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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2-20_지심범천소문경_002 본문
『지심범천소문경』
K0142
T0585
범천소문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지심범천소문경_K0142_T0585 핵심요약
♣0142-002♧
『지심범천소문경』
범천소문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지심범천소문경
해제보기
지심범천소문경 제2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최봉수 번역
5. 난문품(難問品)
그때 명망(明網)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지심 범천(持心梵天)은 여래에게서 이 큰 자비에 관하여 분별된 법을 듣고서도
희열하지도 않고 울적해 하지도 않습니다.”
■ 지심이 답하였다.
“만일 족성자(族姓子)여,
두 가지로 행을 닦고 안다면
그 사람에게는 환희하는 것이나 울적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고 실제인 것의 거처에는 영원히 두 가지 일이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환희하는 것도 없고 울적해 하는 것도 없습니다.
비유하면 환술사(幻術師)가 환상으로 기이한 술법을 부리면,
그 화작(化作)된 사람은 행동은 하지만
환희할 것도 없고 울적해 할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족성자는 이미 제법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들어가 노닐고 있으니,
자연히 여래께서 드러내신 변화를 보고서도
환희하지도 않고 울적해 하지도 않는 것이며,
여래의 교화와 여래께서 설하신 변재(辯才)를 듣고서도
환희하지도 울적해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제법을 분별한다면 일체는 환영(幻影)과 같아 동등하니,
차별이나 특이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여래에 대해서도 은근히 희열하는 일이 없고
중생에 대해서도 하천하고 비열하다는 뜻을 지니지 않습니다.”
명망이 또 말하였다.
“그대는 이미 제법이 환영의 모습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제법에 행할 만한 장소가 있으면 능히 그것을 질문해도 좋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그대는 어느 곳에서 행하고 있습니까?”
답하였다.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가 준수하여 행하는 곳이 있으니,
내가 시설한 것은 그곳에서 행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리석은 범부는 음욕(婬欲)과 분노와 우치(愚癡)를 행하고
지나치게 의심하고 외적인 몸에 집착하나니,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소유이다’라고 하며,
삿된 견해에서 머물고 행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대도 그곳에서 행합니까?”
“그대는 범부인 사람으로 하여금 범부가 없는 법을 성취하게 하고자 합니까?”
명망이 말하였다.
“나는 범부의 일조차 즐기려 하지 않는데 마땅히 편안하게 제법의 성취에 뜻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비유하면 족성자여,
일체의 제법은 성취하는 바가 없으니,
법에는 머무는 바도 없고 모으고 쌓는 장소도 없습니다.
원한을 맺는 일도 없고 잊어버리는 바도 없습니다.
또한 부서지는 일도 없고 상응하는 과보가 오는 일도 없습니다.”
답하였다.
“족성자여,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떠나고 제법을 행하지 않는 것이 말하자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범부가 저 현자와 성인의 행을 한다고 하면 그렇게 행하는 자는 곧 두 가지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또한 족성자여,
일체의 행한 바는 행한 바가 없는 것이 되고,
일체의 가르친 바는 가르친 바가 없는 것이 됩니다.
일체의 거처에는 거처가 없는 것이 되고 일체의 거취에는 거취가 없는 것이 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무엇을 일컬어 일체의 행한 바는 행한 바가 없는 것이 된다고 합니까?”
답하였다.
“가령 억백천해(億百千垓)의 여러 겁 동안 가르침을 준수하고 수행한다 하더라도
법의 성품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행한 바는 행한 바가 없는 것이 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무엇을 일컬어 일체의 가르친 바는 가르친 바가 없는 것이 된다고 하며,
일체의 거처는 거처가 없는 것이 된다고 합니까?”
“일체의 제법이 여래께서 가르치신 바이고 여래의 거처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가르친 바는 가르친 바가 없는 것이 되고,
일체의 거처는 거처가 없는 것이 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일체의 거취는 거취가 없는 것이 된다고 합니까?”
“헤아려 보건대 어떤 사람이 어딘가로 나아가 생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거취는 거취가 없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 세존께서 지심을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설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강설해야 한다.”
이에 명망보살이 지심에게 질문하였다.
“그대가,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것에 대해서 설하신 바대로 향합니다.
나는 그곳에서 수행한 바가 있습니다.
만일 그와 같이 한다면 그 행한 것에 얻는 바가 있겠습니까?”
답하였다.
“어찌 가히 생한 바에서 노닐며 행한 바에 이르겠습니까?”
다시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그대가 만일 생하여 노닐지 않는다면 어떻게 중생을 교화하겠습니까?”
답하였다.
“여래께서 변화로 생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나도 그와 같이 생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여래께서 변화하시는 일을 두고 어찌 생하는 일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정녕 변화가 있어야 할 때 마땅히 드러낼 바를 드러낸 것입니까?
부처님의 경계를 누가 일으키겠습니까?”
그 답에 대하여 말하였다.
“드러내는 것도 있고 드러낸 바도 있고 경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드러낸 바가 있다 하더라도 드러낸 바가 없는 것이 됩니다.”
답하였다.
“내가 생한 바는 마땅히 그렇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한 자는 인연으로 경계를 세운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대는 어찌 생사의 행에 인연합니까?”
답하였다.
“나는 생사의 행에 인연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어디에 인연한 것이기에 경계를 연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습니까?”
답하였다.
“여(如)에 인연한 것과 같습니다.
경계에 인연한 두려움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본래부터 없었음을 헤아리는 자에게 퇴전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때 장로 사리불이 앞으로 나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만일 누군가가 이들 여러 천신 및 용 등과 함께 그러한 언사에 들어간다면 한량없는 복덕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세존께서 들으셨던 것과 같이 이 여러 바른 장부의 명호만 들어도 매우 유쾌합니다.
하물며 법을 강설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겠습니까?
비유하면 나무가 땅에서 생겨났지만 허공에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를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위대한 성인이시여,
이 여러 바른 장부가 행하는 모습,
곧 제법에 머물면서 생겨나는 것과 끝과 시작과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과 윤회하는 것과 가고 오는 것을 드러내고,
여러 부처님 국토를 드러내며,
그리고 높고 미묘하고 그와 같이 비유되는 지혜로써 걸림 없는 변재를 얻어 이미 자유자재로 노니는 것,
이러한 것을 마땅히 관찰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지혜와 변화를 보고 나면 어떤 족성자와 족성녀가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때 모임 가운데 한 보살이 있었는데 이름이 보화(普華)였다.
그가 장로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지금 장로께서 어찌 이 법의 성품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장로를 두고 지혜가 가장 높은 자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변화를 느끼고 움직이는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답하였다.
“세존께서는 성문에 대해 그 경계를 제가 잘 안다고 설하셨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대중들은 경계를 이해하여 법을 설합니까?”
답하였다.
“아닙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떻습니까?
장로여,
그 경계에 따라 강설하는 바가 있습니까?”
답하였다.
“들어가는 바에 따라 설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장로여,
법의 성품으로 하여금 끝이 없도록 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증득하십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들어가는 바에 따라 설하는 바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합니까?
사리불이여,
그 들어가는 바의 절도와 한계에 따라 강설하는 바의 절도와 한계가 있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리하여 한계와 절도는 스스로 법의 성품을 묶습니다.
그렇지만 그 법의 성품이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보화여,
그 법의 성품이란 들어가는 모습이 없습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만일 법의 성품이 들어가는 모습이 없는 것이고,
법의 성품이 모습에 들어간 바도 없는 것이라면 그대는 어느 것에 말미암아 열심히 법의 성품에 입각하여 해탈에 뜻을 둔다는 것을 설정할 수 있습니까?”
답하였다.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들어가는 바에 따라 평등하게 순응한다면 법의 성품도 역시 그러합니다.”
답하였다.
“보화여,
나는 보고자 하고,
또한 그것을 듣고자 합니다.”
답하였다.
“사리불이여,
어떻습니까?
법성(法性)에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까?
일체의 제법에 설한 바도 있고,
듣는 바도 있습니까?”
사리불이 답하였다.
“아닙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나는 보는 바가 있고 듣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합니까?”
답하였다.
“보화(普華)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얻는 복덕은 한량없다.
한 사람은 오로지 정성들여 법을 설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한마음으로 청취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대는 법을 강설하고 나는 마땅히 그것을 듣는 것입니다.”
범천이 또 질문하였다.
“장로여,
능히 사유와 생각을 멸하고 난 사유정(思惟定)에서 어찌 법을 청취하겠습니까?”
답하였다.
“족성자여,
그 멸진정에는 두 가지 일이 없으니,
그것이 법을 청취하는 이치입니다.”
그 답에 대하여 말하였다.
“장로 사리불이여,
몸은 편안하고 뜻은 즐겁습니까?
본래부터 고요하고 청정한 것이 제법입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족성자여.
