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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3-05-27_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_003 본문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K1506
T1732
제3권 상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_K1506_T1732 핵심요약
불기2563-05-27_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_003
http://buddhism007.tistory.com/5640
♣1506-003♧
제3권 상_핵심
Dalida - Lucas
Marc Anthony - Je Ne Suis Pas Un Heros
Jeanne Moreau - L'adolescente
R-Wan - Maudit Sort
● [pt op tr] fr sfed--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_K1506_T1732.txt ☞제3권 상
♣1506-003♧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제3권 상
○ [pt op tr]
[img2-49]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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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506V047P0032a01L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제3권 상
지엄 지음
박서연 번역
[제6회 타화천회(他化天會)]
22) 십지품(十地品) ⓛ
이 회상의 처음 네 가지 문은 앞과 똑같이 분별한다.
첫째는 명칭을 변별한 것이다.
타화자재천회(他化自在天會)는 처소를 따라서 명칭을 얻은 것이다.
「십지품」이란 것은 수(數)의 뜻으로써 명칭을 밝힌 것이다.
둘째, 온 뜻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상이 온 뜻이니,
앞은 아함이고,
다음은 증득에 들어가기 때문에 온 것이다.
두 번째는 품(品)이 온 뜻이다.
앞은 방편이 행을 돌려 보리를 향하는 것이고,
지금은 행상(行相)이 더욱 밝아져서 10지(地)에 전입(轉入)하는 것이니,
뜻의 차례[次第] 이기 때문이다.
셋째, 종지라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상이고,
두 번째는 품이다.
회상이라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스리는 바를 밝힌 것이니,
이른바 정사 번뇌(正使煩惱)의 업보와 성품의 세 가지 장애 위의 마음 종자이다.
둘째는 능히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올바른 무분별지(無分別智)와 보현의 성기지(性起智)이다.
셋째는 성취한 바의 덕인데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사람[人] 과 법[法] 이다.
사람에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정화(正化)와 조화(助化)이다.
각기 체(體)ㆍ상(相)ㆍ용(用)이 있는데 모두 성기(性起) 등을 통틀은 것이다.
법이란 것은 이른바 이교(理敎)와 행과(行果)이니,
모두 성기와 수생(修生) 등을 통틀은 것이다.
준거하여 생각하고 섭수하면 알 수 있다.
넷째는 성취한 지위를 밝힌 것이니,
이른바 10지의 지위와 보현 성기의 무루 법문 등이다.
만약 품의 종지를 논함에 네 가지 뜻을 준한다면 오직 수생(修生)을 취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또 이 품은 설하지 않는 것으로써 설함을 삼으니
그 뜻은 곧 보현의 덕위(德位)를 증득하는 것이고,
설하는 것으로써 설함을 삼으니 삼승의 종지이다.
넷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문】이 회상은 위의 2ㆍ3ㆍ4ㆍ5회상과 어떻게 다른가?
【답】우선 네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누(漏)와 무루(無漏)가 다른 것이고,
둘째는 본말(本末)이 다른 것이며,
셋째는 공(共)과 불공(不共)이 다른 것이니,
10지의 인천(人天)과 성문 등은 공통으로 채택되기 때문이다.
『지론(地論)』에서는 “또한 능히 인천 도를 성취함을 낳으니,
나머지를 행하면 그렇지 않다”고 했으니, 준거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는 지위가 다른 것이니, 이것이 전부이다.
【문】어째서 이 회상만이 홀로 개별적인 처소와 저 체용(體用)이 서로 융화해서
광명을 놓아 오고 가면서
온갖 장엄구를 모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인가?
【답】이 회상에서 법에 둘이 없음을 증득해 요달하고,
체용의 멀고 가까움이 모두 다름[別異] 이 없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개별적인 처소 등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또 이 회상 등은 증법(證法)이라서 사(事)로써 현취(玄趣)를 따로 표방하지 않고,
다만 총상(總相)을 얻어 나타낼 뿐이니,
위를 준거해서 생각하라.
이 회상에는 11품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에 있는 9품은 연(緣)이 덕용(德用)을 성취함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에 있는 2품은 성기(性起)의 체용을 밝힘으로써 모든 회상에서 배우는 법으로 삼은 것이다.
처음의 9품 안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에 있는 6품은 인행(因行)의 만족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으로 「부사의품」 이하에 있는 3품의 경문은 인(因)이 얻을 바의 과(果)를 성취함을 변별한 것이다.
【문】어째서 과(果)를 개별적인 처소에 설하지 않았는가?
【답】이 경의 상하는 법을 나타내서 이(理)를 궁진한 것이니,
높은 불지(佛地)를 추구하는 데는 불가설(不可說)이 올바름이 된다.
이 가운데서 설한 것은 동일하게 증득함을 밝히기 위한 것인데,
간략히는 과(果)를 들어서 인(因)을 나타냈기 때문에 설한 것이다.
처음 6품의 내용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1품은 행위(行位)의 체(體)를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5품은 덕용을 변별한 것이다.
체문(體門)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는데,
혹은 다시 여섯 가지가 되고,
혹은 아홉 가지로 나누기도 하며,
혹은 열 가지로 판단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분리해서 48가지가 되기도 한다.
또 이 중에서 변별한 것은 논(論) 중의 어려운 경문을 통틀어 풀이한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이 해석에서 공통으로 논한 것이 합쳐져
하나의 소(疏)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 가지라는 것은 이른바 서(序)와 정(正)과 유통(流通)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나아가면 변별한 바의 법요(法要)는 오직 증교(證敎)뿐이다.
증교가 이미 다르므로 세 가지로 나눈 것도 역시 다르다.
세 가지를 가르치는 데 나아가서 처음의 기분(起分)에 이르기까지는 그 말미암는 서[由序] 이니,
이 기(起)로써 올바른 설[正說] 을 발하기 때문이다.
본분 이후는 그 정종(正宗)이다.
그 중에서 비록 다시 자세함이 있고 간략함이 있더라도
지법(地法)을 똑같이 설하였으니,
구분하면 정종이 된다.
‘지(地)의 이익’ 이하는
믿고 전해서 지니길 권유하여 넘쳐서 말대(末代)에까지 미치는 것이니, 구분하면 유통이 된다.
역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후분(後分)은 게송을 거듭 읊은 것이다.
세 가지를 증득함에 나아가면 처음의 하나는 서분(序分)인데 구분하면 유서(由序)가 된다.
삼매에 들어감은 정종을 증득한 것인데,
삼매에 들어감을 인(因)하여 실다운 증득을 올바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지론』에서는 이 삼매를 법체(法體)라고 말하였다.
유통의 뜻을 해석한 것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미 덕이 흐른 것으로 신지(信地)를 입어 설함이 유통이 된다.
만약 이 뜻을 따른다면 가분(加分) 이후는 모두 유통이니,
자득(自得)을 설함으로써 신(信)의 보살로 하여금 지(地)를 증득해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둘은 말대(末代)에까지 흐르는 것을 이름하여 유통이라고 말하니,
만약 이 뜻을 따른다면 지(地)의 이익분(利益分)을 이름하여 유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섯이 된다고 말한 것은 행하는 바를 따라서 나눈 것이다.
처음의 기분(起分)에 이르기까지는 기화(起化)의 말미암음이니,
물의 믿음[物信] 을 낳기 때문이다.
제2의 본분(本分)은 지법(地法)을 간략히 설한 것이니,
그 뛰어남을 찬탄해서 온갖 낙욕(樂欲)을 일으킨 것이다.
제3의 청분(請分)은 지(地)의 출언(出言)을 밝혀서 올바른 이해를 낳게 한 것이다.
제4의 설분(說分)은 수행의 상(相)을 자세히 밝힌 것이니,
물(物)로 하여금 행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제5의 영상분(影像分)은 비유에 의탁해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제6의 지(地)의 이익은 덕이 이미 성취되어서 지법(地法)에 계합해 증득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론』에서는 “법력(法力)을 얻음으로써 대지가 진동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홉이 된다고 말한 것은 처음의 서분에서부터 나아가 청분에 이르기까지는 여섯이 되고,
설분 이후는 구분하면 제7이 되며,
지(地)의 영상분의 설은 제8이 된다.
지(地)의 이익분은 제9이다.
또한 10으로 나눌 수도 있으니,
거듭 읊음을 덧붙인 것이다.
이 열 가지 가운데 나아가면 변별한 바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상(化相)에 나아감이니,
통틀어서 기설(起說)이 된다.
둘째는 화의(化意)에 나아감이니,
통틀어서 현증(顯證)이 된다.
셋째는 종요(宗要)를 따르는 것이니,
증(證)과 교(敎)를 쌍으로 변별하는 것이다.
기설(起說)이라는 말은 여래께서 장차 설하시는 것이다.
먼저 때와 처소에 의탁해 상(相)을 나타내서 대중을 모으고는 설할 바를 발기하니,
이로써 서(序)를 삼는다.
서(序)가 이미 흥기함을 말미암아서 장차 대중을 위해 설하는데,
이 때 금강장(金剛藏)이 묵묵히 삼매에 들어가서 자기의 자증(自證)을 나타내 능히 대중을 위해 설하니,
또한 가(加)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는 삼매분을 밝힌 것이니,
삼매에 들어감을 말미암아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해서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는 그 가분(加分)을 밝힌 것이니,
이미 거룩한 힘을 얻어서 대중을 위해 설하고자 하나,
다만 정(定)의 말 없음은 마땅히 고요함[寂] 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네 번째는 그 기분(起分)을 밝힌 것이니,
정(定)으로부터 일어난 뒤에 간략히 지의 상[地相] 을 선설하여 나중의 자세히 설함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는 그 본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 본(本)중에서는 간략히 지(地)의 명칭을 설했을 뿐 자세히 분별하지는 않았으니,
대중이 명성을 듣고 의(義)를 맺고자 애타게 우러러서 서로 함께 머리 숙여 청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여섯 번째는 그 청분(請分)을 밝힌 것이니,
대중이 이미 청한 뒤에야 올바로 자세히 진술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일곱 번째는 그 설분(說分)을 밝힌 것이니,
나아가 10지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이 설법은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마땅히 비유로써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여덟 번째는 지(地)의 영상분(影像分)을 밝힌 것이니,
설함을 이미 마치고 나서 마땅히 뛰어난 이익을 나타내 믿고 전하여 유통하길 권하기 위함 때문이다.
다음으로 아홉 번째는 지(地)의 이익분을 밝힌 것이니,
그 법을 나타내고 나서 마땅히 게송으로 설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열 번째는 게송으로 찬탄하여 앞을 매듭 지은 것이다.
현증(顯證)이라는 말은 교화를 위한 뜻이니,
종지가 현증이 된다.
그 중에서 초분(初分)의 현증은 서(序)를 말미암고,
나머지 아홉은 올바로 나타냄이다.
아홉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상(相)에 나아간 현증이고,
다음에 있는 네 가지 분(分)은 설(說)에 나아간 현증이며,
다음에 있는 1분은 섭화(攝化)할 바에 나아간 현증의 이익이고,
다음의 1분은 증득한 덕을 거듭 서술한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중에서 처음의 삼매분은 들어감에 의탁해서 증득함을 나타낸 것이고,
두 번째의 가분(加分)은 가(加)를 인(因)해서 증득을 얻는 상(相)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지론』에서는 “어째서 가(加)인가?
대승의 광명법을 얻음을 말미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세 번째의 기분(起分)은 나옴에 의탁해서 적멸을 나타낸 것이다.
설함이 반드시 기(起)함이니,
곧 들어간 바의 적멸이 말을 여윔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지론』에서는 “정(定)에는 언설이 없으니,
이 때문에 마땅히 기(起)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의 네 가지 중에서 처음의 본분(本分)이라는 것은 간략히 설해서 증득을 나타낸 것이다.
두 번째의 청분(請分)은 상(相)을 물리쳐서 적(寂)을 나타낸 것이며,
설(說)과 영상(影像)은 상(相)에 의탁해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설분(說分) 중에서는 수행에 의탁해서 덕을 나타낸 것이고,
지(地)의 영상분은 비유를 빌려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지(地)의 이익분은 섭화(攝化)할 바에 나아가서 지(地)의 이익을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아래의 경문에서는 법력을 얻음으로써 대지가 진동하고 꽃비가 내린다고 말한 것이다.
게송은 앞과 같다.
이 같은 차별은 똑같이 증득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종요(宗要)를 따라서 증(證)과 교(敎)를 쌍으로 변별한다고 말한 것은 이 품의 요체가 증과 교를 벗어남이 없는 것이다.
아홉 가지 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바로 그 유서(由序)이고,
나중의 여덟은 증교(證敎)의 상을 올바로 나타낸 것이다.
여덟 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삼매분에 들어가서 올바로 증득함을 나타낸 보인 것이며,
나중의 일곱은 차례대로 언교(言敎)를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차례대로 뜻을 말한 것은 초문(初門)과 같다.
말한바 10이라는 것은 지(地)의 동일하지 않음을 따라서 10으로 나눈 것이다.
이상의 세 회상은 모두 이와 동일하게 준거하면 생각해 거둘 수 있다.
48가지라 말한 것은 초지(初地)의 8분과 2지의 양분(兩分)과 나아가 10지의 8분의 차별이니,
1품에 합계 48분이 있다.
이 경문과 『지론』의 경본(經本)은 더하거나 줄인 것이 많이 있다.
동일하지 않은 경문에 나아가면 네 가지 법으로 간추리니,
나중에 경문에 이르러 마땅히 알라.
첫째, 모든 경문 안에 누(漏)가 적은 것은 마땅히 늘어난 것이니,
좌상(左相)에선 수획(竪畫)을 안립하고,
각(脚) 중에선 소구(少句)의 수(數)를 점찍어서 기재한 것이다.
모든 경문이 배치되면서도 뜻은 수순하는 것은 구(句) 속의 첫째 글자 사이에 점을 찍고,
모든 10구(句) 속에서 함께 전후를 논한 것은 해당 구의 좌상(左相)에 일제히 동등하게 수(數)를 점찍어서 기재한 것이다.
모든 구가 많이 증가한 것은 좌상의 상하가 서로 구애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논(論)을 기준으로 하여 정(定)을 취했을 뿐이다.
만약 변별하지 않음을 논한 것이라면 모든 것도 역시 논하지 않은 것이다.
또 논(論) 중에서 늘어난 것은 이에 의거해서 아는 것이다.
또 이 48단락의 경문이라는 것은 단지 1지(地)가 곧 48을 이루는 것이며,
나머지 지(地)도 그러한 유(類)이니,
이와 같이 준거하라.
그런 줄 아는 이유는 그 논주(論主)가 스스로 모든 지(地)를 나누는데,
전후와 은몰(隱沒)과 폐흥(廢興)이 동일하지 않아서 뜻으로써 추구하면 이(理)가 구유(俱有)에 합친다.
처음의 서(序)에 나아가면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설하는 때를 밝힌 것이고,
둘째는 화주(化主)를 변별한 것이며,
셋째는 법을 설해서 의탁할 바의 처소를 밝힌 것이고,
넷째는 똑같이 들음을 변별한 것이다.
머무는 처소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소를 통틀어 밝힌 것이고,
둘째 ‘마니보전’ 이하는 그 개별적인 처소를 밝힌 것이다.
넷째의 똑같이 들음을 밝힌 것 중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을 가려내서 정(定)한 것이며,
두 번째 ‘이 모든 보살’ 이하는 그 사람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세 번째 ‘그 명칭은……라 한다’ 이하는 덕자(德者)의 명칭을 열거한 것이며,
네 번째 ‘한량없음’ 이하는 명자(名者)의 수(數)를 변별한 것이고,
다섯째는 온 곳을 밝힌 것이며,
여섯 번째는 상수(上首)를 열거함을 표방한 것이다.
경에서는 제5구가 빠지고 앞의 네 가지만 있으니,
첫째는 대(大)가 소(小)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고,
둘째 ‘아뇩(阿耨)’ 이하는 종(終)이 시(始)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며,
셋째는 주(住)가 퇴(退)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고,
넷째 ‘타방(他方)으로부터’ 이하는 신(新)이 구(舊)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다.
전자 중에서 먼저는 열거한 바의 사람을 정(定)한 것이고,
다음은 모든 경(經)이 사람의 뜻을 변별함을 밝힌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성화(聖化)를 입은 해당되는 기틀의 대중인,
가령 논(論)에서 설한 신지(信地)의 사람 등과 같다.
둘째는 성화가 상대하여 영향(影響)을 끼친 사람이니,
여기서 열거한 모든 보살 등과 같다.
사람의 뜻을 변별한다는 것은 모든 경에서 사람을 열거하는데 일반적으로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교화의 이익된 바를 밝힌 것이니,
가령 『열반경』에서 무상(無常)의 모든 학인(學人)들을 열거해서 변별한 것과 같다.
둘째는 사람을 대해서 결정(決定)을 설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경에서는 비록 공지(空地)에서 설한 바가 많이 있더라도 참된 사자후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이제 이 같은 대지(大智)의 사람 중에서 선설(宣說)한 바가 있어야 비로소 참된 사자후라는 이름을 얻는다.
셋째는 사람에 의탁해서 그 법을 구별함을 밝힌 것이니,
가령 10신(信)을 설해서 모든 수(首) 등을 널리 상대한 것과 같다.
넷째는 똑같이 들음을 들어서 믿을 만한 것을 증득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지금 이 대중을 열거한 뜻은 나중의 셋을 겸한다.
주(住)가 퇴(退)와 다름을 간별한 것에서 일반적으로 퇴를 논하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얻고서 퇴하는 것이니,
이른바 먼저 얻은 것을 나중에 다시 퇴실(退失)하는 것이다.
둘째는 얻지 못하고 퇴하는 것이니,
이른바 승진에서 퇴주(退住)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는 습행(習行)의 퇴이니,
먼저 많은 행을 익혀서 똑같이 성취하고 나서 나중에 하나가 나타날 때 나머지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나타나지 않는 곳을 이름하여 퇴라 하는 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로써 지위(地位)를 준거해 기준하면 이 뜻이 없지 않으니,
해행(解行) 이전은 분(分)이 아직 견고하지 않아서 그 얻은 바에 따라 퇴실(退失)을 용납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두 3퇴(退)가 있다.
초지(初地) 이상에서부터 6지를 다하기까지는 차례대로 도를 닦을 뿐 돈기(頓起)하지 못하기 때문에 습행이 있으며,
아울러 얻지 못하고 퇴한다.
7지 이상은 지위의 분[位分] 이 아직 궁진하지 못해서 얻지 못하고 퇴함이 있다.
퇴상(退相)이 이와 같으니,
여의는 처소를 따르는 것이 곧 불퇴(不退)이다.
그러나 저 3퇴를 자세히 나누면 다섯이 된다.
처음의 얻고서 퇴함에 나아가서 뜻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는 멸퇴(滅退)이니,
이른바 범부가 소유한 선근이 저 사견(邪見)이 되어서 단멸할 바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실퇴(失退)이니,
선취(善趣)의 사람으로 믿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는 퇴실(退失)해서 이승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
마치 사리불 등이 비록 퇴멸(退滅)해서 일천제(一闡提)를 짓지 않더라도 보리심은 능히 다시 나타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폐퇴(廢退)이니,
종성(種性) 이상이 잠시 번뇌 업의 자취를 일으켜 그 익힌 바를 폐(廢)하여 현전(現前)치 않게 한 것을 이름하여 폐퇴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와 나머지 두 퇴를 통틀어서 합계가 다섯이 된다고 설한 것이다.
이 다섯 종류는 외범(外凡)도 갖추고 있다.
선취(善趣)의 신위(信位)는 오직 멸퇴(滅退)가 없을 뿐 나머지 네 가지는 있으니,
선(善)을 끊어서 천제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종성(種性) 이상은 멸(滅)도 없고 실(失)도 없어서 나머지 세 가지가 있게 된다.
초지(初地) 이상은 앞의 세 종류는 없고 나머지 둘이 있게 된다.
7지 이상은 오직 미득(未得)이 있을 뿐 나머지 네 가지는 모두 없다.
제10지(地) 중에선 급하게 인위(因位)에 나아가서 5퇴가 모두 없다.
만약 불과(佛果)를 조망한다면 퇴상(退相)이 이와 같음을 얻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불퇴(不退)임을 알 수 있다.
또 만약 이 경에 의거한다면 신행(信行)과 해위(解位) 이후는 다만 얻지 못하고 퇴(退)함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없으니,
이는 일상(一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보현 자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모든 퇴(退)가 아울러 없으니,
위를 준거해서 생각해 섭수하라.
지법(地法)은 깊고 은밀해서 거친 지혜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는 지(地)의 교법을 위해서 저 모든 승(乘)과 세간의 선사(善事)에 의탁하여 아함 법의(法義)의 분제를 나타내는 것이니,
비록 일승의 이(理)에 의탁해서 나타낸다 하더라도 삼승과 소승은 해당되는 종지에 스스로 머물러서 자기 종지를 잃지 않는다.
마치 소금이 국을 이루는 것과 같아서 소금이 스스로 성품에 머물러 있어도 국의 뜻은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래 경문의 뜻은 마땅히 이에 준거해서 알아야 한다.
보리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성지(性地)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 명칭이 보리가 된다.
둘째는 초지(初地)이고,
셋째는 불지(佛地)이다.
그러므로 열반에서 수다원은 8만 겁에 도달하고 나아가 벽지불은 십천(十千) 겁에 도달한다고 설한 것은 성지(性地)에 도달함을 일컫는 것이다.
【문】아뇩보리(阿耨菩提)는 과(果)에 있는데 어째서 인(因)에도 통하는가?
【답】이것 역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품경(大品經)』에서는 5보리를 설했으니,
이른바 발심(發心)ㆍ복심(伏心)ㆍ여명(與命)ㆍ출도(出到)ㆍ무상(無上)의 보리이다.
일승에는 10보리가 있으니,
아래의 「이세간품」에서 설한 것과 같다.
생(生)이란 것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법성의 생(生)함이니,
6입(入)의 뛰어남과 무시(無始)의 법이(法爾)이다.
둘째는 실보(實報)의 생함이니,
이른바 먼저 도래한 것을 따라서 선(善)을 닦아 얻는 것이다.
셋째는 생멸의 변역법신(變易法身)이니,
이른바 반연해서 비추어 무루(無漏)를 얻는 것이다.
넷째는 분단신(分段身)이니,
이른바 저 범부일 때 삼계의 업을 얻은 것이다.
다섯째는 응화신(應化身)이니,
물(物)에 따라서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삼승의 이해를 기준으로 한 것이지 일승이 아니다.
어째서 이 회상의 첫머리는 삼승을 기준으로 해서 밝힌 것이 많은가?
「지품(地品)」이 삼승을 통틀어서 믿어 향하기 때문이다.
덕을 찬탄한 경문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개별적인 것이고,
둘째는 총체적인 것이다.
보살의 공덕은 단박에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개별적으로 찬탄하였으나,
개별적으로는 능히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개별 속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간략히 찬탄한 것이고,
둘째 ‘잘 능히 교화하며[善能化] ’ 이하는 덕에 따라서 자세히 찬탄한 것이다.
보살의 광대한 덕은 단박에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간략히 찬탄하였으며,
간략함으로 능히 갖추질 못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자세히 찬탄한 것이다.
간략함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분(自分)을 찬탄한 것이고,
두 번째 ‘모든 부처님 여래’ 이하는 그 승진을 찬탄한 것이다.
둘째의 자세히 찬탄한 경문에는 20구가 있다.
앞의 12구는 위의 자분을 자세히 한 것이며,
두 번째의 여덟 구는 앞의 승진을 자세히 하고 자분을 자세히 하는 가운데 섭수하여 두 가지가 된다.
처음의 여섯 구는 그 행을 닦음이 구족함을 든 것이며,
다음에 있는 여섯 구는 덕용(德用)이 원만히 갖추어졌음을 밝힌 것이다.
행의 닦음이 구족함 중에서 처음의 세 구는 이타이고,
나중의 세 구는 자리(自利)이다.
앞 경문의 초구(初句)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두 구는 개별적인 것이니,
경에 의거하면 두 구 중에서 한 구는 빠져 있다.
두 번째의 자리의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원(願)이고,
다음은 수(修)이며,
나중은 행의 성취를 밝힌 것이다.
두 번째의 원만히 갖춘 경문에는 여섯 구가 있으니,
앞의 세 구는 이타이고,
나중의 세 구는 자리이다.
이타 중에서 처음은 신업(身業)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의업(意業)을 밝힌 것이며,
나중은 구업(口業)을 밝힌 것이다.
두 번째의 자리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행의 닦음이 뛰어난 것이고,
둘째는 모든 덕이 원만히 갖추어짐이며,
셋째 ‘모든 처소’ 이하는 묘용이 자재한 것이다.
둘째의 앞의 승진을 자세히 한 경문에서 구는 따로 여덟 가지가 있다.
앞에 네 구는 그 뛰어난 3업이 행할 바를 섭수해서 닦는 것이며,
나중의 네 구는 그 광대한 3업이 온갖 덕을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의 세 구는 뛰어난 3업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한 구는 행할 바를 섭수해서 닦음을 밝힌 것이다.
후자의 네 구도 마찬가지이니,
처음의 세 구는 그 광대한 3업을 밝힌 것이며,
나중의 한 구는 모든 덕을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뛰어난 3업 중에서 처음은 신업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구업이며,
나중은 의업이다.
후자의 네 구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에 있는 세 구는 3업을 자세히 밝힌 것이니,
그 몸이 널리 나타나는 것이 넓은 신업이며,
그 음성이 두루 들리는 것이 넓은 구업이고,
그 마음이 통달하는 것이 넓은 의업이다.
제4의 한 구는 모든 덕을 갖춘 것이다.
이 처소에서 과(果)에 감응한다는 것에서 감응은 근(根)이고 과(果)는 욕(欲)이다.
또 아래 지(地)의 사람의 과(果)는 결정코 능히 이루는 것이니,
나머지는 논에서 변별한 바와 같다.
또 함께 하지 않음을 밝힌다는 것은,
첫째는 외도와 함께 하지 않음이며,
둘째는 이승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또 두 법을 금강에 비유한 것 중에서 법은,
앞은 능파(能破)이고 뒤는 견고함이다.
비유에서 전자의 나무는 마음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고,
자식을 잉태함은 자식의 능파를 취한 것이다.
삼매분 중에서 힘을 이어받아 정(定)에 들어가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화가 여래에게 있음을 미루기 위함 때문에 힘을 이어받음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비록 자득(自得)하더라도 부처님과 같은 뛰어난 사람을 대해서는 자재로움을 얻지 못하니,
반드시 우러러 이어받아야 한다.
셋째,
이 정(定)에서 비록 분에 맞는 증득을 얻더라도 원만함을 궁구함은 부처님에게 있다.
지금 여기서는 부처님의 뛰어난 교화를 욕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힘을 이어받는다.
과(科)의 경문은 알 수 있다.
가분(加分) 중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삼매에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 동일하게 가(加)함이다.
둘째 ‘모든 보살에게 펴고자 한다[欲宣一切] ’ 이하는 가(加)의 하는 바[所爲] 를 밝힌 것이며,
셋째 ‘금강장이여,
그대는 마땅히 설해야 한다’ 이하는 가(加)의 상(相)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을 가(加)하셔서 똑같이 다 몸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이며,
둘째 ‘똑같은 소리로 찬탄한다’ 이하는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셔서
앞의 입정(入定)에 감응하시어 능히 설함을 증득함을 나타낸 것이다.
셋째 ‘이처럼 시방에서’ 이하는 부처님께서 이미 가(加)함을 밝혀서 앞의 입정에 감응하여 불력(佛力)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가(加)를 얻는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또 ‘많은 부처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라는 것은 많은 부처님께서 똑같이 이 법을 증득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논(論)과 같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둘째는 소위(所爲)의 경문이다.
첫째는 지법(地法)에 대해서 가(加)의 소위를 밝힌 것이고,
둘째 ‘이른바 지혜에 들어가게 해서’ 이하는 교화받는 사람을 대해서 가(加)의 소위를 밝힌 것이다.
또 견지(見智)가 증득을 얻는다는 것에서 앞의 둘은 관해(觀解)이고 나중의 둘은 행해(行解)이다.
견(見)은 시작이고 지(智)는 마지막이니,
시작을 얻어서 마지막을 증득하는 것이다.
또 신락(信樂)이 증득을 얻는다는 것은 역시 앞과 같다.
다만 미득(未得)이 득(得)을 향하기 때문에 신락(信樂)의 명칭을 안립한 것이다.
사람을 대해서 소위를 밝힌 것 가운데 20구가 있으니,
전자의 열 가지 입(入)은 자리의 행이고,
후자의 열 가지 시종(始終)은 이타의 행이다.
【문】어째서 자리의 명칭은 입(入)이 되고,
이타의 행은 시종이 된다고 설하는가?
【답】다만 입과 시종은 뜻이 하나로서 차별이 없다.
입을 말하면 기필코 시작부터 마지막에까지 이르게 되므로 그 시종을 논한 것이니,
반드시 들어가는 바가 있어 두 행을 나누게 되므로 각기 하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입과 시종의 20구 내용에 나아가면 각각 처음의 한 구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머지 구(句)는 개별적인 것이다.
일곱째 중에서 ‘다시 선근이 있어 능히 출세간의 인(因)이 된다’는 것은 지(地) 중의 가행선근(加行善根) 등이다.
또 시종 안의 경문은 제2구가 빠져 있다.
또 논(論)에서 아함이라 말한 것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
첫째는 행(行)과 교(敎)의 상대(相對)이다.
음성으로 말한 가르침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며,
일체 공덕의 설로 증득을 삼으니,
마치 아래의 설(說) 중에서 자의(字意)의 양장(兩藏)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는 위(位)와 지(地)의 상대이다.
해행(解行) 이전에 가르침에 의거해서 수행하는 것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초지(初地) 이상에서 설하는 것은 증득이 된다.
마치 아래 해탈의 두 번째 청함 중에서 대중을 찬탄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지(地) 이전에 일으킨 바의 듣고[聞]
사유하고[思]
수행하는[修]
것 등을 이름하여 아함정(阿含淨)이라 하고,
초지 이상의 일체 행덕은 통틀어서 증정(證淨)이라 이름 붙인다.
셋째는 수행[修] 과 성취[成] 의 상대이다.
