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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12-12_설무구칭경_002 본문
설무구칭경
K0121
T0476
설무구칭경 제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설무구칭경_K0121_T0476 핵심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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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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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무구칭경
해제보기
설무구칭경 제2권
대당 현장 한역
장순용 번역
3.성문품(聲聞品)
그때 무구칭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런 병을 앓아 침상에 누워 있는데 세존께서 대비(大悲)하시니 어찌 불쌍해 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런데도 사람을 보내 내 병세에 대해 묻지 않으시는구나.’
그러자 세존께서는 무구칭의 생각을 아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 사리자(舍利子: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에게 가서 문병하여라.”
사리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뵙고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저는 큰 숲 속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제가 좌선하는 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자여,
앉아 있는 것만이 꼭 좌선은 아닙니다.
무릇 좌선이란 삼계 어디에도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멸진정[滅定]에서 나오지 않으면서도 모든 위의를 나타내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증득한 상(相)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일체 이생(異生)의 온갖 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안에도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도 행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37보리분법(菩提分法)에 머무르면서도 일체의 소견들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생사를 버리지 않는데도 번뇌가 없고,
열반을 증득했더라도 그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렇게 좌선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인가(印可)하실 것입니다.’
당시 저는 무구칭의 말을 듣고서도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묵묵히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무구칭을 뵙고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세존깨서는 대목련(大目連:대목건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서 문병하여라.”
대목련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무구칭을 뵙고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예전에 저는 광엄성에 들어가 거리에서 거사들을 위해 법의 요체[法要]를 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 장소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목련이여,
재가의 거사[白衣居士]를 위해 법을 설할 때는 존자(尊者)처럼 설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법을 설할 때는 반드시 법대로 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구칭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법대로 설하는 것입니까?’
무구칭은 즉시 이렇게 답했습니다.
‘법에는 나[我]가 없으니 나라는 티끌[我垢]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정이 없으니 정(情)의 티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수명이 없으니 생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보특가라(補特伽羅:
有情)가 없으니 먼저와 나중이 끊어졌기 때문이며,
법은 늘 고요하니 모든 모습을 멸했기 때문이며,
법은 탐욕과 집착을 벗어났으니 반연(攀緣)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문자가 없으니 언어가 끊어졌기 때문이며,
법은 표현할 길이 없으니 일체 사념의 물결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은 일체 모든 것에 두루 현현하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법은 드러낼 것도 없고[無顯],
형상도 없고[無形],
모습도 없는[無相] 것이니 일체의 행하고 움직이는 일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내 것[我所]이 없으니 내 것이라는 관념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은 요달하고 구별함이 없으니 마음과 의식[心識]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비교함이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며,
법은 인(因)에 속하지 않으니 연(緣)에 연루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법계(法界)와 동일하니 일체의 참법계[眞法界]에 평등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며,
법은 진여[如]를 따르니 따르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며,
법은 실제의 경계[實際]에 머무니 궁극적으로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법에는 흔들림이 없으니 여섯 경계[六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에는 가고 옴[去來]이 없으니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공(空)에 순응하고 무상(無相)을 따르고 무원(無願)에 응하니1)일체의 늘어나고 줄어드는 사념에서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생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갈무리하는 근본 의식도 없으니 일체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범주를 초월했기 때문이며,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니 늘 부동(不動)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법은 분별에서 나온 어떤 행실도 벗어났으니 모든 쓸데없는 논쟁을 절대적으로 끊었기 때문입니다.
자, 대목련이여,
법상(法相)이 이러하니 어떻게 설할 수 있겠습니까?
법을 설한다는 것은 일체가 모두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며,
그 법을 듣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두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입니다.
만약 이곳[是處]이라면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으며,
이곳에 즉(卽)한다면 도무지 설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요달하고 구별하는 것도 없습니다.
존자 목련이여,
비유하자면 요술쟁이[幻士]가 요술로 만들어진 자[幻化者]에게 모든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에 입각해야 비로소 법을 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일체 중생의 근기의 성향이 다르다는 걸 잘 알아야 합니다.
오묘한 지혜의 눈으로 걸림 없이 살펴서 대자비를 나타내고,
대승을 찬탄하여 설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걸 생각하며,
의요(意樂)가 청정하여 법의 표현들을 능숙히 함으로써 삼보의 종성이 영원토록 끊이지 않게 해야 비로소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 무구칭이 이렇게 법을 설하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 8백의 거사가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저는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어 잠자코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가섭파(迦葉波:대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대가섭파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광엄성 내의 가난한 마을을 돌면서 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제가 있는 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가섭이여,
자비심이 있으면서도 평등하게 행하지를 못하시는군요.
부잣집을 피해 가난한 집만 걸식하다니요?
존자 가섭이여,
일체가 모두 평등하다는 법에 입각해서 마땅히 차례대로 걸식을 행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먹지 않기[不食]2) 위해 걸식해야 하며,
사람들의 먹는 데 대한 집착을 없애고 싶기 때문에 걸식해야 하며,
남이 베푸는 음식을 받고자 걸식해야 합니다.
마을에 들어갈 때는 마을이 텅 비어 있다는 생각으로 들어가고 그러면서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성숙시키기 위해 모든 성읍(城邑)을 들어가야 하고,
또 부처님의 집을 방문하는 것처럼 들어가야 합니다.
걸식하는 집에 가서는 받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 음식을 마땅히 받아야 하고,
보이는 빛깔은 장님이 보는 것처럼 보아야 하고,
들리는 소리는 메아리처럼 들어야 하고,
맡는 냄새는 바람을 냄새 맡듯 해야 하고,
음식의 맛은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감촉을 지각하는 것은 지혜로 증득한 듯해야 합니다.
모든 법은 환상과 같아서 자체의 고유한 성품[自性]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별개의 성품[他性]도 없으며,
치열하게 불타는 것도 없고 적멸한 것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존자 가섭이여,
여덟 가지 삿됨[邪]을 버리지 않고 여덟 가지 해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여덟 가지 삿됨의 평등성을 갖고 올바른 평등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한 그릇 음식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면서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에게도 공양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나 자신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먹는 자는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번뇌를 벗어나지 않으며,
선정에 들지 않으면서도 선정에서 나오지 않고,
생사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이래야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자의 걸식에 음식을 베푸는 사람들은 작은 과보도 없고 큰 과보도 없으며,
이익됨도 없고 손해됨도 없으니,
이는 바로 부처의 길[佛趣]로 들어가는 것이며 성문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존자 가섭이여,
만약 이렇게 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 남이 베푸는 음식을 헛되이 받아먹는 것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 즉시 모든 보살들에 대해 깊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정말 뛰어났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속 선비의 변재와 지혜가 이와 같았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그의 설법을 듣는다면 누구인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때부터 중생에게 성문승의 길이나 독각승의 길 따위를 권하지 않고 오직 마음을 일으켜 무상정등보리를 구하기를 가르쳤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대선현(大善現: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보고 문병하여라.”
