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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5-01-03_반야등론석-K0578-014 본문
『반야등론석』
K0578
T1566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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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등론석』 ♣0578-014♧
제14권
❋본문
◎[개별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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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0801_125810_nik_Ab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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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_1017_150158_can_exc_s12
○ 2019_1201_161857_nik_exc_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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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4_105628_nik_exc
○ 2019_1106_112929_can_exc
○ 2019_1106_102441_nik_exc_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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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6_105606_nik_f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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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6_152058_nik_f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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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_1125_153107_can_BW17
○ 2020_1125_142130_nik_Ab35
○ 2019_0113_113646_nik_ori
○ 2019_0801_105534_nik_Ab31
○ 2019_0731_175444_can_Ar28_s12
○ 2019_0731_191812_can_AB7_s12
○ 2019_0113_140841_nik_ct18_s12
○ 2019_0801_110326_nik_BW17
○ 2020_1125_155337_can_Ar28_s12
○ 2019_0731_174440_can_bw0_s12
○ 2019_0113_135231_nik_BW22
○ 2020_1125_141300_can_ar30
○ 2019_0801_094850_nik_bw4_s12
○ 2019_0731_174942_can_ar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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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燈論釋卷第十四
K0578
반야등론석 제14권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이현옥 번역
23. 관전도품(觀顚倒品)
【釋】지금 이 품도 또한 공(空)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전도에 자성(自性)이 없음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자부(自部)의 사람이 말하였다.
“분별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번뇌는 전도(顚倒)에서 일어난다.
전도로 인하여 욕심 등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주장은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분별에서 번뇌가 일어나
욕심과 성냄 등이 있다고 하네.
선(善)과 불선(不善)의 전도는
연(緣)으로부터 일어나네.
【釋】여러 논에 “욕심과 성냄 등은 차례에 따라 선과 불선을 일으킨다”고 말한 것은
애(愛)와 애 아닌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일어나며,
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르게 사유하지 않은 분별은 번뇌를 일으키는 연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5음 등은 인연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욕심 등과 같다.
만약 자체가 없다면 연에서 생기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愛)와 애 아닌 것의 전도는
모두 연(緣)에서 생기하네.
자아[我]에 자체가 없으므로
번뇌 또한 실체가 아니네.
【釋】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이른바 욕심 등의 번뇌가 제일의제 중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비유가 빠졌으므로 주장에 오류가 있다.
그대가 “자아[我]는 세제(世諦)로써 비유되며
제일의제는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주장하려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만약 세제 중에 존재가 성립한다면 오히려 나의 주장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두 경우가 다 성립하지 않네.
자아를 원인으로 하여 번뇌가 존재하고
자아 없이는 그것들은 생기하지 않네.◂
【釋】여기에서 자아는 세제에서도 성립하지 않고 제일의제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아를 떠나면 번뇌는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의지하는 주체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의지하는 대상도 또한 실체가 없다.
주장을 개오(開悟)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자아를 원인으로 하여 번뇌가 존재하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번뇌는 곧 아법(我法)이고,
또한 수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의 자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관아품(觀我品)」에서 관한 것처럼 번뇌에는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증험은 다음과 같다.
자아가 의지하는 것은 무체(無體)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석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아이의 피부 색깔이 흰지 검은지 말할 수 있겠는가?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자아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오로지 마음과 번뇌가 화합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번뇌는 곧 마음 위의 법이다.
그대가 세운 무아(無我)라는 주장은 그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틀리다.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존재한다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하네.
만약 중생을 떠나 있다면
번뇌는 속할 곳이 없네.◂
【釋】이는 번뇌가 곧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곳에서 중생을 추구해도 얻을 수 없다.
만약 중생을 떠나면 번뇌는 속할 곳이 없다.
마음의 생기에 관하여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식(識)의 자체를 제거하기 때문이며,
또한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관한 그대의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나의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번뇌가 없다는 주장을 용인하는 것은 비존재를 실체로 삼는 것이다.
무체(無體)의 실체가 성립하기 때문에 모든 실체는 다시 서로 체상(體相)이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모든 실체에는 병이나 비단이나 나머지 다른 사물 등이 존재한다고 하면
실체가 있는 경우와 실체가 없는 경우에 지각의 원인을 일으킬 수 있는가?
병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면 이 병과 청색ㆍ황색ㆍ흑색 등이 화합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청색과 황색 등의 색깔이 사람을 지시한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만약 비존재인 병과 비단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청색과 황색 등의 색(色) 또한 사람에게 지시할 수 없다.
의지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는 궁극적으로 주인이 없고 실체가 없다는 주장은
마치 석녀의 아이처럼 청색과 황색의 상(相)이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비존재를 실체로 삼는다는 뜻은 성립하지 못한다.
지금 다시 유식학파에게 답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자아와 아소(我所)를 연(緣)해도
번뇌와 탐욕에 물든 마음은
다섯 가지로 구해도 얻을 수 없네.◂
【釋】명색(名色)으로 취집(聚集)된 원인을 몸이라 이름한다.
자신을 연하여 염오(染汚)의 견해를 일으킨다.
이를 신견(身見)이라 한다.
욕심 등의 세 가지는 이 주장과 같다.
마치 「관여래품(觀如來品)」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5음도 없고 5음을 떠난 것도 없으니
5음 중에 여래는 없네.
여래 중에 5음이 없으니
여래에 5음이 있지 않네.
모든 번뇌도 그러하다.
다섯 가지 중에 번뇌는 없어도
고(苦)를 일으키므로 번뇌라고 이름한다.
탐욕에 물든 사람은 번뇌가 아니다.
지금 다르지 않다는 뜻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탐욕에 물든 사람이 곧 번뇌라면
불사르는 자와 불사르는 대상이 동시에 하나가 되는 오류가 생긴다.
또 번뇌와 다름없이 탐욕에 물든 자가 존재한다는 이 주장은
이미 앞에서 부정한 것과 같다.
다시 번뇌와 달리 탐욕에 물든 자가 존재한다면
번뇌를 떠나 홀로 탐욕에 물든 자가 있다는 오류가 된다.
그러므로 이체(異體)가 성립하지 않는다.
탐욕에 물든 자에도 번뇌는 없다.
번뇌에도 탐욕에 물든 사람은 없다.
탐욕에 물든 자가 아니어도 번뇌는 존재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추구해도 번뇌에는 실체가 없다.
번뇌에는 실체가 없으므로 능히 세우려는 것[能成法]이 없다.
이는 그대의 비유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愛)와 애가 아닌 것의 전도는
본래 자체가 존재하지 않네.
무엇을 연(緣)으로 삼아
번뇌를 일으키는가.
【釋】마치 아법(我法)처럼 애(愛)와 애가 아닌 것의 전도에는 본래 자체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일의제 중에 번뇌는 연(緣)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다.
세우려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주장은 오류이다.
다시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색(色) 등의 여섯 대상에서 전도가 일어난다.
어째서 비존재란 말인가?
그것이 없다고 말하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색깔ㆍ소리ㆍ향ㆍ맛ㆍ감촉과
법은 여섯 가지이네.
애(愛)와 애가 아닌 것이 연(緣)이 되어
사물에 대해 분별을 일으키네.
【釋】여기에서는 여섯 대상을 연하여 능히 모든 번뇌를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애와 애가 아닌 것이 전도하여 연이 되고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을 일으킨다.
제일의제의 사물에는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섯 대상은 실체가 없다.
비유하면 색명인 자의 안식(眼識)과 같다.
또한 욕심과 성냄 등은 전도분별을 일으킨다.
마치 내가 말하는 것과 같다.
원인에 효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전도가 존재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비유에 오류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틀리다.
모두 허망하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색깔과 소리와 향과 맛과 감촉과
법의 실체는 여섯이 되네.
마치 건달바(乾闥婆)의 성(城)과 같고,
불꽃과 같고,
또한 꿈과 같네.
【釋】
세분(勢分) 또한 없고,
나아가 세제를 비방하는 오류도 없다.
무슨 오류는 없는가?
사물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건달바의 성과 같은가?
시간과 공간 등으로써 뭇 사람이 함께 보기 때문이다.
이를 이름하여 건달바의 성과 같다고 한다.
어째서 불꽃과 같다고 하는가?
비유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뜨거울 때 불꽃을 보고
“이것은 물이다”고 말하고
이를 뒤쫓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부질없어 스스로 피로해져도 결국 얻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자체는 다 공하다.
법에는 집착하는 범부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불꽃과 같다고 말한다.
어째서 꿈과 같은가?
어떤 시간과 장소에도 사념(思念)하는 원인과 결과가
실체로서 없고 일체법에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이름하여 마치 꿈과 같다고 한다. ◂
만약 색 중에 있다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愛) 혹은 애가 아닌 것을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으리오.
