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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ॐ मणि पद्मे हूँ
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10-17_대승기신론-K0616-001 본문
『대승기신론』
K0616
T1666
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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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0616-001♧
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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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18_1022_171116_can_CT33_s12 공주 태화산 마곡사
❋❋본문 ♥ ◎[개별논의]
능히 마하연(摩訶衍: 대승大乘)의 신근(信根)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설(說)해야 한다.
설에는
5 부분이 있으니, 무엇이 5 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 입의분
이미 인연분(因緣分)을 설했으니 다음은 입의분(立義分)을 설하겠다.
마하연(摩訶衍)이란 총괄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 마하연[대승]의 법은 중생심
이른바 법이라 함은 중생의 마음[衆生心] 을 이르니,
이 마음이 일체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의 이치를 드러내어 보이니,
무슨 까닭인가?
이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모습[心眞如相] 이
마하연의 본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요,
=>
이 심진여상[心眞如相]이 마하연의 본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요,
이 마음 그대로가 생멸의 인연상(因緣相)이니,
능히 마하연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이 심생멸인연상[心生滅因緣相]이
능히 마하연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 마하연[대승]의 의(義)- 체대, 상대, 용대
이른바 의(義)라 함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체대(體大)이니,
일체법이 진여이며 평등하여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대(相大)이니,
여래장(如來藏)이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요,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셨던 바[所乘] 이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모두 이 법을 타고서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 때문이다.
● 해석분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했으니 다음은 해석분(解釋分)을 설하겠다.
해석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요,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이요,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
● 현시정의 - 심 진여문 심 생멸문
현시정의(顯示正義)에는 한마음인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마음 그대로가 생멸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
현시정의(顯示正義)에는 한마음인 법에 의하여
2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2 가지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2 문은 모두 제각기 일체법을 통틀어 포섭하니 이 이치는 어떠한가?
이 2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진여(心眞如)라 함은
곧 한 법계를 크게 총괄한 모습인 법문의 바탕
[일법계대총상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體]이니,
이른바 심성(心性)은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나
만일 마음과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의 모습도 없는 것이다.
○ 일체법은 일심 => 진여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모습[言說相] 을 여의었으니
이름과 별명의 모습[名字相] 을 여의었으며
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습[心緣相] 을 여의었으니
끝내 평등하여 변함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는 것으로 오직 한마음[一心] 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여(眞如)라 한다.
=>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언설의 모습]을 여의었으니
명자상[名字相-이름과 별명의 모습]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습]을 여의었으니
끝내 평등하여 변함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는것으로
오직 일심[一心-한마음]일 뿐이다.
○ 일체언설 = 가명
일체 언설(言說)은 거짓 이름일 뿐이요,
진실이 없으니 다만 망념(妄念)을 따를지언정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진여 = 무상 = 말을 여읨 = 체는 떠나지 않음 => 일체법 진여
진여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상이 없으니,
이른바 언설의 극치일 뿐으로
말로 인해 말을 여의었지만
이 진여의 바탕[體] 은 여윌 수가 없다.
일체법이 모두가 다 같이 진(眞)이기 때문이다.
또 세울 수도 없나니 일체법이 모두가 다 같이 여(如)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여라 한다.
[... ]
심생멸(心生滅)이라 함은
여래장(如來藏)에 의한 까닭으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게 되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해서
같지도 않고[非一] 다르지도 않은[非異] 것을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한다.
이 식(識)에 두 가지 이치가 있어
능히 일체법을 거두어 모으고[攝受]
일체법을 내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K0616V17P0615b02L; 二一者覺義二者不覺義所言覺義
첫째는 깨달음 쪽인 각의(覺義)요,
둘째는 미혹 쪽인 불각의(不覺義)이다.
이른바 각의라 함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윈 모습은 허공계(虛空界)와 동등하며,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
법계 그대로인 한 모습인지라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본각의 이치는 시각(始覺)의 이치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니
그 까닭은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이치는 본각에 의거한 까닭에 불각(不覺)이 있고,
불각에 의거한 까닭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은 까닭에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범부들은 앞생각에 악(惡)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능히 뒷생각을 그쳐 일어나지 않게 하나니,
비록 각(覺)이라 하지만 이것도 또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0616-001♧
『대승기신론』 ♣0616-001♧
○ [pt op tr]
▼mus0fl--Adamo - Salvatore Adamo - A Vot' Bon Coeur.lrc K0616
T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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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마하연(摩訶衍: 대승大乘)의 신근(信根)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설(說)해야 한다.
설에는
5 부분이 있으니, 무엇이 5 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 입의분
이미 인연분(因緣分)을 설했으니 다음은 입의분(立義分)을 설하겠다.
마하연(摩訶衍)이란 총괄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 마하연[대승]의 법은 중생심
이른바 법이라 함은 중생의 마음[衆生心] 을 이르니,
이 마음이 일체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의 이치를 드러내어 보이니,
무슨 까닭인가?
이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모습[心眞如相] 이
마하연의 본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요,
=>
이 심진여상[心眞如相]이 마하연의 본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요,
이 마음 그대로가 생멸의 인연상(因緣相)이니,
능히 마하연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이 심생멸인연상[心生滅因緣相]이
능히 마하연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 마하연[대승]의 의(義)- 체대, 상대, 용대
이른바 의(義)라 함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체대(體大)이니,
일체법이 진여이며 평등하여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대(相大)이니,
여래장(如來藏)이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요,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셨던 바[所乘] 이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모두 이 법을 타고서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 때문이다.
● 해석분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했으니 다음은 해석분(解釋分)을 설하겠다.
해석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요,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이요,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
● 현시정의 - 심 진여문 심 생멸문
현시정의(顯示正義)에는 한마음인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마음 그대로가 생멸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
현시정의(顯示正義)에는 한마음인 법에 의하여
2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2 가지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2 문은 모두 제각기 일체법을 통틀어 포섭하니 이 이치는 어떠한가?
이 2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진여(心眞如)라 함은
곧 한 법계를 크게 총괄한 모습인 법문의 바탕
[일법계대총상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體]이니,
이른바 심성(心性)은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나
만일 마음과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의 모습도 없는 것이다.
