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여래의 수행처인 보장엄당(寶莊嚴堂)에서 지내고 계셨다.
이곳은 큰 공덕을 닦아 이루신 곳이니,
부처님께서 일체의 법을 성불하기 이전부터 행하신 과보이다.
한량없는 보살 대중을 포용하셨으니,
그들이 강설(講說)하여 펼친 것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이 아주 깊은 이치로서 다 여래께서 신통력으로 호지(護持)하셨으며,
걸림 없는 행과 미묘한 지혜의 문에 들어가 마음으로 기뻐하여 생각[念]과 정진할 뜻[進意]을 얻었다.
분별하는 지혜[分別智]를 갖추어 깔보거나 헐뜯는 사람이 없었으니,
만약 그 공덕을 칭찬하려면 미래의 세상이 다하더라도 끝낼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른 깨달음[正覺]으로 평등한 법을 깨달아 법륜(法輪)을 잘 굴리시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시고,
일체의 법에 대해 자재하시어 중생의 뜻을 아시며,
그 근원을 다하시어 중생을 위해 모든 습기를 잘 끊으셨으나,
부처님의 일을 따라 하지만 마음에 짓는 것이 없으셨다.
큰 비구 6백만 명을 거느리시니,
이들은 다 여래 법왕(法王)의 아들로서 잘 해탈하여 번뇌와 습기를 끊고 깊고 깊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 위의(威儀)를 성취하여 그 행이 단정하고 엄숙하며 충분히 공양을 받아 중생의 복밭[福田]이 될 만하였고,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과 계율을 잘 지녔다.
또 보살마하살 대중이 있었으니,
그 수는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여러 보살들은 한 순간에 능히 한량없고 가없는 불국토를 지나서 일찍이 과거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고는 미묘한 법을 물어 그 가르침을 받았으나 싫증내거나 만족하지 않았고,
항상 한량없는 중생을 부지런히 교화하였으며,
방편을 잘 알아 지혜를 구족하였고,
그 마음이 걸림 없는 해탈에 편안히 머물러 억상(憶想)과 취상(取相)과 희론(戱論)을 없애서 일체지(一切智)에 가까웠으니,
이들은 모두 한 생(生)만 지나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를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전천(電天) 보살ㆍ승쟁(勝諍) 보살ㆍ일장(日藏) 보살ㆍ용건(勇健) 보살ㆍ이악의(離惡意) 보살ㆍ유행(遊行) 보살ㆍ관안(觀眼) 보살ㆍ이암(離闇) 보살이니,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보살 대사(大士)1)의 덕(德)이 다 그러하였다.
그때 세존(世尊)께서 여러 보살들이 행하는 걸림 없는 법문(法門)의 경(經)에 드시니,
이른바 모든 보살 도(道)와 아주 깊은 부처님 법을 장엄하는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는 지혜를 성취하여 자재함을 획득하는 총지교문(摠持敎門)과,
모든 변재를 분별하는 대신통문(大神通門)과,
물러나지 않는 무생법륜(無生法輪)을 굴려 모든 법이 한 모양[一相]과 같음을 통달하여 한 모양의 법[一相法]에 대해 분별을 내지 않고 모든 중생의 근성(根性)에 걸림이 없음을 알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잘 관찰할 수 있어서 일체 모든 마구니 경계를 깨부수고 통달하여 잘 생각함에 들어가는 문[入於通達善思惟門]과,
일체 번뇌의 소견들을 제거하고 걸림 없는 지혜의 훌륭한 권도방편(權道方便)으로 모든 불법(佛法)이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알아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받아 지니는 문[受持諸佛智慧之門]과,
모든 법을 진실한 모양대로 연설하여 모양[相]을 생각하고 모양을 취하여 평등함에 들어가는 문[憶相取相入平等門]이다.
이것을 공덕대로 이루어 깊은 인연에 들어가 부처님 몸을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업(業)으로 장엄하고,
생각하고 정진하여 지니니,
네 가지 진리[四諦]를 나타내 보여 미묘한 지혜를 분별함은 성문(聲聞)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함은 연각(緣覺)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일체지(一切智)를 얻음은 대승(大乘)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에 들어가 자재한 지혜를 얻음은 여래의 모든 공덕을 찬탄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문으로 말씀하여 열어 보이시고 가르쳐 이끌어서 분별해 주셨다.
