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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07-13_대승기신론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07-13_대승기신론_001

선현 2018. 7. 13. 18:56



®

『대승기신론』
K0616
T1666

기신론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승기신론_K0616_T1666 핵심요약



♣0616-001♧
『대승기신론』

기신론









마명보살님의 논서에 
원효대사님이 소를 붙이고 또 따로 내용을 덧붙인 
『대승기신론소기회본』을 살펴 보게 된다. 
그런데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알고보면 대단히 간단한 내용을 제시한다. 
그 내용을 지금까지 과거 조각글에서 반복해서 설명했다. 

첫 구절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

[論] 공(空)이라고 말한 까닭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상(差別相)을 여의어서 

허망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은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아니고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며, 

유상과 무상이 함께 하는 것[유무구상有無俱相]도 아니며, 

일상(一相)도 아니고 이상(異相)도 아니며, 

비일상(非一相)도 아니고 

비이상(非異相)도 아니며, 

일상과 이상이 함께 하는 것[일이구상一異俱相]도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중생이 망심(妄心)이 있어서 

순간순간마다 분별하여 모두가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여의면 진실로 공이라 할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

일단 일일히 한자어가 붙어 있어서 어렵다. 
염법이란 표현이 보이는데 오염되어 더러운 것 이런 의미다. 
현실에서 더럽고 악하다고 보고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관련되고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현실 일체를 놓고 공하다라고 한 것은 
본래부터 현실 일체가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측면이다. 

이 부분이 과거에 신수스님과 혜능스님이 서로 
대립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부분과 관련되면 
주로 혜능스님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 시를 다시 한번 올려 놓고 살펴보자. 

... 

선종에서는 신수스님과 혜능 스님 사이의 일화가 전해진다. 

혜능 스님은 5조 홍인(弘忍)대사를 찾아가 법을 전해 받고 

선종의 제6조가 된 스님이다. 

법을 전해 받게 된 계기가 있는데 거기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홍인대사는 수상좌인 신수(神秀)가 지은 


“몸은 이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명경대와 같은지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


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혜능이 이 시를 보고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서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참고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4960#2038


그런데 이 두 입장이 서로 모순된 듯하기에 
어느 한 입장을 취하면 다른 쪽 입장은 배척해야 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렇게 만일 오해한다면 크게 잘못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이 사정을 밝히고 있다. 

보시할 물건이나 보시하는 이나 받는 이나 보시하는 행위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상에 머물지 않고 무량하게 보시를 해야 한다. 

이것이 금강경에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금강경에 영향을 받아 내용을 제시한 분이 
또 알고보면 혜능스님인 것이다. 

중생제도도 마찬가지다. 

수행자는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제도되는 중생도 얻을 수 없고 
그런 제도를 행하는 이 자체도 얻을 수 없고 
제도한다는 것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 내용도 이 각 부분이 
표면상으로는 서로 모순된 내용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신수스님과 혜능스님이 남긴 게송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수행을 강조한 신수스님이라고 해서 
그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고 

본래 닦아낼 티끌과 먼지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해서 
마치 수행을 현실에서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제시하는 
혜능 스님이라고 해서 현실에서 아무런 수행을 할 필요가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또는 반대로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심지어 선도 얻을 수 없고 악도 얻을 수 없다고 해서 
극심하게 악을 행해도 된다거나 
무언가 선한 수행을 한다해도 얻을 바 있다고 여기고 
수행을 해도 된다.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미다. 

강조하는 측면이 달라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수행자가 이 두 측면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부처님이 제시한 것처럼 다 잘 수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a 와 b 의 게송이 있다고 할 때 
이 a 와 b 를 다 취해서 사용하면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가르친 내용에 부합하지만, 
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 편벽되게 하나의 측면을 취한다고 해서 
다른측면을 배제하면 그로 인해 큰 문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얻을 것이 없다는 측면만 강조하고 
이것을 붙들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당연히 그로 인해 생사번뇌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는데 
그로 인해 오로지 없다는 측면에만 치우치게 되고 
무량한 선법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전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할 선법이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하니 
무엇때문에 그것을 힘들게 하려고 하는가 
이렇게 여기고 
마냥 오로지 없음에만 치우쳐 빠져 지내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현실에 임하려면 
극히 극심하고 억울한 생사고통을 자신이 겪는 순간에도 
그런 관을 통해서 자신이 이를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야 
생사현실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 내용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그런 상태에 이른 수행자가 극히 희박하기에 
이 내용만 붙잡고 임하면 
대부분 수행자는 큰 문제점에 봉착한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내용 자체가 잘못인 것은 아니다. 
이미 대승기신론에서 제시된 내용을 살피는데 
그 부분이 이 부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반대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라고 하여 
세상에서 번뇌와 악법에 물들지 말고 
청정하게 수행을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로 인해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서 
일반적으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는 중생의 상태와는 
구별되게 되는 것이어서 좋은 내용인데 

그러나 그 수행이나 수행을 통해 얻는 상태가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런 수행을 하게 되면 
처음 생사번뇌에 묶인 중생의 병처럼 
그 수행자도 그런 병을 고치고자 한 약으로 인해 
다시 병이 걸리는 상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유소득(얻을 것이 있음)을 방편으로 
그와 같이 수행하는 입장이 갖는 문제점이다. 