○ 일체법은 일심 => 진여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모습[言說相] 을 여의었으니
이름과 별명의 모습[名字相] 을 여의었으며
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습[心緣相] 을 여의었으니
끝내 평등하여 변함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는 것으로 오직 한마음[一心] 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여(眞如)라 한다.
=>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언설의 모습]을 여의었으니
명자상[名字相-이름과 별명의 모습]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습]을 여의었으니
끝내 평등하여 변함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는것으로
오직 일심[一心-한마음]일 뿐이다.
○ 일체언설 = 가명
일체 언설(言說)은 거짓 이름일 뿐이요,
진실이 없으니 다만 망념(妄念)을 따를지언정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진여 = 무상 = 말을 여읨 = 체는 떠나지 않음 => 일체법 진여
진여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상이 없으니,
이른바 언설의 극치일 뿐으로
말로 인해 말을 여의었지만
이 진여의 바탕[體] 은 여윌 수가 없다.
일체법이 모두가 다 같이 진(眞)이기 때문이다.
또 세울 수도 없나니 일체법이 모두가 다 같이 여(如)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여라 한다.
[... ]
심생멸(心生滅)이라 함은
여래장(如來藏)에 의한 까닭으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게 되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해서
같지도 않고[非一] 다르지도 않은[非異] 것을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한다.
이 식(識)에 두 가지 이치가 있어
능히 일체법을 거두어 모으고[攝受]
일체법을 내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K0616V17P0615b02L; 二一者覺義二者不覺義所言覺義
첫째는 깨달음 쪽인 각의(覺義)요,
둘째는 미혹 쪽인 불각의(不覺義)이다.
이른바 각의라 함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윈 모습은 허공계(虛空界)와 동등하며,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
법계 그대로인 한 모습인지라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본각의 이치는 시각(始覺)의 이치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니
그 까닭은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이치는 본각에 의거한 까닭에 불각(不覺)이 있고,
불각에 의거한 까닭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은 까닭에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범부들은 앞생각에 악(惡)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능히 뒷생각을 그쳐 일어나지 않게 하나니,
비록 각(覺)이라 하지만 이것도 또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0616-001♧
『대승기신론』 ♣061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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अरपचन नचपरअ
○ 보이지않는 마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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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않는 마음의 의미
과거 갓난 아이 때 모습을 떠올린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갓난아이 때 모습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왜 이 둘을 다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게 되는가.
한편 불교에서는 한 주체는 생사과정에서 축생이나 아귀 지옥 중생 형태도 된다고 제시한다.
이 경우도 성격이 위 문제와 같다.
그런 경우 그처럼 달라진 모습을 자신이라고 왜 여기는가.
그런 가운데 왜 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가.
이런 문제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좀더 정확히 살핀다고 하자.
이런 경우 각 형태가 정신적 육체적인 측면에서 모두 대단히 다르다.
그런데 어떤 요소로 이들을 모두 한 주체의 일로 여기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이들을 모두 다 자기자신이라고 판단하게 된다고 하자.
그래서 처음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우선 그런 요소를 그냥 U 라고 표시한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를 살핀다.
그런데 이에는 사정이 있다.
어떤 이가 눈을 떠서 현실을 대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눈이 눈 스스로를 볼 수 없다.
한편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은 마음에 맺혀 머물게 된다.
그런데 정작 그 마음은 마음 자체를 보거나 만지거나 파악하지 못한다.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할 때는 무슨 사유로 있다고 하는가가 처음 문제된다.
또 없다면 무엇때문에 마음이 없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마음의 유무를 살필 때는 이런 어려움이 있다.
한편 눈을 뜨고 볼 때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도 마음이다.
또 생각을 할 때 어떤 생각내용을 담는 마음도 사정이 그렇다.
한편 자신이 생각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자신의 생체를 유지해 나가는 데 작용하는 마음도 있다.
이 역시 사정이 그렇다.
한편 매 생의 단계에서 이들 마음을 분화 생성시키는 근본정신도 있다.
이런 근본 정신도 역시 사정이 마찬가지다.
처음 문제가 갖는 성격이 이들에 모두 공통된다.
자신이 매 순간 눈을 떠서 무엇을 잘 본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그에 작용하는 마음의 정체를 스스로 잘 파악하기 힘들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하는 사정이 무엇인가.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것과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즉 마음이 '있다'라고 할때 '있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그것이 마음이라고 한다고 하자.
이는 마음 안에 맺힌 내용물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런 것들이 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임한다.
그래서 자신이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자.
먼저 그 가운데 일부를 스스로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외 나머지는 그런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과는 떨어져 있고 별개의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물질과 정신을 구분한 가운데 이를 '물질'이라고 구분해 잘못 표현한다.
한편 이들 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보는 자신의 몸 부분은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자신이 다른 사람 영희를 대한다고 하자.
이 경우 자신이 영희의 몸이라고 잘못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경우 영희의 정신은 그런 영희의 몸으로 보는 부분 안에 머문다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또 이런 생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그처럼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도 스스로 자신이 몸이라고 보는 부분에 머문다고 잘못 이해한다.
이것이 모두 뒤집혀진 잘못된 분별(전도망상)이다.
이 사정을 이미 반복해서 살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상태로 삶을 시작해서 삶을 마친다.
따라서 엉뚱한 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탐욕과 분노의 번뇌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번뇌에 집착한 가운데 업을 행해 나간다.
그래서 그런 망집 번뇌에 묶여 평생 사역을 당하고 다른 생명도 묶어 사역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같은 바탕에 있는 다른 생명과 가해 피해관계를 중첩시켜 쌓아 나간다.
그리고 그런 업으로 장애가 쌓인다.
또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장구하게 묶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사현실에서 과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생사고통은 미리 원인단계에서 예방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 가장 근본원인이 되는 망집부분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각 부분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일정한 부분에 대해 행하는 잘못된 판단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판단을 바탕으로 일으킨 망집 증상을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1차적으로 현실내용이 마음 내용임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모습이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의 마음에 맺혀 머무는 마음 내용이다.
이런 사실부터 먼저 잘 이해하고 임해야 한다.
이를 가장 쉽게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평소 자신의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실험부터 잘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그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는가를 스스로 잘 살핀다.