일체의 제법은 본래 청정하고 고요하고 멸한 것입니다.”
그 답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런 까닭에 장로 사리불이여,
항상 정(定) 속에서 법을 듣는다는 것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제법은 본래 빠짐없이 적정(寂靜)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질문하였다.
“그대 족성자여,
정녕 정(定)에서 일어나지 않고도 법을 강설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합니다.
사리불이여,
제법을 성찰하면 어찌 제법을 획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대는 정에서 일어나지 않고 능히 법을 설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범천이 다시 말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대여,
일체의 범부인 어리석은 무리들은 항상 정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장로가 다시 말하였다.
“범부인 어리석은 무리들은 어떤 정의 마음으로 삼매에 드는 것입니까?”
“일체의 제법에는 거취가 없습니다.
그것을 항상된 정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와 같다면 범부인 어리석은 무리가 현자 및 성인과 동등하게 수습하여 차별이 없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이야기한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내가 살펴볼 때 범부인 어리석은 무리와 현자 및 성인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라도 있다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현자 및 성인의 법에는 멸진되거나 제거되는 것이 없으며,
어리석은 무리의 법에도 일으키는 바가 없습니다.
법계와 동등한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제도되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제법에는 본성이 없는데 무엇을 일컫습니까?”
답하였다.
“장로가 몸소 분별하고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대가 현자와 성인의 법을 어찌 다시 일으키겠습니까?”
답하였다.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대는 범부의 법을 소멸하거나 제거합니까?”
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러면 어찌 다시 현자와 성인의 법을 체득하겠습니까?”
답하였다.
“체득하지 못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정녕 다시 범부의 법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답하였다.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찌 장로는 때를 분별하고 압니까?”
답하였다.
“들은 바대로 법이란 범부를 떠나서는 본성이 없는 것입니다.
평등한 것이 역시 그러하니 해탈도 없습니다.
멸도도 역시 그러하고,
본성이 없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그 본성이 없는 것은 차별이 없으니 약간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 본성이 없는 것은 돌아갈 거취가 없으므로 본성이 없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없는 것과 같이 일체의 제법은 빠짐없이 본성이 없는 것에 들어갑니다.”
그때 장로 사리불이 앞에 나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비유하면 큰 불이 치성하고 혁혁하게 불타올라 태우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족성자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여러 설해진 법을 모두 분별하고 요지합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법의 성품은 모두 멸진해 버리는 곳에 처해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사리불아,
여러 족성자들이 강설하는 법의 성품은 네가 말한 것과 같다.”
그때 명망보살이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대가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서 높다고 찬탄하셨는데,
어떤 지혜로써 장로를 찬탄하셨습니까?”
답하였다.
“명망이여,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 성문들 중에서는 음성에 입각하여 단지 스스로 몸을 비추어 해탈을 얻는데 그 가운데서 나를 높다고 한 것일 뿐입니다.
보살 가운데서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사리불이여,
지혜를 관찰해 보면 말의 모습만이 있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아닙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지혜는 행하되 두루 하며 또한 평등하지 않습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말한 그대로입니다.
지혜는 평등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떤 이유로 제법은 두루 하고 평등하며,
나아가 지혜도 그러한데 반대로 지혜에 한계가 있다고 강설합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족성자여,
지혜의 법성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그러나 얽매어 한계가 있는 것은 그 경계를 따르기 때문이니,
본래의 지혜에 말미암아 행하여도 들어가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대가 아는 바로는 그 무한한 것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떤 제한에 입각하여 스스로 묶이고 걸리어 설한 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사리불이 침묵한 채 말하지 않았다.
이에 현자 대가섭(大迦葉)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명망보살은 무엇 때문에 명망이라고 불립니까?”
이에 세존께서 장로 대가섭이 청하는 것을 보시고는 모여 있는 대중들로 하여금 덕의 근본을 구족하게 하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명망에게 말씀하셨다.
“너 족성자야,
스스로 본래의 덕으로 지은 업에 의하여 성취한 청정한 빛을 드러내어라.
그리고 마땅히 천상(天上)과 세간(世間)의 인민을 위하여 그 휘황찬란함을 보여 주어라.
그리하여 지금껏 선(善)의 근본을 지니어 왔던 보살 대중의 의지가 완숙해지도록 하여라.
혹은 도에 마음을 일으킨 자로 하여금 정진력(精進力)을 얻도록 하여라.”
그러자 명망보살은 부처님께서 분부하시는 말씀을 받고서는 다시 가사를 추스르고 정돈하였다.
그런 뒤 오른손의 비단 그물 같은 무늬의 손가락과 손톱 사이로부터 광명을 내놓았다.
그 광명은 한량없이,
그리고 한계를 잴 수 없이 통과하고 꿰뚫었으니,
끝이 없는 시방의 여러 부처님 국토를 비추었다.
그리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이 모여 있는 여러 부처님 세계를 빠짐없이 두루 돌았다.
그 가운데는 지옥도 있고 아귀도 있고 축생의 무리도 있었다.
또한 눈먼 자,
듣지 못하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손발이 자유롭지 못한 자와 병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도 있었다.
또한 지극히 지혜가 없고 미쳐 날뛰는 어리석고 어두운 자도 있었고,
음욕을 지니고 진에를 지니고 우치를 지닌 자도 있었다.
또한 헐벗어 가리지 못하는 자와 배고파하는 자와 목말라 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묶인 자와 매달려 있는 자도 있었고 빈궁하고 못생긴 자도 있었다.
늙어 다 죽게 되어도 인색하게 탐착하고 질투하는 자도 있고,
계율을 파괴하고 화내는 자도 있고,
게으르고 방자한 뜻을 지닌 자도 있었다.
또한 지혜는 좋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데다 들은 것이 적은 자도 있었고,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알지 못하고 사악한 견해인 예순두 가지 의혹에 떨어진 자도 있었다.
또한 여덟 가지가 어려운 곳[八難]인 한가하지 못한 장소에 태어난 자도 있었다.
그러한 중생들로서 이 빛을 쪼인 자들은 이윽고 모두 안락함을 얻었다.
그리고 그때 그 중생들에게는 탐착과 음탕함이 없었고,
근심하지 않고 진에와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다.
미혹하지 않고 우둔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으며 맺힌 원한이 없었다.
그리고 극심한 번뇌도 없었다.
바로 그때 세존 앞에 와 있던 여러 대중들의 모임에는 보살ㆍ성문ㆍ천신ㆍ용ㆍ귀신ㆍ잡신ㆍ건달바[犍沓和]ㆍ아수라[阿須倫]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眞陀羅]ㆍ마후라가[摩睺勒] 등이 있었고,
아울러 비구ㆍ비구니ㆍ청신사(淸信士)ㆍ청신녀(淸信女) 등의 대중이 있었다.
이들이 두루 한 가지 형상을 드러내니,
모두가 금색으로 일체가 평등하게 드러나 상호와 형상 및 용모가 모두 여래와 같았다.
두루 한 가지로 동등하게 드러나니,
특출하게 두드러진 모습을 따로 볼 수가 없었다.
몸은 금강과 같았고,
모두가 다 저절로 이루어진 연꽃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구슬과 교로(交露) 휘장과 온갖 보배로 된 덮개가 덮고 있었으니,
모두가 빠짐없이 동등하여 차별이 없었다.
또한 자연스러운 자태를 드러내니 부처님과 같아서 차이가 없었다.
일체가 색신에 있어서 빠짐없이 안온함을 얻었으니,
비유하면 보살이 ‘환희를 일으킴’이라는 이름의 삼매를 체득한 것과 같았다.
그때 모여 있던 대중들은 일찍이 없었던 괴이한 것을 만나 각각 서로를 보니 빠짐없이 세존과 같이 차별이 없었고,
다시는 스스로도 작고 비루한 자신의 몸을 보지 못하였다.
또한 이 광명이 비추자 그때 아래 방향에 있던 네 명의 보살이 자연히 땅에서 솟아올라 합장한 채 섰다.
그리고 각자 생각하길 ‘지금 마땅히 어느 곳에 있는 여래에게 예를 올려야 하는가?’라 하자,
공중에서 소리가 나며 말하였다.
“이것은 명망보살의 수승(殊勝)하고 특별한 광명이다.
이로써 두루 모여 있는 대중들로 하여금 한 가지 색을 드러내게 하여 여래의 모습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때 네 보살은 일찍이 없었던 것을 얻고는 소리 높여 말하였다.
“만일 우리들이 지극한 정성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보고 있는 모습과 색이 한 종류로서 다를 바가 없고,
제법도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해도 허무하지 않은 진실한 진리[眞諦]를 간직하여,
우리는 마땅히 능인(能仁)부처님의 상서로운 신체를 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여래를 친견하게 된다면 마땅히 받들고 섬길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연꽃의 교로를 지닌 사자좌(師子座)를 띄워 땅에서 일곱 자[尺]를 올라갔다.
