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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부정관과 60인의 스님의 죽음2 본문
[ 요약 ] ● 부정관과 60인의 스님의 죽음2 ○ 부정관은 죽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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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부정관의 문제점에 대한 글인데 상당히 내용이 깁니다.
기존 분량을 나누어 올립니다.
////참고 끝////
● 앞에서 몸이나 시신(시체)의 깨끗하지 못함을 관하는
부정관의 수행방안에 대해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이 부정관의 수행을 부처님이 강조하자,
스님들이 몹시 몸을 싫어하고 근심하여 자살을 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리고 석존은 그런 행위를 금하고 다른 수행방안을 다시 설하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 참고 => http://buddhism007.tistory.com/120
"불교수행-부정관_공부1.htm" [빈문서] o:/G/G/08/불교수행-부정관_공부1.htm ]
그런데 부정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기 쉽다.
우선 사람에게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면도 많다.
그런데 왜 굳이 시체나 신체의 더러운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또 잡아함경 첫부분에서 부처님은
싫어하고 떠날 마음을 일으키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을 없앨 것을 가르친다.
색수상행식은 물질-감수-생각-신구의3업의 변화 움직임[행]-의식 등을 말한다.
이는 곧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 전부를 말하고
또한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 전부도 되고
따라서 현상을 전부 포괄하는 범주도 된다.
그런데 이들 색수상행식에 대해 싫어하여 떠날 [염리(厭離)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자신과 삶 그리고 세상 모두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가짐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깨끗하지 못함을 관하고
또 한편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은
불교가 염세주의적인 가르침이라고 비판받는 이유도 된다.
그리고 사실 이 부정관과 앞의 가르침만을 보면
염세주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일 여지도 많다.
○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다.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혔듯
불교는 염세주의적 종교라기 보다는
세속의 탐욕을 버리고
대신 진리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더욱더 깨끗하고 원대한 서원을 실천해가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
http://buddhism007.tistory.com/124
디스크 08\budr-00070.htm
과거 삭제된 링크 http: //blog.paran.com/buddhism007/46144761 )
그리고 부정관의 내용에 대해 살피자면,
우선 부정관은 수많은 번뇌 가운데 탐욕에 대해 행하는 개별적 수행방법이다.
이 가르침은 속세에서 갖던 탐욕을 버리고 출가하여
막 수행을 시작하는 이를 대상으로 한 가르침이다.
출가자는 세속에서 추구하는 많은 탐욕의 대상
즉 부, 권력, 명예 등에 대한 탐욕을 정리하고 출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신과 자신의 생명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끊지는 못한 상태이므로,
이런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친 내용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대지도론 1권에서는
이 부정관을 부처님이 상대편의 마음의 병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설법을 하는 것[대치실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실단(悉檀 siddhānta)이라 함은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대치실단(對治悉檀)이란, 예를 들어
탐욕심이 많은 이에게는 부정관(不淨觀)을 말씀하고
분노가 많은 이에게는 자비관(慈悲觀)을 가르치는 등
상대의 병의 상태에 따라 하신 적절한 설법이다.
마치 설사병 환자와 변비 환자 각각에게
각기 달리 지사제와 완화제를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의 본 취지와 본 목적은 하나의 대치실단 내용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전체적인 가르침을 모두 같이 살펴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이미 다른 곳에서 대략 살펴 보았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참고
http://buddhism007.tistory.com/124
디스크 08\budr-00070.htm
과거 삭제된 링크 http: //blog.paran.com/buddhism007/46144761 )
○ 그러나 여하튼 부정관을 수행하다 보면,
자신에 대해 갖는 기본적 애착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게 되어,
세속에서 취하는 방향과는 정반대가 되게 된다.
예를 들어 세속에서는 사람들이 욕심을 갖는 것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는가 여부로
서로 우열을 따지게 된다.
