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5-15_불설보우경_002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기2564-05-15_불설보우경_002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5. 15. 07:03



®

k0133t0660
『불설보우경』
K0133
T0660

제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불설보우경_K0133_T0660 핵심요약



『불설보우경』 ♣0133-002♧





제2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불설보우경



해제보기

▸ 불설보우경 제2권
달마류지 한역
장용서 번역◂


“다시 이르니,
선남자야,

▸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인욕의 원만을 얻으니,
어떤 것들을 열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안으로 참는[內忍] 원만이요,
둘째는 밖으로 참는[外忍] 원만이요,
셋째는 법에서 참는[法忍] 원만이요,
넷째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참는[隨佛敎忍] 원만이요,
다섯째는 분한(分限)이 없이 참는[無分限忍] 원만이요,
여섯째는 분별없이 참는[無分別忍] 원만이요,
일곱째는 일을 기다리지 않고 참는[不待事忍] 원만이요,
여덟째는 성냄이 없이 참는[無恚忍] 원만이요,
아홉째는 불쌍히 여겨 참는[悲忍] 원만이요,
열째는 서원을 세워 참는[誓願忍] 원만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안으로 참는 원만인가?
선남자야,
모든 보살들이 안에 있는 근심ㆍ슬픔ㆍ고통ㆍ걱정[憂悲苦惱]**을
능히 편안히 참아
마음에 머물러 핍박됨이 없음을 말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안으로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밖으로 참는 원만인가?
선남자야,
모든 보살들이 남에게서 더러운 말,
꾸짖는 말이나 부모나 친속,
아차리야(阿遮利耶)나 우파타야(鄔波馱耶)를 훼방하거나 꾸짖는 말을 듣거나,
▸ 부처님ㆍ법ㆍ승가를 비방하는 것을 들었을 적에,
보살은 듣고 나서 화내거나 원한을 하거나 앙갚음을 하지 않고
또한 저 성냄에 따라 끌리지도 않아,
저 마음의 괴로움을 참아 견디어 능히 편안히 머무는 것을 말함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밖으로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법에서 참는 원만인가?
모든 보살들이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 가운데의 일체의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의 뜻에서,
오는 것도 없고 간 것도 없이
자성이 고요하여 분별을 여의고
자성열반을 취함을 말함이니,
보살은 듣고 나서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아서 이런 생각을 가지니,
자기가 만일 여러 가지 깊고 묘한 법을 알지 못하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므로,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여러 법을 거두어 취하여 생각하고 닦아 익혀서
마음에 믿고 이해함을 내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법에서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참는 원만인가?
모든 보살들이 만일 화를 내어서 손해가 되었을 때에
보살은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성냄은 어디로 쫓아 일어나며 어디로 쫓아 없어지며,
이는 누가 일으킨 것이며,
어째서 일어나며,
반연한 데가 있는가?’ 할 것이다.
보살이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능히 일어났던 원인도 이미 없고,
능히 없어진 원인도 또한 벌써 없으며,
능히 일어남이 이미 없으니 일어남을 받는 바도 없이 되어서
끝내는 반연한 바도 모두 없이 되었음을 말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보살은 편안히 참아서 머물러 있으므로,
화내는 마음이 반연하여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서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분한(分限)이 없이 참는 원만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낮에는 참고 밤에는 안 참는 것이 아니며,
밤에는 참고 낮에는 안 참는 것이 아니며,
자기 나라에서는 참고 남의 나라에서는 안 참는 것이 아니며,
유명한 이에 대해서는 참고 유명치 않은 이에 대해서는 안 참는 것이 아니며,
이름 없는 이에 대해서는 참고 이름 있는 이에 대해서는 안 참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어느 때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이름이 났거나,
이름이 안 났거나,
모두 모조리 능히 참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분한 없이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분별없이 참는 원만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은 오직 부모ㆍ처자ㆍ친속이 있는 곳에서만 참고
나머지 다른 데서는 안 참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보살은 아래로 전다라(旃茶羅) 등에게 이르기까지 또한 능히 참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분별없이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일을 기다리지 않고 참는 원만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욕됨을 참는 일을 닦을 때는
재물을 위함도 아니요,
놀라 무서움 때문도 아니요,
은혜를 베풀기 위함도 아니요,
세상을 따르거나 또 부끄러워서 그러함도 아니므로,
이와 같이 보살은 자기 성품대로 늘 참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일을 기다리지 않고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성냄이 없이 참는 원만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가령,
저 성내는 일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였거나,
또는 다른 성내는 일을 만나지 못하였더라도
마음에 늘 참음에 안주하고 있음을 말함이니,
만일 성내는 인연 혹은 성내는 일을 만나거나,
아니면 가볍게 속이거나 주먹으로 치고 손으로 때리고 칼,
몽둥이로 손해를 주고 추한 말로 훼방하고 책망하는 것을 만나면,
보살은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느니라.

‘가볍게 훼방함을 당하는 업은
이것이 나의 지은 바로서 내가 이제 마땅히 받는 것이요,
절대로 부모나 친척이 지은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기쁘게 참고 받아야 한다.
또한 안팎의 땅의 경계에서 받는 것도 아니요,
물ㆍ불ㆍ바람의 경계에서 받는 것도 아니다.’
보살은 이렇게 하여 뒤바뀐 관찰이 없느니라.
인연을 만난 때에 성낼 것이나 성내지 않을 것이나 두 가지를 모두 능히 참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성냄이 없이 참는 원만을 얻은 것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불쌍히 여겨 참는 원만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저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온갖 중생을 위하여
군주나 혹은 왕 또는 적은 왕이 되었거나
큰 재보가 있거나 여러 가지 살림거리가 많을 적에,
만일 온갖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중생들에게 꾸짖음을 당하거나 책망을 당하고,
난동함을 당하였을 때에라도,
종내 성내거나 앙심먹고 손해를 주려는 마음이 없다.

또한 자기만 높다 하여 군주의 위세를 나타내지 않으며,
다만 생각을 일으키기를
‘이 모든 중생들은 이것이 내가 거두어 줄 바며,
내가 마땅히 양육하고 지켜 보호하여야 된다’고 하느니라.
이러므로 말미암아 보살은 손해를 내지 않고,
이 인연으로써 대비심을 일으켜 참음으로 편안히 머물러 있게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불쌍히 여겨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서원을 세워 참는 원만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저 일체의 여래ㆍ응ㆍ정등각 부처님께서 계신 데에서 사자후를 토하여,
맹세코 보리를 닦아 부처가 되어서
생사의 바다와 번뇌의 진흙 속에 들어가서
일체의 모든 중생들을 건져 제도하여야 하니,
보살은 이로 말미암아 성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이러므로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건져 제도하기 위하고,
성숙시키기 위하므로,
성냄을 조복 받아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고자 한다.
만일 스스로 성을 내고 또한 저들에게 손해를 주면 곧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능히 불쌍히 여기는 참음을 내어서 중생을 구제하랴.’

