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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5-01-04_신화엄경론-K1263-008 본문
『신화엄경론』
K1263
T1739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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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엄경론』
♣1263-008♧
제8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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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華嚴經論 卷第八 ...
K1263
신화엄경론 제8권
이통현 지음
장순용 번역
10. 가르침을 회통해서 처음과 끝을 밝힘②
시방의 청정한 바다인
법계의 진정한 보신 노자나(盧遮那)와
6위(位) 인과의 모든 보살인
문수와 보현의 대해(大海) 같은 대중에게 머리숙여 예배합니다.
교설한 법문의 청정한 바다인
과덕(果德)이 원만한 금강구(金剛句)1)에 대하여
제가 이제 이 미묘한 경전을 해석해서
장차 모든 중생에게 널리 이익을 주고자 하옵니다.
법문에 대해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하시고
보고 듣는 모든 이가 큰 이익을 얻도록
바라건대 모든 성인은 가피력으로 수호하여
모두 다 노자나의 청정한 바다와 같게 하소서.
교리를 드러내어 널리 알리고 경전을 홍보하는 데는 모름지기 네 가지 뜻으로 나눈다.
첫째는 경전의 뜻을 분류하는 것이며,
둘째는 경전의 종지를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가르침의 바탕을 밝히는 것이며,
넷째는 회상의 숫자를 총체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첫째,
경전의 뜻을 분류한다는 것은 간략하게 열 가지 단락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함을 밝히는 것이며,
둘째는 과(果)를 들어서 수행을 권함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과(果)로써 믿음을 성취함을 밝히는 것이며,
넷째는 진실한 증득에 들어감을 밝히는 것이며,
다섯째는 행(行)을 발해서 수행함을 밝히는 것이며,
여섯째는 지혜와 자비가 서로 들어감을 밝히는 것이며,
일곱째는 수행을 쌓아 덕을 성취함을 밝히는 것이며,
여덟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장애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며,
아홉째는 모든 현자(賢者)의 지위에 의탁함을 밝히는 것이며,
열째는 범부로 하여금 실제 증득하게 함을 밝히는 것이다.
첫째,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함을 밝힌다는 것은 바로 「세주묘엄품(世住妙嚴品)」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
과(果)를 들어서 수행을 권한다는 것은 「현상품」 이하부터 「비로자나품」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아울러★★ 「세주묘엄품」에서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과(果)를 칭찬하여 높임으로써 사람을 수행으로 나아가게 한다.
셋째,
과(果)로써 믿음을 성취함을 밝힌다는 것은 「불명호품」 이하부터 「현수품」에 이르기까지 여섯 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아울러 앞서 나온 「세주묘엄품」 이후로 통틀어서 해당된다.
문득 열 개의 지혜 불[智佛]로써 자기 마음의 과(果)를 삼는데,
부동지불로써 첫머리를 삼는 것은 자기 마음의 지혜가 분별성을 따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밝히기 때문이다.
넷째,
진실한 증득에 들어간다는 것은 「승수미산정품」 이하부터 여섯 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10주로 체(體)를 삼아 부처님의 지혜 가문에 태어나 머물기 때문이다.
다섯째,
행(行)을 발해서 수행한다는 것은 「승야마천궁품」 이하부터 네 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10행으로써 체(體)를 삼아 부처님의 행(行)을 행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지혜와 자비가 서로 들어감을 밝힌다는 것은 「승도솔천궁품」 이하부터 세 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10회향으로 체(體)를 삼는데,
그 체(體)가 진속(眞俗)이 원만하여 대자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일곱째,
수행을 쌓아 덕을 성취함을 밝힌다는 것은 타화자재천 중의 「십지품」이 이에 해당된다.
앞에 나온 세 가지 법의 수행을 쌓아 점점 익숙하게 해서 성취시키기 때문이다.
여덟째,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장애가 없음을 밝힌다는 것은 「십지품」 이하부터 「보현행품」에 이르기까지 열한 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십지품」 안에서 덕을 쌓아 공(功)을 성취함으로써 11지에서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行l 원만한 이것을 법과 행(行)이 원만한 부처라고 이름붙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작위 없는 체성(體性)이 털끝만한 생각도 이동하지 않아서 법계의 뚜렷하고 밝은 대지혜의 성품이 된다.
그리하여 도(道)를 보는 10주 초심에 시간[時]이라는 생각이 없게 되고,
삼세에 자체성이 없게 됨으로써 총제적으로 일시(一時)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정식(情識)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지혜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홉째,
모든 현자의 지위에 의탁함을 밝힌다는 것은 앞서 말한 37품의 모든 보살과 「불출현세간품(佛出現世間品)」이 이에 해당된다.
모두 다 성품 바다의 대지혜 경계로부터 방편으로 그 몸을 나타내 지위에 의탁함으로써 10신과 10주와 10행과 10회향과 10지와 등각위의 11지 법문을 이루고 있다.
이는 범부로 하여금 믿음을 통해 입문하게 고 배움을 본받게 함으로써 자취에 의거해 그 일[事]을 미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열째,
범부로 하여금 실제 증득하게 함을 밝힌다는 것은 법계의 성품 안에 10신 등 6위(位)의 닦아 나아가는 방편행(方便行)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10지에서는 체용을 여의지 않으며,
방편을 무너뜨리지도 않으며,
지혜가 높을수록 그 행(行)은 더욱 낮아서 근기에 따라 행(行)이 원만하게 성취되기 때문에 “닦아 나아간다”고 이름붙인 거이다.
이 닦아 나아감은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데 따라 모든 지위를 세우고,
그 지위의 지(知)와 행(行)을 따라 인과를 미혹하지 않게 함으로써 배우는 자로 하여금 총체적[總]인 것과 개별적[別]인 것을 훌륭히 밝히게 한다.
그리하여 자취에 의거해 공을 성취하게 함으로써 처음[始]에 걸리지 않도록 한 것이며,
초시(初心)을 벗어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아래 문장에서 선재동자 등 온갖 우바새와 우바이와 동자와 동녀가 제각기 5백 명씩 나열된 것은 10주와 10행과 10회향과 10지와 11지인 5위의 하나하나의 지위마다 열[十]이 있어서 합계 5백이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 6천 명의 비구는 믿음으로 물러나지 않는 자를 통틀어 합계 6천 명이라고 말한 것이며,
1만 명의 용들은 만행(萬行)을 밝힌 것이다.
기러한 대중들이 모두 범부인데,
모두 법계의 불과(佛果)인 지혜 경계의 문[智境門]을 믿기 때문에 10주와 10지에 오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범부로 하여금 실제 등득하게 한다”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상 열 가지 항목으로 경전의 뜻을 다 분류했는데,
그 속에 담긴 자세한 뜻은 본문에서 밝히겠다.
「법계품」 한 품(品)은 앞뒤의 40품 경전을 모두 통틀어서 다 법계이기 때문에 삼세의 법이 모두 법계란 것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이 「법계품」 한 품은 일체 모든 부처님의 과(果)이자 일체 중생의 과(果)이다.
이 한 부[一部]의 경전에는 모두 다섯 가지 인과의 보편성[遍周]의 뜻이 있다.
첫째,
정각의 성취를 제시한 인과의 보편성이다.
즉 「세주묘엄품」 이하 다섯 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
신위(信位)와 닦아 나아감[進修]의 인과의 보편성이다.
「불명호품」 이하 여섯 품의 경전으로부터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의 지위를 합친 10품의 경전이 이에 해당된다.
셋째,
선정의 바탕[定體]의 보편성으로서 「십정품」과 「십통픔」과 「십인품」이 이에 해당된다.
넷째,
행의 바다[行海]의 보편성이니,
「보현행품」과 「이세간품」이 이에 해당된다.
다섯째,
법계의 부사의한 크고 뚜렷하고 밝은 지혜 바다[法界不思議大圓明智海]의 보편성이니,
「법계품」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다섯 가지 보편성의 듯이 있기 때문에 이 일부 경전 안에 있는 다섯 품의 첫머리를 모두 “이때 세존께서는 마갈제국에 계시면서”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이 다섯 가지 법이 일시(一時)이며,
일법계(一法界)이며,
일찰나제(一刹那際)이며,
일체용(一體用)이며,
일체 모든 부처님께 공통된 법이라서 하나의 인과가 평등하고 보편적이고 원만하고 앞뒤의 뜻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일체 모든 부처님이 마찬가지란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법이 10정(定) 중의 1찰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신(神)을 내려 모태에 들어가는 것과 성불을 나타내 보이는 것과 열반에 드는 것이 1찰나를 벗어나지 않아서 다시 이동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일부의 경전은 한 품에 하나씩 다섯 번에 걸쳐 “이때 세존께서는 마갈제국에 계시면서”라고 했는데,
오직 「법계품」만이 다른 것은 이 일부 경전의 대강의 종지를 총체적으로 갉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 법계의 크고 뚜렷하고 밝은 지혜에는 다섯 가지 보편성의 인과가 있어서 최초의 믿는 마음[信心]에서부터
모든 행(行)을 닦아 나아가는 시종(始終)의 인과와 만행의 원만함에 이르기까지
궁극적으로는 10정(定)의 바탕[體]인 때가 없는[無時] 성품을 벗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범속함[凡]과 성스러움[聖]이 한결같이 동등한 것이 본래부터 그와 같거늘
정(情)의 망령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시량(時量)2)이 생(生)을 따르면서 태어나고 늙는 일이 문득 있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만약 근본법계의 문 안에서 늦고 빠르다는 견해를 일으킨다면,
이는 모두 자기 정(情)에 따른 망령된 견해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자체성 없는 이치를 미혹해 본래 시간이 없는 지혜 경계의 법문을 어기고서
방령된 정을 쫓아 시겁(時劫)의 늦고 빠름을 보는 자는 부처님의 정법(正法) 속에서 믿음의 종자를 이루지 못하니,
이런 사람은 설사 삼계를 벗어나는 과(果)를 수행할지라도 여전히 성불의 종자는 있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즉 권교의 6통(通) 보살과 성문과 연각이 이런 사람에 해당된다.