그러나 앞의 부정관은 모든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는 애착의 대상
몸에 대한 애착부터 근본적으로 버리고 떠남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그외의 나머지 것은 더더욱 당연히 애착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세속의 가치 평가나 목적 상태와는 방향이 크게 다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왜 자기 자신의 신체나 애착을 갖는 것들에 대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갖고 탐욕과 집착을 끊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신체까지 싫어하고 혐오하여 떠나려 한다면,
앞의 스님들처럼 삶을 혐오하여 죽음을 택해야 마땅한 것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 쉽다.
그래서 다음에서 그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어 없어져 아무것도 없는 사멸(死滅)의 상태를 목표로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윤회의 고통을 끊으라는 것이며,
자살과 죽음을 목표로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을 싫어하고 떠나야 한다면,
대신 무엇을 추구하며 살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세간에서 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는 대신
무엇을 어떻게 추구하라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 앞의 부정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우선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음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좋음은 좋은 것을 직접 얻고 누릴 때에도 얻지만,
한편 좋은 것을 기대하며 희망을 그려나가는 순간에도 얻는다.
그리고 사람은 이러한 좋음을 얻기 위해 좋음을 얻을 많은 수단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물질이나 명예 권력과 같이, 좋음을 줄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여러가지를 추구할 때
최종적으로 그것 자체보다는 그를 통해서 좋음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음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지위나 물질 등등의 많은 수단을 추구한다고 하자.
그래서 원하는 지위나 물질을 얻지만,
그러나 이를 통해 좋음을 끝내 얻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1000억이란 재산을 구해 얻는다고 하자.
그러나 그 재산으로 좋음은 얻지 못하고
만일 분쟁과 불쾌함 걱정 두려움 만을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에게 그 재산은 의미없을 뿐 아니라, 고통을 준 것뿐이다.
결국 사람이 원하는 것들은 최종적으로는 나쁨을 피하고, 좋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오직 이처럼 좋은 것을 얻어 늘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고
또 늘 좋은 것에 대한 희망을 그려가면서 좋아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
○ 그러나 삶은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 우선 삶에는 좋음이 아닌 나쁨을 주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그 나쁨으로 고통받고 불쾌함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신체기관이 늙고,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들거나 죽음을 맞이하여 고통과 불쾌를 겪고
또 불쾌한 감각을 하거나,
또 욕구가 뜻대로 실현되지 않아 번뇌를 일으키며 고통과 불쾌를 겪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갖는 욕망은, 무한하고,
그 무한한 욕망을 뜻대로 다 성취하지 못한다.
또 사람이 갖는 여러 욕망을 그 성격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늘 건강하고 젊고 병들지 않은 상태로 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부터
- 생계를 해결하려는 욕구
- 그리고 비교로 인해 끝없이 생겨나는 욕망
- 끝없이 극한으로 나아가는 무한한 욕망 - 등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뜻대로 잘 성취되지 않는다.
또 성취되어도 정작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한 좋음은 잘 얻지 못한다.
또 자신이 좋음을 일시적으로 얻기는 해도
좋고 좋은 상태 즉,
자신에게도 좋고 남에게 좋고 모두에게 좋고,
지금 좋고 오래 오래 좋은 '좋고 좋은 상태'는 정작 잘 얻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이 겪는 고통과 불쾌가 그리고 바로 이런 문제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 문제인 것이다.
○ 만일 현실이 이렇지 않고 모두 좋고 좋은 상태를 다 잘 얻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문제로 삼을 것인가.
그리고 또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수행자는 왜 굳이 어려운 수행을 할 것인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삶에는 고통과 불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의 목표와 방안이 제시되는 관계에 있다.
● 부처님께서도 이런 사정을 경전에서 밝히고 계시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잡아함경에 나온다.
...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세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은 세간의 사랑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뜻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가.
이른바 늙음·병·죽음이니라.
만일 세간에 사랑할 만하지 않고 생각할 만하지 않으며 뜻할 만하지 않은 이 세 법이 없었더라면,
여래·응정등각은 세간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요,
세간도 또한 여래·응정등각이 있어 알고 보고,
바른 법을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랑할 만하지 않고 생각할 만하지 않으며 뜻할 만하지 않은
늙음·병·죽음의 세 가지 법이 세간에 있기 때문에
여래·응정등각은 세간에 나왔고,
세간도 또한 여래·응정등각이 있어서,
아는 것과 보는 것으로 바른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아느니라.
