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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Pierre Bachelet - Derriere Le Grand Abat-Jour.lrc
♥ 잡담 ♥시설철거과정에서 나의 분실과 마음
원래 조각글을 매일 하나씩 꼭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루에 하나씩 올리다보니 꼭 올려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조각글이 한 번 밀리자, 계속 밀렸다. 그래서 숙제처럼 되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실질적인 연구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각글은 틈이 나면 올려나가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오늘은 북미와 중미 국립공원 지역을 방문하면서 목록을 작성 중이다. 처음 세계 사찰 - 세계 각국의 도시 - 대학교 - 국립공원 - 그리고 박물관 이렇게 목록을 작성해보고자 기획했다.
그런데 목록에서 검색이 되어도 구글맵에서 검색이 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구글맵이 지원하지 않는 국가들은 목록작업 순서를 뒤로 돌리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빠진 국가가 많다. 그렇다고 그 곳에 아름다운 풍광이나 방문해볼 의미가 있는 장소들이 많다.
다만 그런 경우는 일반 검색사이트에서 검색되는 자료를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일단 뒤로 돌리는 것 뿐이다.
그런데 목록에서 뽑혀 나오는 장소를 방문하다 보면 평소 잘 알지 못하는 장소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동떨어지고 생소하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다른 이의 잔치집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장소를 살펴보는 일은 자신의 삶과 별 관련없이 느껴진다. 어떤 의미를 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객적고 쓸데없고 공연한 일로도 느껴지게도 된다.
그런데 이처럼 그 때 그 때 뽑혀 나오는 장소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다.
알지도 못하고 한번 방문한 적도 없다. 그곳에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 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여하튼 세계의 어느 한 지점을 방문해본다.
그러면 그곳엔 그런 건물도 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꿈꾸면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보게 된다. 그리고 또 평소 잘 보지 못하던 아름다운 풍광도 보게 된다. 그래서 세계는 넓고 제각각 생활하는 모습도 제각각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대하는 일반적 생활모습들도 이와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무언가 어떤 소원을 갖고 또 무언가 분주히 하면서 그렇게 제각각 세계 각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본인이 현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곳은 과연 아름다운가.
본인 입장에선 큰 불만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그런 장소는 아니다. 어떤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거의 삶의 대부분을 여기에서 생활한다. 또 별일이 없으면 또 이곳에서 마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실 본인에게 의미있는 장소는 이곳이다.
아름다운 풍광이 보이는 그런 곳은 어떻게 보면 스쳐지나가며 잠시 살펴보는 곳일 뿐이다.
시간날 때마다 세계 각 곳을 이곳 저곳 자주 방문한다. 그러면 이런 각 세계의 모든 내용이 지금 생활하는 이 곳에 모두 다 함께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시간을 보내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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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Julien Clerc - Le Piano Elephant.lrc
마음 현상을 살피면서 마음을 살피기 위하여 일정한 시설을 하게 되는 사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런 시설을 통해 마음과 그 본 사정을 살핀다. 그리고 그 다음음에는 처음에 시설한 시설을 철거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앞에서 살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내용은 자신 마음안 내용임을 살폈다. 그리고 자신이 외부세계라고 보고 대하는 내용도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또 한편 그것들은 그에 대해 자신이 일으키는 관념분별에 해당하는 그런 내용도 아니다. 또 그런 현실 내용은 마치 꿈과 그 성격이 같다. 그래서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살펴왔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거리를 거닌다고 하자. 지나 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또 여기저기 오가는 자동차와 건물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 다시 그것들은 또 외부세계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정신과는 별개의 외부물질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모든 이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대단히 실답고 진짜처럼 여겨지는 내용이라고 잘못 대하기 쉽다. 이를 대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두 입장이 서로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양 입장을 오가면서 살피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심하게 어리둥절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경전 내용을 통해 약간은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거꾸로 뒤집힌 전도망상분별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살아가면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오늘 무량의경이 뽑혀 살핀다.
무량의경은 그간 두 번이나 살핀 적이 있다. 조각글도 밀린 상태라 핵심 부분만 올려 놓고 살핀다. 그런데 무량의경에도 그런 내용이 제시된다.
...
중생들은
허망하게 계교하여
이것이다, 저것이다,
얻는다, 잃는다 하고
착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어
여러 가지 나쁜 업을 짓고,
여섯 갈래[취趣]를 윤회하면서
여러 고통을 받다가
한량없는 억겁(億劫)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도다.’
...
이런 부분이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이런 구절은 결국 현실에서 자신이 대하는 현실상황이 이런 상태임을 제시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현실내용과는 극과 극의 차이가 있다.
한량없는 억겁동안 자신이 살아가고 존재하는가도 의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이 아닌 고통이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심히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
이런 부분이 결국 일반적인 입장에서 잘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그래서 망상분별을 정상적이고 올바른 판단으로 여기게 되는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처음 생을 출발할 때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배경사정을 살피게 된다.
결국 평소에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그런 내용이 그런 내용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갖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그런 바탕에서 수행의 방향으로 전환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업의 장애가 자신을 생사고통의 현실에 묶어 놓는다. 그것이 생사고통을 받게끔 하는 핵심이 된다.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그외 나머지 부분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처음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일정한 시설을 하게 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을 놓고 행하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행하던 업을 제거한다.
그로 인해 무량겁에 걸쳐서 받아나가게끔 되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작업 목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제거 작업을 행하면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던 입장에서는 대단히 어리둥절함을 느끼게 된다.
평소 대부분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집착을 일으켜서 대한다. 각 주체는 세상 일을 널리 관심을 갖고 대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의미를 갖는 근본은 결국 그것이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된다. 그리고 그 정도에 비례해서 그것들이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 부분이 곧 그 주체가 살면서 일으키는 온갖 번뇌의 근원이 된다.
또 한편 그는 이후 그런 번뇌에 묶여서 평생 고통스런 사역을 당한다. 또 다른 중생도 그렇게 사역을 시켜 나간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그 근원은 그렇게 매 순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 부분을 놓고 온갖 신경을 다 기울이며 임한다. 그의 생활이나 그가 관심은 그런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다.
수행은 이 부분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일으키는 온갖 쓸데없는 망상적 소원과 그에 바탕해 행하는 온갖 업을 다 제거한다.
그래서 이를 대단히 황당하게 여기게 된다.
일반적으로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대하는 온갖 모습을 다 실답게 여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 모든 내용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그 모습이 근원이 된다. 그래서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근원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시설로 그런 작업을 행하게 되는가 하는 취지는 처음에 살핀 것과 같다.
그 주체가 현실에서 겪는 무량겁에 걸친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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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는다는 것도 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그런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작업을 한다는 것도 또 사실은 그 입장에서는 대단히 어리둥절하게 느껴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그 내용을 놓고 그런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그리고 자신의 재산 가족 지위 명예 이런 것이 침해받거나 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할 때 그런 고통을 해결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그런 자신을 그 현실에서 아예 지워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니, 대단히 엉뚱한 내용이라고 이를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를 비유하면 손에 종기가 나서 그 종기로 인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의사를 방문하니
그런 고통이 문제되는 손을 아예 잘라서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제시하는 경우처럼 위 내용을 대단히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는 의미다.
자신의 생사고통이 문제인데 왜 거기에서 그 생사고통만 제거할 일이지 왜 그런 자신을 아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하는가. 그러면 그전까지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한 그 자신은 이후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의문이 이어지게 마련이라고 본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의문이 현실과 마음의 본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 일정한 시설을 하고
그런 시설을 통해 기존에 가졌던 망상분별과 집착과 그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제거하여 그 주체가 무량겁에 걸쳐 받게 되는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작업을 마치고
그리고 이후 그런 작업을 위해 시설한 내용을 다시 제거하는 내용과 깊게 관련이 된다고 본다.
위 과정에서 기존에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그것이 그런 자신의 본 정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내용을 기준으로 잡은 상태에서 그 내용을 위 작업을 통해서 제거한다고 하니,
앞과 같이 종기가 문제되니 그 종기가 난 손이나 자신 자체를 다 제거해야 한다는 요구처럼 엉뚱하게 이것을 대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제 그 종기가 그로 인해 없게 된다지만, 그런 경우 정작 처음에 자신이 가장 집착을 두었던 그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한다면 누가 어떻게 어떤 현실에서 그런 것을 하고 그렇게 되면 어떤 누가 그로 인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 어리둥절한 상태로 남게 되기 쉽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문제는 위 작업에서 그 작업을 통해 철거하고 제거하는 문제현상과 작업을 마치고 제거해야 한다는 시설의 내용에 대해
평소 자신이 일으켰던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이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이해하면 그렇게 눈을 떠 대하는 내용은 그 자신의 마음내용인데 그러나 거리에서 거리의 사람이나 자동차나 건물을 대하면 왜 그것을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자꾸 여기게 될까.
