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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10-15-법계도기총수록 본문
『법계도기총수록』
K1502
T1887B
법계도기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법계도기총수록_K1502_T1887B 핵심요약
♣1502-001♧
『법계도기총수록』
법계도기
一―微―塵―中―含―十 初―發―心―時―便―正―覺―生―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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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量―無―是―卽 方 成 益―寶―雨―議―思―不―意 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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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 劫 遠―劫 念 一 別 生 佛―普―賢―大―人 如 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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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 九 量 卽 一 切 隔 滿 十 海―人―能―境 出 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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切 世 無 一―念 塵 亂 虛 別 印―三―昧―中―繁 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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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十 是―如―亦―中 雜 空 分―無―然―冥―事―理―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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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 世―互―相―卽―仍―不 衆―生―隨―器―得―利―益―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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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相―二―無―融―圓―性―法 叵―際―本―還―者―行―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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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諸 智―所―知―非―餘 佛 息 盡―寶―莊―巖―法―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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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法 證 甚―性―眞―境 爲 妄 無 隨―家―歸―意 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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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 不 切 深―極―微―妙 名 想 尼 分―得―資 如 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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切 動 一―絶―相―無 不 動 必 羅―陁―以―糧 捉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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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本―來―寂―無―名 守 不 不―得―無―緣―善―巧 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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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一―成―緣―隨―性―自 來―舊―床―道―中―際―實―坐
* 일승법계도
제1구: 법성은 원융하여 두 상(相)이 없고[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2구: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어 본래 고요하다[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3구: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제4구: 증지(證智)로써 아는 것이며, 다른 경계가 아니다[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제5구: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제6구: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어진다[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제7구: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제8구: 하나가 곧 일체이며,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제9구: 한 티끌 속에 시방을 포함하고[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제10구: 모든 티끌 중에도 이와 같다[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제11구: 한량없이 오랜 겁이 곧 일념이요[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제12구: 일념이 곧 한량없는 겁이다[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제13구: 9세와 10세가 서로 상즉하면서도[[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제14구: 흐트러지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이룬다[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제15구: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요[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제16구: 생사와 열반은 언제나 함께 어우러져 있다[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제17구: 이치와 현실이 흐릿하여 분별이 없으니[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제18구: 10불과 보현 대인의 경계이다[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제19구: 능인의 해인삼매 속에서[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제20구: 빈번하게 여의를 냄이 부사의하다[번출여의불사의翻出如意不思議].
제21구: 보배를 비처럼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허공을 가득 채우니[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제22구: 중생이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는다[중생수기득리익衆生隨器得利益].
제23구: 그러므로 행자는 본제에 돌아가[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제24구: 망상을 쉬어 기필코 얻음이 없고[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제25구: 연이 없는 선교로 여의를 잡아[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제26구: 집으로 돌아감에 분수에 따라 자량을 얻는다[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제27구: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써[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제28구: 법계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여[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제29구: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제30구: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음을 부처라 이름한다[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
오늘은 『법계도기총수록』이 뽑혔다.
『법계도기총수록』록은
의상대사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일승법계도는
법성은 원융하여 두 상(相)이 없고[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음을 부처라 이름한다[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로 끝나는 짧은 글인데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의 다양한 주석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대충 살펴보니 원 내용은 쉬어 보이는데
역시 일반적인 사례들과 같이
주석이 오히려 더 복잡해 보인다.
학교 다닐 때 어떤 시가 나오면
시 자체는 아름답고 좋아 보이는데
그 시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 더 어렵고 복잡해서
내용을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하기 힘들게 되고
끝내는 이로 인해 그 시 자체를
대하기 싫어지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뽑힌 글을 놓고 처음 부분만 대강 살폈는데
역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아아 님은 갔습니다.
이런 시가 있다면
이 시에서 시인이 '아'나 '아아아'라고 하지 않고
'아아'라고 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님이 왔다고 하지 않고 갔다고 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여기서 님은 이러이러한 것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런 식으로 해설을 붙이는데
그럴 듯 하지만,
정작 시인이 그런 생각을 갖고
그런 시를 썼다기 보다는
남들이 볼 때
그렇게 생각된다는 그런 내용들로서
역시 고난 탐정의 입장에서는
이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놓고
수사하기가 상당히 곤란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덧붙이면
이런 평론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시만 그냥 볼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다시 살펴보게 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들를 때
옆에서 작품의 자세한 의미를 소개해주는 가이드가
있는 상태에서 감상하는 것과
그냥 감상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물론 감상을 복잡하게 하는 면이 있는 것이지만,
이런 가이드의 설명이 작품 감상을 더욱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예술품의 감상과정에서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는 것은
이런 평론이 갖는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좋다라고 그냥 지나가는 상태에서
어떤 측면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조금 부족하고 이런 내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만, 조금 번잡한 점은 물론 있는 것이다.
