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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수행-자비관 공부-01 본문
자비관-공부01
http://buddhism007.tistory.com/108
http://buddhism007.tistory.com/entry/자비관-공부01
08fl--자비관-공부01.txt
[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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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관의 필요성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어떤 이가 대하는 모든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에게 있어서는 종국적으로
좋음(+), 나쁨(-),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0) 등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 좋음, 나쁨,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에 대해
각각 반응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독(毒)들이 발생하게 된다.
○ 예를 들어, 좋음을 대할 때,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알고,
그 좋음을 남과 함께 나누려고 하고,
남에게 베풀고
규범을 지키고,
보다 더 선하고 좋은 것에 대해 집착없는 서원을 일으키는 자세를 갖는다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를 넘어
좋은 것을
자신이 반드시 차지하고 맛보아야겠다고 집착하고 달라붙는 마음 자세를 갖는다면
이는 마음의 독이 된다.
이렇게 좋음에 대한 마음이 독이 된 상태를 탐욕심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내용이 선한 경우에도 독이 된다.
하물며 그것이 악한 욕심인 경우에는 더더욱 큰 독이 된다.
○ 나쁜 것에 대한 자세도 같다.
나쁜 것을 나쁜 것으로 알고,
나쁜 것을 끊으려 하고,
다른 이의 나쁜 것을 끊게 하고
다른 이가 주는 나쁨을 나쁨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편안히 좋게 받아들이고
나쁨을 참고,[안인]
나쁜 것을 주는 다른 이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나아가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여,
나쁜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며,
자신과 남이 모두 선하고 좋고 좋은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나쁜 것에 대해
성을 내
나쁜 감정을 외부로 표현하고, 분노하고
그 나쁨에 집착하고,
더 나아가 나쁨을 가져다 준 대상이나 상대를 파괴하고 해치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마음의 독으로서 성냄[분노, 瞋]인 것이다.
그 성냄이 악한 대상을 향해 악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다 해도 독이 된다.
그런데, 하물며 선한 대상을 향해 일으키는 경우에는 더더욱 큰 독이 된다.
이처럼 좋고 나쁨에 대해 일반인이 반응하는 여러 자세 가운데
탐욕과 분노가 독이 되고, 문제되므로
이 독을 다스리기 위해,
앞에서
부정관을 살폈고
다시 여기서 자비관을 살피게 된다.
● 자비관의 의미
○ 자비관[慈悲觀]이란 범어로는 maitrī-smṛti 라고 하며
5 정심관(停心觀)의 하나다.
일체 중생을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고 생각하는 관법이고
특히 성냄이 많은 자가
성냄을 없애기 위해 닦아야 할 수행법이다.
● 자비의 개념
자비란 오늘날 많이 사용하는 말이고,
쉽게 생각하면 자비란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자비가 갖는 의미가 반드시 명료한 것은 아니다.
특히 자비는 부처님이 갖는 네 가지 무량한 마음
대자-대비-대희-대사 즉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에도 들어 있다.
여기서는 자와 비가 독립적으로, 나열되고,
다시 그것이 또 희와 사라는 의미와도 구별되어 네 가지가 나열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자비란 말의 의미를 살필 때는
결국 사무량심의 자(慈 maitrī),비(悲 karuṇā), 희(喜 muditā), 사(捨 upekṣā)의 의미도 함께 살피는 가운데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자 비 희 사의 각 낱말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해지고 있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자라는 용어는
마치 현명한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때 갖는 사랑의 마음처럼,
상대를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끌기 위하여,
상대에게 좋은 내용 즉, 선(善), 지혜(智慧), 행복(幸福), 즐거움, 이익을 베풀어주며
반대로 나쁜 내용 즉, 악(惡),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제해주는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사람들이 사랑이란 말로 의미하는 내용은 다양하다.
