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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05-03_금강반야바라밀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05-03_금강반야바라밀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5. 3. 12:08



®


『금강반야바라밀경』
K0014
T0236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금강반야바라밀경_K0014_T0236 핵심요약



♣0014-001♧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


이와 같이 법상(法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법상이라고 말하는데 

♣0014-001♧ 그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설하며 이는 이름이 법상이니라. 


>>>

♣0014-001♧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별 같고 그늘[翳] 같고 등불 같고 허깨비 같으며 

이슬 같고 물거품 같고 꿈 같고 번개 같고 구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vthf1484

◈Lab value 불기2562/05/03/목/12:08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Veronique Sanson - Annecy.lrc



♥ 잡담 ♥기준의 차이와 주춧돌과 시금석


이전 글에서 같은 돌에 발이 걸려도 
어떤 이는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는 디딤돌이라고 여긴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이는 수행에 있어서도 사정이 같다고 본다. 

요즘 사진 앨범을 제작하는 등으로 
디스크 정리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기존에 사용하던 컴퓨터가 이 작업에 점유되어서 
아예 문서작업을 하는 컴퓨터를 옮겼다. 

그런데 컴퓨터를 오가면서 작업을 하려니 
여전히 정신이 산만하다. 

수행자가 다른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임한다고 할 때 
다른 중생의 번뇌를 제거해주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번뇌를 들여다보면서 
같이 마음이 안타깝게 되고 
자신도 같이 번뇌를 일으키게 되기 쉽다. 

그런데 그러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수행에 임하는 이가 
다른 중생의 번뇌로 인해 그 번뇌에 같이 물들어 
자신도 번뇌를 일으켜 전체적으로 번뇌가 증가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 상대의 번뇌도 제거되고 자신의 번뇌도 함께 제거되면 물론 좋지만,
현실에서 번뇌가 그렇게 쉽게 쉽게 잘 제거되지 않는 것이 일반이라고 본다면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이 번뇌를 더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의 번뇌에 대해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이를 대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기는 하지만, 
그러나 수행자가 이로 인해 번뇌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고 보게 된다. 

지금까지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내용을 많이 제시했는데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런 내용을 받아들여서 
수행으로 전환해 나오는 사례는 희박하다고 본다. 
그만큼 현실에서 전도망상을 일으키고 이에 집착하고 
붙들려 있는 그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생멸문과 해탈문을 오가면서 
이 경계선에 위치하게 되면 
수행자 자신도 사실 오락가락하게 마련이다. 

생사현실 안에서 어떤 문제를 대하고 그것을 그렇게 보면
그 상황에 그런 문제가 수없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실상 진여의 측면에서 이를 대하면 
그것은 하등 얻을 수 없고 문제되지 않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본래 생사를 얻을 수 없는 청정한 진여 실상의 측면을 가지고 
현실을 대하면 그 현실이 모두 청정하다고 보게 되고 
세상에서 문제삼는 온갖 번뇌나 문제도 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에 임해 온갖 생사고통을 
대단히 진지하게 받아나가는 입장을 놓고 보면 
그 하나하나가 대단히 심각한 문제상황이라고 보는 
양 측면이 수행자가 생사현실 안에서 임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양 측면을 오락가락하면 
수행자 자신도 사실 오락가락하게 되는 면이 분명 있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것이다. 

중심을 잘 잡지 못하면 
번뇌에 물든 생사현실의 진흙탕 연못에서
연꽃처럼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자신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다른 중생도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여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고자 하는 수행은 
쉽게 실현되지 못한다고 본다. 

중생의 번뇌 문제를 해결하려다 
수행자 자신부터 무량한 번뇌에
연꽃 줄기가 꺽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전 조각글에서 같은 돌에 걸려 넘어져도 
의지가 강한 이는 디딤돌로 여기고 
의지가 약한 이는 걸림돌로 여긴다고 내용을 소개했는데 
돌을 놓고 생각하니 
수많은 돌들의 명칭이 달리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시간에 배운 선돌 고인돌도 떠오르고 
또 맷돌도 떠오르고 
또 주춧돌이나 머릿돌 시금석 이런 돌들도 
떠오른다. 

같은 돌이라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기능이 다른 것이다. 

여기서 시금석이란 어려운 표현은 
귀금속의 순도를 판별하기 위해 현무암을 사용하는 것을 놓고 
이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어떤 상태나 능력, 가치, 정체 등을 판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돌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에서 발에 걸리우는 돌이 디딤돌이 되는가 
걸림돌이 되는가가 달라진다면 
이처럼 발에 걸리우는 돌 하나도
그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이의 상태를 테스트하는
하나의 시금석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 돌에 걸려서 넘어질 때 그 상대가 그것을 장애로 여기는가 
아니면 그것을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여기고 대하는가가 달라지는데 
그것이 바로 그 돌이 그런 이의 상태를 그렇게 판별하고 테스트하는 
역할도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하나의 시금석으로 
어떤 상태를 시험해본다면 
대부분 그 주체는 그런 자세와 그런 상태로
평생을 일관해 임해 나간다는 것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한번 무언가에 탐욕을 일으키고 대하는 경향을 갖는 이는 
거의 평생 그에 대해 탐욕으로 임하게 마련이고 
또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분노를 일으키고 대하는 경향을 갖는 이는 
또 거의 평생 그런 자세로 삶을 임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 주체의 성격이나 습관 경향 등은 
그렇게 쉽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돌이 시금석이 되어서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이는
거의 평생 그런 형태로 매번 만나는 돌을
걸림돌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면서 살아가고 

그리고 그런 경향이 누적되어서 
그의 삶을 그런 의미로 규정짓게 하고 
그래서 알고보면 그 하나의 시금석은 
결국 그 주체의 모든 삶을 그 위에 올려 놓는 주춧돌과 같은 기능도
같이 하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가 처음 만나 걸려 넘어진 그 하나의 돌이
하나의 시금석이 되기도 하면서
그의 삶을 그 돌 위에 모두 올려 놓는 
주춧돌도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다 
결국 그가 사망하면 
그 돌이 결국 그의 삶을 그런 형태였다고 기념하게 하는
고인돌과 같은 기능도 또 하게 된다고 본다. 


계속 돌만 가지고 이야기 하다보니 
삶에서 중요한 맷돌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삶에서 문제는 바로 이 맷돌이라고 본다. 

맷돌이 의미하는 상황은 
서로 그 특성이 비슷한 돌 두개를 얹어 놓고 
이 돌을 갈리면 이 돌들이 서로 부딪혀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갈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맷돌을 돌리는 막대를 어이나 또는 어처구니라고 표현한다고 하는데 
어원상 확실한 것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일이나 상태가 예상밖인 경우거나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상황을 만나서 
어떤 주체가 이를 놓고 
어리둥절하게 되고 황당함을 느낄 때 
어이가 없다라고 표현하거나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보통 표현한다. 

그래서 이처럼 어이없다거나 어처구니없다라는 표현에서 
'어이'나 '어처구니'는
평소 그것이 있어야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고 이치에 맞다고 여기는
그 무엇인가를 나타낸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어이없다나 어처구니없다라는 표현에서
어떤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보게 만드는 그런 
어이나 어처구니가 정작 무언가라고 물으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가운데 
평소 그런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바로 이런 현상 자체가 
사실은 어이가 없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 만큼 현실에서 전도망상분별을 일으켜 
헤매 도는 현상이 심함을 나타낸다고 개인적으로 본다. 

이제 그런 어이나 어처구니에 대한 어원적인 해석의 하나로 
'어이'가 맷돌의 손잡이라고 한다거나
'어처구니'가 무언가 대단히 큰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한다면 
현실에서 그런 맷돌의 손잡이나 그런 큰 무언가가 없다고 
왜 그런 상황에서 황당함을 느끼겠는가. 


그런데 여하튼 대단히 유명한 사찰 어리둥절을 방문하는 일반인들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대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이런 경전내용을 놓고
대단히 어리둥절함을 느끼거나 황당함을 느끼는 상태가 되고
끝내는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이치에 맞지 않는 궤변이나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여기고 대하는 현상이 
바로 이 문제와 관련이 된다고 본다.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른 이런 입장 사이에서 
서로가 상대의 입장을 

대단히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는 입장으로 대하게 된다는 이 현상이
또 이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의 입장에서 
어떤 상황이 어이 없이 느껴지지 않고 
황당하게 여겨지지 않고 
반대로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고 
수긍이 잘 되어 어이있게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그것이 통상 어떤 상태인가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일반적인 것이다. 

