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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sfed--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_K0989_T0847.txt ☞4. 방광여래지경(方廣如來智經)
선지식이기 때문에 모든 법으로 보살을 가르쳐 인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하나니,
이로써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라도 당연히 성문과 연각의 소승(小乘) 교도(敎道)를 배우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파계한 사람과 삿된 행을 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보살의 선지식이기 때문이다.
저 성문과 연각은 불도를 장애하기 때문에 선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율을 범한 사람은 보살의 바른 수행[正行] 을 깨뜨리지 못하나니,
이 계율을 범하고 삿된 행을 하는 사람은 법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불도를 장애할 능력이 없다.
만약 성문과 연각이 세속적 진리[世諦] 로써 내가 없게 되고 또한 번뇌가 없게 된다면,
이러한 지혜 때문에 처음 배우는 보살로 하여금 성문의 가르침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성문은 보살의 선지식이 아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차라리 계율을 깨뜨리고 삿된 행을 행하는 이와 사귀는 한이 있을지언정,
반드시 성문승과 연각승(緣覺乘)의 사람에게는 법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율을 범하고 삿된 행을 행하는 이와는 비록 사귄다고 해도 몸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성문의 사람들은 가고 앉음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집안의 도둑이 그 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당연히 성문과 함께 익히고 배우고 사귀고 내왕하지 않아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야간(野干:여우)은 사자와 같이 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성문과 보살과의 관계도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성문은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닦아 배우기 때문이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불도만을 전념하여 구해서 중생들을 제도하지만,
성문은 오직 제 한 몸만 나아갈 길을 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바른 길을 잘 행하여 중생들을 인도하지만,
성문은 오직 자기의 마음만을 청정히 할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능히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고 또한 중생들의 마음도 청정하게 하지만,
성문은 오직 자기의 번뇌만 제거할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자기의 번뇌를 제거하고 또한 중생들의 번뇌도 제거하여 없애지만,
성문은 삿되게 빠른 길에 들어가 혼자만 세간을 피할 뿐이기 때문이다.
보살이라면 스스로 바른 길에 들어가 중생들을 인도하지만,
성문은 오직 습기와 번뇌만을 제거할 뿐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습기를 모두 없애고 번뇌도 다 제거하지만,
성문과 외도들은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보살은 스스로 바른 도와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증득하지만,
성문은 적멸(寂滅) 열반(涅槃)에 들어가 그 법마저도 또한 없애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등정각을 이루고 이미 무여열반에 들어가면 법은 없어지지 않고,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18불공법(不共法)과 4성제(聖諦)와 32상(相)과 80종호(種好)도 한량없이 많아서 불사(佛事)와 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성문과 벽지불은 모두 이러한 덕목이 없느니라.”
5.
승의제품경(勝義諦品經)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수행하는 보살이 열 가지 행원(行願)을 일으키면 빨리 불도(佛道)를 성취하며,
수행하는 보살이 열 가지 계행(戒行)으로 6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을 해설하였다.
이때 보현(普賢)보살이 보지(普智)보살에게 말했다.
“불자여,
수행하는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기 위한 까닭에 응당 열 가지 행원(行願)을 일으켜야 합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이요,
둘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 번뇌를 멀리 여의게 하려는 서원이며,
셋째는 상속(相續)되는 습기를 제거하여 없애 주려는 서원이요,
넷째는 일체의 불법에 대하여 의혹이 없게 하려는 서원이며,
다섯째는 중생들의 일체 괴로움 덩어리를 제거하고 구원해 주려는 서원이다.
여섯째는 중생들을 3도(途)13)와 여덟 가지 재난[八難] 14)에서 구제해 주려는 서원이요,
일곱째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고 친히 모시겠다는 서원이며,
여덟째는 보살의 일체 계행을 배우겠다고 하는 서원이요,
아홉째는 공중에 올라가서 털끝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사(佛事)를 나타내어 보이겠다고 하는 서원이며,
열째는 큰 법의 북을 크게 쳐서 모든 부처님 국토의 중생들이 듣는다면,
근기를 따라 속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겠다는 서원이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처음 배우는 보살들은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만약 이러한 지위에 머물면 오래지 않아서 여래의 행원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불자야,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다시 열 가지 계행이 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구경에는 보리(菩提)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그 계행이요,
둘째는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의 지위를 멀리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항상 일체 중생들의 몸과 마음을 이롭게 하는 것이요,
넷째는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행에 머물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의 계율을 받아 행하되 중생들로 하여금 조금도 범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체 모든 법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요,
일곱째는 닦은 바의 공덕을 시방에 회향하고 보시하여 불도(佛道)를 이루게 되기를 서원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여래의 법체(法體)를 마땅히 분별하지 아니함이요,
아홉째는 일체 세간의 법에 탐욕과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열째는 6근(根)을 방어하고 보호하여 물들거나 집착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불자야,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 가지 계행이니,
만약 보살이 능히 이 지위에 머문다면 오래지 않아 계행과 6바라밀을 원만하게 하여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리라.