눈을 감으면 보던 모습이 그 순간 사라져 없어진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뜰 때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처럼 눈을 뜨는 순간 나타난다고 여기는 내용들이 있다.
평소 이런 내용을 마음에 구분해 잘 붙잡아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실험은 해보면 어렵지 않다.
다만 현실에서 망집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망집에 바탕해 쉼없이 바삐 무언가를 행하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만큼 현실에서 번뇌가 사역을 시키는 정도가 강하다.
그래서 그런 실험을 해볼 마음의 여유 자체도 갖기 힘들다.
그러나 여하튼 잠시라도 여유가 생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스스로 위와 같은 실험을 해보기로 하자.
그리고 눈을 뜰 때 얻는 내용을 잘 구분해 붙잡아 보기로 한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은 도대체 어디에 머무는가를 스스로 파악해본다.
그리고 그런 내용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부터 스스로 파악해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눈썹이나 이마는 스스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도 스스로 파악해본다.
한편 다시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구해보자.
그리고 눈을 뜬 상태로 계속 썼다 벗었다 해본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눈 뜰때 보게 되는 내용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한편 눈을 뜬 가운데 자신의 눈을 손으로 눌러 보자.
그래서 사물이 두개로 보이게 하는 실험을 해볼 수 있다. [제 2의 달]
기본적으로 이런 실험을 하는 가운데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과 거의 같은 사람을 옆에 둔다.
그는 자신과 유사한 감각기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평소 거짓을 보고하지 않아서 신뢰할 수 있다.
그런 이에게 위 실험을 똑같이 행하게 하면서 그 내용을 보고하게 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그 상대의 상태를 관찰한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보고내용을 자신 입장에서 입장을 바꾸어 재 검토해 본다.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다음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실험이다.
자신이 눈을 뜰 때 얻는 내용이 있다.
이는 그 일체가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얻어진 내용이다.
그 가운데 일부가 자신의 몸이 아니다.
또 그 나머지가 자신 밖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이 아니다.
또 이들은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도 아니다.
또 이들은 자신의 마음과는 떨어져 있는 별개의 외부 물질도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이가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
이처럼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행하는 기본적 실험이다.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그 모습들이 모든 이가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하자.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자신이 눈을 떠서 볼 때 자신의 이마나 허리는 보지 못할 사정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무언가를 볼 때는 늘 이런 부분을 경계점으로 해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평소 눈을 뜨면 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런 부분은 다시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보고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정은 평소 보는 내용이 모든 이가 대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님을 이해하게 한다.
즉 이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얻게 되는 자신의 주관적 내용이다.
이런 위치에 다른 철수가 영희가 들어 오면 그도 비슷한 내용을 경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 자체는 일단 자신의 마음에 얻게 된 주관적 내용일 뿐이다.
한편, 자신이 눈을 떠 보게 된 내용이 외부에 있는 외부세계의 내용이라고 하자.
그리고 외부 대상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자신이 안경을 썻다 벗었다 할 때 마다 그 모습이 변화할 리 없다.
자신이 안경 하나를 쓰고 벗어서 외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수퍼맨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실험을 반복해본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눈을 뜰 때 나타난 내용을 검토해보자.
이 가운데에서 안경 하나 벗고 쓰는 가운데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있는가.
그런 부분은 어느 부분인가.
이런 것을 스스로 음미해 파악해본다.
그래서 이를 통해 다음을 이해해야 한다.
평소 자신이 외부 세계나 세상의 내용이라고 이해한 부분들이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들은 사실은 그런 내용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온 내용임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비유하면 이런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그런 그릇이나 거울과 같은 마음에 이들 모든 내용이 담겨진다고 비유해보자.
그런 가운데 마음과 현실 내용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고 하자.
그러면 일반적으로 행하는 판단은 잘못된 판단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관계를 뒤집어 거꾸로 행한 잘못된 판단들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릇에 일정한 내용이 들어 왔다.
그런데 그런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런 내용을 행하는 자신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그런 내용 가운데 나머지 부분이 곧 그릇 밖에 있는 외부 세계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그런 내용을 그릇이나 감관이 상대한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그런 내용을 그릇과는 떨어진 별개의 내용으로서 외부 물질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그런 내용을 모든 그릇이 다 함께 담게 되는 내용으로서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이해한다.
이제 거울면의 비유에서 거울면을 놓고 생각한다고 하자.
이 때 거울면에 어떤 모습이 비추인다고 하자.
그리고 이 내용과 거울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거울에 의자의 모습이 맺혀진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의자의 모습이 거울의 기능을 갖는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그런 모습이 곧 거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반대로 거울이 곧 그런 의자 모습 자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이 거울면을 떠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자신이 처음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상태도 이와 마찬가지다.
자신이 눈을 떠 얻는 내용이 있다.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그런 내용물이 있다고 하자.
이를 자신 밖에 있는 외부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내용이 곧바로 마음 자체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또 반대로 마음이 곧 이런 내용이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또 마음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마음도 이들 내용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자신이 보는 그런 모습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또 그 안 내용물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또 그리고 마음은 어떤 점에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하게 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기까지는 주로 눈을 떠서 보는 감각현실을 얻는 과정을 놓고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후 이런 상태에서 다시 관념분별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이 부분은 의자라고 분별을 일으킨다.
또 저 부분은 바위다, 영희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다양한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역시 그런 내용이 머무는 마음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과 그 안에 들어와 머무는 관념내용의 관계가 다시 문제된다.
그리고 무엇을 어떤 사유로 마음이라고 구분해 칭하게 되는가.
또 다른 것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고 하게 되는가를 잘 헤아려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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अरपचन नचपरअ
○ 마음의 구체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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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구체적 의미 ,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고 마음과 관련한 문제를 살피려 한다고 하자.
이 작업은 상당히 복잡하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간단히 표현한다.
그리고 글자는 '마음'이라고 다 같이 적고 대한다고 하자.
그래도 그 글자로 그 각각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무엇을 마음이라고 여기는가도 입장 따라 다르다.
그리고 마음이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과 명칭은 있다.
그런 가운데 그 언어표현으로 정작 정확이 어떤 부분의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문제된다.
