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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56-03-01_전식론_001 본문
『전식론』
K0612
T1587
전식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전식론_K0612_T1587 핵심요약
♣0612-001♧
『전식론』
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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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식론
전식론(轉識論)
-무상론(無相論)으로부터 출현함-
진제(眞諦) 한역
김철수 번역
■ 식(識)이 전변(轉變)하면 두 가지가 있게 된다.
첫째는 전변하여 중생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전변하여 법이 되는 것이니,
일체의 소연(所緣:인식대상)은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두 가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나
다만 식이 전변하여 두 가지 모습을 지어낸 것이다.
■ 다음으로 능연(能緣:인식주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보식(果報識), 즉 아뢰야식이고,
둘째는 집식(執識), 즉 아타나식이며,
셋째는 진식(塵識), 즉 육식(六識)이다.
■ 과보식이라는 것은
번뇌와 업이 이끌기 때문에 과보라 하며,
또한 본식(本識)이라고도 한다.
유위법의 종자가 의지하므로 또한 택식(宅識)이라 하고,
일체의 종자가 서식하는 처소이므로 또한 장식(藏識)이라 한다.
일체의 종자가 숨어 잠복하는 처소인 것이다.
【문】이 과보식은 어떤 모습(相)이며 어떤 경계인가?
【답】그것의 모습과 경계는 분별할 수 없으며 하나의 체(體)이니, 서로 다르지 않다.
【문】만일 그러하다면 어떻게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가?
【답】일[事]1)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 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 식은 일체의 번뇌와 업의 과보가 되는 일[果報事]을 낳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무명이 응당 이 무명의 모습과 경계를 일으킬 때에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분별할 수 있다면 무명이라 말할 수 없고,
만약에 분별할 수 없다면 응당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지도 않은 것은
또한 탐욕이나 진에 등의 일[事]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무명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 본식(本識)도 또한 그러하여 모습과 경계가 차별이 없으나,
다만 일[事]로 말미암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 본식은 여덟 가지의 다양한 뜻을 갖추고 있으니,
‘의지하는 처소’ 등의 뜻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이에 관해서는 『구식의품(九識義品)』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다.
또한 이 본식은 다섯 가지 심법(心法:心所)과 상응한다.
그 다섯 가지 심법은
첫째는 촉(觸)이고,
둘째는 작의(作意)이며,
셋째는 수(受)이고,
넷째는 사유이며,
다섯째는 상(想)이다.
근(根)ㆍ진(塵)ㆍ식(識)의 세 가지 일[三事]이 화합하여 촉을 생한다.
마음이 항상 움직여 행하는 것을 작의(作意)라 이름한다.
여기서의 수(受)는 단지 사수(捨受)만을 말한다.
사유란 행할 수 있는가 또는 행할 수 없는가를 헤아리고 생각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옳지 못한 일이나 옳은 일을 이루게 하므로 사유라 한다.
작의는 말(馬)이 나아가는 것과 같고
사유는 기수와 같다.
말이 저 혼자 앞으로 나아갈 경우에는 옳지 못한 길을 피할 수 없으나
기수가 있기 때문에 잘못된 길을 피하여 바른 길로 가게 할 수 있으니,
사유 역시 그러하여 작의로 하여금 제멋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 본식(本識)과 이와 상응하는 심법(心法)의 자성(自性)은 무기(無記)2)이다.
생각마다 항상 흐르니,
마치 흐르는 물의 물결과 같다.
■ 본식은 흐르는 물과 같고 이와 상응하는 다섯 가지 심법은 물결과 같으니,
아라한과를 얻어도 이 흐름의 물결 법은 오히려 멸하지 않는다.
이를 세 가지 능변식(能變識) 가운데 첫 번째 식[第一識]이라 한다.
■ 이 본식을 의지하여 두 번째 집식(執識)이 존재하다.
이 집식은 집착을 체(體)로 삼고
네 가지 번뇌[惑]와 상응하니,
그 네 가지 번뇌란
첫 번째는 무명(無明)이고,
두 번째는 아견(我見)이며,
세 번째는 아만(我慢)이고,
네 번째는 아애(我愛)이다.
이 집식은 유부무기(有覆無記)3)인데,
이 집식도 또한 다섯 가지 심법과 상응하며 그 명칭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그렇지만 앞의 본식과 상응하는 것이 미세하다면 이 집식과 상응하는 것은 거칠다.