▸ 선남자야,
용한 의사가 있어 침으로 병을 잘 고치는데,
눈병을 앓는 중생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마땅히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
눈의 가림을 없애서 캄캄하게 막힘이 없도록 하여 주겠다.’
그때에 용한 의사는 이 생각을 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가 눈이 어두워진 병을 앓았었다.
선남자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의사가 저 중생의 눈 어둔 병을 능히 고치어
캄캄하게 막힌 것을 없애 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지개보살이 부처님께 말하였다.
“못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지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도 또한 그러하니라.

▸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능히 지혜의 침으로써 세간의 어둠을 끊어주지 못함은
자기의 마음에 무명의 어두운 장애가 있음이니,
어찌 남의 무명의 혹(惑)을 능히 멸해 없애주랴.’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손해치 않고 참음을 닦아 편안히 머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서원을 세워 참는 것의 원만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면 참음의 원만을 얻느니라.








▸ 다시 선남자야,
보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여 정진원만(精進圓滿)을 얻으니,
어떤 것들이 열 가지가 되는가?◂


첫째는 금강과 같은 정진이요,
둘째는 미침이 없는[無逮] 정진이요,
셋째는 두 변[二邊]을 여읜 정진이요,
넷째는 넓고 큰 정진이요,
다섯째는 치열하고 왕성한 정진이요,
여섯째는 성품이 항상한 정진이요,
일곱째는 청정한 정진이요,
여덟째는 같이하지 않는 정진이요,
아홉째는 경박하거나 천하지 않은 정진이요,
열째는 거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정진이니라.

선남자야,
어떻게 하는 것이 금강과 같은 정진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정진을 일으켜 부지런히 닦으면서 중생계에 머물러,
열반을 이루지 못한 이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고,
제도를 받지 못한 이에겐 제도를 받게 하고,
해탈하지 못한 이는 해탈을 얻게 하고,
편안치 못한 이는 편안함을 얻게 하고,
등각(等覺)을 나타내지 못한 이는 등각을 나타내게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부지런히 닦고 있는데,
이때에 하늘의 마군이 그의 단점을 구하여
장차 파괴하고자 보살 있는 데에 이르러 이런 말을 하였다.

‘선남자야,
너는 이 괴로운 정진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나도 일찍이 이와 같이 정진을 시작하여 부지런히 닦으며 중생계에 머물러,
열반하지 못한 이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고,
제도를 받지 못한 이로 하여금 모두 제도를 받게 하고,
해탈하지 못한 이는 해탈을 얻게 하고,
편안치 못한 이는 편안함을 얻게 하고,
등각을 나타내지 못한 이는 등각을 나타내게 하였지만,
이와 같은 정진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고 혹하게 하는 것으로서,
모두 허망된 것이요 진실한 법이 아니다.

선남자야,
이와 같이 부지런히 닦아 정진을 일으킨 이로서 한 중생도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등각을 나타낸 것으로 나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노라.
선남자야,
나는 한량없는 구지(俱胝) 수의 중생이 모두 능히 2승(乘)열반을 증득한 것을 보았노라.
선남자야,
너는 한갓 정진하여 허망한 법을 구하는 것뿐이니,
이 마음을 빨리 버리고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을 여의어라.’

이때에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결정코 이 마군이 나를 괴롭게 하여 파괴하려 하는구나.’
보살은 깨닫고 나서 이것은 마군의 말인 줄 알고 마군에게 말하였다.
‘너의 악한 생각은 나를 파괴하고자 하나,
너는 다만 네 걱정이나 하지 나의 일에는 근심하지 말라.부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다.
≺마라파순(魔羅波旬)아,
일체의 세간은 각각 업을 따라 좆느니라.
또한 스스로나 혹은 공동으로나 업과를 따라 태어나니,
너도 마땅히 이와 같이 업을 따라 가고 나를 혼란케 하지 말라.
의리가 없는 까닭에 긴 밤 동안 고통을 스스로 받으리라.≻’

그때에 마라는 정지(情智)가 좁고 낮아서 부끄러움을 스스로 내어 곧 악을 버리고 몰래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보살은 온갖 마왕과 모든 마군의 무리가 와서 괴롭히고 어지럽게 할 때에 그 단점을 구하여 파괴하고자 하나,
보살의 마음은 마침내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으며,
용맹하고 사납고 굳건하여 물러서지 않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금강과 같은 정진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미침이 없는 얻는 정진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이와 같은 갖가지 정진을 일으킴이니,
여러 나머지 보살들이 비록 오래전부터 깨끗한 업을 쌓아 참된 성(性)에 편안히 머물고 있지만,
마침내 이 갖가지 정진을 일으킨 보살에게는 미치지 못하기를 수분(數分)에도 미치지 못하며,
가라등분(迦羅等分) 내지는 계유(計喩)와 오파니살담분(鄔波尼殺曇分)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온갖 성문이며 연각들이랴.

이 가운데 보살의 발심한 정진의 힘은 일체의 부처님 법을 거두어 잡으며,
다시 능히 온갖 죄업과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법을 버려 버리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미침이 없는 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두 변[二邊]을 여읜 정진인가?
말하자면 보살은 항상 정진을 일으키되,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극히 증상(增上)함으로써 거드름과 교만을 내게 되고,
극히 하열(下劣)함으로써는 게으름을 피우게 되기 때문이니라.
이러므로 정진이 항상 늘거나 줄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두 변을 여읜 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넓고 큰 정진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정진을 발하여
‘원하건대 나는 이와 같이 하여 여래의 묘한 빛깔의 단정하고 장엄함과,
여러 부처님의 소유하신 무견정상(無見頂相)과 원광수호(圓光隨好)의 미묘함을 구족케 하옵소서’ 하며,
또한 다시 이와 같이 정진을 발하기를 ‘원하건대 나는 한량없고 걸림 없는 모든 부처님의 큰 지혜와 큰 위덕(威德)과 승의성(勝義性) 등을 마땅히 얻으리라’ 함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넓고 큰 정진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왕성한 정진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정진을 발하여 온갖 티끌과 때와 허물과 근심을 영영 여의기를
마치 말니주(末尼珠)와 자금(紫金) 등과 같이 온갖 티끌과 때와 허물과 근심을 영영 여의어 광명이 환하게 비추고 훌륭하고 묘하게 번쩍번쩍 빛나는 것과 같다.
보살의 정진도 이와 같이 왕성하여 온갖 티끌과 때와 허물과 근심을 영영 여의니,
어떤 것이 이름이 정진의 티끌이고 때며 어떤 것이 정진의 허물이고 근심인가?

