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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광박엄정불퇴전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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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박엄정불퇴전륜경 제2권
지엄 한역
김두재 번역
그때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문수사리 법왕자가 불세존께 광박엄정불퇴전륜법(廣博嚴淨不退轉輪法)에 대하여 질문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문수사리 법왕자가 나에게 광박엄정불퇴전륜법에 대하여 물었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불세존께서도 모두 광박엄정불퇴전륜법을 굴리셨기 때문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슨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견고한 믿음과 법ㆍ8인(人)과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 법에 대하여 설법하십니까?
세존이시여,
저런 것들을 수행하는 것이 곧 보살법(菩薩法)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저런 것을 수행하는 것이 곧 보살법이니라.
왜냐하면 5탁(濁) 세계의 중생들은 마음에 작은 법을 즐거워하고 대승(大乘)법을 구하지 않나니,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방편력(方便力)으로써 중생들의 성품을 따라서 설법하셨느니라.
그것은 모든 중생들이 대부분 작은 법만 좋아하고 대승법은 감당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그러한 깊은 마음을 관찰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도의 뜻을 일으켜 불지혜(佛智慧)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니라.
아난아,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안온(安穩)한 곳에 이르러 무위(無爲)ㆍ무작(無作)하게 하고 마음의 작용법[心數法] 을 여의게 하며,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영원히 소멸하게 하시며,
방소(方所)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음을 깨달아 안온하고 적정한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경지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고서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자 존자 아난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슨 인연으로 여래께서는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존자 아난이여,
모든 중생들은 이 법 설함을 듣고도 믿는 이가 적기 때문에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겁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미묘하고 비밀스런 말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을 뿐 지금 4부 대중들은 모두 이에 대하여 의심을 냅니다.
‘무슨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견고한 믿음과 법[堅信法] 에서부터 성문ㆍ벽지불법까지를 설법하시는 것일까?’
지금 이 백천만억 나유타(那由他) 여러 하늘들과 백천만억 나유타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모두 의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견고한 믿음과 법에서부터 성문ㆍ벽지불승까지의 모든 법을 설하셔 놓고서도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것일까?’
이 법은 믿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천(河泉)의 근원과 크고 작은 물들이 담연(湛然)히 흐르지 못하고,
공중의 여러 가지 새들도 머무른 채 날아가지 못하며,
해와 달이 운행하지 못하고,
모든 등불과 횃불이 밝게 비추지 못하고,
일체 중생들도 위광(威光)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즉 믿기 어려운 법을 어떻게 설법해야 할지를 모르셔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머물고 계시는 정사(精舍)를 1만 송이의 연꽃이 에워싸고 있자,
이런 말을 하였다.
“세존이시여,
부디 바라옵건대 광박엄정불퇴전륜법을 설하여 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저희들은 일찍이 이곳에서 92억 백천 나유타 모든 부처님께서 다 이 법을 설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존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광박엄정불퇴전륜법을 설하여 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저희들이 늦은 밤에 문수사리 법왕자와 함께 동방으로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국토를 지나 다른 부처님의 국토에 이르는 동안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이 법을 설하셨으며,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四維:
東南ㆍ東北ㆍ西南ㆍ西北] ㆍ상하의 한량없고 끝없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불세존께서도 모두 이 법을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허공에서 80만 5천 나유타 여러 하늘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광박엄정불퇴전륜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왜냐하면 저희들은 일찍이 이곳에서 92억 백천 나유타 모든 부처님께서 이런 법을 설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존자 아난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굳은 신념과 법에서부터 성문ㆍ벽지불 법까지를 설법하셨습니까?
지금 여기 모인 4부 대중들이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기침 소리조차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모인 백천 만억의 중생이 모두 의심을 내고 있으니,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굳은 신념과 법에서부터 성문ㆍ벽지불승까지의 모든 법을 설하셨는지,
부디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이 대중들의 마음속의 의심의 화살을 뽑아 주시옵소서.
여기 모인 여러 대중들은 오직 부처님께서 증명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모든 불세존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증명할 수 있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누가 증명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법으로써 내가 증명하느니라.
모든 여래께서도 법으로써 증명하고 나서 선설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거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도록 하여라.
내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해설하리라.
보살마하살을 이름하여 견고한 믿음이라 말하고,
나아가 벽지불승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존자 아난과 여러 큰 성문들이 모두 일심(一心)으로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을 들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믿게 하고,
부처님의 지견을 믿게 한 연후에는 색(色)에 집착하지 않게 하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하였나니,
색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수ㆍ상ㆍ행ㆍ식에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이 보살마하살을 이름하여 견고한 법이라고 하였느니라.
또한 아난아,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도
모두 다 공하여 적정(寂靜)한 것이라 믿나니,
이런 법을 믿는 까닭에 이 보살마하살을 이름하여 견고한 믿음[堅信] 이라고 하였느니라.
또한 아난아,
보살마하살이 불지혜[佛智] 를 믿고 문득 생각하기를,
‘우리들도 또한 이런 지혜를 성취해야겠는데,
왜 이 지혜를 보지 못하는구나’라고 하나니,
그런 까닭에 아난아,
보살마하살을 이름하여 견고한 믿음이라고 말하느니라.
