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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sfed--당호법사문법림별전_K1400_T2051.txt ☞당호법사문법림별전 하권
이미 진술한 말이 허황되게 부르짖은 말이라면 법에는 엄격한 조항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음성이 고르면 메아리가 순조롭고 형상이 곧으면 그림자도 단정하다고 하였으며,
불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물을 얻었다거나 팥을 심었는데 보리 싹이 났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소진(蘇秦)4)과 장의(張儀)5)가 귀곡자(鬼谷子)6)를 만나게 되어 각각 부질없고 거짓된, 선봉에 처한데 비해,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蹇)7)이 공문(孔門)을 만남으로써 함께 덕행(德行)의 시작을 표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편(二篇)의 교화를 익힘으로 무위(無爲)의 미묘함을 구하고,
삼장(三張)의 풍교를 실천함으로 그 모책이 난리의 으뜸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장릉의 사례
왜냐 하면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에 패(沛) 땅 사람 장릉(張陵)8)이 촉(蜀) 땅에 객(客)이 되어 유람하다가 고로(古老)들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말 중에 ‘옛날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24기(氣)를 호응하여 24산(山)에 제사를 지냈고,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여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장릉이 자신의 덕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마침내 이런 꾀를 구상하여 소를 잡아 24개 처소에 제사를 지내고,
흙으로 단(壇)을 모으고 풀로 지붕을 잇고서 24개의 치관(治館)을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치관이 흥기하게 된 시초가 되었습니다.
23개의 처소는 촉(蜀)나라 지방에 있고,
윤희(尹喜)9)의 한 처소만 함양(咸陽)에 두었는데,
이때에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흉악한 무리를 불러 모아서 조세미(租稅米)를 거두는 등 난계(亂階)를 꾀하더니,
때마침 사탄(蛇呑)을 입어 역모에 힘쓰는 일[亹逆] 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장로의 사례
또 장릉(張陵)의 손자 장로(張魯)10)가 그 할아버지의 술법을 수행하여 후한(後漢) 중에 스스로 사군(師君)이라고 칭한 것으로 인하여 화란(禍亂)이 비로소 일어나려 하다가 조공(曹公:曹操)에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 장각의 사례
또 중평(中平) 원년(元年, 184) 거록인(鉅鹿人) 장각(張角)11)이 스스로 황천부사(黃天部師)라고 칭하고,
36명의 장수를 두어 모두 누런 수건[黃巾] 을 쓰게 하고 멀리 장로(張魯)와 더불어 서로 내통하였습니다.
그들의 무리가 10만에 이르러 업성(鄴城)을 불태워 버렸으므로 한(漢)나라 황제가 하남윤(河南尹) 하진(何進)12)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망시켰습니다.
○ 진단의 사례
또 진(晋)나라 무제(武帝) 함녕(咸寧) 2년(276)에 도사(道士) 진단(陳端)이 좌도(左道)를 가지고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스스로 천사(天師)라고 호칭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 수천 명과 세월을 보내다가 익주자사(益州刺史) 왕준(王濬)13)에게 주멸(誅滅)당하고 말았습니다.
○ 노송의 사례
또 진(晋)나라 문제(文帝) 태화(太和) 원년(元年, 366)에 팽성(彭城) 도사 노송(盧悚)이 스스로 대도좨주(大道祭酒)라고 칭하면서 삿된 술법으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도당(徒黨)을 취합(聚合)하여 해를 향하여 좋은 날을 점치고는 광한문(廣漢門)을 공격하면서 말했습니다.
‘해서공(海西公)을 맞이하시오.’
그때 대궐 내의 환비(桓秘)14) 등이 깨달아 알고는 그와 더불어 전쟁을 벌여 얼마 안 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 원긍의 사례 또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동(大同) 5년(539)에는 도사 원긍(袁矜)이 요사스런 말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행금보강(行禁步綱)하다가 관군(官軍)에게 엄습당하여 얼마 뒤에 주멸(誅滅)당하고 말았습니다.
○ 포동과 좌동의 사례 또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0년 창륭현(昌隆縣) 도사 포동(蒲童)과 좌동(左童) 두 사람이 붕계관(崩溪館)에 있으면서 스스로 성인이 되었다고 칭하면서 인민(人民)들을 속이고 현혹하였는데,
2층으로 된 평상을 만들어 가지고 집에 이르러서는 문득 그 위에 올라 앉아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5세 동녀(童女)라야만 비로소 법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여자를 침상으로 오르게 하여 장막을 죽 둘러치고는 마침내 간음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한 달가량 지내다가 나중에 그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곧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 한랑과 황유림의 사례
또 개황(開皇) 18년(598)에 익주(益州) 도사 한랑(韓朗)과 면주(綿州) 도사 황유림(黃儒林)이 촉왕(蜀王)을 선동하고 현혹시켜 촉왕으로 하여금 반역을 일으키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일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꼭 특수한 인연을 바탕으로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촉왕을 시켜서 재물을 다 기울여 1천 자[尺] 나 되는 도상(道像)을 세우고,
1천 일 동안 큰 재[大齋] 를 베풀어 선제(先帝)의 형상을 그려 놓고 머리와 손을 뒤로 묶어 주문으로 억압했습니다.
