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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2-09-02_대반열반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09-02_대반열반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9. 2. 13:34



®

『대반열반경』

K0105
T0374

대반열반경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반열반경_K0105_T0374 핵심요약



♣0105-001♧
『대반열반경』

대반열반경





『대반열반경』의 내용을 원효대사의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를 통해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자. 

『열반경종요』 첫 부분에 열반의 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열반의 도는 

도가 없으면서, 도 아닌 것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면서, 머무름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도는 지극히 가까우면서 지극히 머니, 

이 도를 증득한 이는 

고요하고 못내 시끄럽다. 

...


그런데 문장 자체가 서로 모순되는 표현을 붙여 놓고 
그것이 하나의 대상에 대한 내용들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열반의 도라는 것은 
도가 없다고 하니 
이 도는 닦고 수행하고 걸어나가야할 내용인가. 아닌가. 


그런데 또 열반의 도는 또 '도 아닌 것'이 없다고 제시하니 
어떤 특별한 수행을 선택해 닦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인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오락가락 하게 만드는데 
잘못 이해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그 때 그 때 자신에게 유리해 보이는 내용을 
마음대로 골라서 아무렇게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자칫 잘못 불러 일으키게 되기 쉽다. 

그런데 원효대사가 쓴 글들을 보면 
대부분 이렇게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형태로 
서술이 많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원효대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내용을 놓고 승의제와 세속제를 오가며 행하는 종합적인 설명 방식인데 
이 논서를 통해서 어떤 내용을 이해하려는 입장에서는 
그런 사정 때문에 표현은 이해해도 
정작 그 표현이 나타내는 내용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아듣기 힘들게 되기 쉽다. 

그런데 사실 무언가에 대해 
그 정체를 올바로 관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고자 할 때는 
이렇게 제시하게끔 되는 그런 사정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특이한 차를 맛보았는데 
어떤 이가 다가와서 그 차의 맛이 어떤가. 
말로 설명해달라고 한다거나, 

또는 엉뚱하게 그 차 맛은 어떤 색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여기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데 무언가에 대해서 올바로 그 정체를 파악하고 
서술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결국 이와 같은 문제를 누구나 만나게 된다. 

그래서 글자는 글자인데 아무리 읽어도 
그 글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도무지 무엇인지 알아듣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더라도 
그런 내용을 어렵게만 여기지 말고 
무엇에 대해 설명할 때 도대체 어떤 취지에서 
이렇게 매 경우 제각각 오락가락하는 표현으로
복잡하게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가 
그 사정을 깊게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열반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본래 생사현실에는 각 생명들이 제각각 
극심한 생노병사의 고통을 겪고 있기에 이 문제 해결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생사현실에서 그처럼 각 주체가 문제라고 여기는 
그런 생사나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분이 부처님이다. 

그런데 그 부처님의 제자나 일반인이 볼 때 
그 부처님이 이제 일반인들이 죽어 사라진다고 보게 되는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본래 부처님께서 
생사현실에는 각 주체가 그렇게 문제삼는 그런 생사나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포함해 그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나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가르쳐주신 것인데 
이제 그런 부처님이 
일반인들이 죽어서 사라진다고 보고 
그래서 문제라고 보는 그런 상황에 놓인 상태에서 
지금 열반경의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또 이것을 반열반이라고 구분해 표현한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 각 입장마다 
열반을 놓고 이해하는 내용에 따라서 
조금씩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처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얻는다는 의미는 
일반적 입장에서 생사와 생멸이 있고 
그래서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망집을 일으켜 그런 생사현실에 임하는 입장에서 

그런 생사현실에는 본래 그런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그런 올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온갖 망집 번뇌를 제거하고 
그런 망집에 바탕한 업의 장애도 모두 제거하여 끊고 
그래서 생사고통일체를 벗어난 상태를 
기본적으로 해탈 열반[니르바나]을 얻는 상태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또 한편 부처님은 
그처럼 일반적 입장에서 생사고통이 있다고 보는 그런 생사현실은  
본래부터 그런 생사고통을 떠난 열반적정의 상태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생사현실에서 
이런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일정한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그런 열반의 상태를 증득하게 되는 것처럼 제시되지만, 

알고보면 그렇게 얻는 열반은 본래부터 그런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얻는다는 해탈 열반은 
그런 본 상태를 가리우고 있던 망상분별과 집착
그리고 그에 바탕해 겪고 있던 생사고통의 묶임을 걷어내 
제거해낸 의미만 갖는 것이 된다. [이계과] 

그래서 이 부분에서부터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통해 비로소 얻고 증득하게 된다고 보는 열반과 
본래부터 그렇다고 제시한 열반 사이에서 
약간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 


한편, 그런 사정을 그처럼 제시해주시는 부처님은 
일반인이 죽게 되었다고 보는 그런 상태에서 비로소 그런 열반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그런 깨달음을 얻어 그 내용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그 상태에서부터  
이미 그런 상태를 얻었고 
또 이후 죽 그에 바탕해서 
그런 깨달음을 가르치신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일반인 입장에서 볼 때 
다시 그런 부처님께서 죽어서 그 몸도 없어지고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이런 상황을 또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상태를 완전히 남김이 없는 열반이란 의미에서 
반열반이라고 구분해 칭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이런 내용을 놓고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처음 일반인 입장에서 망집에 바탕해 
어떤 이가 죽으면 그것으로 그 주체는 끝이고 
그 이후에는 그와 관련해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해하는 입장[단멸관]부터 시작해서 
앞에 제시한 열반 해탈의 의미와 함께 
각 입장마다 오락가락하며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잘 이해하려면 
일단 일반적 입장에서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 
그리고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의 
본 정체가 무언가부터가 처음부터 잘 파악되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렇게 영희나 철수 그리고 평소 자신이라고 본 부분이 
어느 순간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망가지고 사라지게 되어서 
장례식을 치루고 매장되고 화장처리될 때 
이 내용을 일반적으로 영희나 철수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다시 이런 현장에서 이 내용을 놓고 
이 내용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또 잘 관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생사현실 전반에 걸쳐 
그 모든 상황에서 
그런 부분에 제각각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영희나 철수 그리고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제시한 것이다. 

만일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임하면 
그것이 타상이나 아상을 취해 임하는 것이어서 
아직 생사현실이나 어떤 주체에 대한 본 정체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그 자신부터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자신부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것이어서 

그런 경우는 그 사유만으로 
수행자 라이센스 자체가 박탈당한다고 제시한다. [ 참고 금강경 ] 

그러니 이 부분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생멸한다거나 오고간다거나 
무언가를 행한다고 여기는 현실 내용을 놓고도 마찬가지가 된다. 

생사현실에 대부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생사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이렇게 올바로 관하고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온갖 망상분별을 다 제거하고 
이것을 모두 없애어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 시점 2563_0923_072952


여기에서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측면이 우선 있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영희나 철수가 그렇게 있고 
그 생멸이나 오고감 등이 있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는 
그런 망상분별의 내용을 기준으로 잡고 
그 기준에서 좋다고 보는 것을 붙잡고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집착해 
현실에 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하나같이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쓸데없는 것이고 
바로 이런 상태때문에 무한히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수많은 주체가 대단히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보는 그런 내용을 
남김없이 다 제거하고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반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회신멸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다. 


이 상황을 조금 쉽게 이해하려면 
어떤 게임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어떤 게임을 하는 이가 
어떤 게임을 해서 그 게임 안에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기술도 익히고 
그리고 아이템도 수없이 쌓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대단히 애착을 갖고 임하는 상태다. 
그런 가운데 그 게임 안에서 활동해 그간 쌓아 놓은 
자신의 아이템과 캐릭터가 어느 순간 파괴되면 
거의 그의 삶 전반이 의미가 없게 된다고 여길 정도다. 

