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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3-02-12_금강반야론_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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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3-02-12_금강반야론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9. 2. 12. 12:11



®

『금강반야론』

K0555
T1510

금강반야론 상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금강반야론_K0555_T1510 핵심요약



♣0555-001♧
『금강반야론』

금강반야론 상권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금강반야론




해제보기

 

금강반야론(金剛般若論) 상권(上卷)

 

무착(無着)보살 지음

수(隋)나라 달마급다(達磨笈多) 한역

이한정 번역

 


불법의 출생(出生)이 비할 데 없고

법계(法界)를 명시(明示)하는 것이 제일이네.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이 같은 구의취(句義聚)는

일체의 성인도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이 작은 『금강바라밀경』이

그 이름대로 세력을 떨치리라.

지혜로운 이가 말씀하신 가르침과 이치를

듣고서 옮겨 다시 우리들에게 그 말씀을 전했으니

 

저 성인[類]과 선배[輩]들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오며

모두 바른 마음으로 예를 올립니다.

제가 마땅히 힘써 그 이치를 다시 세워

나와 남을 위해 해석을 이어가겠습니다.

 

일곱 종류의 구의(句義)가 성립해야만, 

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성립하게 된다. 

여기서 일곱 종류의 구의란, 

첫 번째가 종성(種性)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행상(行相)의 발기(發起)이고, 

세 번째가 머물러야 하는 처소의 행(行)이고, 

네 번째가 대치(對治)이고, 

다섯 번째가 퇴실하지 않는 것[不失]이고, 

여섯 번째가 지(地)이고, 

일곱 번째가 명자(名字)를 세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곱 종류의 구의는 『반야바라밀경』 안에서 성립되는 까닭에 구의라 부르는 것이다. 

앞의 여섯 번째까지의 구의는 보살이 행해야 하는 구경(究竟)을 현시하고, 

일곱 번째의 구의는 이 같은 법문(法門)의 성립을 현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한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종성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까닭에, 

세간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이 같은 부처님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이치를 현시하고자 하는 까닭에, 

상좌(上座) 수보리(須菩提)가 경전의 서두에서 “세상에 드문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어떻게 제일가는 선섭(善攝)으로 모든 보살마하살을 섭수(攝受)하셨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같은 구절에서의 선섭이란, 

소위 이미 성숙된 보살을 가리키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증득하시고 법륜을 굴리실 때에 다섯 가지 이치로써 보살법(菩薩法)을 세웠기 때문이다. 

부촉(付囑)이란 그와 같이 이미 섭수(攝受)받은 보살 등이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시는 때에
다시 그러한 다섯 가지 이치를 이와 같이 세웠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선섭과 부촉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여기서는 그 종성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현시하고자 함이다.

 

행상의 발기는 마치 경전에서 “보살이 어떻게 이와 같은 것에 응주(應住)하는가?”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저 응주(應住)란 지욕과 원력[欲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마땅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란 소위 삼마발제(三摩跋提)에 상응하기 때문이고, 

마음을 항복받는다는 것이란 산란한 마음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욕(欲:

志欲)이란 올바르게 구한다는 뜻이고, 

원(願)이란 구하는 바가 있어서 마음과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삼마발제에 상응하는 것이란 무분별(無分別)의 삼마제(三摩提)이다. 

산란한 마음을 조복한다는 것은 만약 저와 같은 삼마발제의 마음이 산란해지면 이를 제어하여 다시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첫 번째는 도의 섭수를 현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도의 성취를 현시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도에서의 불퇴전(不退轉)을 현시하는 것이니 여기서 머물러야 하는 처소의 행이란
소위 저와 같은 행상의 발기가 머무르게 되는 처소이다.

 

여기에 다시 열여덟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소위 첫 번째가 발심(發心)이고, 

두 번째가 바라밀에 상응하는 행이고, 

세 번째가 색신(色身)을 얻고자 하는 지욕[欲:志欲]이고, 

네 번째가 법신(法身)을 얻고자 하는 지욕이고, 

다섯 번째가 도를 수습하여 수승함을 얻더라도 만결(慢結)을 내지 않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부처님께서 출세하시는 시절을 여의지 않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청정한 불국토의 원력을 세우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외도(外道)의 논서에서 야기되는 산란한 마음을 멀리 여의는[遠離] 것이고, 

열 번째는 색신과 중생신(衆生身)에 사로잡힌 가운데에서 잘 관찰하여 이에 상응하는 행을 깨뜨리는 것이고,

 

열한 번째는 여래를 공양하고 시봉하는 것이고, 

열두 번째는 정진을 방해하거나 퇴실(退失)하게 하는 이양(利養) 및 뜨거운 번뇌[熱惱]의 핍박을 멀리 여의는 것이고, 

열세 번째는 고(苦)를 인내하는 것이고, 

열네 번째는 적정(寂靜)의 미경(味境)을 여의는 것이고, 

열다섯 번째는 도를 증득하는 때에 희근(喜根)의 동요(動搖)를 멀리 여의는 것이고, 

열여섯 번째는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고, 

열일곱 번째는 도를 증득하는 것이고, 

열여덟 번째는 불지(佛地)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모두 열여덟 종류의 주처가 된다.

 

이 가운데에서 보살이 이와 같이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것은 일체의 중생을 멸도(滅度)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미 바라밀 따위에 발심하고, 

이에 상응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여래의 색신과 법신을 얻기 위해서이다. 