마치 환인(幻人)과 같고,
또한 거울 속의 형상과 같네.
【釋】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색(色)의 모습 등은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마치 환화인(幻化人)과 같다고 하는가?
진실하지 않은 경계에서 비슷하게 현현(顯現)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형상(形相)과 같다고 하는가?
사람의 노력 없이도 나타날 수 있고,
형상(形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대가 위에서 제시한 이유와 주장 등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사물의 실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의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애(愛)를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면
애 아닌 것이 있지 않네.
애를 원인으로 하여 애 아닌 것이 있네.
그러므로 애가 있지 않네.
애 아닌 것은 애를 상대하지 않고
애는 애 아닌 것을 상대하지 않네.
애를 연하여
애 아닌 것이 있다고 시설하네.◂
【釋】애(愛)에는 자체가 없다.
그 주장은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애 아닌 것이 있지 않다.
애 아닌 것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애는 애 아닌 것을 상대하지 않으므로
애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이 또한 옳지 않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착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욕심이 일어나겠는가?
불애(不愛)가 만약 무체(無體)라면
어느 곳에서 성냄이 일어나겠는가?
【釋】두 가지에 실체가 없으므로 어리석음 또한 실체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말한 바의 오류와 같은 것은 지금 다시 그대에게 있다.
경량부[修多羅]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애와 애 아닌 것에 전도가 있다.
마치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경에서 말씀하셨다면 이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무아(無我)를 말하면 반드시 무아인 것과 같다.
지금 경(經) 중에 현저히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른바 무상(無常)을 상주(常住)로,
무아를 자아[我]로,
무락(無樂)을 낙(樂)으로,
부정(不淨)을 청정(淸淨)으로 계탁하는 것을 이름하여 전도(顚倒)라고 한다.
이 뜻으로 인하여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애와 애 아닌 것의 전도가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세제 중에 애와 애 아닌 것의 전도가 있다.
제일의제 중에 있지 않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제일의제에서는
궁극적으로 전도가 없으며
여래께서는 자아[我]와 무아(無我) 등을
끝내 말씀하시지 않으셨네.
【釋】제일의제 중에서도 자아(自我)와 무아(無我)를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대의 비유와 제시한 이유에는 실체가 없다.
다시 경량부 사람이 의도를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전도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전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생사에 수순하는 것이고,
둘째는 열반에 수순하는 것이다.
무엇을 이름하여 생사에 수순한다고 하는가?
이른바 무상을 상주로 무아를 자아[我]로,
무락(無樂)을 낙(樂)으로,
무정(無淨)을 청정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무엇을 열반에 수순한다고 하는가?
이른바 공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무상에 대하여 무상을 집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있으므로 전도라고 이름한다.
가령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으려 할 때
상주(常住)와 단멸(斷滅) 두 가지의 전도는 지혜의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무상의 사물에 대하여
무상의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 전도라고 말하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전도란 무슨 뜻인가?”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실체는 무상하다.
이른바 상주(常住)를 가히 전도(顚倒)라고 말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지 않다.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무상이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을
전도된 집착이라고 한다면
무상 또한 집착이니
공이 어째서 집착이 아니겠는가?
【釋】
말하자면 지혜의 소연(所緣)은 전도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도에 관한 주장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삼계의 욕망을 이미 벗어났는데
무슨 까닭으로 해탈이라 말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말은 곧 해탈이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다시 ‘무상도 공하다’고 말하면 어째서 제일의제 아닌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기가 없기 때문이다.
무기(無起)에 관한 주장은 도리에 위배됨을 이미 앞에서 부정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열반에 생기가 없고 또한 무상이 없는 것과 같다.
다시 무상의 실체는 상주의 분별지(分別智)를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전도?★★의 집착이 없다고 말하면 상주하는 깨달음을 소연 경계는 곧 실체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게송에서
‘무상도 집착이니 공이 어째서 집착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도(倒)란 곧 전도이다.
왜냐하면 분별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상주(常住)에 집착하는 자와 같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색이 무상하다고 말하면 곧 전도이다.
이는 분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색에 집착하여 상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지혜를 분별하여 모든 행이 공하다고 말하면 그 지혜는 일향(一向)으로 전도 된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또한 전도된 것이다.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이와 같다면 공지(空智)는 해탈의 원인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전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내입(內入)이 고락(苦樂) 등 지혜의 경계인 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세운 주장은 무슨 뜻인가?”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눈이 공하다는 것을 연(緣)한 지혜는 해탈의 원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도리어 나의 주장을 성립시킨다.
어떻게 나의 주장을 성립시키는가?
무분별지에 의해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눈이 공하다고 말하면
눈이 공하다고 아는 지혜에는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 말을 차지하고
지금 다시 그대를 위하여 나는 근본적인 주장을 말하겠다.
마치 무상(無常)에 집착하여 상주라고 하는 것처럼 이는 전도된 것이다.
무아(無我)를 자아[我]라 하고,
무락(無樂)을 낙(樂)이라 하며,
부정(不淨)을 청정이라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말한다.”
자부의 사람이 주장을 분별하여 말하였다.
“이와 같이 집착이 있는 것은 집착하는 것과 집착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착을 일으키는 것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다.
집착을 일으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주장은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집착을 갖춘 것과 집착을 일으키는 자와
집착을 내는 경계는
일체 적멸(寂滅)의 상(相)이 되네.
이 까닭으로 집착이 존재하지 않네.
【釋】집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른바 집착을 갖춘 것과 집착을 일으키는 자와 집착을 내는 경계 등이다.
집착을 갖춘 것이란 이는 능히 집착하여 총괄적으로 물체를 연(緣)하는 지혜를 말한다.
집착을 일으키는 자는 집착하는 마음 혹은 망치(妄置) 혹은 비발(非撥) 등을 말한다.
또한 집착을 필요로 하는 자는 집착을 일으키는 사람을 말한다.
집착하는 경계는 계탁하는 바의 상락아정(常樂我淨) 등의 경계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법은 다 자체가 공하다.
내가 말하는 바의 경계와 같이 집착을 갖춘 것 등의
모든 적멸의 상을 열어 보이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집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집착을 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여
중생들에게 이해시키려 하나 비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집착하는 성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른 것과 옳은 것 또한 없네.
무엇에 전도가 있고
무엇에 비전도(非顚倒)가 있겠는가?
【釋】제일의제 중에 무엇이 전도(顚倒)이고 무엇이 비전도인가?
보살마하살은 무분별지(無分別智)에 머물러 일체의 분별을 행하지 않는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전도도 없고,
부전도(不顚倒)도 없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반드시 전도가 존재한다.
전도를 구족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뚜껑이 존재하면 뚜껑이 지닌 자가 있는 것과 같다.
범부에 전도가 존재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전도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에 근거해서 전도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위의 게송에서 ‘집착하는 성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른 것과 옳은 것 또한 없네’라고 한 것과 같다.
두 도리(道理)에 관하여 이미 앞에서 개오(開悟)시켰기 때문이다.
생기 또한 성립하지 않는데 그와 같고 그와 같이 전도와 전도하는 자 또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게송에서 ‘무엇에 전도가 있고 무엇에 비전도가 있겠는가?’ 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전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도가 없기 때문에 전도하는 자 또한 없다.
다시 만약 전도가 있다면 비전도도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의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제일의제 중에 비유할 실체가 없으며,
또한 그대의 주장과도 위배된다.”
다시 세간의 사람이 말하였다.
“전도와 화합하는 것을 전도된 사람이라 이름한다.
이 전도는 이미 전도된 자와 화합하는가?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와 화합하는가?
전도가 이러나는 순간에 화합이 있는가?
지금 세 종류에 대하여 대답하겠다.
전도와 화합한다고 말하면 이 모두 옳지 않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미 생기한 것과 화합하지 않으면,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과 또한 화합하지 않으니
이미 전도된 자와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에게
화합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네.
【釋】이는 이미 전도된 자가 다시 전도와 화합한다면 소용 없다.
왜냐하면 전도된 자는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전도되지 않은 자와 같다.
만약 전도와 시간이 화합한다고 하면 이는 모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전도를 떠나 부전도가 시간과 화합한다고 마하면 이는 옳지 않다.
작용은 관찰될 때 모두 다 옳지 않다.
만약 있다면 그대는 지금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전도는 무엇과 더불어 화합하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존재와 전도의 화합이 없다고 말하면
이 주장 때문에 그대는 앞서 말한 오류를 얻게 된다.
다시 제일의제에서처럼 모든 실체에는 다 자성이 없다.
이 도리를 말하여 이미 개해(開解)시켰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생기한 것이 없고 아직 생기하지도 않았다면
어떻게 전도가 있는가?