그러자 네 보살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함께 소리 내어 말하였다.
“일찍이 없었던 일에 이르렀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여래의 지혜는 그 끝을 다할 수 없습니다.
명망보살의 본성이 청정한 복덕과 서원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러한 광명을 펼치셨으니,
여러 중생의 위용과 안색과 용모로 하여금 이와 같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명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너는 크고 밝게 드러냈던 광명을 거두어들이도록 하라.
이미 그것으로 부처님의 일을 실천하며 건립한 바가 많았고,
한량없는 사람의 의지를 도에 세워 놓았다.”
그러자 명망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듣고서 광명을 거두어들였다.
그리하여 그때 모여 있던 대중들은 모두 예전과 같이 되었으니,
위의와 예의와 절도가 다시 전과 같이 드러났다.
그리고 여래는 홀로 사자좌에 거처하셨다.
장로 대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 네 보살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 네 보살이 말하였다.
“저희는 아래 방향의 다른 부처님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답하였다.
“중보보현(衆寶普現:
온갖 보배가 널리 나타남)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여래ㆍ지진의 명호는 무엇이며,
지금 법을 설하고 계십니까?”
답하였다.
“명호는 일보개(一寶蓋)여래이시며,
그곳에서 법을 강설하고 계십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세계는 여기에서 멉니까,
가깝습니까?”
답하였다.
“세존께서 그것을 아십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대들은 어떻게 여기에 왔습니까?”
답하였다.
“명망보살이 광명을 펼쳐 놓았을 때 우리는 본토에서 그 광명을 보았습니다.
아래 방향의 부처님 국토에서 능인(能仁)세존과 명망의 명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국토에 와서 세존을 친견하고 머리를 조아려 받들고 섬기고자 하였으며,
바른 장부인 명망보살을 보고자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때 대가섭이 앞으로 나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일보개부처님의 국토인 중보보현이라는 세계는 여기서 얼마만큼 됩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아래 방향으로 72항하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수의 부처님 국토를 지나면,
마침내 중보보현이라는 세계를 만나고,
일보개(一寶蓋)부처님의 처소에 이르게 된다.
이 네 보살은 그 세간으로부터 왔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기에 도달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번 뜻을 내는 사이에 여기에 이르렀다.”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어려운 일입니다.
위대한 성인이시여,
보살 대사가 방사한 광명과 성스러운 신족으로 도달하는 것이 그와 같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명망보살은 그 광명을 펼치어 끝없이 멀리까지 비춥니다.
또한 이 네 보살은 찾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누가 이 신족의 위엄과 변화에 능한 지혜로 이룬 바를 보아서 대승을 건립하는 것을 즐거이 원하지 않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처럼 여러 보살이 행하는 바는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성문이나 연각은 능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6. 문담품(問談品)
그러자 대가섭이 명망보살에게 말하였다.
“족성자여,
그대는 광명으로 여래와 같이 만들었으니 위용과 자태와 안색이 자마금(紫磨金)의 형색입니다.
모여 있는 대중들이 휘황찬란한 광명을 입어 모습이 두루 갖추어졌습니다.”
답하였다.
“대가섭이여,
마땅히 세존께 여쭈어 본다면 그것에 대해 전하실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에 장로 가섭이 그것에 대하여 위대한 성인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명망보살이 부처님이 될 때 그 모임의 대중들은 모두 자마금 빛의 얼굴을 하게 되고 모두 한 가지 뜻을 즐기게 될 것이다.
한마음과 굳은 믿음으로 여러 신통과 지혜를 통달하여 성문이나 연각이라는 이름은 없으며,
순수한 여러 보살 대사의 모임만 있을 뿐이다.”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 부처님 국토에 태어나는 보살은 마땅히 여래를 이룬다고 말해야 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가섭아.
네가 말한 대로이다.
마땅히 여래를 이룬다고 말해야 한다.”
이때 4만 4천 명의 사람은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일으키고 마음으로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이구동성으로 함께 찬탄하여 말하였다.
“명망보살이 부처님의 도를 얻을 때 저희들은 모두 그 부처님의 국토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자 가섭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명망보살은 지금으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야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성취하여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직접 명망에게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려 부처님을 이루게 되는가를 물어보아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그것에 대해 전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이에 장로 가섭은 명망에게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그대는 얼마만큼의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성취하고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까?”
답하였다.
“가섭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환술사가 변화시켜 만든 사람에게 ‘너는 얼마만큼의 오랜 시간이 걸려서 위없는 바르고 진실함을 성취하고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고 그에게 답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족성자여,
환술사가 변화시켜 만든 것은 텅 비어 알맹이가 없으니,
어찌 답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일체의 제법은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것처럼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니,
어떻게 이와 같이 ‘어진 이는 마땅히 얼마나 오래 걸려야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성취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물었다.
“어떻습니까?
족성자여,
환술사가 변화시켜 만든 환술로 된 사람과 같으니,
적막하여 분별할 수가 없어서 상념도 없고 언사도 없습니다.
그대도 제법은 역시 그와 같다고 일컫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어떤 한계와 절도로써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그들을 개도(開導)할 수 있습니까?”
답하였다.
“도가 자연이듯이 사람도 역시 자연입니다.
사람이 자연이듯이 환상도 역시 자연입니다.
환상이 자연이듯이 중생도 자연입니다.
중생이 자연이듯이 제법도 역시 자연인 것이 또한 다시 그와 같습니다.
대가섭이여,
그렇게 헤아린다면 마땅히 이익이 있다거나 없다고 관찰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익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이익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도(濟度)하는 것도,
제도하지 못하는 것도 없습니다.”
또 물었다.
“그러면 중생을 부처님 도에서 세우지 못합니까?”
대답하였다.
“여래의 도에 상념을 세울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중생의 무리를 부처님 도에 건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성문이나 연각에도 뜻을 두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족성자여,
그대는 여(如)를 지금 어느 곳에서 세우려 합니까?”
대답하였다.
“여에는 본래부터 세우는 것이 없으니,
내가 세우는 바도 역시 그러합니다.”
또 물었다.
“여는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즉 세운 바도 없습니까?
또한 물러나고 돌아가는 것도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마치 여란 본래부터 없는 것이어서 세운 바도 없는 것처럼 또한 물러서고 돌아가는 것도 없습니다.
그 본래부터 없다는 것은 또한 역시 그러하니,
세운다고 해도 세운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제법이란 세우는 것도 없고 물러나는 것도 없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명망이여,
그대는 무엇으로 중생을 열어 교화합니까?
세우는 것도 없고 물러나고 돌아가는 것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답하였다.
“이해하고 요달하는 바가 있고 뜻으로 서원한 바가 있다면 미묘한 일이지만 중생을 교화하지 못합니다.
제법에 있어 물러나고 돌아가는 자가 있다면 역시 열어 교화하지 못합니다.”
또 물었다.
“그대 족성자여,
중생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나고 죽는 일도 얻지 못하고 또한 본 바도 없는데 하물며 중생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또 물었다.
“그대는 끝과 처음의 윤회 속에서 이리저리 구르면서 중생의 윤리를 교화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고 있으니,
어찌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답하였다.
“나는 열반도 얻지 못하고 본 바도 없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열심히 중생의 무리들을 교화하겠습니까?” 비유하면 족성자여,
만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멸도(滅道)도 얻지 못한다면 지금 무엇 때문에 권하고 교화하고 열고 인도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 도를 행하게 합니까?
그리고 이들 중생들은 멸도를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보살이 생사라는 것을 얻는다면 열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중생을 위하는 상념이 있어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부처님 도를 행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히 보살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마땅히 부처님 도를 구하는 것이라고 일컬을 수 없습니다.”
또 물었다.
“족성자여,
그대는 어디를 향하여 행합니까?”
“내 몸이 행한다고 하지만 생사로 행하는 것도 아니고,
멸도로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이라는 상념이 없는 것입니다.
대가섭이여,
어디를 향하여 행하느냐고 질문하지만 변화로 만들어진 여래께서 행하는 경우와 같아 내가 행하는 것도 역시 그것을 따릅니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족성자여,
변화로 만든 여래에게는 행하는 곳이 없습니다.”
대답하였다.
“일체 중생의 모습도 역시 그러합니다.
마땅히 행하는 바가 있다고 관찰해서는 안 됩니다.”
또 물었다.
“족성자여,
중생의 행하는 모습이 그와 같다고 관찰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어찌 중생이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행합니까?
그 변화로 만들어진 여래에게는 오염된 것이 없으며 맺힌 원한도 없으며 망실한 바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장로여,
지금 서로 질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는 바에 따라 그것에 답하여 주십시오.
장로여,
어찌 이러한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또 물었다.
“그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정녕 멸진한 것입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닙니다.”
