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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02-25_보리자량론_001 본문
『보리자량론』
K0585
T1660
보리자량론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보리자량론_K0585_T1660 핵심요약
♣0585-001♧
『보리자량론』
보리자량론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보리자량론
해제보기
보리자량론(菩提資粮論) 제1권
용수(龍樹) 본송
자재(自在) 해석
달마급다(達磨笈多) 한역
박상수 번역
이제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합장하여 머리 숙여 공경하오니
나는 마땅히 가르침대로
불보리(佛菩提)의 자량(資粮)을 말할 것이다.
‘부처님[佛]’이란 일체의 알아야 할 것 중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기 때문이며,
또한 지혜가 없는 잠(睡眠) 속에서 깨닫기 때문이다.
‘깨달음[覺]’이란 깨어나는[覺寤] 것을 그 의미로 삼으니 지혜 없는 잠을 여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석범(釋梵)1)들은 이 깨달음을 깨닫지 못했다.
오직 그 명성(名聲)이 삼계(三界)에 널리 퍼졌다 함은 능히 깨달은 바이기 때문이니,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라야 이 깨달음을 깨닫는다.
일체종편지(一切種遍智)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뿐 모든 성문(聲聞)ㆍ독각(獨覺)ㆍ보살이 아는 바가 아니니 함께할 수 없는 법[不共法]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모든[諸]’이란 빠짐이 없는 것으로 과거ㆍ미래ㆍ현재 등을 말한다.
‘머리 숙이다[頂]’라는 것은 윗부분[上分]이다.
‘합장(合掌)’이라함은 손을 모으는 것이다.
‘공경[敬]’이라 함은 향하여 예배하는 것이다.
‘나는 말할 것이다[我說]’는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다.
‘가르침대로[如敎]’라 함은 저 각각의 경전에서 갖가지로 이미 말한 것이니,
지금도 또한 그 가르침대로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佛]’이란 지혜가 없음을 여읜 것이며,
‘보리(菩提)’란 일체지지(一切智智)이다.
‘자량(資粮)’이란 능히 보리를 충만시키는 법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세간의 병이 가득 참[甁盈]과 가마솥이 가득 참[釜盈] 등과 같으니,
가득 참은 충만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보리를 충만시키는 법으로써 보리의 자량으로 삼는다.
또 가지는 것[持]으로써 그 의미를 삼는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함께 운행되는 해[日]는 열기를 포섭하고 달[月]은 냉기를 포섭하는 것과 같다.
포섭한다는 것은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보리를 갖는 법으로 보리의 자량을 삼는다.
자량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가진다는 의미이다.
또 장양(長養)으로 그 의미를 삼는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능히 천(千)이나 백(百),
십(十)을 충만케 하기도 하고,
혹은 오직 스스로만 충만케 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충만케 하기 어렵기도 한 것과 같다.
보리의 자량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리를 장양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삼는다.
또 원인[因]으로 의미를 삼으니,
마치 집[舍]ㆍ성(城)ㆍ수레[車] 등의 원인 중에서 집의 자량ㆍ성의 자량ㆍ수레의 자량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연법 속에서 보리를 낳는 것을 보리의 자량이라고 이름한다.
또 여러 부분[衆分]을 구족하는 것으로 의미를 삼는다.
비유하면 제사(祭祀)의 부분 중에서 구기[杓]2)ㆍ불[火] 등을 구족하는 것을 제사라고 이름하지 구족하지 않은 것은 제사가 아닌 것과 같으며,
또한 신체의 부분인 머리ㆍ손ㆍ발 등을 구족하는 것을 신체라고 이름하지 구족하지 않은 것은 신체가 아닌 것과 같으며,
보시의 부분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시하는 자[施者]ㆍ보시하는 물건[施物]ㆍ받는 자[受者]ㆍ회향(廻向) 등을 구족하는 것을 보시의 자량이라고 이름하지 구족하지 않은 것은 보시가 아니다.
계(戒) 등의 자량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러 부분을 구족하는 의미가 자량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나는 보리의 자량을 말하였다.
이 능히 충만시키는 것ㆍ가지는 것ㆍ장양하는 것ㆍ보리의 원인인 것ㆍ보리의 부분을 구족하는 것이 모두 그 의미이다.
어떤 능력으로 보리의 모든 자량을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는지라
유독 모든 부처님만이
따로 가없는 깨달음[無邊覺]을 얻는다.
‘어떤 능력으로[何能]’란 어떤 힘이다.
성문이나 보살은 적은 부분의 각지(覺知)라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보리의 자량을 빠짐없고 남김없이 말하고 싶다면 오직 모든 부처님뿐이다.
‘따로 가없는 깨달음을 얻는다[別得無邊覺]’에서,
‘가없는 깨달음’이란 소위 적은 분량의 깨달음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ㆍ세존은 가없는 응지(應知)의 의미 중에서 각지(覺知)가 걸림이 없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을 가없는 각자(覺者)라고 이름한다.
또 욕락(欲樂) 및 자기의 피로와 괴로움,
단절[斷]과 항상함[常],
있음[有]과 없음[無] 등의 변견(邊見) 속에서 깨달아 집착하지 않고 깨달은 바가 가없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을 가없는 각자라고 이름한다.
【문】어찌하여 자량은 오직 부처님만이 설할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설할 수 없는가?
【답】불체(佛體)의 가없는 덕(德)은
깨달음의 자량을 근본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깨달음의 자량도
또한 한계가 있지 않다.