그래서 예를들어
무언가 애착을 갖고 집착하여 감각하거나 소유하고 맛보려는 의미,
[사과를 좋아하는 이가 사과에 대해 갖는 애착, 사랑]
또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실현시켜 주어
단지 상대가 좋음을 느끼고 만족하게 하고 행복을 얻게 해주려는 의미 [ 애완견에 대한 사랑 ]
등등 여러가지 의미로 사랑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의 자[慈]가 의미하는 사랑이란,
그런 탐욕과 애착을 바탕으로 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진정 위하여 상대를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는 마음,
그래서 마치 현명한 어머니가
그 자식을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는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반대로 애착과 탐욕에 바탕한 사랑은
부정관을 통해 끊고 버려야 할 내용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다만, 종전의 해석을 참조하면 자-비-희-사의 개념은
그다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혼동을 주는 측면이 있다.
- 종전의 해석에 관한 논의 참조 -
□ 본래 '자'(慈)란
이미 앞에서 보듯
마치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때 갖는 사랑의 마음처럼,
상대를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끌기 위하여,
상대에게 선(善), 지혜(智慧), 행복(幸福), 즐거움, 이익을 베풀어주고
반대로 악(惡),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로부터 구제하는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사랑 안에는
즐거움을 주거나,
고통을 빼주거나 하는 마음이 함께 포함되어 들어 있다.
그래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자',
고통을 빼주는 것은 '비' 이렇게 구별하지 않고
이 모두는 결국 같은 내용으로서 '자'의 마음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실제로 실천해
선(善), 지혜(智慧), 행복(幸福), 즐거움, 이익을 베풀어주며
좋음을 베풀고
반대로 악(惡),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를 덜어주고 없애주며
이런 나쁨으로부터 구제하여
상대를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끄려는 사랑의 마음을
'자'는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
그러나 한편 현실에서는 그렇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일과 같은 경우도 그런 경우다.
또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먼 곳 먼 시간의 일들도 그런 경우다.
그래서 자신이 노력해서 변경시킬 수 없는 성격의 일들이 많다.
그래서
우선 그것이 변경 가능한 일일 때,
상대를 변화시켜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 노력하는 마음을 '자'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 즉,
단순한 관찰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런 현상들을 관찰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직접 좋음을 주거나 나쁨을 없애주는 것이 곤란한 경우
그 상태에 어떤 마음으로 그 현상을 대하는 것이 좋은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나머지 비-희-사를 대치시켜 나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변경할 수 없는 일에 대해
○ 그 가운데 악하거나, 나쁜 일에 대해서는, 같이 슬퍼하는 마음['비']의 마음을 갖고 대하고,
○ 그 가운데 선하고 좋은 일에 대해서는, 같이 기뻐하는 마음['희']을 갖고
○ 그리고 가치없는 일에 대해서는, 평등하게 버림['사']의 마음을 갖고 대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
그리고 이렇게 해석할 때 자-비-희-사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 내용을
표현만 달리해 반복 나열한 것으로 해석하지 않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각각 다른 상태에 대해
각기 달리 자-비-희-사의 마음을 갖고 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한 주체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자''비''희''사'의 마음을 늘 함께 지녀야 한다.
그러나 각각의 상태에 따라 가져야 할 마음상태는 조금씩 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비'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때
'희'나 '사'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 '희'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때
'비'나 '사'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 '사'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때
'비'나 '희'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위와 같이 나누어 본 것이다.
○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다시 자비관의 '자'와-'비'란 말을 대하면,
이것이 결국 나쁜 상태에 일으키기 쉬운 성냄의 독을 대해 치료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수행방안의 의미가 뚜렷히 나타난다고 본다.
원래 나쁜 상태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갖기 쉬운 마음 상태란,
나쁨을 참지 못하고 불쾌함을 느끼며
그 나쁨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 표출시키고
분노를 떠트리고
다른 대상을 파괴하거나 해치는 행위를 하고
그 나쁨을 가져다 준 대상에 미움과 원망을 품고 해치는 마음을 갖기 쉽다.
넓게 보아 이것을 분노[성냄]의 마음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싫고 불쾌한 상태에 직면하지만,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도록 억눌림을 당하거나,
그 나쁨을 변경할 수 없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경우
그 나쁜 대상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은 슬픔[비]이나 울음의 형태로 표출된다.
