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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3-31_십문변혹론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기2564-03-31_십문변혹론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3. 31. 01:16



®

『십문변혹론』
K1079
T2111

변혹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십문변혹론_K1079_T2111 핵심요약





♣1079-001♧
『십문변혹론』




변혹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십문변혹론




 

십문변혹론(十門辯惑論) 상권



석복례(釋復禮) 지음

김두재 번역



태자(太子)의 문학(文學) 권무이(權無二)의 석전계의(釋典稽疑)1)에 대하여 대답한 서문.


“권문학은 명성이 응행(應行)2)에 으뜸이요, 

지위는 원기(園綺:常山四皓인 園公과 綺里季)에 참여할 만하므로 진신(搢紳:유학자)이 그의 영망(令望:善望)을 아름다워하였고 치소(緇素:僧俗)가 그의 훌륭한 방책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가 열 가지 의혹을 드러내어 나에게 두 가지 진리[二諦]를 구하였으니, 

공손생(公孫生:公孫丑, 

孟子의 제자)의 훌륭한 말솜씨로도 일찍이 대답하기 어렵고 사리자(舍利子)의 뛰어난 재주로도 이제 탄식하며 헤아리지 못할 일이지만. 

어찌 인(仁)을 행함에 있어 반대 의견을 주장할 수 있으며, 

시험 삼아 뜻을 말하여 글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필코 명목(名目)과 실제가 부합되어야만 하리니, 

이를 일컬어 십문변혹(十門辯惑)이라 말하리라. 

비록 『시경(詩經)』에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경계한 것을 다 덮어버리고 한 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다’3)고 했다 해도 법은 오직 비밀스러운 것이라서 10문에 대한 것을 밝혀 기록하다보니, 

감히 삼전(三轉)4)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비슷한 유(類)들을 모아 형상을 관찰하다 보니 다시금 권축(卷軸)만 채우게 되어 번거롭게만 하였고 온당하지 못한 점 못내 지음(知音)5)들에게 부끄럽게 생각하노라”


1. 통력상감문(通力上感門)

2. 응형부화문(應形俯化門)

3. 정예토별문(淨穢土別門)

4. 미오견수문(迷悟見殊門)

5. 현실득기문(顯實得記門

6. 반경찬도문(反經贊道門)

7. 관업구사문(觀業救捨門)

8. 수교억양문(隨敎抑揚門)

9. 화불은현문(化佛隱顯門)

10.성왕흥체문(聖王興替門)



1. 통력상감문(通力上感門)6)


【稽疑】가만히 살펴보건대 유마(維摩)가 신통력으로써 손바닥으로 여래를 가지고 놀았다고 하였는데, 

다만 십지(十地)의 경지로 관찰해 보면 여래와는 오히려 나곡(羅縠:얇은 비단)만큼의 간격이 있거늘 어떻게 한 손바닥 안에 십호(十號)의 지존(至尊)을 수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다만 낮은 것을 높은 데로 옮기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치에도 순조롭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로 또한 부처님과 보살이 어찌 차등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가령 차등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부처님을 마음대로 움직이며, 

또한 차등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꼭 부처가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유마가 바로 여래의 몸으로서 부처를 도와 교화를 펴려는 것이었다면 무어라 이름하고 무어라 호(號)를 하며 무슨 논(論)이라고 하고 무슨 경(經)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니, 

바라건대 상지(上智)를 번거롭게 하는 일이지만 하우(下愚)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辯惑】일찍이 들으니 마음을 거슬러가면서 취하면 아무리 천한 필부(匹夫)라고 하더라도 빼앗기 어렵고 이치를 순종하여 구하면 만승(萬乘:天子)가 비록 존귀하다 해도 항복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산과 못은 서로 기운이 통하였지만 처음부터 그 높낮이는 같지 않았고 쇠와 돌은 같은 소리이니 굳이 그 크기까지 고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모든 부처님께서는 평등하게 한다는 서원(誓願)이 있어서 때를 타서 만물에 응하며, 

보살은 신통력으로 유희(遊戱)하므로 모든 것을 잊고 앉은 채로 먼 곳까지 이르러서 모습을 바꾸기를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다함께 기연(機緣)에 부응하는 것이겠습니까?

유마힐(維摩詰)은 법신대사(法身大士)라서 그 덕이 뭇 성인들보다 뛰어나고 방편 지혜를 열어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속가에 있으면서도 큰 도를 보이셨습니다. 

연화총지(蓮花總持)의 힘으로 다른 곳에서 오시기도 하고 개자해탈(芥子解脫)의 문으로 이 나라에 열어 보이셨습니다.

미증유(未曾有)의 집에서 주머니를 여미듯이 그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括囊無外]7) 부사의(不思議)한 도(道)를 이롭게 쓰되 방향이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5백이나 되는 성문(聲聞)들이 모두 유마힐의 질병을 위문하기를 사양하였고8) 8천의 보살들도 명령하지 못했습니다.

