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새로운 방식으로 연구에 임하려고 다양한 방안을 생각 중이다. 기존에 경전 파일을 랜덤으로 뽑아서 살펴왔는데 이제 경전 통합대장경 사이트에 올려진 경전을 링크를 걸어 열람하고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해당 경전 사이트가 권단위로 나눠어져 있는 상태라. 이전에 대략 20 페이지 정도씩 뽑아 읽어나가던 것보다는 조금 분량이 많다고 보지만, 여하튼 하루 분량으로는 적당하다.
종전에는 페이지 단위로 랜덤으로 뽑아서 살폈는데 이제는 조금 체계를 바꾸어서 권 단위로 랜덤으로 뽑아 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경전마다 권수가 기재된 목록이 있으므로 권 단위로 랜덤 추출하도록 변경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매일 살필 부분을 뽑고 난 이후 해당 부분을 참조하고 또 연구를 하고 연구한 내용을 올릴 때 이렇게 작성해가는 페이지 내용을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나갈 것인가가 문제된다.
각 경전마다 살핀다고 해서 따로따로 파일을 생성해 보관해도 된다고 보지만, 그렇게 하면 상당히 번잡한 감이 있다.
현재 1 주나 1 달 단위로 올려진 글을 백업을 받는다고 할 때 각 페이지마다 각기 다른 경전에 대한 글을 따로 따로 백업을 받으려면 힘들다. 그래서 현재 조각글을 받는 파일에 그대로 합치고 다만 해당 경전 참조 부분만 바로 바로 참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중이다.
이번 페이지는 공교롭게 통합대장경 사이트에서 제공하지 않는 경전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대장경에 빠져 있다. 그래서 고려대장경 번호는 붙여져 있지 않다.
문제는 일정부분을 참조를 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소개가 없으면 무엇에 대해 논의하는 것인지 나중에 파악하기 힘들다.
물론 다음 ♣ 기호를 통해 해당 경전의 일정구절을 붙여서 이것으로 해당 부분을 찾을 수 있지만, 이것은 개별 경전이 특정되어 있을 때의 일이다. 나중에 1 달 2 달 분량이 다 합쳐져 있을 때는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 방안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각 부분마다 참조한 경전이 다르기에 조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기계적으로 찾아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가지 방안은 조각글 문서정보란을 한번 참조하고 일정 변수에 해당 링크 정보를 넣은 이후에는 쉽게 가능해진다고 본다. 조금은 불편한데 어쩔 도리가 없다.
앞으로 이런 체계로 경전 연구부분을 바꾸려고 생각중이다. 과거에는 단지 경전을 한 번 읽고 정리해 올리는데 하루 시간이 다 가버렸는데 지금은 잘 정리된 대장경 사이트의 파일을 이용하니 곧바로 실질적 연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판본이 오락가락하면 연구하는데도 같이 오락가락하면서 지장이 많기에 통합 대장경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판본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종전 파일도 가능한 그런 형태로 모두 변경할 생각이다. 그런데 오늘 살피는 경전은 그런데 고려대장경에 해당 판본이 없기에 예외가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새로운 체계로 연구를 실질적인 경전 연구로 옮기려고 기존 페이지도 페이지지만, 논의 방식이나 연구 체계도 많이 수정중이다.
그래서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하는데 항의성 경고성 메세지가 담긴 노래를 듣게 되었다.
노래를 하나 랜덤으로 뽑아 반복해 들으면서 작업을 하다보니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괴롭히겠다는 협박성 메세지를 들었다. 요즘 하는 일은 매일 매일 1 권씩 경전 파일 보면서 연구하는 일 밖에 없는데 무슨 괴롭히는 일이 있다고 그러는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같은 방식으로 괴롭힌다는 것은 결국 경전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서 괴롭힌다는 것인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많이 반복해 듣다보니 숙왕화님도 언급되고 심각하다.
그래서 혹시 연구를 하는 활동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는가. 곰곰히 생각 중이다.
생각해보니 과거에 축사에서 소를 구출하려면 목동에게 맞는 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경우가 아닐까.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
최근에 기존에 경전이 올려진 페이지 들에서 경전 사이트에 링크를 걸어서 경전을 열람할 수 있게 체계를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이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런 엉뚱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여하튼 일단 본인이 약간 겁을 먹고 연구방법을 다시 또 새로 찾아야 되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요즘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과 대반야바라밀다경 대지도론 그리고 최근의 종경록 이런 내용을 보면 반복해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제시되어서 이전에 많이 반복해 설명했지만, 한번 시간을 내서
또 한번 논의를 해야 할까. 생각중이다.