부처님께서 이 『대집경(大集經)』을 말씀하실 때,
동쪽에서 자연히 커다란 금색 빛이 나타나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비추어 두루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처님의 광명을 제외하고 그 가운데 있던 해와 달 제석[釋]ㆍ범천[梵]ㆍ호세천왕(護世天王)과 모든 용ㆍ귀신ㆍ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伽)에게 있던 모든 광명이 다시 나타나지 못하였으며,
담ㆍ벽 등과 나무나 숲과 크고 작은 산과 목진린타산(目眞隣陀山)ㆍ철위산(鐵圍山)ㆍ대철위산과 국토의 중간까지 그 광명이 훤히 비추었고,
이 세계에 있는 지옥까지 다 그 빛을 받아서 그 가운데 있던 중생들에게 광명이 몸에 닿을 때엔 온갖 고통이 사라지고 미묘한 즐거움을 받았다.
그때 부처님 앞에 대중들이 있던 땅에서 자연히 60억 송이의 깨끗하고 미묘한 연꽃이 피어나니,
좋은 향기가 널리 퍼져나갔고,
갖가지로 장엄된 꽃들의 찬란한 빛깔이 대중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그 꽃들은 각각 억 백천의 꽃잎이 있었는데,
보배 그물로 그 위를 가득히 덮은 꽃의 질감이 마치 하늘의 옷처럼 부드러웠고,
그 꽃을 만지는 사람은 미묘한 쾌락을 느꼈으며,
각각의 꽃에서 나오는 향기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여 그 세계 안에 있는 하늘이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다른 모든 향기는 다 사라져 풍기지 않았고,
모든 천룡(天龍) 팔부(八部)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를 맡는 자는 다 미묘한 기쁨을 얻어 점점 번뇌를 여의었다.
그때 아난존자(阿難尊者)가 이 금빛의 광명과 연꽃들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이 상서로운 감응은 누가 한 것이기에 이런 광명과 연꽃들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진의(無盡意)라고 하는 보살마하살이 이 동쪽에 있는데,
60억의 보살들과 함께 권속에 둘러싸여 이곳으로 오려고 하기 때문에 먼저 상서로운 감응을 나타낸 것이니라.”
오래지 않아 무진의 보살이 곧 신통력으로 대지를 감동(感動)하여 크게 진동시키고 한량없는 광명을 놓으며 갖가지 꽃을 비처럼 뿌리면서,
억 나유타(那由他)의 하늘과 사람들이 백천 가지의 기악(伎樂)을 연주하고 60억 보살 대중과 함께 빙 둘러싸여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곧 부처님 앞에서 허공 가운데 높이가 일곱[七] 다라수(多羅樹) 되는 곳에 머물면서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미묘한 음성을 내니 그 음성이 두루 육천(六千)세계까지 들렸다.
곧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깨끗하여 길이 더러움을 여의셨고
용맹하고 건장함으로 모든 욕심 제거하셨으며
번뇌를 다 없애 버리시어
깨끗하고 미묘한 눈을 얻으셨으며
탐(貪)ㆍ진(瞋)ㆍ치(癡)의 거친 번뇌들을
잘 끊고 토하고 씻어버리셨으며
온갖 것을 남김없이 없애버리신
대자비의 깨달으신 분께 예배합니다.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고
무명(無明)의 그물을 없애버린
10력(力)의 성주왕(聖主王)은
사론(邪論)으로 굴복시킬 수 없네.
외도(外道)와 다른 소견을 가진 자도
모두 다 겁내고 두려워하니
마치 사자왕이 당당하게 걷는 것처럼
아무런 두려움이 없으시네.
바른 깨달음의 청정한 광명으로
더러움 없이 널리 밝게 비추어
하늘과 인간 세간에서
일체의 어둠을 여의고
모든 어둠을 다 제거해버려서
무명의 그물 없어지니,
그 광명 항상 밝고 깨끗하여
해가 운무(雲霧) 속에서 나온 것과 같네.
중생의 생노병사 고통을
그 누구도 구호하는 이 없어
이를 조복하기 위한 까닭에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시며
견고한 자비심을 내시는 분은
오직 등정각이시니,
마치 위대한 의왕(醫王)이
부지런히 뭇 병을 치료함과 같으시네.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은
그 성품에 ‘나[我]’가 없으므로
마치 산골짜기 메아리처럼
뭇 인연 따라 생겨나며
중생은 본래 성품 없으므로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지만
중생을 위한 까닭에
큰 자비심을 내시네.