대선현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광엄성 안에 들어가 걸식을 행하다가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은 저에게 예의를 표하고 제 밥그릇에다 맛있는 음식을 가득 채워 주면서 말했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이 음식에 대한 평등성으로 일체 만법의 평등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또 일체 만법의 평등성으로 모든 부처님의 평등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끊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들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살가야견(薩迦耶見)3)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단 하나의 평등한 길[一趣道]에 들어갈 수 있다면,
무명(無明)과 아울러 삶에 대한 갈망을 멸하지 않고서도 슬기의 광명을 일으켜 해탈을 이룰 수 있다면,
5무간업(無間業)의 평등한 법성(法性)으로 해탈의 평등한 법성으로 들어가서 해탈도 없고 속박도 없다면,
4제(諦)를 보지는 않았으나 진리를 보지 않은 것도 아니라면,
과보를 성취하지 않았으나 과위를 성취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면,
범인[異生]이 아니지만 범인의 법을 여읜 것도 아니라면,
성인이 아니지만 성인 아님도 아니라면,
일체의 법을 성취하면서도 모든 법상(法想)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그대가 부처님을 보지도 않고 법을 듣지도 않으며 승가를 섬기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저 외도(外道)의 여섯 스승인
만가섭파(滿迦葉波:프라나 카샤파)ㆍ
말살갈리구사리자(末薩羯璃瞿舍離子:마칼리 고살라)ㆍ
상폐다자(想吠多子:산자야 벨라티풋타)ㆍ
무승발(無勝髮:파쿠다 카짜야나)ㆍ
알봉가연나(褐犎迦衍那:아자타 케사캄발리)ㆍ
이계친자(離繫親子:니간타 나마풋타) 등을
그대의 스승으로 삼아 그들을 의지해 출가해서
그 여섯 스승이 떨어진 곳에 존자 역시 떨어질 수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모든 온갖 잘못된 소견의 길에 빠져 있으면서도 양극단이나 중도의 길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8난처[無暇]에 묶여 있으면서도 유리한 조건[有暇]을 구하지 않는다면,
온갖 오염된 욕망과 어울리면서도 청정함을 성취하지 않는다면,
모든 중생이 얻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無諍:
아라나]를 존자 역시 얻지만 그것을 청정한 복전이라 이름붙이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음식을 보시한 사람들이 여전히 3악도(惡道)에 떨어진다면,
존자를 온갖 마군과 함께 손잡고 모든 번뇌를 반려로 삼는다고 여긴다면,
일체 번뇌의 자성이 곧 존자의 자성이라면,
모든 중생에 대해 원망하고 해치는 감정을 갖는다면,
모든 부처님을 경멸한다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비방한다면,
승가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궁극의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저는 무구칭의 말을 듣고서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앞이 캄캄해 방향감각을 잃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밥그릇을 버려둔 채 그 집을 나오려고 하자 무구칭이 제게 말했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밥그릇을 가져가시고 내 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한 분이 여래가 만든 사람[化人]이었다면 두려워하겠습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이 다시 말했습니다.
‘일체 만법의 성품과 모양은 다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일체 유정과 모든 언설의 성품과 모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이 문자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이 모두 성품과 모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문자 아닌 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이 해탈의 모습이 바로 일체 만법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인 무구칭이 이 법을 설하자 2만 명의 천자(天子)가
번뇌의 어둠과 욕망의 오염에서 벗어나 일체 만법에 대한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500명의 천자는 순법인(順法忍)을 터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묵묵히 할 말을 잃어버려 대답하질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 다시 만자자(滿慈子: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만자자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큰 숲 속에서 처음 배우는 비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자자여,
먼저 선정에 들어 비구들의 마음을 관찰하고 난 다음에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십시오.
더러운 음식을 보배 그릇에 담지 마십시오.
반드시 비구들의 마음이 어딜 지향하고 있는지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니,
값으로 따질 수도 없는 폐유리 보배[吠琉璃寶:
사파이어 보석]를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水精珠]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존자 만자자여,
모든 중생들 근기의 차별성을 살피지 않고,
아무에게나 보잘것없는 근기가 수용하는 법을 주어선 안 됩니다.
저들 스스로는 상처가 없으니 그대가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대도(大道)를 행하고자 한다면 작은 길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햇빛을 저 반딧불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큰 바다를 소 발자국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큰 사자후를 들짐승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취급하지 마십시오.
존자 만자자여,
이 비구들은 전에는 대승의 마음을 내었는데 최근에 와서 보리를 기원하다가 그 마음을 잊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성문승의 법을 보여 주겠습니까?
내가 성문들의 지혜를 살펴보니 미천하기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이상으로 캄캄해서 대승이 없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근기와 지혜는 관찰해도 그들 근기의 날카롭고 무딤을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구칭은 이 같은 뛰어난 삼매에 들어가서
모든 비구들이 한량없는 숙세(宿世:전생)의 차별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그들은 과거 500명의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고
한량없이 뛰어난 공덕을 쌓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으로 회향했습니다.
비구들이 숙세의 일을 모두 기억하자 보리를 구하는 마음이 다시 현재에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 대사의 발에 머리 숙여 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은 법을 설하는 것을 인연으로 그들이 무상정등보리의 마음에서 다시는 물러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문승들은 남들의 생각과 근기의 성향을 알지 못하니,
여래께 말씀드리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성문승들은 중생의 근기의 높고 낮음을 잘 알아내지도 못하고,
부처님이신 세존처럼 늘 선정 상태에 있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 마하가다연나(摩訶迦多衍那:마하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가다연나가 말씀드렸다.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을 위해 법을 설하신 뒤 선정에 들었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선정에 든 바로 직후 세존께서 가르친 내용을 분별하고 결택(決擇)해서 이건 무상(無常)의 뜻이고,
이건 고(苦)의 뜻이고,
이건 공(空)의 뜻이고,
이건 무아(無我)의 뜻이고,
이건 적멸(寂滅)의 뜻이라고 비구들에게 일러줬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 장소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존자 가다연나여,
생멸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실상법(實相法)을 설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모든 법은 궁극적으로는 과거에 생긴 것[已生]도 아니며,
현재 생기고 있는 것[今生]도 아니며,
미래에 생길 것[當生]도 아니며,
또 과거에 멸한 것[已滅]도 아니며,
현재 멸하고 있는 것[今滅]도 아니며,
미래에 멸할 것[當滅]도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무상의 뜻입니다.
5온(蘊)의 본성이 궁극적으로는 공(空)하다는 사실을 통달하면 결국 말미암아 일어나지[由起]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고의 뜻입니다.
일체 만법이 궁극적으로는 고정적 실체[所有]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공의 뜻입니다.
나[我]와 나 없음[無我]이 둘 아님을 알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무아의 뜻입니다.
그 자체의 고유한 성품[自性]도 없고,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성품[他性]도 없는 것은 불타지도 않으며,
불타지 않는 것은 꺼질 수도 없으니 적정(寂靜)해질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꺼질 수도 없는 그것이 절대적인 적정이며 궁극적인 적정이니,
이것이 바로 적정의 진정한 뜻입니다.’
무구칭이 이러한 법을 설하자 그 비구들은 모두 번뇌[漏]가 소멸되면서 마음이 해탈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대답하질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대무멸(大無滅:
아나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대무멸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큰 숲 속의 한곳에서 경행(經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엄정(嚴淨)이라는 이름을 가진 범천왕이
1만 명의 범천들과 함께 대광명을 뿌리면서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와 절을 하면서 물었습니다.
‘존자 대무멸이여,
그대가 터득한 천안(天眼)은 얼마나 볼 수 있습니까?’
저는 그 범천왕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선(大仙)은 알아야 하오.
나는 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천대천세계를 마치 손바닥 안의 아마락(阿摩洛) 열매처럼 봅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 대무멸이여,
그대가 터득한 천안은 행하는 모습[行相]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행하는 모습이 없는 것입니까?
만약 행하는 모습이 있다면 외도의 5신통과 같은 것이며,
행하는 모습이 없다면 그것은 무위(無爲)이니 본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존자께서 터득한 천안이 볼 수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천들은 무구칭의 설법을 듣고 경이감에 차서 즉시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며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다운 천안을 얻었습니까?’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참다운 천안을 얻으셨습니다.