이른바 게으름ㆍ느림과 음식을 알맞게 하지 못하여 그 양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과,
이치에 닿지 않는 뜻을 내는 것과 악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티끌과 때라 하고,
또한 이름하여 허물과 근심이라 하느니라.
보살은 정진으로 영영 능히 이들을 여의어 버리니,
이러므로 정진이 청정하여 때깔이 없고,
곱고 희고 왕성하여 허물과 근심이 없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왕성한 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성품이 항상한 정진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은 모든 위의에서 능히 항상 갖가지 정진을 발하여야 하니,
성품이 항상 부지런하고 용맹스러워서 쉬거나 폐해버림이 없을 때에
몸이나 혹은 마음에 일찍이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성품의 항상한 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청정한 정진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이와 같은 항상한 정진을 일으키되,
있는 바 뭇 죄와 모든 착하지 않은 법ㆍ이익 없는 일ㆍ도에 장애되는 것
나아가 미세하고 극히 적은 불선(不善)과 한 생각의 악한 마음도
또한 발하여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다시 광대한 여러 가지 불선한 법이랴.
이러므로 보살은 모두 다 끊어 없애 열반의 이치에 순응하며,
성도자량(聖道資糧)으로 보리분(菩提分)에 나아가니,
이와 같은 선법을 보살은 닦아 익히어 보리를 늘려 자라게 하고 넓고 크게 하며 원만하게 하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청정한 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같이하지 않는 정진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설사 시방 항하사 세계에 불더미가 두루 가득 차기를 마치 아비지옥과 같고,
저 세계를 지나가서 한 중생이 여러 가지 고통을 받되,
돌아갈 데 없고 의지할 곳 없고 또한 만들 것이 없을 적에 보살은 이 한 중생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 불더미를 넘어 저기에 가서 교화하되 오히려 고생됨을 사양하지 않거늘,
하물며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지 않으랴.
보살은 이와 같이 크게 불쌍히 여겨 정진함에 대하여 외도(外道)와 2승(乘)은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같이하지 않는 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경박하거나 천하지 않은 정진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은 마침내 마음을 내되
 ‘나의 정진이 미약하고 하열(下劣)하며 게으른 까닭으로 보리를 닦아 익히되 하열하며
게으른 까닭으로 보리를 닦아 익히되 얻기 어렵다’고 스스로 이르지 않으며,
또한 다시 생각하되 ‘나는 또한 능히 이와 같이 한량없는 겁과 천만 겁에 고행을 쌓고 모아서 머리에 불타는 것을 끄려고 하듯이 하려고 하여도 보리를 바야흐로 증득함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지 않으며,
이러한 물러서는 마음을 먹지 않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발하니 ‘온갖 지나간 세상의 여래(如來)ㆍ응(應)ㆍ정등각(正等覺)이나 지금 세상의 여래ㆍ응ㆍ정등각이나 미래 세상의 여래ㆍ응ㆍ정등각과 저 모든 부처님이 한량없는 겁 동안에 정진하고 닦아 행하여 모두 등각을 나타내셨다.

이 모든 부처님이 많은 때에 닦고 행해 정진한 것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정등각을 나타내셨으니,
나도 또한 이렇게 응당 많은 겁에 갖가지 행을 닦아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마땅히 얻을 것이다.
3세의 여래께서 똑같이 정진을 행하여서 이미 부처를 이루었으므로
또한 나도 차라리 온갖 중생을 위하여 정진하고 닦아 익혀서,
지옥에 처할지언정 마침내 내 한 몸을 위하여 닦아 익혀 정진하여 열반을 증득하지 않겠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경박하거나 천하지 않은 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의 거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정진인가?
이 보살이 정진을 일으켰을 때에 마침내 맛에 착하거나,
자기는 거만히 하고,
남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니,
누구 지혜 있는 이가 남이 은혜로 생각하는 것을 바라서 정진을 행할 것이겠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거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정진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능히 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는 까닭에 정진의 원만함을 얻느니라.







다시 이르나니,
선남자야,
▸ 보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여 정려(靜慮)의 원만함을 얻으니,
어떤 것들이 열 가지가 되는가?◂

첫째는 복덕을 쌓아 모으는 것이고,
둘째는 능히 많이 싫어하여 여의는 것이요,
셋째는 정진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고,
넷째는 많이 들음을 갖추는 것이요,
다섯째는 뒤바뀌지 않고 부지런히 닦아 받는 것이고,
여섯째는 법을 법에 따라 행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이근(利根)의 성품을 이루는 것이고,
여덟째는 마음에 선교(善巧)를 얻는 것이요,
아홉째는 지관(止觀)의 선교를 얻는 것이고,
열째는 집착(執着)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복덕을 쌓아 모으는 것인가?
모든 보살들이 대승을 사랑하고 즐겨하여 다시 능히 온갖 선근을 쌓아 모으니,
태어나는 곳에서 선지식을 만나 능히 갖가지 묘한 행을 닦아 익히며,
또한 큰 바라문 집이나 찰제리 집이나 큰 거사 집에 태어나기를 항상 원하면 태어난 곳에서 항상 바른 믿음을 얻는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한량없이 넓고 큰 선근을 늘리고 기르며
언제나 선지식을 떠나지 않은 까닭이다.

