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살마하살들은 모두가 바르게 결정된 무리에 머무를지언정 결정되지 않은 무리에 머물지 않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보살마하살들은 어느 바른 성품으로 결정된 무리에 머뭅니까,
성문승입니까,
독각승입니까,
보살승입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들은 모두가 보살의 바른 성품으로 결정되는 무리에 머무를 지언정 2승의 바른 성품으로 결정되는 무리에 머물지 않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보살마하살은 어느 때에 바른 성품으로 결정된 무리에 머뭅니까?
처음으로 마음을 일으킬 때입니까,
물러나지 않는 지위입니까,
마지막 몸입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마음을 일으킬 때나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서나 마지막 몸에서나 모두 바른 성품으로 결정된 무리에 머무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여쭈었다.
“바른 성품으로 결정된 무리에 머무는 보살마하살도 나쁜 길에 떨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바른 성품으로 결정된 무리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결정코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또 선현아,
네 뜻에 어떠하냐?
여덟째 지위와 예류ㆍ일래ㆍ아불환ㆍ아라한ㆍ독각의 나쁜 길에 떨어지겠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처음에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와 그 밖의 한량없고 끝없는 불법을 수행하여 온갖 나쁜 법을 끊은 그 인연으로 온갖 나쁜 길에 떨어진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없으며,
장수천에 태어난다 함도 그럴 이치가 없으니,
그 곳에는 온갖 수승하고 착한 법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 보사마하살이 변두리에나 달서(達絮)와 멸려차(蔑戾車) 종족에 태어난다는 것도 그럴 이치가 없으니,
그 곳에는 수승하고 착한 법을 닦을 수 없으며,
나쁜 소견을 많이 일으켜 인과를 믿지 않으며,
항상 온갖 더럽고 나쁜 업을 즐겨 익히며,
불ㆍ법ㆍ승의 이름을 들을 수 없고 네 가지 무리,
즉 필추(苾芻)ㆍ필추니(苾芻尼)ㆍ오파색가(鄔波索迦)ㆍ오파사가(鄔波斯迦)들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삿된 소견의 집에 난다는 것도 그럴 이치가 없으니,
즉 그 집에 태어나면 갖가지 나쁜 소견에 집착되고,
좋은 행과 나쁜 행과 그 결과가 없다고 여기며,
온갖 좋은 업을 닦지 않고 온갖 나쁜 짓만을 짓기를 좋아하는 까닭에 보살들은 그 집에 나지 않느니라.
또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처음으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수승한 뜻과 욕망으로써 열 가지 불선업도(不善業道)를 닦는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없으리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마하살들이 처음에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이와 같은 공덕과 선근을 성취하여 나쁜 곳에 태어나지 않을진대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늘 대중에게 전생 일을 백천 가지로 말씀하실 적에 그 중에는 온갖 나쁜 곳에 태어난 일이 있다고 하십니까?
그때에 선근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나쁜 업 때문에 나쁜 곳의 몸을 받는 것이 아니요,
다만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생각하는 서원에 의하여 그 몸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그것을 이끌어서 힐난할 것이 아니니라.
또 선현아,
네 뜻에 어떠하냐?
어떤 독각이나 아라한이 모든 보살들과 같은 선교한 방편으로써 수승한 선교한 방편을 성취하여 흰 코끼리 등,
축생의 몸을 받았을 때에 원수나 도적이 와서 해치려는 것을 보면 곧 위없는 안인과 자비를 일으키고,
그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들을 해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독각 등에게는 이러한 일이 없겠나이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인연으로써 반드시 알아라.
보살은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큰 자비의 마음을 속히 원만케 하기 위하여 비록 갖가지 중생의 몸을 나타내나 축생들의 허물에 물들지 않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어떠한 선근에 머물러서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축생의 몸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에게 어떤 선근을 원만치 않게 할 것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온갖 선근을 모두 원만케 할지니라.
이른바 처음에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묘한 깨달음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원만케 하지 않을 선근 없이 온갖 착한 법을 갖추어 원만케 하여야 바야흐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느니라.
만일 하나의 착한 법이라도 원만케 하지 못하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없으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묘한 깨달음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 중간에 항상 온갖 착한 법을 원만케 하기를 배우며,
배운 뒤에는 일체상지를 얻고 온갖 습기의 계속함을 끊어야 비로소 온갖 지혜를 증득하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보살마하살은 맑은 법과 참되고 거룩한 지혜를 성취하였으되 나쁜 길에 태어나서 축생의 몸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는 온갖 맑은 법과 참되고 거룩한 지혜를 성취하였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여래는 온갖 맑은 법과 참되고 거룩한 지혜를 성취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선현아,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변화로써 축생의 몸이 되어 유정을 이롭게 하는 부처의 일을 하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여래께서는 변화로 축생의 몸이 되어 유정을 이롭게 하는 부처의 일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변화로 축생의 몸을 받을 때에 실제로 축생이 그 고통을 받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여래께서 변화로 축생의 몸을 받을 때에 실제로 축생이 그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비록 맑은 법과 참되고 거룩한 지혜를 이루었으나 모든 유정들을 이루어 주기 위한 까닭에 선교한 방편으로써 축생의 몸을 받아 알맞은 바에 따라 모든 유정들을 이루어 주느니라.
또 선현아,
네 뜻에 어떠하냐?
어떤 아라한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뒤에 변화한 몸을 나타내어 온갖 사업(事業)을 일으켜,
그 사업에 의하여 다른 사람이 기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어떤 아라한이 모든 번뇌가 다한 뒤에 변화한 몸을 나타내어 온갖 사업을 일으키고,
그 사업에 의하여 다른 사람이 기쁜 마음을 일으키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비록 맑은 법과 참되고 거룩한 지혜를 성취하였으나 모든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선교한 방편으로써 나쁜 길의 몸을 받아 알맞은 바에 따라 유정들을 이루어 주며,
비록 그러한 몸을 받으나 그들이 온갖 괴로움을 받는 것과 같지 않으며,
그들의 허물에 물들지도 않느니라.
또 선현아,
네 뜻에 어떠하냐?
어떤 공교한 요술쟁이나 그의 제자들이 요술로써 갖가지 코끼리ㆍ말 같은 모양을 나타내어 여러 사람이 보고 기뻐 뛰게 하면 거기에 실제로 코끼리ㆍ말 같음이 있겠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거기에는 실제로 코끼리ㆍ말 같음이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비록 맑은 법과 참되고 거룩한 지혜를 이루었으나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 축생 등의 몸을 받으며,
비록 그러한 몸을 받으나 실제로 그것이 아니며,
그들의 허물에 물들지도 않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광대한 선교한 방편으로 비록 맑은 법과 참되고 거룩한 지혜를 이루었으나 유정들을 위하여 갖가지 몸을 받아 그들에 알맞은 바에 따라 이로운 일을 나타내느니라.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어떠한 법에 머물러서 이와 같은 선교한 방편을 성취하여 여러 길의 갖가지 몸을 받으나 그들의 허물에 물들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머물러서 이와 같은 선교한 방편을 성취하나니,
이 선교한 방편의 힘에 의하여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에 가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그 유정들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나 그 가운데는 도무지 물들고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에 도무지 얻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물들게 하는 것과 물드는 인연을 도무지 얻을 수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온갖 법의 제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선현아,
반드시 알아라.
공이 공을 물들일 수 없으며,
공도 다른 법을 물들일 수 없으며,
또 다른 법도 공을 물들일 수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공 가운데서는 공한 성품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법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러한 것을 얻을 수 없는 공이라 하나니,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가운데 머물러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여 모든 유정에게 항상 이로운 일을 하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에만 머물러서 이와 같은 선교한 방편을 일으킵니까,
혹은 다른 법에도 머무릅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대답하였다.
“어찌 반야바라밀다에 포섭되지 않는 다른 법이 있기에 너는 지금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느냐?”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이미 제 성품이 공하거늘 어찌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온갖 법이 포섭된다고 하십니까?
공 가운데 포섭되는 것과 포섭되지 않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 아니겠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그러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할진대 어찌 공 가운데 온갖 법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그러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이 까닭에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온갖 법을 포섭하나니,
반드시 알아라.
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머물러서 이와 같은 선교한 방편을 성취하느니라.”
그때에 구수 선현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모든 법의 제 성품 공에 머물러서 신통바라밀다를 일으키며,
신통바라밀다에 머물러서는 능히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세계에 가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며,
모든 부처님께 바른 법을 듣고 한량없이 수승한 선근을 심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의 부처님들과 그들이 말씀하신 법의 제 성품이 공하며,
오직 세속의 붙인 말의 이름에 의하며,
세계와 부처님들과 법이라 하거니와 이와 같은 헛말과 이름도 제 성품이 공함을 두루 관찰하느니라.
선현아 반드시 알아라.
시방세계와 부처님들과 말씀하신 법과 붙인 말의 이름들의 제 성품이 공하지 않을진대 이미 말한 공이 한 부분을 이루려니와 말한 공이 한 부분을 이루지 않는 까닭에 온갖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하니,
그 이치는 두루하고 원만하여 둘이 없고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공을 두루 관찰하는 선교한 방편에 의하여 신통바라밀다를 일으키고,
신통바라밀다에 머물러서는 곧 하늘 눈,
하늘 귀,
뜻대로 다님,
남의 속 알기,
전생일 알기와 번뇌가 다하는 미묘한 신통의 지혜를 일으키느니라.
선현아,
반드시 알아라.
보살마하살들이 신통바라밀다를 떠나서는 자유로이 유정을 이루어 주고 불국토를 장엄하며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는 이가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신통바라밀다는 깨달음의 도이니라.
모든 보살마하살은 모두가 이 도에 의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구하여 나아가나니,
구하여 나아갈 때에 스스로가 온갖 착한 법을 원만케 하고는 남에게도 전하여 온갖 착한 법을 닦게 하며,
비록 이와 같은 일을 하나 착한 법에 대하여 도무지 집착함이 없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착한 법이 모두가 제 성품이 공하여서 제 성품이 공한 가운데는 집착할 것이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니라.
만일 집착함이 있으면 곧 사랑하는 맛이 있거니와 집착이 없는 까닭에 사랑하는 맛도 없나니,
제 성품이 공한 가운데는 사랑하는 맛이 없는 까닭이며,
맛들이는 이와 맛들일 것과 맛 들이는 인연도 공한 법 가운데서는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니라.