또한 아난아,
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 욕락(欲樂)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믿음의 힘을 성취하나니,
그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을 이름하여 견고한 믿음이라고 말하느니라.
또한 아난아,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불세존께서 불가사의한 법을 중생들에게 보시하듯이 나도 마땅히 배워서 불가사의한 법을 모든 중생들에게 보시해야겠다’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을 이름하여 견고한 믿음이라고 하느니라.
또한 아난아,
보살마하살은 기쁜 마음으로 온갖 물질을 다 버리고 마침내는 제 몸까지도 오히려 보시하나니,
더구나 그 밖의 물질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러한 보시를 믿고 행하며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처소에서 아끼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보리(菩提)에 회향하지 않고,
또한 보리라는 견해도 일으키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을 이름하여 견고한 믿음이라고 하였느니라.
또한 아난아,
보살마하살은 믿는 마음이 청정하고 겁내거나 나약함이 없으며,
불ㆍ법ㆍ승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순박하고 청정함을 얻고 여섯 가지 감정[六情] 을 잘 지키고 단속하여 소원하거나 구하는 것이 없으며,
중생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불ㆍ법ㆍ승에 대하여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며,
이미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킨 뒤에는 방일(放逸)하지 않고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마음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며,
여섯 가지 경계와 법계 등을 믿어 아느니라.
왜 믿고 알아야 하는가?
이른바 이 경계는 모두 음성(音聲)이요 문자(文字)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하며,
모든 행업은 곧 덧없는 것이요 공(空)한 것이므로 나라는 법도 없다고 믿고 알며,
또한 무루(無漏)와 성스러운 계율,
희론(戲論)이 아닌 법을 믿어서 모든 삼매를 원만히 갖추고,
일체 중생이란 곧 소멸하는 것이요 중생의 모습도 곧 소멸될 모습이라고 믿어서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모든 중생은 곧 법계(法界)라고 보지만 이 법에 대하여 법계라고 보지도 않느니라.
왜냐하면 법계가 곧 중생이요,
무심(無心)한 경계이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믿기 때문에 견고한 믿음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모든 중생들은 머무는 처소가 없다고 생각하느니라.
왜냐하면 자성(自性)이 공(空)하기 때문이며,
또한 중생의 형상(形相)도 볼 수 없나니,
모든 중생을 보면 열반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중생계(衆生界)는 공하기 때문에 곧 이 열반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느니라.
만약 이와 같은 법을 믿는 이가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믿을 수 있게 하면,
그런 까닭에 아난아,
보살마하살을 견고한 믿음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믿음 내어 불지견(佛知見)에 향하게 하여
물들고 집착하는 마음 내지 않으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부처님의 설법 믿어
그 성품과 모습은 다 공한 것이라고 생각하나니
이 법을 믿어 이해하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부처님의 지견(知見) 믿으면
그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
마음 내어 열심히 구하면
나는 틀림없이 이 지혜 얻게 된다 말하리라.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 내어
다섯 가지 욕락 탐하여 구하지 않으면
곧 신심의 힘 성취하리니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모두가 모니존(牟尼尊)께서
중생들에게 법을 보시함 믿고서
나도 또한 따라 배우리라 하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믿음 내어 보시 행하고
마침내 제 몸까지 버리면서도
보시했다는 생각 내지 않으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믿음 내어 온갖 것 보시하되
아깝다는 생각 내지 않으면
모두 보리에 회향(回向)하리니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믿음 내어 여러 부처님께 귀의하여
그 마음 더럽고 혼탁하지 않으며
무심(無心)한 법 믿으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여섯 가지 감관 단속하고 지켜서
또다시 소원하거나 구하지 않고
이미 이런 법 믿고 알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모두가 중생을 믿지 않고
이러한 믿음 건립하여
불법을 따르고 순종하게 하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이러한 믿고 향하는 마음으로
다 같이 보리(菩提)에 회향하여
마음 모습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여섯 경계 평등한 것이어서
곧 법계와 같음을 알고
음성을 분별함으로써
모든 경계의 성품 얻지 않아야 하네.
모든 행업은 덧없는 것
괴로움도 공하며 나라는 것도 없다고 알아
이러한 마음의 힘 성취하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번뇌 없는 성인이 계율 믿고
희론(戲論)의 법 그르게 생각하여
계율과 삼매(三昧) 원만하게 갖추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중생계(衆生界)에 대하여
그 경계의 성품도 멸하는 것임을 믿어야 하리니
이와 같은 모습 믿으면
이것을 믿음 중의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중생에게는 의지할 성품 없으니
중생은 곧 모든 법계이기 때문이라네.
모든 법계는 이와 같으므로
그 성품 헤아릴 수 없다네.
만약 이와 같이 알아서
저 법계의 모습을 따르고 순종하면
그것이 곧 두려움 없는 보살이니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중생의 몸은
필경에 머무르는 곳 없고
그 성품도 본래 공한 것임을 믿으면
그런 까닭에 머무르는 처소 없음을 알리라.
중생은 곧 열반(涅槃)이요,
그 성품도 공한 까닭에
이러한 이치로써
적정(寂靜)한 열반의 모습 나타내 보였네.