또한 이 경우에는 자신이 생사에서 벗어나게 되면 
본래 생사현실 자체가 청정한 니르바나여서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관하는 가운데 
중생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꺼려하는 경향도 갖게 되기 쉽다. 
이것이 자신만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고 
수행결과를 증득하는 아라한이 갖는 문제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금강경에서처럼 
그런 수행을 하되 
그러나 그 수행이나 그 수행을 통해 얻는 결과가 
모두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이 모두에 대해 망집을 제거한 가운데 
그렇게 중생제도를 위해서 수행에 임하라는 것이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가르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은 결국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한 측면씩을 조금 더 강조해서 제시한 것이고 
알고보면 두 내용이 다 겸해져야 
수행이 원만히 성취된다는 사정을 볼 수 있다. 

사정이 그런데 
두 스님이 표현상 대립되는 게송을 남겼다고 해서 

모 아니면 도다 이런 식으로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 취하고 
다른 쪽은 배척해서 버려야 할 내용으로 이해하면 
큰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각각의 경우의 문제는 이미 앞에 본 바와 같다. 






mus0fl--Michel Jonasz - J'veux Pas Q'tu T'en Ailles.lrc 

앞에서 신수수님의 신시보리수 ~ 물사야진애 이런 게송과 

혜능스님의 보리본무수~ 하처야진애
이런 게송을 보았는데 
각기 한 측면에서 타당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기에 
이 두 측면을 다 함께 병행해 갖추어야 함을 보았다. 

신수스님의 게송과 
혜능스님의 게송은 
어떻게 보면 단심가와 하여가를 주고받는 입장에 비교할 수 있다. 
혜능스님의 시는 
마치 본 바탕에는 그런 것을 일체 얻을 수 없는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런 입장을 표명한 듯 느껴지고 

신수스님은 사정이 그렇다해도 
자신은 생사현실에서 
몸과 마음에 티끌이 끼지 않도록 쉼없이 노력하겠다는 
자세를 표명하여 수행에 단심가를 읊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원래 본 바탕을 놓고 보면 
혜능 스님의 입장이 타당하다고 보는데 
그런데 왜 생사현실에서는 
혜능 스님마저도 반대파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을 가게 되는가. 

그리고 왜 생사현실에서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면서도 
또 그렇다고 굳이 그런 시를 써야 하는 것인가. 
이 사정을 함께 보아야 한다. 

혜능스님의 입장이 
지금 살피는 대승기신론소 부분의 내용과도 
관련된다. 

앞에 제시된 대승기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공(空)이라고 말한 까닭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상(差別相)을 여의어서 

허망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

즉 이 측면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죄복개공무소주 이런 게송에서도 살필 수 있다. 

현실에서는 선과 악이 크게 문제되고 
세상의 온갖 사건 사고가 다 문제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 바탕에서는 원래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라고 
요구할 바 자체가 없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만화와 같은 허무맹랑한 내용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시인이 흥에 겨워 제멋대로 시를 써 제시하는 경우도 있고 
기타 대승기신론이나 부처님 경전처럼 그래도 가장 옳다고 보는 내용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가지인데 

그런데 이 모두가 본 바탕은 마찬가지로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는 
굳이 어떤 이가 그런 측면을 그렇게 보아야만 
그 본 바탕이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사현실에서 꼭 그런 측면을 
그렇게 관하고 현실에 임해야 한다고 할 것인가. 

알고보면 사정은 마찬가지다. 
즉 그렇게 관하고 현실에 임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관하고 
생사현실에서 이러저러한 수행을 그렇게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열심히 행해야 한다고 하는 사정과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다시 이 부분을 설명하면 사정이 이렇다. 

그렇게 관하지 않더라도 
또 그렇게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또 그런 수행을 굳이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하지 않더라도 
본 바탕에서는 아무 차별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관하고 
또 그런 수행을 해야 하고 
또 그런 수행도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하는가. 

이 부분은 양 입장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결국 같은 사정 같은 취지인 것이다. 

