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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6-15_불설부증불감경-K0490-001 본문
『불설부증불감경』
K0490
T0668
부증불감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불설부증불감경』
♣0490-001♧
부증불감
용어풀이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설부증불감경(佛說不增不減經)
원위(元魏) 북인도삼장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김달진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바가바(婆伽婆: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기사굴산 중에 큰 비구의 무리 1,250인과 함께 계셨다.
여러 보살마하살은 무량하고 무변하여 말하고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때 혜명(慧命)1) 사리불은
대중 가운데에서 곧 자리를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이르고,
이르기를 마치고서는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였다.
물러서서 한쪽에 앉아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일체의 중생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지금까지
6도(道)를 돌고 돌아
삼계(三界)를 왕래하면서
4생(生) 중에 윤회하여
나고 죽으면서 괴로움을 받음이 끝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중생의 모임[聚]과 중생의 바다에 더하고 덜함이 있습니까, ◂
더하고 덜함이 없습니까.
이 뜻은 깊고 감추어져 있어 저는 아직껏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이 저에게 물으면 마땅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이때 세존께서는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사리불아,
너는 일체 중생을 안온하게 하고,
일체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일체 중생을 가엾게 여기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며,
일체 중생과 모든 하늘과 사람을 요익하고 안락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나에게 이 깊고 깊은 뜻을 물었다.
사리불아,
네가 만약 여래ㆍ응공ㆍ정변지에게
이와 같은 뜻을 묻지 않았다면 많은 허물이 있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현재세(現在世)와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
모든 하늘과 사람 등 일체 중생은
깊이 쇠뇌(衰惱)하고 손해되는 일을 받고,
깊이 일체의 이익과 안락함을 잃기 때문이다.
큰 사견이란 이른바 중생계(衆生界)의 더함을 보고 중생계의 덜함을 보는 것이다. ◂
사리불아,
이 큰 사견을 가진 여러 중생들은
이 소견으로 해서
나면서부터 장님이며 눈이 없어,
이 까닭으로 긴 밤을 망령되이 사도(邪道)를 행하고,
이 인연으로 해서 현재세에서 여러 나쁜 세계[惡趣]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큰 험난이란 이른바 중생계의 더함을 취하여
굳게 집착하고 망령되이 집착하며,
중생계의 덜함을 취하여
굳게 집착하고 망령되이 집착하는 것이다.
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굳게 집착하고 망령되이 집착하는 이 까닭에
긴 밤을 삿된 도를 행하고
이 인연으로 해서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
나쁜 세계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여실하게 한 법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실하게 한 법계[一法界]2)를 보지 못하는 까닭에
사견의 마음을 일으키고,
중생계는 더하고 중생계는 덜한다고 말한다. ◂
사리불아,
여래가 세간에 있을 때
나의 여러 제자는
이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멸한 뒤,
5백 세를 지나면
많은 중생이 있고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으며
불법 중에서 수염과 머리털은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사문의 모양을 나타낸다 하여도,
그러나 그 안에는 사문의 덕과 행이 없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실로 사문이 아니면서 스스로는 사문이라고 말하며,
부처의 제자가 아니면서 부처의 제자라고 말한다.
더욱 스스로 설하여
‘나는 곧 사문이며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이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더하고 덜한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무슨 까닭인가.
여실하게 공의 견해를 멀리 떠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가 밝힌 바 초발심(初發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닦아서 모은 무량한 보리(菩提)의 공덕과 행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가 얻은 무량한 법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무량한 힘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무량한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래의 무량한 행처(行處)를 믿지 않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부사의(不思議)한 무량한 법의 자재(自在)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부사의하고 무량한 방편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무량한 차별의 경계를 분별하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래의 불가사의한 대비에 잘 들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대열반(大涅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
어리석은 범부는 듣는 지혜가 없는 까닭에
여래의 열반을 듣고서도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일으킨다.
단상(斷想)과 멸상(滅想)을 일으키므로 해서
중생계는 덜한다고 하고
큰 사견의 지극히 무거운 악업을 이룬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덜한다고 하는 견해에 의지하여
다시 세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세 가지 견해는
저 덜한다고 하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떨어질 수 없음이 마치 그물과 같다.
무엇을 세 가지 견해라 하는가.
하나는 단견(斷見)으로 필경에는 다한다 함이며,
둘은 멸견(滅見)으로 즉 열반을 말하며,
셋은 열반이 없다는 견해로
이 열반이란 필경은 공적(空寂)함을 말한다.
사리불아,
이 세 가지 견해의 이와 같은 얽매임과
이와 같은 집착과
이와 같은 접촉의
이 세 가지 견해의 힘과 인연으로 해서 전전하여
다시 두 가지 삿된 견해를 낳는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저 세 가지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떠나지 못함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말하는가.
하나는 탐욕이 없는 견해이며,
둘은 필경은 열반이 없다고 하는 견해이다.
사리불아,
욕망이 없는 견해에 의하여 다시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욕망이 없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떠날 수 없음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하나는 계(戒)를 취하는 견해이며,
둘은 부정(不淨)함 중에서 깨끗함을 일으킨다는 전도(顚倒)된 견해이다.
사리불아,
필경은 열반이 없다고 하는 견해에 의하여 또 여섯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여섯 가지 견해는 열반이 없다고 하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떨어질 수가 없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여섯이라 하는가.
하나는 세간(世間)은 시작이 있다고 하는 견해이며,
둘은 세간은 끝이 있다고 하는 견해이며,
셋은 중생은 환화(幻化)로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이며,
넷은 괴로움이란 없고 즐거움도 없다고 하는 견해이며,
다섯은 중생의 일이란 없다는 견해이며,
여섯은 거룩한 진리[聖諦]는 없다고 하는 견해이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더한다는 견해에 의지하여
다시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저 더한다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떠나지 못함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하나는 열반의 비롯함이 생겼다는 견해이며,
둘은 인연(因緣)이 없어 홀연히 있게 된다는 견해이다.
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중생으로 하여금
선법 중에서 원하는 욕심과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없게 한다.
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이 같은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키는 까닭에
참으로 칠불(七佛) 여래ㆍ응공ㆍ정변지(正遍知)로 하여금
차례로 출세하여 그를 위하여 설법하게 하여도
선법 중에서 혹은 욕심과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렇게 할 리가 없다.
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이는 곧 무명과 여러 미혹의 근본이다.
이른바 열반의 비롯함이 생겼다고 하는 견해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는데
홀연히 있다고 하는 견해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이는 곧 극악(極惡)한 근본적인 큰 환난의 법이다.