모든 존재의 깊은 바다에는
무명의 어둠이 너무 깊어서
그 가운데 거칠고 세밀한 생각이 많아
솟아 넘쳐 물결이 이네.
다른 이로부터 법 듣지 않아도
자연히 저 언덕에 이르니
마치 물속의 연꽃 같아서
세간에 다녀도 더럽혀지지 않으리라.
가을에 초목이 시들고
한더위에 시내와 못이 마르니
비지(比智)로써 세간법이 바뀌고 움직여
항상 머물지 않음을 아네.
어리석은 사람이 가까이 하는 것은
슬기로운 이는 꾸짖고 버리니
어리석은 법이 견고하지 않음을 알아
홀로 존재의 폭류를 건너시고
그 얼굴에서 나오는 광명은
우담바라 꽃과 같아서
미묘하고도 청정한 것이
백천 개의 해와 달보다 더하도다.
모든 과거 세상과
현재 중생들의
갖은 찬탄을
여래는 다 받을 만하고
조복하기 어려운 것을 조복하였기에
열뇌(熱惱)를 없애고 시원함을 얻으셨으니
그러므로 제가 오늘
위없는 높은 분께 예배합니다.
세상을 제도하여 복을 더하시는
그 공덕 끝이 없어서
사람 가운데 우왕(牛王)과 같으시니
부처님 복 밭에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그때 무진의 보살이 이렇게 부처님을 찬탄하고는 공중에서 내려와 60억 보살 대중과 함께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서 연화대(蓮花臺) 위에 결가부하고 앉았다.
그때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무진의 보살마하살은 어느 곳에서 왔으며,
그 나라 부처님 명호는 무엇이며,
그 세계의 이름은 무엇이며,
거리는 여기에서 얼마나 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네가 직접 물어보려무나.
무진의는 마땅히 너를 위해 말하여 줄 것이니라.”
사리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경히 따라서 무진의 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께서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부처님의 명호는 무엇이며,
세계의 이름은 무엇이고,
거리는 여기에서 얼마나 됩니까?”
무진의 보살이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온다는 생각이 있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선남자여.
나는 벌써 생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만약 생각으로 알았다면 마땅히 두 가지 모양[相]이 없을 텐데,
무슨 인연으로 어느 곳에서 왔느냐고 묻습니까?
사리불이여,
오고 감이 있는 것이 화합(和合)의 뜻이 되나,
화합의 생각에는 화합도 없고 화합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화합도 없고 화합 아닌 것도 없는 것이 곧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이 행하는 곳입니다.
사리불이여,
가고 옴이 있다면 곧 이것은 업상(業相)이니,
업상에는 조작이 없고 조작이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조작이 없고 조작이 아닌 것도 없는 것이 곧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이 행하는 곳입니다.
사리불이여,
오고 감이 있는 것은 곧 국토상(國土相)이니,
국토상에는 국토도 없고 국토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국토도 없고 국토 아닌 것도 없는 것이 곧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요,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이 행하는 곳입니다.
사리불이여,
오고 감이 있는 것은 반연한 생각[緣想]이니,
반연한 생각에는 연도 없고 연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연도 없고 연 아닌 것도 없는 것이 바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요,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이 행하는 곳입니다.
사리불이여,
가고 옴이 있는 것은 곳 인(因) 등이 생기는 모양이니,
인의 모양에는 인도 없고 인이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인도 없고 인이 아닌 것도 없는 것이 바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요,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이 행하는 곳입니다.
사리불이여,
가고 옴이 있다는 것은 곧 문자와 언어이니,
문자의 모양에는 문자도 없고 문자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문자도 없고 문자 아닌 것도 없는 것이 바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요,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이 행하는 곳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말한 미묘한 일의 모양[事相]은 내가 아직껏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니,
지난번부터 의심을 품어왔던 것을 다시 묻도록 하겠습니다.
관문[關]을 지키는 문지기가 짐 없이 다니는 사람을 보거나 짐을 진 자를 보면 곧 ‘네가 가진 것은 무슨 물건이냐’고 물은 다음에,
그 물건이 곡식의 종자인 줄 알게 되면 마땅히 세금을 받는 것처럼,
선남자여,
우리들도 그렇게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고서 그 음성을 따라 알고 스스로 마음을 비추어보니,
그러므로 내가 지금 물어보겠소.
그대들 대사(大士)는 대승(大乘)을 옹호하기 위해서 한량없는 성문ㆍ연각을 등장시키니 원컨대 선남자께서는 그 오는 곳을 분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그대가 지금 직접 부처님께 나아가 여쭈어 보십시오.
