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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9-05_삼무성론-K0622-002 본문
K0622
T1617
하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삼무성론』 ♣0622-002♧
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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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무성론(三無性論) 상권
진제(眞諦) 한역
K0622V17P0684b01L; 三無性論卷上 <出無相論>
≪논≫
입공품[立空品-공을 세우는 품] 가운데
인공[人空-사람이 공함]은 이미 성립되었으나,
법공[法空-법의 공함]을 아직 세우지 못했는지라
법공[法空-법의 공함]을 나타내기 위해
제법무자성품[諸法無自性品-모든 법의 제 성품 없음의 품]을 설한다.
≪해석≫
앞서 공품[立空品~공의 품]을 설하고
뒤에 무자성품[無自性品-제 성품 없는 품]을 설함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답)
앞서 공품[空品-공의 품]을 설한 것은
사람의 <공>함을 나타내기 위해
다만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할 뿐이니,
이는 별개의 도이기 때문이다.
뒤에
무자성품[無自性品-제 성품 없는 품]을 설하는 것은
법공[法空-법의 공함]을 나타내기 위해
일체의 지장(智障- 소지장)과
번뇌장(煩惱障)을 통틀어 제거하는 것이니,
이는 공통된 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별개의 용(用)이 있으니,
이는 세간의 3 가지 허망한 논(論)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노가야테가(露伽耶鞮迦)와 승가(僧佉)들처럼
말로 다툼을 뛰어나다고 하는 논이 그러한 것이다.
둘째 다문[多聞-들음이 많은 것]으로서 수승한 논을 삼는
4위타(四韋陀)와 이테하바(伊鞮訶婆)의 논이 그러한 것이다.
셋째 정행[正行-바른 행]으로써 수승한 논을 삼는
2승(二乘-성문승, 연각승)들의 교법이 그러한 것이다.
이제 두 <공>을 설하여
이 3 가지 논을 제거함에 있어서
먼저 인공[人空-사람이 공함]을 설한 것은
앞서 외도들의 2 가지 논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그 다음 법공[法空-법의 공함]을 설하는 것은
뒤의 2승(二乘)들의 치우친 고집과
내지
외도들 삿된 고집의 논을 제거하기 위해
진실한 정행[正行-바른 행]을 나타내서
이 행으로 인하여
구경(究竟)의 견줄 데 없는 이치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인공[人空-사람이 공함]을 설한 것은
삿된 법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법공[法空-법의 공함]을 설하는 것은
정법[正法-바른 법]을 성립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을 널리 밝혀 용(用)을 논한 것은
저 18 부(部)와 같음이다.
이 용(用)을 나타내기 위해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니,
바로 제 1 의 용(用)을 밝히는 부분이다.
≪논≫
[외도의 물음]
어떤 법에서
이 무성[無性-성품 없음]을 세우려면,
응당 먼저 이 법을 안립[安立-시설]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무상[無相-형상 없음]의 이치가
상응하는 것이 있으리니,
진실하고 허망한 두 경계를
곧 볼 수 있겠습니다.
(답) 일체 법은
세 가지 성품에
벗어나지 않으니,
K0622V17P0684c02L; 二依他性三眞實性分別性者謂名
첫째는 분별성[分別性-분별하는 성품]이고,
둘째는 의타성[依他性-남을 의지하는 성품]이고,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진실한 성품]이다.
분별성[分別性]이란,
이른바
명언[名言-이름과 말]으로써
제법[諸法-모든 법]의 자성[自性-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니,
곧 진[塵-대경]이나 식[識-의식]과 같은 부분이다.
의타성[依他性]이란,
이른바
인(因)을 의지하고
연(緣)을 의지하며
법의 자성[自性-]을 나타내는 것이니,
곧 난식[亂識-산란한 의식]의 부분이
인 안의 감관[內根]과
연 안의 진[塵-대경]을 의지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실성[眞實性]이란,
이른바 법의 여여[如如-바로 그대로의 진리]함이다.
법이란,
곧 분별성[分別性]과
의타성[依他性]의 두 가지 성품이며,
여여[如如]함이란,
곧 이 두 가지 성품의 무소유[無所有-있는 바가 없음]이다.
분별성[分別性]은
그 체상(體相)이 없기 때문에
무소유[無所有-있는 바가 없음]이고
의타성[依他性]은
그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無生]
무소유[無所有-있는 바가 없음]이다.
이 두 성품의 무소유[無所有-있는 바가 없음]는
다 변이[變異-변하거나 달라짐]가 없기 때문에
여여[如如-그대로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여여[如如-그대로의 진리]를 일컬어
진실성[眞實性]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제 2의 상응되는 부분이니
그것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다음,
이 3성[三性-3 가지 성품]을 들어서
3무성[三無性-3 가지 성품 없음]을 설하겠으니,
3무성[三無性-3 가지 성품 없음]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무성[無性-성품 없음]의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분별성[分別性]을 말하자면,
그 상무성[相無性-모양에 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무성[無性-성품 없음]이라고 이름붙여 설하는 것이니,
왜냐 하면
나타나는 바 이 상[相]에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분별성[分別性]이란,
무상[無相-모양이 없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의타성[依他性]을 말하자면,
그 생무성[生無性-생겨남에 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무성[無性-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다.