즉, 일반인이 이치에 맞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상태란, 
마치 맷돌에 손잡이가 구비되어서
그 맷돌들이 서로 맞물려서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갈아대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도 함께 갈아대는 
상황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그 맷돌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대강 현실에 임하는 일반적인 상황을 보면
각자 집착하는 것에 접착되어서 
마치 톱니바퀴에 붙은 껌조각처럼 
또는 어떤 차트에 붙어 그 차트의 움직임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선처럼 
그렇게 한 주체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내용을 실답다고 여기고 
그 현실내용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바탕으로
그 현실에 접착되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렇게 그런 내용에 접착되어 평생을 살아간 이의 삶의 의미는
그외로는 별다른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한 주체가 살다가 사라지면
그가 처음 걸려 넘어지거나
그것을 딛고 넘어간 그 돌이
곧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올려 놓는 주춧돌이 되고 
한참 활동할 때는 그가 세워 놓은 머릿돌과 선돌과 같은 표지의 역할을 하고 

그리고 나서 자신과 거의 일란성 쌍동이와 같은 다른 상대를 만나
그런 형태로 무언가를 놓고 다투고 경쟁해가는 경우에는
그처럼 맞물린 맷돌과 같은 활동을 하면서

자신 스스로도 그런 망상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또 한편 다른 생명들도 그런 형태로 묶어서 사역을 시켜 나가는 활동을 하고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3 악도로 활동 무대를 옮겨 가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은 이들이 그를 기념하여
그처럼 고인돌을 괴어 놓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 돌에 대한 단상은 이와 같다. 

그런데 그 핵심에 
현실 내용을 놓고 어떤 기준면을 붙잡고 이것을 대하는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을 과연 실답고 집착을 가질 만한 내용으로 
그것을 대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어서 
그런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실답지 않은 내용이고 
그래서 이에 집착을 일으켜 접착되지 않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처음 제시한 수행자의 상황이란 이와 마찬가지다. 

중생이 대하는 그 측면을 놓고 대하면 
역시 생사고통을 그런 형태로 받아나가는 그 내용이 
문제로 보이는 것이고 

그러나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는 
실상 진여의 측면을 놓고 대하면 
바위나 물과 같은 무정물부터 시작해서 
소나 돼지나 곰이나 그런 축생에서 부터 
아라한이나 보살이나 부처님과 같은 수승한 상태까지 
이 일체가 다 차별없이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는 사정을 
또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뽑힌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도 
바로 이 두 측면을 수행자는 
함께 다 취해서 
어느 한 측면의 내용도 버리지 말고 
부처님이 가르쳐 준 그대로 
이 두 측면의 내용을 
그런 자세로 
그 두 측면에 적용해서 
잘 임해야만 한다고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 





컴퓨터를 분리해서 작업을 하니 
그래도 조금 낫다. 

원래 이것이 본인 주 작업인데 
요즘 사진앨범 제작을 위해 파일 정리하는 작업 때문에 
경전을 살피는 일이 뒤로 미루어져서 
마음이 상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삶에서 무엇을 가장 우선시해서 대하는가에 따라서 
결국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내용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이처럼 매 순간 우선시해서 선택하지 않고 뒤로 미루는 것은 
매순간 그렇게 미루게 되어서 
결국 삶에서 한 번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삶을 마치게 된다는 사정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걸림돌과 디딤돌이 시금석이 된 내용이 
그 주체의 평생을 그 위에 올려 놓는 주춧돌이자 머릿돌도 되고
그가 생활하면서 임하는 맷돌도 되고 
나중에 사후 그 주체를 기념하는 고인돌까지 된다는 내용도
바로 위와 같은 사정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이 당면한 이 한 순간에
자신이 해탈문에 들어서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바로 그런 상태로 매순간 임하는 가운데
무량겁을 두고 지켜보아도
여전히 그 상태로 생사고통의 묶임에
매어서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경전에서도 그처럼 제시하고 있다.

현실에서 전도망상을 제거하지 못하고 
임하면 그런 상태로 무량겁에 걸쳐서 
3 악도를 헤매면서 생사를 받고 돌고 돌게 된다고
경전에서 그 사정을 제시하는데
그렇게 되는 그 사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첫 돌 때 아이에게
여러 물건을 놓고 그 아이가 무엇을 집는가를
테스트해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한 아이가 
자신의 앞에 놓인 여러 물건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쥐었을까가 
궁금하기도 하다. 

별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떤 한 아이가 그렇게 한 순간을 임하면
또 바로 그런 자세로 평생을 나아가기 쉽다고 보기에
그 엉터리 테스트도 그런 측면에서는
나름 일리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돌 하나를 놓고 
너무 견강부회한 측면이 없지 않은데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바로 this time or never  정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지금 이 순간에 수행으로 전환해 벗어나오지 못하면 
그런 자세로 무량겁을 지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결코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의미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최 우선 순위로 놓고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무량겁의 내용을 달리 만드는 
중요한 내용이 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mus0fl--Diener Joan - Jacques Brel - Aldonza.lrc

돌에 관련한 단상을 적고 

올라가 쉬는데 
돌에 관한 메세지를 전하는 노래를 마침 듣고 
웃음을 짓게 된다. 

요즘 옥상기지에 올라가 쉴 때마다 
직전에 작성한 글과 관련된 메세지를
노래에서 듣게 되는 경우가 잦다. 

그리고 이는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 노래를 대하기에 그렇게 여기게 되는 것이라고 
일단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망상분별이 증폭되는 과정도 
이와 사정이 같다. 

자신이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그것을 대하면 
그에 대해 어떤 면을 대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형태로 여겨지는 현상이 
일상생활에서도 상당히 많다. 

자라에게 놀란 입장에서는 
솥뚜겅을 보고도 그 자라가 떠오른다는 속담도  
그가 그런 자라를 보고 놀란 이후 
자라에 대한 생각을 갖고 무언가를 대하기에 
그런 상태가 된다고 본다. 

여하튼 위 노래에서 돌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시간과 관련해 다양한 메세지를 전한다고 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는가는 
오늘 뽑혀 살피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대단히 짧은 경전 하나를 놓고도 
상황이 마찬가지임을 보게 된다. 

이 경전의 분량이 30 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또 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짧은 경전은 더더욱 짧다. 
불교 경전 가운데에는 상당히 분량이 많은 경전도 있지만, 
이들 짧은 경전 내용만 잘 이해해도 
그 핵심을 이해하는데는 부족하지 않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 
일반적으로 이 내용을 놓고 
대단히 어리둥절하게 여기면서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런데 잘 이해한다는 경우도 알고보면 
한 번 두 번 이 경을 대한 것이 아니고 
상당히 오랜 기간 대하면서 
내용에 대해 공부한 입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처음 이런 경전을 대하고
곧바로 이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경우는 
사실 희박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그만큼 일반적으로 처한 전도몽상분별 편집증상이 
극심한 것이라고 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일반적으로 몇번 대하고 
이 경전 내용에 대해 어리둥절함을 느끼는 가운데 
의문을 제시하는 내용은 
보통 이런 내용이 많다. 

만일 경전 내용대로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들 가운데
진실로 한 중생도
번뇌의 바다를 건넌 자가 없다거나,

그처럼 제도할 중생을 본래 얻을 수 없다면
왜 수행자가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고 
수행에 임하는가. 

또 보시를 행한다고 할 때도 
보시하는 이나 
보시하는 상대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를 얻을 수 없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상을 일으켜 
그런 상에 머물러서 상을 취하는 가운데 
보시를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면 

왜 그런 보시는 또 무량하게 수행자가 
행해야 한다고 하는가. 

그리고 그런 상을 현실에서 갖지 않는다면 
도대체 현실에서 
어떻게 그런 보시를 할 수 있겠는가. 

잠자면서 무의식 중에 잠꼬대를 하면서 
보시를 해야 하는가. 
의식이 혼절된 상태거나 
만취한 상태로 
정신이 없이 아무 것이나 보이는 대로 
집어들어서 거리에 내 던져야 
그런 형태로 상을 취하지 않고 상에 머물지 않고
무주상 보시를 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면서 이런 경전 내용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자체적으로도 내용이 모순이 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궤변인 것 같다고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결국 이전 조각글에서 살핀 주제와도 관련이 된다고 본다. 

반복해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대하는 
현실 내용은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는데 
사정이 그렇다면 
그렇게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그냥 그렇게 방치하고 임하면 그 뿐이지 

왜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에서 
무엇은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내용을 제시하면서 
계와 정과 혜의 수행을 닦아야 한다고 하는가. 

왜 현실이 실답지 않은데 
그런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에서 
그런 수행만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 
이는 서로 자체적으로 모순이 되는 내용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일으키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고 본다. 

