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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격자이론과 대상의 정체 본문
sfxx--격자이론과-대상의-정체.txt.htx
sfxx--격자이론과-대상의-정체.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77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불어를 모르는 이가
불어 노래를 하나 놓고 하루 종일 들어본다고 하자.
그것이 무슨 내용을 말하는 노래라고 시감상을 하게 되는가 .
그 내용은 대부분 그가 이미 갖고 있는
전도몽상의 내용과 대단히 관련이 깊은 것이다 .
먹물을 그저 백지에 흩뿌려 놓고
이것이 무엇처럼 보이는가하는
심리실험의 경우도 사정이 같다.
대부분 문어나 오징어 또는 거미로 보는데
어떤 이가 거기에서 엉뚱한 내용이 보인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사정도 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미 깊이 그런 전도몽상 편집증을
갖고 모든 것을 그렇게 대하는 가운데
그런 내용을 스스로 찾아내 보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환자가 대부분이 상황에서는
그 환자만 탓할 것은 아니고
그 사정을 배려를 해줄 필요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격자이론이란
우리가 대하는 감각현실을
관념분별영역에서 다양하게
묶고 나누면서 관념분별을 행한다는
전도몽상분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다.
[img2-90]
08pfl--image/grid_00.jpg
마음안에 이런 모눈종이나 격자가 있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이 격자를 놓고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고 하면서
그 각각에 이것은 a 저것은 b 이렇게
망상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이 격자는 더 미세하게 나눌 수도 있고
그래서 이번에 주문한 현미경을 사용해
대각선 1cm 정도 되는 부분을 모니터 크기만큼 확대시키면서
그런 분별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더 심하면 나노 단위로 각 부분을 나누어 살피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왼쪽 끝 한 부분과 아래 끝 한 부분을 서로 묶어
관념을 갖는 것도 가능하고 그 방식이 무량한 것이다.
[img2-91]
08pfl--image/grid_01.jpg
그런데 여하튼 어떤 이가
그런 과정에서 위와 같은 부분은
A 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전도몽상 상태에서 이렇게 생각할 때
그 감각현실 부분에는 정작 그런 A 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는데에는 위와 같은 격자이론이 필요없다.
그 감각현실을 놓고
그것이 그 대로 그 A 자체인가 이렇게 한 번 물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덧붙이는 것은
그런 관념 A 가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얻고 있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은
서로 이런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처럼
이런 감각현실을 얻게 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와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내용도
또 이런 관계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
감각현실을 놓고
그 실재가 그대로 그 감각현실 그 자체인가 .
그런데 그런 실재를 떠나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것인가.
이런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는
자신이 눈을 떠서 세계의 모습을 대하는 가운데
꽃이라고 보는 부분을 대하고 그것을 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자신이 눈으로 본 그 모습에
그런 꽃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그리고 심지어
유리를 어떤 이가 공으로 차서 깨뜨리고
그 유리수리비가 천만원이 나왔는데
왜 이런 심각한 사건에서
그 현실에
그런 유리도 얻을 수 없고
그것을 깨뜨린 이나 깨뜨려짐
행위자 행위를 다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자꾸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망상분별에 바탕한 견해를 고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제시하는 것은
그 사정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바탕으로
왜 또 수행은 또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천만원 수리비를 청구하면
수행자는
수리비는 수리비대로 잘 지불하고
그리고 참회나 사과도 같이 하고
그리고 보시나 정계 안인을 다 함께
잘 하라고 하는가도
사실은 그 사정이 위와 같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 취지를
그렇게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img2-91]
08pfl--image/grid_02.jpg
어떤 이가 생각하는 내용이 무엇이던 그것을 A 라고 하고
그가 저런 부분을 놓고 A 라고 생각할 때
이제 그것이 A 라고 한다면
A 가 아닌 부분을 검게 칠해보라고 하면
저처럼 단순하게 파악하고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단 저렇게 그려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고 해야 하는가하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img2-93]
08pfl--image/grid_03.jpg
이제 빨간 색으로 표시한 각 부분을 놓고
앞의 질문을 다시 해보자.