오늘 원융이란 말이 나와서
그 반댓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다가
새로 말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방각격력차별 이런 말이다.
방각은 모나고(方방) 각이 진 상태로 서로 대립하고(각角)
격력(隔歷)은 서로 사이가 띄어진 체 격리된 상태로 떨어져 있고[隔離격리]
서로 관계가 성기고 차별된다.[歷別역별]
그리고 그 모습이 제각각 서로 다르다.(差別차별)
이런 의미를 나탸내는 표현이다.
사전상 원융의 반댓말은 격력이라고 나오는데
격력이란 말은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고
방각도 억지로 만든 새로운 단어인 것이어서
차별이란 단어만 빼고 다 사정이 그렇다.
영어로 '이해하다'는 말을 UNDERSTAND 라고 표현하는데
이의 반대말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가.
up stand
over stand
under sit
under lie
이런 식으로 찾게 된다.
이들 단어는 어떤 대상을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또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을 찾으라고 하면
up lie
up sit
over lie
over sit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반댓말을 만들려고 할 때
한 단어의 구성부분의 짝수갯수에 해당하는 구성부분의 반대말을 찾아 붙이면
결과적으로는 처음과 엇비슷한 말이 되기 쉽다고 보게 된다.
다만 이 경우 홀수갯수를 붙이면 조금 달라진다.
그래서 under stand 각 부분의 반대에 해당하는 말을 찾아 결합시키면
결국 다시 원래 말과 비슷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위에서
I uplie you 이런 표현은 I understand you 와 비슷한 표현으로서
나는 당신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런 표현인데
I oversit you 이런 표현보다도 조금 더 친밀한 표현이 된다.
I understand you 가 일반적으로
지상의 인간이 하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경우 등에 사용한다면
위 표현들은 그 반대의 상황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남녀간에 단어를 이처럼 구별해 사용했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요즘은 그렇게 설명하면
남녀 평등무애 원융사상에 의거해
헌법소송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여전히
부자간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사정과 입장을 이해할 때는 I uplie you
직장이나 군대에서 상관이 부하의 입장을 이해할 때는 I oversit you
그 반대로 아들이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부하가 상사나 상관의 입장을 이해할 때는 I understand you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나 위 설명에 든 단어들이
현실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은
현실에 그런 경우가 거의 없기에 그런 것일까.
여하튼 오늘 뽑힌 글에서 처음 원융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실을 대할 때는
오히려 각 입장이 서로 모나고 대립하고
차별되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서로 손익을 따지고 구별하고
그래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그 결과 서로 격리된 상태로
다른 이를 소외시키고 고립시키고
또 배타적으로 차별하며 대하고
그렇게 서로 끼리끼리 대하면서 생활해간다고 이해하는데
그러나 의상대사는 처음에
법성은 원융하다고 표현하고 2 상이 없다.
이렇게 처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원융이 무슨 의미인가
글자만 보면 동그란 형태로[원] 녹아 있다[융]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
불교 사전을 참조하면
모든 현상이 각각의 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있고
한데 통하여 아무 차별이 없고
원만하여 서로 막히는 데가 없는 것을 나타낸다고 제시되어 있다.
사(事-현상)와 이(理-실재,본질)의 완전한 상즉상입(相卽相入), 또는 융합을 주장하고,
사리(事理)ㆍ사사(事事)ㆍ이이(理理)의 3종 원융으로 하고,
공가중(空假中)의 3제를
총별(總別)ㆍ동이(同異)ㆍ성괴(成壞)의 6상원융(六相圓融)으로 구분하는 등,
상대즉절대(相對卽絶對)의 사고를 강화시키는 것이 특색이다
여기서도 살펴보면
설명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시와 시에 대한 평론과의 관계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에 대해
자신이 under stand를 하던지 over sit 를 하던지 up lie 를 하던지 해서
다른 이들이 왜 각기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지
그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여하튼 현실에서는
남녀가 해변에 놀러가서 탈의실이나 화장실을 사용할 때는
남녀를 구별하여 따로 들어간다던지
직장에서 일을 나눠 하거나 월급을 받거나 할 때는
각기 따로 따로 임하는 사례가 대부분인데
왜 이런 현실을 놓고
의상대사는 원융무애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인가.