■ 이 집식과 이와 상응하는 심법은
아라한의 과위에 이르면 마침내 없어지며,
또한 무심정(無心定)에 들어도 모두 다 멸하여 없어진다.
만약에 진실로 네 가지 번뇌를 없애는 것을 보면
출세간도의 십육행(十六行)4)을 얻어
집식과 그것에 상응하는 법을 마침내 멸하여 없앤다.
여전히 잔존하여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은 다만 사유에 속한다.
이것을 두 번째 식[第二識]이라 한다.
■ 세 번째 진식[第三塵識]은
이 식이 전변하여 유사한 경계[塵]를 낳으니,
여섯 종류의 식[六種識]이 전변하여
유사한 경계가 성립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으며,
그 체(體)는 삼성(三性)5)에 통한다.
이 육식(六識)은 열 가지의 심법과 상응하며
열 가지 선악(善惡)과 아울러
대혹(大惑),
소혹(小惑)과 더불어
세 가지 수(受)6)를 갖춘다.
열 가지 심법이란
촉(觸) 등의 다섯 가지 변행(遍行)은 앞과 동일한데,
다만 본식이나 집식에서의 경우에 비해 아주 거치니,
뒤의 다섯 가지는
첫째는 욕(欲)이고,
둘째는 요(了)이며,
셋째는 염(念)이고,
넷째는 정(定)이며,
다섯째는 혜(慧)이다.
이 가운데 요(了)라는 것은
옛날에는 해탈의 법수(法數)라고 밝혔었다.
열 가지 선(善)이란
첫째는 신(信)이고,
둘째는 수(羞)이며,
셋째는 참(慚)이고,
넷째는 무탐(無貪)이며,
다섯째는 무진(無瞋)이고,
여섯째는 정진(精進)이며,
일곱째는 의(猗)이고,
여덟째는 무방일(無放逸)이며,
아홉째는 무핍뇌(無逼惱)이고,
열째는 사(捨)이다.
이 열 가지는 모든 세계에 두루하므로
심(心)과 무류(無流)의 심수(心數)를 ‘대지(大地)’라고 한다.
이는 자성이 선한 것이며,
이 열 가지를 뒤집으면 자성이 악이 된다.
대혹(大惑)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욕(欲)이고,
둘째는 진(瞋)이며,
셋째는 치(癡)이고,
넷째는 만(慢)이며,
다섯째는 다섯 가지 견해[五見]이고,
열째는 의(疑)이다.
소혹(小惑)에는 스물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한(忿恨)이고,
둘째는 결원(結怨)이며,
셋째는 부장(覆藏)이고,
넷째는 불사악(不捨惡)이며,
다섯째는 질투이고,
여섯째는 인석(悋惜)이며,
일곱째는 기광(欺誑)이고,
여덟째는 첨곡(諂曲)이며,
아홉째는 극취(極醉)이고,
열째는 핍뇌(逼惱)이며,
열한째는 무수(無羞)이고,
열두째는 무참(無慚)이며,
열셋째는 불의(不猗)이고,
열넷째는 도희(掉戱)이며,
열다섯째는 불신(不信)이고,
열여섯째는 해태(懈怠)이며,
열일곱째는 방일(放逸)이고,
열여덟째는 망념(忘念)이며,
열아홉째는 산란(散亂)이고,
스무째는 불료(不了)이며,
스물한째는 우회(憂悔)이고,
스물두째는 수면(睡眠)이며,
스물셋째는 각(覺)이고,
스물넷째는 관(觀)이다.
소혹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으니,
첫째는 작의변행(作意遍行)이고,
둘째는 불변행(不遍行)이다.
오식(五識)은
제육의식(第六意識)이나 본식(本識) 또는 집식(執識)에서
이 세 가지 뿌리로부터 인연을 따르는 것이니,
어떤 때는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차례대로 일어나기도 한다.
작의(作意)로 인(因)을 삼고
외진(外塵)으로 연(緣)을 삼는 까닭에 식(識)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에 먼저 작의로 색(色)과 성(聲) 두 가지 외진(外塵)을 취하고자 하면
후에 안식(眼識)과 이식(耳識)이 동시에 함께 일어나 두 가지 외진을 감득(感得)한다.