모든 전도에 다 발생이 없는데
어느 곳에서 전도가 일어나겠는가?
【釋】여기에서 게송의 뜻은 발생이 없으므로 전도가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 등은 다 오류가 존재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상락아정(常樂我淨) 등이
실체로서 있다고 한다면
저 상락아정은
반대로 전도가 되네.
【釋】여기에서는 제일의제 중에 상락아정 등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이 또한 전도된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자아[我] 및 상락(常樂) 등이
장자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아(無我)와 고(苦)와 부정(不淨)은
마땅히 얻을 수 있어야 하네.
【釋】여기에서는 무아 등의 자체가 능히 자아 등의 전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하기 때문이다.
무아 등 또한 비존재를 성립시키지 않는데.
무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아가 존재하는가?
이 전도가 보여지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사람 없이는 결코 걸상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생각에 관한 전도를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등은 그 과실을 모면하기 어렵다.
상주(常住)와 무상(無常) 등의 전도 및 부전도를 관찰함으로 해서 원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이 없다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것은 무인(無因)이기 때문에
무명(無明)과 행이 사멸되고
나아가 생(生)과 노사(老死)
이들 모두 다 사멸되네.
【釋】여기서는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受)ㆍ
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 및 노사(老死) 등은 전도의 원인이 없기 때문에
무 자체를 증득하여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은 성립한다.
자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번뇌에는 실체가 있다고 하는가,
실체가 있지 않다고 하는가?
지금 질문한 것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의 모든 번뇌에
하나하나 자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무엇을 단제(斷除)할 수 있고
누가 존재의 실체를 끊을 수 있는가?
【釋】여기에서는 자체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괴멸(壞滅)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번뇌에 실체가 없어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면 또한 게송에서 말하는 오류와 같을 것이다.
어째서 끊을 수 없단 말인가?
비존재라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말[馬]의 실체가 없듯이 이 비존재를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만약 이러한 생각을 일으켜 “실체로서 번뇌가 존재하나 성도(聖道)가 일어날 때
끊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이 말에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실체로서 번뇌는 무슨 상(相)과 비슷해서 대치도(對治道)를 일으켜서 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대의 주장은 중생들을 이해시키기 어렵다.
이러한 까닭으로 실체로서 있다느니 실체로서 있지 않다느니 하는 번뇌의 분별을 일으킨다.
그러나 끊을 수 있다는 이 분별은 옳지 않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에는 번뇌가 없다.
자체가 단멸되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여인을 환작(幻作)하는 순간
비록 환화(幻化)하더라도
모든 범부가 탐욕에 물든 마음을 일으키고
나중에 실체가 아닌 것을 알고 탐욕에 물든 마음을 스스로 버리는 것과 같다.
번뇌에 실체가 없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여기에서 외도가 세운 증험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말하였다.
내가 세운 증험에 오류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도를 이해시키는 것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품에서 주장하는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여기서 경(經)을 인용하여 현성(顯成)하겠다.
『금광명녀경(金光明女經)』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언어는 색(色)이 아니므로 모든 곳에서 있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 또한 그러하다.
마치 언어에 실체가 없고 내입과 욉입에 머물지 않는 것과 같이
번뇌의 실체에는 실체가 없고 또한 내외(內外)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佛)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염오(染汚)가 곧 여실(如實)한 뜻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떤 염오의 전도도 성립하지 않는다.
중생이 염오를 일으키는 것이 만약 실체로서 없다면 이는 곧 전도된 것이다.
만약 전도가 실체로서 없다면 거기에는 진실의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을 청정(淸淨)이라 한다.’
번뇌가 실체로서 없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정각(正覺)을 이룰 때 번뇌라고 말하는 것은 색이 아니며 무색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이 아니며,
수ㆍ상ㆍ행ㆍ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비식(非識)이 아니며 무식(無識)이 아닌 것도 아니다.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취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사람은 단제(斷除)할 대상이 없어 증득할 때도 얻을 것이 없다.
증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증(無證)과 무득(無得)과 무상(無相)과 무위(無爲)는 단지 가설된 이름일 뿐이다.
비유하면 환화(幻化)와 같다.
모든 법의 부동상(不動相)에 대하여 취착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그림자와 같고 소리와 같아 상(相)을 떠나고 기억을 떠나서는 발생하는 것도 없고 사멸하는 것도 없다.”
「관전도품」의 해석을 마친다.
24. 관성제품(觀聖諦品)
이제 이 품에서도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여
4성제(聖諦)에 자체의 뜻이 없음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자부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4성제가 공하여 자체가 없다면 그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생기와 소멸이 없어
4성제에 자체가 없다고 말하면,
그대는 이와 같은 오류를 갖게 되네.
【釋】그 말한 바의 도리에 따라
중생들을 이해시키려고 한다면 그 사실은 옳지 않다.
공하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초래한다.
생기와 소멸에 자체가 없다면 고체(苦體)에도 실체가 없다.
고제에 자체가 없으므로 집제(集諦)를 일으키더라도 실체가 없다.
집제에 자체가 없으므로 멸제(滅諦) 역시 실체가 없다.
멸제에 자체가 없기 때문에 고(苦)를 소멸하는 도제(道諦)에서는 정견(正見)을 으뜸으로 삼지만,
도제에서 닦은 것도 또한 실체가 없다.
위의 게송에서 설한 것처럼 그대는 이러한 오류를 갖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존재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중생은 4제(諦)의 경계에 대해 부지런히 행하고 정진하여
고제를 마땅히 알아야 하고,
집제를 끊어야 하며,
멸제를 증득해야 하며,
도제를 닦아야 할 것이다.
이 4성제 모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없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알고 끊고
닦고 증득하는 작업(作業) 등은
4성제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얻을 수 없네.
【釋】
4성제란 성인으로 상속하는 실체를 능히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성제(聖諦)라고 한다.
또한 제(諦)란 진실의 뜻이다.
만약 4성제가 없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4성제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4과(果) 역시 존재하지 않네.
4과에 자체가 없기 때문에
4과에 머무는 자 역시 없네.
【釋】여기에서는 말하자면,
신견(身見)ㆍ의견(意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등의 여러 허물을 땔감이라고 한다면 4성제는 불이라는 것이다.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多含)ㆍ아나함(阿羅含)ㆍ아라한(阿羅漢) 등이
4성제의 불이 능히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을 보는 것이다.
“4과(果)에 무는 자”란 말하자면 역시 수다원도에 의해 수다원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또 그 이름이 다른 연과 화합하지 않으므로 하늘의 악마도 가진 것으로써 파괴할 수 없다.
또한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 등과 함께 화합하므로 이름하여 승(僧)이라 한다.
이 승은 또한 무상복전(無上福田)이라고 한다.
그대가 만약 승보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승보(僧寶)가 있지 않다면
8인(人)1)이 없네.
4성제에 만약 실체가 없다면
또한 법보(法寶)도 없네.
【釋】만약 승보에 4도(道)와 4과(果)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또한 승보가 없으므로 역시 법보(法寶)도 없을 것이다.
법보가 없으므로 또한 불보(佛寶)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법보와 승보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가 있겠는가?
만약 삼보가 모두 공하다면
일체 존재를 파괴하게 되네.
【釋】
불(佛)이란 4성제를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佛)이라 이름한다.
어째서 보(寶)라 하는가?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나는 이해해야 할 것을 이미 이해하였고,
수행해야 할 것을 이미 수행하였고,
끊어야 할 것을 이미 끊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불이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모든 법에는 자체가 있어 거기서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므로 불이라 이름한다.
경전의 게송에서 “자체가 없는 법 중에 남김없이 깨달으면 모든 법을 평등하게 깨닫기 때문에 불이라 하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가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위의 게송에서 “만약 삼보가 모두 공하다면 일체 종재를 파괴하게 되네”라고 말한 것처럼 주장에 오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원인과 결과의 자체가 공하다면
법과 법 아닌 것 또한 공하니,
세간의 언설 등은
이와 같이 모두 다 파괴될 것이네.
【釋】여기에서는 그런 말을 한 자는 오류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이 오류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만약 공함을 세우지 않고 생기하고 소멸하는 모든 체에 자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오류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증험하겠다.
모든 체에 자체가 있어 생기와 소멸이 있기 때문에 만약 모든 체에 자체가 없다면 생기와 소멸은 볼 수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인용한 주장은 모두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공(空)과 공의(空義)가
모든 희론을 능히 소멸함을 이해하지 못했네.
그런데도 공을 부정하려 하는가?
【釋】
그러므로 공이라고 이름한다.
연기하므로 공함을 아는 지혜를 공의라 한다.