그런 입장에서 자신이 눈을 감으면 그 직전까지 그렇게 외부세계나 외부대상이고 외부물질이고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며 대하던 그 내용을 보지 못하게 되는데
이 때 앞과 같이 생각한 입장은 설령 자신이 보지 못해도 그 직전까지 그렇게 대한 그 내용들이 그 외부에 그대로 그렇게 있다고 또 여기게 된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그 모습을 다시 대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눈을 감았을 때 그렇게 외부에 그대로 있다고 여긴 그 내용을 다시 그렇게 얻는다고 이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뜰 때 얻는 그 내용이 그래도 그런 외부의 객관적 실재이자 외부 세계이고 외부 대상이고 외부물질인 것은 마찬가지라고 이 양 경우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엉터리 망상분별인데 그렇게 자신이 눈을 감고 뜨는 동작을 반복하는 가운데 눈을 뜨면 대하게 되는 그런 내용을 그렇게 객관적 실재로서 실답다고 이해하면서 현실에 임하게 된다고 보게 된다.
사실은 이 상황에서 그 자신은 자신과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실재영역의 내용에 대해 그렇게 건너뛰지 말고 그런 실재는 과연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감은 상태와 일치한다고 할 것인가 등을 놓고 잘 검토해야 하는데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자신이 눈을 떴을 때 얻은 모습을 그대로 실재라고 여기면서 눈을 감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무조건 밀어 넣고 눈을 떴을 때 얻게 되는 내용을 그대로 실다운 내용이라고 이해하고 집착하고 현실에 임하는 것이 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해가 결국 평소 자신이 현실내용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킨 후 그것을 견고하게 유지하게 하는 또 하나의 사정도 된다고 본다.
과거에 자신이 대하는 현실내용을 놓고 그런 현실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이 있음을 제시한 바 있다.
다만 이들 여러 입장은 여기에 되풀이하지 않고 관련 내용을 살핀 부분을 찾아서 링크를 걸어 놓고 넘어가고 이후에 다시 좀 더 자세히 살펴나가려고 하는데 여하튼 앞과 같은 입장도 그런 여러 입장의 하나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있다.
여기서는 다시 앞에서 살핀 문제 즉 일정한 시설을 하고 그 시설을 통해 평소 앞과 같은 형태로 일으킨 여러 망상분별과 집착 그리고 그에 바탕한 업을 제거하여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작업을 한다고 할 때 그로 인해
자신이 평소 집착하고 대하던 자신이 함께 제거된다면 그렇게 분실되어버린 자신은 이후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이 문제를 살피려면 일단 기존에 살핀 그림들을 다시 올려 놓고 살피는 것이 편하다고 보게 된다.
먼저 위 그림부터 살피자. 이는 1이 눈을 떠 대하게 되는 모습을 위 그림처럼 표시한 것이다.
그 상황은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거리에 서서 다른 사람이나 자동차나 건물도 보는 그런 상황일 수 있지만, 여기서는 1 이 4 라는 꽃을 놓고 그것을 다른 영희나 철수에 해당하는 2,3과 같은 다른 이가 관찰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상황을 그려 놓은 것이다.
이전에 많이 반복해 살핀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만 살피기로 한다.
위 상황에서 2 에게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라고 하면 2 는 무엇이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보고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는 1의 입장에서는 그런 변화는 잘 파악되지 않는데 다만 그 상황에서 그런 변화가 있음을 2 가 보고하게 되니, 그런 변화는 2 의 영역에서 있는 변화라고 보게 되고 그래서 2 가 눈을 뜰 때 그 순간에 보이게 된다는 그런 내용은 2 주체 안의 5 ^ 와 같은 부분에서 얻는 그런 내용이라고 추리하게 되고 그래서 그 내용을 위 그림처럼 그려 제시하게 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 역시 엉터리 추리이고 망상분별의 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런 내용을 그대로 놓고 앞에서 제시한 문제가 무슨 문제인가를 살펴나가게 된다고 제시하였다.
위 그림을 놓고 보면 2 는 자신이 보는 2 ^ 와 같은 부분을 놓고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생활하는 상태라고 보게 된다.
그것은 알고보면 평소 1 이 눈을 떠서 대하는 1 과 같은 부분 즉 눈썹이나 이마도 보이지 않고 허리도 보지 못하는 1과 같은 부분을 1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평소 생활하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각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그 각 부분을 위처럼 표시하면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앞에서 말한 시설의 하나인 것이다.
즉 4 와 같은 부분을 저렇게 표시해놓고 그것을 꽃이라고 표현하고 논의를 시작한다거나 2 와 3 과 같은 부분은 다른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논의한다거나 1 과 같은 부분은 1 자신이라고 표현하고 논의한다거나 하는 것도 하나의 시설이고
이렇게 눈으로 보는 그 일체를 색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역시 또 하나의 시설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보는 내용들의 본 사정이 어떤 것인가에 관련해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시설을 통해서 논의하는 내용이란, 2 의 입장을 놓고 보면 2 는 2 ^와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보고 생활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 2 가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분별하는 그런 일체의 내용은 2 ^와 같은 부분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 먼저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2 가 보는 5 ^ 안의 다른 내용들이 2 밖의 외부세계나 2 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거나 2 의 정신밖에 별개로 있는 외부물질이고 그리고 그 내용이 1이나 2나 3 과 같은 영희 철수를 비롯해 온 사람들이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는 이해가 엉터리이고 잘못된 망상분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은 2 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실은 1 이 대하는 위와 같은 내용 역시 그 사정이 위와 같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런 시설을 통해서 이 사정을 살피면 결국 평소 1 이나 2 나 3 등등이 제각각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그런 내용이 사실은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내용을 제거하다보면 이제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던 그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또 그런 부분이 자신이 아니라면 이런 내용을 관하고 또 이에 대해 평소 이해하던 망상분별도 제거하고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어떤 수행을 현실에서 행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본 정체는 과연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어져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단 1 이 보는 자신으로서 1 과 같은 부분 또는 2 가 2 자신이라고 보는 2 ^ 와 같은 부분을 놓고 그에 대해 각기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망상분별이라고 하여 그것을 제거하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앞에서 어떤 시설을 통해서 한 주체가 대하는 내용의 본 정체를 살피고 그런 시설을 통해서 평소 가졌던 망상분별과 집착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제거해서 생사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할 때
이 과정에서 마치 그 이전까지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던 자신까지 함께 제거되고 분실되버리는 것처럼 여기고 어리둥절하게 되므로 이것이 또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아래 그림을 놓고 이어 살피기로 하자. 다만 일단 글이 조금 길어졌으므로 다시 조금 쉬고 이어 살피기로 하자.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쓰는데 자꾸 3 명이 어디서에서인가에서 쫒겨 났다는 듯한 메세지를 듣게 되는데
이것이 위 그림에서 보는 1,2,3, 을 놓고 앞과 같이 여러 내용을 시설해서 살펴서 거기에서 그런 각 주체는 얻을 수 없다고 하게 되면 이로 인해 그 1,2,3에 해당하는 3 명이 제거되고 없어지고 분실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상과 관련되는 내용이 아닌가 시감상하게 된다.
이런 경우 원래 각 주체가 그런 내용을 놓고 모든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고 초점을 맞추고 평소 임해왔기에 그런 상태가 되면 상당히 당황하고 어리둥절하게 되는 것은 사실인데 그러나 여기에는 기존에 가졌던 그런 망상분별이 여전히 그렇게 작용해서 그런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조금 잘 살피고 사실 그런 기존의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할 때 그렇게 어디에서 쫒겨나고 없어진다고 이해하는 현상은 알고보면 결론적으로 기존에 생사고통에 묶여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는 풀려나는 한편 대신 무량겁에서 걸쳐 무량한 수명과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광대무변한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성취해나가는 상태로 전환하는 바탕이 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과정에서 앞과 같은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하여 무언가를 시설해서 그렇게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나중에 그런 작업에 필요한 시설은 시설대로 다시 철거한다고 할 때 철거해야 할 내용과 굳이 철거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 또는 철거하면 오히려 곤란한 내용들을 놓고 기존의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이를 대해서 이들을 서로 혼동하기에 그런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정리해 살핀 부분은 찾지 못했다. 그런데 계속 검색해 이를 찾으려 하다보면 차라리 지금 다시 글을 쓰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게 될 것 같아서 일단 불충전하지만, 대략적으로 살핀 내용을 링크를 걸고 ㅂ 그와 관련된 내용을 일단 아래에 살피고 넘어가기로 한다.
처음 1 이 눈을 떠서 위와 같은 내용을 보는 경우 또는 2 가 눈을 떠서 5 ^ 와 같은 내용을 보게 되는 경우를 놓고 각 주체가 이를 무엇이라고 이해하는가를 살폈다.
그런데 여기서 이와 관련해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실재에 관한 여러 입장들이 어떤 입장들이 있고 그 각 입장의 문제점을 무엇인가를 살피기 전에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란 어떤 연유로 그런 내용을 문제삼게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현실 상황은 이렇다.