이처럼
분노와 슬픔은 나쁨에 대해 반응하는 마음상태인 점에서는 같으나,
분노는 외부로 다른 대상을 해치는 기능을 갖지만,
슬픔은 억제되는 가운데 반응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자비란, 결국 나쁨에 대해,
성냄을 일으키지 말고,
기본적으로 자의 마음,
그리고 비의 마음으로 이를 대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자-비-희-사의 내용 가운데,
나쁨에 상대하므로
기본적으로 기쁨의 '희'나 버림의 '사'가 함께 들어오지 않고
슬픔의 '비'까지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 자비관을 행하는 방안
○ 현실적으로 성이 날 때 어떻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신의 생명과 신체, 자신의 재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기타 자신의 희망하는 상태 등에 대해 좋아하고 집착을 갖는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것들이 침해될 때
그것에 대해 싫어하고, 또한 성을 내게 된다.
그런데 자비관이란, 이런 경우에 분노를 멈추고 중지하고
자와 비의 마음을 갖고 임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면 외부 현상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 마음을 뜻대로 바꾸고 조절하는 것도 역시 그 만큼 힘들다.
그래서, 앞과 같이
자신의 신체나 재물들이 침해되는 상황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성을 내지 않고, 참고 중지하는 것은
말처럼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원치않고 불쾌한 상태를 대하여
불쾌를 일으키지 않고 좋게 받아들이고
불쾌하더라도 성을 내지 않고 참고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지 않으며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더 나아가 상대와 자신을 모두 최상의 상태로 이끌어들이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평소에 이런 불쾌하고 화가 일어나는 상황을 마음에 그려 놓고,
이를 참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훈련을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곧 수행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 본래 사랑스럽고 좋은 내용을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자비의 수행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래서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화가 나는 상황에서 그런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특히 누구나 집착을 갖고 아끼는
자신의 생명과 신체, 재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에 침해가 일어날 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 가장 먼저는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애착을 갖고 집착을 하기 쉬운 대상들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관을 사용하여 집착을 끊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이들 집착은 잘못된 분별에서 시작되게 된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계분별관 인연관등을 사용하여
자신이 집착하는 것에 대해 올바로 분별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집착을 끊는 것이 필요하다.
○ 두번째는
나쁨을 대하여 그 나쁨을 완화시켜 받아들이고
좋음을 취하는 다음과 같은 방편을 사용할 수 있다.
우선 대부분 나쁘다고 받아들이는 상황에 대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을 달리하면
그에 대해 좋음을 찾아내고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대할 때
비록 그것이 나쁘게 생각되지만,
마음을 달리하여 좋음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 그것이 그 안에 숨겨 갖고 있는 좋은 측면을 찾아내 보는 것
□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 그것을 바라보는 것
□ '더' 나쁜 것을 생각해 그것과 비교해 생각해 보는 것
□ '다른' 나쁜 것들을 생각해서 그것과 비교해 생각해 보는 것
□ 만일 이것이 아니었으면 '대신' 있었을 다른 나쁜 것들을 생각해서 그것과 비교해 생각해 보는 것
□ '이미 이루어진 다른 좋은 것' 들을 꺼내 생각해 보는 것
등을 통해
주어진 내용에서 좋음을 찾아내 얻을 수 있다.
○ 한편 자비심을 일으키는 또 다른 방안으로 3가지 인연을 들기도 한다.
이를 3 연자비(三緣慈悲)라고도 한다.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 법연자비(法緣慈悲), 무연자비(無緣慈悲)가 그것이다.
먼저
○ '중생연자비'는 상대를 자신과 친한 이와 똑같이 보아 베푸는 자비를 말한다.
○ '법연자비'는
온갖 현상이 사실은 색수상행식 5 가지요소가
거짓으로 일시적으로 화합한 것임을 알고
그 실체는 없으며
또한 그 실재는 얻을 수 없어 공(空)한 줄을 깨달아 알고,
근본적으로 집착과 번뇌를 없앤 성자(聖者)가
그런 바탕에서 일으키는 자비를 말한다.
○ 무연자비란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의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깨달아 아는 부처님이 일으키는 자비를
특별히 가리키는 말이다.
즉 부처님이 일체 중생에 대하여 평등하게 일으키는 자비심을 뜻한다.