선지식이란 이는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일체의 보살이시다.
이 보살들로 말미암아 익힌 선근을 더 늘리고 왕성케 하며 세간의 고통과 고달픔의 핍박을 관찰하되 ‘여러 가지 병이 모임은 어리석고 어둠의 가린 바로서 편안히 머물 바 없구나’ 한다.
왜냐하면 이는 욕심으로써 인연한 까닭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능히 많이 싫어하여 여의는 것인가?
말하자면 보살이 앞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제 반드시 이 세간에서 탐욕을 행하지 않겠다’ 함이니,
저 탐욕은 다만 망령된 정으로 말미암아 분별이 생기는 까닭이니,
여러 부처님도 널리 설하시기를 ‘일체의 탐욕은 갖가지의 허물과 근심이다’라고 하셨다.
이른바 욕심은 뾰족한 칼끝 같고 송곳 같고 검(劍)과 같고 또한 날카로운 칼 같으며,
또 독사와 같고 물거품 같고 고기 썩은 것 같아서 냄새가 나고 더러워서 미워할 만한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보살은 싫어서 여읠 마음을 내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고 출가하여 바른 믿음으로 출가생활에 나가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부지런히 닦아 정진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보살이 이미 출가하고 나서 큰 정진을 발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고,
알지 못한 것을 알게 하고,
증득 못한 것을 증득하게 함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많이 들음을 갖추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보살은 앞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많이 들어 받게 되며,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의 깊고 묘한 이치 가운데서 능히 잘 설하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뒤바뀌지 않고 부지런히 닦아 받아 지니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보살이 여러 가지 진리를 마음에 받아 들여 뒤바뀜이 없는 선교(善巧)를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법을 법에 따라 행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보살이 선교(善巧)를 얻고 나서 법을 법에 따라 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바른 말ㆍ바른 업ㆍ바른 목숨ㆍ바른 사유ㆍ바른 진정ㆍ바른 생각ㆍ바른 선정ㆍ바른 소견이니 이것이 보살의 닦아 익히는 도리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이근(利根)을 얻는 것인가?
말하자면 보살이 도지(道支)를 닦고 나서 이근이 밝게 깨달아서 능히 바로 아니,
보살이 이로 말미암아 고요한데 편안히 머물러 온갖 심란스럽고 시끄러운 데 집착함을 멀리 여의고 말 많음을 즐겨하지 않고,
다시 능히 욕심의 심(尋)과 성냄의 심과 해함의 심 및 죽지 않으려는 심을 버리고 권속과 명예ㆍ이익 기르기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에 선교(善巧)를 얻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보살이 앞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선교를 얻어 몸이 항상 고요한 것이니라.
그 마음을 선(善)과 불선(不善)과 및 무기(無記)에서 관찰하여,
스스로 생각하되 ‘나는 지금 마음이 어느 성품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하여,
만일 훌륭한 선에 머물러 있으면 깨끗한 마음에서 믿어 즐겁고 환희함을 낼 것이니,
어떤 것이 훌륭한 선인가?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말함이요,
만일 불선에 머무르면 마땅히 싫어하여 여의고 정진을 내어 일으켜서 문득 능히 여러 가지 불선한 법을 영영 끊어야 하니,
어떠한 것을 이름하여 여러 가지 불선한 법이라 하는가?
탐욕[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을 말함이니라.
탐욕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를 말한다.
어떤 것이 상품의 탐욕인가?
말하자면 이 탐욕은 몸과 마음에 두루 꽉 차서 하열(下劣)한 마음을 따라 순종하여 항상 염착(染著)하여 어느 때에도 부끄러움[慚]과 부끄러움[愧]이 없느니라.
어떠한 것이 부끄러움[慚]이 없는 것인가?

말하자면 탐욕하는 이는 항상 생각하여 탐욕의 경계를 찾아 구하여 마음에 애중(愛重)함을 내서 탐착함을 찬미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부끄러움이 없다고 함이니라.
어떤 것이 부끄러움[愧]이 없는 것인가?
말하자면 탐욕 내는 이는 욕심의 인연을 위하여 능히 부모와 및 다른 높은 이에게 다투고 논란함을 일으켜 가볍게 속이고 손해를 주어 저 탐욕만 중하게 여기니,
이것을 이름하여 부끄러움 없다고 하느니라.
탐욕 내는 이는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쁜 곳에 태어나리니 이런 까닭에 이름하여 더 늘어가는 탐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중품의 탐욕인가?
말하자면 탐욕 내는 이가 탐욕을 행하고 나서 곧 싫증내어 여의고 나서 변하여 뉘우치는 마음을 일으켜 다시 따라 순종하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중품의 탐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하품의 탐욕인가?
말하자면 탐욕 내는 이가 탐욕이 일어났을 적에 혹은 몸을 만지거나 닿거나 겨우 같이 말을 하거나 혹 보고 나서 욕심이 문득 쉬어버리면 이것을 이름하여 하품의 탐욕이라고 한다.
온갖 생활에 쓰이는 물건이 만일 마음에 집착되면 모조리 이름하여 탐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이름하여 성냄이라 하는가?
이 성내는 것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상ㆍ중ㆍ하이니,
어떤 것이 상품의 성냄인가?
말하자면 성내는 이란 갖가지 성을 일으켜 다섯 가지 무간(無間)에서 한 업을 짓거나 혹은 바른 법을 비방하느니라.
바른 법을 비방하는 것은 그 죄가 저 다섯 가지 무간의 업보다 지나치니,
수분(數分)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분(迦羅分:
아주 적은 것)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지는 계산하여 비교하는 것과 오파니살담분(鄔波尼殺曇分:
극소의 수량)에도 또한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날락가(捺洛迦:
지옥)에 태어나며,
혹 사람 가운데 태어나더라도 모양이 참혹하게 검고 눈알이 항상 붉으며,
사람됨이 포악하여 항상 손해될 짓만 행하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날락가에 태어나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상품의 성냄이니라.
어떤 것이 중품의 성냄인가?
말하자면 성낸 이가 죄업을 짓고 나서 빨리 능히 뉘우쳐서 곧 대제(對除)함을 일이키면 이것이 중품의 성냄이니라.

어떤 것이 하품의 성냄인가?
말하자면 성내는 이가 성냄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추악한 말을 내고,
가볍게 여의고 꾸짖고 혐의하여 불선한 업을 모아놓고,
한 찰나나 한 납박(臘縛:
시간의 단위)이나 한 모호율다(牟呼栗多:
1주야의 30분의 1) 사이를 지나서 능히 곧 고치고 뉘우쳐서 대제할 것을 닦아 익히면,
이것이 이름이 하품의 성내는 것이니라.
이 어리석음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음을 반드시 알아두라.
말하자면 상ㆍ중ㆍ하니라.

어떤 것이 상품의 어리석음인가?
말하자면 어리석은 이가 늘 탐욕과 성내는 데에 머물러 근심하고 뉘우침이 일찍이 없음을 이것을 이름하여 상품의 어리석음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중품의 어리석음인가?
말하자면 어리석은 이가 적은 불선(不善)을 일으키고 곧 능히 저 범행(梵行)하는 이 앞에서 드러내어 참회하여 악업을 무겁게 받음을 보지 아니하면,
이것이 이름이 중품의 어리석음이니라.
어떤 것이 하품의 어리석음인가.
말하자면 어리석은 이가 부처님이 만드신 비성계(非性戒) 가운데 조금 훼법하지만 혹 한두 세 번에 능히 버려 여의면 이것은 하품의 어리석음이니라.

보살이 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법에서 모두 능히 막아 그침은 마음의 선교에 말미암음이니,
선교를 얻고 나서는 마침내 저 염착함에 기쁘고 즐거워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마음에 선교를 얻은 까닭에,
만일 무기에 머물면 곧 부지런히 관찰하여 오직 바른 생각을 일으키니,
무엇이 무기인가?