어떤 주체가 눈을 뜨면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보게 되지만 여하튼 1 은 1 대로 2 는 2 대로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 거리에 서서 실험한다면 거리에 오가는 사람이나 자동차나 건물 등도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눈을 감으면 또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실험을 반복하다 보면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그런 내용은 자신의 눈이 관계해서 얻는 감각현실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귀나 코 입 몸 등을 통해 얻는 다른 감각현실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눈을 통해 얻는 위와 같은 감각현실을 하나 놓고 살피는 내용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보는 가운데 일단 눈을 통해 얻는 위 내용을 놓고 실재의 문제를 논의해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란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우선 눈을 뜨면 위와 같은 모습을 보다가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얻지 못하게 됨을 반복해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눈을 감아 그 직전에 보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면 그 상태에서 그 직전까지 눈을 떠 대하던 그 모습은 그로 인해 이제 완전히 사라져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뜨던 감던 이와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하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자신과 관계없이 별도로 실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라는 것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즉,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이 무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어떤 이가 눈을 뜰 때 얻는 내용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이미 반복해 제시했다.
즉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런 감각현실 내용을 놓고 그 주체는 그것이 곧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정신과는 떨어져 있는 정신과는 별개의 외부물질이고 그리고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비롯한 모든 이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며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했다.
이것이 망상분별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살폈지만, 그러나 여하튼 위와 같은 입장도 실재에 대한 하나의 입장이라고 볼 수는 있다.
그래서 그것을 실재에 대한 하나의 입장으로 1 로 표시해 정리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 실재란,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그 내용이 곧 외부의 객관적 실재다. 이런 입장이다.
이 경우 만일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얻는 감각현실을 그대로 자신의 주관과 관계하지 않고도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런 내용은 왜 자신이 눈을 감고 뜨면 그에 따라 사라지고 얻지 못하거나 얻게 되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그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용은 잘못이고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은 그의 주관이 관계해서 그의 마음안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마음안에 머무는 마음내용인 것이어서 이들 내용은 자신의 주관과 관계하는 내용으로서 자신의 주관과 관계하지 않고 그대로 실재하는 어떤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 내용이 마음내용이고 실재가 아니라고 보는 경우에는 다시 자신의 주관과 관계하지 않고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은 무엇이고 그런 실재는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감각현실과는 어떤 관계라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다시 다음과 같은 여러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2-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그 자체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과 그대로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즉,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면 그 내용은 그의 마음안 내용이지만, 그런 상황에서 어떤 주체가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은 그의 마음 밖에 그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재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이다.
결국 이는 사실은 위 그림에서 1 이 2 를 관찰하고 추리한 내용처럼 그 관계를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2 가 눈을 떠서 4 ^ 와 같은 꽃의 모습을 본다면 그 내용 자체는 2 의 마음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2 의 마음 밖에 4 ^와 일치하는 4 와 같은 내용이 그처럼 그대로 일치하는 형태로 실재하기에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2 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결국 2 마음 밖에 실재하는 무언가를 놓고 그와 그대로 일치된 내용을 마음에 비추어 주는 것이기에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입장은 우선 어떤 주체도 그런 문제되는 실재를 직접 얻지 못하므로 현실적으로 앞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단 하나도 얻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게 된다.
또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는 그런 감관이나 주체와 관련되지 않고도 그대로 실재하고 본 바탕이 되는 어떤 내용을 찾는 것인데
감각현실이란 각 주체별로 그리고 각 주체의 각 감관별로 그리고 각 상황별로 각기 다른 내용을 그 관계에서 달리 얻게 된다고 이해하는 내용인 한편, 그처럼 각 주체나 감관별로 그 관계에서 달리 얻는 어떤 내용을 곧 실재와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보는 가운데 이를 실재 영역에 밀어 넣게 되면,
이는 처음에 어떤 주체의 주관과 관련되지 않고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을 실재라고 하여 문제삼은 것과는 어긋나는 결과가 된다는 문제가 있게 된다.
3 - 한편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을 실재와 그대로 일치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조금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즉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은 그것이 그대로 곧 실재의 내용인 한편, 또 자신이 눈을 떠서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는 이처럼 그 지위나 성격이 다른 내용이 그렇게 겹쳐있다고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런 상태로 겹쳐 있는 내용 가운데 눈을 감으면 사라지는 부분은 그 사정때문에 그런 부분은 감각현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실재라고 보아야 하는데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뜰 때 얻는 내용 가운데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없이 사라지거나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있는 어떤 내용을 그 안에서 얻을 수 없다는 문제를 보게 된다.
4 또 다른 입장은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실재와 그대로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여하튼 이런 내용을 얻게 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눈을 떠서 얻는 내용과 어느 정도 유사하거나 그와 비례하는 어떤 내용일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앞의 2 의 입장과 같은 문제점을 다시 보게 된다. 우선 무엇과 무엇이 유사하다거나 비례관계가 있다고 하려면 그런 관계를 정립할 내용을 실재에서 단 하나라도 얻은 바탕에서 그런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데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단 하나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관계 자체를 정립한 근거가 없는 것이 문제점이다.
그리고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은 눈으로 얻는 시각정보나 귀로 얻는 청각정보, 코로 얻는 후각정보 혀로 얻는 미각정보 몸으로 얻는 촉각정보 사이에서부터 그런 유사 비례 관계는 있다고 보기 힘들고
또 앞의 입장에서 본 문제점과 마찬가지로 각 주체나 감관별로 달리 얻는 이런 감각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그와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을 실재라고 보고 실재 영역에 밀어 넣게 되면,
이는 역시 앞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어떤 주체의 주관과 관련되지 않고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을 실재라고 하여 문제삼은 것과는 어긋나는 결과가 된다.
5 한편 또 다른 입장은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마음안 내용으로서 이런 내용을 얻게 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며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은 이 내용에는 없다고 제시하는 한편, 여기서 문제삼는 외부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는 결국 어떤 주체가 얻는 현실내용은 오로지 그의 마음을 바탕으로 마음의 변화를 통해 얻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또 그런 마음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정신을 바탕으로 이런 현실 내용을 얻게 된다고 이해하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주체가 얻는 일체 내용이 마음내용이고 그 내용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 없다는 점은 긍정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앞과 같이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고 찾을 때 그런 실재가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한다고 볼 수 없기에 문제가 있다.
즉, 앞과 같이 실재가 무언가를 찾을 때 각 내용을 마음에서 얻는 주체로서는 마음 밖의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어떤 주체도 그런 마음 밖 실재 내용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고 보지만, 이는 각 주체가 그런 실재 내용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고 그런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이 곧 실재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면 눈으로 소리를 얻으려 해도 눈의 특성상 끝내 소리를 얻지 못한다고 보지만, 그렇게 '얻지 못한'다는 사정만으로 귀로 얻는 소리를 '없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5 -1 그리고 일단 앞 5 와 같은 입장에서는 다시 세상의 모든 일체 내용이 그런 근본 정신을 바탕으로 그것이 변화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는 한편 세상에는 그런 근본정신이 단 하나 밖에 없다고 보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어떤 주체가 자신의 마음에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가 영희나 철수를 비롯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명을 보는 경우에도 그런 사람이나 다른 생명 역시도 오로지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그 마음 하나에 모두 다 포함된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마음내용에서는 반복해서 다른 주체가 자신과는 다른 내용을 얻고 그런 내용을 보고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모두 하나의 마음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산수문제가 제출되면 어떤 이는 그 답을 모르는데 또 다른 이는 알아서 대답한다면 왜 하나의 마음에서 그런 현상을 보게 되는가하는 문제와 함께 또 그 마음에서 보는 여러 주체 가운데 한 주체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왜 그런 상황에서 다른 주체는 또 그렇지 못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여하튼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모두 마음안 내용인 것이어서 그 주체는 그런 마음에 얻어진 그런 내용외에 마음 밖의 다른 주체의 마음이나 어떤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 경우도 역시 앞에서 살핀 것 같이 그 주체가 그런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 곧 그런 내용이 일체 전혀 '없다'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5-2 그런데 또 모든 일체가 그런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또 그런 근본정신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주체마다 각기 그런 근본정신을 갖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또 앞과는 반대되는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한 주체는 자신 마음내용만 얻을 수 있을 뿐이고 마음 밖의 다른 주체의 마음이나 어떤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근거로 그런 다른 주체나 그 주체의 마음이 '있다'고 제시할 수 있는가가 또 문제된다.
그것은 그 자신이 다른 주체의 마음을 직접 얻어서 그런 것인가. 우선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그렇게 얻은 다른 주체의 마음은 그의 마음안에 포함되는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자신의 마음이 그런 상대의 마음에 포함되어서 그렇게 된다고 볼 것인가가 또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일반적으로 각 주체는 자신의 마음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하지만, 또 다른 이의 마음 역시 사정이 그와 같이 직접 보거나 얻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므로 위와 같은 주장은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각 주체마다 각기 마음이 따로 있다는 주장을 하는 근거가 결국 자신이 눈으로 보는 다른 이의 형체때문에 그 형체에 따른 어떤 주체가 자신 마음 외부에 있고 그래서 그런 주체가 있다고 보게 되고 그리고 그런 주체는 그런 마음을 갖기에 또 자신과 언어소통을 하거나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라면
이는 결국 처음에 자신이 마음으로 얻는 내용 각 내용마다 마음 외부에 그런 내용이 그대로 일치하거나 유사한 형태로 있다고 제시한 처음의 입장들과 같아지고, 그리고 그 각 주장에 지적한 문제를 같이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 주체가 모두 마음내용인 것이고 어떤 주체도 문제되는 마음 밖의 실재를 직접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런 상태에서 마음 밖에 그것이 어떤 사람이나 생명이거나 또는 단순한 사물이던 그런 어떤 것이 '있다' '없다' 어느 쪽으로도 단정할 도리는 없다는 문제점이 있게 된다.