본 바탕에서는 문제가 없고 
그런 수행을 요구하지도 않는데 
정작 문제는 그 본 바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전혀 실답지 않다고 할 생사현실 안에서 
그렇게 실상을 올바로 관하지 못하고 
엉터리로 임하고 수행을 행하지 않으면 
또는 수행을 행하더라도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유소득)고 여기고 
유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임하면 
본 바탕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생사현실에서 실상에 대하여 올바로 관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수행이 필요한 사정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론 그대로 
자신이 극히 극심한 고통을 받고 
억울한 수모와 모욕을 받게 되는 상태에 처해서도 
앞의 제시한 내용대로 
본 바탕의 내용을 붙잡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평안히 견딜 수 있다면 
최소한 자신만은 그래도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 제시된 것처럼 
별 이유도 없이 왕에게 붙잡혀 
눈과 귀와 코를 잘리우고 
손과 발을 잘리우고 
곧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한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생각해보면 너무 억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금강경에 제시된 것처럼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고 
여기에 상을 취하지 않고 안인을 성취해서 
지극히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적어도 그 개인의 입장에서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해도 
이런 상황이 되면 
대부분 얼굴색이 노랗게 변하고 
당황하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앞의 내용이 현실에서 적용되려면 
바로 이런 상태에서 
그 상태를 잘 견딜 수 있는가가 요건이 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현실에서 별 불만이 없이 그저 잘 지내고 있기에 
일체가 다 관계없다는 경우라면 
그것은 누구나 다 취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수행을 안해도 
자신을 누가 크게 괴롭히지 않으면 
대부분 다 성인군자와 별 차이없이 잘 지낸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누군가 나타나 자신을 발로 이유없이 걷어차면 
대부분 성인군자 형태로 지내던 사람들이 
또 대부분 다 분노를 일으키고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삶의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니 앞에서 제시한 현실 일체가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내용은 
이론적으로 옳고 잘못이 아니지만, 

현실에서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그와 같이 관한 가운데 평안히 임할 수 있는 수행자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론처럼 되지 않는 것이고 바로 그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또 설령 자신만은 그렇다 해도 
다른 중생을 자신처럼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할 때는 
또 마찬가지로 이 부분이 문제된다. 

자신이 일반적으로 하기 힘든 어떤 내용을 
다른 이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니 
잘 성취되기 힘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장 자신이 아끼는 것을 
다른 필요한 이에게 베풀어보라고 해도 
그것조차 잘 하지 못하는 중생들이 

자신의 손과 발이 묶여서 
코나 혀를 잘리우는 고문을 당할 때 
아무런 분노나 미움이나 원망을 갖지 않고 
평안히 임하고 
그래서 생사고통을 받는 업의 장애의 묶임에서 풀려나라고 요구하면 
그것이 쉽게 성취가능하겠는가 
이런 문제다. 

그러니 그 내용 자체는 옳은데 
그것이 생사현실에서 각 중생이나 수행자 자신이 받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는데는 
당장은 효용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위와 같은 시를 쓴 혜능 스님도 
당시 그 시를 쓰고 
어떤 흉악한 범인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고 
바로 자신과 함께 수행하던 수행자를 피해서 
도망을 가야 했던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자신도 수행자이고 상대가 수행자인데도 
사정이 그렇고 
수행자인 자신도 또 금강경에 나오는 그런 상태로 
어떤 고통이 에상되면 그것을 자신이 제시한 내용처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 상황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 본 바탕이 그렇다는 것은 
옳은 내용이지만, 
그런 본 바탕을 놓고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다시 어떻게 임해야 한다고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된다. 

어디에 티끌이 낄 곳이 있겠는가 .
이렇게 시로는 읊지만, 
그러나 몸의 안전을 위해 바삐 
피해야 할 곳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사실은 티끌이 낀 곳이라는 의미다. 

이는 그런 곳마저도 본 바탕의 측면으로 보면 
그런 문제가 없다고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에서는 
그런 문제가 그곳에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수행이 문제되는 부분은 바로 
그처럼 생사현실에 묶여 받는 생사고통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위해 수행이 필요하게 된 것이지. 
원래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에서 
그런 실상을 잘 관해야 한다거나 
그런 내용을 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거나 
그에 바탕해 이런 저런 수행을 그렇게 행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실상을 올바로 관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고 
또 그렇게 올바로 관한 가운데 
자신이 생사고통을 받도록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해소하는 계의 수행이 먼저 요구되고 
그것이 성취되면 

다시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수행자 자신부터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갖추는 것이 요구되므로 
또 계와 정과 혜의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음을 
수행자가 잘 이해하더라도 
복덕자량이나 지혜자량을 원만히 갖추지 못하면 
그 수행자가 행하는 제도 노력은 
대부분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한 중생의 입장에서 
좋다고 보는 것이 복덕이고 지혜자량인데 
그런 중생을 제도하려면 그것을  수행자가 갖추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털어낼 티끌과 먼지는 본래 얻을 수 없지만 
생사현실에 임해서는 끊임없이 그런 티끌과 먼지를 털어내고 
더 나아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원만히 갖추기 위해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수행을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 

닦을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는데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받는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스스로 풀려나고 다른 중생도 풀려나게 하려면, 
쉼없이 닦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닦으면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 바탕이기에 
바로 그런 사정으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고 성불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런 사정으로 그런 결과를 성취하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성불이란 것도 생사현실에서 문제되는 것이고 
본 바탕에서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는 
본 바탕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해도 
생사고통에 묶인 중생과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난 아라한이나 
보살 수행자나 부처의 상태는 
극단적인 차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사현실의 측면에서 그런 것이다. 