『법화경』에서 “불퇴전(不退轉)의 보살들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고 설한 것은 생사(生死)를 벗어난 불퇴전늘 밝힌 것이지
생사 속에 처한 불퇴전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또 단지 공관(空觀)으로만 현재 행하는 번뇌를 굴복시켜서 초지(初地)의 도를 보는 지위에 들어간 것이지
근본무명(根本無明)을 통달해서 근본지 속의 불퇴전을 얻은 것은 아니다.
이처럼 3승의 도를 봄은 모두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3) 보살일 뿐,
근본법계의 크고 뚜렷하고 밝은 지혜로 초발심의 초주(初住)에서 능히 시방에 성불할 수 있는 등의 불퇴전이 아니다.
세 종류의 의생신이란 것은 초지ㆍ2지ㆍ3지는 삼마발제락(三摩跋提樂)4)의 의생이이라 이름붙이며,
4지ㆍ5지ㆍ6지는 법의 자성(自性)을 깨달은 의생신이라 이름붙이며,
7지ㆍ8지ㆍ9지ㆍ10지는 종류를 함께 하여 태어나면서도 행위의 작위가 엇는 의생신이라 이름붙인다.
이같은 세 종류의 의생신 보살은 모두 법계의 크고 뚜렷하고 밝은 지혜 바다의 화택문(火宅門)5) 밖에다 세 대의 수레를 방편으로 세워서 모든 자식들에게 불의 재난을 벗어나도록 한 것이다.
이 경전의 아래 문장에서 “성문은 회상에 있으면서도 귀머거리와 같고,
6통 보살은 설사 이 경전을 듣더라도 믿음을 낼 수 없다”고 한 것이니,
자세히는 경전에서 밝히고 이다.
이는 무시(無始) 이래로 망명된 견해를 따르는 것이라서 설사 불법에 대한 믿음을 낼 수 있다 해도,
단지 정에 따라 믿음을 내면서 스스로의 지혜 경계를 미혹하기 때문에
실다운 지혜에 저절로 계합해 참다운 믿음을 일으켜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면 궁극적으로는 성불하지 못할 것이니,
설사 다시 중생을 교화한다 해도 3승과 인천(人天)의 종자만을 이룰 수 있어서
단지 한 방향의 청정한 찰토에만 머물 뿐 광대한 법계의 양이 마치 허공과 같은 무변지(無邊智)의 대용(大用)은 없는 것이다.
즉 시방의 티끌 같은 찰토에 색신(色身)을 대현(對現)하여 일체의 중생을 근기에 따라 제접하는 것은 3승으로선 할 수 없는 것이라서 단지 “삼천대천세계의 경계를 본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 화엄 경전에는
세계해(世界海)가 있고,
세계성(世界性)이 있고,
세계종(世界種)이 있는데,
모두 너무나 깊고 광대한 것이 법계 허공과 같으니,
「화장세계품」에 충분히 설해져 있다.
3승 중에서는 설사 여래 몸의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볼지라도,
또 설사 그 광대함이 8만 4천이라 말할지라도 여래의 십 불찰미진수 등인 신상(身相)과 수호(隨好)는 보지 못한다.
또 3승의 종성(種性)은 단지 여래의 교화가 삼천대천세계에 충만한 행(行)을 볼 뿐이지,
여래의 교화가 다함 없는 불찰미진(佛刹微塵)에 충만한 행은 보지 못한다.
또 3승의 종성은 작위하는 일체가 다 변량(邊量)6)이 있어서
법계의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변량 없는 법과 보현행의 법이 서로 사무치면서 장애가 되지 않는 걸 보지 못한다.
둘째,7) 경전의 종지를 밝힌다는 것에는 그 뜻이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경전의 종지를 밝히는 것이며,
둘째는 이 경전이 어떤 장(藏)에 포섭되는 것이며,
셋째는 그 서분(序分)을 나누는 것이며,
넷째는 그 바른 종지[正宗]를 정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이 경전이 어떤 사람에게 부촉되는가를 밝힌 것이며,
여섯째는 이 경전이 유통해 있는 곳을 밝히는 것이다.
첫째로 경전의 종지를 밝힌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경전은,
비로자나 대지혜 법계의 본질적인 참됨 자체가 적멸[寂]과 작용[用]이 원만하고 과덕인 법보(法報)의 성(性)과 상(相)이 걸림 없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타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법화경』에서는 “이 보배 수레를 타고 곧바로 도량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또 이 경저에서는 “불과(佛果)를 기거이 구하는 자에게는 최승승(最勝乘)과
상승(上乘)과 무상승(無上乘)과 부사의승(不思議乘) 등을 설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초발심을 한 자로 하여금 뜻을 광대하게 함으로써
이같은 여래의 대지혜의 과(果)가 자기 지혜와 하나로 합쳐져 둘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경전의 종지는 너무나 깊고 믿기가 어렵다.
만약 믿는 자가 있다면,
그 공덕은 십불찰미진수의 모든 부처님을 1겁이 다 지나도록 받들어 섬기는 것보다 뛰어나다.
즉 부처님을 섬기는 공덕은
이 경전 안에 여래의 대지혜 경계인 불과법계문(佛果法界門)이 저절로 있음을 믿는 것만 못하니,
이를 믿는 복이 그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다.
가령 「현수품」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손으로 10북찰을 들고서 1겁이 다 가도록 공중에 머룰러 있더라도 그러한 행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니,
오히려 이 법을 믿는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
십찰미진수의 중생의 처소에다 악구(樂具)를 보시하기를 1겁 동안 하더라도 그의 복덕(福德)은 뛰어난 것이 아니니,
오히려 이 법을 믿는 것이 가장 뛰어나다.
십찰미진수의 여래의 처소를 1겁 동안 받들어 섬기는 것보다 이 품(品)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할 수 있다면,
그 복이 훨씬 뛰어난 거이다.”
또 앞서 말한 게송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한 적이 있다.
“일체 세계에 있는 온갖 종류의 중생들 중에서 성문승을 구하고자 하는 자가 적으며,
독각승을 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적으며,
대승으로 나아가는 자는 너무나 드물다.
하지만 이 대승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니,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배나 어렵다.”
이러한 교설은 모두 이 경전의 종지가 너무나 깊어서 믿기 어렵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공관(空觀)을 닦는 자는 망령된 생각을 쉬고 선을 수행하면서도 더러움과 청정함이라는 정견(情見)이 여전히 있고,
성문과 독각과 6통 보살 중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 자는 이같은 분수가 없으니,
경전의 글에서도 “설사 어떤 보살이 한량없는 백천 나유타겁이 지나다록 6바라밀을 행하고 6신통을 얻더라도 여전히 가명(仮名) 보살이라 이름하지,
참된 보살이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설사 이 경전을 듣더라도 믿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법화경』 역시 이 3승을 돌이켜 1승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니,
즉 문 밖의 세 수레를 돌이킴으로써 방편으로 모든 자식들을 인도해 여래의 대지혜 법계인 진실한 문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또 문자에 의지하는 법을 타파함으로써 여래의 아무 데도 의지하지도 머물지도 않는 지혜[如來無依住智]의 본질적인 자유로움을 얻게 한 것이다.
『화엄경』은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을 때 단박에 상근기를 위해 설법한 것이며,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온 뒤 40년 동안 3승인을 돌이키기 위해 설법한 것이다.
또한 불승(佛乘)과 3승을 일시에 다 같이 설한 것이지만,
다만 근기에 따라 스스로 응하기 때문에 일음(一音)의 법문이 저마다 차별이 있어서 총체성[總]과 개별성[別]의 뜻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바탕[眞體]은 때[時]가 없기에 앞과 뒤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시방의 불국토에는 오직 1승법만이 있을 뿐 2승이나 3승은 없다.
부처님의 방편설을 제외함이니,
다만 거짓 명자[仮名字]로써 중생을 인도한다”고 설했으며,
또 “오직 하나의 사(事)만이 실답고 나머지 둘은 참되지 않다”고 설했다.
여기서 나머지 둘이란 것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 같이 타고 있는 문을 실(實)로 삼고 3승을 나머지 둘로 삼는 것이다.
즉 단순히 방편으로만 시설해서 참되지 않은 것이 나머지 둘이기 때문에 하나의 진실[一實]과 대조되는 모든 방편은 다 나머지 둘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성문과 연각과 불퇴전 보살의 3승이 모두 1승법을 믿지 못한다고 질책한 것이다.
권교의 보살은 비록 보리를 구하는 마음이 한 푼이라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생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러움을 벗어난 불퇴전을 얻을 뿐
참에 부합한, 청정함과 더러움이 평등한 불퇴전은 얻지 못하고 있다.
또 공관을 닦는 보살은 공(空)을 두드러지게 즐기는 것과 가진여관(仮眞如觀)으로
일방적으로 속박을 벗어나느라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있으며,
아울러 정토에 태어나기를 즐기는 보살 대중은 모두 생사를 벗어나고 속박을 벗어날 수 있어서 불퇴전이지만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는 법계의 성해(性海)인 하나의 참된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불승(佛乘)과 비교해 보면,
생사를 즐기는 자든 생사를 싫어하는 자든 둘 다 모두 퇴전(退轉)이니,
설사 공(空)을 두드러지게 관하고 가진여문(仮眞如門)을 닦아서 6바라밀을 행해 6신통을 얻더라도 이는 생사에서 벗어난 불퇴전이지 생사와 열반이 동일한 성품인 가운데 불퇴전은 아니다.
이 때문에 『화엄경』과 『법화경』에서는 6신통을 얻은 보살이라도 이 경전은 듣지도 못하고 믿지도 모한다고 설한 것이며,
『법화경』에서는 “만약 8만 4천 법문과 12부 경전을 수지하여 타인을 위해 연설함으로써 그 듣는 자로 하여금 6신통을 얻게 하는 것이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경전을 듣고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 것이다.
오로지 이 지혜의 경계는 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믿기가 어렵고,
3승의 믿음과 이해는 정(情)이 기뻐하는 바에 따르고 있다.