6 한편 또 다른 입장은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마음안 내용으로서 이런 내용을 얻게 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며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은 이 내용에는 없다고 이해하는 것은 앞과 같지만,
그러나 여기서 문제삼는 외부 실재는 진짜라고 볼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내용이 없는 가운데[무아, 무자성] 또 앞의 입장과는 달리 그렇다고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할 그런 것도 아닌 가운데 그러나 그 내용을 어떤 주체도 직접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실재는 결국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는 그것이 a 이다 아니다 -와 같다. - 와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온갖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는 것으로 [불이] 결국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도 또 다른 입장을 더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략 위와 같은 여러 입장을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에 대한 입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위와 같이 대략적으로 살폈다.
내용이 너무 길어졌지만, 이는 결국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살피는 과정에서 문제되고 살펴야 하는 내용으로서 일단 대략적으로도 살펴야 한다고 보고 함께 살핀 것이다.
글이 길어지기도 하고 또 그 내용도 각 입장별로 상당히 복잡한 측면이 있으므로 조금 쉬고 처음에 살피고자 한 문제를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앞에서 한 주체가 얻는 현실내용과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관계에 대한 여러 입장을 살폈다.
그런데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왜 살피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런 내용은 어떤 본 바탕에서 얻게 되는 것인가가 궁금해서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지적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수행과 관련해서는 다음 취지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우선 한 주체가 얻는 현실 내용에서 그 주체가 원하지 않는 생사고통이 있다고 여길 때 그 생사고통의 본 정체를 살피고 그 생사고통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 이 실재를 살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나 생멸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실의 본 바탕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서이다.
이미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되는 사정을 살필 때 그 꿈은 꿈으로서는 대단히 생생하게 얻지만, 그 꿈은 그런 조건 상황에서만 얻는 임시적인 내용으로서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고 그 꿈에서 기대하는 다른 성품도 갖추지 못한 내용이어서 실답지 않다고 판단하게 되는 사정을 보았다.
침대에 누어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황금을 얻고 그 황금을 바다에 빠뜨려 잃어 버렸다고 하자. 그래서 어떤 이가 꿈을 깨어나서 대단히 아쉽게 생각하며 통곡하고 혹시나 꿈에서 빠뜨린 황금을 다시 찾을 수 있는가 하고 침대에 자신이 누었던 위치와 꿈 속에서 꾼 바다를 비례관계를 잡아서 그 곳을 찾고 그 곳을 어떻게 수리하거나 만지면 다시 꿈을 꿀 때 잃어 버린 황금을 찾게 되지 않을까 여기고 침대 여기저기를 만진다면 어떻게 보게 되는가.
꿈에서 생생하게 황금을 얻었다고 그가 여기지만, 그것은 그런 상황에서만 잠시간 얻은 꿈 내용으로서 비록 그 상황에서는 대단히 생생하고 진짜처럼 여겼겠지만, 그 황금을 얻었다고 해서 없던 황금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잃었다고 해서 있었던 황금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결국 그 꿈 속의 황금이란 실답지 않은 것이다. 꿈 속에서는 진짜 황금처럼 여겼겠지만, 그 꿈 속에서도 황금이 갖는다고 볼 다른 성품이 있는가를 찾아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꿈이 이처럼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 꿈 안에서 그 꿈을 놓고 검토해서라기 보다는 그렇게 꾼 꿈 내용을 놓고 그런 내용이 다른 현실 영역 등에서 얻어지는 내용인가를 살핀 가운데 그 꿈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펴서 꿈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게 되면 이제 그런 바탕에서 꿈에서 얻었다거나 잃었다는 황금에 집착하면서 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취지로 그렇게 생생하게 꾼 꿈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고 그런 사정을 이해한 바탕에서 꿈에 대해 갖는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고 해서
그렇다고 그런 꿈을 그렇게 생생하게 꾼 적이 없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꿈을 꾸는 일이란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는 잘 때 꿈을 반드시 꾸어야 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앞으로 꿈을 꾸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꿈을 꿀 수도 있고 꿈을 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꾼 꿈은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꿈을 그 꿈이 있는 그대로 그와 같고 그와 같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그 꿈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하여 임하는 가운데 일으키게 되는 부작용을 제거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꿈 내용이 길어진 것은 이런 내용을 통해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겪고 심각하게 문제삼는 생사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즉 현실도 이런 꿈과 마찬가지로 그 사정과 성격이 그와 같으므로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 그와 같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잘 임해야 함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임할 때 대단히 생생하고 진짜처럼 여겨지는 현실 내용이 위에 제시한 꿈과 같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면 이에 준해서 어떤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겠는가.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면 그 꿈을 자며 꾼 침대와 같은 현실 내용을 이해하여 그 현실영역을 놓고 꿈을 살펴야 하듯,
생생하게 진짜처럼 여겨지는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면 그런 현실내용을 매순간 얻게 되는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놓고 그런 현실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어떤 상태인가를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실재 내용을 놓고 현실을 살피고 검토해야 비로소 그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이런 실재에 관한 여러 입장들을 나열하며 살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러 입장 가운데 어떤 입장은 오히려 현실내용과 실재는 그런 사정이기에 그런 사정으로 현실 내용을 정말 실답다라고 보아야 한다는 성격의 주장들이어서 그런 각 주장들에 어떤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가를 살핀 것이다.
이처럼 각 입장에서 그런 망상적 주장을 제시하게 되는 사정은 현실에서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 다음 그런 전도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그런 전도망상분별 내용을 더 증폭시켜 실재영역에까지 그렇게 적용하기에 그런 주장을 제시하게 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현실 내용을 실재와 관련시켜 살피는 것은 현실 내용은 여하튼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어떤 내용이 아니고,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여하튼 마음에서 내용을 얻게 되는 어떤 주체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는 공한 것으로서 여하튼 그런 실재는 여하튼 적어도 현실 내용은 아닌 그 어떤 무엇임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해를 통해서 곧 현실은 실재가 아닌 한편, 본 바탕인 실재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어떤 내용인 것이어서
그런 사정으로 이미 꿈에서 살핀 것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그래서 이런 이해를 통해 현실에 대해 갖는 집착을 제거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본 바탕의 실재가 공함을 잘 이해하는 것은 이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와 관련해 현실을 살필 때 이를 통해 그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현실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는 문제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그런 취지에서 현실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 하나 실재가 수행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현실에서 무량겁에 걸쳐 받는 생사고통이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중요하고 그래서 이런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때
앞과 같이 실재의 정체를 파악하여 자신이 놓인 본 바탕 자체가 바로 그런 상태임을 자각시키는 데 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생사고통을 겪는 어떤 주체나 어떤 현실도 그 본 바탕만은 그렇게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생사를 떠나 있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일체는 그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의 문제를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바로 그런 현실의 문제상황과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런 생사문제나 온갖 더러움을 떠나 있기에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가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제거하고자 할 때 본 바탕인 실재가 이미 그런 상태로서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것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은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문제라는 의미다.
그러나 일체의 실재 진여가 본래 그렇게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것은 실재가 생사현실과는 달리 참된 진짜의 성품을 갖는다거나 실재는 생사현실과 달리 적극적으로 실다운 어떤 청정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얻게 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앞에서도 살폈듯 실재도 참된 진짜라고 할 어떤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어떤 것이 없어서 무아 무자성인 것이고 또 한편 실재는 그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다만 마음에서 어떤 내용을 얻게 되는 주체로서는 끝내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기에 그것을 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실재는 실답지 않다고 보는 현실과 달리 어떤 실다운 내용을 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기에 '실'재 '진'여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현실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이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만일 실재가 그렇지 않고 현실과 달리 어떤 참되고 실다운 어떤 내용이 있어서 무아 무자성이 아니라면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될 때 그런 실다운 A를 제시하면 되는 것이고 공한 상태라고 표현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아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무아 무자성인 한편 어떤 주체는 끝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언설 분별을 행할 수 없는 그런 것이므로 그것을 공하다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라는 표현은 곧 무아 무자성이라는 내용도 그 안에 함께 포함하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실재를 진여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런 실재가 현실에서 얻는 현실 내용의 그 '본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실'재 '진여'라고 이를 시설해 표현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실재 진여는 현실과 달리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고통의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적어도 그런 것이 아닌 그 무엇이기에 그것을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현실의 생사고통을 제거함을 목표로 하는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다.