‘불체(佛體)’란 곧 부처님의 신체[佛身]이다.
그 불체에 가없는 공덕을 구족하였으므로 ‘불체의 가없는 덕’이라고 말한다.
‘공덕(功德)’이란 이른바 칭찬할 만하다는 뜻이니,
칭찬할 만한 것을 곧 공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자주자주[數數]라고 한 뜻은 비유하자면 경서(經書)를 자주자주 염송하고 익히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또 뇌고(牢固:견고함)의 의미이니,
비유하면 노끈을 만드는데 둘을 합하여 공(功)으로 삼기도 하고 셋을 합하여 공으로 삼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증장(增長)의 의미이니,
비유하면 식리(息利:이자,
이익,
배당금)에 대하여 둘을 증가시키는 것을 공으로 삼기도 하고 셋을 증가시키는 것을 공으로 삼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의지(依止)의 의미이니,
비유하면 모든 사물이 각각 의지로 공을 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불체는 계(戒)ㆍ정(定) 등 가없는 차별의 공덕을 의지하기 때문에 ‘불체에는 가없는 공덕이 있다’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자량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저 보리의 자량이 불체(佛體)의 가없는 공덕과 더불어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근본[根]’이란 건립(建立)의 의미이다.
보리란 지혜이며 근본은 곧 자량이다.
저 자량이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능히 건립하므로 자량을 불체의 근본으로 삼는다.
진실로 불체에 가없는 공덕이 있음을 말미암아서 모름지기 가없는 공덕으로서 불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자량 또한 무한한 것이다.
비록 적은 분량이라 해도
응당 부처님과 보살에게 경례해야 한다고 설하나니,
이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저 모든 자량은 한계가 없지만 지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저 자량은 능히 빠짐이 없지 않다고 설하니,
이 때문에 ‘비록 적은 분량이라 해도 응당 부처님과 보살에게 경례해야 한다고 설하나니’라고 하는 것이다.
【문】부처님께 예배해야 하는 것은 일체의 중생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의미에서 이 가운데 또한 보살을 예배해야 하는가?
【답】이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마땅히 공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발심(初發心) 보살부터 깨달음의 도량[覺場]에 이른 보살까지 모든 보살들을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보살에는 일곱 종류가 있다.
첫째는 초발심한 보살이며,
둘째는 바르게 수행하는 보살이며,
셋째는 무생인(無生忍)을 획득한 보살이며,
넷째는 관정(灌頂)3)한 보살이며,
다섯째는 일생소계(一生所繫) 보살이며,
여섯째는 최후 생애의 보살이며,
일곱째는 깨달음의 도량에 나아가는 보살이다.
이들 보살을 모든 부처님 다음으로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몸[身]ㆍ입[口]ㆍ뜻[意] 및 외적인 물건 등으로 그들을 공양해야 한다.
초발심이란 아직 지(地)를 얻지 못한 것이고,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란 7지(七地)까지이고,
무생인을 얻는다는 것은 제8지(第八地)에 머무는 것이며,
관정이란 제10지(第十地)4)에 머무는 것이다.
일생소계란 바야흐로 도솔타(兜率陀)5)에 들어가는 것이며,
최후의 생애란 도솔타 처소에 머무는 것이다.
깨달음의 도량에 나아가는 것이란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수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곱 종류의 보살 중에서 초발심 보살에게도 일체 중생은 모두 예경해야 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이들이랴.
왜냐하면 깊은 마음이 너그럽고 크기 때문이며 여래의 교량(敎量)이기 때문이다.
초발심하는 보살은 보리심을 발할 때 시방의 부분에서 감소하는 바가 없고,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서 감소하는 바가 없고,
모든 중생에게서 감소하는 바가 없어서 보편적이고 원만한 자비로써 보리심을 발한다.
아직 제도되지 않은 중생은 내가 마땅히 그를 제도해야 하며,
아직 해탈하지 못한 자는 내가 마땅히 해탈시켜야 하며,
아직 소식(蘇息:蘇生)하지 않은 자는 내가 마땅히 소식시켜야 하며,
아직 적멸(寂滅)되지 않은 자는 내가 마땅히 적멸시켜야 하며,
성문에 상응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성문승(聲聞乘)6) 중에 들어가게 해야 하며,
독각에 상응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독각승(獨覺乘) 중에 들어가게 해야 하며,
대승에 상응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대승(大乘) 중에 들어가게 해야 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전부 적멸을 얻게 하고자 할 뿐이지 적은 부분의 중생을 적멸시키고자 하지 않으니,
이 깊은 마음이 너그럽고 크므로 일체의 중생은 모두 마땅히 예경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여래의 교량(敎量)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가섭(迦葉)이여,
비유하면 신월(新月)엔 문득 예배를 해야 하지만 만월(滿月)에는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가섭이여,
나를 믿는 자는 반드시 모든 보살들에게 예배하여 공경하여야 하지 여래에게만 예배하고 공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로부터 여래가 나오기 때문이다.’
또 성문승 중에서도 또한 말한다.
그 법을 아는 자라면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응당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범지(梵志)¹가 불[火]을 섬기듯이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을 마땅히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해야 한다.