적정(寂定)을 버리지 않고서도 모든 불국토를 보시는데,
두 가지 상(相)이나 갖가지 상을 짓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듣자 그 범천왕과 5백의 권속들은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우파리(優波離)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을 하여라.”
우파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계율을 범한 두 비구가 있었는데,
그들은 너무나 부끄러워서 감히 부처님을 찾아가지는 못하고 저를 찾아와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파리여,
지금 우리 두 사람은 계율을 범했는데 정말 너무나 부끄러워 감히 부처님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이 불안과 걱정을 없애서 허물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즉시 두 비구가 불안과 걱정을 없애고 잘못을 씻도록 바른 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른 법으로 권유하고 이끌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바리여,
이 두 비구의 죄를 악화시키지 마십시오.
곧바로 그들의 가책하는 마음을 없애버려야지 범한 행위를 갖고 그들의 마음을 흔들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저 죄의 성품은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으로도 나가지 않으며 둘 사이에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마음이 오염됐기에 중생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하기에 중생이 청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란 것 역시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으로도 나가지 않고 그 둘 사이에 있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그렇다면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또한 그렇다면 모든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진여[如]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바리여,
그대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해서 해탈되어 있습니다.
이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이 오염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무구칭이 다시 말했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도 본래 청정해서 일찍이 오염된 적이 없는 것이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파리여,
만약 사량 분별이 있고 다른 분별도 있다면 번뇌가 있는 것이며,
사량 분별이 없고 다른 분별도 없다면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입니다.
만약 전도됨이 있다면 번뇌가 있는 것이며,
전도됨이 없다면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입니다.
만약 자아를 취함이 있다면 번뇌에 물듦이 있는 것이며,
자아를 취함이 없다면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입니다.
우파리여,
모든 법의 성품은 생멸하면서 머무르지 않는 것이 허깨비 같고 환화(幻化)와 같고 번개와 같고 구름과 같습니다.
일체 만법의 성품은 서로 기다리질 않으며,
나아가 단 일념(一念)이라도 잠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모든 법의 성품은 다 허망하게 보이는 것이 꿈과 같고 불꽃과 같고 건달바성(健達婆城)4)과 같습니다.
모든 법의 성품은 다 분별심이니,
분별심이 일으킨 영상(影像)은 마치 물속에 달이 비친 것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 같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아는 것을 계율을 잘 가진다고 하는 것이며,
이 계율을 잘 지켜나가는 것을 조복(調伏)을 잘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두 비구는 무구칭의 설법을 듣고 경이에 차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기합니다.
거사여,
이처럼 뛰어난 지혜의 변론은 우파리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파리를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셨어도 우파리가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즉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그를 단순히 거사라고 생각지 말라.
왜냐하면 여래를 제외하고는 성문이나 그 밖의 보살이라 할지라도 이 대사(大士)의 지혜로운 변론을 당해내질 못하기 때문이다.
대사의 지혜로운 변론은 분명하기가 이 정도로 뛰어나다.’
그러자 두 비구는 즉시 양심의 가책이 없어지면서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고 다음과 같은 서원을 세웠습니다.
‘모든 중생이 반드시 이 같은 뛰어난 지혜의 변론을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라호라(羅怙羅:라훌라)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라호라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이첨비 종족의 여러 청년들이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와 머리 숙여 절을 하고 제게 물었습니다.
‘라호라여,
그대는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출가하여 도를 닦습니다.
출가를 하면 어떤 공덕과 뛰어난 이익이 있습니까?’
저는 법대로 출가의 공덕과 뛰어난 이익에 대해 설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호라여,
출가의 공덕과 뛰어난 이익을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출가 자체는 공덕이 없고 뛰어난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호라여,
유위법 안에서는 공덕과 뛰어난 이익이 있다고 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라는 것은 무위법이니,
무위법 안에서는 공덕과 뛰어난 이익이 있다고 설할 수 없습니다.
라호라여,
무릇 출가라는 것은 피(彼)도 없고 차(此)도 없고 중간도 없으니 온갖 잘못된 견해를 멀리 벗어나 있습니다.
출가는 색(色)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니니,
이것이 열반의 길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칭송하는 것이며,
성인이 수용하는 것이며,
온갖 마군을 항복시키는 것으로서 5취(趣)에서 해방되고,
5안(眼)을 깨끗이 맑히고,
5근(根)을 확고히 세우고,
5력(力)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번뇌함이 없이 모든 악법을 벗어나고,
뭇 외도를 꺾어서 가명(假名)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 집착이 없고 섭수함이 없으며,
나와 내 것을 떠나 모든 취(取)함이 없으며,
취하는 것이 전혀 없으니 취함이 이미 끊어졌고,
동요함이 전혀 없으니 동요가 이미 끊어졌고,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니 남의 마음[他心]도 잘 보호하고,
침묵의 고요함[寂止]을 따르면서도 뛰어난 관찰[勝觀]을 부지런히 닦고,
모든 악을 떠나서 모든 선을 닦습니다.
만약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를 참다운 출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구칭은 여러 청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이제 이 훌륭히 설한 법의 비나야(毗奈耶:
律] 속에서 함께 출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선 세상에 나오기 어렵고,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행을 벗어나기 어렵고,
행운의 복덕을 갖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러 청년들이 말했습니다.
‘대거사여,
부처님께서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그대들 청년들이여,
다만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켜 올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 바로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자 서른두 명의 이첨비 종족 청년들이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켜 올바른 수행을 닦기를 맹세했습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아난다(阿難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아난다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세존께서 가벼운 병이 났을 때 우유를 드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에 평상복을 입고 밥그릇을 들고 나와
광엄성 안의 바라문 집을 찾아가서 그 집 문 앞에 서서 우유를 구걸하였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어찌하여 새벽부터 밥그릇을 들고 이곳에 서 있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거사여,
세존께서 가벼운 병이 나셨는데 우유를 드셔야 하기 때문에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존자여,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서 세존을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여래를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여래의 몸은 금강으로 이루어져서 일체의 악법과 나쁜 습관을 영원히 끊었고,
일체의 선법(善法)을 원만히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슨 병이 있고,
무슨 번뇌가 있겠습니까?
아난다여,
잠자코 돌아가십시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이 이 어설픈 말을 듣지 않도록 하십시오.
큰 위덕을 지닌 모든 하늘과 다른 불토의 모든 여래와 보살들이 이 말을 듣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난다여,
전륜성왕은 약간의 선근(善根)을 쌓았는데도 병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한량없는 선근을 쌓고 원만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한 여래는 어떠하겠습니까?
병이 붙으려야 붙을 곳이 없습니다.
아난다여,
잠자코 빨리 돌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외도와 바라문들이 그대의 어설픈 말을 들으면 반드시 어찌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으면서 어떻게 남들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 사람들이 듣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 아난다여,
여래의 몸이란 바로 법신(法身)이지 더러움이 섞여 있는 육신이 아닙니다.
세간을 벗어난 초월적인 몸이라 세간법에 물들지 않고,
무루신(無漏身)이라서 더 이상 번뇌의 누출이 없으며,
무위신(無爲身)이라서 모든 유형의 활동[有爲]을 벗어났으며,
모든 수(數)가 영원히 적멸해서 온갖 수를 초월했습니다.
이 같은 부처님의 몸에 병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고 당치 않은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무구칭의 말을 듣고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잘못 듣거나 이해한 일이 없었는가?’ 생각했는데,
그때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대 아난다여,
거사의 말이 옳다.
세존의 참다운 몸[眞身]에는 정말로 병이 없다.
다만 여래가 5탁악세(濁惡世)에 출현하신 것은 곤궁하고 고뇌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중생들을 교화 인도하기 위하여 그런 일을 보이신 것이다.
