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죄수의 억울한 사연을 청취해보면 그 사정을 조금 살필 수 있다고 본다. 사유인즉 자신은 자신에게 좋은 일을 열심히 했는데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사정을 들을 수 있다.
강도강간 이런 심각한 범죄를 놓고 볼 때도 사연이 마찬가지다. 설마 범인이 자신에게 나쁨을 주는 일을 하려다가 체포되었겠는가.
그래서 범인의 입장에 동조하다보면 공감이 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왜 일반적으로 이에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가. 이 부분에 수행의 기본 내용의 원리가 들어 있다고 본다.
생명인 이상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신도 좋고 다른 생명도 좋고 온 생명이 모두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좋으면 문제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위 내용 가운데 무언가가 좋지 않으면 그 부분에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 완벽하게 규정을 해서 성취가능하기 힘든 내용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지만, 여하튼 현실에서 각 생명이 좋음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란 결국 위 내용 가운데 어느 부분이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결국 그런 문제가 발생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결국 본 바탕이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정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는 되도록 좋고 좋은 상태를 얻어내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전 조각글에서도 본 바탕의 사정과 생사현실의 사정을 대비해서 많이 살폈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는데 왜 생사현실에서는 이런 수행을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를 살핀 것이다.
단적으로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은 아니다. 그래서 이를 방치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알고보면 현실에서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기에 그 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요구한 적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매번 본 바탕을 관하고 본 바탕에 상응해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해야 함을 제시하는가하면 바로 본 바탕인 실재 진여의 사정을 관함으로써 자신이 대하는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때문에 본 바탕인 실재 진여를 관하면서 이를 놓고 생사현실을 대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게 수행을 한다고 해서 본 바탕인 실재 진여를 어떻게 취득하거나 본 바탕인 실재 진여를 증득하거나 실재 진여에서 어떤 상태를 얻고 머물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생사현실이 어떤 내용이던 그 일체가 본 바탕을 떠난 적이 없는 것이다.
꿈을 놓고 비유하면 꿈 내용이 침대가 있는 현실 내용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꿈을 그런 침대가 있는 방에서 꾸는 이상 그 꿈 일체가 그런 침대가 있는 방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꿈 내용이
그 침대에 누어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그 침대에 그런 내용이 '있다'거나 그 침대가 곧 그런 꿈 내용이라고 여기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그렇게 여기고 대하면 그것이 꿈을 꾸고나서 일으킨 꿈망집현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꿈 한번 꾸고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 경우는 적지만, 만일 있다면 그렇다는 의미다.
그런데 본 바탕인 실재와 생사현실은 알고보면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집을 제거하기 위해 본 바탕의 사정을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같은 현실에 처해서도 현실 내용만을 붙잡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절대시하고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곤란하다.
같은 현실을 대하지만, 본 바탕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함께 관하면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면서 임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 바탕의 측면만 오로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 생사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또 정작 꿈은 아니기 때문이다.
꿈보다는 훨씬 그 주체가 오랜 기간 그런 형태로 반복해서 얻게 되는 내용이고 또 그 주체만 그런 것이 아니고 비슷한 상태의 많은 주체가 또 엇비슷한 상태로 엇비슷한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이고 또 다양한 감각과 분별을 통해서 비교적 생생하게 명료하게 그 내용을 얻기에 이는 꿈은 아니고 그래서 그것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 성격을 갖는다고 해서 단순히 무시하고 방치하기 곤란한 것이다.
원래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처음 본 바탕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현실내용은 실답지 않다. 이 내용만 간단히 선언하고 부처님도 사업을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렇게 실답지 않은 현실인데 그 현실안에서 각 주체가 겪는 생사고통이 바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이 해결이 문제되기에 본 바탕의 사정을 함께 잘 관해서 이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수행에 잘 임해서 각 주체간에 얽혀서 고통에 묶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시한 사정이 있다.
그런 가운데 각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좋음을 얻는 것이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상태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면 본 바탕만 강조하다면 이런 일 자체가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고 마치면 끝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그런 증상으로 생사고통을 겪어나가는 주체가 대단히 많고 그 생사고통이 비록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은 아니기에 이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중생을 제도하려면 수행자자신부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리고 다시 다른 중생을 그런 바탕에서 제도할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또 복덕자량으로 표현되는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좋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또 살펴야 하는 것이다.
막연히 좋음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양한 좋음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가 매 순간 문제된다.
이미 앞에서 보듯 자신의 지금 이측면의 좋음이 늘 모든 주체의 모든 기간의 모든 측면의 좋음이라면 이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충돌되고 모순되는 좋음을 놓고 그 경중을 재고 그 좋음을 얻는 방안도 또 이런 측면에서 잘 살펴서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좋음의 문제가 제기될 때는 각 내용의 좋음을 서로 비교하고 측량하는 가치저울이 필요하다.
여기서 가치저울의 양쪽 접시에 선택이 문제되는 각 내용을 올려 놓고 가치를 비교해서 더 좋은 쪽을 선택해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입장이다.
그래서 결국 세세하게 이 문제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가치저울문제는 과거에 추구미작전에서 상세히 살폈는데 여하튼 그 내용이 이 부분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한쪽에 자신의 두 눈을 올려 놓고 다른 쪽 접시에 현금 얼마를 올려 놓으면 가치가 균형이 된다고 보는가.