게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서 지닌 자는
적은 부분의 행이 수승하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을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자애는 허공과 동등하여
널리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니,
그러므로 최승자(最勝子)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모든 중생의 부류에 대하여
마치 자식 대하듯 크게 자비롭게 하니,
그러므로 이 불자(佛子)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둘이 없음이 허공과 비슷하니,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는 자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일체의 시기에 아버지처럼
모든 중생을 증장시키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을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마치 땅ㆍ물ㆍ불처럼
중생을 항상 수용하니,
그러므로 즐거움을 베푸는 자[施樂者]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오직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즐거움의 요인을 버리니,
그러므로 저 일체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후예가
모두 초심(初心)으로부터 나오나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을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문】존자(尊者)는 이미 자량의 가르침에 대한 연기(緣起)를 바르게 설명하였다.
이제 마땅히 자량의 체(體)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답】이미 보살의 어머니라면
또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나니,
반야바라밀은
깨달음의 첫 자량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의 어머니이므로,
보리의 첫 자량이다.
왜냐하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체의 감각기관 중에서 안근(眼根)이 가장 수승하고,
모든 신체의 부분에서 머리가 가장 수승한 것처럼,
모든 바라밀(波羅蜜) 중에서 반야바라밀이 가장 수승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반야바라밀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첫 자량이 되는 것은 앞선 행[前行]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 중에서 믿음을 앞선 행으로 삼는 것처럼,
모든 바라밀 중에서 반야바라밀이 앞선 행인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저 다나(陀那:布施)를 가지고 보리에 회향하지 않으면 곧 다나바라밀이 아니다.
이와 같이 시라(尸羅:持戒) 등을 보리에 회향하지 않으면 또한 시라바라밀 등이 아니다.
보리에 회향하는 것은 곧 반야(般若:智慧)이다.
반야의 앞선 행을 말미암기 때문에 회향할 수 있다.
이렇게 앞선 행이므로 모든 바라밀 중에서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또 이 모든 바라밀은 3륜(三輪)의 청정한 인체(因體)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모든 바라밀의 3륜의 청정한 인체(因體)로 삼는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3륜이 청정하다는 것은 보살이 반야바라밀 중에서 보시를 행할 때에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취하는 것을 여의기 때문에 받는 자의 차별을 생각하지 않는다.
일체의 처소에서 분별을 단절하기 때문에 보시의 과보를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모습이므로 이와 같이 보살은 3륜의 청정한 보시를 획득한다.
청정한 보시처럼 청정한 계(戒) 등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반야바라밀은 그 모든 바라밀의 3륜의 청정한 인체(因體)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또 큰 과보[大果]이므로 반야바라밀의 큰 과보는 모든 바라밀보다 수승하니,
경전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보리심의 복덕과
섭수하는 법[攝受法]으로써
공(空)에 대하여 믿고 이해하면
가치의 수승함이 16분(分)이 된다.
비마라경(鞞摩羅經:維摩經) 가운데 큰 과보의 인연을 이 중에서 마땅히 설명하나니,
이것이 큰 과보이므로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문】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이 보살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가?
【답】능히 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방편에 포섭되는 반야는 모든 보살을 낳아서 위없는 보리를 추구하게 하지 성문과 독각을 추구하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을 출생하는 인체(因體)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
또 다섯 바라밀 중에 안치하기 때문이니,
명발라이파저(冥鉢囉膩波低)7)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명(冥)은 성품[性]이 되고 발라이파저는 읽음[誦]이 되니,
바로 이 성상(性相)이 마다(摩多)가 된다[마다는 번역하면 어머니가 된다.
자성론(字聲論) 중에서 마다의 글자는 명발라이파저의 언어 속에 나온다.
명은 마다의 자체 성품[體性]이고,
발라이파저는 마다의 뜻을 읽는 것이다.
발라이파저는 바르게 번역하면 안치하다가 된다.
그러므로 안치하다는 것으로써 어머니의 의미로 삼는다.]
비유하면 어머니가 자식을 낳으면 때로 상부(床敷)에 안치하기도 하고 혹은 지상(地上)에 안치하기도 하듯이,
반야바라밀도 또한 마찬가지다.
저 보리를 구하는 보살을 출생할 때 보시 등의 다섯 바라밀 중에 안치하나니,
보리를 구하는 보살을 안치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또 헤아리기[量] 때문이니,
망마니(茫摩泥)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망(茫)8)은 성품[性]이 되고 마니(摩泥)는 읽음[誦]이 된다.
바로 이 성상(性相),
이것이 마다(摩多)가 된다[자성론(字聲論) 중에서 마다의 글자는 또 망마니의 언어 속에서 나온다.
망(茫)은 또한 자체 성품이고,
마니는 그 의미를 읽는 것이다.
마니는 바르게 번역하면 헤아림이 되니,
이 때문에 헤아림으로써 어머니의 의미로 삼는다.] 비유하면 어머니가 자식을 출생하고 나서 때에 따라 내 자식은 이것을 먹음으로써 몸이 증대하고 이것을 먹음으로써 몸이 감소한다고 주량(籌量; 헤아림)하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다.
반야바라밀로써 스스로 그 몸을 헤아리면서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하고,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이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스스로 헤아리는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또 짐량(斟量)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물건을 측량할 때 발라살타(鉢邏薩他:突嚧拏의 16분의 1)가 있고,
아택가(阿宅迦:돌로나의 4분의 1)가 있고,
돌로나(突嚧拏:1斛)가 있고,
거리저(佉梨底:돌로나의 16배) 등[이곳의 합(合)ㆍ승(升)ㆍ두(斗)ㆍ곡(斛)이라는 부류와 같다.]이 있어서 분량을 짐작하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다.