이런 경우 그 언어표현과 글자 형태만으로 이를 명확하게 해결하기 쉽지 않다.
간단히 마음 문제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게 된다.
그래서 물건을 담는 그릇으로 비유해 설명할 수도 있다.
또는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 비유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우선 다음을 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그 그릇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기관]
한편, 그 그릇에 무엇이 없다가 담겨지는 과정이나 방법을 가리킬 경우도 있다. [작용,기능]
한편, 그 그릇에 그렇게 담겨진 어떤 내용물[결과물]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구체적 내용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한편 마음이 어떤 크기나 방위를 갖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본다고 하자.
그리고 이들 내용 모두가 마음에 담겨진 내용이라고 하자.
이런 경우 마음은 온 세계를 다 그 안에 담고 있을 정도로 크기가 넓다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대단히 큰 부피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좁은 골방에서 상자에 머리를 넣어 무엇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내용만큼 마음의 크기가 줄어 든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또 자신이 눈을 감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앞과 반대로 그 마음이 이제 그렇게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마음은 사실은 그런 크기나 방위를 갖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각 생명이 늘 마음작용을 통해서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정작 각 주체가 자신의 마음을 놓고 그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이 눈에 직접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그래도 언어나 생각을 통해 '마음[심]'이라는 단어를 시설해 표현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마음이라고 가리키게 된다.
이는 사실은 우리가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는 사정에 바탕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활동을 하는 그런 부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없다고 가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 내용을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사정을 다시 파악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현실 사정을 바탕으로 그런 작용을 하는 마음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언어로 마음이란 단어를 '시설'해서 이런 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과거 비사부불의 게송을 참조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4대(四大-지수화풍)를 빌려서 몸으로 삼았고
마음은 본래 생겨나지 않았으나
경[境]을 따라서 있게 되었네.
앞에 경[境]이 없다면 마음 또한 없으니
죄와 복도 환술[幻]과 같아 생겼다가 사라지네.
毘舍浮佛同前劫偈曰
假借四大以爲身 心本無生因境有
前境若無心亦無 罪福如幻起亦滅
또 다음의 시기불의 게송도 도움이 된다.
모든 착한 법 일으키는 것도 본래 환술[幻]이요,
온갖 악업 짓는 것 또한 환술이네.
몸은 물거품과 같고 마음은 바람과도 같으니
환술로 생겨난 것에는 근본도 실상도 없네.
起諸善法本是幻 造諸惡業亦是幻
기제선법본시환 조제악업역시환
身如聚沫心如風 幻出無根無實相
신여취말심여풍 환출무근무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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अरपचन नचपरअ
○ 유식무경에서 마음과 대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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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식무경에서 마음과 대상의 의미 ,
일반사람들이 눈을 떠서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모습을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불교에서 이것을 경(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6 근 6 경 6 식 이렇게 배열한다.
예를 들어 눈으로 얻어 보는 색깔이 경에 해당한다.
귀로 얻어 듣는 소리도 경에 해당한다.
이런 색깔이나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색깔이나 모습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 상태에서 다음처럼 생각한다.
자신이 그런 색깔이나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그것은 바로 그런 색깔이나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것을 얻었다고 잘못 분별한다.
그래서 경이라는 표현을 그런 외부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데 현실 내용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그 외부 대상은 없다.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그런 내용에 관련된 외부대상 자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현실에서 얻은 내용 안에는 그런 대상이 들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이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분별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그런 감각현실은 그런 '생각'이나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대상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다음을 제시한다.
그런 감각현실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 일체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 아니다. [유식무경]
그래서 일단 이런 내용을 주의하고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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अरपचन नचपरअ
○ 근본정신에 대한 논의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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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정신에 대한 논의의 어려움 ,
근본 정신과 관련된 논의를 한다고 하자.
이런 근본정신은 한 주체의 생사를 넘어 무량겁에 걸쳐 이어지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사 전후를 이어가게 된다.
이런 근본정신을 모두 U 나 U 에 관한 내용이라고 표시하자.
일단 그 U 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그 U 가 그렇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 무엇을 무엇때문에 어떻게 하려 하는가부터 파악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당장 할수 있는 것부터 행한다.
그런 가운데 그 내용을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의이로 그 U 에 대해서도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렇게 U 라고 표시한 내용부터 먼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 내용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런 이후 이를 전제로 행할 수행을 생각하고 실천해 나간다고 하자.
그렇다면 평생 이 U 를 연구해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이미 눈을 뜰 때 무엇을 보는 과정에서도 마음이 관계한다.
그런데 이런 마음도 파악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
이런 사정을 이미 살폈다.
그런데 지금 문제삼는 U 는 이 보다 사정이 더 힘들다.
어떤 수행자가 무량겁이전부터 무량겁이후까지 계속 수행을 해나간다고 하자.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님이나 문수보살님이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매생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을 받아간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매 생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해 나타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저 모습과 이 모습이 다 다르다.
그런데 이를 모두 한 보살님으로 칭하게 된다.
그런 경우 이런 문제와 관련되는 마음에 해당한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5백진점겁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사미였었다고 경전에 제시된다.
또는 과거생에 상불경보살로서 수행을 했다는 등의 내용이 제시된다.
그런 경우 다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당시 수많은 다른 생명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명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특정한 분만 유독 그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그렇게 보게 하는 요소가 바로 지금 문제삼는 이 U 이기도 하다.
그처럼 과거생과 현생 그리고 장래의 생명형태를 한 주체의 일로 이어주게 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런 U를 파악하려 한다고 하자.
이번 생을 마치고 다음 생에서 다른 생명형태로 태어나 생활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두 생의 모습이 대단히 다르다.
예를 들어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축생이라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근거로 이 둘이 하나의 주체라고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근본정신은 바로 이런 상황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생에서 작용하는 마음도 기본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당장 눈을 뜨고 감고 하는 상황에도 정신이 관여한다.
그런데 이런 정신 조차도 잘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한 생의 한 단면을 놓고도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 문제삼는 U 는 생사 전후에 걸쳐 문제된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를 파악하기 더욱 힘들다.
한편 그 U 는 지금 단면에서도 그처럼 있다.