일단 쉬고 또 이어 살피자.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Etienne Daho - Tombé Pour La France.lrc 


어떤 이가 다른 이의 견해에 대해 비평을 가하면 
대부분 반응이 좋지 않게 될 수 있다. . 
그러니 무언가 잘못 보고 있다고 여겨도 
그냥 방치하게 되기 쉽다.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수행에 임하는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조금 상황을 이해가 쉽게 설명하면 
병원이나 유치원 상황이라고 놓고 
이 사정을 이해하면 쉽다. 

유치원생이 집착하는 것들은 
사실은 유치원 선생님 입장에서보면 
하등 중요하지 않고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처음 혜능스님이나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무소득 무소유 불가득 공의 입장이다. 

그런데 상황이 그런데도 
그 유치원에서 
매 순간 유치원생들간에 그런 문제로 시비가 일어나고 
다투고 서로 고통을 주고 받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도 알고보면 역시 그 본 바탕이 
무소유 불가득 공한 것이어서 문제가 아닌데 
그러나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본 바탕에서 실답지 않게 나타나는 생사현실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생사고통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도 망상을 일으켜 
그 생사현실의 내용을 기준으로 대할 때는 
이것이 가장 극심한 문제가 되는 내용이다. 


그러니 수행자가 이 사정을 잘 관하고 나서는 
이들 유치원생을 일정한 상태로 이끌고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서 
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어서 그 상황에 들어가 임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본 바탕에 그런 것이 얻을 수 없는데도 
그래도 생사현실에서는 이러저러한 보시~ 반야의 수행을 
이러저러하게 무소득을 방편으로 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래야만 본 바탕이 어떻게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되기에 그런 것이 아니고, 
본 바탕은 그러던지 말던지 관계없이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나 중생이 그런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벗어나게 하는데에서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유치원생이 집착하는 쿠폰이나 딱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쓸모가 있다거나 가치가 있다고 한편으로 보지 않지만, 
그러나 상대가 집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그것을 의존해야만 상대가 선생님을 믿고 
그런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올 수 있기에 
상대 눈높이에 맞추어서 그 상대의 상황에 들어가 
이끄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시하는 측면인 것이다. 

알고보면 생사나 고통도 얻을 수 없는데 
생사현실에서는 거의 대부분 이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고 있기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한편으로 잘 관하면서도 
그 상황에 들어가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벗어나게 하는 수행을 
수행자가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여 
그런 유치원생을 그냥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가. 
본래 그런 것이 없어서 
유치원생이 그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량하게 그런 상태로 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이다. 

또 그런 것이 문제된다고 해서 
수행자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 현장에 들어가는데 
올바른 방편을 통해 그들을 이끌려고 하지 않고 
한 손에는 전기 충격기 한손에는 쇠망치 
이런 것을 들고 강제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게 하면 
또 어떻게 되는가. 
그것도 문제인 것이다. 

그 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수행자가 억지로 그렇게 할 때 뿐이고 
그것이 멈춰지면 또 마찬가지가 된다. 
더욱이 그렇게 수행자가 올바로 수행을 하지 않고 
엉터리로 임하면 
수행자 자신도 그 환자나 유치원생과 상태가 같아져서 
함께 생사의 묶임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선생님 입장에서는 
유치원생을 그대로 방치할 도리도 없고 
그렇다고 손발을 묶어서 끌고 다닐 수도 없고 
결국 유치원생의 눈 높이에 맞추어 
상대가 스스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온갖 방편을 다 사용해야 한다고 보듯 
수행자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결국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한다는 측면은 
이런 측면인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고 보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에 임해 
생사현실에서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나아가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수행을 
쉼없이 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인 것이다. 

그냥 본 바탕에 그런 것이 없다고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중생을 그대로 방치할 도리도 없고 
그렇다고 강제로 손발을 묶어 
생사고통을 받게 만드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지시켜서 
그런 목표가 성취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서 
그런 취지로 수행을 하는 데 

이 상황에서 대부분 어떤 문제를 지적하면 
대부분 어긋난 반응을 보이게 되기 마련이다. 

본래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현실은 대부분 또 그렇게 임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그 방편은 
중지하고 
효과를 발휘할 선교방편을 찾아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수행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
본인도 랜덤으로 경전과 논서가 뽑혀서 
각 내용을 살피게 되면 

어떤 부분에서는 문제점을 보게 되고 
그것을 수정해보려고 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때마다 이 문제를 먼저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이의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보고 
그런 부분을 지적하면 
그 상대부터 대부분 감정이 상하고 
더 악화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그것을 방임하거나 

오로지 모두 좋다 좋다고만 하면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강제로 그런 내용을 없애면 
또 그것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방치하는 것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강제로 어떻게 강제할 도리도 없는데 
그러나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하게 하고 
이끌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수행자가 처한 수행의 어려움인 것이다. 