즉 이것은 초발심이고,
이것은 수행이고,
이것은 득인(得忍)이라는 등의 짐량하는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또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염송[誦]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러 경전에서 모체로 짓는 것을 염송이라 이름한다.
그들 경전 중에 모든 불국토에 두루 퍼진 보살의 명칭이 있는데 비마라길리제(毘摩羅吉利帝)9)라고 이름하는데
[예전에 유마힐(維摩詰)이라고 한 것은 바르지 않다],
가타(伽陀:偈頌)를 설하여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보살 인자(仁者)의 어머니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버지로 삼고
자비를 여식으로 삼는다.
다시 그 밖의 경전에서도 이와 같이 염송한다.
수다라로써 헤아리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문】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은 또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가?
【답】장애가 없는 지혜를 출생하고 현시(顯示)하기 때문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아함(阿含)을 말미암기 때문에 번뇌를 이미 다했고 마땅히 다할 것이며 지금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출생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로 삼는다.
장애가 없는 지혜를 현시한다는 것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모두 반야바라밀에서 장애가 없는 지혜를 현시하는 것이며,
이렇게 장애가 없는 지혜를 현시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어머니로 삼는다.
여기에 수로가(輸盧迦:偈頌)가 있다.
큰 자비에 상응하는
반야바라밀을 말미암아서
무위(無爲)의 험난한 언덕을
불자(佛子)는 능히 넘을 수 있어서
무등(無等)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포섭하고
지도(智度)10)를 어머니로 삼기 때문에
대인(大人)은 능히 이와 같으며
지도(智度)의 획득을 말미암기 때문에
비로소 부처님의 본체[佛體]를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수승한 선인[勝仙: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어찌하여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성문이나 독각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위[上]를 더 알아야 할 바가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이 지혜가 일체의 저 언덕[彼岸]에 도달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이 반야바라밀 외에 수승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삼세(三世)에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허공이 가없이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수승한 인연은 반야바라밀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으며,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문】이미 보리의 첫 자량을 대략 설명했으니,
두 번째의 자량을 이제 마땅히 설명해야 한다.
【답】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이 다섯 가지 외에는
모두 지도(智度)를 말미암기 때문에
바라밀에 포섭된다.
이 중에서 다나바라밀(陀那波羅蜜)이 두 번째 보리의 자량이 되니,
반야의 앞선 행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보리를 이루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니,
이 때문에 보시를 두 번째 자량으로 삼는다.
그 중에서 타인의 몸과 마음에 즐거움을 생기게 하므로 이름하여 보시라고 하지 괴로움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이다.
재시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공식(共識)과 불공식(不共識)이다.
공식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안[內]과 밖[外]이다.
자신의 지절(支節; 사지)을 보시하거나 몸 전체를 보시하는 것,
이것은 내시(內施)가 된다.
남자와 여자,
아내와 첩,
두 다리[二足],
네 다리[四足] 등을 보시하는 것,
이것은 외시(外施)가 된다.
불공식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가식(可食)과 불가식(不可食)이다.
이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몸 안에 수용하는 반식(飯食) 등의 물건을 보시하는 것,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可食]이 된다.
몸 밖에 수용하는 향과 만[香鬘]에 포섭되는 금ㆍ은ㆍ진귀한 보배ㆍ의복ㆍ땅과 전답ㆍ재물ㆍ동산과 연못ㆍ유원지 등을 보시하는 것,
이것은 먹을 수 없는 것[不可食]이 된다.
그러나 수용할 수는 있다.
법시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다.
법시로 인하여 유전(流轉)[예전에 나고 죽음이라고 말한 것은 바른 번역의 명칭이 아니라서 이제 유전이라고 고친다.
이후에 모든 유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 의미이다] 중에서 애호할 만한 신근(身根)의 경계를 낳는 것,
이것은 세간이 된다.
법시로 인한 과보가 유전을 초월해 벗어나는 것,
이것은 출세간이 된다.
그 재시와 법시에는 각각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유착(有着)과 무착(無着)이다.
자신을 위하거나 자생(資生)을 위하거나 수승한 과보를 위해서 상속을 희망하여 재물이나 법을 보시하면,
이것은 집착이 있는 것[有着]이 된다.
혹은 일체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하거나 혹은 장애가 없는 지혜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집착이 없는 것[無着]이 된다.
그밖에 다시 두려움이 없는 보시[無畏施] 등은 또한 재시 속에 수순해 들어간다.
저 두 가지 보시의 과보 및 여분의 기[餘氣][진액(津液)11)을 말한다.]는 자세하게 대승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여기에서는 마땅히 요약하여 게송으로 말한다.
반식(飯食)과 피복(被服)은
필요에 따라서 모두 보시하며
또한 화만(花鬘)ㆍ등(燈)과
말향(末香)ㆍ음악(音樂)을 보시한다.
혹은 모든 맛있는 것과
약물(藥物) 및 의침(猗枕)과
질병을 요양하는 데 필요한 것과
아울러 의료인과 급시(給侍; 시중)를 보시한다.
남녀와 아내와 첩
노비 및 창고와
장식한 모든 채녀(婇女)를
필요에 따라서 보두 보시한다.
소유한 모든 보물과
갖가지 장엄구(莊嚴具)와
코끼리ㆍ말ㆍ수레와 타는 것 등과
미묘한 물건을 남김없이 보시한다.
원림(園林)12)의 수도하는 처소와
연못과 우물ㆍ집회당(集會堂)과
토전(土田)과 아울러 잡다한 물건과
객사(客舍) 등을 모두 보시한다.