또한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도에서 물러나 길을 헤매는 열 가지가 있으니,
항상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 반드시 멀리 여의어야 한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자기의 스승[師僧] 과 화상(和尙)15)과 선지식(善知識)16)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둘째는 세간의 괴로움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셋째는 닦는 바의 계행에서 홀연히 후회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넷째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머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다섯째는 삼마발저(三摩鉢低)17)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여섯째는 조그마한 공덕을 닦고 문득 만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일곱째는 대승(大乘)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여덟째 보살의 계행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아홉째는 아라한도(阿羅漢道)와 벽지불도(辟支佛道)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열째는 또 수행하는 보살을 보고 증오하거나 질투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불자야,
이와 같은 열 가지가 보살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니,
이런 것들을 멀리 여읠 능력만 있다면 오래지 않아 틀림없이 해탈의 법문(法門)에 들어가리라.
또한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열 가지 행원(行願)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나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미래의 겁(劫:아주 오랜 시간)이 다하도록 세간에 머물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둘째는 나는 최후까지 일체 모든 부처님께 친히 공양 올리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셋째는 나는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보현보살의 행원에 머물게 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넷째는 나는 일체 계행의 공덕을 쌓고 모으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다섯째는 나는 널리 6바라밀 닦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여섯째는 나는 보리의 계행에 만족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일곱째는 일체 부처님 세계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여덟째는 나는 시방의 부처님 세계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아홉째는 나는 일체 부처님의 법을 깊이 구하여 스스로 잘 알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열째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서 등정각(等正覺 )18)을 성취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불자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수행하는 보살의 열 가지 큰 행원이라고 하나니,
원력(願力)의 힘 때문에 속히 보살이 되고 행원을 구족하느니라.
또한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다시 열 가지 마장(魔障:악마의 장애)이 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홀연히 물러나는 마음을 내어 ‘나는 부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둘째는 부지런히 수행함을 올바르게 일으켰다가 홀연히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셋째는 조그마한 공덕으로 싫어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넷째는 세상에서 은둔하여 후미진 데 머물기를 좋아하고 선행(善行)을 함께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다섯째는 일체 좋은 행원을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다.
여섯째는 번뇌를 끊어버리고 멸정(滅定)19) 닦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일곱째는 세간법(世間法)을 끊어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여덟째는 보살의 도행(道行)을 버리고 물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아홉째는 중생들에게 권유하여 교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열째는 부처님의 법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번째의 마장이다.
불자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 가지 마장(魔障)이니,
만약 보살이 이런 마장을 멀리 여의면,
오래지 않아 속히 여래의 열 가지 기별(記別)20)의 지위를 얻을 것이다.”
6.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실천해야 할 네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처음에는 단바라밀(檀波羅蜜:보시바라밀)을 배워서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
산란함이 없어지고 나서도 보리의 마음이 산란한 까닭에 6바라밀의 행으로 생각을 다잡는다.
번뇌의 인연에 대하여 해설했으며,
보살은 처음 낸 보리의 마음으로 6바라밀의 행을 유지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때에 성자(聖者)21) 사리불(舍利弗)22)이 성자 부루나(富婁那)에게 말하였다.
“또한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응당 맨 먼저 단바라밀(檀波羅密)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탐하고 아끼는 세상의 업(業)은 시작이 없는 오랜 옛날부터 익혀 온 기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이것을 버릴 때엔 아끼는 마음도 곧 버리게 되며,
그 인연으로 보리심을 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보리심이 발하면 곧 점점 자라고 커져서 성취하게 될 것이요,
점점 자라고 커져서 성취하면 곧 2승(乘)을 점점 멀리 여의게 됩니다.
만약 2승을 점점 멀리 여의면 곧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나아가게 됩니다.
비유하면 마치 비가 올 때 비가 내리는 곳에 병을 놓아두면 이 병에 제일 먼저 들어간 빗방울과 제일 나중에 들어간 빗방울,
그 두 방울만이 인연이 되어 병이 가득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들어간 빗방울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점점 들어가서 병이 가득 차는 것과 같습니다.
