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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4-11_존바수밀보살소집론_001 본문
『존바수밀보살소집론』
K0963
T1549
존바수밀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존바수밀보살소집론_K0963_T1549 핵심요약
♣0963-001♧
『존바수밀보살소집론』
존바수밀
용어
‡바수밀 <=바수밀다,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존바수밀보살소집론
■ 존바수밀보살소집론 서문
■ 바수밀(婆須蜜) 보살대사(菩薩大士)는
다음에 미륵(彌勒)의 뒤를 이어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이름은 사자여래(師子如來)이시다.
■ 석가문(釋迦文)을 따라 내려와
비제국(鞞提國)에 태어나서
대바라문(大婆羅門) 범마유(梵摩渝)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의 이름은 울다라(欝多羅)였다.
아버지가 명(命)하여
부처님을 뵙도록 하자
찾아가 네 달 동안 모시면서
부처님의 상표(相表)와 위변(威變)과 용지(容止)를 자세히 보고 돌아와서
뵈었던 바를 말하였다.
아버지가 부처님 곁에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자마자
출가하여 배우면서 이름을 바수밀이라고 고쳤다.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하신 뒤에는
주투국(周妬國) 반내원(槃奈園)에 유행(遊行)하면서 교화하였고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었으며,
분일(奔逸)하면서 번뇌를 끊고 이 경(經)을 찬집(饌集)하였다.
따로 7품(品)을 1건도(揵度)로 삼아,
모두 12건도로 찬집하였으며,
마지막 4품의 1건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게송을 훈석(訓釋)한 것이다.
무릇 11품 14건도이다.
갖추어 펼친 것이 깊고도 넓어서
아비담(阿毘曇)과 함께 외국에서도 흥(興)하였으며,
곁들어 대승(大乘)까지도 통하였다.
밝음[明]을 지니고 번뇌[漏]를 다했으며,
열 가지 법[十法]을 널리 섭렵하고 백 가지 행[百行]의 능히 할 일을 마쳤다.
그것을 찾고자 하면 넓고도 먼 것이 마치 창해(滄海)가 끝이 없는 것과 같았으니
어찌 넓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를 사귀려고 똑바로 보면 마치 곤악(崑岳)에 산마루가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높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배 섬에서 한껏 보면서도 밤에 비추는 보석을 싫어하고
바위 굴에서 눈썹을 치켜들면서도 천하의 지혜로운 옥을 싫어하게 되니,
아름답고 부유함이 어찌 이 경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외국의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이들도
미처 땅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 바수밀보살께서는 이 경을 찬집한 뒤에
3매정(昧定)에 들어 손가락을 튕기는 잠깐 사이에
정신이 도술천(兜術天)에 올라가니,
미투로(彌妬路)와
미투로도리(彌妬路刀利)
그리고 승가라찰(乘伽羅刹)도
그 천궁(天宮)으로 찾아갔다.
■ 이 두세 군자(君子)들은
모두가 다음의 보처(補處)가 되실 분들이니,
미투로도리는 광염여래(光炎如來)이시고
승가라찰은 유인불(柔仁佛)이시다.
여기에 네 분 대사[四大士]들은
한 집[一堂]에 모여 중생을 대할 적마다
권지(權智)를 널리 선양하면서도
현성(賢聖)들은 말없이 묵묵히 계시고
양양(洋洋)하여 가득할 따름이었으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
■ 계빈국(罽賓國) 사문 승가발징(僧伽跋澄)이
진(秦)나라 건원(建元) 20년(서기 384)에
이 경 한 부를 가지고 장안(長安)으로 왔다.
무위태수(武衛太守) 조정(趙政)은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는 선비였으므로
이 경을 구하여 출간하게 된 것이다.
불념(佛念)은 전(傳)을 번역하였고,
발징(跋澄)과 난타(難陀)와 제바(禘婆) 세 사람은 호문(胡文)을 맡았으며,
혜숭(慧嵩)은 필수(筆受)하였다.
3월 5일에 시작하여
7월 13일이 되어서야 끝마쳤으니,
호본(胡本)은 12천 수로(首盧)였다.
나와 법화(法和)가 서로 교정하면서 수식하였고
무위(武衛)는 다소 윤색(潤色)하였다.
이 경은 3승(乘)을 설하여 9품(品)이 되었고,
잘 지니고 수행하여 정관(正觀)으로 다스렸으니
열여섯 가지를 가장 잘 갖추었다.
그리고 늘 윗 사람의 운치를 찾으면서도
의미를 잊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여러 길 되는 문을 엿보다가 너무 늦어
그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부(富)를 다 알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 존바수밀보살소집론(尊婆須蜜菩薩所集論)
존바수밀(尊婆須蜜) 지음
승가발징(僧伽跋澄) 등 한역
변각성 번역
■ 1. 취건도(聚揵度) ①
10력(力)께서 자비로 세상에★★ 나타나
온갖 법을 밝게 깨달아 아셨네.
나는 지금에 그러하신 부처님과
진리와 거룩한 대중에게 예배합니다.
가장 수승한 좋은 법의 구절을
여러 성현들이 잘 들으시고서
구담(瞿曇) 대중들은
여러 중생들을 잘 도와주시네
【문】★★ 어떤 것을 색상(色相)이라고 하며,
그 색상은 어떤 것인가?
【답】온갖 법을 그대로 잘 깨달아 아는 것이다.
【문】★★어떤 것을 온갖 법을 잘 깨달아 안다고 하는가?
【답】유계(有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문】★★ 보다 수승한 것이 있게 되는가?
【답】그에게는 하나의 생각[一想]이 있다.
■ 【문】그 하나의 생각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하나의 생각 중에는 애욕의 모든 때[垢]에 집착되어
온갖 경계에 묶인 바가 되었으나 끝내 묶이지 않나니,
때문에 온갖 결박이 곧 약해지게 된다.
■ 【문】그 온갖 결박[結] 중에서도 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장차 감로(甘露)법에 이르게 되는 그것이 있다.
■ 【문】그 중에 서로 감로법에 이르게 되는 그것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의생신(依生身)과 의생의(依生意)에서는 온갖 괴로움을 받는 그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몸과 뜻[意]과 온갖 괴로움이 이미 지난 과거가 된다.
【문】만일 그 중에 색상이 없다고 하자 설령 색상이 없다면
물질[色]★★역시 그 모양[相]★★이 없는가?
【답】만일 색상이 없으면 또한 저 물질도 없으며,
색상에도 또한 그 모양이 없고 또한 색상이 더럽힐 것도 없다.
【문】그대에게 색상에 물질이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나에게도 색상이 없고 또한 그 모양이 없는가?
또한 색상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차츰차츰 색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문】하나의 물질 중에서 혹 일어나기도 하고 혹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어떤 이가 “만일 물질이 어느 때에 차츰 쌓인다면 거기에는 색상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차츰차츰 색상을 분별하는 것도 역시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색상을 모조리 통괄했다”고 말했다.
【문】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가장 다르다는 말씀은 없고 곧 무형[無色]이 있다고 말했다.
【답】★★어떤 이는 “색상을 껴잡아 매어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또 “온갖 덮임[蓋]과 색상까지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망가지고 없어진 색상이라고 한 그것도 역시 과거와 미래에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색상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볼 수도 있고 상대도 있는 것[可見有對]과
볼 수 없고 상대만 있는 것[不可見有對]과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不可見無對]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모든 물질이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다면 그것을 가지고 색상이 없도록 한 것인가?
【답】★★어떤 이는 “색상이 가고 오고 하는 그것을 색상이라 한다”고 말했다.
【문】과거와 미래에 대한 내용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가?
【답】★★어떤 이는 “색상이 물질이 된다”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4대(大)로 말미암아 물질이 되었다”고 말했다.
세존께서도 역시 “4대로 된 것이니,
저 네 요소로 말미암아 색음(色陰)이 생기고 수음(受陰)이 왕성해진다”고 말씀하셨다.
【답】★★그 요점을 들어 말한다면 거기에서는 온갖 물질을 상대로 한 저 온갖 것은 네 요소이고,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답】그것은 요점을 들어 말한 것이 못 된다.
또 말하기를 “인연이 변경됨으로써 온갖 고통스러운 음(陰)이 생긴다”고 했다.
어떤 이는 “그대는 어떠한 색상을 묻는가?
만일 푸른 것이라고 하면 푸른 그것이 색상이 되고,
누런 것이라고 하면 곧 누런 그것이 색상이 된다”고 말했다.
【문】나는 온갖 색상을 묻는다.
만일 저것이 색상이라면 그 모양보다 더 수승한 것은 없는가?
【답】빛깔에는 동일한 하나의 모양만이 아니니 그 중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설령 모양과 모양이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 내용만은 곧 그러하지 않으니,
마치 땅은 굳은 모양이 되나 지금에 땅이 다르고 굳음도 다른 것과 같다.
【문】온갖 물질이 동일한 모양인 것은 마치 무상(無常)한 것과 같다.
제 모양[自相]이 모양 없음을 물을 적에는 땅이 제 모양이 되나니 그러므로 그러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제가 제 모양이 없음’을 물을 적에는 저는 온갖 모양을 묻는다.
어떤 이가 “상대가 있는 물질[有對色] 모양은 바로 빛깔이니 색상이 되며,
상대가 있는 모양[有對相] 그것은 마치 화살이나 회초리를 잡는 것과 같나니 그것은 빛깔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곡식의 종자를 땅에 심어두고 수시로 적당한 수분을 공급하면
거기에는 곧 및깔이 생겨나게 되는 것과 같나니
무엇을 색상이 아니라 말하는가?
【답】위에서 말한 내용과 정반대이다.
담마다라(曇摩多羅)존자는
“온갖 물건으로서 상대가 없는 것은 빛깔이 아니니 그것을 색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상대가 없는 물건은 그것 또한 나지 않나니 그를 상대가 없다[無對]고 말한다.
마치 상대 없는 것은 그 상대의 자취인 것과 같아서 그는 곧 상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색상이 아니다.
4대(大)로 만들어진 물질에는 어떠한 다름이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다름이 없나니 온갖 네 요소가 바로 만들어진 물질이다”라고 말했다.
【문】세존께서 “온갖 빛깔이 있는 저 온갖 것들은 곧 네 요소이니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경에 어김[違]이 있다.
【답】만들어진 소리가 다시 딴 감관[根]에서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를테면 여섯 갱락(更樂)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를 탐내고 있으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참는 수행이 그에서 생긴다.
그 낙이 생긴 이후로부터 그 중간에 이르기까지
여섯 갱락 밖에 다시 일곱 갱락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만든 자도 없다.
【문】만일 소리를 만든 것이 없다면 또한 애욕과 형색을 변경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내 물질인가?
또한 나에게 있는 것인가?
【답】★★어떤 이는 “굳음ㆍ축축함ㆍ따뜻함ㆍ움직임 그것이 곧 네 요소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땅의 빛깔은 빛깔로부터 만들어진 물질이 아닌 것과 같다.
【문】네 요소가 이리저리 그 우열이 있고 물질은 언제나 만들어지지 않는데
그것들을 만들어짐이 있는 물질이라 보려고 하는가?
【답】비록 저 네 요소가 이리저리 그 우열로 네 요소의 모양이 있게 되었으나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은 네 요소의 모양이 되지 않나니,
그는 거기에서 일어난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온갖 인연은 저 네 요소와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이다”라고 했다.
【문】네 요소가 또한 네 요소를 인연하는데 그것에서 일어난 물질인가?
【답】그것들이 비록 네 요소를 인연하기는 하나 약간의 인연하는 바가 있고 네 요소가 곧 색상을 일으킨 것이다.
【문】물질이 색상에 인연하여 그 물질이 더욱 물질을 내는 것인가?
★★물질이 더욱 물질을 내고 다시 네 요소를 인연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아는가?
【답】★★어떤 이는 “유루(有漏)의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은
또한 유루이기도 하고 또한 무루(無漏)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문】온갖 유루의 것에서 만들어진 물질은 저 네 요소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온갖 무루의 것에서 일어난 물질은 어떤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인가?