낙욕(樂欲)을 발생시켜서 도를 증득하는 가운데 그 장애가 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하는 것이니, 

만결이나 희근의 동요 따위를 여읜 마음에서 도를 증득하기 위한 까닭에, 

가르침을 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까닭에 도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불지(佛地)를 구하는 것으로, 

이러한 것을 이 같은 차례에 따라 이어받게 되고, 

다시 이러한 가운데에서 발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이처럼 보살은 이러한 마음을 내어야만 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라밀에 상응하게 행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보살이 물건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색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32상(相)의 구족(具足)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같은 구절에서 말하는 법신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소위 언설법신(言說法身)과 증득법신(證得法身)이다. 

이 같은 증득법신에도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소위 지상법신(智相法身)과 복상법신(福相法身)이 있다. 

언설법신은 말하자면 수다라(修多羅) 등이니, 

이 같은 법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많은 중생이 미래세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 이치가 전도(顚倒)되지 않은 생각[想]이 실다운 생각[實想]이니, 

말씀하신 그대로 그 이치에 집착하는 저와 같은 것은 실다운 생각이 아니기에, 

지상법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어떠한 법이 여래께서 바르게 깨달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복상법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만약 이 같은 삼천대천세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도를 수습하여 수승함을 얻더라도 만결을 내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로다아반나파(須嚧多阿般那頗)1)가 이 같은 생각을 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부처님께서 출세간하시는 시절을 여의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어떠한 법이 여래께서 연등불의 처소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청정한 불국토의 원력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내가 장엄 국토를 성취하였다고 말한다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중생을 성숙시키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마치 장부(丈夫)처럼”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외도의 논설에서 야기되는 산란함을 멀리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에는 어떠한가? 

만약 항가강(恒伽江)에 있는 모든 모래가 다시 항가강에 있는”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색(色)과 중생신(衆生身)에 사로잡힌 가운데에서 잘 관찰하여 이에 상응하는 행을 깨뜨리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대지의 티끌을”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여래를 공양하고 시봉케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32대장부상(大丈夫相)으로써 여래(如來)ㆍ응(應)ㆍ정변각(正遍覺)을 친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정진하는 도중에 물러나게 하거나 발명하지 못하는[不發] 이양 및 뜨거운 번뇌[熱惱]의 핍박을 멀리 여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여인이거나 장부가 항가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중생신을 버리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중생신 가운데 피곤한 마음과 뜨거운 번뇌가 있으니, 

이 같은 두 종류가 저와 같은 정진을 퇴실케 하거나 발명하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고통을 인내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만약 여래가 인욕바라밀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적정(寂靜)의 미상[味:味相]에 대한 탐착을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여인이거나 장부가 이 같은 법문을 받아서 간직하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도를 증득하는 때에 희근(喜根)의 동요를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보살이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가르침을 구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어떤 법을 여래가 연등여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도를 증득케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장부의 묘신(妙身)이나 대신(大身)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묘신이란 유신(有身)을 지득(至得)하여 유신을 성취하게 되면 마침내 전의(轉依)하기 때문이고, 

대신이란 일체의 유신으로 그와 같은 유신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불지(佛地)를 구하는 것이니, 

그와 같은 불지에도 다시 여섯 종류의 구족(具足)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섭전의구족(攝轉依具足)은 말하자면 국토정구족(國土淨具足)이니, 

무상견지정구족(無上見智淨具足)ㆍ수형호신구족(隨形好身具足)ㆍ상신구족(相身具足)ㆍ어구족(語具足)ㆍ심구족(心具足)이다.

 

그 심구족에 다시 염처(念處)가 있고, 

정각(正覺)이 있고, 

시설대리법(施設大利法)이 있고, 

법신(法身)의 섭취가 있고, 

부주생사열반(不住生死涅槃)이 있고, 

행에 머무르는 것의 청정함[行住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행에 머무르는 것의 청정함 가운데에서 다시 위의행에 머무는 것[威儀行住]이 있고, 

명색을 관찰하는 자재한 행에 머무는 것[名色觀自在行住]이 있고, 

염오(染汚)되지 않은 행에 머무는 것[不染行住]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불염(不染) 가운데에서 다시 설법불염(說法不染)과 유전불염(流轉不染)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국토의 청정을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국토의 장엄을 성취하였다고 이같이 말한다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무상(無上)의 지견(智見)을 청정하게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육안(肉眼)이 있느냐? 

또는 만약 삼천대천세계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형체를 좇아서 호신(好身)을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색신을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신(相身)을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상호의 구족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일체의 언어를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에는 어떠한가? 

여래가 설법한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내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심구족 가운데에서 그 ‘염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정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닫는다는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시설대리법(施設大利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다시 수보리여,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모든 수미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법신을 섭취(攝取)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를 상호의 구족[相具足]으로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상호의 구족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쳤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내지 말거라”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이치는 상구족(相具足)의 체(體)가 보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또한 상구족을 인(因)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은 색(色)의 자성(自性)이기 때문에 열반법에도 머물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이와 같이 보살승(菩薩乘)을 발명하여 이를 행하겠다고 생각을 내는 이에게 단멸(斷滅)이라고 말할 만한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유전법(流轉法)에 머물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보살의 복취(福聚)를 받지도 말고 취하지도 말아야 하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구절에서 받는다는 것이란 유(有)를 설명하는 것이고, 

취한다는 것이란 그와 같은 취도(趣道)를 취하기 때문이다. 