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에 의하여 일체의 견해를 일으킨다.
이 일체의 견해는 저 두 가지 견해와 서로 떨어지고 버릴 수 없음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일체의 견해란,
이른바 혹은 안(內)이며,
혹은 밖이며,
혹은 거칠고 혹은 가늘고,
혹은 중(中)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온갖 견해로서
이른바 더한다고 하는 견해이며 덜한다고 하는 견해이다.
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하나의 경계에 의지하며,
하나의 경계와 같고,
하나의 경계와 합하여,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는 저 하나의 경계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실하게 저 하나의 경계를 보지 못하는 까닭에
극악하고 크게 삿된 견해의 마음을 일으키며,
중생계는 더한다고 말하며,
중생계는 덜한다고 말한다.
이때 혜명(慧命) 사리불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곧 하나의 경계로서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가 여실하게 저 하나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실하게 저 하나의 경계를 보지 못하는 까닭에
극악하고 크게 삿된 견해의 마음을 일으키어
중생계는 더한다고 말하고 중생계는 덜한다’고 말합니까?”
사리불은 아뢰었다.
“좋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뜻은 깊고 깊어 저는 아직껏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원하오니 여래께서는 저를 위하여 해설하시어
요해(了解)함을 얻게 하십시오.”
이때 세존께서는 혜명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 깊고 깊은 뜻은 이는 곧 여래의 지혜의 경계이다.
또 이는 여래의 마음이 행하는 곳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깊은 뜻은
일체의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지혜로 알 수가 없는 곳이며,
볼 수 없는 곳이며,
관찰할 수가 없는 곳이다.
하물며 어찌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로서 능히 헤아리겠느냐.
오직 모든 부처와 여래의 지혜만이 있고,
곧 능히 이 뜻을 관찰하고 지견(知見)한다.
사리불아,
일체의 성문과 연각의 지혜는
이 뜻 중에서 오직 우러러 믿어야 하며 여실하게 지견하고 관찰할 수가 없다.
깊은 뜻이란 이는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제일의제란 이는 곧 중생계(衆生界)이다.
중생계란 이는 곧 여래장(如來藏)이다.
여래장이란 이는 곧 법신(法身)이다. ◂
내가 설하는 바와 같은 법신의 뜻이란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끊이지 않고
다르지 않음이
항하(恒河)의 모래 수에 지나는
불가사의한 불법이며
여래의 공덕과
지혜인 것이다.◂
사리불아,
세간의 등(燈)이 밝은 빛을 소유하고
접촉함이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음과 같이
또 마니보주(摩尼寶珠:如意寶珠)가 소유한 밝은 빛과 형상이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음과 같다.
사리불아,
여래가 설하는 바 법신의 뜻도 이와 같아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끊이지 않고
다르지 않음이
항하의 모래 수에 지나는 불가사의한 불법이며
여래의 공덕과 지혜인 것이다.
이 법신은 곧 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 법으로서
과거제(過去際)도 아니며 미래제(未來際)도 아니다.
두 가[邊]를 떠난 까닭이다.
미래제가 아니라 함은 멸하는 때를 떠난 까닭이다. ◂
여래의 법신은 항상하다.
다르지 않은 법인 까닭이며,
다하지 않은 법인 까닭이다. ◂
사리불아,
여래의 법신은 항상하다.
항상 귀의해야 할 것인 까닭이며,
미래제에도 평등한 까닭이다.
사리불아,
여래의 법신은 변하지 않는다.
멸함이 아닌 법인 까닭이며,
지음이 아닌 법인 까닭이다.
즉 이 법신이
항하의 모래 수에 지나는 무변한 번뇌에 얽혀서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지금의 세간에 수순하여 파도에 표류(漂流)하면서
나고 죽음에 왕래함을 이름하여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즉 이 법신이
세간에 나고 죽는 고뇌를 싫어해서 떠나고
일체의 모든 존재[有]의 욕구를 버리고서 10바라밀(婆羅蜜)을 행하고
8만 4천의 법문을 거두고 보리의 행을 닦는 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한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즉 이 법신이
일체 세간의 번뇌에 사역(使役)되고 얽힌 것을 떠나고,
일체의 괴로움을 지나고,
일체의 번뇌의 때를 떠나서 청정함을 얻고,
피안(彼岸)의 청정한 법 가운데 머무르고,
일체 중생이 원하는 땅에 이르고,
일체의 경계 중에서 구경(究竟)을 통달하여 다시 뛰어난 자가 없으며,
일체의 막힘을 떠나고 일체의 걸림을 떠나고,
일체의 법 중에서 자재한 힘을 얻는 것을 이름하여
여래ㆍ응공ㆍ정변지라고 한다. ◂
중생계를 떠나지 않고서 법신이 있고
법신을 떠나지 않고서 중생계가 있는 것이다.
중생계는 곧 법신이며,
법신은 곧 중생계이다. ◂
사리불아,
이 두 법은 뜻이 하나이면서 이름은 다르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내가 위에서 설함과 같이
모두가 진실로 같아서 다르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다.
무엇을 ★★세 가지 법이라고 말하는가.
하나는 여래장은 본래의 경계와 상응하는 체이며 청정한 법이다.
둘은 여래장은 본래의 경계와 상응하지 않으며 번뇌에 얽힌 청정하지 않은 법이다.
셋은 여래장은 미래의 경계와도 항상 평등하며 존재의 법이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법은 여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여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다.
지혜가 청정하여 진여의 법계는 부사의한 법이다.
비롯함이 없는 본래의 경계로부터 지금의 이 청정하고 상응하는 법체가 있다. ◂
사리불아,
나는 이 청정한 진여의 법계에 의지하여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설하여 불가사의한 법의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라고 한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근본 경계는 떠나서 벗어나
번뇌에 얽매인 청정하지 않은 법과 상응하지 아니하며
오직 여래 보리 지혜의 능히 끊는 바 된다. ◂
사리불아,
나는 이 번뇌에 얽매인 상응하지 않는 부사의한 법계에 의지하여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설하여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한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는 곧 일체의 모든 법의 근본으로서
일체의 법을 구비(具備)하여
세간의 법 중에서
진실한 일체의 법과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으며,
일체의 법을 주지하고
일체의 법을 거두는 것이다.◂
사리불아,
내가 이
항상하고 청량하고 변하지 않고 귀의하는
불가사의한 청정법계(淸淨法界)에 의지하여 설해서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이라 함은 이는
곧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항상하며 청정하고 멸하지 않으며
귀의하는 불가사의한 청정법계 등의 다른 이름이다. ◂
이러한 뜻인 까닭으로 해서
나는 그 법에 의하여 설하기를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이 세 가지 법은 모두가 진실하고 같아서 다르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
이 진실하고 같고 다르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법 중에서 구경을 다하여
극악과 불선의 두 가지 삿된 소견은 일으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실한 견해인 까닭이다.
