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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2-18_대반야바라밀다경-K0001-597 본문
『대반야바라밀다경』
K0001
T0220
제5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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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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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대반야바라밀다경』 ♣0001-597♧
제5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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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201_161857_nik_bw6 원주 구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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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4_135314_can_CT33 구례 화엄사 연기암
○ 2020_0905_112206_can_BW17 오대산 월정사
○ 2020_0904_135522_nik_CT27 원주 구룡사
○ 2019_1106_121659_can_Ab31_s12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20_1114_143711_nik_ar14 삼각산 도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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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_0211_124932_nik_ar47 불암산 천보사
○ 2020_0908_151748_can_BW17 합천 해인사
○ 2020_0909_130358_nik_CT27 무주 백련사
○ 2019_1106_114442_can_BW17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20_0908_155747_can_bw24 합천 해인사
○ 2016_0505_124729_can 춘천 청평사
○ 2019_1106_104715_can_ab41_s12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20_1017_154344_can_BW25 삼각산 화계사
○ 2018_1023_130248_can_BW25_s12 예산 덕숭산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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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般若波羅蜜多經卷第五百九十七
K0001
대반야바라밀다경 제597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김월운 번역
16. 정계바라밀다분 ⑤
그때에 사리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야 보살마하살들이 이러한 법에 의하여 여러 경계의 형상을 수행하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들은 법도 얻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법 아님이겠느냐.
도도 얻지 못했거늘 하물며 도 아님이겠느냐.
깨끗한 계율에서도 얻은 바가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거늘
하물며 계를 범하겠느냐.
또 여러 길의 나고 죽음에도 떨어지지 않고,
몸이나 목숨에 집착되지도 않거늘
하물며 바깥 경계이겠느냐.
나고 죽음의 흐름에서 이미 저 언덕에 이르렀고,
큰 바다를 이미 건넜고,
큰 장난을 이미 초월하였느니라.◂
또 사리자야,
온갖 경계의 형상을 행하고는
온갖 경계가 모두 경계의 성품이 없음을 잘 아나니,
이 까닭에 이 보살들은 온갖 경계에서 모두 머무름과 집착 없음이
마치 사자가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같으며,
이 보살들이 모든 경계에 물듦과 잡됨 없이 온갖 경계를 초월함이
마치 큰 장사꾼을 장애할 수 없는 것 같으니라.
이 보살마하살들은 이러한 법에 의하여 모든 경계의 형상을 행하되
집착하는 바가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나는 이 대중 가운데 어떤 한 보살도
이 법을 깊이 믿지 않거나, 이런 법에 대하여 의심하고 망설이는 이를 전혀 보지 못했느니라.
또 사리자야,
지금 이 대중에 있는 온갖 보살들은 이런 법에 대하여 의혹과 망설임이 영원히 다하였나니,
이 보살들이 이러한 법에 대하여 스스로가 망설임이 없게 된 뒤에는
다른 유정들의 의심도 영원히 끊어 주느니라.
이 보살들은 이 까닭에 온갖 법에서 모두 의심이 없게 되고,
다른 유정들에게 온갖 법의 성품이 도무지 있지 않음을 확실히 말해 주느니라.
또 사리자야,
오는 세상에 어떤 유정이 이런 법을 들으면 온갖 법에 대하여서도 의심과 망설임이 끊어지고,
온갖 유정들의 의혹도 끊어 주나니,
이른바 내가 지금 연설한 법문과 같이 설법해 주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나는 끝내 선근이 얇은 유정들은 이 법에 대하여 깊은 믿음을 내지 못하리라 하노니,
선근이 얇은 유정은 이 법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런 법 재물을 그들이 수용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선근이 얇은 유정들은 이런 법을 듣지도 못하거늘 하물며 받아 지니고 생각하고 닦아 익힐 수 있겠느냐.
만일 어떤 이가 이와 같은 법을 들으면 나는 결정코 그에게 불법을 성취하리라는 수기를 주겠노니,
그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불법의 사자후를 하되 지금 내가 대중 안에서
사자의 영각[獅子吼]ㆍ두려움 없는 영각[無所畏吼]ㆍ자연 지혜의 영각[自然智吼]을 하는 것같이 하리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이가 이와 같은 심히 깊은 법문을 듣고,
잠깐 동안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어 비방할 생각을 내지 않으면
나는 그도 오는 세상에 위없는 정등보리를 증득하리라는 수기를 주리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사리자야,
유정들이 심히 깊은 법을 듣고 기꺼이 받아 지니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유정들이 심히 깊은 법을 듣고 깊이 좋아하는 생각을 내어
위없는 정등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런 유정들은 더욱 있기 어렵나니,
나는 그들이 광대한 선근을 성취하고,
큰 양식을 마련하고 큰 갑옷을 입었으므로 빨리 위없는 정등보리를 증득하리라 하노라.
만일 어떤 유정들이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듣고
기꺼이 받아들여 자주자주 듣기만 하여도
그가 얻은 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거늘 하물며 받아 지니고,
다시 남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겠느냐.
설사 바른 성품으로써 생멸을 여의는 지위[正性離生]에 아직 들지 않았거나 들었거나
바야흐로 들은 이가 2승의 법에 결정되지 않았으면
나는 그들 모두에게 수기를 주되 장차는 위없는 정등보리를 얻어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를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끊임이 없으리라 하리라.
또 사리자야,
만일 유정들이 낮고 열등한 법을 성취하면
나는 그가 광대한 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지 않으리니,
광대한 법이라 함은 곧 부처님의 보리이니라.
또 사리자야,
유정들은 낮고 열등한 법을 성취한 일이 많은데 그들이 갖는 믿음과 견해도 낮고 열등하여 광대한 선근을 심지 못하나니,
그들은 이와 같은 광대하고 물듦 없고 바른 법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유정들이 광대한 법을 성취하면 그의 믿음과 견해도 광대하나니,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어 사업을 잘 끝내며,
갑옷을 잘 입으며,
심히 깊은 이치를 잘 생각해서 가리며,
큰 도 즉 험난함이 없이 곧으며,
빽빽한 숲을 멀리 여의어 그 모습이 평등하매 가시ㆍ돌자갈ㆍ구덩이 따위가 없으며,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삿되거나 굽음이 없는 곳을 잘 행함으로써 세간을 이롭게 하고,
세간을 안락하게 하고,
세간을 가엾이 여기고,
하늘과 인간에 광대한 이익과 안락이 되어 주며,
유정들에게 큰 횃불과 견고한 사다리가 되어 주며,
크게 인자함을 갖추어서 온갖 유정을 가엾이 여기며,
이익과 안락과 편안함을 주고자 하여 유정들에게 온갖 안락의 도구를 두루 보시하느니라.
이런 유정은 곧 보살마하살이니,
큰 법보의 재물을 잘 수용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큰 법보의 재물을 잘 구하므로 가장 훌륭한 법보의 재물은 반드시 그에게 속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어떤 유정들이 착한 벗을 가까이하지 않거나 선근을 심지 않았으면 복덕이 얇은 까닭에 믿음이 낮고 열등하나니,
그들은 이와 같이 광대하고 심히 깊고 물듦 없는 바른 법을 믿어 받들지 못하느니라.
나는 이 유정들에게 이러한 차별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비밀한 뜻으로 말하기를 ‘유정들의 세계가 갖가지로 차별되므로 낫고 못함에 따라 제각기 좋아하나니,
낫고 열등한 믿음을 갖은 유정들은 도리어 낫고 열등한 믿음을 갖은 유정들을 좋아하고,
광대한 믿음을 갖은 유정들은 도리어 광대한 믿음을 갖은 유정들을 좋아한다 하였노라.”
그때에 사리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반야바라밀다는 어떤 법으로써 행해야 할 경계를 삼나이까?”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끝없는 법으로써 행해야 할 경계를 삼나니,
비유하건대 바람이 끝없는 경계를 지나는 것같이 반야바라밀다도 끝없는 법으로써 행해야 할 경계를 삼느니라.
또 허공이 끝없는 경계에 퍼져 있는 것같이 반야바라밀다도 끝없는 법으로써 행해야 할 경계로 삼느니라.
또 바람이 허공으로써 다닐 경계로 삼는 것같이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의 공함으로써 행할 경계를 삼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치 허공과 바람이 모두 제자리가 없어서 아무도 볼 수 없으며,
또 어떤 법의 모습을 일으키기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닌 것같이 반야바라밀다도 다른 법에 대하여 도무지 나타내 보이는 것이 없고,
또 어떤 법을 일으키기 위해 있지도 않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치 허공과 바람은 모두가 잡을 수 없고,
원만 진실이 아니며,
또 빛도 모양도 헤일 수도 없는 것같이 반야바라밀다도 잡을 수 없고,
원만 진실이 아니며,
빛이나 모양도 헤일 수가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치 허공과 바람이 조그만 법도 원만 진실이라 할 것이 없는 것같이 반야바라밀다에도 조그만 법도 원만 진실이라 할 것이 없느니라.”