하북공(河北公) 조중경(趙仲卿)이 조사하고 살펴서 이 같은 사실을 들어 알고는 몸을 경성(京城)으로 송치하였는데,
검문을 당하고 죄를 입어 저자 가운데서 형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이망과 포자진의 사례
근래 무덕(武德) 3년(620)에는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사람 이망(李望)이 앞서부터 황로(黃老)를 섬기며 항상 요망하고 사특한 일을 하여 왔었습니다.
지나간 대업(大業) 말년에는 도사 포자진(蒱子眞)이 도술(道術)을 조금 익혔는데
동경(東京)에 송치되었다가 양한(梁漢)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그로 인해 저기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이망(李望)이라는 사람이 속여서 말하기를,
‘자진(子眞)이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저 고을 산언저리에 석실(石室) 한 개가 있었는데,
암혈(巖穴)이 그윽하고 어두워 사람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망(望)이 이것을 빙자하여 요사(妖詐)스러운 일을 지었는데,
밝은 데 있으면 목청을 높여 큰 말로 통전(通傳)을 영납(領納)하고 어두운 데 들어가면 목 메인 기운으로 작은 소리로 화복(禍福)을 거짓으로 진술하곤 하였습니다.
마침내 도사(道士)들로 하여금 말을 퍼뜨리게 하여 고을마다 미치게 하고 고을마다 소문이 나게 하였는데,
관청 사람이 처음 검문을 하고는 아울러 모두들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뒤에 자사(刺史) 이대례(李大禮)가 말하기를,
‘이 일이 가볍지 않으니 반드시 다시 살펴보고 아뢰어라’고 하더니,
거짓임을 살펴서 직접 징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옳고 그름을 결정하였습니다.
마침내 온 고을[州縣] 의 관리들과 도사(道士) 등 1백여 기(騎)가 다 함께 동굴[穴所] 에 이르러 두 번씩 예배하고 기원하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망은 그때에 거짓으로 대답하니 듣는 사람들마다 마음을 기울였으나,
오직 파서(巴西) 현령(縣令) 악세질(樂世質)만은 일의 실상[機情] 을 깊이 통달하고 그가 속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깜깜한 데 들어가서 몰래 엿보다가 망(望)이 목이 쉰 듯한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는 악세질이 그때 그를 꾸짖으니,
이망(李望)이 곧 진심으로 굴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 감옥에 잡아 가두고[收禁] ,
바야흐로 죄목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독약을 마시고는 죽어 버렸습니다.
○ 반역과 대중을 혼란하게 함
이로써 그들이 익힌 것이 바르지 않으면 반역에 힘쓰는 이들[亹逆] 이 서로 따르고,
좌도(左道)가 대중을 혼란하게 만든다고 한 이 말이 진실임을 알 만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도적들이 누런 수건[黃巾] 을 쓰고 거록(거鹿)에서 일어났고,
귀서(鬼書)와 단간(丹簡)은 양평(陽平)에서부터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의복의 형상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서로 거리가 멀고,
옷이 우곡(雨穀)과 같다고 하는 것도 인정(人情)과는 가깝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학(鶴)을 타고 용(龍)을 타며,
몸에는 포갈(布褐)을 입고,
난새[鸞] 를 몰고 봉황[鳳] 을 채찍질하면서 머리에 피건(皮巾)을 쓰는 일이 있겠습니까?
백석(白石)15)과 적송(赤松)16)의 무리는 모두 귀신의 졸개[鬼卒] 가 아니었고,
왕교(王喬)17)와 선문(羨門)18)의 무리는 다 고을의 우두머리[治頭] 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담(李聃:老子)이 주(周)나라를 섬길 때에는 의복을 유가(儒家)나 묵가(墨家)들처럼 입다가,
공기(公旗)가 한(漢)나라를 도모하던 날에야 비로소 황건(黃巾)을 머리에 쓰기 시작하였는데,
만일 백양(伯陽:魏伯陽)19)을 시조로 섬기며 그의 법을 익혔다면 도사(道士)들을 모두 조정에서 임명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나,
만일 공기(公旗)를 으뜸으로 여기고 그의 법을 취하였다면,
이러한 폐단은 특별히 자취도 남기지 말고 제멸시켜야 할 것입니다.”
