【論】아(我)는 없다.
왜냐하면 반드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이 있는데 반드시 나타낼 수 없다면 이 사물은 곧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비자재인(非自在人)의 두 번째 머리와 같다.
두 번째 머리는 색이나 향기 등에 대하여 머리의 상모(相貌) 속에서 사유하거나 분별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이와 같아서 눈 등의 근에 있어서 분별하더라도 나타낼 수 없으므로 반드시 없다.
아가 있다[有我]고 설하는 그대의 뜻은 옳지 않다.
■ 이것을 파소락의(破所樂義)10)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만약 그대가 아상(我相)은 분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있다고 말한다면
두 번째 머리 역시 분별할 수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두 번째 머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 또한 이와 같이 그대를 믿어서는 안 된다.
■ 이것을 현불락의(顯不樂義)11)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그대가 두 가지는 똑같아서 분별되어져서는 안 되며 도리에 의하지 않아서 아(我)는 바로 있는 것이라고 설한다.
두 번째 머리가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면 아도 또한 도리에 의하지 않는다.
두 번째 머리가 바로 있다고 설하면 아도 바로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이 뜻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대의 뜻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
■ 이것을 현도의(顯倒義)12)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만약 그대가 아(我)와 두 번째 머리가 똑같아서 분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지 않다고 한다면 같지 않음의 허물은 그대가 정상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석녀(石女)의 여자 아이는 노리개가 있고 석녀의 남자 아이는 노리개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므로 이 말도 또한 마땅히 성취되어져야 할 것이다.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같지 않음의 허물 속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그대 또한 이와 같다.
■ 이것을 현부동의(顯不同義)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만약 그대가 도리에 의하지 않고서 반드시 아는 있지만 도리에 의하지 않고서 두 번째 머리는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이 성취될 수 있다면 온갖 전도되고 미친 말이나 어린 아이의 도리에 맞지 않는 말 또한 마땅히 성취되어져야 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은 볼 수 있으며 불ㆍ얼음ㆍ바람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 것 등과 같다.
이 모두는 전도되고 미친 말로써 도리에 의하고 있지 않다.
그대가 주장하는 그런 것도 또한 성취될 것이다.
만약 성취되지 못한다면 그대의 뜻도 또한 이와 같다.
■ 이것을 현일체무도리득성취의(顯一切無道理得成就義)라고 이름한다.
■ 3. 타부처품(墮負處品)
■ 【論】이치에 어긋나는 것[墮負處]에는 스물두 가지가 있다.
■ 첫 번째는 괴자립의(壞自立義)이고,
두 번째는 취이의(取異義)이며,
세 번째는 인여립의상위(因與立義相違)이고,
네 번째는 사자립의(捨自立義)이며,
다섯 번째는 입이인의(立異因義)이고,
여섯 번째는 이의(異義)이고,
일곱 번째는 무의(無義)이요,
여덟 번째는 유의불가해(有義不可解)이며,
아홉 번째는 무도리의(無道理義)이고,
열 번째는 부지시(不至時)이며,
열한 번째는 불구족분(不具足分)이고,
열두 번째는 장분(長分)이며,
열세 번째는 중설(重說)이고,
열네 번째는 불능송(不能誦)이며,
열다섯 번째는 불해의(不解義)이고,
열여섯 번째는 불능난(不能難)이며,
열일곱 번째는 입방편피난(立方便避難)이고,
열여덟 번째는 신허타난(信許他難)이며,
열아홉 번째는 어타부처불현타부(於墮負處不顯墮負)이고,
스무 번째는 비처설타부(非處說墮負)이며,
스물한 번째는 위실단다소위(爲悉檀多所違)이고,
스물두 번째는 사인(似因)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스물두 가지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
만
약 어떤 사람이 하나하나의 이치에 어긋나는 곳에 떨어지면
다시 그와 더불어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첫 번째, 괴자립의란 자기의 입의에 대해서 대의(對義)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괴자립의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항상하다.
왜냐하면 몸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다.
【論】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만약 소리가 허공과 더불어 동상(同相)이면 항상하다.
만약 동상이 아니라면 곧 무상할 것이다.
동상이 아니라는 것은 소리는 원인이 있지 만 허공은 원인이 없다.
소리는 근(根)에 집착하여 있지만 허공은 근에 집착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다.
외도가 말하기를,
“동상이거나 동상이 아니거나 나는 모두 생각하지 않으며 언제나 동상을 설한다.
만약 언제나 동상이라면 곧 이것은 항상하다”고 한다.
【論】언제나 동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몸이 없는 물건이 아니며,
또한 무상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 등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의 원인은 성취될 수 없다.