여래께서 마땅히 말씀하시어 그대의 의심을 끊어주실 것입니다.”
그때 사리불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바라건대 세존께서 이 보살이 온 곳이 어디며,
그 곳의 부처님 이름은 무엇이며,
세계의 이름이 무엇이며,
여기서부터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만약 그 부처님과 세계의 이름을 듣는다면 한량없고 가없이 많은 보살들에게 보리를 장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이제 저 국토의 공덕과 부처님의 명호를 말할 터이니,
네가 이 말을 들으면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땅히 오롯한 마음으로 믿고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그때 사리불이 이 말씀을 듣고는 찬탄하여 말하였다.
“거룩하고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지금 말씀하여 주신다면 제가 마땅히 한 마음으로 머리에 이어 받아 지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열 개의 항하강 모래처럼 많은 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 같은 세계를 지나면 불순(不眴)이란 세계가 있다.
그곳의 부처님 명호는 보현(普賢) 여래ㆍ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ㆍ불세존이시며 지금 현재에 계시느니라.
사리불아,
그 국토에는 성문ㆍ연각이 없고,
나아가 이승(二乘)이라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모든 성인의 무리는 순수하게 보살일 뿐이니라.
이미 과거에 오랫동안 공덕의 근본을 닦아 선한 업을 이루어 갖추고,
보시하고 조복하여 스스로 계율과 인욕을 지키며,
널리 들어 아는 것이 많고 마음이 방일하지 않아 공덕에 편안히 머물고,
위의를 성취하여 인욕의 힘으로 걸림 없으며,
최상의 도(道)에 정진을 굳건히 하여 선근(善根)을 닦아 모두 성취하였느니라.
또 모든 선정과 해탈과 삼매에 들어 마음대로 신통을 부리고,
큰 지혜로 비추어 밝혀 모든 법을 잘 분별하여 알며,
사랑하는 마음을 지님이 허공처럼 넓고,
큰 자비심이 견고하여 중생을 구호해 주며,
항상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같이 즐겁게 하며,
가진 것을 버리는 마음으로 미움과 사랑을 잘 없애고,
마(魔)의 그물에 걸려 다투는 일을 남김없이 다 없애며,
중생들 모든 근기의 나아가는 곳을 잘 알아서 그들 근기의 정도에 따라 법재(法財)를 베풀되 그 마음의 평등함이 땅ㆍ물ㆍ불ㆍ바람과 같았느니라.
일체 외도와 이론(異論)들을 무너뜨리고,
적진을 꺾어 항복시켜 승리의 깃발을 세우며,
부처님 법의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에 깊이 들어가 여러 대중들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으며,
모든 사변(辭辯)으로 분별하여 연설해서 나유타 겁수 동안 하여도 말로는 다 할 수 없느니라.
또 큰 신통력을 얻어 한량없고 가없이 많은 불국토를 감동시키고,
모든 불국토에 잘 왕래하여 성내는 것이나 겁내는 것,
교만하고 방일한 것들을 끊어버리니,
그가 연설하는 것은 사자의 외침과 같으니라.
원수거나 친한 이나 일체 중생들을 다 구경열반에 편안히 머물게 하여 법의 구름[法雲]을 드리워 우레를 일으키고,
3명(明)2)과 해탈로써 번갯불을 삼고 최상의 법비(法雨)로 감로(甘露)를 삼아 능히 법재(法財)로 물을 대어 삼보(三寶)를 끊이지 않게 하며,
안과 밖이 청정하기가 마치 보배구슬 같고,
상호(相好)의 훌륭함은 가장 뛰어나 견줄 데가 없느니라.
또 모든 선근으로 그 몸을 장식하고,
불법으로 관정(灌頂)하여 다음 세상에 부처 이룰 지위[補處位]를 얻으며,
중생들의 행을 잘 분별하여 알맞게 조복함으로써 해탈을 얻게 하고,
도량을 깨끗이 하여 사자좌(師子座)에 앉아 모든 법에 두려움이 없으며,
스스로 그 모습을 부처님의 몸처럼 바꾸어 온갖 불사(佛事)를 다 나타내어 자재한 마음으로 법륜을 굴리느니라.
사리불아,
저 국토는 순전히 이런 보살마하살만으로 권속을 삼느니라.”