이미 이전 조각글에서 
그 대강의 사정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현실이 꿈이나 환영처럼 실답지 않은데
그러나 현실은
또 꿈이나 환영 자체는 아니어서
꿈과 환영과는 또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미 그 사정을 제시한 바 있다. 

즉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 자체는 아닌 것이어서 
바로 그처럼 꿈과는 다른 그 측면이 
이 실답지 않은 현실을 
그처럼 실답지 않다는 사정으로 
단순히 무시하고 방치하고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사정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꿈은 허망하고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 꿈과 다르다고 여기는 
그런 요소가 그것이기도 하다. 

즉 비록 현실 내용은 실답지 않지만, 
그래도 한 주체가 
매 번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고 
그래서 그와 비슷한 내용을 
천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또 누군가는 
그런 내용을 비슷하게 얻을 것 같고 

또 그런 현실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이 
엇비슷하게 같이 얻는 것이고 

또 그런 현실 내용은 
비록 하나하나 실답지 않지만
자신의 시각으로만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 아니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다양한 형태로 중첩해서 
그에 대한 내용을 얻는 것이어서 
자신이 대하는 현실 내용은 꿈과는 달리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 측면인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측면 때문에 
경전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하고 
이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하지 않으면 

비록 하나하나 실답지는 않지만, 
그런 형태로 
무량겁에 걸쳐서 
그처럼 매순간 생생하고 실답게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되고 

바로 이처럼 본래 실답지 않은 것인데도 
그런 주체가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면서 생생하게 매순간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서 받아나간다는 그것이 
바로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이 생사현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에 임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본래의 상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관하는 것도 
바로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안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내용이다. 

본래의 상태에서는 
그런 문제를 본래 얻을 수도 없고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 영역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거나 
요구할 사정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본 바탕인 실재의 상황을  잘 관하고
본래의 상태에 그런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보면 그런 실재 영역에서의 문제때문이 아니고 

사정이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는 전도된 망상분별을 일으켜 
본래 얻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은 그런 생사현실을 놓고 
각 주체가 그런 생사고통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매 순간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고 

또 그렇게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3 악도의 세계로 향해 
쉼없이 나아가고 있기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내용을 잘 관하고 
그런 생사현실에서 그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수행을 잘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사정인 것이다.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은데 
그러나 그런 사정부터 잘 관하지 못하기에 
그에 집착을 일으켜 대하는 것이 첫 문제이고 

또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또 꿈 자체는 아니어서 
꿈과는 달리 그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고 대하는 경우 
그것을 현실에서 일반인이 임하는 상황처럼 
꿈과는 달리 이를 대단히 실답게 여기고 생생하게 받아 나가게 되는 것이기에 
바로 이 측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생사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잘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본 바탕이 그렇지 않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그에 대한 망상과 집착을 제거한 바탕에서 
그런 생사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한다해도
해나가야 한다는 내용을 
현재 금강경에서 반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은 
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그런 취지가 아니고 

현실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수행을 하더라도 
그런 본 바탕의 사정을 잘 관한 상태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또 심지어 수행이나 수행목표 역시도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잘 관해서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 바탕에서 
그런 수행을 잘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일단 조금 길어졌으므로 
쉬었다가 이어 쓰기로 한다. 




mus0fl--Charlotte Gainsbourg - Etienne Daho - If.lrc

앞에서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데 

왜 실답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실답지 않은 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는가 그 사정에 대해서 
살폈다. 

그것은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데 
그러나 정작 현실은 또 꿈이 아니고 
꿈과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임을 보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현실에서는 
자신이 대하는 현실이 꿈과 '다르다'는 사정은 잘 관하지만, 
그러나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사정은 잘 관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현실에서 현실 내용에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키고 
현실에 접착되어서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가게 되고
그리고 사후에는 다시 험악한 3 악도에 들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사정으로 
현실은 꿈이 아니고 꿈과는 다른데 
그러나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보는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이 내용을 몇 주전부터 살핀다고 주제로 내걸고 
연구원들 사진 앨범제작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그것은 과거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많이 제시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 시간을 내어 
과거 조각글에서 관련된 부분을 찾아내 
링크를 걸 북마크를 각 부분에 생성시키고 
이에 링크를 걸어 
이전 조각글에도 붙여 놓고 
또 이 조각글에도 붙여 넣게 된다. 

그런데 내용이 체계적이지 않아 조금 불충분하다고 보기에 
다시 이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 사정





우선 침대에 누어 바다꿈을 꾸고 황금꿈을 꾸었다고 해보자. 

이 꿈을 그렇게 꾼 것이 사실이고
그 꿈은 꿈대로 꿈을 꾸는 상황에서 대단히 생생하였는데
왜 이것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
이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이런 꿈이 비록 생생하게 꾼 내용이지만 
실답지 않기에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그 사정이 
현실에서 얻는 모든 내용에 공통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먼저 자신이 실답지 않다고 쉽게 이해하는 꿈이 
왜 실답지 않다고 한 것인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우선 
꿈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자면서 그런 꿈을 생생하게 꾸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자면서 그런 꿈을 생생하게 꾸었는데도  
왜 그런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꿈에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이 나열해볼 수 있다. 


꿈은 비록 자면서 꿀 때는 대단히 생생한데 
그러나 그런 꿈은 그런 꿈을 꾸는 그런 조건과 그 상황에서만 
그런 내용을 얻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다른 경우 다른 조건 다른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그런 꿈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 그런 꿈에서 얻는 내용은 
그것이 황금이나 바다라고 한다면 
평소 황금이나 바다에 대해 기대하는 다른 성품을 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아무리 꿈을 자면서 꿈을 생생하게 꾸었다고 해도 
그런 꿈은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꿈 속에서 바다를 보고 황금을 얻었다가 또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런 바다나 황금은 그런 꿈을 꾸었다고 해서
없던 바다나 황금이 새삼스럽게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바다나 황금이 꿈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어떤 있었던 바다나 황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꿈을 깨고 나서 
그런 꿈을 침대에서 자면서 꾸었다고 해서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을 
침대를 이곳 저곳 뒤지면서 찾아나선다고 해서 
그런 바다나 황금이 침대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침대를 다시 잘 정리하고 
꿈에서 잃어버린 황금이 있었던 장소를 
현실에서 보는 침대에서 위치를 비례해서 추정해서 
잘 정돈하고 나서 다시 잠을 잔다고 해서 
꿈에서 잃어버린 황금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 꿈에서 바다나 황금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 경우 그  꿈은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꿈내용을 얻는 것인가가 또 문제될 수 있다.

우선 꿈에서 본 황금은 
꿈에서 본 황금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황금꿈을 꾼다고 할 것인가. 

비유로 설명하면 
거울에 꽃 모습이 비추인다면 
그 모습은 거울에 비추인 그 꽃모습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모습을 거울에 비추이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인가. 

여기서 같은 내용을 두번 나열하면서 
하나는 대상으로 그리고 하나는 그것을 대상으로 얻는 내용으로 제시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착오를 대단히 일반적으로 일으킨다. 

즉, 자신이 눈을 떠서 꽃이나 바위나 영희나 철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신이 보는 그런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을 얻게 한 대상이라고 
스스로 여기면서 이 상황에 임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이다. 

자신이 눈을 떠서 본 그런 내용은 그 일체가 
자신의 마음안에 맺혀진 내용이고 
그런 내용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란 없다고 제시하는데 
현실에서는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 
자신이 눈을 떠 얻는 내용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잠깐 여기서 망4, 축약키에 축약해 넣은 내용을 다시 꺼내보기로 하자. 
얍. 망4,ㅣ 안 나온다. 
이 컴퓨터가 이전에 작업하던 컴퓨터가 아니라서 
새로 축약한 이 내용이 적용이 안 되서 그런 것으로 본다. 
대신 망1, 은 나온다. 



다음 내용이다. 

---

현실에서  
분명 종이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나고

자신이 컵에 커피를 담아 마시면서 컵을 가볍게 두드린다고 할 때
눈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고

귀로는 컵 소리를 듣고
코로는 커피 향을 맡고
입으로는 커피 맛을 보고
손으로는 촉감을 느끼고

이 커피를 영희나 철수에게 건네니
역시 영희나 철수도 같은 내용을 보고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이 대하는 이런 내용은
외부 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고
정신 밖에 있는  정신과는 별개인 외부물질이고
이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모든 이가 함께 대하게 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표적으로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갖는
전도망상분별증의 기본적 내용이다.

