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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3-05-08_대반야바라밀다경_514 본문
『대반야바라밀다경』
K0001
T0220
대반야바라밀다경 제514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 핵심요약
♣0001-514♧
『대반야바라밀다경』
● 19. 진여품 ②
● 무상정등정각의 신속한 증득방안
● 무소득 방편으로 한 머묾과 방편선교
● 수행에 장애가 없음
● 장애가 없는 사유- 섭수[攝受]하지 않음
● 섭수할 수 없는 사유
● 무생법인의 증득
● 20. 불퇴상품(不退相品) ①
● 불퇴전보살의 행(行)과 형상[狀] 과 모습[相]
● 무소득방편으로 차별상과 진여에 대해 분별하지 않음
● 불퇴전보살의 설법
● 불퇴전 보살의 평등한 자비심
● 불퇴전보살의 신중한 설법
● 불퇴전 보살의 평등한 자비심
● 모든 법과 행과 형상과 모습이 없음을 관찰함
● 불퇴전 보살이 구르는 바
● 퇴전을 불퇴전이라 하는 사유-무자성 부주[머물지 않음]
● 불퇴전보살의 계율
● 불퇴전보살의 수생
● 불퇴전보살의 10 선업
● 불퇴전보살의 요익중생 무소득 바라밀수행
● 불퇴전보살의 법보시 회향
● ○불퇴전보살의 무의혹과 그 사유
● ○불퇴전보살의 성품 특성-자비희사와 번뇌제거
● 불퇴전보살의 선근 공덕 [주거와 심신]
● 불퇴전보살의 청정한 신구의업
● 불퇴전보살의 12두타와 수행정진
● 악마의 권유와 불퇴전보살
● 악마-수행자의 고통을 듦
● 동요없는 불퇴전 보살
● ○불퇴전보살의 무의혹과 그 사유
● ○불퇴전보살의 성품 특성-자비희사와 번뇌제거
● 불퇴전보살의 선근 공덕 [주거와 심신]
● 불퇴전보살의 청정한 신구의업
● 불퇴전보살의 12두타와 수행정진
● 악마-바라밀다 수행을 불설이 아니라 비방함
● 동요없는 불퇴전보살
● 악마를 믿지 않는 사유 - 믿고 행할바를 얻지 못함
● 악마- 생사해탈을 권함
● 불퇴전보살 - 도를 장애하는 법을 배움
● 악마- 장구한 수행으로 이익없음을 듦
● 악마- 많은 퇴전한 수행자를 듦
● 불퇴전보살- 바라밀다 수행으로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할 수 있음
● 악마와 나쁨과 경계를 깨달아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음
● 붙퇴전보살의 퇴전과 불퇴전
● 보살의 퇴전을 불퇴전이라하는 사유
>>>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Raphaël - Ne Partons Pas Fachés.lrc
내용을 압축해 키워드를 뽑아 태그로 활용하는데
내용을 줄이는 요령이 없어서인지 너무 내용이 많다.
그런데 하나하나 살피면 또 중요해 생략하기 어렵다.
그리고 알고보면 수행자가 불퇴전위에 오르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생사를 피하지 않고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한 수행을 닦아 나간다.
이런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일단 각 부분을 요약하면서 키워드를 뽑아 놓게 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514권에는
불퇴전 보살의 행상에 대해 자세히 제시되는데
이는 결국 수행자가 초점을 맞추어 수행해나가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수행자의 퇴전을 권유하는 욕계 마왕도 나오는데
왜 욕계 마왕은 수행자가 불퇴전위에 올라 수행해나가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무생법인과 불퇴전위의 관계도 제시되고
또 한편 물러남이 있는 까닭에 '물러나지 않는다'고 한다는 표현도 나온다.
이는 표현상 서로 상반되는데
왜 이렇게 제시되가를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 수행자의 불퇴전과 욕계 마왕의 이해관계
『대반야바라밀다경』 제514권 불퇴전품을 보면
악마가 수행자에게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생사를 받아가며 고통을 겪지 말고
그냥 아라한에 머물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라고
권유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런데 욕계 최고 상태에 있는 마왕 파순이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들거나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를 받아가며 수행을 해나가는 것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런 권유를 하며
수행을 방해하고자 하는 사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욕계의 사정부터 이해해야 한다.
수행자의 불퇴전과 마왕의 이해 관계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많이 살폈다.
그런데 수행자가 불퇴전의 지위에 올라 물러남이 없이 수행해가는 것에 대해
욕계에서 최상의 위치에 있는 마왕이 신경을 쓰게 되는 사정은
바로 욕계내 생명들이 처한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욕계의 상황이란 어떤 희망을 성취했다고 일반적으로 여기는 그 상황의 단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와 밀접하다.
일단 이는 전도된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즉, 그 현실 단면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욕계 내 중생은 망집을 일으켜서
어떤 상태는 자신의 뜻이 성취된 상태라고 여기고 좋아하고
어떤 상태는 그렇지 않고 반대로 고통스런 상태라고 여기고 대단히 고통스러워한다.
문제는 이것이 엉터리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그런 상태에 놓인다는 점이다.
또 하나 문제는 그런 욕계 안에서
한 주체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어 좋다고 여기고 대하는 그 상태는
다른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고통스럽고 혐오스런 상황이라는 점이 또 문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서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으면서
업의 장애를 쌓아가며 무량겁을 나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한 시점에서 욕계에서 최상의 상태에 있는 입장에서는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가운데
어떤 중생이 이 욕안에서 벗어나면
그 만큼 자신에게 이익은 줄어들고 손해가 늘어난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가 단순히 그 자신만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반에 들지 않고
만일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고 서원을 갖고 수행해가게 되면
두려워하게 되는 관계가 된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회집에서 물고기를 가두어 팔거나 식사를 하는 상황이나
아니면 축사에서 소를 기르는 목동의 상황을 놓고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물고기를 잡아 회를 먹는다거나,
축사에서 소나 돼지 닭 등을 길러 우유나 달걀을 얻고
나중에는 도살을 해서 고기를 팔아 수익을 얻는다고 해보자.
이런 입장에서는 자신이 적은 비용으로 많은 수익이나 즐거운 맛을 얻는다고 보지만,
그 생명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보면 이는 지극히 고통을 주는 상황이다.
그리고 욕계에서 가해와 피해를 중첩해 주고 받아가며 업의 장애를 쌓고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 나가는 관계가 바로 이런 상황이다.