동상이 아니라는 것은 반드시 일체의 무상함은 항상하는 모습과 떨어져서 나타나므로 능히 무상을 내세운다.
외도가 말하기를,
“나도 또한 무상에는 원인이 있고 항상함에는 원인이 없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괴자립의라고 이름한다”고 한다.
■ 두 번째,
취이자립의란
자신의 뜻이 이미 남에 의해서 무너졌는데도
또다시 사유하여 다른 법을 뜻이라고 하여 내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취이자립의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항상하다.
왜냐하면 촉감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다.
【論】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만약 그대가 소리는 촉감의 원인이 없음에 의해서 항상하다고 주장한다면,
촉감의 원인이 없다는 것은 일정하지 않다.
마음과 탐욕과 성냄 등도 모두 촉감이 없지만 이것들은 무상하다.
소리 또한 촉감이 없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 등의 항상한 것과 같지 않으며,
마음 등이 무상한 것과도 같지 않다.
촉감이 없는 것은 이미 일정하지 않으므로 그대의 원인은 곧 성취될 수 없다.
만약 원인이 성취되지 못한다면 입의(立義) 또한 성취되지 못한다.
이 뜻은 이미 논파되었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와 항상함은 모두 나의 뜻이 아니다.
내가 세운 뜻은 항상함과 소리를 두루 포섭하는 것이며,
소리와 항상함을 두루 포섭하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소리가 색 등을 제거한 것이며,
내가 말한 것은 항상함이 무상 등을 제거한 것이다.
항상함은 색 등을 떠난 소리를 떠나지 않으며,
소리는 귀에 소집되는 것을 떠난 항상함을 떠나지 않는다.
서로 떠나지 않는 것을 서로 포섭한다고 한다.
이것이 나의 입의이며,
소리를 세우지도 않았고 항상함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대는 소리를 힐난하고 항상함을 힐난하였지만 나의 뜻을 힐난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취이자립의라고 이름한다”고 한다.
■ 세 번째,
인여립의상위란 원인과 입의(立義)가 같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인여입의상위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상주한다.
왜냐하면 일체가 무상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다.
【論】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그대는 일체가 무상하기 때문에 소리가 항상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소리는 이 일체에 포섭되는 것인가,
일체에 포섭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일체에 포섭된다면 일체는 무상하므로 소리도 마땅히 무상할 것이다.
만약 일체에 포섭되지 않는다면 일체는 곧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리를 포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원인을 말한다면 입의(立義)는 곧 무너질 것이다.
만약 입의를 말한다면 원인이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인여립의상위라고 이름한다.
■ 네 번째,
사자립의란 다른 이가 이미 내가 세운 입의를 파한 뒤에 버리고서는 다시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사자립의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상주한다.
왜냐하면 근(根)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동이성(同異性)은 근의 집착인 까닭에 항상한 것처럼,
소리 또한 근의 집착이므로 상주한다”고 한다.
【論】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그대는 소리가 근의 집착인 까닭에 상주한다고 말하는데,
근의 집착은 무상함과 서로 포섭된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 그릇과 같다.
오지 그릇 등은 근의 집착인 까닭에 무상하므로 소리도 마땅히 무상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동이성의 같음은 항상하다고 설하지만 이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소 등의 동이성은 소와 같은 것인가,
소와 다른 것인가?
만약 소와 같은 것이라면 소는 바로 진실하며 동이성은 진실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다르다면 소를 떠나서 동이성의 자체는 마땅히 드러내어져야만 할 것인데
소를 떠나서는 이미 동이성을 볼 수 없으므로
상주함의 비유를 이루지 못한다.
그대의 입의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이 뜻은 이미 논파되었다.
외도가 말하기를,
“누가 이런 뜻을 주장하는가”라고 한다.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사자립의라고 이름한다.
■ 다섯 번째,
입이인의란 이미 동상(同相)의 원인의 뜻을 세우고서 후에 다른 원인[異因]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입이인의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상주한다.
왜냐하면 양시(양時)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는 상주하므로 모두가 일시(一時)에 나타난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 등과 같아서 소리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한다.
【論】이 논리가 이미 섰거늘 그대가 소리는 상주하므로 양시에 나타나지 못한다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 등과 같다고 설한다면 이 원인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양시에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마치 바람과 촉감이 일시에 나타나더라도 바람은 무상한 것과 같으며,
소리 또한 이와 같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와 바람은 동시가 아니므로,
바람은 신근(身根)의 집착이고,
소리는 이근(耳根)의 집착이다.
따라서 소리와 바람은 동상이 아니다”고 한다.
【論】그대는 앞에서는 양시에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는 상주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제는 소리와 바람이 동상이 아니며,
각각 근의 집착인 까닭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앞의 원인을 버리고 다른 원인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원인은 성취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입이인의라고 이름한다.