---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부분은
사실상 자신이 이번 생에 잠시 매순간 걸치고 있는 옷과 그 성격이 같은데도
이런 내용을 붙들고 그것이 실다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매순간 대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확인함과 함께 
자신이 이들 내용을 놓고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임하는 자세를 지금 시정하고 
수행으로 자세를 전환해 임하지 않으면 

이번 생에서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날 가능성이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후 매 순간 그런 자세로 임하는 가운데 
말로만 듣고, 경전에서 글로만 제시해 대하던 
지옥 아귀세계를 포함헤서 
자신이 현실에서 익숙하게 대하던 각종 축생들의 세계로 
자신이 직접 들어가 
그렇게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으면서 임하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축생의 수가 많을 것인가. 
인간의 수가 많을 것인가를 먼저 헤아리고 
그래서 단순히 이 수적 비율을 가지고 
그 확률을 추정한다고 해도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은 대단히 적다고 보듯 

자신이 이번 생을 마치고 
다음 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3 악도를 벗어나 좋은 세계에 태어날 가능성이나 
확률을 주정한다면 
대단히 희박하다고 스스로 잘 이해해야 한다. 


만일 사정이 이런데
자신만은 그렇지 않기를 기대한다거나 희망한다면 
자신 스스로 그래야 마땅하다고 볼 사유를 
지금 이 순간 대략 10 가지 정도는 죽 나열할 수 있어야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놓고 보면 그런 경우도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 내용 대부분은 
평소 자신이 일으킨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일으킨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에 바탕한 
망상분별이고 단순한 희망일 뿐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도
그렇게 되어야 할 마땅한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실험은
물론 자신이 먼저 곰곰히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는 한데 
일반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놓고 헤아려보면
그 상대의 생각과는 달리
그 사정이 대단히 어렵다고 보게 되는 그 사정을 자신도 잘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가하면
앞 문제에서와 같이 
대부분 일반적으로 전도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현실을 대하고 
그런 현실에서 그렇게 제각각 분주하게 임하고 있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에게 
눈앞에 꽃을 내밀고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평소 자신은 무엇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생활하는가 
이렇게만 질문을 던지고 그 사정을 살펴보아도 
그 사정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각 주체가 행할 도리 밖에는 없고 
그래서 행하게 되는 행위를 분주히 행하는 것이어서
그런 상태에서는 그 결과는 일일히 살펴 보지 않아도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자신이 사정이 그렇지 않고 
자신은 어떤 특별한 사정으로 
이런 생사과정에 묶이지 않고 
또 3 악도에 들어갈 사유가 없다거나 
있다고 해도 자신이 그간 노력해서 해소시켰기에
자신만은 다른 이들과 달리
좋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자신 스스로 자신에게 대해서라도 
그럴만한 사유가 이러이러하게 있다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드물기도 하고
또 그렇게 나열하는 사유가 
대부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그리고 자신의 망상분별과 자신의 희망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망집에 바탕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나열하는 내용들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주장하는대로 
그가 망상분별에서 생각하는 내용이 다른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려면 
우선 자신이 지금 눈으로 보는 내용을 가지고 
귀로 듣는 소리의 영역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고 
꺼낼 수도 있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이 순간도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렇게 주장한 내용이 
다른 세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성취될 사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혹자는 자신이 이번 생을 살고 이렇게 살다가 마치고 죽으면 그뿐이지, 
그 뒤에 무슨 자신과 관련된 일이 있다고 
그런 일까지 미리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처럼 망상분별을 일으켜 현실을 대하는 주체가
일으킨 또 다른 망상분별의 하나인 것이다. 

경전에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삶을 대충 살아가는 입장을 
단멸관을 갖고 살아가는 이라거나 로카야타라고 표현하는데 

만일 사정이 정말 그렇다면 
도대체 수행자는 무엇때문에 무량겁을 고려에 놓고 
지금 수행에 임하겠는가. 


여하튼 망집현상도 쉽게 해결이 안 되지만,
이런 문제도 수행자와 일반 입장간에
서로 피차 답답하게 여기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미 꿈을 실답지 않게 보아야 할 사정을 
앞에 여러가지 나열하고 

꿈에서 황금꿈을 꾸었다면 
그 황금의 꿈 내용은 도대체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것을 얻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폈는데 

앞에서 꿈 내용이 꿈 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얻는다고 보기 힘든 
사정을 먼저 살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제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은 
그런 꿈을 자면서 꾼 침대의 상황이나 침대의 어떤 부분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꿈 내용을 얻었다고 볼 것인가. 

사정이 그렇지 않다. 

물론 침대의 상황이 꿈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미 제시했듯 그런 꿈은 그런 침대에 그렇게 누어서 그런 꿈을 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잠을 잔 침대의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꿈 내용을 얻은 것도 아닌 것이다. 

이전에도 
'라이터' 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언가라고 물으면 
'담배'라는 관념을 일으켜 꺼내는 사례를 들어서 
이 관계를 설명한 적이 있다. 

이 경우 '담배'라는 관념은 
분명 '라이터'란 관념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 연후에 그런 '라이터'란 관념을 연해서(의존해서) 
일으켜 꺼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담배'란 관념이 '라이터'란 관념을 대상으로 삼아서 
일으킨 관념이 아닌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 '담배'라는 관념내용을
그 관념을 일으키게 한 '라이터'란 관념에 갖다 붙여서 이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즉 '라이터'란 관념은 '담배'라는 관념을 일으킨 그 대상이기도 하고
그래서 담배란 관념이 갖는 내용을 그 안에 포함해 갖고 있다거나 
라이터에는 담배가 들어 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이런 사례와 마찬가지로 
비록 침대에 누어서 그런 바다나 황금꿈을 꾸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꿈이 그런 침대를 대상으로 해서 얻은 내용이고 
또 마찬가지 사정으로 그런 꿈 내용이 
침대에 대한 어떤 내용으로 얻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꿈과 현실간의 관계나 
그  문제 상황이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고 문제삼는 그 일체에 
다 공통한다는 의미다. 


즉, 

침대 ====> 자면서 꾼 바다와 황금의 꿈 
이 관계가 


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게 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  ===> 감각현실 
의 관계에서도 사정이 그렇고 


다시
감각현실  ===>  느낌 
감각현실 ===> 관념분별 
느낌 ====> 관념분별 

등에서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대충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이들 각 내용의 관계를 살피면 
자신이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삼아서 
그것을 그렇게 대한 관계로 
그러그러한 내용을 연하여[의존해서]  
어떤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된 것이므로 
그런 사정으로 자신이 그에 대해 일으킨 각 관념분별 내용은 
그런 영역의 그런 대상에도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이를 대하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이 
그렇게 이해하고 그 각 영역의 내용을 대하는 
망상분별 증상의 내용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그런 사정으로
관념분별 영역안에서
각 영역의 내용을 그렇게 접착시켜 놓고 
그 각 내용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바로 여기서 제시하는 망상분별 증상의 기본이다. 

각 영역의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고 
진짜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인데 
각 영역의 각 내용은 설령 실답지는 않고,
망상분별의 소재가 되어주는 측면은 분명 있지만,
그러나 그 영역 자체에서는
그런 망집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데 반해서 

관념분별 영역에서는
그런 각 영역의 내용을 가지고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킨 다음 
그에 바탕해서 그런 내용을 대해 나간다는 것이 
첫번째 문제점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 증상을 바탕으로 
이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키고 
이에 집착해서 

그렇게 현실에서 각 상황마다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도무지 없다고 여기면서 매 순간 매 상황마다 
반응하면서 행하게끔 되는 생각과 말과 행위 태도 자세를 취해 나가면

이것이 곧 금강경에서 말하는
그렇게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러서 
상에 접착되어 행하는 형태로서 

그로 인해 자신이 대하는 기본 바탕들이 변화가 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바로 그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생사고통의 현장
즉 그 주체가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의 세계에 들어가 생활하게 된
그 상황인 것이다. 
 


물론 앞의 전제를 놓고 보면 
이런 3 악도의 생사고통 역시도 실답지 않고 
그 본 바탕이 청정한 니르바나인 것은 다른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현실에서 현실을 대할 때 
그렇게 올바로 관하여 수행에 임하지 않은 경우는 
그가 대하는 그 현실에서도 그 사정을 그렇게 관하지 못하고 
그 현실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그렇게 대했듯 

그런 3 악도에 들어가 임할 때에는 또 이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그 생사고통의 상황을 그렇게 대하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어서 

바로 이것이 근본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그렇게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매 순간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무량겁에 걸쳐 받아나게 되는 생사고통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을 놓고 보면 
이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현실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현실에 자신이 문제삼는 그런 자신과 그런 세계의 각 내용이 그렇게 있고
그리고 그런 생사와 생멸이 있다고 여기면서 이를 대하는 것처럼 

이런 상태에서는 바로 그런 망집을 전제로 
한번 행한 업과 그 과보는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무량겁에 걸쳐서 받아나가게 된다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다. 