복취 가운데의 과보에 모두 상응하지 않아야만, 

행주정(行住淨) 가운데에서 위의행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만약 여래가 가셨다고 이와 같이 말하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명색을 관찰하여 이를 깨트리고 자재한 행에 머물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다시 선가자(善家子)와 선가녀(善家女)가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대지의 티끌”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불염행주(不染行住) 가운데에서의 설법불염(說法不染)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다시 보살이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세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유전불염(流轉不染)에 해당하기 때문이니,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치 별빛ㆍ안질ㆍ등잔ㆍ환영과

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처럼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이와 같이 관찰하여야 한다.

 

이 게송에서는 네 종류의 유위상(有爲相)이 현시(顯示)되었으니, 

소위 자성상(自性相)이고, 

착소주미상(著所住味相)이고, 

수순과실상(隨順過失相)이고, 

수순출리상(隨順出離相)이다.

 

여기서 자성상은 공통되는 모양[共相]을 보고 식별하는 것이니, 

이 같은 모양은 마치 별빛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가 없는 무명(無明) 속에서도 그와 같은 빛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지혜가 있는 명(明) 가운데에서는 그와 같은 빛이 없기 때문에, 

인법(人法)과 자아(自我)를 보되, 

마치 안질 환자처럼 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치가 없는 것을 취하기 때문이니, 

식별하기는 하되 마치 등잔불 밑에서 보듯이 희미하게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애(渴愛)에 깊이 젖어서 그 연(緣)을 취하는 까닭에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듯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착소주미상이란 전도(顚倒)된 경계의 미상(味相)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그와 같은 것을 마치 환영처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되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순과실상이란 무상(無相) 따위에 순순히 따르기 때문이니, 

그와 같은 것을 이슬로 비유한 것은 그 상(相)의 체(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무상에 순순히 따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것을 물거품에 비유한 것은 고(苦)의 체에 순순히 따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그 수(受)가 물거품과 같기 때문이고, 

만약 ‘수’가 있더라도, 

모두가 ‘고’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유(有)’에 부수되어 그와 같은 ‘고’가 생겨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이 고고(苦苦)이고, 

파멸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이 괴고(壞苦)이고, 

서로 여의지 못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이 행고(行苦)이다. 

다시 제4선(禪) 및 무색계 가운데에서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세우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순출리상이란 인법(人法)과 무아의 수순에 반연(攀緣)하기 때문이고 출리(出離)를 얻기 때문에, 

무아로써 출리를 삼는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수순이란 소위 과거 따위의 행이니, 

꿈 따위의 비유로써 그와 같은 것이 과거의 행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한 것이며, 

기억되는 처소이기 때문에 꿈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란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번개 같다고 하는 것이고, 

미래란 그와 같은 추악한 종자(種子)가 마치 허공처럼 그 마음을 끌어서 빼내는 까닭에 구름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3세에 유행하여 그 생을 전의(轉依)하는 것임을 깨닫고 나면, 

바로 무아를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수순출리상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그와 같은 주처(住處) 등을 간략하게 여덟 종류로 삼아 만족을 얻는 것으로, 

말하자면 섭주처(攝住處)ㆍ바라밀정주처(波羅蜜淨住處)ㆍ욕주처(欲住處)ㆍ이장애주처(離障礙住處)ㆍ정심주처(定心住處)ㆍ구경주처(究竟住處)ㆍ광대주처(廣大住處)ㆍ심심주처(甚深住處)이다.

 

여기서 섭주처란 발심(發心)을 가리키는 것이고, 

바라밀정주처란 바라밀에 상응하는 행을 가리키는 것이고, 

욕주처란 색신과 법신을 얻고자 하는 지욕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장애주처란 여타의 열두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고, 

정심주처란 도의 증득을 가리키는 것이고, 

구경주처란 여기서부터는 모두 불지를 구하게 되는 것임을 가리키고, 

광대주처 및 심심주처는 일체의 처소에 통용되는 것이다.

 

초주처(初住處)에서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만”이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모든 중생도 이와 같기에 이러한 것이 광대(廣大)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이처럼 “보살이 중생상(衆生想)으로 전의하면”이라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심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2 주처에서 만약 “보살이 일에 머물지 않고”라고 말씀하시거나, 

“일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이 심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그와 같은 모든 복취가 양(量)으로 취할 수 없다는 이와 같은 것이 광대에 해당한다. 

이처럼 그 밖의 주처에서도 광대와 심심 등이 그 상응하는 것에 부수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주처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어떠한 것이 대치인가 하면, 

그와 같은 것에 상응하는 행상(行相)이니, 

여러 주처로 행하는 때에 두 종류의 대치, 

소위 사행(邪行)과 공견정행(共見正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견(見)이란 소위 분별(分別)이다.

 

초주처에서 “이처럼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내되, 

모든 중생이”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사행대치(邪行對治)이고, 

“이와 같은 마음을 낸다는 것”은 보살의 사행이다. 

다시 “만약 보살이 중생상으로 전의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이 공견정행대치이다. 

이 같은 분별의 집착도 보살이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니, 

소위 “내가 중생을 멸도(滅度)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2 주처에서 “이처럼 보시를 행하되”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사행대치이고, 

“보시 아닌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이 보살의 사행이다. 

다시 “일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공견정행대치이다. 