왜냐 하면,
이 생[生-생겨나는 것]은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룩되고
자체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이 아니므로,
무성[無性-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다.
인연의 힘[緣力]은 곧 분별성[分別性]이다.
분별성[分別性]은 그 자체가 이미 없는 것이어서
인연의 힘[緣力]이 없기 때문에
생[生-생겨남]이 성립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의타성[依他性]이란,
무생[無生-생겨나는 것이 없음]으로써
성품을 삼음이다
진실성[眞實性]을 말하자면,
진실로 무성[無性-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무성[無性-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니,
왜냐 하면
이 이치가 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일체 제법이 다 이 이치로 말미암아
똑같이 무성[無性- 성품이 없음]이라,
이 때문에
진실성[眞實性]이란,
무성[無性- 성품이 없음]으로써
성품을 삼는 것이다.
[참고]구판본
https://buddhism007.tistory.com/3548
>>>
○ 기본적 용어 풀이
『삼무성론』은 결국 해심밀경[심밀해탈경]에서 제시하는
3성(또는 3상)과 3무성의 내용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
여기서 3상 내지 3성이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3무성이란 .
상무자성(相無自性), 생무자성(生無自性),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이다.
여기서는 일단 『삼무성론』에 대해 사전 설명부터 간단히 먼저 살핀다.
다만 불교 사전 풀이는 별도 페이지에 정리해 넣기로 한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이후 부분을 조금씩 또 살펴 나가기로 한다.
불교사전 풀이 =>
ꊱ삼무성론
‡삼무성론
ꊱ삼무성
‡삼무성
>>> [ 용어 풀이 참고 ]
* 노가야테가(露伽耶鞮迦)
로가야타(路迦耶陀) 【범】Lokāyata 또는 로가야(路伽耶)ㆍ로가야타(路伽耶陀). 번역하여 순세(順世). 외도 이름
* 승거(僧佉)
상키야의 음역. 수론(數論)
위다(圍陀 veda) 베다의 음역. 위타(韋陀)라고도 함. 인도의 대표적인 고전.
이스바라 【범】Īśvara 자재천(自在天)이라 번역. 대자재천이라 존칭. 보통은 인도교의 śira 신(神)을 말함. 만유를 창조한 신. 또 단순히 신이란 의미로도 사용
* 18 부 : 인도에서 소승(小乘)의 부파인 18부류를 가리킴
첫째는 분별성[分別性-분별하는 성품]이고,
둘째는 의타성[依他性-남을 의지하는 성품]이고,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진실한 성품]이다.
* 이는 해심밀경에서의 변계소집성- 의타기성-원성실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K0622V17P0684c15L;
約依他性者由生無性
說名無性
何以故此生由緣力成不由自成
緣力卽是分別性
分別性體旣無
以無緣力故
生不得立是故
依他性以無生爲性
의타성[依他性]을 말하자면,
그 생무성[生無性-생겨남에 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무성[無性-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다.
왜냐 하면,
이 생[生-생겨나는 것]은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룩되고
자체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이 아니므로,
무성[無性-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다.
인연의 힘[緣力]은 곧 분별성[分別性]이다.
분별성[分別性]은 그 자체가 이미 없는 것이어서
인연의 힘[緣力]이 없기 때문에
생[生-생겨남]이 성립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의타성[依他性]이란,
무생[無生-생겨나는 것이 없음]으로써
성품을 삼음이다
K0622V17P0684c19L;
約眞實性者由眞實無性故說無性
何以故此理是眞實故一切諸法由此理故同一無性
是故眞實性以無性爲性
진실성[眞實性]을 말하자면,
진실로 무성[無性-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무성[無性-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니,
왜냐 하면
이 이치가 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일체 제법이 다 이 이치로 말미암아
똑같이 무성[無性- 성품이 없음]이라,
>>>
○ [pt op tr] ▼ mus0fl--Michel Delpech - Rimbaud Chanterait.lrc
『삼무성론』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일반인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그래서 논서에서 표현하는 내용이 자신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지도를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지도에 사용된 각종 기호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이해해야 지도를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도로나 산, 건물의 어떤 부분을 지도에서는 어떤
기호로 표시하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경전이나 논서에 사용된 표현도 이와 사정이 같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감각을 하고 분별을 한다.
그런데 경전과 논서도 이런 내용을 일정한 표현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그 각 표현이 이들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지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런 특수기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그런데도 지도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다.
산과 강을 직접 가져와 보여주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매핑(mapping) 이란 표현이 있다.
이는 지도를 나타내는 map 에서 유래한 말이다.
지도의 ^ 표시는 => 산을 나타낸다고 하자.
이처럼 실물의 어떤 내용을 일정한 기호로 그려서 표현하는 것을 mapping 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매핑은 이런 내용에서 다시 x 에 f(x) 함수값을 대응시키는 관계도 나타낸다.
또 평면상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씌어 나타내는 기법도 나타낸다.
그래서 다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여하튼 일정한 내용이 나타내는 내용을 잘 대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경전과 논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특히 마음은 눈에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본 바탕 실재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마음이나 실상에 대한 논의를 하려면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다.
불교에서는 mapping 이란 용어 보다는
시설, 안립, 가명 또는 발기, 건립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논의되는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일단 가리켜서 설명하거나 논의해야 한다.