그런데 이 게임을 하는 이의 부모님은 
이것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백날 해보았자 결국 아무 쓸모 없다. 
그리고 단지 쓸모없는 것일 뿐 아니라, 
바로 그런 자세때문에 
다른 무수한 게임 안에서나 게임 밖에서나 
한결같이 그가 심한 고통을 당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x취급받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사정이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하나의 내용을 놓고 
무엇을 기준으로 대하는가의 입장 차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르게 보게 만드는 기준 가운데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할 때 
어떤 기준이 정말 옳고 타당한 내용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게임을 놓고 보면 
그 게임안에서 취득한 온갖 기술이나 아이템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게임을 하는 이들간에서 
분명 뚜렷한 차이와 효과를 발휘하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은 분명한데 
그런데 그것은 나머지 영역에서는 통용이 되지 않는다.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처음 제시된 회신멸지라는 내용은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게임 안 내용들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게임이 전혀 실답지 않을 뿐더러 
이후 무한한 기간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무익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안에서 무언가를 하려면 
또 한편 그 게임안에서 적용되는 규칙이나 내용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임을 그처럼 기준으로 잡고 중요시하고 대하는 입장 뿐 아니라, 
게임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이를 벗어나와야 한다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도  
그런 게임 안에서 행해야 할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그 게임 안에서 행해야 할 여러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수행방안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 사정이 위와 같은데 
다만 문제는 그 게임에서 활동하는 이들 대부분이
그 사정을 그 게임 안에서 
그 사정을 그 상대가 곧바로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설령 그렇게 이해해도 
이를 바탕으로 그 게임안에서 일정한 실천을 통해 
그 주체를 게임에 묶어 놓게 하는 장애가 해소되지 않는한 
그 게임을 통해 고통을 겪는 상태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니 그 상태에서는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하는 한편 
예를 들어 자신이 게임을 통해 
다른 게임하는 이에게 피해를 입히고 고통을 주었다거나 
많은 채무를 부담해 놓았다면 
그런 바탕에서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자신을 그러한 게임에 묶어두게 하는 
업의 장애를 해소하는 수행 노력을 열심히 해야 
비로서 그 게임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된다고 보게 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게임 밖에서 그 부모님이 볼 때는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것이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그렇게 방치만 해서 
게임하는 이가 자신이 알아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오는 경우는 
무한한 기간 관찰해보아도 거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자비심을 갖고 이런 이를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게 하고자 하시는 어떤 분이 

이제는 직접 그 게임으로 들어가서 
그런 게임 안에서 활동해서 
다른 게임하는 이들을 상대로 하여 
그처럼 게임의 본 사정을 잘 관할 수 있도록 
그 게임의 본 정체도 잘 알아듣게 제시해주고 
또 한편 그런 묶임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방안[수행방안]도 잘 제시해 실천하게 하는 한편 
그 외 다양한 방편을 사용해서 
그렇게 생사고통에 묶인 이들을 그 게임 밖으로 꺼내 오고 구출해 내기 위해서 
임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처음에 비록 게임에서 
어떤 키를 누르면 수없이 어떤 내용이 그런 형태로 무한히 반복해 나타나고 
그것은 어떤 특정한 이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게임을 하는 다수가 또 다함께 그처럼 그 내용을 대하고 
그 내용도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생생하게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하나 그리고 종합적으로 실답지 않고 쓸모없다고 제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실답지 않는 게임에 묶여 고통을 받는 무수한 이들을 그 상태에서 벗어나오게 하려면 
결국 앞처럼 쓸모가 없다고 본 그런 게임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 게임안에서 적용되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준수하는 가운데 
그런 취지에서 그 게임 안에서 활동을 잘 해야 한다는 것도 또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임하는 수행방안이 
그렇게 제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손바닥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이제 손바닥과 소리를 놓고 두 내용을 대조해 살핀다면 
이 두 내용은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할 뿐만 아니라, 
그 관계도 엉뚱한 것이다. 
무슨 사정으로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를 일으키는 역할을 할 것인가. 
또 반대로 청각정보가 시각정보를 일으키는 역할을 할 것인가. 
매번 그런 관계로 그런 내용을 반복해 대해도 
그 사정이 본래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또 심지어 그렇게 문제삼는 그 각 내용도 본래 하나하나 실답지 않은 것이다. 
즉 어떤 이가 어떤 부분을 대해 손바닥이라고 여기는 그런 분별내용이나 
소리라고 여기는 분별 내용도 
역시 그런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고 
또 그런 감각현실은 본 바탕인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한편 실재의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 실재는 차별없이 공하다 
이러한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마다 반복해서 그런 관계로 그런 내용을 얻고 있고 
또 그것은 어떤 특정한 주체만 그렇지 않고 대다수가 그렇고 
그것은 또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생생하게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만일 그런 상태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손뼉 소리가 필요하다고 할 때 
그 손뼉 소리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역시 손을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게임을 놓고 이 관계를 이해해보자. 
어떤 키를 누른다고 어떤 화면에서 무기가 발사될 사정이 무엇인가. 
그 게임에서는 매번 그 관계를 그렇게 대한다해도 
다른 게임도 그렇던가. 
그리고 그런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도 그렇던가. 
그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그 게임에서 그런 무기를 발사시키고 일정한 동작이 화면에 
나타나게 하려면 그 키를 눌러야 하고 
다른 키로는 그렇게 하기 곤란하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그 내용이나 그렇게 행하는 주체나 
이를 통해 제도하는 그 주체를 본래 얻을 수 없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그리고 종합적으로 다  실답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런 생사현실안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생생하게 겪어 나가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그 수행자 역시도 그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그런 수행방안을 열심히 닦아
그 수행자부터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한 상태가 되어야만 
자신과 다른 중생을 다함께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된다는의미다. 



이것은 게임안에서 일정한 키를 눌러야 
일정한 화면이 나오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것이 그 게임안에서 무한히 
무수하게 다수 게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내용이라고 해도 
그 하나하나는 다 실답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게임 밖에서 볼 때 그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게임에 들어가 게임에 임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위와 같이 그 내용들이 그런 형태로 대단히 반복하고 
또 자신 뿐 아니라 다수가 함께 그 내용을 그처럼 얻고 
또 여러 형태로 대단히 생생하게 얻기에 
바로 그런 사정으로 오히려 그 내용 하나하나가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는 한편 
그런 내용은 그 게임 밖에서도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는 가운데 
그 게임에서 스스로 그 사정을 
끝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끝내 벗어나오지 못한다는 의미다. 



알고보면 게임의 종류가 대단히 많은 것이어서 
어떤 게임에서 평생 그렇게 노력해 쌓은 아이템들이 
다른 게임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면 모르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어떤 게임에서 임한 아이템은 다른 게임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 게임에 집착하는 입장에서 
그 게임을 기준으로 놓고 살피면 
그렇게 자신이 집착하는 그 게임의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통해 얻어 놓은 아이템 등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고 없어지게 되는 
그 캐릭터의 사망이 대단히 문제라고 보고 
그 게임에 전전긍긍하며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게임을 게임 밖에서 대하는 입장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그 게임에서 그처럼 실답지 않은 캐릭터에 집착하는 가운데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자신이 애착하는 자신의 캐릭터가 사망하면 
그 캐릭터가 얻어 놓은 아이템 등이 아무 의미없게 된다고 
전전긍긍하면서 그런 실답지 않은 캐릭터를 붙들고 
그 게임을 통해 생사고통을 겪는 것도 문제는 문제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게임에서 그 게임하는 이가 행한 업으로 인해 
이후 그 주체가 이후 무한히 
그 뜻과 관계없이 임해야만 하는 새 게임 종류나 
그런 게임에 임하게 되는 캐릭터 자체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혹[번뇌] - 업 - 고의 관계로  제시되는 생사현실의 문제점인 것이다.  


