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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2-11-05_종경록_055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11-05_종경록_055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11. 5. 13:23



®

종경록
K1499
T2016

종경록 제55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종경록_K1499_T2016 핵심요약



♣1499-055♧

종경록 제55권

연수 지음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horus Meps - Nuit De Folie.lrc


Lab value 불기2562/11/07/수/22:20

아래 ♣01♧부분관련 


종경록 ◀宗鏡錄▶

     100권. 북송의 연수(延壽) 지음. 
대승교의 경론 60부와 중국ㆍ인도 성현(聖賢) 300인의 저서를 비롯하여 
선승(禪僧)의 어록ㆍ계율서ㆍ속서 등을 널리 인용하고 방증(傍證)하여 
선가에서 말하는 
“마음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온갖 것이 모두 법이다(심외무불心外無佛 촉목개법 觸目皆法)” 하는 뜻을 말한 책. 
원나라 때에 대장경에 편입.(운허_동국역경원사전)

● 법처소섭색의 문제 


아래에 유식학파에서 제시하는 법처소섭색에 관련된 내용을 제시한다. 


우선 법처소섭색에 대한 사전내용을 참조한다. 

법처소섭색 ◀法處所攝色▶

     제6의식으로 대할 바 경계인 법경(法境)에 속하는 색법(色法).

5근(根)ㆍ5경(境)을 제외하고,
다른 일체 색법을 말함.
극략색(極略色)ㆍ극형색(極逈色)ㆍ수소인색(受所引色)ㆍ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ㆍ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이 이에 속함.
((운허_동국역경원사전))




우선 기본적으로 
색(色)이란 표현은 눈을 통해 안식에 의해 얻는 내용
빛깔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때 색은 가장 좁은 의미의 색을 말한다. 

지금 실험해보면 된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자신이 얻는다고 여기는 그 내용을 잘 확보한다면 
그것을 모두 색이라고 일컫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색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색은 눈,귀,코,입,몸을 통해 안식,이식,비식,설식, 신식에 의해 얻는 내용이다. 
이렇게 말할 때 색은 넓은 의미의 색이다. 

이는 번역서에서는 일반적으로 물질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번역 표현의 문제점은 이미 살폈다. 

즉 일반적으로 물질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는
그 표현을 사용하는 이가 비록 색이란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과
같은 내용을 가리키지만,
그 내용을 놓고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입장은
그 내용이 기본적으로 정신과는 대립되고 구분되는 어떤 것이라고 이해하는 가운데
그런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표현을 대하는 입장도
또 색이란 표현이 역시 그런 의미를 갖는 것으로 미리 오해하고
이를 대하기 쉽기에 문제가 된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적으로 물질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그 내용이 
이 색이란 표현에 해당하는 것은 같다.

이제 실험을 해보자.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그래서 책상 앞에 라이터도 보이고 지우개도 보인다고 하자. 
그 내용을 평소 일반적으로 무엇이라고 이해하는가하면 
이 내용은 

- 자신 밖에 따로 있는 외부 세상의 내용이고 
- 또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 또 이들 내용은 자신의 마음(정신) 밖에 있는
정신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외부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이 결국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의 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눈을 떠 얻는 내용이나 
귀로 듣는 소리 등등을 모두 물질이라고 표현하고 
물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입장은
결국 물질 - 정신 이런 형태로 이들 내용이 상대되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면서
이런 의미로 이 내용을 이해하면서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지만, 
눈을 통해 얻는 내용 
귀를 통해 얻는 내용 
..
등을 모두 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감각해 얻는 내용을 통칭해 표현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비록 이 두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은 동일하더라도 
그 내용이 갖는 성격이나 의미는 서로 달리 파악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이나
귀로 얻는 내용 ... 손으로 얻는 촉감 내용 등을
일반적 입장에서는
정신 밖의 외부 물질이고
각 감관이 상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이해하면서 
물질이라고 표현하기에 
개념의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전에서
특히 유식학파 논서 등에서 강조해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색이란 표현을 놓고 비록 번역과정에서
'물질'이라고 번역하더라도
그 표현 자체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물질 - 즉 외부세계 외부대상으로서 
마음 밖에 따로 있는 외부의 물질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다만 한글 번역시 눈으로 대해 얻는 좁은 의미의 색은 빛깔로 번역한다면 
넓은 의미의 색은 조금 달리 번역해야 한다고 보기에 물질이란 표현을 빌려 
표현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그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놓고
일반적인 입장과
경전의 입장은 
같은 내용을 놓고 그 내용이 갖는 성격과 
의미에 대해 달리 이해하는 것이다. 


여하튼 언어표현을 놓고 많은 혼동이 발생할 수 있기에 
처음에 눈을 감고 뜨고 하면서 

눈을 뜰 때 얻는 내용을 평소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갖는 내용이라고 이해했는가를 
초점으로 파악하면 
혼동을 줄일 수 있다. 

지금 제시하는 내용은 
그런 내용이 
자신 밖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도 아니고, 
각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도 아니고 
또 더욱이 정신 밖에 정신과는 따로 있는 어떤 내용도 아니다. 

그것은 한 주체가 감관을 통해 그 주체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마음안 내용이라는 
이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자신과 세계를 파악하고 
그렇게 파악하는 부분을 붙들고 집착하면서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가면서
결국 그런 바탕에서 그런 부분으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되기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




한편, 
세상에 존재하는 내용을
크게 색,수, 상, 행, 식 이렇게 5 가지[5온]으로 묶어 제시할 때는
그 색은 위와 같은 의미의 넓은 의미의 색이다. 

즉, '앞에서 말한 좁은 의미의 색(눈으로 얻는 갘각내용)과 성, 향, 미, 촉을
모두 포함해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제 법처소섭색이란 내용은
색이라고 묶어 제시하는 내용 가운데
어떤 내용들은 사실상 위와 같은 성격을 갖지 않고
오히려 관념영역에 속하는 어떤 내용
즉 법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법처소섭색을 제시하면서
이것을 색의 범주에 넣어 분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기본 분류체계에 비추어 보면
이는 조금 이상하다고 보게 된다. 

여기서 제시하는 법이란 표현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법률 그런 내용과는 다른 의미다. 

자신이 현실에서 무언가를 얻는데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는 내용 이외의 것은 
모두 법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그리고 이런 법과 관련해서는 
법은 의(의근)를 통해(의존해) 의식에 의해 얻는다고 말하게 된다. 

색(빛깔)은 눈을 통해 안식에 의해 얻는다라는 문과 서로 대응하는 표현이다. 


일반적인 망상분별에서는 위 표현과 달리 
자신이 색(빛깔)을 대상으로 해서 눈이 관계해서 안식에 의해 색을 얻는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도 참고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의근이라고 표현하는 내용도 
유식학파의 입장은 다른 입장과 다르고 
또 불교내 입장은 또 일반적 입장과 다르다고 잘 파악해야 한다. 