유덕위(劉德威) 등이 또 법사에게 물었다.
“논(論) 제7권에서 이르기를,
‘건안(建安)은 꿈에서 감득(感得)한 다음 병이 나았고,20) 문선제(文宣帝)는 신령함이 내려와서 질병이 나았으며,21) 오(吳)나라 왕은 사찰을 에워싸자 사리(舍利)에서 광채를 띠었으며,22) 제(齊)나라 임금은 형(刑)을 집행하다가 칼이 부러졌고,23) 우문(宇文:周)은 승려를 헐뜯었다가 종창이 곪아 터졌으며,24) 척발(拓拔:魏)은 사찰을 헐어 버리고 나서 온몸에서 고름이 흘렀고,25) 손호(孫皓)는 불상에 오줌을 누고 나서 음근(陰根)이 아팠으며[陰疼] ,26) 혁련(赫連)은 흉악하고 미련한 짓을 하다가 벼락 맞아 죽었다[雷死] 27)고 하였는데,
그 인용한 것을 살펴보니 모두가 제왕들이었다.
어찌하여 잠시라도 마음을 귀의하면 모든 질병이 소멸되고[銷痾盪瘵] ,
잠깐이라도 사찰을 헐거나 스님을 헐뜯으면 곧 나라도 잃고 몸 또한 죽고 만다는 말인가?
이것으로써 제대(帝代)의 천와(遷訛)는 스스로의 운수가 길고 짧음에 관계되는 것이고,
황왕(皇王)의 흥하고 침체함도 또한 불교를 믿고 헐뜯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헤아려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망령되게도 화복(禍福)에 대해 진술하고,
요상(妖祥)에 대하여 거짓으로 속여 기술하였는가?
이것에 근거해 한곳에 오래도록 머문다면 지적을 받아 배척당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주역(周易)』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는 경사스런 일이 생기고[積善餘慶] ,
악함을 자꾸 쌓으면 마침내는 재앙이 온다[積惡餘殃] ’28)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서는,
‘착하고 악함에 대한 보응은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 같다[善惡之報同乎影響] ’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성왕(成王)ㆍ강왕(康王) 때에는 치도(治道)가 융성하고 공평[隆平] 하였고,
진(秦)나라 황제 2세(世)의 시절에는 천하를 가혹하게 다스렸습니다.
이는 곧 도(道)를 실천하면 복이 오래 가고,
지나치게 형벌을 가하면 후사가 짧다는 사실이 전적(典籍)에 성대하게 드러나 있는데 어찌 운수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부처님께서는 조어사(調御師)라 불리시고 삼계(三界)에 특별하게 존귀하신 분이시며,
승려는 복전(福田)이라고 불리고 사생(四生:胎ㆍ卵ㆍ濕ㆍ化)이 숭배하고 귀중하게 여기니,
어찌 공경을 다하여 추앙하는데 복의 징조가 없을 것이며,
헐뜯고 파괴하는데 화의 조짐이 없겠습니까?
앞에서는 보응(報應)에 대하여 간략하게 진술하여 저 삿된 사람들을 대함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아침에 도 들음을 경하하게 하고 또 저녁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29)
저 문선제(文宣帝)와 건안(建安)의 무리와 오(吳)나라의 왕과 제(齊)나라 임금 등의 부류,
그리고 척발(拓拔)ㆍ우문(宇文)ㆍ혁련(赫連)ㆍ손호(孫皓) 등에 대해서는 선하고 악한 자취를 기록해 전하고 자세히 밝힘으로써 널리 명상(冥祥)을 선험(宣驗)하고 신의 감응을 찾는다는 등의 말과 같음을 밝힌 것입니다.
또 선악(善惡)의 분한은 이치와 숫자가 분명하므로 그 사실을 전모(典謀)에 전하여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밝혀서 저들로 하여금 어질지 못한 사실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나약한 중생들이 돌아갈 곳을 알게 하고,
어진 일을 보고는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여 미혹한 길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일이 충분하리라고 생각하여 저는 한 구석을 대충 기술한 것일 뿐이니,
이는 저들로 하여금 세 모퉁이를 되돌아보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지금의 성상께서는 공손하시고 총명하시어 깨달음의 길[覺路] 에 마음을 귀의하사 죽원(竹園)을 헤아려서 사찰[梵宇] 을 일으키시고,
기수(祇樹)를 의지하시어 선감(禪龕)을 일으키시며,
무착(無着)의 존상(尊像)을 조성하시어 마군(魔軍)의 무리를 항복받아 제도하시니,
그 은혜가 마안(馬岸)까지 뻗었고,
도(道)는 용퇴(龍堆)에 미치게 하셨습니다.