선현아,
반드시 알라.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신통바라밀다에 머물러서 인간을 초월한 청정한 하늘 눈을 일으키고,
그 하늘 눈으로써 온갖 법의 제 성품이 모두가 공함을 관찰하여,
온갖 법의 제 성품이 공함을 보는 까닭에 법의 모양에 의하여 온갖 업을 짓지 않나니,
비록 유정들을 위하여 이러한 법을 말하여 주나 모든 유정의 모양과 그의 시설도 얻을 수 없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보살의 수승한 신통을 일으키며,
이 신통으로써 하여야 할 온갖 사업을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지극히 청정하여서 인간을 초월하는 하늘 눈으로써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 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본 뒤에는 뜻대로 다니는 신통을 일으켜 그 곳에 가서 모든 유정들을 이롭게 하되 혹은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로써 이롭게 하고,
혹은 4념주 내지 8성도지로써 이롭게 하고,
혹은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으로써 이롭게 하고,
혹은 8해탈 내지 10변처로써 이롭게 하고,
혹은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으로써 이롭게 하고,
혹은 그 밖의 수승하게 착한 법으로써 이롭게 하고,
혹은 성문ㆍ독각ㆍ보살과 부처님들의 법으로써 이롭게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시방세계에서 어떤 유정들이 인색함이 많은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어 이러한 법을 말하되 ‘너희 유정들은 보시를 하라.
온갖 탐내는 이는 빈궁한 고통을 받을 것이니,
빈궁한 까닭에 위덕이 없어서 스스로도 이롭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남을 이롭게 하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은 부지런히 보시를 하라.
스스로가 안락한 뒤에는 남도 안락하게 하리니 빈궁으로써 서로서로 잡아먹지 말라.
모두가 온갖 나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유정들이 정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어 말하되 ‘너희들은 정계를 지녀라.
정계를 깨뜨리는 이들은 나쁜 길의 괴로움을 받으리라.
파계한 사람은 위덕이 없어서 스스로도 이롭게 하는 인연으로 세 가지 나쁜 길[三惡趣]에 떨어지면 괴로운 갚음을 받아 고통을 참기가 어려우니,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남을 구제하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은 정계를 지니라.
잠시라도 파계할 마음을 용납하지 말 것이거늘 하물며 오래도록 계속하겠느냐.
스스로가 마음을 놓았다 뒷날에 뉘우치도록 하지 말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유정들이 서로서로 성을 내어 더욱 더욱 원수를 맺고 서로서로 해치는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어 말하되 ‘너희들은 안인을 닦을지언정,
서로서로 성을 내어 원한을 맺고 해치지 말라.
온갖 성내는 마음은 착한 법에 맞지 않으므로 나쁜 법을 자라게 하여 쇠퇴와 손해를 부르느니라.
너희들은 이 성내고 원한하는 마음[忿恨心] 때문에 목숨이 마친 뒤에는 나쁜 길에 떨어져서 온갖 지독한 고통을 받되 벗어날 기약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잠시 동안이라도 성내는 마음을 용납하지 말 것이거늘 하물며 그를 오래도록 계속하겠느냐.
너희들은 지금부터 서로서로 인연이 되어서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 이로운 일을 하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유정들이 게으른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어 말하되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할지언정 온갖 착한 법에 대하여 게을리하지 말지니라.
온갖 게으른 이는 온갖 착한 법과 온갖 수승한 일을 모두 이루지 못하나니,
너희들은 이 까닭에 나쁜 길에 빠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잠시라도 게으른 마음을 용납하지 말 것이거늘 하물며 오래도록 계속하겠느냐’ 하느니라.
만일 어떤 유정들이 바른 생각을 잊어버리고 어지러워서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어 말하되 ‘너희들은 마땅히 정려를 삼을지언정 바른 생각을 잊어버려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이와 같은 마음은 착한 법에 맞지 않으므로 나쁜 법을 자라게 하여 쇠퇴함과 손해만을 부르나니,
너희들은 이 까닭에 목숨이 마친 뒤에 온갖 나쁜 길에 빠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잠시라도 바른 생각을 잊어 어지러움에 맞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거늘 하물며 오래도록 계속하겠느냐’ 하느니라.
만일 어떤 유정들이 어리석어서 나쁜 지혜를 가진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말하되 ‘너희들은 마땅히 수승한 지혜를 일으킬지언정 나쁜 지혜를 일으키지 말라.
나쁜 지혜를 일으키는 이는 여러 착한 길에 가지도 못하거늘 하물며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이 나쁜 지혜 때문에 온갖 나쁜 길에 빠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잠시라도 어리석고 나쁜 지혜에 걸맞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거늘 하물며 오래도록 계속하겠느냐’ 하느니라.
만일 어떤 유정이 탐욕이 많은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써 그들이 부정하게 관찰[不淨觀]함을 닦게 하고,
어떤 유정이 성내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써 그들이 자비하게 관찰[慈悲觀]함을 닦게 하고,
어떤 유정들이 어리석음이 많은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어 방편으로써 그들이 인연임을 관찰[緣起觀]함에 머무르게 하고,
어떤 유정들이 교만함이 많은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써 그들이 세계를 분별하여 관찰[界分別觀]함을 닦게 하며,
만일 어떤 유정들이 번거로운 생각[尋侗]이 많은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써 호흡을 지니는 생각[持思念]을 닦게 하고,
어떤 유정들이 바른 길을 잃은 것을 보면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써 인도하여 바른 길에 들게 하나니,
이른바 성문의 도와 독각의 도와 보살의 도와 여래의 도이니라
그리고 방편으로써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들이 집착한 것은 모두가 제 성품이 공하니라.
공한 법 가운데는 집착할 것이 있지 않나니,
집착할 바 없음으로써 공의 모양을 삼기 때문이니라’ 하느니라.
이와 같으므로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반드시 신통바라밀다에 머물러야 비로소 자유로이 바른 법을 연설하여 모든 유정들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느니라.
선현아,
반드시 알라.
보살마하살이 신통바라밀다를 멀리하면 바른 법을 자유로이 연설하여 모든 유정에게 이로운 일을 하지 못하리라.
선현아,
반드시 알라.
마치 새가 날개가 없으면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서 먼 곳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모든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신통바라밀다가 없으면 바른 법을 자유로이 연설하여 모든 유정에게 이로운 일을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마땅히 신통바라밀다를 일으킬지니,
신통바라밀다를 일으키면 곧 자유로이 바른 법을 연설하여 마음대로 모든 유정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리라.
선현아,
반드시 알아라.
모든 보살마하살은 청정함이 인간을 초과하는 하늘 눈으로써 두루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와 같은 부처님 세계와 거기에 태어난 유정들을 관찰하고,
본 뒤에는 뜻대로 움직이는 신통[神境智通]을 일으켜 잠깐 사이에 그 세계에 가서 남의 속 아는 지혜[他心智]로써 그 유정들의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을 여실히 알아서 알맞은 바에 따라 그들에게 법을 말하여 주느니라.
이른바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말하고,
4념주 내지 8성도지를 말하고,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을 말하고,
8해탈 내지 10변처를 말하고,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말하며,
혹은 온갖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말하고,
내공 내지 무성자성공을 말하고,
진여 내지 부사의계를 말하고,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고,
인연 내지 증상연을 말하고,
인연에서 생기는 모든 법을 말하고,
무명 내지 늙음과 죽음을 말하며,
혹은 갖가지로 쌓임,
곳,
경계 등의 법을 말하고,
성문ㆍ독각ㆍ보살의 도를 말하고,
혹은 깨달음과 열반을 말하여 그 유정들이 들으면 모두가 수승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지극히 청정함이 인간을 초과하는 하늘 귀로써 온갖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이들의 소리를 듣나니,
이 하늘 귀에 의하여 두루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에서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말씀하시는 바른 법을 들으며,
들은 뒤에는 그 이치를 지니고 생각하여 들은 법에 따라 유정들에게 여실히 말하리라.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말하되,
……(자세한 것은 생략함)…… 내지 깨달음과 열반을 말하여 그 유정들이 이 법문을 들으면 모두가 수승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지극히 청정한 남의 속 아는 지혜의 신통으로써 모든 유정들의 심ㆍ심소법을 여실히 알고 그들의 알맞은 바에 따라 법문을 말하나니,
이른바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말하며,
……(자세한 것은 생략함)…… 내지 깨달음과 열반을 말하여 그 유정들이 들으면 모두가 수승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청정한 전생 일 아는 지혜의 신통으로써 자기와 남의 전생 일을 기억하나니,
이 전생 일 아는 지혜의 신통에 의하여 과거의 부처님들과 그 제자들의 이름 등이 차별하였던 것을 여실히 기억하여 아느니라.
만일 모든 유정들이 과거의 온갖 묵은 일을 듣고서 이익을 얻을 이가 있으면 곧 그들에게 전생 일을 말하여 주나니,
이러한 방편에 의하여 바른 법을 연설하되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말하며,
……(자세한 것은 생략함)…… 내지 깨달음과 열반을 말하여 그 유정들이 이 법을 들으면 모두가 수승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지극히 빠른 뜻대로 움직이는 지혜의 신통으로써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에 가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모든 부처님께 온갖 선근을 심고는 본 국토에 돌아와서 유정들에게 모든 부처님 국토의 일을 연설하나니,
이러한 방편에 의하여 바른 법을 말하되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말하며,
……(자세한 것은 생략함)…… 내지 깨달음과 열반을 말하여 유정들이 들으면 모두가 수승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번뇌가 다하는 지혜의 신통으로써 모든 유정들의 번뇌가 다했거나 다하지 못함을 여실히 알며,
번뇌를 다하는 방편도 여실히 알아서 다하지 못한 이에게는 법문을 연설하나니,
이른바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말하며,
……(자세한 것은 생략함)…… 내지 깨달음과 열반을 말하여 그 유정들이 들으면 모두가 수승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느니라.
이와 같으므로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마땅히 신통바라밀다를 일으킬지니,
이 보살마하살이 신통바라밀다를 닦아서 원만케 하면 마음대로 갖가지 몸을 받아도 괴롭거나 즐거움의 허물에 물들지 않나니,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하신 몸과 같이 갖가지 사업을 짓더라도 그 괴롭고 즐거움의 허물에 물들지 않느니라.
이와 같으므로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신통바라밀다에 유희할지니,
신통바라밀다에 유희하면 능히 유정들을 이루어 주고 불국토를 장엄하여 속히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리라.
선현아,
반드시 알라.
