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왜 1,2,3,4,5,6,7,8 이런 식으로 나누어 시설하는 사정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 유식무경에 대한 내용을 살펴나가야 한다. 즉, 일체가 다 마음내용이고 그 안에 외부 대상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음을 살펴야 한다.
현실 내용이 다 자신의 마음에 머무는 내용이다. 그런데 현실 내용이 왜 하필이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살펴야 한다.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일체의 내용이 마음에 머무는 내용임은 반대로 말하면 그 이전까지 현실내용에 대한 이해가 잘못임을 나타낸다.
즉 일반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정신과는 떨어져 있고 정신과는 다른 속성을 갖는 외부 물질이라고 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 내용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단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 세계 인류가 다 그런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이해가 잘못이라고 할 때 다시 다음 의문이 생긴다. 현실에서 컵에 손을 대면 촉감을 그 순간 얻게 된다. 이 경우 자신이 보는 그 컵이 그런 촉감을 얻게 한 대상으로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갖다 댄 손 부분이 촉감을 얻는 주관이나 감관에 해당한다고 여기게 된다. 이들이 모두 마음안 내용이라면 왜 이렇게 되는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인데 그런 형태로 얻어지게 되는 사정을 추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공한 실상을 바탕으로 공 중 3 회전에 해당하는 전도망상분별을 중첩적으로 일으켜서 현실에서 그렇게 그런 내용을 대하게 되었다고 대략적으로 설명한다.
즉, 처음 이번 생에 제 7 식이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그것을 붙잡고 임한다. 그런 가운데 이후 현실에서 표면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1,2,3,4,5,6 식을 이후 분화 생성시킨다. 배경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표면으로 나타는 정신 내용들 간의 관계가 그렇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를 전문적 용어로는 3 능변이라고 표현한다. 3 능변이란 표현이 어렵다. 그래서 이를 공중 3 회전에 걸친 전도망상분별이 중첩되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 정신현상과 관련된 용어풀이
한자어 표현에서 능소 이런 표현이 사용되면 주로 능동 수동의 개념과 관련된다.
자신이 공을 던진다고 하자. 이 현상은 하나다. 그러나 공을 던지는 입장을 기준으로 하면 그 공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던져지는 공의 입장을 기준으로 하면 던져지는 것이다. 그래서 능 소 이런 표현을 붙여서 표현한다. 그러나 또 그런 표현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한자어에 익숙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이는 조금 낯선 표현이 된다.
여하튼 전문적으로 3 능변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제 8 식에서는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이 있고 이하는 과능변만 있다고도 제시한다. 또 전변이나 능변 소변 이런 표현도 사용한다. 그 모습이나 내용 성격이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이숙이란 표현도 사용한다. 종자 훈습 현행 이런 표현도 사용한다.
알고보면 별로 어려운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용어가 평소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표현이다. 그래서 공연히 그 내용도 어렵다고 여기면서 어렵게 대하기 쉽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무언가를 행할 때 어떤 내용은 보존이 안 된다. 그런데 어떤 내용은 또 이와 달리 정신에 보존이 된다. 그래서 이는 마치 밭에 농부가 뿌리는 씨와 같기에 이를 종자라고 표현한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행하는 그런 활동이 근본 정신에 일정한 내용을 자꾸 씨의 형태로 보존시키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런 활동이 그렇게 행하게 되는 그 세력을 습기(習氣)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런 내용이 근본정신에 보관되게 된다. 이를 마치 향이 옷에 배는 것에 비유하여 훈습(熏習)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에 그런 내용이 보존되면 이후 이런 내용들이 이후 그 조건이 맞추어져 달리 나타나게 된다. 마치 농부가 밭에 뿌려 놓은 씨(종자)가 일정한 때가 되면 그 모습을 달리하여 싹이나 열매 형태로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를 현행(現行)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 표현이 모두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이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 뿐 별다른 내용은 아니다.
즉, 한 주체가 현실에서 활동하며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이는 알고보면 그 주체의 마음에 그런 내용들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 현행現行 ]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서 한 주체가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그 내용은 근본정신에 일정하게 보관이 된다. [ 현행훈 종자 現行薰 種子 ] 그래서 그 근본정신은 그런 내용을 마치 창고나 밭처럼 그런 씨앗을 보관하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로부터 이후 성격이 다른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마치 씨에서 씨와 다른 모습인 열매가 타나나는 것과 같다.