그때에 사리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러한 반야바라밀다는 무엇으로써 모양을 삼나이까?”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도무지 모양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치 허공과 바람이 조그만 법도 원만 진실이라 할 것이 없는 것같이 반야바라밀다도 조그만 법도 원만 진실이라 할 것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사리자야,
이 반야바라밀다는 뭇 모양을 멀리 여의어서 조그만 모양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마치 허공이 걸리고 집착될 것이 없는 것같이 반야바라밀다도 걸리고 집착될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집착 없음으로써 모양을 삼는다 하노라.
또 사리자야,
집착 없는 법에 어떤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건만 세간의 이름ㆍ말ㆍ이치를 따라서 말하기를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집착 없음으로써 모양을 삼는다 하노라.
또 사리자야,
반야바라밀다가 모양 없음으로써 모양을 삼는다고는 하나 이 반야바라밀다는 모양을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집착 없음으로써 모양을 삼는다 할 수 없나니,
집착 없는 법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집착 없음이라 함은 이른바 두루 앎에 집착하거나 얻을 수 없음에 집착하거나 여실한 성품에 집착하는 것이 모두가 뒤바뀐 집착임을 두루 아는 까닭에 집착 없음이라 할지언정 모두 집착 가운데는 어떤 집착도 얻을 수 없느니라.
이 까닭에 여실한 성품에 집착함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집착 없음이란 곧 반야바라밀다이니,
이것은 또 집착 없는 모습의 지혜[無着相智]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모든 법은 모두가 집착 없음으로써 모습을 삼나니,
모든 법의 모습을 얻을 수 없으므로 집착 없는 모습이라 하고,
조그만 법의 모습이라고 일으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 가운데는 어떤 형상도 얻을 수 없으므로 모습 없음이라 하고,
형상이 없으므로 집착 없음이라 하느니라.
만일 온갖 법이 조그만 모습이라도 있다면 마땅히 여기에는 집착이 있겠지만 온갖 법의 뭇 모습이 도무지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기에는 집착이 없을 수 없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집착 없음으로써 모습을 삼는다 하노라.
비록 이렇게 말하나 말과는 같지 않나니,
집착 없는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집착 없는 모습은 있지 않기 때문이며,
성품이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법의 집착 없는 모습은 보일 수 없고 드러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유정들에게 이 집착 없는 모습을 방편으로써 보이려는 것이니,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온갖 물듦의 모습이 곧 모습 없음이니,
물듦의 법이 어떤 모습을 일으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
또 사리자야,
온갖 뒤바뀜은 모두가 모습 없음이요,
모습 없음은 모두가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모습 있는 법은 곧 모습 없음이니라.
또 사리자야,
온갖 청정한 법도 모습이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온갖 물듦의 법도 형상이 없거늘 하물며 청정한 법의 형상을 얻을 수 있겠느냐.
또 사리자야,
만일 온갖 물듦의 법의 여실한 성품을 두루 알면 그 물듦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러나 유정들이 뒤바뀐 까닭에 물듦을 일으키나니,
온갖 뒤바뀜이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니라.
만일 진실이 아니라면 실체도 없는 것이요,
진실한 모습도 없는 것이니,
만일 이와 같이 두루 알면 그것이 곧 청정이라 하느니라.
온갖 물듦의 모습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청정한 모습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물듦과 청정 두 법은 모두가 모습이 있지 않으며,
원만 진실이 아니니라.
또 사리자야,
모든 법의 모습 없음과 원만 진실이 아님을 집착 없음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집착 없음으로써 모습을 삼는다 하노라.
온갖 법이 집착 없는 모습이므로 집착 없음이라 했거니와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은 집착 없는 모습에 집착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것이 온갖 법의 집착 없음으로써 모습을 삼는 이치를 설명한 것이니,
이 집착 없는 모습이 곧 지혜의 행할 곳이며,
또 반야바라밀다의 행할 곳이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끝없는 경계를 행한다 하노니,
온갖 집착 없는 성품이 곧 끝없는 경계를 행한다 함을 알 수 있느니라.
또 사리자야,
행할 곳이라 함은 행할 곳이 아님을 나타내는 말이니,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행할 곳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라.
또 사리자야,
행할 경계라 함은 행할 경계가 아님을 나타내는 말이니,
온갖 법의 여실한 성품과 있는 그대로의 성품이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온갖 법은 행할 경계가 아니니,
온갖 법은 경계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이와 같이 모든 법을 두루 알면 이것은 온갖 경계를 행하는 것이니라.
비록 이렇게 말하나 말과는 같지 않나니,
만일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도무지 집착하는 바 없음을 두루 알면 집착 없는 모습이라 하나니,
이 까닭에 반야바라밀다는 집착 없음으로써 모습을 삼는다 하노라.
또 사리자야,
이렇게 말한 여래 지혜의 경계의 심히 깊은 법문을 연설하여 분별하고 보이려 하면 도움될 것이 심히 적느니라.
여기에서 도움될 것이란 오직 진리를 보고서 큰 보리에 나아가는 일뿐이니라.
여러 성문들과 물러나지 않게 된 보살마하살들과 지견이 구족한 보특가라들로서 무생승(無生乘:대승)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면 그들도 소견이 구족한 보특가라이므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법을 바르게 수행하여 모든 의혹을 멀리하고 몸소 보살의 법을 증득한 뒤에 청정한 지혜[淨忍]를 얻었으므로 이 법문에 대하여 결정코 의혹이 없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은 이와 같이 묘한 법을 수행할 경지가 아니니라.
또 사리자야,
이렇게 말한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상응하는 교법은 심히 얻기 어렵나니,
낮고 열등한 믿음을 가진 유정의 손에는 끝내 떨어지지 않느니라.
만일 어떤 유정이 일찍부터 여러 부처님들을 섬기어 가장 훌륭하고 청정한 선근을 성취함으로써 믿음이 광대해지면 이렇게 말한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상응하는 교법이 그의 손에 떨어지느니라.
이런 유정들은 이미 광대하고 한량없는 선근을 심어 부드럽고 청정한 소원[意樂]을 성취하였으며,
이미 과거의 한량없는 부처님께 보리의 종자를 심었고,
큰 서원을 세웠고,
보살의 행을 행하였고,
부처의 탈 것을 탔고 부처님을 가까이하여 심히 깊은 법을 이치와 같게 청하여 물었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다에 상응하고 교법이 그의 손에 들었느니라.
이런 유정들은 이미 무생법인을 증득했거나 혹은 머지않아서 무생법인을 증득할 것이므로 이 반야바라밀다에 상응하는 교법이 그의 손에 떨어지느니라.
이런 유정들은 빨리 위없는 정등보리를 증득하나니,
자비와 원력으로 빨리 증득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이는 제외하느니라.
이런 유정들은 여러 부처님께 이미 수기를 받았거나 혹은 오래지 않아서 수기를 받게 되느니라.
이런 유정들은 부처님께서 눈앞에서 수기하심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눈앞에서 수기를 주신 것과 같으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유정이 선근이 익지 않았으면 복덕이 얇은 까닭에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다 경전의 이름도 듣지 못하거늘 하물며 손으로 잡고 읽고 쓰고 공양하고,
남에게 널리 연설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능히 이렇게 한다면 옳지 않은 말이니라.
만일 어떤 유정이 선근이 이미 익어지면 지난 세상의 원력 때문에 이 경을 만나서 듣고 지니고 쓰고 공경하고 공양하고,
남에게 널리 연설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유정들이 선근이 늘어나서 번성해지고 좋아하는 취미가 조절되어 착해지면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다에 상응하는 교법이 그의 손에 떨어지느니라.