보살마하살이 유정을 이루지 않고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으면 끝내 구하려는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보살마하살이 깨달음의 양식[資糧]을 원만케 하지 않고서는 구하려는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반드시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구수 선현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모든 보살마하살의 깨달음의 양식이기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깨달음의 양식을 원만케 하여야 비로소 구하려는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착한 법이 모두가 보살의 깨달음의 양식이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을 온갖 착한 법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처음에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되 그 중간에 도무지 분별과 집착이 없나니 즉 생각하되 ‘이것이 보시 내지 반야이다,
보시 내지 반야를 무엇 때문에 닦는다,
누구를 위하여 닦는다’ 하는 이 세 가지 분별과 집착이 도무지 없나니,
온갖 법의 제 성품이 공한 것을 알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닦은 보시 등의 6바라밀다에 의하여 스스로가 이롭고 온갖 유정들로 하여금 이롭게 하여 나고 죽음을 뛰어나서 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까닭에 착한 법이라 하며,
보살의 깨달음의 양식이라고도 하며,
보살마하살의 도라고도 하나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보살마하살들이 이 도를 행하는 까닭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이미 얻었거나 장차 얻거나 지금 얻으며,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나고 죽음의 큰 바다를 이미 건넜거나 장차 건너거나 지금 건너게 하느니라.
또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처음에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4념주 내지 8성도지를 수행하고,
내공 내지 무성자성공에 머무르고,
진여 내지 부사의계에 머무르고,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머무르고,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을 수행하고,
8해탈 내지 10변처를 수행하며,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수행하고,
보살마하살의 지위를 수행하고,
온갖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수행하고,
여래의 10력 내지 18불불공법을 수행하고,
잊음이 없는 법과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을 수행하고,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를 수행하되 그 중간에 도무지 분별과 집착이 없느니라.
이른바 생각하되 ‘이것이 4념주 내지 일체상지다.
4념주 내지 일체상지를 무엇 때문에 닦는다거나 누구를 위하여 닦는다’ 하는 세 가지 분별과 집착이 도무지 없나니,
온갖 법의 제 성품이 공함을 알기 때문이니라.
이 때문에 닦는 4념주 내지 일체상지에 의하여 스스로가 이롭고 온갖 유정들도 이롭게 하여 나고 죽음을 벗어나서 열반을 얻게 하는 까닭에 착한 법이라 하며,
보살의 깨달음을 양식이라고도 하며,
보살마하살의 도라고도 하나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보살마하살들이 이 도를 행하는 까닭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이미 얻었거나 장차 얻거나 지금 얻으며,
유정들로 하여금 나고 죽음의 큰 바다를 이미 건너고 장차 건너고 지금 건너서 열반을 증득하게 하느니라.
선현아,
반드시 알아라.
한량없는 보살들이 닦는 공덕이 또 있으니,
모두들 착한 법이라 하며,
보살의 깨달음의 양식이라고도 하며,
보살마하살의 도라고도 하느니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온갖 착한 법을 닦아서 지극히 원만케 하여야 바야흐로 일체지지를 증득하며,
일체지지를 증득하여야 비로소 뒤바뀜이 없는 바른 법 바퀴를 굴리어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끝내 안락하게 하느니라.”
82.
불법품(佛法品)
그때에 구수 선현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온갖 착한 법이 모두가 보살의 법이라면 다시 어떤 것이 부처님의 법입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의 법이 곧 부처의 법이니라.
이른바 보살은 온갖 법에서 온갖 모양을 깨닫나니,
이 까닭에 일체상지를 얻어 온갖 습기의 계속함을 영원히 끊고,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은 온갖 법에서 잠깐 사이에 걸맞은 묘한 지혜로써 바른 깨달음을 나타내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나니,
선현아,
이것은 보살과 부처님 두 법의 차별이니라.
두 가지 거룩한 이가 모두 성인인 것 같으나 행과 향함과 머무름과 결과에는 차별이 있으며,
성취하는 법에도 차이가 없지 않느니라.
이와 같으므로 선현아,
끊임없는 도[無間道]에서 온갖 법을 행하여 어두운 장애를 여의지 못하고 저 언덕에 이르지 못하고 자유로움을 얻지 못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 때를 보살이라 하며,
해탈도(解脫道)에서 온갖 법을 행이 어두운 장애를 여의고 저 언덕에 이르고 자유로움을 얻고 결과를 얻은 때는 부처라 하나니,
이것이 보살과 부처님이 차이가 있는 것이니라.
지위에 차이가 있는 까닭에 법에도 차별이 없지는 않으나 법성에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온갖 법의 제 모양이 모두 공하다면 제 모양이 공한 가운데 어떻게 갖가지 차별,
즉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ㆍ하늘ㆍ종자 성품의 지위,
여덟째 지위ㆍ예류ㆍ일래ㆍ불환ㆍ아라한ㆍ독각ㆍ보살ㆍ여래라 함이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말하는 보특가라는 얻을 수 없다면 그들이 짓는 법도 얻을 수 없으며,
이렇게 지은 업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갚음인 결과도 얻을 수 없으리이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네 말과 같이 온갖 법은 제 모양이 공하니,
제 모양이 공한 가운데는 보특가라가 있지 않으므로 업과 결과도 있지 않나니,
있지 않은 가운데는 차별의 모양도 없느니라.
그러나 모든 유정들은 온갖 법의 제 모양이 공한 이치를 여실히 알지 못하므로 온갖 업,
즉 착한 업과 나쁜 업을 짓나니,
착한 업을 짓고 자라게 한 까닭에 하늘이나 인간에 나고,
나쁜 업을 짓고 자라게 한 까닭에 세 가지 나쁜 길[三惡趣]에 빠지며,
착한 업에서는 결정된 업을 짓고 자라게 한 까닭에 색계나 무색계에 나느니라.
이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고,
내공 내지 무성자성공에 머무르고,
진여 내지 부사의계에 머무르고,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머무르고,
4념주 내지 8성도지에 머무르고,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을 수행하며,
8해탈 내지 10변처를 수행하고,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수행하고,
극희지 내지 법운지를 수행하고,
온갖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수행하고,
5안과 6신통을 수행하고,
여래의 10력 내지 18불불공법을 수행하고,
잊음이 없는 법과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을 수행하고,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를 수행하느니라.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깨달음의 부분인 법을 끊임없고 결함 없이 닦아서 원만케 하고,
원만케 한 뒤에는 곧 깨달음을 일으켜 가까이 하여 돕는 금강 같은 정려를 일으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여 모든 유정에게 큰 이로움을 짓되 항상 잃음과 무너뜨림이 없이 하며,
잃음과 무너뜨림이 없는 까닭에 모든 유정들이 나고 죽는 모든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도 여러 길의 나고 죽는 법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도 흑업(黑業)ㆍ백업(白業)ㆍ흑백업(黑白業)ㆍ 비흑백업(非黑白業)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여러 길의 나고 죽음과 업의 차별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ㆍ하늘 종자 성품의 지위ㆍ여덟째 지위ㆍ예류ㆍ일래ㆍ불환ㆍ아라한ㆍ독각ㆍ보살ㆍ여래라고 시설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유정들이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함을 알겠느냐?”
선현이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유정들이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함을 알았다면 보살마하살들은 곧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구하고 증득하여 선교한 방편으로써 모든 유정들을 구제하여 나쁜 길의 나고 죽음을 벗어나게 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모든 유정들은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러 길에 헤매면서 온갖 고통을 만나니,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부처님에게 온갖 법의 제 모양이 공함을 듣고서 모든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구하고 증득하여 선교한 방편으로써 모든 유정들을 구제하여 나쁜 길의 나고 죽음을 벗어나게 하느니라.
선현아,
반드시 알아라.
모든 보살마하살은 항상 생각하되 ‘온갖 법은 온갖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이 집착하는 것같이 제 모양이 실제로 있지 않거늘 그들은 뒤바뀐 분별의 힘 때문에 실제로 있지 않은 가운데 실제로 있다는 생각을 내나니,
이른바 나가 없는 데서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유정이 없는 데서 유정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며,
……(자세한 것은 생략함)…… 내지 본다는 것이 없는 데서 본다는 것의 생각을 일으키며,
물질이 없는 데서 물질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없는데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며,
내지,
온갖 유위의 법에서 허망하게 분별하는 뒤바뀐 힘 때문에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하고,
있지 않는 것을 있다고 집착하나니,
이 까닭에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지어 나쁜 길의 나고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내가 구제하여서 해탈을 얻게 하리라’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생각한 뒤에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되 온갖 착한 법을 그 가운데 거두어 모아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을 뒤바뀜 없이 수행하여서 점차로 깨달음의 양식을 원만케 하느니라.
깨달음의 양식을 원만케 한 뒤에는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고,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유정들을 위하여 사성제(四聖諦)의 이치를 연설하고 보이고 분별하고 세우되 이는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요,
이는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요,
이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요,
이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하느니라.
다시 온갖 깨달음의 부분인 법을 통달하는 지혜에 의하여 이와 같은 사성제에다 거두어 모으고,
다시 온갖 깨달음의 부분인 법에 의하여 미묘한 지혜로써 불ㆍ법ㆍ승 삼보를 시설하여 세우나니,
이 까닭에 삼보가 세간에 나타나서 모든 유정들이 나고 죽음을 벗어나느니라.
모든 유정들이 불ㆍ법ㆍ승 삼보를 믿지 않고 갖가지 업을 지어 여러 길에 헤매면 받는 고통이 한량이 없는 까닭에 마땅히 불ㆍ법ㆍ승 삼보에 귀의할지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의하여 모든 유정들이 열반에 듭니까?
혹은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지혜에 의하여 모든 유정들이 열반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의하여 유정들이 열반을 얻는 것도 아니며,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지혜에 의하여 유정들이 열반을 얻는 것도 아니니라.
선현아,
나는 사성제의 평등한 성품이 곧 열반이라 하노니,
이와 같은 열반은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지혜에 의하여 얻는 것도 아니요,
오직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여야 열반을 얻었다 하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평등한 성품입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여기에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가 없거나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지혜가 없으면 사성제의 평등한 성품이라 하나니,
이 평등한 성품이 곧 사성제이며,
온갖 진여ㆍ법계ㆍ법성ㆍ불허망성ㆍ불변이성ㆍ평등성ㆍ이생성ㆍ법정ㆍ법주ㆍ실제ㆍ허공계ㆍ부사의계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거나 세상에 나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무는 것이어서 잃음과 무너짐과 변함이 없나니,
이 모든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평등한 성품이라 하느니라.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이 사성제의 평등한 성품을 깨닫기 위하여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나니,
만일 이 사성제의 평등한 성품을 깨달을 때는 참으로 온갖 진리를 증득하였다 하며,
빨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리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이 사성제의 평등한 성품을 깨닫기 위하여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며,
이 사성제의 평등한 성품을 깨달으면 온갖 진리를 깨달았다 하여서 성문이나 독각 등의 지위에 빠지지 않고 번뇌를 여읜 보살의 바른 성품에 빨리 듭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조금만큼의 법도 여실히 보지 못한 것이 없나니,
온갖 법을 여실히 볼 때에 온갖 법에서 도무지 얻는 바가 없고,
온갖 법에서 도무지 얻는 바가 없을 때에 온갖 법이 공함을 여실히 보느니라.