이른바 더한다고 하는 견해와
덜한다고 하는 견해는
사리불아,
이 두 삿된 견해를 모든 부처와 여래는 필경 멀리 떠나고
모든 부처와 여래가 꾸짖는 바이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새와 우바이가 있어 혹은 하나의 견해를 일으키고,
혹은 둘의 견해를 일으키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그의 세존이 아니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나의 제자가 아니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둘의 견해를 일으킨 인연으로 해서
두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 속으로 들고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 속으로 든다.
나는 이들을 설하여 일천제(一闡提)4)라고 이름한다.
이 까닭에 사리불아,
너는 지금 마땅히 이 법을 배워 저 중생을 교화하고
두 견해를 떠나서 정도(正道) 중에 머물러야 한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법들을 너도 또한 마땅히 배워서
저 두 견해를 떠나 정도 중에 머물러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자,
혜명(慧命) 사리불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ㆍ보살마하살과
모든 천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 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사람인 듯 아닌 듯한 무리[人非人] 등
일체의 대중들이 모두 환희하고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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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구의 존칭.
지혜로써 생명을 삼기 때문이다.
2)
진여와 진심을 가리킨다.
일(一)은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뜻이다.
3)
명료하게 법성의 참뜻을 열어 보이지 못한 경전을 말한다.
4)
Icchāntika.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성(資性)을 결핍한 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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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reille Mathieu - Douce Nuit.lrc
일체의 중생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지금까지
6도(道)를 돌고 돌아
삼계(三界)를 왕래하면서
4생(生) 중에 윤회하여
나고 죽으면서 괴로움을 받음이 끝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중생의 모임[聚]과 중생의 바다에 더하고 덜함이 있습니까, ◂
만일 그 상황에서 앞에 절벽이 있는 것을 모른다고 하자.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reille Mathieu - Monsieur Lilas.lrc
위 내용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현실에서 영희가 자신 앞에 서있다가 100M 정도 떨어진 쪽으로 뛰어 가는 상황을 놓고 잘 판단해보자.
여기에 아상과 보특가라상(인상) 그리고 신견을 잘못 취하는 문제가 들어 있다.
여기서는
아상과 보특가라상과 관련된 내용을 최대한 간략하게 제시하고 마치기로 한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관련된 부분에 이어 나가기로 한다.
우선 이를 살피기 전에 다음 내용을 잘 파악해보자.
○ 과 ■ 이 있다고 하자.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 에는 ■ 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은 ○ 이나 ■ 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 에 ■ 이 없다는 의미다.
경전에서 무언가 얻을 수 없다거나 없다는 표현을 할 때
위 내용을 잘 이해하고 대해야 한다.
현실에서 수행을 통해 아상이나 인상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원래 아상이나 인상으로 가리켰던 그 내용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망상분별을 일으켜 그 부분을 그렇게 대하던 증상만 없어지는 것이다.
그 증상이 없어지면 그 망집 증상에 바탕해 행하던 업도 중지될 수 있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처음 그 내용으로 가리키던 그 내용이나 재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리불 존자가 처음 중생세계에 늘고 줆이 있는가를 묻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중생은 생사에 묶인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이 중생이 생사에서 벗어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중생세계에 그만큼 중생이 줄어든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는 망상분별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본래 처음부터 그런 자신이나 중생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여기고 임한 것뿐이다.
그래서 있다는 망집을 갖다가 이를 없앤다해도
본 상태자체는 처음부터 늘거나 줆이 없다.
그런데 본래 처음부터 그런 자신이나 중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이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자신이나 중생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있다.
그 내용 자체는 늘거나 줆이 없다.
다만 그런 내용을 대하면서
일반적으로 자신이나 중생으로 여기는 망상분별만 제거되는 것이다.
그 망집이 제거되면 그로 인한 업도 중지된다.
또 그 업이 중지되면, 생사고통애서도 벗어나 해탈을 하게 된다.
생사고통에서 해탈된다고 해서 늘고 줆이 없다는 내용을 이처럼 잘 이해해야 한다.
이제 현실에서 영희가 자신 앞에 서 있다가
100M 정도 떨어진 쪽으로 뛰어 가는 상황을 놓고
이 문제를 잘 판단해보자.
우선 이 상황에서 대부분 그 현실에 영희가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자신 앞에 영희가 서있다고 여기는 상황이 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이가 영희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은 영희라고 여기는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상황에 자신은 무엇인가라고 누가 묻는다고 하자.
그 경우 손가락으로 영희를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것이 현실에서 아상이나 타상[영희상]을 취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물론 자세히 살피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은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에 제시한 내용은 일단 눈을 떠서 대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그런데 색,수,상,행,식 전반에 걸쳐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이 그 성격이 같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렇게 판단하는 경우도 마찬가지 바탕에 있다.
그러그러한 내용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에 묶이는 기본적인 망집현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 배경사정이 대단히 복잡하고 깊다.
그래서 현실에서 설령 이런 망집을 갖지 않아도 외관상 큰 차이가 없다.
그렇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은 살아 있는 한 그대로 유지된다.
설령 어떤 수행자가 아라한의 상태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그가 아생이진 범행이립 소작이작 자지 불수후유 이런 식으로
해탈지견을 읆고 다니는 상황이라고 하자.
그렇다해도 다른 이가 그를 대하면 그 이전 상태와 별 차이가 없다.
또 신견을 제거하는 수행도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그 부분을 바탕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대하는 부분을 놓고
그런 망집을 제거한 가운데 그런 수행을 해나가는 점이 다르다.
여기에는 여러 사정이 있다.
신견은 이번 생을 출발하기 이전에 장착된 상태로 생을 출발하게 된다. [구생기 신견=태생적 신견 ]
그래서 설령 자신이 그런 분별을 행하지 않아도
여전히 평소 자신으로 여긴 그 부분은 그대로 유지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너무 바빠서 자신의 손이나 발을 의식하지 못하고
어떤 모임에 갔다고 하자.
그런 의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손과 발이 떨어진 가운데 모임에 가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은 이런 바탕에서 행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생사에 벗어난 후
다시 다른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할 경우도 사정이 같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이것이 방편선교를 갖고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과 관련이 된다.