무릇 사람 치고 어느 누가 은혜를 입거나 힘입지 않은 이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찌 감히 망령되게 요얼(妖孽)을 진술하여 국가를 배척하겠습니까?
다만 저 중경(仲卿)을 상대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은 것입니다.”
유덕위 등이 다시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논 제8권에서 이르기를,
‘도(道)에서 벗어나 거짓되고 잘못됨이 진실로 까닭이 있었구나.
사슴과 말은 형체가 다르건만 진(秦)나라 사람들은 그 모양을 동일하다고 말하였고,30) 기린과 고라니는 바탕이 다르건만 노(魯)나라 풍속에서는 그 용모를 미혹하였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그 거짓되고 허망함을 조사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다만 관중(關中)에 자기(紫氣)가 일어남으로 인하여 윤희(尹喜)가 심오한 내용 2편을 지었고,
푸른 소[靑牛] 가 경계를 벗어남으로 인하여 노자(老子)가 중현(重玄)의 은미함을 기술하였다.
그런 까닭에 홍한(洪漢)의 경제(景帝)와 문제(文帝)는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우리 황제께서도 그 뒤를 계승하여 직접 자신이 의지하여 실천하고 계신다.
이제 곧 비방하고 모독함이 겉은 화려하나 실속이 없으니[浮華]
우읍(禹泣)을 기대하기 어렵고,
교묘하게 속인 일이 검증되었으므로 탕라(湯羅)에 걸려들고 말았다.
지금 성상께서는 신비한 계책[神謀] 이 있으시어 사총(四聰)은 육합(六合)에 달하였고,
황제의 쇠퇴한 예감[皇衰叡誥] 도 이요(二曜:해와 달)가 팔굉(八紘:우주)을 밝히는 것과 같은데,
갑자기 사슴과 말의 고사(故事)를 들어 훌륭한 시대[昌辰] 을 풍자하고,
기린과 고라니의 고사로써 슬기로운 임금[哲后] 을 희롱하니,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인들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백마(白馬)가 동쪽으로 발길을 돌림으로 인하여 삼장(三藏:經ㆍ律ㆍ論)이 이때부터 일어났고,
푸른 소[靑牛] 가 서쪽으로 감으로 인하여 이편(二篇:道德經)이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은 현현(玄玄)함을 천양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기도 하고,
혹은 공공(空空)을 밝혀서 중생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도첩(圖牒)을 징험해 보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현종(顯宗) 때에 일으켜 창궐했던 일이 이 세대에 이르러 끝이 났고,
석교(釋敎:佛敎)의 번역(翻譯)은 이 시대에 환히 빛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문사(文史)에 잘 갖추어 드러났으므로 백성들이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도가(道家)의 현적(玄籍)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못해서,
오직 『노자(老子)』 두 편만 이담(李聃)이 몸소 천양하였고,
나머지 경교(經敎)는 잡다한 일반 감정을 저술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한(前漢) 때에 왕포(王褒)는 『통현경(洞玄經)』을 지었고,
후한(後漢) 때에 장릉(張陵)은 『영보경(靈寶經)』을 지었으며,
장초(草醮) 등은 도서(道書) 24권을 지었습니다.
오(吳)나라 때 갈효선(葛孝先)31)은 『상청경(上淸經)』을 지었고,
진(晋)나라 때 도사 왕부(王浮)는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을 지었으며,
또 포정(鮑靜)은 『삼황경(三皇經)』을 지었는데,
뒤에 고쳐서 『삼청경(三淸經)』이라 하였었고,
제(齊)나라 때 도사 진현명(陳顯明)은 『진보허경(眞步虛經)』 64권을 지었고,
양(梁)나라 때 도홍경(陶弘景)32)은 『대청경(大淸經)』과 『장초의(章醮儀)』 10권을 지었습니다.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두 교[二敎] 를 멸할 때에 화주(華州)의 전 도사(道士) 장빈(張賓)33)을 조서로써 본 고을의 자사에 임명하였고,
장안(長安)의 전 도사 초자순(焦子順)34)은 일명 도항(道抗)이라고 하는데,
개부(開府) 부풍령(扶風令)에 선임되었으며,
전 도사 마익(馬翼)과 옹주(雍州) 별가(別駕) 이운(李運) 등 네 사람은 천화(天和:後周 武帝의 연호) 5년(670)에 화주(花州)의 고성(古城) 안에 있는 수진사(守眞寺)에서 불경(佛經)을 열람하고는 도가(道家)의 위경(僞經) 1천여 권을 지었는데,
그때 만년현(萬年縣) 사람 색교장황(索皎裝潢)은 단지 견란(甄鸞)35)의 도가를 비웃은 곳은 다 고치거나 없애 버렸습니다.