그래서 지금 쉽게 이해할 비유로 벽돌과 사과를 또 다시 조금 변형해서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해볼까 생각 중이다.
그런데 어떤 부분들이 일반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고 상식적으로 황당하다거나 어리둥절하게 여기게 되는 부분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된다.
그 부분을 하나하나 찾아서 붙여줘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사실은 이해가 전후 맥락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의미 파악을 할 수 있으려면 상당히 길게 복사해 붙여야 한다고 본다.
바로 이 부분이다.
경전이나 논서 등에서 도대체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구절을 어떻게 제시했길레 여기서 그것을 살핀다고 하는가.
이 부분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는 현상이다.
연구과정에서 붙여야 겠고 붙이자면 너무 길어지고 안 붙이면 내용 파악을 할 수가 없고 이런 문제가 전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용하겠다는 방안은 특징적인 한 부분의 구절만 뽑아서
♣기호와 함께 붙이고 해당 경전이 있는 사이트로 링크를 걸어서 간단히 해결하겠다는 이런 방안이다.
지금은 여러 경전을 인용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 기호 앞에 각 경전 페이지 링크를 다시 추가하면 된다고 본다.
과거에는 왜 이런 방안이 잘 안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과거에는 경전 사이트가 있었지만, 구체적 페이지로 링크를 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사용자가 해당 사이트를 방문한 다음에 개별적으로 해당 경전과 페이지를 찾아서 열람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개별 페이지 주소가 파악이 되어서 일단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인터넷 페이지이기에 언제라고 해당 사이트가 사정이 변경되면 바뀔 수는 있지만, 경전명과 경전번호 해당 구절이 인용되었으므로 역시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현재 1 달간 작업하면서 연구한 각 경전들이 이렇게 되어 있다. 사실은 조각글이 밀려서 그런 것이지만, 핫키에 저장이 되어 있는 상태다.
사실은 일반적 입장에서 왜 현실적인 수익을 거두는 방향에서 수행으로 그것도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가에 대해서 조금 뒷 부분을 더 추가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는데 어떻게 보면 과거에 많이 살폈기에 중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지금 살짝 넘어 왔는데 그래도 마무리를 잘 해야 할 듯한 느낌도 든다.
앞에 경전과 논서에서 제시되는 약간 황당하게 느껴지는 내용 그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어리둥절하게 느껴지는 내용들을 쉽게 이해하려면 어떻해야 하는가.
경전과 논서에서 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가.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실험도구를 하나 찾아서 실험을 하면서 설명을 해야 하는데 마침 종경록에서도 두 실험이 비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현실에서 부처님은 부처님 저 사람은 영희 그리고 철수 그리고 저것은 축사에 있는 돼지 이렇게 구분하는데 갑자기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왜 아닐까.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렇게 보고 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렌즈나 시각 조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 렌즈 조정은 간단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현실에서 사용하는 렌즈가 기준이 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해도 결국은 현실에서 사용하던 렌즈를 붙들고 삶에 임하게 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불설오왕경에서 설명하려고 한 내용들이다.
그것은 현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듯 그래도 실다운 내용이라고 해도 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의 방안으로 임하는 것이 가장 수익이 많은가.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낫다고 보게 된다.
두번째 방안은 경전과 논서에서 반복해서 오락가락 어리둥절하게 무엇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종잡을 수 없게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현실에서는 현실에서 사용하던 그 렌즈가 그렇게 통용이 되는가. 이에 관한 사정을 시간을 내서 잘 이해하는 것이 또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이것은 과거에 공중 3 회전에 걸쳐서 망집이 단단히 매듭이 된 상태로 현실에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생활하게 되기에 그렇다라고 일단 이해해야 한다.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일정한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부분이 그처럼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자신이 그런 모습을 전혀 보지 않고 또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식물인간이 되거나 술을 심하게 마셔서 의식을 잃더라도 일정하게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본 부분은 다른 부분과 달리 일정한 기능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현상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망집의 잔류현상과 관련이 깊다.