그대가 지금 진실한 모습을 파괴하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맨손으로 허공을 치는 것과 같아서
쓸데없이 스스로 피곤할 뿐 끝내 허공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못한다.
그대가 만약 위의 게송에서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생기(生起)도 없고 소멸도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대가 이와 같이 말한 것도 또한 쓸데없는 노력일 뿐 중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2제(諦)에 의거하며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이시네.◂
【釋】
색(色) 등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소멸하는 모습에 대해 설하는 것과 같다.
또 제바달다가 가고 오는 것,
비사노밀다라(毘師奴蜜多羅)가 먹는 것,
수마달다(須摩達多)의 좌선,
범마달다(梵摩達多)의 해탈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이른바 세간의 언설이며,
세제라고 이름한다.
이들을 제일의제라고 하지 않는다.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제일(第一)의 뜻이 있으므로 제일의(第一義)라고 이름한다.
또 그것은 최상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이자 진실의(眞實義)이므로 제일의제라고 이름한다.
진실이란 다른 것에 연하지 않는 모습이다.
혹은 진실에 머물러 진실의 소연(所緣) 경계에 대해 분별이 없는 지혜를 제일의제라고 이름한다.
저 일어남 등을 말한 순서대로 부정하여 일어남이 없다고 설한 것과
문(聞)ㆍ사(思)ㆍ수(修)의 3혜(慧)가 모두 제일의제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일의제를 말한다.
능히 제일의 부정으로써 전도되지 않은 방편의 인연을 짓기 때문에
이러한 까닭으로 또 제일의제라고 하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들이 2제(諦)의
차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진실하고 깊은
불법(佛法)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네.◂
【釋】여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2제의 차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계의 모습에 착란하지 않아도 올바르지 않은 사유가 많은 이러한 사람은 깊은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체가 있다거나 자체가 없다는 집착된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깊다’란 건너기 어렵다는 뜻이다.
‘불(佛)’이란 앞에서 이미 이해한 것과 같다.
‘법’이란 천인(天人)에게 감로의 법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다.
‘행(行)’이란 이와 같은 깊고 깊은 경계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끊어야 하고,
증득해야 하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도되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감로법(甘露法)이라 한다.
이 사람은 제일 깊고 무분별지의 되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록 전도되지 않은 가르침을 행하고 진실한 법의 경계에 머물러도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는 법의 실체에 대하여 중생에게 설법을 하더라도 경계가 아닌 것에 대하여 경계의 견해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는 『중론』의 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제 중에 생기와 소멸 등의 법이 모두 없다”고 말하고 이대로 분별한다면 그 오류도 위의 게송에서 “모든 법이 공하다면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자가 있다면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세제에 수순하여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고,
생기ㆍ머묾ㆍ소멸 등의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고 설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는 자는 제일의제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일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허망한 분별을 짓는다면 존재의 광야 한가운데에 떨어져서 빠져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다.
자부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제일의제로써 해탈을 얻는다면 2제(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세제(世諦)에 의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고,
제일의제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끝내 열반을 얻지 못하리.
【釋】세속제(世俗諸)란 모든 법은 생기하지 않으므로 본성이 공하지만 중생은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망령되이 집착을 내므로 세간에서 진실로 삼는 것이다.
모든 현성((賢聖)들은 세간의 전도된 성품을 요달하고 있으므로 모든 법이 다 공하며 자성이 없음을 안다.
성인들은 이 제일의제를 또한 진실로 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2제에 의거하여 설법하셨다.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모든 언어의 길을 널리 초월하였기 때문이고,
모든 소승이 분별한 모든 분별의 원인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세제가 없다면 제일의제를 증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번뇌와 생기 등이 소멸한 것이 열반의 모습이다.
만약 제일의제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열반의 도(道)를 끝내 얻을 수 없다.
혹은 외도 중에 총명하다고 자만하는 자가 있어서 다음과 같이 분별하였다.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
5음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집착하는 견해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공하지 않은 것인가?
5음이 공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보고 내가 지금 보면 내가 장차 보게 될 이러한 5음이 공하다고 보지만 5음을 여의고서는 공이 있을 수 없다.
공 중에 5음을 보고 5음 중에 공을 본다.”
이러한 견해는 올바른 사유가 아니며 증상만(增上慢)2)이라 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혜가 적고 어리석은 자는
악견(惡見)으로써 공을 파괴하니,
마치 뱀을 잘못 만지는 것과 같고,
법답지 아니한 주문을 지니는 것과 같네.
【釋】여기에서는 무분별의 혜명(慧命)에 대해 장애를 짓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악견이 되며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다.
다시 자체가 없는 것에 대해 자체가 있다는 견해를 일으켜도 또한 공을 파괴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뱀을 잘못 잡은 사람이 스스로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다.
마치 주문을 지는 사람이 주문 법에 의하지 않아 스스로 손상을 입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을 잘못 이해하는 자는 갖가지 이롭지 못한 일을 짓게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까닭으로
회향하는 마음으로 법을 설법하지 않으셨네.
부처님께서 이해하신 심오한 법에
중생은 들어갈 수 없네.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공에 대해 비방하여
법(法)에 생기와 소멸이 없고
나아가 삼보를 파괴한다고 말하네.
【釋】비방이란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의 성냄과 분노 때문에 공에 대해 오류를 지우려고 하지만 공은 끝내 그대가 말한 오류를 입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실체에 자체가 없다면 제일의제 중에 공하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체가 없다는 뜻은 나 역시 사용하지 않는다.
집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부 사람들이 분별한 공을 부정하기 위하여 지금 이 공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공에 자체가 없다고 말해도 공에 집착하여 이러한 분별을 짓는 것은 아니다.
공은 이제 마땅히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적경(寶積經)』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아견(我見)을 수미산만큼 일으킬지라도 증상만(增上慢)을 지어 공에 대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겠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색이 공하다는 견해를 내도 안 되고,
색이 공하지 않다는 견해를 내도 안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공에 대해 옳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을 것이고,
공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지 않네.
【釋】여기에서 말해지는 것은 공을 바로 본다면 어떤 것들이 ‘모든 것이 옳다’는 것인가?
생기 등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다는 것인가?
이른바 유무(有無)등과 눈 등은 모두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마치 허깨비의 사내와 같이 사내 자체가 공하다.
왜냐하면 모든 뭇 연의 모임에 의지하여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실체인가?
실체는 이른바 고(苦)이다.
무엇이 고인가?
이른바 이 생기를 고라 하며,
고 등의 작용을 보는 것을 고제(苦諦)라 한다.
무엇이 집체(集諦)인가?
이른바 고의 원인을 일으키는 것을 집제라 한다.
다시 집제란 이른바 여기에서 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집(集)이라 한다.
혹은 집 등의 작용을 보므로 멸제(滅諦)라 한다.
고를 소멸하는 원인인 방편을 얻으므로 도제(道諦)라 한다.
만약 도(道) 등의 작용을 보므로 도제라 하면 그 4성제가 이와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법이 성립한다.
일체의 작용에 대해 자연스레 깨달으므로 이에 부처라 한다.
성문에 수순하여 말하면 경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고에 대해 나는 예전에 듣지 못하였다.
모든 법에는 눈의 생기[眼起],
지혜의 생기[智起],
진리를 아는 지혜의 생기[明起],
깨달음의 생기[覺起]가 있으니,
이들 실체의 자체는 모두 허깨비와 같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마하연(摩訶衍) 중에 4성제의 도리를 이룰 수 있다.
도리를 이루기 때문에 지혜를 이루며,
지혜를 이루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공을 비방하면 위의 게송에서 말한 것처럼 “만약 공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지 않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오류를 지녔으면서도
나에게 씌우려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있으면서
스스로 타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것과 같네.
【釋】“그대가 공에 과실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제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대가 만약 모든 법에
자체가 있다고 본다면
모든 실체에 인연이 없어
도리어 자연(自然)의 견해를 이루게 되리라.
【釋】만약 모든 실체에 자체가 있다고 본다면 모든 실체는 인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인연을 상대하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모든 실체에 자체가 있다고 본다면 이제 오류를 설명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원인과 결과에 상대가 없다면
작업하는 자와 작업
나아가 생기와 소멸 등의
모든 법은 다 허물어지네.
【釋】여기에서는 인연을 상대하면 인과(因果) 등의 뜻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대는 어찌하여 공의(空義)에 대해 허망한 분별을 내는가?
비유하면 어린애가 그림 속의 야차(夜叉)를 보고 공포심을 내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만약 색 등은 공하여 허공의 꽃과 같이 자체가 있지 않다고 분별하는 자는 이 공의에 대해 두려움을 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뭇 인연을 따라 생기하는 법을
나는 바로 공하다고 말하니,
단지 가명자(假名字)이고
또한 중도(中道)의 뜻이다.