요즘 대업(大業:隋煬帝의 연호) 말년에 오통관(五通觀)에 도사(道士) 보혜상(輔慧祥)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어느 날 갑자기 『열반경(涅槃經)』을 고쳐 『장안경(長安經)』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엔 구속을 당하여[被約]
성문 밖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집에서 속에 누런 옷 입은 것을 보고 잡아다가 유수(留守)에게 송치했더니,
경전을 고친 일이 발각되어 상서(尙書) 위문승(衛文昇)이 보고하여 금광문(金光門)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함께 증험한 것입니다.
또 『견란소도론(甄鸞笑道論)』에서 말하기를,
‘도가(道家)에서 함부로 제자서(諸子書)에 주석을 달아 350권의 도교 경전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현도목록(玄都目錄)』을 조사해 보니,
‘망령되게도 『예문지(藝文志)』의 책 이름을 취하였고,
거짓으로 884권의 책에 주석을 달아 도교 경전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거하여 말하면 허망하고 거짓됨을 밝히기에 너무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대대로 천착(穿鑿)하여 광간(狂簡)함이 이로부터 번성하였으며,
사람마다 함부로 책을 지어 허황됨이 가득하였음을 알 것입니다.
제가 또 조사해 보니,
후위(後魏) 정광(正光) 원년(520)에 명제(明帝)가 청통관(淸通觀) 도사 강빈(姜斌)과 융각사(融覺寺) 스님 담모최(曇謨最)를 불러 서로 마주하여 논쟁을 펴게 하였는데,
강빈이 그 때 함부로 『개천경(開天經)』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천사(天師) 장릉(張陵)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께서 그때 칙서로 태위공(太尉公) 단양왕(丹陽王) 소종(蕭綜)36)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37)등 170명을 보냈는데,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노자는 바로 오천 문(五千文:道德經)을 저술하고 서쪽으로 가서 유사(流沙)에 숨어 다시는 더 이상의 언설(言說)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의논한 바로는 강빈(姜斌)의 죄는 대중들을 현혹시킨 조항에 해당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강빈은 이미 요망한 말을 하였으니 옥사에 붙여 참결(斬決)토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조사해보니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4년(71)에 도사 저선신(褚善信) 등 690명이 불법(佛法)이 낙양(洛陽)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각시(捔試)하기를 청구(請求)하고,
도가(道家)의 경서들을 다 가져왔는데 도합 37부(部) 744권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509권은 도가 경전이었고 나머지 235권은 바로 제자서(諸子書)였습니다.
또 조사해보니,
진(晋)나라 때 갈홍(葛洪)38)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 이르기를,
‘노교(老敎)에서 소유하고 있는 세상을 건지고 재앙을 소멸시키는 법[度世消災之法] 이 무릇 930권이고,
분명히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ㆍ노자(老子)ㆍ장자(莊子) 등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다.’
또 『모자론(牟子論)』에서 말했습니다.
‘요(堯)ㆍ순(舜)ㆍ주공ㆍ공자ㆍ노자의 교화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교한다면 마치 흰 사슴[白鹿] 을 기린(麒麟)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
또 후주(後周)때 왕포(王褒)의 정고(庭誥)에 말했습니다.
‘도가의 의(義)는 지체(支體)를 무너지게 하고 총명(聰明)을 쫓아 버리며,
의리를 버리고 인을 끊으며[棄義絶仁] ,
형체를 여의고 지식을 버리는 데 있으니 이는 역중(域中)의 가르침이다.
반면에 석씨(釋氏)의 가르침은 괴로움[苦] 을 보고 괴로움의 쌓임[集] 을 끊으며,
적멸[滅] 을 증득하기 위해서 도(道)를 닦으며,
원인[因] 을 밝히고 결과[果] 를 분별하며,
범부를 개혁하여 성인으로 만드시니,
이것이 불교의 극치이다.’
또 요즈음 비서감(秘書監) 우세남(虞世南)44)이 지은 『제왕략론(帝王略論)』에서 또한 말하였습니다.
‘노자가 가르친 이치는 곡신(谷神)은 죽지 않고 현빈(玄牝)에 영원토록 존재하니,
오래도록 관하여 영원히 살아서 용을 타고 학(鶴)을 타고 하는 것이 곧 구중(區中)의 가르침이다.