일체의 지(地) 가운데 문사(聞思)와 수혜(修慧)와 보생(報生)과 식지(識智) 등과 같은 네 가지 마음이 반연하여 비춘 이해를 이름하여 아함이라 말하고,
참지혜[眞智] 는 언설을 벗어난 것으로 증득을 삼는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논하여 말하길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등이라면 설할 수 있으며,
설할 수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지지(地智)가 경문을 여읜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한다”고 했다.
넷째는 참[眞] 과 거짓[僞] 의 상대이다.
일체의 지(地)에서 참과 거짓을 합쳐 수행함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거짓을 버리고 실다움[實] 에 계합하는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니,
마치 아래에서 밝힌 의(義)와 설(說)의 2대(大)가 대아함 방편의 수행을 설한 것과 같다.
의대(義大)는 행의 성취를 증득한 것이다.
다섯째는 상(相)과 실(實)의 상대이다.
세간의 수행 중에서 저 증상(證相)을 얻은 것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근본 실상에 계합한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니,
마치 아래에서 설한 증상 묘법(增上妙法)의 광명 법문과 같다.
증상은 증득이고,
광명은 가르침이다.
여섯째는 체(體)와 덕(德)의 상대이다.
저 상(相)을 여의어서 성취한 행 중에 나아가면 비롯됨이 없는 법성이 본래는 숨어 있다가 지금은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고,
근본에 의거해서 성취한 방편행의 덕과 가르침에 의거해서 생(生)을 닦는 것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니,
마치 아래 경문에서 연금(鍊金)에 비유한 것과 같다.
금의 체(體)는 증득을 비유한 것이고,
반지나 팔지 같은 장엄구는 아함에 비유한 것이다.
일곱째는 체(體)와 용(用)의 상대이다.
앞의 체와 덕이 서로 따르는 것은 증득이 되고,
이 일어난 바에 의거해서 세간을 수순하는 교지(敎智)의 작용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니,
마치 아래의 경문에서 구슬의 광명 등에 비유한 법이 이것이다.
주륜(珠輪) 등의 청정함은 증체(證體)를 비유한 것이고,
광염(光焰) 등은 아함에 비유한 것이다.
여덟 째는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의 상대이다.
자분에서 성취한 체덕(體德)과 용(用)은 모두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고,
능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아함이라 일컬으니,
마치 아래의 경문에서 금강장과 두 힘을 찬탄한 것이 이것이다.
묘지(妙智)와 변재는 이름하여 증력(證力)이라 하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견고하고 청정한 슬기를 염(念)하는 것을 이름하여 아함력(阿含力)이라 한다.
아홉째는 언전을 기준으로 한 것과 실(實)에 나아가는 것의 상대이다.
진지(眞智)의 체(體)를 설하는 것으로써 증득을 삼으니,
곧 이 증체(證體)가 말을 열 가지로 나누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아함이라 이름한다.
마치 아래의 경문에서 허공의 적처(跡處)에서 비유한 바의 법이 이에 해당된다.
허공의 평등은 지(地)의 증지(證智)를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아래의 논(論)에서는 자신(字身)의 머무는 처소가 증지(證智)의 섭수하는 바라고 말한 것이다.
공(空) 가운데 자취는 지(地)의 아함을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아래의 논에서는 지지(地智)의 명구자신(名句字身)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명구가 바로 아함의 법이다.
이 아함과 증득이 위와 아래에 통하니,
준거해서 생각하여 섭수할 수 있다.
나머지 상(相)은 아는 것이다.
셋째1)는 가상(加相)이니,
경문 안의 이른바 구(口)와 의(意)와 신(身)에서 구(口)는 설하길 권유함으로써 힘을 증대하는 것이고,
의(意)는 은밀히 가(加)의 위세를 입는 것이며,
신(身)은 정수리를 어루만져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어째서 먼저는 구(口)이고,
다음은 의(意)이며,
나중은 신(身)으로서 앞의 모든 부처님께서 나타내신 가(加)의 소위(所謂)를 탄 것인가?
인(因)의 경우는 설하길 권유했기 때문에 먼저 구(口)를 밝힌 것이고,
신(身)을 만지면 일어나므로 이치로는 마땅히 나중에 있는 것이며,
의(意)는 이런 뜻이 없어서 중간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
구가(口加)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또 신정(身淨) 중의 경문에 불진(佛盡)의 한 구가 빠져 있다.
두 번째 의가(意加)의 경문에 20구가 있다.
처음의 열 구는 의가를 올바로 밝힌 것이고,
나중의 열 구는 편가(偏加)의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어째서 뜻에 나아가서만 편가를 해석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것인가?
의(意)는 가(加)의 근본이기 때문에 나아가 해석한 것이다.
또 앞의 구가에는 자타(自他)의 두 가지 힘의 변재가 있는데 의가도 마찬가지이다.
앞의 열 가지 올바른 가(加)는 그 타력(他力)을 밝힌 것이고,
뒤의 열 가지 가(加)의 해석은 그 자력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처음은 무외신(無畏身)이니 총체적이기도 하고 개별적이기도 하다.
10구를 통틀어 섭수하는 것이 무외신이 되고,
통틀은 바는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있다.
이 중에서 개별적인 것의 처음 한 구는 색신(色身)의 뛰어남을 나타낸 것이니,
이 때문에 개별이라 이름한다.
나머지 아홉 구는 한결같이 개별이다.
또 이 중에서 법의 성취를 논한 것은 상속에 의거한 것이니,
『해탈경(解脫經)』 중에는 네 종류의 성취가 있다.
첫째는 유(有)로써 성취하는 것이니,
인연의 명상(名相)과 언설의 모든 법이 성취를 얻는다.
둘째는 소작(所作)의 성취이니,
일체의 소작이 각기 변재를 성취함이 있다.
셋째는 법의 성취이니,
일체 모든 법의 성품과 상(相)이 성립하는 것이다.
넷째는 도와서 성취하는 것이니,
지(智)의 언설로써 모든 법의 성취를 도운 것이다.
이제 연(緣)이라고 말한 것은 저것을 유(有)로써 성취하는 것이다.
인연이 있는 모든 법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에 이름하여 연이라 한다.
법이란 것은 곧 저 가운데의 법이니,
지음을 성취한다는 것은 저 지을 바를 이루는 것이다.
성취라는 것은 곧 그 가운데서 도와서 이루는 것이다.
또 세 가지 동일한 상(相)의 지(智)라는 것은 한 종류가 아님을 해석한 것이니,
『금강선론(金剛仙論)』에 의거하면 일체의 법이 모두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임을 아는 것이다.
다른 번역의 논(論)에 의거하면 일체법의 자상(自相)은 동일한 상으로서 둘이 아닌 상(相)이니,
이른바 세제(世諦)와 진제(眞諦)가 하나의 참된 진리[實諦] 임을 아는 것이요,
또 공(空)ㆍ무상(無相)ㆍ원(願)을 아는 것이다.
또 6정견(正見)이란 능히 아는 지혜이다.
『금강선론』에 의거하면 첫째는 진실지(眞實智)의 정견이니 능히 이법(理法)을 아는 것이고,
둘째 행(行)의 정견이니 능히 행법을 아는 것이다.
이 둘은 교지(敎旨)이다.
셋째 교(敎)의 정견이니,
능히 교법을 아는 것이다.
넷째 두 변(邊)을 여읜 정견이니,
앞의 이법(理法)을 알아서 정(情)으로 취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다섯째 부사의의 정견이니,
앞의 행법을 알아서 덕을 성취해 정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섯째 근욕성(根欲性)의 정견이니,
앞의 교법을 알아서 물심(物心)에 따라 설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소위(所爲)를 해석함 중에서 처음의 ‘왜냐하면’은 따지는 것이고,
다음은 답의 경문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아홉은 개별적인 것이다.
또 ‘불법이 무너지고자 할 때 나머지 존귀한 법을 빌려서 송지(誦持)한다’는 것은 무너지는 때를 따르는 것이니,
무엇이 존귀한 가르침이겠는가?
세 번째,
신가(身加)의 경문에 네 구가 있다.
첫째는 근본을 여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신력(神力)을 쓰는 것이며,
셋째는 오른손을 펴는 것이며,
넷째는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경문에는 처음의 두 구가 빠져 있다.
본분(本分)을 해석하는 데 나아가면 경문의 내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告)하는 것이고,
다음은 서술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선(願善)을 밝히는 것으로 지(地)의 체(體)를 삼는 것이고,
둘째는 열 가지 명칭을 열거해서 그 지(地)의 상(相)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을 들어서 지(地)의 요체와 뛰어남[要勝] 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셋은 모두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첫째인 지(地)의 체(體) 안에서 처음의 한 구는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허물도 없고[無有過] ’ 이하는 개별적인 것이니,
나머지는 논(論)에서 변별한 것과 같다.
둘째인 상(相) 중의 경문에는 따로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질문이고 다음은 답인데 답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건립에 두 가지가 있고,
다음의 열거함에 두 가지가 있으며,
셋째는 매듭 지음이다.
세 번째 단락의 경문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니,
처음의 ‘나는 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을 들어서 지(地)의 요체와 뛰어남을 나타낸 것이며,
둘째 ‘왜냐하면’ 이하는 지(地)의 요체와 뛰어남을 밝힘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의 말미암는 바를 해석해 나타낸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질문이고 다음은 답이다.
답의 경문에 네 구가 있다.
초구(初句)는 이 증행(證行)을 들어서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을 해석한 것이며,
제2구는 다만 저 출세간의 소증(所證)뿐만 아니라 역시 세간 방편의 소행(所行)이기도 하다.
제3의 이른바 한 구는 앞의 제2 광명 법문을 나타낸 것이며,
제4의 ‘모든 불자여’ 이하는 앞의 제1의 증상 묘법(增上妙法)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논(論) 중의 경본(經本)을 기준으로 하여 과목별로 나눈 것이며,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논(論)에서 결정(決定)이라고 말한 것은 『지지(地持)』에 의거하면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종성(種性)의 결정은 부처님의 종자를 정한 것이고,
둘째 해행(解行)의 결정은 발심을 정한 것이며,
셋째 증(證)의 결정은 정(定)이 법을 얻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세 번째이다.
또 선(善) 결정이란 것에서 처음은 선을 변별하고 결정이 따라서 온 것이며,
다음으로 결정이란 것은 결정의 뜻을 변별하고 선자(善字)가 따라서 온 것이니,
선에 나아가서 결정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세 번째,
승선(勝善)의 결정 중에서 논에 의거하면 합계 네 가지의 뜻풀이가 있으니,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셋은 개별적인 것이다.
셋 중에서 이른바 증조(證助)는 머물지 않는 것이다.
또 풀이하면 처음은 이(理)이고 다음은 지(智)이며,
세 번째는 지위와 교법이다.
넷째,
상(相)을 기준으로 하면 곧 무루에 즉하는 것이며,
또한 조도(助道)에 즉하는 것이니,
준거하여 생각해서 섭수하라.
『대품경론(大品經論)』에 의거하면 삼승 10지의 명칭이 있다.
첫째는 간혜지(乾慧地)이며,
둘째는 성지(性地)이며,
셋째는 8인지(人地)이며,
넷째는 견지(見地)이며,
다섯째는 박지(薄地)이며,
여섯째는 이욕지(離欲地)이며,
일곱째는 이작지(已作地)이며,
여덟째는 벽지불지(辟支佛地)이며,
아홉째는 보살지(菩薩地)이며,
열째는 불지(佛地)이다.
이 10지는 일승의 쓰는 바[所用] 이며,
삼승의 들어가는 바[所入] 이다.
이 중에서 본분(本分)은 자의(自義)에 의지한 아함의 설이다.
청분(請分)의 경문에 나아가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금강장이 설하고 나서 침묵으로 머무는 것과 보살과 부처님께서 다 함께 공통으로 청하는 것이며,
둘째 ‘관찰’ 이하는 설분(說分)의 제등함을 제시해서 대중으로 하여금 올바로 알게 하는 것이다.
전자 중에서 사람에 따라 청(請)을 나눈 것이 세 가지가 된다.
첫째는 해탈월(解脫月)이 청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이 청하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의 가(加)로 청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나아가면 처음의 해탈월이 청한 내용의 경문은 3대(對)로 구별한다.
모두 처음에는 설한 자가 침묵하여 어기면서 설하지 않는 것이고,
나중은 계청(啓請)을 밝힌 것이다.
제1대(對) 중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설하고 나서 침묵으로 머무는 것이며,
나중은 해탈월이 대중의 의심하는 마음을 알아서 이를 위해 물어 청하는[問請]
것이다.
인자(仁者)는 설함을 감당하고 대중은 능히 들을 수 있는데,
어찌 설하지 않겠는가?
제2대(對) 중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앞의 청문(請問)함을 타고서 이미 침묵한 뜻을 나타냄으로써 수답(酬答)을 삼았으니,
법은 설하기 어렵고 증신(證信)은 얻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탈은 이를 타고서 대중을 찬탄하면서 거듭 청한 것이니,
나[我] 는 이른바 인자(仁者)이니 다시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래서 증신을 얻기가 어려워서 설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제 이 보살이 훌륭하고 청정하게 대중을 모으는 것에는 증(證)도 있고 신(信)도 있으니,
인자는 마땅히 설해야 한다.
이는 제2대(對)이며,
이상의 양대(兩對)는 사람을 찬탄함으로써 청한 것이다.
제3대(對) 중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앞의 청하는 말을 타고서 손해를 들어서 어기는 것이니,
비록 이 대중이 청정하더라도 나머지 즐거움이 작은 것은 듣고서도 의혹을 일으켜 길이 쇠뇌(衰惱)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손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탈월은 이를 타고 법을 찬탄함으로써 거듭 청하는 것이니,
인자(仁者)는 다만 설할 뿐 온갖 의심은 생각지 말라.
모든 부처님의 호념(護念)은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시키는 것이라서 그 설함에 많은 이익이 있으니 쇠뇌를 두려워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탈월의 청함에는 뜻에 남음이 있다.
저 금강장이 청함을 어긴 것은 이(理)가 여기서 궁진하여 말이 끊긴 것이나 다만 법을 중시하기에 침묵으로 나머지 청함을 기다린 것이니,
처음 대(對)의 경 가운데 처음에 금강장이 설하고 나서 침묵에 머문 것이다.
‘이 때 일체’ 이하는 중생의 마음을 해탈하고자 해서 청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전자 중의 두 구절에서 첫째 금강장이 지(地)의 명칭을 설하고 난 것은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일으킨 것이고,
둘째 침묵하고 설하지 않은 것은 나중의 청함을 올바로 기다린 것이니,
아래의 대중은 이를 대해서 욕(欲)을 낳고 의심을 낳는 것이다.
아래의 청함에 나아가면 처음은 대중이 명칭을 듣고 뜻을 욕구하였으나 침묵함을 보고 의심을 낳음을 밝힌 것이다.
‘그 때 대보살’ 이하는 해탈월이 의심함을 알아 청함을 밝힌 것이다.
다시 전자에 나아가면 처음에 명칭을 설함에 대(對)한 것은 듣고 나서 뜻을 욕구하는 것이다.
‘각기 이렇게 생각한다[各作是念] ’ 이하는 분별하지 않음을 대한 것이니,
침묵함을 보고 의심을 낳는 것이다.
하인(何因)이라는 것은 저 설하는 사람을 대함으로써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하연(何緣)이라 말한 것은 그 청중을 대함으로써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둘째의 해탈이 의심함을 알아 청하는 가운데 세 가지로 그 구(句)를 구별한다.
첫째는 청주(請主)인 해탈보살을 표방하는 것이고,
둘째는 온갖 의심을 아는 것을 계청(啓請)으로 삼는 것이며,
셋째는 청하는 말을 드는 것이다.
청하는 말의 게송 중에서는 경문을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두 문으로 분별되니,
징(徵)과 청(請)의 분별이다.
징이란 침묵을 따져서 온갖 의심을 떨쳐 버리는 것이며,
청이란 설하길 청해서 대중 마음의 욕구를 따르는 것이다.
게송 중에서 처음의 두 구는 침묵의 뜻을 따져 묻는 것이며,
세 번째의 한 게송은 그 설을 베풀기를 청하는 것이다.
나중의 두 게송은 간략해서 징과 청이 없지만 이치로는 마땅히 제등(齊等)함이 있다.
둘째,
찬탄한 바 설하고 들음의 분별에 나아가면 처음의 게송은 저 설하는 자가 설함을 감당함을 찬탄한 것이니,
대중의 무엇을 인하여 의심하는지 버리게 하기 위함 때문이다.
나중의 네 게송은 대중이 들음을 감당함을 찬탄하는 것이니,
대중이 어떤 연(緣)으로 의심하는지 버리게 하기 위함 때문이다.
듣는 자의 네 게송 가운데 나아가면 처음의 두 게송은 동일한 법의 대중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다른 법의 대중을 찬탄한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두 대중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명칭이 동생이생(同生異生)인 것이다.
또 논(論)에서 ‘현전(現前)의 결정이 아닌 것에는 현전 등이 없다’고 말한 것은 증(證)과 교(敎)의 두 결정이 현욕(現欲)의 결정이 아닌 것이다.
또 제1행의 혜(慧)자는 논 가운데 각(覺)에 해당하며,
제4행 중의 하(瑕)자는 곧 불욕(不欲)을 논한 것이며,
예(穢)자는 곧 논 가운데 위의탁(威儀濁)이며,
실(實)이란 곧 논 가운데 다른 상[異想] 을 제외한 것이니,
나머지는 준거해서 알 수 있다.
두 번째 청함의 내용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금강장은 앞의 계청(啓請)을 타고서 이미 침묵한 뜻을 나타낸 것이며,
나중의 해탈월은 말[言] 을 타고서 거듭 청한 것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긴 행은 나중의 설하는 뜻을 낳는 것이며,
제2의 게송은 해석이다.
게송에는 여섯 게송이 있으니,
처음의 두 게송은 법의 설하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며,
다음에 있는 두 게송은 법의 듣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설하고 들음의 어려움을 비유한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어려움을 들어서 침묵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비유에서 경문의 뜻은 공(空)은 증지(證地)의 체(體)를 비유한 것이고,
풍획(風畫)은 자구(字句)의 언설을 비유한 것이며,
풍획의 머무는 처소는 설한 바 차별된 10지(地)를 비유한 것이다.
【문】이것과 아래의 비유는 어떻게 다른가?
【답】아래에서는 새의 자취가 있는 곳을 취해서 비유로 삼은 것이며,
이를 정황으로 삼아 증명한 것이다.
이 중에선 붓을 움직인 획이 몰아치는 바람임을 선설(宣說)함으로써 비유를 삼았기 때문에 이를 정황으로 삼아서 설한 것이니,
이것의 좌우가 있을 뿐이다.
또 이 획과 새의 발과 아울러 아래의 실담장(悉曇章)의 비유와 아래의 「보현품」은 총체적으로 한 부류이니,
이는 현증(顯證)의 10지를 말한 것이다.
아래의 새 자취의 처소 등은 현증의 10지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10지의 명칭을 설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 역시 준거해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지의 총체적인 명칭은 또한 삼승 숙교(熟敎)의 명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두 게송 중에서 법에는 4중(重)이 있다.
첫째는 법의 어려움을 총체적으로 드는 것이며,
둘째 ‘제1’ 등은 그 어려움의 상(相)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보살행이 어려운 법의 체(體)를 벗어난 것이며,
넷째 ‘미묘해서 보기 어렵다’ 이하는 어려움의 까닭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논의 경[論經] 에 의거한 것이니,
준거해 취해서 생각하여 섭수할 수 있다.
두 번째의 해탈이 청함을 타는 경문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긴 행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탈월이 금강장의 어김을 듣고서 거듭 청하는 것이며,
둘째 ‘이 대보살 대중은 직심(直心)이 청정하여’ 이하는 대중의 청정함을 자세히 찬탄한 것이며,
셋째 ‘그러므로[是故] ’ 이하는 청해서 설하게 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두 번째인 대중의 청정함을 자세히 찬탄하는 경문에서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아함의 청정함 안의 개별적인 경문 속의 제2구는 제4구를 논하는 데 있고,
경문 속의 제5구는 제2구를 논하는 데 있으며,
또한 경문에 의거해서 정할 수 있으니 반드시 사유해서 준거하라.
둘째,
게송을 거듭함의 경문 내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긴 행은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게송이다.
게송 중에서 처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청함을 매듭 지음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위의 청하는 경문을 읊은 것이다.
세 번째의 청하는 내용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손해를 들어서 어기는 것이고,
다음은 해탈월이 이익을 찬탄해서 거듭 청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누니,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앞에서 찬탄한 바를 끌어와서 얻음이 잃음을 겸함을 든 것이며,
두 번째 ‘그 나머지 작은 법을 좋아하는’ 이하는 찬탄하지 않은 바를 가려내어 손해를 들어서 어기는 것이다.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선(善)을 망친 손해이고,
두 번째 ‘이 사람’ 이하는 길이 쇠뇌(衰惱)를 받아서 즐거움을 잃는 손해이며,
세 번째 ‘내가 불쌍히 여겨서’ 이하는 침묵하는 까닭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의 게송을 거듭하는 경문에서 처음은 설하는 뜻을 밝힌 것이고,
두 번째는 올바른 게송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한 행 반은 앞의 경문을 거듭함을 매듭 지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 반은 위에서 잃음을 밝힌 것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두 번째의 해탈의 청함 중에서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긴 행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선포해서 거듭 청하고자 함을 밝힌 것이고,
둘째 ‘바라건대 불력(佛力)을 받들어서’ 이하는 올바로 청해서 설하게 한 것이며,
셋째 ‘그러므로’ 이하는 청해서 설하게 함을 매듭 지은 것이니,
처음의 단락 중에 나아가면 알 수 있다.
둘째의 올바로 청하는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종지를 세워서 부사의법(不思議法)을 설하길 청하는 것이며,
두 번째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신 바’ 이하는 모든 부처님 법이 호념에 응함을 변별한 것이다.
이 경문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호념이니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두 번째 ‘왜냐하면’ 이하는 요체와 뛰어남을 변별한 것이며,
세 번째 ‘비유하면’ 이하는 비유의 정황이며,
네 번째 ‘이처럼 불자여’ 이하는 법(法)과 합(合)이다.
두 번째의 게송을 거듭하는 경문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 반은 설하길 청하는 경문을 밝힌 것이며,
둘째의 한 게송은 앞의 첫 번째 호(護)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두 번째 요체와 뛰어남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비유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네 번째 합하는 비유[合喩] 를 읊은 것이다.
두 번째의 대중이 청하는 경문에서 이상은 해탈이 대중을 위해 먼저 청하는 것인데 청하길 비록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허(虛)와 실(實)을 알지 못하니,
대중이 마땅히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밝혀서 앞에서 청한 언사를 이루어야 한다.
또 설함을 일으켜서 법의 존중을 나타내도록 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공통으로 청한 것이다.
청하는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동일한 소리로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게송이다.
모든 게송의 경문에는 다섯 행 반이 있으니,
처음의 네 행 반은 사람을 찬탄함으로써 청하는 것이고,
나중의 한 게송은 법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단락에 나아가면 처음의 두 게송은 그 설하는 자를 찬탄한 것이고,
나중의 두 게송 반은 대중이 들음을 감당함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에 있는 다섯 구는 금강장이 스스로 증력(證力)과 아함력(阿含力)을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며,
아래의 세 구는 금강장이 능히 듣는 자로 하여금 증득과 아함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에 있는 네 구는 증력을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에 있는 한 구는 아함을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다.
듣는 자를 찬탄함 중에 나아가면 처음의 한 게송 반은 대중이 지단덕(智斷德)을 갖춤과 아울러 먼저 근(根)이 있음을 스스로 찬탄한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감당해서 사유해 유지함을 찬탄한 것이다.
세 번째,2) 부처님의 가(加)로써 청(請)한 내용에서 이상은 비록 다시 보살 대중이 청하더라도 감응을 따름이 미약함으로 말미암아 법을 나타냄이 아직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청하신 것이다.
또 보살이 청함은 법을 나타내는 것이 아직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님의 가(加)로써 청한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신가(身加)를 밝힌 것이고 나중은 구가(口加)를 밝힌 것이다.
신가는 경 속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어 널리 시방을 비추시는 것이며,
둘째는 시방의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어 이것을 비추시는 것이며,
셋째는 이 대중이 광명을 찾아서 저것을 보는 것이며,
넷째는 저 대중이 광명을 찾아서 이것을 보는 것이며,
다섯째는 광명 구름 대[光臺] 가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광명 구름 대(臺)가 게송을 설하는 것은 마땅히 구가(口加)에 속해야 하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그러나 나오는 바의 소리는 구가에 섭수되는 바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능히 소리의 업[聲業] 을 발함을 올바로 취한 것이니 판단하면 신(身)에 속하는 것이다.
만약 경본(經本)에 의거한다면 이것이 저것을 보는 것과 저것이 이것을 보는 것이 없으니,
둘 모두 없는 것이다.
또 경에서는 제5의 업을 조복함[降伏業] 이 빠져 있다.
또 이 광명은 불력(佛力)의 분제와 가(加)로써 설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지 모인 대중 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머지 경문은 논(論)과 같다.
두 번째 구가(口加)의 경문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긴 행은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게송이다.
게송 중에는 일곱 게송 반이 있는데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청(敎請)의 분별이니,
앞의 여섯 게송은 그 청설(請說)이고,
나중의 한 게송 반은 교설(敎說)이다.
청(請)함은 법의 뛰어남을 밝혀서 사람으로 하여금 깊게 공경토록 하고,
교(敎)는 설함의 진(眞)을 나타내서 대중으로 하여금 깊게 믿게 한 것이다.
둘째는 가청(加請)의 분별이니,
이 게송에 나아가면 앞의 여섯 게송 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 반은 정가(正加)이고,
두 번째에 있는 한 게송은 가(加)의 소위(所爲)이며,
셋째에 있는 세 게송 반은 이익을 얻음을 밝힌 것인데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은 들음의 이익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닦을 때의 이익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더욱더 생겨나는[轉生]
이익이다.
또 이 전생(轉生)의 경문 가운데 게송은 이해하기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다.
경문의 의취(意趣)라는 것은 그 경법(經法)의 뛰어난 힘이 그 듣는 자를 가(加)하고,
나아가 화겁(火劫)이 다할 때라면 경(經)을 듣게 됨을 말미암는 것이다.
논(論)에서 동등하다고 말한 것은 나머지 2재(災)도 모두 듣게 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
【문】저것은 무엇을 듣는다고 말하는가?
【답】저 천(天)이 먼저 부처님으로부터 듣고,
지금은 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極)에 있으면서 말하는 것이지 이 때에 국한한 것은 아니다.
용(龍) 중에서 먼저 경에 있기 때문에 인용했을 뿐이다.
또 세 가지 점차(漸次)라는 것은 곧 가행(加行)과 정체(正體)와 후득(後得)의 3지(智)이니,
이는 준거해 생각해서 섭수할 수 있으며,
또한 가르침과 증득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의 ‘이 때 금강장보살’ 이하는 설분(說分)의 제등함을 보여서 대중으로 하여금 올바르게 알게 한 것이다.
이 경에 나아가면 처음의 집경(集經)이란 금강장이 장차 설하는 상(相)과 아울러 설하는 뜻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그 설하는 바의 게사(偈辭)를 올바르게 밝힌 것이다.
앞의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은 설하는 상(相)을 보인 것이니,
관찰이 설함을 표현한다.
내심(內心)으로 비추어 관찰함을 이름하여 관(觀)이라 하고,
또한 눈으로 흘깃 돌아보고서 설하는 것을 관이라 하니,
이미 치우침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시방을 관한다’ 이하는 설하는 뜻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금강장에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게송을 설하니,
첫째는 지혜가 설함을 감당함을 스스로 나타냄으로써 대중이 무엇으로 인하여 의심하는지를 떨쳐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이미 대중이 청문(聽聞)을 감당치 못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밝힘으로써 대중이 무엇을 연하여 의심하는지를 떨쳐버리는 것이다.
【문】대중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답】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이익이다.
첫째는 의대(義大)의 이익이니,
실제로 말을 내서 오직 깊은 것만이 즐거움이기 때문에 이익을 얻음을 밝힌 것이다.
둘째는 설교대(說敎大)이니,
듣게 된 것이 지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환열(歡悅)의 깊음이 올바른 믿음을 낳은 것이다.
게송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13게송 반이 있다.
처음의 일곱 게송 반은 그 의대(義大)를 밝힌 것이고,
나중에 있는 여섯 게송은 그 설대(說大)를 밝힌 것이다.
의대의 경문 속에 나아가면 경문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처음의 세 게송 반은 그 불법(佛法)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의 네 행 게송은 저 불법을 들어서 지(地)가 말을 냄을 나타낸 것이다.
지금은 지(地)를 밝히기 위한 것인데,
어째서 저 불법의 미묘함을 나타낼 필요가 있는가?
지(地)가 인(因)에 있음으로써 깊은 뜻의 은밀함을 변별하고,
불법이 과(果)에 있음으로써 깊은 뜻의 나타남을 밝히기 때문에 불법을 밝혀서 지(地)의 깊고 미묘함을 나타낸 것이다.
인(因)은 과(果)와 더불어서 높고 낮은 천(天)이 다른데 어떤 상(相)이 나타난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이것이 비록 다시 사람에 따라 높고 낮더라도 법체(法體)는 다르지 않으니,
마치 허공이 자[尺] 를 기준하여 차이를 나누더라도 그 차이가 그대로 공(空)인 것과 같으니,
지법(地法)도 이를 본받은 것이다.
처음의 경문3) 내용에 나아가면 처음의 한 게송 반은 곧바로 법의 미묘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두 게송은 미묘함의 체상(體相)을 낸 것인데 이른바 두 가지 열반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묘함을 총체적으로 변별한 것이고,
둘째 ‘오직 지혜 있는 자만이[唯智者] ’ 이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미묘함이고,
둘째는 알기 어려운 도(道)이며,
셋째는 사량으로 논할 것이 아님을 비분별(非分別)이라 이름 붙인 것이며,
넷째는 이름하여 무구탁(無垢濁)이라 하는데 경에는 이 구(句)가 없으며 아래의 세 구는 있다.
또 무구탁 이하에 네 가지 뜻이 있는 것도 역시 옳다고 하겠으니,
난득(難得)은 위에 속하고 무구(無垢)는 아래를 향한다.
또 두 향(向)에 모두 속하는 것이니,
생각하여 준거할 수 있다.