나는 그러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혹 보살승이었거나 혹 성문승이었다가 이 법을 얻고서 깊이 좋아한 까닭에 먼저는 비록 게을리 하여 수면을 좋아했거나 바르지 못한 알음알이를 일으키거나 바른 생각에 머물지 않거나 혹은 마음이 어지럽거나 혹은 음식을 탐하거나 혹은 진기한 재물을 사랑하거나 혹은 추한 말을 좋아하거나 혹은 포악한 짓을 좋아하거나 혹은 오만한 생각을 품었거나 혹은 근기가 암둔해서 아는 바가 없었더라도 그들은 이런 선근의 힘 때문에 앞서 말한 온갖 허물이 모두 바뀌었느니라.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법문을 들은 까닭에 설사 그들이 성문이더라도 보살로 바뀌어서 심히 깊은 법에 곱이나 좋아하는 마음을 내고,
모든 경계에서 방일하지 않고,
온갖 착한 법을 즐거이 수행하고,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온갖 게으름을 여의고,
일심으로 잡념을 잘 포섭해서 모든 감관을 수호하고,
추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포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항상 공경한 행을 닦으며,
많이 듣기를 즐거이 익히고,
정진을 성하게 하여 탐내고 물듦이 없으며,
심히 깊은 법과 뜻을 잘 간택하나니,
만일 누구든지 이와 같은 공덕을 원만하게 하고자 하면 심히 깊은 법문을 부지런히 닦아 배울지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보살이나 성문이 이 법문을 들으면 수승한 과위를 얻나니,
이른바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법문을 듣고는 결정코 온갖 방일한 행을 다시는 하지 않으며,
온갖 나쁜 법을 믿으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잘 정진할 생각을 내어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수행하던 일을 늦추지 않으며,
외도의 삿된 법을 생각하거나 구하지 않으며,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그다지 많이 일으키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과위들은 한량없고 끝없는 것이나 모두가 이 깊은 법을 들음으로써 얻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심히 깊은 법은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 과위가 아니요,
반드시 방일하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여실히 진리를 알고,
뭇 죄악을 멀리 여의며,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여야 비로소 과위라 하느니라.
또 법을 듣는다 함은 법문을 여실히 알아서 부지런히 닦아 배우는 것이요,
바른 법에 대하여 다른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니,
만일 바른 법에 대하여 다른 소견을 일으키면 그들은 법문을 듣는다 할 수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너희들은 모두가 이미 들은 법에 대하여 방편 선교로써 뒤바뀜 없는 견해를 일으키어 바른 행에 머무르리라.
만일 어떤 이가 뒤바뀐 견해를 일으키어 바르지 못하게 수행하면 그들은 불타의 바른 법을 순종하는 지혜가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나의 바른 비내야 안에서 말과 같게 행하는 이는 순종하는 지혜를 얻었다 할 수 있나니,
순종하는 지혜라 함은 바른 법에 대하여 뒤바뀜 없이 간택하여 바른 수행을 일으키는 일이니라.
또 사리자야,
순종하는 지혜가 구족한 보특가라들이 바른 행에 머무르면 그들은 결정코 지옥ㆍ아귀ㆍ축생 따위 온갖 나쁜 길에 태어나지 않고,
바른 법의 훌륭한 과위를 빨리 증득하리라.
또 사리자야,
유정들은 조그만 선근을 믿지 말아야 하나니,
이른바 그들이 온갖 나쁜 길을 벗어나리라 하는 것이며,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도 믿지 말아야 하나니,
법에 대하여 바른 견해를 갖추기 전에는 온갖 나쁜 길에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이가 바른 법을 원만히 수학하여 순종하는 지혜를 얻은 뒤에 다시는 나쁜 길에 태어나는 업을 짓지 않고,
다시는 게을리 함으로써 물러날 생각[順退分]을 일으키지 않으면 낮은 지위에서라도 물러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행한 것을 늦추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사리자야,
그들은 물듦과 청정함 가운데서 바르고 두루하게 알아 여실한 지견을 얻고 온갖 법이 뒤바뀜에서 일어난 바이며,
허망한 마음에서 나타났음을 통달하여 집착을 내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들은 바른 법의 심히 깊은 이치에서 이미 바른 견해를 얻어 순종하는 지혜를 얻었으며,
총명하고 부드러워 청정한 계율에 머물렀느니라.
위의에 맞는 바른 행과 궤칙에 맞는 행이 순종하는 지혜를 얻음으로써 구족하지 못함이 없게 되면,
하늘ㆍ용ㆍ약차ㆍ아소락 따위 온갖 무리도 그들을 공경하거늘 하물며 여러 사람들이겠느냐.
하늘ㆍ용ㆍ약차ㆍ아소락 등 온갖 무리들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의하여 공양하고 수호하고 둘러싸서 나쁜 인연이 몸과 목숨이나 수행하는 바를 파괴치 못하게 하거늘 하물며 사람들이겠느냐.
그러므로 부지런히 바른 법의 순종하는 지혜를 닦아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이가 순종하는 지혜를 얻으면 하늘ㆍ용ㆍ약차ㆍ아소락 들이 항상 따르면서 공경하고 공양하기를 잠시도 끊이지 않느니라.”
그때에 사리자가 선현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존자께서 아무 말 없이 잠자코 계십니까?
어찌하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실 것이며,
지금의 이 대중은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참 법기(法器)로서 취미가 청정하여 깊은 법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현이 대답했다.
“예,
사리자여,
나는 모든 법에서 도무지 본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습니다.
사리자여,
나는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도무지 보지 않으며,
보살들도 보지 않으며,
말하는 이를 보지 않으며,
말한 바도 보지 않으며,
또 이에 의하여,
이를 위하여,
이를 인하여,
이에 속하여,
이에 의지하여 말할 것을 보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본 바가 없거늘 어떻게 나로 하여금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다를 연설하라 하십니까?
설사 내가 연설한다 하여도 누구를 말하는 이라 하고,
무엇을 말할 바라 하겠습니까?
또 무슨 까닭에,
무엇 때문에,
무슨 인연으로,
무엇에 속해서,
무엇에 의지해서 말해야 할지도 모르거늘
내 어찌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연설하겠습니까?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말할 수 없고 보일 수 없고,
희론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야,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연설할 수 없고,
보일 수 없고,
희론할 수 없나니,
만일 이와 같은 방편으로 표시하면 반야바라밀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현재도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과거의 형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미래의 형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현재의 형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상이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야,
나는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어떤 형상이 있음으로써
그 형상에 의하여 반야바라밀다를 연설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도무지 보지 못했습니다.
사리자여,★★
5온ㆍ12처ㆍ18계 따위의 3세의 모습은 깊은 반야바라밀다가 아니요,
5온ㆍ12처ㆍ18계 따위 3세의 모습에 있는 진여ㆍ허망하지 않은 성품ㆍ면하지 않는 성품ㆍ있는 그대로의 성품이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또 사리자여,
5온ㆍ12처ㆍ18계 따위의 3세의 모습에 있는 진여ㆍ허망하지 않은 성품ㆍ면하지 않는 성품ㆍ있는 그대로의 성품은 시설할 수 없고,
나타내 보일 수 없고,
희론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 따위의 업으로 표시할 수 없느니라.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5온ㆍ12처ㆍ18계가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어감과 지어감 아님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연기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름과 물질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나와 유정 따위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법계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얽매임 있음과 얽매임 없음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인연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괴로움과 즐거움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차례차례 세움과 차례차례 세우지 않음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생멸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물들고 깨끗한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본 성품과 본 성품 아님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세속과 으뜸 가는 진리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착실함과 허망함의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옮김과 바로 들어가는 모습을 설명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뭇 모습을 여의었으므로 이것이 반야바라밀다이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있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말미암는다,
이 반야바라밀다를 위한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인한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속한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한다 함을 설명해 보일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나는 어떠한 법도 그 법에 의하여 반야바라밀다임을 설명해 보일 수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사리자여,
어떤 조그만한 법도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나타내거나 취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5온ㆍ12처ㆍ18계ㆍ연기ㆍ밝음ㆍ지혜ㆍ해탈을 나타내거나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리자여,
출세간의 묘한 지혜와 통달로도 반야바라밀다를 나타내거나 취하지 못합니다.
또 사리자여,
만일 이렇듯이 어떤 법도 모든 법을 나타내거나 취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설명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리자여,
만일 어떤 이가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진실한 이치를 여실히 알면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다를 잘 알고 연설하는 것입니다.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5온ㆍ12처ㆍ18계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이름과 물질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요,
물들고 깨끗한 법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요,
모든 연기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온갖 뒤바뀜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나와 유정들의 경계들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ㆍ식계의 경계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보시ㆍ탐냄ㆍ계를 지킴ㆍ계를 범함ㆍ참음ㆍ성냄ㆍ부지런함ㆍ게으름ㆍ정려ㆍ어지러움ㆍ묘한 지혜ㆍ나쁜 지혜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염주(念住)ㆍ정단(正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력(力)ㆍ각지(覺支)ㆍ도지(道支)ㆍ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ㆍ한량없음ㆍ신통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진리와 과위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님의 지위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온갖 법의 지혜와 지혜 아님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다함과 생멸 없음의 지혜와 사라짐의 지혜를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열반의 법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어떤 법도 법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거늘 내가 어찌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연설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리자여,
만일 이와 같이 말한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가 모든 법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알면,
이는 곧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잘 아는 것이며,
또는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연설하는 것입니다.