미륵(彌勒)보살이 일생(一生)9)의 경지에 있으면서 그의 현해(懸解:의혹을 풀어줌)에 감복하였으며, 

문수(文殊)는 곧 여러 부처님의 스승인데도 그의 진입(眞入)을 사양하고 암원(菴園:菴羅樹園)에 결집하였습니다.10) 정명(淨名:유마힐)으로 인하여 발흥(發興)하였으니 정명의 자취는 무동(無動:삼매에 의해 번뇌가 없음)을 바탕으로 하여 비로소 밝아졌고, 

그래서 여래께서 마침내 이 세계를 돌아보셨으니 거사(居士)가 공경을 다하여 오른쪽 손바닥에 자리를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삼매의 힘에 감응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으므로 십호(十號)의 지존(至尊)께서 행하지 않고도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한 정성이 신을 감동시키면 그 신통의 크고 작음을 알 수 없고 효도의 덕이 하늘을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하늘의 높고 낮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물며 혜안(慧眼)으로는 멀리까지 볼 수 있으므로 모니(牟尼)의 실상(實相)을 볼 수 있었고, 

신족(神足)은 크게 운행하므로 묘희국(妙喜國)을 화만(花鬘)처럼 가지고서 저 인존(仁尊)을 비굴하게 하지 않고도 이 나라의 경계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나곡(羅縠)의 비유만으로 비교해서 통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금속(金粟)11)을 가지고 이름을 전하여도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길장(吉藏) 법사가 이르기를 “금속의 일은 『사유삼매경(思惟三昧經)』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그 책은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제 여러 경전의 목록들을 검토해 보았으나 이 경전의 이름이 없으니, 

생각해 보건대 서국(西國)엔 이 경전이 있었으나 동방에서 아직 번역하지 못한 듯하다.









2. 응형부화문(應形俯化門)12)


【稽疑】 아주 짧은 기간에 용녀(龍女)가 부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불도(佛道)는 너무도 쉬운 일일 텐데 무엇 때문에 한량없이 노력하고 고생해야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합니까?

저와 같이 변화하는 것은 그 변화가 곧 진실이 아니거늘 어찌 사실이 아닌 것으로써 뭇 중생들을 교화한단 말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사실이 아닌 말씀이 없으신데 어째서 이와 같은 일을 하셨습니까?

또 문수는 바로 연등(燃燈)부처님의 스승이요, 

석가(釋迦)는 또 연등부처님의 제자이다. 

문수는 이미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로서 마땅히 연등부처님 이전에 벌써 부처가 되었노라고 하였거늘, 

하물며 미륵은 문수가 이미 깨달았음을 미처 알지 못했는데 용녀가 도를 성취한 것은 문수의 힘이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이제 용녀가 미륵보다 먼저 부처가 되었고 미륵은 용녀보다 뒤에 부처가 된 터인데 문수가 아직 부처가 되지 않았으니 어찌 의혹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먼저 성불하였다고 한다면 성불한 내용이 어느 경전에 있으며, 

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만약 부처를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면 왜 그 일을 덮어 감추었는지 그 덮어 감춘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가령 문수가 성불하지 않은 것이 옳다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께서 성불했다고 한 것이 분명 잘못일 것이요, 

만일 벌써 성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면 문수의 일이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옳고 그른 이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辯惑】지극한 사람은 제 자신의 몸은 없고 사물에 따라 형상을 나타낼 뿐이므로, 

높고 낮은 것은 자취를 가지고 결정할 수 없으며, 

숨거나 나타나는 것은 마음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용녀가 아무리 그 몸이 5도(道)에 떠돈다고는 하지만 그 위광(位光)은 십지(十地)의 경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문수가 아무리 보살이라 불려지지만 사실은 바로 여래입니다.

무엇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법화경(法華經)』을 살펴보면 그 경에 이르기를 “사가라용왕(娑竭羅龍王)에게 딸이 있었는데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다. 

지혜롭고 근기가 영리하여 중생들의 모든 근기와 행업(行業)에 대하여 잘 알았고, 

마침내는 말솜씨가 걸림이 없었으므로 능히 보리(菩提)에 이를 수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건대 ‘지혜롭고 근기가 영리하다’는 것은 하열한 세계에 사는 존재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요, 

‘여러 가지 근기와 행업을 알았다’는 것은 소승(小乘)의 일이 아닙니다. 

‘말솜씨가 걸림이 없었다’는 것은 선혜(善慧)의 지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보리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은 등각(等覺)의 도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곧 삼기겁(三祇劫)이 다하고 십도(十度:10바라밀)의 원인이 충만한 것입니다.

보배 구슬을 바치고 나서 여인의 몸이 남자로 바뀌어 연꽃에 앉아 각위(覺位)에 올랐으니, 

이치는 달라 실제와 맞지 않으나 일은 몸을 구부려 물건을 줍는 것처럼 쉽습니다. 

의혹을 일으킨 사람은 용녀를 보고 곧 ‘이는 삼도(三塗)의 중생으로서 다섯 가지 장애에 얽혀 있다’고 말하고, 

발심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범위(凡位)로부터 성과(聖果)를 희망한 것이다’고 말하니, 

5도에 태어남을 보이신[示生] 뜻이 있고, 

네 가지 발원에 보처(補處:다음 생에 부처가 될 자리, 

또는 그 사람)의 글이 있음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지적(智積)보살도 그런 까닭에 의심이 생겼고 신자(身子:舍利佛)도 그로 말미암아 힐문을 초래하였으니, 

더벅머리의 마음이 어찌 그리도 비뚤어져 있습니까?