일반적으로 갓난아이때 모습과 어른이 된 순간의 모습은 다르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 두 모습을 놓고 다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서로 엉뚱하게 다른 두 모습을 다 자신이라고 이해한다.
반대로 당시의 다른 갓난아이는 자신이 아니라고 여긴다.
또 지금 다른 어른들도 자신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도 U 는 관련된다.
다만 그것을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다.
또 눈이 관계하는 정신과는 또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그 u 가 파악해 얻는 내용을 의식 표면에서 확인하기 힘들다.
그런 사정으로 한층 논의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 문제삼는 u 나 u 가 얻게 된 내용을 직접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먼저 수행이 상당히 경지에 오른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명확하게 그것을 붙잡아 살피며 헤아릴 수 있다.
이런 어려운 사정을 경전에서도 제시한다.
또 대승기신론에서도 제시한다.
물론 그런 어려움이 있다.
다만 그 내용을 이치상으로 헤아리고 이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능하다.
즉, 부처님이 제시하고 설명해주는 내용을 놓고 이론상 이해할 수는 있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 사정을 놓고 이들 내용을 살필 수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할 주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하튼 그런 U 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도대체 자신의 현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부터 먼저 살핀다.
또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제시하는가를 먼저 파악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무엇을 실천해가야 하는가를 먼저 파악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먼저 익히고 실천해간다.
그런 가운데 이 문제를 대해간다고 하자.
그러면 이 문제가 오히려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여기서 『대승기신론』을 살핀다.
이는 결국 기본적으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야 한다.
내용이 상당히 어렵다.
이전 조각글에서 알지브라 대수식으로 논의하는 방식을 살폈다.
일단 파악하기 힘든 내용을 모두 U 로 표시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살피는 취지나 성격부터 살핀다.
그런 가운데 문제를 살피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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अरपचन नचपरअ
○ 대승기신론에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들
---
○대승기신론에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들 ,
대승기신론의 내용을 보면 일단 혼동을 일으키는 표현들이 몇몇 발견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그것이다.
..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
...
오직 일심[一心-한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여(眞如)라 한다.
..
이 진여의 체[體-바탕]은 여윌 수가 없다.
일체법이 모두가 다 같이 진(眞)이기 때문이다.
..
일체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여라 한다.
..
이런 표현에서 표현상 마음(심)과 진여 실재의 관계에 대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또 한편 불교에서 무언가에 참된 실체나 자성이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리고 그렇게 제시하는 마음이나 진여가 각각 진짜의 내용인가
그런 경우 참된 진짜의 내용[아, 자성]이라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는다.
그런데 진여라는 표현이 과연 이런 내용을 가리키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한편, 이런 부분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처럼 이해할 수도 있다.
오직 일심일 뿐이다. => 일심이 모든 것의 본 바탕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의 실재 진여 그 자체는 곧 마음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또 한편 다음처럼 이해하기도 쉽다.
다른 것은 엉터리고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이 1심 진여만은 그렇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오해하기 쉽다.
즉 1심 진여만은 진짜라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리고 1심 진여는 자성을 갖는 참된 어떤 것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즉 불교에서 제시하는 무아나 무자성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즉 이런 내용들을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표현상 그런 오해나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일체법이 모두 진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 일체법이 모두 진짜 참된 것으로서 아와 자성에 해당한다라고 오해하기 쉽다.
표현상으로만 보면 이런 오해와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
진여 실재 실상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무엇을 어떤 측면에서 무엇을 찾는 것인가 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왜 그런 내용에 진이나 실, 이런 표현을 붙이게 되는 사정부터 이해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뜨고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그것은 무엇이 되었던 '색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색'이라고 칭한다.
자신이 눈으로 보는 그런 색깔[색] 등을 본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자신 마음에 여하튼 들고 나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를 언어로 '생멸'한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눈을 감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대하던 색깔은 이제 더 보지 못하게 된다.
이 때 그 직전까지 보던 그 색깔은 이제 아주 세상에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
그리고 아주 없게 된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무언가가 따로 실재해서 있다고 할 것인가.
즉 자신이 눈을 떠서 보던 보지 않던 무언가가 따로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또 그런 것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실재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선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것을 앞에서 본 '색의' 진여나 실상 실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색의 진여나 실상이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 다음을 논의하게 된다.
우선 색의 진여나 실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눈을 떠서 보던 그런 색깔이나 모습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눈을 감아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그런 상태와 일치하는가
이런 것들을 놓고 논의하게 된다.
그 실재에는 진짜라고 할 어떤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 [무아, 무자성 ]
그러나 그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주체는 마음이 관계해서 일정한 내용을 화합해서만 얻게 된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는 실재는 그런 마음과의 관계를 떠난 어떤 내용이다.
그런 사정상 문제삼는 그런 실재 내용은 그런 주체 입장에서는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있고 없음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의
2 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다.
또 일체 언어표현을 떠나게 된다.
따라서 본래 별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이를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 공 ]
그런데 현실에 진짜라고 할 것이 있어서 무아 무자성이 아니라고 하자.
그런 가운데 지금 실재 진여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공하다고 제시할 것이 아니다.
그런 참된 진짜의 내용을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무아 무자성]
또 그 내용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직접 얻어낼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공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색의 진여나 색의 실재는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다.
이렇게 표현하게 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 일체가 다 마음에 머무는 것이다.
눈으로 얻는 색깔을 포함해서 소리, 냄새, 맛, 촉감이 다 그렇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런 전제에서 심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은 그런 실재 진여를 바탕으로 그렇게 나타난다.
그런 사정을 그리고 다음처럼 제시한다.
...
오직 일심[一心-한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여(眞如)라 한다.
...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만일 이 표현을 다음처럼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처음 실재 진여가 무언가를 문제삼았다고 하자.
즉 현실에서 얻는 것들의 본 바탕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 내용이 곧 1 심이라는 어떤 것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잘못 오해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다음처럼 이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본 바탕 실재는 무아 무자성 공한 것이 아니다.
아나 자성이 있다.
그리고 진짜라고 할 어떤 1 심이 그렇게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진여의 내용이다.
이렇게 제시한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것은 표현으로 잘못된 혼동을 일으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처음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떠 색을 보게 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색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는 무언가를 문제삼는다.