이른바 사성제에 포섭되는 것과 포섭되지 않는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한 것임을 여실히 보나니,
이렇게 볼 때에 번뇌를 여읜 보살의 바른 성품에 들며,
번뇌를 여읜 보살의 바른 성품에 드는 까닭에 보살의 종자 성품 지위에 머무르며,
보살의 종자 성품 지위에 머무르면 결정코 정수리에서 떨어지지 않거니와 만일 정수리에서 떨어지면 마땅히 성문이나 독각의 지위에 떨어지리라.
이 보살마하살은 보살의 종자 성품 지위에 머물러서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을 일으키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삼마지에 머물러서 곧 온갖 법의 성품을 결택하고,
또 사성제의 이치를 깨닫느니라.
그러한 때에 보살은 비록 괴로움을 두루 알았지만 괴로움을 반연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비록 괴로움의 발생을 영원히 끊었으나 괴로움의 발생을 반연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비록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였으나 괴로움의 소멸을 반연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비록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으나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반연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수순하고 향하고 돌아가려는 마음만을 일으켜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여실히 관찰하느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관찰합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대답하였다.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관찰하나니,
이것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관찰하는 것이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모든 법이 모두가 공하다고 관찰합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대답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에서 모두가 제 모양이 공함을 여실히 관찰하나니,
이것이 모든 법이 모두 공함을 관찰하는 것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비발사나(毗鉢舍那)로써 모든 법이 모두가 공한 것임을 관찰하여 보되,
도무지 어떤 법의 제 성품이라도 거기에 머물러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할 곳이 있다고 보지 않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과 온갖 법은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물질 내지 의식이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눈의 영역 내지 뜻의 영역도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빛깔의 영역 내지 법의 영역도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눈의 경계 내지 뜻의 경계도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빛깔의 경계 내지 법의 경계로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안식의 경계 내지 의식의 경계도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으며,
눈의 접촉 내지 뜻의 접촉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눈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 내지 뜻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도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지계 내지 식계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인연 내지 증상연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인연에서 생기는 모든 법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으며,
무명 내지 늙음과 죽음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보시바라밀다 내지 반야바라밀다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으며,
내공 내지 무성자성공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진여 내지 부사의계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4념주 내지 8성도지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으며,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8해탈 내지 10변처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정관지 내지 여래지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으며,
극희지 내지 법운지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온갖 다라니문과 삼마지문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5안과 6신통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여래의 10력과 18불불공법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서른두 가지 거룩한 모습과 여든 가지 잘생긴 모습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으며,
잊음이 없는 법과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예류과 내지 독각의 깨달음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온갖 보살마하살의 행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고,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도 성품 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성품 없음은 부처님들이 지은 것이 아니며,
독각이 지은 것이 아니며,
보살이 지은 것이 아니며,
성문이 지은 것이 아니며,
결과에 머무르거나 향해 가는 이가 지은 것도 아니건만 오직 모든 유정들은 온갖 법이 공한 것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까닭에 보살마하살들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선교한 방편으로써 스스로가 깨달은 바와 같이 모든 유정들에게도 여실히 연설하여 집착을 떠나고 온갖 남ㆍ늙음ㆍ병들음ㆍ죽음에서 벗어나 열반의 구경안락(究竟安樂)함을 얻게 하느니라.”
○ [pt op tr]
● [pt op tr] fr
● 정려와 신통
무엇을 잘 하는 신통이란 결국 무언가에 몰입하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전제가 된다.
정려 수행에서 수행자가 얻는 신통이 언급되는 것은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종이 100 장을 셀때에도 집중하는 상태와 산만한 상태는 차이가 았다.
그런데 정려 수행은 먼저 마음이 산란함을 벗어난 심일경성의 상태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정려 수행에 그처럼 임하게 되면 그러한 심일경성의 상태를 바탕으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영역에서 현재 자신이 위치한 욕계의 상태를 벗어나 색계나 무색계라는 각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더 나아가 망상분별 상태에서 엉터리로 관계를 이해하고 대하는 내용에서 대단히 이상하게 여겨지는 현상을 수행자가 얻어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통해서 무량겁에 걸쳐서 자신이 어떻게 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잘 검토해야 한다.
축사나 지옥계에서 무량겁을 보내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다. 그러나 차별없는 본 바탕을 놓고서 동가 홍상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더더욱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또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문제를 놓고 생각해도 더더욱 그렇다.
생사현실에서 계, 정, 혜 수행에 정진해야 되는 사정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자신부터 업의 장애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데 자신도 스스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도 힘들다. 따라서 계, 정, 혜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벽돌로 내리치고 지갑을 빼았아갔다. 그래서 장애가 생기고 치료비도 많이 들고 생계활동도 어렵고 온갖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다음 생각을 하게 된다. 내게 이런 막대한 피해와 고통을 준 그 사람을 붙잡아서 자신이 당한 만큼 벽돌로 시원하게 내리치고 치료비와 위자료도 받아내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끝내면 된다. 그런데 왜 이것이 무량겁에 걸쳐서 그런 가해와 피해를 중첩해 받아 나가는 시작점이 되는가.
또는 다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지금 자신이 몹시 배가 고프다. 그래서 바다에서 잡은 문어를 요리를 해 먹었다. 그런데 이렇게 했다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무슨 일이 있는가. 그것으로 끝이다. 자신이 문어의 다리를 잘랐다고 그 과보로 나중에 손과 발이 잘라지는 일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앞처럼 피해를 당해 보복을 하거나 다른 생명을 해치며 가해를 해도 그것으로 끝이다. 그로 인해 무슨 무량한 가해와 피해의 중첩관계가 나타나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은 자체적으로 모순이 있다. 자신이 피해를 당했을 때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자신이 보복을 가하거나 보상을 받아야 끝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해를 한 경우는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두 내용만 보아도 자체적으로 서로 내용이 들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위 관계에서 위치를 바꾸어가며 살피면 왜 그것이 무량한 가피 중첩관계의 시작점이 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피해를 받은 경우는 그 상태로 도저히 끝낼 수 없다고 보기에, 가해자에게 피해를 다시 되돌려 주거나 보상을 받은 다음에 끝이 된다고 여긴다.
반대로 자신이 가해를 한 경우는 상대는 그럴 능력이 없거나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평가하며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되돌려 받는 일은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위 사례에서 다른 입장은 위 관계를 달리 본다.
즉 처음 사례에서 자신에게 가해를 한 상대는 자신이 한 번 벽돌로 내리쳐 금품을 뺏고 도망갔다. 그런데 피해자가 무슨 수로 자신을 찾고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긴다. .
그런데 그 상대도 또한 자신이 피해를 당할 때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복을 하겠다고 임한다.
어떤 상황이던지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침해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끊어가며 자신을 토막내 자살에 이르는 토막 자살행위가 된다.
원래 자신이 남의 손을 끊으면 상대도 나중에 자신의 손을 끊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상대는 자신의 다리를 끊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다른 이의 지갑을 뺏으면 상대도 자신의 지갑만 빼앗아 가야 한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의 집을 빼앗거나 신체를 잘라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해와 피해를 주고받는 관계는 이처럼 들쑥날쑥인 것이 보통이다. [이숙]
그래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관계는 마치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경우처럼 반드시 순서적으로 하나하나 토막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오늘은 손, 내일은 다리, 다음 날은 잇빨,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토막이 나는 형태로 고통을 계속 주고받는 상황이 된다.
예를 들어 상대가 자신의 이를 부러뜨려서 - 자신이 상대 손을 부러뜨렸다. - 그러니까 상대가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 그래서 자신이 상대의 자동차를 망치로 부섰다. 그러니까 상대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 그래서 자신이 상대의 손을 잘라냈다. 그러니까...이런 식으로 가해와 피해가 중첩되어 이어진다고 하자.
이 경우 이들 내용을 오직 자신이 당한 피해만 놓고 이어 살피면 자신이 애착을 갖는 부분이 하나하나 토막나는 형태가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까지 이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런 결과를 나타나게 하는 원인들은
그런 사건 전후에 자신이 취한 반응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전후에 행한 행위는 그런 토막자살을 행하는 스위치와 같다.
현실에서 리모콘을 누르면 왜인지 모르지만, tv가 켜진다. 그런데 토막자살 스위치도 사정이 비슷하다.
물론 그런 행위는 자신이 피해를 돌려 받으려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매 경우 자신이 그렇게 반응하고 행하면
자신에게 고통과 피해를 되돌려주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그런 토막자살을 행하게 하는 스위치가 된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내용도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면 그 관계를 잘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과연 현실이 그런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는 매 순간 발생하는 일은 모두 알 수 없는 우연과 추첨으로 나타나는 일처럼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신이 우연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잘 모를 뿐,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사실 그런 자신도 예를 들어 운전을 할 때는 자신이 핸들을 돌리고 엑셀을 밟아야 자동차가 나아간다고 여기고 인과에 의존한다. 그런데 세상이 일부는 인과에 의존하고 일부는 인과에 의존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지 자신이 그것을 일일히 헤아리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우연히 그런 일이 나타난다고 여길 뿐이다.
가해와 피해의 무한한 중첩 순환관계는 한 생명이 죽음을 당해 육체가 허물어지고 사라지면 그것으로 모두 끝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벽돌로 상대를 내리친 이나 문어를 칼로 잘라 음식을 만들어 먹은 이나 상대가 죽어서 없어졌는데 이후 무엇이 이어지겠는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 문제를 살피려면 일단 마음과 관련되어 무량겁에 걸쳐 이어지는 마음부터 살펴야 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81 정정품을 보면 시설의 문제가 언급된다. 또 그런 가운데 무량겁에 걸쳐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서 고통을 받아나가는 생명이나 무량겁에 걸쳐 수행해나가는 수행자도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생사를 넘어서 계속 고통을 받거나 수행함을 제시하려면 먼저 무엇을 가지고 그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가부터 기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이들 내용이 비로소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될 수 있다. 이들 내용이 이해가 안 되면 이는 그냥 지어낸 이야기라고 무시하고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무량겁에 걸친 생사현실의 문제가 된다.
망집상태에서 아무리 고통과 공포를 심하게 받고 죽게 되어도 그로 인해 끝을 만나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을 정진할 필요성이 있다.
대략 20 년,~ 50 년 정도 삶을 살아온 경우를 놓고 간단히 살펴보자.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이 자신이라면 20년 30년 40 년 50 년전의 순간에 그런 자신이 그 상황에 있었는가를 살펴보자. 그리고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그 내용을 그대로 붙잡아 들고 그 과거 시점으로 밀어 넣어보자.