만약 이와 같이 믿을 수 없으면
그 이름 두려움 없는 보살이니
이와 같은 모든 중생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아난아,
잘 받아 지녀서
또한 이와 같인 선설(宣說)하여라.
만약 이와 같은 신심 있으면
이것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이와 같은 모든 법과
그 밖의 한량없고 끝없는 법을
부처님은 모든 보살 위하여
차별 있는 모습 설법하셨네.
“이와 같아서 아난아,
여래ㆍ응ㆍ정등각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느니라.”
“또 아난아,
이제 마땅히 이 법을 즐거워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다시 게송으로써 보살마하살을 견고한 믿음이라고 이름하는 이치를 말해 주겠노라.”
그때 세존께서
게송을 설하셨다.
모두 다 화합하여 일심으로 들어라.
나는 불자(佛子)들을 위해 모든 공덕과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정진(精進)과
인욕(忍辱)ㆍ선정(禪定)ㆍ지혜(知慧)의 몸에 대해 설법하리라.
믿고 따르면 이런 법을 즐겁게 구하게 하고
믿지 않는 이에겐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 믿게 한다네.
이와 같은 믿음을 보살이라 이름하나니
세간 중생 인도하고 교화하되 게을리 않네.
모든 법 믿고 알아 분별하지 말라.
그 성품 공적(空寂)함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은 법을 잘 이해하면
이것을 보살의 견고한 믿음이라 이름한다네.
한량없는 불지견(佛知見) 믿고
발심하여 이런 지혜 구하려 하나니
가장 높은 대인(大人)이 얻으신 지혜
나는 어느 때나 이런 지혜 얻을까.
욕락(欲樂)을 믿지 않으면 청정한 법이니
욕망으로 인하여 악업(惡業)을 행하지 말라.
믿는 힘 때문에 법을 즐겁게 구하나니
이렇게 뛰어난 믿음 있으면 보살이라 이름하네.
모든 여래께서 법시(法施)를 믿으셨으니
나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리라.
부처님 설하신 법 따라 행하여
이렇게 뛰어난 믿음 있으면 보살이라 이름한다네.
믿음 내어 이 휼륭한 맛[餚膳] 과
코끼리ㆍ말ㆍ금보(金寶)와 노비
남녀ㆍ권속ㆍ사랑하는 아내와
크고 작은 성과 국토를 모두 버려라.
손과 발 사지를 보시하여
뼈가 부서지고 골수가 나와도 두려움 없고
귀ㆍ코ㆍ눈과 머리까지 보시하여
이렇게 뛰어난 신심 있으면 보살이라 이름하네.
이 몸 안에 주인 없다 믿어 알며
그런 까닭에 남에게 보시할 수 있으리라.
또한 묘한 법을 보시하면
이런 인연으로 부처님의 지혜 구하네.
믿음 내어 나 없는 몸 버리되
와서 구하는 이 보거든 기쁜 마음 내어라.
이와 같은 중생은 나의 훌륭한 친구이니
보리 위해 위태로운 이 몸 버리네.
이러한 법 보리의 씨앗임을 믿어
청정한 마음으로 세간을 교화하고
법 듣고 불지견(佛知見) 의심 않으면
이렇게 뛰어난 신심 보살이라 이름한다네.
눈이란 것 덧없으며 귀와 코와
혀ㆍ몸ㆍ뜻도 또한 그러한 줄 알라.
이것은 허위(虛僞)라서 견고하지 않음을 알라.
보리의 씨앗 위해 다 버려라.
괴로운 중생을 보니 믿어 가질 것 없네.
교화하여 믿음에 머물게 하고 믿음 내어 보시하게 하라.
스스로 자비로운 마음에 머물러 세간을 불쌍히 여겨
모두 부처님의 최상지(最上智)를 믿게 하라.
6진(塵:
根)에 집착하여 악한 일 행하는 이 보거든
교화하여 마음 돌려 불지(佛智)에 나아가게 하고
이런 마음으로 보리의 씨앗 얻지 못하거든
보리를 믿게 하고 마음의 집착 없애게 하라.
중생계의 지혜 없는 이는
여섯 경계의 평등함을 모르나니
이 법은 모두 법계의 모양과 같음을
음성으로 설법하나 얻을 수 없네.
모든 중생 생사(生死)에서 헤매거나
항상 하지 못한 것을 항상 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 보거든
모든 행업은 곧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공하여 나라는 것 없는 이치 알게 하여라.
모든 중생 악한 계행 행하는 이 보거든
가르쳐서 부처님의 가장 훌륭한 계율 믿게 하여라.
계와 정(定)에 청정한 모든 공덕 지으면
이렇게 훌륭한 믿음 보살이라 이름하네.
모든 중생의 게으름을 보거든
가르쳐서 부처님의 큰 정진 믿게 하여라.
정진의 힘으로 스스로 조복하면
이런 심신 가진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네.
어리석은 중생 수명에 집착하는 것을 보거든
가르쳐서 음신(陰身)은 영원하지 못함을 믿게 하라.
생멸 있는 세계와 법계가 평등함을 알아
이런 법 알게 되면 훌륭한 믿음이라 하리라.