또 현실에서 보게 되는 그런 색이 생멸하는 관계는 어떠한가를 문제삼는다.
한편, 그러한 내용을 얻게 하는 마음이 문제된다.
그래서 그 마음[심]의 진여 실재는 무엇인가.
그 마음[심]의 생멸하는 모습은 어떤가
이런 주제를 살핀다고 하자.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도 이런 입장으로 내용을 살핀다고 하자.
이 경우 이를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 표현을 놓고 여러가지 혼동과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처음 색이나 마음 등의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를 찾는다고 하자.
그런데 이에 다음처럼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진여 실재로서 어떤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의 마음'이다.
모든 것의 실재의 정체는 공하다고 한다.
그러나 공한 것이 아니다.
알고보면 1심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
이런 식으로 제시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런 마음도 그런 실재, 진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진여 실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위 표현은 그런 의미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심진여라는 표현을 잘못 오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심 그자체가 곧 진여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또는 '심'의 진여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심진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색'의 진여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심의 진여 실재는 무엇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심진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다음처럼 이해하게 된다.
심은 그것이 곧 진여 실재는 아니다.
또 진여 실재도 곧 심은 아니다.
그러나 심은 진여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표현에 대해 이런 두 입장에서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그리고 이 두 입장은 서로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다.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다.
대승기신론이나 부처님의 본 입장이 그렇지 않다.
그러나 표현을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처럼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모든 것의 진여 실재는 1심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또 그 1심은 다시 진짜의 내용으로서 참된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1 심은 무아 무자성이 아니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공한 것도 아니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곤란하다.
처음 어떤 것의 실재를 찾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실재를 진여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여의 '진(眞)'이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꿈은 가짜이고 실답지 않다.
그런데 현실 내용이 이처럼 꿈과 같이 실답지 않음을 관한다고 하자.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꿈과는 성격이 다른 실다운 진짜의 내용이 있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찾는다.
이런 경우 그런 의미에서 실답고 진짜라고 할 내용을 실체로 표현한다.
그런데 진여의 진(眞)을 그런 의미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본 바탕 실재를 표현할 때 '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본 바탕을 '진여'라고 표현하게 된 사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본 바탕이 무엇인가를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본래 자신과 관계없이도 그대로 실재하는 그 무언가[실재]를 상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본 바탕에 무언가가 있다고 하자.
그런 실재를 바탕으로 어떤 주체가 감관을 통해 그의 마음에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다시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즉, 그 감각현실 각 부분을 이리저리 묶고 나눈다.
그런 가운데 한 주체가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를 발생의 순서로 본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처럼 제시하게 된다.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그래서 이런 형태로 각 내용을 얻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어떤 것이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리고 그 정체가 무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순서가 각 내용의 발생순서와 거꾸로 된다.
감각현실을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 영역에서는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를 문제삼기 곤란하다.
또 무엇의 성품 등에 대해 문제삼을 도리도 없다.
즉, 그런 감각현실 영역에서 감각현실만 가지고는 문제삼을 도리가 없다.
관념분별이 정지되거나 중지된 상태라고 하자.
그래서 감각만 얻는 어떤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그런 문제를 살필 수 없다.
이와 사정이 같다.
결국 무언가를 문제삼을 때는 관념분별 영역에서 문제를 삼게 된다.
그리고 관념분별내용을 가지고 문제를 삼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 등에 대해서도 그 정체를 살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본 바탕인 실재도 다시 문제삼을 수 있게 된다.
그 정체를 논의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떤 꽃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그것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있다고 할 그 꽃의 실재를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그 실재가 무엇인가를 찾아나선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도 역시 관념영역에서 이를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이를 문제삼고 찾아 나서게 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의 정체를 찾아나선다고 하자.
그런 경우 관념분별에서 일으킨 관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후 감각현실을 문제삼게 된다.
또 다시 이들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인 실재를 찾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처음 현실에서 얻은 내용을 붙잡고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그 본 바탕인 실재는 일단 그와 엇비슷한 어떤 것으로 추정해보게 된다.
그런 의미로 여(如) 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실재를 찾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전도몽상을 바탕으로한 엉터리 판단을 많이 행하게 된다.
그러나 옳은 깨달음은 이런 내용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실재에 대한 '참된 올바른' 판단을 구별해 표현할 필요가 있다.
한편, 실재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모든 것들의 본 바탕의 지위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이를 '진'여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진여 실재에 대한 논의의 결론은 다음이다.
그런 진여 실재는 그 안에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다. [무아. 무자성]
그래서 실재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제시하게 된다.
우선 어느 영역에나 그런 진짜에 해당한 내용은 없다.
또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전혀 없다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주체가 직접 그 내용을 얻을 수는 없다.
따라서 있다 없다를 떠난다. .
따라서 진여 실재를 진짜의 참된 어떤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다만 진여는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것 뿐이다.
즉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어내는 내용이 있다.
이런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을 진여라고 표현하는 것 뿐이다.
진여 실재가 공하다고 표현한다.
이는 그런 진여 실재도 역시 실답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즉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실 내용도 꿈처럼 실답지 않다.
마찬가지로 실재 역시 실답지 않다.
그러나 진여 실재를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하게 된다.
이는 진여 실재가 꿈과 달리 참되고 진짜라고 할 어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 고통을 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으로 진여 실재는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하게 된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실재는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다.
그러나 이는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는 현실에서 문제되는 온갖 문제와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으로 이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게 된다.
현실이 실답지 않고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런 경우 실재진여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렇다고 실재진여에는 현실과 달리 어떤 실다운 진짜가 따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정은 그렇다.
그래도 실재 진여는 현실의 본 바탕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 관계를 비닐판을 포개어 놓고 하는 마술실험으로 비유해 살필 수 있다.
하나의 비닐에 작은 세모를 그려 놓는다.
또 다른 비닐에 커다란 원을 그려 넣는다.
그 다음에 이 두 비닐을 포갠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난다.
이는 본래 각 비닐에서는 얻을 수 없던 내용이다.
즉 이 도너츠는 각 비닐판에는 없던 그런 모습이다.