이 같은 분별의 집착도 보살이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니,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떠한 것이 잃어버리지 않는 것[不失]인가 하면, 

소위 두 변을 여의는 것이다. 

여기서 ‘두 변’이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소위 증익변(增益邊)과 손감변(損減邊)이다. 

만약 여언사법(如言辭法) 가운데에서 유자성(有自性)에 분별 집착하는 이러한 것은 증익변이 되고, 

만약 인법ㆍ무아의 일 가운데에서 없다고 집착하는 이러한 것이 손감변이 된다.

 

여기서 만약 세존께서 복이 취집(聚集)하였거나 취집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경우, 

이러한 것은 증익변을 차단하는 것이니, 

그러한 복취를 분별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복취를 말씀하셨다는 이러한 것은 손감변을 차단하는 것이니, 

그와 같은 것이 비록 언사에 해당하는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일을 설명할 수 있기에, 

여래께서 복취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서 현시하는 것은 이러한 것으로 “수보리여, 

불법(佛法)”에서의 불법을, 

여래께서 불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증익변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불법이라 부른다”는 이러한 것은 손감변을 차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여래께서 불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불공(不共)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이러한 것을 불법이라 부른다는 것은 상응(相應)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상응인가 하면, 

만약 불법이 그 말씀처럼 자성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불법도, 

비록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우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자성(無自性)을 세제(世諦)로 삼는 까닭에, 

여래께서 불법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의 처소에서 불공 및 상응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불법이란 바라밀을 섭수하는 일과 염처 등의 보리분(菩提分)임을 알아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두 변을 여의는 까닭에, 

그와 같은 것을 대치하여 다시 퇴실하지 않으므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지(地)인가 하면, 

이 같은 지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신행지(信行地)ㆍ정심지(淨心地)ㆍ여래지(如來地)이다. 

여기서의 16주처는 신행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증도주처는 정심지이고, 

구경주처는 여래지이다.

 

어떻게 그 이름을 세우는가 하면, 

금강처럼 능히 끊는다고 말해지는 이름은 두 가지 이치와 상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에 따라 정견행(正見行)에 섭입(攝入)되고 사견행(邪見行)에 섭입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금강이란 가느다란 절굿공이다. 

여기서 가늘다고 한 것은 지혜의 인(因)이기 때문이고, 

절굿공이라 한 것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고, 

능히 끊는다고 한 것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에 의하여 끊어지는 것이 마치 금강저(金剛杵)로 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을 금강능단이라 부른다.

 

또 금강저의 형태를 그려보면, 

첫 부분과 끝부분은 넓어지고 가운데 부분은 좁아지는데,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이 그 중간에서 좁아지는 것을 정심지라 한다. 

첫 부분과 끝부분이 넓어진다는 것은 신행지와 여래지이니, 

이것은 불공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와 같은 다섯 종류의 구절의 의미가 그 구절의 의미마다 의지하는 바를 알아야 하니, 

그와 같은 것은 모두 지(地)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지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의 말씀이 수다라신(修多羅身)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같은 구절의 의미를 지금 설명하도록 하겠다.

 

세존께서 어째서 적정한 위의를 갖추어 앉아 계셨는가 하면, 

오직 적정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법을 능각(能覺)하고 능설(能說)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상좌 수보리가 질문하였는가 하면, 

여기에는 여섯 종류의 인연이 있으니, 

의심을 끊고자 함이고, 

신해(信解)를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고, 

깊고 깊음의 이치에 들어가게 하고자 함이고, 

퇴전(退轉)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고, 

환희심을 내게 하고자 함이고,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것이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가? 

만약 의심하는 이가 있으면 그 의심을 끊고자 함이고, 

복덕을 즐기더라도 그 마음이 성숙하지 못한 여러 보살들이 많은 복덕을 전해 듣고 반야바라밀에 대한 신해를 일으키게 하고자 함이고, 

이미 그 마음이 성숙된 이는 깊고 깊음의 이치로 들어가게 하고자 함이고, 

이미 불경천(不輕賤)을 획득한 이는 그 탐심에 연유해서 수행의 많은 공덕을 수지하는 것으로 인해서 다시 퇴전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고, 

이미 섭수의 수순과 청정한 마음을 얻은 이는 법에 스스로 들어가 이를 인견(忍見)하고 환희심을 내게 하고자 함이고, 

미래세에 대승의 교리를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함이다.

 

만약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면, 

의심 내는 이로 하여금 이를 인견하게 하고자 함이고, 

복덕을 기꺼워하거나 마음이 이미 성숙된 여러 보살들이 섭수하게 하고자 함이고, 

이미 불경천을 얻은 이는 힘써 정진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자 함이고, 

이미 마음이 깨끗한 이는 환희심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여러 보살에게는 일곱 종류의 대(大)가 있는 까닭에, 

이 같은 대중생(大衆生)을 마하살타(摩訶薩埵)라 부른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 일곱 종류의 ‘대’인가 하면, 

소위 법대(法大)ㆍ신해대(信解大)ㆍ정심대(淨心大)ㆍ자량대(資糧大)ㆍ시대(時大)ㆍ과보대(果報大)이니, 

보살지에서 가지(加持)된다고 설명한 그대로이다.

 

경전에서 “선섭(善攝)이고 제일의 선섭이니, 

여러 보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선섭이고 제일인가 하면, 

이익과 즐거움이 상응하는 것이 선섭이다. 