【釋】눈 등의 모든 실체가 연(緣)에서 일어난다면 모든 연 중에 눈 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며,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으며,
자기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또한 자타(自他) 동시도 아니고 자타 동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연기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제일의제 중에 자체가 생기하지 않으며 세속제에 의거하므로 눈 등이 생기한다.
내가 “이 생기는 것은 공하다”고 말하면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경전의 게송에서 “인연을 따르는 것을 발생이라 이름하지 않으니 발생법에는 자체가 없네.
만약 연에 속하는 존재가 있다면 곧 공하다고 이름하네”라고 한 것과 같다.
세간과 출세간은 단지 가설로 시설된 것이다.
그 공으로 이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름하여 불방일(不放逸)이라 한다.
『능가경』에서 “자체는 생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무기(無起)의 진리는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신 “나는 모든 법이 공하다고 말한다”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연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면 또한 이것도 공의 다른 이름이다.
왜냐하면 시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은 모두 세속에서 지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명자(名字)를 시설하여 중도(中道)라 한다.
이는 『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訶般若波羅蜜多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중도라 하는가?
생기와 비생기 및 존재와 비존재 등의 치우침을 여의었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
이른바 모든 실체에는 생기도 없고 생기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으며,
상주도 없고 무상(無常)도 없으며,
공(空)도 없고 공하지 않는 것도 없다.
중도를 닦는 자는 관찰할 때 눈에 실체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눈에 실체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또한 『보적경(寶積經)』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있다는 것도 하나의 치우침이며 없다는 것도 하나의 치우침이다.
양자를 떠난 중간에는 바로 색도 없고 수ㆍ상ㆍ행ㆍ식도 없다.
이와 같은 중도를 이름하여 실상을 증득하는 방편이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일찍이 어떤 법도
인연에 따라 생기한 적이 없었네.
이와 같다면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네.
【釋】여기에서 인연에 따라 생기한 사물은 비유하면 허깨비 등의 장부와 같은 것이어서 필경에는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허공 등과 같이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
‘연에서 생기한 법’을 이유로 든다면 그대의 주장 중에 일부 뜻으로서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대가 제시한 이유의 오류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허공의 오류는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큰 오류가 이제 그대 자신에게 있기에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오류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일체가 공하지 않다면
생기도 없고 또한 소멸도 없으니,
4성제에 자체가 없어
오류가 도리어 그대 자신에게 있게 되네.
【釋】이 주장은 무엇인가?
만약 고가 공하지 않아 자체가 있다면 작용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작용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세속제에서도 믿을 수 없는데 어찌 제일의제이겠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연(緣)에서 생기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고(苦)가 있겠는가?
무상(無常)은 곧 고(苦)를 뜻하는 것으로서
고에는 자체가 없네.
【釋】여기에서 만약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면 곧 상주하는 것이다.
상주한다면 고가 아니다.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면 고이므로 무아(無我)이다.
무아라면 곧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고에는 자체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은 주장과 상응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 자체가 이미 없는데
어디에 집(集)이 있겠는가?
집이 있지 않으므로
이는 곧 공에 대해 논파하는 것이다.
【釋】여기에서는 고 자체가 생기하지 않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자체가 있다면 인연을 상대하지 않고 존재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苦)에서 만약 정해진 성품을
앞서 보지 못한다면
지금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 성품은 변이(變異)하지 않기 때문이네.
【釋】만약 먼저 고의 성품을 보지 못한다면 성과(聖果)를 얻을 때에도 역시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품이 만약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고에 자체가 있다면
소멸이 있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되네.
그대가 자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까닭에
곧 소멸의 실체를 논파할 것이네.
만약 고에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도를 닦는 일도 없네.
도를 닦는다면
정해진 성품은 없네.
【釋】여기에서는 만약 소멸에 실체가 있다면 고에도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닦는다’란 무엇인가?
자주자주 정견(正見) 등을 일으키므로 닦는다고 이름한다.
만약 이러한 도(道)의 자체가 이미 성취되어 생기가 있다면 옳지 않다.
만약 이러한 오류를 피하려고 도(道)를 닦는다고 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를 소멸하는 것이 도(道)인데
어디서 도를 얻을 수 있는가?
고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한 고의 원인도 이해하지 못하네.
【釋】여기에서 그대가 말한 도리에 따르면 고에는 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자체가 있다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고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오류가 있어 단멸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의 실체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단멸에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애(愛)의 실체에 다함이 없다면 다함이 있다는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소멸에 실체가 없다면 실체가 없으므로 소멸을 증득했다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소멸을 증득함이 없는데 소멸에 나아가는 도에 자체가 있다면 수도(修道)도 없게 된다.
만약 도를 닦음이 없다면 또한 4과(果)를 증득하는 사람은 없다.
4과를 증득하려는 사람이 자체가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이제 묻겠다.
어째서 버리지 않는가?
만약 증득한 결과에 자체가 있다면 어떻게 다시 증득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미 4과에 자체가 없으므로
4과와 4향(向)에 머무는 것도 없네.
8인(人)이 있지 않으면
승보(僧寶)도 또한 없네.
【釋】8인이란 4도(道)와 4과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사람 중에 뛰어난 사람이나 사대부 등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4성제에 자체가 없다면 단지 승보(僧寶)만 없는 것이 아니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또한 법보(法寶)도 없네.
법보와 승보가 없으므로
불보(佛寶)가 어떻게 있겠는가?
【釋】‘부처’란 법으로써 제자를 깨닫게 할 수 있으므로 부처라 한다.
다시 이제 자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자에게 묻겠다.
부처님에게 자체가 있는가,
없는가?
【문】 이것은 어떤 오류가 있어서 이와 같이 묻는가?
【답】 만약 그대가 부처님에게 자체가 있다고 하면 진여(眞如)를 깨닫지 못해도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깨달음을 인연으로 삼지 않으면
부처는 무연(無緣)의 오류에 떨어지며
부처를 연으로 삼지 않으면
깨달음은 무연의 오류에 떨어진다.
부처에 자체가 있다면
모든 보살이 수행하여
부처가 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도
성불할 수 없네.
이 법과 법이 아닌 것은
사람을 만들 수 없네.
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자체가 있어 만든다면 옳지 않다.
【釋】여기에서는 법에 자체가 있어 작용을 일으킨다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그대의 의도가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늘리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밝은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오류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자부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어째서 작용하는 것에는 모든 자체가 없다는 것인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곳곳에서 작업하는 자는 모두 자체가 없음을 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마치 환술로 만든 사물과 같다.
내입(內入) 등의 작업도 또한 이와 같다.
그리하여 이 내입도 또한 자체가 없다.
만약 어떤 한 사물이라도 자체가 있다면 앞의 주장과 위배된다.
이는 말하자면 작업에는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니,
그대가 자체가 있다는 뜻에 집착해도 만약 자체가 있다면 그대는 분명히 나를 위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작용과 자체가 있다고 말하면 어떠한 사물과 비슷한가?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것은 모두 삿된 견해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법과 법이 아닌 것의 원인이 없다면
결과는 무인(無因)의 오류를 얻을 것이네.
만약 법과 법 아닌 것을 여의었다면
그대는 상대하지 않는 결과를 얻을 것이네.
【釋】만약 그대의 의도가 세간에서 논해지는 것과 어긋나지 않으려고 이와 같이 법과 법 아닌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그대가 법과 법이 아닌 것의
원인이 있다고 하면
결과는 법과 법이 아닌 것에서 생기한 것인데
어떻게 공이 아니라고 하는가?
【釋】여기에서는 “무릇 생기하는 것은 모두 공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환술로 만든 사물과 같다.
이는 그대의 주장과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거듭 나머지 오류가 있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언설의 일과
세간은 다 파괴되네.
만약 연기법을 파괴한다면
공의(空義) 또한 성립할 수 없네.
【釋】언설이란 “병을 만든다”,
“옷을 만든다”,
“제바달다는 흰 소가 오면 나는 우유를 마시겠다고 말한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병 등에 자체가 있어 반드시 작업이 있다면 옳지 않다.
만약 연기에서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위의 게송에서 “만약 연기법을 파괴한다면,
공의(空義) 또한 성립할 수 없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대가 공의를 파괴하면 어떤 오류를 얻는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한 사물도 만들 필요가 없으니,
또한 사람이 업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만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자라고 하면
공의를 파괴하게 되리라.
발생도 없고 또한 소멸도 없는
이것이 바로 상주이며
갖가지 모든 사물의 부류가
다 자체에 머무네.
【釋】무엇을 사물의 부류라 하는가?
비유하면 벽화에 갖가지 색과 모양과 성질과 분량 등의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무엇을 ‘자체에 머무네’라고 하는가?