결국 한 주체가 하나의 게임을 마치고 다른 게임에 임하게 될 때는 
이전 게임에서 집착해 쌓은 아이템은 하나도 다음 게임으로 가져가지 못하지만, 
정작 그 게임들에서 일으킨 번뇌망상과 그에 바탕해 행한 업은 
그 이후 임하는 게임 종류와 게임 케릭터 배정에 
모두 영향을 미치고 그 적용을 받아 나가게 된다. 

쉽게 말해 어떤 이가 생사현실에서 
쌓아 놓은 자산이나 지위는 이번 생을 마치면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데 
다만 그가 행한 업은 사라지지 않고 씨의 형태로 그 안에 보관되어서 
이후 다른 형태로 그 열매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숙인, 이숙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사현실에서 3 악도에 들어가 이후 무한히
생생하게 겪어나가게 되는 생사고통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쉽게 말해 지금 이 순간에서 
자신이 눈으로 본 색은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 등을 얻는 다른 영역이나 
관념을 일으키는 영역 등으로 
그 형태 그대로 옮겨 놓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렇게 안 되는 것은 
생사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아무리 현실에서 집착하고 대했더라도 
죽으면 하나도 못 가져간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떤 내용은 이 순간 보전되고 또 이후에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서 나타난다고 보게 되듯, 
생사 과정에서 그런 형태로 계속 보전되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따로 있다고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생사과정의 문제는 
처음 내용처럼 
어떤 이가 생사현실에서 집착하고 쌓은 것은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닌 것도 문제인 한편 
그런 내용은 대부분 다음 게임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인 반면

정작 어떤 이가 그런 과정에서 행한 업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씨의 형태로 남아서  
다음에 자신이 묶여 끌려가게 되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게 되는 생명형태를 
그처럼 나타나게 하는 관계에 있기에 
무한한 생사과정에서는 바로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3 계 6 도에서 생사에 묶여 받게 되는 
생사현실의 사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이번 생에 쌓아 놓은 온갖 재산이나 명예나 지위가 
다른 세계에서 그대로 인정을 받고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고 
정작 이번 생사현실에서 행한 업은 
오히려 다음 세계에서 어떤 캐릭터로 임하게 되는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씨에서 씨와는 엉뚱하게 다른 모습인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처럼 
이뤄지는 것이어서 이것을 이숙이라고 표현하는 데 
바로 이 부분이 생사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즉, 이번 생에서 무언가 좋다고 보는 것을 집착해서 취득했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다음 생에 축생으로 태어나게한 핵심 열쇠나 족쇄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로 그 주체의 무한한 생사현실이 
전개되어 나간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 혹- 업 - 고 ] 


그래서 이런 사정 때문에 
그 게임안에 직접 들어가 게임하는 이를 상대하여 
그런 안타까운 상태에서 벗어나오게 하려는 입장에서는 

비록 그것이 실답지는 않지만, 
게임 밖의 사정과 함께 
그 게임안에서 적용되는 내용을 놓고 
이 두 측면을 또 함께 살펴야 하는 사정이 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따라 살펴야 할 내용이 다 다르고 
또 그런 취지에서 그 각 내용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비록 게임이 실답지 않다고 하더라도 
게임 안에서 어떤 캐릭터를 하늘로 날러가게 하거나 
게임 안에서 무수한 아이템을 취득해서 
게임을 벗어나게 하고자 할 때는  
비록 그 게임이 실답지 않다고 해도 
그 게임에 들어가서 아무렇게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그 게임에서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려면 
일정한 방식대로 잘 임해야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표준적으로 닦아야 할 
수행방안의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표준방안을 떠나서 
어떤 이가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려면 
다시 어떤 이가 그 게임 프로그램 자체를 샅샅이 잘 살펴서 
어떤 치트키를 만들거나 찾아내서 
그것을 눌러서 그런 상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이는 게임하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볼 때 
평소에 도무지 보지 못한 놀라운 신통을 보인 것으로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게임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일은 상식에 들어 맞지 않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지만, 
정작 그 생사현실에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려면 
결국 그 생사현실에서 아무렇게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실답지 않으므로 
아무렇게 하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해도 
다 무방한 것처럼 오해하고 그렇게 임하기도 쉽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는 그것이 실답지 않지만, 
생사현실 안에서 
어떤 망집에 바탕해 어떤 업을 어떻게 행하면 
그로 인해 3 계 6 도 안에서 어떤 과보를 받게 되는가 
이 사정을 한편으로 잘 관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생사현실에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이를 통해 다른 중생과 자신을 모두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려면 
어떤 수행을 어떻게 닦고 
수행자가 어떤 다라니 삼매 신통을 얻어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함께 잘 관하여 실천해가는 한편 

또 한편 
이들 내용은 기본적으로 
본 바탕에서는 또 그 정체가 무언가도 함께 잘 관하고 임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단 쉬고 이어 살펴나가기로 한다. 



mus0fl--Alain Chamfort - Bons Baisers d'Ici.lrc 

앞에서 열반의 의미에 대해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들을 나열해 보았는데 
여기에서 가장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 
곧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의 본 정체를 파악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와 함께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사망하고 현실에서 사라진다고 여기는 그 현실 단면이 갖는 
의미가 과연 또 무언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부처님이 생사현실에 본래 그런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였는데 
정작 앞과 같은 사정으로 
그런 생멸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바탕으로 하면서 
다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임해 
복덕과 지혜와 수명을 구족하여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신 상태인데 
그렇다고 이 사바세계에 제도할 중생들이 남김없이 제도된 것은 아닌 것이기에 
그런 상태가 소멸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되신 후 
이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다가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보는 사태에 처해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듯 사망하고 
그리고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된다는 단멸관을 취하고 
부처님의 열반을 대하는 것은 또 곤란하다. 

이런 사정에 대해서 법화경 여래 수량품 등에 그 
자세한 사정이 제시되는데 
이것도 또 열반에 대해서 갖는 기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 부처님이 평소 설법하실 때 
그렇게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 이런 내용을 제시하다가 
이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4 가지 덕[4덕四德 :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을  제시하는가 하는 점도 
이와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 내용이 이번에 살핀 열반경종요에서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이 제시되고 있다.  

...

열반에 관한 부문에서는 

그 뜻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첫째 열반의 이름과 뜻을 설명하는 부분, 

둘째 열반의 체상(體相)을 설명하는 부분, 

셋째 열반의 공통됨과 국한되는 것을 살펴보는 부분, 

넷째 열반의 2멸(二滅)을 설명하는 부분, 

다섯째 열반의 3 가지 일[3사三事: 법신法身, 반야般若, 해탈解脫]을 설명하는 부분, 

여섯째 열반의 4 가지 덕[4덕四德 :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

이것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이 제시한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과 같은 
법인설과 기본적으로 표현상 모순되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면 위 내용도 사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불교에서 수행을 하는 목표점도 
사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에 임하는 것이 된다. 

그 자세한 내용은 관련되는 부분에서 살피기로 하고 
앞에 첫부분에 제시한 내용과 관련해 
열반과 관련된 혼동문제를 좀 더 살피기로 한다.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부분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라고 대하는 부분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거리에 서서 거리를 걸을 때 
앞에서 다가오는 영희나 철수를 대하면서 
이것이 영희나 철수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대하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신이 어디인가를 나가서 걷고자 해서 
걸어갈 때 그런 생각을 하고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움직여가는 그런 부분을 또 자신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놓고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가 
여기저기를 오고 간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없다가 있게 되고 
있다가 없게 되어서 생멸을 한다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서 바로 이런 분별이 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 

그 사정은 이전 조각글들에서 대단히 많이 살핀 바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현실에서는 위와 같은 분별이 오히려 
대단히 그럴 듯하다고 여기면서 대하게 마련이다. 
오히려 앞과 같은 내용들이 망상분별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이 사실이다. 