[잡아함경, 대정장 2-95c 한글 (잡아함경-346. 삼법경) 남전장경 : a.10.76]
○ 위 내용은 결국 다음을 말한다.
즉 세상에는 해결하기 힘든 늙음, 병, 죽음의 문제가 있었기에, 부처님이 나온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필요성도 그다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는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바른 법을 설하여서
과연 인간 세상에서
사람이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상태를 얻게 되었는가.
○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른 종교를 살펴봐도 문제가 같다.
삶에는 여전히 늙음 병 죽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살아가는 한 다시 의식주와 같은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다시 서로 서로 얻고 차지한 것을 비교하며 욕심을 키우고,
그 욕심을 다 쫒아 성취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제각각 무한한 욕심을 향해 갈증을 일으키며
번뇌를 일으키며 살아간다는 문제가 있다.
삶에는 이런 고통과 불만, 불쾌함이 있다.
또 이런 고통과 불쾌를 겪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함이 있다.
또 원하는 좋음을 얻지 못하게 되거나, 이미 얻은 좋음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불안에 젖게 된다.
그것이 결국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
○ 우선 부처님은 일찍이
이처럼 삶에서 얻는 온갖 고통과 불쾌를
생,노,병,사,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로
제시하였다.
이 가운데,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좋아하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색수상행식, 5 요소가 참된 성품을 가리고 덮고, 사람은 이에 집착하고,
이 오음에 수많은 고통이 쌓여 모이고 윤회를 반복하며 받는 고통을 말한다.
[中阿含 卷七 分別聖諦經]
결국 이들이 삶의 문제거리이다.
만일 앞에 나열한 여러 문제가 삶에서 진정 없다면,
도무지 삶에서 문제거리가 없고,
따라서 수행해야 할 필요성도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삶에서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기에,
또 수행자가 수행목표를 세워 수행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의 상태와 그 원인을 우선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없애고 문제가 해결된 상태의 원인을 찾아 행해야 한다.
우선 문제의 상태는 무엇인가.
우선 삶에서 만나게 되는 앞에 나열한 것과 같은 고통의 상태들이 문제의 상태들이다.
그리고 앞에서 욕망의 단계에 여러가지 단계의 고통을 나열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원적이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 생노병사의 문제이다.
○ 그런데 그런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늙음·병·죽음의 세 가지 근본적인 고통의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위 설법에 이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세 가지 법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늙음·병·죽음을 떠나지 못한다.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가.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이다.
다시 세 가지 법이 있어 그것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을 능히 끊지 못한다.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가.
이른바 몸을 나라고 봄[신견身見]·
잘못된 목적과 실현방법에 대한 판단[계취戒取]、
의심[疑]이니라. ...."
[잡아함경, 대정장 2-95c 한글 (잡아함경-346. 삼법경) 남전장경 : a.10.76]
결국 삶에서 고통과 불쾌함이 문제인데
그 문제의 원인을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근원으로 다시
색수상행식 5온이 일시적으로 화합한 몸을 실재의 자신으로 보는 견해(신견)와
잘못된 목적을 설정해 잘못된 방법으로 실현하려는 견해와 자세(계금취견),
그리고 진리에 대한 의심을 갖는 자세 등을 그 원인으로 다시 들고 있는 것이다.
○ 생각해보면 늙음 병 죽음이란 고통의 사태에 대해,
언제나 젊게 살게 만드는 방법이랄까,
절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랄까.