또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이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사리자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온갖 5온ㆍ12처ㆍ18계 따위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지어감이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연기가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뒤바뀜이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욕계ㆍ색계ㆍ무색계가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ㆍ식계의 경계의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나와 유정 따위가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법계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보시와 인색함ㆍ계율 지니기와 계율 범함ㆍ참음과 성냄ㆍ정진과 게으름ㆍ정려와 어지러움ㆍ묘한 지혜와 나쁜 지혜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염주ㆍ정단ㆍ신족ㆍ근ㆍ력(力)ㆍ각지ㆍ도지ㆍ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ㆍ한량없음ㆍ신통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진리의 도와 도의 과위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들의 경지와 법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과거ㆍ미래ㆍ현재 3세가 평등함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집착 없음ㆍ다함ㆍ생멸 없음의 지혜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열반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만일 어떤 법도 다른 법에 합함과 흩어짐이 있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거늘
내가 어찌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연설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리자여,
나는 이런 이치를 보았으므로 말하기를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말하여 보일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사리자여,
나는 도무지 어떤 법도 말하는 이 말할 바가 있다거나,
이를 말미암고,
이를 위하고,
이를 인하고,
이에 속하고,
이에 의지하여 말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거늘
어떻게 저로 하여금 보살들에게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연설하라 하십니까?”
그때에 세존께서 선용맹 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들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나 온갖 법에 도무지 행하는 바가 없나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온갖 법은 모두가 뒤바뀜에서 고르게 일어나서 실제가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삿되고 거짓되고 허망하기 때문이니라.
또 선용맹아,
비유컨대 어떤 법에 행하는 바가 있으면 모두가 뒤바뀜을 행하는 것이며,
모두가 진실하지 못함을 행하는 것인 것같이,
어떤 보살이 행하는 바가 있으면 뒤바뀜을 행하는 것이며,
진실하지 않음을 행하는 것이니,
보살들은 뒤바뀐 행과 진실하지 못한 행에서 나타난 바가 아니며,
또 보살들이 뒤바뀜을 행하거나 진실하지 않은 행을 행하면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
또 선용맹아,
뒤바뀜과 진실하지 않음을 행할 바가 아니니,
그러므로 보살들은 거기에서 행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 선용맹아,
뒤바뀜이라 함은 허망한 것으로서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이 집착하는 바이니라.
이러한 모든 법은 여실(如實)히 있지 않고,
이러한 집착은 그 모습과 같지 않나니,
그러므로 뒤바뀜은 진실하지 않으므로
보살들은 뒤바뀜을 행하지 말고 진실하지 않음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니라.
이 까닭에 보살을 진실한 말을 하는 이라 하며,
또는 뒤바뀜 없이 행하는 이라 하느니라.
만일 진실로 뒤바뀜이 없다면 행하는 바도 없나니,
온갖 행이 끊어지면 보살의 행이라 하느니라.
이 보살의 행은
이것이다,
이 까닭이다,
여기에 있다,
이에서 생긴다 함을 나타내 보일 수 없으며,
보살의 행들에 의하여 나타내 보일 바도 아니니라. ◂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보살들은 온갖 행을 쉬고
보살의 행을 행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중생ㆍ성문ㆍ독각들의 집착 있는 행을 쉬고 보살의 행을 행하는 것이니라.
또 선용맹아,
이러한 보살들은 불법까지도 행하지 않고,
또 이것이 불법이다,
이 불법에 말미암는다,
이 불법에 있다,
이 불법에 속한다 함에 집착되지 않느니라.
이른바 보살들은 분별과 다른 분별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서
온갖 분별과 다른 분별이 끊이면 이를 보살의 행이라 하느니라.◂
선용맹아,
분별이라 함은 모든 법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른 분별이라 함은 모든 법의 차별을 분별하는 것이나 온갖 법은 분별하거나 다른 분별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온갖 법은 분별하거나 다른 분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을 분별한다면 이는 곧 모든 법에서 다른 분별을 하는 것이어니와,
분별 법은 분별과 다른 분별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또 선용맹아,
분별이라 함은 한 쪽이요,
다른 분별이라 함은 둘째 쪽이니,
보살들은 끝과 끝없음을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
만일 보살들이 끝과 끝없음에 모두 행함이 없으면 이 보살은 중간을 보지 않나니,
만일 중간을 본다면 중간을 행하는 것이니라.
만일 중간을 행한다면 이는 곧 끝을 행하는 것이나,
중간에는 행함과 나타냄과 보임이 있지 않아서 온갖 행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또 선용맹아,
중간이라 함은 곧 여덟 가지 거룩한 도이니,
이러한 거룩한도는 온갖 법에서 도무지 얻는 바 없이 있느니라.
또 선용맹아,
만일 어떤 때에 어떤 법을 닦음과 버림이 없으면 그러한 때를 쉬는 도[止息道]라 하나니,
이 쉬는 모든 온갖 법에서 닦음도 버림도 없이 온갖 닦고 버림을 초월하여 온갖 법의 평등하고 진실한 성품을 증득하고,
모든 법의 평등하고 진실한 성품을 증득하면 도라는 생각도 없어지거늘,
도를 보는 일이 있겠느냐.
또 선용맹아,
쉬는 도라 함은 이른바 아라한으로서 번뇌가 다한 필추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그들은 도를 버린 까닭이니라.
닦은 바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버린다 하고,
그 버림도 또한 없으므로 버린다 하고,
닦음을 버리기 때문에 버린다 하느니라.
또 선용맹아,
만일 닦거나 버림이 있으면 얻음이 있을 것이니,
버림이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버림이라 함은 닦는 성품을 버리는 것이나 여기에는 닦음도 없으므로 버림이라 하나니,
닦음이 없으므로 버림도 있지 않느니라.
비록 이렇게 말하나 말과는 같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버림이란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버림의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다시 무엇을 여의겠느냐.
이른바 뒤바뀜의 법이 다시는 고루 일어나지 않고 진실하지 않은 법도 다시는 고루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또 선용맹아,
뒤바뀜들이 뒤바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니라.
대체로 뒤바뀜이라 함은 실제로 일어남이 없음이니,
여기에 실제로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여기에 실제로 일어남이 있다면 뒤바뀜이라 할 수 없거니와 실제로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뒤바뀜이라 하느니라.
또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은 모든 법을 깨닫는 대로 모든 뒤바뀜을 여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보살들은 뒤바뀜이 모두가 실제로 있지 않음을 밝히 알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뒤바뀜 가운데는 뒤바뀜의 성품이 없나니,
뒤바뀜이 실제로 있지 않기 때문이니라.
뒤바뀜 가운데 다시 뒤바뀜의 성품이 있지 않으므로 보살들이 모든 법을 깨닫는 대로 온갖 뒤바뀜을 여읜다 하노니,
다시는 법에 대하여 뒤바뀜을 내지 않기 때문이니라.
만일 여기에 다시는 뒤바뀜이 없다면 이 법을 행할 수도 없나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온갖 뒤바뀜은 모두가 행할 바가 있고,
행할 바가 있음으로써 고루 일어남이 있나니,
행하는 바와 고루 일어남이 모두가 뒤바뀜에 의하여 허망하게 분별하기 때문이니라.
보살들은 행하는 법에 모두가 분별이 없고,
고루 일어남도 없나니,
그러므로 뒤바뀜을 멀리 여의었다 하느니라.
뒤바뀜이 없으므로 행하는 바가 없고,
행하는 바가 없으므로 일어나는 바가 없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행할 바 없음이란 이른바 모든 법을 도무지 행하는 바가 없고,
또 관찰하지도 않고,
행의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만일 이와 같이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라.
또 선용맹아,
만일 보살마하살들이 물질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반연하지 않고 행함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모든 반연할 바의 성품이 멀리 여의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반연할 바의 성품을 멀리 여의면 이는 곧 행할 바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의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눈에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요,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반연할 바의 성품이 진실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반연할 바의 성품이 진실하지 않음을 알면 이는 곧 행할 바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물질의 영역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요,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모든 반연할 바가 뒤바뀜에서 일어났고,
뒤바뀜에서 일어났으면 진실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반연할 바가 뒤바뀜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성품이 진실하지 않음을 안다면 이는 곧 행할 바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안식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요,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모든 반연할 바의 성품이 모두가 허망함임을 잘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반연할 바가 모두가 허망한 줄 알면 이는 곧 행할 바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이름과 물질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반연할 바의 성품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니라.