부루나여,
보살의 수행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반드시 처음 보리심을 낸 까닭만으로 불도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최후에 보리수 아래에서만 불도를 성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낸 것과 나아가 최후와 그 중간에서 보살이 점점 불도를 증득하고,
여러 가지 선행(善行)을 일으켜 3아승기(阿僧祇)23) 동안 수행하여 부처님의 도를 이익이 되게 돕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인자(仁者)24)이신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산란한 마음에 물드는 일이 없어야만 합니다.”
이때에 성자 부루나가 성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어떻게 마음을 거두어야 산란함이 없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보살은 부처님의 도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삿된 행과 나쁜 견해를 내어도 장차 좋은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지금 저지른 나쁜 행도 반드시 보리에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삿된 견해를 위하여 세간의 생사를 끊지 않나니,
이 때문에 내 몸은 세간에서 바꾸고 변하여 방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수행하는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로 마음에 산란함이 없습니다.”
그때에 부루나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만약 보살의 보리심이 산란하면 어떤 모양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이 마음이 산란한 것은 성문승과 연각승의 사람들이 그 도를 장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2승(乘:성문승ㆍ연각승)의 도과(道果:불도의 과위)를 구하면 곧 이것이 산란한 마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2승의 도행(道行)은 보리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견해도 오히려 산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3독(毒)25)의 견해가 불도를 돕기 때문에 나고 죽음을 바꾸어가면서 보리를 이익되게 하나니,
이러한 견해 때문에 세간에 태어나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6바라밀을 원만하게 합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번뇌를 돕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부루나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을 섭념(攝念)하는 까닭에 선(善)을 장애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곧 산란함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또 성문과 벽지불의 섭념에 상응하면 보살도 또한 산란해집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섭념하지 못하고 나고 죽음을 끊지 못한다면 도를 돕는 까닭에 산란한 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다잡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세간에 있으면서도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생각을 거두어 계속 이어가면서 세간에 태어남을 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태어나고 나면 곧 단바라밀(檀波羅蜜)ㆍ지계(持戒)바라밀ㆍ인욕(忍辱)바라밀ㆍ정진(精進)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지혜(智慧)바라밀을 받아 이와 같이 닦고 배우는데,
이와 같이 생각을 거두는 것이 세간의 나고 죽음의 길을 돕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주고 배우며,
나아가 부처님이 될 때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번뇌를 싫어하거나 여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번뇌를 알고 분별하여 ‘이들 번뇌는 나의 몸을 이롭게 하고 내가 부처를 성취하는 것을 돕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번뇌에 모양이 있다면 최상의 미묘한 공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번뇌를 위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보살은 항상 번뇌를 보호하고 아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지혜로써 번뇌의 원인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쓰기 때문에 삼계의 얽매임에 간섭 받지 않고 나로 하여금 6바라밀을 증장시켜 원만하게 하여 빨리 보리를 얻기 때문입니다.
만약 6바라밀이 점점 증장하면 나는 곧 세간의 나고 죽고 하는 얽매임에서 해탈하여 관만(寬慢)을 얻습니다.
부루나여,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비유하면 수레에 무거운 물건을 실은 것과 같으니,
수레가 무거우면 그 때문에 수레의 굴대가 점점 닳아서 수레에 실은 물건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면 그 굴대는 할 일을 다 끝내고 곧 끊어집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번뇌를 인연하는 까닭에 삼계에는 생사가 있나니,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번뇌 때문에 계속 세간에 태어나지만 6바라밀이 곧 증장하고 원만함을 얻습니다.
만약 6바라밀이 점점 원만함을 얻으면,
곧 나고 죽음의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됩니다.
만약 나고 죽음의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되면,
곧 결정적으로 부처님의 지위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리수 아래에 앉고 나면 곧 살바야(薩婆若)26)의 지혜가 일어나고 앞뒤의 번뇌는 장차 끊어져 없어지고 다시는 이러한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보살이 이미 정각을 성취하고 나면 번뇌는 다시 인연할 것이 없나니,
비유하면 수레의 굴대가 무거운 짐을 싣고 성에 들어가서 일이 끝나고 나면 비로소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하는 보살이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고 나면 또한 이와 같아서 번뇌가 일을 분별하는 것을 다시는 인연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이익을 위하기 때문에 중간에 번뇌를 끊지 않습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비록 성냄이나 꾸지람을 당해도 도리어 빌어 구하는 것을 좇아서 모두 도를 돕는 좋은 인연으로 삼나니,
보리심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한(羅漢)의 마음을 거둔다면 그 지혜도 또한 이러하나니,
수행하는 보살은 불도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한의 행문(行門)이 없었다면 여래는 무엇을 따라 그 법을 만들어서 나한의 도과(道果)를 닦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법을 만들어 닦게 하는 까닭에 불도(佛道)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세존께서 마하반야(摩訶般若)에서 가타(伽他:게송)로 말씀하셨으니,
비유하면 세간에서 나무에 싹이 없으면 나무의 몸통이 없으며,
또한 나무의 몸통이 없으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무엇을 근거하여 무성해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중생들에게 만약 보리의 씨앗이 없으면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셨다면 성문은 무엇으로부터 생겼겠습니까?