그런 경우는 열반경 종요에서 
승의제 차원에서 제시하는 각 부분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쉽다. 

열반경종요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 

이러한 참 성품은 

현상[상相]을 초월하고 

성품[性]을 초월한 것이어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금도 장애됨이 없다. 


그것은 현상을 초월하였기에 

때묻지도 않았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원인도 아니요 결과도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니고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성품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물들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며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며 

동일하기도 하고 차별이 있기도 하며 

유(有)도 되고 무(無)도 된다. 


물들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데에서는 중생이라고 하고 

어떤 데에서는 생사(生死)라고 하며 

또는 여래라고 하고 

또는 법신(法身)이라고 하였다.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기 때문에 

어떤 데에서는 부처의 성품이라고 하고 

어떤 데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며, 

어떤 데에서는 보리라고 이름하고 

어떤 데에서는 큰 열반이라고 하였다. 

...

그런데 이런 부분들이 
결국 현실의 본 정체와 관련된 승의제의 내용과 
그리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세속제의 관계를 
이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면 
저기 서 있는 것은 영희이고 
영희가 여기로 온다고 보고 대하는 현실을 놓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세속제이고 
이 바탕에서는 영희가 여기에서 태어나 저기에서 죽어간다. 
이런 내용이 또 세속제로 제시되는 것이어서 
생노병사나 생멸이 그런 바탕에서 제시된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세속제로 제시되는 각 내용을 바탕으로 
그렇게 대하는 현실에는 그런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다는 
승의제의 내용까지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국 이전 조각글에서 살피던 주제를 
건너 뛰지 않고 그런 내용들을 함께 놓고 
이 주제를 함께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결국 같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자신이 사과로 보는 것을 놓고 
이 사과를 자신의 손으로 붙잡고 두드린다고 할 때 
이 상황에서 자신이 소리를 듣고 촉감을 얻는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과는 자신의 밖에 있는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는 구분되는 마음 밖의 물질이고 
그리고 이런 내용은 자신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가 함께 대하는 것으로서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여기는 한편 

이 상황에서 그런 동작을 하고 
그런 내용을 감각해 얻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이런 형태로 기술하면 
세속에서는 대부분 대단히 옳고 적절한 내용이라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결국 
과학교과서에도 그대로 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위와 같이 본 내용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고 
위 내용에는 자신이 대하는 대상은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고 
이 내용을 이미 살핀 성유식론에서 제시하는데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 보게 되는 내용을 
설명할 때는 또 앞에 제시한 내용들을 가지고 
기본적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정을 가정적 논의를 위한 시설과 방편 
또는 경전에서 제시하는 뗏목의 비유로 
그 사정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평소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대하는 것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면 
망집에 묶인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본 사정이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에서 행하는 수행은 
또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그처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미 앞에서 게임상황을 놓고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본 사정은 그렇지 않은데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려면 
중생이 생사를 겪는 그 현실에 들어가서 
그 생사현실에서 적용되는 내용을 바탕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그 결과로 이계과를 얻게 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얻는 택멸 무위 /이계과/로서 열반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복잡한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상황에서 그런 수행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거나 
본 바탕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없이 공한데 
무슨 차이가 있기에 그런 수행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가. 
이것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면서 
일정부분을 대하고 
그 부분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현실에서 온갖 활동을 하는데 
이 상황에서 그런 부분이 자신의 본 정체가 아닌데 
그런데도 왜 어떤 사정으로 
현실에서는 그렇게 임하게 되었는가부터 
기초적으로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해한다면 
그 이후 문제는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된 기본 사정을 잘 수정해서 
그렇게 생사에 묶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바로 그런 사정으로 
이후에도 무한히 그런 형태로 
또 다음 생을 받아나가게 된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의 문제는 
일반인이 생각하듯, 
지금 이번 생에서 대하는 
본래 실답지 않은 것 가운데 
평소 자신이 대단히 집착하고 대하는 
그런 자신이나 자신의 것 
예를 들어 자신의 신체나 재산 가족 등등이 
어느 순간 죽음으로 소멸되고 없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는 그 망집 증상이 가장 문제이고 

또 그런 망집 증상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여 
3 악도에 들어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게 된다는 것이
바로 문제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예를 들어 축생계에 들어갔다면 
그 상황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예를 들어 돼지나 소의 그런 형태는 
지금 자신이 인간으로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런 형태와 사정이 같아서 
그런 내용은 본래의 자신은 아닌데도 
그러나 마치 지금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그렇게 
자신이라고 여기며 집착하고 대하듯 
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상한 상태가 
어느 계기로 해소되지 않으면 
그런 상태로 무한하게 묶여 나가면서 
3 악도에 들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다. 

만일 그런 상태지만, 
그 주체가 끝내 그런 고통을 겪지 않고 
오로지 좋고 좋은 내용만 얻는다면 
비록 그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고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던 
그렇지 않다고 하던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으므로 
계기가 되었을 때 
이런 망집을 기본적으로 잘 제거하고 
그에 바탕한 업도 끊고 
수행으로 대체해서 현실에 잘 임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부분에 
수행을 통해 얻어낸 열반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는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고 

일반인의 입장처럼 생사를 겪고 
단멸관에 바탕해 죽음을 맞이한 이후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고 여기는 상태나, 

아니면 그런 단멸관에 바탕한 생각과 달리 
생사를 겪어 죽음을 맞이 한 이후 그런 자신의 뜻과 달리 
자신이 행한 업에 의해 3 악도에 묶여 들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를 놓고 
열반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도 처음 살폈듯 
설령 사정이 그렇더라도 그 기본 상태는 청정한 니르바나임은 차별이 없는데 
문제는 본 바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는 망집에 바탕해서 지금 현실처럼 
엉뚱한 내용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바탕에서 생사를 겪고 3 악도에 들어가서 
매 순간 생생하게 고통을 겪어나간다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점이다. 


그래서 이 증상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비록 그런 축생 아귀 지옥세계도 
다른 현실과 마찬가지로 차별없이 공하고 
그 본 바탕은 다 차별없이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해도 
이를 놓고 열반의 상태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반대로 
만일 깨달음을 얻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모든 생사현실에 평안히 임할 수 있는 안인을 성취하여 현실에 임할 수 있으면 
또 반대로 온갖 생사현실을 그대로 놓고도 
그 상태를 열반이라고 표현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것이 생사 즉 열반이라는 표현으로 제시되는데 
중생의 상태는 이와 차별이 본래 없는데도 
그 주체가 망집을 바탕으로 임하기 때문에 
본래부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놓고 
그 상황에서 앞과 같이 망집을 바탕으로 
본래 얻을 수 없는 각 내용을 그렇게 거기에 있다고 여기면서 
본래부터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생사고통의 상태로 
즉 열반 즉 생사로 뒤바꾸어 대한다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어느 계기를 통해서 
그런 생사현실과 자기 자신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고 
그리고 그런 생사 묶임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 해소하면  
이제 그 관계가 바뀌어져서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을 포함해 온갖 생사현실을 대하는 가운데 
곧 그 생사현실 자체가 곧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 청정한 니르바나인 것으로 
대하고 임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것이 '생사 즉 열반'이란 표현이 나타내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자가 노력해서 법신을 증득해 성불하는 상태가 되는데 
그런 상태에서 
일반인의 입장을 기준으로 하여 
그런 분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는다라고 보게 되는 상황이 된다고 해서 
그런 주체가 그런 생사를 겪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물론 기준을 그런 망집을 일으킨 이들의 망집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생사를 부처님이 겪는다고 보아야 할 것도 같은데 
그런데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깨달음이고 수행인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처음에 제시한 문제 