말하자면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마음이 안에도 있지 않고 또한 밖에도 있지 않고 선에도 주하지 않고 불선에도 주하지 않고 비발사나(毘鉢舍那:
비파사나,
觀)에도 머물지 않고 또한 다시 사마타(奢摩他)에도 머물지 않아서,
마음이 하열(下劣)하여져서 그만 잠이 일어나서 마음으로 하여금 어둡게 하니,
마치 사람[士夫]이 극히 깊이 잠을 자다가 처음 깼을 때는 근(根)과 식(識)이 혼미해서 능히 밝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무기의 마음에 머무름도 또한 이와 같으니 무기의 마음이 밝지 못한 까닭이니라.
보살은 이 가운데서 마음이 깨끗하고 용맹스럽고 예리해져서 환희함에 편안히 머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마음의 선교를 얻었다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사마타ㆍ비발사나의 선교를 얻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보살은 마음이 선교하고 나서 여러 가지 법을 환상과 같고 꿈과 같이 관찰하여,
여러 가지 법이 선한 법이며 선한 법이 아니며,
출리법(出離法)이며 출리의 법이 아닌 줄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모든 보살은 온갖 법은 모두 마음을 의지로 삼고 마음을 자성으로 삼고 마음을 우두머리로 삼는 것으로 보아,
마음을 능히 거두어들이어 마음을 잘 조복 받고 마음을 잘 아니,
그러므로 이 온갖 여러 법을 능히 거두어 잘 조복 받고 또한 잘 아느니라.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사마타법을 능히 닦아 익혀서 이렇게 마음을 얽어매고,
이렇게 마음에 그치고,
이렇게 마음에 편안히 머무느니라.
이렇게 사마타를 부지런히 닦는 까닭에 문득 능히 마음의 일경성(一境性)에 편히 머무니,
보살이 마음의 일경성에 머무르고 나서 정(定)에 들어 관찰하여 이생희락(離生喜樂)을 얻느니라.
마음에 기쁨을 얻고 나서 욕계(欲界)의 악(惡),
불선법(不善法)과 유심(有尋),
유사(有伺)를 멀리 여의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행(修行)하여 첫 정려(靜慮)에 머무름이라 한다.

또한 심사(尋伺)를 여의고,
희락에 맛들이지 않고 무상을 관하고 나서,
첫 정려에서 나와 내등정(內等淨)에 머물러 정생희락(定生喜樂)을 얻으니,
이것의 이름이 보살이 제2 정려에 들어감이다.
다음에 기쁨을 싫어하여 여의고 고통을 관하고 나서 사정념(捨正念)에 머물러 바로 알고 마음으로 편히 정수(正受)를 즐겨 하리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사념락(住捨念樂)을 성취하여 제3 정려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여기서 닦아 익히고 머물러서 공해(空解)를 짓고 나서 제4 정려에 들어가 아집을 버려야 하느니라.
아집을 버리므로 고와 낙도 또한 끊어지고 근심과 기쁨이 멸해 없으므로 고락이 아닌 사념청정(捨念淸淨)에 머무니 이것이 이름이 제4의 정려를 닦아 익히는 것이니라.
또 보살이 몸이 허공과 같이 평등하다고 관하여 이미 믿어 알고 나서 여러 가지 색의 생각을 버리고 유대(有對)의 생각[有對想]을 멸하고 갖가지 생각을 여의니,
색의 생각을 버리므로 유대의 생각을 멸하고 다른 생각을 여의므로 가없는 공에 들어가느니라.
이것을 일러 공무변처(空無邊處)를 닦아 익힌다 하느니라.

온갖 공무변을 지나고 나서 식 등이 생겨나 가없는 식에 들어가니 이것을 일러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닦아 머무른다 하느니라.
온갖 식무변을 지나고 나서 소유 없는 데에 들어가니 이것을 일러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닦아 머무른다 하느니라.
무소유처를 뛰어나서 닦아 익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머무느니라.

또 모든 보살은 능히 반연하는 상수(想受)의 마음으로 멀리 여의므로 이름하여 멸정(滅定)에 머무른다고 하느니라.
비록 저 정에 들었으나 마침내 즐겨서 집착하지 않고 저 정에서 나와서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더불어 같이하니,
원망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고 손해를 끼치는 생각을 멀리하여 크고 한량없고 평등하고 둘이 없는 극치의 선을 닦아 익혀 한 방위에서 의해(義解)가 두루 차서 정에 들어 머무는데,
여러 나머지 세 방위와 네 간방위,
위아래의 세간에도 두루하느니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더불어 같이하니,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고 손해하는 마음을 여의어 넓고 크고 한량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없는 극히 선함을 닦아 익혀 한 방위의 끝없는 세계에서 의해가 두루 차서 정에 들어 머물러 있는데,
여러 나머지 세 방위와 네 간방위,
위아래의 세간에도 두루하느니라.

보살이 기쁜 마음으로 더불어 같이하니,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고 손해하는 뜻을 여의어서 넓고 크고 한량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없는 극히 선함을 닦아 익혀 한 방위에서 한 의해가 두루하여 정에 들어 머물러 있는데,
여러 나머지 세 방위와 네 간방 위,
위아래의 세간에도 두루하느니라.
보살이 버리는 마음으로 더불어 같이하니,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여의고 손해하는 마음을 버려서 넓고 크고 한량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없는 극히 선함을 닦아 익혀 한 방위에 의해가 두루하는데,
여러 나머지 세 방위와 네 간방 위,
위아래의 세간에도 두루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집착하지 않음을 얻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보살이 다섯 가지 신통을 얻었을지라도 또한 집착하지 않고 항상 능히 보리의 자량을 바라고 구하여 여러 가지 법을 원만히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정려의 원만을 얻느니라.








▸ 다시 이르나니,
선남자야,
보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여야 반야의 원만을 얻나니,◂


어떤 것들이 열 가지가 되는가?
첫째는 내가 없는 선교[無我善巧]요,
둘째는 업과의 선교[業果善巧]요,
셋째는 함이 있는 선교[有爲善巧]요,
넷째는 나고 죽음에 헤매는데 선교[生死流轉善巧]요,
다섯째는 나고 죽는 것을 버려 여의는 선교[捨離生死善巧]요,
여섯째는 2승(乘)을 얻는 선교[得二乘善巧]요,
일곱째는 대승의 선교[大乘善巧]요,
여덟째는 마업(魔業)을 버려 여의는 선교[捨離魔業善巧]요,
아홉째는 뒤바뀌지 않는 반야를 얻음[得不顚倒般若]이요,
열째는 같은 것이 없는 반야를 얻음[得無等般若]이니라.