즉, 실재 진여를 청정한 니르바라고 표시할 때 그런 표현은 실재 진여에 정말 청정이란 푯말이 거기에 붙어 있거나 참된 청정함 자체가 실답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다만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과 더러움을 놓고 대하면 상대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고 또 그런 본 바탕은 여하튼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는 상태이기에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수행의 측면에서는 이런 본 사정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생사고통이 문제되어서 이를 해결한 상태를 찾는다면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이미 그런 목표가 성취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고 또 수행자가 이런 본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 바탕이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본 바탕의 사정이 그럼에도 무엇이 문제로 남는가 하면, 본 바탕은 사정이 그러함에도 현실영역에서 그런 생사고통의 내용을 얻게 된다는 그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즉, 본 바탕이 그러함에도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마음에서 얻고 그리고 그에 대해 전도망상분별을 일으켜 그것을 대하는 가운데 본 바탕에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온갖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계속 받아나가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런 상태에서 겪게 되는 생사고통을 문제삼아 그 해결을 위해 그런 현실의 본 정체를 살피고 그리고 그런 내용이 실다운 내용인가를 살피기 위해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살핀 것인데
그렇게 살핀 실재는 본 바탕의 측면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렇지 않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은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는데 그럼에도 현실 영역에서 각 주체는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는 가운데 그것을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면서 그로 인해 생생하게 실답게 진지하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매 순간 그렇게 대하는 현실을 놓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런 전도망상 분별상태를 제거하고 생사현실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면
그런 사정으로 매 순간 순간을 그렇게 임하는 가운데 무량겁을 걸쳐서 그런 상태로 그렇게 생사현실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으며 무량하게 계속 나아가게 된다는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가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수행의 목표로 삼는 생사고통의 제거는 본 바탕에서는 이미 얻어져 있는 상태임에도
현실에서는 어리석음과 전도망상 분별을 통해서 겪지 않아도 될 그런 생사고통을 실답게 여기며 생생하게 겪고 있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현실 내용을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살피는 가운데 이를 통해서 자신이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하고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통해서 실답지 않은 그런 현실의 생사고통을 그런 실답지 않은 '현실 영역에서도' 제거해서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상태를 '현실 영역에서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행이 처음에 무엇때문에 문제되었는가를 놓고 이 문제를 다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문제삼은 실재는 그것이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떤 주체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아무리 얻으려고 해도 그 내용을 끝내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실재영역에서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수행이 처음 문제되었다거나, 실재에 대한 논의가 문제된 것은 본래 아닌 것이다.
그리고 실재의 무아 무자성 공함이나 실재 진여의 청정한 니르바나는 어떤 이가 어떤 수행을 해야만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란, 어떤 수행을 하던 안 하던 어떤 주체가 본바탕의 실재가 그렇다고 보던 보지 않던 원래부터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실재에서 어떤 문제가 있어서 현실에서 어떤 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실재 영역에서 어떤 내용을 얻어 내고자 그런 수행을 하는 것도 또한 아닌 것이다.
수행이란 본 바탕이 그런 문제를 본래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이고 또 현실이 실답지 않은 것임에도
각 주체가 전도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사정을 관하지 못하고 그런 상태에서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서 심하게 받아나가므로 그 문제를 그 현실 영역에서 제거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 영역에서 그런 수행으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현실 영역에서 그런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고
또 그렇게 본 바탕의 사정이 어떤가를 잘 관하여 이를 바탕으로 현실 내용에 대해 갖던 집착을 잘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자신을 묶어 생사고통을 겪게끔 만드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이 요구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행에 정진하여 그런 생사묶임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경우 그런 수행으로 마치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를 그로 인해 새로 얻게 되는 것처럼 그 상태에서는 여기게 되지만,
그러나 그 본 바탕은 원래부터 그런 상태였던 것이고, 다만 그 본 바탕을 덮고 있었던 실답지 않은 생사고통이 제거되어서 마치 그로 인해 그런 상태를 얻게 되는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 뿐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란 결국 본 바탕은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것이 실답지 않은데도 그렇게 매순간 생생하게 얻는 생사현실을 제거하여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만 남겨 놓거나,
또는 그런 본 바탕에서 얻게 되는 현실 내용에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과 그에 바탕한 업을 제거하여 본 바탕인 청정한 니르바나와 상응하게 여여한 상태로 생사고통을 제거한 바탕에서 다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를 향한 수행을 하는 상태로 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고
따라서 비록 그렇게 문제삼는 실재는 어떤 주체가 끝내 얻지 못하지만,
현실을 대할 때는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본 바탕으로서 실재가 어떤 것인가 하는 그 사정을 잘 이해하면서
그 현실 내용을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꿰뚫어 넒고 길고 깊게 잘 관하여 살피고 임하는 것이 수행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단 글이 너무 길어진 감이 있으므로 다시 쉬었다가 이어나가기로 한다.
○ [pt op tr]
▼https://www.youtube.com/watch?v=Z3SC2l3vv7M
현실의 생사고통의 문제를 살필 때 이를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관련시켜 살피는 사정을 앞에서 자세히 보았다.
그런 가운데 본 바탕에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일체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무아 무자성 공한 상태로서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을 살폈다.
이 실재에 대한 이해가 현실내용에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이에 집착하여 현실 내용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쉽지 않고 어리둥절하게 대하게 되는 내용들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에 비례해서 현실에서 심하게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게 되는 사정도 또 함께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 등의 문제를 얻을 수 없고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내용이
사정이 그렇기에 현실에서는 아무 내용도 얻지 못한다. 또는 현실에서 그런 내용도 얻고 그런 생사고통도 얻지만,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생사고통을 겪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상태는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고 그래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실재의 측면을 강조해서 제시하다보면
마치 실재의 측면이 그렇기에 현실의 내용은 아예 없는 것이라거나 있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수행도 일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또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앞에서 살핀 실재와 현실의 관계를 다시 잘 정리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어떤 주체가 얻는다면
그 현실내용은 실재를 기준으로 잡고 실재의 측면에서 살피면 그것은 실답지 않은 내용이고 그런 내용은 그 실재의 측면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서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본 바탕인 실재는 그런데도 현실 영역에서 어떤 주체가 그런 본 사정을 올바로 관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거꾸로 되집힌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 임하면
그렇게 얻는 현실 내용을 놓고 그것이 그런 사정으로 대단히 실답고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얻는 내용은 외부의 세계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고 또 자신의 마음과는 떨어져 있는 별개의 외부물질이고 모든 이가 함께 얻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서 대단히 실다운 어떤 내용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이에 대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서
그에 바탕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여 업을 행해서
그런 바탕에서는 극심하고 생생하고 실답게 여길 도리 밖에는 없는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 나가는 상태로 묶여 지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살핀 무량의경에서도 그 사정을 그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측면은 그렇지 않은데 그러나 이상하게 현실의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한 그 측면에서는 그 주체는 그런 상태로 매 순간 매순간 그렇게 생생하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여 무량 억겁에 걸쳐 지내게 된다는 바로 이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측면을 함께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수행항목으로 강조되고 제시된 사정이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위 내용은 본 바탕의 사정이 그렇기에 문제가 전혀 없고 아무런 수행을 하지 않아도 그 상태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 아니고
본 바탕의 측면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렇지만, 사정이 그럼에도 현실의 망상영역에서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것이 바로 문제이고
바로 그 현실 영역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그 현실영역 안에서 그런 사정을 관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전환해 그런 생사현실에 자신을 묶어 두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여 그 생사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 것이다.
그런 기본 상태에서 그 주체만 놓고 본다면 마치 현실에서 다시 그런 고통을 겪게 한 꿈을 앞으로 일체 꾸지 않아도 된다고 보듯,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에서 공연히 실답지 않은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 나가는 상태 자체를 아예 제거하여 회신멸지의 열반 상태에 들어가도 그 주체의 입장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일단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주체의 측면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여전히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입장을 놓고 보면 또 그 측면에서는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주체를 그렇게 방치하는 일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앞에서 꿈으로 이 상황을 비유하면 그런 실답지 않은 꿈을 앞으로 꿀 수도 있고 꾸지 않을 수도 있고 또 꾸어도 되고 아예 전혀 꾸지 않아도 별 관계가 없다고 보지만,
그러나 실답지 않은 꿈을 실답지 않다고 잘 이해하고 그래서 그 꿈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그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거나 문제상황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런 실답지 않은 꿈을 꾸어도 문제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 고통받는 다른 주체를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생사현실에 오히려 더 임해서 그런 중생을 제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또 요구되는 측면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처음 살리고자 한 문제 즉,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시설을 하고 그 시설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한 다음 이제 그런 시설도 제거한다고 할 때 제거해야 하는 시설이 있는 한편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시설도 있고 제거하면 오히려 곤란하다고 보는 시설도 있다고 제시한 내용과 관련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앞과 같이 현실 영역에서 그런 수행을 통해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가 되어 해탈신의 상태가 된 경우에도
다시 그 생사 현실영역에 남아서 계속 무량한 방편을 닦는 수행을 정진하여 그 현실 영역에서 무량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여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는 수행이 또 요구되는 측면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측면에서 제거해야 할 문제는 제거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나 시설까지 제거한다거나 또는 오히려 제거하면 곤란하다고 보는 내용이나 시설까지 기존의 전도몽상분별을 바탕으로 다 함께 제거하면 오히려 이것이 수행자가 무량한 선법을 얻어 내는 수행을 함에 장애를 만들어 내는 사유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원래 이 조각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길어도 딱 4 문장만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시작을 했었다.