그런 사정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언설을 통해 무언가를 표시하고 나타내게 된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일체 경전의 설법이 다 이런 의미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어떤 이가 사과를 하나 먹고
그 사과에 대해 글로 한없이 기술한다고 하자.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 글이 사과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대하는 사과의 맛과 언어표현만 보아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불교에서 논의하는 내용은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영역을 넘는 주제가 많다.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게 하는 마음도 살핀다.
또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도 살핀다.
그리고 이들에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는가 문제도 살핀다.
그래서 한층 문제가 심하다.
예를 들어 마음은 눈에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마음과 관련된 복잡한 내용을 하나하나 언어표현으로 나타낸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이 어떤 내용인가 아닌가가 문제되면 이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삼매는 마음으로 닦는 수행이다.
그 삼매에 종류가 많다.
그래서 여러 명칭을 붙여 나타낸다.
그런데 예를 들어 금강삼매와 여금강삼매가 어떻게 다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또 어떤 상태가 금강삼매인가 여금강삼매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런데 언어표현으로 이를 아무리 기술해도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앞 상황과 마찬가지다.
어떤 차나 과일을 맛보고 언어로 한없이 기술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 언어표현이 곧 그런 차나 과일이 되지 않는다.
사정은 그렇지만, 또 그런 언어표현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이에게 그런 내용을 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떤 사과를 맛보았다고 하자.
그래서 이 사과는 맛이 시큼하면서 달콤해서 다른 사과맛과 좀 다르다고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표현만으로 그 내용이 이 사과맛인지 저 사과맛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불교 관련 주제에서의 문제는 사과의 맛을 표현할 경우보다 어려움이 한층 더한다.
그렇지만 여하튼 표현이 원래 나타내려한 의미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우선 다음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가 눈에 대해 안과의사의 설명을 듣는다고 하자.
안과의사가 전문 용어로 각막도 설명하고 망막도 설명한다.
신경세포나 다양한 안과질환도 소개한다.
그리고 눈으로 물체를 보는 과정도 설명한다.
또 근시나 원시 난시의 문제도 설명한다.
문제는 이런 설명과정에 사용된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사전도 참조하고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설명을 하지 못해도
대부분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은 잘 한다.
또 대부분 눈도 갖고 있다.
또 질환도 엇비슷하게 갖는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일상적으로 이들 현실 내용을 대한다.
다만, 각 표현이 나타내는 바외 이들 내용을 잘 상응시켜 이해하면 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망막이란 표현을 잘 몰랐을 수 있다.
그리고 망막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신체부분을 대부분 갖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 표현의 의미를 모를 수 있다.
또는 그는 이를 다른 표현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안과의사가 사용하는 표현과
자신이 이해하는 내용을 서로 상응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어 시설, 가명을 통해 경전에서 어떤 내용을 제시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 생활을 잘 한다.
그런 가운데 일상생활에서도 각 부분에 대해 다양한 표현을 통해 나타낸다.
경전내용도 결국 이와 관련된다.
그런 가운데 경전을 대할 때는
경전내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불교사전 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중에는 일상에서는 다른 표현으로 나타낸 내용도 있다.
또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거의 문제삼지 않는 내용도 많다.
어떤 부분은 일상에서 아예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일상적인 표현 가운데 이를 가리키는 표현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들 각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이 무언가를 잘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현을 반복해 대한다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
사과에 대한 기술을 몇백 페이지를 쌓아 놓아도 그것이 사과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과에 대한 설명을 몇백 페이지를 읽어도 결국 사과 맛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지도를 만일 본다고 하자.
이 경우 지도를 한쪽 손에 들고 거리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지도표시와 거리 상황을 잘 대응시켜 이해해야 한다.
경전 이해도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정려 수행을 하면
처음 유심유사의 상태에서 무심유사의 상태를 거쳐 무심무사의 상태가 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무엇이 심(尋)이고 무엇이 사(伺)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언어로 기술해도 그것이 곧 심이나 사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런 표현으로 무언가를 가리켜 나타내게 된다.
이 경우 그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우선 불교사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정려 수행을 직접 행하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표현이 가리킨 내용을 잘 상응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과 관련된 내용은 이런 문제가 심하다.
그래서 더 어려움이 많다.
>>>
『삼무성론』을 살핀다.
이 논서에 사용된 표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논서를 살피려면 먼저 표현이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 수 있다.
그래도 논서를 살피는 입장에서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번역표현을 일부 한자로 바꾸어 고치며 살핀다.
약간 정리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
오늘 하루 안에 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살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듯 하다.
나중에 수정이 마쳐지면 다시 수정해 올리기로 한다.
논서는 복잡하다.
그러나 있고 없음의 논의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들 내용을 살폈다.
그래서 논서를 글자를 따라가며 살필 의미는 적다.
◧◧◧ para-end-return ◧◧◧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Kenza Farah - Quelque part.lrc Lyrics
일단 기본 번역본에 한문 색인을 붙여서 올려 놓았다.
sfed--삼무성론_K0622_T1617_x.txt
https://buddhism007.tistory.com/3548
번역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용어를 한글로 풀어 놓았기에 파악이 어렵다.
그래서 한글로 풀어 놓은 용어를 한자어로 바꾸어 놓고 살피기로 한다.