왜냐 하면 불과(佛果)가 3승의 뒤에나 있다고 설하며,
부처님의 정토가 다른 방위에 있으며
이 사바세계는 예토라 설하고 있으니,
보리를 닦는 자는 더러움을 싫어하고 참을 좋아해서
청정한 불국토에 태어나기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설사 세간에 머무는 보살이
미혹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말해도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지,
법이 본래 그러한 근본지의 자재력(自在力)이
응당 그러한 것을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이같은 보살은 모두 정에 따르는 법이라서 법이 믿기가 쉽다.
따라서 이 경전에서 설한
“불과에 들어가는 것은 찰나를 넘어서지 않지만,
다만 미혹과 깨달음이 현격하기에 한량없는 겁을 설한 것이지 총체적으로는 한 때[一時]도 옮기지 않는다.
따라서 범부의 자리에서 처음 도(道)를 볼 때부터
인과가 한 때라서
먼저와 나중이 없기 때문에 성불하지 못한 때를 보지 못하고,
정각을 성취한 때를 보지 못하며,
번뇌를 끊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보리를 증득함도 보지 못하고,
궁극적으로는 털끝만치의 생각도 옮기지 않으★★면서 50위(位)를 닦아 익혀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원만히 성취한다”는 것만도 못한 것이니,
총체성과 개별성[總別],
동일성과 차이성[同異],
생성과 파괴[成壞]가 일시에 자재로워
모두 세간의 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믿는 바라는 것은 경전의 문장에서
10신의 지위가 금색세계이며 부동지불이며,
상수(上首) 보살의 명칭이 문수사리라는 것이다.
문수사리는 한역(漢譯)하면 묘덕(妙德)이고,
금색이란 순백의 청정함으로서 더러움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곧 법신의 이치[理]다.
부동지불이란 것은 이치 속의 지혜[智]이니,
일체의 성인이나 범부의 몸에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 “일체처가 문수사리이며,
일체처가 금색세계이며,
일체처가 부동지불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제 믿는 자는 스스로의 마음이 의지하거나 머물지 않는 성품의 오묘한 지혜의 해탈[妙慧解脫]이 바로 스스로의 문수요,
마음이 의지하거나 머물지 않는 가운데 자체성이 없는 묘한 이치가 자유롭게 분별하면서도 성품에는 동요가 없는 것을 부동지불이라 하며,
이치와 지혜가 둘이 아니라서 묘용(妙用)이 자유롭기 때문에 묘덕 보살이라고 호칭하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부치님은 바로 이 믿음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문수를 시방 모든 부처님의 모태(母胎)라고 호칭하는 것이며,
아울러 문수를 동자(童子) 보살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모두 믿음으로 첫 탄생을 삼기 때문이다.
믿는 마음을 성취하자마자 선정과 지혜의 관지력(觀智力)으로 인(印)을 쳐서 서로 계합해 일념이 상응하는 것을 “10주 초심에 문득 정각을 성취한다”고 이름 붙이는 것이니,
능히 행(行)을 행하는 곳을 취해서 보현이라고 호칭하며,
오묘한 지혜가 의지함이 없는 곳을 취해 묘덕이라고 호칭하며,
잘 분별하여 근기를 아는 지혜를 취해서 부동지불이라고 호칭하며,
스스로 계합하여 상응하는 것을 정각이라 이름붙이며,
또한 능히 믿는 곳을 믿는 마음[信心]이라 호칭하며,
스스로 계합해 상응하는 것을 머무는 마음[住心]이라 호칭하니,
부처님이 머무는 곳에 머물러서 오묘한 지혜로 해탈하는 것이 상(相)이 소진한 무생법(無生法)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님이 있다면 믿는 마음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이름은 삿되게 보는 사람[邪見人]이 된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다 자기 마음[自心]과 같고,
일체의 중생이 다 자기 성품[自性]과 같아서 성품에 의지함이 없기 때문에 체(體)에 차별이 없고 지혜가 동일한 성품인 것이니,
반드시 이렇게 알아서 이 동체(同體)의 오묘한 지혜를 통해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을 알되 마땅히 이렇게 믿고 이해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종지는 대심중생(大心衆生)을 위해 이 같은 법,
즉 모든 부처님이 스스로 타고 있는 문인 일승묘전(一乘妙典)의 법계 도리를 시설함으로써
대심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근본지혜인 불과(佛果)에 들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일념이 참에 계합하여 이치와 지혜가 다 같이 나타난 것이 바로 부처님인 것이니,
법계의 도리가 나타나면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없기 때문에 3무수겁(無數劫:3아승기겁)에 불과에 오른다고 듣는 것과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토는 다른 곳에 있고 이 사바세계는 예노라고 설하는 이해력이 낮은 3승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3승 중 이해력이 낮은 자를 돌이키기 위해 용녀의 비기(非器)8)로 하여금 찰나에 성불하게 한 것이니,
이는 믿는 마음의 고아대함을 밝힌 것이지 방편으로 시설하여 실교(實敎)를 나타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닦고 있는 실교가 정체되지 않는 것이다.
용녀의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라고 말한 것은 금생에 처음 배운 것이지
예전에 배운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축생녀(畜生女)라고 한 것은 과거에 수행을 쌓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이번 생(生)에서 믿고 있는 법문이 이치가 정직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에
법계의 체성(體性)이 삼세에 거둬지는 것이 아니라
일념이 참에 응하면서 삼세의 정이 소진함으로써 지혜가 출몰함이 없는 그대로가 불과(佛果)임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전에서는 “이해력이 낮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8상(相) 등의 일을 일으켰다”고 한 것이다.
또 사바세계의 온갖 중생이 멀리서 용녀가 남방의 무구세계(無垢世界)에 가서 성불함을 본 것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즉 남방이란 것은 명(明)이 되고 정(正)이 되는데,
이(离)를 주재하기 때문에 이(离)가 명(明)이 되고 일(日)이 되며 허무(虛無)가 되는 것이
바로 무구(無垢)이다.
온갖 중생이 멀리서 보았다는 것은
3승의 권학은 믿기는 하지만 스스로 증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멀리서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법계는 하나의 참[一眞]이라서 자타(自他)가 서로 사무치고 있으니,
만약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면 어찌 멀리서 보아다고 말하리오?
화엄의 경전에서 선재동자로 하여금 한 생[一生]에 성불하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한 생이란 것은 범부의 자리에서 믿음을 일으킨 뒤에 10주 초심에서 무생(無生)에 계합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법계의 지혜에 맡긴 한생이지,
업에 따른 한 생이 아니다.
앞으로 본문을 살필 때 자세히 풀이하겠다.
이제 이 경전의 종자가 향한 불과의 법문을 간략히 밝혔으니,
널리 통달한 군자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둘째,9) 이 경전이 어떤 장(藏)에 포섭되는가를 밝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경전은 그 이름이 비로자나 법계장에 포섭된 것이니,
법계의 바다를 두루 비춤으로써 일체의 법문을 남김 없이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경전은 3승 화불의 가르침 중 보살과 2승의 대중은 일진법계(一眞法界)인 보불(報佛)의 법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3승의 자분법(自分法)10)만 알 뿐이다.
따라서 설사 이러한 보살이라도 다만 삼천대천세계가 한 보불의 경계라서
천백억의 석가가 화신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1승의 실보법계(實報法界)인 보불(報佛)이 설하는 법문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명칭이 비로자나법계불과지해(毘盧遮那法界佛果智海)가 거두어 들인 것이니,
이는 3승 보살의 화신불의 가르침 중 방편으로 시설한 보살장(菩薩藏)이 포섭한 것과는 같지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법계품」에서 자씨(慈氏:미륵)가 거처한 누각의 명칭이 비로자나장엄장인데,
선재동자가 들어가서는 오직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장행문(法藏行門:법장의 실천문)과 보상장엄(報相莊嚴:과보의 상으로 장엄한 것)과 무진복상(無盡福相:다함 없는 복의 상)이 모두 아승기임을 볼 뿐이니,
하나하나는 경전에 잘 설해져 있다.
이것은 바로 비로자나불의 가르침에 의거해 법을 법 받고 행(行)을 행하는 인(因)이 과보로 얻은 것이며,
거처하는 궁전의 누각은 한결같이 법계장(法界藏)에 의거해 행을 행함으로써 성취한 인과인 것이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께서 과보로 얻은 장엄의 인과도 역시 마찬가지다.
장(藏)이란 갈무리한다[含容]는 뜻이니,
법계의 모든 법문의 인과법을 갈무리하여 다함이 없는 것이다.
3승의 경전에서는 대체로 항하(恒河)의 모래로써 법문의 수(數)를 비량(比量)11)함으로써 광대하다는 뜻을 나타냈으나,
이 일승경에서는 대체로 1불찰진(佛刹塵)과 10불찰진과 나아가 한량엇는 불찰미진(佛刹微塵)으로 법수(法數)의 비량을 삼았다.
또 3승의 법상(法相)은 어떤 경우는 하나,
어떤 경우는 둘ㆍ셋,
나아가 일곱ㆍ여덟ㆍ아홉ㆍ열로써 수를 삼았으나,
이 경전의 법문은 낱낱이 열[十]을 갖추어 수를 삼음으로써 불과 법문의 원만함을 밝혔다.
이처럼 표현한 명자(名字)가 이미 충분하고 충분하지 못한 차이가 있으니,
법장의 법도 반드시 차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경전은 비로자나장이 거둔 것이지 3승의 보살장이 거둔 것이 아니다.
또 이 경전은 항상 불과(佛果)로서 닦아 나아가는 길의 자취로 삼고 있으니,
부처님의 근본 대지혜의 옛 자취[古跡]로 차별지를 닦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님의 옛 자취와 달리하면서 닦아 나아간다면 성불의 뜻이 없는 것이다.
즉 3승이라면 조잡한 생사의 고통을 한 푼이나마 벗어나긴 했지만,
부처님의 지혜 바탕[智體]의 옛 자취에 의거해 불승(佛乘)에 계합해서 닦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비로자나장이 거둔 것이지 3승의 보살장이 거둔 것은 아니다.