만약에 작의가 어떤 곳에 있는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으려 하면
나중에 동시에 세 가지 식이 함께 일어나 세 가지 외진을 감득한다.
그리고 작의가 일시에 다섯 가지 외진을 취하려고 하면
다섯 가지 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전후(前後) 차례대로 오로지 하나의 식만 일으켜 하나의 외진만을 감득하기도 한다.
이렇듯 모두 인연을 따르므로 똑같지는 않다.
이와 같이 전칠식(前七識)은
모두 아뢰야식 가운데서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뭇 영상[影像]이 거울 속에 모두 나타나는 것과 같고
또한 뭇 물결이 하나의 물로 모이는 것과 같다.
【문】이 의식(意識)은 어떤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답】무상정(無想定)이나 무상천(無想天)에 들었을 때 떠나며,
숙면에 들어 꿈을 꾸지 않을 때와 크게 취했을 때,
정신이 아득히 끊어졌을 때와 마음이 잠시 죽었을 때 떠나니,
이 여섯 처소에서는 의식이 떠나며
다른 처소에서는 항상 존재한다.
이 의식의 전변과 그 작용은 두 가지 의미를 떠나지 않으니,
첫째는 능분별(能分別)이고,
둘째는 소분별이다.
소분별이 존재하지 않는 한
능분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취하는[取] 식도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유식의 뜻이 성립한다.
유식의 뜻이 성립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 의미는 본래 경계도 떠나보내고
마음(心:능분별)도 떠나보낸다는 것인데,
지금 경계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유식(唯識)도 또한 소멸하였으니,
이것으로 곧 유식의 뜻이 성립된다.
이상의 내용이 곧 정품(淨品)이니,
번뇌와 경계가 모두 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유식의 뜻이 성립한다는 것은
일체의 종자식이 여차여차하게 짓고 전변(轉變)하면서 작용하여
자기에게든 다른 이에게든 서로 따르고 뒤쫓으면서
갖가지 분별과 소분별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식을 떠난 이외의 모든 사물은 성립되지 않으니
이를 부정품(不淨品)이라 하는데,
단지 이전의 경계만을 떠나보낸 것일 뿐
아직은 식이 없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용을 풀어 설명해 보면,
‘일체의 종자식’이란 아뢰야식이니,
모든 법의 종자와 그 밖의 나머지 전칠식(前七識)의 종자를 지녀 저장하며,
아울러 전칠식의 종자가 자기 종류의 한량없는 모든 법을 생겨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일체법의 종자식이라 이름한다.
‘여차여차하게’란 이러한 식들이 전변하면서 작용하여
한량없는 모든 법을 지을 수 있게 되는데,
전변하여 근(根)을 짓기도 하고,
전변하여 경계[塵]를 짓기도 했고,
전변하여 아(我)를 짓기도 하며,
전변하여 식(識)을 짓기도 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온갖 다양한 것들을 오로지 유식이 짓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짓고 전변하면서 작용하여’라고 한 것이다.
‘자기에게든 다른 이에게든 서로 따르고 뒤쫓으며’란
자신에게는 전변하여 오음(五陰)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색음(色陰)이 되거나
나아가 식음(識陰)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이에게는 전변하여
갖가지로 원수나 친한 사람 등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각기 자신들의 오음을 조망(照望)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他]’이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나와 남이 서로 전변작용하여
전후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서로 따르고 뒤쫓으면서’라고 한 것이다.
갖가지 지어진 바가 모두 다 식일뿐
그 이외 다른 경계는 없다.
‘갖가지 분별 등을 일으킨다’는 것은
낱낱의 식 가운데 모두 능(能)과 소(所)를 갖추었음을 말한다.
능분별이란 식이고
소분별이란 경계인데
능은 의타성(依他性)이고,
소는 분별성(分別性)인 까닭에
‘갖가지 분별 즉, 능분별과 소분별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식을 떠나서는 그 외에 별도의 경계가 없으므로
다만 ‘오직 식이 있을 뿐이다’라는 뜻이 성립하는 것이다.
아직 식을 떠나보내는 것을 밝히고 있지 않아
번뇌의 어지러움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품(不淨品)이라 이름한다.