이런 문제가 본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참고로 사회는 불법 부정 비리가 판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에 반대되는 경우를 표현한다면
역시 불법 부정 비리라고 표현하는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뒷 부분을 굳이 해석하면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은 이치아닌 내용[비리]를 부정한다.
이런 의미로 보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행히 단어가 홀수갯수여서 그대로 사용하면
반대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선행을 정진한다의 반대상황은
악행에 정진한다이고
두 부분을 다 반대되는 어구를 사용하여 결합시켜
악행을 게을리한다고 표현하면
오히려 선행을 정진하는 것과 유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 선행을 게을리하면
악행을 정진하고 힘쓰는 것과 유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악을 열심히 행하는 이가 있고
선을 열심히 행하는 이가 있을 때
이를 놓고 차별없이 모두 똑같이 대하면
이것이 평등하게 되는 것인가.
자신의 즐거움과 이익과 좋음을 추구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에게 고통과 손해와 나쁨을 주는
악을 열심히 행하면 고통이 상응되고
그 반대로
선을 열심히 행하면 복이 상응되는 것이
오히려 평등한 상태가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에 10 시간 일하는 이나
하루에 1 시간 일하는 이가
똑같이 수입을 얻으면 그것이 공평하고 평등한가.
그렇게 보기는 힘들고,
10 시간 일하는 이는
1 시간 일하는 이보다 10 배 정도 이상의
수입을 얻어야 공평한 상태라고 볼 것이다.
그런데 그 공평하다는 상태 자체가
이미 차별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협단천 관찰방식[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방식]과
광장심 관찰방식[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는 방식]에 의한 판단은
서로 그 결과 내용이 반대가 된다고 보통 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좋고 나쁨 또는 선과 악의 규범 등이 문제될 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성실하게 추구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왜 나쁘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up stand 하거나
over stand 하거나
under lie
unde sit
하려는 자세로 현실에 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정은 바로 강간범이
감옥에 드러눕거나 앉은 상태로
동료 죄수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합리화하며
하소연하는 사정과 비슷하다.
강간범 자신도 피해자 상대를
다른 돌이나 물과는 달리 상당히 애착을 갖고
관심을 갖고 대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어처구니없다고 다들 이해하는데
정작 일반인 자신들이 평소 무언가 좋은 것을 놓고
추구하는 과정을 놓고
그 성격이 이와 같다는 사정은
꿈에도 up lie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한우를 대단히
사랑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또는 자신은 한우보다는 치킨이나 족발을
사랑하는데 또 그것이 삶에 무슨 문제가
그렇게 된다고 하는가.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그리고 좋은 직장에 간 다음
좋은 배우자와 결혼해서
잘 살아가려고 하는 것 뿐이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이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자업자득인 것으로서
외면하는 것 뿐인데
또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up lie해서
도무지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여럿이 있을 때 혼자 짜장면을 시켜 하나 먹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자신이 먹는 것을 자꾸 흘깃거리고 지켜본다고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데
앞의 상황이나 자신의 상황이나
모두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결국
자신이 배가 고프다고 빵가게의 빵을 훔쳐 달아나는 장발쟌이나
사흘 굶은 장뱔쟌이 빵을 훔쳤다고 붙잡고 고발하는 빵집 가게 주인이
있다고 할 때
물론 현실에서는 이 가운데 앞 경우만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만,
그 행위의 실질 성격은 다 같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훔치는 것이나
인색하여 도무지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으면서 보시 수행을 행하지 않는 것
이것이 실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왜 그런가는
위 반댓말 만드는 관계를 종합적으로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뺏는 것을 열심히 한다.
=>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게을리한다.
여하튼 여기서 장발쟌은
배가 고픈 가운데 자신보다 더 안타까운 노파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주지 않고
자신의 굶주림만 먼저 해결하려고 하는 가운데
빵가게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고
빵가게 주인은
주변에 사흘 굶은 이가 있는데도
돈을 주지 않으면 빵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더 나아가 빵을 가져가서 붙들려 오면
소설에 나오는 신부처럼 잡혀 온 장발쟌에게
음료수도 먹으라고 했고 거기에 빵가게에서 할 수 있는 일자리도 주었는데
왜 빵만 그냥 들고 갔는가면서
이런 것을 모두 제공해주려 하지 않은 것이 문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뒤에 제시한 불법 부정 비리 이런 차원에서는
앞에 제시한 현실의 불법 부정 비리 사태를 놓고
이런 문제를 보는 한편,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제시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죄와 복이 모두 공하여 머물 바가 없네 .