첫째는 관해(觀解)의 청정이고,
둘째 ‘지자(智者)’ 이하는 행증(行證)이 진(眞)에 계합하는 것이고,
셋째 ‘자성 등(自性等)’ 이하는 체성(體性)의 청정이고,
넷째 ‘불멸 등(不滅等)’ 이하는 덕용(德用)의 자재로움이다.
이상은 논(論)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인데 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 세간의 지혜가 있으면 듣는 데 따라서 명료히 아는 것이니,
아래에서는 세간의 지혜가 경문에 따름을 들어서 진지(眞智)는 들음을 따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논에서 매듭 짓기를 ‘관해(觀解)는 매우 미묘하다’고 한 것은 불탁(不濁)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
지(止)에 의지하여 지자(智者)를 매듭 지은 것 등은 이(理)와 지(智)가 의거함이 되는 것이다.
셋째,
청정의 매우 미묘함은 자성의 멸(滅) 등을 매듭 짓는 것이며,
공덕 등은 불생불멸 등을 매듭 짓는 것이다.
또 첫 번째는 세간을 벗어났기 때문에 세간의 정(定)과는 동일치 않은 것이며,
두 번째는 실다움을 성취하기 때문에 외도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며,
세 번째는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청정한 존자(尊者)와는 동일치 않은 것이며,
네 번째는 정(靜)에 즉해서 항상 쓰기 때문에 성문 등과 동일치 않은 것이니,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래의 두 게송에 나아가면 미묘한 체상(體相)을 낸 것이니,
경문을 나누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있는 두 구는 그 동상(同相)이고,
나중의 한 게송 반은 동일하지 않은 상(相)이다.
동일하지 않은 상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어느 처소든 해탈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취(趣)를 여의는 것이며,
둘째의 다섯 구는 ‘무엇이 해탈인가’를 말한 것이다.
다섯 구를 그대로 나누면 다섯이 되는데,
첫째는 관해(觀解)가 여(如)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른바 열반의 상(相)과 동등한 것이며,
둘째는 대치(對治)해서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체(體)와 덕(德)이 원만히 갖추어졌음을 밝힌 것이고,
넷째는 그 법신이 항상하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고,
다섯째의 한 구는 해탈 자체의 걸림 없음이다.
또 논에서 “오직 처음과 중간과 나중만이 아니라,
앞에서 뒤를 취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지(智)의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 지(智)의 사(事)를 기준으로 한 뜻은 아니다.
지(智)가 일어나고 미혹이 다음으로 멸하는 것인가,
또는 지(智)가 생기고 미혹이 멸하는 것이 동시인가?
이것을 중간이라 이름할 뿐이다.
또는 미혹이 멸한 다음에 지(智)가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런 것들은 다 옳지 않으니,
모두 항상 생(生)하고 항상 불생(不生)하며 항상 멸(滅)하고 항상 불멸(不滅)하는 등의 과오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과 중간과 나중은 연기의 성품대로 취한 것이다.
또 ‘이 같은 관지(觀智)’ 등이란 것은 차례대로 앞의 동일하지 않은 상(相)의 방편이 열반을 무너뜨림을 매듭 지은 것이니,
다섯 가지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앞의 불법을 들어서 지(地)가 말을 여읨을 나타낸 내용에서 그 가운데 네 게송이 있으니,
처음의 한 게송 반은 앞의 두 가지 열반을 듦으로써 지법(地法)을 유비(類比)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 반은 지체(地體)의 설하기 어렵고 듣기 어려움을 올바로 밝힌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설하기 어렵고 듣기 어려움을 비유한 것이다.
앞 가운데 세 구는 앞서 불법의 적멸(寂滅)이 말을 내는 것을 거듭 든 것이며,
아래에 있는 세 구는 지(地)의 설하기 어려움과 다시 듣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
또 논에서 지(地)라고 말한 것은 경계이고,
관(觀)이라 한 것은 혹은 이름하여 분제(分齊)라 하고,
혹은 소연(所緣)일 뿐이다.
둘째,4) 설대(說大)의 경문 중에는 여섯 행의 게송이 있는데 뜻은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처음 한 게송의 세 구는 설함의 분제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세 구는 이미 허물 없는 것으로써 대중에게 권하여 잘못을 없앰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 반은 그 설상(說相)이 간략하여 자세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대중에게 공경히 듣기를 권하여 이미 훌륭하게 설함을 밝힘으로써 대중의 공경과 사랑을 낳는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이미 얻은 힘을 나타내서 설함의 분제를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논에서 ‘단지 1분(分)을 설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인분(因分)이다.
지(地)에는 두 가지 분(分)이 있으니,
하나는 인(因)이고 둘은 과(果)이다.
인은 이른바 세간의 방편행을 닦는 것이니,
곧 가행지(加行智)의 분제이다.
과(果)는 이른바 세간을 벗어나고,
상(相)을 여읜 참다운 증득이니,
곧 정증(正證)의 분제이다.
참다운 증득은 말을 벗어난 것이다.
인상(因相)은 논할 수 있는데,
지금은 오직 인(因)만을 설하기 때문에 1분을 설한 것이며,
또한 지위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른바 듣고 사유하는 등이 돈(頓)이 아닌 점진적 성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자량하여 성취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그 인(因)을 자량하여 성취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증(證)을 자량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교설(敎說)을 닦는 것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참마음의 구경(究竟)이 덕을 성취해서 만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둘째 ‘관수(觀修)’라는 것은 참마음이 허망함을 여의어서 안으로 법계를 비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이 두 가지와 나중에 얻은 정설(正說)이 상응하기 때문에 교설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불상응의 뜻은 의대(義大)에 속할 뿐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설분(說分)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여섯 문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제거할 바의 장애를 밝힌 것이며,
셋째는 나타난 바의 이(理)를 변별한 것이며,
넷째는 성취한 바의 행을 밝힌 것이며,
다섯째는 얻은 바의 과(果)이며,
여섯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인데,
모든 지(地)가 이와 동일하다.
첫째,
명칭을 해석한 것에서 처음을 이름하여 환희(歡喜)라 하니,
위없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성취하여 처음으로 성처(聖處)를 증득해서 환희를 낳음이 많기 때문에 환희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장애를 제거하는 것에서 『지론』에 의거하면 범부아상(凡夫我相)의 장애라 이름하고,
『섭론(攝論)』에 의거하면 범부성무명(凡夫性無明)이라 이름한다.
또 두 가지 장애로 나누니,
첫 번째는 법(法)과 아(我)를 분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악도(惡道)의 업이다.
또 두 종류의 업과 한 종류의 보(報)를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방편의 생사(生死)이다.
무엇을 다스린다고 말하는가?
허공 등과 같으니,
자세히는 논(論)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셋째,
나타난 바를 밝힌 것은 이른바 법계의 두루 하고 원만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힌 것은 단도(檀度:단바라밀)와 10원(願) 등을 성취한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를 밝힌 것에서 만약 과에 국한하여 취한다면 오직 공(空)을 가로막는 뜻을 통달하는 것만이 일체의 장애가 소멸하는 과와 지위 등을 얻는 것이고,
만약 통틀어서 과를 판단한다면 유식(唯識)의 세 가지 무성(無性)의 이(理)를 얻는 것과 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 등을 얻는 것이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긴 행이고 나중은 게송이다.
긴 행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앞을 매듭 짓고 나중을 낳는 것이며,
둘째 ‘만약 중생이’ 이하는 지체(地體)의 상(相)을 변별한 것이다.
이 경문의 상(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설분(說分)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의 ‘보살이 이같이 안주해서’ 이하는 승분(勝分)을 교량(校量)한 것이다.
설분(說分)의 경문에 1백 구가 있으니,
처음의 40구는 주분(住分)이라 이름하고,
다음의 30구는 명분(名分)을 해석함이라 이름하며,
나중의 30구는 안주(安住)가 됨을 설한 것이다.
전자의 40구는 논(論)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처음의 10구 중에서 경에는 정심집(淨心集)이 빠져 있다.
명칭을 해석함에 나아가서 30구 중 처음의 10구는 기쁨이 많은 것인데,
이 중에서 경에는 경희(慶喜)의 문장이 빠져 있다.
논(論)에 의지하는 가운데 ‘심희(心喜)’라 말한 것은 심체(心體)가 기쁜 것이 아니라 기쁨을 섭수해서 마음을 좇는 것이다.
체(體)의 기쁨도 역시 이와 같다.
‘근희(根喜)’라는 것은 체(體)가 나중을 성취하는 것으로써 근(根)을 삼는 것이지 근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10념(念)은 미래에 얻을 것이고,
나중의 10념은 현재에 얻을 것이니,
염현(念現)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념(所念)의 현득(現得)을 올바로 밝힌 것이고,
둘째 ‘왜냐하면’ 이하는 다섯 가지 두려움[怖畏] 을 멀리 여읨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며,
또한 제10 중에 나아가서 나눈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외를 해석한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따지는 것이고 다음은 답이다.
답의 내용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여읜 바의 과(果)를 밝힌 것이고,
둘째 ‘왜냐하면’ 이하는 여의는 상(相)을 해석하여 이룬 것이며,
셋째 ‘이와 같이 보살은’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논(論)에서 ‘앞에서는 신외(身畏)를 설하였고,
나중은 이신(異身)의 두려움이다’라고 말한 것은 먼저 총체적으로 밝히고 나중에 개별적으로 변별한 것이기 때문에 이신(異身)이라 한 것이지 신(身)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안주(安住)함에 나아가서 경문을 나누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안주를 밝힌 것이고,
둘째 ‘이른바 신심(信心)’ 이하에 있는 30구는 개별적으로 안주를 밝힌 것이며,
셋째 ‘보살이 이같이 성취해서’ 이하는 총체적으로 안주를 매듭 지은 것이다.
30구를 자세히 변별함에 나아가면 처음은 10신(信)이고,
다음은 10수행(修行)이며,
다음은 10회향이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둘째,
원교량(願校量)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교량의 뛰어남이고,
둘째는 행교량(行校量)의 뛰어남이며,
셋째는 과교량(果校量)의 뛰어남이다.
10원(願)이라 말한 것에서 첫째는 부처님을 공양하는 원(願)이며,
둘째는 정법을 수호하는 원이며,
셋째는 법을 섭수하는 것을 제일[上首] 로 하는 원이며,
넷째는 중생의 마음을 아는 것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교화함이라 이름하며,
여섯째는 세계를 아는 것이라 이름하며,
일곱째는 정토(淨土)이며,
여덟째는 동심행(同心行)이며,
아홉째는 3업(業)의 불공(不空)이며,
열째는 보리를 성취하는 것이다.
『섭론』에 의거해서도 10원(願)이 있다.
첫째는 공양의 원(願)이니,
뛰어난 연(緣)의 복전(福田)인 사법주(師法主)를 공양하길 원하는 것이며,
둘째는 수지(受持)의 원이니,
뛰어나고 미묘한 정법을 수지하길 원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륜을 굴리는 원이니,
대집륜(大集輪) 중에서 미증유의 법륜을 굴리길 원하는 것이며,
넷째는 수행의 원이니,
설한 대로 일체 보살의 올바른 행을 수행하길 원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성취의 원이니,
이 기세계(器世界) 중생이 삼승의 선근을 성취하길 원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승사(承事)의 원이니,
모든 불국토에 가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뵙고 항상 공경하고 섬기면서 정법을 듣고 받아들이길 원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정토의 원이니,
청정한 스스로의 땅이 정법에 안주하고 아울러 능히 중생을 수행하길 원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여의지 않는 원이니,
일체 중생처(衆生處)에서 항상 모든 불보살을 여의지 않고서 똑같은 뜻의 행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이익의 원이니,
모든 때[時] 에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지으면서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며,
열째는 정각의 원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똑같이 위없는 보리를 얻어서 항상 불사(佛事)를 짓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 이 열 가지 원은 앞의 열 가지 원과 더불어 뜻이 똑같아서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경문의 내용에 나아가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을 매듭 지어서 나중을 낳는 것이고,
둘째는 원(願)의 체(體)를 올바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처음의 원에선 두 구가 빠져 있고,
아홉째의 원에선 여의보신(如意寶身)이 빠져 있다.
셋째 ‘모든 불자’와 나아가 ‘대원(大願)’ 등에 이르기까지는 원(願)의 방편을 닦음을 밝힌 것이다.
넷째 ‘10불가(不可)로써’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만약 논본(論本)에 의거한다면 10무진(無盡)이 앞의 대원(大願)을 성취함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고,
만약 경본(經本)에 의거한다면 이 네 번째가 원(願)의 다함 없음을 매듭 지은 것이다.
이 경문 속에 나아가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과 원(願)을 들어서 종지를 세운 것이고,
둘째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는 10진법(盡法)을 열거한 것인데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만약 중생이 다한다면[若衆生盡] ’ 이하는 법을 가지고 원(願)을 대함으로써 다함을 성취함을 역(逆)으로 나타낸 것이다.
넷째 ‘그러나 중생[而衆生] ’ 이하는 다함 없음을 순(順)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또 여섯 번째 원(願) 가운데 논에서 ‘추(麤)와 세(細)를 변별한다’고 한 것에서 모두 “어떤 의(意)ㆍ식(識)ㆍ신(身)ㆍ색(色)ㆍ심(心)의 추세(麤細)를 따른다”고 말했기 때문에 땅도 역시 추세이니,
나머지 상(相)은 논과 같다.
또 세 가지 3전(轉)이란 것은,
10진(盡)의 구(句)에 나아가면 개별 중에서 중생계ㆍ세계ㆍ공계(空界) 및 심연계(心緣界) 등의 네 가지는 세간전(世間轉)이고,
법계ㆍ열반계ㆍ불지입계(佛智入界)의 이 세 가지는 이름하여 법전(法轉)이라 한다.
불출세계(佛出世界)와 여래지계(如來智界)의 이 두 가지는 지전(智轉)이 된다.
둘째,
행교량(行校量)의 승분(勝分)의 경문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앞을 거듭 들어 나중을 일으킨 것이고,
둘째는 행의 체(體)를 올바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 ‘모든 불자가 다 안다’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의 행을 해석한 경문 내용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원이 마음을 훈(熏)해서 이안(利安) 등의 이익을 성취한 것이며,
둘째 ‘이와 같다면 성취한다’ 이하는 사람이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며,
셋째 ‘즐거이 믿음으로써 분별한다’ 이하는 믿음의 상(相)을 자세히 밝힌 것이다.
이 경문의 10행은 곧 열 가지 단락이 된다.
처음 믿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종지를 총체적으로 세운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는 요체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아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 자비를 해석한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3문(門)을 든 것은 소관(所觀)이 되고,
둘째는 대(對)해서 자비를 일으킨 것이다.
전자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는데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논(論)에서 “제일의(第一義)의 즐거움을 멀리 여읨을 변별한 것 중에서 3공(空)은 세 가지 장애를 여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분별상의 취하고 버리는 것 등이 곧 세 가지 성품의 장애이다.
나머지 행은 논과 같으니 이해할 수 있다.
셋째,
과교량(果校量)의 승분의 경문에 네 가지 과(果)가 있는데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
조유과(調柔果)의 내용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 중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많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며,
둘째 ‘마음이 크게 환희해서’ 이하는 능련(能練)의 행을 밝힌 것이며,
셋째 ‘많이는 두 가지 섭수로써[多以二攝] ’ 이하는 앞에서 수련한 행을 타고서 개별적인 지(地)의 덕을 밝힌 것이며,
넷째 ‘이 보살’ 이하는 수련한 바[所練] 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다.
둘째,
발취과(發趣果)의 경문 내용은 두 가지로 나누는데 처음은 해석이고 나중은 매듭 지음이다.
전자의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고,
둘째는 비유이며,
셋째는 합(合)이고,
넷째는 매듭 지음이다.
법과 비유와 합 중에는 모두 네 구가 있으니,
첫 번째는 지(地)의 법을 묻는 것이고,
두 번째 ‘이 보살이 잘 알아서’ 이하는 지해법(智解法)을 밝힌 것이고,
세 번째 ‘모든 불자여’ 이하는 능행(能行)의 행을 밝힌 것이고,
네 번째 ‘모든 지의 지혜를 얻는다[得諸地智] ’ 이하는 그 능히 도달함을 밝힌 것이다.
비유와 합의 네 구(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셋째,
섭보과(攝報果)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재가(在家)의 과(果)이고,
둘째는 출가(出家)의 과이다.
재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상승과(上勝果)이고,
둘째 ‘능히 큰 보시로써[能以大施] ’ 이하는 이른바 왕의 과보[王報] 에 의거해서 뛰어난 행을 일으킨 것이다.
원지과(願智果)는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둘째,
게송 중에는 45행 반이 있다.
처음의 22게송은 위의 설분(說分)을 읊은 것이며,
다음 ‘보살이 이와 같이’ 이하의 21게송 반은 교량의 승분(勝分)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총체적으로 매듭 지어서 찬탄한 것이다.
처음 경문의 내용에서 처음의 11게송은 지(地)의 방편과 주지(住地)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이 보살’ 이하의 다섯 행 반의 게송은 저 명칭을 해석함과 다섯 가지 두려움[怖畏] 을 읊은 것이며,
다음 ‘언제나 행하며[常行] ’ 이하의 다섯 행 반의 게송은 안주(安住)의 경문을 읊은 것이다.
다음 21행 반의 게송 경문 내용에서 처음의 다섯 행 반 게송은 10원(願)의 매듭 지음과 다함 없음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 여섯 행의 게송은 신(信) 등 10행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 ‘지자(智者)가 밤낮으로’ 이하의 열 행 게송은 과교량을 읊은 것인데 그 중에서 처음의 한 게송은 조유과를 읊은 것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발취과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다섯 게송 반은 섭보과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만약 원력으로써 하면’의 반 게송은 원지과를 읊은 것이다.
제2지(地)의 내용에서 여섯 문은 앞과 같다.
명칭을 해석한 것에서 능히 마음을 그르치고 계율을 범해서 일으킨 번뇌의 더러움 등을 여의어서 청정한 계(戒)를 구족하기 때문에 이구지(離垢地)라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를 밝힌 것이다.
『지론』에 의거하면 중생신(衆生身) 등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장애이며,
『섭론』에 의거하면 신업(身業) 등에 의지해서 모든 중생에 대해 삿된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명은 또한 두 가지 장애를 다스리니,
첫째는 미세(微細)의 과오를 범함이며,
둘째는 갖가지 상(相)의 업행(業行)이다.
또 두 가지 업의 장애와 하나의 보(報)의 방편 생사를 다스린다.
셋째,
나타낸 바라는 것은 가장 뛰어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
성취한 바라는 것은 계도(戒度:계바라밀)를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
얻는 바의 과(果)라는 것은 만약 법계의 가장 뛰어난 공덕을 통달하면 일체 중생의 가장 뛰어나고 비길 바 없는 보리의 과(果)를 얻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果)는 초지(初地)와 동일하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이니,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게송은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의 긴 행은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의 게송은 앞을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의 게송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세 게송은 대중이 이익을 얻는 것이니,
3업의 공양이 곧 세 가지가 된다.
다음에 있는 두 게송은 해탈월이 청해서 후지(後地)의 경문을 낳는 것이다.
둘째의 올바로 해석하는 경문 내용에 두 단락의 경문이 있으니,
하나는 발기(發起)의 청정함이고,
둘은 자체(自體)의 청정함이다.
발기라는 것은 지(地)의 방편에 취향하는 것이다.
후지(後地)를 낳음 중에서 3취정계(聚淨戒)를 발기의 청정함이라 이름하고,
3취정계가 지(地) 중의 올바른 행이기 때문에 자체의 청정함이라 이름한다.
처음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금강보살은 앞을 매듭지어서 나중을 낳는 것이며,
둘째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는 발기를 올바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이익을 성취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의 자체의 경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행의 체(體)를 밝힌 것이고,
두 번째는 지(地)의 과(果)를 변별한 것이다.
첫 번째인 행의 체(體)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먼저는 율의(律儀)를 해석한 것이고,
다음은 선(善)을 섭수함을 해석한 것이며,
나중은 중생을 섭수함을 변별한 것이다.
이 10지 안의 과문(科文)은 일정하지 않다.
초지와 제10지는 똑같이 나누어서 여덟이 되고,
이 지(地)는 둘이 되며,
3지와 4지와 9지는 넷이 되고,
5지와 6지는 똑같이 셋이며,
제7지는 다섯이 되고,
8지는 일곱이 되니,
각기 하나의 법을 따를 뿐이다.
이는 지법(地法)이 매우 깊기 때문에 방편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지,
오직 하나의 지(地)에만 이러한 1문(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율의에 나아가면 크게 판단해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계(性戒)가 성취되어서 모든 허물을 단박에 여읨을 밝힌 것이고,
둘째 ‘보살이 이와 같이’ 이하는 필경에는 호지(護持)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다시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은 자성의 성취를 밝힌 것이고,
둘째 ‘일체를 멀리 여의어서’ 이하는 모든 허물을 단박에 여의는 것이다.
또 논(論)에서 ‘이 두 종류의 친구’라고 말한 것은 2가(家)의 말을 기억하여 그 2가에게 가서 거짓으로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또 경에서 ‘이것의 들음이 저것을 향하지 않고 이것의 무너짐을 설하기 때문에 등’이란 것은 이것의 유지하는 뜻을 변별한 것이니,
피차가 서로 무너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설하지 않은 것이다.
또 제10의 사견(邪見) 중에서 일곱 가지 사견의 이상(異相)이란,
첫째 이승(異乘)의 사견이 개별적으로 출세간의 행에 의거하는 것이며,
다음의 둘은 유사한 법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니,
그리하여 기(記)와 무기(無記)의 두 가지로 나눈다.
다음의 하나는 무(無) 중의 허망한 계교에 의지하는 것이며,
다음의 둘은 은복(隱伏)의 법에 의지해서 생기하는 것이니,
그리하여 하나는 용(用)의 안이요 하나는 용의 밖이니 두 가지로 나눈다.
다음의 하나는 세간법에 의지해서 생기하는 것이다.
경에서는 제1구와 제3구 등의 경문이 빠져 있다.
또 결정(決定)의 깊은 믿음은 이승(異乘)이고,
죄와 복의 인연은 복장견(覆藏見)이다.
경문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의당 사유해서 준거해야 한다.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둘째5)는 섭선법계(攝善法戒)의 경문인데 경문은 다섯 가지로 구별하며,
뜻으로는 네 가지로 구별하는데 요약해 섭수하면 두 가지가 된다.
경문의 다섯 가지라고 말한 것은 아래의 경문과 같으니,
다섯 처소는 경론을 들어서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뜻을 네 가지로 구별하는 것에서 첫째는 지(智)이고,
둘째는 원(願)이며,
셋째는 관(觀)이고,
넷째는 행(行)이다.
첫째,
중생이 일체의 악(惡)을 따르는 것은 모두가 열 가지 불선도(不善道)를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사유하는 것이 바로 지(智)이다.
‘나는 마땅히 스스로 머문다’ 등은 그 원(願)이니,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깊이 사유한다’ 이하부터 ‘여래’에 이르기까지는 그 관(觀)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이하는 그 행이다.
요약하면 두 가지가 된다는 것은 처음의 둘이 하나로서 지(智)를 대해서 방편이 되어 뒤의 올바른 원(願)을 일으키는 것이며,
나중의 둘이 하나로서 관(觀)을 대해서 방편이 되어 뒤의 올바른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셋째6)는 섭중생계(攝衆生戒)의 경문인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중생을 섭수함[攝生] 을 자세히 밝힌 것이며,
둘째 ‘모든 불자여,
이 보살은 이처럼’ 이하는 중생을 섭수함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니,
나머지 뜻은 논과 같다.
살생 등은 두 종류의 사람 가운데 과(果)를 얻는데 무엇인가?
【답】이것의 습(習)이란 것은 기(氣)의 습이 아니니,
이는 잔습(殘習)이라 이름 붙인다.
인도(人道)를 수순하는 업이란 것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 따로 과보를 받는 것이며,
정보(正報)가 단(斷) 등을 수순한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 가운데 정해지지 않은 과보이니,
마땅히 준거할 수 있다.
만약 명언(名言)으로써 구한다면 두 가지 과보도 역시 우열이 있고 유(有)와 무(無)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이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3도(道)를 거치는 것도 그 뜻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자세히는 『대론(大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2도(倒)의 악의(惡意)와 전념(專念)의 행이란 것은 연(緣)을 살펴서 뜻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상락(常樂)의 2도(倒)가 연(緣) 가운데서 현기(現起)하기 때문에 뜻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이(理)를 어긴 것을 악(惡)이라 이름 붙이니 이것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고,
뜻을 지어서 낳는 것을 전념의 행이라 이름한다.
2도(倒)의 악심이 전념이 아니라는 것은 근본의 집기(集起)가 그 마음의 뜻이고,
아정(我淨)의 2도는 앞의 상락(常樂)을 조망하는 것이니,
근본의 집기이기 때문에 마음이라 설하는 것이다.
아(我)는 상(常)의 근본이고 정(淨)은 낙(樂)의 근원이니,
이 둘은 성품이 이루어진 것이지 작의(作意)로 생긴 것이 아니라서 전념이 아니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나중의 과보를 추적하는 중에서 경에는 장(障) 중의 제8구와 실(失) 가운데 제1구가 빠져 있다.
또 계(界)의 차별의 내용에서 제2 개별적인 구(句) 안의 경의 제1구는 논의 제3구이며,
제2 지과(地果)의 경문 안에서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調柔)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조유의 상(相)이고,
둘째 ‘보살은 이 때’ 이하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상(行相)이며,
셋째 ‘불자여,
이 명칭이’ 이하는 과상(果相)을 설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며,
둘째는 능련(能練)의 행이며,
셋째는 소련(所練)의 청정함이다.
행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공양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회향을 밝힌 것이며,
나중은 열 가지 선법(善法)의 행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경에 의거하면 회향이 생략되고 없다.
과보의 섭수는 초지(初地)와 동일한데,
『섭론』에 의거하면 2지(地) 이후에는 여덟 가지 청정이 있다.
여기서 많은 부처님을 보는 것은 곧 저기서 부처님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며,
여기서 옷을 입는 것과 나아가 공경하는 마음은 곧 저기서 신(信)의 청정함이고,
여기서 청정한 계율은 곧 저기서의 바라밀이고,
여기서 왕을 짓는 것은 곧 저기서 제6의 중생을 성취함이고,
여기서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은 곧 저기서 마음의 청정이고,
여기서 수(首) 등이 되는 것은 곧 저기서의 자비이고,
여기서 천 겁 등에 머무는 것은 곧 저기서 중생의 청정함이고,
여기서 대지가 흔들리는 등은 곧 저기서의 위덕(威德)이니,
나머지 지(地)는 이에 준거하라.
셋째,7) 게송을 거듭함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설하는 뜻을 밝히는 것이고,
둘은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26게송이 있는데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두 게송은 발기(發起)이고,
다음의 16게송은 자체의 청정함이며,
다음에 있는 일곱 게송은 과(果)의 이익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찬탄을 매듭 지은 것이다.
자체의 경문 중에서 처음에 있는 네 게송은 여의는8) 계의 청정함[離戒淨] 을 읊은 것이고,
다음에 있는 네 게송은 선법을 섭수함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여덟 게송은 중생을 섭수하여 이롭게 함을 읊은 것이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경문 내용에서 처음에 있는 세 게송은 원행(願行)의 집(集) 등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다섯 게송은 집과(集果)의 경문을 읊은 것이다.
과(果)의 이익 중에서 처음의 두 게송은 조유(調柔)를 읊은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섭보(攝報)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원지(願智)를 읊은 것이다.
제3지(地) 안의 여섯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한 것이니,
듣고[聞]
사유하고[思]
수행하는[修]
등을 따라서 법을 비추어 현현하기 때문에 명지(明地)라고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지론』에 의거하면 암상(闇相)은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등에서 모든 법을 망령되게 장애하는 것이고,
『섭론』에 의거하면 심지(心遲)와 고(苦)와 무명은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무명에 다시 두 가지 무명이 있으니,
하나는 욕애(欲愛)의 무명이고,
둘은 구족문지다라니(具足聞持陀羅尼)의 무명인데,
2업(業)의 장애와 1보(報)의 방편 생사가 있다.
셋째,
나타낸 바를 밝힌다는 것은 승류(勝流)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히는 것은 곧 인행(忍行)과 4정(定)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를 밝히는 것이니,
법계의 승류(勝流)의 문구와 공덕을 통달해서 가없는 법음(法音)을 얻는 것과 아울러 일체 중생의 의욕과(意欲果)와 3지위(地位)를 능히 채우는 것인데,
전체적인 과(果)는 초지(初地)와 같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인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게송을 발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주지(住地)의 체(體)를 올바로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을 거듭 읊는 것이다.
처음 게송의 경문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있는 여섯 게송은 대중의 3업이 앞의 설을 공경하면서 찬탄하는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한 게송은 기뻐하는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꽃비가 내리는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둘째의 네 게송은 나중에 청함을 생기한 것인데,
이 중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대중이 청하는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월이 청하는 것이다.
제2지(地)의 체(體)의 경문에 나아가면 그 차별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행(厭行)을 일으키는 분(分)이고,
둘째는 염행분이며,
셋째는 염분(厭分)을 밝힌 것이고,
넷째는 염과분(厭果分)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앞을 맺어 뒤를 낳는 것인데 닦아서 향해 들어가길 권한 것이다.
두 번째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는 염(厭)을 일으킴을 올바로 변별한 것이며,
세 번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행의 능입(能入)을 매듭 지은 것이다.
염행(厭行)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번뇌를 수호하는 행을 닦는 것이며,
두 번째는 소승을 수호하는 행을 닦는 것이며,
세 번째는 방편의 섭수하는 행을 수행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10구는 무상(無常)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10구는 구원할 자가 없는 것이다.
소승을 수호하는 데 나아가면 30구가 있는데,
처음에 있는 10구는 부처님의 지혜를 구해서 저 소심(小心)을 수호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20구는 중생을 이롭게 함을 염(念)해서 저 협심(狹心)을 수호한 것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후자의 협심을 수호함 중에 있는 처음의 10구는 비(悲)를 일으킨 것이고,
나중의 10구는 구도(救度)하는 것이다.
도(度)는 비(悲)의 이익인데,
또한 처음의 10구는 그 비심(悲心)이고 나중의 10구는 자심(慈心)이라 할 수도 있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며,
나중의 구도(救度)의 10심(心) 중에서 처음은 전자를 거듭 들어 나중을 일으킨 것으로서 제도하는 마음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둘째는 제도하는 마음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다.