만일 반연할 바가 반연할 바의 성품이 없음을 깨달으면 이는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음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만일 보살마하살들이 나와 유정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나와 유정 따위 생각의 성품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만일 능히 나와 유정 따위 생각의 성품이 진실하지 않음을 알면 모든 행을 도무지 행함이 없고,
모든 행을 도무지 행함이 없으면 이는 곧 모든 행을 여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만일 보살마하살들이 나라는 생각이나 유정이라는 생각과 내지 안다는 생각ㆍ본다는 생각을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온갖 생각을 제하여 버렸기 때문이니라.
만일 온갖 생각을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모든 생각을 도무지 행함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뒤바뀐 소견의 갈래와 온갖 가림[蓋]을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요,
뒤바뀐 소견의 갈래와 온갖 가림을 반연하지 않으면 그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모든 뒤바뀜의 소견 갈래와 가림과 반연할 바가 모두 실제로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연기를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연기와 그들이 반연하는 바를 두루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연기와 그들이 반연할 바를 두루 알면 이는 곧 행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3계의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해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3계의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보시와 인색함,
계율 지킴과 계율 범함,
참음과 성냄,
부지런함과 게으름,
정려와 어지러움,
묘한 지혜와 나쁜 지혜를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마하살들은 보시와 인색함 내지 반야와 나쁜 지혜의 반연할 바를 두루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은 온갖 반연할 바를 두루 알면 이것이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음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뒤바뀜 없는 염주ㆍ정단ㆍ신족ㆍ근ㆍ력ㆍ각지ㆍ도지ㆍ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ㆍ한량없음ㆍ신통 따위를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온갖 반연할 바에 대하여 자유로이 깨닫고,
또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온갖 반연할 바에 대하여 자유로이 깨닫고 또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음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의 반연할 바를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들이 능히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반연할 바를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버리는 없는 바가 것이며,
또는 행하는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밝음ㆍ지혜ㆍ해탈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마하살들은 능히 밝음과 해탈의 반연할 바를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밝음과 해탈의 반연할 바를 제하여 버리면 이것이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다함ㆍ생멸 없음ㆍ조작 없음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마하살들은 다함ㆍ생멸 없음ㆍ조작 없음의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이와 같은 온갖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것이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ㆍ식계의 경계를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이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ㆍ식계의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이러한 반연할 바들을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것이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의 지위를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이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의 지위에서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의 지위의 반연할 바들을 두루 제하여 버리면 그것이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의 법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마하살들이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의 법의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능히 성문ㆍ독각ㆍ보살ㆍ부처의 법의 반연할 바들을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열반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이 열반의 반연할 바를 두루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열반의 반연할 바를 두루 알면 이것은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상호의 청정함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능히 상호가 청정함의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상호가 청정함의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불국토의 청정함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이 능히 불국토가 청정한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이 불국토가 청정한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것은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성문의 원만한 공덕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이 능히 성문의 원만한 공덕인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성문의 원만한 공덕인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마하살들이 보살의 원만한 공덕을 반연하지 않고 행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선용맹아,
이 보살들은 보살의 원만한 공덕인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원만한 공덕인 반연할 바를 두루 제하여 버리면 이는 곧 행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행할 바 없는 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선용맹아,
보살들이 능히 이와 같이 행하면 그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요,
보살들이 능히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면 온갖 반연할 바를 두루 알고서 행하고,
온갖 반연할 바를 제하여 버리고 행하는 것이니라.”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ETIENNE DAHO - TombPour La France.lrc
노래를 듣다보니 거북이가 나온다.
현재 사찰사진에 지명과 사찰명을 함께 기재해 넣는다.
그런데 운주사가 있는 지명은 한자로 靈龜山 雲住寺로 쓴다.
이 때 靈龜山이 영귀산인가 영구산인가가 먼저 문제된다.
구미(龜尾)시도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본래는 이런 지명들이 거북이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龜를 거북이로 보면 귀,
단순히 땅 이름으로 보면 구,
점치는 거북등으로 보면 균,
이렇게 다양하게 읽는다.
● 분별을 끊고 어떻게 생활하고 수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
『대반야바라밀다경』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른바 보살들은 분별과 다른 분별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서
온갖 분별과 다른 분별이 끊이면 이를 보살의 행이라 하느니라.◂
『대반야바라밀다경』 ♣0001-597♧
이 표현을 대하면 다음 의문이 생겨난다.
현실에서 거리를 걷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 매 순간 현실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고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고 저것은 자동차다. 이렇게 주의해야 한다.
또 어떤 가게에 들러 물건을 산다고 하자.
그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얼마고 성능이 어떻다.
저것과는 얼마가 비싸고 어떤 특성이 다르다.
이런 식으로 쉼없이 분별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생활하기 힘들다.
이는 수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행자도 식사는 해야 한다.
또 일상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수행행위도 무엇이 계정혜 3 학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 수행행위를 선택해 행할 수 있다.
그래서 매 순간 이런 분별을 행하지 않으면 수행도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수행자는 온갖 분별을 행하지 않는다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사정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정을 잘 이해하고 현실에 임하는 것이
곧 올바른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위와 같이 제시하는 사정을 살피면 경전 앞에서 다음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온갖 경계의 형상을 행하고는
온갖 경계가 모두 경계의 성품이 없음을 잘 아나니, ...◂
『대반야바라밀다경』 ♣0001-597♧
이렇게 제시된다.
즉 생사현실에서 온갖 경계가 그 성품이 없다.
그래서 일단 이것이 기본 사정이 된다.
그런데 이는 수행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또 수행자가 그런 의식을 하는 경우에만 그런 것도 아니다.
즉 그런 사정을 알거나 모르거나 어느 경우나 사정이 그렇다.
그리고 분별을 하거나 않거나 어느 경우나 그 성품은 본래 없다.
그래서 이것이 그런 분별을 떠나야 할 사정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분별을 설령 한다해도 없던 성품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별을 떠나야 하는 사정은 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온갖 경계의 형상을 행하고는
온갖 경계가 모두 경계의 성품이 없음을 잘 아나니,
이 까닭에 이 보살들은 온갖 경계에서 모두 머무름과 집착 없음이
마치 사자가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같으며,
이 보살들이 모든 경계에 물듦과 잡됨 없이 온갖 경계를 초월함이
마치 큰 장사꾼을 장애할 수 없는 것 같으니라.
이 보살마하살들은 이러한 법에 의하여 모든 경계의 형상을 행하되
집착하는 바가 없느니라.◂
『대반야바라밀다경』 ♣0001-597♧
온갖 행이 끊어지면 보살의 행이라 하느니라.
이 보살의 행은
이것이다,
이 까닭이다,
여기에 있다,
이에서 생긴다 함을 나타내 보일 수 없으며,
보살의 행들에 의하여 나타내 보일 바도 아니니라. ◂
『대반야바라밀다경』 ♣0001-597♧
우선 이 사정을 잘 이해해보자.
현실이 꿈과 같다.
가짜다.
먼저 이런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진짜가 아닌 현실에서
무수한 중생들이 고통을 겪는다.
그것이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가짜라고 해도 큰 관계없을 것이다.
즉 설령 현실이 실답지 않고 가짜라고 해도
그 안에서 고통을 겪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이 가짜라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다음과 같다고 하자.
사흘 굶어 배가 고프다.
춥다.
돈이 없어 옷도 사기 힘들고, 잘 곳도 없다.
더 나아가 물건을 훔쳐서 체포되고 감옥에 갇혔다.
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다.
병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 생사현실이 가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그 상황에 처해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고통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겪어 나간다.
그런 고통을 겪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런 상황에 처하기 이전에 그런 상태에 처할 일정한 업을 열심히 행했다.
그런데 또 그런 업은 일정한 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갖고 행했다.
그런데 그 분별이 알고보면 엉터리 망상분별이었다.
한 주체가 고통을 겪게 되는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바탕되어 있다.
그래서 이를 다음의 관계로 나타내게 된다.
무명 망집 => 업 => 고통 [혹업고]
이 고통을 현실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고통 아닌 것만 남게 된다.
예를 들어 좋은 것,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만 현실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의 문제가 해결된다.
고통을 해결하려면
고통을 당장 겪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그런데 미리 고통에 처하게 될 원인을 앞 단계에서 제거하는 것이 훨씬 낫다.
즉 예방하는 것이 훨씬 낫다.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다리와 허리가 부러져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어떤 방안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방안보다는 떨어지기 직전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훨씬 낫다.