罪福皆空無所住
죄복개공무소주
[ 비바사 여래 ]
모든 선법을 일으킴이 본래 환이고
모든 악업을 만드는 것이 역시 환이네
起諸善法本是幻 造諸惡業亦是幻
기제선법본시환 조제악업역시환
[ 시기 여래]
죄와 복이 환과 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네
罪福如幻起亦滅
죄복여환기역멸
[ 비사부 여래]
과거의 부처님들은
현실적으로 첨예한 차별을 낳은
죄와 복의 문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데
왜 차별이 많은 현실상황을 놓고
그렇게 표현하는가도 이해해야 하지만,
다시 이런 내용을 놓고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앞의 내용을 놓고
본래 죄와 복이 차별없이 공하고 환과 같으니,
현실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취하고
어떤 것을 어떻게 추구해나가야 하는가를
잘 헤아려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모든 것이 차별없이 공하고 환과 같은 것인데
이런 기본 바탕에서 수행자가
갖는 의문점은 다음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차별없이 공한데
왜 그런 상태에서
매번 수행을 통해 선을 행하여 무량한 복과 지혜를 얻지 않고
왜 하필이면 악을 취하고 악행을 하여
고문대에 묶여서 지옥 중생이 당하는 고통을 당하는가.
왜 차별이 없는 가운데 굳이 하필이면
매 경우 그렇게 임하여 무량한 고통에서
지내는가.
이것이 수행자가 갖는 의문점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수행을 하지 않아서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바탕에서
굳이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입장을 up lie 해
이해해본다면
먼저
1 처음 수행방안으로 제시되는 각 내용을 행하는 것을
그들이 대단히 힘들고 행하기 어려운 일로 여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좋음을 아끼지 말고 필요한 상대에게 아낌없이 베풀라거나 [보시]
상대가 집착하는 좋음 즉 상대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이런 것을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함부로 침해하지 말라고 하거나 [ 정계]
반대로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등을 다른 이가 함부로 침해할 때
자신이나 사람 생명 목숨 이런 등등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음]
그것을 평안히 참고
상대에 대한 미움 원망을 갖지 않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거나 [안인]
등등의 수행방안을 제시하면
하나같이 그 상황에서 그런 행을 하는 것을
끓는 물에 자신의 몸을 담그라거나
돌아가는 톱날에 자신의 손을 밀어 넣어 한겹한겹 잘라내라고 요구한 것처럼
그것을 도저히 자신은 행하기 힘들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차별없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공하다는 것을 이해해도
자신의 탐욕과 분노를 쫒아가는 행위는 대단히 민첩하게 임하지만,
위와 같은 내용은 대단히 행하기 어렵게 여기고
아예 그런 수행방안은 외면하고 무시하거나
하더라도 마지못해 더디게 행해가면서
생을 살고 마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인해
이후 상황이 바뀌어서
자신이 묶여 끓는 물에 자신의 몸을 담가야 하는 경우거나,
톱날에 손과 발을 밀어 넣어 한켜 한 켜 잘라내게 되는 상황에서는
또 그것대로 그것이 바로 차별없이 공한 상태라는 것을
올바로 관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 상황에서 생생하게 지극한 고통을 겪으면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몸이 아프다고
산 잉어를 잡아와서 솥에 넣고 끓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솥에 산 잉어를 넣고 끓이려고 하면
그 잉어가 온 힘을 다해서 뛰는데
병 치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솥뚜껑을 꽉 힘주어 닫고 끓이는 상황이 현실에 가끔 있는데
그런 상황에 그 잉어가 잉어가 아니고 자신이라고 하면
위 내용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고 보는가 아니라고 보는가.
그것이 문제다.
그래서 평소 현실에서 수행방안을 따라 행하는 것과
또 그렇게 행하지 않아서 이후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
이 둘이 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고
또 이 둘이 다 차별없이 공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그나마 수행방안을 행하여
그런 것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
예방하지 않고 매번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해 벗어나와야 하는 뒤의 경우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힘들다고 여기게 되는데에는
3 가지 문제정도가 있다고 보게 된다.