또 살펴본 바에 의하면 『수릉엄경(首楞嚴經)』에 이르기를 “문수는 바로 과거 평등국(平等國)의 용종상존여래(龍種上尊如來)였다”고 하였고, 

『앙굴마라경(央崛魔羅經)』에 이르기를 “이 분은 북방 상희세계(常喜世界)의 마니보적불(摩尼寶積佛)이다”라고 하였으며, 

『문수사리불토엄정경(文殊師利佛土嚴淨經)』에 이르기를 “미래 세계에 부처가 되면 그 명호를 보견(普見)이라고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문수의 지혜는 방편과 실제[權實]를 포함하고 있고 본체는 진신과 응신[眞應]을 겸하고 있어서 혹은 과거겁(劫)에 도를 성취하였으므로 이미 용종(龍種)의 지존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 세계에 모습을 나타내어 오히려 법왕의 아들이라고 이름하기도 하며, 

혹은 정녕코 북방에 위치하여 오래도록 보적(寶積)이라는 이름으로 지내기도 하였고, 

때로는 수기(授記)를 받아 미래겁에 장차 보현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여 시방세계에서 변화하되 걸림이 없었으며, 

삼제(三際:과거ㆍ현재ㆍ미래)를 두루 다녔으되 흔들리지 않았고, 

취한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지만 과업을 이룩하였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았지만 몸을 나타냈으니, 

어찌 가히 하나의 모습으로써 구할 수 있겠으며 또 하나의 이름으로써 결정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연등부처님을 만나서는 함장(函丈:스승)이 되었었고 석가(釋迦)를 만나서는 피석(避席:제자의 예의)하였으며, 

자씨(慈氏:미륵보살)는 그에게 나아가 의심을 결단하였고, 

용녀는 스승으로 삼아 도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녀가 번뇌가 있는 몸으로부터 밝게 된 것이 매우 빨랐던 것은 중생들을 깨우쳐서 경을 지니게 하기 위한 것이요, 

문수가 인위(因位)에 처하였으면서도 막혀서 지체함을 보인 것은 다른 사람을 권장하고 자신을 뒤로 한 것으로서, 

이 두 가지는 모두 곡진하게 방편을 써서 실제로 이익을 준 것입니다. 

또한 군자의 도는 곧으면서도 잘잘못을 헤아리지 않으며 성인의 일은 성품이 부드러우면서도 권도를 행하나니, 

수레를 타기를 허락하였지만 아주 준 것은 아니요, 

화성(化城)을 보여준 뒤 다시 나아가게 한 것과도 같은 유(類)입니다.13) 이미 저것은 거짓이 아님을 믿으면서도 이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나니, 

아, 

슬픕니다. 

칠규(七竅) 중에 하나도 오히려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3. 정예토별문(淨穢土別門)14)


【稽疑】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에 50소겁(小劫)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다만 춘추(春秋) 야명(夜明:畫夜)은 석가모니 생애의 일이 되고, 

정법(正法) 5백(百)년과 상법(像法) 1천 년은 모두 멸도(滅度)하신 뒤의 일로서 다 같이 한 겁(劫)이 될 뿐입니다.

만약 서역(西域)에서 법을 들은 사람이 신통력 때문에 시간의 짧기가 한 식경(食頃)이 되었다면 여기에서 법을 듣지 못한 사람과는 이미 50소겁의 간격이 있게 됩니다.

어찌하면 처음에 부처님의 신력이 무엇인지 듣지도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신력을 가(加)할 수 있겠습니까? 

신력을 가하지 못했다면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말았을 터인데 지금은 이미 타서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이것은 천여 년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진실로 천여 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면 어찌 50소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아무리 부처님의 신력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한 신력을 가할 수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초기에 대소가 다 함께 과보(果報)를 증득했어야 할 터인데 어찌 빈바(頻婆) 한 나라의 12만 사람에게만 국한 될 뿐이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정황을 살펴보면 신력을 가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사문 복례(復禮)가 말하였다. 

“『법화경』 「서품(序品)」에서는 ‘일월등명(日月燈明)부처님께서 『법화경』을 60소겁이 지나도록 설하셨는데도 그 시간이 마치 한 식경(食頃)과 같았다’고 되어 있고, 

「용출품(踊出品)」에서는 ‘50소겁이 마치 반 일(半日)과 같았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 논란을 일으킨 내용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실 때의 인용한 글과 등명부처님의 일을 겸하고 있다. 

다만 뜻만 취하여 바로 통했을 뿐 글에 의지하지 않은 채 반힐(反詰)한 것이다.”

【辯惑】부처님에는 진신(眞身)과 응신(應身)이 있고 진토(眞土)와 응토(應土)가 있습니다. 

진신과 진토는 이름이나 모습을 단절하고 홀로 선 것이며, 

응형(應形)과 응국(應國)은 사물에 따라 감응하여 그 형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 것입니다.