가거라. 아난다여,
우유를 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무구칭 대사(大士)의 변설을 듣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 묵묵히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존께서는 성문의 대제자 500명에게 “그대가 가서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문 제자들은 모두 제각기 겪었던 일[本綠]을 부처님께 고백하고 무구칭 대사를 칭송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4.보살품(菩薩品)
세존께서는 다시 자씨보살마하살(慈氏菩薩摩訶薩: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자씨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도사다천왕(覩史多天王:
도솔천왕)과 그의 권속들에게 모든 보살마하살들의 불퇴전(不退轉) 경지에 관한 법의 요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 자씨여,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당신에게 수기(授記)하시기를,
한 번만 더 생(生)을 거치면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생에 수기를 얻은 것입니까?
과거입니까,
미래입니까,
현재입니까?
만약 과거의 생이라면 과거의 생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미래의 생이라면 미래의 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생이라면 현재의 생은 멈춰 있질 않습니다.
세존께서,
그대 비구들이여 찰나마다 나고 늙고 죽음이 들어 있어서 즉각 소멸하고 태어난다고 설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생(無生)으로 수기를 받은 것입니까?
그러나 무생은 바로 올바른 본성[正性]5)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 무생의 본성 속에서는 수기가 있지 않으며 정등보리를 증득함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씨보살께서 어떻게 수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진여[如]의 생기[生]에 의거해서 수기를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진여의 소멸에 의거해서 수기를 얻었다 하겠습니까?
만약 진여의 생기에 의거해 수기를 얻었다 해도 진여에는 생성이란 것이 없고,
진여의 소멸에 의거해 수기를 얻었다 해도 진여에는 소멸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는 진여의 이법[理] 속에는 수기가 없습니다.
일체 중생이 다 진여이고,
일체의 법도 진여이며,
일체의 성현도 진여입니다.
그리고 자씨보살까지도 진여입니다.
만약 존자 자씨께서 이렇게 수기를 얻었다면 일체의 중생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수기를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는 상대적으로는 드러나질 않고 갖가지 다른 성품으로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자 자씨께서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 그 순간에 일체 중생도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일체 모든 중생들도 평등하게 따르는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존자 자씨께서 열반에 이르는 그 순간 일체 중생들도 그렇게 열반에 이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반 상태에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여가 반열반(般涅槃)이 된다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살펴보니 일체 모든 중생은 그 본성이 적정한 것이 그대로 열반의 상태라서 진여가 반열반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씨여,
그대의 법으로 천자(天子)들을 유혹하지 말 것이며,
그대의 법으로 천자들을 막지 마십시오.
저 보리라는 것은 나아가 구할 것[趣求]도 없으며,
퇴보하여 전락할 것도 없습니다.
존자 자씨여,
이 천자들로 하여금 보리를 분별하는 생각들을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몸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멸이 보리이니 모든 중생과 일체 만법의 상[法相])이 적멸하기 때문입니다.
증익(增益)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일체 반연하는 바가 증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하지 않음[不行]이 보리이니,
모든 어리석은 논쟁이나 의도[作意]도 보리 안에서는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단절이 보리이니,
모든 잘못된 소견이 다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버리고 떠나는[捨離] 것이 보리이니,
모든 집착을 다 버리고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혼란의 법을 영원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적정(寂靜)이 보리이니,
모든 분별이 영원히 적멸해 있기 때문입니다.
광대함이 보리이니,
일체의 크나큰 염원[弘願]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투지 않음이 보리이니,
모든 집착과 모든 논쟁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평안히 안정되어 있는 것이 보리이니,
법의 세계[法界]에 머무는 까닭입니다.
따르면서 힘쓰는 것이 보리이니 진여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둘이 아님[不二]이 보리이니 차별법의 특성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건립(建立)이 보리이니 실상의 경계 위에 건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등이 보리이니 눈과 눈이 보는 빛깔에서부터 뜻과 뜻이 헤아리는 법(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등한 것이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무위가 보리이니 나고 머물고 변하고 소멸하는[生住異滅] 것을 절대적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앎[遍知]이 보리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과 행위를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틈새가 없는 것[無間]이 보리이니 내부의 6처(處)에 섞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얽혀들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번뇌와 윤회전생으로 상속되는 습기(習氣)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처소가 없는 것이 보리이니 진여 속에서는 모든 방향과 처소를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머물지 않음이 보리이니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름뿐인 것이 보리이니 이 보리라는 이름은 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결 없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취사선택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혼란 없는 것이 보리이니 늘 제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고요함이 보리이니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명료히 드러나는 것이 보리이니 자기 본성에 섞여서 물드는 법[雜染]이 없기 때문입니다.
취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반연(攀緣)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차별성이 없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을 따르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비유할 수 없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비유를 영원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미묘함이 보리이니 이해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루 행함[遍行]이 보리이니 자성이 두루한 것이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절정[至頂]이 보리이니 모든 법의 으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오염이 없는 것이 보리이니 일체의 세간법으로는 오염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리는 몸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 무구칭 대거사가 이러한 법을 설하자 200명의 천자들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었을 뿐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광엄(光嚴) 동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광엄 동자가 여쭈었다.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광엄성을 나가고 있었는데,
그때 무구칭은 그 성을 막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절을 하고 나서 물었습니다.
‘거사여,
어디서 오십니까?’
무구칭이 제게 대답했습니다.
‘오묘한 보리[妙菩提]로부터 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거사여,
오묘한 보리는 어느 곳입니까?’
무구칭이 즉시 대답했습니다.
‘순박하고 솔직한 의요(意樂)가 오묘한 보리이니,
그러한 의요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행(加行)을 일으키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시설한 것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의요(意樂)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궁극적으로 뛰어난 법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대보리심이 오묘한 보리이니,
어떤 법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정한 보시가 오묘한 보리이니,
세간의 이숙과(異熟果)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정한 계율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소원이 원만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욕과 유화함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에 대해 성내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맹렬하게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선정[靜慮]이 오묘한 보리이니,
그 마음이 조화로워 견디어 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반야가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자(慈)가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에 대해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비(悲)가 오묘한 보리이니,
온갖 고통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喜)가 오묘한 보리이니,
늘 법의 뜰[法苑]에서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사(捨)가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의 애착과 성냄 등을 영원히 끊기 때문입니다.
신통이 오묘한 보리이니,
6신통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해탈이 오묘한 보리이니,
분별의 활동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방편이 오묘한 보리이니,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사(事)를 섭수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을 섭수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듣는 것[多聞]이 오묘한 보리이니,
진실한 행(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조복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이치대로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37종의 보리분법(菩提分法)이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의 유위법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참된 진리가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을 기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연기가 오묘한 보리이니,
무명(無明)이 다하지 않고 나아가 늙음과 죽음ㆍ근심ㆍ고통ㆍ번뇌 등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번뇌를 지식(止息)시키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참된 법의 성품을 완벽히 밝혀내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일체 중생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두 무아(無我)로써 자기의 성품을 삼기 때문입니다.
일체 모든 법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것의 본성이 공(空)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마군과 원수를 항복받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어떤 마군이나 원수가 날뛰어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계를 여의지 않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의 취(趣)를 발하는 일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자후가 오묘한 보리이니,
두려움 없이 능히 잘 결택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외(無畏)ㆍ18불공법(不共法)이 오묘한 보리이니,
널리 일체에 흠잡거나 싫증냄이 없기 때문입니다.
3명(明)이 거울처럼 비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번뇌를 벗어나 궁극적인 지혜[究竟無餘智]를 얻기 때문입니다.