그러니 실답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고 그냥 방치할 일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이런 두 측면을 다 함께 잘 취해서 
현실에서 수행에 잘 임해야 할 사정이 그렇게 있는 것이다. 


즉, 실답지 않지만 그렇게 그런 생사고통을 매순간 겪고 
지금 이 순간 그런 바탕에서 그런 사정으로 그렇게 그 현실을 대하고 임한다면 
그 다음 순간도 그렇고 
그리고 그 다음다음 순간도 또 그렇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에 걸쳐서 그 상태를 이어 나가게 되고 
그리고 왠만해서는 그 상태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오지 못한다고 
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먼저 꿈이 일정한 사유때문에 아무리 생생하게 꿈을 꾸어도
그것은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되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들도  
그 사정이 이와 같다는 측면을 잘 살펴서 

비록 현실은 꿈이 아니고 꿈과는 많이 다르지만, 
현실도 이런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것을 잘 관하고 
이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전환해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그간 쌓아 놓은 업의 장애가 해소되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3 악도에 묶여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런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지금
연극을 보면서 연극에서 진행되는 상황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단순하게 그것만으로
자신이 연극을 보는 동안 수없이 연극을 행하는 다른 배우를 괴롭히고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도 괴롭히고 손해를 입힌 일들이 다 사라지고 
그 연극상황에서 쉭하고 자신이 벗어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고통을 겪는 연극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벗어나오려면 
이런 연극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비록 그렇게 이해를 잘 하게 되었다고 설령 가정해도 
연극에 임하는 다른 이들은 그 상황이 그렇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그렇더라도 
다른 배우나 관객을 괴롭힌 것을 보상도 잘 하고 
앞으로는 자신이 과거와 달리 잘 임하고 좋은 상태를 성취하겠다는 서원도 만들어 제시하고 
또 그것이 단순히 말로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이 열심히 실천해 성취하겠다는 사정도 하나하나 보여주어야 

그 연극 상황에 임하고 있는 다른 관객이나 배우도 
그런 내용을 통해 비로소
더 이상 그를 묶어 괴롭히겠다는 뜻과 의지를 포기하고
그 방향을 달리 돌리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통해서 계를 지키면서 청정한 범행을 닦고 
자신이 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기본적인 수행부분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표현이 '범행'이라고 표기 되어서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는데 

죄복개공무소주라는 게송이 의미하듯,
본 바탕에는 본래 청정한 수행을 의미하는 '범행'이나
사회에서 범죄를 의미하는 '범행'의 구분이 없는데 


그러나 망집이 진행되는 생사현실에는 
각 주체마다 굳센 망집과 고집을 바탕으로 
그런 내용을 그렇게 붙들고 서로를 묶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한 주체가
그렇게 회나 치킨이나 소세지가 맛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으면 
왜 물고기나 닭이나 소 돼지가 그렇게 붙잡혀서 사육을 당하고
끝내는 도살을 당할 것인가. 

그러나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자신부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정이 그런 것처럼 
다른 생명들의 상황도 또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현실에서 생명 가운데 
자신만 유독 좋은 것을 취하려 하고 
나쁜 것을 피하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연못에 가서 앉아 물고기를 놓고 관찰해보거나 
곤충 하나를 놓고 지켜보거나 
아니면 현미경을 갖고 세균을 놓고 관찰해보아도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이해하는 것이다. 

왜 자신만 그렇다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왜 또 그런 가운데 
자신만 유독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묶여 끌려가지 않게 되고 
자신만 유독 좋고 좋은 하늘과 같은 세계에서 
지내야 할 사정이 있다고 보겠는가.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 사정이 별로 없다. 



그래서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 기본을 바탕으로 
자신부터 그런 생사묶임에서 벗어나려면 
계를 잘 지키면서 수행으로 전환해 임해야 하고 

이후 다른 중생을 또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또 마찬가지로 수행에 정진해서 
수행자 자신부터 복덕자량을 구족하지 않으면 
자신부터 생사묶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또 그런 사정으로 
자신이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도 없게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는 
지혜자량도 마찬가지로 성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글을 많이 써서 점점 
오타가 심해지니
조금 쉬었다가 이어 쓰기로 한다. 


아래는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보아야 할 사정에 대해 
기존에 살핀 내용을 대강 찾아 
링크를 붙여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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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답지않음의 논의
http://buddhism007.tistory.com/3825#001
sfed--회쟁론_K0630_T1631.txt ☞○실답지않음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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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답지않음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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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
http://buddhism007.tistory.com/3470#002
sfx--3악도를-벗어나는-방안.txt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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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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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실답지 않음과 진짜의 존부문제
http://buddhism007.tistory.com/3480#003
sfed--금강삼매경론_K1501_T1730_x.txt ☞○꿈이 실답지 않음과 진짜의 존부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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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실답지 않음과 진짜의 존부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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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답지않음과 대상의 문제
http://buddhism007.tistory.com/4121#004
sfed--유식이십론_K0608_T1590.txt ☞○실답지않음과 대상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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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답지않음과 대상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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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답지않음과 망상분별의 관계
http://buddhism007.tistory.com/4310#005
sfed--대방광불화엄경60권본_K0079_T0278.txt ☞○실답지않음과 망상분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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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답지않음과 망상분별의 관계




mus0fl--Michel Polnareff - Le Roi Des Fourmis.lrc


이미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 꿈의 사례를 놓고 
그런 꿈은 그 꿈안의 바다나 황금을 대상으로 해서 얻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침대의 어떤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얻는 것도 아님을 살피고

그리고 꿈이 
그런 조건 그런 상태에서만 얻게 되는 임시적인 내용이고 
다른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사정과 함께 
그에 기대되는 여러 성품도 갖추지 못한 내용임을 통해서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는 사정을 살폈는데 

비록 꿈은 이렇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도 사정이 이렇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이제 앞과 같은 꿈은 그렇지만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앞에 나열한 것처럼 

지금만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지 않고 
10 년전에도 그와 비슷하게 그렇게 얻었고 
또 그런 내용은 앞으로 천년 만년을 지나도 그렇게 얻을 것 같고 

그런 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는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서
세상 사람들이 다 그와 엇비슷하게 그런 내용을 얻고 

또 그런 내용은 단지 시각을 통해서만 아니라 
다른 촉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내용을 얻기에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자신이 얻는 내용은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사정을 보았다. 

그리고 이 부분이 현실이 꿈이 아니고 
꿈과 다르다고 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그렇기에 
비록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 사정을 잘 그렇게 관하고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임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면 

앞에 기술한 그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런 생사현실에서 자신이 망집에 바탕해 행한 업은 
그가 단순히 생각하는 십년 백년 천년이 만년이 아니라
무량겁에 걸쳐서도 그 업과 그에 따른 과보는 사라지지 않고 
그것을 받게 된다고 제시하고 

또 그런 지옥이나 아귀 축생세계도 
자신 혼자 그런 내용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런 업을 행한 무수한 다른 이들과 함께 그런 세계에 함께 처해서 
받아나가게 된다고 제시하고 

또 현실 내용이 그처럼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여러 내용을 중첩해서 얻는 것임을 그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이런 생사현실이 꿈이나 환영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정작 꿈이나 환영 자체는 아닌 것이어서 

이런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그냥 그대로 방치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생사현실에서 열심히 수행을 통해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잘 행하고 
또 그런 생사고통을 직접 당면하게 되는 상태에서도 
그런 생사고통을 안인수행을 통해 참고 잘 벗어나오려면 

그런 현실에 자신이 고통을 겪거나
억울하게 느껴야 할 그런 내용 자체가 
그 안에 실답게 있지 않고 

또 현실 내용이 전체적으로 
하나하나 실답지 않고 
또 중첩적으로도 실답지 않고 
전체적으로도 종합적으로 그렇게 실답지 않음을
먼저 잘 관하고 이해한 가운데
그런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부분에서 
그 수행이 모두 원만하게 성취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이번 생에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신체나 자신에게 어떤 침해가 있고 위해가 가해지면
여기에 집착하고 반응하지 않을 경우가
과연 현실에 몇이나 있겠는가.

거의 드문 것이다.