알고보면 그 상대나 자신이나 차별없이 
상태가 마찬가지고 
다 성불할 가능성을 차별없이 갖기에 
그러니 쉽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런 수행 노력을 시작하고 
성불하기에 이르기 까지는 
지극히 오랜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중간지점에 
수행자자신부터 자신이 제시하는 내용대로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청정한 니르바나이니 
자신의 손과 발을 묶어서 자신의 코와 귀 눈을 다 파내고 잘라내도 
말 그대로 평안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평안히 머물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가 
이것이 문제된다. 

정말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국 
생사에 묶인 중생의 상태와 마찬가지다. 

앞의 유치원의 상황을 놓고 
유치원생은 딱지나 쿠폰을 다 잃어버리면 
죽음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하는 경우와 같다. 

그 치료를 위해 선생님이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어  자신도 딱지나 쿠폰을 들고 
상대와 함깨 대하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도 
그 딱지나 쿠폰에 대해 집착을 똑같이 가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딱지나 쿠폰을 다 잃게 되니 
선생님이 얼굴색이 노랗게 되고 
심장에 경련이 생긴다고 하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알고보면 이 이야기다. 

그런데 손과 발이 잘리우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이 현실에서 대부분 
앞의 비유에서 딱지나 쿠폰의 상황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망집에 그만큼 깊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정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정말 본 실상을 잘 관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전에서 반복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대로 현실에서 잘 임하지 못한다면 
수행자는 수행자더라도 수준이 여전히 낮은 단계의 수행자로 평가받고 
대력보살도 그런 수행자에게는 
무량한 방편을 무량하게 제공해줄 도리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유치원생과 선생님의 상태가 별 차이가 없기에 
그로 인해 똑같은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여하튼 그런 어려움이 현실에 있다. 

그러니 무언가에 대해 
상대가 그런 내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역효과를 일으키게 되면 
상당히 곤란하게 된다. 

그러니 방관방치도 곤란하다고 보지만, 
또 마땅한 방편이 없기에 
그냥 겉돌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쉽다. 
왜 수행이 어려운가하면 현실이 그런 사정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일체가 모두 공하고 
청정하다. 그래서 생사번뇌에 오염되지 않는다. 

이 내용이 현실에서도 그래도 적용되려면 
수행자가 먼저 
일체 현실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고통을 그것도 억울하게 받는 상황에서 
그것을 평안히 받아들이고 참을 수 있는 수행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이 다 뜻에 맞기에 
그래서 평안하다는 것은 
왕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사문제는 그 부분이 문제가 아니고 
그렇지 않고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그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을 때 
그 현실에 그런 문제가 본래 없다는 것을 잘 관하고 
그런 생사고통을 극복하고 벗어나올 수 있는가가 
현실에서 수행자가 성취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금강경예 제시된 것처럼 
무상해탈문을 통해서 안인을 성취해야 한다.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 또는 
생명이나 수명 등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망집을 바탕으로 그에 대해 상을 취하고 머무는 자세를 벗어나야 
이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왜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자신이 분명하고 
그런 부분에서 손과 발로 보는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머지 않아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목숨이 없어진다고 하는 사태에 
직면해서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이어서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이론을 이해하더라도 
그런 구체적 상황에서 
그런 바탕에서 상을 취하지 않고 
안인을 성취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이것이 안  되면 
생사 일체가 청정한 니르바다라는 것은 
그저 말에 지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다음 조각글에 이어서 살펴나가기로 한다. 


한편 오늘 살핀 대승기신론소기회본에서 제시된 
내용도 이 문제와 함께 관련되므로 
함께 이어서 살펴나가기로 한다. 


즉 다음 내용이다. 

...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은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아니고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며, 

유상과 무상이 함께 하는 것[유무구상有無俱相]도 아니며, 

일상(一相)도 아니고 이상(異相)도 아니며, 

비일상(非一相)도 아니고 

비이상(非異相)도 아니며, 

일상과 이상이 함께 하는 것[일이구상一異俱相]도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이 아니면 이것인 것이지 
왜 자꾸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자꾸 하는가. 
이 문제는 결국 해탈문에서 
공해탈문 무상해탈문과 밀접한 문제다. 