깨끗한 것을 보면 깨끗하다 말하고 더러운 것을 보면 더럽다고 말하며, 

오래된 것을 보면 오래 되었다고 하고 최근의 것을 보면 최근의 것이라고 말하나니, 

각각 한정된 바에 막혀 있어서 능히 달관(達觀)한 이가 적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身子:舍利佛)는 더러운 것을 보고 깨끗한 것에 미혹되어 부질없이 일월(日月)의 이야기를 받들었고 미륵(彌勒)은 가까운 것에 집착하여 오래된 것을 의심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부자(父子)의 비유를 들었으며, 

급기야는 땅을 안찰(按察)하여 장엄한 나라를 나타내고 하계(下界)의 악한 세계에 승기(僧祇)의 수명을 비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더러운 것을 집착하는 마음을 비로소 버리고 가까운 것에 국한된 견해를 마침내 없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깨끗한 것을 보여줌은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자 함이니 더러운 것이 제거되었으니 깨끗함이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오래된 것을 설해줌은 그 때문에 가까운 것을 깨뜨리기 위함이니 가까운 것이 없어졌으니 오래된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어야 마침내 미묘한 국토[妙土]가 될 것이요, 

오래된 것도 아니요 가까운 것도 아니어야 비로소 참다운 몸[眞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40여 년이란 예토(穢土)의 화신(化身)이요, 

50소겁(小劫)이란 정토(淨土)의 보신(報身)입니다. 

변천하여 움직이는 화신은 스스로 연월(年月)로써 예측하여 알 수 있겠지만 원만하고 변함없는 보체(報體)야말로 어찌 시대(時代)로써 한정지울 수 있겠습니까? 

이미 보신과 화신의 자취가 나뉘고 오래된 것과 가까운 것의 귀결처가 다르니, 

오랜 된 것을 가까워지게 하기 란 어려우니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말은 잘못입니다.

『법화경』의 「수량품(壽量品)」과. 

『유마경(維摩經)』 「불국품(佛國品)」의 글에 이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어찌 많은 저술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의혹[惑:宋ㆍ元ㆍ明ㆍ宮本엔 或으로 됨]하여 말하였습니다.

“석가의 이견(利見)은 원래 화신이고 사바(娑婆)의 모든 땅은 본래 청정한 국토가 아닙니다. 

기사(耆闍:석존이 설법한 산. 

기사굴산)는 더러운 국토의 영진(靈鎭)이요 『법화경』은 화신의 오묘한 경전이니, 

이제 마침내 보신으로써 화신을 말하고 깨끗한 국토를 가지고 더러운 국토를 밝힌 것입니다. 

그것의 잘못됨은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이 무슨 말입니까. 

이 앞서 어찌 말하지 않았습니까? 

깨끗하고 더럽고 오래 되고 가까운 것은 견해에 의하여 생겨납니다. 

견해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은 처소는 같건만 견해가 다른 것이요 처소가 달라서 견해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또 석가(釋迦)는 한 분의 부처님이건만, 

어떤 이는 이를 오래 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그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라고 보는 이도 있으며, 

사바(娑婆)는 한 세계이건만, 

어떤 이는 깨끗하다고 보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그것을 더럽다고 보는 이도 있으니, 

‘오래이다, 

깨끗하다’고 보는 것은 보살 상인(上人)의 견해요, 

‘가깝고 더럽다’고 보는 것은 범부 하승(下乘)의 견해입니다.

만약 그러하여 더러운 것을 이미 사바세계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깨끗함을 얻을 수 없을 것이요, 

가까운 것을 이미 석가여래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오래된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는 다만 화신(化身)일 뿐이요 사바세계는 오직 예토(穢土)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 뜻은 치우친 집착에 부합하고 이치도 현동(玄同)과는 다르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법화경』 몇 품(品)과 영산회상의 한 차례 모임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처음엔 이승(二乘)을 개회(開會)하여 일승(一乘)으로 돌아가게 하여[會三歸一] 작은 도[小道]로써 대승(大乘)에 들어가게 하였고, 

다음엔 세 차례 팔방(八方)을 변화하여 더러운 마음을 인도해서 깨끗한 국토를 관(觀)하게 하였으니, 

대승에 이미 들어가서는 다시는 소승(小乘)으로 되돌아감이 없어졌고, 

깨끗한 국토를 이미 관하였으니 어찌 더러운 국토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처음에 분신(分身)한 부처를 하나로 모은 것으로부터 나아가 수량(壽量)의 경전을 설함에 이르기까지 다 깨끗한 국토 가운데에서 변함없는 몸의 이치를 연설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 이르기를 ‘이와 같이 내가 성불(成佛)한 이래로 너무도 크게 오래되고 멀어져서 그 수명이 한량없이 많은 아승기겁(阿僧祇劫)을 지나도록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항상 영취산(靈鷲山)과 그 밖에 다른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생들이 겁(劫)이 다하여 큰 불이 일어나 타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나는 이 국토에 있으면서 안온하여 천인(天人)이 항상 충만하다네’라고 하였습다.

그런 까닭에 성인의 수명은 길고 오래 되어 진계(塵界)에서 능히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묘(妙)한 경계는 편안하고 견고하니 어찌 겁화(劫火)가 태울 수 있겠으며 어떻게 춘추(春秋)에 처음 생겨난 것을 미루어서 50소겁을 조사해 낼 수 있겠으며, 

물과 불의 재난도 겪어보지 못하고서 1천여 년을 가지고 사실 여부를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서리를 밟아본 자라야 반드시 얼음이 얼 것이라고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십니까?”