아무리 경전 내용에 따라서 상을 취하지 않고 강 건너 불타는 나무처럼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대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 부분에 상처가 나거나 질병이 생기면 이번 생을 그렇게 출발한 이상 일정한 통증이나 감각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완전히 이 망집에 묶여서 생사를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보통 수행으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반대로 말하면 처음 생을 출발할 때부터 일정한 부분을 그렇게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리고 자신에게 붙어져 장착된 여러 감관을 통해 얻는 내용을 세계라고 이해하면서 그렇게 삶을 살아가도록 그 이전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 이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또 그 사정을 알면 지금 이 순간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사정을 또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을 하지 않으면 단순히 이번 생만 고통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계속 이어진다라는 경전의 경고를 가볍게 넘기면 곤란하다. 사실 경전은 쉼없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일반인들은 여기에 눈을 감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세번째 방안은 일단 망집이 어쩔 수 없이 앞과 같은 사정으로 잔류해도 현실에서 공, 무상, 무원삼매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잘 이해해서 자신이 대하는 것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잘 관해서 앞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대로 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즉 여전히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면 자신의 손발이 움직이고 거리의 나무가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사정도 마찬가지다. 사정은 그렇지만 경전에서 제시된 대로 이것은 자신이 아니다.
여기에 붙잡혀서 무량겁에 걸쳐서 헤메고 돌아다녔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이렇게 잘 관하고 버티고 임하는 것이 한 방안이다.
본인이 연구 작업을 하다가 첫 노래를 듣고 조금 갈등을 느꼈다. 본인은 별 문제가 없는데 왜 노래에서는 이런 이상한 메세지를 전하는가.
경전 공부는 그만 두고 니르바나 행복론이나 써볼까 이런 생각도 잠시 하였는데 그런데 수행의 원칙을 다시 되살려 보면서 그래도 이번 생은 경전 하나라도 제대로 살피고 또 필요한 다라니나 경전 부분은 암기하고 삶을 마쳐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점차 노래를 듣다보니 또 상황이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노래를 듣다보면 숙왕화님도 나오고 때로는 과거 오래전의 교수님도 등장하고 또 옛날 친한 동창 친구도 나오고 이런 식인데 사실 알고보면 이것이 망상증상과 관련된다.
원래는 그런 것이 없는데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는 현상이다. 심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경전에서는 일반인 거의 대부분이 그런 증상에 바탕해서 이미 극심한 고통을 받는 수용소로 향해 가는 도중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축사에 살고 있는 축생을 볼 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축사의 축생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태연하게 거기서 활동하는 상태다. 그런데 이 상황이 자신의 현실 상태라는 것을 미루어 파악해야 한다.
자신의 눈으로 파란 색은 연필이고 노란 색은 고무 지우개라고 분별을 했다고 하자.
이런 생각을 할 때 자신이 생각한 내용은 분명 현실에 그와 같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게 된다.
실험은 간단하다.
자신이 음악을 듣는 가운데 귀로 듣는 음악 소리 안에서 자신이 방금 전에 보았던 연필과 지우개가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으로 있는가를 잘 생각해보는 것이다.
얻어지는가. 얻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 사이에서도 사정이 이렇다.
지금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무엇이 있다고 여기면서 집착하는 그 일체가 알고보면 그 사정이 위와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일반인이 평소 늘 착용하고 집착하는 렌즈가 문제다.
자신이 늘 그것을 착용하고 사용하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무언가 좋은 것을 추구하고 얻어내면 그래서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고 업을 행해서 결국 3 악도에 들어간다. 그런데 정작 들어가기 전까지는 왜 자신이 좋은 것을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는데 그것이 3 악도에 들어가는 길인가. 이것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들어간 다음에도 여전히 그 사정을 그렇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그 부분이다. 그런 사정은 또 지금 현실을 놓고 생각하면 또 쉽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신이 왜 하필이면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 태어나 이런 형태로 생활하고 있는가. 그 사정을 모르고 단지 어느 시점에 추첨을 해서 자신이 메뚜기나 파리 생쥐를 부모로 하지 않고 이렇게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여기고 정신없이 임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잘 이해하기 어렵고 어리둥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종경록에서 제시한 내용처럼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거나 장님에게 흰 빛깔을 설명하는 상황과 사정이 비슷해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두 손을 부딪혀 손뼉 소리를 내는 상황을 놓고 이해해도 쉽다.