개별적인 것 속에 아홉 구가 있으니,
처음의 세 구는 제도하는 처소이고,
다음의 두 구는 제도의 행이며,
다음의 세 구는 앞의 것을 변별한 것이고,
나중의 한 구는 제도의 과(果)이다.
셋째,9) 방편의 섭수 중에서 이 안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관(觀)을 일으키는 방편이니,
위의 세 가지 마음을 거듭 들어 나중의 관구(觀求)를 일으키는 것이며,
두 번째 ‘즉시욕구(卽時欲具)’ 이하는 표취(標趣)의 방편이니,
그 부처님 슬기를 표방해서 그 취향하는 바를 밝힌 것이며,
세 번째 ‘이렇게 사유한다’ 이하는 관구(觀求)의 방편이니,
중생을 제도하는 법을 관찰하고 추구하는 것이며,
네 번째 ‘즉시지주(卽時知住)’ 이하는 정지(正知)의 방편이며,
다섯 번째 ‘보살이 이같이 알고 나서’ 이하는 전수(轉修)의 방편이니,
법을 듣는 행을 닦아서 올바른 법을 섭취하는 것이다.
네 번째의 정지(正知) 방편이란 전념(前念)에서 중생이 번뇌업의 고(苦) 속에 떨어져 있을 때 모종의 방편으로써 건져 올려서 열반의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다.
곧 장애가 없는 지(智)를 여의지 않는 것이 여래지(如來智)임을 아는 것이니,
지(智)는 무엇을 말미암아서 생기하는가?
곧 8지 이상의 실다운 각(覺)을 여의지 않고서 일어남을 아는 것이니,
각은 무엇을 말미암아서 생기하는가?
곧 4지 이상의 남이 없는 행혜[無生行慧] 를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니,
혜(慧)는 무엇을 말미암아서 얻는가?
곧 3지의 선정(禪定)을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니,
정(定)은 무엇을 말미암아서 생기하는가?
법을 들음[聞法] 을 여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보살은 먼저 정법을 구한다.
이미 법을 듣고 나면 고요한 처소에서 사유하고,
사유하고 나서는 닦아 익혀 선(禪)의 무색(無色)에 들어가며,
이 선정에 의거해서 법의 무생(無生)을 관하여 출세간의 혜를 일으키고,
무생의 혜에 의거해서 실답게 각(覺)하며,
저 실다운 각에 의거해서 걸림 없는 지(智)를 얻고,
이미 지를 얻었다면 문득 와서 중생을 구제하니,
지상(智相)이 이와 같은 것이다.
다섯째의 중생을 섭수하는 방편의 경문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구하나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서 능히 외부의 재물을 버리는 것을 밝힌 것인데,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어렵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 ‘다만 법을 설하는 자에 대해[但於說法者] ’ 이하는 사람을 중시하고 보배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다섯 구가 있다.
이것이 곧 한 구가 되니 법을 구하기 위해서이며,
이 제2구는 법을 위해 버리고 보시하는 것이며,
‘또 법을 구하기 위해[又爲求法] ’ 이하의 법을 위해 주사(走使)하는 것은 제3구가 되고,
교만을 타파하고 없애서 고(苦)를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는 것이 제4구가 되니 위로는 공경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 되고 아래로는 나를 집착하는 것을 아만(我慢)이라 이름하며 동등함에서는 스스로 크게 여기는 것을 대만(大慢)이라 이름하며,
‘만약 한 구를 얻는다면[若得一句] ’ 이하에서 승재(勝財)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곧 제5구가 된다.
이 중에서 교량(校量)에 들어가서는 총체적으로 세 구가 있음을 성취하니,
이것이 처음의 한 구를 이룬다.
‘한 게송만 들어도[得聞一偈] ’ 이하는 제2 교량이고,
‘이 보살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이하는 제3 교량이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의 ‘또한 들은 바와 같이[又如所聞] ’ 이하는 경문에 따라 능히 행하는 것이다.
염분(厭分)을 해석하는 가운데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앞에서 법을 듣고 나서 고요한 처소에서 사량하는 것을 거듭 들어 나중의 설(說)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염(厭)의 체(體)를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들어가는 뜻을 밝히는 것이니,
법행을 수순함으로써 집착을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의 경문 내용 중 초선(初禪) 안에서 욕망과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는[離欲惡不善法]
것은 장애를 여의는 것인데,
그 해석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총상(總相)의 해석인데,
욕계의 악과 착하지 않음을 없애기 때문에 욕망과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는 용수(龍樹)에 의거한 것인데 5욕(欲)을 멀리 여의는 것을 욕망을 여읜다고 이름하고,
5개(蓋)를 끊어서 없애는 것을 착하지 않음을 여읜다고 이름한다.
그래서 용수는 “초선(初禪)에 취향해서 5법을 멀리 여의고 5법을 끊는다”고 한 것이다.
셋째는 비담(毘曇)에 의거한 것인데 5욕을 여의기 때문에 욕망을 여읜다고 이름하고,
10악을 끊기 때문에 악을 여읜다고 이름하며,
5개(蓋)를 없애기 때문에 불선(不善)을 여읜다고 이름한다.
넷째는 성실(成實)에 의거한 것인데 탐욕의 마음을 끊는 것을 욕망을 여읜다고 이름하고,
또한 살생 등을 버리는 것을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읜다고 이름한다.
각이 있고 관이 있다[有覺有觀] 는 것은 대치(對治)이다.
거친 사유[麤思] 를 각이라 이름하고,
세밀한 사유[細思] 를 관이라 이름하니,
이 때문에 용수는 “비유하자면 방울을 흔들 때 거친 소리는 각에 비유되고 세밀한 소리는 관에 비유된다”고 말한 것이다.
여의어서 기쁨[喜] 과 즐거움[樂] 을 내는 것이 바로 그 이익이다.
욕망과 악을 가려 등지기 때문에 기쁨을 내는 것이고,
허물을 여의어서 쉼[息] 에 의지하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선행(禪行)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그 정체(定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어째서 유독 이것만을 선행이라 이름하는가?
일심의 선체(禪體)이기 때문에 선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2선(禪) 속에 나아가서 각관(覺觀)을 멸한다는 것은 바로 장애를 멸하는 것이다.
장애를 멸함 중의 각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定)에 즉(卽)한 마음이고,
둘째는 정(定)에서 나올 때이며,
셋째는 식신(識身) 중에서 거칠게 움직이는 각(覺)이다.
이 셋은 모두 동란(動亂)의 마음인데,
2선(禪)의 뛰어난 고요함은 모두 똑같이 이것들을 멸한다.
내정(內淨)이라 말한 것은 대치(對治)의 지(支)이다.
만약 각관(覺觀)이 있다면 혼탁하고 산란해서 고요하지 않은데,
이 선(禪)의 뛰어난 고요함은 저 외부의 산란함을 여의기 때문에 내정(內淨)이라 말한 것이다.
일처(一處)라고 말한 것은 그 다스리는 상(相)을 밝힌 것이니,
저 안으로 청정한 마음이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서 다시 나머지 반연이 없기 때문에 일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저 사리아비담(舍利阿毘曇)에서는 “욕계의 지(地) 속에서 마음은 6처(處)에 행하니,
6식(識)의 몸으로써 6진(塵)을 취하기 때문이다.
초선(初禪)의 지(地) 속에서 마음은 4경(境)에 행하니,
4식(識)의 몸으로써 4경에 행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초선 위에서는 비식(鼻識)과 설식(舌識)이 없기 때문에 단지 네 가지를 말했을 뿐이다.
2선(禪) 이상에선 마음이 일처(一處)에 행하니,
오직 의식(意識)의 몸만이 법진(法塵)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상속하여 사이도 없고 끊어지지도 않는 것을 일처라고 이름하니,
아래의 논석(論釋) 중에서는 이 두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각관(覺觀)이 없다는 것은 그 능히 다스림을 나타내는 것이니,
능히 각관을 다스리는 것이다.
앞에서는 각관을 멸함으로써 곧바로 허물을 여읨을 밝힌 것이니,
가령 멸제(滅諦)를 설하는 것으로 무루(無漏)를 삼은 것과 같다.
이제 능히 다스림에 나아가서는 각관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마치 도제(道諦)를 설하는 것으로 무루를 삼은 것과 같다.
정(定)이 희락(喜樂)을 냄은 그 이익이다.
앞의 초선 중에선 처음으로 욕망과 악을 등져서 여읨을 기뻐하기 때문에 기쁜[喜]
것이다.
지금의 이 선(禪) 중에선 법이 안으로부터 생기하면서 얻음을 기뻐하기 때문에 기쁜 것이니,
즐거움[樂] 은 앞서의 해석과 같다.
2선의 행에 들어가는 것은 선체(禪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3선 중에 나아가서 희(喜)를 여읜다고 말한 것은 장애를 멸하는 것이다.
2선의 희심(喜心)은 분별하여 서로 동란(動亂)을 낳아서 허물이 많은데,
이 선정에서 마음이 전(轉)하여 고요하기[寂]
때문에 멸(滅)이다.
사(捨)를 행해서 혜(慧)를 염(念)하는 것은 그 대치(對治)이다.
사(捨)를 행한다고 말한 것은 그 사지(捨支)이다.
마음의 조정(調停)을 행해서 저 희(喜)의 허물을 버리기 때문에 사(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捨)의 수(數)로서 다른 사(捨)의 수용을 가려내기 때문에 행을 밝힌 것이다.
억념(憶念)을 말한 것은 바로 그 염지(念支)이다.
앞에 있는 희(喜)의 허물을 염(念)해서 마음의 한 경계를 지키기 때문에 염이라 칭하는 것이다.
염과 억(憶)은 모두 짝을 통틀어서 설하기 때문에 억념이라 말한 것이다.
억(憶)이 능히 깨달음을 발해서 염력(念力)이 강해지도록 도우니,
이 때문에 통틀어서 든 것이다.
이는 또한 염을 즉설(卽說)하는 것으로써 억을 삼는다고 할 수 있으니,
가령 4념처(念處)는 체성(體性)이 혜(慧)이면서도 그 이름을 염이라 한 것과 같으니,
이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안혜(安慧)를 말한 것은 안혜지(安慧支)이다.
희(喜)의 허물을 분별해서 혜(慧)를 설하니,
혜의 고요함을 안(安)이라 이름한다.
몸이 즐거움[樂] 을 수용하는 것은 그 이익이니,
열(悅)을 해석해서 낙이라 이름 붙인다.
신수(身受)를 말한 것에서 수(受)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른바 몸과 마음인데 두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근(根)을 기준해서 분별한 것이다.
5식 중의 수(受)는 색근(色根)에 의지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신수(身受)라 이름하고,
의식 중의 수는 의근(意根)을 따라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심수(心受)라 이름한다.
둘째는 이익된 바를 기준해서 몸과 마음을 분별한다.
하품(下品)의 수는 창달함이 마음에 있음을 해석해서 심수(心受)라 이름하며,
상품(上品)의 수는 몸과 마음에 두루 함을 해석한 것인데 두루한 처소에 나아가 말(末)을 따라서 이름을 삼았기 때문에 신수(身受)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후자의 뜻을 따른다.
낙처(樂處)의 심법은 이 처소의 증상(增上)이 몸과 마음에 두루 원만하기 때문에 신수를 설한 것이며,
낙(樂)의 증상을 나타냄은 이 심법을 즐기는 것이니,
마음속의 수(受)의 뜻은 언론(言論)을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현성(賢聖)이 능히 설한다고 말한 것은,
이 즐거움의 깊고 뛰어남은 오직 현성만이 능히 설할 수 있음을 허물로 삼아서 능히 버리어 여읨[捨離] 을 감당할 뿐 범부가 능한 바가 아니니,
이는 즐거움의 깊음을 밝힌 것이다.
염(念)이 즐거움을 수용해서 3선(禪)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그 선체(禪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이른바 스스로의 지(地)에서 즐거움을 수용하는 허물을 염(念)함으로서 일심에 들어가는 것이다.
4선(禪)에 나아가서 고통을 끊고 즐거움을 끊어서 걱정[憂] 과 기쁨[喜] 을 멸한다는 것은 장애를 멸하는 것이니,
4수(受)를 끊어서 선(禪)의 부동(不動)을 밝힌 것이다.
고통을 끊는다고 말한 것은 고통의 실재(實在)를 2선(禪) 중에서 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禪)에서 움직이지 않고 4수(受)를 끊어서 벗어남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에 끊는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저 3선의 즐거움을 가리켜서 고통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3선의 즐거움을 끊는 것을 고통을 끊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와 같은가?
저 3선의 즐거움은 거친 마음의 사람을 조망해서 설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나중의 고요한 마음을 조망하는 것은 곧 대고(大苦)이니,
마치 세간에서 손뼉을 치고 나무를 때려서 저 깨어 있는 자에게 설하는 것은 즐거움이 되지만 잠이 든 사람에겐 큰 고통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즐거움을 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즐거움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3선의 즐거움을 끊는 것이니,
저 즐거움이 거칠게 움직이기 때문에 여기서 끊는 것이다.
먼저 걱정을 멸하는 것은 초선의 멸함이고,
먼저 기쁨을 멸하는 것은 3선의 멸함이니,
모두 앞에서 멸하기 때문에 ‘먼저’라고 말한 것이다.
이미 여기서 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이를 논했는가?
이는 또한 이 부동선(不動禪)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걱정과 기쁨이 앞의 지(地)에서 끊어지게 하기 때문에 먼저 멸함을 밝힌 것이라면 고통[苦]
역시 먼저 멸하는데 어째서 먼저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석언(釋言)은 ‘먼저’를 밝힌 것이니,
이(理) 역시 손상이 없다.
다만 여기서 고통이 비록 먼저 끊어지더라도 고통을 대(對)한 즐거움이 이 속에서 끊어짐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을 대한 고통을 ‘먼저’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먼저 고통을 끊은 자를 반드시 말해야 한다면 남들이 저 즐거움도 역시 먼저 끊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걱정과 기쁨의 능대(能對)와 소대(所對)가 먼저임을 밝히지 않은 것이니,
모두 먼저 끊음이기 때문에 먼저 멸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이익이다.
나머지 선(禪) 중에선 모두가 먼저 다스림을 밝힌 것인데 지금 여기선 어째서 먼저 이익을 설하고 나서 앞서 밝힌 바인 고통을 끊고 즐거움을 끊음을 탄 것인가?
이를 대한 것이 곧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님[不苦不樂] 을 밝힌 것인데,
이익의 뜻을 밝힘이 편하기 때문에 먼저 논한 것이며 행실(行實)은 나중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사수(捨受)가 고통과 즐거움과는 동일치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이름한 것이다.
어째서 걱정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 것인가?
세 가지 뜻의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이 선(禪)이 즐거움의 수(受)를 올바로 끊어서 다시는 고통이 없어 저 둘을 뒤집어 대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둘째는 앞의 경문에선 먼저 고통과 즐거움을 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를 치우치게 대함으로써 고통도 즐거움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셋째 5수(受) 중에선 걱정과 기쁨의 명칭을 구별하며,
3수의 분별에선 걱정과 기쁨의 두 명칭은 고통과 즐거움에 섭입(攝入)한다.
고통과 즐거움이 관대하기 때문에 사수(捨受)로써 이를 대하는 것을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이름한다.
사념정(捨念淨)이란 대치(對治)이니,
사(捨)는 사지(捨支)이고,
염(念)은 염지(念支)이다.
앞의 3선 중에선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사념(捨念)이 청정치 못한데 지금 여기선 없기 때문에 사념(捨念)이 청정하다.
4선(禪)의 행에 들어가는 것은 그 선체(禪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4공정(空定)의 뜻은 자세히는 별장(別章)과 같으니,
이는 마땅히 논해야 한다.
4공정의 경문은 논(論)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법행(法行)을 수순한 것은 선정에 의거해서 한량없는 신통 등을 수순해서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선정에 들어간 것이지 애착이 아니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염과(厭果)를 해석함 중에서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한량없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신통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자재로움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4무량(無量) 중의 경문에선 불이(不二) 및 청정과 무념 중의 두 구가 빠져 있다.
또 신통(身通) 중의 경문에선 제6의 주수구(注水句)가 빠져 있고,
타심(他心) 중의 경문에선 제7의 망행정행구(妄行正行句)가 빠져 있다.
지과(地果)를 해석함에 나아가선 경문을 세 가지로 나눈다.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과(調柔果)에선 크게 네 가지로 판별하는데,
첫째는 조유의 행이고,
둘째는 인욕행의 덕이며,
셋째는 별지(別地)의 행을 밝힌 것이며,
넷째는 설상(說相)을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 중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많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며,
둘째 ‘공양하다’ 이하는 능련(能練)의 행을 밝힌 것이며,
셋째 ‘백천 겁에서’ 이하는 때[垢] 의 장애가 희박함을 밝힌 것이며,
넷째 ‘다시 적집(積集)하지 않다’ 이하는 소련(所練)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셋째,10) 게송을 거듭하는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35게송이 있는데 처음의 두 게송은 열 가지 깊은 마음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24게송은 염행(厭行)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염분(厭分) 및 과분(果分)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조유(調柔)의 3과(果)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염(厭)의 24게송에 나아가면 처음의 네 게송은 번뇌를 수호함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소승을 수호함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14게송은 방편의 섭수를 읊은 것이다.
제4지(地) 중에서 여섯 문은 앞과 같다.
명칭을 해석한다고 말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 번뇌의 장작을 지혜의 불이 능히 태우기 때문에 염지(焰地)라고 이름한 것이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지론』에 의거하면 법을 이해하는 교만의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섭론』에 의거하면 미세한 번뇌의 행이니,
다 함께 신견(身見) 등을 낳는다.
무명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삼마발제애(三摩跋堤愛)이고,
두 번째는 행법애(行法愛)이다.
또는 두 가지 업의 장애와 한 가지 방편의 생사를 멸하는 것이다.
셋째,
나타난 바라는 것은 섭수함이 없는 뜻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히는 것은 정진행(精進行)과 도품(道品) 등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라는 것은 만약 법계의 섭수함이 없는 공덕을 통달한다면 감응하는 바가 일체 중생의 이익사과(利益事果)와 네 가지 지위와 같음을 얻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果)는 초지와 동일하다.
여섯째는 경문을 해석하는 것인데 경문의 내용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게송이 나중을 낳는 것이고,
둘째는 지체(地體)를 올바로 변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으로 앞을 매듭 짓는 것이다.
처음에 여덟 게송이 있는데 첫째의 두 게송은 보살의 공양이고,
다음은 천녀(天女)의 공양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천왕이 만남을 축하해서 공양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대중이 청하는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이 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왕과 여인이 청한 까닭은 이 지(地)의 정체지(正體智)와 외적인 용(用)을 둘 다 성취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체(體)의 경문 속에 나아가면 크게 네 가지로 판별한다.
첫째는 청정의 대치(對治)로 수행이 증장(增長)하는 인분(因分)이며,
둘째는 청정분(淸淨分)이며,
셋째는 대치하는 수행의 증장분이며,
넷째는 저 과분(果分)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낳음으로써 닦아서 향해 들어가길 권유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행의 체(體)를 밝힌 것이며,
세 번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이익을 행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논(論)에서 ‘두 곳을 순행(順行)한다’고 말한 것은 지(地) 이전에선 방편이 올바른 지(地)를 사량하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이고 지(地) 속에 올바로 있는 것은 이름하여 ‘이미 증득함’이라 말하는데,
이 두 처소의 행이 똑같이 설한 바에 의거하기 때문에 순행(順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논한 바와 같다.
청정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며,
나중은 매듭 지음이다.
총체적인 것 속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불가(佛家)가 더욱 세력이 있음을 밝힌 것이며,
두 번째는 내법(內法)을 얻는 것이며,
세 번째는 이른바 10지(智)의 교화를 성취하는 것이다.
또 논에서 ‘여래 자신이 소유한 모든 법은 이 모든 법으로써 여래를 나타내 보인다’고 말한 것은 사람과 법이 서로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을 나타내면 도로 뛰어난 법으로써 여래를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수행이 증장하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번뇌를 수호함은 바로 자리(自利)의 행이고,
둘째 소승을 수호함은 이타(利他)의 행이다.
이 두 가지는 각기 둘이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또 번뇌를 수호함 중에서 신념(身念) 가운데 나아가면 먼저는 내신(內身)을 관한 것이고,
다음은 외신(外身)을 관한 것이며,
나중은 둘을 합쳐서 관한 것이다.
내신이라 하면서도 다시 외(外)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저 12입(入) 가운데 나아가서 내외를 나눈다면 자(自)이든 타(他)이든 6근(根)은 안이고 6진(塵)은 밖이 된다.
이제 4념(念) 중에선 자신(自身)을 안이라 이름하고,
타신(他身)은 밖이 된다.
어째서 처음은 개별적이고 나중은 총체적인가?
해석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병을 타파함이 동일치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정(內情)을 집착함은 많고 외정(外情)을 집착함은 적다면 마치 사람이 자신을 위해 처자와 모든 재물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안을 집착함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안을 관함을 가르쳐야 한다.
어떤 사람이 외정을 집착함은 많고 내정을 집착함은 적다면 마치 사람이 재물 때문에 몸을 잃고 욕망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과 같으니,
밖을 집착함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밖을 관함을 가르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안과 밖을 모두 집착하기 때문에 반드시 합쳐서 관해야 한다.
둘째,
관(觀)의 시종을 따라서 행하는 것은 본래 자신 속에서 청정한 상(相)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안을 관해야 하고,
안에서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이른바 밖에 있다고 하기 때문에 반드시 밖을 관해야 한다.
향(向)이라는 것은 안을 관하면 그 밖을 미치지 못하고,
밖을 관할 때는 다시 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에서는 안과 밖을 합쳐서 관하는 것이다.
내신(內身)을 관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관하는 바를 표방하는 것이고,
순신관(循身觀)이란 것은 그 관상(觀相)을 밝힌 것이니 순(循)은 순(順)과 같다.
그 신상(身相)을 살펴서 다 관찰하는 것을 순신관이라 이름한다.
정근(精懃)의 일심(一心)은 그 관의(觀儀)를 밝힌 것이다.
행하는 자가 이제 신상(身相)을 파괴하고자 한다면 부지런하지 않으면 판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는 “보통사람과 이별하긴 쉬워도 지식(知識)과 이별하긴 어려우며,
지식과 이별하긴 쉬워도 친척과 이별하긴 어려우며,
친척과 이별하긴 쉬워도 자신과 이별하긴 어렵다”고 한 것이다.
수행하는 자가 이제 자기 자신과 이별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근해야 한다.
정근은 뜻을 오로지 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일심(一心)이라고 말하니,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없애서 관(觀)하여 여읠 바를 밝힌 것이다.
어째서 이 중에선 용수가 설한 것처럼 탐욕과 걱정을 치우쳐 여의는가?
수행하는 자가 이 중에서 탐욕과 걱정을 많이 낳기[多生]
때문에 치우쳐 없앤 것이다.
무엇을 다생(多生)이라고 말하는가?
처음으로 5욕(欲)을 버리고서 본래의 애착하는 바를 염(念)하니,
이 때문에 탐욕을 낳는 것이며,
아직 도법(道法)을 얻지 못하기에 걱정을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없앤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시 탐욕이라는 것은 범부가 많이 일으켜서 경계를 탐착해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니,
생(生)을 받는 근본이요 3독의 시초이기 때문에 번뇌 중에서 탐욕 없애기를 치우쳐 설한 것이다.
걱정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제거해야 하는 것은 정(定)을 장애함을 일으키는 가장 중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禪) 속에서 먼저 여의기 때문에 5수(受) 중에선 걱정 없애기를 치우쳐 설한 것이다.
만약 탐욕 없애기를 설한다면 결과적으로 나머지 법도 따를 것이며,
만약 걱정 없애기를 설한다면 모든 수(受)도 따라서 버려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나무를 쪼갤 때 첫 마디가 어려운 것과 같으니,
만약 첫 마디를 쪼갠다면 나머지 마디는 따르기 마련이니 탐욕과 걱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래에서 외신(外身)을 관하는 것과 아울러 내외를 관하는 것은 그 유(類)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념(受念) 중에 나아가서도 역시 처음은 안을 관하고,
다음은 밖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12입(入) 중에서 수(受)는 오직 그 외법에만 있으면서 섭수에 들어가니,
그러므로 이제 4념(念) 중에서 자수(自受)는 안이 되고 타수(他受)는 밖이 된다.
또 다시 뜻이 상응하는 수(受)를 설하여 안으로 삼고,
5식(識)이 상응함을 이름하여 밖이라 한다.
또한 정수(定受)를 얻어서 설하는 것이 안이 되고,
산수(散受)가 밖이 된다.
이 안에선 처음은 개별적이고 나중은 총체적인 것이다.
심념(心念) 중에 나아가서도 처음은 안을 관하는 것이고,
다음은 밖이고,
나중은 총합이다.
12입 중에서 마음은 오직 안일 뿐이니,
의근(意根)의 섭수이기 때문이다.
이제 4념(念) 중에서 자심(自心)은 안이라 이름하고,
타심(他心)은 밖이라 이름한다.
또 다시 의식은 안이라 이름하고,
5식(識)은 밖이라 이름한다.
또 정심(定心)의 설(說)을 얻는 것을 안으로 삼고,
산심(散心)은 밖으로 삼는다.
법념(法念) 중에 나아가서도 처음은 안을 관하는 것이고,
다음은 밖이고,
나중은 총합이다.
안은 이른바 심법(心法)이고,
밖은 이른바 비색비심(非色非心)의 불상응행과 아울러 3무위(無爲)이다.
둘째,
정근(正勤)의 뜻에서 처음의 둘은 악법을 끊어 없애는 것이고,
나중의 둘은 선(善)을 섭수하는 것이다.
전자의 악을 여읨 중에서 먼저는 미생(未生)을 끊는 것이고,
나중은 이생(已生)을 끊는 것이니,
이는 바로 때를 설한 것이지 행의 체(體)는 아니다.
또한 이생이 바로 먼저 무명주지(無明住地)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세(細)이기 때문에 나중에 끊는 것이며,
미생(未生)은 4주(住)의 현기(現起)이니,
추(麤)이기 때문에 먼저 끊는 것이다.
미생(未生)의 악은 그 끊을 바를 든 것이고,
불생(不生)이 되는 것은 근(勤)이 하는 바이며,
진보를 낳고자 하는 것은 근방편(勤方便)의 마음이며,
발심하여 끊는다는 것은 근의 체(體)를 올바로 밝힌 것이다.
이생(已生) 중에서 이를 유비(類比)하면 알 수 있으니,
이미 생긴 것이 과거로 물러가면서 어떻게 이를 없앨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이처럼 이생(已生)의 종류가 미래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끊은 것은 상속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일어났다 이미 소멸한 것을 일으켜서 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의 선을 낳음 중에서 먼저는 미생을 일으킨 것이고,
나중은 이생을 자세히 한 것이다.
선(善)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익혀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미생을 일으키고 나중에 이생을 자세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생의 선이라는 것은 닦을 바를 든 것이며,
‘생(生)이 되기 때문에’라는 것은 근(勤)이 하는 바이고,
근을 낳고자 하는 것은 근방편의 마음이며,
발심의 행이란 근의 체(體)를 올바로 밝힌 것이다.
이생은 앞과 같으니,
이미 일어난 것이 과거로 물러가면서 어떻게 책려(策勵)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저 이생의 종류가 미래에 존재함을 반드시 책려해서 지속하여 일어나도록 한 것이지,
저 일어났다 이미 소멸한 것에 대해 책려함을 말한 것이 아니다.
셋째,
여의(如意)의 뜻이다.
이 경문 중에 나아가면 처음은 총체적으로 표방해서 든 것이며,
나중은 개별적인 해석이다.
욕정(欲定)이라 말한 것은 곧바로 행의 체(體)를 든 것이다.
욕망이 능히 정(定)을 낳아서 인(因)을 과(果)로부터 칭하기 때문에 욕정(欲定)이라 이름한다.
또한 정심(定心)은 욕망을 말미암아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인을 들어서 과에 이름 붙이기 때문에 욕정이라 말한다.
단행(斷行)의 성취라는 것은 그 공능을 변별한 것이니,
이 정행(定行)으로써 능히 온갖 결박을 끊는 것을 단행의 성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저 열반이라 이름 붙인 것을 단(斷)이라 이름 붙일 수 있으니,
단가행(斷家行)의 성취를 단행의 성취라 이름한다.
수여의(修如意)라는 것은 앞의 욕정(欲定)에 나아가서 그 닦음을 밝힌 것이다.
‘지염(止厭)에 의거해서’ 이하는 제2 단행의 성취를 향함을 밝힌 것이다.
모든 번뇌에 대해 처음의 방편도(方便道)로 허물을 관해서 싫어하여 등지는 것을 이름하여 염(厭)이라 하며,
무애(無碍)는 올바로 끊음이니 이를 설하여 여읨이라 하고,
해탈은 없앰을 증명하는 것이니 이를 설하여 멸(滅)이라 하며,
열반에 취향하는 것을 이름하여 사(捨)를 향함이라 한다.
만약 지위에 따른 분(分)이라면,
견도(見道) 이전에 설한 것은 염(厭)이라 이름하고,
견제(見諦)의 미혹을 없애는 것을 설함으로써 여읨으로 삼고,
수도(修道)의 결박을 끊는 것을 설함으로써 멸(滅)로 삼고,
열반의 과(果)를 얻는 것을 이름하여 사(捨)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모든 행이 결박을 다스리는 차례이지,
반드시 염처행(念處行) 등을 따로 대한 것은 아니다.
나머지 행의 유(類)도 마찬가지이다.
어째서 염근(念勤)이 이를 밝히지 못한 것인가?
정(定)의 성취를 얻어야 비로소 이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앞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정진은 이해할 수 있다.
심정(心定)이란 것은 나머지 경론에서는 염정(念定)이라 이름한다.
뜻을 묶어서 연(緣)에 머물기 때문에 염(念)이라 칭하는 것이고,
마음을 오로지해서 경계를 지키기 때문에 마음이라 설하는 것이다.
사유정(思惟定)이라는 것은 나머지 경론 속에서는 혜정(慧定)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슬기로운 마음이 꾀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유라고 말한다.
나머지 자세한 것은 논과 같다.