그래서 외관상 생사현실에 망집을 바탕으로 임한 중생과 외관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실질적 차이가 크다.
한쪽은 그런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인다.
그러나 망집을 제거한 입장은 그 반대다.
생사에 묶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고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
이 문제를 처음 ○ 과 ■ 내용을 놓고 잘 이해해야 한다.
영희가 자신 앞에 서 있다가 100M 정도 떨어진 쪽으로 뛰어 가는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자신 앞에 서 있을 때는 자신과 거의 크기가 같다.
그래서 영희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그런 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이 현실에서 영희에 대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누가 자신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이와 비슷하게
한 정지단면에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된다.
이것이 결국 자신에 대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아상]
그런데 이제 영희가 100 M 정도를 뛰어 간다고 하자.
그래서 100 M 떨어진 상태에서 영희를 본다고 하자.
이 경우 자신의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게 보인다.
그리고 자세히 이 과정을 제시하면
매 순간 자신이 영희라고 여기는 그 모습은 그 크기나 형태가 달라진다.
그런데도 자신은 계속 매순간 그 각각의 모습을 영희라고 여기고 대한다.
비록 100M 달려가는 순간은 길지 않지만, 여기에 보특가라[윤회의 주체] 문제가 들어 있다.
매 순간 한 정지단면씩 이를 끊어서 살핀다고 가정해보자.
매 순간 정지단면마다 영희라고 여기는 그 모습과 크기나 형태가 다르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이처럼 각기 다른 모습과 크기를 다 영희라고 여기고 대하는가가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생사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이 문제를 현실에서 먼저 잘 해결해야 한다.
손가락 마디만한 영희에서 부터 자신 눈앞에 선 영희까지 모두 하나의 영희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 안에서 그렇게 여기게 하는 요소가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이 경우 그 답을 간단히 U 라고 처리하자.
물론 지금 그 구체적 내용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U 때문에
매순간 제각각 다른 크기 다른 형태인 그 모두를 다 영희라고 여긴다는 뜻이다.
이제 그 U가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는 한 정지단면에서 무언가를 붙잡고 영희라고 여긴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자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한순간 정지단면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내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갓난아이 때부터 청소년 장년 노년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이 모두를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만일 지금 이 순간 자신으로 여긴 내용을 자신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갓난아이 시절에는 그런 자신은 없다.
반대로 갓난아이 시절 그 갓난아이가 그 당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내용을 자신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런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는 없다.
그것은 육체적 내용이거나 정신적 내용이거나 사정이 같다.
사정은 그렇다.
그렇지만, 자신은 갓난아이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매 순간
모습이나 형태가 각기 다른 내용을 모두 묶어서 다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각 상황에서 다른 아이 다른 청소년
다른 장년 다른 노인은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형태로만 비교하면 갓난아이는 다른 갓난아이와 오히려 더 비슷하다.
또 노인은 다른 노인과 더 비슷하다.
그런데 자신은 특정한 갓난아이와 특정한 청소년. 특정한 장년. 특정한 노년의 모습을
모두 자신으로 여긴다.
그래서 다른 아이나 노인의 내용과 달리
이처럼 각기 다르면서도 특정한 내용만 모두 자신으로 취급하게 하는 내용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는 일단 막연히 U 라고 표현했다.
이제 그것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런 U의 문제를 생사과정에 적용하면 결국 보특가라의 문제가 된다.
즉, 이는 길게 보면 결국 생사윤회를 하는 주체의 문제다.
그런데 처음 아상과 보특가라상이 문제될 때
먼저 그것이 왜 잘못된 엉터리 망상분별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잘못된 분별이다.
그렇지만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잘못된 망집을 바탕으로 임하게끔 된다.
따라서 그렇게 묶이게 되는 그 배경사정까지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물론 그 내용이 엉터리다.
그런데도 그런 형태로 생사에 묶이게끔 되는 배경 사정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잘 이해해야 비로소 생사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앞 내용을 놓고 잘 생각해보자.
영희가 100M 뛰어가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영희가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대부분 현실에서 그렇게 그런 내용을 영희라고 여기고 살아갈 도리 밖에 없다.
이것이 근본 망집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이 그 주체를 생사에 묶이게 하는 기본 원인이다.
그래서 이 현실 상황을 놓고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는 수행과정에서 무상해탈삼매와 관련된다.
이것이 해결되어야 이후 업을 제거할 수 있다.
이는 무원무작해탈삼매와 관련된다.
한편 이 문제는 본 바탕인 실재와 관련되면 공해탈삼매와 관련된다.
이를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에 해탈이라고 표현한다.
우선 아상의 문제부터 살피자.
지금 이 현실 한 정지단면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자.
그리고 이 부분을 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가부터 검토해보자.
자세히 살피면 그렇게 자신으로 여기는 내용은
육체적측면과 정신적 측면에 걸쳐 광범위하다. [색,수,상,행,식,]
그런데 간단히 눈을 떠서 세상을 볼 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자.
이는 거울을 볼 때 무엇을 자신으로 여기고 옷을 입는가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책상이나 의자나 마네킹을 자신으로 여기고 옷을 입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먼저 그것부터 잘 찾아야 한다.
현실에서 분명 매순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것이 바로 망상분별이다.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표현이다.
그런데 이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이 질환 때문에 생사에 묶인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렇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에는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현실에서 이런 망집을 부정하고 생활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생사현실이 그런 상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뜨고 대하면 늘 그 부분을 대할 수 있는 잘못 여겨진다. [상]
주변 사물이나 풍경은 그렇지 않다.
있다가 없다가 한다. 그런데 그 부분은 늘 한 구석에 파악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면 그 부분이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그 부분은 자신 뜻대로 되어 즐거움을 주는 부분인 듯 여겨진다. [락]
책상이나 의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부분을 책상에 대면 그 상황에서 촉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몸이라고 여긴 부분은 주관이 위치한 부분으로 잘못 여기게끔 된다[아]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이 주관이 대하는 외부 세상 외부사물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즉 평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게끔 한다.
생사현실에 이런 사정이 이처럼 있다.
따라서 현실에서 이를 부정하고 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대단히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한 주체가 세상을 사는 동안 갖는 온갖 집착은
모두 여기에서 파생된다.
그리고 한 주체가 살아가는 동안 행하는 온갖 업도 이 망집에 바탕한다.