【답】★★어떤 이는 “무기(無記)인 네 요소에서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만들어진 물질이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라고 하는데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어떤 이는 “저 네 요소에 의하여 일어나게 된 물질이다”라고 말했다.
【문】마음과 마음이 생각하는 법도 역시 네 요소에 의해서 그것들이 물질을 일어나게끔 하는 것인가?
【답】네 요소에 의한 것은 모든 감관[根]인데
모든 감관 역시 마음과 마음이 생각하는 법에 의하나니
그러므로 그것들이 네 요소에 의하지 않는다.
【문】이름과 물질[名色]이란,
이러나 저러나 서로 의지하지 않는가?
【답】★★어떤 이는 “증가하는 네 요소이기에 네 요소가 증가하여 물질을 일으킨다”고 했다.
【문】그것은 약해서 줄어듦과 증가함을 말하는가?
그것은 증가하고 나지 않음을 말하는가?
【답】★★마치 온갖 법이 이리저리 증가하여 서로 생기는 것과 같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그것들은 나지 않는다.
승가다라(僧伽多羅)존자가 “네 요소인 큰 사실이 일어나는 인연에서 물질이 생긴다고 말하였다.
【문】네 요소가 각각 서로 떠나지 않으며 또한 큰 사실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만일 떠나지 않게 된다면 혹 네 요소는 물질이 아닐 것이니,
바람이 허공에서 떠돌아 다님과 같고 물질에 냄새와 맛이 없는 것과 같다.
네 요소는 물질이 아니면서도 물질에 들어가 만드는 작용을 한다.
바수밀(婆須蜜)존자가 “갱락(更樂)은 역시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이니,
땅의 빛깔ㆍ땅의 냄새ㆍ땅의 맛과 같다”고 말했다.
존자 담마다라존자는 “마치 미묘한 물질을 네 요소가 해산시킬 수 있고
그 밖의 물질까지도 그러하나니
그것을 물질을 일으킴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어떠한 내용에서 신식(身識)이 받아들이매 가늘고 윤활하게 받아들이데
혹 네 요소이기도 하고 네 요소가 아니기도 하는가?
【답】★★어떤 이는 “저것은 인연이 없으니,
빛깔을 분명하게 인식함에 혹은 푸른 것,
혹은 푸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함과 같나니,
그를 신식이 받아들일 때에 가늘고 윤활하게 받아들이는데
혹 네 요소이기도 하고 혹 네 요소가 아니기도 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사대의 모양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온갖 가늘고 윤활한 것으로만 된 것이 아니니,
네 요소의 모양이 동일하지 않고 축축함과 딴딴한 모양도 또한 같지 않으며,
굵고, 가늘고,
가볍고, 무겁고,
차갑고, 굶주리고,
목마름 따위가 같지 않다.
저 가늘고 윤활한 것이 굵은 땅에서 생긴 것인데,
가벼운 것은 불과 바람으로 만들어졌고,
무거운 것은 땅에서 생긴 것이며,
차가운 것은 물에서 만들어졌고,
굶주림과 목마름은 불과 바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땅의 견고한 것보다 더한 것은 있지 않나니
가늘고 윤활하고 굵은 것은 바로 땅의 처소이니,
이것을 증가함이 있다고 말한다.
땅의 평탄하고 바른 것과 같기 때문에 가늘고 윤활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며,
땅의 평탄치 못한 것과 같으면 굳고 굵은 것이라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굵음과 가늘고 윤활한 것이 없다.
설령 굵고 가늘고 윤활한 것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온갖 것이 항상하면 될 수 있는 사실이나
푸른 빛깔을 언제나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그가 성립되지 못한다.
저것에 혹 가벼울 원인이 있다가도 저것이 다시 무거워질 수 있나니,
그러므로 가벼움과 무거움도 성취될 수 없다.
만일 차가워졌다면 어떻게 푸른 연꽃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저 사대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니,
그러므로 차가움도 성취될 수 없다.
만일 불이 성하면 굶주리고 바람은 목마름의 근본이 된다.
어떤 이는 “온갖 신식(身識)이 가늘고 윤활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사대라고 말해야 하나니,
사대를 떠나지 않고 신식이 있기 때문이다.
사대가 더욱 증가함을 제각기 말한다”고 말한다.
【문】★★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
【답】★★어떤 이는 “무지(無智)가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어찌하여 무지를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는가?
【답】★★만일 그것이 지혜가 아니라면 저것은 곧 무명이다.
풀과 나무와 장벽(牆壁)은 모두가 지혜롭지 못하니 그것들을 무명이라고 해야 하는가?
【답】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은 법과 서로 상응한다.
【문】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은 많고 마음 법[心法]의 모양은 무지인데,
어찌하여 미사색(彌沙塞)1)에서는 “아직 무명(無明)을 깨닫지 못하여 무명을 수행하니,
저 밝음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을 무명이라고 이른다.
마치 소금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을 소금이 없다고 말함과 같다”고 했는가?
【문】만일 저 밝음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이 밝음을 일으키면 곧 무명이 있는 것이
마치 저 그릇에 소금이 없으면 저 그릇에는 소금이 없다고 말함과 같다.
만일 밝음이 있지 않으면 저 무명은 공연히 무명만 있을 뿐이다.
만일 밝은 물건이 곧 무명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행(行)의 인연이 있는가?
어떤 이는 “5개(蓋)가 곧 무명이다”고 말했으며,
세존께서도 역시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명에 덮인 바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문】결(結)은 중요한 자리가 없는가?
【답】★★어떤 이는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 곧 무명이다”고 말했다.
세존께서 또한 “비구가 부정을 생각하면 아직 생기지 아니한 애욕의 번뇌[欲漏]가 곧 생기게 되고,
이미 생긴 애욕의 번뇌는 갑절이나 더 많아지며,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또 “무명습(無明習)은 곧 유루습(有漏習)이니,
그러므로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은 곧 무명이라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문】부정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곧 무명인가?
【답】★★그것도 부정을 생각한 것에 관련되므로 역시 무명이다.
또 세존께서 “그와 같이 비구가 부정(不淨)을 생각하므로 그 무명(無明)에 관련되어 그 무명이 애(愛)에 관련되나니,
그러므로 그런 부정을 생각함이 없어도 곧 무명이다”고 말씀하셨다.
【문】만일 무명이 무명에 관련되면 그 뜻은 어떠한 어긋남이 있는가?
무명이 어리석음에 관련된다고 말함과 같은가?
【답】★★어떤 이는 “네 가지 전도(顚倒)가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괴롭다고 보는 것으로 전도를 끊나니,
그러므로 그가 무명이다.
괴로움을 보고 소견의 결[見結]과 무명의 결[無明結]을 끊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중요한 자리가 있지 않겠는가?
【답】★★어떤 이는 “온갖 결이 곧 무명이요,
지혜로움은 곧 밝음[明]이다.
온갖 결 때문에 깨달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온갖 결이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사(使)는 중요한 자리가 있지 않은가?
【답】만일 열 가지 현색(現色)이 있으면 중요한 자리에 드나니,
그와 같이 사(使)는 중요한 자리가 있다.
어떤 이는 “진실로 무명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삿됨이 무명을 낸다”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무명이라는 명칭은 무지(無智)와 의혹과 삿됨[邪]을 따르는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명에는 여섯 가지 모양이 있으니
어리석음ㆍ순종ㆍ삿됨ㆍ의혹ㆍ희망ㆍ중요함이 없는 것을 얻고자 함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명이란,
거룩한 진리[聖諦]에 대하여 행하려 들지 않는 무지(無智)이니,
삿됨을 따르는 그것을 곧 무지라 말한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조작으로 중생이 있나니,
그것은 아소(我所)의 무명이요,
내가 조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무명의 모양은 어떠한가?
【답】★★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다시 말하자면 이 중생의 어리석음이 무명의 모양이다.
어찌하여 무명의 인연이 있는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다시 나라는 물건이 있음과 무명이 있음과 무명의 네 가지 전도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소견이 곧 전도이니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함이 있다고 하며,
괴로운 것을 즐거움이 있다고 하며,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며,
무아(無我)인 것을 내가 있다고 하여 그와 상응하는 것과
그 밖의 결사(結使)와 상응하는 무지(無智)가 있는 그것이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그것과 상응하는 무지는 무상한 것을 항상함이 있다고 여기며,
괴로움을 즐거움이 있다고 여기며,
나아가서는 무아(無我)인 것을 내가 있다고 하여 한 곳에서 전도된 소견을 갖나니,
그 무지는 곧 전도인지라,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어떤 이는 “진리를 보는[見諦] 데서 끊을 바는 전도이고 진리를 보고 생각하는 데서 끊을 바는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약 무명을 진리 보는 데서 끊는다면 저 전도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차별이 없나니 전도가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그렇다면,
수다원(須陀洹)도 또한 무명이 있지 않는가?
【답】★★어떤 이는 “무명이란,
무너지거나 없어짐이 없나니,
무너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곧 전도다”라고 말했다.
【문】상응하는 것은 혹 무너짐도 있고 혹 무너짐이 없기도 한다는데,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어떤 이는 “무도(無道)한 것을 무명(無明)이라 이르고,
사도(邪道)인 것을 전도(顚倒)라 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요함이 없는 것을 무명이라 이르고,
중요함을 전도라 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결사(結使)가 곧 무명이요,
무명에서도 아주 작은 것을 전도라 이른다”고 말했다.
다시 온갖 결(結)은 곧 전도이고,
전도 중에서 아주 작은 것은 또한 무명이다.
【문】★★어떤 것을 내상(內相)이라 하며 어떤 것을 외상(外相)이라 하는가?
【답】모든 법의 제 모양[自相]이 내상이고,
무너지는 것은 외상이다.
【문】★★내상과 외상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두루하지[普遍] 않는 것은 곧 내상이고,
두루한 것은 곧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두루하다면 허공도 또한 두루하다.
만일 내상이 껴잡아 유지하면 내상이 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내상도 있고 외상도 있는가?
【답】★★어떤 이는 “무너지지 않는 것은 외상이고,
무너지는 것은 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두루한 것도 역시 무너지며,
그 밖의 무상함과 괴로움도 역시 무상한가?
【답】5음(陰)이 이미 무너지되 하나는 무너지지 않나니,
무상함도 두루하다.
【문】만일 제 모양이 무너지고,
두루하는 모양[普遍相]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와 같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제 모양이요,
무너지는 것은 외상(外相)인가?
【답】★★어떤 이는 “그것이 서로 같지 않다”고 말했다.
【문】푸른 것은 푸른 것과 같고 누런 것은 그와 서로 같지 않은데,
그것을 내상이다, 외상이다 하려는 것인가?
【답】푸른 것과 누런 것이 서로 같지 않은데도 푸른 것은 내상이고 외상이 아니라고 하려 드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나타난 것은 곧 내상이요,
알지 못한 지혜는 곧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그가 혹 알지 못한 지혜가 있으면 그것을 내상이다 외상이다 하려 들며
더 나아가서 알지 못한 지혜는 구경(究竟)에는 제 모양이라고까지 하려는 것인가?
【답】★★어떤 이는 “의지 그것은 곧 제 모양이고 의지함은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이름[名]과 물질[色]이 각기 서로 의지하는데 그 역시 내상인가? 외상인가?
만일 외상에 의지한다면 제 모양[自相]과 외상은 외상에 의지하고 무상함이 무상함에 의지함은 없는가?
【답】★★어떤 이는 “공통되지 않는 것은 제 모양이요,
공통된 것은 외상이다”라고 말한다.
【문】외상도 역시 공통되지 않음이요, 무상함과 괴로움이 다른가?
【답】5음(陰) 중에 어찌 무상함과 외상이 공통되지 않음이겠는가?
【문】저 무상함과 같아서 물질이 무상하며,
사실대로 생각해보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인식까지도 무상한가?
【답】★★어떤 이는 “자연(自然)과 상응하는 것은 곧 내상이고,
그와 상응하지 않는 것은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외상이 진실함이 없다면 지금도 역시 없다.
만일 외상이 있다면 거기에는 또한 제 모양이 있겠는가?