일반적 입장은 생체 해부실에서 보게 되는 
뇌와 같은 육체적 기관을 의근이라고 보게 마련이다. 

그런데 불교입장은 일단 그렇지 않다. 
또한 유식학파에서는 의근을 제 7 말나식으로 제시하게 된다. 
이것은 유식학파에서 제 7 식 제 8 식을 시설해서 
정신을 세분해 제시할 때의 입장이다. 
미리 이런 내용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그 사정을 자세하게 살필 수는 없지만, 
일단 일반적 입장에서 관찰자가 
영희나 철수 그리고 어떤 이의 사체에서 보는 뇌와 같은 것을 놓고 
무엇이라고 할 때 
그 내용은 사실은 그런 내용을 얻는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임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다른 관찰자가 보는 그런 관찰자 마음안 내용을 
통해서 어떤 내용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관찰자가 뇌라고 지목하는 그 부분은 
어떤 주체가 생각하는 활동을 하는 그런 기관이 아니다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어떤 주체가 생각할 때 의존하는 기관이라고 할 것인가. 
여하튼 이에 대해 

어떤주체가 어떤 생각을 얻기 그 직전 앞 순간에 생각한
제 6 의식내용이라고 파악하려는 입장과 함께 

이와는 달리 또 다른 정신인 제 7 말나식을 제시하는 입장으로 나뉜다고 
대략적으로만 파악하고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분류는 
현실에서 문제삼게 되는 온갖 존재를
큰 범주로 
12 처 18 계 형태로 묶어 제시할 때의 내용이다. 

색 - 안  ~ 안식 
성 - 이  ~ 이식
향 - 비  ~ 비식
미 - 설  ~ 설식
촉 - 신  ~ 신식
법 - 의  ~ 의식 

이런 형태로 분류할 때 법이 배당된다. 

쉽게 표현하면 
한 주체가 감각기관으로 감각과정을 통해 얻는 내용을 색이라고 하고 
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색이라고 하면서 또 법이라고 하니 
오락가락하게 되면서 혼동을 일으키면서 
애매한 상태에 일단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후대에 논사들이
온갖 것의 존재를 큰 범주로 묶어 분류하는 과정에서
5 위 체계를 세워 분류하게 된다. 


이는 간단히 보면 다음 방식의 분류다. 

우선,  허공처럼 생주멸 변화를 떠난 어떤 것 --- 무위법
그리고 생주멸 변화를 하는 것                   ---(유위법)    ----- 마음[심],  마음에 딸린 내용[심소],  색,  색도 심도 아닌 내용[심불상응행법], 

이런 분류는 경전에서 처음 제시된 분류는 아니지만, 
논사들에 의해서 이런 분류체계가 제시되어서 
현실에서 문제삼는 온갖 내용을 이런 범주로 묶어서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법에 들어가는 내용을
위에 제시한 색,성,향,미,촉, 안, 이, 비, 설,신을 나열해 제시하면서 
다시 이에 덧붙여 법처소섭색이란 내용을 또 하나 
포함시켜 분류하면서 
조금은 성격이 애매한 내용을 추가해 넣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살펴보면
그런 내용을 별도로 시설해 제시할 만한 그럴만한 사정이 각각에
그렇게 있기에 그렇다고 제시된다. 


그리고 그 부분이 다음과 관련된다.
그래서 일단 다음 내용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미리 말하면 
여하튼 눈을 떠서 얻는 그런 내용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범주에 넣어야만 한다고 볼 만한 사정이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 
이렇게 일단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다음 내용을 살피면 
도움이 되리라 본다. 

즉 눈으로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어떤 내용은 아니지만, 
그에 준한 어떤 것을 따로 분류해 제시할 만한 혐의가 가고 
그런 것을 그처럼 있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곤란하기에
결국 그런 것을 따로 법처소섭색으로 묶어 
제시하게 된다는 이런 입장으로 이해하면 된다. 

쉽게 생각해보자. 

어떤 운동을 아주 오랫동안 열심히 했다. 
그래서 그는 턱걸이도 100 개 할 수 있고 
탁구를 친다면 곧바로 탁구를 해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떤 일반인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외관상 척 보면 이 두 사람 사이에 
별 차이가 안 보인다. 

그런데 앞과 같은 상황을 놓고 관찰하면 
여하튼 두 사람은 각각에서 다른 반응을 보이는 한편 
다른 자세와 다른 결과를 취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앞과 같은 무언가가 그 각각에게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한편 
그런 무엇을 일단 혐의선상에 올리고 
따로 묶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도 비슷하다. 

나중에는 정려 수행을 통해서 
신통을 얻고 
그런 가운데 얻는 특수한 능력과 관련된 내용도 나오는데 
일반인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을 실증하기가 곤란하다. 

그런데 일반인도 그런 부분이 몇개 있다. 

실험을 해보자. 
검은 테이프를 바퀴벌레형태로 만들어서 
옆에 있는 영희에게 한 번 바퀴벌레다라고 하면서 던져보자. 

심장이 약하거나 임신 상태면 곤란한데 
그 경우 영희는 그것을 바퀴벌레라고 잘못 보는 한편,

그런 생각을 통해서 다시 신체에 소름이 돋는 등의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소름을 돋게 했는가. 
그리고 이 소름을 놓고
그 정체가 무언가 이런것도 한번 살펴야 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시력이 나쁜 이가 안경을 벗었다고 가정한다면 
달을 보는데 달이 두개로 보인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하나는 평상시 보는 달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하나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등등의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검토하면서 
기본적인 범주에 넣기는 곤란하지만, 
여하튼 기본적으로 색에 넣는 내용과 관련시켜서 
무언가를 또 시설해 제시할 사정이 있기에 
이들을 제시하게 된다고 
이런 내용을 시설해 제시하게 된 
사정과 취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늘은 왜 푸른가 
푸를 만한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없다면 왜 다른 곳과 달리 
하늘은 푸르게 보일 것인가. 
이런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또 무언가를 잘게 나누면 작은 부분을 보게 되는데 
결국 이것을 하나하나 잘라보지 않아도 
결국 그런 것들이 뭉쳐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런 검토도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시설해 제시하고
이후 이들 내용에 대해서
그 성격이나 자세한 정체를 살펴 나가는 작업이
또 필요하게 된다는 의미다. 



>>>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Berger - Mademoiselle Chang.lrc 

Lab value 불기2562/11/09/금/00:16


♣1499-055♧ 

일단 여기서 일반적 입장에서 조금 낯선 용어가 
많이 보인다. 

상분 견분 
소연연 능연 친소연연 소소연연 
이런 여러 낯선 표현이 나온다. 