짓는 자가 없는 것을 ‘자체에 머문다’고 말한다.
파괴되지 않는 까닭에 ‘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주라고 말하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아직 얻지 못한 자는 얻어야 하네.
고변(苦邊)의 업이 다함과
모든 번뇌가 끊어짐을,
공의가 없기 때문이네.
【釋】세간과 출세간이 수승한 법을 증득하고 고변을 다하면 반드시 대치법을 닦을 필요는 없다.
말하는 상(相)도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따르면 환화와 불꽃처럼 자체에 일어남이 없다.
자체가 있다거나 없다고하면 모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니,
지혜의 눈이 가린 자는 모든 법에 대해 망령되이 “모든 법은 연(緣)에서 생기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세제의 견해이며 허망되게 집착하여 제일의로 삼는다.
그 견해는 어떤 것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른바 고와 집과
나아가 멸과 도에 이르기까지
발생과 소멸이 있다고 보면
이러한 견해는 잘못 본 것이라 하네.
【釋】어째서 잘못 본 것인가?
이른바 여실하게 연기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부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만약 고 등의 모든 작용을 보는 것을 여의었다면 달리 볼 진리의 법이 없을 것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입(內入)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입(內入)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생기 등의 도리는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고 등에 생기가 없다고 보는 것이 ‘진리를 본다’는 뜻이라면 그대가 항상 말한 것은 성립시킨다.
내입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전도되지 않았다면 그 말은 도리어 전도된 것이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떻게 고를 보아야 할 것인가를 자세하게 관찰할 것이다.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따라서 환희환(歡喜幻)을 찾아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것과 같다.
이 품에서는 자부의 사람들이 한 말에는 오류가 있어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고 4성제에 자체가 없음을 밝혀 중생들을 신해시키는 것이 의도이므로 아래에 경을 인용하여 나타내고자 한다.
『범왕소문경(梵王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범천왕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문(門)에 의거해 마땅히 고는 성제(聖諦)가 아님을 알아야 하며,
집ㆍ멸ㆍ도 또한 성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이 성제란 무엇인가?
범천왕이여,
만약 고가 생기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성제라고 하고,
집이 생기하지 않으면 이것을 성제라 한다.
만약 모든 법이 필경에는 열반과 같이 생기와 소멸이 없음을 본다면 이것을 성제라 한다.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알고서 도를 닦는다면 이름하여 성제라고 한다⧽고 하셨다.’
이어서 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인연법을 본다면 그 사람은 부처를 볼 것이며 또한 성제(聖諦)를 보아 성과(聖果)를 증득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할 것이다’고 하였다.”
「관성제품」의 해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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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향(向)과 4과(果)를 말한다.
2)
4만(慢)이나 7만(慢)의 하나.
성도(聖道)를 이루지 못하고도 이루었다고 잘난 체하는 것.
○ [pt op tr]
용어풀이참조
● 반야 무진등의 정신
반야는 생사현실의 본정체나 생멸 변화 인과를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깊은 지혜를 뜻한다.
이 반야지혜는 수행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수행자는 바로 이 반야지혜로 생사현실에서 극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이를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
그래서 일체 생사고통을 제거한다.
또 반면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이를 통해 무량한 번뇌를 끊고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
또한 이 반야지혜를 통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법문을 닦고 무량한 수명과 지혜를 구족한다.
그리고 이 반야지혜를 통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 된다.
세속에서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는 1원의 자본금으로 하루당 수백조원의 수익을 얻게 하는 첨단기술력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세속에서 어떤 사업가가 그런 고급기술을 가졌다고 하자.
그래서 무량한 수익을 이를 통해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고급기술을 함부로 다른 이에게 내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결국 자신의 수익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된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수행 세계는 이와 사정이 정반대다.
반야지혜를 아무리 나눠 주어도 이로 인해 자신의 자산이 줄어드는 일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그래서 이를 무진등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밤에 등이 없으면 밤에 숲길 하나도 걸어가기 힘들다.
아무 것도 아닌데도 심한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때로는 어두워서 벼랑에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등이 있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반야 지혜를 등이라고 명칭붙인 것은 결국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런 반야 무진등을 갖추고 해야 할 바도 앞에 나열한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거두어 들이는 막대한 수익이다.
반야지혜가 없으면 이것을 일단 현실에서 보지 못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고 임하게 된다.
그것이 욕계에서 파순에 붙잡혀 사역을 당하는 사정이기도 하다.
속임을 당하고 재산상, 정신상, 육체상 손해를 막대하게 본다.
그런데도 그가 생사를 겪는 순간까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데 만일 그런 수익이 눈에 보인다고 하자.
예를 들어 1 원을 가지고 수백조원의 수익을 바로 얻어내는 것이 보인다고 하자.
그렇다면 현실에서 새벽 0시부터 그 앞에 수만킬로의 줄이 서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행위 성격이 바뀌게 된다.
한마디로 장삿꾼의 행위가 된다. 수행이 아니다.
이것을 시역법이라고 경전에서 칭한다.
그런데 반야지혜는 생사현실에서 결국 이런 수익을 거두게 하는 방안이다.
반야지혜로 관하면 이 수익이 눈에 보인다.
『금강경』에서도 그 사정을 여러 비유로 제시한다.
경전 표현 그대로 무량복덕을 얻게 한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이렇게 주의를 덧붙인다.
그 수익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는 경우 그렇게 무량한 수익을 얻는 행을 행할 도리 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앞의 시역법을 행한 것이 된다.
이 경우는 수행결과가 거꾸로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자는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임해야 함을 다시 덧붙이게 된다.
복덕을 무량하게 얻는다.
그러나 수행자는 복덕에 탐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금강경』에 제시된다.
그리고 수행자가 이런 반야지혜를 바탕으로 얻는 수익에 대해서
『반야심경』에서도 간결하게 제시된다.
도일체고액, 능제일체고, ---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런 구절이 바로 이와 관련된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도 제시된다.
아라한만 되어도 실내 공중부양 실내 장풍 사용등을 주의해야 한다.
반야지혜를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더 심하다.
◧◧◧ para-end-return ◧◧◧
● 불생불멸의 논증의 방안들
반야지혜를 통해 실재가 공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수행에서 중요한가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실재가 공함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를 논증해 밝히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가운데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가 나타난다.
이 사정을 또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들 논증은 기본적으로 방편이다.
논증해 밝히고자 하는 내용 자체가 불가득 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관론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논증 자체도 방편이다.
처음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출
이런 기본 명제를 제시한다.
이것이 실재의 공함을 언설로 표현한 부분이다.
그런데 불생불멸을 입증해 밝힌다고 하자.
예를 들어 어떤 a 를 붙잡고 그것이 불생불멸임을 논증해 밝힌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의 공함을 논증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다만 공함을 언설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그런 표현을 빌릴 뿐이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결국 중관론의 논증이나,
자립논증파의 해석 입장이나,
귀류논증판의 해석 입장이나
어차피 모두 방편적인 입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통해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그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어떻게 수행을 잘 성취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하에서는 이들 각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사정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그렇게 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렇게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망집을 제거하려면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바다나 황금꿈은 생생하다.
그러나 그 꿈을 꾸는 본 바탕인 침대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사현실은 매순간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러나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
그렇게 해야 망집을 제거하게 된다.
또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한편 과거에 쌓은 업장이 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런데 망집이 제거되면 이를 위한 수행도 어렵지 않게 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성취되면 생사고통을 예방할 수 있다.
한편 망집이 완전히 제거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고통에 당면한 경우에도 평안히 임할 수 있다.
꿈에서 낙하산도 없이 한없이 아래로 떨어진다고 하자.
또는 행성 사이를 빛의 속도로 오가면서 수많은 바위에 부딪힌다고 하자.
그런데 꿈을 꾸며 그것이 꿈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래서 침대가 놓인 현실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상황에 처해도 이를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꿈도 자신이 원하는대로 좋은 형태로 바꿀 수도 있다.
이런 사정과 같다.
생사현실의 본 정체와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즉 그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본 바탕은 공하다.
이런 것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만나는 온갖 생사고통을 잘 극복하고 제거할 수 있다.
또한 생사현실에서 좋다고 보는 상태도 쉽게 성취해 얻어낼 수 있다.
수행 부분에서는 이는 여환삼매나 현일체색신삼매 등과도 관련된다.
생사과정을 통한 시공간 여행 과정에서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한 내용이 있다.
그런 경우 그 상태를 그 때 그 때 쉽게 성취해 얻어낼 수 있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원하는 대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쉽게 얻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는 중요하다.
○ 실재가 공함을 증명하는 방안
이는 과거에 살핀 내용과 중복된다.
가장 원칙적인 방안은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하는 방안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보조적 방편을 사용하게 된다.