그때 모여 있던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저 보살 대중의 공덕과 지혜에 대하여 칭찬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하늘의 우담바라꽃과 구물두(拘物頭)꽃과 파두마(波頭摩)꽃과 분다리(分陀利)꽃과 만다라(曼陀利)꽃을 무진의 보살과 여러 보살들에게 뿌리고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오늘 쾌히 좋은 이익을 얻어 이러한 여러 보살들을 보고 예배 공양하며 공경히 에워쌀 수 있었으니,
만약 어떤 중생이 그 이름을 듣는다면 이와 같이 한량없는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며,
그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듣는다면 다 위없는 도(道)의 마음을 일으키리라.”
이 법을 말씀하실 때에 그 법회에 모인 360만의 중생들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阿耨多羅三邈三菩提]의 마음을 내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저 부처님 세계에는 세 가지 나쁜 갈래[三惡道]나 혹은 그 이름조차도 없고,
또한 삿된 행과 계율에 어긋나는 이름도 없으며,
또 여자나 간탐(慳貪)과 질투와 파계(破戒)와 성냄과 게으름이나 산란한 마음과 어리석음이라는 이름도 없고,
걸림과 덮임[蔭盖]과 쌓임[集]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중생의 근기가 평등하여 상ㆍ중ㆍ하가 없이 순전히 일승(一乘)이어서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이름이 없으며,
불국토에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이름이 없고,
또 삼보(三寶)를 차별하는 명칭도 없고,
음식에 굶주리거나 목말라 하는 소리와 ‘나’와 ‘내 것’을 막거나 보호한다는 이름도 들리지 않으며,
모든 마구니 그물과 망령된 소견으로 쌓은 이름도 없으며,
저 부처님의 세계는 평탄하고 광대해서 하나의 해와 달이 60억 백천 나유타 유순을 두루 비추니,
이런 보기 드문 일은 저 보살의 본원(本願)으로 이루어진 것이니라.
그 국토는 평평하고 고르기가 마치 손바닥 같으며 유리 같은 뭇 보배들로 뒤섞여 이루어졌고,
그 땅은 부드럽고 연하기가 마치 하늘 옷 같아서 이것에 몸이 닿은 이는 미묘한 즐거움을 느끼니,
보배 나무로 장엄하여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보배 끈으로 연결하여 여덟 길의 경계를 구분했으며 펼쳐져 있는 모든 꽃들은 언제나 저절로 피고 돌과 모래와 가시와 더러운 것이 없으며 모든 산은 순전히 보배 꾸러미로만 섞여 이루어졌느니라.
또 사람이나 하늘이나 다름이 없이 법의 기쁨과 선정의 맛으로 음식을 삼고,
오직 보현여래 법왕 말고는 그 불국토에 왕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그 부처님과 보살들은 문자를 쓰지 않고서도 설법하고,
보살들은 오직 부처님 뵙기만을 생각하면서 자세히 보아 싫증내지 않으며,
눈을 잠시도 깜박이지 않았으므로 곧 염불삼매를 얻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으니,
그러므로 저 불국토의 이름을 불순(不眴)이라고 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느냐면,
물질의 모양이나 타고난 종성(種性) 또는 과거의 깨끗한 업까지도 관찰하지 않는 것이니 이때에는 마음에 자기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현재의 5음(陰)ㆍ18계(界)ㆍ6입(入)과 보고[見] 들음[聞]과 깨달아[覺] 아는 것[知]과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 등을 관찰하지 않으며,
희론(戱論)과 나고[生] 머물다[住] 사라진다[滅]는 생각이 없고,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으며,
염(念)하거나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思想]과 생각 아닌 것을 관찰하지 않으며,
다르다는 생각[別想]과 법이라는 생각[法想]과 자기라는 생각[己想]을 나누지 않고,
경계와 공덕과 안과 밖과 중간에서 같다거나 다르다는 생각이 없으며,
각관(覺觀)과 처음과 끝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생긴 모양이나 위의나 법식(法式)을 관찰하지 않으며,
계(戒)ㆍ정(定)ㆍ지혜(智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地見)과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18불공법(不共法)을 관찰하지 않느니라.