둘째,11) 소승을 수호함 중에 있는 5행 안의 경문에서는 제3구가 빠져 있다.
저 과(果)의 뛰어남 중에서 처음은 행과(行果)를 밝힌 것이고,
다음은 지과(地果)를 구별한 것이다.
행과에는 여섯이 있는데 맨 처음 번뇌를 여읨에서부터 제6 본심계(本心界)의 원만을 다함까지이다.
경 속에선 제2의 업염(業染)이 생략되어 없는데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번뇌를 여읨 중에서 경문이 비록 다르고 배치되더라도 그 뜻은 역시 만족함을 얻고 있다.
또 논(論) 중에서 업염이란 것에 두 가지 뜻의 부작(不作)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이 곧 부작이며,
둘째는 악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타(利他)를 잃음이고 번뇌를 낳음은 자리(自利)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부작이다.
증상욕(增上欲) 중에서 제3의 허물을 여의는 별구(別句)의 내용에는 제1구가 빠져 있다.
부지런함을 발하여 정진함 중에서 경론에서는 흡사 차(次)가 아닌 듯하나,
다만 논문에 의거하면 차제소식(次第消息)이니,
그 뜻도 역시 잃어버림이 없다.
본심계(本心界) 중에서도 역시 이와 같다.
지과(地果)의 경문 내용에서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과 중에서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조유행(調柔行)이다.
둘째 ‘마니주’ 이하는 교지(敎智)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니,
이 지(地)에서 청정한 증득을 성취해서 체(體)로부터 용(用)을 일으키기 때문에 교지(敎智)가 있는 것이라서 앞의 지(地)와는 동일치 않다.
셋째 ‘4섭(攝)’ 이하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을 밝힌 것이다.
경본(經本)에서는 이 구(句)가 생략되어 없다.
넷째 ‘이 명칭’ 이하는 설상(說相)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고,
나중은 합(合)이다.
법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는 것이고,
둘째 ‘공경하다’ 이하는 능련(能練)의 행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 ‘이 보살의 낙심(樂心)’ 이하는 소련(所練)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셋째,12) 게송을 거듭함 중에서 처음은 설한 뜻을 변별하는 것이고,
다음은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29게송이 있으니,
처음의 두 게송은 증장의 인(因)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청정분(淸淨分)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대치해서 수행하는 증장분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아홉 게송은 증장의 과(果)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조유(調柔)나 섭보(攝報) 등의 3과(果)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찬탄함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제3권 하
지엄 지음
박서연 번역
22) 십지품 ②
제5지(地) 안의 여섯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출세간 지혜의 방편선교(方便善巧)를 얻어서 제도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제도하기 때문에 난승지(難勝地)라고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만약 『지론』에 의거하면 신정(身淨)이라는 아만(我慢)의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만약 『섭론』에 의거하면 아래 승(乘)의 반열반이다.
무명에 또한 두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생사와 열반이니,
한결같이 사유를 취함을 등지는 것이다.
둘째는 방편의 섭수하는 바로서 도품(道品)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또한 2업의 장애와 1보(報)의 인연 생사를 다스리는 것이다.
셋째,
나타난 바를 밝히는 것은 상속하여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히는 것은 선(禪)바라밀과 아울러 4제를 배움을 이루는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를 밝히는 것은 법계에서 상속하는 차이 없는 공덕을 통달해서 삼세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차별 없는 법신의 과를 얻는 것이며 아울러 5지(地)의 지위를 성취하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果)는 앞과 같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함 중에선 크게 세 가지로 판별한다.
처음은 게송이 나중을 낳는 것이며,
둘째는 지(地)의 체(體)를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으로 앞의 것을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의 15게송에서 첫째에 있는 두 게송은 보살이 공양을 수순해 닦음으로써 3업이 경희(慶喜)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천왕이 불보살의 오염 없는 공덕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열 게송은 천녀가 인(因)과 과(果)의 대자비로써 두 지위가 원만히 갖춰짐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의 청함이 나중의 증명에 들어감을 나타낸 것이다.
천녀의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의 일곱 게송은 인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과를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행이 성취되어 증득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지(地)의 체(體)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승만(勝慢)의 대치(對治)이고,
둘째는 도행(道行)의 뛰어남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저 과(果)의 뛰어남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만(慢)의 두 종류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첫째는 자지(自地)의 만(慢)이고,
둘째는 타지(他地)의 만이다.
타지(他地)라는 것은 앞의 4지(地) 중에서 출세간의 지(智)를 얻는 것이니,
그것의 뛰어난 상(相)을 취하는 것을 만이라 이름한다.
아래에선 열 가지 청정한 마음으로써 다스림[治] 을 삼는다.
둘째,
자지(自地)의 만은 이 열 가지 중에서 뛰어난 상(相)을 희구하는 것을 다시 만으로 삼는다.
아래에선 여도(如道)를 수순함으로써 다스림으로 삼는다.
이 두 가지 경문 중에서 통틀은 명칭이 승만이니,
만치(慢治)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을 거듭 들어 나중을 낳음으로써 닦아 향해 들어가기를 권유하는 것이며,
둘째는 열 가지 마음을 변별하는 것이며,
셋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이익을 성취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불퇴전의 마음을 똑같이 염(念)한다는 것은 방편의 청정한 마음과 물러나지 않는 증심(證心)이 똑같이 정리(正理)를 반연해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경문 속의 7정(淨)이란,
첫째는 계(戒)이고,
둘째는 정(定)이며,
셋째는 견(見)이며,
넷째는 의심을 제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도와 비도(非道)이니,
이 다섯 가지는 대승이든 소승이든 명칭이 동일하며,
나중의 두 가지는 명칭이 소승과 다르다.
나중의 두 가지라는 것은,
첫째는 행의 청정함이고,
둘째는 행단(行斷)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저 종취(宗趣)로써 멸하기 때문이다.
대승의 명칭이란 것은,
첫째는 그 명칭이 행단(行斷)이며,
둘째는 그 명칭이 사량보리분법상상정(思量菩提分法上上淨)이니,
이 종지가 행단에 의거해서 뛰어난 추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행은 비록 일곱 가지가 있더라도 경문은 여섯 구(句)가 있다.
제3구 중에서 두 종류의 청정이 있으니,
이른바 견정(見淨)1)과 도의정(度疑淨)이다.
나머지 상(相)은 알 수 있다.
위(位)라는 것은,
만약 소승에 의거하면 계(戒)와 정(定)은 견도(見道) 이전이고,
다음의 셋은 견도이고,
다음의 하나는 수도(修道)이고,
다음의 하나는 무학도(無學道)이다.
대승의 3위(位)로 논한다면 행단(行斷)과 행은 수도 가운데 있으며,
나머지는 다 앞과 같다.
그 이유는 대소(大疏)와 같다.
둘째,
여도행(如道行)을 따르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앞을 들어서 나중을 일으키는 것은 총체적으로 여행(如行)을 나타낸 것이며,
둘째 ‘대원(大願)을 얻는다’ 이하는 여도행의 상(相)을 수순함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며,
셋째 ‘정(定)을 생기해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의 총체적인 것 중에 나아가면 법체는 세 가지가 있고 구(句)는 따로 네 가지가 있다.
법체의 세 가지는,
첫째는 이 4지(地)가 닦을 바의 도품이고,
둘째는 이 지(地) 이전의 열 가지 청정한 마음이며,
셋째는 이 지 중에서 여도행을 수순하는 것인데 경문의 네 가지는 알 수 있다.
부주도(不住道) 중의 경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4제(諦)의 실다운 법의 분별을 열거한 것이니,
이는 번뇌를 수호하는 자리(自利)의 행이고,
둘째는 교화받는 중생의 분별이니,
이는 소승을 수호하는 이타의 행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4제의 실다운 법의 분별을 열거한 것이며,
나중의 이 4제에 나아감은 10관문(觀門)을 밝힌 것이니,
곧 중생을 교화하는 분별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열 가지 명칭을 열거한 것이고,
두 번째는 차례로 해석한 것이다.
또 4제문(諦門) 중의 뜻은 법계를 포함하고 보살은 그 중에서 남김 없이 궁극까지 비추니,
지(知)를 따른 이론(異論)은 헛된 구별로서 궁구하기가 어렵다.
지금 여기선 1수(數)의 원만함에 나아가면 간략히 10문(門)이 되지만,
그러나 이 10문의 보살은 지상(知相)의 밝히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함에 의탁함으로써 그 차이를 나타내니,
이는 곧 교화를 기준으로 해서 스스로 앎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통틀어 소지법(所知法) 가운데 지(智)의 청정이라 이름하니,
그러므로 개합(開合)이라 말한 것은 이 10문이 총체적으로는 오직 하나뿐으로서 중생을 교화하는 분별이다.
만약 교화받는 바를 따른다면 대승과 소승은 둘로 나누니,
앞의 아홉은 소승을 교화하고 나중의 하나는 대승을 교화한다.
일으키는 바에 따라서 세 가지로 나누니,
앞의 다섯은 중생을 교화해서 그 이해를 낳도록 하는 것이고,
다음의 넷은 중생을 교화해서 그 행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며,
나중의 하나는 중생을 교화해서 그 증득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동일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여읨은 일곱 가지가 된다.
처음은 제(諦)가 근기가 미숙한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근기가 이미 성숙한 자를 교화하는 것이며,
셋째는 심오한 법을 의심하는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을 잘못 이해한 자를 교화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정념(正念)을 여읜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여섯ㆍ일곱ㆍ여덟ㆍ아홉 번째는 정견(正見)인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열째는 대승을 교화하는 것인데 교화는 법의 동일치 않음을 따라서 열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만약 자세히 분별한다면 수(數)의 구별은 한량없다.
실다운 법을 대해서 통(通)과 별(別)을 변별한다고 말한 것은 이 10문이 앞의 4제(諦)를 조망하면 하나하나가 다 통(通)이니 처음의 세제(世諦)라는 것은 4제 법상(法相)의 차별을 통틀어 관하는 것이고,
제일의(第一義)라는 것은 4제의 체성(體性)이 공적함을 통틀어 관하는 것이다.
상제(相諦)라고 말한 것은 4제의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님을 통틀어 관한 것이고,
차별이라 말한 것은 4제의 유와 무가 각기 다름을 통틀어 관한 것이며,
성제(成諦)라고 말한 것은 4제의 연기집성(緣起集成)하는 상상(相狀)의 사(事)를 통틀어 관한 것이며,
사제(事諦)라고 말한 것은 4제를 미혹해서 고(苦) 등의 사(事)를 이룸을 통틀어 관한 것이고,
생제(生諦)라고 말한 것은 4제를 통틀어 미혹해서 작집(作集)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생(無生)을 다한다는 것은 4제를 통틀어 이해해서 증멸(證滅)을 얻는 것이며,
도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4제를 통틀어 이해해서 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며,
보살의 여래지(如來地)가 제(諦)를 성취하는 것은 4제의 연기실성(緣起實性)의 청정계를 통틀어 궁구해서 대승도의 인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또 차제(此諦)라는 것은 앞의 4제가 곧바로 법계의 체성(體性)을 밝혀서 4제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하 사(事) 등의 4제는 4제 아님이 있는 것이다.
중간의 5제(諦)는 방편의 닦는 상(相)으로서 차제를 이해하여 관하는 것이다.
나중의 1제는 법계에 올바로 칭합하여 두루한 것이 자체인과(自體因果) 원통묘도(圓通妙道)의 장애 없는 덕의 갖춤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교연(敎緣)의 법상을 차별하는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처음의 4제는 곧바로 법체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세제와 제일의제는 상(相)에 대해 밝힌 것이며,
다음의 상제(相諦)라는 것은 하나의 실다운 제상(諦相)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차별이라는 것은 법계의 법상을 밝힌 것이며,
성제(成諦)라는 것은 이 같은 법계의 상(相)을 범부는 미혹해서 전도되기 때문에 보리가 번뇌가 되고 삼계가 무성히 흥기하여 세간에 치연(熾然)해서 온갖 상(相)이 집성(集成)함을 밝힌 것이다.
다음 사(事) 등의 4제를 밝힌 것은 올바른 수행이 대치(對治)하는 방편행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4제 아님도 있으니,
곧 보살이 방편법을 올바로 수행하는 데도 다만 법은 전체적인 것이고 국한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승도 그 가운데서 수행해 나아가게 되고,
아래에 있는 인천(人天)의 착한 업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 중에서 행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만 이 보살이 올바른 수행으로 대치해서 방편의 도가 원만한 것이니,
그러므로 능히 법계에 칭합하여 두루한 것이 자체 원극(圓極)의 장애 없는 도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보살의 지(地)에서 차례로 여래 지혜의 제(諦)에 들어감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관(觀)의 뜻은 논과 같다.
신해지(信解智)의 지(知)는 무진지(無盡智)의 지(知)가 아니라는 것은 앞에 있는 여래제(如來諦)의 경문을 해석한 것이니,
이른바 인지(因智)의 지(知)는 과무진지(果無盡智)의 지(知)가 아니다.
또는 문자의 아함을 설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신지(信智)의 지(知)는 뜻을 설할 수 없는 무진지의 지(知)가 아니다.
이 경문은 해석을 기준으로 해서 간추렸을 뿐이며,
아래의 「이세간품」에서 거듭 다시 경문을 간추린 것은 행을 기준으로 해서 간추린 것이다.
해석에서 경상지(鏡像智)라고 말한 것은 삼승의 견도(見道) 이전에서 정(定)에 의거해 사(事)를 성취한 것이니,
마치 거울 속의 상(像)이 사(事)를 이룸에 자재한 것과 같다.
그 위(位)는 정해지지 않았으니,
혹은 견도(見道)인 난(煖) 등의 네 가지 착한 마음이고,
혹은 광명을 얻는 등의 네 가지 정(定)이고,
혹은 지(地) 이전의 40심(心)이고,
혹은 10행과 10회향 등이고,
혹은 세간의 수혜(修慧)이며,
나아가 정(定)을 얻은 이후가 바로 그 위(位)이다.
둘째,
소승을 수호하는 근방편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유위(有爲)의 허망함과 속임[誑詐] 이 중생을 괴롭힘을 관해서 자비의 염(念)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 ‘이 같은 지혜를 얻는다’ 이하는 자비를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타자를 교화하는 원(願)을 밝힌 것이며,
둘째 ‘일체의 유위를 실답게 관한다’ 이하는 타자를 교화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비(悲)이고,
나중의 ‘이 같은 고뇌 등’ 이하는 자(慈)를 변별한 것이다.
비(悲)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비(悲)의 방편을 일으킨 것이며,
다음의 ‘중생을 알아서’ 이하는 비관(悲觀)을 올바로 밝힌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실다운 고(苦)를 관해서 고의 체성(體性)을 아는 것이며,
둘째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하는 깊고 무거운 고(苦)를 관한 것이다.
사람에 나아가서 허물을 나타냄은 그 비(悲)할 만한 것을 밝힌 것이다.
깊고 무거운 고(苦)의 내용에 나아가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을 관하는 것이니,
중생이 고(苦)를 받으면서도 싫어하여 여읠[厭離]
줄 모르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다.
둘째 ‘무명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하는 모든 중생이 괴이하게 여길 만한 까닭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깊은 고(苦)를 밝힌 것이며,
두 번째 ‘이 같은 생사(生死)’ 이하는 그 무거운 고(苦)를 밝힌 것이다.
둘째,
자(慈)를 해석한 경문은 크게 두 가지로 판별한다.
첫째는 중생을 위해 착한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며,
둘째 ‘이같이 사유하다’ 이하는 그 닦는 바를 따라서 요익(饒益)을 발원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중생에게 악의 비롯함 없음을 염(念)한 것인데,
이 경문에선 제3구ㆍ제5구ㆍ제6구가 빠져 있다.
두 번째는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착한 법을 모으게 되는 것이다.
둘째,
요익을 발원함 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아홉은 개별적인 것이다.
이 중의 경문에도 역시 차례가 아닌 것이 있으니,
차례에 의거해서 경문을 소거하면 뜻도 잃지 않는다.
과분(果分)을 해석한 경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공덕의 뛰어남을 섭수한 것이며,
둘째는 수행의 뛰어남이며,
셋째는 중생 교화의 뛰어남이며,
넷째는 세간의 지(智)에 수순하는 뛰어남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자의 둘은 자행(自行)이니,
이는 위에서 아는 바 지(智)의 청정과(淸淨果)이다.
공덕을 섭수하는 것은 자분(自分)으로 성취하는 것이며,
수행의 뛰어남이란 것은 승진의 성취한 바이다.
나중의 둘은 이타(利他)이니,
이는 앞에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근방편의 과(果)이다.
중생 교화의 뛰어남이란 것은 타자를 교화하는 행이며,
세간의 지(智)를 수순한다는 것은 타자를 교화하는 지혜이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다.
네 번째인 세간의 지(智)를 따름 중에서 처음은 총체적으로 뜻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 ‘세간의 모든 것을 안다[知世所有] ’ 이하는 교화의 지(智)를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개별적인 것 속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경서[書]
등을 아는 것이며,
둘째는 금석의 성질[石性]
등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병을 다스리는 방법이며,
넷째는 논(論) 등을 짓는 것이며,
다섯째는 일월(日月) 등이며,
여섯째는 지계(持戒) 등이며,
일곱째는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일이며,
여덟째는 중생을 안락하게 하는 일이며,
아홉째는 연민 때문에 이런 법을 내는[憐愍故出]
것이며,
열째는 점차로 믿게 해서 위없는 불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경문의 제3 중에선 두 구가 빠져 있고,
제4의 뜻 중에선 한 구가 없으며,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또 논(論) 중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길ㆍ흉ㆍ입(入) 등이 때에 따라 상(相)이 변하는 것이다.
변신상(遍身相)이란 과보가 정해진 상(相)이니,
때에 따라서 상(相)이 변하는 것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해[日] 가 첫째이고,
달[月] 이 둘째이며,
별[星] 이 셋째이다.
별은 이른바 5성(星)이니,
동방의 세성(歲星)과 남방의 형혹(熒或),
서방의 태백성(太白星)과 북방의 진성(辰星)과 중앙에 있는 진성(鎭星)이니,
이상을 5성으로 삼는다.
넷째의 수(宿)란 것은 28수(宿)이다.
이른바 각항(角亢) 등의 5성인데,
그 중에서 정지해 머물기 때문에 이름하여 수(宿)라고 한다.
대지의 진동이 다섯째가 되고,
꿈은 여섯째요,
상(想)은 일곱째이고,
길흉이 여덟째가 된다.
여우 울음소리 등은 모두 길흉에 섭수된다.
또 7요(曜)라는 것은 일월과 5성이 이에 해당된다.
입(入)이라는 것은 수순하는 것이다.
과거세의 8상(相)의 업을 수순하고 또한 미래의 8상에서 표현된 과(果)를 수순하는 것이다.
또 변신(遍身)의 모든 상(相)이란 것은 정해진 과보의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상(果相)이다.
또 5행(行)을 5염(染)에 상대한 것은 지계로 파계(破戒)를 다스린 것이며,
4선(禪)은 탐욕을 다스린 것이며,
신통은 사귀(邪歸)를 다스린 것이며,
4무량(無量)은 함부로 살생을 행하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 복을 구하는 등의 망령된 행을 다스린 것이며,
4공(空)은 망령되게 해탈을 닦는 외도의 삿된 수행 등을 다스린 것이다.
지과(地果)의 경문에 나아감 중에서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調柔)는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조유의 상(相)이며,
둘째 ‘또한 일월과 같다’ 이하는 교지(敎智)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이며,
넷째는 설상(說相)을 매듭 지은 것이다.
경에는 제3구가 빠져 있으니,
처음의 경문은 법을 설함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처음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 됨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능련(能練)의 행이며,
나중은 소련(所練)의 청정함이다.
능련의 행 중에서 처음은 공양이고,
다음은 회향을 닦는 것이며,
나중은 법행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경문은 다분히 불충분하다.
또 4지와 5지 중에서 출가의 과(果)는 조유 중에 있으니,
이유는 4지 이후에 출세간의 무루행(無漏行)을 얻어서 출가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셋째는 게송을 거듭한 경문인데 처음은 설한 뜻을 변별한 것이다.
다음은 게사(偈辭)를 밝힌 것인데 39게송이 있다.
처음의 11게송은 승만(勝慢)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13게송은 부주도(不住道)의 뛰어남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일곱 게송은 부주과(不住果)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조유 등의 3과(果)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 승만(勝慢)의 내용에서 처음의 두 게송은 평등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아홉 게송은 여실한 도의 행을 수순함을 읊은 것이다.
부주도(不住道) 안에서 처음의 넷은 지혜의 청정함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아홉은 근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함을 읊은 경문이다.
제6지의 내용에서 여섯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반야바라밀행은 어느 사이에 대지(大智)가 현전하기 때문에 현전지(現前地)라고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지론』의 경본에 의거하면 미세한 번뇌 습기의 장애이고,
『섭론』에 의거하면 미세한 상(相)이 행하는 무명인데,
이 경문에서는 7지에 의탁해 있으니,
다시 두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이 생기하여 상속함을 증득하는 것이 곧 세속을 미혹하는 것이다.
둘째,
상상(相想)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곧 진(眞)을 미혹하는 것이다.
또는 2업의 장애와 아울러 1보(報)의 인연 생사를 다스리는 것이다.
셋째,
나타난 바는 오염과 청정이 없는 뜻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변별하면 반야바라밀을 성취한 것과 아울러 연기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라는 것은 12연생(緣生)의 진여와 오염이나 청정이 없는 공덕을 통달해서 상속의 청정과 아울러 일체 중생의 오염되고 혼탁한 과(果)를 능히 청정히 하는 것과 6지의 지위를 얻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는 앞과 같다.
여섯째는 경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게송으로 나중을 낳는 것이고,
둘째는 지(地)의 체(體)를 변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으로 앞을 매듭 짓는 것이다.
처음에는 18게송이 있는데 앞의 두 게송은 보살이 찬탄하는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모든 천(天)이 3업(業)으로 공양하는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천왕이 그 권속과 함께 지(地)의 의의를 찬탄하는 것이고,
다음에 있는 11게송은 천녀가 지(地)의 체(體)와 모든 개별적인 행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이 청해서 나중의 증득에 들어가는 것이다.
천녀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한 게송은 기악(妓樂)의 공양이고,
다음의 아홉 게송은 과덕(果德)과 인(因)을 올바로 찬탄한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묵묵히 부처님을 관(觀)하는 것이다.
앞의 아홉 게송의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의 네 게송은 과(果)를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다섯 게송은 인(因)을 찬탄한 것이다.
인(因)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한 게송은 대비행(大悲行)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6도(度:6바라밀)의 행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덕용(德用)을 맺어 이룬 것이다.
지체(地體)의 경문은 크게 세 가지로 판별한다.
첫째는 승만(勝慢)의 대치이고,
둘째는 부주도행(不住道行)의 뛰어남이며,
셋째는 저 과(果)의 뛰어남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낳음으로써 닦아 향해 들어가기를 권유한 것이고,
둘째는 상(相)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는 행의 성취를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 승만의 대치를 밝힌 것은 10평등법을 밝힌 것인데,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해경(解境)이고,
둘째는 행경(行境)이다.
해경이라 말한 것은 이 10문에 즉하는 것을 궤칙이 되는 법으로 삼는 것이니,
‘부주도(不住道)’ 이하는 의거하는 바 행관문(行觀門)의 방편을 밝힌 것이다.
행경이라 말한 것은 10평등에 즉하는 것이 바로 관해(觀解)이니,
처음 ‘부주도’ 이하는 성상(成相)을 관함을 밝힌 것이다.
또 논(論)에 의거해서 그 경문을 개별적으로 정한 것도 좋다.
10평등에 나아가서 상(相)을 해석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아홉은 개별적인 것이다.
아홉의 내용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일곱은 무(無)로써 유(有)를 타파한 것이고,
다음의 하나는 유로써 무를 타파한 것이며,
다음의 하나는 유무를 쌍으로 타파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하나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이니 곧 무상관(無相觀)이며,
다음의 다섯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니 곧 무생관(無生觀)이며,
다음의 하나는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이니 곧 무성관(無性觀)이다.
행의 차례라는 것은 해(解)를 들어서 행을 성취한 것이다.
외도가 “만약 모든 법이 없다면 어떻게 주지(住持)해서 오래 서[立]
결정되는가?”라고 의심하니,
이런 의심에 답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무성이라고 말한 것은 실다운 성품이 없는 것이다.
또 “만약 모든 법이 없다면 현재 보는 실유(實有)는 무엇을 말함인가?”라고 말했는데,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일체법이 무상(無相)으로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또 “만약 법이 무상(無相)이라면 어느 처소에서 법이 생겼다가 어느 처소에서 법이 소멸하는가?
마음이 보는 데 따라서 취하여 스스로의 뜻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상이 없다 하겠는가?”라고 의심하니,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일체법은 무생(無生)으로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이 이하의 자체공(自體空)은 무상 등과 같지 않기 때문에 앞과 다른 것이다.
무생(無生)이라 말한 것은 일체의 모든 법이 염(念)을 좇아서 생기할 뿐 스스로 섬[自立] 이 없는 것이다.
‘유(有)라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한 것은 논(論)에서 말한 염(念)의 전전(展轉)과 같기 때문이다.
또 말하길 “만약 법이 염(念)을 좇아서 생기하는 것이라면 곧 인연이 하나가 아니라서 염 등의 모든 연(緣)을 내가 끝까지 보지 못하여 오직 성취하여 안립한 바의 법을 볼 뿐 염 등은 보지 못하니,
스스로는 무(無)라고 할 수 있으나 성취된 법은 마땅히 유(有)라고 설해야 한다”라고 하니,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무성(無成)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무성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법이 타자로부터 생기하는데도 그대가 그것이 연(緣)으로부터 발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이미 법이 타자로부터 생기함을 인정하고 그대가 이 상(相)을 보지 못한다면 보는 바가 곧 자(自)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실다운 경계를 얻지 못하고 망견(妄見)으로 이룬 것이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무성(無成)의 평등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둘은 고제(苦諦)를 미혹한 것이다.
또 만약 모든 법이 타자로부터 생기하면 스스로 생기하는 성품이 없는 것이니,
나는 비유(非有)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능히 성취하는 인(因)이 이미 타자를 이루게 되니,
이것은 역능(力能)이 있는 것이라서 마땅히 유(有)라고 설해야 한다.
이런 의심에 답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일체를 여의기 때문에 일체법이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경에 의거하면 제8구에 있다.
여읜다고 말한 것은 다만 집착하는 바 경계이니,
정(情)을 이른바 실(實)이라 일컫는 것이다.
저 보는 바를 논하면 곧 좇는 바가 없으니,
첫째는 선유(先有)가 아니고,
둘째는 실다운 이(理)가 없는 것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만약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면 곧 실(實)이 아닌 것 같기 때문에 보는 바가 곧 상(相)의 비유(非有)임을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논에서는 “염상(染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곧 집제(集諦)를 계교한 것이다.
【문】만약 이 집제가 곧 마음 덩어리의 섭수라면 해(解)가 이미 경계에 있는 것인데,
어째서 집(集)에 응한다 하는가?
【답】능히 체(體)를 취함을 논한 것이 바로 연(緣)의 유사함에 응한 것이다.
번뇌의 업용(業用)이 계교하는 것을 이른바 경계 가운데 경계라 하니,
곧 이는 무(無)이고 뜻은 돌아가 상(想)을 취하기 때문에 이 집(集)을 설한 것이다.
또 말하길 “모든 법의 인연에 대해 그 본말(本末)을 찾지만 모두 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뜻을 궁구하면 염법(染法)은 실(實)에 의거해 진(眞)을 미혹해서 생기는 것이라서 염(染)은 무(無)를 설할 수 있지만,
미혹한 바의 진속(眞俗)과 멸(滅)ㆍ도(道)의 2제(諦)는 이(理)를 수순해서 유(有)에 응하는 것이다.
【답】그대는 진속(眞俗)이 이(理)를 수순하는 것을 실(實)이라 일컫는데,
이 뜻은 그렇지가 않다.
멸도(滅道)와 진속은 바로 범행(梵行)과 지(智)의 경계이다.
여(如)를 이른바 실(實)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본래 청정한 평등’이라고 했다.
만약 여(如)를 이른바 실(實)이라 한다면 곧 잡염심(雜染心)이 생겨서 본래 청정함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논에서는 “정상(淨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멸(滅)과 도(道)의 2제를 미혹한 것이다,
또 말하길 “만약 법이 여(如)가 아니어서 보는 바가 실유(實有)라면 마땅히 세간의 언설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현재에 있는 명칭이 가지가지로 동일치 않은 것은 곧 소목(所目)의 뜻이 없지 않음을 증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답】말한 대로 집착한 바의 명칭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세간에서 이른바 시설한 것이 실유(實有)를 앞세움이 아닌 것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다만 세간에서 뜻은 얻어도 명칭은 얻지 못하고 명칭은 얻어도 뜻은 얻지 못함을 보기 때문에 모든 명칭이 따르는 뜻이 일정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대가 말한 뜻의 실다움이 명칭을 일으키는 등은 희론일 뿐이지 실유(實有)가 아니다.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희론이 없기 때문에 명칭은 실유가 아니라 뜻에 의거해서 생기하고,
뜻은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명칭에 의거해서 나타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증험으로서 희론의 인연이다.
또 뜻의 인(因)을 관해도 명칭의 과(果)를 보지 못하고,
또 명칭의 과를 관해도 뜻의 인을 보지 못하니,
이것은 희론도 또한 없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에 논에서는 “분별상(分別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오직 분별만을 설한 까닭은 상(相)에 즉한 공(空)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4제의 명칭을 미혹한 것이니,
이상으로 무생관을 설해 마친다.
또 말하길 “나는 이미 상(相)이 무(無)임을 알았고 생(生)이 유(有)가 아님을 요달했으니,
곧 여실함을 증험해서 결정코 취향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답】그대가 이른바 스스로 봄을 망령되게 유가 아니라 하고,
개별적으로 보아서 염(念)을 여의는 것을 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또한 분별이기 때문에 경에서는 “취하고 버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취하고 버림이 없다는 것은 본래 정(情)으로 일컬은 것이니,
이는 보는 바를 취한 것이라서 모두 다 진(眞)이 아니다.
이제 또한 염을 여의는 것을 보는 것이 취향하는 바가 되는 것은 곧 앞의 망령됨과 같기 때문에 논에서는 “출몰(出沒)의 상(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오직 출몰만을 말한 까닭은 출몰이 곧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은 무(無)로써 유(有)를 버리는 것이다.