“만일 장로여,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없고 그것을 멸진하고 제거하는 것도 없다면 그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어디에 붙어 있겠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족성자여,
어리석은 범부가 뒤바뀐 것에 거처하면서 사유와 생각과 온갖 망념으로 그리워하고 추구하는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응하든 상응하지 않든 문득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익히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현자와 성인은 교법과 율법으로 뒤바뀐 것을 깨달아 요지하고 문득 사유와 생각과 온갖 상념을 익히지도 행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상응하는 것도 상응하지 않는 것도 없으니,
다시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없는 것입니다.”
“가섭이여,
그대의 뜻으로 억념하는 것으로는 어떻습니까?
그 뒤바뀐 것에 거처하면서 제법이 생겨난다면 법을 따라 도달하겠습니까?
원인에 따라 생하는 바가 있습니까,
생하는 바가 없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족성자여,
그것은 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곧 생한 바가 없습니다.”
대답하였다.
“오직 그렇습니다.
대가섭이여,
그러면 뜻에는 어떻습니까?
그것이 생하여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있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정녕 생한 바가 있겠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대가섭이여,
그것이 생하여 있는 것이 아닌데 생겨나게 하고자 하면 어느 곳에선가 생겨납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또 물었다.
“장로여,
생한 바를 구하려고 하지만 이것에 의존하여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생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없습니다.”
대답하였다.
“그런 까닭에 대가섭이여,
무엇으로부터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얻겠으며,
중생이 더럽고 피로함에 기대고 집착하고 이르겠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족성자여,
일체의 제법은 본래부터 모두 청정하여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대답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일체의 제법이란 모두 환상과 같고 변화로 만들어진 여래의 자연스런 모습과 같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을 설할 때에 4만 4천의 보살들이 유순법인(柔順法忍)을 얻었다.
그때 대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누군가가 명망보살을 눈으로 보기만 하여도 악취(惡趣)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며,
여러 악마와 그 권속이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법이 설해지는 것을 듣는다면 그 보살들은 끝내 성문과 연각이 거처하는 지위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가르치는 것과 강설하는 바를 본다면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미 명망보살의 국토가 지니는 덕에 대해서 찬탄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명망보살은 부처님 국토에서 노니는데,
노니는 곳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중생을 개화하고 제도하고 해탈시킨다.
가섭아,
여러 족성자가 그의 광명을 입는 것을 보았는가?”
대답하였다.
“이미 보았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삼천대천세계를 겨자로 가득 채웠다면 그 수효는 오히려 알 수 있고,
그 많고 적음은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명망보살이 열어 교화하여 부처님의 도에 세운 사람은 헤아리거나 측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섭아,
이 명망보살이 방사한 그 광명을 중생이 본 것에 대하여 알려고 해도 그와 같은데 하물며 권화와 방편으로 경의 법을 설하는 것이겠는가?
또한 다시 가섭아,
내가 설하는 것을 경청하도록 하라.
이 족성자의 국토는 두드러지게 특이하니,
‘덕엄정명(德嚴淨明:
덕으로 장엄한 맑고 밝음)’이라는 이름의 청정한 명망의 처소가 있다.
명망보살은 670만의 아승기겁(阿僧祇劫)이라는 수효가 지나면 마땅히 부처를 이루게 된다.
그는 명호를 보명변동광왕(普明變動光王)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라고 할 것이며,
세계의 이름은 등집수승(等集殊勝:
수승한 것을 평등하게 모음)이라고 할 것이니,
부처님의 나무에 나아가 부처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 부처님의 국토에는 여러 악마도 없고 여러 악마의 천신들도 없다.
모두가 빠짐없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둔다.
그 부처님 국토는 미묘한 전단(栴檀) 나무로 땅이 덮여 있을 것이고,
그 세계는 손바닥처럼 평평하며 비단 그물 같을 것이다.
그 세계에 있는 중생의 몸은 유연하며,
토지는 조화롭고 비옥하여 안온하고 풍요로울 것이다.
일체의 온갖 보배가 화합하여 부처님 국토를 이루고 있으니,
모래나 자갈,
가시와 같은 더러운 것이 없을 것이며,
악한 갈래[惡趣]도 없고 힘들고 괴로운 근심도 없을 것이다.
또한 여덟 가지 어렵고 한가하지 못한 경우[八難不閑]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처님의 경계 지역에는 빠짐없이 연꽃이 생겨날 것이다.
그 여러 연꽃은 모두 보배로 이루어져 있고,
그 꽃의 향기는 매우 향기로우며,
갖가지 색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세계는 넓고 크니,
동ㆍ서ㆍ남ㆍ북으로 한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보명변동광왕여래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보살 대중이 있어 그 음성을 따를 것이다.
부처님 법에 입각한 성스러운 대중은 위신력과 변화를 갖추고 이미 빛으로 장엄되어,
다라니(陀羅尼)의 곳간을 얻게 될 것이다.
변재에 걸림이 없고 지혜와 명성과 덕을 갖출 것이며,
위대한 신통을 획득하고 온갖 악마를 항복시킬 것이다.
뜻과 의지에 입각하여 노닐되 항상 수치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성스러운 광명을 오로지 닦으며 지혜로써 교화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그 부처님 국토에는 또한 여인이란 없으니,
모든 보살은 모두 보배로 된 연꽃에서 태어나 저절로 장대해질 것이다.
그 모든 보살은 선정으로 음식을 삼을 것이다.
그리고 거주하는 곳과 경행(經行)을 하는 곳과 침상과 긴 걸상과 와구와 궁전과 목욕하는 못과 정원 그리고 그곳에서 관찰되는 산업이 모두 천상의 것과 같을 것이다.
이 보명변동광왕여래는 경의 법을 강설하는 데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설하니,
단지 부처님의 광명으로 모든 보살을 비추면,
빛이 그 몸에 닿자마자 곧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광명은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티끌을 소진시킨다.
아울러 그 나머지 광명은 다른 부처님 세계에 이르러 그곳 중생이 지닌 색에 대한 애욕의 티끌을 소멸시켜 허물이 없게 만들고 율법에 순응하게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 광명에서는 자연히 법문의 음성이 연출되니,
서른두 가지 일을 내놓는다.
무엇을 일컬어 서른두 가지라고 하는가?
제법은 공이니 일체의 견해를 정화하기 때문이다.
제법은 무상(無想)이니 상념을 떠난 까닭이다.
제법은 무원(無願)이니 삼계를 건너는 까닭이다.
제법은 애욕이 없는 것이니 본래 깨끗하고 고요한 까닭이다.
제법은 분노를 떠난 것이니 온갖 생각을 제거한 까닭이다.
제법은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니 우매함을 떠난 까닭이다.
제법은 온 곳이 없는 것이니 일어난 바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제법은 앞으로 올 것이니 노닐며 관찰하는 데 순응하기 때문이다.1) 제법은 머무는 것이 없으니 자연히 서 있기 때문이다.
제법은 영원히 건너는 것이니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기 때문이다.
제법은 다른 것이 없으니 자연히 본성인 까닭이다.
제법은 생하는 것이 아니니 상응하는 과보를 떠난 까닭이다.
제법은 과보를 만드는 것이 없으니 일으키는 바가 없는 까닭이다.
제법은 지을 수 없는 것이니 행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까닭이다.
제법은 형상이 없으니 상념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까닭이다.
제법은 모양이 없으니 모든 생겨나는 것을 떠난 까닭이다.
제법은 자세히 살펴야 하는 것이니 진실을 깨닫고 요지하는 까닭이다.
제법은 지극히 정성스러운 것이니 동일하고 평등한 까닭이다.
제법은 사람이 없는 것이니 사람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제법은 목숨이 없는 것이니 진실로 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제법은 우둔한 듯 하니 가르침을 수용한 바가 없는 까닭이다.
제법은 보호하며 응시하는 것이니 여러 가지 결박을 제거한 까닭이다.
제법은 집착이 없는 것이니 뜨거운 번뇌가 없는 까닭이다.
제법은 가까움이 없는 것이니 본래 깨끗하고 티끌이 없는 까닭이다.
제법은 한 가지 성품이니 진실한 끝은 고요한 까닭이다.
제법은 담백한 것이니 한 가지로 같게 정해져 있는 까닭이다.
제법은 본래의 근원에 머무는 것이니 대하는 것에 따라 일어나는 까닭이다.
제법은 본래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 인연이 파괴되는 까닭이다.
제법은 동등하게 제어된 법이니 일체가 두루 들어가는 까닭이다.
제법은 연고가 없는 것이니 서로 섞이지 않는 까닭이다.
제법은 깨달음이니 드러나는 바에 따라 순응하는 까닭이다.
제법은 무위(無爲)이니 온갖 걸리는 일이 없는 까닭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보명변동광왕여래의 광명이니,
항상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소리를 낸다.
