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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8-09_변중변론-K0601-001 본문
『변중변론』
K0601
T1600
상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변중변론』
♣0601-001♧
상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용어참조]
[불교용어]
한글번역표현 => 불교용어
**맺음[結] => 결[結~번뇌]
** 행을 더함 => 가행
**행을 더함이 없음[無加行] => => 가행이 없음
착함에 세 가지 장애가 있나니,
첫째는 **행을 더함**이 없음[無加行]이요, => 가행이 없음
둘째는 그릇된 곳에 **행을 더함[非處加行]이요, => 비처 가행
셋째는 이치답게 않음에 **행을 더함[不如理加行]이다.=> 불여리 가행
** 제 나름 분별[遍計所執性] => 변계소집성
** 서로 의지성[依他起性] => 의타기성
** 두루 진실성[圓成實性] => 원성실성
허망한 분별의 대경에 의지하기 때문에 **제 나름분별**[遍計所執]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하며,
허망한 분별의 성품에 의지하기 때문에 **서로 의지함**[依他起]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한다.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공≻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두루 진실함**[圓成實]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함이다.
이미 허망한 분별의 포섭의 모양을 나타냈는지라,
곧 허망한 분별에 있어서 **모양 없는 방편의 모양[無相方便相]에 드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함이 있음[有爲:因緣所生의 事物]과 => 유위 [생주멸변화를 하는 ~]
**함이 없음[無爲:因緣所生이 아닌 것]의 법이니, => 무위 [ 생주멸변화를 떠난 ~]
6식[識]은 아는 모양이 **머트럽기** 때문이다.=> 머트럽다 => 麤 => 거칠다,
與我癡等,恒相應故。變似了者,謂餘六識了相麤故。『변중변론』 1권(ABC, K0601 v17, p.397b01)
** 임자 마음과 딸린 마음[心心所] => 심, 심소
『변중변론』 1권(ABC, K0601 v17, p.398a01)
기타 국어사전 및 불교사전 어디에서도 설명을 찾아보기 힘든 이상한 번역표현들
**그릇 누리[器世間] => 기세간
** 하욤[功用] => 공용
** 손티[客塵] => 객진 (손님+티끌)
** 손티에 더럽힘을 받게 되기 때문이니,
** 깨달음 갈래[覺分] => 각분
** 보리 갈래[菩提分] => 보리분
**편히 세움[安立]=> 안립
**벌려 세움[安立] => 안립
=>
이들 표현들은 한자어를 억지로 순한글 표현 형태로 풀어 번역한 표현이다.
이들은 원래 불교한자어로 표현해주고 필요시 주석으로 내용풀이를 덧붙여주는 것이 낫다.
예를 들어 이들 각 표현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 이렇게 표현하고 설명을 붙여주는 것이 낫다.
이들 불교용어를 한자어로 표현해주는 경우
적어도 불교 사전을 참조하면 해당 표현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함이 없음, 함이 있음, 행을 더함, 머트럽다. 딸림 마음, 제 나름 분별,
서로 의지성, 두루 진실성 이런 표현은 어느 사전을 찾아도 내용을 알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한글표현으로 원 표현이 갖는 의미 자체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문장안에 반복되면 이로 인해 문장 전체 의미 파악이 오히려 힘들게 된다.
변중변론(辯中邊論) 상권
세친보살(世親菩薩) 지음
현장(玄奘) 한역
한길로 번역
1. 변상품(辯相品)
이 논(論)을 지으신
선서(善逝)의 체소생(體所生:子)과
우리들을 가르치신 스승께 머리 조아리면서
부지런히 이 뜻[義]을 밝혀야 하겠다(釋論者의 歸敬頌)
이 가운데서는 맨 처음에 논의 체[論體]를 벌려 세우면서 게송으로 말한다.
다만 모양[相]과 장애[障]와 진실함[眞實]과
모든 다스림을 닦음[修對治]이며
곧 이 닦음의 나누어진 위치[修分位]와
과위를 얻음[得果]과 무상승(無上乘)만이다(總序)
≪논≫
이 논(論)은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뜻[七義]만을 설명한다.
첫째는 모양이요,
둘째는 장애요,
셋째는 진실함이요,
넷째는 모든 다스림을 닦음이요,
다섯째는 곧 이 닦음의 나누어진 위치요,
여섯째는 과위를 얻음이요
일곱째는 무상승이다.