【답】★★어떤 이는 “외상이 있지 않고 모두가 제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외상이 없다면 모든 법에도 또한 외상이 없겠는가?
【답】★★어떤 이는 “이미 제 모양은 분별했으니 외상은 분별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깨달음은 곧 제 모양이요,
깨닫지 못한 것은 외상이다”라고 말한다.
두루 무너지지 않는 모양 있는데
지혜가 의지한 바를 알지 못하네.
공통됨도 저절로 있음도 아니요
말도 지어냄 아님 있지 않네.
이것이 있는 것처럼,
3유(有)는 유위상(有爲相)이요,
그 밖의 것도 역시 유위상이다.
마하승기(摩訶僧耆)는 “이 무상한 다른 모양을 말할 적에 무위상(無爲相)과 다르며,
지금 또한 유위상(有爲相)에 대하여 그러한 말을 할 적에
한량없이 유위법문(有爲法門)에 미치고
낱낱 모든 모양이 세 상(相)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이리저리 서로 생기는데 생기는 것은 이미 없어지고,
또한 다시 머무르지도 않는다.
【문】나에게 두 가지로 일어나는 것 등이 생기고 이리저리 서로 생기는 것이 있으니,
그러므로 그 중에 다르지 않는가?
【답】★★어떤 이는 “말하고 나서 마땅히 다시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유위상과 무위상이 하염이 있는 것인가?
【답】★★어떤 이는 “이도 아니고 그도 아니며 유위법(有爲法)일 뿐이니,
또한 마땅히 그 밖에 그를 유위법 모양으로 보지 아니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생기고 멸함과 항상 머무름은 변역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면 무상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땅히 항상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항상함이 있는 모양은 유위(有爲)가 되는가?
【답】★★어떤 이는 “무상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유위법에 속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고,
항상 함이 없다고 말하며 일어나 항상 머무름과 그것에 대해서도
무상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무위상이 있더라도 지금 유위라고 해야 하는가?
【답】★★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 항상함이 없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무슨 이유인가?
모든 법의 행(行)이 성립되기 때문에 그가 무상함이고,
저 법의 행(行)이 성립되니,
그러므로 무상한 축에 들지 않으며,
모든 법에 묶이고 집착하니 그러므로 항상함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항상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첫 게품(偈品)을 마친다.
1. 취건도 ②
【문】★★ 입과 입의 행위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어떤 이는 “그 다름이 없으니 입이 곧 입의 행위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에 입이 곧 입의 행위라고 한다면 몸도 몸의 행위가 아니겠는가?
만일 입과 입의 행위가 다름이 없다면 몸과 몸의 행위도 또한 다름이 없을 것이니,
그 내용이 어떠한가?
조금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은 혹시 몸의 행위인가 싶다.
【답】★★어떤 이는 “문자(文字)로 설명한 것이거나 문자에 실린 것은 곧 입의 행위[口行]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낱낱 글자가 입의 행위가 아니라면 입의 행위와 더불어 서로 상응한 것이 아닌가?
【답】낱낱 모든 글자가 입의 행위가 아니면 상응함이 아니니,
낱낱 글자에는 뜻과 음향이 서로 상응하는 것이 있다.
어떤 이는 “말하는 바가 있는 것은 곧 입으로 행동한 것이니,
입의 행위 중에 입으로부터 행동이 된 것은 곧 입의 언어다”라고 말했다.
【문】★★어떤 이에게 기쁨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거나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그를 입의 행위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입의 말이 그로 하여금 기쁨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게 한 것이 아니다.
다시 다른 뜻으로 본다면 뜻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곧 기쁜 모양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입으로 말한 바가 있거나,
입에서 생각하는 행위가 입에서부터 나온 것은 모두가 다 입의 행위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생각함이 곧 몸의 행위라면 생각함이 곧 입의 행위이고 생각함이 곧 뜻의 행위이니,
그러므로 세 행위[三行]는 일정한 자리가 없는가?
【답】내 몸의 행위가 다르고 마음의 행위가 다르고 입의 행위가 다르고 뜻의 행위가 다르다.
【문】작위하는 것의 행위는 일정한 자리가 아니다.
다시 소리는 곧 입의 행위이고 글자 수도 역시 입의 행위인데,
입과 글자 수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어떤 이는 “입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이고 글자 수는 무기다”라고 말했다.
【문】입의 무기(無記)인 말은 저 글자 수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어떤 이는 “글자 수는 결코 입이요,
글자 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어찌하여 벙어리가 된 사람은 축생과 더불어 어떠한 다름이 있는지
그들에게는 입의 행위가 없다고 보려 하는가?
【답】★★어떤 이는 “말은 입에 관한 것이고 글자 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저 글자 수는 또한 뜻이 되는 것과 같이
자연(自然)인 물건과 바람이 불어서 방울이 울리는 것도 입의 행위가 아닌가?
본시 3매(昧)에 들었는가?
【답】★★어떤 이는 “입으로 온갖 행위를 한 것이요,
글자 수가 또한 행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담마다라존자는 “두 소리가 차별이 있지 않으나 두 사실은 서로 행함이 다르다.
생각으로 선(善)인 글자 수를 아는 것은 단연코 입이요,
깊은 내용을 부연하는 것도 역시 입이요,
또한 입의 행위이며,
두 소리가 함께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다
[존 담마다라가 삼매에 들어 그 내용을 알았다].
【문】★★무슨 이유에서 입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이고,
글자 수는 무기뿐인가?
【답】★★어떤 이는 “입으로 발동하는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으나 글자 수는 그러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글자 수가 발동함도 또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되고 마음을 쓰지 않고서 된 것이 아닌 것인가?
【답】★★어떤 이는 “미묘함과 미묘함이 없는 그것을 입으로는 지으나 글자 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문】글자 수가 미묘함과 미묘함이 아닌 것을 만드는 것은 마치 꿈에서 깨어남과 삼매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가?
【답】★★어떤 이는 “입으로는 지시해 주거나 가르치거나 경계를 하기도 하나 글자 수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문】무기(無記)인 입의 말로는 지시해 주거나 가르치거나 경계를 해 주지 못하고
내가 그런 것을 하나니
그러므로 저것은 선ㆍ불선ㆍ무기이나 글자 수는 아닌 것인가?
【답】★★어떤 이는 “입과 몸의 행위는 쌓이나 글자 수는 그러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문】글자 수도 역시 몸의 행위를 쌓는다고 하겠다.
존자께서는 “이 두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하나니,
그를 보지 않고 제 모양을 보지 않고 또한 그 공을 드린 보람이나 효과를 보지 아니해야 한다.
입과 뜻이 함께 일어나매 미묘한 지시를 함이 없으나 그 과보를 받는 것은 둘 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셨다.
생각[想]과 인식[識]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차별이 있지 않으니 그 둘이 함께 발동하여 나오는 것이 마음을 말미암는다”고 말했다.
【문】만일 발동하여 나오는 것이 마음을 말미암는다면,
반드시 그 일정한 자리가 있겠으며 만일 차별이 없다면 음(陰)도 또한 일정한 자리가 있겠는가?
【답】만일 당신에게 세 가지 마음이 있을 적에는 곧 음의 자리가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이 곧 차별이니 생각이 곧 인식이라 이른다”고 말했다.
【문】일정한 자리가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제 모양을 말해야 할 것이다.
【답】★★어떤 이는 “생각은 생각함이 되고 인식은 아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문】그 어떤 내용이 짓는 바가 되는가?
【답】★★어떤 이는 “생각은 생각이 되고 인식은 인식이 된다”고 말했다.
【문】그것 역시 나의 의심되는 바이니,
생각은 스스로 생각을 알고 인식은 스스로 인식을 아는 그것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어떤 이는 “마음이 곧 생각이요,
마음이 또한 인식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마음이 그러하다면 곧 생각과 느낌의 다름이 있지 않을 것이니,
마음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생각과 기억이 작위하는 바를 인식이 스스로 인식한다”고 말한다.
【문】저 생각은 어떤 것을 기억하게 되는가?
만일 그전 것을 기억한다면 그러기에 생각이 스스로 기억하여 생각할 것이요,
만일 그 외의 것을 기억한다면 거기에는 곧 하나의 인연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기억이라고 한 것은 곧 생각이요,
그 제 모양은 곧 인식이다”라고 말했다.
【문】한 법이 두 명자(名字)와 제 모양[自相]을 갖추었는가?
만일 한 법이 두 명자를 갖추고 있다면
저 명자도 역시 다르고 제 모양도 역시 다를 것이요,
만일 명자가 서로 같지 않다면
생각은 또한 스스로 제 모양이 있고
인식은 명자를 기억할 것인가?
【답】★★어떤 이는
“밖의 기억이 생각이 되고 제 모먕이 인식이 된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본래 이미 말한 것과 같다.
【문】★★존자께서는 “분별을 제 생각이라고 말하나니,
제 생각으로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은 그가 지은 것만이 아니다.
뜻[意]을 바깥이라 말한다”고 말하였다.
나아가서는 눈으로 느끼는 것과 생각과 마음과 인식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마땅히 이 일곱 방편으로써 설명해야겠다.
존자께서는 “눈으로 빛깔을 반연하여 눈의 인식과 제 모양으로 느끼는 인식을 내는데,
인식이 이 모든 법에 흘러 달리면서 재차 그러한 차등을 일으킨다.
뜻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인식과 다른 것,
인식과 공통되는 것,
그와 함께 얻는 고락(苦樂) 그것이다.
온갖 생각을 조작하고 본래 짓는 바를 따르는데,
그도 역시 생각과 마음에서 행하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이 마음, 이 법을 하나인 모양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약간의 모양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어떤 이는 “마땅히 한 모양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만일 인식이 푸른 것을 반연할 적에는 뜻도 역시 그러한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하나의 인연이 하나의 인연과 상응하는 법이 있는가?
【답】하나의 모양이요,
제 모양이 있지 않다.
【문】아픔을 참는 인식과 생각과 분별하는 마음이 능히 생각하며 생각 또한 서로 아는가?
온갖 것이 다르며 푸른 것은 실로 그 푸른 것인데,
생각이 또한 서로 알며,
마음이 또한 마음으로 알며,
인식이 또한 인식으로 안다면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어떤 이는 “이 한량없는 모양은 미묘함과 미묘함 아닌 느낌인데 그를 생각으로 지은 바라고 말하며,
제 인식[自識]이 지은 바며 제 인식의 제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문】하나의 인연도 있지 않다.
존자께서는 “마땅히 한량없는 모양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의 모양이라면 법이 곧 무너짐이 있을 것이요,
법이 어지러워짐이 있을 것이니,
여기에 일정한 자리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모든 법에 제 모양 있는 것이 마치 이 유위법(有爲法)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할 수 없고,
무위법을 또한 유위법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세존께서 세상에 나오신 것은 무엇을 하시려고 한 것인가?
【답】그런 내용 때문에 부처님 세존께서 나오신 것이 아니다.
혹 유위법을 무위법으로 만들고 무위법을 유위법으로 만든다고 말하더라도
비유컨대 보배를 보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보배 아닌 것을 보배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다만 분별하는 이가 안다.
비유컨대 도사(導師)가 도 아닌 것을 도(道)라고 말할 수 없으며
도를 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도사만이 잘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등불을 밝히는 이가 낮은 데를 높다고 말할 수 없으며
높은 데를 낮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그 높고 낮음을 비출 뿐인 것과 같다.
비유컨대 의사가 단 것을 쓰다고 말할 수 없으며
쓴 것을 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달고 쓴 것이 각기 다르기 때문인 것과 같아서,
위에 말함도 역시 그와 같다.
다시 세존께서 중생을 위하시기 때문에
이 법의 뜻[義]을 말씀하신 것이니
마치 이 유위법이 3세(世)에서
각각 제 모양이 있어서 외상(外相)을 알도록 하게 함과 같다.
【문】★★무슨 이유 때문에 혹 일어나기도 하고 혹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는가?
【답】★★어떤 이는 “모양에는 약간의 것이 있다”고 말했다.
【문】저 모양은 본래 머무름이 없나니,
그러므로 저 서로 생김이 있는가?
【답】본래 있는 그 모양은 생기지 않았다.