진여 실재의 상황이 자신이 분별하는 분별 내용과의 관계에서는 
그런 분별 내용이 해당되지 않고 
언설을 떠나게 된다는 그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실상의 공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또 그것이 곧 앞에 제시한 혜능 스님의 입장이기도 하고 
또 그것이 금강경에서 보시할 이나 보시받는 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행위를 얻을 수 없고 
제도하는 중생이나 제도하는 이나 제도하는 행위나 모두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과 모두 관련이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앞 구절처럼 왜 그것을 그렇게 복잡하게 나열하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어떤 범주로 분류해서 분별이 가능한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단순히 2 가 분류를 하면 이다 아니면 아니다. 
있다 아니면 없다. 이렇게만 분류하기 쉬운데 
자세히 살피면 더 추가해야 한다는 사정을 보게 된다. 

이 소리는 노란색인가 노란 색이 아닌가. 
이렇게 물으면 무언가 잘못된 범주로 나누어 질문을 한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논리학에서 다루는 모순개념이 무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노란색의 모순 개념은 비 노란색 이렇게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비 노란색이란 노란색이 속한 유개념 가운데 
노란색을 제외한 나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 노란색이란 색 가운데 노란 색이 아닌 색들 
이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이다 아니다 형태로 분류하는 2 가 분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소리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게 되면 
소리는 색의 범주 자체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 두 범주 가운데 
넣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리가 전혀 없는 내용인가하면 그것도 아니다. 

단순하게 보면 일단 소리가 노란 색이 아닌 것이므로 
노란 색 아닌 것 이렇게 보고 넣기 쉬운데 
그러면 ~ 이 아니다라는 관념이 가리키는 범위가 
앞의 경우와는 또 달라진다. 

그래서 관념분별에서는 조금 더 복잡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어떤 상자가 있는데 어떤 이가 도저히 그 상자를 열어볼 도리가 없다. 
그런데 상자에 물건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그런데 잠깐 열어 봤다. 
그런데 너무 빨리 보아서 그런지 
어떻게 보면 꽃처럼도 보이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처럼도 보이면 
그때 무엇이라고 보고를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도 있다. 

딱 부러지게 꽃 이면 꽃 이고 아니면 아니다 
이렇게 제시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어떤 그림 부분이 노란 점과 빨간 점이 섞여 찍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놓고 
어떠한 이가 이것은 노란 색인가 아닌가.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이 경우는 애매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어떤 이가 
그런 경우 두가지 속성을 결합시켜서 질문을 던지면 
또 어떻게 답하는가. 
이것은 노란색으로 그려진 꽃인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분별 판단을 할 때는 
단순히 2 가 분류로만 범주를 나누어 접근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세히 보면 일단 노란 꽃에 들어간 내용을 가지고 
다양한 경우수를 나열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노란  + 꽃 
노랗지만 + 꽃 아닌 것 
노랗지 않지만 + 꽃 
노랗지 않고 + 꽃도 아닌 것 

이렇게 대강 경우수를 분류해야 
문제되는 것을 이 범주에 모두 넣을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니다'나 '아닌 것' 이런 내용이 상당히 애매한 표현이 된다. 
어떤 이가 노란 것인지 아닌지 모를 때는 여하튼 
노란 것은 아닌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도 언어분별과정에서는 다 문제된다. 

자세히 살피면 골치아픈 문제인데 
일반적으로 관념분별하게 되는 모든 경우수를 다 포괄해서 
나열하다보면 
위와 같은 형태로 일단 나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실재나 실상은 그런 분별 내용에 해당되지 않는다. 


즉, 분별영역에서 행하는 그 일체의 분별은 
분별 영역에서의 일이고, 
실재 진여의 실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해당 되지 않는다. 

이것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왜 그런 분별이 실재 영역에 해당이 되지 않는가라는 사정만 
이해하면 이것은 간단한 내용이다. 


또 사정은 실재 영역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감각현실 영역도 알고보면 사정이 마찬가지여서 
분별 내용은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잘 이해하면 
역시 무상해탈문도 이를 통해 쉽게 찾아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생사를 벗어나고 
또 나와서 중생을 제도하는 활동을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보는 색이 
관념분별인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신이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일정 부분이 자신이라거나 영희라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분별 영역에서의 일이고 그의 망상의 자유가 있는데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에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망집을 일으켜서 생사를 받고 
생사고통에 묶인다는 상태는 
자신이 일으킨 관념분별을 가지고 
관념분별 영역에서 각 영역의 내용을 
모두 접착시켜서 이것을 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가 되면 
그런 내용이 없는 다른 영역의 내용을 대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그런 생사고통을 거기에서 
생생하게 받고 얻어내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 것이다. 

알고보면 거기에는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이것을 접착시키고 그런 것이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 전제에서 신나게 생생하게 좋음을 얻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비명을 지르게 되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당연히 좋은 순간에서는 
왕도 다른 수행이 필요없이 생사고통을 걱정하지 않게 된다. 