셋째,12) 경전의 서분(序分)의 구분을 밝힌다는 것은 두 문(門)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한 부[一部] 경전을 모두 총괄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해당되는 품(品)마다 스스로 서분이 있는 것이다.
한 부의 경전 모두를 촐괄했다는 것은 바로 「세주묘엄품」을 말하며,
해당되는 품마다 스스로 서분이 있다는 것은 각 품 속에 있는 각각의 회상 안에서 ‘이때 이러이러하다“고 하면서 그 품의 대의에 대한 서문을 지은 것과 아울러 일부의 경전이 상하로 다섯 번 세존이 거처하는 보리도량의 처소를 서문으로 한 것이다.
문
어째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답
처음 제1권부터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마갈제국에 계시면서”라고 한 것은 최초로 성불한 곳이 난야(蘭若) 속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다음 제2회(會) 속에서 또 “그때 세존께서는 마갈제국 아란야의 법보리도량 속에 계시면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다”고 한 것은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고서도 보택(報宅) 속에 도달해서 거처함을 밝힌 것이다.
즉 보광명전이 이치와 지혜의 행을 통한 과보로 얻은 집[宅]임을 밝힌 것이니,
세간과 함께 하는 데 의탁하더라도 난야(蘭若)를 계합해 증명해야 비로소 집[宅]에 나아가 머무는 것이다.
이 뒤부터 천궁에 오르는 것은 모두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으면서 몸이 일체의 도량에 두루 앉아 있는 걸 말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오른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천상계에 오르는 것은 순차적으로 지위를 닦아 나아감을 밝힌 것이며,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법계의 도리를 밝힌 것이니,
이는 법성(法性)의 오묘한 이치[妙理]가 가고 옴도 없고 안팎도 없어서 대지혜의 바탕[大智體]이 스스로 두루하기 때문이다.
다음 40권에 있는 「십정품」에서 “이때 세존께서는 마갈제국 아란야의 법보리 도량 속에 계시면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하고,
보광명전에서 찰나제삼매에 들었다”고 한 것은 법계의 법신의 선정의 바탕을 삼아서 삼세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와 신(神)을 강림한 것과 열반에 든 것과 49년간 세상에 머물면서 일체의 법륜을 굴린 것 등이 모두 찰나를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 삼매로써 비롯함[始]과 마침[終]을 원만히 통하면 삼세와 고금(古今)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서문을 지은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일체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일시에 다 성불한 것이며,
아울러 중생의 생사도 찰나를 옮기지 않은 것이지만,
다만 중생의 망령된 집착으로 세월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생에 즉하고 죽음에 즉하는[卽生卽死] 것이 모두 때[時]를 옮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일념으로 한량없는 겁을 널리 관(觀)하니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이렇게 삼세의 일을 두루 알면 모든 방편을 초월해서 10력(力)을 이룬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한 품의 경전이 먼저와 나중,
비롯함과 마침 사이를 총괄하여 가고 옴이 없음으로써 고금(古今)의 성품이 소진한 것은 범부의 자리에서부터 일념으로 발심하여 홀연히 도(道)를 보고,
10주ㆍ10행ㆍ10회향ㆍ11일지의 5위법을 닦아 나아가 성불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이 모두 찰나에서 옮기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법계문을 통해 깨달아 들어갔기[開示悟入] 때문이며,
실교의 일승법계문(一乘法界門)의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매의 명목(名目)으로 그것을 밝힌 것이니,
이 품(品)은 모두 이 일승근본법계의 적용(寂用)의 문이 시종일관 일체(一際)라서 근본과 지말(枝末)의 시분(時分)이 없기 때문에
성불의 첫머리가 되는 것이다.
다음 「이세간품」도 마찬가지다.
처음 정각을 성취한 것에서부터 나아가 보광명전까지 서문을 삼고 있는 것은 보현보살이 불화삼매(佛華三昧)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불화(佛華)는 닦고 있는 부처님의 행이며,
삼매(三昧)는 적용(寂用)의 장애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또한 이전의 서문과 같은 것은 부처님의 행을 닦는 것이
체용의 비롯함과 마침이 없어서 항상 원만하여 삼세가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품(品)은 보현행으로 닦고,
아울러 법계의 바탕인 대지혜로 항상 온갖 행을 따르면서도
삼세를 원만히 총괄하여 찰나도 옮기지 않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온갖 행 그대로가 법계의 체용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서문을 삼은 것이니,
이 모두가 때[時]를 옮기지 않고 처소를 옮기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보리도량이 중심도 없고 변두리도 없기 때문에
닦고 있는 온갖 행이 항상 평등해서 찰나와 삼세가 늘거나 줄지도 않고 가거나 오는 일도 없는 것이다.
다음 「입법계품」에서
“이때 세존께서는 실라벌국(室羅筏國) 서다림(逝多林)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는 것은
올바른 종지[正宗]를 들어 천명한 것이다.
즉 여래승(如來乘)은 앞에도 통하고 뒤에도 사무쳐서 천상의 인간과 시방세계가 모두 법계로 체를 삼고 있어서
허망한 체가 아닌데도 중생이 미혹을 따르느라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입법계품」 속의 천상 인간과 시방세계가
모두 부사의법계(不思議法界)의 체(體)라서 적용(寂用)의 자재함을 모두 들어 천명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개달아 들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 품은 여래께서 부사의신력(不思議神力)으로 설한 것이지 입을 빌려서 말한 것이 아니니,
세간의 총체적인 진실함과 총체적인 신령함과 출몰(出沒)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법계가 보편적으로 총괄됨으로써 전후가 본질적으로 일제(一際)라는 걸 밝히고 있기 때문에
똑같이 보리도량을 서문으로 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는 곧 보리가 바로 법계이기 때문이며 전회(前會)가
총체적으로 법계회 속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서문을 둔 것이니,
10회(會)의 체용이 모두 이 품(品)과 일체(一體)이자,
일성(一性)이며,
일시(一時)며,
일지(一智)의 근본 모태임을 총괄한 것이다.
이처럼 다섯 번에 걸쳐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한 것으로
서문을 삼은 것은 모두 이 법계가 일시(一時)로서 앞과 뒤가 없는 교설임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부의 경전 속에 있는 「세주묘엄품」과 「불명호품」과 「십정품」과 「이세간품」에서
네 번이나 거듭 처음 정각을 성취한 것과 보광명전을 서문에 둔 것과
「입법계품』에서는 다만 급고독원을 말한 것은 이 다섯 품 경전의 대의가 다섯 가지 불과(佛果)를 두루하고 있어서 나머지 품(品)도 총괄하고 있기 때문에 거듭 서문에 둔 것이다.
다만 이 다섯 가지 법계에 두루한 인과(因果)가 1찰나에 다섯 가지 일[五事]이 단박 드러나 모든 지위를 총괄하면서도 총체적으로는 그 안에 있으면서 법계대지혜의 과(果)를 이루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섯 개 경전의 제목이 비슷한 것이며,
오직 「이법계품」에서만 홀로 급고독원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두루한 인과가 되는가?
첫째,
「세주묘엄품」은 처음으로 성취한 불과(佛果)의 두루함을 밝혔으니,
경전에서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고서도 몸이 일체의 도량에 두루 앉는다”고 한 것이다.
둘째,
「불명호품」을 보광명전 속에서 설한 것은 보신(補身)과국토와 명호(名號)와 법문과 교화를 시설해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모두 두루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이 회상에서 여섯 품의 경전을 설해 신위(信位)의 불과를 성취했으니,
이는 믿는 마음의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셋째,
「십정품」에서는 여래가 찰나제삼매에 들고 있다.
이 삼매를 통해 이 경전과 한량없는 삼세의 겁이 모두 일시(一時)로서 본래 그러하다[如是]는 것을 널리 총괄함으로써 불도(佛道)의 응당 그러함으로 근본법을 나타내기 때문에 성불과 설법과 멸도(滅度)의 시분(時分)이 옮기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부처님의 대지혜의 본성 자체인 적용(寂用:공적의 작용)과 정체(定體:선정의 체)의 두루함과 나아가 열반에드는 것과 40년간 세상에 머물면서 법을 설하는 것에 이르기까지가 모태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나지 않고 도솔천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계(下界)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실제 법제(法際)의 체(體)가 그러한 것이라서 옛과 지금이라거나 가고 온다는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넷째,
「이세간품」은 법계 자체의 본래 적정(寂定)한 대지혜를 보현행의 체)體)로 삼는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곧바로 각행(覺行)의 두루함을 밝히고 있다.
불화(佛華)란 각행이며,
삼매는 본각(本覺)의 체(體)이다.
다섯째,
「입법계품」은 근본법계의 본체인 대지혜의 불과가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두루함이 다 법계를 체로 삼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하나의 두루한 법문이다.
이 다섯 가지 두루함이 모든 지위의 온갖 차별을 거두어 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그 뜻을 상실할까 걱정이 돼서 경전 안의 다섯 곳에 서문을 마련해 제목이 서로 연결되고 앞뒤가 서로 거두어 들이도록 한 것이니,
이는 이 경전의 법체(法體)가 본래 차례와 본말(本末),
양쪽 끝이나 중간 같은 시분(時分)의 길고 짧음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마치 왕의 보인(寶印)으로 일시에 널리 인(印)을 치니 먼저와 나중이랄 것 없이 문채(文彩)를 이루는 것처럼 법계의 보인(寶印)으로 널리 모든 지위를 인(印)을 침으로써 5위의 10주ㆍ10행 등과는 닦아 나아가는 습기(習氣)가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성품은 차별이 없는 것이니,
총별동이성괴(總別同異成壞)의 10현(玄)과 6상(相)의 뜻으로 융통하면 도리는 자연히 밝아질 것이다.
이 여섯 글자의 뜻이 연기(緣起)의 세 가지 대(對:대비)가 되어서 여섯 글자가 만법(萬法)을 총괄하고 있으니,
첫째 총별(總別)이 하나의 대(對)요,
둘째 동이(同異)가 하나의 대요,
셋째 성괴(成壞)가 하나의 대이다.