우선 현실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이 두 내용이 서로 그렇게 관련이 된다는 사정을
아예 under lie 하고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려서
가을에 열매를 수확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면서
봄에는
왜 쓸모없는 씨를 그냥 밭에 버려 썩히는가
이렇게 문제를 삼고
이에 대해 농부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그런다고 답하면
어제 씨를 뿌린 것을 보고 나서
오늘도 지켜보고 다음날도 지켜보고 또 다음날 다음날 이어서
아무리 지켜보고 또 지켜보아도
열매가 맺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
무슨 엉터리 주장을 하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시일이 지나
열매가 맺게 될 때는
그가 다시 나타나 이 열매가 왜 홀연히 여기에 이렇게 나타났는가.
기이하다고 하면서 연유를 묻게 되는데
농부가 그것이 전에 봄에 뿌린 씨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설명하게 되면
그는 다시 그 열매는
어느날 일어나보니 밭에 그런 열매가 그렇게 홀연히 나타난 것 뿐이지,
그것이 무슨 과거에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 썩힌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씨와 열매는 서로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들인데
이치에 닿지도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비유로 든 내용처럼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는 내용을 놓고서는
대부분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나머지 수행이나 그 수행을 통한 과보나
그 반대의 경우에 반대의 과보를 얻는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앞 비유와 같은 형태로
현실에 임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마치
어떤 이가
씨와 열매를 놓고
그것이 서로 모습도 다르고 시기도 다르다면서
이들이 서로 관계가 없다고 억지주장을 할 때
농부의 입장에서 말로는 그 상대를
이해시킬 도리가 별로 없다고 보게 되듯,
수행과 관련하여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 관찰을 통해서
억지 주장을 하는 경우도
사정이 마찬가지가 된다.
그것은 씨 뿌리고 나서 열매가 안 나타나는 상태에서는
그 씨로 인해 아무런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경우도 그렇고
나중에 열매가 나타났지만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다시 그 원인이라고 할 과거의 씨가 보이지 않기에
모두 그런 협단천 관찰에 바탕해서 억지 주장을 하는 상대를
이해시키기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이다.
2 번째 문제점은
다시 앞 사정을 이해해도
또 다시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행하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
즉 봄에 씨뿌리는 일이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봄에 고생을 하고 그로 인해 가을에 좋음을 얻는 것이나
봄에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지낸 다음
가을에 좋음을 조금 얻지 못하는 것이나,
어차피 합산하면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억지주장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도 앞의 경우처럼 다시 협단천관찰을 통해
대충 좁고 짧고 얕게 헤아리면
마치 그런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예를 들어
산수를 비유하면
x 나 x2 (제곱)이나 x3 (3승)이나
그 x 에 1 만 넣으면 다 답이 1 이 된다고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게 짧게 1 만 딸랑 넣어보고 헤아리지 말고
이후 1,2,3,4,5 이런 수를 계속 넣어서 관찰해보면
그 차이가 계속 커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처음 위 두 내용을 놓고 이것이 서로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입장은
결국 다음과 같이 억지 주장을 하려는 것이다.
처음 어떤 수행을 해서 자신이 다른 생명에게 + 좋음을 주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는 - 손해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나중에 그로 인해 가을에 + 좋음을 얻는 것은 물론 그것만 보면 + 좋음이지만,
결국 이것을 모두 합치면 0 이 되는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자신이 당장 + 좋음을 얻기 위해서
다른 이를 해치고 손해를 끼쳐 - 나쁨을 준다면
일단 그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좋음을 얻는 것이므로 + 좋음인데
그로 인해서 나중에 감옥에 간다거나 하는 등등으로
가을에 - 나쁨을 얻는 것은 물론 - 나쁨이지만,
이 둘을 합치면 결국 0 이 되는 것은
앞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뜻 이 내용을 살피면 그럴 듯 해보이는데
이것이 엉터리 산수식인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그래서 그 두 경우가 다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왜 마찬가지인데 앞의 방안을 취하지 않고
하필이면 굳이 매번 뒤의 방안을 취하는가 물어보면
역시 이 경우에도 다시 협단천관찰방식을 동원해서
그렇게 현실에 임한다는 사정을 보게 된다.
즉 그는 앞의 경우에서는
수행을 한다면
당장 자신이 - 나쁨을 받고 이를 견뎌야 하고
+ 좋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그러나 그로 인해
나중에 + 좋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러나 그 순간에는 말뿐이고 불확실한 것 아닌가.