그런 상태에서 각 주체가 생생하게 도너츠 모양을 얻어 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정으로 그런 도너츠는 실답지 않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것은 꿈을 실답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꿈을 꾸는 상황에서는 꿈 내용은 생생하게 얻는다.
그런데 그 꿈이 실답지 않다고 표현한다.
이는 그 내용이 생생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 꿈을 꾸는 상황이 사라지면 얻지 못한다.
또 그 꿈 내용은 그로부터 기대하는 다른 성품들을 얻을 수도 없다.
다른 영역 즉 현실에서 꿈 내용과을 얻을 수 없다.
비록 꿈은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그런 사정으로 꿈을 실답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무엇이 진짜인가 아닌가를 찾는다고 하자.
이는 어떤 내용이 이런 꿈과 다른 특성을 갖는 것인가를 문제삼는다 .
즉 꿈과 같은 특성을 갖지 않는 실다운 것인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현실에서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도 그 사정이 꿈과 같이 실답지 않다.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그 본바탕이 되는 실재도 그처럼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이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처럼 실답지 않다.
그리고 무아 무자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실재 본 바탕은 사정이 그렇다.
다만,실재는 현실 내용과 달리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앞의 도너츠 비닐 마술에서
두 비닐을 겹친다고 하자.
그 경우 도너츠모양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를 실답지 않다고 표현한다고 하자.
그 상황에 각 비닐에 세모나 원이 그려져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이 세모나 원은 이와 달리 실답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존재를 문제삼는 각 영역이 있다.
그런 가운데 실재는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같이 다 실답지 않다.
이런 실재도 역시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는 이들은 별 차이가 없다.
즉, 실재 진여가 실다운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즉 다음처럼 오해하면 곤란하다.
꿈은 실답지 않다.
또한 현실 내용도 꿈처럼 실답지 않다.
즉,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실재는 이와 달리 실답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다만 실재나 감각현실 관념분별의 본 상태는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생사고통이 현실에서 문제된다.
그러나 그 각 영역에서 본래 이런 생사고통은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그와 같이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은 망집에 바탕해 얻게 된다.
예를 들어 비닐을 두 개 합치는 경우와 같다.
이런 각 내용을 얻고 전도몽상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만 그런 내용이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처음 부처님이 이런 사정을 올바로 관하라고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가르침을 베푼다.
그리고 각 존재의 정체에 대해서 가르침을 베푼다.
그리고 복잡한 정신 내용의 과정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베푼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본래 각 존재 영역에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사정을 올바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망상을 일으켜 이를 대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하고 벗어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취지로 이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래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전도망상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상하게 그런 사정을 올바로 관하지 못한다.
그래서 본래 생사고통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그런데 그런 '생사고통'을 각 세계에서 생생하게 받아 나간다.
또 한편 장차 그런 고통을 받을 업을 행해 나간다.
그래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이런 사정을 올바로 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런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그런 사정으로 이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내용들을 제시하게 된다.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마음에 머무는 내용이다.
또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본 바탕의 실재는 공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각 주체가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서 업을 서로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전제에서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끔 된다.
그래서 아래 내용을 살핀다고 하자.
이런 경우 표현을 통해서 자칫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다음 내용을 제시했다고 오해한다고 하자.
문제되는 실재 진여를 찾아본다.
그 결과 실재 진여는 바로 1심인 것이 밝혀졌다.
모든 것의 실재 진여는 심이다.
다른 것은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이 심은 진짜다.
이런 의미로 심진여라고 나타낸 것이라고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러면 곤란하다.
나중에는 심과 실재진여의 관계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앞처럼 미리 혼동을 일으키고 대한다고 하자.
그래서 심과 실재진여가 하나의 동일체라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를 살펴나가기 곤란하게 된다.
실재 진여와 마음의 관계를 살핀다고 하자.
이런 경우 실재 진여 자체가 곧 마음인가.
또는 마음이 곧 실재진여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실재 진여를 떠나서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마음은 실재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마음은 실재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내용을 있는 그대로 잘 관해야 한다.
그리고 실재 진여와 마음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자칫 이 두 개념을 혼동한다고 하자.
그래서 실재 진여 자체는 곧 마음이라고 오해한다고 하자.
또 마음 자체가 곧 진여라고 오해한다고 하자.
그래서 진여와 마음은 단지 표현이 다를 뿐 사실상 같다고 오해한다고 하자.
이렇게 이해하고 나아가면 곤란하다.
한편, 실재 진여나 일심은 진짜의 내용이라고 오해한다고 하자.
그래서 이는 무아 무자성이 아니라고 오해한다고 하자.
그래서 다음처럼 이해한다고 하자.
꿈은 실답지 않다.
현실도 역시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진여 실재는 그렇지 않다고 오해한다고 하자. .
또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오해한다고 하자. .
이런 식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실재 진여도 무아 무자성이다.
그리고 공하여 실답지 않다.
이런 사정은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재 진여는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다.
현실에서 전도몽상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리석음에 바탕해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진여를 살핀다고 하자.
이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이 실재진여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실재가 곧 아나 자성을 갖는 진짜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혼동하면 곤란하다.
◧◧◧ para-end-return ◧◧◧
अरपचन नचपरअ
○ 근본정신을 U라고 표시해 살피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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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정신을 U라고 표시해 살피는 문제 ,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또 이에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는다.
이런 경우 실재는 그 본 바탕이 된다.
이런 실재도 역시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는 없다.
그래서 이 일체가 모두 무아 무자성이다.
따라서 이들 일체는 모두 실답지 않다.
또 그런 가운데 각 내용은 본래 하나같이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본 사정은 그렇다.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중생이 이러한 사정을 올바로 관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이들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어리석음에 바탕해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 각 내용에 생멸이나 생사고통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이들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내용을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생생하고 실답게 그런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생사현실에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를 위해 근본적으로 망집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망집에 바탕해서는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이 전개된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그런 생사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못하다고 하자.
이런 상태에서 이들에 대해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을 행하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그런 내용들 일체가 다 문제 상태가 되게 된다.
본래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
이는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다.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망집으로 이들 일체가 다 문제가 된다.
그래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를 곧 생사고통으로 대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로 거꾸로 대하게 된다.