비유하면 등을 밝히는 데는 심지의 힘을 필요로 하지만,
이 심지는 맨 처음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서만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맨 마지막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 다 타는 것도 아니고,
맨 마지막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 다 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에 앞과 뒤와 중간의 불꽃들이 서로 이어져서 심지가 다 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보리도 또한 그러하여 처음 발심만을 인연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도 아니며,
또한 최후의 발심만을 인연한 것도 아닙니다.
앞과 뒤와 중간의 마음이 서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까닭에 부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찰나(刹那刹那:아주 짧은 시간)가 보리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불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시(布施)27)하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수자상(受者相)28)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마음에 구하는 바도 없고 탐하고 아끼는 생각도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보시하면 비록 조금만 보시하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시를 하는 것과 같나니,
곧 수행하는 보살이 단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하는 보살이 언제나 여래의 원만한 위신력(威神力)을 생각하고 거룩한 덕을 드러내어 드날리면,
곧 이것이 보살의 매우 깊은 계행(戒行)입니다.
만약 보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상(戒相)29)이 점점 이지러지면 곧 계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또 수행하는 보살이 세간의 법을 수순하는 까닭에 비록 오욕(五欲)30)을 받지만 마음으로는 3귀의(歸依)31)를 생각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나는 정각을 성취하고 중생을 구원하기를 서원합니다’라고 하면,
이것이 곧 이미 지계바라밀행에 머문 것입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로써 마음으로 계를 범하지도 않고 계를 범했다고 이름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억 겁 동안 비록 열 가지 좋은 계행을 지녔다고 해도 만약 성문(聲聞)의 아라한과(阿羅漢果)만 좋아한다면,
이것은 곧 남을 얕보며 계를 범하고 대승(大乘)을 망가뜨리는 것이니,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지계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수행하는 보살이 넓고 큰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들이 감옥에 갇혔거나 목에 칼을 차고 있거나 발에 칼을 채운 채 있거나 손과 발에 고랑을 차고 있거나 형틀에 묶였거나 용수를 썼거나 채찍질을 당하거나 목이 잘리거나 손과 발과 코와 귀를 잘리거나 몸이 분리되는 것을 보면,
그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저들을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받아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다 안락함을 얻게 하겠노라.
만약 나를 고달프게 하면 아무리 참기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잘 참으며 마음으로 나쁘게 대함이 없으리라’라고 하나니,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이 행하는 이런 것이 바로 자비로운 인욕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aude-Monet-not_detected_212144
Artist: Claude-Monet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 Title : not_detected_212144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mezing_flower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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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fighting-temeraire-tugged-to-her-last-berth-to-be-broken-up-1839
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J.M.W. Turner File Source: en.wikipedia.org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산을 올라갈 때 쉽게 마음이 지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올라가야 할 목표점만 마음에 넣고 마음을 재촉하면 가도 가도 목표지점이 안 보이기에 지치게 되기 쉽다.
그런데 방향은 목표지점을 향하지만, 주변 풍광도 바라보고 사진도 찍어보고 그러면서 가다보면 마음도 지치지 않고 또 그렇게 가다보면 어느 순간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조금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매일 50 경전씩 살펴보자는 기획하에 경전을 살피는데 그간 꽤 열심히 살폈으니 혼자 생각에는 지금쯤은 한 2/3 정도 살피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오늘 일일히 숫자로 확인해보니 형식적으로는 겨우 1/2 정도 실질적으로는 1/4 정도를 살핀 것으로 나타난다. 조금 마음이 지친다.
형식적이라는 것은 거의 내용을 살피지 않고 대강 살핀 것을 의미하고 실질적이라는 것은 그래도 조금 내용을 살핀 경우를 의미한다. 경전을 살피는데 왜 이런 구분이 필요한가 하겠지만, 예를 들어 다라니가 대부분인 경전인 경우 내용을 살펴도 내용을 외우지도 못하고 그 다라니에 들어 있는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바삐 넘어가게 되기에 이런 구분이 있게 된다.