이제 이 안에서는 먼저 그 모양[相]을 설명하면서 게송으로 말한다.
허망한 분별은 있고
이것에 두 가지는 도무지 없으며
이 안에는 ≺공(空)≻이 있을 뿐이요
그것에도 역시 이것만이 있다
≪논≫
‘허망한 분별은 있고’라고 함은,
취할 바[所取:感覺認識이 되는 것]와
능히 취함[能取:感覺認識을 하는 것]의 분별함이 있음을 말함이요,
‘이것에 두 가지는 도무지 없으며’라고 함은,
곧 이 허망한 분별에 있어서
영원히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두 가지 성품[二性]이 없음을 말한다.
‘이 안에는 ≺공≻이 있을 뿐이요’라고 함은,
허망한 분별의 안에는
다만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을 떠난
≺공≻한 성품[空性]만이 있음을 말함이요,
‘그것에도 역시 이것만이 있다고 함은,
곧 그 두 가지가 ≺공≻한 성품 안에서도
역시 이 허망한 분별만이 있음을 말한다.
만약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로 말미암아 자세히 살피어
≺공≻이 되고,
그 밖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대로 알아서 있는 것이 되는지라,
이와 같이 될 적에는 뒤바뀜이 없어서
≺공≻의 모양[空相]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
또 다음에 게송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공≻이 아니고
≺공≻ 아님[不空]도 아니라고 말하나니
있음[有]과 없음[無]과 및 있음[有] 때문에
이는 곧 중도(中道)에 꼭 들어맞는다
≪논≫
‘온갖 법[一切法]’이라고 함은,
모든 **함이 있음[有爲:因緣所生의 事物]과
**함이 없음[無爲:因緣所生이 아닌 것]의 법이니,
허망한 분별을 **함이 있음이라고 하고,
2취(取)의 ≺공≻한 성품을 **함이 없음이라고 한다.
앞의 이치에 의하기 때문에
이 온갖 법은 ‘≺공≻이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공≻한 성품과 허망한 분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공≻이 아니라고 한다.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성품[所取能取性]이 없기 때문에 ≺공≻ 아님이 아니라고 한다.
‘있음의 때문[有故]’이라고 ★★함은
≺공≻한 성품과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요,
‘없음의 때문[無故]’이라고 함은,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이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및 있음 때문에’라고 함은,
허망한 분별의 가운데에 ≺공≻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 ≺공≻한 성품의 가운데에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중도도 꼭 들어맞는다’라고 함은,
온갖 법은 한결같이 ≺공≻한 것이 아니고,
또한 한결같이 ≺공≻ 아님도 아니니,
이와 같은 이치야말로 미묘하게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등의
온갖 법에 ≺공≻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는 데에도 들어맞고 따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허망한 분별의
있음의 모양과
없음의 모양을 나타냈는데,
이것의 자기만의 모양[自相]을 이제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식[識]이 나서 변하여
뜻[義]ㆍ유정(有情)ㆍ≺나≻[我]와 알음[了]에 비슷하되
이 대경[境]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경이 없는지라 의식도 없다.
≪논≫
‘변하여 뜻[義]에 비슷하다’고 함은,
빛깔[色] 등, 모든 대경의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을 말함이다.
‘변하여 유정(有情)에 비슷하다’고 함은,
자기나 다른 이의 몸을 다섯 가지 감관[五根]의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을 말함이다.
‘변하여 ≺나≻[我]에 비슷하다’고 함은,
물들은 마나스[末那]가
≺나≻라고 하는 어리석음 따위와 언제나 서로가 응하기 때문이며,
‘변하여 알음과 비슷하다’고 함은,
그 밖의 6식[識]은 아는 모양이 머트럽기 때문이다.
與我癡等,恒相應故。變似了者,謂餘六識了相麤故。
『변중변론』 1권(ABC, K0601 v17, p.397b22-c04)
‘이 대경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라고 함은
뜻에 비슷하다 함과
감관[根]에 비슷하다 함과
알음에 비슷하다 함은
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실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대경이 없는지라 의식도 없다’라고 함은
취할 바 뜻[所取義] 따위의 네 가지 대경이 없기 때문에
능히 취하는 것의 모든 의식[能取諸識]도
역시 실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또 다음에 게송으로 말한다.