제일에는 여섯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첫 번째는 시(時)이고, 

두 번째는 차별(差別)이고, 

세 번째는 고대(高大)이고, 

네 번째는 뇌고(牢固)이고, 

다섯 번째는 보편(普遍)이고, 

여섯 번째는 이상(異相)이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 시인가 하면, 

현재 보이는 법과 미래이니, 

그와 같은 보살의 선섭 가운데에서의 즐거움이 바로 현재 보이는 법이 되고, 

그 이익이 미래법이 된다. 

어떠한 것이 차별인가 하면, 

세간의 삼마발제와 출세간의 성자ㆍ성문ㆍ독각 등의 선섭 가운데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고대인가 하면, 

이 같은 선섭에는 유상(有上)이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뇌고’인가 하면, 

소위 필경(畢竟)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보편인가 하면, 

나와 남의 유신(有身)을 자연스럽게 선섭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이상인가 하면, 

청정하지 못한 보살의 선섭 중에서 수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제일의 부촉”이라 말씀하시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제일가는 부촉인가 하면, 

여기에도 여섯 종류의 인연이 있다.

첫 번째는 입처(入處)이고, 

두 번째는 법이득(法爾得)이고, 

세 번째는 전교(傳敎)이고, 

네 번째는 부실(不失)이고, 

다섯 번째는 비(悲)이고, 

여섯 번째는 존중(尊重)이다.

 

어떠한 것이 입처인가 하면, 

선지식에게 잘 부촉받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법이득인가 하면, 

이미 선섭을 얻은 보살이 다른 이를 이치에 따라 선섭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전교인가 하면, 

“그대들이 다른 보살을 잘 선섭해야 한다”는 이와 같은 것을 전교라 부른다. 

다음의 세 종류는 그 순서에 따라 부실ㆍ비ㆍ존중 따위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어째서 오직 행(行)의 발기만을 질문하는가 하면, 

보살승에는 세 종류의 보리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고, 

그 질문이 어질기 때문에 상좌 수보리에게 “어질도다”라고 칭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란 중생으로 섭수되는 이들을 그 총상(總相)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고, 

난생(卵生) 등은 차별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또 생을 받는 의지의 경계에 섭수되는 차별을 알아야 하니, 

화생(化生) 등에 이르기까지 그 생을 따로 받기 때문이다. 

만약 유색(有色)이거나 무색(無色)이라면 그 의지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고, 

만약 유상(有想)이거나 무상(無想)이거나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이라면 그 경계에 섭수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계를 시설(施設)하여 그 시설된 것에 머무른다”라는 것이란,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에 머무르는 중생계는 부처님이 시설하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째서 “내가 모두 열반에 들게 하겠다”라고 발원하는가 하면, 

이 같은 불가득(不可得)의 이치로 생(生)을 섭수하고자 함이고, 

허물없이 모두 여기서 거듭나게 하고자 함이니,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난생 등의 생(生)도 중생수(衆生數)에 넣어 발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난생ㆍ습생ㆍ무상과 비유상비무상 등은 불가능한 것인데도, 

어째서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하겠다고 하는가? 

세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난처(難處)에서 생겨난 이는 그 시절을 기다리기 때문이고, 

난처 아닌 곳에서 태어나되 미처 성숙하지 못한 이는 이를 성숙하게 하기 때문이고, 

이미 성숙한 이는 해탈시키기 때문이다.

 

어째서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를 설명하면서 곧바로 열반을 설명하지 않는가? 

만약 이와 같은 경우에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초선(初禪) 등의 방편열반(方便涅槃)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것은 스스로의 장부력(丈夫力)으로 비롯되는 까닭에, 

부처님 없이도 얻을 수 있되, 

다만 구경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유여열반계(有餘涅槃界)를 설명하지 않는가? 

그와 같은 것은 그 과보가 공통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숙업(宿業)에 연유하는 것이고, 

또 부처님의 말씀에 맞게[値] 과를 얻기 때문이다. 

또 일향(一向)이 아니기에 그 신체의 고가 남아 있기 때문이고, 

이와 같은 열반 및 유여열반 등은 장부력의 과보이기 때문이고, 

공통되는 과보이기 때문이고, 

구경의 과가 아니기 때문이고, 

일향의 과가 아니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무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같은 무량한 중생이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이란 난생 등의 생 하나하나가 무량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다”는 이러한 것은 무슨 이치인가 하면, 

보살이 스스로 열반을 얻더라도 중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중생상으로 전의하면 바로 보살이라 일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만약 보살이 중생과 다르다는 생각으로 전의하는 경우, 

이것도 자체상(自體想)이 아니기에 보살이라 일컫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중생상(衆生想)ㆍ명상(命想)ㆍ인상(人想)으로 전의하면 보살이라 일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만약 번뇌심(煩惱心)으로 중생상ㆍ명상ㆍ인상을 취하여 전의하는 그와 같은 경우, 

바로 아상(我想)이 일어나 중생 가운데 처해서 중생상으로 전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은 그와 같은 것으로 전의하지 않으니, 

이미 아견(我見)을 끊은 까닭에 자재행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행(行)이란 5음(陰)의 행을 가리킨다.] 그 모양이 평등하기 때문에 나와 남이 평등하다고 친애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보살은 중생상ㆍ명상ㆍ인상을 견(見)으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치이다.