즉 자신이 사과라고 보는 것을 손에 붙잡고 
그 사과를 손으로 두드리고 만질 때 
그 때마다 소리를 듣고 촉감을 얻는다는 상황에서 
그런 현실 상황에서 그 사과의 본 정체가 무엇이고 
그리고 그 사과를 그렇게 대한다고 보는 그 자신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잘 살피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시간이 남으면 자세히 살피지만, 
이전 조각들들에서 이 내용을 대단히 많이 반복해 살폈고 
또 다음 경전이 올려져 있는 상태이므로 
되도록 생략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mus0fl--Calogero - Prouver l' amour.lrc 


사과를 손에 잡고 두드리거나 만지면서 소리나 촉감을 얻는 관계를 놓고 
관찰하면 대부분 다음처럼 생각한다.
우선 자신이 눈으로 보는 사과가 대상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 외부에 있는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정신과는 별개의 외부 물질이고 
자신 뿐 아니라 영희 철수를 포함한 다수가 대하는 객관적 실재의 내용이다.
이처럼 망상분별을 대부분 일으키게 된다. 
또 같은 바탕에서 그런 상황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현실 사정이 이렇고
일반 과학의 입장도 이런데 
왜 이것을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 내용을 지금까지 반복했다.
하지만, 단서가 되는 자료를 일단 그림으로 올려 놓고 
기회가 되면 이를 같이 살피기로 한다. 

과거에 반복했다고 해서 생략하면 
그 부분을 찾아보도 힘들고 
오히려 기존의 망상분별을 고집하는 가운데 
논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쉽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첫 그림은 그림에서 1 로 표시한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뜰 때 
그 순간 얻는 내용을 대강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 자신과 유사한 2 가 또 자신처럼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면서 그 변화를 보고하는 상태다. 
그런 가운데 2 가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면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라고 
보고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1 이 관찰하면 별 변화가 없는데 그런 보고를 2 가 하니 
그 변화는 자신이 보는 2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하고 
위 그림처럼 '엉터리'로 추리를 해서 표시하게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추리하면 그것이 2 에 대해서 엉터리 '타상'을 갖고 취하는 것이 된다. 
위와 같이 추리하면 왜 엉터리인가는 이전 글에서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여하튼 위 그림을 놓고 
4 로 표시한 부분이 앞에서 제시한 사과라고 놓고 
상황을 음미해보면 왜 그것이 대상이 아닌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보충 설명하면 1 의 입장에서 4 가 그런 4 의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는 위 그림에서 2 가 자신이 본 4 ^를 4 ^ 를 얻게 한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잘못이다. 


그런데 2 의 입장을 놓고보더라도 4 가 2 가 본 4^ 를 얻게 한 대상도 아니다. 
이것은 다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일 2 가 1 에 대해서 거꾸로 생각하기를 
1이 무언가 본 것은 2 가 본 4^ 와 같은 것을 대상으로 해서 1^ 부분이 그렇게 얻고 
그 내용이 1 ^ 부분에 머문다고 이해하는 것처럼 엉터리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갖는 타상이나 아상이 갖는 문제다. 
또 앞에 그림으로 나타낸 내용이 사실은 엉터리 추리임을 나타낸다. 

다만 일반적으로 세속에서 이처럼 이해하므로 
그것을 일단 받아들여 가정적 논의를 전개해가면 이해가 쉬우므로 
이렇게 그림으로 나타내게 되는 것 뿐이다. 




한편, 
다음 그림은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과 
자신이 사과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왜 자신이 사과를 손으로 두드리거나 만지면
그 때 그런 소리나 촉감을 얻게 되는가. 
왜 각 생명이 각기 그런 형태로 살아가게끔 태어나고 살다가 죽어가게 된 것인가. 
그 사정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이다.




[img2-9]
08pfl--image/8식-9.jpg



1,2,3,4,5 는 시각정보, 청각정보, 후각정보, 미각정보, 촉각정보를 얻는 영역을 표시한다. 
6 은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영역이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는 부분을 
위에서 a! 부분 ◇ 로 표시한 것이다. 

그에 대해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긴다면 
그런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생각 분별은 a@ 로 표시한다. 

현실에서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런 감각현실을 얻거나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일으킨 관념분별 내용이 
그런 감각현실 영역에도 그대로 있고 
더 나아가 #실재 영역에도 그대로 있다고 여기고 임하는 것을 망상분별이라고 한다. 

이 사정을 침대에 누어 꾼 황금이나 바다꿈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꿈을 꿀 때 그런 꿈을 꾼 바탕이 된 침대가 문제도 아니고 
또 꿈에서 황금이나 바다꿈을 꾼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 상태에서 자신이 꾼 꿈 내용이 침대에 있다고 여기고 
침대를 대하면 그 부분부터 문제가 된다. 
또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꿈은 실답지 않다.  
그리고 꿈을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다. 

물론 꿈에서는 대부분 그 사정을 잘 이해한다. 
그런데 자신이 어떤 부분을 대하고 그것을 사과라거나 자신이라거나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대할 때는 
이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망집 상태로 임하기에 이를 문제삼게 된다. 

대부분 자신이 일정한 부분을 대하고 그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한 내용이 곧 그 부분에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런 자세로 임해서 
그 관념내용을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까지 밀어 넣고 

또 반대로 그런 감각현실도 역시 마찬가지로 
실재영역에 그대로 있다고 밀어 넣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감각현실이 곧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그런 관념의 
구성부분이라고도 여긴다.
이것이 망상분별 증상이다. 

이것이 왜 문제되는가 하면 사실이 그렇지도 않은데 
현실에서 그런 엉터리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각 부분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놓고 대단히 집착하게 된다. 
그 이후 그에 바탕해서 온갖 엉터리 행위[업]를 해서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게 되기에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위 그림을 놓고 a!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는 사정은 
상-락-아-정이란 요소로 그간 설명했다. 
즉 현실에서는 그런 사정으로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디론가 가자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다른 부분과 달리 ◇ 로 표시한 a! 부분만 변화함을 매번 경험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은 본래 자신이라고 할 부분과 전혀 무관한 것은 또 아니다. 
그 관계가 자신이 평소 걸치고 있는 옷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옷과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을 곧 자신이라고 망집을 갖고 
매 순간 임하면 대단히 곤란하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이런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사정은 
사실은 1,2,3,4,5,6 과 같이 현실에서 표면으로 활동하는 마음영역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 즉 태어나기 이전 첫단계에서 
7 로 표시한 부분에서 일으킨 망상분별이 원인이다.  
즉 아견, 아애, 아치, 아만을 갖는 7 부분이 그 배경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번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처음 그런 상태에서 태어나 삶을 시작했기에 
그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죽 살아가게 되고 
그러다가 삶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한번 7 이 그렇게 일정 부분을 붙잡고 삶을 출발하게 되었다면, 
예를 들어 만일 그것이 돼지의 형태라면 
그렇게 돼지를 부모로 해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는 돼지의 형태로 삶을 마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숙인 이숙과를 설명하는 것은 
처음 삶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왜 그렇게 임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즉 이런 내용이 아무 원인없이 어떤 추첨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근본 무명 어리석음 및 그에 바탕해 일으킨 망상분별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한 업이 마치 밭에 뿌려진 씨[종자]와 같은 역할을 해서 
결국 그 주체가 이후 임하는 세계와 생명형태를 나타나게 한 것임을 제시한다. 

이를 살피려면 전생 후생의 관계를 이어 살피는 특수능력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이 내용은 현생 안에서도 존재한다.
따라서 현생 안에서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현생 안에 이미 있는데 현생 안에서 볼 수 없으면 
아무리 전생 후생을 살펴도 마찬가지로 살필 수 없다. 

