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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12-05_현양성교론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12-05_현양성교론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12. 5. 12:55



®

K0571
T1602
현양성교론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현양성교론_K0571_T1602 핵심요약





mus0fl--Volo - T'es Belle.lrc


연구체계가 prince 님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새로 정비가 되었다. 
경전들도 각 품과 권수별로 대략 25000 부분에서 
앞으로 랜덤추출하게 되었다. 
지금이 12 월달인데 노래를 뽑을 때마다 경전랜덤 추출도 
이뤄지기에 예약글은 불기 2563 년 3 월달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뽑을 때 한번 살피고 그날 되면 또 살피고 이렇게 하면 
공부로 치면 예습을 한번 하는 셈인데 사실은 복습이 더 중요하다. 
대략 1 주일전에 뽑아 살핀 중아함경 경번호를 가끔 확인해보는 것은
아직 치매 상태가 아닌가를 점검하는 의미가 있다. 

당시 중아함경에서 
자신이 매 순간 무슨 활동을 어떻게 하는가를 스스로 잘 자각하고 임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했는데
이와 비슷한 내용을 며칠전 유가사지론을 살필 때도 또 비슷하게 살피게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생활할 때 자신이 매순간 무엇을 지금 하고 있는지를 자각하려 노력하면서
무언가 수해을 해나간다는 것이 도대체 뭐 그리 중요한가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이 잘 안 되면 정신없는 가운데 엉뚱한 것을 붙잡고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되어서
이것이 삶에 문제가 되기 쉽다. 


나중에는 중아함경을 살필 때 제시했던 
삶의 감각상각비도 살면서 제대로 충당하지 못하고
삶을 마이너스 상태로 마치면 
그 상태에서 아무리 난 참 바보처럼 살았다고 반복해도 회복이 힘들다. 

오늘 살피는 현양성교론은 유가사지론에 대해 그 핵심을 추려 제시하는
보충 해설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가사지론은 실존인물인지 오락가락하는 미륵보살님이 설한 내용을 
무착보살님이 받아 제시하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겠는가. 혹시 무착보살님이 자신의 주장을 
미륵보살님의 명성을 이용해서 발표한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추리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는 입장은 최소한 그런 입장이 아니다. 
그래서 현양성교론은 무착보살님의 저술이고 
아무리 무착보살님이 받아 적어 제시한 것이라고 해도 
유가사지론은 미륵보살님의 저술인 것이다. 
그런 부분을 놓고 세상을 속이면서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간 내용은 진실로 믿어달라고 하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대승 경전의 시작 부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시작부분은 믿거나 말거나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 채워 놓고 
그 이하부분은 세상에 본 정체나 진실에 대해서 제시하겠다. 
이런 입장이 아닌데 후대 우물안 개구리 형태로 망집에 바탕해서 
문헌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자꾸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보인다. 
이는 서양의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처음 낯선 불교 문헌을 대한 학자들이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지만, 
오늘날 불교 개설서 대부분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부재의 증명이란 어려운 논리 문제에 들어가게 된다. 

현재 오늘 내가 생존하고 여러 활동을 했는데 
그러나 신문이나 방송기록 어디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나의 오늘 활동은 전혀 없었던 일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내가 정려 수행에 들어가서 혼자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생각을 했다면 그 내용도 그렇다고 해야 하는가. 등등이 
모두 문제로 제기된다. 
과거 현장에 부재했던 연구원 입장에서 
자신이 직접 보지도 못한 어떤 내용에 대해 
추리를 하면서 내용을 제시하고자 할 때는 
불확실한 과거를 놓고 이를 살피기 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의 눈 앞에 가장 명료하다고 보는 내용들을 놓고 
먼저 검토를 해야 한다. 

현양성교론을 보면 먼저 
마음에 관해 심. 의. 식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정신관련 내용을 제시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우선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서도 잘 파악이 안 된다는 입장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현양성교론에서 제시하는 이들 내용이 
어떤 과거시점에만 그렇게 있었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무량겁 전도 사정이 그렇고 무량겁 후도 사정이 비슷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각 주체의 사정이 바로 그렇다고 제시하는 성격의 내용이다. 

그러니 그 문제도 지금 이 순간을 놓고 먼저 확인해야 한다. 
물론 마음이란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데 
어떻게 이것을 그렇게 여러 형태로 있다고 제시하게 되는가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을 놓고 검토하고 확인할 내용이지, 
과거에 미륵보살님이 그렇게 말했는가 아닌가에 따라 
의존하게 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도 그런 입장에서 그런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뗏목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여기서 그렇게 각 마음을 시설하게 되는 그 사정과 함께 
현양성교론에서 제시하듯 수많은 내용들을 시설해 나열하게 되는 그 사정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고 보지만, 
이들 내용의 대강은 이미 과거에 자세히 살핀 바 있다. 