총체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한쪽을 없애고 한쪽을 남겨 놓을 수 없으며,
한 쌍을 함께 세울 수도 없고 한 쌍을 함께 버릴 수도 없다.
총체적으로 이 단상(斷常)과 생멸(生滅)과 중변(中邊) 등의 견해는 모두 정견(情見)으로 헤아린 것이라서 법 자체성의 연(緣)에 맡겨 생기는 것임을 요달하지 못한 것이니,
이는 바로 사념이 없는 올바른 슬기의 힘[正慧力]이라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사념으로 아는 것은 믿는 마음일 뿐이다.
이것은 초지(初地) 보살이 세간의 일체 연기법이 비록 총체적으로 동시(同時)에 함게 있는[俱有] 것이라 헤아리지 못하며,
비록 총체적으로 차별성을 갖췄더라도 모두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다 함께 없는[俱無] 법이라 계량할 수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나머지 두 가지 대(對)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유(有)와 무(無),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
구(俱)와 불구(不俱),
상(常)과 무상(無常)은 정(情)으로 헤아린 것이기 때문에 저 일체의 연생법(緣生法)은 마치 허공의 메아리가 본래 스스로는 작위가 없으면서도 사물에 응해 소리를 내는 것과 같고,
또는 산가지와 거북으로 점을 치는 자가 생각도 없고 작위도 없고 귀신도 아니고 신도 아니면서도 연(緣)에 응해 만유를 알아서 사람에게 과거와 지금의 길흉을 손바닥 가리키듯이 알려주는 것과 같다.
이처럼 법의 연기에 맡기는 것은 망정(妄情)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一]와 다양함[多]의 총(總)과 별(別),
온갖 동문(同門)과 이문(異門),
일체의 생성[成]과 파괴[壞]는 모두 앞과 뒤라거나 동시(同時)라는 등의 헤아려 비교하는 것이 아니니,
법계의 법문 도리도 이와 마찬가지라서 앞과 뒤라거나,
유와 무라거나,
동시라거나,
구(俱)와 불구(不俱)라거나,
소멸하기도 하고 남아 있기도 하다는 등의 정견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다 성기(性起)인 대자비와 작위가 없는 대원(大願)으로 법의 연기에 맡기고 작위 없는 지혜에 부합함으로써 낡은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니,
올바른 법륜을 굴리는 것과 출생과 소멸을 시설하는 것에서도 낡음과 새로움,
가고 옴 등의 견해를 짓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여래의 생멸 없는 지혜의 자재로운 힘이기 때문에 비록 적멸로부터 증득을 취함으로써 정(情)을 소멸시켜 지혜를 없내는 2승과는 달리 대염원[大願]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더라도 염원의 상(想)이 없으며,
비록 대자대비로 중생을 이롭게 하더라도 애착의 상(想)이 없으며,
비록 생사에 들더라도 수렁에 빠지지 않으며,
비록 열반에 있더라도 시방 세계의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쉬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다 여래의 자체성이 없고[無性] 의지하밍 없고[無依] 작위가 없는[無作] 지혜의 힘이라서 과거ㆍ현재ㆍ미래라는 고금의 견해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넷째,13) 올바른 종지[正宗]를 정한다는 것에는 세 종류의 올바른 종지가 있다.
첫째는 지위에 따른 올바른 종지요,
둘째는 품(品)에 따른 올바른 종지요,
셋째는 커다란 바탕[大體]의 올바른 종지다.
첫째 지위에 따른 올바른 종지에는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가 저마다 올바른 종지가 있다.
10시은 부처님의 근본부동지로 올바른 종지를 삼고,
10주는 법계에 증득해 들어가는 지혜의 여래 과덕(果德)인 이체(理體)의 오묘한 슬기로 올바른 종지를 삼고,
10행은 부처님의 근본지로 보현행을 일으켜서 닦아 나아가는 것을 올바른 종지를 삼고,
10행은 부처님의 근본지로 보현행을 일으켜서 닦아 나아가는 것을 올바른 종지로 삼고,
10회향은 이치의 지혜[理智]가 진(眞)과 속(俗)을 원융함으로써 대염원을 일으켜 자비와 지혜를 이루고,
그 이치의 지혜와 대자비를 균등하게 함으로써 고요함이나 소란함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올바른 종지로 삼고,
10지는 자비와 지혜를 닦아 쌓아서 능숙한 공(功)으로 제도하도록 하는 것을 올바른 종지로 삼고,
11지는 보현행으로 중생의 정(情)과 평등하게 흘러서 법계의 바다에 충만하고 작용에 맡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올바른 종지를 삼으니,
이상은 지위에 따른 올바른 종지다.
둘째 한 부[一部] 경전의 교문(敎門)으로 한다면,
40품 안에 해당되는 품마다 스스로 올바른 종지가 있으니,
품에 따른 명목(名目)이 이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 부 경전의 커다란 바탕의 올바른 종지로 한다면,
여래의 대지법게성(大智法界性)의 고금이 끊어져 체용이 원만한 1승의 불과로 종지를 삼는 것이다.
항상 이 불과의 올바른 종지로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는[開示悟入] 수행을 진척시킴으로써 충분히 익혀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또 이 경전의 40품 중 「법계품」을 올바른 종지로 삼고 나머지 품을 짝으로 삼는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자기 마음이 분별하는 번뇌로써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루고,
법계의 체용으로 탈 것[所乘]을 삼아 정각을 성취한다.
따라서 이 근본번뇌는 3승이 알 바가 아니니,
2승은 조복시켜서 일어나지 않게 하고,
보살은 공관(空觀)으로 조복시켜 현행(現行)이 없기 때문이니,
자세히는 『승만경』에서 설한 대로이다.
일체 중생이 법계문으로 개시오입(開示悟入)을 삼는 것은 여래의 근본지가 중생의 분별심이니,
이 근본지와 분별심이 계동(契同:계합)하여 둘이 없어서 법계가 자재함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0주의 초심에서 문득 정각을 성취하고 나서 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 법문을 익숙하게 다스려 지혜와 자비를 성취하면서도 또한 초심의 법계 지혜의 체용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이 법계 지혜의 체용의 의지함이 없는 문으로 모든 습기와 의혹을 다스림으로써 의혹이 엷어지고 지혜가 밝아져 분수마다 뛰어난 거이다.
또한 선정과 지혜의 비추는 작용[照用]으로 몸과 마음의 모든 법이 안팎으로 의지함도 없고 뿌리도 없고 근본도 없어서 모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점점 미약해지고 온갖 부처님 지혜가 점점 밝아져 법락(法樂)이 스스로 즐거우니,
세상 즐거움을 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법계 가운데 점점(漸漸)인 것이지 시말(始末)이 아니다.14)
다섯째,15) 이 경전이 누구에게 부촉됐는가를 밝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경전의 법문은 대심범부(大心凡夫)에게 부촉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 경전의 법문은 일체 나머지 중생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그 주해에서는 “나머지 중생이라는 것은 3승과 외도(外道) 중 인천(人天)에 탐착하는 자와 출세간의 즐거움을 구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왜냐 하면 이 경전은 3승의 보살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니,
설사 6신통을 갖춰더라도 이 경전을 듣고 능히 믿음을 일으킬 수 없는데 하물며 2승이나 인천이나 외도가 가능하겠는가?
경전에서는 “오직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는 법왕(法王)의 참된 자식이라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심범부가 능히 믿음을 일으켜 증득해 들어가기 때문에 부처님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지,
이미 부처님 집안에 태어난 모든 대보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보살들은 항상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기 때문에 대심범부가 믿음을 통해 증득해 들어가지 않으면 부촉이라 이름붙이지 못하며 유통이라 이름붙이지도 못하니,
이는 세상 사람이 믿지 못하고 세상 사람이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만약 이런 자식이 없으면 이 경전은 반드시 소멸하고 만다”고 했으며,
이에 대한 주해는 다음과 같다.
“범부로서 믿음으로 증득해 들어가는 자가 없다면 이 경전은 반드시 소멸한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이미 불가에 태어난 대보살이 이같이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에 미진수가 있을텐데 여래가 어찌 이 경전의 소멸을 염려하겠는가?
이미 불가에 태어난 대보살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대심범부를 생각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성서러움[聖]에 들어간 자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이 경전이 대심범부에 부촉된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자세히는 「출현품」에서 설한 대로이다.”
여섯째,
이 경전의 유통 소재를 밝힌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경전의 유통분(流通分)은 매 품(品) 말미에 있는데,
대지가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고 보살의 공양이 있는 곳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부촉유통분이 「여래출현품」에 있고 경전의 말미에 있지 않은 것은 「여래출현품」이 경전의 말미에 있기 때문이며,
이 품이 경전의 말미에 있는 이유는 이 품이 37품으로서 5위 보살의 5위인과(位因果)의 행문(行門)을 결집해서 종결짓기 때문이다.
또 여래는 종전의 제6권에 있는 제2 「현상품」 안에서 이빨 사이로 광명을 놓아 보현보살로 하여금 중생의 인과와 여래의 인과를 설하게 한다.
여래의 인과란 세계의 과보로 얻은 국토의 장엄이니,
미간에서 광명을 놓아 문수사리와 현수(賢首) 등으로 하여금 10신의 문을 설하게 하고 나서 10주ㆍ1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ㆍ10정ㆍ10통 등의 법을 설하는 것이다.
「현상품」에서부터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 36품의 경전이 있으며,
등각위 속의 한 회상은 제3선(禪)에서 설한 것으로서 한 품의 경전이 있지만 내용이 충분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 수를 통틀어 계산하면 총 37품이 있고,
그 앞과 뒤에 총 40품의 경전이 있으니,
그 「여래출현품」에 이르러서는 이 5위 인과의 시종(始終)이 끝나기 때문이다.