그런데 쓰다보니 왜 이렇게 자꾸 길어지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또 글이 길어졌으므로 일단 다시 쉬고 이어나가기로 한다. 원래 살피고자 한 문제
즉 이런 시설을 해서 문제현상인 자기 자신에 대해 일으키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고 할 때
이로 인해 원래 집착을 갖던 자신이 분실되고 함께 제거되어 어리둥절하게 된다는 그런 문제 즉, 망상환자가 시설을 통해 문제를 제거하고 시설도 제거하는 과정에서 호소하게 되는 망상적 문제를 살피려고 한 것인데
조각글을 옮겨야 한다고 보는데 그렇게 되면 처음에 제시한 문제는 정작 논의하지 않고 다른 내용만 살피고 조각글을 끝내는 것이 된다고 본다.
처음에 한 4 문장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이 조각글에 논의할 주제는 현실에서 각 생명이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근본원인이 되는 전도망상분별과 집착증세와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제거하기 위해 일정한 시설을 하고 그런 문제현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작업을 마친 다음 작업을 하기 위해 시설한 내용도 제거하면 이로 인해 처음 망상상태에서 가장 집착을 가진 자신까지 함께 없어지게 된다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상태가 되는 경우가 있어서 이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그 사정을 4 문장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림을 동원해서 최대한 간략하게 살피고 마치기로 한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은 이미 앞 부분에서 했으므로 생략한다. 그림에서 그려진 2 의 5^ 내용을 놓고 살피자.
여기서 2 는 2 ^ 와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2 가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이 5 ^라고 한다면, 그런 내용을 놓고 생각하게 되는 내용은 위 그림에 그려져 있지 않다.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은 그림으로 나타내기 곤란하고 글자로 그런 관념분별 내용을 시설해 표현하면 적절하다고 보는데 여하튼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2 마음 밖의 외부 실재도 사실은 위 그림에 나타나 있지 않다. 어떻게 잘못보면 위 그림에서 1 이 보는 4 와 같은 내용을 2 가 대하는 2 마음 밖의 실재대상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4 는 1 의 입장에서 1 이 본 내용인 것이고 그래서 1 마음안에 있는 내용인 것이다.
만일 그런 4 를 2 마음 밖에 있고 2가 대하는 외부 실재대상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인 것이다.
이 사정은 과거에도 많이 반복했는데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만일 2 가 눈을 떠서 1이 무엇인가를 보는 과정을 관찰하고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거나 보고한다고 하자.
1^ 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눈을 뜨고 감으면서 무엇이 보이고 안 보인다고 자신에게 보고한다. 그것은 1 ^ 안에서 있는 변화이므로 그가 얻는 내용은 1 ^ 안의 어딘가에서 있는 변화다. 그래서 그 내용을 1 ^ 의 머리 부분에 적당히 표시해 넣는다고 하자.
그런데 알고보면 이는 처음에 1 이 2 가 보는 내용을 5^ 로 표시해 그린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리고 이어 생각하기를 그런 1 ^ 라는 사람은 사실은 2 가 보고 있는 4^ 를 외부대상으로 해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고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판단이 옳은 판단인가가 문제다. 그렇지 않음은 1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1이 2 가 무엇을 보거나 보지 못한다고 보고할 때 그것은 1 자신이 보는 4 를 대상으로 해서 그런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하는 것이고 2 가 얻는 내용은 1 자신이 보는 2 의 몸 어느 부분에 5^ 처럼 있는 것이라고 추리하여 위 그림처럼 제시하면 2 가 처음에 행한 판단처럼 엉터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살폈는데 여하튼 앞의 그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생각한다면
2 가 5 ^ 와 같은 내용을 얻었다면 그것은 2 가 얻는 감각현실이고 그런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2 가 분별을 일으킨 내용과 2 의 마음 밖에 있는 실재는 위 그림에 표시되지 않았다고 일단 제시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2 가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이 결국 2 가 스스로 2 자신이라고 현실에서 매 순간 여기고 대하는 2 ^ 와 같은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2는 이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평소 생활하는데 우선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1 의 입장에서 볼 때 2 ^ 와 같은 부분은 사실은 2 가 얻는 전체 감각현실의 한 부분으로서 2 가 얻는 감각현실 가운데 다른 부분과 별로 질적 차이가 없는데 왜 2 ^ 와 같은 부분을 2 는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가. 조금 엉뚱하지 않은가.
그런데 2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게 되는 사정이 또 있다고 제시하였다.
2 가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5 ^ 안의 다른 내용과 다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2 가 생활해가면서 2 ^ 부분은 다른 부분과 조금 다른 특성이 있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런 부분을 2 자신이라고 스스로 망상분별을 일으키면서 집착을 갖고 이후 그에 바탕해서 온갖 것을 행해나간다는 의미다.
여하튼 그런 사정으로 2 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런 관념분별은 위 그림에 표시되지 않은 것인데 그처럼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그 부분에 대해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킨 사정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상-락-아-정의 항목에 배당해 이해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즉 다음 사정이다. 이상하지만, 2 가 매 순간 생활하는 가운데 이곳 저곳도 다니고 이동을 하는데 다른 부분과 달리 2^ 부분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고 판단하게 된다는 의미다.
1- 자신이 눈을 뜨고 세상을 대할 때마다 매번 다른 부분은 들고 나고 변화하는 것 같은데 그 한 구석에 늘 어느 정도 일정하게 계속 파악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사정으로 계속 파악되는 그 부분은 주인이라고 할 나이고 나머지 부분은 들고 나고 하는 손님과 같은 부분들로서 외부 세계의 내용이다. 이런 망상분별을 처음 일으키는 것이다. [ 상 ]
2 - 한편 그 부분은 자신이 어느 순간 다른 곳으로 움직여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그런 뜻에 따라 함께 변화하고 움직이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꽃이나 영희나 다른 나머지 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 부분은 자신의 뜻에 따라 변화해서 자신의 뜻에 맞는 상태가 되고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런 부분으로서 그래서 그 부분은 나라고 보게 된다는 그런 의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자고 뜻을 가져도 그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책상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하겠는가. 이런 의미다. [락]
3 또 하나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꽃이나 컵으로 보는 부분을 놓고 자신의 손으로 보는 부분을 갖다 대면 그 순간 촉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위와 같은 그림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손을 대는 경우는 양쪽 부분에서 서로 촉감을 느끼는데 그렇지 않다고 보는 부분을 손을 대면 손쪽에서만 촉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 양 경우가 차이가 있다.
그러니 평소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자신이라고 보게 되고 그런 촉감을 얻게 되는 부분은 자신의 감관과 주관이 위치하는 그런 자신이고 그런 나머지 부분은 그런 촉감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외부대상과 구별되는 자신은 이런 부분이다. 이런 의미다. [ 아 ]
4 그리고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파리처럼 날개도 지저분하고 그 내장도 지저분하고 더럽지만, 자신은 이와 달리 신체도 깨끗할 뿐 아니라, 우주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고 아름다운 그런 존재다 이렇게 여기면서 자신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임한다는 의미다. [정]
그런 가운데 그렇게 각 특성을 갖춘 무언가를 자신이라고 관념한 가운데 그에 해당한 부분이 바로 2 입장에서는 2 ^ 와 같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전도망상분별과 그에 바탕한 집착증세를 가지고 평소 생활에 분주하게 임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증상이 혹-업-고라고 표현하는 내용 가운데 처음 자신과 관련한 망상분별을 일으켜 갖는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키고 이에 집착하여 행해 나가면 아우슈빛츠에 준하는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란 수용소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이 부분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서 시설을 하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앞과 같이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평소에 자신이라고 여긴 그 부분은 어떻게 되는것인가 하는 당혹감을 갖게 되기에 이 부분을 살펴보자는 의미다.
여기서 살필 내용이 원래 4 문장이면 된다고 보는데 이미 또 길어졌다. 되도록 짧게 줄여보자.
그러기 위해서 위 그림을 다음 그림으로 옮겨 놓고 살피기로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여기에는 처음 그림에서 1이 눈을 떠 보게 되는 내용인 그림 전체부분 또는 2 가 보게 되는 5 ^ 안의 내용은 위 그림에서는 1! 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은 a! 라고 바꿔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각 감각현실 외의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은 각기 2!, 3!, 4!, 5! 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감각현실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분별하는 정신은 6@ 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7, 8 이 추가로 표시되어 있는데 그런 정신을 또 시설하게 되는 사정은 앞에서 대략 살폈지만, 차후 과제로 남기고 일단 이런 상태에서 문제를 살펴보자.
일단 위 그림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보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을 a! 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을 놓고 그것이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은 여러 특징을 갖기에
그 부분은 다른 부분과 달리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킨다면 그런 생각은 a@ 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한 주체의 마음 밖에 있다고 할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그림으로 표시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 실재라고 따로 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 영역을 이렇게 시설해 놓고 여기서 무엇이 문제라고 하는가를 기초적으로 살피자는 의미다.
이것이 곧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사이의 관계라고 하여 살피는 문제다.