【문】경계를 떠나보내고 식만 존재하므로 유식의 뜻이 성립하는 것인데,
경계와 식을 함께 보내버린다면 어떻게 식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답】유식을 세워 한결같이 경계는 떠나보내고 마음은 남도록 하는 것이니,
논쟁을 끝마치기 위해 경계는 보내버리되
심식은 공(空)하게 하는 것이 그것의 바른 의미이다.
그러므로 ‘경계와 식은 함께 소멸한다’는 뜻이 성립한다.
이 경계와 식이 함께 소멸한다는 것이 곧 실성(實性)이니,
실성은 곧 아마라식(阿摩羅識)이다.
또한 논쟁을 끝마치게 하는 것이
이 아마라식이다.
기(記)에 이르기를,
‘두 가지 숙업훈습(宿業熏習)과 두 가지 습기(習氣)가 집제(集諦)가 되므로
생사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두 가지 숙업훈습이란 곧 모든 업종자이다.
첫째는 숙업훈습이며,
둘째는 숙업훈습집(宿業熏習執)이다.
숙업훈습은 곧 소분별이니 분별성이고,
숙업훈습집은 곧 능분별이니 의타성(依他性)이다.
소(所)는 경계이고 능(能)은 식이다.
이 두 가지 업을 상사집제(相似集諦)라 하며,
이것들은 오음을 낳을 수 있다.
두 가지 습기란 모든 번뇌를 말하는데,
첫째는 상(相)습기이고,
둘째는 추중(麤重)습기이다.
상이란 번뇌의 체(體)이며 의타성이니,
이전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다.
추중이란 번뇌 경계이며 분별성이니,
경계가 거칠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번뇌를 진집제(眞集諦)라 한다.
이것들은 미래의 오음을 모이게 한다.
이상의 상사(相似)와 진(眞),
두 가지 집제(集諦)로 말미암아
만일 숙업이 다했으면
다시 별도의 과보를 받아서 능히 생사를 안립할 수 있다.
풀어 설명해 보면,
‘두 가지 숙업훈습’이란 낱낱의 종자가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으니,
소분별은 숙업훈습이고 능분별은 숙업훈습집이다.
소는 분별성이니,
종자를 만들 수 있는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이 법문을 숙업훈습이라 하며,
명칭은 있으나 체는 없다.
능은 의타성으로서 바로 업종자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숙업훈습집이라 하며,
체는 있으나 진실한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습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낱낱의 번뇌에는 모두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소분별은 진(塵:경계)이니 추중습기가 번뇌를 일으키는 법문을 말하며,
명칭은 있으나 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능분별은 바로 번뇌의 체이니 존재하되 진실한 것은 아니며,
이는 의타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밝히고 있는 분별과 의타는
삼무성(三無性) 가운데서는 명칭이 같지 않다.
삼무성 가운데서는 분별성을 상류(相類)가 존재하여
번뇌를 짓게 하는 법문(法問)이므로 번뇌라고 이름한다.
의타성은 바로 번뇌의 체이며
생사의 과보를 얻게 하기 때문에 추중이라 이름한다.
지금 여기서는 분별하는 성상류의 거칠게 나타나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추중이라 하고,
의타성은 앞의 상류를 집착하기 때문에 상(相)이라 한다.
각자 뜻이 있는 것이니,
만약에 이것들을 전환하여 각자 삼무성 중의 명칭으로 사용하여도 좋다.
기(記)에 이르기를,
‘이러이러하게 분별한다’ 하였으니,
만약에 이러이러한 유(類)를 분별한다면
이 유들은 분별성이라 이름한다.
이는 다만 명칭만 존재하는데,
이 명칭에 의해 드러나는 체는 진실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들에 의해 드러나는 체는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분별은 다른 것을 인(因)하여 일어나므로 의타성이라 한다.
이 앞뒤의 두 가지 성(性)이
일찍이 서로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은 진실로 실성(實性)이다.
만일 서로 떨어진 것이라면 유식의 뜻이 성립되지 않으니,
경계와 식이 서로 다름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직 식일 뿐 경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가 없기 때문에 식 역시 성립됨이 없으나
경계도 없고 식도 없기 때문에 유식의 뜻을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앞의 분별성과 뒤의 의타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만약에 결정적으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단정한다면
허물이 있게 되는데 어떤 허물인가?