그래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지옥 아귀 축생계라는 3 악도는
이런 망집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욕계에만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욕계내 3 악도만 제거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것이 무색계 색계 욕계 생명이 제각각 존재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서로 상대적이고 순환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3 악도의 고통은 그런 고통을 우선 당장은 받지 않고
희희낙락하면서 즐거움과 이익을 찾아
무언가 업을 열심히 정신없이 행한 그런 업으로 인해
그런 생사고통에 묶이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고진감래 감진고래의 순환관계라기 보다는
업을 통해 가해와 피해를 중첩시켜 받아나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기본적으로 그런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자신의 좋음을 집착하며 정신없이 업을 행하게 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로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이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앞의 사례에서 누군가가
축생을 축사에서 풀어주어 고통을 면하게 하는 한편
목장주인의 업의 장애도 해소시켜주려고 하면
우선 그 축생부터
그 상황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대하게 된다.
즉, 축생은 축생대로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목장 주인이 음식이나 거처를 마련해주어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면서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가 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구해주려는 이에게 반감을 품고
들이 받으려 하기 쉽다.
이는 축생이 어리석기에
그 상황을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하면서
자신이 장차 받게될 고통을 미리 헤아리지 못하고
거꾸로 자신을 그런 상태로 묶어 놓은 목장 주인을
우호적으로 여기고 대하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상황에서 목장의 주인도
축생을 구해주려는 이를 마땅치 않게 대하게 된다.
수행자는 그렇게 축생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그 목장 주인의 업의 장애도 해소되고
그로 인해 그 목장 주인도 더 좋고 좋은 상태가 된다고 보고
이 양 당사자를 모두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목장 주인은 그렇게 하면
우선 당장 자신이 축생을 통해 얻는 수익이 줄어든다고 여기면서
엉뚱하게 수행자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바로 욕계에서 최상의 위치에 있는
마왕이 수행자를 경계하게 되는 기본 배경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욕계내 생명이 기본적으로
일으킨 전도된 망상분별이 그 근본바탕이 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Pierre Perret - Pepe La Jactance.lrc
● 수행 과정에서 퇴전하게 되는 사유들
불퇴전 보살을 살폈는데
현실적으로 한 수행자는
일반적인 현실 생활을 하다가 처음 수행에 진입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수행 중에 어떤 어려움을 만나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원래의 망집 상태로 되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사정들이 무엇들인가를 먼저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수행과정에서 극복하고 성취해나가야 할 부분이 된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도 생활하는 가운데
어떤 어려움을 만나면 뜻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되기 쉽다.
수행의 경우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 사정은 다음 경우들을 들 수 있다.
>>>
○ 진리와 가치 그리고 실현방안에 대한 올바른 판단의 어려움
우선 현실적으로 누구나 좋음을 많이 얻기를 바라고
또 반대로 고통이나 나쁨을 싫어하고 이것을 피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현실적으로 다양한 삶의 문제가 나타난다.
단순하게 보면
좋고 즐거운 일을 많이 성취하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처음
자신이 대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진리 판단 자체가 어렵다.
즉, 눈 앞에 대하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 성품은 어떻고 그 구성성분은 또 무엇이고
또 그것은 무엇을 원인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또 어떻게 없어지고 하는가. [인과관계]
이런 등등에 대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런 결과 자신이 대하는 세상이나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일단 어렵다. [진리판단]
또 좋고 나쁨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알기 어렵고
또 좋음의 경우도 그것이 누구에게 얼마만한 기간에 걸쳐 어떤 측면에서 좋음을 주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올바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무엇이
자신에게 좋고 남에게 좋고 온 생명에게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량하게 좋고
이 측면에서도 좋고 저 측면에서도 좋고 모든 측면에서 두루두루 좋음을 주는 것인가.
또 반대로 어떤 것이 그 반대인가를 알기가 어렵다. [가치판단]
다시 그 좋고 좋은 내용을 성취하고자 할 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그것을
빨리 일찍 쉽게 그리고 즐겁게 잘 성취할 수 있는가.
이런 방안에 대해서도 알기가 쉽지 않다. [목적과 실현방안]
그래서 이런 문제 전반에 걸쳐서
본 바탕이 되는 실상을 꿰뚫어
관련된 내용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쉽게 말해 앞에 어떤 광석이 있는데
그것이 금광석인지 구리광석인지 잘 알지 못하고
그런 광석에서 어떻게 금을 구하고
또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이런 것을 알기가 마냥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현실 생활이 이뤄지기에
그에 따라 삶이 영향받고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론상은 이들 내용을 모두 잘 파악하여
가장 좋고 좋은 상태를 가장 잘 즐겁게 지혜롭게 성취하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일반인이나 수행자나 마찬가지로 그렇지 못한 부분들로 인해
삶에서 고통으로 대하는 상황에 처하고
또 그런 사정으로 인해 물러나게 되기 쉽다.
그리고
좋고 좋은 상태를 얻는 수행을 해나갈 경우에도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를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할 때
수행이란 자신이 당장 집착하는 즐거움과 좋음을 희생시켜야 하고
고통을 받게 된다고 보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물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경우들로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 당장의 즐거움의 희생
일반적으로 우선 어떤 일로 인해
당장 얻을 수 있다고 보는 즐겁고 좋은 것을 얻지 못하게 되고
포기해야 하게 되면 어려움을 느끼고
그 일에서 물러나려고 하게 되기 쉽다.
이것은 어떤 일을 포기하게 되는 비교적 단순한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마음대로 드러누어 쉬려면 쉴 수 있고
또는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는데
이제 어떤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그것을 참아야 한다고 하면
당장 얻을 수 있는 그런 좋음을 참아야 하기에
그런 일을 어렵게 느끼고 물러나게 되기 쉽다.
○ 희생을 통한 욕구의 실현
현실에서는 무언가 좋음을 얻으려면
반대로 일정한 희생이나 수고 그리고 비용을 대가로 치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돈을 상대에게서 받으려면 자신이 상품을 만들거나 구해 상대에게 대신 제공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버는 측면은 좋은데 상품을 제공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고 일반적으로 여기게 된다.
이와 같이 어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비용이나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
자신이 놓인 상황이나 능력이나 기타 여러 사정 때문에 이것이 어렵다고 보고 물러나게 된다.
○ 생리적 욕구
또 다른 어려움도 일반현실에 많다.
한 개인이 생존하고 활동하기 위해서
생리적으로 요구되는 활동이 많다.
일단 식사를 해야 하고
또 배설도 해야 하고
또 일정 시간 쉬고 잠을 자야 하는 것 등이 그런 예다.