예를 들어 낭떨어지에서 떨어진 상황은 다음과 같다.
앞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다고 잘못 판단한다.
그 쪽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낭떨어지에 떨어진다.
이런 과정을 겪어 낭떨어지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혹-업-고의 관계다.
이 경우 앞 단계에서 미리 중지하면 훨씬 낫다.
즉 잘못된 판단을 제거한다.
또 설명 망집을 제거하지 못한다해도 그에 따른 업만은 중단한다.
이렇다면 그런 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하지 않을 수 있다.
결과가 나타난 상태에서 이를 제거하는 노력보다 훨씬 적은 노력으로 이를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삼매, 무상삼매]
한편 그런 망집에 바탕해 부질없는 소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원무작삼매]
결국 현실에서 갖는 일체 소원은 거의 대부분 망집에 바탕해 있다.
그래서 이 일체를 기본적으로 다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실패하면 결국 고통을 극심하고 장구하게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현실에서 한번 다리나 허리가 부러지면 이후 삶을 장애상태로 지낼 수도 있다.
한편 이렇게 겪는 고통은 그 생사현실을 진짜라고 여기는 그 정도에 비례해 증폭된다.
즉 망집이 강할 수록 그에 따라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게 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런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미 오랜 기간 각 주체는 망집에 바탕해 장구하게 업을 행해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업의 장애가 축적되어 쌓여 있는 상태다.
따라서 한편으로 망집을 제거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쌓여 있는 업의 장애[업장]을 제거할 수행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된 망상분별인가부터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내용은 이전에 많이 반복했다.
최근 수십년간 이 내용을 여러 형태로 제시했다.
그런데 경전을 살피려면 매번 이 내용을 반복해 또 살펴야 한다.
그런데 경전 내용이 그와 같다.
그런 사정 때문에 문수보살님은
수많은 경전을 간단히 압축하면 '아라바자나' 5 글자로 압축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는 '나자바라아' 순서로 처음 도출된다.
그리고 '나'라는 글자가 바로 이 내용과 관련된다.
'나'는 범어로 nama => 영어로 name => 한자로 언설명자. => 한글로 이름 이런 의미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 '나'는 생사현실에 본래 언설 명자 모습 성품[상성]을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것을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매번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반복작업을 피하려면 과거 글을 잘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과거글 정리나 새글 작성이나 시간이 같이 걸린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다.
---
사진을 하나 놓고 보자.
이것이 현실이라고 하자.
이 상황에서 이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업무 때문에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하자.
이제 이런 상황을 놓고 사진에서 사람을 찾아보자.
현실 상황이 이와 같다.
자신은 사진이나 현실 안에서 영희를 찾아낼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것이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왜 그것이 망상분별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경전에서 분별을 떠나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이런 사정이다.
이제 현실에서 영희를 찾는 과정을 놓고 이 문제를 살펴보자.
어떤 상황에서 영희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처음 영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마음 속에서 찾는 영희에 대한 상이 있다.
눈을 감아도 그런 상이 떠오른다.
방에서 책이나 안경을 찾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때 그런 마음 속의 상을 먼저 잘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에 떠올리는 상은 상(想 Saṃjña)이라고 표현한다.
관념적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이제 자신이 대하는 현실에서 영희를 찾아낸다고 하자.
그래서 찾았다고 하자.
이 상태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손가락으로 영희라고 여기는 부분을 가리키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망상분별이다.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 생활 거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한다.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 이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생활하다가 죽어간다.
그리고 이후도 마찬가지다.
이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생사의 묶임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격자 이론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처음 영희를 찾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처음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다음과 같다고 가정해보자.
[img90]
08pfl--image/grid_00.jpg
이는 그림으로 표시해서 위와 같이 나타낸 것 뿐이다.
현실은 위 그림과 같지는 않다.
각 부분에 색상이 제각각 다를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다음 사진과 같을 수도 있다.
○ 2020_0908_155747_can_bw24 합천 해인사
[img91]
08pfl--image/grid_01.jpg
이제 광장이나 해변 백사장에서 영희를 찾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영희를 찾기 위해 다양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다양하게 초점을 맞추면서 이렇게 묶어서 보기도 하고 저렇게 묶어서 보기도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아내기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러다가 일정한 부분 A 부분이 영희라고 판단했다고 하자.
이 상황을 위 그림처럼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영희를 찾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손가락으로 A 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 현상이 처음 문제다.
이처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위는 다음을 의미한다.
저 A 부분이 영희'이다'.
또는
저 A 부분에 영희가 '있다'.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를 망상분별이라고 칭하게 된다.
그 부분에서는 자신이 찾거나 생각하는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 부분이 그런 영희나 바위 꽃이라고 여기면서 대한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그렇게 영희나 바위 꽃이라고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여기서 위 그림의 A와 같은 부분은 상(相 Lakṣaṇa )이라고 표현한다.
즉 그처럼 일정 부분을 나누고 묶어 그 부분이 자신이 찾는 상(想 Saṃjña)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달리 말하면 그런 상(想 Saṃjña)에 바탕해서 그런 부분을 취하는 현상이다.
즉 자신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마음에 떠올리는 영희나 바위 꽃과 같은 상(想 Saṃjña)이 있다.
이는 관념분별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관념분별에 바탕해 일정 부분을 취한다.
그래서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며 대한다.
이런 현상이 망상분별이다.
그리고 이후 그는 그런 상태에 머물러서 업을 행하게 된다.
이것이 상에 머물고 상을 행하는 상태가 된다.
이것이 해소되지 않으면 이후 이 상태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 현상을 잘 시정해야 한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는 내용 가운데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자.
평소 그런 부분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이것도 마찬가지 문제다.
그 부분에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영희나 바위 꽃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모두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본래 아니다.
그 부분에서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간단히 보면 눈을 떠 얻는 내용은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귀로 듣거나, 코로 맡거나 혀로 맛보거나 몸으로 느끼는 감각현실도 사정이 같다.
색성향미촉의 사정이 이와 같다.
한편 이 상황에서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떠올리는 내용이 있다.
이는 관념분별이다.
이 역시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이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통해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해도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연필이란 생각을 하고 연필이 길다. 긴 것은 기차다
이런 생각을 연이어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연필이 기차는 아니다.
또 연필 안에 기차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도 이처럼 잘 구분해 이해해야 한다.
한편 처음 눈을 떠서 볼 때 일정한 내용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는 그가 눈을 떠서 얻어낸 내용이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뜨거나 뜨지 않거나 본래 있다고 할 내용은 또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이것은 어떤 주체와 관계되지 않고도 본래 있다고 할 실상이 무엇인가의 문제다.
그래서 이것도 함께 잘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실상과 감각현실 [상(相 Lakṣaṇa )]의 관계를 살피면 앞과 같은 형태로 제시할 수 있다.
실상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감각현실은 실상이 아니다.
실상과 관념분별 [상(想 Saṃjña)] 관계를 살펴도 앞과 같은 형태로 제시할 수 있다.
실상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관념분별은 실상이 아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그림으로 살펴보자.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을 # 기호로 표시해보자.
이는 어떤 주체와 관계없이 본래 있다고 할 내용이다.
한편 상(相 Lakṣaṇa )을 ● 로 표시해보자.
그리고 상(想 Saṃjña)을 □ 로 표시해보자.
그리고 # - ● - □ 의 관계를 살펴보자.
먼저 실재 #는 아주 전혀 없다고 할 것도 아니다.
다만 각 주체는 마음이 관계해서 마음안에 맺혀진 내용만 얻을 수 있다.
사정이 그렇기에 각 주체는 실재를 끝내 얻어내지 못한다.
각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각 감각현실● 과 관념분별 내용□ 이다.
그래서 이 점부터 실재#와 감각현실● 과 관념분별 내용□은 다르다.
그런 가운데 # - ● - □ 의 관계는 위에 밝힌 것처럼 제시하게 된다.
# 은 ● 이 아니다.
# 에는 ● 을 얻을 수 없다.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
● 은 # 이 아니다.
● 에서 # 를 얻을 수 없다.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
나머지들의 상호관계도 마찬가지다.
# 은 □ 이 아니다.
# 에는 □ 을 얻을 수 없다.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
□ 은 # 이 아니다.
□ 에서 # 를 얻을 수 없다.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 =>있다고 할 수 없다. => 없다)
● 은 □ 이 아니다.
● 에는 □ 을 얻을 수 없다.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
□ 은 ● 이 아니다.
□ 에 ● 은 얻을 수 없다.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 =>있다고 할 수 없다. => 없다)
이렇게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한 주체는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 □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한편 표현상 얻을 수 없다[불가득]과 있다없다[유무]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감각현실 가운데 색과 소리의 관계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색은 눈을 통해 얻는다.