또 그런 내용을 놓고 현실에서 각 주체가 집착을 일으켜 그것을 대한다. [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
집장이라는 표현은 다음 의미다. 한 생에서 처음 생을 시작할 때 제 7 식이 처음 분화생성된다. 그런 가운데 이 제 7 식이 근본정신의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 일정한 내용을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집착을 갖고 대한다. 그리고 이후 그 바탕에서 다른 정신과 기관들을 분화생성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생을 시작해나가게 된다. 이런 측면을 집장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근본정신에 그런 내용이 보관되는 측면을 그 정신을 주체로 놓고 능동적으로 파악하면 능장(能藏)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정하게 보관되는 내용을 기준으로 수동적으로 파악하면 소장(所藏)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관된 내용들은
이후 일정한 조건이 성숙된다. 그러면 처음에 보관된 씨앗과는 다른 형태로 다시 그 모습을 달리해 나타나게 된다. [이숙異熟] [ 종자생 현행 種子生 現行 ]
그리고 마음에서 그런 과정을 통해 그런 내용이 그렇게 변화해 나타나는 과정을 전변(轉變)이라고 한다.
이를 살필 때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정신을 주체로 놓고 능동적으로 보게 되면 이를 능변(能變)이라고 한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나타난 내용을 기준으로 놓고 이를 수동적으로 보면 소변(所變)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알고보면 이들은 결국 정신에서 나타나는 이런 여러 내용과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내용으로서 별 내용이 아니다. 다만 이를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로 표현하여서 이를 어렵게 대하게 쉽다.
현행 훈습 종자 능장 소장 이숙 이런 식으로 표현한 내용은 결국 쉽게 말하면 다음처럼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이가 오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면 그것이 사라진 이후에도 나중에 그 내용 일부가 어느 순간 무언가를 계기로 일정한 조건이 되면 다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검토해보면 원래의 그 내용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또 조금씩 그 상황마다 다른 형태다. 그래서 그런 현실 내용을 위처럼 표현한다고 쉽게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살피는 근본정신은 지금 이 현실단면에서 대하게 되는 1,2,3,4,5,6,7 과 같은 정신의 바탕이 되는 정신이다. 그래서 근본정신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이 현실 단면과 1,2,3,4,5,6,7 과 같은 정신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번 생에 처음 생을 출발할 때도 이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관계를 생전 생후로 죽 이어나가면 제 8 식은 무시무종의 관계로 그렇게 계속 유지된다.
수학에서 자연수의 무한을 증명하는 것은 어떤 주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수를 생각해도 다시 그 수보다 1 이 더 큰 수를 늘 다시 제시할 수 있기에 자연수는 무한하다고 제시한다.
제 8식도 마찬가지다.
현실단면에서 파악되는 1,2,3,4,5,6,7,8 의 정신의 상호관계도 생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나 그 이후의 단계가 다 지금 이 단면에서 파악되는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무한하게 그 상호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그렇다라고 이해하면 쉽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살피려면 먼저 현실 한 단면에서 이들 내용을 먼저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그 구체적 내용을 또 상세하게 살펴나갈 필요가 있다.
마음현상을 살피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표현을 살폈다. 그러나 기초적으로 그런 표현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살피고자 하는 것은 다음이다.
이처럼 한 주체가 현실에서 대하는 그 일체 내용이 마음내용이라고 제시하면서 이를 1 심 이런 표현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그렇다면 세계에는 딱 1 주체의 하나의 마음 밖에 없고 이외에는 실재던 현실 내용이던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또는 이와 달리 다음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즉, 마음은 각 주체별로 무량하게 있다. 그러나 다만 각 주체가 각기 얻는 현실 내용 그 일체는 다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 주체가 처음 그렇게 있다고 생각한 그런 외부대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유식무경이라고 표현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양 입장의 중간적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즉, 각 주체별로 무량하게 마음이 있다. 그러나 또 그 마음 외에는 전혀 없다고 하는 내용으로 이 내용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다양한 입장을 놓고 천천히 살펴나가야 한다.
이것은 마음은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만을 파악할 수 있고 어차피 마음 밖에 어떤 실재를 파악할 도리는 없기에 그런 실재가 과연 무언가가 따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그 실재를 직접 얻지 못하기에 위와 같이 일단 이론상 다양한 입장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그런 입장의 차이가 그렇게 나타난다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결국 현실에서 얻게 되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마음안 내용이라고 할 때 그 내용은 도대체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마음안에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놓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냥 마음이 혼자 자체적으로 분열해서 그러한 내용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을 대상으로 붙잡아서 그런 내용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인가.