그래서 이런 생리적 욕구가 발생할 때 이를 충족시키기 못하면
극심한 고통을 받고 반대로 충족시키면 또 즐거움을 얻게도 된다.
그런데 구체적인 경우에 어떤 상태를 성취하려면
이런 욕구를 어느 정도 자제하고 참아야 한다면
이런 사정으로 그 일을 어렵게 느끼고 물러나게 되기 쉽다.
○ 의무이행
한편 현실에는 일정하게 요구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일정한 고통이나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정한 행위를 하면 그런 고통 등을 받지 않게 되고
그런 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런 고통 등을 받는 상황에 처하면
고통을 참고 의무적으로 일정한 행위를 하는 것을
어려움으로 여기면서
그런 일에서 물러나게 되기 쉽다.
○ 육체적 고통
한편 직접적으로 육체적으로 당장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도 있다.
사고로 손발이 부러진다거나, 질병이 생기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 그런 경우다.
그리고 직접 모욕을 받거나 누명을 쓰고 비난을 받는 경우처럼
직접 정신적으로 억울함이나 분노나 불쾌를 받으며
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은 결국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생노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의 형태로
나열할 수 있다.
결국 이처럼 어떤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위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고통을 받게 되면
그것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곧바로 하게끔 되는
반응을 행해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당장 좋다고 보이면 참지 않고 바로 취해 행하려하거나,
필요한 수고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좋음만 얻어내려고 꾀하거나,
생리적으로 어떤 욕구가 밀려 오면 곧바로 실현시키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 평안히 참지 않고
곧바로 물러나 분노를 일으키거나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갖고 해치려 하는 경우가 모두 이런 경우다.
결국 수행자가 결국 이런 상황들에서
수행을 단념하고
원래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상태로 물러나
생사고통에 장구하게 묶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Delpech - Les Divorcés.lrc
● 보살의 퇴전과 무생법인
『대반야바라밀다경』 514권 불퇴상품에서는
불퇴전위에 이른 수행자의 특성을 나열하고
무생법인과 불퇴전위의 관계에 대해서 제시하고
또 한편 물러남이 있는 까닭에 물러나지 않는다라고 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수행자가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 물러나지 않는다는 불퇴전과
물러나 구른다는 퇴전은 서로 반대되는 표현이다.
그런데 어떤 사정으로 이렇게 제시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사정을 제시한다.
...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이러한 물러나지 않는 보살은
제 모양의 공으로써 온갖 법을 관찰하여
이미 보살의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었으며,
내지 조그마한 법도 얻을 수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니,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조작하는 바가 없고
조작한 바가 없기 때문에 마침내 나지 않는다 하며,
마침내 나지 않기 때문에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무생법인을 얻었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이라 하나니,
만일 보살마하살로서 이와 같은 모든 행과 형상과 모습을 성취한 이면
그가 바로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인 줄 알지니라.”
그런데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 배경과 사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수행이 갖는 일반적인 어려움을 또 살펴야 한다.
● 수행의 일반적 어려움
이미 앞에서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려운 부분을 살폈다.
그런데 수행자도 일반적으로 그런 사정들로 수행에서 물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즐겁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유혹에 이끌려 수행에서 물러나거나
어떤 좋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희생과 수고를 행하기 힘들어 물러난다거나,
생리적인 욕구로서 식욕이나 수면욕 등을 자제하지 못해 수행에서 물러난다거나,
기타 생노병사 과정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물러난다는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망집상태에서 행하게 되는 반응과
수행은 이런 좋고 나쁨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그래서 수행과정은 일반적인 입장을 기준으로 하면
대부분 취하게 되는 반응과 매 경우 정반대 방향을 취해 행하는 것이 되어
일반적으로 이를 대단히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욕계내 각 주체는 망집에 바탕해서
세상과 자신의 정체를 잘못 파악하는 가운데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관찰에 바탕해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추구하고 나쁨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당장 집착하는 내용을 놓고
매 경우 다음처럼 반응하게 된다.
즉, 우선 어떤 좋음을 갈구하는 가운데
그런 좋음[+]을 얻게 되면 대단히 아끼며
그 좋음을 다른 이에게 결코 베풀지 않으려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집착하는 좋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등]을 해쳐도 무방하다고 여기면서
함부로 침해하며, 나쁨[-]을 가하게 된다.
그러다가 반대로 다른 상대가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면
이를 평안히 참지 못하고 불같이 분노를 일으키고
상대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갖고
상대를 보복해 해치려 하게 된다.
이런 행위 반응 방식은
물론 그가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각 내용의 관계를 살피면서
좋음을 추구하기에 그런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자신이 어떤 좋음을 얻으려면
그렇게 얻는 좋음을 취한후
그것을 아끼고 지니면서
결코 다른 이에게 주거나 뺏기지 않아야
자신이 원하는 좋음을 많이 얻고 오래 지닐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다.
나머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어떤 이가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면
자신이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한편
그런 상대를 해쳐야 자신이 받은 불쾌에 대해 보상과 위안도 얻게 되고
나아가 통쾌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렇게 해야 앞으로도 그 상대가 자신을 함부로 괴롭히지 않게 된다고
이렇게 판단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면
이렇게 매 경우 반응하며 업을 행하면
우선 어느 정도는 그가 의도한 효과를 얻게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예를 들어 만 키로가 떨어진 곳을 향해 갈 때
어떤 이가 그 방향을 향해 직선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면
가만히 있는 이보다 그 만큼 상당히 가깝게 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각 경우를 넓고 길고 깉게 관찰하면
이와 같이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는 경우
그가 집착한 작은 좋음을 얻고 그 좋음을 징검다리 삼아서
생사현실 안에서 업의 장애를 쌓고
그로 인해 이후 생사고통에 장구하게 묶이게 된다는 사정을 볼 수 있다.
앞에서 전속력을 그 방향으로 달려나가고 멈추지 않는 경우
그 대부분 며칠 지나지 않아 몸에 탈이나거나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자신이 좋음을 집착하여
매 경우 그렇게 반응해갈 때
왜 그 뜻과 달리 3 악도에 묶여 들어가게 되는가하는 사정은
욕계에서 그런 반응방식을 취하는 주체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좋음을 추구한다는 점과 함께
그런 상태에서 하나의 현실 상황을 놓고
각 주체마다 좋고 나쁨을 서로 달리 판단하면서
집착해 임한다는 것을 그 배경사정으로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간단히 이 사정을 살피면
어떤 이가 배가 고파 닭이나 돼지를 살해해 식사하는 경우,
그 주체는 그 상황이 대단히 즐겁고 좋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죽음을 당하는 닭이나 돼지를 비롯해 다른 입장에서는
그 하나의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집착하는 생명과 신체를 침해당하며 극심한 고통을 받거나
그런 일에 두려움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황은 하나인데
각 주체마다 좋고 나쁨의 평가가 엇갈린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 7인의 무법자가 같이 걸어가는데
황금이 있어서 한 사람이 주으면 그는 좋다고 여기지만,
나머지는 모두 불만을 느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각 주체마다
각 시기 상황과 각 측면에서 좋고 나쁨을 엇갈려 주고 받는 관계에 놓이고
그래서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중첩되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 주체가 행한 업의 장애현상으로 쌓이게 된다.