「여래출현품」에서는 법칙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그 시종의 5위 인과가 원만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즉 미간의 광명을 문수의 정수리에다 붓고 입 속의 광명을 보현의 입에다 부음으로써 이 두 분의 체용(體用)과 인과(因果)로 하여금 서로 문답하게 하고,
문수를 법계의 체(體)로 삼고 보현을 법계의 용(用)으로 삼음으로써 두 분이 서로 체용이 되게 하고,
또 문수를 인(因)으로 삼기도 하고 보현을 과(果)로 삼기도 해서 두 분이 서로 인과가 되게 함으로써 이 한부의 경전은 항상 이 두 분으로 체용의 인과를 나타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부처님은 다 마찬가지로서 모두 이 자취에 의거해서 인과를 닦아 나아가는 이익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여래가 미간에선 놓은 고아명과 입 안에서 놓은 광명을 이 두 분 대사(大士:문수와 보현)에게 가함으로써 5위 교문(敎門)의 시종(始終)이 끝마침을 밝히고 있다.
입 안의 광명은 부초의 뜻이자 유통의 뜻이니 가르침과 실천을 통해 유통하게 하기 때문이며,
미간의 광명은 과(果)의 뜻이니 이미 과의 광명을 놓아 문수에게 부촉함으로써 문수로 하여금 과법(果法)을 묻게 하고 보현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출현을 설하게 한 이것이 바로 유통이다.
이 품 안에서 부촉과 유통을 갖추어 설하면서,
또한 윤왕태자(輪王太子)의 복이 구족한 왕상(王相)이 능히 와위를 다스릴 수 있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문장에 대한 애석은 품(品)에 가서 자세히 밝히겠다.
「여래출현품」 뒤에 나오는 「이세간품」은 바로 부처님께서 스스로 과(果)를 성취한 뒤에 보현의 이타행과 세속을 훈육하는 문을 행하는 것이다.
11지의 과(果) 이전에 보현행을 행하는 것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있지만,
11지의과 뒤에 행하는 보현행은 순수하게 이타뿐이니,
이는 앞의 7권의 회석(會釋) 속에서 대략 풀이해 놓았다.
「법계품」은 한 부 경전의 가르침을 총괄한 것으로 총체적으로 다 법계문이다.
기수급고독원에 있는 것은 중생의 세간이 바로 법계이기 때문이며,
중생의 성품이 바로 부사의(不思議)이기 때문이며,
중생의 분별이 바로 여래의 지혜이기 때문이란 것을 밝힌 것이니,
즉 중생의 세계로 나가서 법계의 부사의함을 설한 것을 밝힌 것이다.
셋째,16) 가르침의 바탕[體]을 밝힌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섭(涉)법사의 설에 의거한 경전의 가르침의 바탕은 다음과 같다.
“일체 성인의 가르침은 네 가지 법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니,
명신(名身)과 구신(句身)과 문신(文身)과어(語)17)로 성품을 삼고 있다.
먼저 익숙하게 해서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되는데,
들어서 간직하고 널리 유포함으로써 법을 오래도록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은 여섯 곳[六處]에 의거해서 굴러간다.
첫째는 법을 의거하는 것이니 12분교(分敎)를 말한다.
둘째는 뜻[儀]에 의거하는 것이니 지위의 행상(行相)에 따르는 것이다.
셋째는 때[時]를 의거하는 것이니,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자기와 타자(他者)의 일을 설하는 것이다.
넷째는 곳[處]에 의거하는 것이니,
요컨대 세계의 국가와 성(城)에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수(數)에 의거하는 것이니,
일(一)ㆍ십(十)ㆍ백(百)ㆍ천(千)에서부터 미진수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보특가라(補特加羅)18)에 의거하는 것이니,
반드시 부처라 설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19) 이 여섯 곳으로 말미암아 정법(正法)이 오래도록 머물게 되는 것이니,
보특가라란 한역하면 삭취취(數取趣)이다.”
이상은 섭법사에 의거해서 가르침의 바탕을 세운 것이다.
이제 나 이통현은 자신의 좁은 소견[管闚]으로
이 『대방광불화엄경』에 의거해 열 가지 가르침의 바탕을 세움으로써 그 광활함과 다함 없음을 밝히겠다.
첫째,
일체 중생의 근기와 부처님의 일원음(一圓音)과 일념인 산세가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법륜을 굴리는 것으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다.
둘째,
일체의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경계를 장엄하는 과보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다.
이는 바로 경계를 보고 발심함으로써 설명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며,
악을 보면 싫어하고 선을 보면 좋아해서 모두가 능히 선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또한 일체의 법이 부처님의 일[佛事]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일체법의 자성이 청정한 것으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 것이니,
관찰력을 통해 마음이 계합하면서 저절로 상응하기 때문에 설명을 기다리지 않는다.
넷째,
걷고 머물고 앉고 서는[行住王立] 네 가지 위의(威儀)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 것이니,
공경함을 보고서 발심할 뿐 말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
부처님과 보살의 출현과 열반으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 것이니,
이러한 법사(法事)는 중생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사모하도록 해서 발심을 하게 한다.
여섯째,
부처님과 보살의 신통력으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 것이니,
온갖 자재로움을 나타냄으로써 보는 자로 하여금 발심하도록 하고 문구(文句)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으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 것이니,
관(觀)하는 자가 발심하여 말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
말이 없는 고요함[無言寂然]으로 가르침의 바탕을 심는 것이니,
예컨대 유마거사의 침묵의 응답과 같은 것으로서 명(名)ㆍ구(句)ㆍ문(文)과 어(語)를 기다리지 앟는다.
아홉째,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ㆍ어(語)와 중생의 근기로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 것이니,
말을 빌려서 나타내기 때문이다.
열째,
법계의 일체법이 본래 참되다는 걸 가르침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니,
중생이 이를 법으로 받아서 오염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강의 요지를 말하자면,
일체 중생의 모든 번뇌의 바다와 일체 중생의 분수에 따른 선근(善根)인 인천(人天)의 낙과(樂果)와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승(佛乘)의 해탈열반과 명신ㆍ구신ㆍ문신ㆍ어(語)의 업 등과 일체 선악의 업에 따른 과보와 허공 법계와 말을 하든 말을 하지 않든 일체의 법이 가르침의 바탕 아닌 것이 없다.
그리하여 스스로 관찰하는 지혜[觀智]를 통해 법을 듣기도 하고 스스로 사유하기도 하는 것,
내훈(內熏)의 지혜가 나타나면서 온갖 악을 물리치고 열반을 얻는 것,
설명을 하는 것과 설명을 하지 않는 것 등 모두가 가르침의 바탕이니,
만약 번뇌가 없다면 가르침의 바탕도 없는 것이다.
넷째,20) 회상의 수(數)를 총체적으로 서술함을 밝힌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속의 대의(大意)d는 세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는 회상의 수를 총합해서 드는 것이며,
둘째는 그 회상의 뜻을 서술하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온 연유를 설하는 것이다.
첫째,
회상의 수를 총합해서 든다는 것에서 이 회상은 열 개가 있다.
둘째,
그 회상의 뜻을 서술한다는 것은 최초의 회상이 보리도량 속에 있는 것은 처음으로 정각으로 성취한 것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주생을 교화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회상은 보광명전에 있는 것은 보광명전이 법신과 보신,
그리고 행을 통해 과보로 얻은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거처하는 집임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이 품(品)에서 거듭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한 것을 말해서 최초 회상에서 일어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은 첫 회상의 난야보리도량(蘭若菩提場)의 체(體)가 이 체(體)를 벗어나지 않고 도를 얻음으로써 이곳이 보택(報宅)이 거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 사람이 고요한 곳에서 도를 얻고 나서 비로소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이 법이 본래 오고 가거나 시분(時分)을 옮기는 일이 없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세 번째 회상에서 수미산 정상의 제석천궁에 오른 것은 보광명전으로부터 10신의 지위를 설하고 그 지위 위에서 처음으로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지금의 제석천궁에서는 그 닦아 나아가는 지위를 나타내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즉 법행(法行)이 두드러지게 뛰어나기 때문에 이 천상에서 10주의 문을 설한 것이니,
10주의 지위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참[眞]에 응해 마음이 공(空)과 합하면서 스스로 슬기의 작용[慧用]을 한 푼 얻어서 자재한 것이 천사오가 같음을 밝히고 이다.
마치 높은 산에 오르면 몸이 허공과 합치듯이 처소로써 법위(法位)의 뛰어남을 나타낸 것이뎌,
중요한 점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相)이 엇는 슬기의 작용이 천상처럼 자재롭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 산의 체(體)가 세간에서 가장 높아 세속을 초월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10주 초심의 선정이 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상(相)이 없는 오묘한 슬기[ 妙慧]가 세속을 벗어나 현전하면서 능히 장애를 타파함을 나타낸 것이다.
네 번째 회상에서 야마천궁에 계신 것은 야마천궁이 허공에 있으면서 땅과는 연결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즉 10행이 공(空)을 의지해 행을 행함으로써 탐욕과 애착 등의 모든 유(有)와 연결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처소에서 10행의 지위를 설한 것은 법이 그러함을 나타낸 것이지 몸이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을 중시한 것이 아니니,
이는 행(行)이 항상 공(空)하여서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회상에서 도솔천궁에 계신 것은 이 천상계가 지족(知足)을 즐기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10회향을 설한 것이니,
회향의 지위에서 이(理)와 사(事)를 균등히 융화하여 대염원과 대자비와 대지혜가 치우치지 않게 함으로써 세상의 쾌락을 탐내지 않고 열반도 탐내지 않으며 대자비에도 집착하지 않고 대염원에도 집착하지 않되 중도를 벗어나지 않고 세상에 처하게 하는 것이 마치 연꽃이 티끌과 함께 하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이 천사예가 욕계의 중간에 위치하여 아래로는 도리천과 야마천이 있고 위로는 화락천과 타화자재천이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이 천상계가 위아래로 욕계의 중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10회향문을 설하고 있으니,
10신의 대지혜와 만행과 대자비와 대여원을 균등히 조정하여 중도에 처하게 함으로써 애착이 있는 세상의 자비와는 같지 않게 하며,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 닦기를 몹시 즐겨하는 3승과도 같지 않게 함을 나타내고 있다.