이런 여러 입장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현실에서 왼 손을 놓고 오른 손을 세게 마주치니 그 때 소리가 난다. 그런데 손을 보니 그 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소리는 그냥 마음에서 그 마음이 혼자 자체적으로 변화해 얻은 것인가.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리는 마음에서 얻지만, 그 마음만으로 그런 내용을 얻었다고 보지 읺을 수도 있다.
일단 자신이 손이라고 보는 그 내용은 소리와는 달리 마음내용으로서 시각정보다. 그래서 마음안 시각정보가 청각정보인 소리를 얻게 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 또한 그 손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소리를 그 부분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런 손 모습을 보게 한 본 바탕 실재에 그 무언가가 관여해서 소리를 얻게 된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주체도 실재에서 내용을 직접 얻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 논의는 상당히 살피기 곤란하게 된다. 실재에서 어떤 내용이든 얻어야
이후 그것을 붙잡고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상황에서 넣고 빼고 해가며 차이를 살필 수 있다. 그래야 그런 실재의 어떤 A 가 소리를 얻는 과정에 관여하거나 하지 않음을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관계가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실재의 영역에서는 어떤 주체가 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논의가 공회전하는 상태가 된다.
이에 대해 각 입장이 다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입장이 과연 적절한가를 놓고 이론상 심하게 대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수행 면에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
처음 현실에서 대하는 각 내용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살핀 것은 이 문제 자체가 중요해서 살핀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 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를 살핀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현상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다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선 현실내용은 마음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마음 밖에서 그런 형태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 관계는 마치 꿈과 현실내용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그런 현실내용에 대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듯 그런 내용이 마음 밖 외부 세계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또 그런 내용이 외부 대상이고 외부 물질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 내용이 객관적 실재라고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에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게 마련인 반응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수행방안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게 되는 생사고통을 제거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왜 그런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되는가와 관련해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당장 당면한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마음현상은 불가사의하다.
어떤 한 주체는 그가 얻는 그 일체를 외부 세상이라고 잘못 여기며 대한다. 그런데 그 일체는 그 마음에 머무는 마음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그처럼 마음에 나타나는가를 생각하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런 모습을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얻게되는가가 상당히 궁금하다. 그래서 이에 관해 조금 더 상세한 논의를 이어가려 한다 . 그런데 이 논의를 통해 얻을 실익과 효용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먼저 살피면 공연히 쓸데없는 논의에 함몰되어 빠져 나오지 못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현실 내용 가운데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의 논의도 사정이 비슷하다. 무아 무자성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아 무자성을 밝히는 논의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지금 이런 논의를 하는 주체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런 주체가 그런 영원불변한 것의 존부를 따지고 문제삼을 때 그 내용은 그런 주체와는 관련이 없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자신처럼 변화하는 주체가 영원불변한 존재가 된다고 하자. 그것은 그 자체로서 그것이 영원불변한 것이 아님을 같이 제시하는 것이 된다. 무엇인가가 변화해서 되는 어떤 a 는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 설령 있다고 해도 현실에서 자신과 관련은 없다. 따라서 그것을 논의를 할 실익도 없다.
다만 현실에서 대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진짜라고 할 어떤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무아 무자성임을 잘 파악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현실의 자신과는 관련이 없음을 파악하면 충분하다.
무아 무자성임을 제시하게 되는 사정은 나중에 자세히 살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으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측면이다. 수행과 관련해서는 앞 내용 정도로 충분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하면 충분하다.
한 주체가 대하는 온갖 세상의 모습이 다 자신의 마음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하필이면 그처럼 나타나는 사정을 살피는 일은 지적 호기심 충족에 치우치기 쉽다.
수행의 면에서는 이들이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면 충분하다. 마음현상을 살피고 논의한 것은 그런 취지다.
마음현상을 살피는 것은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는 문제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겪는 현실의 정체를 살피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데 이들이 마음 내용임을 이해함이 요구된 것이다.