이 광명이 보살들을 비춤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일을 이룬다.
그리하여 그 부처님 국토에는 악마의 일이란 없어서 방해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또 그 여래의 수명은 한량없다.”
그때 현자 대가섭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만일 부처님 국토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부처님의 청정한 경계를 수용해야 하거니와 그것은 역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지금 저 족성자는 마땅히 일체를 두루 갖추고 구족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야기한 바와 같다.
계산할 수 없는 억백천해(億百千垓)의 여러 여래의 처소에서 그의 뜻과 서원은 청정했던 것이다.”
그때 지심 범천이 명망보살에게 말하였다.
“지금 여래께서 족성자에게 수기하신 것입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여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수기하십니다.”
또 질문하였다.
“어떻게 수기하십니까?”
답하였다.
“그 지은 바에 따라 상응하는 과보를 받듯이 그렇게 수기는 이루어집니다.”
또 질문하였다.
“무엇으로 인으로 하여 상응하는 과보로서의 기별[記]을 줍니까?
그대에게 기별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이른바 연(緣)이니,
몸으로는 지은 바가 없고 입으로는 언사가 없고 뜻은 볼 수가 없는 것이라면,
이것이 죄 또는 복을 지은 것이 됩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되지 않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그 부처님의 도는 행상을 지닙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닙니다.
도는 형상이 없는 것이며 존재하는 바가 없습니다.
도는 곧 이름이 없으니 행상도 없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만일 행이 없다고 하면 어찌 가히 도라는 것이 행의 모습을 지니어 획득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없습니다.
범천이여,
그런 까닭에 ‘지은 바도 없고,
과보도 없고,
행하는 모습도 없고,
행하는 모습의 성품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도라고 한다’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도와 같이 획득한다는 것도 그러하고 수기라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곧 행하는 모습에 입각하지 않고 수기하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그대는 6바라밀[度無極]을 행한 뒤에야 수기를 얻은 것이 아닙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범천이여.
6바라밀을 행한 뒤에야 수기를 받습니다.
또한 다시 성인과 현자가 일체의 티끌을 버린다면 이름하여 보시(布施)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또한 행하는 바가 없고 짓는 바가 없다면 이름하여 지계(持戒)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또한 감당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면 이름하여 인욕(忍辱)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만일 담백하다면 이름하여 정진(精進)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또한 상응하는 바에 따라 머문다면 이름하여 선정(禪定)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또한 빠짐없이 환하게 안다면 이름하여 지혜(智慧)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범천이여,
어떤 보살이 이 6바라밀을 받들어 행한다고 해도 정녕 행하는 것이 있습니까?”
답하였다.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행할 만한 것이 있다면 행하는 것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 행한 바가 있다는 것에는 행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한 바가 없다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 됩니다.”
답하였다.
“그러므로 범천이여,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이 곧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대 범천이 말한 대로 도에 있어 수기를 받았습니까?
만일 법의 성품에는 이미 근본이 없고 그 근본이 없는 자에게 수기라는 것이 보인다면 내가 수기를 받았다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답하였다.
“족성자여,
그 근본이 없는 것과 법의 성품에는 모두 수기라는 것이 없습니다.”
답하였다.
“수기의 모습도 모두 역시 그와 같습니다.
마치 근본이 없는 것과 법의 성품은 동등하여 차이도 없고 특별함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지심 범천이 세존께 아뢰었다.
“그 보살은 행하는 바가 무엇이기에 수기를 얻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이르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행하는 것은 일어나는 법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멸하는 법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선한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악한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세간을 따라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세간을 건넌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죄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복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범하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범한 적이 없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유루(有漏)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무루(無漏)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유위의 법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무위의 법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존재하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떠난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오로지 닦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오로지 정진하는 것을 떠난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단절하고 제거하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제거하지 않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생사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멸도에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보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듣는 것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뜻과 생각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인지하는 것에서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보시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인색하고 탐착하는 데서 행하지 않아야 한다.
범행(梵行)을 받들어서는 아니 되고,
범하는 것이 있어서도 아니 된다.
그리고 인욕에서 행하여서도 아니 되고,
인욕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
정진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게으름에서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선정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오로지 하나인 것에서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
지혜에서 행하지 않아야 하고,
지혜가 아닌 데서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도달하는 것에서도 행하지 않아야 하고,
들어가는 바에서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그와 같이 행한다면 여래는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마땅히 성취할 것이라는 기별을 주느니라.
왜냐하면 범천아,
만일 마땅히 그렇게 행할 자나 행한 바가 있는 자는 뜻으로 지은 바가 있는 것이니,
‘도를 행하는 데는 상념의 행을 일으키거나 상념의 행이 없거나 도를 행하는 것이며,
지은 행이 있거나 지은 행이 없거나 도를 행하는 것이며,
방일하는 바가 있거나 방일하는 바가 없거나 또는 희론을 즐기는 바가 있거나 희론을 즐기는 바가 없거나 이것이 도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곧 앞서와 같이 보아서는 아니 되니,
일체의 지은 행업을 모두 도탈하는 것이 바로 보살이 수기를 얻는 까닭이 되느니라.”
또 여쭈었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기별을 주고 기별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일컫는 말입니까?”
세존께서 답하셨다.
“일체 제법에서 둘을 제거하는 것을 이름하여 기별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일체 법에서 둘을 만들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기별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일으킨 것에서 온갖 색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이름하여 기별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몸과 말과 뜻에 있어서 담백하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기별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나간 옛날의 세상과 시절을 기억한다.
그때 한 겁이 있었으니,
겁의 이름이 희견(喜見)이었다.
나는 이 겁에서 72해(垓)의 여러 여래들을 공양하였다.
그런데 그 여러 여래에게서 수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시 한 겁이 있었는데 이름이 선화(善化)라고 하는 겁이었다.
이 겁에서는 22억의 여러 여래들을 다시 공양했지만 수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시 한 겁이 있었는데 이름이 범탄(梵歎)이라고 하는 겁이었다.
나는 이 겁에서는 1만 8천의 부처님을 다시 공양했다.
그런데 수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시 한 겁이 있었는데 이름이 흔락(欣樂)이라고 하는 겁이었다.
나는 이 겁에서는 320만의 여러 여래의 무리를 다시 공양했다.
그런데 그 여러 여래에게서도 수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 겁이 지난 뒤에 다시 한 겁이 있었는데 이름이 대연(大演)이라고 하는 겁이었다.
나는 이 겁에서도 다시 태어나 840만의 여러 여래의 무리를 빠짐없이 공양하였다.
그리고 몇 가지로써 안온한 바에 따라 그들을 받들어 나아갔다.
그런데 그 여러 여래에게서도 수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1겁 또는 1겁을 넘어서는 시간 동안을 여러 여래의 명호를 설하고,
또한 옛날에 공양한 여러 부처님의 수효도 설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있는 곳에서 깨끗이 범행을 닦았다.
일체를 보시하였으니,
존재하는 공양거리로써 바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체의 계율을 준수하였으니 빠짐없이 구족하였다.
인욕을 받들고 맺힌 원한을 자비로 풀었으며,
힘들여 노력하고 정진하였다.
들었던 것은 모두 수용하고 간직하였다.
한마음으로 선정에 들었고,
뜻으로 행하는 바는 고요하였으며,
앉아서 오로지 사유에 들었다.
또한 강설하고 질문하는 음성에 지혜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여러 여래가 수기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지어서 행하는 바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범천아,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것은 일체의 모든 행을 초월하고 건너는 것이다’라고 관찰하고 알고자 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기별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정광여래를 만나고 친견하였고,
불기법인(不起法忍)을 획득하였다.
그러자 정광정각께서는 수기하시며,
‘그대는 오는 세상에서 부처가 될 것이니,
명호를 능인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ㆍ불중우(佛衆祐)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일체의 행을 초과해 있었고,
6바라밀을 구족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념을 모두 빠짐없이 버렸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일체의 연고와 번뇌를 제거해 버렸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지계바라밀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성품을 참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
일체의 행에서 모두 빠짐없이 고요하니 그것을 이름하여 정진바라밀이라고 한다.
일체를 생각하는 데 익히거나 행하는 것이 없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선정바라밀이라고 한다.
또한 본래 청정하여 일어나는 것이 없는 법인[不起法忍:
無生法忍]을 요지하니 그것을 이름하여 지혜바라밀이라고 한다.
정광여래를 친견하고는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했던 것이니,
내가 처음 뜻을 일으킨 이래로 베풀고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방출하였다.
그것의 백 배,
천 배,
만 배,
억 배,
그리고 더 큰 억만 배를 해도 다섯 연꽃을 공양한 덕에는 비교할 수도 없고 비유조차 불가능하다.
처음 뜻을 일으킨 이래로 보시하고 지족(知足)하였으며 금기를 받들고 계율에 순응하였다.