■ 여섯 번째,
이의란 증의(證義)를 설하더라도 입의(立義)와 서로 관계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의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상주한다.
왜냐하면 색 등의 오음(五陰)과 십이인연(十二因緣)이다”라고 한다.
이것을 이의라고 이름한다.
■ 일곱 번째,
무의란 뜻을 논하고자 할 때에 주술을 외는 것이다.
이것을 무의라고 이름한다.
■ 여덟 번째,
유의불가해란 만약 세 번을 설하여도 청중 및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의불가해라고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법을 설하는데 청중과 상대방을 이해시키고자 하나 세 번을 설하여도 모두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있어서 티끌[塵]은 몸이 없지만 기쁨을 일으키고 근심과 번민을 일으키며,
이르지 못하여도 손해와 이익이 있으며 버리는 것이 더욱 많지만 버리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과 같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소리가 항상 무상하기 때문에 상주한다.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유의불가해라고 이름한다.
■ 아홉 번째,
무도리의란 어떤 뜻이 앞과 뒤가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무도리의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열 가지 열매를 먹으면서 세 가지 전(氈: 모직물)과 한 가지의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무도리(無道理)라고 이름한다.
■ 열 번째,
부지시란 입의가 이미 논파되고 후에 원인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부지시라고 이름한다.
외도가 말하기를,
“소리는 인허원(隣虛圓)과 같기 때문에 상주한다.
상주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원(圓)이 상주한다.
소리 또한 이와 같다”고 한다.
【論】그대는 항상함의 뜻을 세웠지만 원인을 말하지 않았고 오분(五分)을 주장하였지만 말이 구족되지 못하였다.
그대의 뜻은 곧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뜻이 이미 논파되었다.
외도가 말하기를,
‘나는 원인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만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원인이 되는가?
상주하는 허공에 의지하는 까닭이다”고 한다.
【論】비유하면 마치 집이 모두 불에 타고 난 뒤에 다시 물을 구하여 이 집을 구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때 아닌 때에 원인을 내세우고 뜻을 구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부지시라고 한다.
■ 열한 번째,
불구족분이란 오분의(五分義) 중에서 일분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불구족분이라고 이름한다.
■ 오분이란 첫째는 입의언(立義言)이고,
둘째는 인언(因言)이며,
셋째는 비여언(譬如言)이고,
넷째는 합비언(合譬言)이며,
다섯째는 결정언(決定言)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소리는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제일분이다.
왜냐하면 원인에 의하여 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제이분이다.
만약 어떤 사물이 원인에 의지해서 생한다면 이 사물은 무상하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이 원인에 의지하여 생하였으므로 무상한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 제삼분이다.
소리 또한 이와 같다고 하는 것이 제사분이다.
그러므로 소리는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제오분이다.
이 오분 가운데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였다면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불구족이라고 이름한다.
■ 열두 번째,
장분이란 원인을 많이 말하고,
비유[譬]를 많이 말하는 것을 장분이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소리는 무상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력에 의하여 생하였으며,
중간없이 생하였으며,
근의 집착이기 때문이며,
생멸하기 때문이며,
언어를 짓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을 장인(長因)이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소리가 무상한 것이 원인에 의지하여 생한다.
비유하면 마치 오지그릇과 같고 의복과 같고 집과 같고 업과 같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장비(長譬)라고 이름한다.
【論】그대는 많은 원인과 많은 비유를 설하는데 만약 하나의 원인으로써 뜻을 증명할 수 없다면 무엇 하러 하나의 원인을 설하는가?
만약 뜻을 증명할 수 없다면 무엇 하러 많은 원인을 설할 필요가 있는가?
많은 비유 또한 마찬가지이므로 많이 설하는 것은 곧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장분이라고 이름한다.
■ 열세 번째,
중설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성(重聲)이요,
둘째는 중의(重義)이며,
셋째는 중의지(重義至)이다.
중성이란 제석제석(帝釋帝釋)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중의란 안목(眼目)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중의지란 생사는 실로 괴로움이요 열반은 실로 즐거움이라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처음 말로 마땅히 설하였다면 둘째 말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말이 이미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만약 앞의 말이 이미 뜻을 나타냈다면 뒤의 말은 무엇을 나타내겠는가?
만약 나타내는 것이 없다면 뒤의 말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중설이라고 이름한다.
■ 열네 번째,
불능송이란 만약 입의를 말하여 대중이 이미 이해하고 알아들었는데,
세 번을 설하여도 어떤 사람이 능히 외우고 지니지 못한다면 이것을 불능송이라고 한다.
■ 열다섯 번째,
불해의란 만약 입의를 말하여 대중이 이미 알아들었는데
세 번을 설하여도 어떤 사람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불해의라고 이름한다.