정신은 현실에서도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없는 것과 차이는 무엇인가. 
그래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위 그림처럼 '있다'고 표시해 나타내게 되는 근거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마음에서 얻어진 내용이 그런 마음의 존재를 밝히는 근거가 된다. 

비사부부처님의 다음 게송에서는 이 사정을 다음처럼 밝힌다.

[참고] 
...
4대(四大-지,수,화,풍)를 거짓으로 빌려 몸으로 삼았고 

마음은 본래 생겨남이 없으나 

경(境-대상)을 따라서 있게 되었네. 

앞에 경(境-대상)이 없다면 

마음 또한 없으니 

죄와 복도 환(幻)과 같아 생겼다가 사라지네. 
...



假借四大以爲身 心本無生因境有 

가차4대이위신 심본무생인경유 


前境若無心亦無 罪福如幻起亦滅 

전경약무심역무 죄복여환기역멸 




그런데 여하튼 단순히
현실에서 한 주체가 매 순간 얻게 되는 그런 내용만 현실에 '있다'고 하지 않고 
'마음'이 있어야 그런 내용을 얻게 되고,
또 한편 마음은 이런 내용을 얻고 못 얻고와 관계없이 계속 '있다'는 것은 
다른 실험과 논의가 필요로 한다. 

경전에서는 간단하게 
종을 하나 울리고 나서 소리를 듣게 하고 
이런 상황에서 소리가 나는가
아니면 소리가 들리는가라고
부처님이 질문을 던져서 이 사정을 밝힌다. 
그런데 이 내용이 곧 마음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는 실험이기도 하다. 

즉 여기에서 소리가 나는 것과 소리가 들리는 것의 차이는 
결국 마음이 없다고 보는가 있다고 보는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즉 일반 생리학자 가운데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현상이란 
단지 외부 물질의 자극 반응관계의 연쇄적 현상일 뿐 
마음이란 따로 없다고 하는 입장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앞과 같은 상황에서
'단지 소리가 난다'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종을 울린다 - > 소리가 난다 
이런 관계에서 소리가 나면 나는 것이고 나지 않으면 안 난다. 
그리고 이것이 곧 마음현상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것은 
소리가 외부에 그렇게 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들으려면 그것을 들을 마음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위 실험을 위해서 어떤 주체에게서 
그 주체의 마음을 넣고 빼고 해보면서 실험을 해볼 도리는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교를 통해서 
마음이 있어야 어떤 내용을 얻게 됨을 파악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 내용이 제시된 『수능엄경』을 참조하면 된다. 


여하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도 않는 마음은 
결국 그 마음에 들어가 있고
그러다가 나타나는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위와 같은 비교 판단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눈에 보이게 또는 만져질 수 있도록
어떤 특수 조치를 취해서 확인할 도리는 없다. 

수행자가 정려 수행을 해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깊이 들여보게 된다고 해도 
위와 같은 기본 상황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즉,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던 마음이 정려 수행으로 보이게 되고 만져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마음의 존재는 여러 상태에서 마음에 들어오는 각 내용을 놓고 
위와 같이 판단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본 정체를 
어느 부분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 
결국 현실에서 보는 자신의 부분은 
사실은 본 정체라고 할 근본정신 8과 
현생에서 이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현생에서 분화 생성시킨  
12345678 들이 오히려 본 정체라고 해야 한다. [3능변] 

그리고 이런 내용이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한 
특성을 오히려 갖는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무아 무자성의 논의에서 문제삼는 
참된 진짜의 내용은 역시 아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하면 
이전에 ◇ 부분에 갖던 집착을 
거꾸로 1234567 그리고 특히 8 과 같은 부분으로 옮겨 가지고 와 
집착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더욱 곤란하다. [참고 『해심밀경』 ] 


또 이런 마음과 실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칫 마음이 곧 실재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반야경전에서 
마음 자체가 곧 그런 실재인가. 
반대로 실재 자체가 곧 그런 마음인가. 
그렇다고 마음이 그런 실재를 떠나서 있는 것인가. 
이렇게 이 관계를 잘 살필 것을 제시한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 공의 내용은 
이 부분에도 공통되게 적용되는 사정을 기본적으로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대략 세상과 자신의 기본 정체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매순간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
그리고 다음 생에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게 되는 내용이 
어떤 형태로 되는것이 바람직한가를 잘 살펴야 한다. 


앞에서 회신멸지의 상태를 제시했는데 
이 경우는 아예 이들 실답지 않은 내용은 두 제거하고 
원 상태인 근본정신만 남겨 놓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면 욕계 색계 무색계 어디에도 그 존재가 속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생사과정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그렇게 소극적으로 임하면 안 되고 
수행자가 자비심에 바탕한 서원을 일으켜서 
중생의 생사현실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존에 생사에 묶인 중생들이 어떤 과정으로 
때로는 인간으로 때로는 닭으로 때로는 돼지로 
매 생마다 이런 식으로 매 순간마다 형태를 달리 해가며 
생을 받아 살아가게 되는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하고 
수행자 자신도 이에 맞추어 잘 임해야 한다. 





긴 논의를 요약해서 제시하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열반의 내용을 살피고
이 내용이 자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제시하는가를 잘 이해해서 
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앞 내용을 잘 살피고도 
이 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헛수고가 되기 쉽다. 

그것은 결국 중생제도와 성불을 위해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위 내용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생제도를 위한 서원을 잘 구상하여 
그 서원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 등을 
중생이 고통을 받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기본적으로 잘 구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지금 자신이 생사에 묶여 원치않는데도 3 악도에 묶여 들어갈 입장이라면 
먼저 기본적으로 그런 업의 장애부터 해소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경전에서 생사현실에서 행해야 할 수행방안들이 먼저 제시된다. 

이것은 생사현실에서 적용되는 내용이기에 
그렇게 실천하면 그렇게 되고 
그렇게 실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이론을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곤란한다. 
이는 그 사정이 게임과 같다. 

자신이 게임이나 현실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예를 들어 10 이란 숫자를 누르면 10 층에 가고 
6 이란 숫자를 누르면 6 층에 간다는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고도 그 번호를 누르지 않고 
매번 2 란 숫자만 누른다. 그러면 2 층에 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에서 3 계 6 도에서 각 중생이 돌아다니는 사정을 잘 관하고 
그 관계를 그렇게 잘 파악하였다면 
이를 바탕으로 수행자가 자신의 서원에 맞추어 잘 실천하며 임해야 한다. 

이런 논의에서는 먼저 3 계6 도라는 각 세계 가운데 
어떤 주체가 눈에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놓고 
그것이 정말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것처럼 

각 세계를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경전에서 제시되는 각 하늘이나 아귀나 지옥세계가 
정말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되기에 논의가 공전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먼저 아귀나 지옥 하늘 이런 세계를 먼저 증명하라고 하면 
논의가 상당히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는 
비유하면 장님이 노란 색과 파란 색이 있음을 
자신이 듣는 소리를 통해서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 
장님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노란 색과 파란 색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장님이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제시할 도리가 없다. 
그 장님이 눈의 장애를 해소해서 직접 보면 되겠지만, 
그렇다 해도 또 다른 장님은 여전히 같은 상태로 문제를 제기하게끔 된다. 
그래서 어렵다. 

반대로 귀먹은 분이 각 음악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보는 색으로 확인시켜달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한 주체만 놓고 보아도 각 감관마다 얻는 내용이 다른데 
그 각각이 다 그렇다. 
그리고 그 감관은 또 각 생명 주체마다 다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을 통해 얻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답고 참된 진짜는 아닌데 
그러나 각 주체에게는 대단히 생생하게 매순간 얻고 
그리고 나중에 그 주체가 세계나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그 실질 내용은 
결국 이런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 주체가 대하는 세계다. 