인욕하고 어질게 화합하고 궁극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 법에 의거하여 견디고 감당해 내었다.
정진하고 힘들여 노력하되,
게으르지 않고 준수하고 수행하였다.
선정에서 고요하였으니 항상 집착하는 일이 없었다.
처음 뜻을 일으킨 이래로 지혜를 관찰하되 항상 방일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지혜를 여러 바라밀에 비하면 백 배,
천 배,
만 배,
억 배 그리고 더 큰 억만 배를 하여도 서로 비교할 수도 없고 비유조차 불가능하다.
범천아,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봐야 한다.
나는 그 세계에 있을 때 6바라밀을 구족하였던 것이다.”
또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가리켜 6바라밀을 구족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보시를 생각하지 않고,
계율에 집착하지 않고,
인욕을 생각하지 않고,
정진을 오로지하지 않고,
선정에 머물지 않고,
지혜에 둘이 없으면 이것이 6바라밀을 구족한 것이다.”
또 여쭈었다.
“6바라밀을 구족한다면 어디에서 구족합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6바라밀을 구족한다면 문득 여러 신통과 지혜에서 구족한다.”
또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6바라밀을 구족한다면 어찌하여 문득 여러 신통과 지혜도 구족한 것입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범천아,
보시가 평등하면 곧 여러 신통 및 지혜도 평등한 것이다.
계율이 평등하면 곧 신통 및 지혜도 평등한 것이다.
인욕이 평등하면 곧 신통 및 지혜도 평등한 것이다.
정진이 평등하면 곧 신통 및 지혜도 평등한 것이다.
선정이 평등하면 곧 신통 및 지혜도 평등한 것이다.
지혜가 평등하면 곧 신통 및 지혜도 평등한 것이다.
이것이 능히 평등함으로써 제법이 평등한 것이고,
문득 능히 여러 신통 및 지혜도 평등한 것이다.
다시 범천아,
구족된 보시를 생각하는 것이 신통과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고,
계율을 생각하고 인욕을 생각하고 정진을 생각하고 고요함을 생각하고 지혜를 생각하니,
이 모두를 구족하는 것이 곧 여러 신통과 지혜를 구족하는 것인가?
여러 신통과 지혜의 생각을 떠나는 것을 이름하여 6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 신통과 지혜를 갖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범천아,
이미 능히 6바라밀을 구족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여러 신통과 지혜를 구족한 것이다.”
또 여쭈었다.
“무엇이 여러 신통과 지혜를 구족한 것입니까?”
위대한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눈이 색을 수용하지 않고,
귀가 소리를 수용하지 않고,
코가 냄새를 수용하지 않고,
입이 맛을 수용하지 않고,
몸이 감촉을 수용하지 않고,
뜻이 법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에는 안이 없고 바깥도 없다.
말미암는 바도 없고 수용하는 바도 없고 스스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여러 신통과 지혜를 두루 빠짐없이 구족하고 이미 이것을 구족한 뒤라면 이름하여 여러 신통과 지혜라고 한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않고,
귀가 소리에,
코가 냄새에,
혀가 맛에,
몸이 촉감에 그리고 뜻이 법에 집착한 바가 없다.
그런 까닭에 여래의 지혜는 걸림이 없으며 보는 바가 무한하니,
여러 신통한 지혜에 통달한 것이며,
다시는 다른 여러 신통한 지혜를 수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 신통한 지혜의 그릇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곧 그릇을 성취할 수 없으니,
그릇이란 없는 것이다.
이미 그릇이 없다면 이것을 현격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 능히 평등하고 현격하게 드러난 행이라면 여러 신통한 지혜를 위하여 그것은 수용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범천아,
비유하면 일체의 행위가 모두 허공에 바탕을 두지만 허공에는 의지할 바가 없는 것처럼 일체의 것에 통달하여 모르는 바가 없으면서 여러 신통한 지혜에 뜻으로 의지하며 또 그것을 구하려고 하지만,
여러 신통한 지혜에는 의지하거나 구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
또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러 신통한 지혜란 무엇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어떤 것을 일러서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이름하신 것입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여러 신통한 지혜란 임시로 빌려온 이름일 뿐이다.
어디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온갖 행을 두루 요지하며,
성문과 연각의 일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일체의 생각을 탐색하여 그것을 치료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가고 오는 여러 거취를 모두 분별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지혜에 한계가 없어 중생의 행을 환히 아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때에 따라 일체를 분별하고 식별하여 유학(有學)을 따르기도 하고 무학(無學)을 따르기도 하고 연각의 지혜를 따르기도 하되,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이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드러내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평등하게 치료하고 수순하여 행하매 그 때를 잃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어떤 약이 무엇을 치료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환하게 아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온갖 병을 소멸시키고 제거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여러 장애를 뽑아내어 근원에 의지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항상 삼매정(三昧定)에 들어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일체의 법을 요지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궁극적으로 두루 통달하여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를 열어 천명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또한 종합하고 분별하여 설한 바가 두루 갖추어져 있고 일체에 민감하게 통달하여 있다.
범천아,
그러므로 이름하여 여러 신통한 지혜라고 한다.”
그러자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여러 부처님 세존께는 마음이 없으니 지혜로 말미암아 마음이라고 이름할 뿐이며,
그 마음은 본래 청정합니다.
여래ㆍ지진께서는 중생의 마음이 행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환히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성인이시여.
만일 어떤 족성자나 족성녀가 여러 신통한 지혜에 관해서 듣는다면 그 누가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부류는 한량없는 공덕을 얻을 것이며,
뛰어나고 훌륭한 것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자 명망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보살이 명성과 공덕을 희망하여 도에 뜻을 둔다면 부처님 도를 사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대승을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제법에는 명성과 공덕이 없으며,
반려와 붕당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이것은 보살의 명성과 공덕이 아닌 것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상응하는 바에 연하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도에 그 뜻을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큰 자비에 입각하여 중생의 괴로움과 근심과 번뇌를 멸진하고자 하는 까닭에 자신의 수고스러움을 참아내고,
그것을 싫어하거나 권태로워하지 않으며,
윤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량없는 까닭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절하지 않는 까닭이며,
바른 법을 보호하는 까닭이며,
성스러운 대중을 공경하는 까닭입니다.
또한 선한 법으로써 악한 법을 제거하는 까닭이며,
여러 해탈문을 보고 그것으로 해탈시키고 제도하는 까닭입니다.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하고 제거하며 멸진케 하는 까닭이며,
일체를 구제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하는 까닭이며,
순응하게 할 뿐 사랑과 증오를 뽑아 버리는 까닭이며,
세간법에 집착이 없는 까닭이며,
험난한 길에서 생사를 물리치고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까닭이며,
무위법에 거처케 하고 안온함에서 힘쓰게 하는 까닭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또한 여러 보살은 의심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중생을 위해 지은 일에 대하여 희망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의심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보살 대사는 괴로움과 즐거움 때문에 근심하거나 멀리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무엇을 일컬어 보살의 종성(種姓)이 청정하다고 합니까?”
세존께서 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은 전륜성왕을 종족의 종성으로 삼지 않으며,
제석과 범천으로 종성을 삼지 않는다.
태어나는 곳마다 종성이 청정하니,
보살이 건립한 것은 능히 덕의 근본을 구족한 것이며,
다른 사람을 온갖 선한 일의 근원에 일으켜 세워 놓은 것이다.
이것을 두고 보살의 종성이 청정하다고 한다.
또한 축생이 태어나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자애로움과 슬픔과 기쁨과 평정으로 법의 약을 평등하게 베풀어 뜻의 더러움을 제거하니,
이것이 곧 보살의 종성이 청정하다는 것이다.
보시로 종성을 삼으니 인색한 바가 없기 때문이며,
계율로 종성을 삼으니 극심한 번뇌가 없기 때문이며,
인욕으로 종성을 삼으니 진에를 떠난 까닭이다.
정진으로 종성을 삼으니 게으름이 없는 까닭이며,
선정으로 종성을 삼으니 한마음으로 정(定)에 든 까닭이며,
지혜로써 종성을 삼으니 어둡게 덮인 바가 없는 까닭이다.
이것을 두고 보살이 여러 더러움을 버리지만 도의 마음은 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보살의 종성이니 성문승과 연각승을 즐기지 않는 까닭이다.”
7. 담론품(談論品)
그때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박수(薄首) 동진이 이 대중의 모임 가운데 앉아 있는데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말도 강설도 없고 담론하는 바도 없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박수에게 말씀하셨다.
“이 법에서 머물며 설하는 것을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느냐?
미치는 곳이 있다면 뜻을 굽히어 분별하여라.”