한 찰나의 마음으로 모든 법의 궁극의 경지를 깨닫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원만히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남자여,
만약 보살들이 진실한 발기[眞實發起]를 구족하게 상응했다면,
바라밀다를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중생을 성숙시키는 힘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일체의 선근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정법을 수용하는 것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여래를 공양하는 것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가고 오고 나가고 멈추고 발을 들었다 내리는 등의 모든 행동거지가 다 오묘한 보리로부터 오는 것이고,
일체가 다 모든 부처님 법으로부터 오는 것이라서 이러한 보살들은 모든 부처님의 오묘한 법에 편안히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가 이렇게 법을 설하자 천자 500명이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대꾸하질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지세(持世)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지세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제가 집에 있을 때,
악마 파순이 1만 2천 명의 천녀들을 데리고 제석천왕의 모습으로 가장한 채 풍악을 울리고 노래를 하면서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같이 온 권속들과 함께 제 발에 절을 하고,
모든 천상의 즐거움으로 저에게 공양한 뒤,
합장 공경하고서 한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진짜 제석천왕인 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오시오.
교시가(憍尸迦)여,
비록 복이 있더라도 마땅히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반드시 욕망의 쾌락은 모두 무상한 것이라고 부지런히 관찰해야 하며,
몸[身]과 목숨[命]과 재물[財] 속에서도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견실한 법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자 파순이 제게 말했습니다.
‘대정사(大正士)여,
여기에 있는 1만 2천 명의 천녀들을 받아들여 곁에서 공양하고 시중들게 하십시오.’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만두시오.
교시가여,
그런 법답지 않은 일을 우리 사문인 불자에게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내게는 온당치 않은 것이오.’
제가 말을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무구칭이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제석천왕이 아닙니다.
악마 파순으로 그대를 놀려 주려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구칭은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이 천녀들을 내게 보시해도 좋다.
나는 재가(在家)에 있는 속인[白衣]6)으로서 사문인 불자가 아니니 받아도 된다.’
악마 파순은 놀랍고 두려우며 무구칭이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까 염려해서 모습을 숨겨 사라지려고 했지만 무구칭의 신통력이 그를 붙들자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신통력과 온갖 방편을 다 썼지만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대 악마 파순이여,
천녀들을 이 거사에게 보시해야 천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악마 파순은 두려운 나머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녀들을 무구칭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이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악마 파순은 그대들을 내게 주었다.
이제 여러 자매들은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하면 그대들의 근기에 따라 차례대로 성숙해 나가는 오묘한 보리의 법을 하나하나 설해서 그대들을 올바르고 평등한 보리로 나아가게 하리라.’
그러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들은 이미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다.
이젠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大法苑樂]을 스스로 즐길 수 있으니,
다시는 5욕(欲)의 쾌락을 즐기지 말라.’
천녀들이 말했습니다.
‘대거사여,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이란 모든 부처님의 파괴되지 않는 청정한 즐거움을 말한다.
또 늘 정법(正法)을 듣는 즐거움이며,
화합 대중[僧伽]을 부지런히 공경하고 섬기는 즐거움이며,
삼계를 영원히 벗어나는 즐거움이며,
어떤 조건[緣]에도 의지하거나 머물지 않는 즐거움이며,
5온(蘊)의 무상함이 마치 원수와 같다고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18계(界)를 비어 있는 독사와 같다고 전도됨 없이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12처(處)를 비어 있는 마을처럼 명확히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보리심을 늘 굳게 수호하는 즐거움이며,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이며,
어른들을 부지런히 모시는 즐거움이며,
보시를 하면서 탐욕을 떠나는 즐거움이며,
청정한 계율을 지켜서 오만하고 나태함이 없는 즐거움이며,
인욕하면서 순종과 화합하는 즐거움이며,
정진을 통해 선근을 기르는 즐거움이며,
선정 중에는 흔들림이 없음을 아는 즐거움이며,
반야를 통해 미혹을 벗어나 명철해지는 즐거움이며,
보리에서는 광대하고 묘한 즐거움이며,
뭇 마군을 꺾을 수 있는 즐거움이며,
모든 번뇌를 능히 두루 아는 즐거움이며,
모든 불국토를 두루 닦아서 다스리는 즐거움이며,
상서로운 상호로 장엄하기 위해 온갖 공덕을 쌓는 즐거움이며,
복과 지혜의 두 자량(資糧)을 올바로 닦아 익히는 즐거움이며,
오묘한 보리를 모두 장엄하는 즐거움이며,
깊고 심오한 법을 들을 때 놀라거나 두려움이 없는 즐거움이며,
3해탈문을 올바로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열반을 올바로 반연하는 즐거움이며,
시기가 맞지 않으면 관찰하지 않는 즐거움이며,
같은 부류[同類]끼리는 그 공덕을 생각해서 늘 가까이하는 즐거움이며,
다른 부류[異類]에 대해선 잘못을 보지 않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즐거움이며,
모든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를 즐기는 즐거움이며,
나쁜 벗은 잘 보호해 주고 싶은 즐거움이며,
교묘한 방편을 잘 받아들이는 즐거움이며,
모든 법을 기쁘게 믿는 즐거움이며,
태만하지 않고 일체의 보리분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 최상의 오묘한 즐거움이다.
자매들이여,
이런 것들을 보살의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모든 대보살들은 항상 그 가운데서 머문다.
그대들도 이런 것들을 즐겨야지 5욕의 쾌락을 즐겨서는 안 된다.’
그러자 악마 파순이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자,
이리 와서 함께 천궁으로 돌아가자.’
천녀들이 대답했습니다.
‘악마여,
당신은 떠나시오.
우리는 절대로 당신과 함께 돌아가지 않겠소.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우리들을 이 거사에게 드렸기 때문이오.
그러니 어떻게 다시 함께 돌아가자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법의 동산의 즐거움을 즐길 것이며 5욕의 쾌락을 즐기지는 않습니다.
당신 혼자 돌아가시오.’
그러자 악마 파순이 무구칭에게 말했습니다.
‘대거사여,
이 천녀들을 놓아 주십시오.
소유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분이 바로 보살마하살입니다.’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내 이미 놓아 주었소.
그대는 데리고 가시오.
그대들은 모든 중생의 법에 대한 염원[法願]을 만족시키도록 하시오.’
그때 천녀들이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면서 물었습니다.
‘우리 천녀들이 마군의 궁전으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수행(修行)하란 말씀을 하십니까?’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여러 자매들은 반드시 알아야 하오.
그대들은 반드시 이 법문을 배워야 합니다.’
천녀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 ‘무엇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고 합니까?’
‘자매들이여,
비유하자면 등불 하나로 수십만 등불을 붙일 수 있는 것과 같소.
그렇게 되면 어둠이 환하게 밝아져 영원토록 꺼지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처럼 자매들이여,
보살 한 분이 백천 구지 나유타 대중에게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내도록 권유한다면,
이 보살의 보리심은 영원토록 고갈되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발전하고 강화될 것이오.
이처럼 남을 위해 능숙한 방편으로 정법을 널리 설하면
오히려 모든 선법이 발전하고 강화되면서
영원히 고갈되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오.
자매들이여,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이 오묘한 법문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배워야 하오.
비록 마군의 궁전에 있을지라도 한량없는 천자와 천녀들이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권해야 하오.
그래야만 여래의 은혜를 알아 진실하게 갚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소.’
이 말을 듣고 천녀들은 무구칭의 발에 공경스럽게 절을 하였습니다.