그런데 그렇게 초등학교 상황에 지금의 자신을 넣어 보면 이상하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 내용이 모두 서로 다르다. 그런데 그 상황에 자신이 없다고 보아야 하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무엇을 가지고 이 두 순간에 걸쳐 계속해서 자신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게 되는가를 찾아야 한다.
원칙대로 하면 그 초등학교 교실에 있는 어린이는 그 어린이대로 또 어떤 일정한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 순간을 임한다.
그런데 거꾸로 그 내용을 자신이라고 붙잡으면 그로부터 2,3,4,50 년이 지난 순간들에는 그런 내용은 이미 없어진 상태다. 그래서 그 초등학생은 결국 장례식없이 장례를 치루고 어딘가에 묻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내용은 그 어린이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동떨어지고 생소한 어떤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이 두 내용을 모두 자신이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보게 하는 것이 무언가를 일단 찾아내야 한다.
이름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전화번호부를 찾으면 자신이라고 볼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다.
대충 비슷하기에 자신이라고 여긴다면 먼 나라에 사는 어떤 사람이나 300 년전에 살았던 대충 비슷한 사람은 왜 자신이 아니라고 하는가를 또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처럼 생각하고 삶에 임해 업을 행해가면, 그런 형태로 3 악도에 끌려가서 극심하게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게 된다. 앞에 나열한 사례도 결국 대충 살며 어떤 주체가 매상황마다 만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벽돌에 맞고 장애를 겪고 저기서는 붙잡여서 손과 발이 잘려 끓는 물에 들어가고 ... 이런 식이 된다.
그래서 현실이 자신의 희망대로 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희망에 맞는 내용이란, 자신의 입장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경우는 늘 자신이 그것을 얻는 방안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쁘면 피해를 보상받거나 피해를 준 상대를 고통을 되돌려 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은 또 그렇지 않고 제외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런 희망은 다른 이들도 대부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임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그런 뜻이 뜻처럼 성취되지 못한다.
가피 중첩현상이 무량겁에 걸쳐 이어짐을 이해하려면, 무량겁에 걸쳐 그 각 내용을 이어줄 주체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부터 판단해야 한다.
어떤 이가 대충 과거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고 하자. 그런 경우 초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는 어떤 어린 아이는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교실에 있는 또 다른 어린 아이는 자신이 아니라고 파악한다. 이런 경우 그렇게 각 주체를 구별하게 하는 요소가 이 문제와 관련된다.
이런 문제에서 그렇게 각기 각 시기별로 내용이 다 다른 내용들을 하나의 주체로 보게 하는 요소를 무조건 U 라고 표시한 다음 이제 그 U 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그런데 수행에 있어서는 일단 그런 U 가 무량겁에 걸쳐 이어 존속한다면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피고 그런 바탕에서 그에 필요한 수행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한 주체가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외부 세계의 내용으로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또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으로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정신과 떨어진 외부물질로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이들을 객관적 실재라고 이해하는 것도 잘못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이제 현실에서 매 순간 또는 10 년 20 년에 걸쳐서 그렇게 매 순간 다른 형태의 내용을 놓고 다 함께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요소를 마음으로 일단 옮겨 오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그림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위 그림에서 1! 라고 표시한 것은 눈으로 보는 내용들을 나타낸다. 평소에 그런 내용 가운데에서 a!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삶에 임한다.
그림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면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는가를 먼저 확인해보자. 그리고 이 상태에서 자신이 차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어나서걸어간다면 이 상황에서 어느 부분을 놓고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눈으로 보는 내용 가운데 그런 부분을 위 그림에서는 a! 라고 일단 표시해 나타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대하면서 그 부분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할 때 그런 관념분별은 a@ 라고 표시하였다.
그런데 처음에 이렇게 생각하는 분별이 엉터리 분별이다.
이는 다음 의미다. 우선 그 관념분별 자체는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관념분별은 그런 감각현실을 구성요소로 갖는 것이 아니다.
또 반대로 그런 감각현실 자체는 그런 관념분별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관념분별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모든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 서로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 감각현실 가운데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일정 부분은 다시 다음 문제를 갖는다.
우선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그와 같은 관념분별 내용에 해당하거나 상응할 그런 내용(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관념분별 내용에 해당한 부분도 또 그런 감각현실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은 다음 사정들때문에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즉, 늘 눈을 뜨면 늘 파악된다. [상] 또 그 부분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변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걸어가고자 할 때 그 부분이 움직인다. 그래서 내 뜻에 들어맞아 즐거움을 준다. [락] 또 다른 외부 세계를 대상으로 삼아 내용을 파악하는 자신의 주관이 위치한 부분이다. [아] 그리고 대단히 깨끗하고 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여기면서 대한다. [정]
관념분별 영역에서 감각현실안의 일정부분을 대하며 앞과 같은 사정으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스스로 여긴다. 즉, 감각현실 영역에서 a!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부분은 그처럼 관념하는 '자신'에 상응하거나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다.
물론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자신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유하면 이번 생에 매 순간 그렇게 걸치고 다니는 옷과 같은 성격을 갖는 부분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a! 와 같은 부분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그 부분을 취하고 그에 머물러서 행해나가면 곤란하다. 경전에서 아상을 취하고 그에 머물러 행하면 수행자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고 『금강경』에서 제시한다.
따라서 이런 상태를 방지하려면 다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선 a! 와 같은 부분은 위 그림에서 #실재로 표시한 영역 즉, 현실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 지위에 있는 내용[실상]이 아니다.
또 한편 그런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실재는 공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그런 감각현실 내용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처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 한편 a! 와 같은 감각현실 부분에는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하는 관념분별 내용을 얻을 수 없음도 함께 잘 관해야 한다.
그래서 앞과 같은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붙잡고 늘어지면 안된다. 그래서 그런 전도망상분별 증상을 제거해야 한다.
현실에서 세모가 그려진 비닐과 큰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두개 겹쳐 놓으면 각 비닐에는 얻을 수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 보인다. 그래서 그 상황에 그런 도너츠가 각 비닐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위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 상태에서 일정부분이 자신이라거나 또는 영희나 철수나 책상이나 의자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 마치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관념내용에 해당한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자꾸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한편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그런 관념은 역시 자신이 그렇게 얻은 감각현실을 그 관념의 구성요소로 갖는다고 여기며 잘못 임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온갖 법은 온갖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이 집착하는 것같이
제 모양이 실제로 있지 않거늘
그들은 뒤바뀐 분별의 힘 때문에
실제로 있지 않은 가운데 실제로 있다는 생각을 내나니,
... 『대반야바라밀다경』 82. 불법품(佛法品)
이 내용은 쉽게 말해서 다음을 나타낸다. 현실에서 눈을 떠서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내용이 있지 않다. 그런데 그것을 대해 그런 생각을 일으켰기에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실제로 있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더 나아가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대로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내용은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러면서 집착을 갖고 자꾸 이를 대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붙잡고 이 부분을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이 위에 좋은 옷을 걸쳐야겠다고 한다고 집착한다.
또한 매 순간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을 마치 감각현실의 다른 부분과 달리 따로 가위로 오려 자신의 내용으로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 가운데 그 부분을 취하여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 부분을 중심으로 모든 뜻을 일으켜 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신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내용은 실재 영역에서도 그렇게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들 내용이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러나 한편 현실에서 이런 부분이 자신의 뜻과 함께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움직이는 것도 사실이다. 또 수행을 할 때도 결국 이런 부분을 놓고 수행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자신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결국 앞에서 설명한 자신과 그 자신이 입은 옷과 같은 관계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그림을 보고 다음 사정을 살펴야 한다.
일반적으로 처음 일정 부분이 갖는 특성 때문에 자신이라고 보게 된다. 앞에서 제시한 내용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은 사실은 위 그림에서 a! 와 같은 부분이 아님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50 년전 40년전 10 년전에 걸쳐서
매 순간 달라지는 다른 옷[몸]을 매 순간 자신이라고 보게 하는 것은 그림에서 갑A@ 라고 표시한 부분이다.
따라서 차라리 갑A@ 라고 표시한 부분을 처음 자신이라고 본 특성을 갖는 부분이며 자신의 본 정체라고 보는 것이 낫다.
그리고 결국 갑A@가 가리키는 각 부분 가운데 가장 근본되는 정신이 생사를 넘어서 계속 자신을 이어주는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 갑A@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처음 자신이라고 본 a! 는 그런 갑A@가 매 생 매 순간 임시적으로 걸치는 옷과 같은 관계에 있다. 물론 그런 옷이 삶이나 수행과정에서 전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도망상분별 증상에 바탕해 그런 옷에 불과한 부분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잘못 분별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 너무 집착을 가지면 문제가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업의 장애를 쌓게 되면 그로 인해 그런 근본정신이 그런 축생의 상태에 얹혀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현실에서도 별로 좋지 않다고 보는 곳 예를 들어 병원 입원실이나 교도소 등등에서 생활하게 되는 사정도 사실은 이와 마찬가지다.
세상에 생노병사를 겪기를 원해 겪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생노병사를 겪기를 원하지 않지만, 생사현실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처음 자신을 자신이라고 보게 된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자신이 움직이자고 생각하면 뜻에 따라 움직여서 즐거움을 준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몸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노병사 상황에서도 여전히 생멸하지 않고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생사고통을 주고 받는 가해와 피해의 중첩관계가 현실의 생사를 넘어 무량하게 이어진다는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기초적으로 무한한 시간에 걸쳐 이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에 위치하고 있지 않음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과 자신의 마음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먼저 비유를 들어서 살펴보자.
자신이 평소 한 일주일간 같은 옷을 입고 지내다가, 일주일 후 다른 옷을 입는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 때 이 옷을 놓고 판단하면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하는 특성이 모두 이 옷에서도 파악된다.
이는 다음 내용과 관련된다.
처음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세상 모습 가운데 어떤 부분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그 부분이 다음 특성들을 갖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자신으로 보는 부분은 늘 눈을 뜨면 파악되는데 반해 주변의 다른 의자나 책상 등은 들고 나고 하며 그렇지 않다. [ 상 ]
또 자신으로 보는 부분은 자신이 뜻을 일으켜서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면 그 부분만 그 뜻에 따라 움직이고 다른 책상이나 의자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이 자신의 뜻에 맞게 변화가 이뤄져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이 부분이 자신이다. [ 락 ]
그리고 이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닿으면 그 때 촉감도 느끼는 것이어서 이 부분은 주관이 위치하는 것이고 다른 부분은 이 주관이 상대하는 외부대상이다. [아 ]
그리고 이 부분은 다른 파리나 문어 바퀴벌레 메뚜기와 달리 내장도 깨끗하고 겉모양도 아름답고 우주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귀하고 가치있다. [정]
이런 사정으로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삶에 임한다.