그래서 위 금강경에 제시된 사례처럼
가리왕에게 붙잡혀서 
4지를 절단당하고
눈과 귀를 잘리우는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을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았다는 것은 
단순히 말뿐일 것이라고 쉽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현실에서 각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고 
그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도리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 경전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현실에 임하는 이는 
수행자 라이센스를 박탈당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한편 

대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는 이처럼 
무언가가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수행에 임하는 이는 
그로 인해서 일반의 경우보다 더 빨리 
더 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가 되게 된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해도 그런 상태로 
수행하는 사례가 현실에서 대단히 많기에 
그것은 또 단순하게 지나칠 내용이 아니고 
현실 문제인 것이다. 



여하튼 꿈의 내용을 놓고 
그것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잘 이해해도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자신이 현실에서 행하는 관념분별에 대한 
사정은 잘 파악하지 못하고 

이들 내용은 꿈과는 달리
실답다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서 
꽃이나 영희모습을 본다면 
그런 내용은 곧바로 외부 세계이고 마음과는 별개의 외부 물질이고 외부 실재라고 여기거나 
또 그러한 내용은 자신이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 자체라고 여기기도 하고 

또 앞과 같은 이해는 잘못이고
자신이 얻는 내용은 설령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에도
다시 자신이 마음에서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은
본 바탕이라고 할 외부의 실재에 자신이 얻은 그런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있기에 그렇다거나
또 본 바탕인 실재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와 비례하거나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거나
그런 식으로
자신이 현실에서 일으킨 망집을 바탕으로 계속
망상분별을 증폭시키는 상태가 일반적이다. 


그런 경우 자신이 얻는 내용이 
한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도 그렇게 있는 것인가를 확인하기 이전에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다른 영역의 내용들 사이에서나마 
과연 그런 관계가 성립되는가부터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 노란 꽃을 본다면 
그런 모습이 과연 자신이 귀로 대하는 영역에서도 얻어지는가. 

그리고 자신이 눈을 감고 떠올리는 노란꽃이라는 생각내용 안에서 
자신이 눈으로 본 내용과 단 한 부분이라도 일치하여 같다고 할 부분을 
스스로 얻는가 
이런 것을 놓고 하나하나 잘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얻는 각 영역의 내용에서도 
그런 관계를 보지 못하는데 
본 바탕인 영역에서 그런 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근거는 무엇이겠는가.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주체가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일으킨 망상분별 아니면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희망하고 기대하는 내용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이 당면한 현실 안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눈으로 본 색깔이나 모습을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도 그와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실재 영역에 그 내용을 그렇게 밀어 넣으면 

이제 그런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대상으로 
귀로 듣는 소리나 
코로 맡는 냄새나 
혀로 얻는 맛이나 
몸으로 얻는 촉감이 
또 이런 내용과 아주 엉뚱한 관계로 엉뚱하게 얻는 것임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감관으로 얻는 다른 내용을
또 그처럼 본 바탕에 밀어 넣고 살펴도 
또 이와 다른 감관이 각기 얻는 내용은 
또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고, 두드려 소리도 듣고, 냄새 맡고, 마셔서 맛도 보고
손에 쥐어 촉감도 얻는 커피가 담긴 컵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연구해 나간다면 

자신이 이에 대해 얻는 이런 감각내용을 다 몽땅 모아서 함께 본 바탕에 밀어 넣고 
심지어 현미경이나 망원경 엑스레이 투시기 자외선 적외선 촬영기 등등의
수많은 다른 관측도구가 얻어낸 결과 내용을 또 그렇게 다 밀어 넣고
수많은 곤충이나 다른 축생 들이 각기 달리 얻는 내용을 또 그렇게 다 밀어 넣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감관이 각기 얻는 내용을 이런 내용과 
비교해 본다면
그 각 내용은 역시 엉터리이고 엉뚱한 관계의 내용들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침대에서 누어 황금꿈을 꾸고 나서 
그런 사정으로 그렇게 황금꿈을 꾸었다는 사정을 빌미로 
자신이 꾼 황금이
자신이 그런 꿈을 누어서 꾸었던 그 침대에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침대를 매만지는 그런 망상증 환자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도 그 사정이 그렇고 
또 이에 대해 각 주체가 분별을 일으키는 분별내용도 그 사정이 그렇고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각 영역의 내용이 
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런 관계에 있기에
이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고
그런 내용에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이게 되고 곤란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착각을 일으키는가하면 
배고파서 짜장면을 먹고 대단히 좋음과 만족함을 느끼게 되면 
그런 사정으로 
그런 좋음과 만족이 그 짜장면에 들어 있다고 여기기 쉬운데 
이것도 결국 마찬가지다. 

이것이 결국 현실에 각종 탐욕과 분노를 일으켜 임하는 
종합적 망상분별 편집증 환자의 상황인데 
이것이 결국 3 계6 도 안에서
무량하게 다양한 형태로 가지가지 생사고통을 겪어나가는 
생명이 처한 상황이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기에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런 내용을 일체 그런 영역에서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영역에서 그렇게 얻는 내용을 
다시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서 
그처럼 망집현상을 일으키고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이 
전혀 없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기에 
자신이 어느 순간 그런 사정을 그렇게 관하고
그런 내용들은 일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임하면 
정말 그처럼 곧바로 이를 젼혀 무시하고 
이와 관계없이 생사현실에서 지낼 수 있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그런 내용을 매순간 대단히 생생하게 실답게 얻지만
그러나 그 정체가 앞과 같은 사정으로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것이므로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으로 임해
그런 내용을 벗어나와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생사현실에 임해서 
매 순간에 그처럼 관하고 그처럼 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그래서 경전에서 제시하는 3 악도의 상태에서
벗어 나오는 것이 대단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또 바로 그런 사정이  
부처님이 제시해준 것처럼 
그런 자세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정진해야 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쓸 내용이 많은데 너무 길게 되었기에 
일단 쉬고 또 이어나가기로 한다. 

 




mus0fl--Grégoire - Sauver Le Monde.lrc

원래 컴퓨터가 사람의 작업을 돕는 도구인데 

매번 할까요 중지할까요 이런 것을 묻고 
그에 따라 대답을 버튼이나 키보드로 해주어야 하기에 
상당히 성가신 형태로 도움을 주는 기기라고 할 수 있다. 

자칫하면 하루 종일 이런 형태로 도움을 주는 
컴퓨터에 붙들려 있기 쉬운데 
지금은 조금 떨어져서 그런 물음창을 올려 놓아도 
한참 지나 한 번 들를 때마다
답을 해주는 형태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도 작업이 산만하고 성가신 것은 사실인데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낫다. 

글을 쓰면서 여러 멀티 자료를 공양물로 올려 놓아서 
산만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보지만, 
사실 글만 계속 대하고 
그것도 비슷한 취지의 글만 반복해 대하면 
나중에는 글자 자체를 보기 싫어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그래서 조금 방해가 되고 간섭을 일으키는 것 같은 
이런 자료가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본다. 

어떤 이가 말을 할 때 언어에 해당하는 발음만 
순일하게 내보내면 말이 잘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기계로 읽는 TTS 는 그렇게 글자를 읽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는 대단히 어색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가끔 쉬기도 하고 숨도 내쉬고 기침도 하고 
그런 가운데 하는 말이 조금 더 자연스런 것이다. 


노래를 올려 놓고 듣다보면 
각 노래에서 수행과 관련된 일정한 메세지를 
전한다고 시감상으로 감상하게 된다. 

현실에서 무량겁을 내다보고 수행으로 
전환해 임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러나 대부분 그런 수행으로 전환을 생각하지 못하고 
당면한 현실에서 대하게 되는 내용에 붙들려서 
삶을 보내게 되는 것은 
사실은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무량한 IF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잘 모르는 가운데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는 
그런 집착 때문에 그렇게 임하게 된다는 사정을 볼 수 있다. 

그런 헛된 희망에 대한 집착 자체가 없다거나 
또는 그렇게 무량한 IF  문제에 대한 답을 매 경우마다 잘 안다면
그 선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이 이것을 선택하면
무량겁에 걸쳐서 복덕을 무량하게 얻는데 
그러나 이것은 잘 해보아야
한 10 년간 몇 억원에 불과한 현금을 얻을 뿐임을 
스스로 잘 이해한다면 그런 선택을 처음부터 하겠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매 주에 복권이 당첨되는 번호를 
미리 안다면 그가 그 숫자를 기재하지 않고 
매번 떨어지거나 몇천원의 상금만 얻게 되는 숫자를 기재해서 복권을 구매하겠는가 
이런 의문과 같다. 