오늘은 경전을 살피면서 6 재일와 관련된 내용을 새삼 살피면서 이를 생활 속에 넣어 실천해가기로 했다. 상식적으로 6 재일이 무언가는 알지만, 양력 생활이 일반적인 입장에서 음력을 기준으로 8 일 14일 15일 23 일 29 일 30 일 이렇게 6 일에는 재가신자라도 최소한 8 계를 출가수행자를 기준으로 지키는 수행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음력을 기준으로 매번 날짜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동원해서 6재일에 각기 6 바라밀의 명칭을 붙여서 앞으로 실천 수행에 옮기기로 했다. 8 월은 29 일 30 일이 5 번째 6번째 6재일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날을 정려 반야 6 재일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이번 주간은 정려 반야 수행에 좀더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전문 수행자를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이 6 일만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꾸준히 해야 하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런 날을 챙기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또 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는다. ...
믿음ㆍ계율ㆍ보시ㆍ지식ㆍ지혜ㆍ부끄러움ㆍ수치심[信戒慚愧聞施慧]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은 성스런 재산이라 하나니
석가모니께서는 진실로
세간에 이를 초월하는 귀중한 보물은 없다고 말씀하셨네.
대왕께서 만약 이 훌륭한 재산을 모으면
오래지 않아 도량의 과보를 증득하네.
...
용수보살위선타가왕설법요게(龍樹菩薩爲禪陁迦王說法要偈)
송 구나발마역
宋 求那跋摩譯
K1043
T1672
이런 내용을 대할 때는 다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왜 재산이 되고 다른 것은 왜 재산이 되지 않는가.
그것은 시공간 여행 과정상의 특수성과 관련이 된다고 본다.
눈을 뜨고 감는 그 찰나 사이에도 눈으로 본 내용은 옮겨 이동시키거나 보관유지할 수 없다. 더욱이 잠을 자고 일어나는 사이나, 의식을 잃고 깨는 사이나 더 나아가 화장터를 들어가고 나오는 사이에서는 더욱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인 자신은 여전히 계속 유지되고 사라지지 않기에 결국 이런 특성을 갖는 것 가운데 가치가 높은 것을 찾으면 위와 같은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계율이나 부끄러움 수치심이라고 제시된 항목은 무량겁에 걸친 시행착오를 그 한 번으로 줄이는 효과를 갖기에 재산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그런 재산이 없으면 그것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항목이 한번도 없으면 더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한번의 과오가 이후 무량겁에 걸쳐 과오를 반복하는 것을 제거해주는 효과를 갖기에 이것이 재산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른바 투자에서 말하는 손절매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만 놓고 보면 손해는 손해인데 그러나 그 손해가 이후 발생할 더 큰 손해를 없애주고 줄여준다면 그것도 훌륭한 재산의 의미가 있다.
신(믿음)은 일일히 그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수확을 거두는 수행에 바로 진입해서 열매를 얻게 해주는 기능을 갖기에 첫째 가는 재산이 된다. 만일 자신이 그 내용을 일일히 다 이해하고 각 선택마다 나타나는 결과를 다 경험하고 나서야 어떤 수행 실천을 하겠다고 임하면 결국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이 믿음으로 인해서 대폭 줄게 되기 때문이다.
남에게 좋은 것을 베푸는 보시가 왜 재산이 되는가. 그것도 사정이 비슷하다. 짧게 보면 보시란 일단 좋은 것이 자신을 떠나 다른 이에게 옮겨 가는 것이어서 당장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고 손해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넓게 보면 어떤 좋은 것을 자신이 집착해서 지니고 있으면 이것이 자신에게 번뇌를 가져다 주고 자신이 들여야 하는 관리나 유지 노력이 상당히 필요하게 된다. 이것을 아낌없이 베풀면 우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한편 그런 좋은 것을 통해 최종적으로 얻고자 한 평안함과 즐거움을 바로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좋은 것을 지녀 필요할 때 사용하고자 한 원래의 취지는 자신이 그런 필요가 있게 될 때는 곧바로 성취할 수 있게도 된다. 그것이 베품이 갖는 인과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고보면 보시란 수행의 제 1 덕목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자신이 우선 업의 장애가 해소되고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될 뿐 아니라 이후 복덕자량을 쌓고 지혜자량을 얻는 바탕이 마련되고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을 성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세상에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데 나 하나 수행한다고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결국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런 가르침은 바로 그런 하나의 내용에 바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