이 가운데 일반인이 갖는 자비는 보통 중생연자비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화가 날 때
예를 들어 견해가 달라 다투거나,
이해관계가 달라 대립하고,
상대가 자신의 생명, 신체, 재물, 가족...등을 침해하여서 화가 나는 경우등에서
일반적으로 자비를 일으키기 힘들지만,
그래도 자비를 일으키게 되는 원인을 살펴보면,
자신이 상대를 매우 사랑하고 아끼는 경우라거나,
또는 그와 동일시하여 볼 수 있는 경우 등인 경우가 많다.
보통 자식이 어머니를 불쾌하게 해도
어머니는 자식을 용서하고 참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 어머니도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어떤 이가 상대의 입장에 자신을 바꿔 넣어 보고 그 입장을 헤아려 보고 [역지사지]
상대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같이 만들어 [공감, 동감]
자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바탕에서
상대를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처럼
최상으로 이끌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화가 일어나고 성이 날 때는
이렇게 여러가지 방안을 통해서
자비의 마음에 도달하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수행해야 한다.
● 결국 자비관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을 다 함께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에 함께 이르도록 이끄려는 자[慈]의 마음과,
그렇지 못한 상태 - 즉 악하거나, 어리석거나, 불행하고 불쾌와 고통 손해의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비[悲]의 마음을 기본으로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싫어하고 나뻐하는 상태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기 쉬운 상태에 처할 때,
앞과 같은 여러 방편을 써서
나쁘게 느껴지는 상태로부터 숨겨진 좋음을 찾아 내거나,
또는 상대와 같은 입장으로 상대와 공감하는 자세를 갖거나,
일체가 무상하고 실체가 없고 공하다는 관을 통해
근본적으로 집착과 번뇌를 벗어나거나,
다시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일체에 대해 차별된 견해를 버리고
일체를 평등하게 최상으로 이끌려는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통하여
분노와 미움, 원망, 증오, 등으로 상대하지 않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와 다투거나 해하려 하지 않고,
불쾌를 좋음으로 바꾸어 받아들여서 편안하게 머무르고
또 불쾌를 참고 억제하고 멈추며,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상대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상대에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지혜와 방편을 써서,
상대를 나쁜 상태에서 끌어내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에
함께 이르도록 이끌고 노력하는
자(慈)와 비(悲)의 마음을 함께 일으켜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 자비관의 성격 :
자비관은 불교의 기본 수행방법으로서 5정심관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대지도론 1 권에서는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등이 각각의 번뇌 상태에 대응하여 사용하는 수행법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설명 참조
★ 기존 Comment 정리
Prajna Citta 2012/01/06 16:48
쉽게 생각하면 많이 들어 쉬운 말이지만,
그것이 정말 무슨
의미인가 생각하면
사실 좀 막연하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의 개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에 Pun tarika 님이 말씀한 것처럼,
길가의 노숙자나 병든 노인 또는 미운 원수들을 대할 때는
- 상대를 마치 첫사랑인 것처럼 생각하고 연모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고,
반대로 아름다운 이성이나 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을 대할 때는
- 거꾸로 시신이나 추한 모습을 떠올려 탐욕을 떨쳐 버리는 것,
그것이 자비관과 부정관의 수행방안이 아닌가.
쉽게 생각하면
이런 마음을 갖고
탐욕과 성냄의 마음의 독을 각기 중화시켜 다스리는 수행방안이라고 봅니다.
★
Lab value 2012/01/06 17:27
대부분 자신과 관련이 없는 상황에서는
관용적이고 부드럽게 상황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되면,
그것에 무섭게 분노를 일으키거나 반대로 탐욕심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prajna 님이 올린 저 사진도
그냥 무심하게 먹다 버린 포도와 포도씨로 보면 그저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만 빼
놓고 먹은 포도
그리고 그 쓰레기는 자신의 책상위에 버린 것이라면
심하게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언제 어느 경우에서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늘 모든 생명을 이익되게 하려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새 저작권법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새 시스템에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잘 대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Ω♠문서정보♠Ω
™[작성자]™ Prajna Citta
◑[작성일]◐ 2012/01/0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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