박수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법의 의미에 입각하여 바른 깨달음에 이르렀는데,
그 법에 말이나 가르침이 있다고 헤아릴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박수여,
법에는 말이나 가르침이 없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법에는 정녕 언사가 있으며,
사념한 것이 있으며,
강설하거나 담론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에는 언사도 없고,
사념한 것도 없고,
담론하거나 강설한 것도 없다.”
다시 질문하였다.
■ “만일 제법에 말도 없고 사념도 없고 논의하고 설하는 것도 없다면 곧 강설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지심 범천이 박수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 다른 사람 또는 중생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지 않으십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법의 성품 가운데 두 가지가 분별된다고 강설할 수 있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법의 성품은 가히 일체 법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대답하였다.
“포함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범천이여,
법의 성품에는 둘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의 성품은 일체 법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중생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겠습니까?”
다시 질문하였다.
“박수여,
그 법을 설하는 것이 나의 자아를 헤아리는 것이니,
어찌 두 가지 일을 위한다고 일컫지 않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만일 범천이여,
획득하는 바가 있다면 설하는 것도 있고 듣는 자도 있는 것입니까?”
다시 질문하였다.
“여래께서는 어찌 법을 강설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여래께서 설한 바에는 곧 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 둘이 없으며,
여래께서는 두 가지 일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가령 제법에 둘이 없다면 누가 둘을 짓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중생은 이름에 기대어 나의 자아를 수용합니다.
그리고 우둔한 범부는 두 가지 일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일이란 끝내 둘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물며 무수한 것으로 둘을 짓지 못하는 것이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진실한 끝이란 둘이 없는 것이며,
두 가지 일을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둘이 없다는 것을 정녕 아는 것이 가능합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만일 알 수 있다는 것이 곧 두 가지 일을 이룬 것이라면
그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자는 두 가지 법이 없음을 인식하며 알고 가르치는 자입니다.
여래께서 비록 지극히 정성스럽게 법을 설한다 하지만 여여하신 분께 설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또한 그 법이라는 것에 문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어느 거취로 돌아갑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거취에는 나아가는 바가 없으니 그것이 곧 여래께서 설하신 법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이 어찌 열반이라는 거취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그 열반이라는 것에 정녕 돌아갈 거취가 있어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까?”
다시 질문하였다.
“그 열반이라는 것에는 돌아갈 거취가 없어 다시 돌아올 수도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의 거취도 나아가는 바가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듣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대답하였다.
“마음이 평등한 까닭에 듣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이 마음의 평등함입니까?”
대답하였다.
“말하고 가르친 것도 없으며 들은 바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을 듣는 자란 무엇을 일컫습니까?”
대답하였다.
“말하자면 법의 성품에서 들은 바가 없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마땅히 무엇으로 말미암아 법을 환하게 압니까?”
대답하였다.
“능히 분별하면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떤 것을 비구가 다투거나 싸우는 것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이것은 그렇게 상응하는 것인데 저것은 그렇게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연이 있는 것인데 저것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욕의 티끌인데 저것은 맺힌 원한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일인데 저것은 선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율을 받드는 것인데 저것은 금기(禁忌)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받들고 행해야 하는 것인데 저것은 반드시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획득한 바가 있는 것인데 저것은 시절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범천이여,
이름이 있건 이름이 없건,
여러 번 합해지고 모인 적이 있는 일을 일으키면 이 모두를 이름하여 다투고 싸우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에는 다투거나 싸우는 것이 없습니다.
새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없고,
달리 행하는 것이 없고,
온갖 싸워야 할 이치가 없습니다.
이러하면 곧 사문이거니와,
사문은 욕심이 없으며 평등한 모습을 지닙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비구가 여래의 가르침을 받든다고 하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만일 여러 가지 제지를 당하고 가르침과 훈계를 받아도 그것으로 인해 근심하지 않는 것이 가르친 바대로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일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분별하고자 하는 지혜를 두지 않으면 곧 말씀과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탐욕스런 무리들을 위하여 들어간다고 해도 그것에 미혹되지 않으면 곧 말씀과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뜻한 바를 두고 다투지 않으면 곧 말씀과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만일 법을 보호한다면 곧 말씀과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바른 언사를 혼란스럽지 않게 하면 곧 말씀과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비구가 바른 법을 수호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만일 두루 행하되 혼란스럽지 않다면 곧 바른 법을 수호하는 것이며,
법성(法性)을 위배하지 않으면 곧 바른 법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비구가 여래에 친근히 하고 가르침에 순응하며 진리를 행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만일 비구가 제법을 멀리하지도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고 또한 얽매인 바도 없다면,
이 비구가 곧 여래에게 친근히 하는 것이고,
가르침을 받들어 순응하는 것이며,
차례로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이 비구가 여래를 받들어 섬기고 시중하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만일 비구가 몸으로 지은 바도 없고 행하는 바도 없고 말도 없고 뜻도 없다면
이것이 여래를 받드는 것이고 시중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의복이나 음식으로써가 아니라 공경하고 받들며 순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여래를 봅니까?”
대답하였다.
“육안(肉眼)도 없고 천안(天眼)도 없고 혜안(慧眼)도 없고 의지하는 바도 없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법을 봅니까?”
대답하였다.
“연기를 멸진하지 않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연기를 보는 자입니까?”
대답하였다.
“평등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지 않는 자입니다.
만일 평등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한다면 곧 생하는 바도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신통을 체득한 자입니까?”
대답하였다.
“번뇌[漏]를 일으키지 않으며 멸하는 바도 없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여래께서 가르친 것을 익힌 자입니까?”
대답하였다.
“짓는 바가 없어 일으키는 바가 없기에 버리는 바도 없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평등을 획득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삼계에 모두 이르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잘 개화한 것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제법의 존재에 있어서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안온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나라는 자아가 없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해탈한 자입니까?”
대답하였다.
“여러 결박에 의하여 속박되거나 묶이지 않은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득도한 자입니까?”
대답하였다.
“생사에 거처하지도 않고 멸도하지도 않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번뇌가 다한 비구는 어느 것을 다하였습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여러 다한 바에서 오히려 다한 바가 없습니다.
그 여러 번뇌는 곧 근본이 없는 것입니다.
근본이 없음을 요지한다면 이를 이름하여 번뇌가 다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참된 진리여서 모든 언사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여러 어려움을 능히 분별하고 요해하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누가 도를 성취합니까?”
대답하였다.
“우둔한 범부가 오히려 도를 성취합니다.
그는 또한 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현자와 성인의 일에 있어서 돌아갈 거취가 없고,
일체의 끝과 시작을 환히 아는 자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참된 진리란 마땅히 무엇으로써 봅니까?”
대답하였다.
“그 참된 진리란 볼 방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보는 방법을 익히는 것 자체가 허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찰하는 바가 없는 것이 바로 참된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떻게 보는 것이 참된 진리를 보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일체의 견해에서 보는 바가 없으면 곧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그 참된 진리란 마땅히 어디에서 구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마땅히 4전도(顚倒) 가운데서 구해야 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설하며,
4전도라는 것은 무엇을 일컫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4전도라는 것은 그 근본과 지말을 유추하되 그것은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안온함이 없는 것이고,
나의 자아가 없는 것이고,
장엄되지도 않고 깨끗함도 없는 것인데 그것을 실제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무상함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어서 역시 그러하고,
그 안온함이 없는 것은 안온하지 못해서 역시 그러하고,
그 몸이 없는 것은 몸이 아니어서 역시 그러하고,
그 공(空)이 없는 것이 공이 아니어서 역시 그러합니다.
범천이여,
만일 일체 법에서 즐기는 바가 없는 자가 성스러운 진리를 구한다면
그는 진실한 진리를 구하되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습기(習氣)를 단절하지 않고 멸진[盡]을 증득하지 않고 도에 입각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마땅히 무엇으로 도에 입각하여 생각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행하려고 생각하는 것도 없지만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도가 있다는 것과 도가 없다는 것의 두 가지 일을 제거한 채
도를 구하는 자는 일체 법에서 어떤 것도 얻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도에 입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도에 입각하여 일으키는 바가 없는 자라면 일으키지 않는 바도 없습니다.
또한 단절함이 없는 자라면 단절하지 않는 바도 없습니다.
그리고 생사(生死)도 없고 멸도(滅度)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바도 없고 일어나지 않는 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현자와 성인의 도라고 합니다.”
그때 큰 가문 출신의 바라문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보행(普行)이었다.
그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청신사(淸信士)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법에 귀의하고 승단에 귀의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 청신사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법과 거룩한 승단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보지 않고 타인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보지 않는 것이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며,
또한 법을 보지 않는 것이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며,
거룩한 승단을 보지 않는 것이 자기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면 청신사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법에 귀의하고 거룩한 승단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만일 청신사가 여래의 색(色)에 들어가지 않고 뜻하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으며,
또한 여래의 수ㆍ상ㆍ행ㆍ식을 뜻하지 않으며,
또한 행하는 것도 없고 아는 바도 없이 뜻이 여래를 향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법에 대해 상념하는 바도 없고,
제법에 대해 동일한 모습도 없으며,
또한 비교되는 부류도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법에 귀의한다고 합니다.