그래서 또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살피게 된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맡고 맛도 보고 촉감도 얻는다. 그런 현실 안에 한 주체가 고통으로 대하는 온갖 내용을 대한다. 그리고 이들이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이 생사고통의 해결이 문제된다. 그래서 이런 현실 내용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그리고 현실 내용이 과연 실다운 내용인가를 살피기 위해서
현실내용의 본 바탕인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게 된다.
실재는 한 주체가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다. 그리고 현실은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그 관계가 같다.
한편 현실 내용은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도 문제삼게 된다. 꿈은 꿈꾸는 그 상황 그런 조건에서만 임시적으로 얻는다. 그런데 꿈과 다른 어떤 참된 진짜가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있다면 현실과 같은 내용은 오히려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무아 무자성이라고 제시한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방안으로 생사고통을 벗어나야함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온갖 문제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서 그런 문제가 제기된 것이 아니다. 즉, 해결해야 할 생사고통은 실재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각 주체는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얻는다. 따라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그리고 수행도 실재 영역에서 행하는 노력이 아니다. 실재 영역에서는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수행은 실재영역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하는 노력도 아니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상하게 그런 내용들을 실답게 있다고 여기고 대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생사현실 영역에서 생사고통을 제거하려면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실재나 마음현상은 그 자체보다는 현실의 생사고통 해결과 관련이 되기에 살피게 된다. 따라서 그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을 놓고 자신의 외부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정신과는 떨어져 있고 정신과는 다른 속성을 갖는 외부 물질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 내용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한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그렇게 업을 행한다. 그리고 수행을 행하지 못한다. 또 그런 사정으로 업의 장애에 묶인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 나간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서 생사를 벗어나려면 일단 그 주체가 그렇게 대해 얻는 현실 내용 일체가 그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앞과 같이 그가 이해하는 내용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내용은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침대에서 누어 황금이나 바다 꿈을 꾼다고 해보자. 그 꿈은 꿈을 꾸는 순간은 대단히 생생하고 진짜처럼 실답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꿈은 꿈꾸는 영역 밖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꿈은 실답지 않다.
현실 내용도 그 사정이 그와 같다. 그 내용을 현실에서는 생생하게 얻어 진짜처럼 여긴다. 그러나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내용은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앞에서 본 것처럼 한편으로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상호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하나같이 다른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 내용이 외부 대상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실내용이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함도 마찬가지다.
현실 내용이 그 주체의 마음내용이다. => 그것은 마음에 얻어진 내용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외부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 밖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 따라서 그런 내용을 실답게 여기며 취하던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집착에 바탕해 행하던 반응[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수행으로 전환해 임해야 한다. => 그러면 그 현실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내용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핵심이다. 그리고 수행과 관련된 핵심이다. 그래서 그런 이해를 통해서 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잘 성츃애ㅑ 한다.
사정이 그런데도 현실에서 자꾸 망집을 갖는 사정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수행이 우선되어야 한다. 독화살을 맞은 이는 그것을 뽑고 치료를 하는 것이 급하다. 독화살이 어떤 과정으로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가를 살피는 것이 급한 것은 아니다.
처음 자신이 현실에서 실답다고 본 내용이 자신의 마음내용이고 또 그런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그런데 현실에서 엉뚱하게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게 된다.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한편으로 잘 관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상태가 만들어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그런 생사고통을 받지 않도록 현실 안에서 수행방안을 통해 잘 임해야 한다. 이런 부분을 잘 취하고 임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 내용이 하필이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가가 궁금할 수 있다. 그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눈을 뜨면 그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처럼 나타난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그런데 앞과 같은 사정으로 그것은 실답지 않다. 그래서 그 사정을 그렇게 파악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켜 대하면 곤란하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에 묶이고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반대로 그 사정을 올바로 관하여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그래야 그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다른 중생을 제도해가며 좋은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경전에서도 실재를 바탕으로 묘한 실재 진여의 성품이 그렇기에 마음에 각 내용이 묘하고 불가사의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다른 더 특별한 설명은 기대하기 곤란하다.
예를 들어 소리가 날 때 그것이 손이 부딪혀서 소리가 난다. 손에는 소리가 없다. 그런 손에서 소리가 갑자기 나타난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소리가 없는 손을 부딪히면 묘하게 소리가 난다. 그러니까 그렇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논의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행위를 해나가면 곤란하다. 그런 바탕에서는 생사고통을 생생하게 받게 된다. 그리고 생사에 무량하게 묶이게 된다. 따라서 곤란하다.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미리 제거하기 위해서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당장 수행을 통해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범위를 넘은 이론상 논의는 그 이후 해나가야 한다.