불교용어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번역과정에서 이런 어려운 용어를 되도록 쉽게 한글로 풀어 번역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오히려 내용 파악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다.
위 논서에 다음 부분이 나온다.
...
'분별함'과 '남을 의지하는 두 가지 성품'에
공통되는 것이다.
보살이 '남을 의지하는 종류'를 관하는 것이
다만 난식(亂識)일 뿐이어서
'분별하는 성품'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일체 언설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능이 있음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기 때문에 저것이 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저것이 있고 저것이 나는,
그 저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있고 나는 것이지,
스스로를 말미암아 있고 나거나
그밖의 '남으로 말미암아' 있고 '나는 것'이 아닌지라, ◂
...
이렇게 제시한다.
물론 이들 각 부분 표현이 나타낸 의미를 맥락을 통해 파악할 수도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살핀 유무 논의와 관련된다.
그런데 번역 표현이 혼동을 많이 일으킨다.
그래서 곧바로 올려 놓으면 다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살펴본다.
한글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그리고 쓰기도 쉽다.
그런데 뜻을 명확하게 묶어서 표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불교 전문용어로 의타기성 이런 말도 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풀어서 한글로 표현하면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의타기성을 '다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성품'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자.
그러면 의타기성이란 말이 나오는 부분을 매번 이처럼 길게 풀어 번역해야 한다.
한편 다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성품을
만일 '남'에 의존하는 성품으로 번역한다고 하자.
그러면 한글의 특성상 또 혼란이 일어난다.
여기서 '남'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른 것' 또는 '다른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는 무엇이 '생겨남'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래서 혼동이 생긴다.
불교경전 번역시 '생겨나다'라는 표현을 주로 '나다' '남' 이렇게 번역한다.
그런데 때로는 다른 것 이런 의미도 가리킨다.
그래서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면 결국 한문 원본을 보고 의미를 잡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나와 남이 나고 죽는 현상이 문제다.
여기에 '남'이 문제된다.
그런데 이 '남'이 남(타인)을 의미하는가 남(생겨남)을 의미하는가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한글로는 잘 구분이 안 된다.
그래서 한자어를 병기해 살피는 것이 낫다.
그런데 이는 한 사례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한글 표현이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가 다음처럼 말한다고 하자.
"밤에 그냥 배를 두드리며 밤과 배를 먹으면 되지
꼭 밤에 배를 두 배 요금을 주고 타야 하는가."
이렇게 말하면 밤과 배라는 단어가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혼동은 맥락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는 각 표현의 의미파악 과정에서 혼동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시시비비 판단과정에서 예민한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는 각 단어의 의미를 무엇으로 해석하는가에 따라
원고 피고의 상황이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
법정에서 피고와 원고가 치열하게 시시비비를 문제삼고 따진다.
이들의 각 주장이나 판단을 일일히 한글로 다 풀어 표현해 진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다시 시비가 일어나게끔 된다.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가 각기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 용어는 그나마 정도가 덜하다.
배가 문제라고 한다.
이 경우 승선과정과 요금이 문제인지
과일 먹고 배탈난 문제인지 혼동이 발생한다.
한편 한자어로 된 낱말을 오로지 순한글로 풀어 표현하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혼동이 발생한다'를 순한글로 표현해보자.
상당히 곤란하다.
한글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모든 용어를 순 한글만으로 풀어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약간 편협한 입장이다.
그렇게 언어문제에 임하면 곤란하다.
그럴 이유가 없다. .
무엇을 사랑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사랑하고 애정을 갖고 사용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만 사랑하고 그것만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와 다른 것을 미워하고 배척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외 다른 것도 널리 그와 같이 사랑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한국어를 사랑해도 오직 모든 것을
다 한국어로만 표기해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또 순수한 한글과 한글 아닌 표현의 경계도 모호하다.
수행자는 우주에서 각 생명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개미가 사용하는 말까지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다 함께 섞어 사용할 필요도 있다.
그 취지는 다른 생명을 잘 이해하고 제도하기 위해서다.
불교 한자용어를 순 한글로 풀어 표현하면 오히려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불교용어를 순한글로 풀어 놓은 표현은 사전을 살펴도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유위법 [생주멸 변화하는 현상]을 '함이 있는 법' 이런 식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불교사전에도 표제어로 나오지 않는다.
한편 이런 표현은 일상생활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오직 경전 번역과정에서만 한자어 하나하나를 한글로 풀어 새로 만든 번역 표현이다.
그런데 위 번역표현으로 해당한자어가 나타내는 의미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한글 자체를 읽으면서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리고 논의과정에서도 이런 긴 표현으로 살펴나가면 논의가 곤란하다.
본인이 불교 관련 공부를 나름대로 오래했다.
그런 본인도 그렇게 느낀다.
불교를 처음 대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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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시시비비를 따지는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래서 어떤 법정에 가서 서로 첨예하게 갑론을박한다.
이것을 옆에서 일일이 살펴본다고 하자.
이 경우 대단히 인내심이 강해야 한다.
불교 대장경 가운데 논서는 주로 그런 성격을 갖는다.
어떤 논서 하나만 놓고 보면 그 자체로 체계가 정연한 것 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논서는 부처님의 경이 아님도 의미한다.
통상 '경'이란 표현은 부처님의 말씀을 담았다는 표식이 된다.