허망한 분별의 성품은
이 뜻으로 말미암아 실로 있음[實有]도
전혀 없음[全無]도 아님을 이룩하게 되나니
사라져서 해탈(解脫)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논≫
‘허망한 분별은 이 뜻으로 말미암아 실로 있음도 아님을 이룩하게 된다’고 함은,
나타나는바 그대로 생겨서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없음도 아님’이라고 함은,
그 안에서 적으나마 어지러운 의식[亂識]의 생기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 성품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인정되느냐 하면,
이것이 사라져서 해탈하게 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면 얽매임과 해탈은 모두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을 부정하여 버리는 실수를 이루리라.
이미 허망한 분별의 제만의 모양을 나타냈는지라 여기서는 포섭의 모양[攝相]을 이제 설명하여야겠다.
다만 이와 같은 허망한 분별만이 있어서 곧 갖춘 세 가지의 제 성품[自性]을 포섭하나니 게송으로 말한다.
오직
제 나름 분별[**遍計所執性]과
서로 의지성[**依他起性]과
두루 진실성[**圓成實性]만은
대경[境]이기 때문이요,
분별(分別)이기 때문이니
두 가지가 ≺공≻하기 때문에 말한다.
≪논≫
허망한 분별의 대경에 의지하기 때문에 **제 나름분별[遍計所執]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하며,
허망한 분별의 성품에 의지하기 때문에 **서로 의지함[依他起]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한다.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공≻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두루 진실함[圓成實]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함이다.
이미 허망한 분별의 포섭의 모양을 나타냈는지라,
곧 허망한 분별에 있어서 **모양 없는 방편의 모양[無相方便相]에 드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식[識]은 얻는 바가 있는 데에 의지하고
대경[境]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며
대경은 얻는 바가 없는 데에 의지하고
의식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긴다.
≪논≫
의식만은 얻는 바가 있는 데에 의지하기 때문에 먼저 대경에서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게 된다.
또 대경에서는 얻는 바가 없는 데에 의지하기 때문에 뒤에 의식에 있어서도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게 된다.
이런 방편으로 말미암아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모양 없음에 들 수 있다.
또 다음에 게송으로 말한다.
의식의 얻음이 있는 성품[有得性]도
얻는 바가 없음[無所得]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두 가지의 얻음이 있음[有得]은
얻음이 없는 성품[無得性]과 평등한 줄 알아라.
≪논≫
의식만이 나는 때에 나타나서 갖가지 허망한 경계에 비슷하기 때문에 얻는 바가 있다[有所得]고 한다.
얻는바 대경은 진실한 성품[實性]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진실한 성품도 이룩할 수가 없다.
얻을 수 있는 의식이 얻는 바가 없기 때문에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두 가지 얻는 바가 있는 것은 평등하여서
다 함께 얻는 바가 없는 성품[無所得性]을 이룬다.
허망한 분별의 모양이 없는 방편의 모양에 드는 것을 나타내 마쳤는지라,
이 차별(差別)과 다른 문[異門]과의 모양을 이제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 세계[三界]의 **임자 마음과 **딸린 마음[心心所]은
이야말로 허망한 분별인 것이니
대경을 아는 것만을 **임자 마음이라고 하고
또한 차별하는 것을 **딸린 마음이라 한다
≪논≫
허망한 분별에 대한 차별의 모양[差別相]이라고 함은,
곧 이는 **욕심 세계[欲界]와 **형상 세계[色界]와 **무형세계[無色界]의 모든 **임자 마음과 **딸린 마음이다.
다른 문의 모양[異門相]이라 함은,
대경의 온 모양[總相]을 아는 것만을 **임자 마음[心]이라고 하고,
차별도 아는 것을 느낌[受] 따위의 모든 **딸린 마음의 법[心所法]이라고 한다.
이제 다음에는 이것이 생기는 모양[生起相]을 말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첫째를 곧 연식(緣識)이라고 하고
둘째를 받는 이[受者]라고 하나니
이 가운데서 능히 수용(受用)하고
분별하여 추리함은 딸린 마음이다
≪논≫
‘인식’이라고 함은,
장식(藏識:阿賴耶識)이니,
이는 다른 의식을 내는 반연이기 때문이다.
장식을 반연으로 하여 생기는 바 전식(轉識:다른 七識)은
수용하는 임자[主]이기 때문에 ‘받는 이’라고 한다.