나중에 자신이 죽었다고 여기는 상황도 이런 부분이 사라지기에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이후 예를 들어 귀신[중음신]이 되어 활동할 때도 그 집착만큼 부작용을 받게 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Serge Reggiani - Le Vieux Couple.lrc
Lab value 불기2564/06/15/월/22:55
이제 아상과 보특가라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쉽게 이해하기 위해 쌍동이 형제를 놓고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특정한 갓난아이 - 특정한 청소년 - 특정한 장년 - 특정한 노년 모습
을 모두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런데 그가 지금 장년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이 한 정지단면에서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모습이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특정한 갓난아이보다는 그 당시의 쌍동이 다른 형제의 모습이 그와 더 비슷하다.
그렇다고 이를 자신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한편 현재 자신으로 여기는 내용을 기준으로 그 인과관계를 살펴보자.
이 경우 현재 자신으로 여긴 내용을 발생시킨 원인을 자신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또 현재 자신으로 여긴 내용이 발생시키는 결과물을 자신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한 주체는 매 순간 호흡을 한다.
또 때마다 식사를 한다. 그리고 배설을 한다.
이런 활동으로 생체를 구성시킨다.
또 이를 통해 활동을 해나간다.
그런데 지금 자신으로 여기는 것과 인과관계에 있는 내용들을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의 육체는 이전에는 배추밭이나 돼지 축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 자신의 정신 내용은 드라마 작가의 시나리오나 소설이나 서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는 마찬가지로 배설물이 흘러가는 곳을 따라 가야할 것이다.
이 변화과정에서 파악되는 모습들에서 늘 공통적으로 파악되는 A 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A에 순간 조금씩 덧붙여지거나 떨어져가는 것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A 를 대표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그런 것도 잘 파악되지 않는다.
갓난아이 - 청소년 - 청년 - 노년을 통해 공통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모두 무언가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자는 활동을 하는 생명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공통성은 벌레부터 양이나 소를 포함한 다른 생명들도 다 갖는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를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런 가운데
특정한 갓난아이 - 특정한 청소년 - 특정한 장년 - 특정한 노년 모습을 놓고
이를 모두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한편, 본래 갓난아이 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긴 내용을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런 자신은 지금은 사라져 없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갓난아이는 사망한 상태와 같다.
그러나 자신은 그 갓난아이의 제사나 기일을 정해 념하지는 않는다.
지금 자신도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렇게 매 순간 그 육체적 정신적 내용이 다른 각각의 내용을
하나의 자신으로 여기게 하는 요소가 무언가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이를 일단 U라고 하자.
그런데 이 논의의 결론을 먼저 잠깐 살펴보자.
현재 한 정지단면에서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있다.
이런 부분을 대해 자신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엉터리다.
그리고 단순한 엉터리가 아니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이게 되는 큰 문제다.
이제 여러 각기 다른 내용을 하나의 주체로 관하는 요소로 U 가 있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그 U 를 또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이것도 엉터리다.
그래서 이런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이런 분별이 잘못된 분별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한편 생사현실에서는 이런 분별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된다.
한 사람은 갓난아이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매 순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죽어간다.
그리고 이 전체 과정을 모두 자신이라고 여긴다.
이것도 엉터리다.
그런데 그렇게 매순간 여기게끔 되는 사정이 있다.
그리고 매생 그렇게 잘못 임하게끔 된다.
그렇게 되는 배경사정이 있다.
그 사정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망집상태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래야 생사고통을 겪게 만드는 정신질환이 해소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한 정지단면에서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을 ○ 라고 표시해보자.
그런데 그런 내용을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자.
이렇게 자신이라고 분별하는 그런 분별 내용을 ■ 로 표시해보자.
여기서 처음 ○ 은 ■ 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또 ○ 에는 ■ 이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평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신이 아니다.
그 부분에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
그런데 이 말은 다음 의미다.
○ 은 ■ 이 아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상황에 ○ 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 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상황에 ○ 도 있다. ■ 도 있다.
그런데 ○ 은 ■ 이 아니라는 의미다.
앞에서 말한 보특가라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 이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비유를 들어 살펴보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어떤 순간에
벽돌을 자신으로 여겼다고 하자.
비유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에는
레고블럭을 자신으로 여겼다고 하자.
이것도 비유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에는
진흙더미를 자신으로 여겼다고 하자.
이것도 비유다.
이제 경전에서 그런 망상분별을 가진 이에게
처음에 벽돌은 그가 생각하는 그런 자신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그가 그런 망집을 제거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그 상황에 벽돌은 그대로 있다.
심지어 그 상황에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면 그 벽돌만 따라 움직일 수 있다.
또 자신이 일으킨 자신이라는 분별도 그대로 있을 수 있다.
또 그 상황에 그전에 하던 것처럼 여전히 감각도 하고 분별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전과 후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는 벽돌은 자신이 아님을 이해하고 임하는 것이다.
위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 벽돌 - 레고블럭 - 진흙더미는
앞에서 든 갓난아이 - 청소년 - 장년 그런 상황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매 순간 그 내용이 달라지는 이들 내용을 한 주체로 여기는 사정도
이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수레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수레에 처음 벽돌을 싣고 갔다.
그런데 매 순간 벽돌에서 조금씩 흙이 떨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레고블럭이 하나씩 그에 얹혀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레고블럭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벽돌과 레고블럭을 비교하면 완전히 내용이 다르다.
그런데 이 매 순간 과정에서 망집을 일으킨 이는
그 각순간의 내용을 모두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벽돌 - 레고블럭 - 진흙더미 - 짚단 - 사기그릇
이런 식으로 각 내용은 달라진다.
그런데 여기에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
수레에 올려진 그런 내용을 놓고
그것을 매 순간마다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다는 점이다.
즉 매 순간 아상을 취해 대한다.
그런 가운데 그것이 상속되어 간다.
그리고 매순간 그처럼 아상을 취해 대했던 내용들을 나열하면
앞과 같은 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떤 한 정지단면에서 취한 내용조차도 올바른 내용이 아니다.
즉 자신이라고 할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그 점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매순간 그렇게 임하게 하는 그 바탕을 다시 살펴야 한다.
이 경우 그렇게 매순간 임하게 된 바탕을
실질적인 자신으로 다시 잘못 여기고 집착하게끔 된다.
예를 들어 위 비유처럼 계속 재료를 바꿔 싣고 다니는 수레와 같은 것이 있다고 하자.
또 그 수레위의 재료를 놓고 그런 망상분별을 하는 작용이 있다고 하자.
처음 재료가 자신이라고 여겼던 이는
이후에는 다시 이런 수레나 그런 작용을 붙잡고 또 진짜 자신이라고 집착하기 쉽다.