이 몸은 가거나 머무름 없음을 분석하라.
비록 다른 세상에 태어나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으리니
지은 바 선악의 모든 업의 씨앗
끝끝내 이 법성(法性) 여의지 못하네.
중생의 성품 의지할 법 아님을 알라.
이 세계 역시 모든 중생 세계와 같네.
법계는 평등하여 부사의한 것
두려움 없는 보살 이렇게 믿네.
부처님께서 설하신 두 가지 없음을 믿어
부지런히 선행(善行) 닦아 모든 법 깨닫고
다른 이 위하여 이와 같이 믿으라 설하여
3유(有)에 물들어 집착하지 않게 하라.
이와 같이 평등한 중생의 성품 믿어
항상 머무를 곳 결정하지 말고
공하여 모양 없는 법 취하지 않아야 하니
이런 법 믿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였네.
이 모든 중생들 공과 같으나
적정한 열반계도 아니니
모든 성상(性相) 존재하는 것이라 말하지 말라.
이런 법을 알면 신심을 지녔다 이름하리라.
모든 중생을 볼 때 변법(邊法)을 믿거든
적정(寂靜)한 법으로 인도하라.
그러면 삼계에서 높은 칭송 얻고
믿음 지닌 훌륭한 보살이라 이름하네.
만약 이와 같이 미묘하고 뛰어난 믿음 있으면
두려움 없는 마음 내어 법 구하기를 즐거워하리라.
내 법 가운데 어리석은 사람 있기 때문에
여기 모인 중생 위해 자세히 선설하였네.
굳은 신심의 모든 공덕과
그 밖의 갖가지 차별된 모습을 이미 설하였으니
삼계에 집착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좋은 복전 성취하네.
긴 세월 보시하여 스스로를 조복 받고
청정한 계율에 머물러 인욕(忍辱)을 닦으며
정진과 선정과 지혜 행하고
보살행 닦아 마음 조복하였네.
상응함에 따라 방편지(方便智)로써
중생을 인도하여 안온한 곳에 이르게 하고
모든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게 하니
이런 지혜 있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한다네.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 때문에 세계가 진동하니
흔들리고 일어나고 파도치고 뛰는 여섯 가지였네.
광명 비치는 꽃 위에 보살 앉아서
적정하고 공하여 모든 법은 없는 것임을 설하네.
동쪽 국토와 남쪽과
서쪽과 북쪽도 또한 그러하며
상방과 하방과 네 간방[四維] 에서도
모두 똑같이 이 적정한 법을 설했네.
차라리 신명(身命)을 버릴지언정 부처님 의심하지 않고
다른 이 가르쳐 불지(佛智)를 믿게 하리니
만약 모든 중생 이런 믿음 있으면
부처님과 수행하는 이는 증명하여 알리라.
“또 아난아,
어째서 여래께서 보살마하살을 견고한 법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바른 법에서 끝끝내 물러나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받아 지니고 다른 이를 위하여 설법하여 끝끝내 헐뜯거나 범하지 않게 하느니라.
불가사의한 진여법계(眞如法界)에서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체득하여 견고한 마음으로 받아 지니고 겁내거나 나약함이 없으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 법을 받아 지니는 것도 없고 법이나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마땅히 이와 같이 지녀서 모든 법 구하기를 즐거워하며,
이미 구했으면 받아들이고,
이미 받았으면 잘 지니고,
이미 지녀서는 다른 이에게 설법하고 조유(調柔)1) 의 선(善)에 함께 머무는 것을 기뻐하며,
항상 적정한 법 선설(宣說)하기를 좋아하고,
법계를 동요시키지도 않으며,
능히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체득하여 여러 법 가운데에서 잘 조복 받고,
항상 머물러 있는 미묘한 몸을 훼손하지 않나니,
이와 같은 몸은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미묘하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몸은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으며 모여서 된 것도 아니요 흩어져 없어지는 것도 아님을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불세존께서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解說)한 것과 같이 법 가운데에서 마땅히 체득하여 일체 법은 청정하여 때[垢] 가 없음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집착하거나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
모든 법의 성품은 공허하여 볼 수가 없나니,
볼 수 없기 때문에 받아 지닐 것도 없느니라.
법계는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다고 설법하지만 그 언설(言說)조차도 없는 것이요,
또한 존재하는 실체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으니,
고정관념을 멀리 여의면 마음에 얻을 것이 없으리니,
그 성품이 적정하게 되어 여러 가지 음성을 여의게 되리라.
언설도 없는 것이고 경계법(境界法)도 아니니,
언제나 이런 법 받아 지니기를 즐거워하고,
또한 이 법을 널리 말하여 이 법에 대하여 의지함이 없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존재함이 없는 법으로써 갖가지로 차별하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설법하였느니라.
이 법은 합해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갖가지 모양도 없나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수행하여 모두 체득하면 이렇게 체득한 법을 성지(性地)라고 이름하느니라.
성지를 체득한 보살마하살에서부터 작은 법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오고 가는 모양이 없으니,
오고 가지 않는 법을 이미 받아 지녔으면 그 법은 늘
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고 모이거나 흩어지지도 않느니라.