반면에 석씨(釋氏)의 법은 공(空)과 유(有)에 막히지 않고,
남이니 나니[人我]
하는 분별을 함께 잊고 나고 죽음[生死] 을 초월하여 적멸(寂滅)에 돌아가는 것이 곧 형상 밖의 담론이다.’
또 저 우열(優劣)의 자취는 훈고(訓誥)에 그러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대소(大小)의 유래는 폐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 하면,
조서[詔] 가 나오기 전에는 불교가 크고 도교가 작았는데 조서가 나온 뒤로는 도교가 커지고 불교가 작아졌으니,
대소(大小)와 우열(優劣)이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의 지극한 덕은 신명에까지 통하시어 그 은혜[雲雨] 가 승려들[緇侶] 에까지 베풀어졌고,
도는 지극한 성인을 이웃하여 현묘한 문[玄門] 에 해와 달을 드리웠습니다.
친히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용렬하고 비박한[庸菲]
사람에게 물으시니,
다만 저는 하문하신 내용을 공경히 받들어 돌아보고 감히 구장(舊章)을 진술하매,
위엄을 더럽히고 모독하였으니 떨리고 두려움만 더더욱 깊어집니다.”
황제가 법사의 대답을 보고는 특이하게 여기고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 때 헌사(憲司)의 관리가 아뢰었다.
“법을 폐지할 수는 없사옵니다.
나라에는 고칠 수 없는 형벌이 있으니,
임금[乘輿] 을 가리키며 나무란 모든 이는 그 죄가 대벽(大僻:死刑)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범림(法琳)이 비록 짐(朕)의 종조(宗祖)를 헐뜯었으나 전거(典據)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그 극범(極犯)을 사면시키고 익부(益部)로 옮겨 살게 하여 승려 노릇을 하도록 하라.”
법사는 추방당했으나 마음이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은 까닭에 그로 인하여 「도굴원편(悼屈原篇)」을 지어 자기의 뜻을 폈는데 그 가사는 이러했다.
하늘의 도가 유매(幽昧)해짐을 어찌하랴.
열수(列宿)가 어긋나게 펼쳐져 있구나.
충직하고 올바른 굴원(屈原)이여,
결국은 내쫓김을 당하였구려.
간교한 무리가 임금의 뜻을 맞추어 아첨하니
지위는 드러나고 이름 또한 드날렸네.
곧은 말 하기를 꺼리지 않다가 마침내 재앙을 만났구나.
화씨(和氏)의 옥[璞] 은 산택(山澤)에 버려두고
연석(燕石)을 보배로 여기네.
요염하게 아름다운 서시(西施)45)
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막모(嫫母)46)가 사랑을 받는구나.
가슴을 치며 굴원을 사모하고 생각해 보니
널리 통달했고 많은 지식 있었네.
군왕(君王)은 그의 절개 있고 올바름을 살피지 못하고서
쫓아내어 나라를 떠나갔네.
아첨하는 사람들의 현혹하는 말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덕을 혼미하게 하였구나.
연소(燕蘇 : 향초)를 거친 벌판에 내버리니
잡초만 번식되었네.
영결(鸋鴃 : 惡鳥)이 군림(君林)에서 지저귀니
완란(鵷鸞 : 吉鳥)이 날개를 접어 버렸네.
승냥이와 이리[豺狼] 가 길에 버티고 종횡하자
기린과 고라니[麟麕] 가 자취를 감추고 숨어버렸네.
봉황[鳳鳥] 은 그래도 덕을 품을 줄 알건만
부서진 둥지를 보고 높이 날아가 버렸지.
기린(麒麟)은 오히려 도(道) 있음을 기뻐하는데
불인(不仁)을 보고서 달아나 버렸네.
충성스럽게 간함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자(箕子)가 거짓 미쳐 날뛰었네.
백이(伯夷)의 진실하고 정직함을 막으니
죄를 당하고 재앙을 만나고 말았지.
비간(比干)은 올바른데도 가슴을 찢겼고47)
오자서(伍子胥)48)는 절개가 있었건만
눈을 뽑히는 아픔 당했네.
청백(淸白)한 굴원(屈原)이여,
멱라(汨羅)에 빠져서 돌아오지 않네.
그 때 경읍(京邑)의 승려들이 뜬소문[流言] 만 듣고 법사에게 말하였다.
“생각을 고요하게 하고 정신을 맑혀 요도(要道)를 구출(求出)할 수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파사론(破邪論)』과 『변정론(辯正論)』을 지어서 천정(天庭:황제의 궁전)을 시끄럽게 하고 주상(主上)을 성나게 함으로써 석교(釋敎:佛敎)를 번복(翻覆)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가?
그대가 만약 진술한 말들이 꼭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면 왜 그대를 검남(劍南)에 옮기라고 허용했겠는가.