모든 형체를 가진 것에 대해서도 의지하는 바가 없고,
형체를 지닌 것을 뜻으로 즐겨 하지 않으며,
또한 형체가 없는 것도 뜻으로 즐겨 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승단에 귀의한다고 합니다.
만약 청신사(淸信士)가 부처님을 얻지 못하고,
또한 법과 거룩한 승단을 얻지 못하면 곧 부처님과 법과 거룩한 승단에 귀명해야 합니다.”
보행(普行)보살이 다시 질문하여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부처님의 도에 뜻을 두고 구한다면 무엇을 기원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는 공과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떤 보살을 일컬어 구도자라고 한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만일 보살이 일체를 구하되 구하는 바가 없고 제법을 요지하며 이미 제법을 안 뒤 곧 중생을 요지하면,
이런 보살을 부처님의 도에 뜻을 두고 기원한다고 합니다.”
그때 보행보살이 세존께 아뢰었다.
“그러합니다,
위대한 성인이시여.
무엇 때문에 보살을 보살이라고 이름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사견(邪見)에 떨어진 부류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그들을 위하여 바른 견해의 일을 분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도에 나아가도록 권하여 들게 한다.
그런 까닭에 보살을 보살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보살에게는 제어할 것이 없고,
또한 제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단지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마음으로 발원하니,
곧 사견에 떨어지는 몇 종류의 중생을 위하려는 까닭에 뜻과 원을 세우는 것이다.
이처럼 족성자야,
보살은 사견에 떨어지는 중생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는 도에 뜻을 건립한다.
그러므로 보살인 것이다.”
그러자 도의(道意)보살이 세존께 아뢰었다.
“저희들도 각자 보살이라는 이름에 대해 아는 바대로 설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기꺼이 설하고자 하는 자는 설하도록 하라.”
도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비유하면 세간의 남자 또는 여인이 밤낮으로 팔관재(八關齋)를 받들어 정진하는 데
훼손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고 계율을 어기는 일이 없듯이 그와 같이 위대한 성인이시여,
보살로서 행하는 자는 처음 뜻을 일으킨 때로부터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까지 항상 팔관재를 지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견의(堅意)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견고한 성품으로 자비로움을 행하는 것을 원만히 갖춘다면 이를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도인(度人)보살이 말하였다.
“비유하면 배와 같고 교량과 같으니,
사람을 건너게 하되 힘들어하거나 수고스러워하지 않고 상념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행하는 자이기에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기악(棄惡)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부처님 국토에서 적절하고 훌륭하고 동등하게 선다면 일체의 온갖 악한 것을 제거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광세음(光世音)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중생이 다만 보살을 보아도 부처님 도(道)로 돌아가고 나아갈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단지 명호만을 관찰해도 해탈을 얻습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득대세(得大勢)보살이 말하였다.
“발을 들어 삼천대천 부처님의 세계를 지날 때마다
일체 악마의 궁전을 진동시킨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환염(患厭)보살이 말하였다.
“강하(江河)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수의 겁들을 밤낮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하되,
만일 보름 밤낮으로 행하고 한 달 동안 행하고 열두 달 동안 행하고 1년 동안 행하고,
천 년 또는 억백천 년 동안 행하면,
이에 한 부처님께서 나오시리니,
그런 식으로 강하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모든 여래께 보시를 올리고 범행을 깨끗이 실천합니다.
그런 뒤 수기를 받고 중생을 위하여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도를 건립하되,
또한 상념하는 것도 없으며,
방일하는 일도 없고,
의심하는 바도 없고,
게으르거나 귀찮아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도사(導師)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중생이 사악한 길에 떨어지면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바른 길에 서게 하고서도,
그 보답을 희망하거나 방일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대산(大山)보살이 말하였다.
“제법에 대해 큰 산[大山]과 같이 상념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구쇄(鉤鎖)보살이 말하였다.
“보는 바가 있어도 또한 집착하는 일이 없어서 일체의 번뇌와 괴로움을 제거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용심(勇心)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마음으로 일체 법을 생각하되 인욕을 일으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욕사자변(欲師子變)보살이 말하였다.
“그에게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는 것이 없고 놀라는 것이 없으며
심오하고 미묘한 법에 의거하여 여러 외도와 이교도를 항복시키고 교화시킨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무념(無念)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마음으로 마음에 들어가는 이여서 생각하는 것도 없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선윤 천자(善潤天子)가 말하였다.
“만일 여러 천상의 궁전에 태어나서 더럽혀지는 바가 없고,
역시 애욕을 떠난 법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성언(誠言)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지극한 정성으로 전개해 나가되,
살피고 관찰하여 들어가서 말하는 바에 진리가 아닌 것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애경(愛敬)보살이 말하였다.
“일체의 색이 모두 부처님의 모습과 같음을 나타낸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상참(常慘)보살이 말하였다.
“나고 죽음에 떨어지는 중생들을 보고 일체의 모든 즐거움에서 즐거움을 일으키지 않으며,
‘내가 마땅히 중생의 무리를 제도하고 해탈시키겠다’고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막능당(莫能當)보살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애욕의 악마에게 위협받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상소희근(常笑喜根)보살이 말하였다.
“뛸 듯이 기뻐함이 한량없으며 모든 감각 기관이 즐거워하고,
이미 서원이 구족되고 지어야 할 바가 끝났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괴제의망(壞諸疑網)보살이 말하였다.
“뜻을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일체 법에서 홀로 의심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사자 동녀(師子童女)가 말하였다.
“그에게 여자의 법도 없고 남자의 법도 없으면서 갖가지 형태를 드러내 보여 중생을 개화시킨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녀(寶女)가 말하였다.
“진귀한 보배를 갖지 않아도 즐거워하는 바가 있으니 오직 3보인 부처님과 법과 거룩한 승단을 즐거워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우시(離憂施) 청신사가 말하였다.
“만일 전도된 것이 없고 미혹한 것도 없고 보살이 도에 있으면서 일체 법에 대하여 얻는 바가 없고 일으키는 바도 없고 멸진하는 바도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현호(賢護) 장자가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짐짓 명호로써 중생을 이끌고 제도하여 부처님 도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월 동녀(寶月童女)가 말하였다.
“만일 항상 동진(동등하게)의 범행(梵行)을 준수하고 보시하는 바가 평등하며,
상념하는 것도 없고 애욕을 익히지도 않는다면,
어찌 하물며 재산과 부귀를 뜻하고 구하겠습니까?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향화(香花)보살이 말하였다.
“도리 천자(忉利天子)와 같이 계율의 향기로 자신의 몸을 쐬고 발라서 보살에게 다른 냄새는 나지 않고 오직 계율과 금기의 법으로 향기를 삼습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조락(造樂)보살이 말하였다.
“다른 법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세 가지 법에 뜻을 두니,
부처님을 시봉하고 경의 법을 강설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지심 범천(持心梵天)이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법에 뜻을 두지 않고,
여러 부처님의 훈계하는 전적을 그리워하지 않고,
오히려 광명을 공경하여 그것에 들어가는 자라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자씨(慈氏)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중생을 보고서 자심(慈心)삼매를 닦고 중생을 제도함을 얻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박수 동진이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비록 일체 법을 설한다고 해도 설한 바도 없고 법에 대한 생각도 없고 제법에 대한 상념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명망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보살의 광명이 여러 애욕의 티끌을 멸진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화(普花)보살이 말하였다.
“시방의 여러 부처님 국토에 있으면서 여러 여래를 친견하는 것이 온갖 꽃과 같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러 보살은 각각 본래의 뜻을 논변하여 나타내고 진술하였다.
■ 그때 부처님께서 보행(普行)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모든 중생을 위하여 여러 고뇌와 근심을 참고
또한 일체 덕의 근본을 잃지 않으면서 중생의 부류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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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역본인 구마라집 한역의 『사익범천소문경』에는 “제법은 가는 곳이 없으니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諸法無所去無所至故]”로 되어 있거니와 문맥상 이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2/20 |
♥ 잡담 ♥뇌암의 치료방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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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지심범천소문경_K0142_T0585.txt ☞범천소문 sfd8--불교단상_2564_02.txt ☞◆vjjv1794 불기2564-02-20 θθ |
■ 선물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 불기2564-02-23-24시이내)
【범】aṇu 색법(色法)의 극히 작은 것을 극미(極微)라 하고, 극미를 7배 한 것을 [ ]라 한다. 극미는 단지 한 개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7개의 극미가 1단이 되어야 존재하므로 이것을 [ ]라 일컫는다.
- 답후보-
미(微)
밀림
바라밀
박가
제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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