일단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여하튼 이런 표현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평소 늘 잘 하고 있고 
늘 대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을 놓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표현이 무엇을 정확하게 가리키는지를 
일반적으로 잘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처음 사과를 하나 놓고 보자. 
이 사과는 무엇때문에 책상위에 있게 된 것일까. 

이런 경우 사과나무와 사과 나무를 그 자리에 있게 한 사과씨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만 있다고 사과가 있게 된 것인가. 
사과가 그 자리에 있으려면 땅도 있어야 하고 공기도 있어야 하고 
물도 있어야 하고 등등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을 대단히 많이 나열할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이런 내용을 다양하게 나열한 다음 
사과가 있게 되는데 필요한 것들을 다 찾아 나열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여기에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추가시키는 것이 
또 있다. 

우선 이런 사과를 문제삼게 될 때는 
그가 의식할 지 하지 않을 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그렇게 문제삼는 그 주체의 마음을 일단 함께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처음 사과를 문제삼았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문제삼는 그 주체를 그 상황에서 빼고 
이 문제를 살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위에 사과를 문제삼는다고 적었는데 
이 경우 정확히 무엇을 문제삼는가가 다시 문제된다. 

사과를 문제삼는다라고 적었다면 
글자로서 '사과'를 놓고 이 글자를 처음 누가 만들었는가. 
이것을 문제삼는가? 

아니면 사과라는 글자로 표현하는 내용 가운데 
자신이 눈을 감아도 생각해 떠올리는 그런 관념분별로서의 사과를 
문제삼는가. 
그래서 그런 생각이 어떤 계기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홀연히 떠올랐는가. 
아니면 맛있는 것은 바나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사과를 떠올렸는가. 
아니면 앞에 무언가 동그란 것을 보고 사과를 떠올렸는가. 
이런 측면에서 사과란 관념분별이 어떤 계기로 얻어졌는가를 문제삼는가. 

이런 것도 문제는 되는데 
그렇다면 조금 이것은 조금 다른 측면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앞과 같은 내용을 아예 제거해버리면 
사실은 이런 문제 자체를 살피기 곤란해진다. 

분별을 일체 하지 않고 
눈으로 무언가 보는 그런 상태라면 
위와 같은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할 바탕이 형성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분명 사과란 관념분별을 하고 
그리고 언어로 표현하면서 
사과가 무엇때문에 나타났는가를 문제삼게 되는데 
이 경우 비록 언어나 관념분별을 가지고 문제는 삼지만, 
정작 그 내용은 그런 측면의 내용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보게 된다. 

그것은 결국 눈을 떠서 자신이 사과라고 여기게 되는 
어떤 부분을 붙잡고 
도대체 이런 내용이 왜 그렇게 나타났는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도대체 
그런 부분은 무엇때문에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는 
또 한편 그런 분별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그렇게 묶고 나누어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그 상태를 또 전혀 무시할 수가 없다. 

본래 사정은 어떠한가하면 
그런 분별을 행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렇게 어떤 부분을 붙잡고 문제삼는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조금 난해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여러가지 혼동이 
복잡하게 개입된다. 

그리고 앞에서 소연연이라고 제시한 표현이 
이 부분과 관련된다. 



이제 여기서 그림을 놓고 이 문제를 한번 살펴보자.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이는 1이 눈을 떴을 때 보게 되는 상황이다. 
어떤 이가 눈을 뜨면 자신의 모습의 일부만 보게 되기에 
그림에서 1과 같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은 1 이 자신과 유사한 철수나 영희를 옆에 놓고 
그가 눈을 감고 뜨면서 어떤 변화를 얻는가를 실험하게 하면서 
그 사정을 보고하게 하는 상황을 그려 놓은 것이다. 

이 과정을 놓고 
만일 4 라는 꽃은 거기에 어떻게 있게 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앞처럼 다양한 문제를 이와 관련해 살펴야 한다. 

이 문제가 대단히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복잡하기도 하고 
그간 많이 살핀 내용이기도 하기에 
이 부분은 이제 생략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여하튼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착각을 많이 일으키게 된다. 

2 가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한다고 하고 
눈을 뜨면 그 때 꽃을 본다고 한다. 

이것이 일단 문제다. 
그 상황을 놓고 1이 지켜보면 
1이 보는 4 부분은 아무 변화가 그다지 없는데 
2가 그런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눈을 떠 꽃이 보인다고 할 때 
그꽃은 적어도 4 는 아니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2 가 본다는 꽃은 
적어도 그림에서 2 와 같은 부분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일 것이다. 
예를 들어 2 의 마음에서 있는 어떤 변화내용이다. 
이렇게 추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상황에서 
2 철수가 도대체 꽃이 거기에 있게 된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일단 다음과 같이 제시하게 될 것이다. 


원래 꽃씨가 태초에 있었다. 
그것이 싹이 나고 ...잎과 줄기가 생기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 한편 


또 단지 그것만 아니고 
땅도 있었고 공기도 있었고 물도 있었고 
그래서 그런 꽃이 피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제시하게 된다. 

이 두 내용의 차이는 일단 다음이다. 

땅은 그 꽃과 관련되지만, 
오로지 문제삼는 그 꽃하고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고 
땅위에 있는 온갖 것들과 다 그런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나열해 제시한 것은 
적어도 이런 땅이나 물 이런 것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고 보게 되기에 
이것을 일단 구분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것뿐이겠는가. 

이미 1 이 이 실험을 2 에게 행하게 하고 
그 내용을 옆에서 관찰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2 가 눈을 감으면 
그가 문제삼는 그런 꽃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심정적으로 
다시 여기에 어떤 것을 더 추가해야 한다고 보겠는가. 
이런 문제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대단히 복잡한 여러 문제가 들어 있다. 
대부분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이 여기에 깊이 관련된다. 

그런데 일단 내용이 너무 길고 복잡해서 생략하고픈 심정이 강하다. 
이렇게 논의하기 시작하면 이 주제만 가지고도 분량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여기서 주의할 점은 
결코 2 라는 주체는 
1이 눈으로 본 4 와 같은 부분을 상대로 해서 
어떤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1 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자꾸 그렇게 여기게 된다는 점이 또 중요하다. 

그래서 1 의 입장에서 2가 무언가를 보는 상황을 관찰해 보고할 때는 
결국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보고하게 된다. 
즉 그림에서와 같이 보게 되는 
2 라는 주체는 
4 라는 부분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의 마음 안에서 어떤 내용 ( 위 그림에서 2 영역안에 있는 4^) 와 같은 내용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얻는다고 보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얻지 못한다고 하니 4 는 아니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다시 그런 내용을 감각해 얻고 나서 
다시 이를 바탕으로 2 는 
그런 내용에 대해 꽃이라고 분별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꽃이라고 언어로 표현해 보고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또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다음이다. 

1 이 볼 때 바로 옆에 서 있는 2 라는 철수나 
1 자신이나 상황이 엇비슷하다. 
즉 1 이 자신의 손을 보나 철수 2의 손을 보나 
엇비슷하다. 