각 주체가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나와 나의 것을 엉뚱하게 분별하고 집착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바탕해 임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게끔 만드는 업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결국 세계를 달리해가면서 생사과정을 겪는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극심하게 받아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다음 문제가 있다.
생사 전후의 생명상태를 관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들은 현재의 자신과는 그 구성요소나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생사 전후의 생명체들을 그 형태나 내용이 다 다르다.
그런데 왜 이들을 모두 다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해 나가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무언가요소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런 것을 일단 u 라고 표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런 내용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통해 차츰 찾아나가게 될 것이다.
즉, 현실 내용은 눈에 보이고 만져진다.
그리고 분별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현실 내용을 바탕으로 이를 찾아 나서게 된다.
갓난아이 때 모습과 어른이 된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현실에서 각 주체는 이를 모두 자신으로 관한다.
그리고 유독 어떤 특정한 갓난아이와 어떤 특정한 어른만을 서로 하나의 자신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렇게 여기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하자.
일단 그것을 잘 파악하지 못할 수는 있다.
그렇다해도 그 요소를 U 라고 일단 표시한다.
그리고 그런 U 로 인해서 세세생생 무한하게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하자.
수행자는 무량한 겁에 걸쳐 수행을 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바로 그런 U를 바탕으로 한다고 하자.
그런데 여기서 그 U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문제는 조금 뒤로 미룬다.
다만 U는 일단 그런 것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런 U가 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당장 할 수 있는 그런 것부터 하나하나 행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또 그렇게 행해 나가는 것이 이 U 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
자신의 평소 마음안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 자체가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증폭시킨다.
그래서 이 생사고통에서 풀려나기 힘들게 된다.
그런 경우가 되면 이런 U 의 정체를 파악해도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그런 내용을 파악하는 일도 힘들게 된다.
즉 그런 내용을 파악할 바탕이 마련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쉼없이 뜨거운 물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또는 매일 매 순간 이리저리 오가기에 바쁜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그 U가 무언가를 파악하기 힘들다고 보게 된다.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러나 만일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또 시간을 내서 이 문제를 곰곰히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경우 이전에 제시한 그림을 놓고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어떤 바탕에서 제기되는가를 살펴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img2-8]
08pfl--image/8식-8.jpg
그림은 엉성하다.
현재 마음이나 각 존재에 대해 다양한 표현들이 제시된다.
1심이라는 표현도 있다.
아뢰야식이라는 표현도 있다.
제 7 식이라는 표현도 있다.
제 6 식 또는 1,2,3,45 식이라는 표현도 있다.
여래장이이라는 표현도 있다.
본각이이라는 표현도 있다.
실재 진여이라는 표현도 있다.
그런데 이 표현들 각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문제된다.
즉 도대체 어느 영역의 무엇을 놓고 그렇게 표현하고 제시하는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논서를 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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अरपचन नचपरअ
○ 본각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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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의 문제 ,
본각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커피를 마신다고 하자.
그런데 그 커피에 대해 가장 정확한 내용을 얻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즉, 그 커피에 대해서 어떤 것을 얻고 어떤 상태가 되어야 그런 상태라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만일 커피맛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 커피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백과사전 내용을 읽고 외운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상태가 된다고 할 것인가.
또 그런 관념분별이나 언어가 과연 그 커피맛 자체라고 할 것인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커피맛이 문제될 때 상황이 이와 같다.
그런데 이제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가 어떤 것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그 사정이 이와 같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를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측면에서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래서 현실 내용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파악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에 대해 가장 정확한 내용을 얻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또 그가 어떤 내용을 얻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이런 문제를 놓고 그 사정을 먼저 헤아릴 필요가 있다.
◧◧◧ para-end-return ◧◧◧
여하튼 이미 내용이 길어졌다.
그래서 이만 마치고 다음에 이어 살피기로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놓고
자신의 현실을 잘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mus0fl--FabienneThibault - Starmania - Un garçon pas comme les autres.lrc
★1★
◆vsjz1249
◈Lab value 불기2561/10/17 |
○ 2019_1004_135731_can_ct19.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aude-Monet-etretat-the-aval-door-fishing-boats-leaving-the-harbour.jpg!HD ○ 2018_0419_134441_nik.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emple_of_the_Emerald_Buddha_2012 ♥Nagoya Keizai University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Kawasaki University of Medical Welfare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Marc Lavoine - Ami ♥단상♥ ○ [pt op tr] ▼mus0fl--Georges Moustaki - Chanson Pour Elle.lrc ○ [pt op tr]Brenztopf 더보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renztopf.JPG Author Freak-Line-Community ● [pt op tr] fr ♥ 잡담 ♥실답지 않은 진여와 실답지 않은 현실의 관계 오늘 대승기신론 판본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글을 쓰는데 사진이 뽑혀 올라온 것을 본다. 이렇게 뽑히기도 쉽지 않다. 어제 올린 그 사진의 원본인 것으로 보인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진 기법을 연구했다. 오랜만에 해보니 원하는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씩 작업을 해두면 조금 더 다채로운 사진을 볼 수 있다. bw28 수묵화 분위기를 구현해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ct40 bw29 스케치 풍을 시도한 것이다. 어제 사진 처리 버튼을 눌렀다. 이 작업은 만 24 시간을 넘기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반절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컴퓨터가 작업을 해도 힘든 일인 듯 하다. 위 사진은 오늘 뽑혀 올린 사진을 처리한 결과다. 아래에 있다. 조금 서로 비슷해보이지만 다르다. 2016_0915_173022_canon.jpg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2/02/2561-10-17-k0616-001.html#1249 sfed--대승기신론_K0616_T1666.txt ☞기신 sfd8--불교단상_2561_10.txt ☞◆vsjz1249 불기2561-10-17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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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수(受)ㆍ5수(受)의 하나.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도 함. 몸과 마음에 고통도 즐거움도 느끼지 않는 일종의 감각 작용.
답 후보
● 사수(捨受)
사월파일(四月八日)
사인(四印)
사정(四定)
사종관행(四種觀行)
사종선(四種禪)
사종의식(四種意識)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2020_1017_145739_can_BW25
™善現智福 키워드 연결 페이지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6/keyword.html
○ [pt op tr]
● 대승기신론_K0616_T166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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