또 말하길 “내가 상생(相生)을 찾는 것은 무(無)이며,
또 염을 여의는 것을 아는 것은 유가 아니니,
염정(染淨)과 진속(眞俗) 등의 법이 모두 그 체(體)가 없어서 진취(進趣)할 수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답】그대는 염정의 진취할 수 없음을 본 것을 무법(無法)이라 말했는데 이 뜻은 그렇지가 않다.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요술[幻] 이나 꿈[夢]
등과 같다”고 말했다.
만약 법이 모두 무라면 어떻게 어느 처소에선 꿈을 꾸고 어느 처소에선 꿈을 꾸지 않는가?
이를 증험하면 곧 일체 모든 법이 결정코 무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나는 유상(有相)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나의 없음을 타파하기 위하여 오직 무아라고만 말한 까닭은 이것이 나를 여의면서 무아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연(緣)으로 이루어진 환사(幻事)이니,
이는 위의 견해와 동일하지 않다.
이는 곧 유로써 무를 타파한 것이다.
또 말하길 “내가 앞에서 여덟 가지 견(見)을 일으킴으로써 이(理)를 다하지 않는 것으로 삼은 것은 무로써 유를 타파한 것이며,
다시 하나의 견(見)을 일으켜서 또 이(理)를 다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로 무를 타파한 것이다.
내가 지금 체(體)를 찾는 것은 유나 무에 치우쳐서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두 뜻을 갖추어 성취하니,
이는 이(理)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답】밖에서 보는 바처럼 정(情)을 초월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으니,
그러함을 아는 이유는 보는 바의 경계와 같아서 무(無)의 뜻은 유(有)의 뜻이 아니고 유의 뜻은 무의 뜻이 아님을 그 이(理)에 근거한 것이다.
무에 즉함이 유라서 유와 무가 하나이니,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유와 무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둘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법이 스스로 머물지 않고 연(緣)에 응해서 이루어져 일어나는 것이니,
다시 이 연이 아니기 때문에 과법(果法)을 성취한 것이다.
그 모든 법을 찾아도 자타(自他)를 넘지 않으며,
자타에 머물지 않음은 사(事)에 즉해서 공(空)을 변별한 것이다.
만약 여실히 유무를 본다면 이것은 자타의 양제(兩際)를 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논에서는 “성괴(成壞)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다만 성괴라고 말한 까닭은 이른바 성괴가 곧 공(空)이기 때문에 따로 구하지 않은 것이니,
둘이 아닌 평등의 법이 유무를 없애서 불이(不二)라 설한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곧 여실(如實)함 그대로 증험이라서 이른바 유무의 명칭이 희론이 되는 것이니,
또한 유와 무의 두 법 중에 따로 한 법을 세우는 것으로 불이(不二)를 삼은 것이 아니다.
다 취하지 않는 것은 위와 똑같이 인연법의 유무동체(有無同體)가 각기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무법(無法)을 설하는 것으로 유(有)를 삼기 때문에 유는 곧 유가 아니며,
또한 저 유법(有法)을 설하는 것으로 무(無)를 삼기 때문에 무는 곧 무가 아니다.
유는 유가 아니기 때문에 무 밖에 다시 따로 유가 있어서 둘이 되는 것이 아니며,
무는 무가 아니기 때문에 유 밖에 다시 무의 법으로 둘이 됨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유와 무는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시 저 유무의 법을 설하는 것으로 불이(不二)를 삼기 때문에 또한 불이의 자성은 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유무를 쌍으로 계교함을 타파한 것이다.
제3의 매듭 짓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알 수 있다.
의상(義相)은 논과 같을 뿐이다.
위는 12입(入)을 기준으로 해서 궤칙이 되는 법을 밝힌 것이며,
아래는 12연생(緣生)을 기준으로 해서 의거하는 관문(觀門)을 변별한 것이다.
【문】위에서 법을 밝힌 것은 오직 12입을 기준한 것인데 아래의 모든 관문은 어째서 연생(緣生)에 치우쳐 있는 것인가?
【답】법을 섭수함이 관대함을 취하기 때문에 12입을 기준해서 의(依)와 정(正)을 통틀은 것이다.
지금은 관문을 기준으로 해서 밖을 섭수해 안을 좇기 때문에 연생에 국한된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초주(初住)에 나아가서 머물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곧 총체적으로 종지를 수립한 것이다.
둘째 ‘이렇게 생각한다’ 이하는 저 올바로 머묾[正住] 을 기준으로 해서 관문을 연 것이니,
곧 개별적인 해석이다.
이전 지(地)는 열등하기 때문에 올바로 지 중에 머무는 것을 바야흐로 머물지 않음[不住] 이라 이름 붙인 것이며,
이 지는 뛰어나기 때문에 처음 지 중에 머무는 것을 머물지 않음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법상(法相)을 관찰하는 등은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낳은 것이며,
법상을 말한 것은 앞의 경문 중 10평등법을 거듭 든 것이니,
앞을 거듭 든 것을 수순해서 6지(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논(論)과 경(經)에 의거해서 준거할 수 있다.
둘째 ‘다시 뛰어난 대비(大悲)로써’ 이하는 머물지 않음을 올바로 나타낸 것이다.
그 중에서 아래를 통틀면 되는데 여섯 구로 분별된다.
첫째는 그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앞의 관(觀)을 대하기 때문에 이를 설함이 되풀이된 것이다.
대비수(大悲首)라는 것은 중생을 염(念)하는 마음인데 고통을 뽑는 것이 비(悲)가 되고,
비(悲)가 늘어나는 것을 대(大)라 한다.
대비증(大悲增)이란 것은 구하려는 마음의 연민이 지극해지는 것인데 증상(增上)이라고 칭한다.
또한 증상과(增上果)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증상이라 하며,
부처님 지혜를 추구함이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대비라 이름한다.
만족이라 말한 것은 유위(有爲)를 여의는 것이다.
마음이 유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연기를 관찰하는데 그 관찰을 궁극까지 다하는 것을 만족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경과 논의 두 곳에서 동일하지 않다.
만약 논문에 의거하면 네 구가 있게 되니,
즉 제4 생멸의 한 구가 앞의 세 문에 의거함으로써 행상(行相)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경본에 의거한다면 제3이 곧 생멸이니,
즉 생멸을 쓰는 것이 만족관(滿足觀)이 된다.
경과 논의 두 곳에 의거하면 곧 두 가지 뜻으로 생멸문을 해석한다.
첫째 논에 의거한 것이니,
이른바 중생과 보리와 인연이 모두 유위인데,
지금은 지(智)로써 알기 때문에 ‘생멸을 관함’이라 한 것이다.
둘째 경에 의거한 것이니,
인연의 법이 생(生)을 수순하고 멸(滅)을 거역하는 것인데 본래의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대비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경에 의거하면 네 구를 성취하는데 역시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3심(心) 차례의 뜻을 밝힌 것이다.
앞의 공법(空法)을 관함을 타고서 문득 중생의 허망함에 얽힌 바를 염(念)하기 때문에 먼저 비(悲)를 일으키고,
비(悲)로써 염(念)하기 때문에 부처님 지혜를 구하고,
부처님 지혜로써 이익을 주고자 하기 때문에 제2를 일으키고,
부처님 지혜는 반드시 허물을 여의어야 이루어지는 바이기 때문에 제3을 일으킨다.
셋째는 자리이타(自利利他)에 나아가서 분별하는 것인데 앞의 하나는 이타이고,
나중의 둘은 자리이다.
넷째는 번뇌를 수호하고 소승을 수호하는 분별인데 앞의 둘은 소승을 수호하는 것이고,
나중의 하나는 번뇌를 수호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인과에 나아가는 것이니,
처음과 나중은 인(因)을 섭수하는 것이고,
제2는 과(果)를 구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머물지 않음의 분별인데 처음의 하나는 이타(利他)가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나중의 둘은 자리(自利)가 세간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둘째 정주(正住)에 나아가서 개별적으로 관문을 변별한 것인데,
처음은 경론을 통틀어서 관문을 간추려 조목별로 나눈 것이며,
두 번째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처음의 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경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이며,
둘째는 논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이며,
셋째는 경과 논을 서로 대비해서 경문을 나눈 것이다.
경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 중에서 처음은 10관(觀)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며,
둘째는 거듭 매듭 지은 것이다.
10관이 무엇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의 차례이며,
둘째 ‘삼계가 허망하다’ 이하는 일심의 섭수하는 바를 밝힌 것이며,
셋째 ‘무명 인연에 두 종류가 있다’ 이하는 스스로의 업이 도와서 성취함을 밝힌 것이며,
넷째 ‘무명이 행을 끊어지지 않게 한다’ 이하는 서로 버리어 여의지[捨離]
않는 것이며,
다섯째 ‘무명ㆍ애(愛)ㆍ취(取)’ 이하는 3도(道)의 행이고,
여섯째 ‘무명과 행은 과거이다’ 이하는 먼저와 나중의 제(際)를 관함을 밝힌 것이며,
일곱째 ‘무명ㆍ행 나아가 6입(入)에 이르기까지’ 이하는 3고집(苦集)을 밝힌 것이며,
여덟째 ‘무명의 인연으로 행이 생긴다’ 이하는 인연이 일어남을 변별한 것이며,
아홉째 ‘무명의 인연은 생(生)의 속박이다’ 이하는 인연의 생멸하는 속박을 변별한 것이며,
열째 ‘무명의 인연이 수순해서’ 이하는 무소유진관(無所有盡觀)을 수순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모두 각기 순(順)과 역(逆)의 관(觀)이 있으니,
곧 둘이 되는 것이다.
경문은 이와 같다.
둘째는 다음으로 논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이다.
논가(論家)가 이 10번의 관[十番觀]
가운데 나아가 3문으로 분별하니,
첫째는 유위를 염리(厭離)하는 마음에 나아가서 12연(緣)을 관하는 것인데,
이것은 곧 앞의 만족생멸문(滿足生滅門)이다.
둘째는 중생을 깊이 염(念)하는 마음에 나아가서 12연을 관하는 것인데,
아래에서 설한 비(悲)가 관(觀)을 수순하는 것이다.
수순이라 말한 것은 이것이 곧 비(悲)를 일으켜서 연생(緣生)을 수순하는 것이니,
바로 앞의 비(悲)를 첫머리[首] 로 삼는 것이다.
셋째는 불심을 추구해서 12연을 관한 것인데,
논문의 명칭은 일체상지분별관(一切相智分別觀)이라 한다.
이것은 바로 앞의 비증상관(悲增上觀)이다.
【문】앞의 초주(初住)에선 먼저 비(悲)가 첫머리임을 밝혔고,
다음은 증상을 설하였으며,
나중은 비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선 어째서 먼저가 원만이고,
다음이 비(悲)이며,
나중이 증상을 설한 것인가?
【답】앞의 초주에선 마음의 차례를 낳기 때문에 먼저가 비(悲)의 첫머리이고,
나중에 비(悲)의 원만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선 그 정행(正行)의 차례이기 때문에 먼저가 비(悲)의 원만이고,
나중이 증상을 설한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앞의 초주에선 위의 10법을 타고서 법의 공적(空寂)을 관한 것인데 문득 중생의 망유(妄有)가 법의 얽히는 바가 됨을 염(念)하기 때문에 먼저 비(悲)를 일으켜서 바로 고통을 뽑아내어 부처님 지혜를 얻게 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은 증상을 일으킨 것이니,
부처님은 반드시 유(有)를 여읨으로써 성취됨을 말미암기 때문에 만족생멸 등의 관(觀)을 밝힌 것이다.
지금은 정행(正行) 중에서 허물을 여의는 것이 시초가 되니,
먼저 유위를 싫어하고 그로 인해 저절로 허물을 여의어 문득 중생이 이에 처해도 나오지 않음을 염(念)한 것이다.
다음은 수순을 변별함인데,
앞의 둘은 인(因)을 섭수한 것이라서 이(理)는 반드시 앞에 있다.
일체상지(一切相智)는 과행(果行)을 구하는 것이라서 이(理)는 반드시 나중에 있다.
이 3【문】속에 각각 열 가지 관(觀)의 인연이 있으니,
모으면 곧 30이 된다.
하나하나의 문 속에 각기 역(逆)과 순(順)이 있으니,
곧 60을 이룬다.
이상의 분별은 다만 주지(住地)에 의거해서 60번을 밝힌 것이며,
아래의 과분(果分)에 대해서는 180인연관문(因緣觀門)이 있어서 그러한 줄 아는 것이다.
과분의 경문에 나아가선 3공문(空門)으로써 연집(緣集)을 분별하고,
이 문 이하에 의거해서는 각각의 섭수가 동일치 않기 때문에 경에서는 “공해탈(空解脫)에 의거해서 10공삼매(空三昧)를 얻으니,
무생(無生)과 무원(無願)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한 것이다.
이 3공(空)에 의거하면 다시 세 가지 뜻이 있다.
만약 공삼매로써 12연을 관하면 곧 12연이 모두 공(空)이니,
이를 알고 나서 논주(論主)는 장차 무상을 분별하여 공삼매에 짝지웠다.
만약 무상문(無相門)으로써 12연을 관하면 12가 곧 사(似)이고,
만약 무원문(無願門)으로써 12연을 관하면 연생(緣生)이 곧 실(實)이다.
논 중에서 또 무상관문이 진실의 성품이 됨을 설했으니,
진실로 말미암아 상(相)을 여의기 때문에 그로써 짝지운 것이다.
무원으로 무생(無生)에 짝지운 것은 의타(依他)의 무생은 원하고 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로써 짝지운 것이다.
이 같은 인연의 동이법문(同異法門)은 아래의 10공삼매에 준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제3은 논으로써 경을 대한 것이다.
경문을 나눈 분제라는 것은 다시 개별적인 뜻이 있으니,
앞서 경본(經本)의 10번에 의거함이 곧 유위의 인연 등을 염리(厭離)하는 관(觀)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전후의 경본에 의거해서 10번이 180문(門)을 이룬다.
【문】만약 경론에 의거하면 60문의 관상(觀相)이 없는데 어째서 180문을 이룬다고 말하는가?
【답】경의 처음에 3관문을 여는 것을 말미암아서 나중에 논주(論主)가 경본의 20번을 인정하고 다시 개별적으로 3문ㆍ4문ㆍ9【문】등을 변별한 것이다.
지금은 앞의 3관문을 여는 것으로써 증험한 것이며,
나중의 경 속에선 관체(觀體)가 곧 결정코 60문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지금은 논으로 경을 대함으로써 10문을 섭수하여 3번으로 삼으니,
뜻인즉 한 관(觀)을 좇아서 유위(有爲)를 싫증내 여의는 것인데 이 뜻은 아래에서 다시 분별하였다.
그러나 논이 경의 분제를 섭수한 것에서 유위를 싫증내 여의는 관(觀)에 나아가면 저 경 안의 10번관문을 섭수하여 그것으로 30을 삼는 가운데 초문(初門)을 곧 하나로 삼아 답상(答相)을 이룬다고 이름하고,
다음에 있는 반문(半門)을 다시 하나로 삼아 제일의(第一義)라 이름하며,
나중의 8【문】반(半)을 합쳐서 하나로 삼아 세제(世諦)의 차별이라 이름한다.
제2의 대비수순관(大悲隨順觀)에선 열을 섭수해서 넷이 되니,
초문을 하나로 삼아 중생의 우치전도(愚癡顚倒)를 관함이라 이름하고,
다음의 하나를 하나로 삼아 나머지 처소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라 이름하며,
다음의 넷을 하나로 삼아 다른 길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라 이름하고,
나중의 넷을 하나로 삼아 다른 해탈을 구하는 것이라 이름한다.
일체상지분별관(一切相智分別觀)에선 열을 섭수하여 아홉이 된다.
처음에 있는 반문(半門)을 설함이 하나가 되니 염정관(染淨觀)이라 이름하고,
다음의 1【문】반이 다시 하나가 되니 염의지관(染依止觀)이라 이름하며,
다음에 있는 5문이 각기 개별적으로 하나가 되고,
다음에 있는 두 문이 다시 합쳐져 하나가 되니 무시관(無始觀)이라 이름하며,
다음의 하나가 하나가 되니 종종관(種種觀)이라 이름한다.
앞을 통틀면 아홉이 된다.
이 3【문】중에서 경문의 앞은 물리친 것이고,
나중은 나누어 해석한 것에 해당한다.
둘째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대경본(大經本)에 의거하면 법계연기는 온갖 다양함이 있지만,
이제 요문(要門)으로 간략히 섭수하면 두 가지가 된다.
첫째는 범부의 염법(染法)을 기준으로 해서 연기를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보리의 정분(淨分)을 기준으로 해서 연기를 밝힌 것이다.
정문(淨門)을 기준으로 한 것은 요체를 섭수하면 네 가지가 된다.
첫째는 본유(本有)이고,
둘째는 본유의 수생(修生)이며,
셋째는 수생에 이름 붙인 것이며,
넷째는 수생의 본유이다.
본유라 말한 것은 연기의 근본 실체가 정(情)의 운위(云謂)를 여읜 것이다.
법계에 현연(顯然)해서 삼세에 부동(不動)이기 때문에 「성기품(性起品)」에서는 “중생의 마음속에 미진(微塵)의 경권(經卷)이 있고,
보리의 대수(大樹)가 있다”고 한 것이다.
많은 성인이 함께 증득하고 사람의 증득은 먼저와 나중으로 동일치 않지만 그 나무는 별이(別異)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본유임을 아는 것이다.
또 이 연생(緣生)의 경문에서 12인연은 곧 제일의이다.
본유의 수생이라 말한 것은 그러한 모든 정품(淨品)이 본래 다른 성품이 없는 것이다.
이제 모든 연(緣)이 새로운 선(善)을 발생함을 기준으로 해서 저 모든 연에 의거한 것은 바로 망법(妄法)이 발한 진지(眞智)로서 곧 보현에 합치한 것이다.
성품의 체(體)가 본래 분별이 없고,
수행의 지(智)도 역시 분별이 없기 때문에 지(智)는 이(理)를 따를 뿐 모든 연(緣)을 따르지 않으니,
이 때문에 수생(修生)이 그대로 본유를 따르고 동일한 성품에서 발함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기품」에서는 “보리심을 이름하여 성기(性起)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문】본유의 수생은 이미 새롭게 뜻을 발한 것이라서 구(舊)가 아닌데 어째서 그 본성을 따른다고 설하는가?
【답】이것은 다만 신생(新生)의 뜻이 되는데,
이 수생을 설한 것이 근본 뜻과 더불어 친하기 때문에 성기를 따르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계박이 겁초(劫初)를 구별하지 않고 근본 계박을 수순해서 친하지만,
지금의 연(緣)을 대해서는 소원하기 때문에 새로 얻음을 설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셋째의 수생이란 것은 신(信) 등의 선근이 미리 현전(現前)하지는 않지만 이제 청정한 가르침을 대해서는 연(緣)에 의지해 처음으로 발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신생(新生)을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저 무분별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넷째의 수생의 본유라는 것은 그 여래장의 성품은 모든 얽힘에 은폐되어 있으니,
범부는 미혹됨에 처해서도 자각하지 못한다.
만약 미혹의 때를 대한다면 유(有)라 이름하지 못하니,
그러므로 『무상론(無相論)』에서는 “만약 유라면 마땅히 보아야 한다”고 했으며,
또 『섭론』에 의거하면 “얻어도 얻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등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제 무분별지를 얻어서 처음으로 법신이 얽매임에서 벗어나 청정함을 이룸을 나타내는데 미리 힘이 있지 않은 것은 저 무법(無法)과 동일하다.
이제 용(用)을 이루게 되는 것이 본래의 선무(先無)와 다르기 때문에 그 명칭이 본유가 됨을 설할 수 없고 수정(修淨)이 됨을 설하는 것이다.
【문】만약 처음으로 나타냄을 수기(修起)라 한다면 그 명칭을 수생(修生)이라 말할텐데 어째서 나타냄이라 말했는가?
【답】단지 이 수생문(修生門) 속의 뜻이 본유를 성취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먼저 미혹된 마음에 있을 때는 체용을 설하지 않다가 금시(今時)에야 비로소 저 법신이 있음을 설하기 때문에 저 신생(新生)과 함께 친함을 아는 것이다.
먼저라면 뜻의 소원함이 있으니,
마치 논에서 “여읨과 여의지 않음이 무상(無常)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미 무상을 말했다면 본유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뜻은 이 연생(緣生)에서 이치로는 실로 유(有)에 통하는 것이다.
만약 경을 대해서 경문을 나눈다면 이 10번의 연생은 오직 두 가지 문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수생이고,
둘째는 수생의 본유이며,
나머지 둘은 「성기품」에 있다.
둘째,
염법(染法) 분별의 연생이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연기의 일심문(一心門)이고,
둘째는 의지(依持)의 일심문이다.
연기문이란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진망연집문(眞妄緣集門)이고,
두 번째는 섭본종말문(攝本從末門)이며,
세 번째는 섭말종본문(攝末從本門)이다.
연집(緣集)이라 말한 것은 총상(總相)에서 논한 12인연과 하나의 근본 식(識)의 지음인데 진(眞)과 망(妄)의 구별이 없는 것은 논(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일심법에 의거하면 두 종류의 문이 있으니,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또 이 경에서 ‘오직 마음의 굴러감’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또 논에서 설한 것처럼 진망의 화합을 아리야(阿梨耶)라고 이름한다.
오직 진(眞)만으론 생기하지 못하고 망(妄) 단독으론 이루질 못하니,
진망이 화합해야 바야흐로 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마치 꿈속의 일과 같으니,
아는 것과 자는 것이 합해져야 바야흐로 집기(集起)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망연집의 문이다.
두 번째의 섭본종말(攝本從末)이란 것은 오직 망심으로 짓기 때문이니,
논(論)에서는 “종자식(種子識)과 과보식(果報識)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도(道)를 대치할 때에 본식(本識)이 모두 소멸하고 법신이 5도에 유전하는 것을 이름하여 중생이라 하니,
그 유전하는 처소에 따라서 그 별미(別味)를 성취한다.
법이 온갖 고통을 심는 것이 이처럼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근본을 섭수해서 그 지말을 따름을 아는 것이다.
【문】염(染)을 따를 때를 당하면 그대로 염이 되는가,
정(淨)을 말미암음이 되는가?
【답】체(體)는 청정한 근본이라서 다시 정(淨)이라는 명칭을 수반할 수 없기 때문에 염(染)일 때는 정(淨)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래장에 의거해서 생멸심이 있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마땅히 단지 단독적인 생멸이라고 해야 한다.
지금은 서로 의지하여 말한 것인데 이같이 설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염(染)과 정(淨)을 다함께 증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지,
염문(染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 번째의 섭말종본(攝末從本)이란 12인연이 오직 진심(眞心)의 지음이라는 것이니,
마치 파도와 물의 지음과 같고,
또한 꿈의 일이 오직 보심(報心)의 지음뿐인 것과 같다.
진(眞)으로 짓기 때문에 경에서는 “5음(陰)과 12인연과 무명 등의 법이 다 불성(佛性)이다”라고 한 것이며,
또 이 경에서 “삼계는 허망하니 오직 일심의 지음일 뿐이다”라고 했으며,
논석(論釋)에서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문】섭말종본은 마땅히 정품(淨品)인데 어째서 염문(染門)에서 분별하는가?
【답】이 섭말종본은 이(理)로는 정품의 연생(緣生)에 있지만 지금은 염(染)을 대해서 염(染)의 환(幻) 같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염문에 있는 것이다.
【문】이처럼 일체의 청정한 법이 모두 염(染)을 대해서 망(妄)을 나타낸 것이 그 뜻이라면 어째서 유독 섭말종본을 변별한 것만이 염(染)의 연생에 있는 것인가?
【답】일반적으로 정품(淨品)의 연기를 논하는 데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염(染)을 대함으로써 망법(妄法)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에서는 “모든 제(諦)의 제일의를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다만 정품의 연기를 나타낸 것이 곧 이(理)를 나타낸 문이니,
곧 저 보현의 「성기품」 등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나머지 뜻은 이에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 섭말종본이 곧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며,
이 중에도 공(空)의 뜻이 있어서 자체공(自體空)이 되니,
나중에 해당되는 곳에서 분별하겠다.
둘째,
의지(依持)의 일심문에서 6식이나 7식은 이야(梨耶:아뢰야)에 의거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12연생은 이야식에 의거한다”고 했으니,
이야식으로써 통인(通因)을 삼기 때문이다.
【문】위에 나온 연기의 일심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답】위에 나온 연기의 일심은 염정(染淨)이 곧 체(體)로서 별이(別異)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지문(依持門)에서는 능소(能所)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둘로 나눈다.
【문】위에서 나왔듯이 모든 뜻은 다 하나하나의 문으로 구별되는데 어떻게 한 증득의 경계[一證境界] 를 이루게 된다고 하는 것인가?
【답】위에서 변별한 것은 모두 연(緣)을 기준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나타낸 것이니,
바로 증경(證境)의 방편도연(方便道緣)이다.
욕락(欲樂)이 이미 구별됨은 바로 지금 의거하는 관문이 동일치 않은 것이니,
만약 증경(證經)을 찾는다면 위에서 나온 10평등의 설(說)과 같다.
이상으로 둘째의 뜻을 해석하는 문을 마친다.
다음은 경문을 대해서 관문의 개별적인 상(相)을 해석하는 것이다.
경본(經本)의 10관(觀) 속에 나아가면 처음은 순관(順觀)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역관(逆觀)을 변별한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와 동일하다.
그 역관의 상(相)은 나중에 해석하겠다.
처음,
인연분의 차례라는 것은 세 종류로 분별한다.
첫째는 다스리는 바의 장애를 밝힌 것이고,
둘째는 관(觀)의 체(體)를 변별한 것이며,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니,
나머지는 모두 이와 같다.
장애를 다스린다고 말한 것은 아견(我見)의 집착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12분(分)이 나의 지음이라 말한 것은 곧 신견(身見)과 사견(邪見)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만약 경문을 나누어서 구별한다면 단지 인견(人見)만을 다스린 것이지만,
이 미혹은 저 3공(空)의 다스리는 바를 통틀은 것이다.
다스리는 상[治相] 은 어떠한가?
실제로는 인상(人相)이 있지 않은데도 인상을 실답게 보는 것은 곧 공문(空門)의 다스리는 바이며,
연기는 아생(我生)과 흡사하나 생(生)을 취하는 바와는 같지 않아서 계교하여 사상(似相)이 되는 것이니 곧 무생(無生)의 다스리는 바이다.
그리하여 저[彼] 가 나와 흡사함을 알게 되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자타의 차별식이 아견(我見)의 훈습으로부터 생긴다”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다.
사생(似生)과 실다운 법상(法相)을 성취함은 곧 무원문(無願門)으로서 앞의 두 가지 집착을 통틀어 다스리며,
또한 저 무아의 공(空)을 다스리고 여덟 가지 자재한 견상(見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앎을 얻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자체공(自體空)이란 것은 유(有)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성품 없음[無性] 의 성품을 이룬 것이니,
곧 미혹의 문을 다스린 것이다.
둘째,
체(體)를 관하는 것은 곧 인연의 이(理)와 차례로 생기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니,
공과 사실(似實) 등의 3성(性)으로 순관(順觀)의 체(體)를 삼은 것이며,
역관(逆觀)은 곧 하나의 연기공(緣起空)의 성품 없는 성품의 관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는 곧 연기 차례의 이(理)로써 이 관의 체를 삼은 것이니,
바로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만약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다면 다만 준거하여 생각해 섭수하라.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인연분에 나아간 것은 곧 인분(因分)이며,
차례라는 것은 점차(漸次)이다.
관(觀)이란 비추어 통달하는 뜻이니,
이에 나아감으로써 장(章)의 제목을 정한 것이다.
이 경문에 네 가지가 있는데 서로 따르면 셋이 되고,
간추리면 둘이 되며,
총체적으로 섭수하면 하나가 된다.
문(門)은 네 가지로 구별하는데 첫 번째는 저 해혹(解惑)을 들어서 무아를 성취함을 나타내는 문이며,
두 번째 논에 의거한 ‘우치(愚癡)’ 이하와 경에 의거한 ‘일체 범부’ 이하는 정(情)을 따져서 이(理)를 나타낸 문이며,
세 번째 논에 의거한 ‘무지(無智)’ 이하와 경에 의거한 ‘항상 사념(邪念)에 따른다’ 이하는 상(相)을 변별해서 실(實)을 나타낸 문이며,
네 번째 ‘모든 제(諦)의 제일의제를 알지 못한다’ 이하는 실(實)에 의거해서 상(相)을 변별한 문이다.
서로 따르면 세 가지라는 것은 4【문】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성취함을 이름 붙인 것이고,
무아를 해석해 이룬 것 중에서 둘은 답을 이름 붙인 것인데 답은 무아를 나타낸 것이고,
나중의 하나는 상(相)을 이름 붙인 것이니,
이른바 2제(諦)에 의거해서 인연의 상(相)을 수립한 것이다.
간추려 섭수하면 두 가지란 것에서 앞의 3문(門)은 종지가 무아임을 나타낸 것이니 곧 인연의 성품이며,
나중의 하나는 인연의 상(相)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총체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제1 인연분의 차례가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인 상(相)을 변별하여 실(實)을 나타냄에 나아가면 단지 치애(癡愛)를 말미암아서 모든 업행(業行)을 일으킨 것이고,
나아가 노사(老死)는 나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 처음은 순(順)이고,
다음은 역(逆)이며,
나중은 매듭 지음이다.
순(順) 중에서 처음은 무지(無智)의 유무를 말한다.
경에서 ‘항상 사념(邪念)을 따른다’고 말한 것은 무명지(無明支)이고,
무지는 치(癡)이며,
구함은 애(愛)이고,
상(常)을 구하는 것은 유(有)라 이름하며,
단(斷)을 구하는 것은 무(無)라 말한다.
과거는 오직 치(癡)뿐이니,
실(實)은 곧 과거로서 모든 번뇌를 갖추어 치애(癡愛)가 강력하기 때문에 치우쳐 드는 것이다.
‘항상 따른다’ 이하는 행이다.
행에는 여섯 구가 있으니,
앞의 세 행은 허물이고 나중의 세 행은 체(體)이다.