혹은 두 다리[二足]와 네 다리[四足]
혹은 다시 하나의 주저(洲渚; 모래톱)와
촌락과 국도(國都)와
그리고 왕의 영역을 전부 보시한다.
완호(玩好)13)한 물건을 보시하여
희망하는 자를 이롭고 즐겁게 하며
모든 중생의 의지가 되어서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두려움 없음을 보시한다.
그 버리기 어려운
손ㆍ발ㆍ눈ㆍ귀ㆍ코를 보시하고
또한 심장과 머리를 보시하며
온몸을 다 능히 버린다.
보시를 수행할 때에는
항상 받는 자의 입장에서
마땅히 복전(福田)의 생각을 내고
또한 친한 권속처럼 대하여야 한다.
보시하는 모든 과보에
선한 취집(聚集)을 구족하여
자신과 타인에게 회향하여
부처와 정토를 성취한다.
보살이 행하는 보시는
올바로 불체(佛體)에 회향하니
이 보살의 다나(陀那)를
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
이 언덕이든 저 언덕이든
능히 설하는 자가 없지만
보시의 과보가 피안에 도달하면
보시의 저 언덕[施彼岸]이라고 말한다.
이제 시주(施主)의 차별을 말한다.
애욕의 과보를 탐내지 않고
자비롭기 때문에 삼륜(三輪)이 청정하니,
정각(正覺)은 저 보시를 말하여
이것이 보리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미 이 일을 지었다고 하고
바르게 짓고 마땅히 짓겠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 베풀었다고 한다면
용임(傭賃:품삯)이지 보시가 아니다.
보시의 과보가 증대되기를 탐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즉각 능히 희사하는 것을
식리인(息利人:이자나 배당금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지혜로운 자는 시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증익되는 과보를 탐내지 않고
오직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면
이것을 진정한 시주라고 하며
나머지는 모두 상업적[商販]이다.
큰 구름이 두루 비를 뿌리는 것처럼
모든 곳에서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이것을 큰 시주라고 이름하며
나머지는 모두 적은 부분일 뿐이다.
보시 및 보시의 과보는
연민으로 필요한 자에게 주나니,
시주는 뭇 사람에게
마치 그 부모와 같다.
보시하는 물건과 받는 자
및 보시하는 자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항상 기쁘게 보시하는,
이것을 이름하여 시주라고 한다.
만약 부처님과
보리와 보살을 분별하지 않고서
보리를 이루기 위하여 보시하면
그는 마땅히 속히 성불할 것이다.
【문】이미 다나바라밀을 해설하였다.
이제는 마땅히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설명해야 한다.
【답】바라밀의 의미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시라(尸羅)의 의미를 이제 설명해야겠다.
시라이기 때문에 시라라고 말한다.
시라라고 말하는 것은 익혀서 가까이하는 것[習近]을 이르는데,
이것이 체상(體相)이다.
또 본성(本性)의 의미이니,
마치 세간에 즐거운 계[樂戒]나 괴로운 계[苦戒] 등이 있는 것과 같다.
또 청량(淸凉)한 의미이니,
후회하지 않는 인(因)이 되어서 마음의 뜨거운 걱정과 고뇌를 여의기 때문이다.
또 안은(安隱)의 의미이니,
능히 다른 세상에서 즐거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안정(安靜)의 의미이니,
지관(止觀)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또 적멸한 의미이니,
열반의 즐거운 원인을 얻기 때문이다.
또 단엄(端嚴)의 의미이니,
장식하기 때문이다.
또 정결(淨潔)의 의미이니,
나쁜 계[惡戒]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두수(頭首)의 의미이니,
무리 속에 들어가서도 겁약(怯弱)이 없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찬탄(讚歎)의 의미이니,
명칭을 능히 낳기 때문이다.
이 계(戒)는 몸ㆍ입ㆍ마음의 선한 행위가 굴러서 생겨난 것이다.
그 가운데 생명을 살해하는 것ㆍ주지 않는데 취하는 것[不與取]ㆍ음욕의 삿된 행위[欲邪行] 등을 멀리 여읜 것,
이 세 가지는 신계(身戒)이다.
망령된 말[妄語]ㆍ파괴하는 말[破壞語]ㆍ추악한 말[麤惡語]ㆍ잡되게 희롱하는 말[雜戱語] 등을 멀리 여읜 것,
이 네 가지는 구계(口戒)이다.
탐욕[貪]ㆍ성냄[瞋]ㆍ삿된 견해[邪見] 등을 멀리 여읜 것,
이 세 가지는 의계(意戒)이다.
몸ㆍ입ㆍ마음의 선한 행위가 굴러서 생겨난 이와 같은 열 가지 계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서 생겨난 열 가지 나쁜 행위에 대치(對治)하는 것이다.
그 열 가지의 악한 행위를 하(下)ㆍ중(中)ㆍ상(上)으로 항상 가까이하여 습득하기 때문에 지옥ㆍ축생ㆍ염마(閻摩)14)의 세계 등으로 떨어진다.
앞에서 헤아린 열 가지의 선한 행위에 대한 계는 깨달음의 분수[覺分]와 상응하지 않는다면 하ㆍ중ㆍ상으로 항상 가까이하여 익히기 때문에 복(福)의 상상(上上)의 차별에 따라 마땅히 하늘나라와 인간의 차별을 얻을 것이다.