그런데 1 주일간 자신이 늘 걸치는 옷을 놓고 살피면 이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정에서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것은 알고보면 자신이 이 생에서 매 순간 걸치고 있는 옷과 같다. 그러나 그것뿐이고, 그런 부분은 실다운 자신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평소 자신이 대하는 현실 한단면을 붙잡고 그 본 정체가 무언가도 잘 확인해야 한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눈을 떠 대하는 현실 내용을 놓고 그것이 곧 외부 세상의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자신의 주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또 정신과는 떨어져 있고 정신과는 별개인 외부 물질로 잘못 여긴다.
또 자신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서 모든 주체가 함께 같은 내용을 얻게 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여긴다.
그런 내용은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맺힌 마음내용이다. 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다. 실재는 공하다. 따라서 그런 내용은 실답지 않다. 그래서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앞의 옷의 비유와 같이 사실은 옷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옷이 어떤 기계에 빨려 들어가거나 할 때 그 옷을 그냥 버리고 나와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이가 그런 옷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 옷이 찢어지는 상황에서도 그 옷을 집착하여 그 옷을 붙잡고 기계에 함께 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옷과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런 비유로 현실의 문제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실다운 자신이 아닌 어떤 내용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에 집착을 갖는다. 그런 가운데 그에 바탕해 온갖 쓸데없는 소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을 불잡고 추구해나간다. 그렇게 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생사고통의 해결이 문제된다.
그래서 하나의 현실 단면을 놓고 왜 이것이 자신이 이해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가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 생리학자들은 마음현상을 외부물질과 육체내 물질이 서로 자극 반응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현실에 있다고 하는 입장이 위와 같은 입장과 같은 입장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는 결국 현실에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그처럼 시설해 제시하게 되는 사정을 살피는 문제가 된다.
『수능엄경』에서 부처님이 종을 울려 소리가 나게 한후 아난 존자에게 그 상황에서 소리가 '들리는가'라고 묻고 소리가 '나는가'라고 묻는 내용이 나온다. 이 부분은 마음을 시설해 제시하는 부분과 관련이 된다.
마음 현상의 각 관계를 다음 그림처럼 그려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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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마음의 부분을 위 그림처럼 동그라미 형태로 표시해 제시하려면 먼저 행해야 할 작업이 있다.
우리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볼 때 그런 내용은 보기도 하고 또 손을 대면 촉감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문제삼는 마음은 일단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무엇이 '있다'고 할 때는 무언가 눈으로 보거나 다른 감관을 통해서 일정한 내용을 얻기에 그런 것이 '있다'고 관념분별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문제삼은 마음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과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렇게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이 '있다'고 하고 그런 마음을 그렇게 '시설'하여 제시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제시하는가를 이어 살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왜 그런 마음이 육체의 사멸과 관계없이 계속 생사를 넘어 무량겁에 걸쳐 그렇게 이어지는가를 또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무량겁에 걸쳐서 과보를 받는 사정을 이해하는데에도 필요하다.
즉, 어떤 주체가 행한 업이 있을 때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다.
그래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으며 가해와 피해를 중첩해 받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살핌에 있어서 어떤 주체가 무량겁에 걸쳐 생사과정을 따라 관찰하고 난 후 지금 시점으로 되돌아와 보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수학에서 무한한 자연수를 증명하는 것은 무한한 수를 일일히 나열해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1, 2, 3 과 같은 자연수를 놓고 이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관계를 파악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무한을 파악하게 된다. 즉, 아무리 큰 수를 놓는다해도 역시 그에 이어지는 다음 수를 이어 제시할 수 있기에 자연수를 무한하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서 이어지는 마음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론상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육체와 마음의 관계를 놓고 살필 때 우선 다음과 같은 입장이 있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나 영희 철수의 몸(육체)으로 보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자극- 반응의 관계로 마음현상을 이해한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자극 반응을 행하는 그런 육체가 사멸되면 마음현상은 없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는 어떤 생명의 육체로 보는 부분이 소멸되면 그 생명은 이후 끝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그 부분은 그런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이 먼저 존재하는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걸치게 된 옷과 같은 것이다. 위에 나타낸 그림은 그런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처음 어떤 생명이 생을 시작하는 최초의 단계를 살필 때 먼저 그런 마음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바탕에서는 지금 자신이 보는 그런 내용 역시 얻어지지 않음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현실단면을 놓고서도 지금과 그 직전, 그 직후의 관계를 통해서 그 관계를 살펴야 한다. 한편 그 관계가 무량겁을 걸쳐 달라질 사정이 없음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무량겁에 걸쳐 그것이 이어져 존속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육체와 마음의 관계에서 마음이 먼저 선행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 선행하지 않으면 현재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그런 몸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 어떤 이가 죽은 후에 지렁이가 되어서 생활하게 된다면 그 경우도 사정이 이와 같음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으로 생활하다가 지렁이 몸을 받아 생활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정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갓난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하튼 시간이 지나면 갓난아이가 인간 세계에 익숙해지듯 익숙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황이나 지금 상황이나 근본정신이 작용하는 관계가 각 상황에서 달라질 특별한 사정이 없다.
그런데 그런 관계는 확인하기 힘든 무량겁 전이나 무량겁 후의 시간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이 현실단면에서 적용된다.
마치 무한한 자연수 문제는 무량 아승기수 부분에서만 적용되지 않고 지금 1 에다 1을 더하는 단계부터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이뤄지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눈을 뜨고 무엇을 볼 때 도대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떤 성격을 갖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것은 또 한편 그런 마음을 그처럼 있다고 시설해야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아니면 생리학자처럼 단순히 육체내의 물질의 자극-반응의 관계로 마음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가를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연못에 돌을 하나 던지면 그 이후 파장이 일어나서 파장이 점점 물가로 가 닿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무언가를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이런 물질간의 자극 - 반응 관계로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물체 - 빛의 반사 - 동공 - 시신경 로돕신의 흥분 -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마음을 이해하는 생리학자의 견해부터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취할 경우에는 결국 그런 자극 반응관계가 이뤄질 만한 육체가 소멸된 경우 마음과 관련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엉터리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생리학자가 물질의 자극 반응 관계라고 이해하면서
관찰하고 보고한 내용을 먼저 잘 붙잡아 살펴보자. 그런 경우 이들 내용자체가 어디에서 얻는 내용인가부터 문제다. 알고보면 그 내용이 바로 그런 생리학자의 마음안에 얻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관계를 거꾸로 이해하고 보고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하튼 이렇게 기본 사정을 이해하고 이들 문제를 살펴나가야 한다.
이제 마음 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왜 '있다'고 시설하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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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서는 문제되는 마음을 1,2,3,4,5,6,7,8, 이런 식으로 동그라미로 그려 놓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과연 마음을 그렇게 그려 시설해 제시할 근거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이다.
현실에서 눈으로 보게 되는 1! 에서 그 가운데 한 부분인 a! 와 같은 부분을 대한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앞에 나열한 여러 특성 [상-락-아-정]을 갖기에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평소 대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임하게 된 근본사정은 사실은 처음 생을 시작할 때 8 과 7 의 관계에서 7 식이 그렇게 망집을 일으켜 엉뚱한 부분을 붙잡은 데에서부터 그것이 시작됨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런 근본정신 8 과 7 식과 함께 이후 각 내용들이 분화 생성한다. 그리고 이후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 태어나 삶을 출발하게 된다. 그러면 눈을 통해 얻는 1!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리고 분별영역 [6]에서는 a!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자.
만일 현실에서 관념분별을 행하는 제6 식에서 1! 영역안에서 어떤 벽이나 책상에 해당한다고 보는 부분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는 얼마나 엉뚱한가. 그런데 이런 엉터리 가정처럼 처음 7 식이 8 식의 내용을 놓고 그렇게 임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현실과 같은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즉, 처음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분화된 7 식이 일정 부분을 대하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망집을 일으키며 붙잡고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한 주체가 지금 대하는 현실 형태처럼 삶을 살게 된 출발점이다.
이런 경우 만일 그 부분이 다행히 상태가 좋은 인간이나 하늘 생명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만일 병정개미나 바퀴벌레 형태면 병정개미나 바퀴벌레로 태어나 살아간다. 또 지렁이면 지렁이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삶을 출발한 바탕에서는 이후 생성된 제 6식이 분별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이후 눈으로 보는 내용 가운데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게 된다.
물론 이런 기본 사정을 기준으로 한다면 분별을 행하는 제 6 식의 망상분별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즉, 그것은 처음 7 식의 망상분별에 바탕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이 7 식이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부분이 가장 근본 문제다. 즉, 이 부분이 한 주체가 현실에서 행하는 모든 망상분별 집착의 근본이자
그런 망상분별의 총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 7식은 그 주체가 의식을 잃거나 식물인간이 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꾸준히 임하게 된다.
이런 제 7 식이 갖는 망집 증상을 불교 전문용어로는 아견 아치 아애 아만이라고 표현한다.
여하튼 바로 이 제 7 식에서 엉터리 망집을 처음 일으켰기에 이후 그 바탕에서 현재 그 주체가 대하는 형태로 생을 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제 6 식에서는 또 제 6 식대로 연쇄적으로 3 번째 공중 회전에 해당한 망집을 또 일으킨다. 그래서 이 망상분별을 증폭시켜 나가게 된다.
즉, 현실 표면에서 예를 들어 눈을 통해 1!과 같은 영역에서 보게 되는 그런 부분을 놓고 그 일부인 a! 부분은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또 외부세계나 외부대상 외부물질이라거나 객관적 실재로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대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쓸데없는 소원을 무한히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행위[업]를 행한다. 그리고 이후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칼이 손에서 피를 흐르게 했다면 손에서 피가 흐르는 증상이 나타나 문제다. 그런데 이 증상은 그 주체를 출혈로 사망하게 하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만일 처음에 7 식이 조금 똑똑해서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와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앞의 그림처럼 갑A@ 의 형태로 자신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했다면 사정이 다를 수 있다.
또 만일 지금 분별을 행하는 제 6식에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한다면 다르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과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지하면 이와는 다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의 방향으로 임하면 이와 다르다. 또는 아예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12,3,4,5,6,7 식들이 전혀 분화생성되지 않았다면 또 이와 다르다. 그래서 이런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
한편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할 경우에는 자신이 어떤 세계에 임해서 수행을 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머물러서
이와 같은 선교한 방편을 성취하나니,
이 선교한 방편의 힘에 의하여
10방으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에 가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그 유정들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나
그 가운데는 도무지 물들고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에 도무지 얻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물들게 하는 것과 물드는 인연을 도무지 얻을 수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온갖 법의 제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
『대반야바라밀다경』 81 정정품
여하튼 이런 사정으로 1,2,3,4,5,6,7,8, 과 같은 정신이 공한 실상의 바탕에서 공중 3 회전에 해당한 망집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런 배경사정을 바탕으로 지금 현실에서 자신이 눈으로 얻는 그런 내용을 놓고 그렇게 망상분별을 일으켜 임하게 된다.