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런 것을 시설해 제시하는가. 
그런 한편 정말 없어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과 
이것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이들 내용을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시설 방편이
논서의 이해에 상당히 많은 혼동을 일으키는 문제가 된다. 

이전에 구사론을 살필 때 
과연 마음에서 일으키는 탐욕과 분노 이런 것이 
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업을 일으키는 요소라고 볼 것인가 
이런 문제부터 논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이가 무엇을 a 라고 본다면 
그 a 가 거기에 정말 있기에 그렇게 제시한다는 입장과 
사정이 그렇지 않고 다만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최종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편 시설로 일단 그렇게 
언어표현으로 시설해 제시하게 된다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지금 유가사지론이나 현양성교론은 자체적으로 
현실에서 얻는 일체의 내용이 한 주체의 마음 안 내용이고 
그리고 이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란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전제로 이들 각 내용을 시설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사정부터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이들 논서에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기에 
이들 내용은 실답게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제시하는 것 아닌가 
이런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나중에 대승기신론과 같은 논서에서 
일체는 마음 하나다. 1 심이다 이렇게 제시하면 
또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세상에 1 심만 있다니, 그러면 부처님이 깨달으면 
나도 깨달은 것으로 해도 되겠다거나 
세상에 하나 있는 그것이 아 물질이 아니고 마음이라는 것이구나. 
이런 식으로 혼동을 일으키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일단 각 경전과 논서에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그 어떤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일정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해 시설하고 
논의를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그런 목표 상태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은 최소한 이해하고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혼동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곤란해진다. 


처음 현실생활에서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과정은 
일반인들도 쉽게 매 순간 행하는 내용인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양성교론에서도 이렇게 제시한다. 

♣0571-001♧또한 “눈과 빛깔․형태를 연(緣)으로 삼아서 능히 안식을 일으킨다. 


>>>
또한 “눈과 빛깔․형태를 연(緣)으로 삼아서 능히 안식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이 모여서 화합함으로써 능히 촉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촉은 수(受)의 연(緣)이 된다”고 말한다.
>>>

어차피 마음을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가운데 
일반인이 현양성교론에서 제시되는 아뢰야식이나 말나식 이런 마음의 존재를 
살펴 나가려면 
사실은 가장 기초적으로 처음 눈을 뜰 때 무언가를 보게 되는 과정 하나를 
놓고서부터 그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제시하는 입장에서 
눈으로 보게 되는 그런 색은 사실은 그런 모습을 얻게 하는 
외부대상이 아니라고 제시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화합해서 촉이 있게 된다.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그래서 처음에 제시한 방편 시설의 의미와 
그렇게 방편 시설을 해서 여러가지 사정을 현실에서 살펴나가는 
취지를 먼저 대략적으로라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무언가를 대해서 좋다고 보고 이에 집착해서 
탐욕을 일으킨 상태가 되었다. 
탐욕이 없던 상태에서 이런 탐욕을 처음 일으킨 이 내용을 놓고 
업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후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게 될 때
이 뒷 부분만 업이라고 하고 탐욕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하는가.
등도 상당히 예민한 문제로 대하게 된다. 
이것은 물론 이런 내용으로 인해 
그 주체가 일단 3 악도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업까지 행하면 지옥행이 확정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이것을 붙들고 심각하게 논의하게 되는 사정을 볼 수 있다. 

어떤 주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다면 
그렇게 된 그 전후 배경에 위와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내용을 자신이 무엇이라고 분별하고 표현하는 것은 
일단 그런 언어표현으로 가리키는 그 자체와는 
일단 별개라고 잘 생각해야 한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그것을 이렇게 묶어서 살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달리 묶어서 살펴야 하는가.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뗏목의 비유가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런 뗏목을 의존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오고 벗어나오게 하는 것이 본 취지인데 
자칫 뗏목에 집착하면 뗏목만 붙들고 
정작 생사고통의 강을 건너 벗어나는 것은 
오히려 실패할 수도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일단 왜 생사고통을 겪는가에 대해 살피자면 
그런 부분도 하나하나 살펴야 하기에 
또 살피게되지만, 여하튼 그 논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취지와 목표는 미리 잘 파악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펴야 한다. 

마음 현상과 관련된 논의는 
종전에 한참 조각글에 이어서 살핀 내용이 있기에 
기본적으로 그 부분에 대한 링크로 대신하기로 한다. 