【문】만일 본래 모양이 있더라도 모양에는 약간의 것이 없는가?
【답】저 심지 않고도 저절로 생기는 모양과 같아서
곧 더러운 모양에 각각 다름이 생겨서 같은 모양[同相]과 더불어 각각 생기지 아니하지 않나니
그를 약간의 모양이라고 말했다.
【문】만일 저 모양이 이미 생기거나 만일 생기지 못했다면 그러기에 저것이 각각 증감이 있나니,
그러므로 저것이 본래 없으면서 생김이 있는 것이다.
【답】여래께서 말씀하신 “모양에는 약간의 것이 없다”고 함과 같나니,
거기에는 곧 더러운 모양이 생기어 다름이 있고 혹 생기지 않더라도 이 생기는 것 때문에 다름이 있다.
비유컨대,
푸른 것이 다르고 무상함과 괴로움이 달라 각각 동일함이 없는 것과 같아서 이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사실에 약간의 것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도 역시 본래 말한 바와 같다.
어떤 이는 “인연이 혹 생기기도 하고 혹 생기지 않기도 한다”고 말했다.
【문】혹 인연이 있지 않기도 하는가?
【답】별로 인연이 있지 않으니 그 둘은 같지 않으면서 같이 생긴다.
【문】처음에는 같다는 말이 없었다.
【답】그런 말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삼세의 곳에 혹 생기기도 하고 혹 생기지 않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를 말한 것이다.
미래의 곳은 미래를 말한 것이요,
과거의 세상은 그 과거를 말한 것이요,
현재의 세상은 그 현재를 말한 것이다.
【문】세(世)가 행(行)과 다름이 있는가?
만일 세가 다르고 행이 다르다면 세가 항상 머무를 것이요,
만일 세가 곧 행이라면 저 행은 혹 모이기도 하고 혹 옮기기도 할 것이다.
【답】어떤 이는
“낱낱의 사실이 동일하지 아니하여
혹 생기기도 하고 혹 생기지 않기도 한다.
과거의 행(行)은 과거의 행을 알며,
미래의 행은 미래의 행을 알며,
현재의 행은 현재의 행을 아나니,
그를 현재라 말한다”고 말했다.
【답】★★저 미래가 현재가 아니라면 현재는 항상 머물지 않는다.
만일 현재라면 그러기에 저 미래는 현재가 있을 것을 알아 곧 현재가 있다.
만일 저 미래가 현재를 안다면 곧 현재가 없을 것이지만
현재란 곧 현재임을 알아 현재가 있음을 안다.
만일 저 현재가 옮기면 곧 과거가 있을 것이며,
만일 과거가 없으면 곧 항상 있는 과거가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당신이 현재에 과거를 아나니, 곧 과거가 있다.
만일 현재에 과거를 알고 과거 있지 않음을 아는 것과 같이,
당신이 과거에 과거가 있다고 아는 것이 없으면 곧 과거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이가
“그 어찌하여 그러한 말을 하며 그 무슨 짓을 하여 제 모양과 상응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답】그것은 머무름이 항상하여 이미 제 모양이 된 것을 말함이니,
만일 항상함이 제 모양과 상응하지 않는다면 곧 세(世)를 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문】만일 제 모양이 세를 낸다면
곧 저 모양이 과거를 낼 것이니,
그러므로 세는 항상한 자리가 없는가?
【답】나[我]라는 모양이 아직 생기지 아니해서는
미래 세상도 생기지 아니하여 현재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생김과 생김 없는 것으로써 다르다고 하지 말 것이니,
그러므로 세(世)는 항상한 자리가 있다.
【문】만일 저 모양이 생기지 않는다면 또한 생기더라도 지금 있는 것이 아니잖겠는가?
【답】만일 지금 생기지 않는다면 또한 생기지 않고 함이 없는 것이다.
다시 항상함인 제 모양이 상응하는 그것은 또한 당연히 없고,
혹 생기기도 하며 혹 생기지 않기도 하나니,
그를 “만일 무상하다면
저것 또한 생기지 않고
지금에 또한 상응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서로 만들어짐이 약간의 종류인데
인연과 세(世)도 그와 같네.
낱낱이 함께 서로 생기는데
본래 모양이 그 소작이 되네.
마치 이 유위법(有爲法)이 없지 않음이 아니고 있지 않음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이
무위법(無爲法)도 없지 않음이 아니고 있지 않음이 되지 않는다.
【문】★★무슨 이유에서 유위법을 항상함이 없다고 말하며,
무위법을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어떤 이는 “유위법의 모양은 약간의 것이 있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약간의 종류를 만들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인연이 있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세(世)의 처소가 있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가지가지로 다르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문】★★존자께서는
“유위법의 짓는 모양은 인연이나,
곧 인연이 서로 생긴다”고 말했다.
인(因)과 연(緣)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차별이 있지 아니하고 합함과 모임에서 있는 바다.
합함과 모임이 없으면 곧 없나니,
곧 그 인과 연이다.
말한 인이 곧 연이라고 한 그것은 낳음ㆍ늙음ㆍ병듦ㆍ죽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합함과 모임에서 있다면
그는 곧 연(緣)이니 눈으로 인하여 눈의 인식[眼識]이 있는 것이다.
그를 “인이고 연이 아니다”라고 하려 하는가?
【답】눈의 합함과 모임에서 눈의 인식이 생기는 것 아니고 상대가 있으면 곧 눈의 인식이 있나니,
그러므로 합함과 모임이 또한 인이고 또한 연이다.
어떤 이는 “합함과 모임은 인이고,
짓는 바는 연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합함과 모임이 합함과 모임을 짓는다면 인도의 연이 아닌가?
【답】낱낱 짓는 바는 연(緣)이고 합함과 모임에는 인이 있다.
【문】만일 낱낱 짓는 바가 인이 아니면 합함과 모임에도 또한 인이 아닌가?
【답】낱낱 짓는 바가 인이 아니고 합함과 모임으로 있나니
낱낱 짓는 바가 합함과 모임이 아닌 것과 같아서
합함과 모임에 합함과 모임이 있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자연(自然)은 인(因)이고 자연 아닌 것은 연(緣)이다”라고 말한다.
【문】보리에서 생긴 싹이 그 보리와 서로 같은가?
만일 그 싹이 보리와 같다면 4대(大)로 하여금 인(因)의 업(業)과 같다고 하겠는가?
【답】★★어떤 이는 “차례[次第]는 인이고,
먼 데에 있는 것은 연이다”라고 말했다.
【문】인연(因緣)과 차제연(次第緣)이 있는데,
그 인연과 차제연은 차별이 있지 않은가?
【답】★★만일 선(善)인 차제연이 불선(不善)인 마음을 일으켰다면 그는 인이고 연이 아닌가?
어떤 이는 “공통되지 않음[不共]은 인이고 공통됨[共]은 연이다”라고 말한다.
【문】눈이 함께하지 않고 눈의 인식을 내는데,
그것을 “인이요 연이 아니다”라고 하려는가?
보리가 뿌리와 싹과 더불어 함께 줄기를 내는데,
그것이 연이고 인이 아닌가?
【답】★★어떤 이는 “생기는 것은 인이고 다시 생기는 것은 연이다”라고 말했다.
【문】지금 생기는 것은 연이 없고 보리가 다시 생기는 것은 인이 없는가?
어떤 이는 “제가 자라는 것은 인이고 딴 것을 자라게 함은 연이다”라고 말한다.
【문】만일 “제 마음에서 착한 일을 내는 것이 곧 자신을 기르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이고 연이 아니다”라고 하려는가?
존자께서는 “회전(廻轉)에 대하여 회전은 인이고,
회전 아닌 것은 연이다”라고 말하였다.
합함과 모임에 있지 아니하고
자연(自然)과 차제(次第)에 있다.
온갖 공동으로 생기는 바이며
자신이 회전하는 그것들이네.
어떤 것이 차제연인가?
【답】★★어떤 이는 “과거의 마음에서 생각하는 법이 차제연이다”라고 말했다.
【문】미래의 마음과 마음 법 그 중간에 차제연이 생기는가?
【답】★★어떤 이는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 법이 차제연이라”고 말했다.
【문】미래의 마음과 마음 법이 만일 오랜 뒤에 생기면 그 중간에 저 차제연이 생기는가?
【답】★★어떤 이는 “온갖 마음과 마음 법을 차제연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지금 아라한(阿羅漢)의 최후 마음에 차례로 다시 딴 마음이 생기는가?
【답】★★어떤 이는 “아라한의 최후 마음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마음과 마음 법은 차제연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멸진삼매(滅盡三昧)의 최후 마음에서도 다시 딴 마음이 생기는가?
【답】마음을 일으키는 중간이 차제연이다.
존자께서는 “만일 마음이 차례로 마음을 낸다면 곧 차제연이니,
왜냐 하면 물질이 아닌 마음과 마음 법에 차제연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법으로부터 나오는가?
그 차례가 적은 것은 많은 것을 내고, 많은 것은 적은 것을 낸다”고 말했다.
【문】★★차제연의 모양은 어떠한가?
【답】★★어떤 이는 “보시 행하기를 기피하는 바가 곧 차제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마음을 비추는 것이 차제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차례로 심성(心性)이 회전하는 것이 차제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차제인 심성이 대개 차제연의 모양이니,
차제연은 당연히 일정한 것이라 말하고,
당연히 일정함 아닌 것이라 말하며,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아라한이 지금 최후 마음에서 차례로 다시 딴 마음을 내는가?
【답】아라한은 최후 마음과 차제연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곧 차제연이 없는가?
【답】아라한은 최후 마음과 차제연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곧 차제연이 없는가?
【답】마치 인연이 항상 일정함이 있지 않음과 같아서 반드시 인연이 있음도 역시 그와 같다.
존자께서는 “현재의 차제연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그는 마땅히 항상 일정하다고 말할 것이며,
현재 모양에 차제연이 스스로 항상함이 있는 것을 관찰해서는 당연히 이과(已果)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그러한 가르침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되는가?
【답】★★어떤 이는 “날 적부터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물질이 있으나 볼 수도 없고,
상대가 없다”고 말했다.
【문】이렇게 “이 현재가 아니다”라고 날 적부터 알았다고 하는가?
만일 물질을 볼 수도 없고 상대가 없는 것이라면 물질이 없고 또한 볼 수도 없고 상대가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당신의 몸은 물질이 없고 차별이 있지 않다.
【답】★★어떤 이는 “상주(常住) 밖에서 교계(敎戒)가 있고 없는 것을 보게 되고 저 지을 공양을 성취했다.
나는 그 교계가 있고 없는 것을 관찰하여 저 하는 짓의 모양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문】그는 하는 짓이 가르침 없는 것을 관찰함이 아니요,
그는 하는 짓이 슬기로운 가르침인 것을 관찰한 것이다.
만일 가르침이 ‘있다’, ‘없다’고 한다면 온갖 가르침이 있고 없는 것에
그가 모두 하는 짓을 관찰할 것이니,
저 가르침 있는 것이 가장 미묘한 행인가?
【답】★★어떤 이는 “일일이 모양을 다 관찰하여 비추고 계율과 계율 아닌 것이 모두 사라져서
계율에는 계율이 사라짐을 보지 않음이 있고,
견해에는 계율과 계율아닌 것 사라짐이 있다”고 말했다.
【문】계율 아닌 것이 사라져 없어진 도리도 또한 계율이 사라져 없어진 것은 아닌 것인가?
【답】★★어떤 이는 “타죄(墮罪)로 말미암아 금계(禁戒)를 설명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타락과 타락 아닌 것이 한량없는 죄에 범함이 있는 것을 알아
저가 이 가르침 없는 곳에 범죄자가 있음을 관찰한다”고 말했다.
【문】그가 가르침이 없지 않아 본래 범한 바를 기억한다.
만일 교화가 없다면 나아가서는 가르침과 저 온갖 범죄가 없겠는가?
【답】★★어떤 이는 “수승함과 수승하지 못함이 있는 것을 아는 이가
교(敎)를 관찰하지 아니하면 곧 가르침 없음이 있게 되고,
만일 유위(有爲)를 관찰하면 곧 무위(無爲)가 있게 된다.