능히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고 모이거나 흩어지지도 않는 이와 같은 법을 견고한 법이라고 이름하나니,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성이 얻을 수 있거나 얻을 수 없거나 간에 이러한 법성은 모두 얻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이 보살마하살을 견고한 법이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이치를 거듭 펴시고자 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에서
물러나지 않나니
능히 이와 같은 법을 지니면
그것을 견고한 법이라 이름하네.
일찍이 훼범(毁犯)한 적이 없는
부사의한 법계에 대해
능히 이와 같은 법을 체득하면
이것을 견고한 법이라 이름하네.
오래도록 마음 내어 받아 지닌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마음속에 겁약(怯弱)함이 없으면
이것을 견고한 법이라 이름하네.
일체 법의 성품에 대해
바르게 나아가고 부지런히 구하며
물들거나 집착하는 마음 없으면
이것을 견고한 법이라 이름하네.
집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또한 남에게도 가르쳐 보이나니
이와 같은 법 지니게 되면
이것을 견고한 법이라 이름하네.
조유(調柔)에 함께 머물고
적정(寂靜)한 법 선설(宣說)하면서
그 법의 성품에 흔들리지 않으면
이것을 법을 지녔다 이름하네.
모든 법의 본바탕은
본래 성품도 모양도 없음을 깨달아
이런 법에서 결정하면
이것을 법을 지녔다고 이름하네.
일찍이 훼손(毁損)한 적 없고
항상 진실하고 미묘한 몸에 머물되
마땅히 이런 몸을 알면
곧 법으로써 본체를 삼았다 하네.
이 몸은 마침도 시작도 없고
모든 법 성취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다고 알면
이것을 법을 지녔다고 이름하네.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 위하여
모든 법의 모양을 선설하셨네.
능히 이러한 법 지니면
이것을 법을 지녔다고 이름하네.
이 계의 성질은 스스로 공하여
법에 대해 염착이 없나니
능히 이러한 법 지니면
이것을 법을 지녔다고 이름하네.
일체 법을 관찰하건대
그 성품 공하여 볼 수 없나니
법을 볼 수 없는 까닭에
또한 가질 것도 없다네.
가질 것도 없는 까닭에
능히 법계를 나타내 보였네.
성품과 모양ㆍ음성도 없으니
그 본체는 존재하는 실체가 없네.
모든 고정관념 멀리 여의면
마음도 얻을 수 없나니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불가사의하다고 이름한다네.
이미 마음의 생각 멀리 여의고
적정한 법 설하여 보였나니
음성조차도 없는 경계인 까닭에
불가사의하다고 이름한다네.
능히 이와 같은 법 지니거니와
그 또한 믿을 것 없나니
믿을 게 없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존재 없는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 위하여
이와 같은 법 설하셨네.
합해진 것도 아니요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갖가지 모양 없는 것이라고.
설법한 대로 수행하면
성지(性地)2) 에 머물 수 있으리니
이미 성지에 머물면
곧 성지에 머무는 사람이라 이름하네.
성지에 머무는 보살
필경엔 의지하는 곳 없나니
능히 이와 같은 법 지니면
이것을 법을 지녔다 이름하네.
그런 까닭에 아난아,
보살마하살은
법에서 얻는 게 없으니
이것을 법 지녔다 이름하네.
만약 모든 중생이
불도(佛道)를 멀리할 생각 내거든
방편의 힘으로써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하라.
이러한 법과 그 나머지에 대하여
모든 보살 위해 설법하였으며
미묘한 방편으로써
부처님이 지견(知見) 나타내 보였네.
법 지닌 크게 밝은 사람
오직 부처님만이 증명해 아네.
이 법을 수행하면
두려움 없는 보살이라네.
불가사의한 지혜로
법 지니는 차별 설하였네.
법이든 법이 아니든 모두 청정하니
이 법에 편안히 머물라.
“이와 같아서 아난아,
여래 정등각께서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견고한 법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또 아난아,
여래께서는 어째서 보살마하살을 8인(人:
忍)이라고 이름했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보살마하살은 이미 여덟 가지 삿된 것을 초월하고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 을 닦지만 여덟 가지 정도[八正道] 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범부법(凡夫法)을 초월하여 작위(作爲)가 없고 평등도(平等道)를 체득하여 범부법을 초월하며,
부지런히 보리를 구하되 보리에 집착하지도 않고,
모든 사견을 여의고 바른 견해[正見] 를 닦으며,
평등도를 체득하여 제 몸의 모양을 여의고 비록 부처님의 몸은
증득하지 못했지만 보리(菩提)를 구하며,
중생이라는 생각을 여의고 부처님의 생각을 닦아 평등한 생각을 체득하며,
중생의 초굴법(摷窟法:
生死法)을 여의고 초굴이 아닌 법[無摷窟法] 를 구하며,
모든 법 가운데 머무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법이 있어서 머무를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세간법을 초월하고 성인의 법을 열어 통해서 이미 적멸의 경계를 체득하였으며,
또한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모두 초월하고,
있고 없음과 옳은 법ㆍ그른 법을 멀리 여의며,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잘 관찰하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심상(心相)에서부터 나아가 보리의 심상에 이르기까지도 다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아느니라.