이른바 업장이 두터워 지는 현상이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이는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얻기 위해
매 상황마다 자신이 취하게 되는 반응방식을 일단 놓고
이 내용을 거울면에 비추어 보면서
그 상황을 대하는 자신의 상대방 입장에 서서
그 각 내용을 반대로 대해보면 그 사정을 이해하기 쉽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상대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응 자세를 매번 취한다고 가정해보자.
즉, 그 상대는 무언가 좋음이 생기면 그것을 대단히 아끼면서 자신에게 결코 조금도 베풀지 않으려 한다.
또 상대는 상대 자신에게 이익되는 경우에는 함부로 남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을 침해하고
그래서 자신의 생명과 가족을 지금 위협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에 대해 상대에게 어떤 보복을 하거나 나쁨을 가하면
상대는 분노를 일으키며 또 그에 상응한 보복을 가한다.
이런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에
자신이 그런 상대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전혀 일으키지 않고
또 상대에게 고통을 되돌려 주지 않으려 한다면,
처음 어떤 주체가 자신의 좋음을 위해 행하는 반응자세는
적어도 그와 관련해서는 별 문제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부터 그렇지 않은 것이 욕계 현실이다.
그런데 앞과 같이 거울을 사용해 다른 입장을 역지사지해보기 전에는
거의 대부분 자신이 집착하는 내용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런 사정 자체를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거나 고려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생선이나 고기를 먹으면서
그 생선과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겪은 고통을 거꾸로 헤아리;면서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장례식에서 느끼는 느낌을 갖는 경우란
현실에서 극히 드물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입장에 놓이면
이와는 또 정반대로 그런 고통을 가져다 준 상대에 대해서는
자신도 역시 그에 상응한 나쁨을 되돌려 주고
좋음을 얻는 것을 방해하려고 노력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노력과 힘이
바로 처음 그렇게 자신에게 일정한 나쁨을 가한 주체가
그 업으로 만들어 낸 업의 장애를 이루는 부분이 된다.
그리고 그가 매 경우 이렇게 업을 행하면
이런 업의 장애가 쌓여서
그가 갖는 뜻의 성취는 장애가 발생하여 성취가 되지 않고
반대로 그가 원하지 않는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어떤 이가 상대를 해쳐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것으로 그 관계가 모두 끝이 된다고 잘못 여긴다.
이 경우도 거꾸로 놓고 생각해보면 쉽다.
즉 자신이 어떤 억울한 고통을 당하여 죽음을 당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자신이 죽어 신체가 허물어지면
그것으로 자신과 관련된 것이 모두 없어지고 끝이 된다면
앞에서 제시한 업의 장애도 그렇게 끝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죽음으로 인해 한 주체가 모두 끝이 된다는 것은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자신의 정체를 잘못 파악하기에 갖게되는 단멸관이다.
그런데 죽음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억울한 고통을 당해 죽음을 당한 자신은
자신대로 그런 억울함을 지닌 상태로 이후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쉽게 말해 어리석음을 지녀 망집을 일으키고
또 그런 상태에서 억울함을 느끼고 죽었다면
죽는다고 그 사정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죽은 귀신은 여전히 그런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망집을 갖고 억울함을 느끼는 상태로 이후 임하고 업을 행해 나가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앞에 처음 제시한 업의 장애 현상은
어떤 고통을 당한 주체가 죽는다고 그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전에서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소멸되지 않고
그 과보를 돌려 받게 된다.
이렇게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이런 인과 업보에 관련된 내용은 경전에서 많이 대할 수 있다.
심지어 부처님마저도 그런 사정에 놓인다는 내용도 제시된다.
그리고 불교 겅전이 아니더라도
그런 내용을 많이 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에에 케이씨라는 어떤 이가 자기 최면에 들어가면
다른 이가 어떤 고통을 겪는 사정을 파악하고 처방을 제시하게 되어서
그가 최면에 들어 말한 내용을 기록으로 보관해 두고 있다고 하는 보고가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이 안 좋은 것은
로마시대때 포로의 눈을 그가 불로 지져서 그 이후 그렇게 되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과거에 노예 였는데
지금 그가 공원에서 매일 채찍을 때려가며 몰고다니는 백마가
과거의 자신을 괴롭힌 농장주라고 한다거나,
또는 어떤 이가 손만 아름다워서 그 손만 광고해서
많은 수익을 얻는데 알보보면 과거에 수녀로 지내면서
손으로 신부들의 빨래를 매번 잘 해주어서
그런 결과가 되었다는 등의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것도 그런 인과응보의 관계를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말 그런가 아닌가를 확인해보자고 나서면
하나하나 입증하기는 곤란하다고 보지만,
세상에서 밭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맺는 현상처럼
세상의 일이 인과에 지배를 받는데
자신의 생사만은 그렇지 않다고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 사정을 반대로 밝혀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한 주체가 업을 행해 업의 장애가 쌓이면
비록 그 주체는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바탕해서
자신이 소원한 좋음을 얻기 위해 그렇게 행한 것이지만,
그 뜻과 달리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상태로 묶이게 된다.
그런데 서로 나쁨을 주고 받는 관계에서
자신의 뜻을 어느 정도 성취하게 되면
더 이상 그처럼 나쁨을 주고 받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고
생사의 묶임에서 그냥 벗어나고자 원할 수 있다.
그런데 업의 장애가 쌓여진 상태에서는
그 주체가 홀로 그렇게 원한다고 해서
그 뜻대로 바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문제점이다.
이는 비유하면 도박을 하는 가운데
돈을 어느 정도 딴 이는 이제 충분하니 그만 도박을 멈추고
도박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상황에 비교할 수 있다.