바른 염불이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행으로 짓는 것도 아니며,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같은 것이 없으면서 같으므로 골똘한 생각을 여의어 염하는 바도 생각하는 대상도 없으며,
5음ㆍ6입ㆍ18계와 나고 머물다 사라진다는 생각이 없고,
처소(處所)가 없지만 처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움직임도 그침도 아니고 빛깔도 의식도 아니며,
생각도 느낌도 아니고 지어감도 아니며,
앎[識]3)에 대하여 알음알이를 내지 않고,
땅ㆍ물ㆍ불ㆍ바람에 대해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며,
눈에 대한 빛깔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혀에 대한 맛과 몸에 대한 감촉과 마음에 대한 법에서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이와 같이 일체 경계에 반연하지 않으며,
모든 모양과 ‘나’와 ‘내 것’을 내지 않고,
보고 들음과 깨달아 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마침내 일체를 해탈하는 데 이르며,
심(心)과 심수(心數) 법을 멸하여 이어가지 않고,
모든 억상(憶想)과 억상 아닌 것 등을 깨끗이 하며,
사랑함과 성냄을 잘 제거하여 인연상(因緣想)을 없애고,
이것과 저것과 중간을 모두 남김없이 끊어버리느니라.
이 법이 깨끗한 것은 문자가 없기 때문이고,
법에 대해 기뻐함이 없는 것은 움직이거나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며,
법에 괴로움이 없는 것은 맛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고,
법에 열뇌(熱惱)가 없는 것은 본래 고요하기 때문이며,
법에 벗어남이 없는 것은 성품을 버리고 여의었기 때문이고,
법에 형체가 없는 것은 물질의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 느낌이 없는 것은 ‘나’가 없기 때문이고,
법에 얽매임이 없는 것은 고요하여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법의 모양을 짓지 않는 것은 조작함이 없기 때문이고,
법에 언교(言敎)가 없는 것은 알음알이가 없기 때문이며,
법에 처음과 끝이 없는 것은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법에 편히 머무름이 없는 것은 처소가 없기 때문이며,
법에 지음이 없는 것은 받는 이를 여의었기 때문이고,
법에 소멸함이 없는 것은 본래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심수(心數)의 생각으로 반연하여 머무는 법에 그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분별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느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타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나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니,
법성의 평등함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눈에 있어서 빛깔과 귀에 있어서 소리와 코에 있어서 냄새와 혀에 있어서 맛과 몸에 있어서 감촉과 마음에 있어서 법을 벗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염불삼매라 하느니라.
보살이 이 염불삼매를 얻는다면 일체의 법 가운데서 자재한 지혜의 다라니문을 얻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다 받아 지녀서 끝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며,
또 모든 중생들의 말과 음성을 분명하게 알아서 걸림 없는 변재로 모자람이 없이 매우 잘 할 것이니라.
사리불아,
저 보현여래는 이 국토에서처럼 두 가지 인연으로써 바른 소견을 연설하지 않으니,
이른바 다른 이로부터 소리를 듣는 것과 안으로 바르게 억념(憶念)하는 것이니라.
저 여러 보살들은 부처님을 뵐 때에 곧 모든 깊고 미묘한 이치를 분별하여 6바라밀(波羅密)을 원만히 갖추어 성취하니,
왜 그런가 하면 색상(色相)을 취하지 않으므로 보시바라밀[檀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을 제거하므로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이 다함을 관찰하므로 인욕바라밀[羼提婆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의 고요함을 보므로 정진바라밀[毘梨耶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을 행하지 않으므로 선정바라밀[禪那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을 희론하지 않으므로 지혜바라밀[般若波羅密]을 원만히 갖추느니라.
이 여러 보살들은 부처님을 뵙자마자 바로 이러한 6바라밀을 갖추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지혜를 얻느니라.
사리불아,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장엄 청정하고 미묘하지만 저 보현여래의 불순세계와 같은 세계는 드무니라.”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기쁘시겠습니다.
그대 어진 대사들은 저 불국토에서 보현부처님을 뵙고 한량없는 이익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그때 무진의 보살이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대덕이시여,
지금 불순세계의 보현부처님과 그 대중들을 꼭 뵙고 싶지 않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보현부처님을 뵙고 이 대중들로 하여금 선근이 더욱더 늘어나게 하고 싶습니다.”
그때 무진의 보살은 곧 보살의 온갖 불국토를 나타내 보이는 삼매에 들어갔다.
삼매에 들어서는 이 대중과 사리불로 하여금 이내 저 불국토의 보현여래와 그 대중을 보게 하니,
이 일을 보고 나서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멀리서 그 부처님과 대중에게 예배하였다.