위 그림에서 1! 부분에 있는 a! 부분은 자신이 감각현실로 여기게 되는 그런 부분으로서 상(相 Lakṣaṇa )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처럼 감각현실에서 각 부분을 나누고 묶어서 일정한 부분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분별 내용은 또 이와는 다른 영역에서 일으킨 내용으로서 상(想)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고 그 존재와 정체를 문제삼는 내용은 대부분 이들 영역안의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비록 그렇게 '실재'라고 표현하고 시설해서 논의하지만, 정작 그에 해당한 내용은 어떤 주체는 직접 얻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공하다고 표현하는데 바로 이런 내용을 이런 현실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내용으로서 실상(實相)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각 내용을 시설해 놓고 이런 시설을 통해서 각 내용의 정체와 관계를 살피는 가운데 이 각 내용과 관련해 각 주체가 일으킨 전도망상분별과 집착 그리고 그에 바탕해 일으키는 업을 제거하는 작업을 행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미 이런 시설로 제거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을 앞에서 살폈다.
먼저 1! 와 같은 영역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이 곧 외부세계나 외부 대상이고 정신과는 별개의 외부물질이고 객관적 실재라고 이해하고 또 그 가운데 a! 와 같은 부분은 실다운 자신이라고 보지만, 결국 이들 내용은 마음안 내용인 것이고 앞과 같은 분별이 전도망상분별임을 보았다.
그런데 특히 어떤 주체가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런 시설을 통해 제거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우선 a! 와 같은 부분은 마음안 내용으로서 실재 지위에 있는 실상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 영역에서는 a! 와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실재는 공하다. 이런 판단을 얻어내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런 실재에 대한 판단을 통해서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해탈해 벗어나게 되므로 이 부분은 공해탈문이라고 칭하게 된다.
한편 a! 와 같은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분별하게 되는데 그 부분에는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는 결국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그 부분에서는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분별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그런 의미다.
그 사정은 간단하다. 감각현실은 감각현실인 것이고 그 자체가 관념분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를 통해서는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대하는 가운데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난 후 그런 부분이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부분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면서 집착해 이에 바탕해 그런 부분을 취하고 그런 부분에 머물러 무언가를 행해 나감으로써 생사현실에 묶이게 되는데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관하여 잘 파악하고 이처럼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려 행해 나가는 것을 멈추면 생사현실에 묶이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이를 무상해탈문이라고 칭하게 된다.
또 한편 a! 와 같은 부분을 대하는 가운데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a@ 와 같은 분별내용을 일으키며 분별을 하는 가운데 그런 분별내용에는 감각현실에서 얻는 a!와 같은 내용이 그 구성요소로 있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이런 분별 내용에는 또 앞의 a! 와 같은 감각현실이 없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비닐마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내용과 관련된다. 즉, 세모가 그려진 비닐과 큰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겹쳐 놓으면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나타나 보이게 되는데 이런 상태에서 각 비닐에는 없다고 할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각 비닐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 비닐을 대하게 됨을 제시하였다.
이런 경우처럼 어떤 감각현실을 대해서 어떤 관념분별을 일으키면 이제 그 주체는 그런 관념분별은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요소로 갖는다고 여기는 한편 또 그런 감각현실에도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자동차라는 생각을 할 때는 단순히 머리에서 떠올리는 그런 생각내용만을 놓고 자동차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자동차란, 자신이 눈을 떠서 거리에서 보는 그러그러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기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할 때도 단순히 그런 생각내용만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그처럼 자신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내용은 당연히 현실에서 자신이 감각해 얻는 감각현실의 내용을 그 내용으로 갖는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런 관념분별에는 그런 감각현실이 없다는 것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쉽게 살피면 그 사정이 이렇다.
눈을 뜨고 일정한 부분을 보고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길 경우 이제 눈을 감고도 그런 생각은 계속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눈을 감은 상태에서 그런 생각을 계속 하는 가운데 이제 그런 생각내용 안에 그 직전까지 눈을 떠서 보던 그런 자신모습이 단 한 부분이라도 얻어지는가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런 부분이 발견되면 신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 사정은 또 간단하다. 관념분별 자체는 관념분별이지 감각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런 내용도 중요한데 관념분별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다음이 좀 더 중요하다.
욕계 영역에서는 앞의 비닐마술에서 설명한 것처럼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내용을 겹쳐 놓고 이것을 서로 접착시켜 각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에 대해서 어떤 주체는 일정한 희망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희망에 일치하는 내용을 그런 감각현실에서 얻기 위해 활동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만일 자신이 좋다고 보는 어떤 상태가 성취된다면, 참 좋을텐데' 이런 형태로 희망에 해당하는 구문을 하나 만들고 감각현실을 대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 '만일 자신이 좋다고 보는 상태가 성취되지 않으면 좋지 않을텐데' 라는 걱정에 해당하는 구문을 또 만들고 현실을 대하는 상황인 것이다.
조금 더 나누면 만일 자신에게 대단히 고통과 불쾌를 주는 상태가 나타나면 대단히 싫은데 이런 구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욕계에서만 보게 되는 6 취 세계가 따로 구분이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자신의 희망과 달리 고통과 불쾌와 공포를 극심하게 겪는 상태가 곧 지옥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하나만 놓고 살피면 그 사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자신이 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는데 그런 뜻에 맞게 커피를 타서 마시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그렇게 처음 가진 희망은 관념영역안의 관념분별 내용이다. 즉 그런 희망을 가진 상태에서는 그런 커피는 오직 관념분별 영역에만 있는 내용이고 그에 해당한 감각현실은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상태는 그런 희망에 해당하는 내용을 단순히 생각하고 그 생각만으로 그런 뜻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면서 희망이 성취되었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커피를 마시고자 했는데 그런 희망에 맞게 그 커피를 마셔서 좋다는 것은 감각현실에서 원래 가졌던 희망에 일치하는 내용이 그처럼 얻어졌다고 여기면서 그래서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며 좋음을 느낀다는 의미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앞에 살핀 망상증상과 직접 관련이 되는 부분이다.
사정을 살펴보면 그런 감각현실에는 사실은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그 주체는 그런 상황을 놓고 그렇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 관념분별 내용은 각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인데 문제는 감각현실과 관념영역의 각 내용을 함께 겹쳐 놓고 대하는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에는 관념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가운데
어떤 경우의 감각현실은 그런 희망에 일치하는 내용이 성취되었다고 망상을 일으키고 또 어떤 경우의 감각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 망상을 일으키면서 매 순간을 대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런 희망을 추구하면서 온갖 업을 행하는데 바로 이런 활동을 통해서 각 영역의 내용이 변화하면 그것이 바로 혹-업-고라고 표현하는 그런 과정이 된다는 의미다.
그 가운데 가장 상태가 안 좋은 것이 욕계 안의 3 악도인데 그 3 악도에 묶여 끌려 가게 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욕계의 세계와 색계 무색계도 마찬가지인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전도망상분별과 집착증세를 제거하고 임하지 않으면 이 3 계 6 도는 전체적으로 모두 고통 자체이거나 고통의 상태로 묶여 들어가는 원인단계로 보게 되고 따라서 이런 상태의 일체는 모두 고라고 선언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념분별 영역에서는 그런 망상적이고 가치없고 쓸데없는 소원을 일으키기 않고 또 그런 망상적인 소원을 놓고 쓸데없이 업을 행해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 곧 그런 생사고통을 묶여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무원무작해탈문의 내용이 된다.
현실에서 유대인이 대량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어떤 이가 묶여서 끌려가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면 이런 내용도 넓게 보아 이런 과정에 함께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경우 그 수용소에 도착한 이후 그런 고통을 벗어날 방안을 찾는 것도 한 방안이지만,
그런 수용소에 도착하기 이전에 예를 들어 최소한 일곱 단계전에 그런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는 포승줄에서 풀려나 벗어나오는 것이 낫다고 누구나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죽 관찰한 입장에서는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이에게 어떤 내용의 should have pp 구문을 사용하여 그런 상태를 벗어나오라고 제시하겠는가.
여기서 should have pp 구문이란 이미 물이 엎질러진 결과를 다 보고 나서 그렇게 되지 않았으려면 무엇을 당시 "어떻게 했었어야 했는데" + 그러나 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구문이다.
물이 엎질러진 상태 그래서 이미 수용소에 도착해서 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에서 이런 표현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이 구문을 이해하면 이 구문이 전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you should think and do what they should have done
즉 그들이 그런 상태가 되지 않으려면 그 이전에 무엇을 했었어야 했었는가를 당신은 지금 생각하고 그것을 지금 행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다.
번역이 잘 되었는가는 모르지만, 여하튼 어떤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를 벗어나려면 미리 어떤 단계에서 무엇을 중지하고 무엇을 그 대신 해야 하는가를 지금 잘 생각해서 지금 잘 행하고 그래서 그런 상태를 미리 벗어나와야 한다고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결국 수행에서는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한 소원과 그 소원을 추구하는 업을 중지하고 제거하는 무원무작삼매해탈문의 수행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주는 교훈이란 그 수용소에 끌려가 희생당한 이들의 비극도 비극이지만,
옆에서 이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어떤 이가 만일 그 비극을 예방하려면 그런 당사자에게 최소한 그런 사건이 발생하기 몇년전부터라도 어떤 조치를 어떻게 취하고 임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이렇게 파악하게 된다면 그런 내용을 미리 그렇게 행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곧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제시하는 계 정 혜 3 학이나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바라밀과 같은 수행방안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앞의 관념영역과 관련해서는 무원무작해탈문의 수행방안을 통해 망상분별에 바탕한 그런 희망과 그런 희망을 추구하는 활동을 제거하고 무량겁에 걸친 생사고통에 묶이는 상태에서 벗어나와야 한다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나머지 한 내용을 또 살피자.