사실은 그런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러나 복권 판매소에서 선전하는 당첨금에 대한 희망은 
대단히 강하기에 
매번 잘 알지도 못하는 숫자를 적어 놓고 
혹시나 하면서 기대했다가 
역시나 아니라는 낙담을 하고 
매 순간 임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자는 그것을 다 잘 아는가. 

수행자도 정말 그렇게 복권 당첨 번호를 매주 잘 안다면 
매주 구입을 해서 당첨되고 그 상금으로 
좋은 일에 사용하려고 왜 하지 않겠는가. 

사실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또 그 보다 더 우선해야 할 내용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런 당첨금에 대해 집착 자체를 제거하려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 주체의 마음은 
생명보다 더 가치가 높고
돈으로서는 환산하기 힘든 가치를 갖는 내용들을  
무량하게 다 담을 수 있는데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것이 마음에 담기게 되면 
그로 인해 훨씬 가치가 많은 것들이 밀려나고 
그런 가치있는 내용은 담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매주 당첨되는 복권 번호의 숫자를 알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대하는 무량한 IF 문제에 대한 답을 일일히
알지 못한다하더라도 
그 가운데 집착을 없애고 제거해야 할 쓸데없는 희망들이 무엇이고 
대신 무량한 IF  문제를 하나하나 대하서 그 답을 알아내는 형식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경전에서 제시받고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그런 것을 마음에서 제거하고 현실에 임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 첫 부분에서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알고보면 현실에서 보시를 행하고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집착없이 행하며
세상의 봉이 되어 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잘 생각해보면 그것이 당장 수행자에게 
어떤 희생을 요구하고 손해를 입게 하는 그런 내용이라고 보기 쉽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망집에 바탕해서
좁고 짧고 얕은 관찰을 할 때 
행하게 되는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당장 자신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생명에게 베푸는가. 

왜 실답지도 않다면서 그러나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생명을 그런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온갖 수고와 노력을 
무량겁에 걸쳐서 기울여 나가야 한다고 하는가. 

무엇때문인가. 
그것을 통해서 그 수행자는 도대체 무엇을 얻기에 
그런 것을 하는 것인가. 

금강경에 보면 그런 수행으로 무량한 복덕을 받는다고 하지만, 
정작 수행자는 그런 복덕에 탐착을 갖지 않기에 
받지도 않는다고 제시되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경전에서 제시되는 수행을 원만하게 잘 성취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당장 자신이 손해를 보고 
어떤 희생을 해야 하는 일을 놓고 
그런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도무지 그런 일을 할 엄두 자체를 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수행을 그렇게 행하라고 제시받을 때 
왜 그런가 하는 사정을 
넓고 길고 깊게 잘 헤아려야 한다고 본다. 


처음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 내용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설령 그렇게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한다면 
또 왜 그런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에 수행자가 임해서
무량겁에 걸쳐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가도 
또 마찬가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정말 어떤 주체가 그렇게 무량겁에 걸쳐서 
계속 수행을 이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이해하기 힘들고 

설령 그렇다 해도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는 취지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의 이해가 깊게 이뤄지지 않으면 
말은 좋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잘 행하기 힘들고 
행하려 하지 않는 내용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그 사정을 잘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다시 그런 바탕에서
어떤 자세로 어떻게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가를 놓고 
또 경전내용을 통해 하나하나 자세하게 배우고 익혀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100 년 사는 것도 길다면 대단히 길다고 보는데 
그러나 한 주체가 보리심을 일으켜서 수행에 임하면 
3 무량 아승기겁에 걸쳐서 수행을 해나간 끝에 
통상적으로 성불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3 무량 아승기겁이라는 기간을 다시 정말 무량한 겁에 놓고 보면
또 그런 기간은 한 순간 한 찰나쪽에 가깝다고 제시하게 된다.

이런 내용은 수학의 무한 개념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쉽게 예를 들어 
1 억이 큰 수라고 해도 
1 억이 9 억쪽에 가까운 수인가 
1 쪽에 가까운 수인가라고 문제가 제시되면 
1 쪽에 가깝다고 답하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아승기겁이라는 시간이 대단히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무한한 시간을 놓고 이것을 또 살피면 
그것은 비록 그렇게 길더라도 
역시 한 찰나쪽에 가까운 시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경전에 초발심즉변성정각 이런 표현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처음 수행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해서 
다음날 모든 경전 내용을 다 이해하고 
모든 신통과 자재함을 성취하고 
여환삼매까지 취득해서 
세계와 자신을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상태가 되는가 하고 
지켜보면 그것은 아닌데 
그러나 그렇게 수행을 시작하여 
성불하는 기간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그것은 찰나쪽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 본 바탕의 측면을 놓고 보면 
무정물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가 차별없이 
공한 상태인 것은 어느 경우나 또 마찬가지인 것이므로 
그렇게 조급하게 임할 일은 또 아니다. 

마찬가지 사정으로 
수행자가 다른 생명을 제도하고자 할 때에도 
그렇게 다른 생명의 번뇌 망상으로 인해 
수행자 자신까지 번뇌 망상을 증폭시켜 나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 사바세계에서 
성불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은 
결국 미륵보살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분이 성불하는 데 남은 기간이 56 억 7 천만년 정도가 
남아있다고 하니 
우스개소리로 아무리 사바세계에서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시키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56 억 년 이하로는 쉽게 가능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수행에 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반대로 해석하면 
수많은 중생이 미래에 성불하여 부처님이 될 때까지
생사고통을 받아나갈 기간이 그만큼 길고 길게 남아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기간 역시 무한한 기간에 비하면
역시 찰나 쪽에 가깝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는 가능하면 
많은 중생을 좀 더 빨리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도록 
가능한 노력을 현실에서 기울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이 순간에 그런 망집을 벗어나 
수행에 임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무량겁에 걸쳐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 갖는 가치는 
그 가치가 무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집착하는 것을 
아무리 무량하게 중첩시켜도 이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무량한 IF 문제를 놓고 
일일히 어떤 선택이 좋은가를 선택하기 위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수행 이상 가는 가치가 없기때문이다. 

그런 자세한 가치 비교를 통해서 
경전에서 수행이 갖는 가치를 
그처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평가하는 가치 저울에서 
한쪽에 이미 대단히 가치가 높다고 보는 내용을 무량하게 올려 놓고 
다시 경전의 사구게 하나를 지니고 외우고 실천하는 것이 갖는 가치가 
그 보다 더 높다고 
제시하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지금 올려 놓고 듣는 노래에서도 
욕계의 최상의 상태에 있는 파순을 거론하면서 
직접 가서 체험하고 보아야 할 바가 있음을 제시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결국 생사현실에서
무량겁에 걸쳐 스스로 일으킨 번뇌에 묶여 고통받고 
다른 생명을 괴롭히는 상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은 작업체계를 조금 바꿔서 그간 밀린 조각글을 
상당히 길게 쓸 수 있어 좋았는데 
글 쓰는 것도 좋지만 본인도 
올려진 경전도 잘 살피고 
핵심부분을 뽑아 키워드를 외우거나 
외울 게송 부분을 외우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 '침대'라는 검색어로 
48 페이지가 출력되어 나와서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그간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내용은 많이 제시한 것도 같은데 
그러나 또 부분 부분 살펴서 좀 체계적으로 살핀다고 나섰는데 
뜻과 같지는 않다. 

그러나 부족한대로 일단 마치고 
다음 기회로 또 넘기기로 한다. 



mus0fl--Marka - Le Pays De La Pluie.lrc



조각글을 마치면서 쓸 내용을 거의 다 마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적어야 할 내용을 빠뜨린 것 같아서 

다시 옥상기지에 올라가 쉬면서 

무엇을 빠뜨렸는가 생각해보았다. 


생각이 났다. 


그 전에 오늘 본인이 쉬면서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사하려는데 

어제까지 보지 못한 모습을 보았다. 

냉장고 선반에 넣어둔 양파에 줄기가 돋아 았는 것을 본 것이다. 


냉장고 안에서 줄기가 돋을 정도이니 

얼마나 그 생명력이 대단한가라고 생각하면서 

이 양파를 꺼내 특별히 화분으로 옮겨서 심어 주었다. 


불교계에 불교신자가 먹지 않아야 할 채소 가운데 

5 신채가 있다. 


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 이런 것들인데 

흥거는 이름만 전하고 한국 등에서 보기 힘든 매운 채소라고 한다. 