그래서 앞과 같이 처음 2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자신이 4 라는 꽃을 보는 관계도 
앞에 제시한 2에 대해 이해한 내용과 마찬가지라고 이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즉 1 자신이 생각하기를 
자신은 자신이 보는 4 와 같은 부분을 놓고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어떤 내용을 얻는다. =>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그 4 다.  


또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그 부분은 꽃이라고 분별을 하게 되고 
언어표현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 의 입장과 달리 
1 입장에서는 
4 라는 부분이 두 지위를 함께 갖게 된다. 

즉 자신의 눈이 상대한 대상이기도 하면서 
그런 대상을 대해서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감각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내용을 놓고 
그 지위나 성격에 대한 혼동이 시작된다. 



다시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자. 

처음 2 를 놓고 보면 옆에서 관찰할 때는 
2 가 4 를 대상으로 어떤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이 경우 2 의 눈이 대한 대상과 
2 가 그런 대상을 대해서 얻어낸 마음안의 감각내용은 
서로 다른 지위에 있는 다른 내용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즉 그림으로 쉽게 이해하면 4 는 2 의 눈이 상대한 대상이고 
4^는 그런 대상을 상대해 얻어낸 결과물로서 감각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서로 구분된다. 



그런데 1 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즉 1 의 눈이 상대한 대상을 4 라고 이해한다면 
그런 대상을 상대해서 얻어낸 감각내용도 알고보면 그 4 인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느 입장에서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가에 따라서 
비록 하나의 4 를 
특정한 어떤 표현으로 가리킨다고 해도 
이미 그 표현이 나타내는 성격이나 의미내용에 대해서 혼동이 발생한다. 

4 란 부분은 하나인데 
도대체 어떤 주체와의 어떤 관계로 그 의미를 이해해서 
그 4 라는 부분을 그런 표현으로 가리킨 것인가. 
이것이 
비록 그런 언어표현을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의식하지 못할지 몰라도 
앞과 같은 사정 때문에 
대단히 큰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처음에 2 가 무엇을 보는 과정에 대해 1이 관찰하고 이해한 내용 
또 1 자신이 무엇을 보는 과정에 대한 스스로 이해한 내용 자체가 
전반적으로 처음부터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고 대단히 복잡한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 문제의 핵심은 
어떤 주체가 무엇을 볼 때 
과연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인가가 
처음에 문제된다. 

여기서 앞 그림에서 4 와 같은 것은 알고보면 
2 의 눈이 상대한 대상도 아닐 뿐더러  
더욱이 1 의 눈이 상대한 대상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우선 다른 주체가 무엇을 보는 과정에서 
다른 주체는 자신의 마음 안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서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1 자신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볼 때 다른 주체 2 의 마음안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서 무언가를 보거나 만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 그림에서 4 와 같은 내용들은 
1 이 눈을 떴을 때 그 순간 이를 통해 얻게 되는 
1 마음안 내용이다. 

그래서 그런 4 부분은 1이 무언가를 보는 상황에서 
그렇게 얻어진 결과 내용이지, 
그런 내용을 얻는 과정에서 
그런 4 와 같은 내용을 눈이 상대해 눈을 떠서 얻어내는 내용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사실은 4 의 내용을 그런 지위로 놓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사정은 그런데 
4 와 같은 부분을 놓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맡고 하는 경우처럼 
4 와 같은 부분이 그런 내용을 얻을 때 각 감관이 상대하는 
대상인 것으로 잘못 여기면서 
평소 생각하고 분별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도 현실이다. 

이는 망집을 일으키고 망집이 잔류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어떤 부분을 무엇이라고 관념분별하고 언어표현을 하면서 
그런 부분을 문제삼을 때 
이런 표현으로 각 주체가 
도대체 정확히 어떤 영역의 무엇을 붙잡고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가에 관련해 문제가 있게 된다. 


이 경우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순수하게 일정한 관념분별이 왜 그렇게 발생했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면 
더욱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선 일반적인 망집상태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관념분별이 
위와 같이 눈을 떠서 보는 영역에도 그대로 있다고 여기면서 
어떤 부분을 붙잡고 계속 문제삼는 상황이다.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임하지 않고 
눈을 뜨면 전체적으로 그런 감각현실을 왜 얻는가.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차라리 그런 감각현실은 무엇을 대상으로 
얻는가 이런 문제로 살피게 될 텐데.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을 사과라고 하면서 
문제삼는 경우는 또 사정이 이와 조금 다르다. 

그래서 비록 일정한 표현으로 위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가리키고자 하지만, 
위 가운데 어떤 입장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가 
대단히 혼란스럽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언어표현만 가지고 
이 가운데 어떤 논사가 사용하는 어떤 표현은 
바로 이런 주체를 놓고 
그 주체와의 관계에서 이런 지위에 있는 이런 부분을 가리킨다. 
이렇게 단정하기가 대단히 곤란하다. 
그런데 위 문제를 먼저 잘 정리하지 않으면 
이후 이 논의를 살피면 살필 수록 더 혼란스럽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이 가운데 
어떤 입장에서 어떤 주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 보면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어떤가하면 
눈을 떠 그런 감각현실을 그렇게 얻고 나서 
이 부분은 꽃 이 부분은 자신 저 부분은 철수 
이런 식으로 묶고 나누면서 
그런 분별에 대응시키는 그 활동 자체가 
상을 일으켜 갖는 망상분별 작용의 하나인 것이다. 
여기서 관념영역에서 그런 생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생각을 일으키면서 
그 내용이 바로 그 감각현실 영역의 그 부분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자꾸 문제를 제기하고 살피는 
그 자체가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해하게끔 이끄는 과정에 
일단 방편시설로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여하튼 언어시설을 해서 무언가를 가리키면서 
이 사정을 설명해나가야 한다는 필요성과 어려움이 있기에 
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런 망집상태는 
사실은 그런 감각현실부분과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을 함께 묶어 놓는 가운데 
또 감각현실 부분을 또 문제삼고 살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일단 4 연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운데 소연연에 대해서 일단 대강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또 이런 경우가 있다. 
오로지 순수하게 관념영역안에서 

어떤 분별 내용으로서 한 내용 예를 들어 
바나나란 분별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생각을 하면서 
그것은 맛있다거나 비싸다거나 길다라고 생각하는 경우 
이런 경우는 조금 앞의 문제와 다르다. 

이 경우 뒤의 분별 내용을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얻었는가라고 한다면 비교적 쉬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영역에서 있는 내용들을 놓고 
그 관계를 살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상당히 서로 친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앞처럼 
눈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그 일정 부분에 대해 매번 엉뚱한 생각을 일으킬 때는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의 내용을 놓고 
관계시키는 것이 되어서 일단 서로 조금 친하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구분을 일단 하게끔 되는 사정이 또 있다. 