깨달음의 분수와 상응하는 열 가지 선한 행위의 계는 상상(上上)으로 항상 익히고 가까이해서 자주 행하므로 마땅히 성문지(聲聞地) 및 보살지(菩薩地) 중에 굴러서 수승한 차별을 얻을 것이다.
또 이 보살계(菩薩戒)의 모임에는 다함이 없는 예순여섯 종류가 있는데,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는 바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요약하여 말하면 두 가지의 계가 있으니,
이른바 평등종시계(平等種蒔戒)와 불평등종시계(不平等種蒔戒)이다.
평등종시계란 이 선한 몸ㆍ입ㆍ마음의 행위를 쌓아 모음으로써 세세생생 혹은 영역[界],
혹은 부유함과 즐거움,
혹은 성문과 독각,
혹은 상보(相報),
혹은 정토,
혹은 성숙한 중생,
혹은 정변각(正遍覺) 등의 종자를 이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말하여 평등하게 종자를 이식하는 계[平等種蒔戒]라고 한다.
이것과 서로 위배되는 것을 평등하게 종자를 이식하지 않는 계[不平等種蒔戒]라고 한다.
다시 두 가지의 계가 있으니,
이른바 유작계(有作戒)와 무작계(無作戒)이다.
작위 하는 가운데 작위 하는 바가 있는 것을 작위가 있는 계[有作戒]라고 하며,
이것과 서로 어긋나는 것을 작위가 없는 계[無作戒]라고 한다.
다시 아홉 가지의 계가 있으니,
범부계(凡夫戒)ㆍ외도오통계(外道五通戒)ㆍ인계(人戒)ㆍ욕계천자계(欲界天子戒)ㆍ색계(色界)천자계ㆍ무색계(無色界)천자계ㆍ모든 학(學)과 무학(無學)15)의 성문계(聲聞戒)ㆍ독각계(獨覺戒)ㆍ보살계(菩薩戒)이다.
범부계는 태어나는 처소에 들어가므로 다한다.
외도오통계는 신통이 물러나므로 다한다.
인계는 열 가지 선한 업도[十善業道]를 다하므로 다한다.
욕계천자계는 복이 다하므로 다한다.
색계천자계는 선나(禪那)가 다하므로 다한다.
무색계천자계는 삼마발제(三摩鉢帝)16)가 다하므로 다한다.
모든 학과 무학의 성문계는 구경(究竟) 열반하므로 다하고,
독각계는 큰 자비를 결여하므로 다한다.
그러나 보살계는 다함이 있지 않으니,
이 계가 능히 모든 계를 드러내서 밝히기 때문이며,
종자가 상속하여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보살이 상속하여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여래의 계[如來戒]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보살계를 다함이 없다[無盡]고 말한다.
모든 보살계는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에 계바라밀(戒波羅蜜)이라고 말하는데,
이 가운데 수로가(輸盧迦)가 있다.
마치 아버지가 공력(功力)이 있는 아들을 애호하듯이
또한 스스로의 몸이 수명을 애호하듯이,
출리(出離)를 애호하는 계도 마찬가지이니
큰마음이 굳건한 자[大心健者]가 애호하는 바이다.
이 계는 모니(牟尼)가 익혀서 가까이 한 후에
욕망을 해탈하고 애욕을 여의었으니
까마귀와 비슷한 범부는 버리지만
지혜로운 자는 항상 이 계를 애호해야 한다.
이 계는 자신과 타인을 이익 되게 하고
몸을 단정히 장엄해 근심과 결핍을 여의게 해서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수승한 장엄이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 계를 애호해야 한다.
이 계는 타인의 힘을 말미암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구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두 자신의 힘으로 인하여 그것을 얻기에
그러므로 상인(上人)은 이 계를 애호한다.
재물과 국경(國境),
아울러 토지와
자신의 살갗과 살 및 머리를
모두 능히 버려도 계를 버리지 않으니
저 수승한 보리를 청정케 하기 위함이다.
가령 하늘나라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설령 지상에서 하늘로 승천하여도
더러움을 여의고 물듦이 없는 경지를 채우기 위하여
응당 결정해서 이동하지 말 것이다.
이미 계의 방편을 만족하면
이때 바로 제2지(第二地:離垢地)를 얻으며
이미 더러움을 여읜 청정지[離垢淸淨地]를 얻으면
이때에 마음이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다시 하늘나라ㆍ인간 세계ㆍ아수라의 세계와
축생 중에서 교화해야 할 자는
교화하는 방편을 잘 알고 나서
생각에 따라 그에게 가서 이롭게 한다.
혹은 보시로써 중생을 거두고
혹은 애어(愛語)로 그의 마음에 들어가며
혹은 다시 그에게 안온한 이로움을 주고
혹은 일을 함께하며 그 힘을 돕는다.
혹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 그 주인이 되고
혹은 하늘나라 무리에 기거하면서 자재하며
각각의 방편으로 그를 인도하여
전부 마땅히 백법(白法:선한 법,
바른 법)에 안치시키네.
참다운 계의 신통을 구족하므로
문득 큰 바다를 마르게 하고
세간이 다할 때 불길이 더욱 치성하여도
찰나에 전부 소멸시킬 수 있네.
세간의 갖가지 고뇌를 관찰하건대
고뇌로 병이 생기는 것은 친한 이를 여읜 탓이니
지혜로운 자에게는 계에 통달한 방편이 있어
세간의 친한 의지가 되어 수승한 도를 보여준다.