그래서 도박이란 아무리 반복해보아도
결국 허무하고 공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제 도박을 그만 두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돈을 잃고 파산한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그렇게 만든 상대를 붙잡고
잘 보내 주지 않으려 하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상대도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렇게 업의 장애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는
거꾸로 자신이 피해를 받고 억울함을 느끼는 상황에서
그것을 참고 되돌려 갚지 않는 가운데
그냥 그 상태를 벗어나려 하면 오히려 쉽게 벗어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억울함을 한 번 통쾌하게 되갚아주고
그리고 나서 그 상태에서 이제 후련한 마음을 갖고 벗어나려고 꾀하면
이는 뜻과 달리 잘 성취되지 않는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이 결국 업의 장애현상과 관련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는
수행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넓고 길고 깊게 이 관계를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좋음을 놓고 일반적으로 반응하는 반응자세를 모두 중지하고
매 경우 그 반대 방향으로 행해야
오히려 자신이 처음에 원한 좋음 뿐만 아니라
더 좋고 좋은 상태를 얻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기본적 수행은
결국 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취하게 되는 반응을 중지하고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 주가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런 내용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에 해당하는 수행덕목이다.
즉
우선 어떤 좋음을 갈구하는 가운데
그런 좋음[+]을 얻게 되더라도
그것을 아끼지 않고 그 좋음을 원하는 다른 이에게 아낌없이 베푼다. [보시 ]
또한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고 또 나쁨을 가하지 않는다. [ 정계- 불살생, 등 ]
그러다가 다른 상대가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게 되면
자신은 이에 대해 상을 취해 일으키지 않고 자신은 평안하게 참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갖지 않고
상대를 해치거나 보복하려 하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고 [ 안인 ]
온 생명을 모두 좋고 좋게 이끌기 위한 서원을 일으켜
꾸준히 노력하고 성취해간다. [ 정진 ]
이런 내용이 가장 기본적인 수행덕목이 된다.
그래서 원래 행하던 업을 중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수행을 행함으로써
업의 장애는 더 이상 쌓이지 않고
그 주체가 쌓아 놓은 업의 장애는 제거되면
이후 그가 원하는 대로
더 이상 생사고통에 묶이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 일체가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사정만 잘 이해하고 깨달으면
이를 통해 곧바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벗는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여기기 쉽지만,
일체가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것은
사실은 자신이 3 악도에 묶여 극심한 고통을 받는 그 상황을 포함해
그 일체가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앞과 같은 사정을 잘 이해하더라도 그에 바탕해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고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지 못하면
결국 일체가 공한 가운데 하필이면 매번
자신의 손과 발이 묶이고 톱으로 잘리우는 상태에 처하는 가운데
그런 상황이 공하고 실답지 않으니
그 내용으로 그 상황을 매번 잘 극복하고 벗어나와야 하는 것이 된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악취공견을 일으키고 수행을 잘못 행하게 되면
매번 지옥에 처한 공수행자가 되기 쉽다.
그리고 이론상
일체가 공하다는 깨달음만으로
지옥에서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낼 것처럼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지금 자신의 손톱을 하나 집게로 뽑아내면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이런 상황도 마찬가지다라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관하는 것만으로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사고통의 문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하더라도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에 적용해
수행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 가운데
그런 생사고통을 미리 예방하고
복덕을 얻는 것이 동가 홍상의 원리에 의해서 볼 때도
바람직하다.
어차피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생사현실에서
고통에 묶이지 않고 복덕을 얻고
다른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우선 가장 기본적인 계율에 해당하는 수행덕목을 잘 성취하여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다시 그 상테에서 수행에 정진해서 복덕 자량을 쌓아야
이후 그런 지혜 자량을 구족해 나갈 수 있게 된다고 제시하게 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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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와 관련된 기본 수행덕목이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내용은
그간 많이 반복했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는 것이
수행자가 수행에서 물러나는 퇴전 현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즉,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좋음을 추구하는 가운데
매 경우 취하는 반응자세는
수행방안은 극단적으로 정반대가 된다.
그리고 수행과정에서 이 부분이 매 상황마다 만나게 되는 첫 어려움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생사현실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서
어떤 사정으로 매 경우 일반적으로 취하게 마련인 반응 형태로 업을 행하게 되고
또 그렇게 업을 행하면 어떤 사정으로 업의 장애가 쌓이고 생사에 묶이게 되는가에 대해
그 사정과 관계를 잘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바탕에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수행이란 매 상황마다 자신이 당장 집착하는 좋음을 희생시키고
고통을 받게 된다고 여기는 가운데
수행에 장애를 겪게 된다.
이는 예를 들어 가을에 열매를 얻을려면
먼저 봄에 씨를 뿌려야 하는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만일 지혜가 깊지 못하는 축생과 같은 상태라면
이런 관계조차도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나무를 길러 숲을 만드는 일처럼
100 년의 기간이 걸려서 결과를 얻는 경우는 더더욱 관찰하지 못한다.
그런데 1 생 안에서도 조금만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면
수행방안으로 임하면 복락을 누리게 되고
그 반대로 임하면 1 생 안에서도 고통을 극심하게 받게 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리석음에 바탕해 엉뚱하게 관계를 파악하면 사고를 자주 당하게 되고
탐욕을 잘 제어하지 못하고 욕심을 일으키는 대로 곧바로 돌진하여 취하려 하거나
분노가 일어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욱하며 반응하는 경우
대부분 현실에서도 병원 중환자실이나 감옥에 갇히는 인과관계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좁고 짧게 살펴서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은 끝이 난다는 단멸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1 생만 놓고 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게 되므로 역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잘 해결하려면
결국 먼저 망상분별을 제거하여
자신의 올바른 정체부터 잘 판단한 가운데
자신과 관련해 고려해야 할 기간부터 먼저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를 잘못 파악하고 임하면
결국 학창시절 가운데 잠시 방학을 맞이할 때
그 방학기간에서만 좋음을 많이 얻어내려하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학생처럼 되기 쉽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잘 파악하려면
현실에서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아야 하는가하는 부분부터
잘 살펴야 한다.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면
죽음을 맞이해 그런 부분이 사라지게 되면
그로써 자신과 관련된 것은 끝이라는 단멸관을 취할 도리 밖에는 없다.
그런 경우는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갓난아이 때와는 모두 다른데
무엇때문에 갓난아이때와 지금의 자신을
모두 자신의 일로 여기게 되는가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만일 갓난아이 때 그 당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긴다면
그 갓난아이는 지금 죽어 없어진 것과 같고
또한 지금의 자신은 그와는 무관한 다른 이의 내용이라고 여겨야 한다.