즉 적멸을 향하는 2승과 생(生)에 머무는 보살21)과 정토를 버리는22) 등의 잘못은 모두 법의 그러함[法爾]에 부합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법의 그러함[如是]을 나타냄으로써 저 천상계에 태어남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진(眞)을 돌이켜 세속에 들어감으로써 지혜와 자비를 균둥하게 함을 밝힌 것이다.
여섯 번째 회상에서 타화자재천궁에 계시면서 10지를 설하고 있는 것은 타화자재천이 타자의 변화로써 자기의 즐거움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즉 10지에서 대자비와 대지혜가 모두 원만히 성취되지만,
다만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자기 열반의 즐거움으로 삼을 뿐 스스로의 즐거움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문
무슨 이유로 화락천을 넘어서서 타화자재천에서 10지의 행을 설했습니까?
답
10회향으로부터 이치와 지혜를 균등히 융화해서 대자비와 대염원이 원만히 성취되어 확장되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단계를 의지하지 않고 화락천을 초월한 것이니,
이는 밑의 지위에서 단계를 밟아 수행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마치 세간에서 거래할 때 처음에는 열 냥으로 두 배의이익을 얻고,
그 다음 다시 20냥을 40냥으로 불리면,
문득 처음과 두 번째 이윤을 초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10지의 과(果)가 종결되어 욕계 사이에 거처하면서 자재함을 얻으니,
욕계와 함께 하면서도 물들지 않고 욕계를 벗어나면서도 여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또 10지 보살의 공(功)이 욕계의 속박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 타화자재천이 마왕과 범천과 함께 하면서
파순(波旬)을 교화하는 것을 밝힌 것인데,
마왕의 지위와 같이 함으로써 마(魔)의 권속을 다스리는 교화가 자재하기 때문에 이 타화자재천에서 머무는 것이다.
또 보살 ★★의 닦아 나아가는 행상(行相)이 10지의 지위에서 도력(道力)과 공행(功行)의 계급이 응당 그러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무명주지(無明住地)23)가 아직 순수하게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여전히 밝고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무명주지는 과(果)가 극에 이르러야 비로소 종결되는 것이니,
설사 11지에 이르더라도 두 가지 어리석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이 경전의 「아승기품」라 「여래수호공덕품」 두 품의 법은 불과9佛果) 이전에 11지 보현행이 원만하더라도
여전히 통달해서 극진하질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여래께서 스스로 설한 것이니,
이는 과(果)가 종결된 후에나 비로소 산수(算數)의 극을 알고,
여래수호공덕도 불과라야 비로소 종결된다는 것을 밝힌 거이다.
이전의 각 지위의 법문은 해당되는 지위의 보살이 스스로 설했지만,
마지막의 입법계품 한 품만은 여래의 신력(神力)으로 설한 것이다.
이는 법계를 나타내는 가운데 일체법이
총체적으로 신령하고 총체적으로 참되고 총체적으로 부사의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법계의 체(體)는 거룩함[聖]과 범속함[凡]이 하나의 성품이란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 가운데서 설한 것이니,
본문에 가서 자세히 밝히겠다.
그리고 두 가지 어리석음은 불과(佛果)라야 쉬게 되므로
10지의 지위에서 능력이 감당하는 바에 따라 타화자재천에 도달하는 것이다.
비록 닦아 나아가는 계급이 각 지위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법계의 체(體)는 일시(一時)이자 일념(一念)이라서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기 때문에 법계의 시종(始終)이 없는 법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이나 끝,
길거나 짧다는 생각을 짓지 말아야 하니,
이같은 정(情)의 사상을 간직하는 것은 이치에 위배되는 견해이니 선정과 지혜로써 비추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곱 번째 회상은 제3선(禪)에서 설하고 있다.
이 한 회상에서 백만억 게송을 설하고 계신데,
이 회상의 문장이 충분하지 못한 것을 『영락본업경』에서 갖추어 설하고 있다.
즉 경전은 여래가 3승인을 교화한 뒤 그들을 통솔해 보리수 밑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처음 성불할 때 『화엄경』을 설한 회상의 차례를 설하고 있으니,
경전에서 충분히 말하고 있다.
이 한 회상을 계산해 보건대,
총 10처 10회의 40품 경전이 되는데,
이 경전이 10으로 법을 이루어서 다 원만하기 때문이다.
3선(禪) 가운데 초선은 근심[憂]을 없애고 2선(禪)은 고(苦)를 소멸시키며,
근심과 고통이 이미 없으니,
3선은 오직 법의 열락(悅樂)뿐이란 것을 밝히고 있다.
법의 열락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기쁨의 움직임[喜動]이 또한 존재하고,
기쁨의 움직임 때문에 색심(色心)이 또한 존재한다.
이 색심은 선(禪)의 법열을 즐기고 사념이 없음을 즐기는 색이라서 욕계의 색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사념 없음과 선을 즐기는 색이 있기에 여전히 들고 내쉬는 숨[息]이 존재하며,
과보로 얻은 청정한 몸은 희디흰 눈과 같고 옷은 금색으로서 몸의 한 배를 넘으며,
다닐 때는 허공에서 노닐면서 발이 밟지를 않으며,
초선은 신장이 2(里) 반이며,
2선(禪)은 신장이 5리이며,
3선은 신장이 10리며,
옷은 몸의 배가 되니 본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 타화자재천에서 11지 법문을 설한 것은
등각위 속에서 그 법신을 순종하고 만행을 행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법계에 두루하여 항상 법을 즐기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제4선(禪)에 도달해서는 부처님 지위[佛位]와 동함에 의탁하기 때문에 참된 법성에 부합해서 들고 내쉬는 숨이 없고,
이치에 따라 두루하면서 중생의 지견(知見)에 맡긴다.
그리하여 습기가 법을 미혹하는 어리석음이 일시에 몽땅 소진하여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일[事]마다 궁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를 갖가지 광명이 두루 비춘다[種種光明遍照]는 뜻으로 호칭한다.
이는 지혜가 원만하기 때문에 법이 그러함을 나타낸 것이지,
이처럼 위아래로 왕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신의 대지혜 허공인 일체지(一切智)의 태양으로 색신을 대현(對現)하여 법계 속에서 그 근기의 수준에 따라 보편적으로 온갖 상(像)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한 회상은 전의 10지를 초월하고 초선과 2선도 넘어서는데,
이는 11지의 지혜가 두 배씩 증가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 천(天)에 올라 처소에 의탁하는 것은 법이 승진하면서 점점 자재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지 이 법이 그 천(天)에 속하는 것은 아니니,
일체의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회상은 보광명전에서 10정문을 설한 것인데,
그 선정의 명칭은 입찰나제(入刹那際)이다.
가령 3승에서는 80생멸을 1찰나라 설하고,
80찰나를 일념(一念)이라고 이름붙이는데,
이는 3승의 설힐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1승 속에서는 찰나가 극히 짧아 사고로 이르지를 못하기 때문에
끝내 따로 생멸이 있음을 논하지 않았으니,
이는 여래께서 세상에 나온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찰나를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가령 「이세간품」에서는 여래께서 올바로 모태에 처할 때에도 도솔천에 머물러 계시며,
아울러 최초의 탄생과 출가와 도를 배우는 것과 보리를 성취함과 법륜을 굴리는 것과 열반에 드는 것이 총체적으로 일시(一時)라서 몸은 오히려 모태에 처하면서 나오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선정의 체(體)가 법계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선정의 체를 삼고 있어서 다시는 길고 짧음이나 처음과 끝이 없이 삼세가 모두 일제(一際)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세상의 망정(妄情)으로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온 것을 생각하거나,
길고 짧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바로 때[時]의 극칙(極則)을 밝힌 것이며,
다시 찰나 외에 따로 생멸이 있다고 논하지 않은 거이다.
이것이 이 『화엄경』의 의취가 3승의 가르침과 다른 점이다.
고인(古人)이 이 회상을 해석할 때,
보광명당에서 거듭 모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명언(名言)의 가르침 속에서 두 번 세 번 거듭 보광명전을 서술한 것을 보지 못하고서 거듭 모였다거나 세 번 모였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 진실한 뜻을 잃은 것이니,
어찌 타인으로 하여금 가고 왔다는 견해를 짓게 할 수 있겠는가?
경전의 뜻은 단지 부처님 자체의 작위 없는 대자비를 모태로 삼고,
일체종지(一切種智)로 부처님을 삼고,
법의 자체성 없음과 의지하는 바 없음을 시간의 세월로 삼고,
일체 중생의 근기로 밝은 거울을 삼음으로써 부처님께서 일선(善)을 향하게 하고 보리를 얻게 한 것이지,
여래가 거듭 오고 거듭 가는 상체종지의 체(體)로서 의보(依報)가 거처하는 곳이 되며,
이 찰나제의 선정이 부처님의 일체지와 일체종지의 법성이란 것을 밝힌 것이니,
이 뜻은 일체 법계의 온갖 회상의 총체를 총괄해서 배우는 자로 하여금 가고 오는 일과 자기와 타자라는 것이 있지 않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가고 온다거나 거듭 모였다고 하는 견해를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치 왕의 보인(寶印)으로 일시에 단박 인(印)을 치는 것과 같아서 가고 온다거나 거듭 모인다는 견해를 지을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니,
경전에는 이런 뜻이 없다.
아홉 번째 회상에서 보광명전에 계신 것은 이곳에서부터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행(行)을 발해서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0정ㆍ10통ㆍ10인을 닦고,
나아가 「여래출현품」의 불과위(佛果位)의 종결까지 다 보현의 옛 행실을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이전과 10주 이상은 스스로 타고 있는 보현행이 원만한 것이니,
즉 「여래출현품」 이전의 36품 경전과 「보현행품」이 이에 해당된다.
또 불과위(佛果位) 이후는 스스로의 행(行)이 이미 원만해서 순전히 이타적인 보현행인 것이니,
「출현품」 이후의 「이세간품」이 이에 해당된다.