그 각부분을 저런 형식으로 취해
그 부분이 A 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물어서
A 가 아니라고 답하는 부분을 하나씩 검은 색으로
칠하면
다음 그림처럼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img2-94]
08pfl--image/grid_04.jpg
이것이 그 그림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의 관계에서도 그렇다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감각현실과 관념의 상호관계도 이렇지만,
그 본바탕이 되는 실재와 감각현실, 관념간의 관계도
위와 사정이 같다고 다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덧붙이는 것은 여기서
이 논의는
저 그림과 같은 전체 감각현실이
'A 가 아닌 것'이다라는 결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논의가 아니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는 상대가 자꾸 저런 부분을 A 라고 하고
다른 것은 A 가 아니라는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그것을 고집하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저런 상태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렇지만,
처음 A 라고 한 부분은
그래도 또 A 라고 보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에 그치지 않고
이제 다시 앞 그림에서
'A 아닌 것'에 해당하는 어떤 부분을 놓고
반대로 위 내용을 적용하면
이제 거꾸로 저 전체부분이
또 다 A 라고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감각현실과 관념 사이에서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행할 수 있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비는
아름다운 여인의 무덤가에서
술을 따르면서 시를 짓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 것이다.
경전에서
부처님이 언어로 무언가를 설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사정도
사실은 그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하면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는
실재와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영역의 내용을 놓고
전도몽상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이 모두에 다 집착을 갖고 그에 바탕해서
고통을 받는 상태가 되기에
바로 그 전도몽상 분별을 행하는 이의 상태에 들어가
사정이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고
그런 전도몽상부분을 제거시키기 위해서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언어 분별을 행할 수 없는 내용도
그처럼 상대가 행하는 언어 분별을 바탕으로 놓고
상대가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수많은 설법을 하시지만,
그러나 그 역시
그런 취지에서 행한 희론일 뿐이고
사실은 하나의 내용도 설하지 않았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취지는 실재와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분별이
하나같이 그 망상분별자가 문제삼는
그런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는 내용들인데도
그가 이 각 내용을 모두 함께 포개어 놓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하기에
이것을 제거시켜
본래 있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허공에 새가 날아가면
허공에 새 발자욱이 찍히는가라는
비유를 드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의 내용과 사정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를 또
제도하기 위해서
허공에 새발자욱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하나 보이게
해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수행자가 닦는 무량행문의
내용이고
그 결과가 불국토 장엄이기도 한 것이다.
집착을 갖는 상태에서는
실재가 공하다고 제시하면
그 실재의 공함에 대해서도
다시 집착을 일으켜 머물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고
다양한 수행방안을 제시하면
또 그에 집착을 갖고 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
https://3.bp.blogspot.com/-HAnP6dZf3kY/WOIrNjHFxKI/AAAAAAAActU/iyAFpYMbSS8abJIMRqMWAXJawBwKSo5RACLcB/s1600/2017_0403_092134_canon_ar43.jpg
유리가 깨진 사진을 보여주는데
이 사진을 놓고
유리도 얻을 수 없고
깨짐도 없고
깨뜨린 이나 그 행위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데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이 많다.
이런 입장은 불교 경전의 일반적인 입장인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고
엉뚱한 내용이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우선 이와 관련하여
대방광불화엄경의 보살문명품의
내용을 같이 소개해보기로 한다.
...
문수사리보살이 보수(寶首)보살에게
https://3.bp.blogspot.com/-HAnP6dZf3kY/WOIrNjHFxKI/AAAAAAAActU/iyAFpYMbSS8abJIMRqMWAXJawBwKSo5RACLcB/s1600/2017_0403_092134_canon_ar43.jpg
유리 보석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자.
[...]