무구칭이 앞서 악마 파순을 제지했던 신통력을 풀어주자,
파순과 그의 권속들은 홀연히 사라져 본래 살던 궁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세존이시여,
무구칭은 이처럼 자유자재한 신통력과 지혜와 변화무쌍한 언변으로 법을 설하기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장자의 아들 소달다(蘇達多)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소달다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아버님의 집에서 7일 밤낮 동안 대보시회[大祠會]를 벌여서 모든 사문과 바라문과 외도,
빈궁하고 하천한 외로운 걸인들에게 공양하였습니다.
이 보시회는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 모임에 들어와 저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자의 아들이여,
무릇 보시회란 그대가 이곳에 벌인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이제 법의 보시회를 마련해야 합니다.
어찌해서 이 같은 재물을 보시하는 모임을 여는 것입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거사여,
어떤 것을 법을 보시하는 모임이라고 합니까?’
무구칭이 제게 대답했습니다.
‘법 보시는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이 일시에 모든 중생을 위해 공양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원만한 법 보시회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하는가 하면,
무상보리의 행상(行相)으로 대자(大慈)가 야기[引發]되는 것이며,
모든 중생의 해탈을 위한 행상으로 대비(大悲)가 야기되는 것이며,
모든 중생의 기쁨에 따르는 행상으로 대희(大喜)가 야기되는 것이며,
정법과 지혜를 이해하는 행상으로 대사(大捨)가 야기되는 것이며,
뛰어난 적정(寂靜)과 자기를 다스리는 행상으로 보시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금기를 범하는 중생을 교화하는 행상으로 청정 계율의 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법이 무아(無我)라는 행상으로 인욕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몸과 마음을 멀리 벗어나는 행상으로 정진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가장 뛰어난 각지(覺支)의 행상으로 선정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배우는 행상으로 반야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행상으로 공(空)의 수행이 야기되는 것이며,
모든 유위(有爲)를 다스리는 행상으로 무상(無相)을 닦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부러 생(生)을 받는 행상으로 무원(無願)을 닦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정법(正法)을 잘 수용하는 행상으로 크나큰 힘[大力]이 야기되는 것이며,
4섭법[攝事]을 잘 닦아 익히는 행상을 통해 생명의 뿌리[命根]가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을 노예나 시종이 공경하고 섬기듯이 하는 행상으로 자만함 없음이 야기되는 것이며,
견실하지 못한 것을 견실한 것으로 바꾸는 행상으로 견고한 몸과 목숨과 재물을 증득하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여섯 가지 염(念)을 따르는 행상으로 정념(正念)이 야기되는 것이며,
청정하고 오묘한 법을 닦는 행상으로 의요(意樂)가 야기되는 것이며,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올바르게 행하는 청정한 삶[淨命]이 야기되는 것이며,
청정한 기쁨과 친근함의 행상으로 성현을 가까이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범속한 자들을 싫어하지 않는 행상으로 조복된 마음[調伏心]이 야기되는 것이며,
청정한 출가의 수행을 잘 하는 행상으로 청정하고 드높은 의요(意樂)가 야기되는 것이며,
늘 중도(中道)를 닦아 익히는 행상으로 능숙한 방편과 배움이 야기되는 것이며,
다투지 않는 법[無諍法]들을 통달하는 행상으로 늘 아란야(阿練若)에서 사는 게 야기되는 것이며,
올바른 부처의 지혜를 구하는 행상으로 좌선[宴坐]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의 번뇌를 올바로 없애는 행상으로 유가사지(瑜伽師地)의 단계를 잘 닦는 것이 야기되며,
상호를 갖추고 중생을 성숙시키고 청정한 불국토를 장엄하는 행상으로 광대하고 미묘한 복의 자량이 야기되는 것이며,
모든 중생의 마음과 행실을 알아 그에 따라 법을 설하는 행상으로 광대하고 오묘한 지혜의 자량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만법에 대해 취하거나 버림 없이 하나의 ‘올바른 이치의 문[正理門]’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행상으로
광대하고 오묘한 슬기[慧]의 자량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의 번뇌와 습기,
그리고 온갖 불선법(不善法)의 장애를 끊는 행상으로 일체의 선법을 증득함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지지와 모든 선법의 자량을 깨달아 가는 행상으로 닦아온 모든 보리분법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대 선남자들이여,
이런 것들을 법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보살들이 이러한 법 보시회에 안주한다면 최고의 보시자[大施主]라고 할 것이니,
세간의 천신과 인간들로부터 널리 공양을 받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가 이 법을 설하자 200명의 바라문이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놀라움에 가득한 저 역시 청정한 기쁨이 일어나 대사의 발에 공경스럽게 절을 하면서
10만금의 가치가 있는 보석 목걸이를 풀어서 은근히 바쳤습니다.
그러나 대거사는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대사여,
저를 가엾이 여겨 꼭 받아 주십시오.
만약 스스로 마음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주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주십시오.’
그제야 무구칭은 목걸이를 받아서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 대보시의 모임 속에서 가장 보기 싫고 빈천한 거지에게 주었고,
또 하나는 저 난승(難勝)여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고는 신통력을 사용하여 대중들이 양염(陽焰)세계의 난승여래를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 난승여래에게 바친 목걸이의 구슬이 난승여래의 머리 위에서 오묘한 보대(寶臺)를 이루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 보대는 사방을 네 대(臺)로 나누어 장식하고 온갖 장엄을 하여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무구칭은 이 같은 신통변화를 끝내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만약 보시를 베푸는 자가 평등한 마음으로 이 모임 속의 가장 하천한 거지라도
여래의 복전(福田)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보시한다면,
또 아무런 차별 없이 공평하게 주고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널리 보시하되
어떤 과보도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를 원만한 법보시라 합니다.’
그 거지는 무구칭의 신통변화를 보고,
또 그의 설법을 듣고 나서
결코 물러남이 없는 드높은 의요(意樂)를 얻으면서 문득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는 이 같은 자유로운 신통변화와 막힘이 없는 언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대보살들 하나하나에게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보살들은 제각기 부처님께 자기가 겪었던 인연을 말씀드리면서
무구칭 대사를 찬탄하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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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3해탈문이라고 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을 말한다.
공해탈문은 일체 만법이 비어 있음을 관(觀)하는 것이며,
무상해탈문은 일체 만법이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떤 차별상도 없음을 관하는 것이며,
무원 해탈문은 어떤 차별상도 없는 무상이기 때문에 염원해서 구할 것이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2 실제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승조(僧肇)는 열반의 경지에서는 생과 사,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이 없다고 했다.
3 satkāyadṛṣṭi의 음역.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한역한다.
우리 존재가 5온(蘊)이 임시로 합성해서 이루어진 것인 줄 모르고,
그것을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서 진짜 나[我]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4 실체 없이 허망한 환영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천룡팔부 중 음악을 관장하는 건달바가 거짓으로 나타낸 성.
신기루.
5 번뇌를 남김없이 끊는 것을 정성(正性)이라 한다.
번뇌를 다 끊어 생(生)에서 벗어났다는 뜻에서 정성이생(正性離生)이라고 한다.
6 인도에서는 승려들이 색깔 있는 옷을 입고 재가자들은 흰 옷을 입기 때문에 흰 옷은 세속에 있는 사람을 나타낸다.
○ [pt op tr]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ane Birkin - C`est Comme Ca.lrc
세상은 어지럽고 자신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설무구칭경』 즉 『유마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설무구칭경』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몇 부분 추려보았다.
이는 수행자 입장에서도 잘 이해하기 힘들다.
>>>
>>>
여기서 자씨는 다음에 성불한다는 미륵보살님을 가리킨다.
미륵보살이 성불하는 그 순간에
일체 중생도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열반 상태에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고 제시한다.
이것이 무슨 이상한 이야기인가.