그래서 이런 여러 경우를 다 고려하면서 
이 문제를 잘 검토해야 한다. 










한편 
연[緣]이란 표현이 다음 의미와 관련된다. 

이는 a 는 b 를 연해서 나타난다. 
이처럼 표현하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 b 가 없다면 a 는 없다. 
그런데 그 상황에 b 가 있다면 있다. 
따라서 b 가 있기에 a 가 있다고 보게 된다. 
이런 의미다. 

현실에서 파악하는 연기의 관계는 이런 의미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으레 그렇다. 
이런 내용을 그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종이에 불을 붙이면 왜 종이도 아니고 불도 아닌 
이상한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가. 
아무리 이 내용을 반복해 살펴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왜 어차피 종이도 아니고 불도 아닌 것이 
그렇게 그로 인해 나타나면 
자신이 원하는 황금이나 아름다운 여인은 안 나타나고 
그런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가. 

수많은 물리 화학 생물 법칙이 다 이런 문제와 관련된다. 
과학교과서에서 많은 설명을 한 것 같은데 
그 설명은 단지 위와 같은 관계를 으레 그렇게 대하게 된다는 
사정을 조금 특이하게 표현한 것이지 
정작 그런 사정이 왜 그런가는 설명한 것은 아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놓고 본다면 
질량이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을 끌어당긴다는 내용인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래야 되는가에 대해서는 
으레 그렇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한 것 뿐이다. 

그래서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다고 여기면 
그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게 되지만, 
알고보면 적당히 타협을 하고 멈춘 것뿐이다.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본 문제로 들어가보자. 

눈을 뜨니 왜 하필이면 그런 모습이 보이는가? 

눈을 떠서 어떤 모습을 보았는데 
그 상황에서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이 벽돌로 여겨진다. 

이 때 그렇게 해서 그 부분은 벽돌이라고 생각하고 분별한다. 
한편 그 상황에서 또 일정부분은 그런 것과 달리 
자신이라고 여긴다. 

이 상황에서 다시 다음 질문을 해보자. 

그런 생각을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평소 벽돌이라고 생각하거나 저것은 자동차다 
영희다 철수다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사실은 그런 의식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현상을 놓고 
이를 살피는 입장에서는 
우선 가장 자신에게 분명한 자신의 정신 활동을 놓고 
스스로 계속 관찰하고 반성해보는 자세를 갖게 마련이다. 

자신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할 때마다 
모습이 보이고 보이지 않고 하는데 
왜 그런가도 생각하고 

그런 가운데 금덩어리로 본 부분이 
알고 보면 벽돌이었다. 
그런데 왜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을까도 생각해보고 

이런 가운데 자신이 그런 생각을 일정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또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때 이런 내용이 과연 어떤 성격을 갖는가가 또 문제된다. 


우선 다양한 입장이 있다. 

먼저 이렇게 보자. 

생각한다고 할 때 
그 생각하는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일일히 따로 구분해서 분류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재물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 
사회에 대한 생각, 
미술에 대한 생각, 
시에 대한 생각, 
...

그런데 마음현상을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눈이 눈을 직접 보지 못하고 
마음이 마음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떤 마음이 일정한 작용을 하는 것을 살피다 보니 
이 마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은 좀 달리 취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한다면 생각한다는 생각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그것을 또 생각하면서 인식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내용이 추가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이런 부분이 
처음 눈을떠서 어떤 사물을 감각하는 부분과 

다시 이에 대해 어떤 분별을 행하는 부분과 
별개로 따로 나누어서 시설해야 할 것인가 
아닌가가 처음에 문제된다. 

그러니까 먼저 자신이 이 문제를 놓고 
잘 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생각하는 활동을 할 때 
그 자체를 놓고 어떤 내용을 얻는다면 
이 내용은 앞의 내용과 별개로 시설해야 할 어떤 
지위를 갖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중에 그 내용을 놓고 
무언가가 직접 어떤 내용을 얻는 것은 아니고 
앞에 이미 나열한 내용에 포함해 넣어야 할 문제인가. 

이것이 또 문제될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하는 활동을 할 때 
이 활동 자체를 어떻게 파악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면, 

여기에는 같은 형식으로 무한으로 나아가는 문제가 일단 발생한다. 

생각하는 활동을 할 때 이 활동 자체를 파악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또 파악하는 것도 있어서 
자신이 그 내용을 제출하게 된 것 아닌가. 

그래서 그것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이제 또 그것을 얻어낸 부분이 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곤란하므로 
적당히 그 이후는 어느 부분에서 순환시켜서 처리하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혹시 이 내용을 처음의 분류에 그냥 넣어서 
이해하는 것이 간단한 것 아니었는가. 
이런 의문도 갖게 된다. 

이것이 자신이 늘 잘 행하는 여러 정신 활동을 놓고 
스스로 어떤 것이 더 적절한가를 스스로 실험하고 
판단하는 연구과제가 된다. 

이에 대해 연구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논사들이 
이에 대해 입장이 다 같으면 좀 편할텐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견해가 입장마다 다르다. 

그런데 위에서 제시한 상분 견분 
그리고 나중에 보면 자증분 증자증분 
이런 표현은 결국 이런 형태로 
자신의 마음현상을 분석하고 살폈던 
논사들이 처음 제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그것이 후대에 상당히 넓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혹시 자동차를 하나 보고 그 다음 자동차가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이 내용을 여럿 놓고서 자동차가 그렇게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한 내용이 있을 때 
이것을 다른 생각과 조금 특별하다고 해서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보듯, 
이상한 주장인가. 

아니면 분명 앞에서 나열한 것과는 
아주 차이가 나는 특별한 정신작용을 통해 
얻어내는 특별한 정신내용으로 
독립적으로 취급해야 할 내용인가. 

이런 것이 다양하게 문제가 된다. 

여하튼 어떤 요소를 통해 이런 여러 내용을 얻는가와 관련해 
기본적으로 4 연이란 분류가 
왜 그런 형태로 제시되는 것도 복잡하고 

그리고 한 주체가 얻는 일체의 내용을 
어떤 범주로 분류해 제시할 것인가도 
또 복잡하다. 

여기에는 사실 처음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면 
과연 그 내용은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그렇게 얻는가의 문제부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이는 곧 실재 영역에 무엇이 있고 
그 가운데 무엇을 넣고 빼고 하면 
그런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주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실재 영역은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는데 
정작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직접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정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하는 주체가 얻는 내용은 
모두 마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재는 마음 밖에 있고 
어떤 주체의 마음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내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직접 얻어낼 도리가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과 하나를 붙들고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두드리고 소리를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 촉감을 얻는 상황을 놓고 
이 사정을 이해해보면 

자신이 하나의 사과를 놓고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같이 얻는 것 같은데 
정작 눈으로 본 모습은 촉감 영역에서는 전혀 얻을 수 없고 
두 내용을 대조하면 아주 엉뚱한 내용들인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감관을 통해서 어떤 내용을 얻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대로 그런 형태로 있다고 감히 
단정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눈으로 보는 사과가 왜 손으로 느끼는 그런 촉감인가. 