위에서 이 안에 유리나 깨짐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 사진을 놓고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드디어 생사를 벗어나고
현실에서도 3계의 각 세계에 잘 진입해 들어가서
무량한 수행에 잘 임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불교계에 다음과 같은 이상한 퀴즈가 있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흔들리니
바람이 부는 것인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서 어떤 이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흔들린다고 답을 해서
과학선생님에게
상당히 혼이 났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과연 마음이 흔들린다고 볼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본래 마음은 흔들림이나 생멸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람이 분다거나 깃발이 흔들린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마음이 흔들린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이런 내용들이 바로 전도몽상 증상의
정도를 나타내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일반적인 전도몽상 증상에서는
분명히 바람이 불어 깃발이 흔들린다고
보고 말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아니고
이제 마음이 흔들린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는데도
현실에서 그렇게 보는 것은
그 마음이 전도몽상 증상에 의해
흔들린 것이다라고 보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기는 한데
그렇지만 이 어느 경우에도
마음에 흔들림이 있다고 할 것은 또 아니다.
그러니
마음엔 본래 생멸이 없지만,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연들에 의해
그런 내용을 마음에서 얻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17 조 승가난제조사가
당시 동자였던 18 조 가사야다에게 전법을 하는 과정에서
나눈 바람과 방울에 관련된 대화로 전해지고 있다.
이 퀴즈가 어려운가.
그런데 바람이 분다거나 깃발이 흔들린다고
그런 생각을 일으키고 그런 표현을 할 때,
그는 그에 상응한 어떤 내용을
현실에서 감각하는 가운데
그런 사정을 나타내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이런 감각현실과 그에 대한 분별을 놓고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가를 놓고 1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는 그에 상응한 어떤 감각현실도 이미 마음에 얻었고
또 그런 생각이나 분별도 이미 일어났다.
그러나
마음에 손님 티끌(객진)에 해당한 내용이
그처럼 들어와 머문 것뿐인데
그렇다고 마음까지 함께 생멸하고
흔들렸다고 볼 것인가.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이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런 생각을 하고 말할 때
이제 그 본바탕의 실재는 또 어떻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런 여러 퀴즈가
바로 현실을 놓고
그 참된 본 정체와
어떤 판단의 옳고 그름을 문제삼을 때
처음 문제삼게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어떤 엉뚱한 이가
자신이 당시 깃발을 밑에서 잡아 흔들었기에
그것이 흔들렸다고 자백하거나
자신은 그런 깃발을 흔들지 않았다고
부인한다면
이는 또 얼마나 엉뚱한 입장인가.
그런데 현실에서 이 모든 논의가
다 함께 논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여기서 논의하는 깃발이고 바람이고 하는 것 자체나
그런 움직임 생멸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실재에서 얻을 수 없고
또한 감각현실에서도 그런 분별에 해당한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런 분별내용에서는 또 그 분별로 가리키는 감각현실이 없는데
이제 이를 놓고
이것을 서로 관련시켜가며 논의하는 것은
얼마나 엉뚱한 것인가.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분별을 할 때
그런 생각을 일으킨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놓고서
그것을 가리키면서 그렇게
분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보리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런 각 판단과정에 보리가 없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현실의 본 정체에 대해
실상을 꿰뚫는 올바른 깨달음이 바탕이 되지 않고
전도망상 분별에 바탕해 판단을 행하고
그에 집착해 머물게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그는 바로 이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바람이 불면
단순히 방울이나 깃발만 흔들린다고 보지 않고
아예 그 자신까지 그 방울에 함께 묶어
같이 흔들려 요동치게 되고
나중에는 나라가의 언덕에서
굴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설령 생사과정을 통해 간다는 나락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현실 안에서
이런 집착에 바탕해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보고
그렇게 집착을 일으키는 무언가 좋음을 놓고
번뇌의 사역을 당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어딘가를 나가고
또 어떤 일을 행하고
또 어딘가를 다시 바삐 가고
이런 활동을 분주히 한다고 하자.
그래서 옆에서 이를 보는 어떤 이가
왜 그가 그렇게 매순간 행하는가가 궁금하다고 하자.