그러나 뒤의 경우는
이와 또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설령 이 둘이 다 마찬가지라고 해도
앞의 경우는 전혀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반대로
뒤의 경우만 열심히 추구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처음 억지 주장처럼
길게 놓고 볼 때
이 두 경우가 다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이 경우나 저 경우나 문제가 안 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후 단계 단계를 밟아나갈 때마다
앞의 경우는
서로 무량한 좋고 좋음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극락의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면
뒤의 경우는
이제 서로 무량한 고통과 나쁨을 주고 받는 관계로서
무량한 고통과 어리석음에 묶인 지옥 아귀 축생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차이가 나타난다고
이 둘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 좋음을 주어서 하나의 + 좋음을 돌려받는 것과
하나의 - 나쁨을 주어서 하나의 - 나쁨을 돌려받는 것을
서로 같다고 본 것부터가 잘못인 것이고
처음의 내용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두번째 세번째로 나아갈 때마다
그 관계로 서로 계속 같은 것이 된다고 본 것이
또 엉터리인 것이다.
현실에서
오늘 씨를 뿌리는 이가 씨를 뿌리면
그 씨를 하나 뿌렸기에 가을에 열매를 하나 얻는 것이 아니고
볍씨 하나를 뿌리면
가을에는 그 볍씨 하나에 33개의 볍씨를 얻는 것이라고
보통 보지 않는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여하튼 이런 관계로 점차 차이가 나타나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양쪽의 격차가 더욱더 심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쪽은 처음 물방울 하나의 좋음으로 바다와 같은 좋음을 얻는 상태를 향해 가고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상태가 되는데 반해
다른 쪽은 역시 마찬가지로 물방울 하나의 나쁨으로 바다와 같은 나쁨을 향해 가고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고통과 어리석음에 묶여 지내야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이 각 경우마다 그 구체적 사정에 맞추어
각 개인이 행한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관계에서
사실은 공평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선을 열심히 닦아 행한 경우나
그렇지 않은 경우나
결과가 다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 달 동안 공부를 꾸준히 열심히 한 학생이나
한 시간도 공부를 안 한 학생이
시험을 보고나서 그 시험 성적이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부당하고 이상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 경우에도
협단천 관찰방식을 통해
당장 자신의 어느 한 측면의 좋음에만 집착해서
초점을 거기에 맞추고 온 신경을 그곳에 쏟으면서
현실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이 관계나 이 각 내용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3 번째 문제점은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처음 다른 중생들에게
다른 중생들이 집착하는 + 좋음을 아낌없이 베풀거나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율을 지키거나
또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가 침해당할 때 평안히 참거나 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등의 수행을 행할 때
수행자가 이런 수행을 고통스럽게 행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점이 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에서 어떤 장삿꾼이 장사를 할 때
이윤을 많이 얻으려면
자신이 물건을 팔아서 얻게 되는
판매수입의 액수를 크게 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그런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은 비용대로
가장 적게 되도록 노력해야
그 차액으로서 이윤이 크게 된다고 여기고
그런 방안을 장삿꾼이 취할 가장 현명한 방안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극대이윤 = 극대 수입 - 극소비용
이렇게 관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장삿꾼은
해변에서 소금을 구할 때는 소금값으로 헐값으로 구매한 다음
산골에 들어가서는
그 소금은 단순한 소금이 아니고
소와 금이 결합된 것이라고 우기면서
이제는 소와 금의 값을 받아서 팔려고 노력을 하고
다시 산골에서는
인삼을 그냥 그곳의 인삼값으로 헐값에 구매한 다음
다른 곳에 가서는 그 인삼이 인[사람]과 삼이 결합된 것이라고 우기면서
한 뿌리마다 사람값에 다시 삼값을 더해서 팔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각 곳에서 각 상대나 각 시기상황에 맞추어
교역조건을 달리해서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입장을 매번 바꾸어 취하면서 임해야
결과적으로 자신이 얻을 이익을 크게 얻게 되는 현명한 장삿꾼이라고 보고
반대로 그와는 반대로 행하는 이는
파산을 향해 나아가는 엉터리 장삿꾼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과연
광장심관찰을 통해서 이를
넓고 길고 깊게 살필 때도
과연 그렇게 되는가가 문제다.