『설무구칭경』에는 유마힐거사가 신통을 보이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일반인들도 다 그런 신통을 얻은 것인가.
그렇다면 누구라도 지금 경전에 나오는 그런 내용을
선보일만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일은 보기 힘들다.
열반 상태에 있지 않은 중생이 하나도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설무구칭경에서는
무엇은 어떻게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는 식으로
성문제자들이나 보살 수행자들에게 제시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미 열반에 다 그렇게 있다면
새삼스럽게 새로 열반에 들게 할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미륵보살님이 성불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경전에서 제시한 내용이 옳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미륵보살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도 해당된다.
사정이 그렇기에 일반 중생이 다 성불한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세상에 생사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또 한편 미륵보살님이던 어떤 보살님이던 성불하면
나머지 중생도 다 성불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수행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수행할 분만 열심히 하면 된다.
여하튼 설무구칭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도
제시된다.
일반적인 부처님제자들 입장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이다.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
『설무구칭경』 제2권 3. 성문품(聲聞品) ♣0121-002♧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알려져 있는 부처님 제자인
수보리 존자 즉 선현 존자에게 유마힐 거사로 잘 알려진 무구칭 법사가
제시하는 내용은 부처님이 일반적으로 제자들에게 제시하는 내용과
거의 반대되는 내용을 제시한다.
잘못된 소견에 빠진다.
온갖 오염된 욕망과 어울린다.
보시한 이들이 3 악도에 떨어진다.
온갖 마군과 함께 손잡고 모든 번뇌를 반려로 삼는다.
모든 중생에 대해 원망하고 해치는 감정을 갖는다.
모든 부처님을 경멸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한다.
승가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가다연나 존자에게 제시하는 내용은 조금
더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불교신자가 아는 무상, 고, 무아, 열반적정, 공에 대한
내용과 조금 설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
모든 법은 궁극적으로는 과거에 생긴 것[已生]도 아니며,
결국 말미암아 일어나지[由起]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고의 뜻입니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현실 일체를 실답다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집착을 갖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생멸이 아님이 무상의 뜻이라고 제시한다.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을 생멸함이 있어 무상하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이는 상당히 이상한 내용이다.
일체개고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중생이 평소 집착을 갖고 대하는 좋은 것이 있다고 하자.
그런 것이 무상해서 결국 파괴되고 무너지고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일체가 공하고 말미암아 발생하는 현상이 없다.
그것이 고의 뜻이다. 이런 식으로 제시한다.
발생할 일이 없는데 무슨 고가 있겠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무아, 무소유의 가르침인데
이것을 공의 뜻이라고 제시한다.
공하다는 것과 무아 무자성은 일단 구분되는데도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기에
이것을 문제로 제시하고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 적정한 상태를
열반,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인데
무아 무자성이기에 불타지도 않고, 사정이 그렇기에 꺼질 것도 없다.
그래서 적정해질 것도 없다.
결국 열반을 얻는 것도 없다.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열반 즉 니르바라나는 표현이
본래 생사고통과 그 원인이 되는 번뇌를
상징적으로 불어서 끈다는 의미를 갖기에
이런 상징적인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불어서 끌 번뇌나 생사고통 문제가 자체가 없는 것이므로
열반도 따라서 얻는 것이 없다. 이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 또 이상한 것이다.
현실을 보면 여기저기서 각종 번뇌를 일으켜
생사고통을 겪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보고를 받다보니 어떤 높은 건물이 소유주가 100 명이 넘고
입주자도 대단히 많은데 붕괴위험이 있어서 퇴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현실에 사건이 이 사건만 있겠는가.
그런데 여하튼 이런 하나의 사건만 보고
자신이 그 사건의 당사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골치가 아프고 번뇌가 극심하겠는가.
물론 지금 자신은 그런 당사자는 아닐 수 있지만,
그것 아니더라도 쉼없이 문제가 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고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번뇌와 생사고통을 벗어난
니르바나 열반의 상태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러니 그런 니르바나를 얻는 수행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적어도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평소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에 임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이는 대단히 이상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설하는 무구칭거사님은
병이 나서 병문안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성문제자분들과 보살님들을 상대로
이와 같이 설해서
제자분들과 보살님들이 하나같이 병문안을 가기 힘들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마힐거사님도
사정이 그렇기에
그냥 현실에 아무 문제가 없고
일체가 무아 무자성 공한 상태인 것이니
그런 줄 알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또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또는 앞에 선현 존자에게 제시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수행자가 행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내용을 포함해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보는 일체의 내용을
극심하게 함부로 행해도 관계없다.
또는 수행을 하더라도
일반 수행자들처럼 수행을 통해 무언가 얻을 것[유소득]이 있다고 여기면서
수행을 하라고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제시하는 것인가.
처음 일반인들이 성문수행자들처럼
세속에서 집착을 갖던 내용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정으로 한 개인이 갖는 가치는 우주보다 더 크고
그것이 결국 죽음으로 언젠가 0 의 상태가 되므로
하루에 없어지는 가치 그래서 감가상각비용으로 잡아야 할 비용액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 억원 이상이 된다.
또 반대로 그런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그 이상의 높은 가치를 얻어내지 못하면
현실에서 아무리 많은 현금 소득을 얻어도
이 비용을 충당할 도리가 없고 결국 현실에도 망하는 길이 된다.
그것이 대부분 이해하는 한 개인의 죽음이 그 주체에게 의미하는 바다.
그런데 생사윤회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을 의미한다.
이번 생은 인간으로 그나마 살았는데
다음 생은 더 상태가 안 좋은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 들어가
장구하게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사현실에서가 문제가 되기에
처음 세속에서 집착하던 것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들어가서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 니르바나에 이르는 수행을 행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수행을 하는 것 자체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만큼 현실에서 당장 자신이 초점을 맞추고
집착해서 도저히 행할 도리 밖에 없다고 해서
업을 행하게 하는 내용이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 주변을 보면 거의 예외가 없이
이런 상태에 붙잡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성문 제자들은 그런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정진했고 특히 이 경전에 나오는 대부분은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한 최고의 성문제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유마힐 거사님이 무엇이라고 이에 대해서
제시한 것인가하면
현실이 공하여 실답지 않고
본래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기에
생사현실 안에서 그런 수행을 일체 할 필요가 없고,
하지 말라고 제시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또 보살 수행자에 대해 설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보살수행자는 위와 같은 바탕에서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을 행하는 한편
생사에 묶인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자
생사현실에 들어가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고자 하는 서원을 갖고
수행에 임하는 것인데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바가 없고
일체가 공하고 차별이 없기에
그런 수행을 앞으로 하지 말라고 제시한 것인가.
역시 그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한 것인가
경전을 보면 자세히 나오는데
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잘 관해서
수행을 하기는 하는데
더 열심히 잘 하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열심히 잘 하는 것인가.
유마힐 거사 당신처럼 잘 해서
다른 불국토에 화신을 보내서 다른 불국토의 부처님에게
음식을 받아온다거나,
기타 다른 불국토에서 32 억개에 달하는 사자좌를 가지고 와
자신이 방에 놓을 정도로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신통력도 구족하고
다양한 형태로 잘 하라고 한 것일 수도 있는데
물론 그런 의미가 있기에 그런 내용이 소개된다고 보지만,
그보다 핵심은
그런 수행을 함에 있어서
적어도 수행자 자신만은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잘 파악하고
수행 자체 내용이나 수행목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이 있다 없다라는 등의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수행에 잘 임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비록 그 취지는 그렇다 해도
도대체 앞과 같은 내용을
어떤 바탕에서 그렇게 제시하게 된 것인가.