그것이 중관론에서 제시하는 방안이다.
여기에서 다음만 간단히 언급하자.
앞에 나무가 하나 놓여 있다.
이 나무를 굴리니 굴러간다.
이 나무를 불을 붙인다.
그러자 안 보이던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이런 내용을 현실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을 지켜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 나무를 얻을 수 없다.
또 나무가 굴러감도 얻을 수 없다.
여기에 불이나 연기 재의 생멸도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러니 그런 나무나 불 연기 재가 나타나는 관계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한다.
이렇게 말할 때 어떤 이가 다음처럼 묻는다고 하자.
눈앞에서 나무와 연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우선 그 상황에서 나무가 어디 있는가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대가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렇게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부분을 나무라고 하자.
이 경우 위 논의는 그런 부분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그런 부분을 대해 그런 생각들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는 그런 생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런 내용들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자체를 못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재에 대한 논의는 위와 같은 내용을 놓고 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위 내용과 우선 혼동하면 안 된다.
실재에 대해 살펴야 한다.
그래서 실재 본 바탕에 그런 내용들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공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공함이란 있고 없음을 모두 떠난다.
'있다'라고 할 수도 없다.
'없다'라고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다'라고도 할 수 없다.
'~아니다'라고도 할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재를 # 로 표시해보자.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를 $ 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감각현실을 ○ 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관념분별을 ■ 라고 표시해보자.
그런데 현실에서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을 얻는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본 바탕 실재#는 얻을 수 없다
이는 본 바탕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다음을 나타낸다.
실재# 에는 감각현실 ○ 을 얻을 수 없다.
실재# 에는 관념분별 ■ 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 는 감각현실 ○ 이 아니다.
감각현실 ○ 은 실재 # 가 아니다.
실재# 는 관념분별 ■ 이 아니다.
관념분별 ■ 은 실재 # 가 아니다.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이 상황에서 어디에도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 $가 없다.
즉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것이 꿈과 같은 성격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들 내용에서 그 논의는 실재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실재에 대해 그 누구도 직접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다.
사정은 그렇지만, 보조적 증명이나 논증에서는 현실에서 얻는 위 부분들에 의존해 진행한다.
그런 가운데 이를 통해서 논증을 진행하게 된다.
그래서 이는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단순한 방편적 논의다.
그래서 혼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 논증도 또한 마찬가지로 혼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들 내용은 『회쟁론』 부분과 함께 살피면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시 앞의 상황으로 가보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나무가 불타고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 것을 대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가 이를 실답다고 여긴다고 하자.
즉 그런 내용이 꿈과 성격이 달리, 실다운 내용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것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도 그런 내용을 그대로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은 이 안에 참된 진짜인 실체가 있기에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잘못 여기는 데에 일정한 배경사정이 있다.
현실은 꿈과 다르다.
다수 주체가 일정한 시기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엇비슷한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는다.
그런 사정 때문에 현실은 꿈과 달리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실재나 실체의 존부에 대해서 위와 같이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 역시 실재를 직접 얻는 것은 아니다.
또 실재에서 그 주장을 뒷받침할 어떤 내용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는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런 가운데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것이 위아 같은 형태로 반복된다.
사정이 그렇기에 얻지 못하는 실재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실재에 대해 사변적으로 일정한 주장을 내세우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만일 실재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다수가 그런 내용을 반복해서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실재에 대한 주장은 결국 현실 내용을 의존해서 제시하게 된다.
그는 결국 이런 입장이다.
현실에서 a 라는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
그런 사정 때문에 실재에도 a 에 해당한 내용이 있음이 분명하다.
또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도 있다.
이렇게 주장한다.
그렇게 이해하는 경우 현실내용에 대해 실답다고 여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힘들다.
또 그런 망집에 바탕한 경우 일정한 상황에서 일정한 업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매 상황 그런 망집에 바탕해 일정한 업을 행한다.
그렇게 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면
그 상대의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이해시켜야 한다.
현실은 꿈과 달리 다수 주체에게 일정한 형태로 무수히 반복한다.
그렇다해도 그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이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그대로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참된 진짜인 실체가 없는 가운데 그런 내용을 얻게 됨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현실내용은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불가득]
또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도 없다.[무소유]
이는 마치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것과 성격이 같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하나하나 실답지 않은데도 현실처럼 반복하는 사례가 많다.
환사의 환술도 그런 예다.
마술사가 보여주는 마술은 매번 반복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실다운 것은 아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만화를 그려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 오늘날 전자 게임화면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게임을 할 때마다 일정한 화면이 일정한 관계로 반복된다.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다.
그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상대가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하는
원칙적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경우의 문제 상황은 다음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런 가운데 일정한 관념분별을 한다.
이것이 반복된다.
그런 가운데 다음처럼 생각한다고 하자.
나무가 여기서 저기로 굴러간다
나무를 태우면 불과 연기가 나온다.
이런 내용을 자신 뿐만 아니라 다수가 수없이 경험한다.
현실 사정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단히 실다운 것 아닌가.
따라서 꿈과 달리 이들 내용을 본 바탕인 실재에도 그렇게 있는 것이다.
또 이 안에 참된 뼈대로서 진짜에 해당한 실체가 그렇게 있다.
이렇게 여기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이 문제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상대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중관론은 이런 경우에 보조적으로 그런 입장을 논파시키고자 하는 논의다.
상대가 실재나 실체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한다.
그런데 상대의 그런 주장은 옳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결론을 얻어내려는 취지다.
그리고 그 논파과정에 여러 방안이 사용된다.
상대가 망집을 일으켜서 그렇게 잘못 여긴다.
이 경우 어떻게 상대의 주장을 논파시킬 수 있는가.
이런 문제다.
현실에서 연기의 생멸을 본다고 하자.
이 때 상대는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기에
본 바탕에도 그에 해당한 내용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상대가 할 때 이 잘못을 이해시켜야 한다.
이런 문제다.
원칙적으로 이 경우에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상대 주장대로 그렇다고 하자.
그렇게 받아들이면 일정한 문제를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 주장은 잘못이다.
이런 방식을 원칙적으로 취한다.
그리고 이것을 원칙적으로 귀류논증식에 의한 논파라고 칭한다.
상대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반드시 잘못으로 귀결된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상대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음 처럼 진행한다고 하자.
상대 주장은 옳지 않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이는 간단히 보면 다음 방식이다.
S는 M이다.
M은 P이다.
따라서 ∴ S는 P다.
이런 형태의 논증식과 같다.
이 경우 결론은 '망집을 일으킨 이가 행한 주장은 잘못이다.'
이런 형태가 된다.
그것을 위와 같은 추론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위 두 방식은 비슷해 보인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위 두 방식의 차이는 별로 없다.
그런데 실재에 대한 논증에서는 그렇지 않다.
실재 영역의 공함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본래 S나 M, P 등 부터 얻을 수 없다.
또 그런 관계도 본래 세울 수 없다.
그래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원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 어느 경우나, 방편적인 입장일 뿐이다.
이런 사정을 전반적으로 잘 이해하고 논의를 살펴나가야 한다.
일단 여기서는 이렇게 간단히만 개관한다.
자세한 내용은 결국 『회쟁론』논의에서 기초부분부터
살펴서 하나씩 나아가며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이들 논의에 대해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사정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 논의를 대부분 망집을 바탕으로 대한다.
그래서 무엇을 논의의 초점으로 하는 지 자체에 대해서도 혼동을 일으킨다.
이미 그 사정을 앞에서 간단히 보았다.
현실에서 누구나 눈귀코..등으로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다.
또 분별도 일으켜 행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나무에 불이 붙어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현실에 불이나 연기 재가 생겨나는 일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선 의아하게 여긴다.
그런 경우 현실에서 이런 감각현실은 생생하게 매순간 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별은 명료하게 일으킨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니 이는 궤변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는 본 논의 성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얻는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본래 본 바탕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을 그렇게 얻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하고 이에 대해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하는 취지다.
또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하는 취지다.
그리고 반대로 업장을 제거하는 수행은 힘들게 여기지 않게 잘 성취해야 함을 제시하는 취지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극복하고 벗어나야 함을 제시하는 취지다.
또 반대로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잘 성취해야 함을 제시하는 취지다.
이런 취지다.
한편 불이나 연기 재가 생겨나는 일을 얻을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밝힐 수 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고 하자. => 이런 문제가 있다.
만일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 이런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 어느 쪽이나 문제가 있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이는 말 자체가 안 되는 궤변이라고 여긴다.
있다는 주장이 잘못이라고 하자. => 그러면 당연히 없다고 해야 한다.