모든 병을 낫게 하고 죽지 않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아서
약간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희망들이 원래 성취 불가능한 내용이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사람이 고통을 받는 근본 원인은 그런 것을 성취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며,
그보다는 바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이 문제가 비롯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해결해야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문제의 핵심과 원인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
○ 세간에서는 늙게 만드는 세포의 변화, 병들게 만드는 각종 원인, 죽게 만드는 각종 원인을
늙음과 병 죽음의 원인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제시하시는 이유를
우선 다음과 같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생명의 자연적인 현상 생노병사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설령 가정하여 생노병사 자체를 없앤다고 하여도
고통과 악은 발생할 것이다.
그런 사태가 가능하지 않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가정해도
사람은 또 다른 상태에 대해 희망을 갖기에 그런 것이다.
반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면,
위 사태에 임한다 해도 고통을 얻어 갖지는 않는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늙음·병·죽음(고통)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세 가지 법을 끊지 못함'에 있다고 보시는 것이다.
○ 한편 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생각해보면 모든 욕심과 분노는 사실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과 관련해 일어난다.
사람은 자신에 관해 집착하는 것이고, 또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탐욕을 일으키고, 또 그것들이 침해되면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 핵심에 '자신'에 대한 의식이 들어 있다.
나 자신, 나자신이 애착을 갖는 것( 타인, 물건, 지위,,,등등)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모든 문제의 중심인 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에서
바로 그 기초가 되는 '나'에 대한 인식이 잘못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신견(身見)의 문제이다.
즉 이른바 몸을 나라고 보는 견해와 자세를 말한다.
이 이해를 위해 다음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만일 누군가 사진이나 만화 그림으로 자신을 그려 놓고
그 후에 이들을 불태우면
마치 정말 자신이 소멸하고 없어지는 것처럼 가슴아프게 여긴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여기에서는 마치 가짜를 진짜처럼 잘못 여겨
그런 반응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을 떠 보게 되는 자기 자신의 모습,
또 만지면 느끼는 자신의 신체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바로 앞의 사진이나 그림의 비유처럼 가짜고 일시적인 것이며,
진짜 실재의 나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현상에서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자기자신과
자신의 것들을 잃거나 갖지 못한다고 하여
고통받고 슬퍼하고 걱정하는 것은
사실은 바로 위의 예에서 사진이나 만화 속의 자신이
불태워진다고 슬퍼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관계는 어떻게 말해야 옳은가?
추리해 말한다면, 본래 '실재의 주체'와 '실재의 대상'이 서로 관계하여
마음에 이런 모습과 촉감 등으로 가상적인 현상 내용이 맺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에 맺힌 가짜의 자신과 대상을
우리는 모두 진짜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해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 하면
반야경전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 모든 현실을 '마치 환영이나 꿈과 같다고 여기는 한편
비록 모두가 실체가 없기는 하나 있는 듯이 나타난다’고 이해해야 옳은 것이다.
즉, 현상은 앞의 비유에서 가짜의 만화나 사진과 같은 것이고
진짜의 나와 대상은 실재내용들이다.
그런데 그 실재내용은 얻지 못하고 공한 것이며,
또한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
그런데 우리는 가상적인 현상내용으로서 색수상행식의 화합상태를
진짜 자신이라 생각하고 집착하게 되며
이 견해와 집착으로부터
다시 자신과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해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갖는 근본원인에
앞과 같이 자신에 대해 잘못 갖는 견해 즉 신견(身見)이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견해 때문에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하고
다시 잘못된 목적을 세우고, 잘못된 실현방안을 찾아 헤매게 된다. [계금취견]
예를 들어 자신의 지금 모습에 애착을 갖고 세상을 바라 보는 이는
자신이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고
지내는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 예를 들면 방부제를 매일 조금씩 먹으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고 먹는다면
그런 것이 바로 계금취견의 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의 처음 기초가 잘못되어 있기에
다시 잘못된 목표를 세우고 잘못된 방안을 찾아 고집하는 것이다.
한편 진리가 그렇지 않은데,
진리의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또는 자신의 희망과 부합하는 내용만 진리라고 믿거나
엉뚱한 견해를 진리라고 잘못 믿기에, [번뇌]
-> 그 믿음으로부터 행동[업]을 일으키고
-> 그것이 다시 고통의 결과와 악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고]
마치 어느 땅 밑에 황금이 없는데 있다고 믿는 이가
한 없이 땅을 파내려가면서 고통받고 다른 사람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한편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이해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아가 믿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고
의심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에 원인이 있다. [의(疑)]
이처럼 삶에 존재하는 고통과
그 원인을 살폈다.