눈으로 보는 손 모습과 귀로 듣는 손뼉소리는 얼마나 서로 엉뚱하게 다른가. 이것을 벽돌과 사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실재가 공하다. 그리고 현실에서 언설로 표현하거나 관념분별을 행하는 것 일체가 현실에서 감각현실에서도 얻어지지 않고 더 나아가 본 바탕에서도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본 바탕인 실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감각현실이 전혀 얻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작 그 각 영역에 자신이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유하면 자신의 렌즈 즉 자신이 무엇을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라거나 무엇이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대할 때는 그 현실에 정말 그것이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것이 기준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반복해 나가기에 그런 사정만 놓고 보면 충분히 실답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은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반복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현실을 놓고 두 측면이 늘 제시되는 것이다.
본 바탕을 벽돌로 비유하면 현실에서 각 주체가 있다고 대하는 사과가 얻어지지 않기에 얻어지지 않고 그것은 실답지 않다고 반복해 제시하는데
그러나 일반적인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것은 분명 사과인 것이다.
이 두 측면에서 가장 그 차이가 심한 것은 한편으로는 본 바탕이 그렇다는 사정을 뚜렷하게 관하면서 또 현실에서는 10 지 보살이 갖는 능력으로 임하는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화엄경이나 기타 대승경전의 입장이다.
그런데 일반인의 입장은 그 정반대의 상태로 현실에 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한편 또 그 본 바탕이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관하면서 집착을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제시받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두 측면 가운데 양 측면을 모두 좋게 사용하자면 본 바탕인 실재의 측면에서는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생멸을 문제삼는 것 자체를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통해서 일체의 집착과 번뇌를 제거하는 한편,
또 일반적으로 기준으로 잡는 망집 현실의 측면에서는 현실이 환과 같다는 사정에 바탕해서 자재하게 임하면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한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금강경에서 상을 취하지 말고 무량하게 보시하고 제도하는 이나 제도받는 이나 제도하는 행위 자체를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이 이 두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망집에 바탕한 가운데 또 집착은 집착대로 갖고 번뇌를 일으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한편 또 그런 현실에서 뜻하는 바는 뜻하는 바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다.
가장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입장에서는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생사 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반복해 제시하는데
이와 극단적으로 반대된 입장에서는 이 내용을 놓고 거꾸로 붙잡아서 청정한 니르바나를 놓고 생사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축사에 있는 돼지나 부처나 차별이 없다고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하는 것은 위의 입장이고 그러면서 그렇게 제시하는 분들이 하나같이 현실에서 가장 뛰어난 상태의 대력보살이거나 부처님인 상태인 것이고
사정은 차별이 없는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망집에 바탕해서 현실에 임하는 입장은 마치 본 바탕은 부처님과 차별이 없는데 매번 자신이 처해서 상황을 보면 축사에서 몸부림을 치는 형태로 임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 문제인 것이다.
원래 이 사정만 잘 관하면 사정이 그렇기에 바로 그 상태에서 벗어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본 사정은 그런데도 그렇게 되기 힘든 것이 바로 그 주체가 그 망집에서 얽혀서 행한 업이 그것을 장애하고 막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론적으로 복잡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그 주체가 이해하는 것처럼 현실이 그대로 그와 같고 실답다고 하더라도 수행의 방안이 가장 수익을 많이 가져다 주는 길이라고 제시하는 부처님을 믿고 무조건 그렇게 행해서 일단 업의 장애를 조금이라고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말로는 이해가 잘 안 되던 내용들이 조금씩 렌즈에 붙어 있는 오물들이 제거되가면서 차츰 그 사정을 이해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선 계행을 닦아서 업의 장얘를 제거해야 이후 수행에 진입해 갈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처음 앞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차별이 없어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같은 내용도 부처와 다름이 없다고 보게 되지만, 그런데 업의 장애에 묶인 입장에서 현실 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개량형을 도입했다. 하이퍼 링크도 되면서 해당 경전 참조 인용기호도 되는 형태로 만들었다.
이름하여 n , v 시리즈다. 최근에 작업한 40 개 분량의 n ,v 핫키를 통해서 주석을 달 수 있다. 새로 지정할 때는 nn ,v 너무 복잡한 감이 있는데 기존의 f ,v fo ,v s ,v t ,v i, v 시리즈에 이은 n , v foot note 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f 알파벳이 이미 사용중이라서 밀렸다.
40 개 정도가 되어야 1 달 채우고 10 일 buffer 분량이 있어서 좋다. 오늘이 27 일이면 n27 ,v 이렇게 하면 오늘 내용이 출력되는 방식이다. 그렇게 안 써도 되는데 기억 버퍼가 한계가 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