만일 분별과 의타가 결정코 동일한 것이라면
분별성은 결정적으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므로
오법장(五法藏)7)에 속하지 않게 되고,
의타성도 역시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그러하다면 생사나 해탈,
선이나 악,
그리고 계율법(律戒法)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성과 의타성은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만일 결정코 다른 것이라면
분별성은 곧 의타성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된다.
분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무릇 의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또 만일 분별성이 결정코 의타성과 다르다면
분별성의 체는 응당 존재하게 되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것도 아니니,
다르다고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이니,
반드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무상(無常)과 유위법(有爲法)에 대해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앞의 것도 존재하지 않고
뒤의 것도 존재하지 않음이 무상의 뜻이며,
오음이 유위법이다.
만일 무상과 유위법이 결정적으로 동일하다고 한다면
무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아울러 일체의 모든 법이 다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반드시 없지도 않기 때문에
결정코 동일하다고 할 수도 없다.
만일 반드시 다르다고 한다면
무상을 관할 때 유위법에 통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통하기 때문에 결정코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역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법이 다 그러하다.
예를 들자면 색(色) 등과 항아리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만일 색이 항아리와 결정코 동일하다면
향(香) 등 다른 요소들은 항아리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항아리가 하나의 진실한 체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색이 결정코 항아리와 다르다면
색은 항아리와 관계가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두 가지 말도 역시 그러하여
만일 분별성을 알지 못하면 의타성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런데 일체의 모든 법에는
다만 삼성(三性:분별성ㆍ의타성ㆍ진실성)만이 존재하니,
모든 법을 섭렵하여 귀납시킨 것이다.
여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모든 법에는 자성(自性)이 없음을 설하였는데,
이 또한 세 가지가 있다.
삼성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속제(俗諦)이고,
뒤의 한 가지는 진제(眞諦)이다.
진ㆍ속 이제는 일체법을 모두 섭수한다.
삼무성(三無性)은 앞의 삼성을 떠나지 않는다.
분별성은 무상성(無相性)이라 하니,
그 체의 모양[體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타성은 무생성(無生性)이라 하니,
그 체와 인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체는 진상(塵相)과 유사하다.
진(塵)은 곧 분별성인데,
분별이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
그 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인(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래 분별성을 경계(즉, 因)로 삼아
식(識)의 과(果)를 발생시킬 수 있으나,
경계가 이니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과를 생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종자가 싹을 낳는데,
종자가 없다면 싹은 어디로부터 비롯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생기지 않는다.
진실성은 무성성(無性性)ㆍ무유성(無有性)ㆍ무무성(無無性)이라 한다.
인(人)과 법(法)에 의거해서는 무유성이라 하고
두 가지가 공하다는 측면에서는 무무성이라 하니,
자성이 있는 것[有性]도 아니고
자성이 없는 것[無性]도 아니기 때문에
거듭 무성성이라 칭한 것이다.
이 삼무성은 일체법의 진실로써
존재의 세계를 떠나기 때문에 진상(眞常)이라 한다.
이 삼무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유식의 뜻을 밝힌 것이다.
■ 만일 사람이 지혜를 닦아 이 유식의 뜻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두 가지 집수면(執隨眠)이 낳는 뭇 번뇌들을 없앨 수 없다.
왜냐하면 근본이 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일승(一乘)을 건립하여 보살도를 배우게 한다.
만약에 ‘오로지 식만이 존재하여 바로 눈앞에 나타나 일어난다’고 집착하는 사람은
이 집착을 떠나지 못할 경우에는 유식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이 경계를 연(緣)하지 않아
두 가지(즉, 경계와 식)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때에는 수행자가 유식에 들어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관행(觀行)을 닦아
산란한 식과 대상에 대한 집착이 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 무소득비심비경(無所得非心非境)이라 한다.
이 지혜를 출세간의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하며
경계와 인식지혜가 차별이 없으므로 여여지(如如智)라 하고,
또한 전의(轉依)8)라 하니
생사의 의지처[生死依]를 버리고
단지 여범한 도리[如理]만을 의지하기 때문이고,
추중(麤重)과 집(執) 두 가지가 함께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중은 분별성을 말하고
집은 의타성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가 함께 다하여 소멸된다.