이 모든 의식 중에
느낌[受]은 능히 수용하고,
생각[想]은 능히 분별하고,
헤아림[思]과 뜻 지음[作意] 따위의
모든 서로 응함의 행[相應行]은 모든 의식을 추리하나니,
이 세 가지는 **임자 마음을 돕기 때문에 **딸린 마음이라고 한다.
이제 다음에는 여기에 섞여 더러움의 모양[雜染相]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가려 막음[覆障]과 **편히 세움[安立]과
거느려 인도함[將導]과
포섭함[攝]과 원만함[圓滿]이며,
세 가지 분별[三分別]과 받아 씀[受用]과
끌어 일으킴[引起]과 연달아 맴[連縛]이며
앞에 나타남[現前]과 괴로움의 결과[苦果] 때문에
이것만이 세간을 괴롭히나니
셋[三]과 둘[二]과 일곱[七]의 섞여 더러움[雜染]은
허망한 분별로 말미암아서이다
≪논≫
‘가려 막음 때문에’라고 함은,
무명(無明)이 사실대로의 이치[如實理]를 가려서 참된 소견[眞見]을 막음으로 말미암아서요,
‘편히 세움 때문에’라고 함은,
모든 **지어감[諸行]이 근본 의식[本識] 가운데에 업의 훈습[業熏習]을 심었기 때문이요,
‘거느려 인도함 때문에’라고 함은,
잡음[取]이 있는 의식[識]이 모든 유정(有情)을 이끌어서 태어나는 처소로 이르기 때문이다.
‘포섭함 때문에’라고 함은,
**이름과 물질[名色]이 유정의 제 몸[自體]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원만함 때문에’라고 함은,
여섯 가지 안의 감관[六內處:六處]이 모든 유정들의 몸을 두루 갖추게 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분별 때문에’라고 함은,
**닿임[觸]이 감관[根]과 대경[境]과 알음[識]의 세 가지를 분별하여 세 가지 느낌[三受]에 따르기 때문이다.
‘받아 씀 때문에’라고 함은,
느낌의 갈래[受支]가 순탄함[順]과 거스름[違]과 둘이 다 아님[非已:非順非違]의 경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끌어 일으킴 때문에’라고 함은 욕망[愛]의 힘이 먼저 지은 업에 끌리어 후생 몸[後有]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연달아 맴 때문에’라고 함은,
잡음[取]이 의식으로 하여금 따르는 욕심 따위를 반연하여 연달아 맴의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앞에 나타남 때문에’라고 함은,
존재[有]의 힘이 이미 지은 업으로 하여금 후생 몸의 모든 이숙의 과보[異熟果]를 붙잡아 주어서 앞에 나타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결과 때문에’라고 함은,
태어 남[生]과 늙어 죽음[老死]의 성품에 핍박함이 있고 먼저의 원인을 갚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열두 가지 인연[十二有支]만이 세간을 괴롭혀서 안온하지 않게 한다.
‘셋의 섞여 더러움[三雜染]이라고 함은,
첫째는 번뇌의 섞여 더러움[煩惱雜染]이니,
무명과 욕망[愛]과 잡음[取]을 말함이요,
둘째는 업의 섞여 더러움[業雜染]이니,
**지어감[行]과 존재[有]를 말함이요,
셋째는 나기의 섞여 더러움[生雜染]이니,
그 나머지 갈래이다.
‘둘의 섞여 더러움[二雜染]이라고 함은
첫째는 원인의 섞여 더러움[因雜染]이니, 번뇌와 업을 말함이요,
둘째는 결과의 섞여 더러움[果雜染]이니, 그 나머지 갈래들이다.
‘일곱의 섞여 더러움[七雜染]이라고 함은,
일곱 가지인[七種因]이다.
첫째는 전도인(顚倒因)이니 무명이요,
둘째는 견인인(牽引因)이니 지어감이요,
셋째는 장도인(將導因)이니 의식이요,
넷째는 섭수인(攝受因)이니 이름과 물질ㆍ여섯 가지 감관이요,
다섯째는 수용인(受用因)이니 닿임과 느낌이요,
여섯째는 인기인(引起因)이니 욕망과 잡음과 존재요,
일곱째는 염포인(厭怖因)이니 나기와 늙어 죽음이다.
이 여러 가지 섞여 더러움은
모두가 허망한 분별로 말미암아 생장하게 되지 않음이 없다.