그런데 육식은 그로 인해 각 생명이 집착하는 생명을 희생하게 되기에 

그것을 금한다고 하지만, 

왜 이런 채소를 금하는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행자는 널리 인간만 아니라 다른 하늘 중생까지 

상대해야 하는데 

현실에서 마늘을 먹으면 그 특유한 향때문에
다른 이가 함께 대화하기 힘들게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수행자도 그런 경우 향에 민감한 하늘 중생이 

이런 수행자를 기피하게 되기에 그렇고 

대신 잡된 귀신은 오히려 달라 붙게 되기에 그렇다고도 하고 


또는 이런 매운 채소가 공연히 정력을 왕성하게 해서 

수행에는 오히려 장애를 초래할 수 있기에 그렇다고도 한다. 


그래서 수행자라면 섭취하지 않아야 하는데 

일반 현실에서는 육식을 섭취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런 채소까지 가려서 섭취하지 않은 것이 쉽지 않다. 


특히 한국 현실에서 마늘 파 부추 이런 것은
대단히 흔하게 사용하는 음식재료라서
이런 것을 일일히 가려가며 식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힘든데
다시 양파는 이름이 파와 비슷하고 또 성질도 비슷하다고 해서
한국 불교계에서는 한국에서는 잘 보지 못하는 흥거대신
이를 추가해서 섭취를 금하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원래 부처님이 제정하지 않은 내용을 공연히 추가한다고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칭찬받게 되지 않고 

때로는 제바달다처럼 공연히 필요없는 내용을 추가하여 

수행을 어렵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공연히 매운 채소를 추가한다고
고추를 추가한다거나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게 되고 

그런 가운데 담배향을 태우는 일을 금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을 금하거나 한다면
이런 것들이 그런 형태의 하나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본다. 


본인은 가끔 엉뚱한 시감상을 통해서 

왜 5 신채를 금하는가를 생각해보는데 

이름이 그 사유를 하나하나 제시해주고 있다고 본다. 


시감상은 자유이기에 정말 자유인데 

잘 이름을 음미해보면 그 사유가 이름에 다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마늘 - 악마가 늘 그렇게 활동하면 좋겠는가. 

파 - 수행을 파하면 좋겠는가. 

나머지는 개인 시감상에 맡기는데 

그러나 본인이 현실에서 이것을 다 함께 섭취하는 

새로운 방안을 개발했다. 


양파와 함께 이것을 먹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마늘과 파 양쪽의 문제점을 다 함께 파하여 

독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넌센스 성격의 횡설수설을 

실답게 여기면 곤란하고 

그런 엉뚱한 시감상을 할 여유가 있으면 

화엄경 정행품에서 문수보살님이 가르쳐 준 내용처럼 


식사를 하던, 잠을 자던, 양치질을 하던 

일상생활에서 행하게 되는 그 모든 활동을 함에 있어서 

그런 매 순간에 

자신의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성불 이런 서원과 관련시켜 

이를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평소 자세가 쌓여서 

자신의 불국토도 성취되고 중생제도 서원도 하나하나 성취되기 때문이다.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오늘 조금 더 자세히 살폈는데 

아무리 이런 내용을 제시해도 

그래도 현실은 대단히 진짜처럼 여겨지는 가운데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사정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사정으로 이런 현실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며
이것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과 


그와 반대로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하는 것은 

무엇이 어떤 사유로 낫다고 할 것인가를 

잘 헤아려야 한다고 본다. 


이미 꿈의 비유에서 이 사정을 설명했는데 

꿈의 내용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꿈도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 것이고 

현실에서 대하는 또 다른 실답지 않는 내용으로서 

환사의 환술이나 

오늘날 현실에서 대하는 만화나 영화나 게임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실답지 않은 내용을 붙잡고 계속 늘어져도 

그 세계 안에서는 나름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되고 

또 그렇게 한 생을 산다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보게도 되고 

심지어 그로 인해서 한 생을 대단히 

풍요롭게 잘 산다고 볼 경우마저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것 뿐이라는 점이 최대의 단점이다. 


마치 가위바위보게임에서 

바위를 내면 가위를 이기는데 

그것은 그 게임안에서만 그런 힘을 갖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마치 장기에서 말이 직선과 사선을 오가는 방식으로만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게임안에서만 그런 것처럼 

그런 내용은 그 안에서만 그렇게 효과를 갖는 것 뿐이고 


다른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다. 

그것이 바로 '실답다'와 '실답지 않다'의 차이인 것이다. 


만일 꿈이 실답다면 

꿈안서만 그런 내용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눈으로 보는 색이 실답다고 하려면 

눈으로 보는 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영역이나 코로 맡는 영역에서도 그래야 할 것이고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은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실답지 않은 것을 붙잡고 임하면 

지금 자신의 눈이 그렇게 기능하는 한도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그렇게 의미를 갖지만, 

그러나 그것 뿐이고 

다른 세계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것들이 의미를 갖고 

현실에서 집착한 그런 것들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이런 여러가지 가운데 

선택이 문제된다면 


현실에서 얻는 그 모든 것을 

어떤 형태의 자산으로 바꾸어 가지려고 할 것인가 

이런 퀴즈 풀이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한 영역에서는 

대단히 실답게 여겨지고 좋다고 보는 것이 

그 순간에 마음을 끄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수행자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히려 그런 것을 버리고 

그 대신 모든 영역 모든 세계에서 

골고루 그 가치를 널리 오래 인정받는 항목을 

수행을 통해 얻어내려고 수행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항목이 무엇들인가 하면 

이미 

신, 계, 참, 괴, 문, 사, 혜, 념, 지, 변과 같은 

10 개의 다함이 없는 창고의 항목

또는 수행자의 7 가지 자산 항목들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런데 왜 그런 항목들은 수행자의 그런 자산이 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가는 


색게 무색계 욕계내 다른 세계들을 일일히 고려하거나 

굳이 사후 생을 미리 고려에  넣지 않더라도  


당장의 현실에서 두 순간만 놓고 실험을 해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당장 눈에 좋아 보이는 화려한 그림을 

귀로 대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무언가. 


그것이 당장 자신 안에서 다른 형태로 환전이 되는가. 


또 눈을 감고 직전에 본 내용이나 

다른 감각현실들을 

그 직후에 그대로 다시 되살려 내려면 그것이 다시 되살려지는가. 


그러니 그런 형태로 얻는 것들을 

한 주체가 각 세계를 오가는 가운데 

무량겁에 걸쳐서 보관하고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떤 것은 이 두순간에 걸쳐서도 

계속 유지되어 확인할 수 있기도 하고 

또 되살려 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 가운데 

어느 세계 누구에게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이가 자산을 갖고 있다면 

먼저 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질 우유와 같은 형태의 것을 

일단 좀 더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현금과 같은 형태로 바꾸고 

그 현금도 일정 장소 일정 시기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형태로 보유하지 않고 

널리 각 세계에서 통용되는 형태로 황금과 같은 형태로 바꾸어 보관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보듯, 


수행자가 수행과정에서 대하는 내용들도 

매 순간 이런 형태로 계속 바꾸어 놓는 것이 

현명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각 항목의 가치를 넓고 길고 깊게 헤아려서 

잘 비교하여 따진다면 


결국 현실에서 각 주체가 집착하고 대하는 

그런 재화나 지식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경전에서 제시하는 그런 항목들에 

가치가 농축되어 집적되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최정점에 

부처님과 부처님이 가르친 가르침(법)과 

그 기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가 

3 보로서 위치하게 된다고 

그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실답지 않은 것을 

그 사정을 잘 관하지 못하고 

실답다고 여기고 그것을 집착하고 매달리면 

이 생에서 그것을 얻는 그 한도에서는 

마치 그것이 대단한 것처럼 여기게 되지만, 

그것은 사정이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선택임을 

이번 기회에 자각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을 빠뜨렸기에 이미 길지만 

보충애 넣고 마치기로 한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4454#1484
sfed--금강반야바라밀경_K0014_T0236.txt 
sfd8--불교단상_2562_05.txt ☞◆vthf1484
불기2562-05-03
θθ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ecilia_Beaux,_Rev._Dr._William_Henry_Furness,_1886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man142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1280px-Sumadera_Gomado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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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enoir madame-claude-monet-1872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flower-1375235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Decorated_Paifang_in_Summer_Palace



♥American Bodhi Center, Waller County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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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ul_Cézanne_055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ower_of_Buddhist_Incense_2



♥Plymouth University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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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un-flower-1058504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eyto_Lake-Banff_NP-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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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Zünd_Gang_nach_Emmaus_1877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flower-1405423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merald_Buddha_Photo_D_Ramey_Lo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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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Utagawa-Kuniyoshi-opening-shellfish-at-fukagawa.jpg!HD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e,_Roman_-_Flickr_-_nekonomania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ummer_Palace_at_Beijing_41



♥Politecnico di Milano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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