여기에 모인 대중들은 부처님과 무진의 보살의 신통한 도력으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미묘한 꽃을 얻었으니,
예전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꽃의 향기와 빛깔이 손바닥에 자연히 가득하게 되어,
그것을 멀리 동쪽에 뿌려 보현부처님께 공양하였다.
꽃이 곧 저 불국토의 보현부처님과 그 법회의 대중들에게 까지 두루 이르니,
저 여러 보살들이 이 꽃을 보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화려하게 장엄된 꽃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꽃인데,
어느 곳으로부터 여기에 온 것입니까?”
보현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바세계에 있는 무진의 보살과 시방에서 온 보살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신 곳에 함께 모여서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세존께서 『대집경』을 연설하시는 것을 듣고 있는데,
이것은 그 대중들이 뿌린 꽃이니라.”
저 여러 보살들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 부처님의 세계는 어느 쪽에 있으며,
여기에서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보현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선남자들아,
여기에서 서방으로 열 개의 항하강 모래처럼 많은 세계에 있는 작은 티끌과 같은 나라를 지나면 그 사바세계가 있느니라.”
여러 보살들이 말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대중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때 보현여래가 곧 큰 광명을 놓으시자,
그 광명이 석가모니부처님 세계를 밝게 비추었다.
저 여러 대중들은 보현부처님의 광명으로 인하여 사바세계의 석가모니부처님과 여러 대중들을 모두 보게 되었으며,
보고서는 기뻐하여 합장하고 공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저 국토의 보살과 모든 대중들은 어느 곳에서 와서 여기에 모였기에 그 세계를 빈 곳이 없이 두루 가득 차게 하였습니까?”
보현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선남자들아,
그 대중들은 다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로부터 와서 거기에 모여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을 묻고 그 법을 듣느니라.”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에게 물었다.
“누가 그대의 이름을 무진의라고 하였습니까?”
무진의 보살이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모든 법의 인연과 과보를 무진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바라건대 그대가 다함없는 법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처음에 위없는 보리심을 낼 때부터 이미 다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보리심을 내는 것은 번뇌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발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여타의 승(乘)을 바리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견고한 것은 외도나 삿된 논의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악마도 저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항상 순조로운 것은 선근을 더욱 증장시키기 때문이며,
발심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것은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덧없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도닥이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이며,
발심이 수승하고 미묘한 것은 손상됨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하여 편안히 머무는 것은 희론(戱論)하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을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는 것은 비슷한 것이 없기 때문이며,
발심이 금강처럼 단단한 것은 모든 법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며,
발심이 끝없는 것은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평등한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널리 덮어주는 것은 분별하거나 다르게 여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이 선명한 것은 성품이 항상 깨끗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더러움이 없는 것은 지혜가 해맑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잘 이해하는 것은 끝내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드넓고 쾌활한 것은 자비로움이 허공처럼 넓기 때문이며,
발심이 광대한 것은 모든 중생을 다 용납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걸림이 없음은 지혜를 통달했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두루 이르는 것은 대비심(大悲心)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잘 이해하여 원력을 세우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귀의하는 것은 여러 부처님의 칭찬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이 뛰어남은 이승(二乘)이 높이 우러르기 때문이며,
발심이 심원한 것은 중생들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무너지지 않음은 불법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편안한 것은 중생들에게 모든 쾌락을 잘 주기 때문이며,
발심이 장엄한 것은 모든 공덕을 다 성취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잘 관찰함은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더 자라나게 하는 것은 뜻대로 베풀어 주기 때문이며,
발심이 바람과 같은 것은 계율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보리심을 내어 원수나 친한 이까지 널리 미치는 것은 인욕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발심을 파괴하기 어려움은 정진을 갖추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고요한 것은 선정을 갖추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헐뜯음이 없음은 지혜를 갖추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바람이 없는 것은 대자심(大慈心)을 더욱더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을 내어 근본에 머무르기를 굳게 함은 대비심(大悲心)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온화하고 즐거운 것은 큰 희심(喜心)을 더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은 큰 평등한 마음[捨心]을 더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책임이 중요한 것은 여러 부처님께 받았기 때문이며,
발심하되 끊지 않음은 삼보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지혜를 위하여 보리심을 내니,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마치 허공이 끝이 없는 것처럼 모든 지혜를 위해 보리심을 내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이 끝이 없습니다.”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부처님 계율을 다할 수 없음도 계율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고,
부처님 선정의 다함이 없음도 선정으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으며,
부처님 지혜의 다함이 없음도 지혜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고,
부처님의 해탈이 다함이 없음도 해탈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으며,