처음 문제삼는 그 모든 내용은 전도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시설하여 논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논의를 통해 그 본 바탕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앞 바탕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들도 그런 사정으로 무의미함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우선되야 한다.
실재영역에서 그에 해당하는 어떤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정을 이해하도록 일정한 내용을 시설해 논의한다.
그런데 이후 그처럼 시설한 내용을 붙들고 그런 내용이 실재에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있다면 그것이 무언가를 자꾸 문제삼게 된다. 그런 바탕에서 전도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하여 시설한 그 내용들이 왜 그렇게 있게 되는가 하고 다시 문제삼아나간다. 따라서 알고보면 그 자세가 문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것은 그 각 영역에서 그렇게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상대가 계속 그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저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가정해 시설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통해 그런 본 사정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논의를 통해서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계속 그 바탕에서 왜 이것을 대하면 하필이면 그런 모습이 묘하게 나타나는가를 붙들고 문제삼으면 곤란하다.
쉬는 동안 옥상기지에서 한국 향가풍의 이상한 노래를 들었다. 안 해도 되는 농구 슛까지 하려고 쓸데없는 노력을 한다고 하는 듯하다.
그런데 농구 구경을 하다보면 그것도 중요하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뜨면 세상이 왜 하필이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꽃을 손에 대면 촉감을 얻는다. 그런데 그 촉감은 그런 모습과는 전혀 엉뚱하다. 그런데 그 상황 그 순간에 왜 하필이면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가. 나머지 소리나 향기 맛도 마찬가지다.
그런 현실에서 그렇게 자신이 문제삼는 그런 A 를 본래 그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A 를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은 이런 문제는 건너 뛰어버린다. 그리고 무조건 그런 A 가 그 각 영역에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그런 주장과 그런 의문을 제기한다.
가정적 논의를 제시하는 입장은 사실은 그런 전제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시설한다. 그런 가운데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음을 이해시키고자 논의를 전개한다.
마음에 대한 논의이건 또는 이미 앞에서 살핀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상호관계에 대한 논의이건 마찬가지다.
부처님이 각 경전에서 수많은 가르침을 베푼 것으로 다들 이해한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한마디도 설한 바가 설한다. 그것은 사정이 위와 같기 때문이다. 그 모든 가르침은 결국은 본 사정은 그렇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일뿐이다. 따라서 이를 뗏목과 같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내용을 그렇게 시설해서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한편으로 그런 시설이 하나같이 실답게 있다고 잘못 오해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다시 그 내용을 붙들고 집착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계속 망상분별을 이어 나가게 된다.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렇게 임하게 된 사정을 연기 인과관계로 제시한다. 그러면 상대는 다시 그런 인과관계만은 정말 실재한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또 집착을 갖게 된다.
한편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그렇게 대하게 된 사정을 마음을 시설해 설명한다. 그리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 사정도 그런 과정으로 설명하게 된다.
이 경우 근본정신만은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자신의 핵심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또 이에 집착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
여하튼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을 시설해 설명을 한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놓고 그런 오해를 하면 안된다.
이미 근본정신은 무량겁에 걸쳐서 그런 관계로 현실에서 각 정신을 분화생성시켜 내용을 얻게 된다. 사정이 그렇기에 각 주체는 현실에서 그처럼 마음에 얻어지는 내용을 붙잡고 외부세계의 내용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외부대상이고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이라는 등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제시하면 현실내용에 대한 그런 판단은 잘못된 망상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그런 근본정신만은 자신의 참된 핵심적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붙잡고 집착하게 되기 쉽다.
어떤 병이 문제가 되어서 약을 제공한다. 그러면 그 병은 치료하는데 나중에 그 약으로 인해 새로운 병을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그 약으로 고통을 마찬가지로 겪기 쉽다.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다.
처음 현실 내용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집착하기 쉽다.
그래서 이런 망집 증상의 해결이 문제된다.
그래서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런 망상분별은 그러한 과정으로 갖게 되었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집착을 제거하게 된다.
그러면 그에 대한 집착은 제거된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그런 근본정신이 곧 자신의 참된 본 정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처음에 가졌던 그 집착을 이 부분에 옮겨 가지고 오기 쉽다.