그래서 그런 망집도 다시 잘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망집을 제거한다고 해서
매 순간 그렇게 대하는 그런 내용이나 바탕 자체가 없어진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것이 곧 『불설부증불감경』에서 제시하는 '부증불감'과 관련된다.
어떤 이가 그런 상황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앞과 같은 바탕에서 수행을 시작한다.
또 생사묶임에서 벗어난 후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을 한다고 하자.
즉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임한다. 그리고 수행을 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경우에도 앞과 같은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해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죽 이어 무량겁에 걸쳐 잇는다고 하자.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는 경우와 별 차이가 없는 듯 여겨진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 제시한
방편선교[선교방편]으로 반야바라밀다를 현실에서 행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색수상행식의 상을 취하지 않고
색수상행식의 상에 머물지 않고
색수상행식의 상을 행하지 않고
그러나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반야바라밀다는 처음 ○ 는 ■ 이 아님을 잘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다 .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와 현실 내용의 관계도 이와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중요하다.
그 차이가 크다.
망집을 갖고 임하면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 주체는 그로 인해 좋음을 얻는다고 여기며 업을 행한다.
그런데 그 뜻과 달리 3 악도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장구한 기간 망집에서 바탕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런데 망집을 제거하면 이와 반대가 된다.
기본적으로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 해탈 ]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수명을 구족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임해 그런 바탕에서 중생을 제도해가게 된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상태로 성불해서 여래가 된다.
그런데 이는 현실 한 단면을 놓고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가 아닌가에서부터
그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위 내용을 잘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
망집을 일으키지 않고 상을 취하지 않고 생사현실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생사현실이 그럭저럭 견딜만한 경우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어떤 주체라도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을만한 상황에서는 이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 제시하듯 이유도 없이 가리왕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손과 발을 잘리우는 고문을 당한다.
이런 상황이 문제다.
이 상황에서 처음 벽돌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고 대한 비유를 잘 적용해야 한다.
아상을 갖고 임하면,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신체가 잘리운다고 하자.
그것은 비유에서 벽돌과 같은 것이다.
그래도 이를 통해 고통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견디기 힘들다.
또 그로 인해 대단히 고통받고 분노를 일으키게끔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집착하면 더 고통이 심해진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다시 업을 행하면 그 고통이 더 증폭되어진다.
그렇게 되면 설령 죽어 귀신이 되어도 그 부작용이 심해진다.
그런데 현실 한 단면에서조차도 그런 분별은 옳지 않다.
그래서 현실 한 단면에서부터 그런 분별이 왜 잘못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
이 내용은 과거에 많이 반복했다.
그래서 되도록 짧게 줄이고 과거 글을 정리해서 링크로 연결해 처리하기로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reille Mathieu - La Terre Promise.lrc
Lab value 불기2564/06/16/화/00:15
기존에 살핀 내용을 생략하고 넘어가려니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
그래서 처음 아상과 보특가라상에 대한 문제를 조금 더 살피기로 한다.
현실에서 눈을 떠 세상 모습을 본다.
이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먼저 잘 붙잡아 보자.
이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일 수 있다.
물론 자세히 보면 색수상행식 전반에 걸쳐 이런 분별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위 내용도 아상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취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 부분을 잘 확보해 둔다.
이제 그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는 앞에서 자신이라고 여긴 그 부분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정한 다른 감각도 하고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 두 순간만 보아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렇게 달라지는 가운데 여전히 계속 공통된 내용이 무언가를 먼저 찾아야 한다.
이것이 처음 제시한 U를 찾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 U 는 눈을 뜨고 대할 때도 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대할 때도 있다.
그런 것이 무언가를 먼저 기초적으로 찾아야 한다.
한편 이 문제는 다른 상황에서도 계속 같은 형태로 제기된다.
이제 일체 감각도 못하고 분별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마셔 의식을 잃은 경우도 있다.
또는 어딘가에 부딪혀 의식을 잃은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감각도 못하고 분별도 못한다.
그런데 옆에서 이 사람을 지켜보면 일정하게 호흡도 하고 몸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어난다.
이 전후를 놓고 또 앞과 같은 형태로 살펴야 한다.
처음에는 다른 감각활동이나 분별 활동을 그런 U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감각이나 분별 활동이 없어도 한 주체는 계속 존재한다.
그래서 의식을 잃은 상태 전후로도 계속 공통된 것이 무언가를 또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 실험은 다시 어떤 이가 사망해서 화장터에 들어가기 전과 후를 놓고도
또 비슷한 형태로 계속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자신이 고려할 삶의 기간은 화장터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고려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위와 같은 입장에서 공통되는 어떤 요소 U 를 찾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요소는 지금 이 한 정지 단면안에도 있다.
그리고 이 U 는 앞과 같은 여러 상황에서 계속 이어지고 공통되게 찾아진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 눈을 떠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그런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경전에서 제시하는 생사윤회 과정에서 한 주체를 잇는 요소가 된다.
한 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갓난아이와 청소년 장년 노년때의 모습이나 내용이 다르다.
그런데 이렇게 각기 다른 내용을 한 주체로 이어 관념하게 하는 요소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요소는 출생 직전과 직후에서도 그런 형태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사망 직전과 직후에서도 또 그런 형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량겁을 걸쳐서도 이 관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지금 이 순간의 한 단면 안에도 있다.
따라서 그것을 잘 찾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 다음과 같이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처음 눈을 뜨고 본 모습을 자신으로 여겼다고 하자.
그런데 몇번 실험하는 가운데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 것은
잘못된 판단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부분은 자신으로 여기게 하는 특성을 갖는다고 잘못 여겼다.
그런데 앞의 실험을 통해서 살피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그런 특성을 갖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집착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것은 예를 들어 정말 길거리에 놓인 돌처럼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부분이
그런 특성이나 관계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부분은 예를 들어 눈을 뜨고 임하는 한 그 부분이 계속 보인다.
그리고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면 그 부분이 따라 움직인다.
또 그 부분을 다른 부분에 대면 촉감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여러 경우를 놓고 살피면 그 판단은 옳지 않다.
그것은 예를 들어 눈을 뜨거나 분별하는 일정한 상황에서만 얻어진다.
그리고 눈을 감거나, 기타 다른 경우에는 그 내용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모두 자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생노병사 현상 자체가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한편 알고보면 이들 내용은 자신 마음이 얻어낸 내용물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얻는 주관이 아니다.
또 주관이 위치한 영역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잘못 여겨진 내용일 뿐이다.
현실에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부분을 의자등에 대면 촉감을 느끼는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부대상황의 관계다.