오래되어서 해당 핫키를 잃어버린 상태인데 
일단 수작업으로라도 붙이고 쉬기로 한다. 


http://buddhism007.tistory.com/4053
dict-list--editing_text.TXT
출처: http://buddhism007.tistory.com/entry/마음-현상의-이해#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


현재 경전을 종전에 page 단위로 랜덤 추출하던 방식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이나 대방광불화엄경 등등 
경전은 하나인데 그 분량이 상당히 방대한 경전과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경전간의 형평을 기하기 위해서 
도입했던 방식이다. 

그런데 이번에 살필 경전을 권수나 품수를 통해 뽑는 방식은 
현재 경전을 불교문화기록유산 사이트의 페이지에 링크를 걸어 
열람하는 상태이고 여기서 권수별로 나눠 페이지를 제공하기에 
여기에 맞추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현재 새로 도입한 인용방식체계형태로 
목록이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다음 형태다. 

♣0966-016♧성실론 제16권

♣0968-001♧

♣0968-001♧해탈도론(解脫道論) 제1권

♣0968-001♧1. 인연품(因緣品)

♣0968-001♧2. 분별계품(分別戒品)

♣0968-002♧해탈도론 제2권

♣0968-002♧3. 두타품(頭陀品)

♣0968-002♧4. 분별정품(分別定品)

♣0968-002♧5. 멱선지식품(覓善知識品)

♣0968-003♧해탈도론 제3권
...

이렇게 각 경전의 권수와 품명이 기록된 목록에서 
랜덤으로 추출하는 방식인데 
일단 해당 방식을 지원하는 문서작성용 핫키들을 
좀 더 테스트해서 안정적이 되어야 
prince 님이 사이트에 올려 놓게 되리라 본다. 
지금은 위와 같은 상태의 목록은 일반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원래 쉴 때마다 노래나 사진 자료들을 랜덤으로 뽑을 때
경전도 랜덤으로 뽑혀 나오기에 
예약글이 대단히 많이 올려져 있는데 
사실 자신의 수명이 그렇게 긴 것은 아니기에 
그렇게 뽑아 놓고 해당 내용을 살피는 것을 뒤로 미루고 
더 나아가 수행의 실천도 미루게 되면 
곤란해진다. 

그런데 여하튼 요즘은 조각글 페이지 체계 변경 이후 
노래만 뽑아 내고 나머지는 다 제외시키기에 
조금 예약글이 덜 올라가고 있는 상태다. 
그간 너무 많은 예약글들이 올려져서 심적으로 따라가기 힘들었는데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게 된 점은 다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점이다. 
지금 링크를 클릭해도 아마 대부분 페이지가 열리지 않으리라 본다. 
그것은 경전 연구 체계를 바꾸었기에 
각 페이지를 놓고 일단 정비중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링크도 복잡하게 다 적었는데 
위 방식으로 대부분 해결되기에 
그것도 다시 또 삭제 중이다. 
자꾸 이렇게 저렇게 바뀌기에 조금 번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여하튼 그런 작업 중이고 
페이지를 살피는 가운데 
단순 편집에 치중하기보다는 
내용도 살피고 수정할 일이 있으면 살피면서 
정리 수정 중이므로 일단 당장은 링크 연결이 안 되는 상태임을 
참고해주어야 한다. 



현재 과거 2,3 년 분량을 놓고 
역순으로 나가면서 하나하나 살피고 있다. 

그 가운데 자주 반복하고 중복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놓고 내용을 보충하고 수정해서
링크로 거는 것이 낫다. 

그리고 예약글은 학습으로 치면 선행학습 내지는 예습의 의미를 갖는다면 
이는 과거에 한번 살폈던 부분을 다시 복습해 정리하거나 재검토해 보충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천천히 하나하나 살펴나가는 것이 중요하고 
급하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보지 않게 된다. 

지금 중간 작업중에 이와 관련된 부분을 하나 임시로 
올려 놓기로 한다. 
이것도 지금 중간쯤 살피는 중이다. 



■■■

●자신의정체에 대해 확인하기
http://buddhism007.tistory.com/5185#003
sfed--불설노여인경_K0216_T0559.txt
☞●자신의정체에 대해 확인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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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ywm1585

◈Lab value 불기2562/12/05/수/13:57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ccordeon De L'amour - Tango El Poeta.lrc

사진 2015_1025_131852_nikon.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ul-gauguin-where-are-you-going-1892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strophytum_01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_Lee_Shau_Kee_Humanities_Buildings_1



♡보문사(예천)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Daum 지도

♥ 잡담 ♥수많은 낯뜨거운 논서들 

대장경 연구를 하다보면 
논서를 많이 대하게 되는데
요즘 계속해서 논서가 뽑혀서 이것을 다 한번씩 읽어보느라고 
정신이 어지럽다. 
품류족론 순정론, 구사론 유가사지론 등인데 

문제는 이들 각 논서의 기본 성격이 서로를 상생하는 듯도 하면서 
서로 상극하는 성격을 갖고 내용이 제시된다는 점이 있다.