소리는 귀를 통해 얻는다.
이제 귀로 듣는 소리 영역안에 노란 색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는 보지 못하는 장님이 과연 세계에 노란 색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 경우 소리 영역에서는 노란 색 등을 얻을 수 없다고 표현한다.
소리 영역에서는 그가 문제삼는 색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소리 영역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리 영역에는 소리가 얻어진다.
한편 소리영역에서 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색의 영역에서 색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래서 이를 서로 잘 구분해야 한다.
한편 있고 없음은 정확하게 엄밀하게 보면 관념분별 영역에서의 문제다.
그래서 관념 영역에서 문제삼는 내용은 관념적으로 있다 없다를 판단할 수도 있다.
관념 영역에서 관념적 내용이 아닌 것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본래 문제삼는 그런 내용자체가 관념영역안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편 관념영역에서는 관념적으로 얻어지는가 여부로 있다 없다를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삼는 내용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정으로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다.
다만 관념분별 자체를 얻을 수 없는 영역에서는 이런 판단이 곤란하다.
그래서 실재#에서 어떤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질 때는
엄격하게 표현하면 불가득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다만 편의상 무라는 표현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실재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집착하는 망집을 제거하기 위한 취지로 방편상 그렇게 표현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정부분을 대하고 영희라는 관념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럴 수 있다.
그런 상태로 삶을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 - ● - □ 로 표시할 수 있다.
공한 실상#을 본 바탕으로 한 가운데
각 주체는 마음에서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리고 관념분별 □ 을 일으킨다.
이런 의미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처럼 다양한 감각현실 ● 을 얻고 관념분별 □ 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 안에 □ 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 이 □ 인 것도 아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실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런 ● 이 영희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이 부분이 바로 기본적인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욕계내 생사현실은 바로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각 내용이 그처럼 생멸을 한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본래 각 영역 사정은 그렇지 않다.
한편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신이다.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이 있다.
이 경우도 그런 내용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킨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눈을 떠서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가리켜보자.
또 다른 내용도 마찬가지다.
색수상행식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 가운데 어떤 내용인가를 그처럼 가리키게 된다.
예를 들어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활동은 실재 영역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렇게 가리키는 각 영역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사정이 이러함에도 그렇다고 잘못 여기면서 임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 나간다.
이 문제를 잘 이해하고 시정해야 한다.
수행자는 우선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들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수행을 통해 업의 장애를 제거야 한다.
그런데 이후에도 수행자는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아나도록 이끌기 위해서
다시 2 중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망집 상태에서 중생들이 생활하며 고통을 겪는다.
이런 중생을 이끌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런 망집을 일으킨 이가 처한 생사현실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중생 제도가 가능하다.
그래서 2 중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
반야 경전에서 한편으로 수행을 행하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사정도 이런 사정이다.
이미 현실에서 갖는 망집상태를 살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태에서 활동을 한다. 즉 업을 행한다.
이런 경우 어떤 문제가 있는가.
우선 그 판단이 옳은 판단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망집에서만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고 대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정체에 대한 판단도 잘못 되어 있다.
당장 감각되지 않는 것은 또 전혀 없는 것처럼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있고 없음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뒤바뀐 잘못된 판단을 행한다.
한편 그런 바탕에서는 각 상황에서 일정한 업을 도저히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그렇게 잘못 여기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제시한 망집 - 업 - 고통의 관계를 예방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고통을 무량겁에 걸쳐 장구하고 극심하게 받아 나가게 된다.
결국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망집 상태에서 있다고 여기는 각 내용이나 고통도 사정이 같다.
그 상황에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주체는 그런 망상을 일으키는 재료 자체는 각 상황에서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그런 각 상황마다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명료하게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을 겪어 나간다.
그리고 그 망집의 정도에 비례해서 이 고통의 내용이 증폭되어 나간다.
이것이 문제다.
현실의 이들 내용은 가짜다.
꿈과 같다.
이들 현실 내용은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런데 성격이 꿈과 같다.
즉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그렇게 화합해 얻는 것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가짜를 대단히 진지하게 대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현실은 꿈과 같지만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 내용 하나하나는 실답지 않다.
그런데 그 내용을 다수 주체가 일정한 시기 상황이 되면
일정한 조건에서 비슷한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겪어 나가게 된다.
이 사정은 마치 종이에 그린 그림이나 만화와도 같다.
또 이는 마치 오늘날 아이들이 하는 게임과도 사정이 같다.
즉, 그 내용 하나하나는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이 그런 내용을 대하면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경험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이를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고 대한다.
또 이런 점 때문에 생사현실은 꿈과 비슷하지만 꿈과는 다르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현실에서 겪는 고통도 그 상태 그대로 방치하기 곤란하다.
만일 현실이 정말 꿈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설령 그 안에서 고통을 겪어도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수 주체가 함께 겪지 않는다.
또 겪어도 일시적이고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할 수 있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꿈과 같지만, 꿈은 아니다.
그리고 생사현실이 갖는 특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를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현실을 실답다고 잘못 여기는 그 정도에 비례해 부작용이 증대한다.
즉, 그 망집의 정도에 비례해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생사고통도 대단히 극심하고 생생하고 명료하게 매 순간 겪게 된다.
이것이 전체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렇게 되는 기본 사정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우선 한 주체가 얻는 각 현실 내용의 정체나 관계를 잘못 파악한다.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또 의식하지 못한다.
그 대신 반대로 잘못된 견해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의 정체인 것처럼 잘못 이해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떠 바위나 꽃, 그리고 영희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여기서 그가 눈을 떠 본 모습 일체는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잘못 여긴다.
우선 그가 그렇게 본 내용이 외부 세계의 내용인 것으로 잘못 여긴다.
또한 그가 본 내용은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인 것으로 잘못 여긴다.
또 그가 얻은 내용은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그것은 마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마음과는 다른 별개의 물질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가 대하는 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 철수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한편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잘못 여긴다.
즉, 그런 내용이 곧 자신인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눈을 떠 보게 된 내용을 외부와 자신부분으로 2 분한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 여기게끔 되는 사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영희에게 다가가 사과를 건네려 한다고 해보자.
그래서 사과를 하나 건넨다고 해보자.
이 상황에서 자신이 영희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그에 따라 변화하고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평소 자신이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이다.
또 눈만 뜨면 늘 그런 모습을 늘 대하게 된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 몸 부분을 사과에 대면 그 순간에 촉감을 얻는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안 일정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외부 세계인 것처럼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처럼 손이 닿은 부분이 감각을 얻게 한 외부대상인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런데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들 판단은 하나하나 잘못된 판단이다.
그런데 우선 이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앞의 잘못된 견해를 바탕으로 온갖 망상분별을 그위에 쌓아 올리게 된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익히고 연구하고 배우는 내용 일체가 이런 바탕에 있다.
어학 논리학 수학...사회, 자연과학 일체가 그렇다.
그래서 그 가장 기본에서 부터 이들 내용이 왜 문제인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은 앞에서 보는 일정한 특성을 갖는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하나도 같지 않다.
또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경우도 거의 없다.
즉 자신의 뜻대로 되는 부분이 아니다.
또 자신이 손을 대서 촉감을 느낀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이해다.
이 상황에서 눈을 감고 있어도 그런 촉감은 느낀다.
즉 시각정보가 촉각정보를 얻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 본 내용이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이는 대상과 주관과의 인과관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각 감각현실들의 관계가 그렇다.
이들은 동시 부대상황의 관계에 있는 내용들 뿐이다.
즉 눈으로 그런 모습을 볼 때 그런 촉감이나 다른 감각을 함께 얻는 관계일 뿐이다.
마치 번개와 천둥소리의 관계와 같다.
번개가 천둥소리를 일으킨 원인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앞과 같이 잘못된 판단을 하게끔 하는 배경 사정이 있다.
즉 일정한 의식 체계나 구조와 기제를 바탕으로 임하면
매 순간 그처럼 마음에 얻어진 내용들을 그렇게 대하게끔 되는 배경 사정이 있다.
한편 그런 기제는 무량겁에 걸쳐서 그렇게 이어져 상속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런 기제를 바탕으로 각 내용을 그렇게 대하면
사실과는 전혀 엉뚱한 내용을 그처럼 자신이나 외부 세계라고 여기고 붙잡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로 나아가게끔 된다.
그래서 이것을 일단 시정해 주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중생의 망집상태가 일으키는 문제가 이와 같다.
따라서 수행자는 한편으로 자신부터 이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와야 한다.