■ 열여섯 번째,
불능난이란 다른 이가 이치에 맞게 입의하는 것을 보고 능히 논파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불능난이라고 이름한다.
【論】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힐난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는 논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힐난하지 못한다면 그와 함께 논의해서는 안 된다.
【論】이 두 가지는 지극히 나쁜 논쟁에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논쟁에 지는 것에서는 만약 말하는 데에 과실이 있더라도
가히 다른 방편으로써 이것을 구제할 수 있지만
이 두 종류는 방편으로 능히 구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앞에서는 총명함의 교만을 일으켰지만
뒤에서는 능히 총명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였으므로
이 어리석은 범부는 가히 수치스러워할 것이다.
이것을 불능난이라고 이름한다.
■ 열일곱 번째,
입방편피난이란 자신의 입의에 과실이 있음을 알고서
방편으로 은밀히 피하여 다른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병이 있다고 말하거나 다른 이의 병간호를 하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 떠나지 않으면 일은 곧 끝나지 못하므로 다른 이의 입난(立難)을 막는다.
왜냐하면 친선애념(親善愛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치에 어긋나는 입방편피난라고 한다.
■ 열여덟 번째,
신허타난이란 다른 이가 힐난을 주장하는 것 속에서 자신의 뜻의 허물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신허타난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미 자신의 뜻의 허물을 믿고 인정한 뒤에
다른 이의 힐난이 나의 허물과 같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며,
그대의 허물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는 것을 신허타난이라고 이름한다.
■ 열아홉 번째,
어타부처불현타부란 만약 어떤 사람이 이미 논쟁에 지고 나서도
그 논쟁에 진 것을 드러내지 않고
다시 힐난을 내세워서 이것을 힐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뜻이 이미 무너졌는데 무엇 하러 힐난을 할 필요가 있는가?
이 힐난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을 어타부처불현타부라고 이름한다.
■ 스무 번째,
비처설타부란 다른 이가 논쟁에 지지 않았는데도
이것을 논쟁에서 졌다고 말한다.
이것을 비처설타부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다른 이가 자신의 입의를 무너뜨리고 논쟁에 지게 하였는데
만약 자기가 세운 이의를 취하여 다른 이가 논쟁에 졌다고 나타내면서도
그것이 논쟁에 진 것이 아니면 이것을 비처설타부처라고 이름한다.
■ 스물한 번째,
위실단다소위란 앞에서는 이미 함께 네 가지 바른 가르침[悉檀多]을 두루 갖추었는데
뒤에는 실단다의 이치에 맞지 않게 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실단다소위라고 이름한다.
만약 스스로 명교서사(明巧書射)와 생인(生因)과 율(律)과 사문(沙門)의 바른 가르침을 두루 갖추어서 이치에 맞게 설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위실단다소위타부처라고 이름한다.
■ 스물두 번째,
사인이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불성취(不成就)요,
둘째는 부정(不定)이며,
셋째는 상위(相違)이다.
이것을 사인이라고 이름한다.
첫째로 불성취란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말이 온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뿔이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말에는 뿔이 없으므로 뿔은 성취할 수 없는 원인이 되므로 능히 말이 온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부정이란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소가 온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뿔이 보인다고 하기 때문이다.
뿔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소인 것은 아니며 양이나 사슴 등도 또한 뿔이 있으니,
뿔은 부정의 원인이 되므로 소가 온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상위란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낮을 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해가 금방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해가 새로 나온 것은 밤과 서로 다르므로
일출을 원인으로 삼아서 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능히 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를 주장하면서 원인으로 삼는다면
그것을 원인은 비슷한 것 같지만
이치에 어긋나는 사인이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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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인[因]의 성질을 비유[喩]에 적용시킬 때 그 비유에 갖가지 성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그것으로써 소립(所立: 主題ㆍ命題)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2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3 상키야,
즉 수론(數論)을 가리킨다.
4 소리가 공력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지만 무상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성현파(聲顯派)의 설이다.
5 극미를 말한다.
6 바이셰시카,
즉 승론(勝論)을 가리킨다.
7 대비란 반유(反喩)를 말한다.
8 상위란 모순을 의미한다.
9 수론(數論)이 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하는 문장이다.
10 신인명(新因明)의 법차별상위인(法差別相違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락(所樂)이란 의요(意樂)의 의미로서 아(我)를 가리킨다.
11 신인명(新因明)의 유법자상상위인(有法自相相違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불락(不樂)이란 상대방이 주장하려고 하는 아(我)가 없음의 뜻이다.
12 반대자의 입언(立言)의 전도됨을 나타낸다고 하는 뜻이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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