없다는 주장이 잘못이라고 하자. => 그러면 당연히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본 논의 성격 자체나 실재의 공함의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위 사정을 이해시키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본 바탕의 실재 영역을 원칙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는 그런 현실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밝히려 한다고 하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본래 실재 영역에서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실재 영역에 아무런 내용이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주체는 마음과 관계해서 내용을 얻는다.
따라서 마음과 관계를 떠나 본래 있다고 할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위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상대의 망집을 받아들일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우선 실재 영역에 대해서는 논의하는 어떤 내용도 시설할 수 없다.
또 어떤 추론 식도 세울 수 없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서 이 논의를 대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는 일정한 내용이 실재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시설한다.
오로지 사변적인 추론과 망집에 바탕한 주장이다.
또 이런 경우 그는 일정한 추론식이나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실재의 공함을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본래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만 방편상 상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로 인해 어떤 문제를 반드시 만나게 되는가만을 제시할 뿐이다.
이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즉 상대의 망집을 논파하기 위해 위처럼 주장한다고 하자.
그러면 거꾸로 그런 주장을 세워 주장한 것이라고 잘못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가 귀류논증 방식이나 자립 논증방식에서 다 같이 발생한다.
망집에 바탕해 귀류논증식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반적으로 이는 간접 논증방법이라고 잘못 오해한다.
즉 상대가 a 가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기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데 예를 들어 이를 다음처럼 귀류논증방식으로 논파한다고 하자.
즉, 만일 그런 일이 있다고 하자. => 그렇다면 반드시 이런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상대 주장이 필연적으로 잘못에 귀결됨을 밝혀 논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망집에 바탕한 입장은 이 내용을 다음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상대가 그렇게 논파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a 가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그 논파는 반대로 a 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이해한다.
현실에서는 망집에 바탕해서 귀류논증식을 이런 취지로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누군가 철수를 여자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 때 이 주장을 귀류논증식으로 논파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만일 철수가 여자라면 이런 문제가 있다고 논파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주장은 그와 반대로 철수가 남자임을 간접적으로 논증하기 위한 취지로 보통 이해한다.
한편, 또 이 귀류논증 추론의 성격도 잘못 이해한다.
즉 귀류논증에서 이렇게 주장했다고 하자.
만일 상대 주장처럼 'a 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a 는 m 이다.
그런데 m 은 p 이다.
따라서 a 는 p 다. => 따라서 잘못이다.
따라서 처음 주장은 잘못이다.
이렇게 논파했다고 하자.
이 경우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 귀류논증을 다음처럼 잘못 이해하게 된다.
위 논파 과정에서 내새운 내용이나 추론식 자체를 모두 논파자가 다 세우고 주장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자체가 실재가 공하다는 입장과 모순된다.
그래서 실재가 공함을 밝히는 입장에서는 그런 입장이 아니다.
다만 상대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렇다는 의미다.
즉 가정적으로 상대입장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과 그 추론식이 타당함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상대입장에서는 이러이러한 문제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어떡할 것인가. 이렇게 논파한 것 뿐이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자립논증식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S는 M이다.
M은 P이다.
따라서 ∴ S는 P다. [=> 이는 상대의 원래 주장과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이다. ]
따라서 상대 주장은 잘못이다.
이런 형태의 논증식과 같다.
그런데 중관론 본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상대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논파하려는 취지일 뿐이다.
다만 자립논증파 방식은
논파자가 그런 내용과 추론식 자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내세운 듯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간의 약간의 대립이 있게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본다면 위 방식은 모두 방편에 불과하다.
만일 자립논증파가 주장이 외관상 논파자가
그런 내용과 추론식 그리고 결론을 다 적극적으로 내세운 것으로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귀류논증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이러이러한 잘못된 주장을 한다.
=>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러이러한 잘못된 결과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 부분도 그 성격이 마찬가지다.
그러나 반야 중관론의 입장은 어느 경우나 그 바탕이 그렇지 않다.
즉, 어느 경우나 논증과정에 사용하는 내용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망집에 바탕해 상대가 잘못된 주장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그런 경우 그런 상대를 논파시키고 이해시키 위해 방편상 그런 방식을 취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는 상대 주장을 논파시키기 위해 취하는 방편일 뿐이다.
다만 어느 경우나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논파과정에서 내세우는 각 주장이나 그 관계를 잘못 오해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자립논증식의 외관이 좀 더 그런 잘못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는 망집을 일으켜 주장하는 상대와 눈높이를 맞춰는 가운데 취하는 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상대가 그 잘못을 스스로 이해하게끔 하기 위해 취하는 방편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내용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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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6_120144_can_Ar26_s12.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blo-picasso-the-buffet-catalan-1943 ○ 2018_0419_130602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พระเจดีย์บนเรือสำเภา_วัดยานนาวา ♥Horní Bělá (Village - Plzeň-North) ,Czech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Helena Noguerra - We Have No Choice (Feat. Emillie Soler Et Lio).lrc Helena Noguerra - We Have No Choice (Feat. Emillie Soler Et Lio) ♥단상♥주제 선택문제와 페이지 찾기의 어려움 조각글 작성시 곡이 랜덤으로 뽑여 올려진다. 그리고 노래를 듣게 된다. 그런데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 반복된다. 조각글을 쓰면서 본인도 그런 점을 문제로 생각하게 된다. 현재 대략 4 년전 글을 다시 살피면서 정리한다. 그런데 정리를 마치고 다시 그 페이지를 찾아보려면 찾기 힘들다. 어제는 4년전에 작성했던 『잡아함경』에서 4 여의족과 소원의 성취에 관해 살폈다. 그런데 페이지를 닫고 다시 살피려니 그 페이지를 찾기 힘들다. 검색방법도 사용해본다. 여하튼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한번 페이지를 정리하면 각 부분에서 키워드를 통해 북마크를 생성한다. 그리고 이를 페이지로 정리해 놓는다. 문제는 이 페이지도 다시 찾기 힘들다. 이 페이지를 어떤 카데고리 등을 통해 쉽게 찾게 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마땅한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키워드 페이지를 연결할 링크를 매 페이지 밑에 두기로 신설했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Grégoire - Si tu me voyais.lrc Grégoire - Si tu me voyais ♥ 잡담 ♥시의 정신과 수행 노래에서 시를 강조하는 듯 하다. 본인 글도 길면 나중에 다시 보기 힘들다. 그래서 되도록 간결하게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대장경 경전 논서등은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글은 쉬어야 한다. 글 내용이 쉬어야 빨리 읽고 쉴 수 있다. 시란 간결함을 생명으로 한다. 또 어떤 것에서 연상되는 내용을 자유롭게 꺼내 연결시킨다. 그러면서 정서적인 감흥을 갖는다. 이것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상분별 증상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낙엽을 보고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시는 그런 사정을 당연히 전제로 하는 것이라 오히려 큰 문제가 없다. 시는 불어에서 가정문의 if 를 나타낸다. 이것이 한국어의 시 정신과도 관련된다. 기본적으로 망상분별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망상분별임을 알면서 시작활동을 하기에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낙엽을 대하고 낙엽이라고 여기는 증세가 더 문제다. 이 경우는 그는 낙엽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손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왜 그것이 낙엽인가라고 다시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처럼 자명한 것을 묻는 것은 오히려 문제다. 그것은 대하는 즉시 즉자적으로 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임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망상증상이다. 그러나 그 말 처럼 무언가를 대하면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즉자적이다. 대하는 즉시 곧바로 그런 내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명론에서 다루는 현량의 속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광범위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후 그런 망집에 바탕해 분주히 업을 행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사기 행위가 있다. 스스로 간절히 원해 한마리 낙타가 되어 성을 쌓으러 다니는 경우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그 눈을 가린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막대한 희생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 업을 행하지 않으면 얻을 막대한 보이지 않는 수익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것이 또 욕계내 파순의 업무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3악도에 처하게 된다. 욕계 중생들이 하나같이 무량하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사정이다. 이것을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수행이다. ◧◧◧ para-end-retur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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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함경이설해지는배경,경전핵심키워드정리와암기,뜻을뜻대로성취하는방안-4여의족,4여의족과방편의선악무기성,욕계에서소원의성취로지옥의고통이발생하는사정,변덕왕자공주와거북도사그리고아귀,아귀의희망추구관계,성취의부작용,만족의사라짐과새로운갈증,기존상태의사라짐으로인한고통과두려움,아귀들간의다툼,성취하기힘든희망에대한집착,쉽게성취되는희망에대한무시,욕계현실에서아귀다툼의발생과가해피해관계의발생,서로충돌하는희망의추구,상호충돌과가해피해관계의형성,가해와피해의중첩관계,수행자의서원과4여의족의관계,악마파순과수행자의관계,안하다하는운동의부작용,잡아함경배경,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반야등론석_K0578_T156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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