따라서 이 사정을 잘 이해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에 잘 임해야 한다.
한편 또 반대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할 때는 마찬가지로 이런 생사현실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런 중생이 묶여 있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그런 중생의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이런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그런 수행을 통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수행과 관련된다.
그림에서는 이들 마음을 미리 그려 놓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처음 눈을 통해 얻는 내용부터 과연 그런 마음이 따로 있다고 시설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하나하나 살펴야 한다.
마음의 존부 문제를 살필 때는 어려움이 많다. 마음은 어떤 주체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에 이를 살피기에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있고 없음'은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것인가. 그냥 있다고 주장하면 있는 것인가. 또 없다고 그냥 주장하면 없는 것인가.
앞 그림에서는 마음을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그런데 그 동그라미를 지워버리면 눈을 떠 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게 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한편 그림에서는 마음을 동그라미 형태로 단순히 표시했지만, 혹시 마음은 네모라거나 세모와 같은 특정한 형태를 갖는 것은 아닌가도 살펴야 한다.
또 모기의 경우는 그 크기가 1 밀리미터 정도 밖에 안된다. 그런데 공룡은 3 M 정도가 된다. 그러니 마음도 이에 비례해서 크고 작은가도 살펴야 한다.
우선 이 마음을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있다고 시설하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만일 그것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진다면 문제가 간단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한 주체를 놓고 그런 마음을 넣고 빼고 할 수 있다면 문제가 간단할 수 있다. 그런 경우 마음의 존재가 문제된다면 현실 상황에서 그 마음을 넣고 빼고 해서 그 차이를 관찰할 수 있다면 명확하게 그 관계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종이에 불을 붙여 연기가 난다고 할 때 그 연기가 종이 때문인가 아니면 바닥에 있는 신발때문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상황에서 종이를 넣고 빼고 해볼 때 연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이 관계가 있다고 볼 것이다. 한편 그 상황에서 바닥에 놓여 있는 신발을 넣고 빼고 해도 연기의 발생에 별 차이가 없다면, 이는 서로간에 관계가 있다고 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들의 관계가 문제된다면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관계를 살필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의 문제에서는 이런 관찰이 곤란하다. 자신의 마음현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자신의 마음을 매 순간 넣고 빼고 해보면서 그 차이를 관찰하고 분별하기 곤란하다.
한편 그런 사정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예를 들어 영희나 철수 또는 다른 생명 메뚜기나 박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마음을 빼고 넣고자 해도 문제삼는 마음이 보이고 만져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실험 자체가 벌써 곤란하다.
그러니 이런 특성을 갖는 마음을 어떻게 '있다'고 시설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한 주체가 얻는 현실 내용은 그런 마음 때문에 얻는다고 제시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수능엄경』과 같은 경전에서
마음을 시설하게 되는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즉, 종을 울리고 나서 그 종소리가 들리는가. 이렇게 한 번 질문을 제기한다.
그 다음 다시 또 종을 울리고 나서 이번에는 그 종소리가 나는가. 이렇게 한 번 질문을 제시한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내용을 놓고 마음이 있어야 그렇게 된다는 사정을 살펴나게 된다.
한편, 『수능엄경』에서는 마음이 있는 위치나 마음의 크기나 생멸유무나 마음과 마음내용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제시하는 한편 현실적으로 실용적인 다음 내용도 함께 제시한다.
즉 살아가는 동안 마음 안에 정이 5 분 이상이면 축생 정이 7 분 이상이면 아귀 정이 9 분 이상이면 지옥 진입을 하게 됨을 제시한다. .
그리고 망집 현상이 심하고 업의 장애가 심해 순전히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임하면 그로 인해 화륜(火輪)을 뚫고 내려가서
풍륜(風輪)과 화륜(火輪)이 맞닿아 지나는 곳에서 몸을 받아 삶을 시작하게 됨을 제시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지구나 세계에 대해 지구는 땅덩어리가 액체성분인 마그마 위에 떠 있고 그 밑에는 다시 기체로 된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이는 지구 속으로 직접 들어가 관찰한 것은 아니더라도 전파의 반사를 통해서 그처럼 각 부분에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구는 전체적으로 허공과 같은 공간에 다른 별들과 함께 그냥 떠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깊은 심해에도 생명이 살고 있고 지질 탐사반이 몇 킬로 땅을 파보아도 그 흙안에도 세균이 발견된다고 보고한다.
그런데 불교경전에서는 이를 수륜 화륜 풍륜 이런 식으로 표현해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모기와 코끼리 사이에 그 근본 정신의 크기가 차이가 있는가라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화엄경』에서는 지구와 티끌사이의 비율로 세계를 계속 미분해나가도 다시 세계가 있고 또 그 세계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도 있다고 제시한다.
또 반대로 오늘날 천문학자가 하나의 은하로 보는 그런 크기의 우주를 그저 책상 정도로 여기고 대하는 수행자도 있다고 제시한다.
이런 경전 내용은 터무니없이 지어낸 내용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자체는 일단 망집을 기준으로 이를 대하기에 그렇게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현상을 이해하려면 종을 울리고 나서 이 상황에서 종소리가 '나는가' 하는 질문과 종소리가 '들리는가' 하는 질문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마음의 문제를 살필 때 어떤 주체에게서 그 문제되는 마음을 붙잡고 넣고 빼고 하면서 이 차이를 분별해서 살필 수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도 마음을 있다고 시설하는 사정은 바로 위 내용이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를 수 있따. 그런데 그것은 그런 내용을 저장해놓은 마음이 따로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어떤 자극이 어떤 반응회로에 들어가서 육체의 한 부분에 무언가를 띄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도 잘 살펴야 한다. 이런 문제도 마음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생리학자는 자극 반응을 a => b => C 이렇게 수식으로 표현하고 이런 과정을 정신 마음 현상으로 단순히 이해한다. 이런 입장은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이후 살피기로 한다.
먼저 부처님이 종을 울리고 나서 아난 존자에게 종소리가 '나는가' 이렇게 묻는다. 그 다음 또 종소리가 '들리는가' 이렇게 질문하신다.
마음은 한 주체가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그리고 또 어떤 주체에게서 마음을 빼고 넣고 하면서 관찰할 수도 없다. 그런 가운데 마음이 있다고 시설하는 사정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처음 종을 울리고 나서 그 상황에서 '종소리가 나는가'라고 물은 것은 결국 오늘날 생리학자가 이해하듯 이 내용을 이해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 말을 식으로 다시 나타내보자.
처음 자극과 반응의 관계식을 a => b => C 와 같이 표시해보기로 하자.
여기서 우선 a 와 같은 기호를 종이라고 이해해보자. 그런데 a 와 같은 종을 그대로 두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제 그 종을 무언가 b 로 표시한 막대기를 부딪히고 때리면 이제 그에 따라 일련의 반응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게 되는 종소리를 일단 C 라고 표기해보기로 하자.
그리고 대충, 위 식이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고 보면 이제 단순한 a 의 상태와 a => b => C 의 의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종을 때려서 종소리가 '나는가' 하는 물음은 어떤 상태가 종이 그대로 있는 a 의 상태인가
아니면 a => b => C 의 상태인가를 물어 본 것이다.
만일 어떤 주체가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하는 과정이 생리학자가 이해하는 것처럼 물질사이의 자극 - 반응 관계라고 한다면 a 의 상태에서 a => b => C 의 상태가 되는 변화를 놓고 곧 마음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를 먼저 물은 것이다.
그런데 두번째로 부처님께서 이 상황과 비슷하게 다시 종을 치고서 그 소리가 들리는가 이렇게 물은 것은 위와 같이 이해하지 않고 마음이 있어서 그것을 듣는가. 아닌가를 물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 여기에 다시 다음과 같은 식을 하나 더 추가해 구별해야 한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삼는 그 마음은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므로 ( ) 이런 기호로 표시하기로 하자.
이제 종을 치고 나서 종소리를 듣는가라는 질문은 다음 형태로 나타내보자.
a => b => C ( )
a => b => C ( C` )
이 두 식은 다음을 나타낸다. 앞 식은 그런 소리가 나는데 그러나 마음에서 그 소리를 얻지 못해 듣지 못하는 경우를 나타낸다. 그리고 뒤 식은 그런 소리를 마음이 얻어 듣는 경우를 나타낸다.
마음을 시설하고자 할 때 만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도 소리를 듣게 된다면 위 식은 처음에 제시한 식과 별 의미차이가 없다.
그래서 다시 위에 나열한 식들을 나열해보자.
a [ 단순한 a의 상태] a => b => C
a => b => C ( )
a => b => C ( C` )
이렇게 4 개의 식을 놓고 차이를 살펴 보자.
이제 무언가를 듣는 현상은 생리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마음이 없어도 설명되는가. 아니면 그와 달리 위 식처럼 그 형체를 보지 못하고 만지지는 못하지만, 여하튼 ( ) 로 표시한 것과 같은 마음이 있고 그런 마음이 개입해야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볼 것인가를 살펴보자.
마음이 없이도 소리를 듣는다고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처음 식과 나머지 3 식은 구별된다. 그러나 나머지 3 식은 모두 다 같은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하게 된다. 이 입장에서는 마음을 표시한 ( )부분은 본래 없는 내용이므로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마음이 소리를 듣는 과정에서 관계하고 마음이 없는 경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위 4 식은 다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런 식을 놓고 현실은 이 가운데 어떤 형태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신이나 관찰자 입장에서 종을 막대로 두드려서 눈으로 보는 모습이던지 아니면 귀로 듣게 되는 소리가 객관적으로 발생한다고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그리고 앞에서 나열한 3 가지 형태처럼 어떤 주체가 그것을 듣거나 듣지 못하는 등의 차이가 있는 경우가 현실에서 발견되는가 . 아니면 무조건 위 3 경우는 다 같다고 보게 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어떤 내용을 얻는 과정을 살피면 결국 위 각각의 식과 같은 차별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차이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어떤 내용을 감각하는 것은 그러한 마음을 따로 시설하고 그런 마음을 전제로해야만 한다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또 육체가 사라지면 그에 따라 마음현상도 설정할 수 없다고 보는 생리학자의 입장은 잘못임도 함께 나타낸다.
이렇게 대강의 골격을 미리 살핀 가운데 해당 경전부분을 붙여서 다시 살펴보자.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에게 들리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들린다 하고,
또 내가 너희들에게
소리가 나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소리가 난다고 하면서
'예, 들립니다. 소리가 납니다'라는 대답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러한 것이 교란이 아니고 무엇이냐.