그리고 또 한쪽에 다른 생명의 두 눈을 올려 놓고 다른 쪽 접시에 현금 얼마를 올려 놓으면 가치가 균형이 된다고 보는가.
앞 문제는 그럴 듯하게 가치를 평가하다가 뒷 문제는 시장에서 그 생명의 가격을 보고 적어 놓은 경우가 많은데 알고보면 그것이 다른 생명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평가받는 가격이다.
그 사정은 다른 생명도 그 상대에 대해 그렇게 가치평가에 임하도록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업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평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 계속 다양한 내용을 놓고 가치비교를 잘 해야 된다.
만일 돈 천만원을 수익으로 얻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두 눈이 빠졌다. 이러면 수익을 얻는 것인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적극적으로 좋음을 얻는 것도 가치지만, 고통을 제거하는 것도 좋음이다.
그래서 고통을 받는 상태가 제거되는 것이 얼마마한 가치를 갖는가도 앞의 가치저울을 놓고 평가할 수 있다.
자신이 하루 종일 소변을 보지 못하도록 수술받고 묶여 있다. 이것을 해결하게 된 상태는 다른 쪽 접시에 현금 얼마를 올려 놓으면 균형이 되는가.
하루 종일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상태는 또 현금 얼마를 옆 접시에 올려 놓아야 균형이 되는가.
이처럼 가치를 비교함으로써 각 내용이 갖는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위 문제는 반대로 다른 쪽 접시에 있는 현금을 줄 테니 그 반대쪽에 있는 내용을 포기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하루 종일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좋은가. 이런 문제와 같다.
현금이 얼마인가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자신의 신체상태가 어떻고 평소 얼마나 거꾸로 매달리는 훈련을 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도 보지만, 여하튼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갖는 가치가 대단히 크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중에 고통이 심하면 다른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공통된 마음이다.
병문안을 갔다가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적힌 낙서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자신의 힘으로 혼자 숨쉬고 걸어다니고 대소변 보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데 평소 그런 것을 잘 하고 있는 이가 위 사실만으로 환희하고 기뻐 뛰어다니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런데 그것이 가치저울 한쪽에 올려지면 현금으로는 평가하기 힘든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후 이번 생을 살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단멸관을 제거하고 무량겁에 걸쳐 생사를 받아나가는 사정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한쪽에 심장을 올려 놓고 한쪽에 경전 게송을 올려 놓으면 어느 쪽이 가치가 높다고 보게 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도 출제된다.
이는 모래알 하나의 좋음과 갠지스강 나머지 모래알의 좋음을 놓고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 이런 것을 문제삼게 되는 고차원적인 문제의 성격을 갖는다.
여하튼 현실에서 대부분 조금 더 좋은 수익을 얻고 조금 더 좋은 맛을 얻기 위해서 조금 더 편리하게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때로는 생존 자체를 어떻하던지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는데
선택을 잘못하면 좋은 것 조금 얻으려다 대단히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결국 경전에서 정리해서 제시하는 수행방안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내용들이다.
알고보면 간단하다.
왜냐하면 제시된 수행방안을 잘 행하면 그로 인해 돈으로는 결코 측량하기 힘든 가치를 그로 인해 매번 획득하는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행하면 보잘것 없는 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얻는 대신 앞의 가치저울 문제에서 제출한 그 반대내용
예를 들어 지극한 고통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로 인해 받게끔 되기에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이것을 무시할 수 있는가. 그러면 지금 그렇게 실험을 해보라는 의미다.
Gustav Klimt ( 1862 년 7 월 14 일 - 1918 년 2 월 6 일)는 오스트리아의 상징 주의자이자 비엔나 탈퇴 운동의 가장 저명한 회원 중 한 사람입니다. 클림트의 주요 주제는 여성의 몸이었고 그의 작품은 솔직한 에로티시즘으로 특징 지워진다. 금박을 포함하는 "황금기"의 그림으로 새로운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Klimt Title : standing-woman-in-kimono-dame-im-kimono-1918.jpg!HD 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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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1868년 3월 13일에 신정부는 신사의 신주(神主)를 겸하고 있는 승려들에 대한 환속 명령을 내렸으며, 1870년에 대교선포(大敎宣布)로 신도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쓰루가오카 하치만궁에 대해서도 이른바 '폐불훼석' 운동이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 이래의 다보대탑 등의 불당은 파괴되고 불상이나 불구(佛具), 경전 등도 파괴되고 소각처분되거나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현재 가마쿠라 내의 주후쿠 사(壽福寺), 센소 사(淺草寺), 후몬인(普門院) 등의 절과 고토(五島) 미술관, 도쿄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가까스로 남아있던 불당도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이 촬영한 사진이나 스케치로만 남아 있다. ▶▶▶ [참조링크7]ko.wikipedia.org
제목 The Temple of Kamakura, Japan 해설 The Temple of Kamakura, Japan Iconographic Collections Keywords : Felice Beato 수입 / 취득 방법 Wellcome Trust logo.svg This file comes from Wellcome Images , a website operated by Wellcome Trust, a global charitable foundation based in the United Kingdom . Refer to Wellcome blog post ( archive ). Library reference : Iconographic Collection Photo number : V0037652 Full Bibliographic Record : http://catalogue.wellcomelibrary.org/record=b1569186 출처 / 촬영자 http://wellcomeimages.org/indexplus/obf_images/07/4e/ff051e44f272b5725e3e08514d14.jpg Gallery : http://wellcomeimages.org/indexplus/image/V0037652.html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