만약 부처님의 법에 공(功)이 있다면 어찌 업신여김[陵遲] 이 이와 같겠는가?”
법사가 그 말을 듣고 몇몇 도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辱)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하였다.
부혁(傅奕)이 승려를 독정(禿丁:승려를 빈정대며 하는 말)이라고 하고,
부처님을 호귀(胡鬼:오랑캐 귀신)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인정한다면 그 무엇인들 용납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그 당시 대덕(大德)들이 구름같이 밀려들고 명승(名僧)이 비처럼 많아서 비록 사아함(四阿含)과 팔만장경(八萬藏經)을 인용하였으나 붓을 놓으려 해도 그럴 만한 명분이 없었고,
다만 구부(九部)와 삼승(三乘)을 깨달아 알았으나 말을 하려고 해도 그럴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소박(疎薄)함을 헤아리지 않고 무너진 기강을 유지하겠노라 맹세하였다.
이로 인해 서적[典墳] 에서 주워 모으고 자집(子集)에서 찾아내서 저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우쳐 주고 저들이 한 삿된 말을 꺾음으로써 마침내 아첨하는 부혁을 말이 없게 만들었고,
이중경(李仲卿)과 유덕위(劉德威)가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게 하였다.
진실로 한 치[寸] 만한 것이라도 큰 것이 있고,
한 자[尺] 만한 것이라도 길지 않은 것이 있으니,
구슬로써 올빼미를 쏘는 탄환을 만드는 것은 진흙덩이 단단한 것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겠다.
칙명을 내려 비록 나를 익부(益部)로 좌천시켰으나 어찌 죄를 추궁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불법(佛法)에서 지금 또한 편안한데 이를 어떻게 번복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굴원(屈原)이 참소를 당하여 쫓겨났으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 굴원을 충성스럽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변씨(卞氏)가 구슬을 바치고 나서 형벌을 받았으나 누가 이 사람을 잘못이라고 말하겠는가?
이 또한 당시 임금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굴원이 비록 쫓겨나는 일을 당했으나 「이소(離騷)」는 왕성하게 퍼졌으며,
변씨 또한 비록 형벌을 받았으나 성(城)을 보전하는 것을 오히려 보배로 여겼다.
다만 맑은 물[淸水] 과 정제한 쌀[圓米] 이 행해지는 곳이라고 해서 어찌 한스러워 하는 바가 없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말을 마치고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는 그로 인하여 시를 지으니 그 시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굴원같이 지조를 지켰건만
「어부편(漁父篇)」은 더듬어 보지 않았다네.
묻는 말은 쑥대처럼 변하는 말이었으나
대답은 곧기가 줄[絃] 과 같았네.
그리고는 울음을 거두고 소리를 삼키며 목 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때를 만나지 못해서 이제 남쪽으로 좌천을 가지만 바라건대 모든 덕 있는 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글로 전하여 때때로 나고 죽음을 따져 보기 바라오.”
그 때 도속(道俗)들이 전송하면서 서울 근교를 꽉 메우고 목메여 울면서 밝은 신[明神] 을 대하듯이 공경하였다.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가 천천히 떠나가자 법사는 친구들과 이별하면서 또 시를 지어 읊었다.
뜻하지 않게 잘못 죄를 쓰고서
친구도 여의고 또 어버이까지 여의네.
산천(山川)이 만 리를 가로막고 있으니
이때야말로 7척의 몸이 고달프기만 하네.
때로는 혼백 멀리 초나라 땅으로 가거니와
마음만은 나뉘어 홀로 진(秦)나라에 머문다네.
스스로 서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사별(死別)하는 사람을 가엾어 하리.
여름 6월 정묘(丁卯)에 행차가 백뢰관(百牢關) 보리사(菩提寺)에 이르렀는데,
이질병(痢疾病)에 걸려 괴로움을 당하다가 마침내 구원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이 임박하자 법사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장부의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은 이 몸이 진실로 아무 데도 쓸모없게 되었구나.
이렇게 추악함이 드러난 것을 보니 매우 싫어할 만하구나.
본래 도(道)에 순직함으로써 입신(立身)하리라 기약했는데,
뜻대로 되지 못하였구나.
기린을 위해 울고 봉황을 위해 슬퍼하니[泣麟傷鳳]
슬픈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치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이때는 곧 정관(貞觀) 14년(640) 가을 7월 23일,
법사의 춘추(春秋) 69세였다.