4. 미오견수문(迷悟見殊門)15)


【稽疑】 『법화경』을 설할 때엔 신비로운 광명(光明)이 다른 세계에까지 멀리 비추었고, 

『열반경』을 설하던 날엔 보배 일산이 대천(大千)세계를 널리 덮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고 한다면 인연이 없는 사람은 죄인(罪人)이고 인연이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달다(達多:提婆達多)는 아비와 어미를 죽였으니 어찌 복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에게는 출가(出家)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며, 

사왕(闍王:阿闍世王)은 아비를 해하고 어미를 가두었으니, 

어찌 복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월광삼매(月光三昧)로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 땅 만리엔 나라를 위하는 어질고 명철한 재상이 많이 있는데도 어째서 한 사람도 인연이 없으며, 

어찌 유독 막혀 있습니까? 

임방(林放)이 태산(泰山)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16)

【辯惑】푸른 저 하늘이 진실로 넓건만 하루살이[醯鷄]는 독 속에서 놀고 있어서 보지 못하고, 

밝은 태양은 대개 밝은 것이건만 박쥐[仙鼠]는 낮이면 숨어 있으니 어떻게 불 수 있습니까? 

어찌 온갖 물질[資始:萬物資始]17)이 밖에 있으면서 비추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가까운 물건으로 그것을 덮어 버린다면 멀리 살필 수 없을 것이요, 

거꾸로 된 마음에 의혹을 일으키면 순수하게 분별할 수 없는 법입니다.

가령 말하기를 “하늘이 있고 해가 있으니, 

하늘은 그 둘레가 삼백 도(度)나 넓어 아래를 덮고 있고, 

해는 그 직경이 1천 리나 밝아 밖을 비추고 있다”고 한다면 저 두 가지 벌레[二蟲:하루살이와 박쥐]를 보면 반드시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믿지 않을 것이니, 

지금 업장(業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어찌 독 속에서 노는 하루살이와 다를 것이며, 

지혜의 눈이 열리지 못한 사람이 어찌 낮에 잠복하고 있는 박쥐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보배 일산(日傘)이 일찍이 백억이나 되는 사천(四天)의 위에 달려 있고, 

백호 광명[毫光]이 널리 1만 팔천 국토를 비추었다고 한들 유루(有漏) 중생은 깜깜한 밤과 같아 커다란 꿈속을 한창 치닫고 있으며 무명(無明)에 덮이고 가리어져 있으니 어떻게 막혀있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만약 보지 못했다면 없는 것과 같은데 이것을 두고 푸른 하늘과 밝은 해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배 일산과 백호 광명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복해서 서로 밝혀 말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더구나 노사(魯史) 직서(直書)에 “묘일 밤[卯夜]에 상서로운 빛이 밝게 비추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지식 많은 공자(孔子)도 서방에 성덕(聖德)이 있음을 미루어 알겠다고 하였고 아울러 여러 가지로 보아 근거가 있는 것이니 어찌 적막(寂寞)하여 조짐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알아야만 합니다. 

군자(君子)는 혹 묵묵히 있으면서도 밝게 드러나서 감통(感通)하게 하고 중사(中士)는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하한(河漢)과 같아서 놀라고 두려워하게 만드니, 

저 지식이 있는 것처럼 꾸려서 그것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무리들과 어리석은 마음을 품고 혼돈(混沌)에 빠진 무리들이 장차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거나 더러는 힘을 꺾고 일찍이 그 사람이 잘못이라고 헐뜯을 것입니다.

도는 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니(仲尼)는 무(無)를 체득하였으나 교화시킬 때에 먼저 유(有)에 간섭을 받았고 계로(季路)는 죽음에 대하여 물었으나 마주해서는 도리어 생(生)을 따졌습니다.

인의(仁義)로 점점 그 성령(性靈)을 단속하고 도덕(道德)으로 대강 그 미묘함을 밝힌 후에야 응진(應眞)이 서쪽에서 일어났고 상교(像敎)가 동쪽으로 오게 되어, 

팔만법문이 구류(九流)에 받아들여져 은미한 것이 나타났고 3천 보탑(寶塔)이 사영(四瀛)에 충만하여 장대(莊大)하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먼저는 안개가 끼었다가 나중엔 해가 나는 것과 같고 처음엔 구름이 끼다가 나중엔 비가 오는 것과 같으니 교리가 점차로 퍼져나가는 것은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다면 연(緣)이 있고 연이 없는 것은 삼승(三乘) 보리(菩提)의 성품이요, 

복이 있는 사람과 죄가 있는 사람은 여섯 갈래 세계[六趣]에 나고 죽는 업장입니다.

그 업장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성품에는 생소한 것과 익숙한 것이 있으니 성품이 만약 생소하다면 아무리 복이 많아도 계도(啓導)하기 어렵고 연(緣)이 이미 익숙하다면 아무리 죄가 중해도 교화할 수 있으니 복이 있는 사람도 오히려 계도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죄가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죄가 있는 사람인데도 오히려 교화하였거늘 더구나 복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멀리 사선(四禪)을 얻고 나서 그 작은 공을 뽐내어 운명을 저버리고 방탄(放誕)하기도 하고 세 가지 반역을 갖추어 행하기도 하였지만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회향(廻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렇게 회향하는 것은 바른 견해에서 생겨나고 바른 견해가 생겨나면 죄업도 소멸될 수 있습니다. 