처음에 어떤 부분을 보고 그 부분은 이러이러한 특성을 갖기에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했는데 그런 분별 내용 자체는 그런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그런 관념분별은 그런 부분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도 추가로 제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평소에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일부는 그런 특성을 갖는 측면이 있다고 보지만, 알고보면 그런 부분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이 갖는 특성에 오히려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 사정은 따로 자세히 살핀 적이 있고 또 기회가 되면 살피겠지만,
그런 가운데 앞에 나열한 상-락-아-정의 특성을 갖는 어떤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려고 한다면 그런 내용은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또 달리 시설해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왜 본래의 사정이 그런데도 자신이 임시적으로 이번 생에 걸치는 옷과 같은 부분을 평소 자신이라고 보고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은 사실은 그보다 근본적인 다른 정신 영역 즉 제 8 식과 제; 7 식 사이에서 제 7 식이 처음에 일으킨 망상분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처음 1 이라고 표시한 영역에서 얻는 내용 가운데 벽이나 책상과 같은 일정 부분을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이라고 제 6 식이 분별한다면 사실 누구나 엉터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에는 앞에서 본 여러 요소가 파악되기에 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1 이라고 표시한 영역에서 어떤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고 제 8 식과 제 7 식 사이에 처음 그와 같은 엉터리 관계로 처음에 제 7 식이 일정한 부분이 자신에 해당한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 부분을 붙잡고 임하는 가운데 그 상태에서 1,2,3,4,5, 6 식을 분화 생성시켰기 때문에 이제 그런 상태에서 현실을 대하면 1 영역에서 일정한 부분이 그런 관계로 파악되는 결과가 나타난 것 뿐이라는 의미다.
즉 관념분별을 행하는 제 6 식이 1 이라고 표시한 영역에서 얻는 내용 가운데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분별하게 된 그 사정은 처음 생을 출발할 때 분화된 제 7 식이 그런 형태로 먼저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 바탕에서 1,2,3,4,5,6 식을 분화시켰기에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앞에서 자신이라고 보게 하는 상-락-아-정과 같은 항목을 갖추어서 자신이라고 관념할만한 어떤 내용을 찾는다면
제 6 식이 자신이라고 보는 a! 와 같은 부분 또는 제 7 식이 처음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킨 내용들이라기 보다는
위 그림에서는 차라리 갑A@ 라고 표시하여 화살표가 가리키고 시설해 놓은 부분들이 그런 내용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낫고
그 가운데 가장 핵심되는 내용은 역시 8 이라고 표시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본다는 의미다.
그래서 어떤 이가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할 때 이에 해당하는 내용도 이 부분인 것이고
또 반대로 무량겁에 걸쳐서 무량한 수명과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여 성불한다고 제시할 때 이에 해당하는 내용도 이 부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30 년전의 상황에도 어떤 한 현실 부분에 자신이 있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있다고 여긴다면
현재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a1와 같은 부분을 붙잡고 그것을 오려내서 한 30 년전에 자신이 있었다고 여기는 그런 상황 예를 들어 초등학교 교실로 들어가서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밀어 넣으면 그것이 이치에 맞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30 년전이나 지금이나 각 현실에 자신이 계속 있었다고 관념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부분이 차라리 그런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보겠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살핀다면
갑A@ 라고 표시하여 화살표가 가리키고 시설해 놓은 부분들 그리고 그 가운데 제 8 식에 해당하는 부분을 차라리 그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그런 의미다.
한편, 갑A@ 라고 표시하는 부분을 이렇게 자신이라고 본다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a!와 같은 부분은 그런 부분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데 그러나 a!와 같은 부분이 이런 내용과 전혀 무관한 것은 또 아니어서
그런 자신에 해당하는 내용이 그 생 매 순간 순간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은 관계를 갖는다는 사정을 앞의 1,2,3,4,5,6,7,8,이 처음에 일으킨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그 사정과 그 관계를 잘 이해하고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앞에서 '차라리' 이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제시한 것은
이들 마음 내용을 그림처럼 원으로 표시하여 제시하고 또 그런 언어로 표시하여 제시한 것 역시 일종의 시설인 것은 마찬가지고
이들 내용도 처음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에서 살핀 내용이 모두 적용이 된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시설한 마음은 사실은 일반적인 상(相)과는 달리 그 모습도 보지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것인데 그러나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을 토대로 해서 처음에 시설하게 되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에 준해서 그 위치에 같이 마음을 넣은 다음 다시 이런 내용에 대해서 일정한 분별을 행하게 되는 내용들은 이제 그런 마음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내용으로서 이제 상(想)의 위치에 넣고
그리고 또 이들 마음의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을 # 실재라고 표시하여 이들 관계를 살피면 결국 앞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처음에 a! 와 같은 감각현실 부분을 놓고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망상분별과 집착을 가져서 행하는 것이 생사고통에 묶이게 되믄 것이므로 그것을 문제라고 보았는데
이제 처음에 가졌던 이런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이제 근본정신을 포함해서 각 정신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에 망상분별과 집착을 가져 처음의 망상분별을 대체시키면 앞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마음에 대해 행한 시설과 그 내용에 대해서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하튼 각 영역에 대한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러나 이 제거 과정에서 앞의 망상분별을 토대로 해서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나 시설까지 제거할 필요는 없음을 또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간단히 보자.
무언가를 자신이라고 보고 대할 때 그것을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놓고 살필 때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실상이 아니라고 제시했다. 그래서 그런 분별을 하고 대한다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런 감각현실 자체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물론 감각현실은 예를 들어 눈으로 얻는 감각현실은 눈을 떠서 그런 내용을 얻어도 되고 얻지 않아도 된다고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앞의 문제와 직접 관련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다시 실상의 부분도 마찬가지다.
실재의 영역에서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라고 제시한 것은 실재의 영역에 그런 감각현실과 일치하는 내용이 그대로 있다는 망상분별을 제거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가지고 실재 영역에는 아무 내용도 없다라고 이해하고 실재 영역 자체를 제거하라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관련되는 감각현실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용이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기에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는' 자세를 제거하라고 한 것이지, 감각현실 자체가 없다거나 그런 감각현실을 아예 얻지 않도록 제거하라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나머지 부분도 다 마찬가지다.
어떤 감각현실을 놓고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고 그런 부분을 놓고 그런 생각에 바탕에 그런 상을 취하고 그런 상에 머물러 어떤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제시할 때
예를 들어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거나 영희라거나 여기면서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 그 영역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 부분을 붙잡고 그 부분을 취하고 머물고 행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한 것이지,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아예 제거하라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이 경우 행하는 관념분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관념분별 내용 안에 어떤 감각현실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런 관념분별 내용을 실답게 여기며 집착하는 것을 문제라고 제시한 것이지 그 관념분별 자체가 문제라고 제시한 것은 본래 아닌 것이다.
만일 이 경우 사정이 그렇다고 하여 그 관념분별 자체를 모두 제거한다면 사실은 각 주체가 대하는 현실 사정이 어떠어떠하고 그 본 실재가 어떻다는 내용 일체를 파악하기 곤란한 상태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알고보면 이런 모든 논의는 다 그런 관념분별과 그에 바탕한 언설을 통해서 진행하고 그런 내용을 통해서 그런 본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런 관념분별 자체는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그런 내용들을 바탕으로 일으킨 관념분별 내용이 그대로 다른 영역에도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일으키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무언가를 행해 나가면 그 부분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 각 영역의 내용을 다 접착시켜 그것을 대하고 이해하던 입장에서는 어떤 a 라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거나 실답지 않기에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라고 하면
평소 a 라는 말로 접착시켜 함께 이해한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영역안의 내용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고 이를 대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나 시설도 제거하고 또 오히려 제거하면 중생제도나 불국토장엄 성불을 향한 수행에 장애되어 곤란하다고 보는 내용이나 시설까지도 함께 제거하여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어떤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이 실재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그래서 실답지 않은 것이고
관념분별 내용은 관념분별내용대로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을 수 없고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관념분별 영역에서는 없다고 하는 내용등은
실재영역의 내용이나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이 전혀 없다고 제시하거나 얻어서는 안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단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마음 현상에 관해 시설한 내용도 이에 준해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마음이라는 언설을 시설해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그런 시설을 통해 가리키는 그 어떤 내용과 그런 언어 분별 그 자체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각 부분에서 제거해야 할 부분과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될 부분 그리고 오히려 제거하면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부분을 잘 구분해서 임해야 한다고 본다.
그냥 4 문장만 적을 것을 이를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글이 너무 길어져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여하튼 이제 이런 바탕에서 다시 중생제도와 불국토장엄 성불의 서원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에 임해야 하는가를 놓고 앞에 제시한 여러 문제들을 앞으로 잘 살펴나가야 한다고 본다. 다만 이는 차후 논의해나갈 주제로 넘기고 이상으로 마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