즉, 그 상황에서 동시에 함께 각 감관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 내용을 서로 관련지어 대상과 주관사이의 인과관계처럼 잘못 이해한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걸친 옷이 몸과 갖는 관계와 유사하다.
옷을 놓고 생각해도 위 내용이 다 적용된다.
그렇다고 옷을 자신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평소 자신으로 여긴 부분은 마치 사람이 걸친 옷처럼 여겨야 한다.
그리고 과도하게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다.
한편 앞과 같은 특성들을 가진 내용을 처음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자.
물론 그런 특성도 전혀 갖지 않는다면 집착을 가질 사정 자체가 없다.
그런데 그런 특성 때문에 일정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면 집착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런 특성을 가진 부분을 찾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위 실험 전반을 거쳐서 그런 특성을 갖는 부분은
차라리 앞 실험을 통해 찾아낸 U 가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처음 눈을떠 일정 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긴 입장은
이제 그런 U를 이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다시 집착하게 된다.
이 경우는 처음 문제가 된 그 정신질환이 한층 더 깊어진 상태가 된다.
그래서 처음 부분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처음 눈을 떠서 자신으로 여긴 부분을 ○ 라고 하자.
그리고 그 부분을 대하며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분별은 ■ 라고 하자.
그런데 처음에 다음처럼 제시했다.
'○ 은 ■ 이 아니다.'
'○ 에 ■ 은 얻어지지 않는다.[없다]'
한편, 앞에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갖는 특성을 나열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현실에서 그 ○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생활하게끔 된다.
그런데 ○ 부분은 ■ 이 아니라고 처음 제시한다.
그래서 그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제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정은 ○ 에는 ■ 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은 ○ 이다.
그리고 ○ 은 ■ 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 은 ○ 이 아니다.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의 정체는 감각현실이다.
즉 마음안 내용이다.
그것은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평소 자신이라는 분별은 관념분별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그리고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 을 ■ 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 부분에 자신으로 여기게 하는 특성이 있다고 여긴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늘 그 상태로 파악된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또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또 그 부분에 자신의 주관이 위치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다만 일정한 사정때문에 그렇게 여겨질 뿐이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갖는 사정을 잠시 걸친 '옷'에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그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평소 그 부분에 대해 일으켜 갖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앞처럼 잘못 여기게끔 되는 배경 사정이 있다.
이는 이번 생을 출발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망집과 관련이 된다. [3능변]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출발해 생사현실에 임하면
그런 관계성을 보게 되는 것 뿐이다.
그것이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걸친 옷'과 같은 특성을 갖는 배경사정이다.
따라서 이 배경사정까지 잘 이해해야 한다.
한편, 앞과 같은 특성으로 일정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차라리 앞 실험에서 찾은 U 를 그런 것이라고 여겨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앞에 나열한 특성이 모두 여기에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무량겁을 걸쳐 그 U는 이어진다.
갓난아이때부터 노인이 될때까지 매순간 모습이 달라져도 이 U 는 공통된다.
심지어 처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이 고통을 주면서 파괴되어도 여전히 이어진다.
한편 어떤 내용을 얻어내는 주관의 기능도 이 U 에 더 적절하다.
그래서 앞에 나열한 특성을 갖는 내용을 자신으로 여겨 집착을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집착을 이 U 로 옮겨가져오기 쉽다.
그런데 이 U 역시 처음 ○ 과 ■ 를 놓고 살핀 내용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이 U 역시 참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는 아니다. [무아 무자성 ]
그래서 처음 일으킨 망집을 여기에 옮겨 오면 안된다.
만일 이런 망집을 갖더라도 그로 인해 그런 생사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를 굳이 문제삼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을 문제삼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 실답지 않은 것이 많다.
잘못된 분별도 많다.
꿈이 대표적이다. 만화나 게임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그것으로 큰 고통을 오래 겪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굳이 문제삼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생사현실 과정에서 일으키는 위 망집은 사정이 다르다.
그런 망집을 일으키면 그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장구하게 생생하고 명료하게 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이것은 실답지 않지만, 꿈과는 달리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그 정도에 비례해서 수행을 통해 위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서
처음 ○ 은 ■ 이라고 여긴 망집이 근본 원인이 된다.
따라서 ○ 은 ■ 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매 상황에 ○ 이나 ■ 등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그 재료나 바탕 자체는 그대로다.
『불설부증불감경』에서 살피는 부증불감이 이와 관련된다.
망집을 제거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생사에 묶이지 않고 벗어나 해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상황에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본 바탕이나 재료에는 늘고 줆이 없다.
또 이는 생사에 묶인 상태에서 이후 생사에서 해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 전후에 없어지는 것은 잘못 일으킨 망집만 없어진다.
또 그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업이 중지될 수 있다.
또 그로 인해 겪는 생사고통이 제거되게 된다.
그러나 이 전후에 그 본 바탕이나 재료에 늘고 줆이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파악해야 한다.
망집의 제거와 생사고통의 제거에서는 주의할 부분이 있다.
망집을 제거해도 망집을 일으키게 한 바탕이나 재료가 바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된 망집만 제거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행하던 활동이나 감각분별은 계속 행해 진다.
단지 자신이 이전처럼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지 않고 대할 뿐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행하지 않게 된 것 뿐이다.
이를 『원각경』에서 눈병이 나서 보게 되는 허공의 꽃으로 비유한다.
허공의 꽃이 눈병 때문에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자.
그래도 허공의 꽃은 그대로 보인다.
다만 과거에 허공의 꽃을 진짜 꽃으로 여겨 집착을 가졌다면 그것이 제거된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이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 수행도 이런 바탕에서 원만히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런 망집을 제거했다고 해도 업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하자.
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비록 허공의 꽃과 성격이 같지만 반복해서 고통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원칙적으로 이 상황은 실답지 않다.
그런데 이론만으로 그 상황을 극복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끔 된 모습이 축생이라고 하자.
그리고 축사에 갇혀져 있다.
물론 그것은 실다운 자신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경전에서 제시한 내용들을 여기에 적용해보기로 하자.
모든 생사현실이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본래 이 상황에 그런 생멸이나 생사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 측면을 놓고보면 그런 현실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론상, 본 바탕의 측면을 100%나 99% 붙잡고 임하면
이 상황에서 얻는 감각이나 고통을 극복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런 이론만으로 그 상황을 쉽게 극복하기 힘들다.
매 순간 자신이 움직이려고 하면 그런 축생 형태가 움직인다.
그리고 각 경우에 고통스런 감각을 느낀다.
그래서 매 상황마다 그런 축생 모습 부분이 나인듯 여겨진다.