경에 의거하면 행의 허물의 세 구도 역시 무명지이며,
논 속에서는 무명지를 빠트리고 있기 때문에 ‘이 행으로써’ 이하는 식지(識支)이다.
처음에 이 행으로써 마음의 종자를 일으킨 것은 앞을 타고서 나중을 일으킨 것이니,
행이 마음을 훈습함을 말미암아서 마음으로 하여금 나중을 낳게 하기 때문에 종자라 설한 것이다.
마음이란 것은 이야(梨耶)이다.
둘째,
유루(有漏) 이하는 나중의 생사를 대해서 앞 종자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유루는 애(愛)이고,
상(想)을 취하는 것은 견(見)이다.
경에 의거하여 마음을 취하면 마음은 곧 상(想)에 통한다.
이른바 ‘업이 지(地)가 된다’ 이하는 다시 후유(後有)를 낳는 것이니,
이것이 명색지(名色支)이다.
명색 등을 낳는 것에 일곱 구가 있다.
첫째는 업이 지(地)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식(識)이 종자가 되는 것이며,
셋째는 무명이 덮는 것이며,
넷째는 애수(愛水)가 적시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의 마음이 물을 대는 것이며,
여섯째는 갖가지 견(見)의 그물이며,
일곱째는 명색의 싹이 생기는 것이다.
【문】훈습의 뜻처럼 마땅히 업이 종자가 되고 식(識)이 의지하는 지(地)가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지금은 식이 종자가 되는가?
【답】일반적으로 업의 종자를 논하면 두 가지로 분별된다.
첫째는 훈습이 종자를 이룰 때이며,
둘째는 생(生)을 이끌어서 과(果)에 감응할 때이다.
만약 훈습이 종자를 이룰 때라면 업이 종자가 되고 식이 지가 되며,
식이 아직 훈습을 받지 못할 때는 종자가 있음을 변별하지 못한다.
이제 훈습이 처음으로 종자를 낳음을 설하게 된 것은 곧 위의 마음과 더불어서 능훈(能熏)의 뜻은 친하고 식과 함께 하는 뜻은 소원하기 때문에 식이 지가 되고 종자가 능의(能依)가 되는 것이니,
곧 업에 속하는 것이다.
둘째의 ‘생(生)을 이끌어서 과(果)에 감응한다’는 것은 식(識)으로써 종자를 삼고 업으로써 지(地)를 삼는 것이다.
지금 업이라 말한 것은 생(生)에 임한 때이다.
중음(中陰)으로서 생을 구하는 업심(業心)이 정업(正業)의 종자가 되지만 오히려 본식(本識)에서는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위의 마음으로서 생(生)을 구하는 중음이 바로 종자의 용상(用相)이다.
이 용상은 이미 업의 체(體)가 아니며 다만 능히 이끄는 업이 식지(識支)를 감득(感得)한 것이니,
마치 지(地)가 종자를 이끌어서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것과 같다.
업을 설함이 지(地)가 되고 종자는 식(識) 안에 있으니,
저 본식과 더불어서 동일한 무기(無記)의 성품이다.
먼저 업식을 이루어 위의 마음은 이미 물러간 것이다.
이제 종자의 현현과 본식이 모두 이루어졌지만 식의 뜻과는 친하고 능훈(能熏)과는 소원하기 때문에 식을 따름이 합쳐져서 종자가 된다고 판별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즉체(卽體)이고,
둘째는 이체(異體)이다.
이 뜻은 위의 『요간(料簡)』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업력의 무명과 모든 견(見) 등은 현금(現今)에서 생(生)을 구하고 식으로써 의거함을 삼으니,
마땅히 식을 따르는 것이 종자가 되야 한다.
그렇다면 분별함이 의거하는 지(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답】이(理)는 식(識)에 의거함과 동일한데 다만 뜻의 구별이 있어서 종자와는 같지 않다.
종자의 현현과 식의 무기성(無記性)이 동일하기 때문에 첫째의 체(體)와 둘째의 상(相)은 모두 하나로서 나누지 못한다.
생(生)을 구하는 무명이 비록 식과 더불어 똑같이 나타나더라도 그 색심(色心) 등의 차별이 변해서 이루어진 것은 본식의 체와 상의 두 뜻과는 같지 않아서 식을 따름이 종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다.
둘째,
의지(依止)의 일심관(一心觀)이란 것은 곧 12연(緣) 등의 능의(能依)이다.
마음이란 곧 이야심(梨耶心)이니,
이에 나아가서 장(章)의 제목을 삼은 것이며,
이야의 연기로써 이 관(觀)의 체(體)를 삼은 것이다.
3문은 위와 같다.
처음의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저 외부 경계를 자성이 집착함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이다.
개별적인 다스림은 단지 자성과 차별과 적취(積聚) 등의 셋을 미혹하기 때문이니,
통틀어 다스림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체(觀體)를 능히 다스리는 것은 도리어 3공(空)의 공이 흡사 실(實) 같은 무생(無生)의 성품과 상(相)으로 이 순관(順觀)을 삼기 때문에 논에서는 “아리야식이 대공(大空)이 된다”고 한 것이니,
그러므로 무생이 흡사 실 같은 것이다.
무원(無願)은 논한 바와 같음을 생각해서 알아야 한다.
역(逆)으로 1관(觀)을 성취함은 처음의 문과 같다.
유식(唯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야유식이 모든 법을 유지하고 낳는 것인데 식(識)을 여의면 곧 무(無)이다.
둘째는 의식(意識)유식을 밝힌 것이니,
생사와 열반,
염(染)과 정(淨) 등의 법이 의지(意地)에 나타나 있는데 식(識)을 여의면 곧 무(無)이다.
이야유식이 비롯함은 해(解)의 경계이지 행이 의거하는 바가 아니며,
의식유식은 그 종결이 곧 정해(正解)가 의거하는 바이니,
마음이 종결하고 뜻이 시작함은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관상(觀相)은 무엇인가?
행하는 마음이 법을 보는 것이 경계가 되는 것과 같다.
만약 관심(觀心)이 경계를 깨달음이 없다면 염정(染淨) 등의 법은 제멋대로 현전할 것이다.
이제 의언(意言)이 지은 바를 아는 것은 일컬음을 취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식(識)의 지음을 아는 때는 이름하여 의타(依他)로써 분별의 경계를 버리는 것이라 한다.
【문】의타와 식은 어떻게 구별을 취하는가?
【답】의타는 상(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의 체(體)의 공상(空相)이 능히 식을 일으키고,
그 식이 연(緣)을 따르면서 자성을 지키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공을 성취함에 응한 것이 곧 사상(似相)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상(相)을 기준으로 했음을 아는 것이다.
둘째,
유식은 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삼계는 유심(唯心)이고,
전현(轉顯)2)의 분별은 곧 공(空)이기 때문에 앎을 얻는 것이다.
식(識)이 성품 없음을 조망한 것이 곧 실답지 않음과 흡사해서 체상(體相)이 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틀어 설했을 뿐이다.
【문】가령 경계가 마음에 의거함은 곧 과법으로서 흡사하지만 무(無)는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식(識)을 대해서 경계가 곧 공임을 변별하는가?
【답】단지 마음을 좇아서 생기하는 것은 분별의 경계가 아니고,
능연심(能緣心)에 속한 것은 의타성(依他性)의 섭수이니,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경계를 보는 때를 당해서는 단지 실(實)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주(論主)는 “2제(諦) 등의 경문으로 한결같이 의거하는 지관(止觀)을 짓는다”고 말한 것이다.
【문】나중에 유식을 아는 것은 도리어 소지(所知)이다.
앞에서 일컬은 경계와 더불어 어떤 뜻의 구별이 있기에 나중의 경계를 판별한 것이 의타성에 속하는가?
【답】앞에서 경계를 볼 때는 연집(緣集)을 알지 못하고 뒤에 식의 지음[識作] 이라 설한 것이다.
뜻을 지음은 성품이 아니라 식의 지음을 본 것이며,
시분(時分)은 염(染)이라 일컬은 것을 여읜 것이니,
연집이 이(理)를 지음은 분별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에 구별됨을 아는 것이다.
실다운 경계를 멸하게 할 때 곧 1분(分)의 공무상성(空無相性)을 얻으니,
무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의 상(想)과 경계가 나란히 생기지 않는 것을 성품 없는 성품을 얻는다고 이름한다.
이것이 바로 행문(行門)의 유식관법이다.
만약 생해(生解)를 기준으로 한다면 3성(性)은 나중에 성품 없는 성품을 변별한 것이다.
【문】유식의 상(想)이 멸함은 무상의 경계를 알아서 유식의 상(想)으로 하여금 식상(識相)이 스스로 멸하도록 하기 때문인가?
【답】다시 따로 무상(無相)을 알아서 마음을 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유식의 상(想)이 성품 없음을 겸하여 아는 것이니,
상을 취한다면 스스로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앞의 세력에 의거해서 나중 마음의 불생(不生)을 얻는 것이다.
지금 이 경문 안에선 두 가지 유식을 통틀은 것이다.
삼계유심의 지음은 곧 본식의 유식이며,
경 아래의 게송이 다만 탐심으로부터 있는 것과 같은 것은 곧 의식의 유식이다.
이것은 순관(順觀)이니,
이는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경본(經本)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구(句)는 종지를 세운 것이고,
둘째 12연분(緣分) 이하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끌어서 증명한 것이며,
셋째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하는 따지는 것이며,
넷째 ‘사(事)를 따라서 욕심을 낳는다’ 이하는 답이다.
수(隨)라는 것은 온갖 많음의 뜻이며,
사(事)라는 것은 위의 마음이 업을 지은 것이며,
욕심을 낳는다는 것에서 마음은 이야심(梨耶心)이다.
【문】이미 욕심이 바로 의식이라 말했는데 어째서 본심이라 말하는가?
【답】욕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식(識)이 작용의 분별을 나타내서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이 식에 즉한 인연이 작용을 발기한 것이다.
의변(義邊)은 곧 그 사(事)에 속하고,
능견취(能見取)의 변(邊)은 곧 의식에 속하며,
인연의 발기는 곧 이야에 속하는데 일어나는 때가 동일한 처소라서 분별할 수 없다.
마치 광심(誑心)을 행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하고,
욕심이 경계를 취하는 것을 곧 요달치 못함이라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욕심의 뒤에서 요달치 못함을 따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욕심에 즉함을 요달치 못함이라 이름함을 아는 것인데,
다만 문장을 이루기 때문에 말에 먼저와 나중이 있는 것이다.
사(事)가 행이란 것은 위의 마음이 분별한 사가 곧 업행인 것이며,
광심(誑心)을 행함을 무명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행이 분별의 실상을 현성(現成)하는 것이다.
이제 이야식이 변성해서 요달치 못하는 것을 의식이라 이름하고,
그 실사(實事)를 취하기 때문에 무명이라 이름하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문】이것과 경본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경은 통틀은 것이고 논은 국한된 것이다.
셋째,
자인(自因)의 관(觀)이라는 것에서 자(自)라는 것은 타와 다름을 가려내는 명칭이니,
오직 사인(邪因)만을 가려낼 뿐 정인(正因)을 가려내지는 않는다.
이제 이 관(觀)안에선 네 종류의 인(因)을 섭수하니,
인연(因緣)과 증상연(增上緣)과 연연(緣緣)과 차제연(次第緣)이다.
이 네 가지 연(緣)의 이(理)를 이 관(觀)의 체(體)로 삼으니,
이 이하로부터 인연관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3성(性)의 상(相)으로써 순관의 체(體)를 삼고,
3공문(空門)으로써 역관의 체(體)를 삼는다.
다만 뜻을 구별해서 나누기 때문에 이런 모든 관(觀)이 있는 것이다.
분별의 성품 안에서 다른 망령된 계교를 가려내는데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다스리는 바라고 말한 것은 달리 계교한 인연의 집착을 다스리는 것이니,
마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수도하는 것이 실제로 업을 발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연을 갖춤이 능히 업을 발생한다고 계교하는 것은 곧 계취견(戒取見)이니,
마치 자성이 인(因)이 아니면서 인(因)과 마음의 번뇌가 되는 것과 같은데,
그 구분은 이 다스림과 동일하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은 이 자인(自因)이 네 가지 연(緣) 등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법을 생기함을 밝힌 것이다.
이같이 인연의 친함과 소원함의 두 가지 이(理)를 갖추는 것을 속제관(俗諦觀)이라 이름한다.
망령된 계교를 낳지 않는 것은 1분(分)의 진(眞)을 이루는 것이니,
이 경문은 이를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제 무명에 두 종류의 지음 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첫째는 친인연(親因緣)이며,
둘째는 소연(疎緣)이다.
첫째의 연(緣) 중에서 어리석음[癡] 은 친인(親因)이고,
둘째의 행과 더불어 인(因)을 짓는 것은 곧 소연(疎緣)이다.
이 가운데서 3연(緣)을 섭수하니,
나머지 경문의 종류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단지 소인(疎因)만을 취한 것은 논(論)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이다.
넷째,
서로 버리어 여의지[捨離]
않는 관(觀)이란 것에서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서로 사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와 구별할 때 서로 생(生)함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3성(性)의 구분은 위의 자인(自因)의 관(觀)과 동일하다.
처음에 다스리는 바를 밝힌다는 것은 인(因)과 과(果)를 이시(異時)로 계교하는 것이니,
이른바 인이 멸하고서 과는 후에 생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이 과를 낳지 않는 잘못이 있으며,
다시 나머지 잘못도 있으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계취견(戒取見)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동시에 과(果)를 낳는 이(理)로써 이 관의 체(體)를 삼은 것이다.
이것의 친함과 소원함의 두 인(因)은 모두 동시이니,
이것은 경문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이다.
관상(觀相)이란 무엇인가?
무명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시(子時)이고,
둘째는 과시(果時)이다.
저 두 종류의 시(時)는 전후가 아니니,
자(子)에 의거해서 시(時)를 취하는 것을 자시라 이름하고,
과(果)에 의거해서 시(時)를 취하는 것을 과시라 이름한다.
그 뜻은 무엇인가?
자(子)라는 것은 행을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이고,
과(果)라는 것은 이 자시 속에서 성취한 행과(行果)이니,
이것에 의거해서 시(時)를 취하는 것을 과시라고 이름한다.
【문】인과가 동시인 것은 곧 별체(別體)의 허물이다.
만약 전후가 생기한다면 인이 과를 낳지 않음의 허물이다.
【답】내가 인과를 세운 것은 저 두 가지 잘못과는 다른 것이니,
동시를 말미암은 것은 제2의 잘못과 다른 것이며,
인과가 되는 것은 제1의 잘못과 다른 것이다.
이것은 역관(逆觀)이 아니라 정(情)을 떠나서 설한 것이다.
단지 속제(俗諦)의 이(理)를 나타냈을 뿐 제일의가 아니라서 동시를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논에서는 ‘두 종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사(事)를 반연해서 나타내 보인다’고 한 것이다.
무엇을 두 가지 뜻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인(因)의 뜻이고,
둘째는 과(果)의 뜻이다.
사(事)를 반연해서 나타내 보이는 것은 두 종류의 뜻을 반연함에 의거해서 두 종류의 때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처럼 나머지 인연도 자생인(自生因)의 두 종류 뜻으로 나누는 것이 사(事)를 반연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논주(論主)가 『중론』의 게송을 인용하길 “온갖 연(緣)으로 생기한 법은 인(因)에 즉하면서도 즉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다시 인과 다르지 않아서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과의 두 뜻이 각기 단과 상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행(行)은 무명의 과(果)이니 무명의 인(因)에 즉하지 않지만 이 과를 말미암기 때문에 무명의 인과 다르지 않으며,
인의 뜻은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단도 아니고 상도 아니니 행이 과를 말미암은 것은 단이 아니며,
과(果)가 힘이 없으니 상(常)이 아니다.
즉 이 때[時]
속에서 무명은 인이라서 단이 아니며,
과의 인이기 때문에 상이 아니다.
이 뜻은 논주(論主)가 외정(外情)을 제거해서 역관(逆觀)의 설을 지은 것이지,
연생(緣生)을 수순하는 속제문이 아니니,
이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다.
논주는 나중에 스스로 해당되는 경에 귀속하면서 “자생인연(自生因緣)을 관하는 뜻은 앞의 설과 같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논(論)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이다.
다섯째,
3도관(道觀)이란 것에서 3이란 것은 수(數)이고,
도(道)라는 것은 통틀어 생기하는 뜻이니,
번뇌의 업보와 통틀어 생기하는 뜻을 이 관(觀)의 체(體)로 삼는 것이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처음의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인연이 사(事)를 폐하고 이(理)를 계교하는 집착을 대치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법의 전체적인 인연의 이(理)를 계교하는 것이 곧 사(事)를 폐하고 이(理)를 집착하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논(論)에서는 “만약 인연이 생한다면 일체의 법이 함께 생기한다”고 말했으니,
이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다.
【문】논문에서 말했듯이 이 말은 나중의 3제(際)에 속하는데 어째서 앞을 따라서 다스리는 바로 삼는 것인가?
【답】논주는 따로 다른 뜻이 있다.
나중의 8【문】반관(半觀)을 과목으로 나눈 것을 속제로 삼은 것은 집착이 허물임을 밝힌 것이니,
그러므로 나중을 좇아서 설한 것이다.
그러나 논주가 3도로써 허물을 섭수하는 관(觀)을 삼은 것은 곧 체(體)가 허물이라서 따로 다스리는 바가 있을 수 없다.
이제 경본에 의거하면 3도는 덕이기 때문에 다스리는 바가 있는 것이니,
장차도 앞에 있으면서 논할 것이다.
논주가 따로 다른 뜻이 있음을 아는 것은 앞의 의지일심관(依止一心觀)이 두 문으로 나뉘는 것과 같으니,
어찌 10번(番)의 뜻이겠는가?
또한 어떤 풀이하는 이는 외인(外人)과 논주가 잘못을 이루었음을 지으니,
만약 이런 해석을 지으면 뜻이 전이되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의심하기를 “만약 인연이 생한다면 일체법이 함께 생기한다”고 함을 알 수 있다.
논에서 답하여 말하기를 “과거의 업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아직 업을 짓지 않은 것이며,
둘째는 이미 업을 지은 것이다.
단지 아직 짓지 못한 것은 일체생(一切生)이 아니며,
이미 지은 것은 마땅히 일체생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렇기 때문에 지금은 논주와 외인이 잘못을 이룬 것이 앞의 다스림에 속함을 성취한 것이다.
또 첫째,
인(因)이 모든 법을 낳는 것은 마치 숙작(宿作)과 자성 등을 계교한 것과 같으니,
그 구분은 이 다스림과 동일하다.
이는 계취(戒取)일 뿐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은 3성을 대해서 구분한 것인데 위와 같다.
자인관(自因觀)의 인연의 도가 모든 유(有)를 통틀어 낳고,
번뇌도에 의거해서 모든 유(有)를 낳기 때문에 똑같이 유류(有流)에 존재하는 것이다.
업에 의거해 모든 유를 낳으니 6도가 동일치 않고 선악도 차이가 있으며,
과보에 의거해 모든 법을 낳으니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3유(有)가 그 사업(事業)을 성취하게 되면서 모든 상(相)이 동일치 않은 것이다.
이것의 이(理)와 사(事)는 이(理)에 상응하기 때문에 법이 가지런히 생기하고,
사의 격리를 말미암기 때문에 서로 생기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인연의 이(理)만이 사(事)를 빌려서 생기하지 않는 것이라면 3유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것은 경본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함은 알 수 있으며,
논에 의거해 변별한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섯째,
3제관(際觀)이란 것에서 3이란 것은 수(數)이고 제(際)는 무시(無始)의 분제를 나타낸 것이니,
곧 3시(時)의 인과와 이사(理事)로써 이 관의 체(體)를 삼는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무인(無因)의 집착을 다스린 것이다.
곧 상견(常見)이니,
이른바 모든 법이 인(因)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다시 미래에 나고 늙고 죽음이 없다고 말하니,
곧 단견(斷見)이다.
둘째,
능히 다스림이 의거하는 바의 관문(觀門)이란 것은 무명ㆍ행 등은 과거세이고,
현재세에선 몸이 항상하다고 보는 집착을 다스리는 것이며,
애(愛)ㆍ취(取)ㆍ유(有) 등은 미래세이니 외적으로 집착하는 단견(斷見)의 허물을 대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삼세의 전(轉)이 있는 것은 이른바 전전(展轉)하여 모든 후유(後有)를 낳는 것이니,
이는 허물과 근심을 밝혔을 뿐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며,
이상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일곱째,
3고관(苦觀)이라는 것에서 3은 수(數)이고 고(苦)는 뜻이니,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이른바 낙정(樂淨)의 집착이다.
이 인연의 몸은 3고(苦)를 갖추고 있는데 미혹된 자가 이를 요달치 못하고 낙정이 있다고 일컫는 것이니,
곧 견취(見取)의 섭수이다.
구분하면 계견(戒見)이 있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을 밝힌 것인데 3성(性)은 위와 같다.
이(理)의 실다움은 모든 인연을 통틀어서 논하고,
구분하면 3고(苦)에 통한다.
지금은 상(相)을 기준으로 해서 나누는데,
무명ㆍ행 등을 행고(行苦)로 삼고,
촉(觸)과 수(受)의 2지(支)를 고고(苦苦)라 이름하며,
애(愛)ㆍ취(取)ㆍ유(有) 등을 괴고(壞苦)로 삼는다.
행고의 점차적인 증가는 몸이 항상 머물면서 낙정이 있다고 계교하는 것을 다스리고,
고고는 몸이 자재로워서 낙정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다스리며,
괴고는 몸의 구경(究竟)에는 낙정이 있다고 계교하는 것을 다스리니,
이것을 세속을 수순하는 관[順俗觀] 이라 이름한다.
【문】3고(苦)와 고를 아는 지혜를 이 관의 체(體)로 삼는데,
이 고가 어째서 3성에 통하게 되는 것인가?
【답】경에서 설했듯이 불생불멸이 무상(無常)의 뜻 등이다.
또 “이는 고(苦)이고,
이는 제(諦)이며,
이는 실(實)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자세히는 『중변론(中邊論)』과 같으니,
준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경문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경문을 해석한 것에서 5지(支)의 명칭으로써 행을 삼은 것은 모든 분(分)의 점증(漸增)이 아직 고구(苦具)를 대하지 못하고 다만 행상(行相)이 증가한 것이며,
촉(觸)과 수(受)로써 고고(苦苦)를 삼는 것은 이 2지(支)가 외적인 고구(苦具)를 대해서 증가하기 때문이며,
애(愛) 등을 괴고(壞苦)라 이름하는 것은 미래세에 인연을 낳기 때문에 현재의 몸을 어기는 것이며,
그 현재도 오래 세간에 머물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애(愛)와 취(取)가 체(體)가 있는 것은 괴상(壞相)이 아니니,
타괴(他壞)의 증대를 괴고라 이름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여덟째,
인연관이란 것에서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이른바 단인(單因)의 유력(有力)이 과(果)를 낳음을 계교한 것이다.
마치 자성의 인(因)이 능히 25제(諦)를 낳음을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 몸의 업은 인연의 소생인데 미혹된 자가 이를 요달치 못하고 자성의 지음이라 일컬으니,
즉 계취견(戒取見)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觀門)이란 것에서 세 가지 성품은 위와 같다.
인연은 이(理)를 낳으니,
인(因)은 결정의 용(用)이 있고 연(緣)은 과(果)를 발하는 능(能)이 있어서 바야흐로 법이 생함을 얻는 것이다.
만약 인력(因力)이 과(果)를 발하는 능(能)을 반연하는 것이 없다면 그 인(因)의 여섯 가지 뜻은 현전하지 못한다.
무엇을 여섯 가지 뜻이라 하는가?
첫째는 염념멸(念念滅)이니,
이 멸(滅)은 공유력부대외연(空有力不待外緣)이다.
그 까닭은 유력이어서 연(緣)을 기다리지 않음을 인체(因體)로 삼아 연사(緣事)를 대(對)하지 못하고 스스로 옮겨 움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구유(俱有)이니,
공유력대연(空有力待緣)이다.
그 까닭은 외연(外緣)을 얻는 것이 오직 체공(體空)을 나타냄으로써 함께 역용(力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쫓음을 따라서 치제(治際)에 이르는 것이니,
이는 유무력대연(有無力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타자를 따르게 되므로 무(無)가 능히 연을 어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무력인 것이다.
넷째는 결정(決定)이니,
이는 유유력부대연(有有力不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외연이 아직 이르지 못해서 성품이 스스로의 성취를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관인연(觀因緣)이니,
이는 공무력대연(空無力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외연이 오직 친인(親因)의 유(有)가 아님과 무력이 능히 과(果)를 낳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가령 자과(自果)를 이끌어서 나타내는 것이니,
이는 유유력대연(有有力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외연을 얻을 때 오직 자인(自因)만을 나타내서 자과(自果)를 얻기 때문이다.
【문】이 인연의 여섯 가지 뜻의 분제는 무엇인가?
【답】이제 연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은 단지 인사(因事)의 밖에서 증상(增上) 등의 3연(緣)을 취한 것이지,
자인(自因)의 여섯 가지 뜻이 서로 발기함을 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여섯 가지 뜻이란 것은 똑같이 이법(理法)이니,
인사(因事)를 대해서 나타냈기 때문이다.
인사를 폐기하면 여섯 가지 뜻이 스스로 서로간에 성취를 능히 발하지 못하는데,
다만 외부의 3연이 각기 이사(理事)가 있기 때문에 인과의 뜻을 대해서 나타내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섯 가지 뜻은 마땅히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이루어선 안 된다.
여섯 가지 뜻과 6상(相)을 공통으로 이룬다고 답한 것에서 6상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이(理)를 수순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事)를 수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 중에서 이(理)를 수순하는 뜻은 드러남[顯] 이고,
사(事)를 수순하는 뜻은 은미함[微] 이다.
그 4연(緣)의 사는 두 가지 뜻이 위와 같다.
다만 사를 수순하는 뜻은 증대하고 이(理)를 수순하는 뜻은 은미하니,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인연이 과(果)를 낳고 법이 미혹을 일으키는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논주가 따로 6상(相)을 가지고 이(理)에 들어가도록 비추었기 때문에 4연이 사를 수순해서 증대함을 아는 것이다.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이(理)를 수순하는 뜻이 증대함을 아는 까닭은 6상을 변별해서 마음을 보게 하여 이(理)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문】다만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여섯 가지 뜻은 이(理)를 수순해서 증대하는 것이지,
사(事)에서 취하지 않은 것임을 어떻게 아는가?
【답】논주는 사(事)가 6상을 갖추지 못함을 가려낸 것이니,
오직 뜻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이상 두 가지 미(微)의 뜻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인연 안에는 각기 여섯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따로 뛰어난 용(用)이 있어서 능히 과(果)에 감응함을 설한 것이다.
【문】논에서 설했듯이 타작(他作)이 아닌 자인(自因)의 생(生)이고,
자작(自作)이 아닌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이미 비타(非他)라고 말한 것인데 어째서 다만 뛰어난 힘이 과(果)를 낳는 것만 취한 것인가?
【답】이것은 불생(不生)을 든 것인데 그 형상이 뛰어난 힘을 취한 것이다.
만약 형상을 빼앗지 못한다면 뛰어난 힘은 이루어지지 못하니,
이 빼앗음 중에서 한 변(邊)의 뛰어난 힘만 편벽되게 취하는 것으로 하여금 위에 나온 논주의 자인관(自因觀)에 속하게 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두 힘을 통틀어 취하고,
능히 생(生)하지 않는 뜻은 그 속에 분재(分在)되어 있으니,
위의 여섯 가지 뜻에 준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문】하나의 개별적인 공(空)이 나중의 관문에 들어가서 해당되는 분별에 이르니,
이는 곧 앞의 독인(獨因)이 과(果)에 감응하는 집착을 다스린 것이고,
업이 연(緣)을 빙자해 이루어져서 나중에 과에 감응할 때는 연에 의지해 발하지 않는데 이런 집착은 어떤 잘못이 있는가?
【답】만약 연(緣)에서 폐기한다면 자인(自因)의 뛰어난 힘은 모두 다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는 곧 속제관이니,
연생(緣生)의 이사(理事)와 지혜를 관체(觀體)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인(因)이 곧 친함과 소원함의 네 가지 연(緣)을 통틀은 것이니,
그러므로 논에서 “인연이 능히 행을 낳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명칭을 해석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또 소승에 의거하면 6인(因)과 4연(緣)이고,
만약 삼승에 의거하면 곧 10인(因)ㆍ20인 등이며,
만약 일승에 의거하면 곧 법에 따라서 인(因)을 변별한 것이니,
하나하나의 인연과 이사(理事)가 각기 개별적으로 법계와 더불어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제 6인(因)의 뜻은 오직 일승만이 능히 궁구할 수 있으니,
이것은 별교(別敎)를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다.
아홉째,
인연생멸박관(因緣生滅縛觀)이란 것에서 인연은 속제의 의거하는 바를 거듭 들어 이룬 것이고,
생(生)이란 생기한 바의 과법(果法)이고,
멸(滅)이란 곧 인연으로 생하는 힘을 여읜 것이며,
박(縛)이란 것은 곧 속박에 수순해서 속제를 좇는 것이다.
경본에 의거하면 인연 두 글자가 빠져 있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이 이하의 2관(觀)이 단지 마음의 미혹을 다스린 것이며,
전체적인 뜻은 이해할 수 있으니,
이른바 인연의 공력(共力)이 능히 과(果)의 집착에 감응하는 것이다.
또 인연법을 말한 것은 각기 약간의 힘이 있어서 공통으로 하나의 과를 이룬 것이니,
그 연기의 이(理)는 모든 뜻을 통틀은 것이다.
만약 인연의 유력(有力)이 공통으로 생기함을 본다면 곧 이사(理事)를 미혹하는 분별의 집착이라 이름하니,
곧 법아(法我)의 소견(所見)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에서 이것은 3공문(空門)으로써 관체(觀體)를 수순함으로 삼으며,
역으로는 일생박무분별관(一生縛無分別觀)을 이루니,
나머지 뜻은 아래에서 다시 분별하겠다.
모든 연생법은 속제상(俗諦相)을 성취하는 것이라서 하나의 연(緣)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생긴 법은 하나의 연을 따라 없어지므로 과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니,
친함과 소원함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無知者故] ”라고 하고,
“지을 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作時不住故] ”라고 하였다.