【문】이미 시라바라밀을 해설하였다.
이제는 마땅히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설명해야 한다.
【답】이 가운데 찬제(羼提:忍辱)란 몸이나 마음으로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하여도 그 의지로 인내하여 감당함으로서 교만하지도 않고 하열하지도 않아 마음에 물듦과 혼탁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여 찬제를 설명한다고 한다.
만약 자유롭게 설명한다면 세 가지로 시설할 수 있으니,
이른바 신주지(身住持)ㆍ심주지(心住持)ㆍ법주지(法住持)이다.
그 가운데 신주지의 인욕[身住持忍]이란 이른바 몸으로 조우하는 괴로움이다.
가령 외적으로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애호하지 않는 감촉이 낳은 몸의 괴로움을 인내하고 감당하며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것을 신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외적으로 낳은 것이란 이른바 음식[食]의 인연으로 인해 공포ㆍ성냄ㆍ어리석음이 일어나고,
또 모기[蚊]ㆍ등에[虻]ㆍ뱀[蛇]ㆍ호랑이ㆍ사자 등의 두 다리[二足]ㆍ네 다리[四足]ㆍ여러 다리[多足]가 있는 모든 마음이 있는 생물[有心物]이 한량없는 인연으로 몸을 핍박하여 고뇌하게 하거나 혹은 다시 찾아와서 손ㆍ발ㆍ귀ㆍ코ㆍ머리ㆍ눈ㆍ지절(支節)17)을 구걸하면서 그걸 절단하는 것이다.
이 끔찍한 일에 대하여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또한 요동치지 않는 일이 없는 것을 신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또 폭풍ㆍ치성한 태양ㆍ춥고 더움ㆍ비와 우박이 공격하여 접촉하는 인연으로 모든 마음이 없는 사물[無心物]이 찾아와서 핍박하여 고뇌하게 할 때 몸 전체가 괴로움으로 절실한데도 능히 안온하게 감수하는 것 또한 인욕이라고 한다.
또 몸 안에서 일어나는 영역[界]이 요동하는 인연으로 중풍[風]ㆍ황달[黃]ㆍ가래끓음[痰]ㆍ가슴앓이[*]가 일어나서 생기는 사백네 가지 질병이 극심해서 몸을 괴롭히거나 핍박하여 고뇌하게 할 때 인내하여 헤아리지 않는 것도 또한 신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심주지의 인욕[心住持忍]이란 욕하고 꾸짖음[罵詈]ㆍ성내고 혐오함[瞋嫌]ㆍ책망함[呵責]ㆍ훼방함[毁謗]ㆍ기세를 꺾어 욕보임[挫辱]ㆍ기만[欺誑] 등 애호하지 않는 말이 와서 핍박하여 고뇌하게 할 때 그 마음이 요동치지 않아서 혼탁하여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심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또 세간의 법에 접촉되는 여덟 가지,
이른바 이익을 얻음ㆍ이익을 잃음ㆍ좋은 명예ㆍ나쁜 명예ㆍ기만ㆍ칭찬ㆍ괴로움ㆍ즐거움 속에서 마음이 교만하거나 비굴함이 없이 동요하지 않음이 산(山)과 같은 것을 심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또 수면[眠]에 따르는 성냄을 단절하기 때문에 살해하는 마음이 없고,
한 맺히는 마음이 없고,
투쟁하는 마음이 없고,
소송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을 보호하며 타인을 보호하고,
중생 속에서 자비로운 마음이 상응하고,
자비와 함께 행하여 환희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항상 베푸는 마음을 갖는 것들도 또한 심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법주지의 인욕[法住持忍]이란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여실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밖[外]이란 이른바 꾸짖어 욕함[罵詈]ㆍ살해(殺害) 등이다.
꾸짖어 욕함은 소리[聲]와 글자[字]가 화합해서 동시에 흩어지지 않으니,
찰나이기 때문이며,
글자가 공(空)하기 때문이며,
소리가 메아리 같기 때문이라서 차례로 상응하는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중에는 꾸짖어 욕하는 일이 있지 않으며,
다만 모든 그 밖의 범부가 허망하게 분별하여 성내고 분노하는 것이다.
만약 글자와 소리의 자성(自性)의 뜻 속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면,
마음이 곧 수순하여 서로 위배되지 않고 평등하게 인욕하며 감수한다.
이것을 법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또 살해하는 자[殺害者]의 경우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몸은 해치는 자가 아니다.
몸에 만약 마음이 없으면 곧 초목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 등과 같기 때문이다.
마음도 또한 해치는 자가 아니니,
마음은 색(色)이 아니라서 접촉하여 장애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일의(第一義) 중에서는 살해하는 자가 없다.’
이렇게 관찰할 때 살해를 보지 못하는지라 능히 그것을 감당하여 인욕할 수 있다.
이것을 법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안[內]이란 안의 법[內法]을 관찰할 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색(色)은 포말의 모임[聚沫]처럼 인연 따라 일어나니,
동작이 없기 때문이고,
스스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고,
공하기 때문이고,
나와 내 것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수(受)는 거품[泡] 같고,
상(想)은 아지랑이[陽焰] 같고,
행(行)은 파초(芭蕉) 같고,
식(識)은 환상[幻]과 같아서18) 인연 따라 일어나니,
동작이 없기 때문이고,
스스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고,
찰나에 생겼다가 소멸하기 때문이고,
공하기 때문이고,
나와 내 것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색은 ‘나’가 아니고,
색은 내 것이 아니다.