도속(道俗)이 슬퍼하기를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하였고,
동쪽 산마루에 장사지내고 백탑(白塔)을 높이 세웠는데,
오고 가는 길손[行侶] 이 왕래하면서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의 인품에 대하여 두루 다 알고는 곧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다만 법사는 예업(藝業)이 뛰어나고 넉넉하여 분소(墳素)49)를 다 해통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사림(詞林)이라고 호칭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학해(學海)라고 불렀다.
또한 바람 앞에서나 달빛 아래서 읊은 시와 봄 난초ㆍ가을 국화에 대한 글을 보면 그는 사물의 이치를 체득하여 정(情)을 따름이 아울러 여락(麗落)하였다.
전 비서감(秘書監) 우세남(虞世南)은 옛 사람을 초월할 만큼 그 이름을 떨쳤고 도(道)에 대해서는 당대에 으뜸이었다.
그가 곧 법사의 글을 모으고 그 서문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신묘(神妙)하기가 비할 데 없다면 산가지로 계산해서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인데,
지극한 이치[至理] 가 아득하다면 어떻게 승준(繩準:줄자)으로 재어 알 수 있겠는가.
진실로 변함없는 도[常道] 는 말로 형언할 수 없어서 마치 끊어진 벼랑과 같거늘 어찌 천종(天縱)50)에 기대어 그 묘명(杳冥)함을 엿볼 수 있겠는가.
오문(五門)과 육도(六度)의 근원이나 반자(半字) 일승(一乘)의 가르침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구류(九流) 백씨(百氏)의 안목과 삼통(三洞) 칠검(七撿)의 문장을 가지고 어떻게 경위(經緯:縱橫)로 엮어서 그 규모를 드러낼 수 있겠으며,
어찌 심력(心力)으로써 그 경계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것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 당대에 그런 사람이 있으니,
법사는 어릴 적부터 삼론(三論)을 익혀 이름이 조야(朝野)에 알려졌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숱한 경전을 다 꿰뚫어 알아서 그 명성을 수속(殊俗)에 떨쳤다.
그의 행동거지는 엄숙하고 공손하였고 절개 또한 널리 알려졌다.
청한(淸翰)에 계속해 머물면서 은미한 이치를 발견하여 가려냈다.
대지가 봄을 만난 것과 같아서 용(用)을 감추었으나 인(仁)이 나타나는 터전이었고,
어리석은 듯 말더듬이인 척 밖으로는 어두운 것같이 행동했으나 안으로 밝은 공이 있었다.
진실로 그의 지혜는 측해(測海)와 같았고,
그의 도학은 미천(彌天)에 버금할 만하였으니,
어찌 그의 지조(止操)를 어제 산도(山濤)에 비교할 것이며,
신비함이 어찌 유량(庾亮)에 짝할 만할 뿐이겠는가?
그리고 그의 글 내용은 법에 맞게 썼으면서도 촌스럽지 않으며,
화려하면서도 법도가 있어서 마치 팔음(八音)이 한꺼번에 울려 퍼지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색깔[五色] 이 서로 통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도행(道行)은 바른 견해를 삼공(三空)에서 받아들이고 중생[群生] 을 팔고(八苦)에서 건졌으며,
이미 학문이 넓은데도 마음을 낮추었고 또한 낮은 데로 나아가면서도 높은 데 있는 사람을 조롱하였으니,
실로 석가 종족의 동량(棟梁)이며,
선한 사람[善人] 의 우의(羽儀)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부족한 사람에겐 보태 주고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은 보호해 주며,
남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로 하였다.
풍광(風光)을 소중하게 여겨 숲 속 창문으로 햇볕을 물리치고,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안개와 노을[烟霞] 을 짊어지고 살았으며 원력(願力)은 융화하였으나 자취를 감추고 숨어 살았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1920-22_Claude_Monet_The_Japanese_Footbridge_MOMA_NY_anagoria
https://en.wikipedia.org/wiki/File:1920-22_Claude_Monet_The_Japanese_Footbridge_MOMA_NY_anagoria.JPG Artist [show]Claude Monet (1840–1926) Link back to Creator infobox template wikidata:Q296 Title English: The Japanese Footbridge Credit line user:Anagoria Permission public domain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an_Standing,_Hands_on_Head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stasahasrika_Prajnaparamita_Avalokitesvara_Bodhisattva_Nalanda
https://en.wikipedia.org/wiki/File:Astasahasrika_Prajnaparamita_Avalokitesvara_Bodhisattva_Nalanda.jpeg English: Painting of Avalokitesvara Bodhisattva. Sanskrit Astasahasrika Prajnaparamita Sutra manuscript written in the Ranjana script. Nalanda, Bihar, India. Circa 700-1100 CE. Author Asia Society created the file. Artwork created by an anonymous ancient source. Licensing[edit]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olegio-ayacu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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