 

다시 경전에서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무르는 가운데에서의 지욕과 원력[欲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아상’으로 전의하면 ‘보살’이라 일컫지 못한다는 것”이란 이와 같은 수행 가운데에 상응하는 삼마발제의 시분(時分)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만약 중생상ㆍ명상ㆍ인상이 전의하면 ‘보살’이라 일컫지 못한다는 것”이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 가운데에서 그 섭수되거나 이산(離散)되는 시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보살이 삼마발제에 상응하거나 이산하는 때에는 중생상도 역시 전의하지 않으니, 

그들과 같이 염상(焰相:

煩惱相)에 머무르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을 얻는 중생이 없다는 것”과 “이것은 그와 같은 지욕과 원력을 성취한다는 것”이란 여러 주처를 섭수하여 가장 수승한 저것과 상응하는 행상으로 인하여 여타의 주처로 행하는 때이니, 

지욕과 원력에 의지해서 그 지득(至得)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욕과 원력의 이치는 다시 해설하지 않겠다.

 

이 이후에 그 밖의 주처 가운데에서 다섯 종류가 그 상응하는 것에 부수되어 해석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첫 번째가 이치에 의지하는 것[依義]이고, 

두 번째가 상의 설명[說相]이고, 

세 번째가 섭지(攝持)이고, 

네 번째가 안립(安立)이고, 

다섯 번째가 현현(顯現)이다.

 

주처의 대치가 의의이고, 

그와 같은 주처에 즉(卽)하는 것이 설상이 된다. 

지욕과 원력이 섭지가 되고, 

주처의 제일의(第一義)가 안립이 되고, 

삼마제에 상응하는 것이 현현이 되기에, 

바라밀의 청정한 주처 가운데에 처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보살이 물건에 머물지 않고 마땅히 보시 등을 행하여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집착에 머무르는 것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마땅히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6바라밀의 앞부분에서 일체의 단나(檀那)의 체성(體性)을 섭수하고자 함이다.

 

단나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의 자생시(資生施)는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이고, 

두 번째의 무외시(無畏施)는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ㆍ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고, 

세 번째의 법시(法施)는 비리야바라밀(毘離耶波羅蜜)ㆍ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ㆍ발라신양바라밀(鉢羅腎攘波羅蜜) 등이다.

 

만약 정진하지 못하고 수법(受法)하는 이에게 설법을 하는 때에, 

피곤한 까닭에 설법을 하지 못하거나, 

정(定)에 들지 못하거나 공경과 공양을 탐하거나 추위나 더위를 인내하지 못하는 따위로 괴로움에 몰린 까닭에 염오심(染汚心)으로 설법하거나, 

지혜가 없이 전도되게 설법하면 허물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 같은 세 가지를 여의고서 법시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바라밀에는 두 종류의 과보가 있으니, 

소위 미래에 받을 과[未來果]와 현재에 받는 과[現在果]이다.

 

미래에 받을 과란 단나바라밀로서 커다란 복의 과보를 받는 것이고, 

시라바라밀로서 자재신(自在身)의 구족을 얻는 것이니, 

말하자면 제석천(帝釋天)ㆍ범천(梵天) 등이다. 

찬제바라밀은 커다란 조력자나 커다란 권속을 얻게 되는 것이고, 

비리야바라밀은 과보 등이 단절하지 않는 것을 얻게 되고, 

선나바라밀은 허물어지지 않는 금강신(金剛身)의 생성을 얻게 되는 것이고, 

발라신양바라밀은 여러 가지 근(根)의 예리함과 여러 가지 즐거움 등을 얻어 대인(大人)의 무리 가운데에서도 자재함 등을 얻는 것이다. 

현재에 받는 과란 일체 대중의 공경과 공양 및 현법(現法)의 열반 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약 보살이 미래에 받을 과를 구하고자 보시를 행하되, 

물건에 머무르면서 보시를 행하게 되면, 

그 보시한 물건으로 인해서 다시 그와 같은 물건에 관한 과보의 취득을 바라게 되는 까닭에, 

경전에서 “물건에 머물지 말고 마땅히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약 미래의 시라(尸羅) 등의 그 과보를 구하려는 까닭에 보시를 행한다면, 

머무름이 있는[有所住]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시라 등의 과보는 너무 많아서 여기서 모두 분별할 수 없는 까닭에 총괄적으로 ‘머무름이 있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약 현재에 받는 과의 공경과 공양 등을 구하고자 보시를 행한다면,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색 등에 머물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약 현법의 열반을 구하고자 보시를 행한다면, 

이것은 법에 머무르면서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 “법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경전에서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시하고자 하는 지욕과 원력의 섭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경전에서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같이 머물지 않아야만 제일의를 안립(安立)하게 되는 까닭이고,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그 밖의 모든 제일의가 물건 등에 머물지 않는다는 이 같은 모든 일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보살은 이같이 보시를 행하여야 하니, 

상(相)이라는 생각[想]에 머물지 않아야만”이라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이 나타내 보이는 것은 말하자면 삼매와 산란한 마음을 섭수하는 것이니, 

이 같은 두 시분에 상의 생각에 머물지 않는, 

이와 같은 것을 머물지 않는 것으로 세우게 된다. 

또 보살이 복덕을 탐내는 까닭에 이와 같은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이를 감당하게 하고자 세존께서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니, 

복취가 아무리 많더라도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다.