반대로 손으로 느낀 그 촉감이 또 왜 이런 소리인가. 
등등이 다 이와 관련되어서 검토할 문제가 된다. 

그런데 만일 여하튼 그런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 눈을 떠 어떤 내용을 얻었다고 이해하면 
그렇게 추리로만 세운 무엇을 대상이라고 해야 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정작 그 내용은 얻지 못하므로 
더 논의할 도리가 없다. 

사정이 이렇기에 이런 내용은 
연기의 관게에서도 넣어 살피기 곤란하고 

그래서 본래 4 연에 들어갈 자격자체가 없게 된다. 

그런데 소연연은 사실 이와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앞의 추리만 의존하면 
감각내용에 대해서도 그런 내용을 하나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끔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런 관계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것과 저것을 서로 연기나 인과의 관계에 있다고 
제시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지고 이것은 저것을 의존해서 나타난다고 하겠는가. 

공한 실재는 있다 없다를 떠나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곤란하다. 

그래서 실재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잡아서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곤란하다. 

반대로 말하면 
연기관계를 파악할 때는 
본 사정은 그렇지 않지만, 
여하튼 마음에서 얻어진 무언가를 가지고 
논의를 해야 
이후 논의가 그나마 진행된다는 사정부터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공허한 주장에 그치게 된다. 

이것이 있어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도 저것이 있다면 
왜 이것을 저것과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 

또 이것이 있어도 저것이 없고 
이것이 없어도 저것이 없다면 
또 왜 이것을 저것과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그런 관계성을 제시하거나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무언가를 무조건 관계가 된다고 제시하게 되면 
단순히 말 뿐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일단 기본적인 내용을 대강 살폈다. 

문제는 여기서 다양한 낯선 표현이 제시되는데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여러 내용 가운데 
분명 무언가를 가리키기는 하는데 
정확히 무언가를 가리키는가를 파악하기는 
일단 어려움이 많다. 

왜 그런가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그런 표현으로 가리키는 그 무엇을 
다른 이에게 상자에 넣어서 택배로 
보내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일반적인 상황을 놓고 
혼자 조용히 실험을 반복해보아야 할 필요가 일단 있다. 

그러므로 조금 더 쉬기로 한다. 


참고로 유가사지론에서 4 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과 
성유식론에서 친소연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일단 찾아 붙여본다. 



또한141) 첫째 인연(因緣) 둘째 등무간연(等無間緣) 셋째 소연연(所緣緣) 넷째 증상연(增上緣)의 4연(緣)이 있다. 인연(因緣)이란 종자(種子)를 말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이란 이 식(識) 다음에 곧바로[無間] 여러 식(識)142)이 결정(決定)적으로 생길 때 이것은 저것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 소연연(所緣緣)이란 제 심(心)과 심소(心所)의 소연(所緣)의 경계(境界)를 말한다. 증상연(增上緣)이란 종자(種子)를 제외한 그 밖의 소의(所依)로서 안근[眼] 및 조반법(助伴法)이 안식(眼識)에 대하는 것과 같이 그 나머지 식(識) 또한 그러한 것을 말한다. 또한 선(善)ㆍ불선성(不善性)은 능히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果)를 취하는데, 이와 같은 등의 종류를 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한다.

또한 종자에 의하기 때문에 인연(因緣)을 건립하며, 자성(自性)에 의하기 때문에 등무간연(等無間緣)을 건립하며, 소연경(所緣境)에 의하기 때문에 소연연(所緣緣)을 건립하며, 소의(所依) 및 조반(助伴) 등에 의하기 때문에 증상연(增上緣)을 건립한다.

경(經)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여러 인(因)과 여러 연(緣)이 능히 식(識)을 생기게 한다’란 그것은 이 4인연(因緣)이다. 한 가지143)는 인(因)이기도 하고 연(緣)이기도 하지만 나머지144)는 오직 연(緣)이다.

『유가사지론』 3권(ABC, K0570 v15, p.481c01)


...
참고 유가사지론 3 권 




K0614V017P0568a01L


셋째는 소연연(所緣緣)이니, 존재하는 법[有法]344)이 자기 모습을 띠는 심왕, 혹은 상응법(심소)의 사려된 것345)과 의지된 것346)을 말한다. 이것의 자체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친소연연(親所緣緣)이고, 다른 하나는 소소연연(疎所緣緣)이다. 만약 능연(能緣)과 자체가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서 견분 등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이라면, 그것은 친소연연(親所緣緣)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능연과 자체가 서로 떨어지긴 하지만, 본질로 삼아 능히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알라. 그것은 소소연연(疎所緣緣)이다. 친소연연은 능연에 모두 있다.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에서 떠나서는 반드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소연연은 능연에 혹은 있기도 하다. 외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에서 떠나서 역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347)

K0614V017P0568a01L

 

제8식의 심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48) 오직 친소연연만이 있다. 업과 종자[因]의 세력에 따라 자연적으로 변현하기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49) (친소연연이 있고) 역시 반드시 소소연연도 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제8식이 변현한 것에 의지하여, 본질로서 스스로 바야흐로 변현하기 때문이다.

K0614V017P0568a01L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50) 두 견해가 모두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한다. 자신ㆍ타인의 신체ㆍ국토를 서로 수용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제8식이 전변한 것을 자신의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351) 자기 종자를 타인에 대해서 수용하는 논리가 없고, 타인이 이것을 변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은 종자가 모두 평등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352)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 심품의 소소연연은 일체의 지위 중에서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다.

『성유식론』 7권(K0614 v17, p.568a01)



K0614V017P0518c01L

현재 타인[彼聚]의 심왕ㆍ심소법은 자기[此聚] 식의 친소연연(親所緣緣)이 아니어야 한다.53) 소연이 아닌 것처럼 타인에게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기[同聚]의 심소도 역시 친소연연이 아니다. 심왕의 자체와 다르므로 소취(所取)가 아닌 다른 것과 같다.54)이에 근거해서 마땅히 알라. 참으로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내부의 식만이 존재하여 외부대상으로 사현(似現)한다.그러므로 경전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K0614V017P0519a01L

어리석은 사람들이 분별하는 것 같은

외부대상은 참으로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습기가 마음을 어지럽혀서 혼탁하게 한다.

따라서 그것(외부대상)에 비슷하게 생겨난다.55)





♣1499-055♧무릇 법처의 색[法處色]을 논하는데 모두 몇 가지가 있는가. 

[문]5 가지가 있다. 1은 극략색(極略色)이요, 2는 극형색(極逈色)이요, 3은 수소인색(受所引色)이요, 4는 변계색(遍計色)이요, 5는 정과색(定果色)이다. 