선남자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내’가 없는 선교를 얻는 것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반야를 배우는 까닭에 능히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바로 관하는데,
색을 관찰할 때에 남[生]을 가히 얻지 못하고 모임[集]도 가히 얻지 못하고 멸함도 가히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관찰하되,
나고 모이고 멸하는 법[生集滅法]을 모두 가히 얻지 못하느니라.
승의(勝義)로써도 가히 얻지 못하므로 세속은 아니다.
승의와 세속의 모든 법의 자성은 다만 말만이 있고 실체는 가히 얻을 수 없느니라.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살은 긴 시간에 정진을 버리지 않고 여러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하는 때문에 머리를 태우는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 보살은 내가 없는 선교를 얻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업과의 선교를 얻는 것인가?
모든 보살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함을 말함이니,
‘온갖 세간은 자성이 모두 공하기를 마치 꼭두각시 놀리는 곳이나 건달바[健達縛]의 성과 같다.
온갖 중생이 비록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으면 이로 말미암아 성현의 도를 능히 통달하지 못하리라’고 함이니라.

여러 중생은 또 이와 같이 생각하리라.
만일 나라는 것이 없고 및 중생과 수명과 살아 있는 것과
사부(士夫)와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마납박가(摩納縛迦)와 또는 양육하는 이가 없으면
곧 선악의 업과 이숙(異熟)의 과(果)의 체성을 가히 얻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바른 반야로써 여실히 알아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업과의 선교를 얻었다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함이 있는 선교를 얻는 것인가?
모든 보살들이 바른 지혜로써 온갖 여러 함이 있는 법[有爲法]을 깨닫고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말함이니라.
모든 함이 있는 법은 생각 생각에 옮기고 갈려서 오래 있는 모양이 없기가 마치 위태로운 이슬과 같고 비유하자면 폭포가 쏟아지는 것과 같다.
어떻게 이러한 가운데 탐착을 내어 근심을 걱정을 품으랴.
만일 집착을 일으키면 여러 가지 법에 쉽게 부수어지리니,
어찌 슬기롭다고 이름하는 이라면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멸괴(滅壞)하는 법에서 즐겨 집착하여 싫어 여읠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함이 있는 선교를 얻었다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나고 죽음에 헤매는데 선교를 얻는 것인가?
보살이 이렇게 생각함을 말함이니라.
온갖 세간은 무명에 덮인 바로서,
나고 죽음에 항상 처하여 애정에 얽매어 있다.
애정이 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취(取)가 생겨나고,
취가 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의 업이 생겨나고,
업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유(有)로 하여금 서로 이어가게 하고,
유가 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 일어나고,
나는 것이 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고달픔이 있느니라.

뭇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리저리 옮기면서 서로 이어 끊이지 않음이 마치 물 푸는 두레박 바퀴가 오르내리며 바퀴돌이하는 것과 같으니,
나고 죽고 하여 서로 이어감도 또한 이러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보살은 바른 지혜로써 여실히 아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나고 죽음에 헤매는데 선교를 얻었다 하느니라.

보살이 나고 죽는 것을 버려 여의는 선교를 얻었다함은 무슨 말인가?
모든 보살들이 이와 같이 생각함을 말함이니라.
무명(無明)을 여읜 까닭에 여러 가지 행에 집착하지 않고,
여러 가지 행을 버린 까닭에 곧 애정이 없고,
애정을 멀리 여읜 까닭에 곧 취함이 없고,
취함을 능히 여읜 까닭에 유(有)가 서로 이어 가지 않고,
저 유를 버린 까닭에 남이 없고,
남을 능히 여읜 까닭에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고달파함을 영영 끊어 버리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보살은 바른 지혜로써 여실하게 깨쳐 아니,
이것이 보살이 나고 죽는 것을 버려 여의는 선교를 얻었다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2승(乘)의 선교를 얻는 것인가?
모든 보살들이 이렇게 생각함을 말함이니라.
이 법은 능히 예류(豫流)ㆍ일래(一來)ㆍ불환과(不環果)ㆍ아라한(阿羅漢)을 얻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번뇌를 영영 다 없애고 여러 가지 번뇌를 끊어서 다시는 나고 죽어서 이리저리 헤맴을 서로 없애 열반에서 노닌다.
이 법을 생각해서 벽지불은 마치 물소 뿔과 같이 혼자 행함을 얻지만,
일체의 보살은 바른 지혜로써 이 법을 깨쳐 알기 때문에 끝내 취하여 증득하지는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러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니라.
여러 중생을 이익하게하기 위하여 사자후를 짓기를,
‘나는 마땅히 나고 죽는데 머물러 있는 여러 중생의 무리를 제도하려고 큰 서원을 발한 것이요,
나 혼자서만 나고 죽음을 여의려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이것이 이름이 보살이 2승을 얻은 선교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대승을 얻는 선교인가?
모든 보살들이 계를 배우는 가운데서 배움을 관하기를 가히 얻지 못하고,
배우는 바도 또한 가히 얻지 못하고,
계의 얻는 과도 또한 가히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공에 집착하여 단견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함이니,
이것이 이름이 보살의 대승선교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마업(魔業)을 버려 여읨을 얻는 선교인가?
말하자면 모든 보살들은 온갖 악을 여읜 장부라 말함이다.
또한 저 악한 나라 가운데도 살지 않고,
또한 능히 세속의 견(見)을 따라 주술을 닦아 익혀서 제 몸의 이익과 존중하여 공양함을 구하는 것을 멀리 여읜다.
다시 능히 보리의 법을 장해하는 여러 번뇌를 멀리 여의고,
능히 여러 가지의 대제(對除)하는 도를 닦아 익힘을 말함이니,
이것이 이름이 마업을 여의어 버리는 선교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뒤바뀌지 않는 반야를 얻음인가?
모든 보살들이 여러 가지 세간의 경서(經書)ㆍ주술ㆍ공교(工巧)의 처소 가운데서 반야를 닦아 익힘을 말함이다.
항상 여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때문이며,
마침내 자기 몸을 위하여 지혜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몸을 위하여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이양(利養)을 얻기 위하지 않기 때문이며,
마침내 자기의 덕을 나타내기 위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훌륭한 바른 가르침만을 생각함을 일으켜 여래가 지으신 비나야 가운데 공덕을 나타내 보이고,
마침내 다른 도의 여러 가지 소견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이름이 보살이 뒤바뀌지 않음을 얻는 선교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같음이 없는 반야를 얻는 것인가?
말하자면 여러 보살이 배운 바 반야는 2승이나 온갖 세간ㆍ하늘ㆍ마군ㆍ범세(梵世) 및 여러 외도ㆍ바라문 등 8부(部)의 여러 무리,
그리고 온갖 중생보다 뛰어나게 지나쳐서 보살의 반야와 같은 것 없다.
다만 여래ㆍ응ㆍ정등각을 제해 놓고 서는 이것이 이름이 보살의 같음 없는 반야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능히 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면 반야의 원만함을 얻는 것이니라.”