그래서 권위가 높고 옳은 내용임을 나타낸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또 아니다.
그런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서 경이라고 붙여진 경우도 있다.
제자들 입장에서 스승의 견해가 너무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스승의 견해를 모아 경이라고 표현해 편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하튼 경은 그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서는 그런 상태는 아니다.
경전에 대한 논사의 견해를 살핀다면
경전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논서의 본 취지는 경전을 풀이하는 것이다.
논서가 어느 정도 경전 이해에 도움을 준다.
다만 경전 이해에 논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또 아니다.
때로는 논서가 경전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단 경전을 다 읽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논서는 자신입장과 함께 다른 입장도 소개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한편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논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논서가 취한 입장을 다른 입장에서는 잘못된 해석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처음 어떤 논서를 대하면 그것이 곧 불교의 전체 입장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면 나중에 혼란을 겪을 우려도 있다.
그래서 하나의 논서가 있으면
그 논서 입장에 반대하는 다른 입장도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유식론』이란 논서가 있다.
이는 10 대 논사의 주장이 담겨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10 명의 논사가 합의를 해서 『성유식론』을 저술한 것은 아니다.
현장 스님이 처음 이분들의 논서를 하나하나 다 번역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후배들이 고생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가운데 호법논사의 논서를 중심으로 이들 논서를 다 합쳐서 『성유식론』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살피는 『삼무성론』도 이와 관련이 된다.
그래서 살피기 복잡하다.
10 명의 논사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갑론을박을 벌인다.
그런데 이들 내용을 한 곳에 몰아 넣었다.
이를 법정에서의 다툼으로 놓고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법정에서 안혜의 주장을 가지고 따진다고 하자.
이 때 갑자기 호법 논사가 뛰어 나온다.
그래서 호법논사를 따진다.
그러면 갑자기 난타 논사가 또 뛰어 나온다.
이런 식이다.
한편 이들 주장은 마음과 관련된 내용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따라서 어떤 용어가 마음 현상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게 된다.
그런 가운데 법정에서 심리를 진행하기가 곤혹스럽다.
이것을 어떻하던 정리해야 한다.
이런 경우 일단 각 입장을 놓고 하나하나 시시비비를 잘 가려야 한다.
그래서 여러 주장의 우열을 잘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가운데 살피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
그러기 위해서도 되도록 경을 먼저 살피는 것이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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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 mus0fl--Les Enfoires - Les Enfoirés - L'Amitié.lrc
3 상과 3 무성의 내용은 복잡해 보인다.
그런데 최근까지 유무문제, 즉, 있고 없음에 대해 살폈다.
이들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다만 표현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는 실답지는 않지만, 그러한 내용이 있음을 나타낸다.
참고로 『금강삼매경』을 살필 때 이를 그림으로 살폈다.
그 그림을 놓고 살피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img2-8] 8pfl--image/8식-8.jpg
세상 일체의 것을 놓고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필 수 있다.
이 때 이들 존재는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영역의 내용을 3 성 3 무성의 관계로 살피게 된다.
이들 각 영역을 살펴보자.
구별을 위해 각 영역에 특수기호(#, !, @)를 붙여 구분해보았다.
이는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이나 귀로 듣는 소리 등과 같다.
처음 그 내용을 얻을 때부터 주관과 관계해 얻는다.
따라서 의타기상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주관과 관계없이도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을 또 생각해야 한다.
이를 실재라고 표현하자.
그런데 이 실재는 현실의 본 바탕이 된다는 의미에서 원성실상이라고 표현한다.
실재는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다.
그러나 그 안에 영원분별한 본체로서 진짜의 내용[실체]는 있지 않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 공'을 제시한다. => 승의무자성
[원성실상 -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 공 ]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을 살피면 다음과 같이 제시하게 된다.
감각현실은 실재와 마찬가지로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
한 주체는 감각기관을 의존해 감각현실을 얻는다.
이들 감각현실[그림에서 12,3,4,5]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주관이 관계해 얻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들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을 다시 생무자성이란 용어로 표현한다.
[의타기상 - 생무자성 ]
그리고 이런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즉,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각 부분을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며 수많은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이를 변계소집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들 관념은 그 관념이 가리키는 감각현실과 같은 모습[자상]이 없다.
한마디로 공허하고 부실한 내용이다. => 상무자성
[변계소집상 - 상무자성 ]
각 영역에 있는 내용은 이처럼 제각각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이들 각 영역에서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각 영역의 내용을 접착시켜 이해할 경우 각 내용에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그처럼 각기 이름을 붙여 구분해 제시하게 된다.
한편 공한 진여 실재로서 원성실상은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의타기상, 변계소집상등의 표현은 그런 것들이 그처럼 각 영역에 그처럼 얻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원성실상, 의타기상, 변계소집상은 있음['유']의 측면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은 하나같이 실답다고 볼 만한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즉 본 바탕인 실재 영역도 역시 진짜라고 할 실체는 없다. [무아,무자성, 승의무자성]
또 감각현실과 분별내용은 실재의 지위의 내용도 아니다. [생무자성]
한편 분별 내용은 그 안에 감각현실도 들어 있지 않다. [상무자성]
이는 모두 그 각 내용에 '실답다고 볼 요소'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 없음[무]의 측면을 나타낸다.