왜냐하면 이미 중생심(衆生心)의 모양은 평등한 법이라고 체득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런 까닭에 독(毒)으로도 해칠 수 없고 불로도 태울 수 없으며,
칼로도 몸을 상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경계를 이미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비록 부처님의 수행법은 증득하지 못했으나 이미 여러 갈래의 세계에 결정함이 없으니,
왜냐하면 보리는 모든 갈래의 세계를 여의었기 때문이요,
보리도는 안정되어 작용이 없기 때문이며,
보리의 성품은 공한 것이어서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니,
이런 까닭에 칼로써 몸을 상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해칠 수 없다[不可害] 고 말하고,
그 수레[乘] 는 몹시 빠르므로 해치지 못한다고 말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수레는 매우 빨라서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 때문에 칼로도 몸을 상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또한 중생들과 두루 인연이 있는 자비와 보리의 자비를 행하여 일체 중생의 세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행할 바 없는 자비ㆍ일체 법이 공한 자비ㆍ나아가는 길이 적정한 경계의 자비ㆍ진에(瞋恚)를 여읜 자비ㆍ밝은 지혜를 행하는 자비를 행하여 보리를 비추어주기 때문이며,
중생계는 얻을 수 없다는 자비를 행하여 두루 중생들과 인연하기 때문에 칼로도 상해하지 못하느니라.
욕계ㆍ색계ㆍ무색계는 모두 평등하다고 알며,
또한 법계도 평등하다고 알며,
보리에는 갖가지 모양이 없어서 알 수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으며,
희론(戲論)도 없고 더러운 때도 없으며,
안온하고 적정하여 모든 음성을
여의었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경계에 대하여 또렷이 알아서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 언설(言說)도 없고 음성(音聲)도 없음을 모두 다 깨달아 아나니,
왜냐하면 오고 감이 없는 법계 가운데에서 머무름이 없는 법인(法忍)을 증득했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들의 언어와 음성을 잘 알아서 그들을 위해 적멸법(寂滅法)을 해설해 주되,
나는 지금 이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해서 이미 나라는 생각과 모든 음성을 여의게 했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적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저 모든 법에서 그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며,
언설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 보살마하살은 8인(人:
忍)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이치를 거듭 펴시고자 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이미 여덟 가지 어려움[八難] 3) 을 초월하여
정녕 여덟 가지 해탈에 머무르되
여덟 가지 바른 견해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하였네.
이미 범부법(凡夫法)을 초월하였으나
바른 도에 머물지 않으며
중도에 머물러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여의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하였네.
이미 범부법을 여의었으나
보리(菩提)를 구하지 않으며
보리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사견(邪見) 멀리 여의고
바른 견해[正見]
수행하여
평등도(平等道)를 체득하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자신의 모습 멀리 여의었으나
보리에 머무르지 못하고
비록 부처님의 몸을 얻지 못했더라도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중생이라는 생각 제거하고
부처님의 생각을 수행하여
이미 평등한 모습 체득했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중생의 초굴(摷窟) 여의고
초굴이 없는 법 구하여
모든 법에 머물지 않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이미 세간법을 초월하고서
성인의 법 열어 통하며
적멸의 세계 성취했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과
그 밖의 세간법에 대하여
이러한 법의 모양 얻지 않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이 한 가지 끝을 보고
두 번째 끝이 없음을 보아
이와 같은 두 가지 견해 버리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중도법(中道法)과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두 끝을 관찰하여
모두가 평등함을 깨달아 알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과거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이른바 최초의 마음
보리를 낸다고 말하지만
이 마음도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보리를 얻을 수 있으리.
만약 이런 이치 체득한다면
보리의 마음 얻지 못하리라.
그런 까닭에 독과 불로도
그 몸을 상해하여 무너뜨리지 못하네.
저 갈림길 비록 결정하지 못했으나
이와 같은 행(行) 두루 닦아서
오고 감이 없는 법을 체득한다면
그런 까닭에 해치지 못한다 이름하였네.
보리는 방향과 모습 없거늘
음성으로 설법하였을 뿐이네.
음성의 모습 잘 깨달아 알면
그런 까닭에 해치지 못한다 이름하였네.
가는 모습도 얻을 수 없고
오는 모습도 또한 그러하여서
가고 옴을 설함은 음성일 뿐이니
그런 까닭에 빠른 수레라 이름하였네.
그러므로 안온(安穩)이라 이름하였고
또한 공(空)하여 없다고 이름했으며
또한 빠른 수레라 이름하였고
헤칠 수 없다고 이름하였네.
이와 같이 빠른 수레를
보살은 마땅히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나
그런 까닭에 해치지 못한다고 이름하였네.
가령 예리한 칼날이라 하더라도
그 몸을 상해할 수 없으니
몸의 모습 볼 수 없는 까닭에
칼로도 해치지 못한다 했네.
중생의 자비와
보리의 자비 행하여 두루 인연하고
보리의 자비 행하는 까닭에
칼로도 해치지 못한다 했네.
행(行)도 없고 중생도 없으니
중생계는 얻을 수 없네.