그래서 그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그 경로를 다 지도에 그려 놓고
그 사정을 살핀다면
그 변화무쌍함을 보고 상당히 어지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남대문 시장에 오가는 수많은 사람을 다 놓고
그처럼 하나하나 그가 그 현장에 오게 된
과거 경로를 다 그처럼 표시한다고 하자.
이제 그렇게 살피면
그 어지러움은 한층 더할 것이다.
이제 이런 현실을 놓고
여기에
바람이 분 것인가
깃발이 흔들린 것인가.
마음에 흔들린 것인가
이런 앞의 퀴즈를 생각하면
무엇이 이렇게
그 각 생명이 이리저리 오가는 그런 경로를
지도에 그려 놓게 한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그 답을 쉽게 아는 방안이 있다.
어떤 이가 매 순간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일 때
그를 그렇게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각 생명의 마음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각 생명이 전도몽상 증상을 일으켜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고
스스로 그 자신을 접착시켜 놓은 내용들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어떤 장삿꾼이 수없이
움직여 다니는 곳마다
무언가의 이익이나 즐거움 그런 것들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알고보면
그처럼 한 사람을 평생
이리저리 묶어 이끌고 다니는
수갑이나 족쇄나 밧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에 들어 있는
그런 전도몽상과 그에 바탕한 번뇌의 집착이라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것이
그 각 생명을 어떻게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세계로 이끌고 들어가는가는
그 하나하나의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곧바로 쉽게 알 수 있다.
그 전도몽상의 바탕에서
어떤 좋음이나 나쁨을 놓고
그가 집착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처음에 그 좋음을 구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것을 얻기 위해 갈구하는 아귀의 상태로 임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 좋음을 얻으면 어떻게 되는가.
잠시 있으면 그 좋음이 무덤덤해지고
그 좋음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갈증을 일으키면서 구하던
그 좋음이 충족되면
그는 또 다른 좋음을 놓고 그런 방식으로 임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좋음이 사라지면 다시
고통을 받게 된다.
단순히 아귀가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고통의 구조는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을 자세히 보면
이처럼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우선 그런 한 아귀는
처음 그런 좋음을 구할 때
그 좋음에 집착을 갖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그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세를 취하기 쉽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더라도
자신이 구하는 좋음을 얻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귀가 수없이 많은 가운데
서로 그런 것을 원하게 되면
이제 그 가운데 어떤 하나가
그것을 차지하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에게 곧 나쁨을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현실에서 개들이 모여 있을 때
그 안에 뼈다귀를 하나 던져주면
이 개들이 그 후 어떻게 서로를 대하는가를
바라보면 그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뼈다귀 하나를 놓고
개들이 서로 얽혀 서로 차지하기 다투는 그런 모습을 놓고
아귀다툼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그 각각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많다고 해도
그 마음의 구조가 아귀의 구조로 현실에 임하는 상황에선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현실의 사건 보도에서
수많은 재벌들이 형제나 부부 부자 친인척간에
서로 싸우고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그것이 없으면 당장 굶어 죽을 상황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귀의 상태로 현실에 임하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상당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더 복잡하게 전개되게 되는데
앞과 같은 상태에서
어떤 이가 좋음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치거나
또는 여럿이 다 함께 원하는 좋음을 놓고
혼자 그것을 차지하게 되면
나머지는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
이 때 그 고통을 받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놓고
다시 보복을 하고
그 상대를 해치려는 입장으로 임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그 반대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이 그 바탕에서 서로 얽히혀
나아가다 보면
서로 그런 고통을
계속 주고 받는 형태로 서로를 대하고
그 고통을 증폭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무량한 기간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바람이 부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
마음이 흔들린 것인가.
이런 문제가 나타날 때
이 퀴즈의 문제를 잘 풀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그 상태에서
이후 자신이 어떤 집착을 일으킨 것을 놓고
위 구조 안에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위 질문을 놓고
자신이 과연 그런 상태인가 아닌가를
스스로 헤아려보기 위해
다음과 같이 위 문제를
바꾸어 제시해보자.
우선
자신이 좋다고 보는 어떤 것이 있는데
자신이 그것을 끝내 못 얻어도 마음이 평안한가.