운명을 저버리고 방탄하게 하는 것은 삿된 견해에서 일어나고 삿된 견해가 일어나면 복은 저절로 없어지게 됩니다.

복이 없어지면 오랜 세월[永劫] 동안 빠져서 허덕이고 죄가 사라지면 곧바로 몸이 해탈합니다.

그러므로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도(道)를 실천하면 군자가 되고 도를 어기면 소인(小人)이 되나니, 

인(仁)이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실행하면 곧 그 힘을 빌어서 이치를 밝힐 수 있습니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항상 모든 사람을 잘 구원해 주나니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며, 

항상 모든 물건을 잘 보살피나니 그러므로 어떤 물건도 버리지 않는다”18)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선(善)하지 않다고 해서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19)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큰 자비와 평등(平等)을 앞세우면서 어떻게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면 솜씨 있는 목공(木工)은 나무를 잘 살펴보고 이름 있는 의원은 병을 잘 살필 수가 있어서, 

나무가 쓸 만하면 그냥 쓸 뿐이지 그 나무가 고운지 미운지를 따지지 않으며, 

병을 치료할 만하면 그냥 치료할 뿐이지 병의 경중(輕重)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혹 물었다고 합니다.

“이란(伊蘭)20)은 나쁜 나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 그 나무를 사용하겠으며, 

가마(迦摩:황달의 일종)는 중병인데 당신이 어찌 그 병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지신 태자께서는 이 질문을 두고 옳은 질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른 질문이라고 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잘못된 질문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래(如來)께서는 기근(機根)을 잘 구별하시며 약과 질병을 교묘하게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달다(達多)가 위완(衛頑:衛昭伯)과 같은 악행을 행하고 사왕(闍王:阿闍世王)이 초목(楚穆)21) 같은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일찍이 보리(菩提)의 마음을 내었다면 쓸만한 것이며, 

이제 깨닫고 뉘우치는 마음을 일으켰다면 치료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치료할 만하면 치료해 주는 것이요 쓸만하면 쓰되 인도하여 마음을 귀의하게 하고 교화하여 도에 들어가게 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함께 나아갈 길을 열어주고 저들의 혼란한 근원을 찾아내어 죄가 있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새로워져서 효도하고 자애롭게 해야 할 것이며, 

허물이 없는 이는 순수하고 지극함을 잘 지키게 하는 것이니, 

선권방편(善權方便)의 이익이 넓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사왕(闍王)은 도를 묻고도 도리어 혼미해졌으니 스스로 임방(林放)과 같아졌고 부자(夫子)는 기미를 알아 성현을 우러러 생각했으니 태산(泰山)에 비교할 만합니다.

현인과 철인이 서로 이어짐은 아무리 세 번 거듭 살펴보았지만 실수가 없거늘 어떻게 그대만 홀로 동떨어져 있습니까?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5. 현실득기문(顯實得記門)22)


【稽疑】 제바달다(提婆達多)는 바로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사세왕(阿闍世王)에게 권유하여 부처님을 해치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천왕(天王)여래가 되었고, 

선성(善星)비구는 곧 부처님의 제자로서 그 죄가 제바달다보다 가벼웠는데도 어째서 산 채로 지옥에 들어갔습니까? 

다만 남을 해친 사람은 마땅히 중한 죄로 다스리고 남을 비방한 사람은 마땅히 가벼운 죄로 다스려야 할 것인데, 

여기서는 죄가 중한 사람은 여래가 되고 죄가 가벼운 사람은 지옥에 들어갔으니, 

이런 것을 후세에 보여 준다면 어떻게 안심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선성을 교화하기 위해서라면 나중에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할 터이니 수기(授記)가 있었습니까, 

수기가 없었습니까? 

만약 수기가 있었다면 부디 지적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가령 수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교화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만약 선성의 일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그렇게도 동일하지 못합니까? 

앞 사람은 천궁(天宮)에 올라가는 것으로써 유도하고 뒷사람은 지옥에 들어가게 하여 두려움을 가지게 하였으니, 

차마 지옥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어찌 자비(慈悲)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뜨거운 불 속에서 수제(樹提)를 건져내었고,23) 높은 하늘 위로 큰 돌을 날려서 광야(曠野)의 귀신을 두려워하게 하고, 

아사세왕의 취한 코끼리를 항복받았다면 어째서 선성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능력으로 구원해 주지 않았습니까?

【辯惑】대개 들으니 여래께서 설교(說敎)하시는 데에는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두 가지 법이 있고 조달(調達)의 소행(所行)에는 방편과 실제[權實]의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대승은 그 실제를 열어주는 것이고 소승은 그 방편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실제는 숨기고 방편만을 따진다면 조달은 부처님을 해치게 한 역죄(逆罪)를 지었으니 지옥의 괴로움만 초래할 것이요, 

만약 방편을 버리고 실제만을 논한다면 승가를 깨뜨린 죄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천왕(天王)여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것입니다.