그렇다면 그런 장삿꾼 계산을 통해서
현실에 민첩하게 임하는 이들만
극락세계나 하늘에 가득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그럴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속에서 행하는 협단천 관찰방식과
수행자가 취하는 광장심 관찰방식의
차이인 것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유대인 수용소에서 별 쓸모없는 유대인들을 데리고 나와서
자신의 공장에서 쓸데없는 일만 하게 하고
결국 파산한 쉰들러 공이 생각나고
한편 유대인이 죽거나 말거나
시체에서 거둔 금잇빨과 금테 안경 가죽등을 모아
새로운 상품을 제조해 수입을 올린 ss 출신 기업인이 생각나는데
여하튼 이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윤 = 수입 - 비용의 계산식에서
수행자가 수행에 임할 때는
일반적으로 수행자가
수행결과를 얻는데 들이는 수행자의 비용이나 희생이라고 보기 쉬운
그런 수행을
수행자 자신은 유희 자재 신통으로 임하는 것이고
따라서 수입 - 비용의 계산식에서는
비용 자체도 마이너스 (-) 형태로 무량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처음 수행을 하는 상황에서부터
무량한 수입을 얻어나가는 상태로 임하는 것이어서
결국 비용 항목을 무량한 '-' 마이너스로 만들어
그 자체에서부터 무량한 복덕을 얻고
다시 이를 통해서 그 결과로서는
또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 관계를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내용도 역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일반적인 경우는
어떤 때는 이렇게 잠시 수행도 해보고
어떤 때는 잠시 또 달리 하면서
현실에서 이리저리 헤메는 가운데
마치 좁쌀이 이리저리 구르는 형태로 이익을 취해 임한다면
수행자는 매 단계를 나아갈수록
눈덩이가 불어 나듯이
그가 거두는 복덕과 지혜 자량의 크기가 늘어나서
나중에는 그로 인해 얻는 무량한 수명과 복덕 지혜의 크기는
매 순간 태양이나 은하계가 한 번 도는 정도로
서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한번 돌 때
좁쌀도 한 번 돌겠지만,
그 차이가 크다고 보듯
이제 수행으로 인한 차이는
태양이나 은하 전체가 한 번 도는 것과
좁쌀이 한 번 구르는 것의 차이처럼
크게 벌어지면서
그렇게 무량하게 나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을 향해
무량한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도
역시 그 반대방향으로
그렇게 무량하게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에서 어떤 한 주체가
자신의 소원을 놓고
그것을 뜻대로 성취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방안이나
자세와 모두 깊이 관련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각 주체는
당연히 자신의 희망하는 바가
자신의 뜻대로 성취되는 것이 좋다고 보는 가운데
이 성취를 위해
기본적으로 다양한 if 문제를 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내용들이
모두 앞과 같이 그에게 먼저 제시되는 것이다.
즉,
if 자신이 지금 이것을 취하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이것을 취하지 않고 양보하거나 베풀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상대를 해치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상대를 해치지 않으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이 부당한 고통을 참지 않고 응징하고 보복하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이 부당한 고통을 평안히 참으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관계식이 앞에
수행과 관련된 내용처럼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if 문장은
당장 좋음을 자신에게 주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고 나중에 좋음을 준다고 하는 것도 있고
당장 지극히 고통스럽고 힘들고 나쁘다고 보는 것도 있고
나중에 그렇게 지극히 고통스럽고 힘들고 나쁘다고 제시되는 것도
섞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각 내용이
지금 당장 비교적 확실하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는 내용도 있고
어떤 것은 아직 자신에게 불확실하고 잘 이해되지 않지만,
다만 그런 내용을 제시한 상대를 믿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대하게 되는 내용도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 다양한 IF 문장이 제시하는 관계식과
그 내용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놓고
자신이 그 사정을 헤아려 보는 가운데
결국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좋고 좋은 내용을 많이 얻어내
쌓아가는 것이 현명한 자세인데
여기에서 각 if 문장이 엇갈려 제시될 때
과거 임진왜란을 앞에 두고 선조대왕이 취한 자세나
여우에 쫒긴 꿩 자세를 취하고
협단천 방식으로 적당히 대강 헤아리고 나서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만 붙잡고
자기 최면의 상태로
또는 낙관적인 입장으로
마냥 임하려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if 문장의 내용을 놓고
일일히 옳고 그름을 헤아리거나 살피는 것이 어렵고 복잡한 가운데
어떤 if 구문이 자신이 지극히 싫어하는 어떤 나쁨이나 고통을
지금 당장이거나 나중에 준다고 제시받으면
그것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 자체가 싫다고 여기는 가운데
오로지 자신이 희망하는 좋음만 붙들고 생각하면 된다고 여기면서
마냥 임하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꿩은 여우가 나타나 자신을 해치려 하는 경우가 되면
그저 모래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서는
그런 일은 없다고 여기면서
자신이 고집하는 것만 계속 붙들고 임하는 가운데
여우가 다가와 자신의 몸을 다 파 먹는 상황까지도
그렇게 임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IF 문제를 놓고
어차피 눈은 소리를 못 듣고
귀는 색을 못 보는 것처럼