반대로 지금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긴다면
또 그 갓난아이는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이의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1 생의 현실 안에서도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무엇을 가지고
현실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내용이 각기 다른 갓난아이와 지금의 자신을
모두 하나의 자신의 일로 여기게 되는가부터 먼저 잘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 둘을 한 주체의 일로 파악하게 하는 요소를 U 라고 한다면,
그런 U 는 지금 이 순간 전후를 놓고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잘 파악하고
또 그런 U 는 자신이 생을 시작한 첫단계와 그 전후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시점과 그 전후에 걸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놓고 또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 관찰을 깊게 잘 행하면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죽음을 맞이해 없어지면
자신과 관련된 일은 모두 끝이라고 잘못 여기는 단멸관을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생명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렇게 단멸관을 제거하고 그 관게를 넓고 길고 깊게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전반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부터가 우선 쉽지 않다.
그래서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무량겁에 걸친 업의 장애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를 벗어나고
복덕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하고
또 그러러면 계에 해당하는 수행덕목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정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전반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면
매 상황마다 당장 자신의 좋음에 집착하고
좁고 짧고 얕게 관계를 관찰하는 가운데
수행을 행하지 못하고 원래의 상태로 물러나게끔 된다.
그래서 이것이 수행자가 처음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수행자는 이런 상황에서 원 상태로 물러나게 된다.
그런데 매 상황에서 이처럼 반응하게 되는 사정은
세상과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잘못된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래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고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기본적으로 세상과 자신의 본 정체를
실상을 꿰뚫어 정확하게 잘 파악하는 것이 먼저 요구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단 망집을 일으킨 상황에서는
자신이 망집에 매달려 집착하며 반응하는 가운데
정작 자신이 원한 좋음은 얻지 못하고
극심한 생사고통을 정신없이 바쁘게 묶여 받는 상태에 처하여
정작 자신과 세상의 본 정체를 올바로 파악할 지혜자량을 얻어내지 못하고
그런 상태로 장구하게 묶여 지내게 되는 것이 문제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수용소에 갇혀
매일 몽둥이로 맞고 정신없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정려 수행을 한다거나,
어떤 것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여
본 정체나 인과관계에 대한 지헤를 얻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곤란해진다.
그래서 이론상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려면
먼저 그와 관련된 각 내용의 정체와 인과관계를 잘 관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먼저 요구되지만,
정작, 수행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로 인해 장구하게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고
복덕을 구족하지 못하게 되어
역시 지혜자량을 구족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각 내용의 본 정체를 잘 관하지 못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요구되는 수행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 수행은 그런 관계나 정체를 올바로 관하여 시작한다기 보다는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해 일단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그렇게 선근을 쌓아 복덕을 구족하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그 이후 원만하게 지혜자량을 구족하게끔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지혜자량을 구족하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각 내용들의 정체와 관계도 잘 관하게 되고
더 나아가 생사고통을 받는 근본원인도
자신이 망집 번뇌를 일으키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하기 때문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먼저 이런 내용을 잘 관하여야
그런 관계를 이해하여 그런 업을 중지하고
수행을 잘 행하게 된다고 보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지혜를 먼저 갖추고 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우선 믿음을 바탕으로 계를 지키고 수행을 실천하고
이를 통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일단 벗어나고
그런 상태에서 수행으로 복덕 자량을 이후 구족하게 되고
다시 그런 상태에서 지혜 자량을 얻고
그런 가운데 세상의 정체나 관계를 자세하게 관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또 그런 사정으로
수행을 계속 원만하게 잘 성취하게 되고
그로 인해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선순환의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한번 업의 장애를 쌓으면 이후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고 또 그로 인해
점점 더 고통을 증폭시켜 무량한 고통을 받아가는 뱡향으로 악순환이 시작되고
또 반대로 한번 수행을 행하여 복덕을 구족하게 되면
이후 그로 인해 다시 무량한 복덕가 지혜 자량을 얻어 나가는 방향으로
선순환을 하게 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는 어떻게 보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데도
현실상 그런 사정으로 그 차이가 점점 극심해진다.
그 결과 장구하게 무량한 복덕을 누리는 하늘과
그와 반대로 장구하게 무량한 고통을 받는 지옥이
나타나는 것도 결국 이런 업에 의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일반적으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놓고 매 경우 취하기 쉬운 반응을 중지하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수행을 행하는 것이
수행자가 수행과정에서 만나는 기본적인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수행덕목 가운데
지금 당장 좋음을 아끼지 않고 베풀면
자신의 좋음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고 잘못 이해하기에
이를 우선 어렵게 여기게 된다.
또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을 중지하면
그로 인해 자신이 얻을 좋음도 얻지 못하게 된다고 여겨
이를 어렵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당장 자신이 집착하는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에 대한
침해를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을 때
이를 평안히 참고 견디는 안인 수행은
한층 더 어렵게 여기게 된다.
이들 각 경우를 놓고 살피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억울하게 자신이나 가족의 생명과 신체가 침해받고
다양한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에서
이를 평안히 참는 수행이
현실적으로 수행자가 극복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 내용을 망집을 떠나서 올바로 관하면
그런 내용이 현실에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잘못된 망상분별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넓고 길고 깊게 관하면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취하는 반응이
오히려 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되는 원인이고
그와 반대로 보시와 자비와 인욕을 수행하는 것이
장구하게 복덕을 얻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그런 관계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앞에서 보는 사정으로 인해 쉽지 않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단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그런 상태에서 다시 수행에 정진해 복덕을 얻게 되면
그런 바탕에서 정려와 반야 수행을 성취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세상의 실상과 자신의 본 정체를
잘 관하고 이해하게끔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내용이
바로 지금 대하는 반야경전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금 살피는 반야 경전은
기본적인 수행을 잘 성취하여 생사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후 중생제도를 위해 다시 더 깊은 지혜와 수행이 필요한 제자들을 상대로
가르침이 베풀어지는 내용이다.
그리고 내용 자체가 어려운 점도 있지만,
업의 장애에 묶여 생사고통을 정신없이 바삐
받아나가는 상태를 수행을 통해 우선 벗어나지 않으면
이들 내용을 이해하고 성취하기 어렵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rie Laforet - Mon Amour, Mon Ami.lrc
● 무생법인과 생사현실안의 수행으로의 퇴전 = 보살의 불퇴전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너무 많은 분량을 적고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과거에 이들 내용을 많이 반복했는데
그러나 사실은 이들 기본 내용을 잘 이해하고 수행에 진입하는 것이
일반 현실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바탕이 되어야
이후 불퇴전위에 이르러 수행해가는 보살 수행자와
관련된 내용도 그 의미가 있게 되고
그 사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조금 쉬면서
간단히 요약해 제시하고 마치고자 한다.