그런데 앞 내용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제시한 것이다.
즉, 그런 부분은 나라고 여길 특성이 사실은 없다.
그것은 본질이 마음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걸친 옷과 같은 관계일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꾸 여겨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여겨도 그 상황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즉 앞 내용을 이 상태에 적용해서
그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이것이 이론 그대로 그런 생사현실에서 적용된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상을 취하지 않는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취하지 않는다 .
그래서 극심한 생사고통이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평안히 참을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안인 수행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불퇴전위에 이르는 수행자가 넘어야 할 고비점이다.
그런데 쉽지는 않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10선법을 비롯해 계의 덕목부터 먼저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3 악도에 처해 이런 상태에 놓이는 것을 미리 예방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났다고 하자.
그리고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한다고 하자.
그 경우에도 수행자 자신이 생사고통을 겪을 상황에 놓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는 수행자 자신도 이론처럼 이론만으로 고통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는데에도 도움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중생과 얽혀서 생사고통을 더 증폭시키게 될 뿐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통해 수행자부터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위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과정에
위 이론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망집을 일으킨 바탕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을 어렵게 여기게 된다.
또 복덕자량을 얻는 수행도 어렵게 여기게 된다.
망집에 바탕해서 집착을 갖고 현실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것을 베푸는 수행부터 행하기 어려워 한다.
베풀면 그것이 없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른 수행도 마찬가지다.
집착하는 것을 얻고자 다른 중생에게 고통을 가한다.
그런데 그것을 중지하기 힘들어 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얻을 것을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으면 자신이 그것을 잃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편 거꾸로 자신이 침해를 받을 때 평안히 참지도 못한다.
그렇게 참고 있으면 자신이 그로 인해
계속 손해만 받고 결국 죽어 없어진다고 잘못 여긴다.
또 이미 없는 악을 만들지 않고, 이미 행한 선을 키우는 등의
정진도 행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계의 항목에 속하는 수행 자체를 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앞과 같은 망집을 제거하고 임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큰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원만히 중지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갈 수 있다.
그리고 업의 장애가 제거되면 복덕자량이 반대로 쌓이게 된다.
그러면 그 바탕에서 다시 지혜자량도 원만히 성취해갈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중생도 제도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할 수 있다.
그리고 끝내 법신을 증득해서 성불할 수 있다.
그런데 본 바탕에서는 이 어느 경우에도 늘고 줆이 없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이들 수행전반이 원만하게 성취된다.
과거에 이들 내용은 반복을 많이 했다.
따라서 자세한 내용은 관련된 부분에서 살피기로 하고 이만 마친다.
다만 과거에 이들 내용을 살필 때 붙였던 그림 자료만 참고용으로 붙이기로 한다.
대강 앞에 글로 제시한 내용을 다음 그림에 적용해 살피면 참고가 될 수 있다.
[img9]
08pfl--image/8식-9.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8]
08pfl--image/8식-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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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4/06/15 |
Guy Marchand - Amor Amor ○ 2019_1106_121206_nik_ct8.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iovanni-Battista-Piranesi-view-of-main-facade-of-the-antonine-column-in-six-tables-5 ○ 2020_0525_165628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ummer_Palace_scene_1
● 수용소 7단계전에 피하기
무엇이던지 위험이 예상되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대비책을 잘 세워야 한다. 구글맵 관광을 다니면서 각 지역의 위키백과 풀이를 참조하게 된다. 유럽 각지역을 살피면 과거에 유대인이 그 지역에서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가라는 내용도 제시된다. 그런데 과거 먼 유럽에서 일어난 이런 고통은 세계 곳곳에서 진행중인 사건이기도 하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조치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타임머신을 타고 가도 수용소 현장에 그 시간대에 도착하면 구출이 힘들다. 또는 수용소에 가는 기차에 올라탄 후 도착해도 구출이 힘들다. 수용소에 가기전 모여 있던 게토에 도착해도 힘들다. 어느 시점에 도착해야 구출이 쉽게 이뤄질 수 있을까를 그런 시점에서 살펴야 한다. 여기에는 짧게 보는 입장과 길게 보는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적어도 한 7 단계 전에는 도착해야 할 듯하다. 수용소 사건이 발생하기 한 10 년전에 들어가서 준비를 시켜야 할 듯하다. 길게 보는 입장에서는 500 년전 1000 년전 2000 년전 30000 년전 이런 시기로 들어가서 어떤 기본 삶의 자세부터 수정하게 하는 것이 나을 듯도 하다. 현재 남은 삶의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대부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데 본인과 비슷한 연령대는 짧게 보면 평균 10 년 길게 보면 그 이상 정도가 남았다고 추정된다. 사실은 올해 사망 통고가 와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생사과정도 이 내용과 성격이 같다. 처음부터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대비를 잘 하면 가장 좋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신견이나 망집을 바탕으로 할 경우에도 3 악도는 피해야 한다. 생사윤회에서 3 악도는 수용소와 성격이 같다. 기간도 대단히 길다. 그래서 미리 3 악도를 피할 준비를 해야 한다. 임종 직전에 그 준비를 시작하려고 하면 당연히 늦다. 그런 입장에서 본인이 과거 SNS 활동을 약간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대단히 비난을 많이 받았다. 결국 한 1 년간 활동하고 거의 대부분 탈퇴했다. 효과는 미미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마친 셈이다. 본인으로서는 더 이상 다른 방안이 없기에 나오게 된 것이다. 대부분 임종전까지 차는 굴러간다. 그러나 차가 멈추고 나면 별 대책이 없다. 그런 입장에서 다 함께 같이 잘 대비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지금이라도 다시 들어가서 좀 다른 대비 방안을 찾아볼까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역시 별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의 캐릭터가 이미 굳어져서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보다는 이제 본인부터 대비방안을 잘 찾아 실천을 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알고보면 이론적 대비 방안과 그 실천은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 para-end-retu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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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6/2564-06-15-k0490-001.html#4741 sfed--불설부증불감경_K0490_T0668.txt ☞부증불감 sfd8--불교단상_2564_06.txt ☞◆vacf4741 불기2564-06-15 θθ |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 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외도의 여러 주장을 분류하여 62종으로 한 것.
(1) 본겁본견(本劫本見)ㆍ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한 여러 가지 말을 62종으로 나눔.
답 후보
● 육십이견(六十二見)
육자명호(六字名號)
육파외도(六派外道)
윤왕칠보(輪王七寶)
율의(律儀)
음광부(飮光部)
응진(應眞)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불설부증불감경_K0490_T0668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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