이제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고통을 만드는 원인을 끊어 없애야 한다.
앞처럼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고통의 원인으로 보았다면,
이들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자신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고
그런 자신에 대해 지금껏 갖던 집착을 끊어 없애고 탐욕을 끊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수행방안이
바로 앞에서 살펴 본 부정관인 것이다.
- 집착을 버리는 방안 - 다음 글로
http://buddhism007.tistory.com/606
"불교수행-부정관_공부3.htm" o:/G/G/08/불교수행-부정관_공부3.htm
[ 주석 ]
참고
부정관에 관한 사전 내용
참고 36물에 관한 사전 내용
○ 부정관의 문제점- 경전 참고 내용
Ω♠문서정보♠Ω
™[작성자]™ Prajna Citta
◑[작성일]◐ 2011-11-금-25-[47weeks 329 days]-18:36
♨[수정내역]♨ 교정 2013-05-목-09-01-34
▩[ 디스크 ]▩ [DISK] o:/G/G/08/불교수행-부정관_공부2.htm
( 구본 ) o:/G/G/08\budr-00090.htm
ж[ 웹 ]ж [web] http://buddhism007.tistory.com/119
⇔[ 관련문서]⇔
"불교수행-부정관_공부1.htm" o:/G/G/08/불교수행-부정관_공부1.htm
http://buddhism007.tistory.com/120
http://buddhism007.tistory.com/119
"불교수행-부정관_공부3.htm" o:/G/G/08/불교수행-부정관_공부3.htm
http://buddhism007.tistory.com/606
( 삭제된 과거 링크 )
1 http: //blog.paran.com/buddhism007/46251364
2: http: //blog.paran.com/buddhism007/46345530
인터넷상의 목록 http://buddhism007.tistory.com/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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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Lab value 2011/12/17 11:22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이 길다고 하나,
제가 요새 만화 웹툰을 보는데 스크롤을 3시간 4 시간 계속해도 만화가 끝나지 않는 페이지가 있습니다.
10분 정도 읽으니 끝나는데 그리 길지 않군요^^
시체를 사랑해요~~사실 상대를 너무 좋아하면 상대의 배설물까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데요,,이것 치료하기 힘든 병이겠죠?
설사에 지사제를 너무 강하게 사용하면 다시 변비가 되고
변비에 완화제를 너무 강하게 사용하면 설사가 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군요.
오래전에 부정관 수식관을 닦으라고 권유를 해서,
수식관을 닦으니 잠이 잘 오고, 부정관을 닦으니 침대에서 자는 것이 조금 두렵습니다.
자꾸 시체가 떠올라서~~ 자비관의 설명을 후편으로 기대해 봅니다. ^^
Mun Tokyun 2011/12/17 12:25
긴 글 정리해 올리느라 고민을 많이 하시던지 올리셨군요
~~최근에 lab님이 prajna님 글 본 이후로 자꾸 우울하다고 하시더니, prajna님이 글을 늦게 올린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Pun tarika 2011/12/17 14:20
길가의 노숙자나 병든 노인 또는 미운 원수들을 대할 때는 첫사랑을 연모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고,
반대로 아름다운 이성을 대할 때는 거꾸로 시신이나 추한 모습을 떠올려 탐욕을 떨쳐 버리라.
이렇게 마음을 갖고 행할 때 올바른 중도의 선한 행위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분별과 집착을 떠나라는 명제는 반야경전의 핵심어구이기도 합니다.
조금 내용이 길어서 어지럽습니다만, 정리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당^^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2/01/03 18:42
매번 같은 내용을 앞에 입력하시는 것이 불편하실 것같아 조금 손 봤습니다.
처음이라 다시 손 보셔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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