○ [pt op tr]


○ 2019_1106_120004_nikon_Ar28.jpg


○ 2019_1106_105630_nikon_ab36.jpg


○ 2020_0430_131756_canon_exc.jpg


○ 2019_1106_141523_nikon_ct7_s12.jpg


○ 2019_1105_160714_canon_ct19_s12.jpg


○ 2019_1106_093351_nikon_bw24.jpg


○ 2019_1106_085503_canon_bw0_s12.jpg


○ 2020_0211_134407_canon_Ab31_s12.jpg


○ 2020_0211_134259_canon_AR35_s12.jpg


○ 2019_1106_135757_canon_ct35.jpg


○ 2019_1105_161219_nikon_CT28.jpg


○ 2019_1104_170939_nikon_ab41_s12.jpg


○ 2019_1106_105630_nikon_bw0_s12.jpg


○ 2019_1104_121848_nikon_BW21_s12.jpg


○ 2019_1106_111242_nikon_CT27.jpg


○ 2019_1201_163858_nikon_ar45_s12.jpg


○ 2019_1104_171630_nikon_BW21_s12.jpg


○ 2019_1106_111933_canon_Ab31_s12.jpg


○ 2019_1104_133141_nikon_ab41_s12.jpg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ldebert - Le Gouter Extraordinaire.lrc


Lab value 불기2564/05/15/금/07:56





● 세상 일체를 보물로 바꾸는 방안 -안인과 정진

세상에서 보물이라 칭하는 것이 있다.
시장에서 값이 비싸게 거래되고, 희소한것을 보물이라 칭한다.
그외 참되고 아름답고, 선하고, 가치있는 것들을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무언가 자신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고 정신적 불쾌감이나 억울함을 주고
분노나 슬픔을 가져다 주는 것은 보물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세상에서 이런 보물을 잘 찾아서 소지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을
대부분 원한다.

그런데 수행자는 안인을 성취해서
3 계 6 도의 상황 일체를 모두 보물로 대해 사용하게끔 된다.
그래서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무생법인을 증득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어떤 극심한 고통과 억울함과 불쾌를 받을만한 상황에서도 안인을 성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상황에서도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이른다.
그러면 무량한 방편을 취득해 닦아 나갈 수 있다.

망집에 바탕하면
이해관계를 다투다가 약간의 물질적 손해만 받아도 참기 힘들어 한다.
또 약간의 모욕만 받아도 밤잠을 자지 못하고 지내기 쉽다.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자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처럼 반응하기 쉽다.

수행은 스스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다른 중생도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또 그러기 위해서
무언가 행하지 않아야 할 바는 제대도 행하지 않고
무언가 행할 바는 제대로 행해야 한다.

그것이 무언가는 각 상황에서 반야지혜를 통해
어느 경우나 극단을 떠나 무엇이 처비처인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
마치 전기등을 켜는 스위치를 찾아내 켜는 것과 같다.

등이 천정에 있다고 천정의 전등을 만져서 켜는 것이 아니다.
또 바닥에서 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중간 어느 곳에나 다 스위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위치가 있는 곳을 찾아서 스위치는 켜고
다른 곳은 만지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수행에서 행할 바를 행하고 하지 않을 바는 하지 않을 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이 망집에서 바탕해 현실을 대할 때 각 상황에서
행하게끔 되는 반응과는 매 경우 정반대로 다르다.
그래서 망집 상태에서는 이렇게 행하기가 쉽지 않다.

본 바탕의 측면을 100% 다 취하면
현실은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
그래서 시시비비 참거짓 올바름과 그름 자체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망집을 일으킨 중생은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을 겪고 고통받게 된다.
이것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꿈과는 성격이 달라서 무량겁에 걸쳐
다수가 일정 공간과 상황에서 일정한 관게로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받아나가게 된다.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에 걸쳐 사라지지 않고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이를 그대로 이를 방치하기 곤란하다.

결국 수행자는 이 문제때문에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한다.
그리고 99% 본 바탕의 측면과 함께
1%의 생사현실의 측면을 취해서 그 생사현실 안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임한다.

이것이 경전에서 제시한 의사의 비유와도 사정이 같다.
또는 대학교를 졸업해 유치원생을 교육하는 선생님과 사정이 같다.

유치원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이끌어주고자 처음에 임한다.
그런데 유치원생이 집착하는 것을 놓고 같이 바라보면서 처음 치료나 교육방안을 찾게 된다.
그런데 그처럼 유치원생과 같이 반응하고 임하다가 너무 몰입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결국 다른 이를 구하려다가 자신부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이게 된다.
똑같은 상태가 된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경전에 다음처럼 내용이 제시된다.

▸ 선남자야,
용한 의사가 있어 침으로 병을 잘 고치는데,
눈병을 앓는 중생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마땅히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
눈의 가림을 없애서 캄캄하게 막힘이 없도록 하여 주겠다.’
그때에 용한 의사는 이 생각을 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가 눈이 어두워진 병을 앓았었다.
선남자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의사가 저 중생의 눈 어둔 병을 능히 고치어
캄캄하게 막힌 것을 없애 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지개보살이 부처님께 말하였다.
“못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지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도 또한 그러하니라.

▸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능히 지혜의 침으로써 세간의 어둠을 끊어주지 못함은
자기의 마음에 무명의 어두운 장애가 있음이니,
어찌 남의 무명의 혹(惑)을 능히 멸해 없애주랴.’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손해치 않고 참음을 닦아 편안히 머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서원을 세워 참는 것의 원만이라 하느니라.◂


『불설보우경』 ♣0133-002♧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Fugain, le best of (compilation)lrc


● 덫에 걸려들지 않는 수행자

일반적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이들 대부분이
외관상 성인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건다고 하자.
또는 다가가 욕설을 한다고 하자.
또는 다가가 금품을 요구하거나 빼앗아 도망가려 한다고 하자.
이런 각 경우마다 대부분 반응하게 마련이다.

안인 수행이란 이런 경우에 그런 예상되는 반응을 하지 않음도 의미한다.
또 반대로 대부분 하지 않으려 하는 수행을 평안하게 잘 행함도 의미한다.