적정하여 생멸 없는 자비와
중생과 두루 인연한 자비와
진에(瞋恚)를 멀리 여읜 자비와
밝은 지혜 행하는 자비와
밝게 비치는 보리의 자비 행하여
모든 중생을 두루 인연하였네.
칼도 곧 공한 법임을 알아
몸의 모습 잘 닦아서
보리의 도 얻지 않으면
칼로도 해치지 못하리라.
이미 적정계(寂靜界) 체득하여
모든 악한 세계 멀리 여의면
악업도 장애할 수 없으며
칼로도 해칠 수 없으리라.
무명(無明)을 멀리 여의고
이미 밝은 법 증명해 알아
보리의 비춤 체득하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가 모두 공하여
다 평등한 줄 알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경계와 보리는 평등하여
갖가지 모습 없으며
지혜도 없고 분별도 없고
청정하여 희론(戲論)도 없다네.
이미 이렇게 평등한 이치 체득하면
보살도 의지할 대상 아니요
설하는 모든 음성이
여러 세계에 두루 이르리라.
오고 가는 모든 음성
다 법계에 돌아가고
머무름 없는 법 가운데에서
이 최상의 법인을 얻으리라.
중생의 음성 잘 알아서
그를 위해 적멸법을 설하였으니
이와 같은 마음 내지 않으면
나 그들 위해 설법하리라.
이미 음성의 법 초월하고
갖가지 모습 취하지 않아
모든 법 적멸함을 알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이미 모든 음성 초월하고
음성계(音聲界) 통달하여
음성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한다네.
아난아,
이런 일 때문에
이것을 8인이라 이름하지만
비록 이렇게 설한다 해도
진실로 얻을 수는 없느니라.
“이와 같나니 아난아,
여래 등정각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8인이라 이름한다고 설법하셨느니라.”
“또 아난아,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보살마하살을 수다원(須陀洹)이라 이름한다고 설법하셨는가?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불가사의한 불도(佛道)를 수다원이라 이름하나니,
보살마하살은 머무름이 없는 도에 머물러서 불도를 친근히 하며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지하거나 인연하는 바가 없으며,
모든 법에 머물지 않아 필경에 태어남이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도를 증득하였기 때문에 견고하게 정진하고 견고하게 사유(思惟)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서 끝끝내 어기지 않으므로 마음이 의지함이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타셨던 수레는 무상최승출요(無上最勝出要)의 도이지만 이 도에는 집착하지 않고 그 가운데 머물지 않나니,
이와 같은 도로써 모든 법을 추구하느니라.
또 비록 추구한다 해도 얻는 것도 없고,
그 도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도의 생각,
나고 죽음의 생각,
부처님의 생각에서 평등한 마음을 내나니,
결장법(結障法)에
평등하고 모든 법에 평등하며 모든 부처님에 평등하여 몸에 대한 소견을 멀리 여의고 부처님에 대한 견해를 내며 모든 견해를 깨닫느니라.
그리고 대치(對治)의 생각을 닦아 이미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났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일로 인하여 보살마하살을 수다원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부처님의 도에 집착하지 않아 도에 물들지 않음을 체득하고 부처님의 보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계율을 선택하지 않아서 마침내 불계(佛戒)를 보지 않나니,
불계를 보지 않기 때문에 계율을 선택하지 않고 계율을 분별하지 않으며,
세 가지 번뇌[三結] 를 영원히 끊고 삼계에 머물지 않아서 이미 부처님의 도를 체득하고 중생의 생각을 여의며,
의지하는 바도 없고 의지법(依止法)을 여의며,
오로지 부처님의 도만을 구하여 안온(安隱)하고 적정(寂靜)한 도를 얻느니라.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온갖 물질을 다 버리며,
얼굴 모습은 화열(和悅)하고 조금도 찡그림이 없으며,
보리를 닦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되 조그만 물질조차도 버리지 않음이 없으니,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까닭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까닭이며,
모습 있는 법을 닦기 위한 까닭이며,
모습이 없는 법을 얻기 위한 까닭이니라.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고 갖가지 두려움 없는 경지에 들어가며,
적정법(寂靜法)을 설하여 보리도를 청정히 하여 무섭거나 두려움이 없고 마침내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적정법을 체득하여 번뇌[塵垢] 를 멀리 여의고 부처님의 도에 평안히 머물며,
악한 세계도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을 잘 닦아서 희론(戲論)의 도가 없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이러한 일 때문에 보살마하살을 수다원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부사의(不思議)한 부처님 도를
수다원(須陀洹)이라 이름하였으니
만약 이 도에 머무른다면
틀림없이 보리에 들어가리라.
이 도는 허공과 같아
일체 법에 의지하지 않으며
인연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어서
존재하는 실체를 얻을 수 없네.
보살은 굳세게 정진하여
이러한 법 체득하였으며
모든 부처님은 세간을 인도하시는 이로서
최상의 출요(出要)의 도를 이루셨네.
이 도에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고
또한 그 가운데 머물지도 않으며
이러한 도로써 추구하여
일체 법을 보지 않네.