그런데 그렇게 
어떤 주체가 자신의 장애 때문에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의 내용을 전제하고 살피기 보다는 
비유적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낫다. 

예를 들어 
현실에 평생 태어날 때부터 왕가에서 수조원의 자산가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마음대로 장애없이 행하고 
삶을 마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현실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을 일단 하늘이라고 그냥 표현해보자.

반대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 
어떤 잘못으로 수사관에 의해 체포되어 
평생 감옥에서 갇히고 고통을 받고 또 다음에 어떤 고통을 새로 받을 지 몰라 
두려움에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지옥에 준하는 상태라고 그냥 표현하자. 

그리고 욕심은 한없이 많은데 
그것이 뜻처럼 성취되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살아가는데 
그러나 그 욕심으로 인해 희망을 안고 매 순간 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희망이 성취되면 곧 이어 
큰 사고를 당하거나 새로운 것에 갈증을 느끼면서 
계속 그 상태로 이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1 달을 간신히 물만 마시면서 굶주린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상태에서 빵을 하나 줏게 되면 그것을 마구 먹게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빵으로 곧바로 죽거나 죽을만큼 고통을 이어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아귀상태라고 표현하자. 

또 축생은 현실에서 사람이 그 상태를 직접 보니까 별 문제가 없다. 

이렇게 여러 다양한 상태를 벌려 놓고 나서 
현실에서 이런 상태가
각기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살핀다면 
이 문제는 결국 처음에 살핀 문제와 같아진다. 


그래서 이렇게 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그 방안의 공식이 제시된다. 

평소 탐욕이 심하고 무엇가를 지독하게 아끼고 인색하고 남에 베풀지 않으면 => 아귀세계
평소 탐욕과 분노가 심해서 심하게 다른 이를 살해하고 고통을 가하는 경우  => 지옥세계
평소 세계나 자신의 정체와 그 인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 축생세계
이런 형태로 압축해 제시하게 된다. 

경전에서는 한 주체가 
망정에 반절 이상 바탕해 행하게 되면
축생계에 태어나게 된다고 제시한다. 

구체적인 각 상태별로 
공중에서 활동하는 축생 
물에서 활동하는 축생 
땅이나 지하에서 활동하는 축생 등 다양한데 
공통적인 특성이 그렇다. 

그리고 이런 3 악도에서는 
어떤 수행자가 이들 중생을 
이 상태에서 바로 구제하기는 대단히 곤란하다. 

이런 사정도 올바로 관하고 
그에 바탕해 제시한 수행을 정진해야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이런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그런 내용 자체가 곤란하다. 


우이독경이란 표현이 그런 사정을 의미한다. 
한편 축사에 묶인 축생을 구제하면 그 축사를 경영하는 목동이나 목장 주인도 싫어한다. 
당장 정신없이 바쁘게 여기저기 고통을 받고 헤매고 돌아다니는 중생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단 이런 3 악도에서는 풀려나야 그런 수행이 쉽게 된다. 
그래서 이런 3 악도에서 먼저 풀려나는 것이 
수행의 기본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들이 계의 항목에 들어가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과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이 잘 성취되어 
3 악도에 묶여 끌려 들어가게 되는 업의 장애가 해소되어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고 
그리고 이후 복덕 자량이 쌓이게 되면 
이후 정려나 반야 수행을 닦아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후 그 수행자가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지혜를 닦는 
무량행문의 수행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결국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 바라밀다의 내용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수행에 임하면 
일체가 공함을 관하고 
멍하니 할일없이 아무것도 안하거나 
그 때 그 때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 행하며 임하면, 곤란하다. 

처음 보시 항목 하나만 
쉼없이 분주하게 무량겁에 걸쳐 정진해나가도 
수행은 사실은 끝이 없다. 

무여열반에 이르게 할 방편이 되면서도
다른 중생이 좋아할 내용을 쉼없이 찾고 
이를 마련해 제공하는 일만 붙잡고 임해도 
그 끝이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결국 각 경전에 자세히 나열되는 수행항목이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행하면 
한편으로는 자신이 쌓아 놓은 업의 장애가 해소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다 해소되면 이제 
자신의 업장이 쌓여진 마이너스(-) 상태가 
복덕이 쌓여진 플러스(+) 상태로 바뀌면서 
복덕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지 않은 상태거나 풀려난 상태거나 
기본적으로 행해야 할 수행은 다르지 않다. 

다른 중생에게 좋음(+)을 아끼지 않고 무량하게 베풀고 
다른 중생이 집착하는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명예 등등을 침해하지 않고, 나쁨(-)을 가하지 않고 
또 한편 자신이 나쁨을 받게 될 때에는 
이에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참고 임함으로써 
그 상대에 대해 분노를 일으켜 보복하거나 해치치 않고 
이를 꾸준히 정진해 나가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다. 

그러면 복덕자량이 쌓이고 
그런 바탕에서는 곧 열반 해탈문을 
현실에서 쉽게 찾아내 들어설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아무리 잘 이해한다해도 
자신이 직접 그 내용을 실천하지 않고 
거꾸로 다른 내용을 실천하면 
마치 게임에 들어가서 매번 엉뚱한 버튼을 누르고 임하는 것처럼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경우는 남의 곡식 창고에 있는 곡식알을 세는 수행자처럼 된다.

수행자가 세상이 공함을 관하기만 하고 
그런 바탕에서 필요한 수행을 하지 않으면 
그런 수행에 따른 과보는 얻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해야 한다고 
경전에 제시된 수행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 내용을 생사현실 안에서 
쉼없이 실천하고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정을 잘 관하면 
마치 현실에서 장삿꾼이 장사하고 일하는 것에 
쉼없이 초점을 맞추며 분주하고 
잠깐 쉬는 것도 대단히 아까워 하듯 

수행자도 마찬가지로 
보시를 행하고 계를 지키고 안인 수행을 함에 
쉼없이 초점을 맞추고 분주하며 
잠깐 쉬고 수행을 게을리하는 것도 
대단히 큰 손해라고 여기면서 임하게 된다. 

주의할 점은 수행자가 이런 수행을 할때 
이런 관계를 미리 관찰하고 계산해서
마치 시장의 장삿꾼처럼 
비용을 적게 치루고 이로 인해 나중에 큰 이득을 보려는 마음으로 
그에 따른 과보를 얻으려고 수행에 임하면 곤란하다. 

이를 시역법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계산을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아예 없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임하는 입장을 옆에서 보면
또 그런 장삿꾼과 같은 자세가 곤란한 사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놀보가 일부로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고쳐주는 형태와
그 성격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각 수행을 원만하게 행하고 성취하려면 
각 수행을 함에 있어서 그 수행은 수행대로 잘 행하지만,
그 수행을 역시 무소득(얻을바 없음)을 '방편으로'
행해야 함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본 바탕에서는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는데 
다만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으로 생사현실에서 
그런 것이 일단 임시적으로 필요하므로 
그렇게 정진해 얻어감을 의미한다. 

이것을 게임을 놓고 이해하면 더 쉽다. 
게임에서 천개의 아이템을 모으면 무엇하겠는가. 
본래 실답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그 게임에서 고통을 받는 다른 이들을 
구출해내는데는 필요해서 그렇게 임한다는 경우와 같다. 

그런데 게임이 실답지 않다고
그 게임에서 아무렇게 해도 그렇게 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그 게임에서 그 아이템을 얻을 키를 매번 정확히 
눌러야 그렇게 된다. 

그리고 현실 사정이 위와 같다. 
그래서 이 사정을 
금강경에서 그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보시 하는 이나 받는 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 그 일체를 다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는 열심히 무량하게 행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 수행자가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 
그런데 정작 그 수행자는 그 복덕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수행자가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런 내용을 『금강경』에서 제시하고 있다.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할 내용은 
이렇게 행하고 이런 바탕에서 
다시 상을 취하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일반적인 입장에서 놓고 보면 
다 의문을 제기하기 쉽다. 