본 바탕의 실재는 그렇게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 그러나 진짜의 내용은 없다. [무아, 무자성 ]
감각현실은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다. => 그러나 그것은 본 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 생무자성]
관념분별은 그렇게 세밀하게 이리저리 헤아리고 분별한다. => 그러나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그 안에 없다. [상무자성]
이런 의미다.
일체 현실은 이런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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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3 상의 내용과 관련해 망집을 일으키기 쉽다.
현실에서 변계소집상의 형태로 온갖 분별을 일으킨다.
자신, 영희, 철수, 꽃, 바위....등등이다.
이런 경우 어떤 이에게 꽃이나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부분은 의타기상이다.
그래서 이처럼 망집을 일으킨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상을 취하게 된다.
현실 상황에서 각 주체가 분별을 일으킨다고하자.
그러면 그런 분별을 일으킨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거기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본래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분별하는 내용이 다른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면, 그는 그 내용들을 대단히 집착하게 된다.
그것이 그처럼 실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일정한 업을 도저히 할 도리 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업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는 결과에 처한다. [ 혹 - 업 - 고의 관계]
이 생사고통의 제거가 생사현실에서 문제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제거하려면 그 원인단계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쉽고 낫다.
따라서 고통을 받게 하는 근본원인인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망집만 놓고 보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에 묶이므로 이를 미리 제거해야 한다.
○ 망집을 일으키는 사정 - 비닐마술의 비유
망집을 일으키는 과정을 비유로 이해해보자.
여기에는 '비닐판 마술'에서 설명한 내용을 적용할 수 있다.
비닐판 마술은 다음을 의미한다.
한 비닐에 작은 세모를 그린다.
또 다른 한 비닐에 커다란 원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이것을 겹쳐 놓는다.
그러면 안이 세모인 둥근 도너츠 모양의 형체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도너츠 모양은 어느 비닐에도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본래 없다고 할 내용이다.
이 도너츠는 각 비닐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없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모습이 그렇게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현실을 대하는 상황이 이와 같다.
한 주체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통해 세상을 대한다.
이는 앞과 같은 비닐판을 두 개 겹쳐 놓고 대하는 상황과 같다.
비닐을 겹칠 때 도너츠 모양이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도너츠모습이 각 비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잘못 이해한다.
그러면 각 비닐에 그런 도너츠가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망상분별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에 집착을 갖고 대한다.
『해심밀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투명구슬에 노란 빛이 비추일 때 이를 황금으로 잘못 여기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것이 망집현상이다.
그리고 난 후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삶의 문제현상이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러면 그 문제현상의 본 정체를 위처럼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그 망집현상을 근본적으로 제거히야 한다.
이 점을 경전과 논서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유처럼 일반 상황에서 대부분 평소 그런 망집에 바탕해 생활한다.
그리고 그 본 정체와 사정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관하지 못한다.
그리고 또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로 인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현실의 감각현실과 관념에 관련한 망상분별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생각을 한다.
감각현실은 본래 전체 내용(예:풍경)을 하나로 함께 얻는다.
그처럼 감각현실을 얻고 그 바탕에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분별영역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두 내용을 동시에 얻는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망집을 쉽게 일으키게 된다.
그처럼 분별을 일으키면 그는 이에 바탕해 감각현실을 대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분별에 의존해 감각현실에서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가면서 헤아린다.
그런 가운데 각 부분을 일종의 선따기 또는 윤곽따기처럼 묶어 나눈다.
그래서 그 각 부분을 다른 부분과 나눈다.
그리고 동시에 일정 부분을 묶는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 자신이라거나 철수 또는 영희라고 분별을 일으킨다.
[ 자신의 상=아상, 철수상, 남자상,...]
그래서 그런 일정부분은 철수나 영희 또는 꽃이라고 여긴다.
그런 상황에서 예를 들어 영희가 어디에 있는가. 꽃은 무엇인가라고 누가 묻는다고하자.
그러면 그는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즉, 그런 일정한 부분을 놓고 그것이 "꽃이다' 또는 '영희다'라고 잘못 여긴다.
마찬가지로 들어 현실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고 일정 부분이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이 상황에서 그는 그 '감각현실' 일정부분이 그런 '분별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즉 그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 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 감각현실 일정부분에는 그런 분별 내용이 들어 '있다'고도 잘못 여긴다.
반대로 그런 분별내용은 곧 그렇게 가리킨 일정한 부분의 감각현실 '이다'라고도 잘못 여긴다.
또 그런 분별 내용 안에 그런 감각현실이 들어 '있다'고도 잘못 여기게 된다.
즉, 그 분별내용이 그런 감각현실[자상]을 구성요소로 갖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긴다.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대부분의 상황이 이렇다.
그러나 그가 가리킨 부분은 알고보면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정작 그런 감각현실은 관념이 아니다.
그리고 그 관념도 역시 그 안에 그런 감각현실[자상]은 없다.
예를 들어 일정부분이 자신이나 영희라고 생각한다고하자.
그런데 그 '분별내용' 자체에는 감각현실에서 얻는 그런 '감각현실내용'이 없다.
이것이 망상분별인 사정을 비유로 살펴보자.
어떤 이가 예를 들어 라이터란 생각을 하고 이로 인해 연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하자.