이를 무류계(無流界)라 하기도 하고
불가사유(不可思惟)라고 하기도 하며,
진실선(眞實善)이라 하기도 하고
상주과(常住果)라 하기도 하며,
출세락(出世樂)이라 하기도 하고
해탈신(解脫身)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삼신(三身) 가운데 법신(法身)이다.
풀어 설명해 보면,
‘두 가지 집수면(執隨眠)이 낳는 과(果)에 대해서 멸하여 없애지 못한다’는 것은
견(見)ㆍ사(思) 두 가지 집수면번뇌가 종자를 만들어 내 한량없는 마음을 생하거나,
또는 모두 본식(本識)을 그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근본이 아직 멸하지 않았으니,
지말도 아직 멸하지 않는 것이다.
『승만경』에 따르면 ‘무명주지(無明住地)가 끊어지지 않아 궁극이 아니며
무변사주지(無邊四住地)도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궁극이 아니다’라고 설하였다.
‘만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이 경계를 반연[緣]하지 않아
두 가지가 드러나 나타나지 않으므로’라고 하는 것에서
이 경계는 곧 유식의 경계이니
유식은 산란하여 경계가 없기 때문에 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능연(能緣)인 유식의 마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가지가 드러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단지 두 가지,
즉 ‘식’과 ‘바로 앞에 나타난 경계’를 말하는 것이니,
앞의 경계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식전품(識轉品)’이라 한다.
이상으로 전식론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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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으로는 인연생(因緣生)인 일체의 유위법을 가르키니,
즉 우주간의 천차만별한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는 능변식(能變識)이 변현(變現)시킨 번뇌와 업의 일을 뜻한다.
2 이 본식의 성질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에 속한다.
무부란 염오(染汚)가 없다는 의미이며,
번뇌가 상응하거나 막아 덮지 않으므로 무부라 한다.
무기는 그 원인이 선인지 악인지 단정할 수 없으며,
그것의 결과가 낙이 될지 고가 될지 예견할 수 없음을 말한다.
3 이 집식은 유부무기성에 속한다.
이 집식 그 자체는 비록 선,
악업을 지을 수 없어서 악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我)를 집착하므로 이와 상응하는 번뇌들과 상응하여 악업을 짓기 때문에 유부라 하며,
이 식은 비록 염오가 있으나 성질상에 한정된 것이며,
행동상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자세히 말하자면 악념을 일으키지 않아 악행을 행하지 않았을 시점에서는 그 내부에서 염(念)을 일으키지 않는 한 밖으로 거동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당연히 선악이 기록될 수 없기 때문에 무기에 속한다.
4 십육행은 십육행상(十六行相)ㆍ십육행관(十六行觀)ㆍ십육제(十六諦)라 이름하기도 한다.
사제(四諦)를 관할 때는 각기 네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그때 생기는 행상은 모두 열여섯 가지이다.
5 선성(善性)ㆍ악성(惡性)ㆍ무기성(無記性)을 말한다.
6 육식이 깨끗한 생각을 일으키면 선성(善性)에 속하여 장래에 반드시 인천(人天)의 복된 과보를 감득하여 낙수(樂受)를 얻는다.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성(惡性)에 속하여 삼악도의 하열한 과보를 감득하고 고수(苦受)를 얻는다.
만약에 무기(無記)의 마음을 일으키면 장래의 과보는 기타 인연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삼수(三受) 가운데서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감득한다.
이상의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삼수라 한다.
7 오법장이란 우주만유의 세계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으로 과거장ㆍ현재장ㆍ미래장ㆍ무위장ㆍ불가설장을 말한다.
8 전의(轉依)에서 전(轉)은 전사(轉捨)하여 전득(轉得)한다는 뜻이고,
의(依)는 염정미오(染淨迷悟) 등의 모든 법을 성립하게 하는 소의(所依)를 가리킨다.
유식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의한 보살도를 닦아 번뇌장과 소지장(所知障)을 끊어 열반과 보리의 과를 증득하는 것을 말하며,
이 두 가지를 칭하여 두 가지 전의과(轉依果)라고 한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56/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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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사리(文殊師利)
미타(彌陀)
바가범(薄伽梵)
바사닉(波斯匿)
반두(飯頭)
반야시(般若時)
발설지옥(拔舌地獄)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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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4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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