경전 부분도 길고
이에 대해 논의하고 살피는 부분도 너무 길면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불퇴전위에 이르러 수행해가는 사정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인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이른바 회신멸지의 열반 상태에 들어가는 아라한의 상태를
먼저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여하튼 그렇게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기본적인 수행 목표로 두고
생사현실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그런데 보살 수행자는 그렇지 않는다는 점과
또 그렇게 하지 않는 그 사정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런가.
즉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인데
정작 생사고통을 벗어나지 않고
왜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을 계속 하는가.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의 고통을 대하면서
그런 수행에서 왜 물러나지 않는가.
이 부분이다.
그 사정은 이미 경전에 그 핵심이 제시되어 있다.
다만 이해를 위해서 이 부분을 보충하고 마치기로 한다.
우선 어떤 수행자가 앞과 같은 기본적 수행을 잘 성취해서
아라한의 상태에 이르고 회신멸지의 열반에 들게 되면
그 입장만 놓고 보면 성인의 지위에 이르러
더 이상 생사고통을 받지 않는 가운데
더 이상 나아갈 바가 없는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 여전히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남아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이 문제로 남게 된다.
이런 경우 그런 중생을 그대로 방치하면
처음 그런 아라한이 생사를 벗어나게 된 것처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해 생사를 벗어나게 되는가하면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앞에서 그 사정을 이미 보았다.
일반적으로 한번 망집을 일으키고 업을 행하면
이후 그로 인해 점점 더 망집을 증폭하고
업의 장애가 증폭해 쌓여 가면서
악순환을 하게 되고
생사고통에 묶여서 정신없이 바쁘게 고통을 받아나가기에
점점 더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계기를 얻기가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한 순간에 그렇게 망집을 제거하지 못하고
수행에 임하지 못하면
그런 상태로 매 순간을 맞이하고 보내는 가운데
무량겁을 두고도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런 중생을 제도하려면
일단 수행자가 그런 중생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자비의 마음을 바탕으로
그런 무량한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서원을
갖고
그런 중생들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그런 중생들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그런 중생들을 수행에 진입할 수 있게 하여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다양한 방편 지혜와 복덕자량을 갖추는 수행이
별도로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보살 수행자가 생사를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생사를 받아가면서
수행에 임하는 사정은 바로 그 수행자가
이런 서원을 갖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하는 바탕에는
생사현실 자체가 망집을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재료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깊은 지혜를 통해 이를 대하면
결국 이들 재료는 본 바탕과 마찬가지로
그런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실을 관하여
생사현실 안에서도 청정한 니르바나와 마찬가지로 여여하게
임하게 되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본래 기본적으로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현실에서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므로
아라한의 상태가 되어 생사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결국 이런 망집을 일으키는 생사현실 안의 재료를 얻는 근본 바탕을 제거해서
회신 멸지의 상태에 이르러 생사를 벗어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꿈만 꾸면 악몽을 꾼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가 꿈이란 원래 잠을 자는 침대에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꿈에서 얻으면서 그렇게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그 사정을 이해한 다음
이후에는 잠을 자지 않고 꿈을 전혀 꾸지 않게 노력해서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면
아라한의 상태를 이런 상태라고 비유할 수 있다.
또는 눈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자꾸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고
업을 행해 고통스런 상황에 묶인다는 사정을 이해한 이가
그렇게 얻는 내용은 본 바탕에서나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은 내용을 얻으면서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는 사정을 이해한 다음
이후로는 아예 눈을 뜨지 않아서
그런 재료 자체를 얻지 않게되는 상황에 비유할 수도 있다.
꿈이나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 내용을 기준으로 붙잡고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그것은 오히려 엉터리 아닌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회신멸지란, 현실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의 신체나 지식 이런 것이
그 본 정체가 허망하고 실답지 않으며
그에 집착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사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상태를 기준으로 잡고
그 상황을 생각하면
몸에난 혹이 고통을 주고 문제라고 해서
몸 자체를 없애는 경우처럼 엉뚱한 방안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잡고 이를 대하는가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꿈의 비유에서 꿈 내용을 기준으로 보면
꿈안에서 얻는 황금을 다 없애고
그 꿈 밖으로 나가 안 들어오면
오히려 엉뚱한 것 아닌가 이렇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라한의 회신멸지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본 바턍에서 부질없이 실답지 않게 나타나고
그리고 이후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그 기본 재료 자체를
얻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정으로 생사 현실에서 존재를 집착하고 삶을 살아가는
무색계 색계 욕계를 기준으로 이 상태를 관하면
이 3 계 안에서는 그 존재 자체를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실답지 않는 내용 자체를 처음부터 일으켜 얻어 내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 머무는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보았듯
그런 생사현실에 여전히 남아
망집을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받아가는 중생들이 문제로 남게 된다.
한편, 깊은 지혜를 통해
본 바탕이 되는 공한 실상과
그리고 그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얻게 되는 현실 내용의 관계를
깊게 살피면
현실 내용은 비록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것이지만,
그 재료 자체만 놓고 보면
생사현실 안에서 문제삼는 그런 고통이나 생사를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현실 자체가 본래 생사고통을 벗어난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것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영화 화면이 비록 진짜처럼 보여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는 되지만,
그러나 지혜를 갖고 이를 대할 때는 그것은 단지 진짜처럼 보일 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지 못하는 것임을 잘 관한 가운데
영화를 통해 고통을 받는 것이 문제된다고 해도
그 영화를 굳이 피하지 않고 그것을 대하면서
그런 바탕에서 고통을 겪는 다른 이를 돕는 활동을 계속 해나가겠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비유처럼
보살 수행자는
깊은 반야 바라밀다를 통해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가운데
생사 현실은 비록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는 되지만,
그 재료 자체에는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그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다양한 수행을 해나가고자 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 수행에 임하게 되면
그 전까지는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고
단지 부질없는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받게 한다고 보고
그런 망집과 그에 바탕한 부질없는 소원을 제거하는 수행에 전념했다면
이 경우는 이제 사정이 달라서
그런 생사현실에서 중생이 일으키는 망집에 눈높이를 맞추어
중생이 갖고 집착하는 무량한 소원에 맞추어
그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고 이를 통해
그 중생을 수행에 진입시켜
끝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것을 서원으로 갖고
무량한 방편 지혜를 닦는 수행에 임하게 된다.