그렇다고 라이터란 생각에 연기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라이터란 생각이 곧 연기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감각현실을 얻고 그 바탕에서 생각을 '일으키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감각현실을 대하여 분별을 '일으킨다'.
사정이 그렇다고 감각현실에 그런 분별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 감각현실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 내용이 없는 내용을 대하면서, 그런 것이 있다고 잘못 여기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이런 망상을 일으켜 갖기 쉽다.
눈으로 볼때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듣는 경우 등도 마찬가지다.
○ 실재 및 실체 존부와 관련한 망상분별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 사이에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런 망집을 갖는 경우 다시 이를 바탕으로 이런 망상분별을 실재의 영역까지 뚫고 나아가게 된다.
즉,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철학자들[ 경전논서에서 외도라고 표현된 학자들]은 한층 더 나아간다.
그래서 자신이 현실에서 얻고 생각한 내용들은
하나같이 실재의 영역에도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 뼈대에 해당하는 진짜라고 할 본체[실체]가
그 안에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 언어의 문제
한편 관념분별 내용과 관련해 언어도 살펴야 한다.
일정한 논의는 언어에 의해 제시한다.
다른 이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논의를 하려면 언어가 필요하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 언어가 위와 같은 기본 성격을 갖는다.
이 언어도 그 성격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측면을 갖는다.
언어로 말소리[예: a: ]나 글자[예; ㄱ ㄴ ㄷ 과 같은 그림]가 있다.
이는 그 성격이 소리나 색상으로서 감각현실이다.
한편 이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다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그것은 곧 관념분별[ 생각하는 영역에서 떠올리는 소리관념이나 글자관념]이다.
그러나 언어는 다른 영역의 여러 내용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일정한 감각내용과 관념내용은 다른 내용을 가리키는 역할을 행한다.
그러면 이를 묶어 따로 언어로 부른다.
한편, 현실에서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 언어를 시설해 설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 이런 언설 시설로 인해 다시 그런 것이 실답게 있다고 망집을 일으키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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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분별만 놓고 보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망상분별이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근본원인이 된다.
망상분별을 일으키면
현실의 본 정체와 사정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관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의 일 부분을 그런 분별내용으로 여기고 붙들고 임한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라고 집착하고 늘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하나같이 실다운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망상분별과 집착]
그런 가운데 그에 바탕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한다. [업]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온갖 소원을 일으켜 추구하며 행위를 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상에 머물고 상을 집착하며 상을 행해 나가게 된다.
일반 상황에서 평소 이와 같은 망상분별에 바탕해 생활한다.
그리고 또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행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한다.
그 상태는 그런 망집을 전제로 할 때는
매 순간 생생하게 얻으며 실답다고 분별하게 되는 고통의 내용이 된다.
즉, 망상분별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그런 가운데 이 상황을 매순간 벗어나지 못한다.
그로 인해 무량한 생사고통을 이런 형태로 받아나가게 된다.
이는 곧
번뇌잡염 -> 생잡염 -> 3 계 6 도에서의 생사고통 [ 혹 -> 업 -> 고 ]
의 관계다.
이 관계가 문제다.
이런 문제를 시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견해나 주장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를 무수하게 학살하기 까지 한다.
그런 일들이 현실에서 자주 벌어진다.
이런 비극도 사실은 이런 망상에 바탕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세상이 비극에 처한다.
그런 상태로 각 세계에 묶여 돌아다니며 생사고통을 받는다.
그런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상황에 처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이 실답지 않음만 관하고 방치해도 될 것이다.
그러하 그렇지 않다.
한편, 그런 업을 행해도 그런 고통을 받는 관계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업을 그처럼 행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한편 망상분별을 일으켜도 그에 바탕해 일정한 업을 행하는 관계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망상분별을 일으켜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치 만화를 보더라도 그로 인해 별 문제가 없다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면 그에 바탕해 일정한 업을 매순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현실은 망상분별로 인해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을 실답게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이를 바탕으로 매순간 일정한 업을 어쩔 도리 없다고 여기며 행해나간다.
그런 가운데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 고통을 매순간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며 받아나간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매 순간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이런 상태에서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아 나간다.
따라서 이를 잘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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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원인단계에서 이를 제거해 벗어나는 것이 낫다.
망집을 제거해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상태에 처한 상태에서 이를 벗어날 경우에도 이 방안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그 원인단계에서 원인을 제거해 예방하는 것이 낫다.
번뇌 - 업 - 생사고통의 관계에서
앞 단계에서 이를 제거하는 것이 훨씬 쉽고 낫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망집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신견이나 망집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그런 신견과 망집에 바탕에서 생사를 받아나간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도 인과를 파악하여 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계행을 지키면서 수행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3 악도에 처해 생사고통에 묶이는 상태를 예방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인간세계와 하늘세계를 오가는 가운데 점차 망집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방안이 된다.
그래서 『금강경』 등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을 취하면 보살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망상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은 앞과 같다.
처음에 자신이 대하는 현실에 대해서 그 정체를 잘못 파악한다.
그런 가운데 그 하나하나에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간 가운데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된다.
- 3 무성의 측면 [무의 측면 - 실다운 것이 없음의 측면 - 번뇌의 제거]
먼저 각 영역의 내용에 실답게 볼 요소가 결여되어 있음을 잘 관해야 한다.