아난아,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없으면
너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으나,
만일 참으로 영 듣지 못한다면,
듣는 성품이 이미 사라져서
마른 나무와 같을 텐데,
종을 다시 쳤을 때
소리가 나는 줄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나는 줄 알고 없어진 줄 아는 작용은
소리의 경계가 스스로 없기도 하고 나기도 할 뿐인데,
저 듣는 성품이 어떻게 네게 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겠느냐.
또 참으로 듣는 작용이 아주 없다면,
무엇이 없어지는 줄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가 듣는 가운데 스스로 생기고 사라질지언정,
네가 소리의 생겨남과 소리의 사라짐을 듣는다고 해서,
너의 듣는 성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 아니니라.
너는 오히려 뒤바뀌었으니
소리를 헷갈려 듣는 작용으로 여기고
영원[상常]을 단멸[단斷]로 혼미한들
어찌 괴이한 일이겠느냐 만은,
끝내 마땅히
온갖 움직이고 조용함의
닫히고 막힘과
열리고 통함을 떠나서는
듣는 작용은 성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마치 잠이 무거운 사람이
평상[상침床枕]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그 집안 사람이 그가 자는 사이에 비단의 다듬이질을 하면서 방아를 찌면,
그 사람은 꿈속에서 절구질과 다듬이질 소리를
다른 물건의 소리로 여기고
북 소리든지 종소리로 들으면서,
꿈꾸는 동안에 스스로
'웬 종이 나무와 돌 소리를 내는 것일까'하고 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었을 때,
절구소리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꿈속에서
이 방아 찧는 소리를
북 치는 소리로 잘못 알았구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참조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K0426 T0945
결국 경전에 제시된 위 내용은 앞에서 나열한 여러 식 사이에서 차이가 있고 따라서 그런 차이가 있게 하는 마음이 있다고 시설해야 함을 나타낸다.
a [ 단순한 a의 상태]
a => b => C
a => b => C ( )
a => b => C ( C' )
이 4 가지 식의 차이는 무언가에 대해서 서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처음 식은 종소리를 놓고 생각하면 종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이다.
나머지 3 식은 모두 관찰자 입장에서 종소리가 나는 상황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그 소리를 마음에서 얻는다고 보게 되는 경우고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차이는 소리가 나고 안 나고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에 의존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사례는 현실에서는 경전에서 드는 사례와 같다. 즉, 잠이 들었을 때 옆에서 분명 소리가 나는데도 어떤 주체가 명확히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경계점에서 소리를 명확하게 듣게 되는 그 상태를 놓고 살피면 위 식처럼 각 경우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을 듣는 문제를 단순히 a => b => C 의 문제로 놓고 살피면 곤란하다.
마음을 처음 시설하게 되는 사정을 이와 같이 살폈다.
근본정신이 무량겁에 걸쳐서 상속하고 이어진다는 내용도 앞에서 이미 대강 제시했다. 그런데 그 전에 현실에서 각 내용과 관련된 각각의 정신을 있다고 시설하게 되는 사정도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무량겁에 걸쳐서 이들 문제를 대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단멸관을 잘 정리해야 한다. 즉, 자신의 몸으로 보는 부분이 장례식장에 들어가고 화장터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기는 단멸관도 잘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시력도 나빠지고 모습도 변화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눈으로 보는 그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눈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 마음과 앞에서 나열한 1,2,3,4,5,6,7,8 이런 정신들의 기본 재료가 그 성품이나 모양이 같은가 다른가도 살펴야 한다.
또 마음에 어떤 전후 방위나 대소 크기가 있고 마음이 생멸함이 있는가도 살펴야 한다.
또 마음이 위치하는 장소가 현실에서 자신이나 생리학자나 의사 과학자가 이해하듯 자신이 거울로 보는 그런 머리 안에 위치한 것으로 볼 것인가도 살펴야 한다.
여하튼 이런 문제를 경전에서 부처님이 잘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관계된 부분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바빠서 수리를 미뤘지만, 최근 수리를 했는데도 여전히 예술작품 사진 공양 부분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해 올려진다.
그래서 같은 그림이 자꾸 두번씩 나온다. 그런데 이 그림은 여인이 옷을 벗은 상태에서 자해를 행하는 그림이다. 현실상황이면 섬찍한 일이다.
TV방송에서는 예술품의 배경을 설명하는 분이 있다. 그래서 이런 분에게 의뢰하면 한 2,3 시간에 걸쳐 그림에 얽힌 사연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가피 중첩 현상과 생사고통 문제를 살피기에 이 그림을 이렇게 해석해보게 된다.
노래를 올려 놓고 듣다 보니 거북이가 등장한다.
그런데 불교 경전에 아주 유명한 거북이가 등장한다. 바다와 거북이를 놓고 확률을 비유로 표시하는 내용이다. 일단 바다와 거북이를 놓고 보면 그 표면적의 비율이 대단히 차이가 많다. 그런데 그런 넓은 바다에 구멍난 널판지가 하나 떠 다닌다. 그리고 거북이는 거북이대로 눈 먼 거북이다. 그런 눈 먼 거북이가 100 년에 한 번 바다로 떠오른다. 그런데 그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그 널판지를 만나 그 널판지 구멍에 거북이 머리를 넣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맹구(귀)부복이라는 사자성어가 의미하는 내용이다.
이는 한 생명이 전도망상을 일으켜서 앞과 같이 생사현실에 묶여 돌아다니는 상태에서 이를 벗어날 확률을 비유한다.
그런데 불어 노래에서 이런 거북이를 한국어로 듣게 되는 확률도 그만큼 희박하다. 그런데 노래에서 대충 쌍동이란 말도 들린다. 눈먼 거북이가 결국 쌍동이란 이야기인 것 같다.
각 주체는 가피 중첩 현상을 일으키며 업의 장애를 일으키고 그에 스스로 묶인다. 그런데 이런 각 주체가 모두 그 반응 형태나 자세가 엇비슷하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일란성 쌍동이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생사현실에서 가해와 피해관계를 중첩시키는 각 주체들이 일란성 쌍동이와 같은 상태가 아니면 그 가운데 하나라도 그렇게 행하지 않게 된다. 또 그렇게 되면 사실은 그런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노래를 듣다보니 거북이에 대한 또 다른 노래를 부른 가수를 보게 된다. 이 노래는 처음 불어노래를 대할 시점에 들었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글자를 입력하는 가운데 영문이 들어가면 오타가 많이 발생한다. 일단 오타를 줄이려면 핫키를 사용하는 것이 편하다. 그런 가운데 앞에서 제시한 식을 일단 에이,L, 로 축약을 해 놓았다. 여기서 에이,L,을 표기하는데 자판을 8 번 이상 눌러 겨우 입력했다.
일단 영문은 키를 영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쉬프트키를 사용해야 원하는 글자가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한영 전환키는 하나의 키가 한글 영문 양쪽 전환을 다 담당한다. 그리고 경험상 반응속도에도 조금 차이가 있다. 그래서 여하튼 매번 오작동을 경험한다.
그래서 a => b => C 이런 식을 한글과 함께 입력하면 입력 과정에서 상당히 오타가 많이 발생한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https://www.youtube.com/watch?v=4xEzqR5NAFA
♥ 잡담 ♥스크립트 오류와 오타문제
같은 사진이 3 번째 뽑혀 나온다. 그래서 스크립트를 살펴보니
해당 예술작품을 뽑아내는 부분에서 RANDOM 명령어가 빠져 있다. 그러나 다시 뽑아내는 것이 성가시므로 그냥 이어서 쓰기로 한다.
쉬는 동안 방송에서 1500 년대 무렵의 화가가 그린 몇천만불하는 그림이
나중에는 은화 몇개에 팔려서 아일랜드까지 흘러가게 된 사연을 보았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사연도 사연이지만, 이후 그 그림이 이런 저런 경로로 옮겨 다니고 나중에 다시 전문가에 의해 진품인 것이 확인되어서 그 가치를 다시 인정받게 되는 경로도 참 다양하다.
스크립트를 수정했는데 같은 그림이 연속해 나타나는 현상은 왜일까. 수학적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본다. 매번 이런 에러를 경험하는 데는 자신이 알지못하는 착오현상이 있다.
컴퓨터는 컴퓨터대로 메모리나 작업처리시간에 어떤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또 테스트를 하며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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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진 노래를 듣다보니 분하다 100 세 이런 메세지가 들린다. 현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은 별 차이가 없다.
경전에서는 이 100 년의 삶의 기간을 어떻게 임하는 가에 따라 대단히 큰 차이가 있음을 제시한다. 즉,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겪으면서 헤맬 수도 있다. 그러나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수명과 무량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원만히 구족해 성불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차이가 크다.
글을 마치는 가운데
추가 보충설명을 붙이면서
스크립트를 테스트해보니 이번에는 별 이상이 없다.
그런데 여하튼 조금씩 에러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각 명령을 처리하는 시간에 문제가 있어 그런 것으로 보게 된다.
무량겁에 걸쳐 일어나는 가해와 피해 관계의 중첩현상을 살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음을 시설하게 되는 기본 사정도 함께 살폈다.
또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지 않게 될 것인가도 문제된다. 그런데 이는 이미 살폈다.
즉, 수행을 통해서 무량겁에 걸쳐 받는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행해야 한다. 그래서 복덕과 지혜 자량을 갖추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정이 이 조각글에서 살핀 『대반야바라밀다경』에 제시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살피는 가운데 『수능엄경』에서 제시되는 내용까지 살폈다.
경전은 각 경전별로 다 제각각 내용을 따로 제시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알고보면 부처님이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유기적으로 수행자의 상황과 단계별로 각 내용을 그렇게 나누어 제시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각 경전마다 그런 소설을 제시한 소설가가 따로 있다고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하튼 반야경전을 살피는 가운데 『수능엄경』을 살펴도 문제가 없다.
Lab value 불기2563/05/23/목/21:14 * 글을 여러 차례재정리하면서 잡담성 글을 한 부분에 몰아서 붙이고 정리를 다시 했다.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mus0fl--JOE DASSIN - L'EtIndien.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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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ézanne_Bibémus_02.jpg Summary[edit] Bibémus quarries, Aix-en-Provence, France. The Bibémus quarries were a frequent theme in Cézanne's paintings. Carrières de Bibémus, Aix-en-Provence, France. Les Carrières de Bibémus figurent souvent dans les tableaux de Cézanne. Personal photo, July 2006. Photo personnelle, juillet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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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Roman. Production in Japan. 浪漫。レンガ色が特徴。 Date 31 October 2009, 15:14 Source Rose, Roman Author Yoko Nekonomania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