제2회(會) 보광명전에서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5위를 거치는 시종의 인과가 본래의 자취인 모든 부처님의 과(果)가 원만한 옛 보현문을 여의지 않고,
「십정품」 역시 이곳24)에서 하는 것은 법신의 정체(定體)가 처음과 끝을 원만하게 통한 일제(一際)요 일처(一處)로서 3법(法)25)이 동일한 것으로,
보광명전의 보신이 거처하는 집을 옮기지 앟음을 밝힌 것이다.일제히 널리 인(印)을 침으로써 두 번 세 번 모이면서 갔다가 오는 일이 없는데도 고인이 이 회상을 해석할 때 보광명전에서 두 번 세 번 모였다고 했으니,
법계의 문으로 세상의 정견을 따르는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재동자가 각성동 대탑묘(大塔廟)에 있는 묘덕(妙德:문수보살)의 처소에서 처음 믿는 마음을 내고 50개 지위의 문을 지나서 덕생(德生)동자와 유덕(有德) 동녀에게 이른 것은 아직 불과 이전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현행을 끝내지 못한 것이며,
12위(位)26) 중 묘각(妙覺)의 지위에서 자씨여래(慈氏如來:미륵)를 본 것이 불과(佛果)를 끝낸 지위인데도 오히려 선재로 하여금 문득 문수를 보게 한 것은 지금 과(果)에 도달한 것이 예전에 처음 믿음을 일으킨 문인 보리의 이지(理智)를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또한 문득 보현의 이름을 듣고 갑자기 그 몸이 보현의 몸과 같음을 본 것은 과(果) 이후의 보현행을 밝힌 것이며,
경전에서 “다시 한량없는 삼매에 들었다”고 한 것은 불과위(佛果位) 안에서 두 가지 어리석음을 넘어섰음을 밝힌 것이다.
두 가지 어리석음이란,
하나는 아승기 광대한 수(數)의 미혹한 어리석음이며,
다른 하나는 부처님 지위 안에서 수호공덕(隨好功德)이 광대한 어리석음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에 달하자,
자기 이익을 닦아 아나가는 5위의 보살은 넘어서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이 두 품의 경전은 여래가 스스로 설한 것이며,
「법계품」은 여래의 부사의신력(不思議神力)으로 설한 것이니,
이는 법계가 모든 부처님께서 다 함께 궁극에 도달한 과(果)임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이 품을 통해 중생에게 깨달음을 보였으며,
나머지 37품은 해당되는 지위의 보살이 설한 것이다.
『승만경』에서는 “무명주지(無明住地)는 불지(佛地)라야 비로소 없앤다”고 설하고 있는데,
3승의 삼기(三祇)의 과(果)와 정토와 예토를 별개로 집착하는 보살이 본래의 국토로 귀환하는 것27)은 두 견해가 정(情)에 따르고 있어서 다분히 비슷하지가 않다.
법계의 인과는 당장의 일념[當念]을 옮기지 않고 계급도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하나와 많음이 서로 통하면서 융화하니 방편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보광명전에서 「이세간품」을 설한 것은 믿는 마음과 궁극적 불과(佛果)의 보현행이 총체적으로 옛 자취를 여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또 “자씨(慈氏)의 누각 안에 널리 삼세를 나타내서 일념에 널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일체 중생을 관하되 즉석에 봄으로써 고금(古今)이 없다”고 한 것도 바로 그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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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엄경』의 법문 한 구절 한 구절이 금강과 같다는 뜻이다.
2)
시간을 헤아리는 것.
3)
부모가 낳은 육신이 아니라 뜻에 따라 생기는 몸.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들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곳에 따라 생을 받는 데 신속히 뜻대로 하기 때문에 의생신이라고 한 것이다.
4)
삼마발제는 선정의 다른 이름이다.
5)
삼계를 불타는 집에 비유하여 벗어나도록 한 것이다.
6)
일정한 한계와 분량.
7)
교리를 드러내어 널리 알리고 경전을 홍보하는 네 가지 뜻 중에서 두 번째이다.
제8권 앞 부분을 참조할 것.
8)
다섯 가지 장애가 있어서 여자 몸은 성불하기 어렵다는 뜻.
9)
경전의 종지를 밝히는 여섯 가지 중 두 번째이다.
10)
자기 분수에 따른 법.
11)
현재 나타나지 않은 경계를 추측하여 아는 인식 방법.
현량(現量)과 비량(比量)과 더불어 세 가지 인식 방법[三量]의 하나이다.
12)
경전의 종지를 밝히는 여섯 가지 중 세 번째이다.
13)
경전의 종지를 밝히는 여섯 가지 중 네 번째이다.
14)
법계 속의 점진적인 과정이라서 점차가 없는 점차이며,
수증(修證)이 없는 수증이다.
이는 먼저와 나중[先後],
처음과 끝[始末]이 있는 세간법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15)
경전의 종지를 밝히는 여섯 가지 가운데 다섯 번째이다.
16)
교리를 드러내어 널리 알리고 경전을 홍보하는 네 가지 뜻 중에서 세 번째이다.
제8권 앞 부분을 참조할 것.
17)
명(名)은 부처님의 말씀이 능히 모든 법의 자성을 말해서 차례로 늘어놓은 것이다.
모든 법의 자성이란 색(色)을 말하고 마음을 말하고 물을 말하고 불을 말하는 것 등이다.
구(句)는 부처님의 말씀이 능히 모든 법의 차별을 차례로 안배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차별이란 형색(形色)과 현색(顯色)과 진심과 망심 등이다.
문(文)은 차례대로 연결되어 합친 것이니,
명과 구가 의거하는 바다.
이는 그 문사(文詞)가 명(名)과 구(句)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명(名)과 구(句)와 문(文)을 모두 신(身)이라 한 것은 저마다 그 수가 많기 때문이다.
어(語)는 설법자의 법어(法語)이니,
명과 구와 문이 합쳐져서 한 법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18)
중생의 나[我]를 가리키는데,
자주 5취(趣:인간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고통을 취하기 때문에 삭추취라고도 한다.
19)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어서 여래의 열반이 상부불멸하기 때문이다.
20)
교리를 드러내어 널리 알리고 경전을 홍보하는 네 가지 뜻 중에서 네 번째이다.
제8권 앞 부분을 참조할 것.
21)
자비심이 두더리지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고 생(生)에 머물러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
22)
앞에서 나온 생에 머무는 보살과 같다.
자비심 때문에 정토에 가지 않는 것이다.
23)
5주지(住地)의하나.
5주지는 견혹(見惑)ㆍ사혹(思惑)ㆍ무명(無明)의 번뇌의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첫째,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견(見)은 삼계의 견혹으로 지적인 미혹이다.
도를 보면 일시에 끊으므로 견일처(見一處)라 하고,
주지(住地)는 이 번뇌에 의거해서 온갖 번뇌가 나오므로 주지라 한다.
둘째,
애욕주지(愛欲住地):욕계의 탐욕과 애착[思惑].
셋째,
색애주지(色愛住地):색계의 애착[思惑].
넷째,
유애주지(有愛住地):무색계의 사혹.
다섯째,
무명주지(無明住地):삼계의 무명으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
24)
보광명전을 가리킨다.
25)
신변주(信遍周:믿음의 보편성과 전체성)ㆍ정변주(定遍周:선정의 보편성과 전체성)ㆍ행변주(行遍周:행의 보편성과 전체성)이다.
26)
10지와 등각위와 묘각위.
27)
정토에 있는 보살이 이 사바세계 왔다가 다시 정토로 귀환하는 것.
○ [pt op tr]
★1★
◈Lab value 불기2565/01/04 |
수행자는 수행을 한다. 이는 동의 반복어다. 그 수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크게 계, 정, 혜 3 학을 닦는다. 6 바라밀 또는 10 바라밀행을 닦는다. 이런 형태로 제시한다. 오늘 살피는 신화엄경론은 화엄경에 대한 논서다. 화엄경에도 수행자가 닦아야 할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열된다. 너무 많다. 그래서 이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 해야 하는가 알기 힘들다. 너무 많이 나열되면 오히려 초점을 맞추어 집중하기 힘들다. 경전에 수행자는 하루 내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가에 대해 나온다. 간단하다. 익힌 경전 내용을 암송하고 실천하거나, 앉아서 좌선 즉 정려 수행을 하는 것이다. 정려 수행을 행하면 기본적으로 계는 자동으로 닦는 것도 된다. 정려 수행을 하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같이 행할 도리가 없다. 이것을 이런 수행으로 면하다고 하자. 이 경우의 가치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가치 저울 한쪽에 위와 같이 겪는 고통을 면하는 상태를 올려 놓는다. 그리고 한쪽에 현금으로 얼마를 올려 놓아야 이것이 균형을 이룰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2000 억원 정도부터 시작해본다. 2000 억원을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3일간 위 고통을 겪는다. 포기한다. 그러면 위 고통을 면한다.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문제다. 그런데 기한을 조금 늘린다. 100 년. 1000 년, 이런 식으로 늘린다. 그래야 수행을 통해서 일단 생사고통 제거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할 수 있다. 보통 부등호를 사용해야 겨우 표시가능하다. 즉 최소한 현금 얼마보다는 더 가치있다.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게송이나 다라니도 포함된다. 부록에 오늘 뽑혀진 다라니와 성관자재보살 명호를 본다. 아노바라 바다 사바 가 라타 아노바라를 자꾸 잊어 먹는다. 바다나 사바 가라타는 익숙하다. 한국말에 비슷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아노바라는 생소하다. 이것을 외우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스스로 외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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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한 교법. 『화엄경(華嚴經)』에 “원만인연수다라(圓滿因緣修多羅)” 또는 “원만경”이란 말이 있는 데서 기인.
이것으로 불교를 비판하여 승렬(勝劣)ㆍ천심(淺深)을 정하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을 삼고, 점돈원(漸頓圓)의 3교를 세움.
『화엄경(華嚴經)』을 원교라 한 것은 북위(北魏)의 혜광(惠光)이 처음.
그 후 천태의 4교, 화엄의 5시(時), 도선(道宣)의 교판에 이 명목을 사용.
자기가 가장 믿는 경전을 원교에 배당.
답 후보
● 원교(圓敎)
원요(願樂)
원주(院主)
원효사교(元曉四敎)
월천자(月天子)
위의무기(威儀無記)
유(有)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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