그래서 자신이 찾은 참된 나<아>의 정체는 바로 그처럼 무량겁에 걸쳐 유지되는 근본정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가졌던 집착을 그 부분으로 옮겨 오기 쉽다.
그러면 망상분별과 집착증세의 치료는 다시 어렵게 된다.
여하튼 그런 사정으로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의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일체가 다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경전과 논서에서 '일심'이나 '유식무경' 등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표현을 가지고 다시 하나의 마음이나 정신이 실답게 있다고 집착을 가지면 곤란하다.
처음 그런 마음이 그렇게 있다고 시설하고 제시하는 사정은 다음이다. 이를 통해 본래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정적 논의의 성격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쉽게이를 이해해보자.
강에 산의 모습이 비추인 사진을 보았다.
그런데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거울을 갖다 대니 사물모습이 비추인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것은 이런 의문이다. 그 사물앞에 벽돌을 갖다 대니 그런 내용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을 갖다 대니 거울면에 그런 모습이 그렇게 비추인다. 왜 그런가하는 질문이다.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따라서 그 관계는 평범하고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왜 그런가를 놓고 따지면 불가사의하고 묘하다.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 이 경우도 아무리 살펴 보아도 손에서 소리가 보이지 않는데 그러나 손을 그렇게 부딪히면 그로 인해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손과는 아주 동떨어지고 엉뚱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소리를 듣게 되는 사정도 대단히 불가사의하고 묘하다.
평소 아주 익숙하게 그 내용을 반복해 대한다. 그래서 이들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하나같이 불가사의하고 묘하다.
그러나 반복해 경험이 누적되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뿐이다.
수소와 산소를 결합하면 물이 나온다. 물을 얼리면 물의 모습은 사라진다. 그리고 물이 얼음이 된다. 이런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모두 식으로 표현하면 a + b => C 와 같은 인과관계 형태로 이를 나타나게 된다.
그 식 자체가 알고보면 처음부터 그런 현실에 그렇게 문제삼는 그런 a 나 b C 등등을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런 관계 역시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상대가 그런 현실에 그런 내용도 그렇게 있고 매번 그런 관계로 그 내용을 얻게 된다고 고집한다. 따라서 그 입장을 받아들여 그 관계를 그렇게 놓고 살핀다. 그러면 그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취지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를 제시한 그 관계 자체가 사실은 불가사의하다.
식을 놓고 보자.
C 를 그런 관계에서 얻는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나 그 식 자체가 그런 C 가 얻어지지 않는 a 와 b를 앞에 제시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관계가 되면 앞 부분에서 얻어지지 않던 그런 C 를 얻게 됨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사의하고 묘한 일이다.
그런데 현실 내용을 이렇게 이해하고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관계식 자체가 그 내용이 영원하지도 않음을 나타낸다.
또 그런 관계에서만 그런 내용을 얻는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런 내용은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불변한 내용이 아님을 나타낸다.
또 그 내용은 그런 관계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님도 나타낸다. 그래서 그 내용은 실재하는 내용이 아님을 나타낸다. 즉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리고 실재의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도 파악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그 현실에는 그런 a 나 b 그리고 C 를 본래 얻을 수 없다. 또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다만 상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그렇게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가정적으로 '시설'하고 그 관계를 살핀다. 그러면 그 내용을 통해서 그 내용이 그가 이해하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이해하라는 취지다.
그런데 그렇게 제시하면 처음에 고집하던 내용은 제거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새로 제시한 a + b => C 의 내용에 과거의 망집을 옮겨 온다. 그리고 그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시설한 마음 등등에 망집을 옮겨 온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마음이 그처럼 실재한다고 고집하고 집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것이 다시 문제된다.
따라서 처음에 어떤 계기가 되었던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망상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본 실재에는 그런 문제를 본래 얻을 수 없다. 본 사정이 그럼에도 현실에서 그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그런 생사현실 측면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의 방안으로 전환해 임해야 한다.
같은 내용을 놓고 자꾸 빙빙 도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
원래 이 문제를 논의한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논의를 어떤 형태로 시작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 일체를 다시 희론이라고 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내용을 의존해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밝히게 됨을 헤아려야 한다.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하며 논의를 살펴야 한다.
위 그림은 1이 자신과 비슷한 2 를 옆에 놓고 그 2 가 반복해 눈을 뜨고 감게 한ㄷ. 그리고 그 상황에서 2 가 보고하는 내용을 듣는다. 그런 경우 1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2 의 상황을 위 그림처럼 엉터리로 이해하게 된다.