그래서 한 논서를 살피기 전에 
불교개설서를 통해서라도 대략적으로 각 불교논서의 성격을 미리 대강 파악한 가운데
그런 입장에서 균형감각을 갖고 대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책상 위에 사과 하나를 올려 놓고 
뻔히 그 모습을 같이 바라보는 가운데 
이 사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이 문제를 살피는 과정에서부터 이들 각 논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차이가 난다. 
어떤 논사는 아침에는 이런 입장 점심에는 또 이런 입장 
그리고 저녁에는 또 다른 입장을 취해서 오락가락하는 형태도 보이는데 
그것은 그 논사를 탓할 일이 결코 아니다. 

논사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입장을 놓고 
한 평생을 되돌아보면 자신도 마찬가지고 
어느 학자도 사정이 비슷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이 한 때 소논문을 일정 기한까지 제출해줄 것을 요청받고 
논문을 작성한 적도 있는데 
당시 매일 저녁때쯤 원고를 다 쓰고 이제는 되었다고 여기고 잠을 들고 
다음날 제출하기전 한번 검토해보자고
다시 보면 어제 본 내용이 여기저기 잘못된 것을 보고 또 수정하게 됨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거의 6 개월 이상을 매일 매일 그런 식으로 보냈던 것이다. 
제출기한이 그 작업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계속 수정작업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음날 보면 어제까지 작성한 내용은 표현은 표현대로 이상할 뿐 아니라, 
내용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피면 조금 부족하고 엉성하다고 볼 뿐 아니라 
때로는 핵심내용도 잘못 보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하겠는가. 수정을 할 도리 밖에는 없다. 

그런데 제출기한이 되어서 제출을 마친다해도 
이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 이후 이런 입장 저런 입장을 놓고 또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해보면 
또 부족한 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또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과거에 작성했던 논문을 놓고 
다시 자신이 자체적으로 이를 비판하는 논문을 또 발표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은 무언가를 놓고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현상이 대단히 정상적인 일인데 
그러나 나중에 문헌학자들이 볼 때는
이는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이라고 이를 바라보기 쉽다. 

왜 한 사람이 a 라고 주장하다가
또 이와는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다른 b 를 주장하는 내용을 썼을까. 
도무지 그럴 리는 없다고 본다면 그러면 이들은 혹시 동명이인의 저술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추리를 하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어느 연구원을 놓고 사정을 살펴도 
연구 이전에 일반적 입장에서 생각해오던 내용과 
연구 첫날 생각하는 가설적 입장이나
연구 중간에 생각하게 되는 입장과
연구 말미에 생각하게 되는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이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위에 나열한 논서가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 대표적인 학파나 종파의 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논서를 쓴 논사듫의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위에 중관반야학파의 대표라고 할 용수보살님의 논서는 빠져 있다고 보는데 
용수보살님의 경우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세상에 어떤 수행자가 첫날부터 예를 들어
대반야바라밀다경이나 해심밀경 등을 붙잡고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이가 있겠는가.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친 보살님이 처음에는 경량부 입장에 있다가
나중에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자세히 기술하면서
또 유여사님 등을 대신 동원해서 설일체유부에 대한 비판을 경량부에 치중해서 가했다고도 하고
나중에는 사적으로 형제 관계인 무착보살님의 영향을 받아
유식학파로 전향해서 유식삼십송과 같은 논서를 저출했다고 하는데 
이를 놓고 나중에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문헌표현만 놓고 살피는 입장에서는 엉뚱하게 
이 각기 다른 입장의 논서를 한 사람이 다 저술했다고 도저히 보기 힘들고
그래서 이들 각 논서의 저자로 제시되는 세친은 한 사람이 아니고 
동명이인의 다수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살피려면 
이전에 제시했던 첫 문제를 또 살펴야 한다. 

100 m 앞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영희가 있다. 
100 m 떨어진 위치에서 보니 콩알처럼 보인다. 
그런데 30 초 지나서 자신앞에 선 영희를 보니 킹콩 내지는 퀸콩 크기로 보인다. 
그리고 그 내심 속의 생각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이 가운데 누가 정말 진짜 영희고 
영희의 대표라고 할 것인가. 