방편이란 과보가 있기 마련이니 선성(善星)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란 죄가 없는 것이니 선성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것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닐 것이고 다르지 않다면 또한 어려움 없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와서 의심을 논하는 취지가 어디에서 일치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비방과 해침의 경중(輕重)이 다르다고 하는 고상한 의논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저 해함이 비록 역죄(逆罪)에 해당되지만 소견을 파괴한 것은 아니며, 

비방하는 것은 소견을 파괴한 것이지만 역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역죄가 성립되는 것은 오직 업장(業障)에 얽혀서 머지않아 무간(無間)지옥에 떨어지는 재앙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견을 파괴한 것은 선근(善根)이 끊어진 것이라서 마침내 천제(闡提: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조달을 꾸짖어 어리석은 사람이라 말했을 뿐이며, 

선성을 제목(題目)하여 사견(邪見)이라고 말하였음을 결정코 알 수 있습니다.

또 선성의 일이 진실한 것인가, 

아니면 교화하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인가를 물었는데, 

무릇 교화의 이치는 반드시 혼진(混眞)으로써 절묘함을 삼고 진실한 일은 저절로 사화(似化)로써 항구적임을 삼는데 진실과 교화가 서로 간섭하게 되면 어(魚)자와 노(魯)자를 분간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레박줄은 짧고 샘은 깊어서 맑은 샘물을 무엇으로 길어 올릴 수 없을 것이며, 

지혜는 적고 꾀만 커서 솥 안의 맛있는 음식을 덮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경솔하게 의논하는 것을 내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대략이나마 다시 성전(聖典)을 상고해본 것입니다. 

이단(異端)을 공격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삼아 논하여 말해보겠습니다. 

저 모니(牟尼) 일대(一代)에는 『열반경(涅槃經)』이 최후의 설법이 되었고 가섭(迦葉) 재청(再請)24)에 선성(善星)이 곧 가장 하열(下劣)한 사람입니다. 

더럽고 천한 곳에 그가 영원히 떨어짐을 안타까워하며, 

괴로움 당하는 지옥에 그가 산 채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또 악한 친구들과 어울려 악을 행하였을 때 보은(報恩)으로 이미 밝혔으니 이것이 곧 방편이요, 

선성이 선근(善根) 끊은 것을 『열반경』에선 그것이 곧 교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교화의 이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일찍이 이 교화에 관한 글이 없으니 이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널리 중부(衆部)을 지녔으나 통발만 지키면 어찌 고기를 얻을 수 있겠으며 두루 여러 선정을 닦았으나 산을 만드는데 이미 한 삼태기를 못 채우고 그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땅강아지[石鼠]가 재주를 부리는 것과 동일하고 비조(飛鳥)가 능히 말을 하는 것과 같나니, 

아무리 문인(門人)들이 가득 찼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백료(伯繚)25)와 같고 부질없이 부처님의 아들이라 칭하더라도 또한 상균(商均)26) 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밤중에 옷을 벗고 작은 아들을 두렵게 하는 말을 내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에서 자취를 쓸어버려 대인(大人)을 나타내는 모습을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겨를 먹고 사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도를 증득함을 말해주고, 

먹으면 토해내는 귀신을 보고는 이미 하늘에 태어났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저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다지도 미련스럽기 그지없습니까?

대체로 변재(辯才)가 제일인 사람으로서도 오히려 반딧불의 희롱함을 초래했고 지혜가 짝할 이 없건만 금사(金師)의 잘못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알아야만 합니다. 

근력(根力)과 해력(解力)이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비춘다 해도 교화자로 하여금 그 참된 것[眞]을 피할 수 없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혜로움을 숨길 수 없게 하는 것이 큰 성인의 본분입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옥호(玉毫)가 이미 가리어지고 금구(金口)는 선설(宣說)함이 없으니 다만 남기신 가르침을 가지고 이해하여야 하는데, 

어찌하여 글을 버리고 그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이와 같기만 할 뿐이겠습니까?

대체로 중생들과 함께 선을 행하고 함께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면 상등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요, 

함께 악을 행하고 함께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등의 어리석은 사람이며, 

선을 행하는 사람과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과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중간 정도의 사람[中人]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오직 상등의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하등의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중인(中人)쯤 되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성(至聖)인 선부(宣父:공자)도 도척(盜跖)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며, 

중현(中賢)인 청하(淸河)는 주처(周處)의 절개를 바꾸었습니다. 

지금 난타(難陀) 등의 무리는 중인이요 선성(善星)과 같은 무리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도하거나 핍박하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괴로움을 참고 학문을 연마해 비로소 나한(羅漢)을 성취하였으나 인과(因果)를 비방하였으니 이들은 그래서 하등의 사람이 됩니다. 

능히 천제(闡提)가 되었으나 어찌 대성(大聖)께서 차마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하열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구제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비유하면 아무리 최상의 밭이라 해도 불에 태워 볶은 씨앗이라면 어떻게 싹을 틔울 수가 있겠으며, 

아무리 구름이 피어올라 금세 비가 내릴 듯한 날씨라 할지라도 말라 떨어진 가지에 잎을 피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점이 있는데 어떻게 제 때에 비가 내려 좋은 밭이 되기를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力士)의 오만함을 항복받고 영아(嬰兒)를 액운(厄運)에서 건져주며, 

광야(曠野)의 신(神)을 교화하고 궁성(宮城)의 코끼리를 조복받은 일 등에 이르러서는 관련된 일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로써 꿰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천제(闡提)에게는 진실로 등급(等級)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말하였습니다.