경전에서 제시하는 하늘이나 아수라나 아귀 지옥과 같은 상태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이가 취하는 행위나 자세로 인해
그런 세계에 자신이 들어가서 무량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을
이해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임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앞의 농부의 비유와 같이,
오늘 어떤 수행을 하고 어떤 씨를 뿌리면
그로 인해 무량한 겁에 걸쳐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게 된다거나,
반대로 그런 수행을 하지 않고
오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견해에 바탕해 무엇을 행하면
또 그로 인해 무량한 겁에 걸쳐서 고통을 쉼없이 주고 받는 상태가 된다는
내용이 제시될 때
그런 IF 문장을 대하면서
이 관계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과거 임진왜란 직전의 선조대왕이나
여우가 눈 앞에 보일 때 모래에 머리를 박고 숨는 꿩과 같이
이 IF 문제를 대하고 무시하고
자신의 눈에 당장 보이는 현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외면하는 경향을 대부분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당장
지금 가게 매상을 얼마 올리는 것이나
수입을 얻고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
그런 것이 무슨 문제인가 하면서
정작 자신의 손과 발이 끊기거나 눈이 뽑히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차이를 낳는 문제는 외면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해서 그런 과보를 받는 상태가 되면
당사자는 또 그 관계를 그렇게 보지 못하고
그 차별의 모습들이 이유도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렇게 자신에게 나타나
대단히 억울하다고 여기며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그러한 사정들로 인해
그렇게 각 경우가 되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공평하고 평등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는 점도
또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이가 다른 이들이 어떻게 행하면 좋겠다고 보게 될 때
그 내용을 무조건 상대에게 규범으로 제시해서
이것이 곧 규범이고 선의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문제가 있다.
이 경우 그 상대도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면서
그것을 규범이라고 이해하는데
문제는 각 입장에서는 서로
그런 것을 자신이 하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한다면
자신이 하기는 싫지만,
다만 그것이 어떤 의무나 규범으로 주어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피해나 고통을 받게 되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의무의 형태로 그것을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기에
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자신을 자신은 합리화하는 한편
정작 다른 상대가 그런 규범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비난하면서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각 주체가 서로간에 대립하면서
악순환의 과정을 무한히 밟아나가는 모습인 것이다.
결국 한 주체는 사회에서
자신의 본능적 충동에 바탕해서
자신의 좋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임하는 한편 Id[Es]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행하지 말고
다른 상대를 배려하고
온 인류나 온 생명에게 나쁨을 가하지 말고
모두 좋음을 주는 방향으로 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는
수퍼에고[Super ego]의 사이에 끼어서
현실을 대하는 가운데
그것을 각 경우마다 적절히 타협시켜 섞어서
자신의 외관적인 행위나 태도를 취하고
또 내심은 내심대로 달리 상태를 만드는 것이
현실의 자신의 자아[Ego]의 정체이고
삶의 방안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위 각 IF 문제를 대하는 가운데
현실에 임하는 것이 바로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super ego 란 말이 나와서 생각이 나는데
자외선의 반대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나오면 적외선 이렇게 말하게 된다고 본다.
결국 가시광선을
빨주노초파남보 이렇게 말할 때
보라색 밖의 파장 내용과
빨간색 밖의 파장 내용을 각기 가리키는 말로서
한글에서는 모두 ( ) 외선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데
영어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외선은 ultra + violet 이라고 하는데
적외선은 red 앞에 ultra 를 붙이지 않고
그렇다고 super 를 붙이지도 않고 hyper 를 붙이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붙인다는 것이다.
어제 이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또 퀴즈로 한번 풀어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왜 그렇게 표현을 달리 하게 되는가
그 사정을 또 up lie 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Lab value 불기2561/10/15 |
댓글내용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663#1091 θθ |
◈Lab value 불기2561/10/15/일/18:13 |
♥ 잡담 ♥원융과 방각격력차별과 차례의 의미 일단 조금 쉬었다가
이뻐라고 해서 780 이상부터 무량한 상태까지
이미 글이 긴데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663#1488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2016_0619_175506-can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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