2 가 눈을 떠서 무언가가 보인다고 보고한다. 그런데 그 때 1은 그런 변화는 2 입장에서만 있다고 보게 된다. 따라서 2가 보고하는 그런 변화내용은 2 의 몸으로 여기는 부분에 5 ^ 와 같은 형태로 머문다고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위 그림처럼 그 관계를 잘못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이후 문제를 살펴나가게 된다. 이렇게 1이 추리하는 내용이 엉터리임은 그간 많이 살폈다.
그런데 이런 추리가 엉터리임에도 이를 전제로 이후 논의를 살펴가게 된다. 그래서 이는 결국 가정적 논의성격이다.
이는 일단 그렇게 전제하고 살피면 처음에 1이 이해한 내용이 엉터리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2 가 무엇을 보는 상황이 위 그림처럼 5^에 표시된 것과 같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 상황에서 2가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다음 변화가 일어난다고 2 가 보고한다.
즉, 2 가 눈을 감으면 어떤 내용을 보지 못하고 얻지 못한데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뜨면 무언가가 그렇게 나타난다. 그래서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고 반복해 보고한다. 여하튼 이는 불가사의하고 묘한 일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1 이 2의 상황을 옆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2 는 위 그림에 그려진 관계로 그런 내용을 경험한다고 여기게 된다.
여기에서 2 가 그런 내용을 2 의 마음에서 얻는 것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런 2의 상황이 또 1 자신의 상황이기도 하다.
즉 1 자신도 그렇게 눈을 감고 뜨면 2 와 마찬가지임의 변화를 스스로 경험한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1 이나 2 나 마찬가지라고 하자.
그러면 1이 눈을 떠 대하는 그런 내용도 처음 2 를 놓고 1이 생각한 것과 같다고 해야 한다.
즉, 1이 눈을 뜨는 순간 보는 내용 일체는 모두 1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처음 문제를 살펴보자.
상황이 이런데 이 경우에 이 내용 일체가 그렇게 1 자신의 마음에 얻는 내용이고 그래서 처음에 그런 내용들이 외부 세계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 아니고 외부물질이나 객관적 실재가 아님을 이해한다.
이런 경우 그 일체가 모두 1 심이라고 표현한다. 이 경우 이제 세상은 오직 1 이라는 주체 하나만의 마음 뿐이라고 이해하면 적절한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1 은 비록 2 가 2 의 마음에서 무언가를 얻는 것처럼 처음에 추리했다. 그래서 위 그림처럼 표시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2 라는 주체도 1 마음안의 내용일 뿐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2 에 해당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할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러나 1이 보고 대하는 것이 모두 1 마음안의 내용일 뿐이고 그 1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하자. 그러면 논리상 앞 내용처럼 주장해야 한다. 그래서 과연 그렇게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래서 자신의 마음 외부에도 2 나 3 과 같은 영희나 철수도 있고 또 그 각 주체마다 각기 마음이 있다고 하자. 이제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1 자신이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인가를 또 이어서 생각해야 한다.
1 자신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그가 과연 2 나 3 의 마음을 직접 그렇게 보고 만질 수 있기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런 2 나 3 이 있고 또 그 2 나 3 이 어떤 마음에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고 보게 된 것인가. 그런 여러 문제를 앞과 같은 상황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풍경 스크립트나 예술작품 감상 스크립트가 기능하는 부분은 이런 경우다. 그런데 최근 이것이 너무 지나쳐 문제가 되었다.
쉬는 동안 새로 남미 지역의 국립공원들을 목록으로 작성해보았다.
도시명을 검색어로 해서 방문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국립공원을 검색어로 방문하면 거리나 건물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아름다운 풍광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목록 작업을 해보았다.
남미지역을 직접 가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현실적으로 직접 가 보기에 쉽지 않다. 여하튼 풍광을 구경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마음 현상에 대해 논의할 생각을 하면서 옥상기지에서 쉬었다.
그런데 들리는 노래에서 마음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마음이 불가사의하다는 메세지를 듣게 된다. 그리고 무언가를 드리고 싶기도 하다고 한다. 지옥을 보았다고도 한다. 성인병이 걱정되어서 엄살을 부리는가라고도 묻는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죽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상한 메세지를 전한다. 세상이 나타나는 것은 노래에서 전하듯 불가사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