수행에서는 하지 않아야 할 내용이 있고 열심히 해야 할 내용이 있다.
이 과정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하나하나 다 힘들다.
그런데 그것을 평안히 잘 참으면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수행자도 덫에 걸려들기 쉬운 사례가 있다.

그 수행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내용을 어떤 이가 침해할 때
그런 반응을 다시 일으키기 쉽다.

그런 내용이 경전에서 제시되고 있다.


▸ 부처님ㆍ법ㆍ승가를 비방하는 것을 들었을 적에,
보살은 듣고 나서 화내거나 원한을 하거나 앙갚음을 하지 않고
또한 저 성냄에 따라 끌리지도 않아,
저 마음의 괴로움을 참아 견디어 능히 편안히 머무는 것을 말함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밖으로 참는 원만이라 하느니라.◂


『불설보우경』 ♣0133-002♧


예를 들어 누가 발로 부처님이나 경전이나 스님을 발로 툭툭 찬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다른 것은 다 참는데, 이 경우만은 도저히 못 참겠다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행하면 결국 처음에 조그만 일도 참지 못하고 덫에 걸리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즉 평소에 아무 자극이 없으면 성인군자처럼 지내다가
자기 지갑하나만 누가 가져가도 바로 돌변하는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읽은 경전 내용을 기억하기


▸ 첫째는 안으로 참는[內忍] 원만이요,
둘째는 밖으로 참는[外忍] 원만이요,
셋째는 법에서 참는[法忍] 원만이요,
넷째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참는[隨佛敎忍] 원만이요,
다섯째는 분한(分限)이 없이 참는[無分限忍] 원만이요,
여섯째는 분별없이 참는[無分別忍] 원만이요,
일곱째는 일을 기다리지 않고 참는[不待事忍] 원만이요,
여덟째는 성냄이 없이 참는[無恚忍] 원만이요,
아홉째는 불쌍히 여겨 참는[悲忍] 원만이요,
열째는 서원을 세워 참는[誓願忍] 원만이니라.◂



이런 식으로 6 바라밀 수행과 관련해 내용들이
반복해 나열된다.

하나하나 읽을 때는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덮으면
자신이 이 내용을 정작 어떤 제목의 경전에서 읽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10 가지 항목은 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해도 핵심을 이해하면
매 순간 실천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기억하면 잘 실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도 그런 골격을 가지고
잘 이끌어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전문 수행자를 지향하는 수행자라면
경전 각 구절을 읽고
매번 잘 보관해 지닐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안에 있는 근심ㆍ슬픔ㆍ고통ㆍ걱정[憂悲苦惱]**
이런 구절에서 근심과 걱정은 비슷해 보이는 말이다.
그래서 한자어의 도움을 받아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외울 때 한자어를 통해 짧게 묶어 외우는 것도 한 방안이다.

첫째는 안으로 참는[●內忍] 원만이요,
둘째는 밖으로 참는[●外忍] 원만이요,
셋째는 법에서 참는[●法忍] 원만이요,
넷째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참는[●隨佛敎忍] 원만이요,
다섯째는 분한(分限)이 없이 참는[無分●限忍] 원만이요,
여섯째는 분별없이 참는[無分●別忍] 원만이요,
일곱째는 일을 기다리지 않고 참는[不待●事忍] 원만이요,
여덟째는 성냄이 없이 참는[無●恚忍] 원만이요,
아홉째는 불쌍히 여겨 참는[●悲忍] 원만이요,
열째는 서원을 세워 참는[●誓願忍] 원만이니라.◂



이렇게 각 부분의 핵심 글자 하나씩 뽑아서 묶어 본다.
그런데 이는 『보우경』에서 출제한 다음 문제에 대한 답이 된다.


▸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인욕의 원만을 얻으니,
어떤 것들을 열 가지라 하는가?◂


『보우경』에서 인욕을 원만하게 성취하기 위한 열가지법으로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은 무엇인가. =>
이런 문제에 대해 1주일후,
이 가운데 최소한 10 개의 제목만이라도 기억할 수 있으면
경전을 읽은 보람이 있다.











◆vbvk1794
◈Lab value 불기2564/05/15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fugain - Une belle histoire4.lrc
michel fugain - Une belle histoire4


○ 2019_1201_161255_canon_ar9.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onstantin-Korovin-spring-1917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rautstrauß_IMG_7868_edit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1280px-Sumadera_Ojyuin



♡永仙院 (古河市), Japan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잡담♥읽히지 않는 경전과 재미의 필요성

요즘 과거글도 다시 읽고 정리하고
또 일일단상도 작성하면서 경전을 살피게 된다.

경전 내용은 가치있고 옳다.
그런데 매번 재미있다고 여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전문적 수행자를 지향해가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꾸준히 경전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읽은 내용을 오래 간직해 실천해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문제는 그런 경우에도 이왕이면 재미있고 흥미있게 행하는 것이 좋다.
수행자의 수행자세로 유희 자재 신통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는 유희와 관련된다.

이는 또 수행자가 다른 이에게 경전 연구를 권할 때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재밌다고 여기는 요소와 경전이 잘
결합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만화 경전 이런 것이 쉽게 만들어지기 힘들다.
그리고 잘못하면 양쪽의 단점만 결합시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연구를 해야 한다.
어떤 수행자가 경전을 세상에 존속시키기 위해
1000 년 단위로 경전의 보존작업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대강 고려시대에 한 번 대장경을 조판하면서
살펴봤다고 하자.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대장경을 살펴본 이나 그
정도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가 문제가 된다.

고려대장경을 조판한 후 오늘날까지
도대체 몇명이 얼마만한 분량을 읽었을까.

그리고 통속적인 다른 소설이나 가요 이런 것을 놓고
비교해보면 조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서 널리 알려지고 오래 보존되는 고전작품이 많다.
그런데 대부분 그 가운데 제목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또는 제목만 겨우 아는 경우도 많다.
고려대장경이 어떤 경우에 해당되는가가 의문이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5/k0133t0660.html#1794
sfed--불설보우경_K0133_T0660.txt ☞제2권
sfd8--불교단상_2564_05.txt ☞◆vbvk1794
불기2564-05-15
θθ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 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부처님만이 가지 10력(力)의 하나. 중생들의 지난 세상 일을 아시는 부처님 지혜 힘. 그 범위는 1세(世)로부터 천만세(千萬世)의 전생을 아신다 함.

답 후보
● 숙명력(宿命力)

순불고불락수업(順不苦不樂受業)
습기(習氣)
승가(僧伽)
승려(僧侶)
승의제(勝義諦)
시무외(施無畏)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