문제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는데 
자신이 대단히 집착하고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망집을 일으켜 대하던 부분이 
다 잘라지고 분해되는 상태에 이르면 
통곡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수행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 핵심은 
그렇게 보고 대하게 되는 그 현실 상황에 
그 현실도 그렇고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도 그렇고 
자신이 그렇게 여기는 생사고통이 
그 각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확인하고 

그 상황을 잘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면 사실은 그 개인만은 
그런 상황에서도 평안히 받아들이게 된 안인을 성취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현실 일체가 다 니르바나라는 내용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생사현실안에서도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앞에 제시한 것처럼 
이론처럼 말처럼 쉽지는 않다. 








◆vdya9982

◈Lab value 불기2562/07/13/금/00:27

댓글내용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Yves Montand - Sir Godfrey.lrc 

☎잡담☎

♥ 잡담 ♥체계의혼란과상의문제

오래전부터 쓰려고 하는 내용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건강문제도 작용하지만, 
시스템이 바뀌어서 그런 측면도 있다. 
여하튼 해당 부분을 살피고 넘어가고자 하는데 
매번 시작부분에서 멈추고 있다. 
답답한 마음이 든다. 

조각글이 더 이상 진전이 안 된 시점은 
되돌아보건대 신수스님과 혜능스님의 시에 대해 
언급한 조각글 이후부터다. 
그 뒤에 sns 을 살피다가 
여행 다녀오고 그러다보니 
무언가 논점을 놓고 살펴야 하는데 
과거 내용만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 더 이상 
쓰기 싫어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또 이 사이트에서 갑자기 체계를 변경해서 
글 수정할 때마다 무슨 퀴즈를 풀라고 성가시게 해서 
다른 작업 공간을 찾아보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사정을 알아보니 사이트에서 봇 사용을 막는다고 
캡차기능을 도입했는데 공교롭게 
그날 이후로 방문자수가 급감했다는 소식도 보게 된다. 

방문자수가 급갑해서 1/4 이 되었는데 
하루 1000 명 정도밖에 방문을 안한다. 
그런데 원인이 새로 도입한 캡차기능때문인지 
아니면 주된 검색엔진 사이트에서 타사 블로그글 검색을 
막아서 그렇다 등등 원인 분석이 복잡하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사이트가 그렇게 방문자가 많은가 하고 
한 번 들러보았더니 주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그런 
주제로 글이 많이 올려져 있는데 
본인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이트는 방문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작업하면 
좀 덜 졸리고 덜 질린다. 
그것이 인터넷에서 본인이 작업하는 주된 이유다. 

본인이 조각글을 쓴다고 바로 누가 찾아와 읽어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처럼 여기며 작업하기에 
디스크에서 혼자 작업하는 것과 달리 
덜 졸면서 덜 질려하며 작업하게 된다. 
이것이 sns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내용인데 누군가 본다거나 반응을 하면 
자신의 활동을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sns 상의 작업이 그런 효과를 갖는데 
오래 놓고 보면 마치 연예인의 인기처럼 
묻히는 허무감도 같이 갖는다. 
일시적으로 방문자수가 많고 댓글도 달리고 하면 
무언가 가치있는 작업을 한 것처럼 심리적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오래 두고 보면 그것도 다 쓸모없다. 

그런데 또 고전이나 경전처럼 세대를 이어가면서 
오래오래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도 문제가 있다. 
과거 세대에서 지금 세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 넘겨주고 
또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 넘겨주지만, 
그러나 정작 각 세대에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나치기 쉽다. 

예를 들어 불교계에서는 해인사의 고려대장경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해인사에 장경이 보관되어 수백년을 보관하면서 
지내오는데 정작 현재나 과거나 그것을 열심히 읽고 
살피는 이는 극소수다. 

그래서 그냥 보관을 위한 보관이 세대를 이어 
이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도 있다. 
한 페이지를 펼쳐서 읽어보려고 하면 
이해가 잘 안 되고 너무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참고 읽어나가기가 힘들다. 
재미가 있는가 
또는 수익을 거두는가. 
또는 입시나 취직시험에 도움되는가.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대부분 관심을 거두어 들이게 된다. 
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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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체계의혼란과상의문제

오래전부터 쓰려고 하는 내용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건강문제도 작용하지만, 
시스템이 바뀌어서 그런 측면도 있다. 
여하튼 해당 부분을 살피고 넘어가고자 하는데 
매번 시작부분에서 멈추고 있다. 
답답한 마음이 든다. 

조각글이 더 이상 진전이 안 된 시점은 
되돌아보건대 신수스님과 혜능스님의 시에 대해 
언급한 조각글 이후부터다. 
그 뒤에 sns 을 살피다가 
여행 다녀오고 그러다보니 
무언가 논점을 놓고 살펴야 하는데 
과거 내용만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 더 이상 
쓰기 싫어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또 이 사이트에서 갑자기 체계를 변경해서 
글 수정할 때마다 무슨 퀴즈를 풀라고 성가시게 해서 
다른 작업 공간을 찾아보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사정을 알아보니 사이트에서 봇 사용을 막는다고 
캡차기능을 도입했는데 공교롭게 
그날 이후로 방문자수가 급감했다는 소식도 보게 된다. 