비록 그의 가르침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가르침이 없는 것으로 관찰한다”고 말했다.
【문】그는 수승함이 있음과 수승함이 없음을 다하지 못한다.
만일 전부가 수승함이 없다고 관찰한다면 그로 하여금 수승함이 있게 하겠는가?
설령 있더라도 곧 수승함이 있지 않을 것이요,
만일 전부가 미묘하게 수승함이 있더라도 그는 곧 없을 것이다.
【답】★★어떤 이는 “천상에 태어난 후에야 능히 알아 익히고 행하며 범하지 아니한 후에야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했다.
【문】어떻게 익히고 행하여 범하지 아니하며 자주자주 범하지 아니하며 능히 마음을 알아 범하지 아니하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마음을 수행하여 그런 후에 천상에 태어나는가?
【답】★★어떤 이는 “알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는 슬기로운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에 교의(敎義)가 있나니 그에 머물러 함께 상응해야 하거늘,
하물며 교의가 없는 것이겠는가?
저 경에 의하여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저 슬기로운 법과 같다”고 말했다.
가르침 없는 몸과 몸의 느낌이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가르침 없음은 몸의 묶임이요,
몸의 느낌은 마음의 묶임이다”라고 말했다.
【문】그는 신근(身根)에 묶인 바가 되는가?
【답】★★어떤 이는 “교계(敎戒)가 없는 것은 색음(色陰)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또 몸의 느낌은 곧 의법(意法)이니 느낌 쌓임[痛陰受陰]에 해당한다.
어떤 이는 “둘 다 함께 상대가 없으니 그 증감을 말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문】★★가르침 없는 마음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은 어떤 종류의 다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가르침 없음은 곧 물질이요,
심불상응행은 물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가르침 없음은 지혜로 관찰함 아닌 물질이 각각 이루어진 것이요,
심불상응행은 자연법 아닌 것으로 만들어진 바이다”라고 말했다.
제2 게품을 마친다.
입과 인식에 세 가지 있으며
마치 세 유위(有爲)와 같다.
인연에 네 가지가 있으며
가르침 없음에 3업(業)이 있다.
1. 취건도 ③
괴로움의 원인은 뜻에서 얻어지고
무지(無智)도 또한 다섯이 있네.
색근(色根)이 모두 갖추어져서
각각 일곱 가지 고(苦)가 있다.
【문】★★마음과 마음 법의 인연이 생각하지 않는 인연[不思惟緣]이 될 수가 있는가?
마음과 마음 법의 인연 제 모양[自相]이 인연을 만드는가?
【답】★★어떤 이는 “없다.
왜냐 하면 인연은 마음과 마음 법에 소속된 바이기 때문이니
청국(靑國)【외국의 견문을 모두 국(國)이라고 말한다】으로 하여금
인연을 알게끔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알게 한다면 청국이 인연이 있을 것이요,
만일 그가 청국을 알면 곧 앎이 있을 것이며,
만일 청(靑)에 국(國)의 인연될 만한 것이 있다면
인연과 제 모양에 곧 두 앎이 있을 것이다.
만일 앎과 그 밖의 알음이 청국에 인연하게 된다면
그 밖의 청국을 포섭할 것이요
만일 앎이 청국을 인연하게 된다면
그 또한 감히 청국이 앎을 포섭하여 인연이 되게 하지를 못할 것인가?
【답】★★어떤 이는
“그 말한 바와 같거니와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모른다.
누가 그를 공포스러운 마음이 나게 했는가?
제 모양이 인연을 만든 것이나 인연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저 제 모양이 인연을 만든 것이 아닌가?
만일 인연을 만든 것이면 스스로 인연이 있음을 알 것이며,
제 모양 성질도 스스로 그러할 것이다.
【답】★★어떤 이는 “이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문】★★이 누구의 생각이며 이 누구의 마음인가?
만일 그러한 말을 한다면 그가 곧 이 인연이요,
만일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생각이 되고,
이는 마음이 될 것이니,
그와 같은 마음은 합당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다.
【답】★★어떤 이는 “만일 미래의 마음과 마음의 법이 인연을 만드는 인연이라면,
그것은 곧 인연이니 마땅히 잘 생각해 보라.
그 마음과 마음 법의 제 모양이 인연을 만들더라도
그는 인연이 있는 줄을 모른다.
왜냐 하면 미래의 인연이 인연 있는 것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그는 제 모양이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
만일 제 모양이 인연을 만든다면 인연에 또한 슬기가 있어서 제 모양과 제 인식을 낼 것이다.
【답】★★어떤 이는
“머리와 배와 가슴에 통증이 있으면
그 통증은 스스로 인연하는 모양으로 인연을 만드나
인연은 스스로 모른다”고 말했다.
【문】그는 통증의 제 모양이고 인연을 만드는 것이 그 인연을 만든 것이 아니다.
통증은 아무런 처소도 없는데
통증의 제 모양이 생겨서
그 실지의 머리와 배에 통증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인가?
【답】★★어떤 이는 “얻음이 만일 얻지 못함에 해당한다고 하면 곧 둘이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며 마음과 마음이 각각 인연을 짓고서 마음이 스스로 인연을 짓나니,
그러므로 자연히 그것이 미묘함 아님을 모르나니 그러기에 이미 얻어진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얻음이 만일 얻지 못함에 해당한다고 하면
마음이 마음에 반연함이 끝날 수 없고 곧 인연이 있나니,
그는 미묘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미 얻어진다”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아픈 모양을 얻는 것과 그 마음의 무슨 차별이 있으랴.
이는 의식(意識)의 경지이고 그 가운데로부터 인식이 얻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인식으로 느끼는 제 모양을 얻지 못하면 그를 구경(究竟)이라 말했다.
그 중에 딴 의식이 들어감이 있으면 그는 곧 무너짐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못 미쳐 마음에 공포를 내는데
미래의 생각도 역시 그러하네.
통증과 그리고 타인의 마음이며
마음이 아픈 이것 저것에 반연하네.
마음과 마음 법에 돌아서는 것과
마음과 마음 인연을 마련하는 그 둘은
함께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여
스스로 모양을 짓는다.
어떤 이는 “청국(靑國)을 아는 것과 같게 되어 일시에 인연을 짓는다”고 말했다.
【문】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나니,
만일 인연을 짓게 된다고 하면 곧 둘의 스스로 앎이 있게 되는가?
【답】★★어떤 이는 “될 수 없나니
만일 인연을 짓는다면 청(靑)이 앎[覺]과 더불어 평등하여 다름이 없을 것이며
앎도 역시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옳겠는가?
그러므로 되지 않고 그것이 같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될 수가 없나니,
왜냐 하면 이것이 전환함으로써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전환함이 아니고 두 번 전환함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될 수가 있다”고 말했다.
【문】★★무슨 이유로 눈의 인식[眼識]이 눈 감관[眼根]을 알지 못하는가?
【답】★★어떤 이는 “볼 수 있는 인연은 눈의 인식이고 볼 수 없는 인연은 눈 감관이다”고 말했다.
【문】귀 인식[耳識]은 지금의 귀 감관[耳根]을 아나니,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을 인연한 것인가?
【답】★★어떤 이는 “대상[境界]을 껴잡는 것은 눈이고,
가까운 것은 눈 감관이니,
그러므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코 인식[鼻識]은 지금의 코 감관[鼻根]을 아는데 그는 대상에 돌아가는가?
【답】★★어떤 이는 “4대(大)는 눈이고 네 요소의 대상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른다”고 말했다.
【문】몸 인식[身識]은 지금의 몸 감관[身根]을 아는데 그는 네 요소의 대상인가?
【답】★★어떤 이는 “눈과 눈의 인식에 의할 것이요,
마음과 마음 법이 스스로 의지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른다”고 말했다.
【문】의식(意識)은 지금의 의근(意根)을 모르나니,
그는 곧 의지[依]인가?
물음에 알 수가 없나니 온갖 법의 대상이 없다.
【답】★★어떤 이는 “만일 눈이 없어지면 눈의 인식뿐이다.
눈은 눈을 가리우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그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문】그것 또한 나의 의심되는 일이다.
어찌하여 눈은 눈을 가리우지 못하는가?
【답】이 중에 물질이 없으면 자연인데 자연이 무너진 것이다.
어떤 이는 “알 수 없다.
설령 알게 된다면 온갖 받아들임[入]이 곧 무너지게 된다.
6식(識)이 무너지지 않을 때를 어떤 이는 ”그것은 이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그것 또한 나의 의심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물질의 제 모양이 모든 눈의 인식을 받아들인 것이요,
물질인 자연이 아니며 눈의 감관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볼 수 있음은 가까이 앉은 때문이니
나는 저 네 요소에 의지했다.
눈을 가리면 무너짐 있나니
대상은 모두가 물질의 모습[色相]이라네.
귀의 감관을 볼 수 있는 것도 역시 그와 같고,
코의 감관을 볼 수 있음은 가까이 앉은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혀의 감관과 몸의 감관은 볼 수가 있다.
그것이 네 요소인데 내가 만든 것이다.
마땅히 “그와 같은 5근(根)의 물질인 온갖 것을 네 요소가 만든 것이다”라는 이러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문】★★무슨 이유로 약간의 모양[相]에 약간의 모습[貌]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모양이나 모습이 없음이 마치 눈의 인식과 같다.
그리고 온갖 물질은 모든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인데 약간의 모양과 약간의 모습이 있다.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또한 다시 그와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처소가 수승함이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처소인 눈의 감관과 더 나아가 몸의 감관[身髮]까지도 그렇다
그러므로 가지가지 감관의 처소가 가지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그러기에 가지가지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문】딴 곳에는 하나의 모습이 있기도 하고 혹은 다시 둘이 있기도 하는데
저 눈의 감관으로 하여금 약간의 모양이 있고 약간의 모습이 있게 하며,
모든 처소는 다 몸 감관[身根]인데 몸 감관으로 하여금 약간의 모양과 약간의 모습이 있게 하는가?
【답】★★어떤 이는 “네 요소로 만든 물질인 환희하는 감관[歡喜根]과 그 밖의 네 요소가 환희하는 눈 감관과
그 밖의 몸 감관까지가 그 중에 갖가지 모양이 있다”고 말했다.
【문】그 밖의 네 요소에는 환희하는 하나의 눈,
혹은 그 밖의 두 눈이 있기도 하는데,
눈이 보는 처소로 하여금 갖가지 모양이 있게 하는가?
【답】★★어떤 이는 “내가 네 요소인 눈과 그 밖의 네 요소인 눈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그 밖의 몸의 감관까지를 그 중에서 갖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와 같다.
【문】그 밖의 네 요소인 하나의 눈에 혹 그 외 둘이 있기도 하는데,
눈의 감관으로 하여금 가지가지 모습이 있게 하는가?
어떤 이는 “지어감[行]의 때[垢]로 만든 감관이며,
인연이 지어감의 때로 눈의 감관을 얻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몸의 감관까지도 그러하여
그 중에는 가지가지 모양과 가지가지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와 같다.
【답】그 밖에 지어감의 때로 인하여 한 눈의 감관을 이루고 혹은 다시 두 눈의 감관을 이루는데,
【문】★★눈의 감관으로 하여금 가지가지 모양을 만들려 하는가?
【답】★★어떤 이는 “4대(大) 안에 상응행(相應行)으로서 가지가지 모양이 있게 된 것은
그가 가지가지 모습을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혹은 하나의 4대이기도 하고 혹은 둘,
혹은 넷이기도 하는가?
【답】모든 것에 조금은 4대가 두루 있는데,
적음과 많음이 함께 합해졌다.
어떤 이는 “4대의 경계에는 증감이 있다.
그러므로 미묘한 요소로 만들어진 물질은 역시 미묘하다”고 말했다.
【문】혹시 땅에 굳은 모양이 있기도 하고 굳은 모양이 없기도 하는가?
【답】모든 굳은 모양에는 다만 굳은 모양뿐이나 다만 굳은 모양에 증감이 있다.