이것부터 확정하고 영희 1인설 2 인설 다수설 이런 식으로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그것이지만, 여하튼 
한 논사가 이미 오래전에 저술한 논문은
이미 세상에 널리 발표되고 당대 학계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태라 
세친 논사의 경우 말년에 70 대가 되어  
유식학파의 내용을 이해하고 새로 받아들여서 
유식삼십송과 같은 저술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자신이 발표한 논서를 수거해 폐기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은 그것대로 불교 전반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공부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사정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어떤 입장을 기준으로 붙들고 
다른 논서를 살피고 다른 논서의 문제점을 살피다 보면 
조금 서로 낯이 뜨거워질 수도 있다. 


요즘 본인이 12 월 년말이 되어서 
각종 모임 연락이 온다거나 
각 동문 모임이나 sns 활동도 하게 되는데 
각 입장이 서로 대단히 다르기에 
무언가를 놓고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의견을 서로 제기하게도 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서로 입장이 달라서 시시비비의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곳 저곳에서 강퇴를 당한다거나
상대의 탈퇴 권유를 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데 알고보면 상대 입장이 더 옳다고 보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사정이 그렇다고 친목을 다지는 그런 모임에서 
오로지 묵언 수행만이 답이겠는가. 

논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 더 쉽게 
또는 핵심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 
부처님 가르침 내용을 정리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또 자신의 방식으로 조금 새롭게 접근해 살피기도 하고 
사정이 다양한데 
이들 각 논사들의 활동이 사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고 수행하는 바탕 안에서
그런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연이어 뽑혀 나오는 각 논서를 살폈는데 
일단 유구무언의 상태가 되게 된다. 
내용이 특별히 난해해서라기 보다는 
이 가운데 어떤 입장만 편중해 살피기가 조금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 과정 중에는 일단 그런 내용들이 있으면
일단 조금 더 자세히 앞으로 살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게 된다. 

물론 그 논서를 쓰신 분이 단멸관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었다거나 
그 설을 지금도 따르는 입장이 전무하다거나 하면 모른데 
그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친 용수보살님의 과거 버전 저술을 붙잡고 
시비를 일으켜도 해당 분이 일단 찾아오기 쉽다. 
그래서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겸손하게 
그리고 자만하지 않는 가운데 
여하튼 어떤 분은 이 정도로 치밀하고 자세하게 
불교 전반을 다 살펴보았구나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가운데 
자신도 여하튼 그런 각 논점에 대해
최소한 어떤 내용이라도 잘 정리해 얻어내려고
평소 노력할 필요가 있다. 

각 논서를 읽어보면 평이한 부분도 있고 
왜 이런 것까지 일일히 서술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기 쉬운데 
수행을 어떤 자세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핵심 주제를 놓고
관련 내용을 살피려면 
결국 그런 내용들을 하나하나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논서를 죽 읽다가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 논서 내용 가운데 어느 부분이던 뽑아서 제시하게 되면 
대부분 졸거나 당혹스러워할 것 같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누가 그런 것을 물어보기라도 했는가라며  
그런 내용을 소개하는 이를 향해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인 입장에서 초점을 맞추고 
집착하는 주제와 이들 논서에서 이끌고자 하는 목표점과를 
잘 이어 붙여서 수행에 진입하게 하고
그런 상태에서 직접 그런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의식해서 
살펴나가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보게 된다. 

왜 이것을 살펴야 하는가. 
표현도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이고 
내용도 복잡하고 
또 각 입장마다 견해도 달라서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이런 복잡한 내용을 
왜 지금 이 시각에 살펴야 하는가.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런 의문을 던질 때 
자동차 하나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폐차처분하게 되기에
처음 자동차 구입비용을 잘 파악한 다음
매 분기마다 그 비용에 대해 미리 감가상각을 잘 해나가야 
엉뚱한 투자 수익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는 이론 내용부터 잘 제시하고
이런 바탕에서 자신의 삶과 관련해 매 순간 감각상각되는 비용을 
도대체 얼마로 보고 그런 자신이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임해야 하는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먼저 자신의 몸과 생명의 값이 400조원이라고 적어야 하는가. 
40000 조원이라고 적어야 하는가부터 하나하나 검토해가면서 
이런 막대한 가치를 갖는 자신이 
어느 순간 0 이나 마이너스 값을 갖는 상태가 되어 
3 악도에 묶여 있지 않으려면 
결국은 논서에세 제시하는 주제들에 다시 초점을 맞추고 
시간을 내어 살펴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내용을 제시하면 살피겠는가. 
그래도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일단 쉬자.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272#1585 
sfed--현양성교론_K0571_T1602.txt
sfd8--불교단상_2562_09.txt ☞◆vywm1585
불기2562-12-05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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