이들 각 영역의 내용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 바탕 실재는 직접 얻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 감각현실은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또 관념분별도 현실에서 명료하게 일으킨다.
이들 내용은 이런 측면에서 '있다'. [3 상]
그러나 이들은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가 없다. [무아]
그리고 또 감각현실 및 관념은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답지 않다.
즉 이들은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그처럼 얻은 것이다.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것이 아니다. [3무성-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 ]
여기서 3 무성의 측면을 통해서는 그에 대한 번뇌와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생사나 생멸 고통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3 무성의 측면을 99% 취하여 생사현실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현실 일체에는 본래 생사나 고통을 실답게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 바탕은 생사고통을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다.
그런 사정을 확인하고 그런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 3 상의 측면 [유의 측면 - 실답지 않고 가짜지만, 매 순간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 현실 내용 - 무량한 선법의 성취]
현실 내용은 앞과 같은 3 무성의 측면에서 실답지는 않다.
그러나 공한 본 바탕 진여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편 감각현실은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또 관념분별도 현실에서 명료하게 일으킨다.
이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정작 꿈은 아니다.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현실은 또 꿈과는 다르다.
이런 측면에서 생사현실안에서 받는 고통을 그냥 방치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이 사정을 살펴보자.
우선 생사현실의 하나하나는 실답지 않다.
즉 이 각각은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성격이 침대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같다.
이를 3 무성의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사현실은 또 꿈과는 성격이 다르다.
생사현실은 수많은 주체가 무량한 기간, 일정한 시간과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과 관계에서 반복해 비슷한 내용을 얻게 된다.
한편 현실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자신으로 잘못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있다.
이 역시 사정이 이와 같다.
또한 현실에서 이들 내용은 늘 자신이 같은 형태로 파악한다고 잘못 여긴다.
또 자신이 움직이려고 하면 뜻대로 움직인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 일정부분이 다른 부분을 대상으로 닿으면 감각을 얻는다고 관계를 잘못 파악한다.
그리고 그 일정부분은 다른 부분과 달리 깨끗하고 수중하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붙들고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한다. [신견]
그러나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는다고 그것이 실다운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실답지 않은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고 그것이 실다운 내용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게임과 같다.
게임을 반복해 수없이 행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게임화면이 실다운 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사현실에서는 이런 사정들로
꿈과 달리 이를 실답다고 잘못 여기고 집착하게끔 된다.
그리고 이에 집착하고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 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이런 상태로 겪는 생사고통이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들 현실 내용은, 꿈과는 달리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꿈과는 다르다.
그런 사정으로 생사현실에서 수행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행이 필요한 정도는 생사현실이 꿈과 달리 실답게 여겨지는 정도에 비례한다.
생사현실이 완전히 꿈과 같다고 하자.
또는 어느 경우나 완전히 꿈처럼 여기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생사현실의 어떤 극한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평안히 임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자신만 놓고 생각한다면, 수행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생사고통을 겪어도 꿈처럼 쉽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생사현실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고 임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 그렇게 실답게 여기는 정도에 비례해 이를 제거할 수행 노력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먼저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손을 톱으로 잘리우는 상황을 놓고 이것을 검토해야 한다.
이 상황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한가를 놓고 잘 판단해야 한다.
현실에서 이런 상황이 비록 가짜라고 해도 대부분 이를 실답게 여기고 고통을 받아나간다.
한편 설령 자신은 수행을 통해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대부분 중생은 그렇게 또 임한다.
그래서 설령 자신은 그렇지 않다해도 이런 중생을 제도할 때는 달리 임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내용을 통해 한편으로 자신부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한편 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서원을 성취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 있는 측면을 잘 파악하고 잘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3성과 3무성의 두 측면 가운데
어느 한 부분만 편벽되게 취하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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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1/09/05 |
[사진] 2017_0113_111342_nikon_ct13.jpg ○ [pt op tr] ▼ mus0fl--Serge Lama - Je T'aime A La Folie.lrc ○ [pt op tr]Wyspianski,_Planty_o_swicie,_1894 ○ 2019_1106_155659_can_ab47_s12.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ustave-dore-the-inferno-canto-33.jpg!HD ○ 2020_0606_184515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HTwachtmanBranchville
● 63혜마달라-나비-bhadakosana자세
오늘 요가 수련을 해야 한다. 오늘은 63혜마달라-나비-bhadakosana자세다.
● 경이라는 이름의 남용사례
연구할 경전 내용 자체를 정리하느라 하루 반 나절을 보냈다. 세상에서 경이라고 이름붙여지면 존중받는다. 까르마는 업을 의미한다.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9/2561-09-05-k0622-002.html#8512 sfed--삼무성론_K0622_T1617.txt ☞하권 sfd8--불교단상_2561_09.txt ☞◆vjwy8512 불기2561-09-05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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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불퇴(不退)의 하나. 보살이 등각 위에 들어가서 번뇌가 그대로 보리인 이치를 깨달으면 번뇌 때문에 퇴전 하는 일이 없게 됨을 말함.
답 후보
● 번뇌불퇴(煩惱不退)
범천(梵天)
법계신(法界身)
법광명(法光明)
법명(法名)
법문(法門)
법상부(法上部)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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