비유컨대 쇠와 납과 백철이 아래로 금의 위에 이르는 것과 같다.
존자께서는 “처음 여러 물건이 생길 적에 가지가지 모양이 있나니
그 가지가지 모양이 있게 된 까닭은
그 가지가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색처의 모든 수승한 것은
환희와 나에게서 만들어지며
빠른 행(行)과 상응(相應)한 것은
병듦ㆍ태어남ㆍ늙음이 일어남이네.
【문】★★눈 감관 모양이 그 따위를 만든 것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눈으로 빛깔을 보는데,
이미 보고 장차 볼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것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그것 역시 나의 의심이니,
어찌 눈으로써 빛깔을 보는데 이미 보고 장차 보되 마침내 법안(法眼)을 일으키지 않는가?
빛깔을 보지 않으며 이미 보지 않고 장차 보지 않으면 그것을 눈이라고 하겠는가?
【답】내가 이미 그에 대한 것을 설명했으니,
만일 그와 같은 현상이라면 역시 자연이다.
【문】어찌하여 보지 않는 것이 자연을 보는 것이라 하는가?
【답】눈은 그 모습[貌]이니 어떤 이는 “검은 동자는 눈이 비추는 것이며,
작용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문】어떻게 검은 동자가 곧 눈이라고 아는가?
【답】검은 동자가 그 근본이다.
【문】검은 동자는 그 근본이 아닌가?
【답】그 외의 사실에는 해당되는 바가 없으므로 그것을 눈이라고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저것 또한 다르나니,
그러므로 저 사실에는 해당되는 바가 없다.
【문】★★저것을 눈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어떤 이는 “네 요소로 만들어진 물질인 눈 감관은 환희이니,
그로 인하여 눈의 인식 대상이 있다.
그것을 지도와 교계(敎戒)라고 이르나니,
그것을 저것이 만들었다 말한다”고 했다.
【문】모든 5근(根)으로 만든 물질이 환희이니,
그러므로 저것은 눈 감관의 제 모양이 아닌 것인가?
【답】★★어떤 이는 “눈의 인식에 의하여 눈 감관이 있고 눈 감관이 눈의 인식에 의하나니,
그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문】모든 일어나지 않는 법은 이 눈의 인식과 다르고 평등하지 않게 저 눈의 인식에 의하나니
저것을 눈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어떤 이는 “네 요소에는 눈 감관과 눈의 인식이 서로 의지하나니,
그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문】네 요소의 모양이 스스로 무너지매
그를 네 요소의 모양이 스스로 무너짐이라고 이르며,
눈 감관 모양이 무너지지 않고 하나의 모양이 눈의 인식에 의하여 온갖 일을 만든다.
묻노니,
만일 네 요소의 제 모양이 한 모양인 눈 감관을 무너뜨리더라도
그와 같은 아상(我相)과 눈 감관은 무너지지 않고
한 모양인 눈의 인식이 서로 의지하여 이루는가?
【답】★★어떤 이는 “빛깔ㆍ냄새ㆍ맛ㆍ섬세하고 매끄러움[細滑:
觸] 그것에 관련되어 눈 감관과 눈 인식이 증가하게 되면서 온갖 사실을 만든다”고 말했다.
【문】지금에 5식신(識身)이 각각 눈 감관을 아는가?
【답】★★어떤 이는 “이는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문】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니, 왜 그러한가?
【답】★★어떤 이는 “저것은 대상이 아니니 눈 감관은 제 모양이 없고 그 수효도 없다.
그런 후에 눈 감관을 이룬다”고 말했다.
【문】만일 눈 감관이 제 모양이 없다면 눈은 감각이 없겠다.
【답】눈으로 헤아릴 줄 아는 물질 이것을 느껴 아는 것이라고 하나니,
눈이 몸을 헤아리는 물질인 것과 같아서 만족함이라고 말했다.
몸의 만족함이란,
네 요소인 몸에 하나의 제 모양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만들어진 물질은 자연인데,
눈의 인식이 증가함에 따라 증감이 있는 것을 나타내나니,
이를 그 사실이라고 이른다.
저것을 계산할 적에 차츰차츰 그 성질이 자연임을 알게 된다.
그 중에 모든 받아들임[入]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했다.
눈의 검은 동자를 관찰함과
환희와 각각 서로 의지함이다.
네 요소가 모두 모였는데
만듦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네.
【문】★★5근(根)도 역시 그와 같고 의근(意根)도 역시 그와 같고
의근의 제 모양이 의지함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뜻[意]으로 모든 법을 아는데 이미 알고 장차 알 것을 안다.
눈 감관도 역시 그와 같고 의식(意識)이 만들어 증가하는 그것을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의식이 서로 의지하는 모양은 의근이 의식에 의지함이니 이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혹 나오기도 하고 혹 들어가기도 하여 다섯 식신(識身)과 의근(意根)이 식(識)에 의지하나니,
이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문】무색계(無色界)에는 의식이 생기지 않나니 거기에는 다섯 식신이 없는가?
【답】어떤 이는 “여섯 식신과 의식신(意識身)이 증가하나니,
그 증가함으로부터 생기는 식(識)이기에 이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문】이름과 물질이 이리저리 서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다시 저 식의 제 모양과 의근(意根)이 증가하는 작용을 하나니,
이를 그 사실이라고 말했다.
저것을 계산해 볼 적에
나아가 마지막인 저 성질은 자연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 중의 의식만은 무너짐이 있다.
어떤 것이 뜻[意]이 되고,
어떤 것이 의식이 되는가?
【답】★★앞에서 네 가지 사실을 말했듯이
6식신(識身)과 상응하는 것은 뜻이고
증가하는 식(識)에서 생긴 슬기와 마음이 그를 반연하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제3 게품을 마친다.
1. 취건도 ④
현재의 통증을 자신이 대신하지 못하나
과거와 미래의 통증은 또한 즐겁지 않고 또한 괴롭지 않다.
어떻게 내가 괴롭고 내가 즐거움을 알게 되는가?
거룩한 마하승기는
“저 통증은 자연히 자신이 대신하고 자연히 안다”고 말했다.
【문】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나니,
어떤 물건이 자연으로 회전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어떤 끊어지는 물건이 능히 제가 저절로 끊어지지 않으며,
창이 스스로 찌르지 못하며,
손가락과 머리가 스스로 부딪치지 못함과 같이 이도 역시 그와 같은가?
【답】★★담마굴(曇摩崛)존자는 “마음과 상응하는 지혜로 알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문】만일 그렇다면 자연으로 자연을 아는 한 인연인 상응법(相應法)이겠는가?
【답】★★미사색(彌沙塞)존자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지혜로 안다”고 말하였다.
【문】만일 그렇다면 곧 두 가지 지혜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一部僧名]은
“사람이 물어볼 줄 알고 또한 지혜를 쓸 줄 안다.
설령 지혜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가 그 다음에야 아는 수가 있다”고 말한다.
【답】★★어떤 이는 “제일의(第一義)에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아는 것이 있지 않다.
중생을 안다고 말한 것은 역시 사만(邪慢)으로서 괴로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다 말한다”고 했다.
【문】아라한으로서 혹은 알지 못하는 그것도 사만이 있는 것인가?
【답】★★어떤 이는 “느낌은 뜻이 전환하는 중간이 되나니,
그 중간에 내가 스스로 인식을 내어 그 대상 중에서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만일 의식(意識)의 성질이라면 그것은 뜻의 대상이 아니며,
의식 그것과 의식으로 인식하는 대상 그것은 느낌 성질이 아닐 것이니,
어떻게 알게 되는가?
【답】★★어떤 이는 “즐거움을 보거나 괴로움을 본 연후에야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어리석은 사람도 지금에 또한 아는데,
다시 그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지 않는가?
【답】★★어떤 이는 “몸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의한 연후에야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만일 저 느낌에 의한 것이 이미 사라지면
어떻게 이는 낙에 의한 느낌이고
이는 괴로움에 의한 느낌이라 말하는 것을 알게 되는가?
마치 저 통증을 몸이 스스로 대신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어떻게 뜻[意]을 껴잡는가?
【답】★★어떤 이는 “마음이 이미 생길 적에는 현재의 느낌만 반연한다”고 말했다.
【문】마음이 생기려고 할 적에 미래는 그것이 반연하지 아니한 미래이니,
그러므로 곧 그 대상인가?
【답】★★어떤 이는 “현재의 마음이 차례로 사라져서 그 느낌에 반연한다”고 말했다.
【문】차제연(次第緣)이 사라지고 또한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또한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알게 되겠는가?
【답】★★어떤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의지하고 다시 그 밖의 괴로움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지 않다.
그는 뜻을 내는 중간 대상에서 의식의 대상을 내는데,
그가 인식 자리인 제 성품[自性]에 편승하여 인식 모양을 만들어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거든,
하물며 다시 중생들이 느낌에 따라 뜻이 어지러워짐이겠는가?”라고 말했다.
■ 자연인 지혜를 가진 그 사람을
가장 제일의(第一義)라고 말하리.
뜻으로 만든 느낌 그 자체가
고락행(苦樂行)을 벌써 내나니.
마치 이 마음과 마음 법이 안에 의지하고
밖으로는 모든 받아들임[入]을 내는 것과 같다.
【문】★★무슨 까닭으로 안에 의지하여 생기고 밖에 의지하지 않는가?
【답】★★어떤 이는 “안에 의지하여 생긴다”고 말했다.
【문】평등하게 걸림 없는 그 중에 그에 의하여 안에서 생기고 밖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마치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데,
이를 안이라 말하고,
이를 바깥이라 말한 것과 같다.
【문】어찌 이것이 뒤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데 이를 안이라 말하고 이를 바깥이라 말한다면,
그와 같은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 것은 이미 안에서 생기는 것이고 바깥은 아닌 것인가?
【답】★★어떤 이는 “안에는 미묘한 사실이 있고 밖에는 없다.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안의 제 성품이 성취된 것이요,
바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바깥 성품도 역시 스스로 성취하나니 자신의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어떤 이는 “안이 친근하고 바깥은 친근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처소가 없으면 가까움과 먼 것이 없고
이미 돌아간 대상도 둘 다 함께 서로 가깝고
둘 다 함께 서로 의지하여 생기는가?
【답】★★어떤 이는 “안에서 생기고 바깥에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바깥도 역시 생기는 것이 제 몸 안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어떤 이는 “안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만든다”고 말했다.
【문】바깥도 역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만드는 것이 제 몸 안에 빛깔ㆍ냄새ㆍ맛ㆍ닿임과 같은가?
【답】★★어떤 이는 “안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나니,
상ㆍ중ㆍ하란 마음과 마음 법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했다.
【문】바깥에도 또한 상ㆍ중ㆍ하가 있나니,
상ㆍ중ㆍ하란 마음과 마음 법으로부터 생긴다.
다시 파리 소리가 일으키는 귀의 인식[耳識]과 다시 힘껏 치는 북소리와 다른 것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안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문】차제인연(次第因緣)도 또한 견고하지 못한데 그로 하여금 서로 의지하여 생기게 하는가?
【답】★★어떤 이는 “안이 곧 증가한다”고 말했다.
【문】바깥도 역시 증가함이니,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 중에는 안이 증가하고 바깥이 증가함이 아니다.
이 내용은 어떠한가?
온갖 모든 유위법(有爲法)이 각각 증가함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안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조작하고 바깥이 아니니
눈썹을 그리고 눈을 점안하여 빛깔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말한 바대로 갑절이나 그리어 확대하여 보도록 하고
높은 소리로 나에게 말하되, “잘 들어라”고 하라.
★★어떤 이는
“안에 의지한 모든 받아들임이니
이 스님의 뜻은
‘짓는 바가 마음과 더불어 함께 있고
식(識)은 네 요소에 의지하여
저것이 각각 수승한 모든 감관으로 충족함이 있다’고 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제 성품의 의지가 미묘함이며
멀고 가까움,
취함과 버림이요,
아래에는 견고한 증가함이 없고
스님 뜻에는 식이 뒤에 있다.
마치 이 마음과 마음 법이 안의 의지[依]와 바깥 연(緣)으로 인연에 들어 생기는 것과 같다.