만약 인연이 능히 생기한다면 머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만약 인연이 생기하지 않는데도 법이 있는 것이라면 앞의 인(因)이 모이지 않았어도 마땅히 과(果)를 낳아야 하고,
또 이 박과법(縛果法)의 인연도 과(果)를 낳으니,
두 상(相)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인연생의 내용에 두 종류의 뜻이 있다.
첫째는 자생(自生)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공(空)이고,
둘째는 인연이 유력하기 때문에 과법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 연박(緣縛)의 내용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속제의 연기이고,
둘째는 연생(緣生)의 힘을 여의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인연생의 법에서 만약 생력(生力)이 없다면 과(果)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 연박관(緣縛觀)에서 만약 공(空)의 뜻이 없다면 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무엇을 공상(空相)이라 하는가?
【답】인(因) 안에선 소원함을 구해도 얻을 수 없고,
또 생력(生力)을 구해도 얻을 수 없다.
앞의 인연생과 과생(果生)의 뜻은 공(空)을 증대하는 뜻이니,
이 미(微)함은 인연법이 생의 미혹을 수순해서 증대되기 때문이다.
지금 연박법의 공의(空義)는 생력(生力)을 증대하는 뜻이니,
미(微)는 연기법이 생의 무분별지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 경에서는 “연기의 법은 유(有)와 무(無)를 여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생력이 없더라도 공력(空力)으로써 성취하기 때문에 자성의 생(生)함을 여읜 것이니,
경에서는 “머묾 없음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만약 연생이 미혹을 수순해서 증대하는 것이라면 이 뜻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연박(緣縛)이 공(空)을 수순해서 증대하는 것은 마땅히 진제(眞諦)의 섭수에 해당해야 한다.
【답】공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공이 되기 때문에 속(俗)의 성취가 있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공이 무분별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속을 성취하는 공을 취하기 때문에 진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문】만약 생박(生縛)을 관하는 것이 마땅히 법을 보는 때라면 능히 속박하는 인(因)의 힘으로써 하는 것이 아닌가?
【답】능히 속박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 능히 속박함이 있다면 이는 곧 타의(他義)라서 박(縛)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뜻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속제의 무분별의 이사(理事)로써 이 관의 체(體)를 삼으니,
이 생박관(生縛觀)은 인과를 나누지 않는다.
이것은 경문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무명의 인연으로 모든 행이 생하니 생박(生縛)으로써 설한다는 것에서 무명의 인연은 세속의 의거한 바를 거듭 든 것이고,
생박으로써 설한 것은 관의 체(體)를 올바로 지적한 것인데 생박은 앞의 해석과 같다.
언설한 까닭은 말에 의거해서 평등한 세속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박(縛)이란 글자로써 생과 불생을 통틀어 지목해 박으로 삼기 때문이며,
친생(親生)을 박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며,
속제가 없으면 두 상(相)으로써 이 두 가지 뜻을 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박(縛)자의 인(印)으로써 그 뜻을 정하니,
만약 그 설(說)을 폐기한다면 두 가지 뜻을 따로 취할까 두렵기 때문에 의거한 설을 관함으로써 뜻을 취한 것이며,
이(理)는 설함 중에 있다.
나머지 경문은 이해할 수 있다.
또 경은 공력(空力)의 많음과 유력(有力)의 적음을 통틀어 취한 것이며,
논은 곧 인(因)을 설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열째,
무소유진관(無所有眞觀)은 논에 의거해서 명명한 것으로서 유진관(有盡觀)을 수순한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마음의 미혹에 국한된 것이며,
또한 모든 사(使)를 통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속제를 통틀어 섭수하기 때문에 집(執)의 인연이 되는데 다만 세속에 응하는 상(相)은 자체공(自體空)의 뜻으로서 앞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장애이다.
왜 그런가?
다만 인연생의 법은 곧 자체공의 이(理)로서 스스로 머물지 않고 속제를 수순하여 성취하는데 속제의 과(果)를 성취할 때는 동일치 않은 인연으로써 하니,
이 뜻으로 치우치지 않는 증대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미혹이 오직 속자(俗者)에게만 있다고 일컫는다면 그 때문에 잘못이 있는 것이니,
곧 법아(法我)와 아(我)의 소견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에서 세 가지 뜻은 위와 같다.
생박(生縛)의 의취는 차이가 있으나,
나중에 스스로 분별한다.
모든 연생법은 생기하지 않음이 이미 생기함이니,
곧 쌍으로 나타난다.
마치 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볼 때 물의 건조함과 습함이 모두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또 거울의 상(像)에 오염과 청정이 쌍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올바른 이(理)이다.
【문】그 나타난 바의 공(空)은 진제이기도 하고 속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관법과 앞의 연생과 아울러 생박을 쓰는 것을 어째서 구별하는가?
【답】인연과 박(縛)은 오직 유(有)를 수순함을 성취한다.
이제 제10의 공(空)과 유(有)를 관함은 둘 다 수순이고,
또 이 공과 유는 모두 속제이다.
일반적으로 진(眞)과 속(俗)을 밝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첫째는 체(體)와 상(相)의 상대이고,
둘째는 공과 유의 상대이니,
이처럼 진과 속을 나누기 때문에 그 뜻이 동일치가 않다.
만약 공과 유로 진과 속을 나눈다면 유(有)라면 속(俗)이 되고 공(空)은 곧 진(眞)이 되니,
증지(證智)로 아는 바이다.
만약 체(體)와 상(相)이 상대한다면,
공과 유가 서로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속제는 공과 유를 통틀은 것인데 이 공은 자체공이지 사공(事空)이 아니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이 심진여(心眞如)의 상(相)은 능히 마하연의 체(體)를 보인다”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비록 진여가 명칭을 얻었더라도 속상(俗相)은 체(體)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이는 곧 공과 유가 동일하게 하나의 상(相)이 되어서 연(緣)으로써 성품을 수순하는 것이니,
이(理)와 사(事)를 이 관의 체(體)로 삼기 때문이다.
위의 경문에서 “12연생은 무위(無爲)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수순(隨順)은 곧 공(空)이고,
유(有)의 다함을 수순하는 것은 공의 수순이 되니 곧 유(有)의 진멸(盡滅)이다.
이는 논주의 나중 해석을 수순한 것이지 경문을 수순한 것은 아니다.
만약 경의 무소유진관(無所有盡觀)에 의거한 것이라면 무소유는 수순하는 바이고,
진(盡)은 능히 수순하는 것이며,
속상(俗相)이 곧 공임은 멸리(滅理)에 수순하는 것이며,
속상으로써 법을 구함은 곧 그 성품을 다하는 것이니,
이는 두루 다함의 다함이다.
또한 어떤 해석자는 진(盡)이란 글자로써 역관(逆觀)을 삼으니,
이는 경문에 응한 것이 아니라 경문 속에 개별적으로 있는 역상(逆相)을 위한 것이다.
또 ‘만약 이 진(盡)이 곧 역(逆)이라면’은 모든 관(觀)이 다 마땅히 그 진(盡)자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경문에서 ‘무명의 인연이 모든 행을 낳음은 무소유진관을 수순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인연의 성품 없음이 상(相)에 즉해서 공을 변별하는 것이니,
공이기 때문에 무소유의 이(理)를 수순해서 그 성품을 다하는 것이다.
10관(觀)도 역시 서로 생하는 차례가 있다.
모든 허망의 잘못을 알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제1이 있는 것이다.
이미 식(識)이 망령되고 나서는 망법(妄法)이 무엇을 의거해서 생기하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2가 있는 것이다.
식이 의거하는 바를 알아도 어떤 이(理)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3이 있는 것이다.
이미 생기의 이(理)를 알아도 어느 때를 의거하는지는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4가 있는 것이다.
식이 때를 알고 나서는 어느 뜻을 기준으로 할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5를 밝힌 것이다.
그 뜻을 알고 난 다음엔 어떤 본말(本末)이 있으니,
이 때문에 제6이 있는 것이다.
본말을 알고 난 다음엔 어떤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7이 있는 것이다.
그 허물을 알고 난 다음엔 어떻게 사(事)를 대하여 이룰 것인가?
이 때문에 제8이 있는 것이다.
성취를 알고 난 다음엔 어떤 상(相)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9가 있는 것이다.
상(相)을 알고 난 다음엔 이(理)에 어긋날까 의심하니,
이 때문에 제10이 있는 것이다.
경에 의거한 10번(番)을 마친다.
둘째,
논에 의거해서 분별한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를 염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비(大悲)를 수순하는 것이며,
셋째는 일체상(一切相)의 지(智)이다.
첫째,
유위를 염리한다는 것은 해(解)이면 순(順)이 되고,
행이면 역(逆)이 되는 것이다.
해(解) 중에선 3공의 상(相)으로써 순(順)을 삼는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답을 성취하는 상(相)이며,
두 번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며,
세 번째는 세제(世諦)의 차별이 앎이 되는 것이다.
세간에는 사람의 성취가 없고 세간의 유위는 허물이니,
이 때문에 모름지기 제1이 있는 것이다.
이미 허물을 알고 난 다음엔 어느 이(理)에 취향할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2가 있는 것이다.
비록 들어가는 바의 법을 알더라도 무엇을 의거해서 얻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속제를 들어서 의거하는 바의 관문을 변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세제를 관함을 수순하여 곧 제일의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처음의 해석한 경문은 앞과 같다.
【문】이 상(相)은 곧 속제인데 어째서 제3이 다시 속제를 밝히는가?
【답】이것은 속제가 잘못을 취하게 됨을 변별한 것이다.
둘째,
제일의제는 소이(所以)를 벗어나게 됨을 해석한 것이니,
저 인연에 나아가서는 제일의를 관하는 것이 인연을 벗어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의지관(依止觀) 가운데 상반문(上半門)을 취한 것이다.
세제관(世諦觀)이란 것에서 세(世)는 곧 시(時)이고,
제(諦)는 시(時) 가운데 법의 실다움[法實] 이다.
이 합친 경 속에서 나중의 8문(門) 반은 6문관(門觀)이 된다.
처음의 반은 하나가 둘을 취한 것이 하나가 되며,
다음의 셋은 각기 하나이며,
나중의 셋은 하나가 된다.
처음은 염염의지관(染染依止觀)인데,
염이란 것은 능히 의거하는 것이고,
의지(依止)라는 것은 의거하는 바이다.
이 6【문】중에서 처음의 1문은 염의 의지를 밝힌 것이며,
다음의 2문은 염상(染相)을 건립하는 것이며,
다음의 1문은 염에 나아가서 허물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2문은 정관(正觀)이 잘못을 막는 것이며,
나중의 1문은 관(觀)의 분제를 변별한 것이다.
또 어째서 염이기 때문에 염상(染相)을 밝힌다고 하는가?
염은 어째서 의거하는 바가 제일의를 의거하는가?
어째서 망법(妄法)에 의거함이 진(眞)에 의거함이라고 설하는가?
이는 염에 나아가서 진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관(因觀)을 말한 것은 염의 소인(所因)을 관한 것이다.
【문】논주의 합본(合本)은 두 관(觀)을 하나의 인관으로 삼는다.
경본은 처음이 자인(自因)이 되는데 논주는 타인(他因)이라 말하며,
경본은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는데 논주는 자인이라고 말한다.
이 뜻이 무엇을 말하는가?
【답】경주(經主)가 자(自)라고 말한 것은 다른 외도를 가려내는 것이고,
논에서 타(他)를 말한 것은 4연(緣) 속에 나아가 증상연을 가려내 취함으로써 12인연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니,
논주의 뜻에 준거해서 저 경문을 해소하라.
이는 곧 친함을 들어서 소원함을 구별하는 것이니,
그 소원한 연을 취하고 친함을 취하지 않는 것은 12인연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수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12지(支) 중에서 다만 행(行)과 유(有)의 2지(支)만이 인(因)의 뜻을 보답해서 나타내고 나머지는 생략하고 갖추지 않으며,
또 증상연을 따로 취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려낸 소이(所以)를 소연(疎緣)이라 이름한다.
타인(他因)을 짓는 것은 증상연이 되는데 친인(親因)을 대하면 소원함이 되고,
증상(增上)을 조망하면 자과(自果)가 친함이 된다.
이제 친인을 대해서 저 증상을 설하기 때문에 타인을 설하는 것도 역시 가능하며,
이를 반(反)하면 그 타(他)를 취하는 것이다.
경에서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는다고 이름 붙인 것은 앞 관(觀)의 해석과 같으며,
또한 친함과 소원함을 통틀은 것이다.
논에서 자인(自因)이라고 말한 것은 증상연 속에서 친(親)의 인연을 취함이 곧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니,
동등하게 서로를 말미암아 인(因)이 됨으로써 모든 지(支)를 통틀기 때문이다.
셋째,
허물을 섭수하는 관(觀)이란 것은 12인연을 섭수하는 것으로써 3도(道)의 관찰을 삼는 것이니,
오직 고(苦)와 집(集)의 허물일 뿐이다.
넷째,
허물을 수호하는 것은 저 범부의 사견(邪見)의 허물을 수호하는 것이다.
다섯째,
불염염(不厭厭)이란 것은 이승의 만심(慢心)의 허물을 막아서 여의는 것이다.
미세한 고(苦)는 이승은 싫어하지 못하고 보살은 능히 싫어하므로 불염염이라 이름한다.
여섯째,
심관(深觀)이란 것은 관행(觀行)이 궁극적이고 깊은 것이니,
인연의 이(理)의 묘함이 정(情)의 취향을 지나치기 때문에 이름하여 심관이라 한다.
상(相)은 무엇을 말하는가?
논주는 근본의 3관(觀)을 나눔으로써 4법이 그 깊은 이(理)에 취향하는 것으로 삼는다.
첫째는 타작(他作)이 아니고 자인(自因)의 생함이기 때문에 곧 자인을 성취하는 것이니,
뛰어난 힘을 갖춤으로써 무인(無因)의 계교를 여읜다.
둘째는 자작(自作)이 아니고 연생이기 때문에 곧 소연(疎緣)을 나타낸 것이니,
뛰어난 힘을 갖춤으로써 단인(單因)이 과(果)를 낳으며 연(緣)을 빙자하지 않는 잘못을 여읜다.
이 두 가지 뜻은 자성의 집착을 여의는 것이니,
속제의 견해를 수순함으로써 마음이 쉬지 못함을 말미암는다.
【문】어째서 저마다 적은 힘이 있어도 공통으로 많은 힘을 성취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답】만약 적음과 많음이라면 성취하질 못한다.
셋째는 둘이 아닌 지음이 단지 생(生)을 수순하는 것이니,
이것은 앞의 견해를 버리는 것이다.
인연의 상(相)이 생을 수순하는 것은 유(有)와 무(無)로 취할 수 없는 것이 유를 수순함이 되기 때문이다.
유를 수순함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유(自有)가 다시 유를 수순하지 않으며,
정(定)이 인(因)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와 무로 취할 수 없음을 여의는 것이다.
넷째는 무인(無因)의 지음이 유를 수순함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의지(意地)를 여의는 것이니,
이른바 무분별이다.
그 법은 위와 같은 10평등의 섭수이니,
이는 곧 심관(深觀)의 미묘한 취향이다.
【문】이 관은 역관이 되는가,
순관이 되는가?
【답】이것은 역관과 순관을 통틀은 것이다.
세제를 관함을 수순하는 것이 곧 순(順)이며,
제일의제에 즉입(卽入)하기 때문에 역(逆)이다.
이 관(觀)은 모든 미혹을 통틀어 다스린 것이지 다스리는 바를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 아니니,
하나의 연기로서 생함이 없는 유식(唯識)을 이 관의 체(體)로 삼는다.
【문】위와 같은 모든 뜻은 다 순관인데 역관은 무엇인가?
【답】진(眞)과 속(俗)의 2제(諦)는 분별지가 아닌데 다만 견정(見情)을 대하기 때문에 2상(相)을 나눈 것이다.
역순(逆順)을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견정(見情)을 초월하는 것이 곧 역(逆)과 순(順)이 상응하는 것이다.
어떻게 방편을 짓는다고 하는가?
가령 모든 관문(觀門)이 상호간에 형탈(形奪)하는 것이니,
곧 그 이(理)를 본받아서 모든 견(見)을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다.
둘째,
대비(大悲)의 수순이란 것은 대비가 인연을 수순하는 것이니,
또한 인연이 대비를 수순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논주는 열을 합쳐서 넷으로 삼았으니,
첫째는 제1로써 어리석음의 전도(顚倒)를 삼은 것이며,
둘째는 1문(門)으로써 나머지 처소에서 해탈을 구함을 삼은 것이며,
셋째는 4문으로써 이도(異道)가 해탈을 구하는 것으로 삼은 것이며,
넷째는 4문으로써 다른 해탈을 구함으로 삼은 것이다.
제1은 허물을 변별해서 여의는 바로 삼은 것이며,
제2는 구하는 바의 이(理)이며,
셋째는 의거하는 바의 도를 삼은 것이며,
넷째는 구하는 바 과(果)로 삼은 것이다.
이 네 가지 문 중에서 하나하나의 대가 되는 짝은 삿됨을 다스리는 바로 삼고 올바름을 능히 다스림으로 삼는 것이다.
첫째의 어리석음의 전도라는 것은 집착하는 바의 처소에 따라서 어리석고 전도되는 것이니,
이는 사(事)를 관하기 때문이며,
아(我)를 집착하기 때문이다.
일체 처소에 생(生)을 받아서 아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곧 생(生)이 있지 않은 것이니,
곧 전도로 법과 아의 상용(相用)을 다스림으로써 과심(過心)이 아를 집착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안다.
나머지 처소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은 범부의 어리석음의 전도가 항상 이야식(梨耶識)과 타나식(陀那識)에서 해탈을 구해야 하고,
아울러 나머지 처소인 아(我)와 아소(我所)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마땅히 이야의 연기법 중에서 구해야 하고,
아울러 망아(妄我)의 경계 중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은 곧 식(識)의 경계로써 아(我)의 경계를 다스리고 유식의 지혜로써 아지(我智)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도(異道)가 해탈을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도된 인(因) 중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마땅히 인연의 이(理) 중에서 도의 의거하는 바를 구해야 하는데,
망인(妄因)의 자성 등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도(道)라면 자인(自因)의 이(理)로써 다스리고,
자성은 인생(因生)이 된다.
25제(諦)의 이법(理法)은 자성의 인(因)이 되는데,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다스려야 한다.
무엇이 25제가 되는가?
5지근(知根)은 곧 눈 등의 5근이고,
5작근(作根)은 곧 손ㆍ발과 입,
대변ㆍ소변의 근(根)이며,
아울러 심평등(心平等)의 근이니 11근이 되고,
5대(大)는 곧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이며,
5유량(唯量)은 곧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인데 앞의 11을 더하면 21이 된다.
걱정과 기쁨의 어둠 또한 염(染)이라 이름하고,
추흑(麤黑)은 곧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합쳐서 염(染)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이는 심제(心諦)로서 22가 된다.
만제(慢諦) 또한 아(我)라 이름하니,
이 마음이 23이 된다.
각(覺) 또한 지(智)라 이름하니 24가 되고,
자성은 25가 된다.
사람이 죽고자 할 때는 능히 업을 짓지 못한다.
그러므로 먼저 5작근(作根)이 괴변(壞變)해서 5지근(知根)이 되니,
육안(肉眼)이 괴변해서 화대(火大)가 되고,
귀가 변해서 공(空)이 되며,
코가 변해서 지(地)가 되고,
혀가 변해서 수(水)가 되고,
신근(身根)이 변괴해서 풍(風)이 된다.
5대(大)가 변괴해서 5유량(唯量)이 되니,
지(地)가 변해서 향(香)이 되고,
수(水)가 변해서 미(味)가 되며,
화(火)가 변해서 색(色)이 되고,
공(空)이 변해서 성(聲)이 되며,
풍(風)이 변해서 촉(觸)이 된다.
유량(唯量)이 변해서 걱정과 기쁨의 어둠이 되니,
걱정과 기쁨이 변해서 만(慢)이 되고,
만이 변해서 지(智)가 되며,
지가 변해서 자성(自性)을 이룬다.
이제 괴(壞)라는 것은 멸괴가 아니니,
다만 현용(現用)을 없애서 도리어 근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괴(壞)라 이름한 것이다.
성취는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는 것은 범작(梵作)을 다스림으로써 범천과 중생이 서로 여의는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3도(道)는 고행(苦行)의 인(因)을 다스리니 고행이 즐거움의 인(因)이 아니기 때문이며,
3제(際)는 무인(無因)을 다스리니 전(前)ㆍ중(中)ㆍ후(後)라는 제(際)의 인(因)이 생기기 때문이다.
4지(智)의 마음을 써서 삿된 지혜[邪智] 를 다스리니,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연기를 올바른 도의 체(體)로 삼는 것이며,
닦아서 성취한 지혜를 조도(助道)의 체(體)로 삼는 것이며,
자인(自因) 등을 올바른 도의 체(體)로 삼는 것이다.
둘째는 무분별지로써 올바른 도를 삼으며,
모든 도품(道品)을 조도(助道)로 삼는 것이니,
법을 들어 능관(能觀)의 지혜를 취하는 것으로 도의 체(體)를 삼는다.
다른 해탈을 구한다는 것에서 일반적으로 해탈을 해석하는 데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연기를 나타낸 것이며,
둘째는 지(智)를 낳는 것이며,
셋째는 미혹을 멸하는 것이다.
이제 아(我)와 아소(我所) 중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망령되이 계교하는 것이니,
세 가지 뜻이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다.
논(論)은 네 가지 뜻으로써 이를 나타냈다.
첫째,
3고(苦)로써 저 즐거움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연기의 이(理)가 진실하고 즐거운 덕을 나타내는 것이니,
행고(行苦) 등의 변천이동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인연으로 저 아(我)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곧 아(我)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니,
유위가 자재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생박(生縛)의 관(觀)으로 저 정(淨)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정(淨)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니,
박(縛)이 자재롭지 않은 정(淨)이기 때문이다.
넷째,
유(有)를 수순함으로써 저 상(常)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곧 상덕(常德)을 나타낸 것이니,
3유(有)를 수순함이 상(常)이 아니라서 아직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상(常)ㆍ낙(樂) 등으로써 차례로 배당한 것이니,
나머지 뜻은 논과 같다.
셋째,
일체상지관(一切相智觀)이란 것에서 일체는 곧 관하는 바의 경계이고,
지(智)라는 것은 능히 관하는 마음이다.
첫째,
유분관(有分觀) 안의 반문(半門)을 취하여 염정(染淨)의 분별관으로 삼는데,
염(染)이란 아만(我慢)의 번뇌로 물드는 것이고,
정(淨)이란 아만이 없는 청정함이며,
분별이란 차별하여 아는 것이다.
이에 의지관(依支觀)은 10번 안의 1문(門) 반의 관(觀)을 취하여 의지관을 삼는다.
앞 차례의 반문(半門)은 진속(眞俗)의 두 법과 미혹된 마음으로 의지를 삼고,
나중의 일심관(一心觀)은 속제와 더불어 의지를 삼는다.
둘째는 의거함의 뜻이 가지런하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依止)와 일심의 의지에 통하고,
생(生)의 의지와 경계의 의지에 통하는 것이다.
앞의 반문의 내용은 오직 경계의 의지뿐이다.
셋째는 1문(門)으로 방편관을 삼는 것이니,
방편이란 것은 인(因)과 연(緣)의 두 힘이 방편으로 과(果)를 발하는 것이다.
넷째는 1문으로써 연상관(緣相觀)을 삼는 것이니,
연상이란 것은 인연이 과(果)를 낳는 상상(狀相)의 뜻이며,
또한 증상연의 상상(狀相)의 뜻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이 1문(門)과 위의 방편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전자는 인연의 힘을 취한 것이며,
후자는 사(事)를 성취한 상상(狀相)을 취한 것이다.
또 전자는 지위이고,
후자는 유지(有支)의 작위 없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니,
오직 연상(緣相)의 뜻이 있을 뿐이다.
다섯째는 1문으로써 입제관(入諦觀)을 삼은 것이니,
입(入)이란 것은 관하는 마음이며,
제(諦)라는 것은 아는 바 고(苦)와 집(集)의 제(諦)이다.
여섯째는 1문으로써 역(力)과 무력(無力)으로 믿어 들어가는 관(觀)을 삼는 것이다.
가령 무명과 행이 식(識) 등의 과(果)를 낳는 것을 이름하여 유력(有力)이라 하고,
식(識) 등이 나중의 과(果)에 감응치 않는 것을 무력이라 이름하니,
이 인과의 분제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신입관(信入觀)이라 이름한다.
일곱째는 1문으로써 증상만 등을 삼는 것이니,
성문인이 행고(行苦)를 아직 끊지 못한 것을 이른바 구경(究竟)이라 하기 때문에 증상이라 이름하고,
이미 거친 미혹을 끊은 것을 증상이 아님이라 이름하니,
이 깊은 고(苦)를 들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2문으로써 무시관(無始觀)을 삼는 것이다.
무시라 말한 것은 저 무시(無始)가 없는 것이니,
인생(因生)을 성취하기 때문에 연(緣)의 지음이 아니고,
연생(緣生)을 성취하기 때문에 인(因)의 지음이 아니다.
이 두 처소에서 무작(無作)을 구하는 것은 시(始)가 다시 2작(作)을 구하는 것이며,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시(始)이니 무시관이라 이름한다.
【문】2관(觀)으로써 무시를 삼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인연의 형상은 시(始)를 설할 수 없으니,
생박(生縛)의 관(觀)으로써 법에 종결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법에 종결이 없다면 단지 무시관이라고 설할 수 없는 것이다.
【문】박(縛)은 무엇의 종결을 말하는가?
【답】만약 박이 과(果)라면 종결이 있는 것을 박이 된다고 설할 수 없으며,
과의 1상(相)을 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결을 설한 것이다.
아홉째는 종종관(種種觀)이니,
다만 세속이 인연을 수순하는 것이 동일치 않기 때문에 종종(種種)이라 말한다.
이상의 아홉 관문은 종지(種智)의 경계이니,
무지(無智)의 장애를 다스려서 능히 법체(法體)를 관하는 것이 곧 능치(能治)가 된다.
이(理)와 관(觀)의 지혜 경계가 아니라서 또한 역순(逆順)이 있으니,
역(逆)이란 번뇌의 소멸이고 순(順)이란 법체를 얻는 것이다.
셋째,
저 과(果)의 뛰어남이란 경문을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대치멸장승(對治滅障勝)이란 앞에서 나온 승만대치가(勝慢對治家)의 과(果)이니,
앞에서 닦은 10법으로 대치를 삼는 것이다.
이 지(地)의 원만함 가운데 다시 매우 깊은 3탈(脫)로써 다스림을 삼으니,
대치승(對治勝)이라 이름한다.
앞에서는 5지(地)의 염정만(染淨慢)의 장애를 다스린 것이며,
지금 여기서는 다시 미세한 아심(我心)과 유무(有無) 등을 다스린 것이니,
멸장승(滅障勝)이라 이름한다.
이 중의 경문에도 또한 향하고 등짐이 있는데,
소식(消息)은 어김이 없다.
두 번째,
수행승(修行勝)이란 앞에서 나온 부주도행가(不住道行家)의 과(果)이다.
앞의 부주(不住)에 의거해서 다시 뛰어난 수행을 일으킨 것이니,
수행승이라 이름한다.
세 번째,
삼매승(三昧勝)이란 것은 앞의 치승(治勝)을 조망해서 과(果)를 설한 것이다.
앞에서 닦은 3탈(脫)을 대치로 삼는 것이니,
저 치(治)가 더욱 증대함을 이름하여 삼매승이라 한다.
이 중의 경문을 논(論)과 비교하면 이해할 수 있다.
네 번째,
불괴심(不壞心)이란 것은 앞의 멸장(滅障)을 조망해서 과(果)를 설한 것이다.
장애를 멸하기 때문에 삼매의 마음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
자재력(自在力)이란 것은 앞의 수행을 조망해서 과(果)를 설한 것이다.
앞의 수행에 의거해서 위로 무애(無礙)로 나아가는 것을 자재력이라 이름한다.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두 번째의 수행승 중에서 처음은 수행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 ‘보살이 이렇게 생각한다’ 이하는 수행승을 밝힌 것인데,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수행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곧 무장애를 얻는다’ 이하는 수행승을 밝힌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다.
삼매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공을 변별한 문이며,
둘째 ‘무상(無相)’ 이하는 나머지 2공(空)과 동등하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다.
나중의 2과(果) 중에서 각기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구(句)는 개별적인 것이다.
지과(地果)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3과는 앞과 같고,
조유과(調柔果)는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조유의 행상(行相)이며,
둘째 ‘월광유(月光喩)’ 이하는 교지(敎智)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이며,
넷째는 설상(說相)을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을 설함에 나아가면 모든 부처님을 많이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고,
다음은 능련(能練)의 행이며,
나중은 소련(所練)의 청정함이다.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셋째,
게송을 거듭함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게송의 뜻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39게송이 있는데,
처음 셋의 한 구는 10평등을 읊은 것이고,
다음 10과 9의 세 구는 부주도(不住道)의 행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주과(不住果)를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아홉 게송은 조유의 3과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분제를 나타내서 설함을 찬탄한 것이다.
부주(不住)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 10과 7의 한 구는 열 가지 관(觀)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 반은 매듭 짓는 경문을 읊은 것이다.
부주과의 경문 중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3탈(脫)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 반은 수행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삼매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불괴심(不壞心)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자재한 힘을 읊은 것이다.
1 가분(加分)의 세 가지 가운데 세 번째이다.
2 청문의 경문을 크게 둘로 나눈 가운데 첫 번째를 다시 사람에 따라 셋으로 나누는데 그 세 번째이다.
3 게송의 경문 가운데 의대[義] 를 밝힌 것을 말한다.
4 게송의 경문을 둘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이다.
5 행의 체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6 행의 체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7 여섯째 경문을 해석함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8 경문에 의하면 선법(善法)이 아닌 것을 여읜다는 의미이다.
9 염행의 세 가지 가운데 세 번째이다.
10 제3지 안의 여섯 문 가운데 여섯 번째 경문을 해석함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11 수행이 증장하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12 여섯째 경문을 해석함 가운데 셋이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1 신수대장경에는 ‘견행정(見行淨)’이라 되어 있다.
2 신수대장경에는 ‘전도(顚倒)’로 되어 있다.
『대정장』 35,
p.64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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