방문자수가 급갑해서 1/4 이 되었는데 
하루 1000 명 정도밖에 방문을 안한다. 
그런데 원인이 새로 도입한 캡차기능때문인지 
아니면 주된 검색엔진 사이트에서 타사 블로그글 검색을 
막아서 그렇다 등등 원인 분석이 복잡하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사이트가 그렇게 방문자가 많은가 하고 
한 번 들러보았더니 주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그런 
주제로 글이 많이 올려져 있는데 
본인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이트는 방문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작업하면 
좀 덜 졸리고 덜 질린다. 
그것이 인터넷에서 본인이 작업하는 주된 이유다. 

본인이 조각글을 쓴다고 바로 누가 찾아와 읽어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처럼 여기며 작업하기에 
디스크에서 혼자 작업하는 것과 달리 
덜 졸면서 덜 질려하며 작업하게 된다. 
이것이 sns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내용인데 누군가 본다거나 반응을 하면 
자신의 활동을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sns 상의 작업이 그런 효과를 갖는데 
오래 놓고 보면 마치 연예인의 인기처럼 
묻히는 허무감도 같이 갖는다. 
일시적으로 방문자수가 많고 댓글도 달리고 하면 
무언가 가치있는 작업을 한 것처럼 심리적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오래 두고 보면 그것도 다 쓸모없다. 

그런데 또 고전이나 경전처럼 세대를 이어가면서 
오래오래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도 문제가 있다. 
과거 세대에서 지금 세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 넘겨주고 
또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 넘겨주지만, 
그러나 정작 각 세대에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나치기 쉽다. 

예를 들어 불교계에서는 해인사의 고려대장경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해인사에 장경이 보관되어 수백년을 보관하면서 
지내오는데 정작 현재나 과거나 그것을 열심히 읽고 
살피는 이는 극소수다. 

그래서 그냥 보관을 위한 보관이 세대를 이어 
이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도 있다. 
한 페이지를 펼쳐서 읽어보려고 하면 
이해가 잘 안 되고 너무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참고 읽어나가기가 힘들다. 
재미가 있는가 
또는 수익을 거두는가. 
또는 입시나 취직시험에 도움되는가.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대부분 관심을 거두어 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시간이 많이 지났고 
글도 길어졌으므로 
다음 조각글로 넘겨 살피기로 한다. 

체계가 바뀌었는데 
사용자들의 불만 접수가 있어서 그런지 
캡처 기능을 처음 1 번만 요구하는 형태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귀찮다고 보지만, 그래도 
본인처럼 한페이지를 놓고 하루에 수십번 반복해 
고치고 수정해 페이지를 마감하는 경우는 
큰 문제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4 곳의 사이트에 병행해 올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본다. 
검색도 안 되는 곳에 자꾸 글을 쓰면 
조금 효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구○  검색사이트 
국내에서는 ●●  검색사이트가 대부분 검색을 장악한 상태인데 
여기에서 검색이 되 나타나지 않으면 
글을 써도 개인 디스크에서 쓴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다만 본인은 그래도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작업하고 글을 올리면 
sns 상황에서 쓰는 것처럼 
막연히 불특정한 누군가가 바로바로 결과를 읽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에 
sns 상에서 실시간으로 글을 주고 받는 그런 느낌을 느끼면서 
글을 쓰니 조금 낫지 않은가. 이런 것뿐이다. 

그런데 경험상 블로그 사이트가 폐쇄되고 없어지는 경험을 
몇 차례 하다보니 
조금 현명하게 잘 관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는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중간중간 저장할 때마다 
사이트를 돌아가면서 백업을 해가면서 
올리는 중이다. 
한번은 1 -2   한번은 1 -3  한번은 1 - 4 
이런 형태라는 의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053#9982 
sfed--대승기신론_K0616_T1666.txt ☞기신론 
sfd8--불교단상_2562_07.txt ☞◆vdya9982 
불기2562-07-13 
θθ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mus0fl--Yves Montand - Sir Godfrey.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Édouard_Manet-Kearsarge-Alabama2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amemphismusic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tanford_University_Arches_with_Memorial_Church_in_the_background



♥Tolmin ,Slovenia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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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HGM_Albin_Egger-Lienz,_Die_Namenlosen_(1916),_Heeresgeschichtliches_Museum,_Wien_0594-Bearbeitet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a_English_Garden_01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Ningbo_Ayuwang_Si_2013.07.28_14-49-07



♡관음사 부산시 강서구 강동동 1760-2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Naver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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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Etienne Daho - Tombé Pour La France.lrc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20_234807_butan_ct33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aude-Monet-vetheuil-morning-effect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e,_Abraham_Darby,_バラ,_アブラハム_ダービー,_(8912484793)



♥Université de Lille, Campus Pont de B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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