 

첫 번째는 일체의 처소에 편만한 것이니,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 머무는 가운데에서 복이 생겨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광대(廣大)하고 고대(高大)하고 수승하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무진해서 구경토록 다하지 않기 때문이니, 

색신의 주처를 얻고자 하는 지욕[欲]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상의 구족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여래의 색신이란 만결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상의 구족”이라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여래의 색신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따라서 상좌 수보리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 같은 이치를 원만하게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수보리여, 

모든 상의 구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은 허망한 것이기에, 

여기서 지욕과 원력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이와 같은 이치 가운데에서 마땅히 섭지되는 까닭에, 

아울러 여기서 제일의를 안립하게 되고, 

제일의 가운데에서 상의 구족도 허망한 것이 되기에, 

상의 구족이 아닌 것으로 허망하지 않은 것을 삼게 된다.

 

경전에서 “이와 같은 여러 상은 비상(非相)이기에 마땅히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러한 것을 현전에 나타내는 것이니, 

말하자면 삼매의 상응과 산란한 마음을 섭수하는 시분이다. 

그것처럼 “상 가운데에서 비상으로 보게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언설법신의 주처를 얻고자 하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많은 중생이 미래세에 이와 같은 수다라의 글귀의 설명 등”이라고 말씀하신 것 가운데, 

여기서 수다라의 글귀의 설명이란 말하자면 소유(所有)의 이치임을 알아야 한다. 

어떠한 것이 글귀인가 하면, 

앞서 설명한 일곱 종류의 구의이다.

 

“상좌 수보리가 ‘미래세에 실다운 생각을 내지 않는다’고 마음 내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을 차단하고자 함이고, 

세존께서 “정법이 소멸하려는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수행이 점차로 소멸되어 가는 시절임을 알아야 한다.

 

이 이후로 세존께서 이처럼 수행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함이니, 

이와 같이 그 인을 모으시고자[集因] 함이고, 

이와 같이 선지식(善知識:善友)을 섭수하고자 함이고, 

이와 같이 복덕의 상응을 섭수하고자 함이고, 

이와 같이 실다운 생각[實想] 가운데에서 마땅히 실다운 생각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계율을 지켜 공덕이 있고 지혜가 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증상계학(增上戒學) 등의 3학(學)은 수행의 공덕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작은 욕 등의 공덕이 그 첫 부분이 되어 삼마지 등에 이르게 된다.

 

경전에서 “이미 한량없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에 대한 공양을 이루었으되,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신심이 청정하였노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집인(集因)’에 해당한다. 

한결같은 마음의 청정한 신심도 이와 같은 업을 얻는데 하물며 실다운 생각을 내는 것이겠는가?

 

경전에서 “여래께서는 모두 아시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명신(名身)을 아신다는 것이고, 

또 “여래께서는 모두 보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색신(色身)을 보는 것이니, 

말하자면 일체의 행주법(行住法)의 지음[所作] 가운데에서 그 마음을 아시고 그 의지하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것은 선지식에 섭수되는 것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한량없는 복취가 생겨나서 이를 취하게 되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복덕의 섭수를 보이고자 함이다. 

여기서 생겨난다는 것이란 복이 일어나는 시분이기 때문이고, 

취한다는 것이란 그것이 소멸되는 때에 그 종자를 섭지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이와 같은 여러 보살은 아상(我想)과 중생상(衆生想)으로의 전의가 전혀 없노라”라고 말씀하시고, 

또 “만약 법상(法想)으로 전의하게 되면 바로 유아(有我)를 취하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실다운 생각으로 다섯 종류의 그릇된 취함[邪取]을 대치하려는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다섯 종류의 그릇된 취함인가 하면, 

첫 번째가 외도(外道)이고, 

두 번째가 정법(正法) 내의 범부(凡夫)와 성문이고, 

세 번째가 증상만(增上慢)을 내는 보살이고, 

네 번째가 세간에 함께 하는 유상정(有想定)이고, 

다섯 번째가 무상정(無想定)이다.

 

첫 번째는 아상 등으로 전의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법상으로 전의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무법(無法)의 생각으로 전의하는 것이니, 

이것도 유법(有法)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유법을 취한다는 것이란 말하자면 무법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유상으로 전의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무상으로 전의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보살은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모두 전의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계율을 지니고 공덕이 있고 지혜가 있는 이에게는 한량없는 복취 등이 생겨나는 것임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어째서인가 하면”이라 말씀하시는, 

이 같은 말씀은 여기서 단지 법만을 잘못 취하였기 때문이니, 

법상으로 전의하는 것도 아니고, 

아상 등도 아닌 것이다. 

그 생각을 내는 것이나 이것에 의지하는 것으로 전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 가운데에서도 수면(隨眠:번뇌)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바로 나를 취함[我取]이 있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는 “만약 보살이 법상을 일으키면, 

‘나를 취함’ 등이 있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무법의 생각으로 전의하더라도 나를 취함 등이 있게 되니, 

이와 같은 자아 등의 생각으로 전의하는 가운데에, 

그 밖의 이치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경전에서 “바로 ‘나를 취함’이 있게 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기서 자체의 상속을 취하여 아상을 삼고 나를 취하는 것[我所取]으로 중생상을 삼는 것이니, 

말하자면 “내가 수명에 머무른다는 것”에서 명상(命想)을 취하게 되고, 

“취도(趣道)를 전전하여 그 밖의 취(趣)로 나아간다는 것”에서 인상(人想)을 취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마땅히 실다운 생각을 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실답지 못한 생각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이 같은 “수다라의 글귀의 설명 가운데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相)의 설명이니 언설법신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고, 

바로 그와 같이 실다운 생각을 낸다는 것이 지욕과 원력이다.