【문】★★무슨 까닭으로 안에는 무너짐이 있고 밖에는 그러하지 않는가?
【답】★★어떤 이는 “이는 현재의 사실이니
마치 저 해 그림자를 보매 눈이 곧 무너짐이 있어도
해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문】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니,
무슨 이유로 눈이 무너짐이 있어도 해의 허물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어떤 이는 “안의 모든 감관이 속박된 것이요,
바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바깥도 역시 모든 감관이 속박되는 것이 자기 몸 안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어떤 이는 “안에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문】바깥에도 역시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
아라한은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없는데,
그로 하여금 무너지지 않게 하려 하는가?
어떤 이는 “안에 의하여 모든 받아들임[入]이 생기고 바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가?
【답】★★어떤 이는 “안에 친근함이 있게 되고 바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문】여기에 받아들임의 처소가 없어서 받아들이는 곳이 있지 않는데,
어찌 가까움과 먼 것이 있는가?
이미 돌아간 대상은 둘 다 함께 친근하는데 그 둘에 의하여 생기게끔 하려는가?
【답】★★어떤 이는 “안에서 이미 생기고 바깥은 그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바깥도 또한 다시 생기는 것이 자기 몸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어떤 이는 “제 성품이 머무는 것이요,
바깥은 그러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바깥도 역시 제 성품의 머무는 것이 자기 몸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존자께서는 “만일 스스로 의지한 물건이 마음과 마음 법을 전환시켜 거기에 있어서 머무른다면,
바깥과 안의 모든 받아들임인 저 모든 법이 이리저리 모든 감관의 무너짐을 내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현재에 모든 감관이 속박되고
조작에 의해 나라고 여김이 있다.
친근과 온갖 조작되는 바와
제 성품이 나로부터 있었네.
사리불(舍利弗)존자는
“저 여러분의 좋은 눈이 안으로 받아들여도 무너짐이 없다.
그 빛깔이나 광명을 보더라도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또한 눈의 인식이 없나니,
깊이 생각하는 이여,
어느 것이 옳은가?”라고 말하였다.
【답】★★어떤 이는 “차제연(次第緣)이 그 생각함이다”라고 말하였다.,
【문】치우쳐 차제연이 없기도 하는가?
【답】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일체 식신(識身)이 현재에 있나니 만일 현재에 있으면 저것이 곧 생긴다.
어떤 이는 “자연인(自然因) 저것은 곧 생각함이다”라고 말했다.
【문】치우치게 자연인이 없을 때도 있는가?
【답】없지 않을 때가 없고 항상 평등함이 있지 않다.
【문】치우치게 평등하지 않음이 있는가?
【답】평등함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이는 “대의(大義)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만일 대의가 없으면 어찌 식(識)이 나지 않겠는가?
【답】나지 않는다.
【문】만일 채찍이나 막대로 구타하여도 그가 식을 일으키지 않는가?
【답】대상의 힘 때문에 저 식이 곧 일어난다.
혹 일어나지 않을 적이 있나니,
무상삼매(無想三昧)나 멸진삼매(滅盡三昧)나 그 밖의 선정에 든 따위는 이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마음을 일으킨 자를 앞서 이미 말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음에 기억한 바를 식(識)이 곧 그를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말과 생각이 그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문】뜻과 생각함이 차별이 없는가?
어떤 이는 “마음과 마음 법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 생각함이다”라고 말했다.
【문】모든 상응하는 법이 그 생각함이어서 모든 식(識)을 내나 식은 생각함이 아니니,
이 내용은 어떠한가?
어떤 이는
“생각함에서 중생의 인연이 생기고
식의 성질이 모든 속박을 일으킨다 함이
그것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차제에서 저 인연이 있게 되고
대의(大義)로 인해 비춰 밝힌다.
희망이 중생을 만들기도 했으며
상응함과 모든 슬기를 만들었네.
그것을 내어 사유(思惟)함 있는 것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차제연으로 저 사유가 생기는 것이 내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문】그는 사유를 내지 않는다.
만일 낸다면 차별이 있지 않을 것이요,
만일 내지 않는다면 말한 바가 그 사유가 아니다.
저 눈의 인식이 생기게 됨이 아니니,
이는 곧 상위(相違)이다.
5사(事)도 또한 다시 그와 같은가?
【답】★★어떤 이는 “저 사유에서 마음 법과 심상응행(心相應行)이 생기는데,
저 사유가 생기는 것은 심상응행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저 마음을 내어 마음이 일어나는 법이 저 사유다”라고 말했다.
다시 다음으로 생기는 것이란 자연으로 만들어진 법이니,
마치 불꽃과 광명이 앞뒤가 서로 인해 생기는 것과 같다.
【문】★★어떻게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는가?
【답】★★어떤 이는 “불꽃이 있으면 곧 광명이 있게 되고,
광명이 없으면 불꽃이 없나니,
그 중에서 불꽃이 광명으로 인해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만일 둘이 함께 일어난다면 어떻게 불꽃에서 광명이 있고 광명이 없으면 불꽃이 없음을 알게 되는가?
【답】불꽃에서 생긴 모습은 타는 것이고, 광명이 아니다.
【문】어떻게 불꽃이 광명을 내고 타는 것은 광명이 아님을 알게 됩니까?
【답】불꽃이 얽힌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불꽃에 얽힌 바는 무엇인가?
【답】★★어떤 이는 “만일 불꽃이 있을 적에는 광명이 때를 따라 상응하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불꽃이 없어지면 광명도 없어지나니,
그러므로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둘 다 함께 없어진다고 할 때,
불꽃이 없어지면 광명은 없어지거나 광명은 없어져도 불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어떤 이는 “불꽃이 치성하면 광명이 있다는 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합해 모여 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불꽃이 크면 광명도 크고 불꽃이 짧으면 광명도 짧다”고 말했는데 이것 역시 앞에서 이미 말했다.
어떤 이는 “불꽃이 깨끗하지 못할 적에는 광명도 곧 깨끗하지 못하고
불꽃이 깨끗하면 광명이 또한 깨끗하다고 하는 그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광명을 보는 것은 불꽃이 그 근본이 되나니,
그로 말미암아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광명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된다면 기름 심지가 광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답】광명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광명 때문에 불꽃을 찾게 되는 것이요,
불꽃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되는 것이다.
【답】★★어떤 이는 “불꽃 때문에 그 광명이 있는것이 아니고 상응하여 광명이 있는 것이니,
불꽃과 광명이 가장 미묘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둘이 함께 생기면 미묘하다 말하니,
미묘하지 않다 말하는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어떤 이는 “본래 불꽃이 일어나서 광명이 생긴 것이니,
그로 말미암아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고 말했다.
【문】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나니 불꽃에 광명이 없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답】그것 역시 비유가 되지 않나니,
저 불꽃이라고 느끼어 번갈아 서로 반연할 때에는 광명이 없다.
그 광명은 그 불꽃이 회전한 것이 아닌 것처럼,
희망하는 감각이 또한 서로 생기지 않을 때에는 곧 교만한 뜻이 있다.
제각기 무너지는 모양이며
희망과 상응하는 행(行)이다.
청정한 이치를 통달한 그것과
합해 모임은 앞에서 말함과 같다.
마치 6식신(識身)이 반드시 과거의 자연인(自然因)에 의지함과 같다.
뜻이 어긋나지 않고 달리 반연하지 않으매 또한 그릇되지 않는다.
【문】★★무슨 까닭인가?
한사람이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지만 6식신은 둘이 함께 일어난다.
【답】★★어떤 이는 “하나의 차제연(次第緣)에 하나의 식(識)이 머무른다”고 말했다.
【문】하나의 식과 상응함에 낱낱이 식이 서로 의지함인가?
【답】★★어떤 이는 “하나는 저 생각함이니,
하나의 식이 곧 상응하여 머무른다”고 말했다.
【문】만일 하나의 식이 상응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의 식인가?
【답】★★어떤 이는 “하나의 감관이 하나의 식에 의해 상응하여 머무른다는 것은
하나의 식이 상응하매
낱낱 식이 머무름이다”라고 말했다.
일체 중생들이 반드시 받을 과보를 제가 지어서 받게 되는 것처럼,
거기에는 미래와 현재에 지은 바가 있다.
【문】★★무슨 까닭으로 한 사람이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아 다섯 갈래[五有]는 전환되지 않는가?
【답】★★어떤 이는 “한 갈래[趣]의 결사(結使)가 치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한 갈래에서 온갖 과보를 받는다”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식(識)과 함께 상응한 연후에 낱낱 식을 일으키나니,
일으켜서 지은 과보 행위가 모두 식 종자에 응한다.
이러하므로 그것을 아나니,
만일 중생이 없으면 일찍이 있지 않은데 생겨 있는 것이 곧 열반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문】★★무슨 까닭으로 중생이 줄어짐이 없는가?
어떤 이는 “그대가 그 수효를 계산하겠는가?
그러한 중생에 대해서 줄어듦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계산할 수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줄어듦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답】★★어떤 이는 “중생이 무궁하다.
그러므로 그 줄어듦을 알지 못한다.
비유컨대 큰 바닷물이 한량없으므로 천 개의 병을 가지고 가서 퍼내더라도 또한 줄어듦이 없는 것처럼,
그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했다.
【문】큰 바다에는 강물과 그 밖의 샘물이 모두 거기에 가 모이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본래 없는데 지금은 있는가?
【답】딴 세계의 중생들이 이쪽에 온 것이다.
존자께서는 “저 세계에 중생은 줄어듦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문】★★그 내용이 어떠한가?
【답】★★중생이 딴 세계에 노닐면서
성현의 도를 가지고 세계를 벗어나서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문】★★그 뜻이나 성품은 어떠하며 어떠한 희망이 있는가?
【답】★★마땅히 이렇게 관찰을 해야 할 것이니
이 3취(聚) 중생은 줄어듦만 있고
더함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이는 “그대가 그러한 수효를 계산하겠는가?
그러한 중생은 줄어듦이 없다.
만일 세지 못한다면 누가 그 줄어듦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한량없이 지은 바 중생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같다.
존자께서는 “어디에나 줄어듦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문】★★그 사실이 어떠한가?
【답】★★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한 “반드시 세(世)가 있는 것이 틀림없고
사취(邪聚)가 있는 것은 사라진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문】★★만일 그렇다면 그 내용은 옳지 못하니 지금에 있고 여기는 없어짐과 같다.
이와 같은 3세(世)에서 1세 안에 미래는 줄어듦만 있고 더함이 없으며,
1세 안에 과거는 더함만 있고 줄어듦이 없다.
무슨 까닭으로 미래 세상은 줄어듦이 없고 과거는 가득 참이 있는가?
【답】★★어떤 이는 “그대가 그러한 수효를 계산하는가?
과거와 미래에 그러한 수효가 있는가?
줄어듦이 있는 것을 알고 만일 계산하지 못한다면
누가 그 줄어듦이 있는 것을 아는가?”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는 이미 없어지고 미래는 생기지 아니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처소가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한량이 없다”고 말했다.
세존께서는 “두 법을 비추어 밝혀야 한다.
왜냐 하면 세(世)는 처소가 없고 사실과 상응하는 인연으로 생기나니,
이미 생김과 곧 무너짐이 그 사실이다중생이 늘아나고 줄어드는 것에 대해
성인은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어느 누구도 계산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래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고 만약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또한 허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억제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범지(梵志)를 억제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깨달음에 나아가는 것인데
중생들은 형상을 버리지 못하고 사물을 숭상한다.
만일 적정삼매(寂靜三昧)에 들면 한량없고 가없는 복이 되나
그는 다 깨끗함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문】★★저 삼매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답】★★어떤 이는 “한량없고 가없는 복이 그 반연이다”라고 말했다.
【문】지금에 다 깨끗하지 않은가?
【답】그것은 스스로 알지 못한다.
【문】만일 스스로 안다면 그것은 무엇을 반연하는가?
만일 깨끗함이 한량없으면 그것은 삿된 슬기가 아닌가?