“개미를 해치면 죄가 되지만 천제를 살해한 것은 아무 허물도 없다.”

오히려 다시 인도하여 출가시켜 좌우(左右)에 두었다 하더라도 비유하면 야위고 늙은 말은 먼저 타지 않고 가시밭은 차라리 잊고 있다가 뒤에 심는 것이 나은 것과 같나니, 

현재의 무익(無益)함을 알고 장래에 씨가 되기를 바라며, 

하열한 세계를 다 마치고서 인천(人天)을 향하고, 

넓은 마음을 내어 복과 지혜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비의 큰 선교방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천지(天地)로도 짝할 수 없고 음양(陰陽)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향(迴向)하는 사람은 마치 아들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나니 이보다 더 큰 행(行)은 없을 것이며, 

비방하는 사람은 마치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는 것과 같나니 그 악함은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알아 그 자취를 모조리 멸하지 못한 것에는 시작이 되는 인(因)의 마음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처음엔 비록 그것이 미미하다 해도 마침내 그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 

추기(樞機)의 시작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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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전 가운데 의문이 가는 점을 드러내어 말한 것이다.

2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응서(應徐)로 되어 있다.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ㆍ원ㆍ명ㆍ궁 본에 모두 서(徐)자가 행(行)자로 되어 있다”고 하였고, 

의미로 보아 그것이 더 당위성이 있으므로 역자도 이를 따랐다. 

응행이란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앞서 행동한다는 뜻이요, 

둘째는 보응(報應)은 행한 일에 따라서 온다는 뜻이며, 

셋째는 꼭 행한다는 뜻이다.

3 『논어』의 「위정(爲政)」편에 말하기를 “시 3백 편을 한 마디 말로 하자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라고 하였다.

4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성문승에 대하여 4제(諦)의 법문을 말씀하실 때의 시전(示轉)ㆍ권전(勸轉)ㆍ증전(證轉)을 말함. 

상근은 시전으로, 

중근은 권전으로, 

하근은 증전으로써 각각 깨닫는다고 하였다.

5 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종자기(種子期)가 듣고 그 곡조를 알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변천하여 자기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을 말한다.

6 신통력으로 부처님을 불러온다는 뜻을 말한다.

7 『주역』, 

「곤괘(坤卦)」에 “주머니를 여미듯이 하면 허물이 없다[括囊無咎]”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괄낭이란 주머니를 닫는다는 뜻이다.

8 유마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부처님이 제자들을 보내 병문하려 했으나 모두 유마의 높은 법력(法力) 때문에 병문하기를 사양했다.

9 일생보처(一生補處). 

즉 인간세계에 탄생하여 부처님을 보좌하며 교화를 돕다가 그 생이 끝나면 바로 성불할 수 있는 자리를 말한다.

10 암라녀(菴羅女)가 부처님께 바친 동산인데 부처님은 여기에 계시면서 유마경을 설하셨다.

11 조[粟]의 색이 금빛을 닮았다는 뜻이다. 

즉 여래의 색신이 금빛이므로 유마힐을 금속여래라고도 한다.

12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에 맞는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13 『법화경』 「화성비유품」에 나오는 글이다. 

일체 중생이 성불하는 곳을 보배가 있는 장소라 하였는데 이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피로하고 지쳐 포기하고 되돌아갈까 두려워하여 도중에 한 성곽을 변화로 세워 거기서 쉬게 한 다음 다시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14 정토와 예토를 구별한다는 뜻이다.

15 미혹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은 보는 것이 다르다는 내용이다.

16 『논어』, 

「팔일(八佾)」편에 공자가 “아, 

슬프구나. 

일찍이 태산의 신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 못하단 말인가?[子曰 鳴呼 曾謂泰山 不如林放乎]하고 말한 적이 있다”라고 하였다.

17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크구나, 

건원(乾元)이여, 

온갖 물질이 이를 의지하여 시작된다[大哉乾元 萬物資始]”라고 하였으니, 

자시(資始)란 만물을 일컫는 말이다.

18 노자 『도덕경(道德經)』 스물일곱 번째 조항의 글에 나온다.

19 노자 『도덕경』 예순 번째 조항의 글에 나온다.

20 인도 전설 속에 나오는 나무로 나쁜 냄새가 나고 그 열매를 먹으면 미친다고 한다.

21 초(楚)나라 목왕(穆王)을 말하며, 

그는 자기의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22 실제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23 수제가(樹提伽)의 약칭. 

거부 장자의 아들이 죽어 화장을 하는데 부처님이 장자에게 아이를 구해오라 하였다. 

이에 장자가 불 속에 들어가서 아이를 구해오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24 고려대장경 원본엔 재청(載請)으로 되어 있다.

25 공자의 제자 공백료(公伯繚). 

자는 자주(子周).

26 순(舜)의 아들로 불초하여 제위를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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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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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박(相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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