이처럼 수ㆍ상ㆍ행ㆍ식도 마찬가지이니,
식은 ‘나’가 아니고 식은 내 것이 아니다.
이들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겨나고,
인연으로부터 생겨나면 자성의 생함이 없으니,
자성의 생함이 없으면 능히 해치는 자가 없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모든 법의 자성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을 법주지의 인욕이라고 한다.
몸[身]과 마음[心]과 법[法] 중에서 자성을 관찰할 때 곧 무생인(無生忍)을 수순하니,
이것을 요약하여 찬제바라밀을 설명한다고 한다.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자세히 말하는 바와 같으니,
이 가운데 성자(聖者)의 게송이 있다.
원수진 자[怨]와 친한 이[親]와 중간의 사람[中人]을
자비로운 생각으로 항상 평등해서
성내는 요인이 오히려 있지 않으니
어떻게 중생을 성나게 하랴.
선함을 배우고 익혀 항상 자애롭고
중생을 자기 자체와 동일시하여
평등하여 둘이 있지 않으니
어떻게 중생을 분노하게 하랴.
마음은 항상 성냄을 버려서 여의고
사랑과 기쁨을 많이 생하여
굳건한 자는 이미 장애가 없으니
어떻게 세상과 어긋나리.
모든 중생의 처소에서
항상 이롭게 하고 돕기를 구하니
어떻게 성냄을 일으켜
중생에게 해악을 가할 수 있으랴.
세간의 여덟 가지 법에 접촉하여도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비유하면 입으로 산을 불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응당 그는 인(忍)을 얻었음을 알아야 한다.
깊은 마음으로 모든 더러움을 여의어
장애되는 일도 능히 오염시키지 못하는 것이
진흙으로 허공을 칠하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그는 인을 얻었음을 알아야 한다.
몸에 애착하는 바가 없고
목숨에 대해서도 또한 탐내지 않으며
온갖 원한도 모두
그 상속하는 의지를 움직일 수 없다.
사랑스럽지 않은 소리에 대해서도
마음이 안온한 것이 메아리 같고
모든 언어도 또한 환상과 같다면
인욕하는 마음이 문득 손[手]에 있으리.
다섯 무리[五衆] 속에서
자아[我] 및 목숨의 모습을 취하지 않고
몸도 또한 내 것이 아니니,
마땅히 그는 인(忍)을 얻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나와 내 것의
자성(自性)을 보지 않는다면
곧 무생인(無生忍)을 얻어서
불자(佛子)는 가장 안온하리라.
---------
1 석(釋)은 제석천(帝釋天:s´akra),
범(梵)은 우리 만물을 창조한 브라흐만(brahman) 신(神)을 말한다.
둘 다 외도의 신이었으나,
나중에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2 술 같은 것을 뜨는 국자와 비슷하게 생긴 도구.
3 국왕이 즉위할 때 관정(灌頂:abhisseka)을 행하는 것처럼,
보살이 수행을 구족하여 부처님 지위에 오르는 단계를 말한다.
여기서는 보살의 수행이 원만한 것을 의미한다.
4 bmi의 역어.
보살이 수도하여 실천하는 단계로서,
여기서는 십지경(十地經)에서 말하는 화엄십지(華嚴十地)를 의미한다.
5 도솔천(tusita)을 말한다.
욕계의 여섯 종류의 하늘 가운데 네 번째의 하늘.
장래 성불하는 보살은 이 하늘에 올라간다고 전해진다.
6 브라흐만 신을 추종하는 바라문 교도.
7 Menpranidhne.
명(冥,
me)은 안치하다[置,
pranidhna]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것은 다음의 망마니(茫摩泥)와 함께 어머니[母,
mt]의 의미를 해석해 내고자 하는 것으로,
mt의 어원을 me 또는 m로 하고,
문법의 해석으로부터 ‘안치하다’ 또는 ‘헤아리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8 Mmne.
망(茫,
m)은 ‘헤아리다(量,
mne)’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9 Vimarakrti.
재가 보살이었던 유마힐(維摩詰) 거사를 말한다.
10 완전한 지혜.
지혜에 의하여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
11 피,
침,
눈물,
땀 등 인체 내 체액을 총칭한 것.
12 집터에 딸린 수풀.
13 진귀한 노리개,
장난감.
14 Yama의 음사.
지옥세계의 심판자.
염라대왕을 말한다.
15 학(學)은 네 가지 사문(沙門)의 과보 중 앞의 세 가지인 예류(預流)ㆍ일래(一來)ㆍ불환(不還)을 가리키고,
무학(無學)은 네 번째의 아라한(阿羅漢)을 가리킨다.
16 sampatti의 음사.
앞의 선나(禪那)와 함께 선정[定]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로 두 낱말을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17 두 팔,
두 다리와 온몸의 뼈마디.
18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온(蘊)을 말한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2/26/수/21:26
[오래된조각글재정리]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사이트가없어진개인촬영사진 = 사진파일명만 기재
◈Lab value 불기2562/02/25/일/22:57 |
시장에 사람이 가득할 때 ☎잡담☎ ♥ 잡담 ♥한 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인과
Lab value 불기2564/02/26/수/21:30 지난 조각글 정리하면서 글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4088#1760 θθ |
>>>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enoir profile-of-andre-leaning-ove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flowers-1559344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sangbongsa_11-05146
♥테리걸 Glenn Mckimmin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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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를 수리하는 테이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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