【답】★★어떤 이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여김은
마음을 그 내용이라 풀이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깨끗한 것을 깨끗하다 말한다면,
마음을 “항상함이 아니요 항상함이 없다”고 풀이함이니,
마음을 그 내용이라 풀이함을 해설한 것이다.
【답】★★어떤 이는 “일체 고요함이란 그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니,
저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문】지금에 제2선(禪)에 들면
그 때에는 눈으로 누런 것을 다 볼 것이니,
그러면 한동안 제 모양[自相]이 무너지는가?
【답】★★어떤 이는 “깨끗함이 저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누가 그런 삼매가 없는가?
【답】생각함에 빈틈이 없을 때에 그러한 삼매가 있다.
【문】일체 삼매도 또한 빈틈이 없는데,
일체 삼매를 적정삼매로 보려고 하는가?
【답】일체 제 모양으로 서로 느낌이 아니요,
일체 한량없는 모양을 만듦도 아니다.★★
만일 제 모양으로 한량없는 모양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행인의 삼매[行人三昧]라고 한다.
존자께서는 “깨끗함이 그 인연이니
그가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불타는 섶으로 인연하여 연기가 일어남과 같다.
모든 인연은 각기 서로 의지하여 깨끗함이 생기나니,
그와 같이 모든 상응함과 모든 인연이 일어나게 된다.
마땅히 이러한 관찰을 해야 할 것이다.
저 삼매를 불순하다 말해야 하고 순하다 말해야 하는데
위의 5사(事)와 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또 존자께서는 “마땅히 불순함이 아니고 차츰차츰 순함이 가까워진다”고 말씀하셨다.
먹는 것을 사람이라고 관찰해야 한다지만
그러나 먹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문】★★저 어리석게 관찰하는 이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답】★★어떤 이는 “먹는 것이 그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저것은 어리석은 관찰이 아니고 생각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 밖의 생각으로 먹는다면 다시 딴 인연이 있을 것이니,
고요한 것으로 고요한 인연이 없다고 하겠는가?
【답】★★어떤 이는 “사람이 그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먹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닌가?
【답】그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만일 스스로 안다면 나라는 것이 그 인연인가?
다시 저 어리석게 관찰하는 이는
이곳에서 먹고 그를 바라고 찾아 구하나니,
저 어리석게 관찰함을 마땅히 “순함이다”라고 말해야 되는지, 마땅히 불순하다고 말해야 되는지,
【답】★★위에서 두 사실[二事]을 설명한 것과 같다.
존자께서는 “마땅히 ‘맛에 순응하여 애착하는 것이 그 상대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골쇄(骨鎖)에 의하여 약간의 생각을 일으켰다면
내 몸도 골쇄로 된 것이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문】★★저 생각은 무엇을 반연하는가?
【답】★★어떤 이는 “골쇄가 곧 그 반연이다”라고 말했다.
【문】몸은 골쇄가 아니다.
【답】그것 역시 골쇄로서 피부와 살이 얽힌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그 반연이니
그는 골쇄로서 피부와 살이 얽힌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저 생각은 몸이 아니다.
만일 골쇄라는 생각으로 관찰한다면 자신에 반연함이거늘,
푸른 것으로 하여금 누런 빛깔에 반연하게 하겠는가?
다시 그 내용인 생각은 저 자신에 반연했는가?
【답】★★분별과 희망인 저 모양을 마땅히 순함이라 말하고
마땅히 불순함이라고 말함은
위에서 두 사실[二事]을 설명한 것과 같다.
존자께서는 “마땅히 순함이라고 말함은
그 상대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4 게품을 마친다.
느낌과 두 마음과
불꽃ㆍ그림자ㆍ광명ㆍ줄어듦이며
일찍이 없었던 취(聚)들과
푸름ㆍ먹음ㆍ골쇄 따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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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승 12부의 하나인 미사색부(彌沙塞部)를 가리킴.
상좌부(上座部)의 말파(末派)로서 화지부(化地部)와 정지부(正地部)라 번역한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lrc
Lab value 불기2564/04/12/일/09:17
● 난해한 논서의 접근 방안
처음 『존바수밀보살소집론』을 대하면서 도대체 무슨 내용을
무슨 취지로 논의하는 지 자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마치 재판정에서 진행하는 소송처럼
분명히 논서 안에서 갑론 을박이 제시된다.
그런데 정작 누가 어떤 주장을 어떤 취지로 어떻게 서로 달리하는지 자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떤 이는 자꾸 질문을 하는데
거기에 존자라는 이의 주장 내용도 있다.
그리고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어떤 이의 견해라는 내용도 제시된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주장이 어떤 이가 어떤 취지로 제시하는 주장인지 자체가 다 모호하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가장 먼저
도대체 이 논의가 어떤 효용을 얻고자 진행하는 것인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파악되면 이제 각 부분에서
맥락을 통해 각 주장의 차이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각 단어나 표현이 갖는 의미도 또 그런 바탕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 제시된 색상이란 표현이나 물질이란 표현도 사정이 같다.
이 하나만 붙잡고 살펴도 페이지가 가득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위와 같이 접근하면 이해가 쉽게 된다.
결국 기존에 살펴왔던 논의와 성격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왜 색이나 색상을 놓고 따지는가.
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색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색이나 색상이라고 표현했다가 갑자기 물질이라고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은 각기 무슨 의미인가도 이해하게 된다.
원문과 함께 살펴보면 물질이란 표현은 색이란 표현을
그처러머 달리 번역 표현한 것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내용을 파악하면
결국 생사현실에서 겪는 괴로움[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논의를 진행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을 대하며 일으키는 망집이 결국 생사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근본원인이다.
따라서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실에서 대하는 현실내용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한 주체가 눈을 떠서 대하거나 귀로 듣는 것들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첫문제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먼저 넓은 의미의 색과
좁은 의미의 색부터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상(相)과 상(想)도 구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넓은 의미의 색은 감각현실 일체를 의미한다.
즉 색성향미촉 전체를 가리킨다.
즉 눈을 의존해 얻는 내용 전체,
귀를 통해 얻는 내용 전체..를 모두 가리킨다.
그런데 좁은 의미의 색은 오직 눈을 통해 보고 얻는 내용만 가리킨다.
한편 상도 마찬가지다.
상이란 표현과 관련해서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을 우선 구분해야 한다.
여기서 상(相)은 일으킨 상(想)을 바탕으로
감각현실 부분에서 잘라 취하는 일정 부분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바위가 어떤 것인가라고 물을 때 상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런 부분이다.
또 영희나 자신이 어떤 것인가라고 물을 때도 사정이 같다.
그리고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일정부분이 바위상이고 영희상이고 아상이고 그렇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눈을 감거나 해도 여전히 자신의 마음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 따로 있다.
이는 결국 상(想)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한 주체의 마음에서 일으키고 얻어지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 주체와 관계하지도 않고 그대로 있다고 할 실상((實相)을 또 문제삼고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 각각이 조금씩 문제삼는 측면이 다르다.
그래서 이것을 서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서로 혼동하고 구별해내지 못하면 논의를 살피기 힘들다.
현실에서는 대부분 영희상이나 바위상을 취하고 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상태가 바로 잘못된 망상을 일으켜 임하는 상황에서 일으키는 증상의 하나다.
그런데 사실은 한 주체는 감각을 얻을 때 전체로서 하나의 내용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내용과 이런 영희상이나 바위상의 관계도 또 문제가 된다.
자신이 눈을 뜨게 되면 전체로서 하나의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나서 일정부분은 바위라고 여기고 취한다.
또 다른 부분은 영희라고 여기고 취한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색성향미촉 전 영역에서 그런 형태로 이뤄진다.
음악실에서 한 사람이 영희를 부른다고 가정해보자.
'영'이라고 부를 때 '희'라는 소리는 없다.
"희'라는 소리가 들릴때 '영'이라는 소리는 없다.
그리고 영희라는 소리가 들리는 상황에서 피아노 소리도 들리고 바이올린소리도 들린다.
이런 것이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유견유대 무견유대 등을 구별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색을 문제삼는 경우다.
그렇지 않고 좁은 의미로 눈으로 얻는 색만 문제삼으면 처음부터 무견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증상이 결국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겪는 잘못된 망상과 관련된다.
알고보면 색성향미촉은 각각 옆 부대에서 나타나는 내용들간의 관계, 즉, 부대상황(附帶狀況)의 관계에 있다.
어떤 이가 손을 부딪히면서 손뼉소리(성)를 들을 때
마치 자신이 눈으로 보는 손바닥이 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 색이 그 성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다 제각각 다른 영역에서 일으키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마음안 내용이다.
예를 들어 마음 밖에 벽돌을 하나 놓여 있다고 해보자.
이 상황에서 눈으로는 그런 색으로 본다.
그리고 귀로는 그런 소리를 듣는다.
...
그리고 손으로는 그런 촉감을 느낀다.
이런 관계다.
그리고 이들을 각 영역에서 함께 얻는다.
그래서 자꾸 반복하면
마치 자신이 그런 색을 대상으로 대해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러나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자신이 일정한 소리를 대상으로 삼아 눈으로 그런 색을 보게 된 것이라고 여기면 잘못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이들이 서로 부대상황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 색성향미촉의 내용을 얻게 한 실재 내용이 마음 밖에 따로 있다고 추정하기 쉽다.
그런데 각 영역 내용은 a + b 가 결합해 화합해서 달라진 내용이다.
그리고 정작 마음 밖 내용은 마음이 끝내 얻어내지를 못한다.
앞에서는 벽돌로 그런 내용을 비유했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색성향미촉은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하다.
그리고 그 서로간에 공통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들 내용만 얻는 상태에서 아무리 이들 내용을 비교해 살펴도
마음 밖에 있다고 가정한 벽돌의 내용을 파악해낼 도리는 없다.
그리고 이런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으키는 관념내용을 여기에 더해서 판단해도 마찬가지다.
한 주체는 이들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을 스스로 다 얻는다.
그러니 스스로 하나씩 비교해보면 이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이 눈을 감고 생각하는 영희란 생각이 그런 감각현실 그 자체인가.
또 반대로 그런 색,성,향,미,촉 각각이 그런 생각내용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런 상호관계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이와 관련해 일으키는 여러 망상증상을 쉽게 제거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논서에서 얻고자 하는 논의 효용을 먼저 잘 파악하고 대하면 내용 이해가 쉽다.
다음 부분에 그런 내용들 일부가 제시되고 있다.
...
【문】그 하나의 생각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하나의 생각 중에는 애욕의 모든 때[垢]에 집착되어
온갖 경계에 묶인 바가 되었으나 끝내 묶이지 않나니,
때문에 온갖 결박이 곧 약해지게 된다.
【문】그 온갖 결박[結] 중에서도 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장차 감로(甘露)법에 이르게 되는 그것이 있다.
【문】그 중에 서로 감로법에 이르게 되는 그것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의생신(依生身)과 의생의(依生意)에서는 온갖 괴로움을 받는 그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몸과 뜻[意]과 온갖 괴로움이 이미 지난 과거가 된다.
...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64/04/11 |
○ 2019_1106_115229_canon_ab8_s12.jpg
♥ 잡담 ♥약점잡힌 협박과 협상의 차이 알고보면 코로나 바이러스 다음에는 토로나 바이러스가 또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냥 처음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만 그대로 곧바로 믿고 구매하면 그것도 곤란하다. 예를 들어 코코넛 하나가 필요할 때 이것을 모두 직접 자신의 힘으로만 구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나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다.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6172#5787
sfed--존바수밀보살소집론_K0963_T1549.txt ☞존바수밀 sfd8--불교단상_2564_04.txt ☞◆vbcf5787 불기2564-04-11 θθ |
■ 선물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색계ㆍ무색계의 멸제(滅諦)를 반연하여 얻은 무루지(無漏智)로서,
욕계의 멸제를 관하는 법지(法智)와 비슷하므로
유지(類智)라 한다.
상(上) 2계(界)의 멸제에 미(迷)한 견혹(見惑)을 끊는 지혜.
답 후보
멸류지(滅類智)
명성(冥性)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
묘고산(妙高山)
묘촉탐(妙觸貪)
무공용지(無功用智)
무기법(無記法)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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