그러다가 간신히 그 좋음을 얻어냈는데
이후 그것을 침해당해도
아무렇지 않고 평안해질 수 있는가.
또 그것이 장차 침해당하고
사라질 것 같은데 역시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평안할 수 있는가.
이런 여러 질문을 제시하면
스스로 어떻게 답하게 되는가.
그 각 경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접착을 일으킨 것이
움직이면 그 역시 같이 그에 따라
움직일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떤 이가 평생
이리저리 오간 그 경로가
왜 그런 형태로 복잡하게 그려지게 되는가 하는데 대한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이가
예외가 될 것인가.
자신은 예외가 될 것 같다고 하면
이제 위 내용에서 막연히 좋음이라고 표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바꾸어서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보자.
자신이 오늘 죽어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은가.
자신의 신체의 일부 손과 발이나 눈이나 귀가 뽑혀도
아무렇지 않은가.
자신의 재산이 모두 다 빼앗기고 사라져도 좋은가.
자신의 지위가 모두 없어져도 좋은가.
자신의 아들이나 딸이나 부모나 형제가 앞과 같은 상태가 되어도 좋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렇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은 무방하다고 답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생사가 달리면
그렇게 평안히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생노병사라는 삶의 병목 지점에서
자신의 생명을 놓고는
대부분 공통적으로 다 같이 접착된 상태로
그 문제를 고민하는 것을 보게 되고
또 삶에서 일으켜 갖는 나머지 모든 집착은
바로 이 부분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임도
보게 된다.
그래서 위 질문에서
각각 그렇게 문제가 되는
가장 핵심이 되는
자신과 자신이 집착을 갖는 그것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위 퀴즈를 놓고
다시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각 문제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임하는 이는
그로 인해 수행자 라이센스를 박탈당한다는 말씀이
금강경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은 돈이 없어도 괜찮다.
아무런 직위가 없어도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앞 문제에서는 대부분 걸리기 쉬운데
그렇게 그 부분에서 걸리게 되면
결국 그 부분부터는 다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고속도로에서 차가 달릴 때
마세라티 고급 자동차로 전속력으로
다른 차를 앞질러 나갔는데
나중에 보니 병목지점에서는
이 차나 저 차나
다 마찬가지로 붙잡여 정체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런 상황이 삶에서 연출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에 임하면서
보리를 얻어 생사를 벗어난다는 것은
앞의 각 경우에 그와는 정반대로 다 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각 개개의 입장에서 힘들다고 보게 되는 내용인데
어떻게 수행자가 그 각 경우마다
그와 반대로 임하게 되고
그런 문제를 모두 벗어나게 된다고 하는가하면
그것이 바로 위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좋음이나 나쁨에 집착해서
그에 접착되고
그런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또 그에 바탕해 다른 생명을 사역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풀려나고
매 경우 온 생명이 제한없이 좋고 좋음을 얻는 상태를
향해 그 노력을 그렇게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수행자가
수행자 라이센스를 발급받고
생사를 초월한 상태가 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고
서원을 자신의 마음에 장착하면
곧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상태부터 이제
수행자가
삼천대천세계와 무량겁을 놓고
현실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자가
각 법문을 배우고
안인 수행의 고지를 넘고
그 상태에서 더 높은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
수행을 전문으로 익히는
명문 학교에
진여상과 능제일체고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 능제 일체고나 진여상에 입학해서
수행자가 각종 수행분야를 닦고
훈련을 행하는데
그로 인해서 무량한 복덕을 갖추게 되지만,
이제 그런 수행의 최종 고비인
안인 수행을 무사히 마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오르면
그때부터 그런 복덕자량을 바탕으로
보리자량을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기 위한 본격적인
무량행문의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단계로
진여상과 능제일체고의 수행을
원만히 마쳐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mun 님이 이들 명문 학교에서
안인 수행 교관으로 임한다는 것인데
되도록 수행과정에서는 최후에 만나볼 교관으로 알고
일단은 피해야 한다고 보지만,
마음의 준비는 평소 잘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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