부처님 해탈지견의 다함이 없음도 해탈지견으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여래의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은 그 성품이 다 함 없으니,
이 다섯 가지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는 것인데 어찌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래의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열여덟 가지 같지 않은 법[十八不共法]의 다함이 없음도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기 때문에 다함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요약하여 말하자면 모든 여래가 다함이 없음은 이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고,
삼보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중생의 성품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실다운 지혜가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중생들의 한량없는 마음과 행을 따르는 지혜가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가장 훌륭한 것에 회향함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중생을 교화함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다함없는 지혜는 생겨남[生]이 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성품을 여의어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모든 법의 본성을 앎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보리심을 내어 다함이 없음이라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이것은 보살의 마음이 청정하여 다함이 없는 것이니,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아첨하지 않기 때문이고,
아첨하지 않는다는 것은 간사함이 없기 때문이며,
간사함이 없음은 잘 분별하기 때문이고,
잘 분별한다는 것은 삿된 방법으로 생활을 꾸려가지 않기 때문이며,
삿된 방법으로 생활을 꾸려가지 않는 것은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늘 바르고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항상 바르고 한결같다는 것은 그 성품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성품이 뛰어나다는 것은 깔보거나 헐뜯음이 없기 때문이며,
깔보거나 헐뜯음이 없다는 것은 모든 왜곡된 것들을 없앴기 때문이고,
모든 왜곡된 것들을 없앰은 마음의 바탕이 곧기 때문이며,
마음의 바탕이 곧다는 것은 평정(平正)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평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견고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견고하고 진실하다는 것은 파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성품이 굳건하기 때문이고,
성품이 굳건하다는 것은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며,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고,
의지하는 곳이 없다는 것은 ‘나’라는 마음을 제거했기 때문이며,
‘나’라는 마음을 제거했다는 것은 상대가 없기 때문이고,
상대가 없다는 것은 비방하거나 멸시하지 않기 때문이며,
비방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업을 짓기 때문이고,
선업을 짓는다는 것은 꾸짖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꾸짖음이 없다는 것은 잘못이 없기 때문이고,
잘못이 없다는 것은 불타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며,
불타는 번뇌가 없다는 것은 성품이 진실하기 때문이고,
성품이 진실하다는 것은 헛되거나 거짓됨이 없기 때문이며,
헛되거나 거짓됨이 없다는 것은 말한 대로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고,
말한 대로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일을 잘 하기 때문이며,
일을 잘한다는 것은 흠이 없기 때문이고,
흠이 없다는 것은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며,
그릇됨이 없다는 것은 막힘이 없기 때문이고,
막힘이 없다는 것은 물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중생을 관찰한다는 것은 대비(大悲)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며,
대비의 뿌리가 깊다는 것은 중생을 잘 교화하되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기 때문이고,
중생을 잘 교화하되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안락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기의 안락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익을 탐내지 않기 때문이고,
이익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은 애욕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애욕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고,
모든 법을 반연한다는 것은 연약함과 모자람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연약함과 모자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중생을 보기 때문이고,
중생을 본다는 것은 항상 옹호하기 때문이며,
항상 옹호한다는 것은 귀의처가 되기 때문이고,
귀의처가 된다는 것은 번뇌에 끄달림이 없기 때문이며,
번뇌에 끄달림이 없다는 것은 잘 관찰하기 때문이고,
잘 관찰한다는 것은 비난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며,
비난하는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고 착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착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훌륭하게 청정하기 때문이며,
훌륭하게 청정하다는 것은 언제나 정진하기 때문이고,
언제나 정진 한다는 것은 안으로 청정하기 때문이며,
안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항상 선명하기 때문이고,
항상 선명하다는 것은 더럽혀지거나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그 청정한 마음은 인색함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인색함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파계를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파계를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성냄과 미움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성냄과 미움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게으름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게으름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어지러운 마음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어지러운 마음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어리석음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어리석음을 끊게 합니다.
사리불이여,
그 청정한 마음이 이와 같이 모든 불선법(不善法)을 끊고 중생들을 선법(善法) 가운데 안주하게 하니,
그러므로 이것을 보살의 청정한 마음은 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의 심행(心行)이 청정함도 다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보살이 보시를 행할 적에 일체를 다 보아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계율을 행함도 다할 수 없으니,
일체를 다 보아서 모든 금계(禁戒)를 지니고 두타(頭陀)의 바른 행으로써 위의를 범하는 것이 없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