이 도는 동요(動搖)함도 없고
또한 그 가운데 머물지도 않으며
게으르지 않음이 부처님 같나니
거스르지 않아 두려움조차 없네.
이른바 생사(生死)의 모습과
부처님 생각 또한 그러하여
여기에 평등할 수 있으면
이는 수다원인 줄 알겠네.
모든 번뇌와 장애
부처님 도 덮어 가린 것
이 모두를 멀리 여의면
이것을 수다원이라 이름한다네.
몸이라는 견해 끊어 버리면
부처님의 견해 생겨나리니
모든 삿된 견해 까닭아 알면
대치(對治)의 생각 잘 닦을 수 있네.
자신이라는 생각 잘 닦아
나라는 생각이 허물되고 근심이 됨을 알면
이것을 수다원이라 이름하나니
부처님 도에도 집착하지 않네.
가령 이런 의심을 내어
나는 보리를 얻지 못하겠지 했더라도
여기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말고
부처님 도에서 찾아보아라.
계율을 선택하지도 않고
부처님의 시라(尸羅:
持戒)를 원하지도 않아
계율이라는 고정관념 이미 끊어지면
시라를 분별하지 않으리라.
세 가지 번뇌 영원히 끊고
삼계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미 부처님의 도 체득한 것이니
중생의 생각도 잘 닦으리.
도에 인연한 바 없는 까닭에
보리도를 구하여
이미 적정(寂靜)한 도 체득했으니
부처님은 보리를 더럽히지 않네.
좋아하고 즐거워하여 보시 행하며
화열한 얼굴로 조금도 찡그리지 않네.
몸과 목숨 아끼지 않으니
희론(戲論)의 도 없어지리라.
괴로워하고 고통 받는 중생 위하여
일체 모두를 버린다면
수다원을 초월하게 되어
미묘하고 뛰어난 최상과(最上果)에 이르리라.
모든 생각을 멀리 여의고
모습 없음을 잘 통달하면
이런 까닭에 악한 이름과
모든 두려움이 없어진다네.
이른바 법과 법 아닌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멀리 여의고
그 가운데 물들거나 집착 않으면
악한 이름이나 두려움이 없으리라.
만약 대중이 있는 곳에 들어가더라도
그 마음 두려울 게 없고
적멸법(寂滅法)을 선설(宣說)하여
이미 보리도를 맑혔네.
만약 중생의 생각 일어나더라도
진실한 마음 내기만 하면
그런 까닭에 번뇌 사라지고
일체 두려움을 멀리 여의리라.
일체의 두려움 이미 여의었으면
마침내 두려울 것 없으리니
이미 적정한 도 증득하여
최상의 경지에 안온하게 머무르리라.
악한 세계도 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으니
모든 두려움 생기지 않고
이 도가 눈앞에 나타나니
나니 남이니 하는 생각 사라졌네.
보살의 이와 같은 법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하나니
작은 법 즐거워하는 이 위해
이와 같이 설법하였네.
미묘한 방편으로써
부처님 법 선설하여
도에서 방일한 이로 하여금
이와 같은 법에 들게 한다네.
길 인도하시는 모든 부처님
방편 베풀어 설법하셨으니
오래도록 수행하는 모든 이와
가장 훌륭한 도 구하는 이를 위한 것이네.
그런 까닭에 아난아,
내가 수다원법 설하였으니
교활한 모든 중생들
이 법을 깨달아 알라.
이런 까닭에 아난아,
내가 수다원법 설하였으니
지혜 없는 모든 중생들
이 법을 분별해 알라.
범부 중생 지혜의 마음 없어
미묘하고 비밀한 말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다툼 일으켜
미묘하고 비밀한 이치 알지 못하네.
온갖 법에 만족하면
이를 곧 수다원이라 이름하나니
수다원이란 이름으로써
모든 부처님 법 나타내 보였네.
“아난아,
이와 같이 여래 등정각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수다원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느니라.”
1 7선(善)의 하나로서 청정조유(淸淨調柔)라고도 한다.
말이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淸淨)이라 하고,
뜻이 청정하기 때문에 조유(調柔)라고 한다.
2 10지(地)의 하나.
10지 중 두 번째 지위.
이것은 내범(內凡)의 지위로서 장교(藏敎)의 4선근(善根)이다.
이 지위에서는 견사(見思)의 의혹을 항복받고 몽롱하게 법성(法性)이 공(空)한 이치를 바라보기 때문에 성지(性地)라고 한다.
3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는 일에 여덟 가지 장애의 어려움[障難] 이 있으니,
첫째는 지옥에 있는 어려움,
둘째는 축생에 머무는 어려움,
셋째는 아귀에 머무는 어려움으로,
이 세 곳은 고통이 심해서 불법을 듣지 못하며,
넷째는 장수천(長壽天)에 있게 됨으로써의 어려움,
다섯째는 울단월(鬱單越)에 있게 됨으로써의 어려움인데,
이 두 곳은 즐거움이 너무 많아서 불법을 듣지 않으며,
여섯째는 벙어리가 되어 듣기 어려움,
일곱째는 봉사가 되어 듣기 어려움,
여덟째는 부처님을 전후(前後)해서 태어남으로 해서 듣지 못하는 어려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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