 

섭지란 이와 같은 보살이 다시 아상을 내지 않는 것이고, 

전의가 평등하다는 것은 제일의를 안립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법과 비법을 취해서는 안 되니”라는 말씀이 드러내어 깨닫게 하는 것은, 

말하자면 삼마발제의 상응과 산란한 마음을 섭수하는 시분이다. 

여기서 법과 비법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란 법체(法體)와 법무아(法無我)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언설법신의 요의(要義)란, 

경전에서 이 같은 이치로써 여래께서 언제나 뗏목의 비유로서 법문(法門)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은 것을 이해하는 이는 법조차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비법이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법조차도 버려야 한다’라고 한 것은 실다운 생각을 내기 때문이고, 

‘하물며 비법이랴?’라고 한 것은 이치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여기서 간략하게 보살이 언설법신을 얻고자 지욕하되 실답지 않은 생각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지혜의 생각을 얻고자 지욕하기 때문이고, 

법신의 주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뜻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서 정각을 이루는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을 이치에 의지해서 나타내 보이시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우친다는 것이겠는가?’라는 구절을 반대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니, 

여기서 법을 설한다는 것이란 정각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한다고 말할 만한 법”이라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법신에 이를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정법이 없다는 것이란 상좌 수보리가 부처님의 뜻을 유도하기 때문이고, 

세제(世諦)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리와 도달함이 지욕과 원력의 섭지이니, 

방편으로 비롯되는 까닭에 두 가지가 구비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세존의 의향에 따라 설명하게 되면, 

두 가지는 모두 없는 것이기에, 

이 같은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내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이해한 바에 따르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경전에서 “여래가 말씀하시는 법이 취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니, 

설법에 연유해서 보리에 도달함을 깨닫기 때문에, 

설법 가운데에서 제일의를 안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취하지 못한다는 것이란 바로 그 설법을 듣는 시분이고,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란 법을 연설하는 시분이다. 

비법이란 분별성(分別性)이기 때문이고, 

비법이 아니란 것은 법무아(法無我)이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어째서 무위(無爲)를 빌미로 삼아 성인(聖人)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인가 하면”이라 말씀하시는, 

이 같은 무위란 분별하지 않는다는 이치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유학(有學)이란 이름을 얻어 일어나지도 않고 짓지도 않는 가운데에서 여래로 전의하는 것을 청정이라 부르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여래는 무학(無學)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 무위의 이치는 삼마발제의 상응과 산란한 시분을 조복받는 것임을 현료(顯了)하고자 함이다. 

두 번째의 무위는 오직 제일의이니, 

무상(無上)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이 이후로 일체의 주처 가운데에서 모두 무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성인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앞서 여러 주처 가운데에서는 무위란 이름을 얻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서의 일체의 무위법을 요결(了決)했기 때문이다.

 

복상(福相)을 얻는 법신의 주처는 어떻게 나타나 보이는 것인가? 

그와 같이 모든 언설법신에서 여래의 복상이 출생하고 법신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한 곳에서 한 수의 4구게의 언설에 이르기까지 생겨나는 복이 몹시 많은 것이니, 

하물며 여래께서 복상을 갖춰서 법신을 지득하는 것이겠는가? 

어떠한 인으로서 언설법신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한 수의 4구게를 해설하는 것이 많은 복을 생겨나게 하는가 하면, 

바로 이 같은 이치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어째서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여기서 나오는가 하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가운데에서 널리 10법행(法行)의 아함(阿含)을 취집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세존이 여기서 나신다는 것”이란 세제이기 때문이고, 

부처님의 출생은 보리에 연유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즉 이 같은 두 가지가 함께 하는 까닭에 불법이라 부르는 것이니, 

보리와 부처님을 빌미로 삼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불법을 불법이라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경전에서 “그 생겨나는 복이 그와 같이 무량한 아승기(阿僧祇)보다 수승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복이 생겨나지 않는 것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여기서 복이란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복상의 법신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그것보다 수승하다는 것이란 지욕과 원력의 섭지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복취는 바로 복취가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복취를 설명하시고, 

“수보리여, 

불법을 불법이라 하게 되면 불법이 아니니, 

이러한 것을 불법이라 부르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복취와 불법을 빌미로 삼아 여래의 복상을 섭취해서 법신 가운데에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고, 

무위에 수순해서 이름붙이고자 함이니, 

삼마발제에 상응하고 아울러 산란한 마음을 조복하는 것은 다시 드러내어 깨닫지 않는다는 것이다.

 

“몹시 많겠나이다. 

바가바(婆伽婆)시여, 

몹시 많겠나이다. 

수가타(修伽陀)시여”라고 말씀하시는 두 마디는 마음을 수렴하여 마음을 지속시키는 것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고자 함이니, 

자심(自心)을 섭수하기 때문에 수지(受持)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에게 풀어 말한다는 것이란 그 구절의 미상(味相)을 해석하기 때문이고, 

한량없다는 것이란 비유로 들 수 없기 때문이고, 

아승기란 많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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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범어 srota āpanna의 음사어이며, 

수다원(須陀洹)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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