이 점이 보살 수행자의 수행이 갖는 다른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중생제도를 위해 닦는 무량한 방편 지혜는
쉽게 성취가 되지 않고
무량겁에 걸쳐서 원칙적으로 닦아야 성취가 된다고 보게 된다.
또한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 지혜는
본래 선악 무기의 특성을 갖고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고
반대로 나쁜 결과를 얻기도 되기에
중생제도를 위해 이런 방편지혜를 얻고자 하는 수행자는
먼저 그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고 불퇴전위에 이르고
취득한 방편지혜를 중생제도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먼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서원하고
이를 위해 무량한 방편지혜를 얻고자 수행하는 보살 수행자에게는
생사현실에서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오르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무생법이란 생사현실에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내용을 원칙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가운데
그 내용을 생사현실에서 적용하고 인가하게 되는 상태를 무생법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수행하는 가운데
가장 성취하기 힘든 부분이
직접 신체가 훼손되고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원칙적으로 실상을 잘 관하고 그에 바탕해서 상을 일으키지 않고
그 상황을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참고 견디면서
원래의 망집상태로 물러나 임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런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런 내용을 이해해도
정작 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황에 처하면 그 때마다
망집을 갖고 반응하던 상태로 물러난다면
무량한 방편지혜를 취득하게 되면
그 만큼 그 수행자도 문제상황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사정상 무량한 방편지혜의 취득에 장애가 발생하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 사정은 쉽게 말하면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어떤 위험한 폭발물을 제조할 수 있는 지식을
얻는 경우를 놓고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좋은 것을 욕심을 일으켜 어떻하든 이를 얻고자 집착하여
그 폭발물을 들고 협박을 해서 금품을 얻어내려 하거나,
또는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경우가 생기면
또 그것을 역시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갖춘 온갖 지식과 방편을 동원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 상대를 향해
폭발물을 사용하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여기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살핀 업의 장애를 일으키고
그 주체가 생사고통에 묶이는 현상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만일 어떤 이가 이런 상태라면
사회에서는 수사기관이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그가 갖는 수단을 뺏어서
폭발물을 함부로 제조해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편을 취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수행도 마찬가지다.
생사현실에서 중생들이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기에
그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하는 수행자가
정작 자신부터 그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에 집착하고
더 나아가 어떤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면
처음의 자신의 원칙적인 서원이나 깨달음을 망각하고
수행에서 물러나서
망집을 일으킨 중생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업을 행하게 된다면
이는 생사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행이 아니고
오히려 그가 수행을 통해 취득한 방편지혜에 비례해서
다른 중생이 생사고통을 증폭해 더 많이 받게 하는 한편
그 자신도 생사고통을 증폭해 더 받는 상태로 묶이게 되는 결과가 된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어떤 수행자가 원칙은 이론상 이해하지만
정작 생사현실에서 어떤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기만 하면
곧바로 물러나는 상태라면
선배 수행자나 부처님은 그런 수행자가
그런 위험한 방편지혜 자체를 함부로 지니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런 상태에 있다면
바로 그런 상태가 그 수행자가 이후 무량한 방편 지혜를
쉽게 성취하지 못하고
얻더라도 곧바로 상실하게끔 되는 핵심적 장애 사유가 된다.
그 사정을 앞의 비유를 놓고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 일체가 모두 실답지 않고
그런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이론상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그 이론을 현실에서 적용해
극복하기 가장 어렵고
그래서 물러나기가 가장 쉽다고 보는 측면이
바로 보시-정계 -안인 -정진의 수행덕목 가운데
안인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그 사정을 살폈다.
일반적으로 이미 갖고 있는 좋음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도 힘들다고 보고
또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으면서 그로 인해 장래 얻게 되리라 보는
좋음을 포기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힘들다고 보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억울한 상태로
신체를 훼손당하고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해 원칙대로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관하면서
상을 일으켜 취하지 않고
이것을 평안히 참고 분노를 일으키지도 않고
상대를 해치지도 않고 참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이론을 원칙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적용해 실천한다면
바로 이 부분을 그 원칙을 통해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되면
생사현실에서 본래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무생법을 단지 이론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현실에서 체험으로 실증하여 증득하게 된것이고
따라서 무생법인을 증득했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되면
결국 현실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생사현실에서 받는 생사고통 때문에
생사현실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외면하고 생사현실을 피하지도 않고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한 수행을 해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선한 방편도 되고
악한 방편도 되는 선악 무기의 특성을 갖는 무량한 방편 지혜를 취득해도
중생제도를 좋은 선교방편의 취지에서만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앞의 예처럼 고통을 받게 되면 물러나서
다른 중생을 해치면서 업의 장애에 묶이게 돼는 형태로 그런 방편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또 사정이 그렇게되면
선배 수행자나 부처님은 그런 취지로 갖고 있는 무량한 방편지혜를
신속하게 아낌없이 그런 수행자가 곧바로 취득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주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방편 지혜의 취득 자체가 보살 수행자의 목표점이 아니고
그런 방편 지헤는 결국 중생제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방편지혜를 취득하기 위해 굳이
무량겁의 수고를 거쳐야 할 이유는 본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가 서원을 굳게 갖고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이르면
곧바로 그 수행을 단축해서 십지 수행단계에도 이르고
성불하게 되는 사정도 이런 사정이다.
예를 들어 아미타부처님의 국토에 가면
수행자들이 곧바로 일생보처의 보살 지위에 이른다는 것도
이런 사정으로 이해하면 쉽다.
그러나 원칙적인 입장에서는
그런 무량한 방편지혜를 취득하고 스스로 성불하려면
무량겁에 걸친 수행이 요구된다고 원칙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사정은 중생이 망집을 일으키고
소원을 갖고 또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이고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그 현실 사정이 그렇게 무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고 중생을 수행에 진입시켜
생사를 벗어나게 하려면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종합적인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보살 수행자가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을 잘 깨닫는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생사현실을 오히려 그렇게 대하면서
물러나지 않고 임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생사현실에서 벗어나는 아라한의 원칙적인 내용을 놓고 보면
이는 외관상 생사현실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굴르는 형태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불퇴전 보살은
그런 생사현실과 받는 생사고통이 곧
니르바나임을 잘 이해하고 관하여
그런 상태에서도 물러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Lab value 불기2563/05/08 |
♥ 잡담 ♥경전코너와 중복되는 일일단상코너 경전 ♥ 잡담 ♥바쁜 연구중 산책 옥상에 화분 등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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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rnst-Ludwig-Kirchner-dance-of-negros.jpg!HD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ematis_viticella_cv02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teinlen-Motocycles_Com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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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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