♣1499-055♧먼저 영상을 밝혀 보자. 친한 소연연[親所緣緣]이라 함은 

모든 상분과 능연(能緣)의 견분은 체성이 서로가 여의지 않나니, 

곧 견분이 의탁할 바 경계 이것은 헤아릴 바의 처소이다. 

곧 의탁할 바를 연(緣)이라 하고 

헤아릴 바를 소연(所緣)이라 하여, 

이 2 가지의 뜻을 소연연(所緣緣)이라 한다. 

곧 이 영상에는 4 가지 이름이 있다. 

1은 영상이요, 

2는 상분(相分)이요, 

3은 안에서 헤아리고 의탁할 바[內所處託]요, 

4는 친한 소연연이다. 

다음에는 본질을 밝혀 보자. 

만일 능연의 자체와 서로 여의면 

곧 성근 소연연[疎所緣緣]이니, 

상분과는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곧 본질 위에서 능연의 견분과 서로가 여의기 때문에 여읜다[離]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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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td1436

◈Lab value 불기2562/11/05/월/13:24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Gilles Vigneault - Pendant Que.lrc
♥ 잡담 ♥경전 열람체계의 변경


Lab value 불기2562/11/08/목/16:06

경전 열람체계를 경전사이트를 이용하고 
조각글 페이지에서는 경전내용 부분에서 
살필 내용을 직접 붙여 살피는 방식으로 체계를 바꾸었다. 
경전판본에 오탈자가 있다거나 문단정리 등 작업은 
이후 본 페이지에서는 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조각글이 밀려 있기도 하고 
경전 실질 내용을 살피는데 시간을 좀 더 들이기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조금 편해졌는데 
다만 경전 사이트 해당 페이지를 찾아 링크를 거는 작업이 
조금 추가되었다. 
그리고 아래 문서정보란에도 경전 사이트 해당 페이지 링크를 덧붙였다. 

또 11 월 6 일자 조각글부터 반영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남아서 과거 조각글을 살필 경우에도 
이런 형태로 점차 바꾸어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조각글 공간은 조각글 공간대로 
계속 시리즈로 이어서 살피는 문제나 
일상적인 잡담을 적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조금 많이 편해진 점도 있고 
체계가 바뀌어서 조금 복잡한 점도 있다. 

종경록을 살피는데 논의할 논점이 상당히 많다. 
한 페이지에 이 내용을 다 살필 수 있을 지 모르는데 
그래도 되는데까지는 보충을 해나갈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한글로 되어 있기에 
죽 읽으면 일반적입장에서 그 내용을 척척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면 바람직한데 
오래 경전을 살핀 입장이라고 해도 
이해가 쉽지 않게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주제가 결국 망집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특히 기본적인 망집이 제거되어도 
현실 생활을 하는 가운데 여전히 잔류하게 되는 망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살펴야 할 주제들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통해
현실에 임하다보면 바로 이런 사정들로 인해 
망집이 여전히 잔류되기 쉽다는 사정을 한편 잘 이해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잔류하기 쉬운 망집을 마저
남김없이 제거해나갈 수 있다. 


이는 현실에서 다음 사정들과 관련된다. 
손으로 사과를 하나 붙잡고 
이것을 눈으로 보고 
이것을 두드리며 소리를 듣고 
코로 향을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촉감을 얻는 실험을 하면, 

자신이 눈으로 보는 그 모습이나 
위 내용들이 바로 자신의 감관이 그렇게
대하는 대상이라고 잘못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또 한편 
그 사과를 책상 위에 놓고 옆에는 지우개가 하나 있었다면 
다음날 와서 보아도 여전히 그 책상 위에
그 위치에 사과가 그대로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그 사과를 집어서 
영희나 철수에게 건네면 
영희나 철수도 역시 사과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대하는 현상과 관계가 깊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자신이 얻는 내용은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망집을 잔류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 기본적으로 여기에서 망집을 제거한다는 것은 

자신이 눈으로 본 사과 모습을 붙잡아 놓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는 현상에서 

먼저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을 일단 추리하는 가운데 
그 실재가 무언가를 살피는 한편, 

또 자신이 눈을 감거나 뜨거나 하면서 모습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할 때도 
이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계속 자신이 사과에 대해 갖는 생각이나 분별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통해서 
자신이 감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과는 구분되는 
분별 내용을 또 살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놓고 각 내용의 관계와 정체를 살피게된다. 

그리고 
불교 용어로는 이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놓고 
살피는 문제가 된다. 

이 경우 하나하나 서로 내용을 대조해 보면서 
이들 각 내용의 관계를 살피면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자신과 외부세계에 대해 갖고 임하던 망집을 
제거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원칙적인 방식은 다음이다. 

감각현실을 하나 놓고 
이렇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감각현실 그 자체가 곧 관념분별인가. -> 아니다. 
반대로 
관념분별 자체가 감각현실인가. -> 아니다. 
그러면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는가. -> 아니다. 

이것이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살피는 원칙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같은 형식으로 
본 바탕이되는 실재의 내용과 감각현실의 관계도 이처럼 살피고 
본 바탕이 되는 실재와 관념분별의 관계를 살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를 통해 
감각현실은 그 자체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고
실재는 공한 것이지만, 
그러나 감각현실은 공또 한 실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한편 공한 실재는 감각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감각현실은 곧 공한 실재와 다르지 않고 
공한 실재는 곧 감각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판단까지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만, 
공한 실재에서는 그런 색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심경이나 대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수상행식...
공중 무색 무 수상행식....

이런 표현이 이와 같은 바탕에서 제시되는 내용이다. 

참고 

K0020V005P1035a04L

 

사리불(舍利弗)이여, 물질[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受]과 생각[想]과 지어감[行]과 의식[識]도 그러하니라.

“舍利子!色不異空,空不異色;色卽是空,空卽是色。受、想、行、識,亦復如是。

K0020V005P1035a06L

 

사리불이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으며[不滅] 더럽지도 않고[不垢] 깨끗하지도 않으며[不淨] 늘지도 않고[不增] 줄지도 않느니라[不減].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반야바라밀다심경』 1권(K0020 v5, p.1035a01-a06)






그리고 위와 같이 문제되는 각 내용을 살피는 방식은
다른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거울과 거울면에 비친 영상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에서 얻어진 내용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또 
마음과 실재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이 마음안 내용이라고 할 때 
그렇다고 눈을 떠 본 책상이나 수건이 마음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모습이 마음을 떠나서 있는가. 
이런 형태로 이 각 내용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이해하기 힘든 실재의 공함은 
쉽게 이해하려면 
사과를 붙잡고 눈으로 본 모습이나 색깔과 
그 상황에서 그 사과를 손으로 만지며 촉감을 얻을 때 
이 두 내용을 놓고 각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 얻어지는가. 
이것을 확인해보면 쉽다. 