이 사정부터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단 표현만 놓고 본다면
앞과 같이 반대로 질문을 제시하면
우선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궁색할 것 같은데
그러나 무구칭 거사님 입장에서는 그런 것 같지 않다.
이런 것을 놓고 연구를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여러 내용이
모두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놓고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려고
제시한 시설 방편임을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뗏목인 것이다.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제시한 적이 없다.
부처님이 설한 내용 일체가 희론이다.
단지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부처님께서 망집을 일으킨 중생들에 대해 자비심을 바탕으로
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도록
제시한 방편 시설의 내용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일단 위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는 이미 과거에 『대반야바라밀다경』이나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등을 살필 때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내용을 살폈는데
지금 살피는 『설무구칭경』도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어떻게 보면
생사 현실 안에서 돼지와 부처님의 상태처럼
극심하게 차별이 된다는 상태
또는 생사현실에서
선악의 구분을 행하는 가운데 가장 극심하다고 보는 수많은 악행들과
이와 반대로 세속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지극히 선하다고 보는 수행방안과
이를 통해서 성취한다고 보는 아라한이나 독각 성불과 같은 수행목표의 성취 상태
이런 것 일체를 놓고
그 모든 것이 본래 차별없이 공하다.
이런 바탕에서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그러나 차별이 극심한 생사현실에서
이런 내용이 최종적으로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대단히 많다.
현실에서 수많은 차별상.
그 가운데에서도 각 주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본 바탕에서는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고
본래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본 바탕에서
이런 차별상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내용은
망집에 바탕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 안에서
각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임하라는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기본적으로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앞에 무구칭 거사님이 제시한 내용들은
현실에서 극심한 차별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보는 내용이거나
그와 반대로 가장 수승한 상태로서 성불한 상태를 놓고
이들이 현실에서 차별되는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본 바탕은 이들이 모두 차별없이 공하고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마치 허깨비가 활동하면서
실답지 않은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정이 그러니까 생사현실 안에서
아무렇게 해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또는 극심한 악을 행해도 무방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이를 통해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수행을 해도
사정이 그렇기에 아무 문제가 없고 무방하다고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가.
어떻게 보면
앞과 같은 전제에서는
앞의 결론도 당연히 도출되고
그런 경우도 무방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일체가 차별이 없고 공하다는 것은
위 어느 경우나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무구칭경에서 유마힐거사가 제시하는 내용은
알고보면 그것이 아닌 것이다.
다만 본 바탕의 측면에서 보게 되는 그런 내용을
수행자들에게 제시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그런 수행을 하더라도
어떤 바탕에서 수행을 잘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는 입장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차별없이 공한 그 바탕에서는
이런 수행 저런 수행을 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고
이런 문제가 있으니 빨리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문제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을 놓고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 때문에
처음에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방안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 내용들은 그런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인가.
이 부분이다.
그래서 유마힐 거사가 제시하는 내용들이
왜 그렇게 제시되게 되는가 그 사정도 한편으로 잘 이해해야 하지만,
이제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바탕에서 앞으로 수행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인가.
이 부분에서 다시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잘 이해해서
수행에 잘 임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해야 잘 수행에 임할 수 있는가?
답을 이미 적었다. '잘'
...
천녀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무엇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고 합니까?’
mus0fl--Marie Laforet - Qu'y A-T-Il De Change.lrc
설무구칭경에 나오는 유마힐 거사님은
병이 들어서 부처님 제자들의 병문안을 받는 상태로 설정이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병이 이렇게 몇천년씩 오래 지속되는가에 대해서
설무구칭경에 그 사정이 나와 있다.
...
무구칭이 말했다.
“모든 중생의 무명(無明)과 삶에 대한 갈애[유애有愛]가 생긴 지 오래됐듯이
나의 이 병도 생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득히 먼 과거부터 생사를 거치면서 중생이 병들었기에
나도 따라서 병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치유된다면
나도 따라서 치유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은
중생들의 오랜 생사유전(生死流轉)에 의지하는데,
그 생사유전에 의지하는 데서부터 병이 있게 됩니다.
만약 중생이 병과 고통을 벗어난다면
모든 보살들도 다시는 병이 없게 됩니다.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들고,
유정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또 병이 무슨 원인으로 생겼냐고 물으셨는데,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설무구칭경』 제2권 ♣0121-002♧
대강 무구칭 거사님의 병의 원인과 증세가 이와 같으니
아마도 무구칭 거사님의 완쾌는 상당히 힘드리라 본다.
문수보살님의 증세와도 알고보면 비슷하다.
이분들이 우주가 성주괴공을 몇번 되풀이 하는 기간에 걸쳐서
이 병을 치유시켜보려고 노력중이라는 소식을 듣는데
퇴원 소식을 듣기에는 아직도 수많은 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끔 우주의 성주괴공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무슨 소리인가.
우주는 대략 몇 십억년전에 빅뱅을 통해서
생성이 되었다.
그 이전은 없다고 단순하게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적어도 불교 경전에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한다.
가끔 퇴적층을 놓고
아무리 살펴도 과거에 그런 활동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제시하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간다면
지금 앞에서 사라지는 계단이
지금 막 나오는 계단과 시간의 선후관계가 어떻게 된다고 볼 것인지를
놓고 먼저 잘 생각해야 한다.
땅의 퇴적층을 살피고 연대를 추정할 때는
지금 막 화산에서 분출되는 화산재가 지금 쌓인 것과
몇 백만년전의 퇴적층으로 보이는 흙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시간이 오래된 흙인가를 잘 구분해야 한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지금 막 출고되어 나온 자동차를 만드는데 사용한 철판
또는 어떤 제철소에서 막 나온 강판과
지금 한 5, 6 년 타고 다니다가 폐차시킨 자동차에 붙어 있는 철판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오래된 철판인가를 놓고 잘 생각해야 한다.
이전에도 시작 0 ------> 00 끝 0 이렇게 단순하게 파악하는 입장을 놓고
위 내용을 앞 뒤로 한 세번만 이어 놓으면
그것이 처음 제시한 내용과 어떤 모순이 있는가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위 내용이 사실은 무시 무종의 시간대를 설명하는 내용도 같이 되는 것이다.
시작 0 ------> 00 끝 0 시작 0 ------> 00 끝 0 시작 0 ------> 00 끝 0
처음 제시한 내용이 사실은 위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 0 은 의미가 없으니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는데
여하튼 경전에서 우주의 성주괴공을 무수하게 되풀이 하는 가운데에서도
중생의 병이 완치가 안 되기에
같이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무수하게 생사현실을 받으면서
여전히 수행 중이라는 분들을 많이 대할 수 있다.
그나마 그런 분이 있기에
유마힐 거사님이 병이 났을 때
다른 제자들도 함께 엉겹결에 그런 유마힐 거사님의
병문안을 같이 갈 수 있었다는 사정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곤란하다.
그런 분들이 주변에 있어야 하는데
대림역 근처 모병원이라고만 듣고 있을 뿐
병문안을 가기 힘든 상태는
경전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향적여래님 불국토에서 가져온 음식만 잘 먹으면
그것만으로 여하튼 수행단계를 한 단계 씩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애꿎은 담배향으로 소신공양을 올리면서
때를 잘못 만난 것은 안타까워해야만 하는가.
방안을 찾을 일이다.
◈Lab value 불기2562/12/12 |
♥ 잡담 ♥가끔결석
설무구칭경을 살피는데 날씨가 추워지니 더 걱정이다.
불어 노래에서 니르바나란 단어가 나올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열반과 관련된 내용을 적고 쉬다보니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284#1851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2016_1015_174718_canon_ct1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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