받지 않을 복덕을 왜 얻는가. 
그리고 그처럼 받지 않을 복덕을 얻을 수행은 또 왜 하는가. 
그리고 그런 물건이나 받는 이, 주는 이를 얻을 수 없고 
그런 분별도 하지 않는다면 
정작 왜 현실에서는 왜 매번 그런 보시를 그렇게 정확하게 
매번 정확히 상대에게 그렇게 행하는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정을 위와 같이 잘 이해하고 
부처님이 하라고 한대로 
양 측면을 모두 잘 준수해서 해야 한다. 

양 측면이란 다음 두 측면이다.

우선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고 
현실에서도 그에 대한 망상 번뇌 집착을 제거하는 측면이 그 하나다. 

또 한편 그런 가운데서도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그리고 그에 필요한 복덕과 지혜 자량을 구족하기 위해 
또 해야 할 내용은 집착없이 정확하게 잘 해야 한다는 측면이 또 다른 하나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의 내용을 
다 잘 해나가야 한다. 
이런 내용을 금강경에서 제시한다. 

어떤 하나만 취하고 다른 측면을 엉터리로 임하면 
결국 다 함께 지옥의 공수행자가 된다. 

어차피 지옥과 극락이 이론상 차별없이 공한데 
어떤 수행자는 
자신의 생사고통을 벗어나거나 중생제도하는 데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위와 같이 잘못 임해서 
하필이면 지옥에 들어가 임하게 된다.
그러면 곤란하다. 


어차피 지옥과 극락이 차별이 없는데 
중생을 제도하고 복덕과 지헤를 구족하는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 
왜 굳이 지옥에 가는 방안을 고집하는가.
그렇게 되는 사정은 사실은 
그가 망집을 바탕으로 수행을 대단히 어렵다고 보고 

평소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한 
행위만 반복하기에 그런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숲길을 걸어가며 떨어진 나뭇잎을 줏듯 
보이는대로 복을 무량하게 얻는 수행을 행할 수 있는데 
왜 수행을 안 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사정을 올바로 관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마치 장삿꾼이 가게에서
쉼없이 물건을 팔며 분주하게 되는 심정처럼 
극심한 생사고통을 면하고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게 되는 
수행에 쉼없이 정진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눈먼 제자가 실을 꿰어달라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때 

부처님이 다른 제자들을 모두 제치고 
가장 먼저 달려가서 실을 꿰어주시면서 
이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복을 구하는데 있어서는 부처님이 최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잘 관한다면 
수행자가 수행에 쉼없이 정진하게 되는 사정도 
알 수 있다. 

다만 망집에 바탕한 일반 상태에서는 
그런 이치와 그런 내용이 우선 자신의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돈으로 숫자를 적을 수 있는 수준의 
몇 조원 이런 가격이 붙은 것을 붙잡거나 
아니면 아예 몇십원짜리 쿠폰 
또는 5 % 할인 이런 광고에 초점을 맞추고 
매달려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는 일단 숫자로 
숫자로 표기할 수 있는 정도의 가치를 갖는 것은 
모두 무시하게 된다.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다른 가치와 비교하면 
소숫점 몇 백자리 이하로도 표시하기 힘든 
대단히 가치가 적은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치저울의 한 쪽에 자신의 두눈이나 심장을 올려 놓고 
다른 쪽에 현금을 얼마를 올려 놓으면 
균형을 이룬다고 볼 것인가. 
두 눈이나 심장이 갖는 가치를 1 로 표시하고 
그런 상태에서 다른 것들이 갖는 가치를 비교하면 결국 
그 가치를 그렇게 표시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세상의 재벌도 
30 분간 거꾸 매달고 고통을 가하면 
재산은 다 포기하고 무엇만은 갖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수행이란, 
자신이 무량겁에 걸친 생사 고통을 벗어나고 
또 다른 생명도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다시 무량한 기간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게 하는 것이어서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임하여 이런 가치부터 고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외관상 한가해보이지만 
알고보면 대단히 분주해야 한다. 

부처님이 성불하고 법신을 증득하고 이르는 열반은 
어차피 어떤 상태나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기본으로 한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이루는 최종적인 정점 상태를 의미한다. 

무량한 중생을 제도함에 필요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여 성불함은 
단순히 본래 부터 누구나 차별없이 구족하는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측면 
즉, 본 바탕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청정한 니르바나를 본 바탕으로 하면서도 
어떤 경우는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고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은 차별이 무량한 생사현실에서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 정점에 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놓고 제시하는 열반은 
비록 아라한을 비롯해 일반 수행자가 얻는 열반과 
해탈을 얻은 부분에서는 공통한 측면이 있고 
여타 모든 중생과는 또 본 바탕에서는 차별없이 공하다는 공통적인 측면은 있지만, 
이런 점에서 차별이 있게 된다. 





올려진 노래를 반복해 듣다보니 
연구원에서 가장 인색하기로 소문난 MUN님을 거론하면서 
MUN 님이 평소 조금만 덜 아꼈으면 달라졌을 것이라면서
미리 바꿔서 장애를 해소하라고 하는데 
그러나 알고보면 과거는 그렇게 흘러 가고 엎지러진 물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 알고보면 
기회는 무궁하게 앞에 널려 있다. 
그래서 크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vldn1731

◈Lab value 불기2562/09/02/일/13:38




○ [pt op tr]  mus0fl--Dalida - Violetera.lrc

♥ 잡담 ♥양측면을 오락가락하여 일으키는 혼동


조각글이 계속 밀려서 
올려진 경전과 논서를 읽고 정리하는 것만도 
버거운 상태다. 

그간 『성유식론』, 『대승기신론』, 『화엄경』 등등 
자세히 살펴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건너뛰어 오느라, 부실한 느낌이 든다. 

『열반경』과 관련해 원효스님이 쓰신 『열반경종요』를 살피는 가운데 
무언가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고 
이런 견해 저런 견해 여러 견해를 소개받다 보니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원래 경전이 어렵고,
이것을 논의하고 설명해주는 논서는 쉽게 느껴져야 하는데 
본인 경험으로는 경전은 대부분 이해하기 쉬운데 
이것을 풀이하고 논의하는 논서가 대부분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결국 불교는 이런 사정으로 일반적으로 
대단히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냥 부처님 믿고 자신이 소원하는 것을 제시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것이 빨리 쉽게 성취되고
그리고 열심히 절에 다니고 열심히 보시를 하고 계율을 지키고 생활하면 
나중에 좋은 곳에 태어나서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 잘 누릴 수 있다. 
이런 형태로만 간단히 되어 있으면 
일반인 입장에서도 쉽게 대할텐데 

경전과 논서 내용을 보면 
내용이 복잡하고 표현도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어떡해야 한다고 하는 것인가. 
이런 부분에서 결국 길을 잃고 헤매 돌기 쉽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119#173
sfed--원효_열반경종요_Kxxxx_T1769_x.txt 
sfd8--불교단상_2562_09.txt ☞◆vldn1731
불기2562-09-02 

θθ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mus0fl--Dalida - Violetera.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iovanni-Battista-Piranesi-architrave-frieze-cornice-various-capitals-saints-cosmas-and-damian-st-peter-etc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strophytum_flower_207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arudas_at_Wat_Phra_Kaew,_Bangkok_(10921613346)



♥Domaine du Château de Masse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rnst-Ludwig-Kirchner-two-bathers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ustralien_Gold_(Kordes_1985)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uvalu_view




♥Musée alsacien (Haguenau) ,France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buddhism007.tistory.com/4207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lvador-Dali-landscape-3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ematis_Kakio_(1)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unming_Lake_in_the_Summer_Palace



♡吉崎御坊,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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