당장 잘못된 망집을 완전히 제거하기 힘들 수 있다.
현실적으로 망집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사정으로 이를 곧바로 시정하지 못해도
우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만은 중단해야 한다.
그래서 예방적인 조치를 잘 취해야 한다.
그것이 곧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이다.
그래야 과거에 행한 업의 장애가 점점 해소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바탕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 장구하게 묶이게 된다.
즉, 3악도의 생사고통을 장구하고 극심하게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생사현실 문제다.
그런데 한편 이런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망집은 잘 제거해야 한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아무리 진짜처럼 여겨지더라도 그것이 가짜임을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달이나 별이 진짜처럼 여겨져도 그것이 가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색안경을 쓰고 벗고 하면서 실험을 잘 해야 한다.
그 때마다 크기나 색이나 모습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렇게 되지 않는 달이나 별이 따로 없다.
그런데 달이나 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실 일체가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이런 실험을 통해서 현실 내용이 가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 밖에는 현실 내용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도 잘 이해해야 한다.
마음 밖 실재 영역에 아무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같은 성격은 아니다.
이는 현실에서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서도 이해할 수 있다
사과를 하나 붙잡고 두드리면서 맛보는 상황에서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을 함께 얻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 각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자.
이 상황에서 시각은 다른 감각과 비교할 때 대단히 엉뚱하다.
또 나머지 감각현실도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감각현실은 다시 관념분별과 비교할 때 또 엉뚱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부터 이런 사정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 일체는 사실은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의 관계와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자는 가운데 바다나 황금꿈을 생생하게 꿀 수 있다.
그런 꿈을 꾼 것이고 안 꾼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꿈은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현실 내용이 꿈과 성격이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가장 극심한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잘 참고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정도에 비례해서 부작용과 문제가 증폭된다.
즉 매 순간 매 상황에서 망집에 바탕한 업을 중단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는
이를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장구히 겪어 나가게 된다.
그 하나하나가 가짜다.
그 상황에 그런 내용 하나하나를 본래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럼에도 그는 그가 일으킨 망집에 바탕해 그런 내용이
각 순간에 정말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겪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사현실 문제다.
수행자는 이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
본래 그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일정한 정신 기제를 바탕으로 현실에 임하면
얻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이 그 상황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게끔 된다.
그리고 중생들이 바로 그런 상태에서 장구하게 스스로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고통을 겪어 나간다.
그래서 수행자는 2 중적인 측면으로 이 상황을 대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우선 수행자 자신부터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고 임해야 한다.
즉 스스로 자신부터 망집을 잘 제거하고 임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부터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잘 벗어나와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생을 이끌고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하려면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같이 임해야 한다.
그리고 망집을 일으킨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이끌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 자량을 잘 구족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부터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을 구족할 수행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수행자 자신부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부터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자신부터 극심한 병에 걸리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수행자 자신부터 그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또 그런 경우는 다른 중생을 이끌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방편이 별로 없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같이 임해서 복덕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이후 그 생사현실에서 다른 중생을 이끌 지혜자량도 갖추게 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다른 중생을 잘 이끌고 제도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결국 수행자는 계의 덕목을 이런 바탕에서 잘 성취해야 한다.
또 그것을 잘 성취하려면 본래 현실에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음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내용 하나하나를 잘 성취하기 힘들게 된다.
본래 망집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하게끔 되는 업이 있다.
이들은 하나하나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게끔 만드는 성격이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잘못 망집을 일으키고 좋음이라고 잘못 여기게 되는 내용들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또 이런 좋음을 아끼고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는다.
그리고 한편 이런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내용을 함부로 침해하게끔 된다.
각 생명은 예를 들어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집착한다.
그런데 각 주체는 또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이를 함부로 침해한다.
예를 들어 배고픔을 면하고 좋은 맛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을 살해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그런데 한편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다른 생명이 침해하는 경우는 이를 평안히 대하지 못한다.
불같이 화를 내고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깊이 갖는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상대를 해치고 보복하려고 임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망집을 갖는 주체들 간에 서로 가해 피햬 관계가
무량하게 얽혀 쌓이게 된다.
이런 업의 장애를 벗어나려면 각 상황마다 이와는 반대방향으로 행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좋음은 아끼지 말고 필요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의 가장 기초다.
그런데 가장 기초적인 이런 수행 조차도 망집 상태에서는 도저히 행하기 어렵다.
그것은 그 내용이 그가 대단히 집착하고 대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은 그런 내용이 그 상황에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기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를 잘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망집을 기본적으로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또 수행이 원만하게 성취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런데 망집을 완전히 제거하고 생사묶임에서 벗어났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위 수행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 사정은 이미 살폈다.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이끌 수 있는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수행자는 이런 2중적 측면을 잘 취하고 임해야 한다.
본래 그런 내용을 현실 각 상황에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중생은 그 각 상황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따라서 그런 중생의 망집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수행자는 다시 그런 생사현실에 함께 임해서 그 상황에서 복덕과 지혜 자량을 잘 구족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한 수행을 잘 성취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반야경전에서 제시되는 내용이다.
본래 중생이 망집을 갖고 대하는 그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
=> 그런데도 그런 수행을 잘 성취한다.
=> 그러나 수행자는 한편으로 그런 수행과정에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이끌고 제도하기 위해 그런 바탕에서 각 수행을 원만하게 잘 성취해간다.
=> 그러면 무량한 복덕을 얻게 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게 된다.
그래서 중생을 무량하게 제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이는 비닐 마술과 사정이 같다.
한 비닐에 ○ 가 그려져 있다.
또 한 비닐에 △ 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비닐을 겹쳐 놓으면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보이게 된다.
이 상황에 어느 비닐 층에도 안이 세모인 도너츠는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비닐을 겹쳐 놓으면
대부분 그 상황에 그런 도너츠가 있다고 여기게끔 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이 관계를 실재# -감각현실 ● - 관념□ 의 관계로 살폈다.
이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살피는 문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영희라고 여기면서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가리키는 그 감각현실 부분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는 일정한 정신 기제를 바탕으로
그런 감각현실을 매순간 얻고 또 그 바탕에서 일정한 관념을 일으킨다.
그렇게 임하는 경우 그는 각 측면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붙잡고
그런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면서 대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생사현실이다.
그 하나하나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각 주체는 그런 망집을 일으키고 매 상황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이런 현상이
다수 주체에게 일정한 시간과 상황 조건에서 무량겁에 걸쳐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정이 비닐마술이나 만화나 게임과 성격이 같다.
그 하나하나가 다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을 대하는 주체는 그런 내용이 각 영역에 실답게 있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게 된다.
그 각 상황에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할 때는 하나같이 다 생생하고 명료하다.
그런 가운데 그것을 대단히 실답게 받아나가게 된다.
비닐마술의 사정과 같다.
그가 그 상황에 있다고 여기는 도너츠는 어느 영역에도 없다.
그럼에도 각 주체는 그 비닐을 대하면 그런 도너츠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각 비닐 영역을 휘젖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또 그런 망집을 갖는 주체들간에 가해와 피해관계로 얽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아나가게 하는 업의 장애현상이 된다.
이 업장을 해소하지 않으면 생사고통의 해결이 어렵다.
그런 바탕에서 한번 행한 업은 또 그런 바탕에서는
무량겁에 걸쳐 그 과보를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잘 이해하고 이런 업장을 수행으로 잘 해소시키고 잘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64/12/18 |
○ 2020_0525_181607_can.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lvador-Dali-landscape-with-flies ○ 2020_0606_191541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YAKUSHI_light_up
그리고 보리심을 가진 상태에서 하루 하루 보시를 실천하지 않으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현금으로 평가하면 하루당 137 억원 이상의 손해를 보는 상태다. 다만 화장터에 들어간 후 그 손해 의미를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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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12/2564-12-18-k0001-597.html#1817 sfed--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txt ☞제597권 sfd8--불교단상_2564_12.txt ☞◆vkxs1817 불기2564-12-18 θθ |
■ 선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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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Dhṛtarāṣṭra 또는 제다라타(提多羅吒). 번역하여 지국천왕(持國天王). 4천왕의 하나. 수미산의 제4층급에 사는 동방천왕. 동주(東洲)를 수호하고, 건달바(乾闥婆)ㆍ부단나(富單那)의 두 신을 거느린다고 함. ⇒<유사어>지국천<참조어>지국천(持國天)
답 후보
● 제두뢰타(提頭賴吒)
제석망(帝釋網)
제일능변(第一能變)
제팔식(第八識)
제호미(醍醐味)
조복(調伏)
조어(調御)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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