눈으로 본 색깔이 촉감영역에서 얻어지는가. 
얻어지지 않는다. 
그 반대는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 촉감은 오로지 색깔로만  표현하려면 어떻해야 하는가. 
또 반대로 색깔을 촉감으로만 표현하려면 어떻해야 하는가. 
=> 그것은 그 영역에서는 못 얻는다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색깔이 촉감을 얻는 영역에서 얻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색깔은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또 반대로 촉감을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모두 그렇지 않다. 

존재가 문제되는 각 영역의 각 내용은 
공통적으로 이런 성격을 살필 수 있다. 

그것이 곧 한 영역에서 얻는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꿈을 아무리 생생하게 꾸어도 그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과 그 사정이 같다. 
그것은 그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그처럼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꿈 꾸는 상황에서 얻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사과를 대할 때마다 수없이 반복해서 엇비슷한 촉감을 얻고
또 수없이 비슷한 사과 모습을 보아도 
앞과 같은 관계로 그런 내용은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즉, 
'실답지 않다'는 말을 무량겁에 걸쳐서 반복해도 
'실답지 않다'는 말이 '실답다'를 의미하는 말로 되지 않듯 
실답지 않은 현실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서 반복해 받는다해도 
여전히 실답지 않은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일정한 업을 행하면 무량겁에 걸쳐서 3 악도에 들어가 
생사고를 받는다고 한편으로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은 
기본적으로 실답지 않은 내용을 놓고 
어리석음에 바탕해 망상분별을 일으킨 이후 
그런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하나같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생생하게 받아가게 되는 
생사고통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꿈처럼 실답지는 않지만,
그러나 또 꿈을 꾸는 상황에서의 꿈처럼 전혀 없다고 할 내용은 아닌데 

생사현실은 또 정작 꿈은 아니어서 
무량겁에 걸쳐서 수많은 중생이 그런 형태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는 것이기에 
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그런 업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 장구하게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는 
중생의 안타까운 사정을 부처님께서 제시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사정을 일단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실상과 관련해서 실상이 공하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사정이 그렇기에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실재영역에서는 얻지 못하는 실답지 않은 내용임을 관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 공해탈문 


또 현실에서 감각해 얻는 각 내용을 놓고서는 
이에 대해 자신이 분별해서 일으킨 분별을 바탕으로 
각 부분을 붙잡고 
이 부분은 자신 저 부분은 영희 그리고 철수 
저 부분은 책상 저 부분은 자동차 
이런 식으로 상을 일으키고 그런 부분을 붙잡고 상을 취하고 
그에 바탕해서 온갖 업을 행하여 나가게 되는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의 관계를 잘 파악해서 
감각현실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관해서 
그런 망집에서 일단 벗어나게 된다. => 무상해탈문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일으키는 온갖 소원과 희망은 
위와 같은 망집의 바탕에서 일으킨 것이어서 
그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갯벌에서 자신이 나중에 나오기 힘들고 시간이 지나면 무너져서
자신이 파묻히게 되는 무덤을 깊게 파는 행위가 된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쓸데없는 소원과 희망을 모두 남김없이 제거해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 무원무작 해탈 

이 부분은 다음 내용이다.

어떤 한 사람이 커피가 없는 상황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희망할 때 
그 희망하는 내용이 무엇을 향해서 어떤 상태를 얻고자 하는 것인가를 
위 내용을 놓고 잘 검토하면 
욕계에서 갖는 희망이 왜 엉터리인가를 잘 이해하게 된다. 

즉,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은 관념으로 형성한 것인데 
희망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욕계 내 중생은 
그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는 감각현실 영역에서 무언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그런 망집상태에서 그에 상응한다고 보는 내용을 얻으면 
자신의 소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상태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생사현실에서 문제로 보는 3 악도 
즉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생생하고 실답게 겪어나가는 3 악도는 
욕계에서 망집을 일으킨 상황에서만 얻는 문제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위 내용을 잘 관해서 무원무작해탈문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첫번재 공해탈문도 그렇지만, 
두번째 무상해탈문에서도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바탕에서 다시 무원무작해탈문에 들어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제거하고 
그래서 그런 업에 의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풀려나야 하는 것이다. 

마치 극심한 고통을 받는 수용소에 끌려가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미리 그 수용소로 향해 가는 기차에 어떻하던지 올라타지 않아야 하고 
올라탔으면 어떻하던지 내려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벗어나면 
그 사정을 잘 관하고 
그 방향을 반대로 해서
다시 앞에서 무원무작삼매해탈로 제거한 내용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게 
중생제도를 위해서 무량한 서원을 일으키고
이를 집착없이 성취해내기 위한 수행을 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들어가는 생멸문으로 또 다시 들어가
생사현실에서 여여하게 수행에 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해탈문 => 생사현실에서 공한 법의 자리에 임한다. 
무상해탈문 => 생사현실에서 이에 바탕해 안인의 갑옷을 입고 임한다. 
무원무작해탈문 =>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자비의 방에 들어가 무량한 서원을 일으켜 임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결과적으로 같아보이지만, 
이 경우는 처음 상태와 다른 입장에서 
중생 제도를 위해서 생사현실에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살피면 간단해 보이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사정이 그렇다해도 
여전히 망집을 잔류시키게 하는 사정이 또 있다. 

즉 사과를 놓고 비유로 든 내용을 놓고 보면 
현실에서 망집상태에서 판단하고 분별하면서 
업을 행하던 상태가 오히려 더 적절하고 옳은 판단이 아닌가. 
현실에서 살아남고 생활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존의 망집을 여전히 잔류시키면서 
고집하는 경향이 남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현실에 장구하게 묶이게 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간단히 기본적으로 위 내용을 통해서 
망집을 제거하였다 해도 

왜 현실에서는 자꾸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또 생을 출발하는 단계부터 마음이 어떻게 망집을 일으켜서
공중 3 회전에 걸친 망집을 일으켜 
그 망집에 단단히 묶이게 되는가 하는 
그 전후 배경을 또 살펴야 하는 것이다. 

또 이를 살피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표면상으로 쉽게 확인 가능한 
감각이나 분별을 행하는 정신과정부터 
또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놓고 
논의가 이뤄지기에 
언어표현만 가지고 이것을 논의해나가려면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고 
살피기 어려운 문제로 남기가 쉽다. 

부처님이나 논사나 일정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표현하고 내용을 제시하는데 
정작 이것을 대하는 입장에서 
그 표현으로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서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단 조금 더 쉬기로 한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232#1436
sfed--종경록51-75_K1499_T2016.txt  ☞제55권
sfd8--불교단상_2562_11.txt ☞◆vutd1436

θθ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hristina-Robertson-portrait-of-grand-duchess-maria-nikolaevna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tarr_080117-1521_Begonia_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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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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