이로부터 그 앞은 통틀어서 허망한 분별에 아홉 가지의 모양[九種相]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는 있음의 모양[有相]이요,
둘째는 없음의 모양[無相]이요,
셋째는 제만의 모양[自相]이요,
넷째는 포섭의 모양[攝相]이요,
다섯째는 모양 없는 방편의 모양에 듦[入無相方便相]이요,
여섯째는 차별의 모양[差別相]이요,
일곱째는 다른 문의 모양[異門相]이요,
여덟째는 생김의 모양[生起相]이며,
아홉째는 섞여 더러움의 모양[雜染相]이다.
이와 같이 이미 허망한 분별을 나타냈는지라
이제 다음에는 알 바의 ≺공≻한 성품[空性]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모양[諸相] 및 다른 문[異門]과
뜻[義]과 차별(差別)과 성립(成立)은
두 가지가 ≺공≻한 성품인 줄 알지니
간략히 말하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논≫
그러므로 알라.
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하는 것[能取]의 ≺공≻한 성품은
이 모양 따위의 다섯 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알 바의 ≺공≻한 성품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이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두 가지가 없고[無二]없음이 있기[有無] 때문이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며
다름[異]도 아니고 또한 동일함[一]도 아니니
이것을 말하여 ≺공≻한 모양이라고 한다
≪논≫
‘두 가지가 없다’고 함은,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이 없음을 말하며,
‘없음이 있다’고 함은,
두 가지 취함[二取]의 없음이 있음을 말한다.
이 ≺공≻은 성품 없음[無性]이 성품이 된다 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한 모양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둘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요,
무엇을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둘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이 ≺공≻한 모양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을 나타낸다.
이 ≺공≻은 저 허망한 분별과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다르다면
법의 성품[法性]은 다른 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바른 이치[正理]에 어긋나나니
괴로움[苦] 따위의 성품과 같으며,
만약 동일하다고 하면
깨끗한 지혜[淨智]의 경계도 아니고 공통된 모양[共相]도 아니어야 하므로
이는 곧 ≺공≻과 허망한 분별[忘相]과는 동일하거나 다르다고 하는 모양을 떠났음을 나타낸다.
알 바 ≺공≻한 성품의 다른 문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게송으로 말하리라.
≺공≻의 다른 문을 간략히 말하자면
진여(眞如)와 실제(實際)와
모양 없음[無相]과 뛰어난 이치의 성품[勝義性]과
법계(法界) 따위인 줄 알아야 하리라
≪논≫
간략하게 ≺공≻한 성품을 말하면 이런 다른 문이 있다.
어떻게 이 다른 문의 뜻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게송으로 말하리라.
변함이 없음[無變]과 뒤바뀜이 없음[無倒]과
모양의 사라짐[相滅]과
거룩한 지혜의 경계[聖智境]와
모든 거룩한 법의 원인[聖法因]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다른 문의 뜻은 다음과 같으니라.
≪논≫
곧 이 안에서 알 바의 ≺공≻한 성품을 말하자면,
‘변함이 없음’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진여(眞如)로 삼나니,
참다운 성품은 항상 그대로 이어서 바꾸어짐이 없기 때문이며,
‘뒤바뀜이 없음’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실제(實際)로 삼나니,
모든 뒤바뀜의 의지[依]와 반연[緣]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양의 사라짐’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모양 없음[無相]으로 삼나니,
이 안에서는 영원히 온갖 모양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거룩한 지혜의 경계’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뛰어난 이치의 성품[勝義性]으로 삼나니,
이는 가장 뛰어난 지혜로써 행할 바 뜻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법의 원인’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법계(法界)로 삼나니,
온갖 거룩한 법은 이것을 반연하여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계(界)라고 함은
곧 이는 원인[因]이라는 뜻이니,
≺나≻없음[無我] 따위의 뜻도 이런 이치와 같이 알아야 한다.
어떻게 ≺공≻한 성품의 차별을 알아서 하느냐 하면,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것은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이어서
때 있음[有垢]과 때 없음[無垢]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마치 물 경계[水界]와 온전한 허공[空]처럼
깨끗하므로 인정하여 깨끗함[淨]이라고 한다
≪논≫
≺공≻한 성품의 차별은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섞여 더러움이요,
둘째는 맑고 깨끗함이다.
이것이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이룩함은
나누어진 위치[分位]의 구별로 말미암아서이니,
때 있음의 자리[有垢位]를 말하여 섞여 더러움이라고 하고,
때[垢]를 벗어나게 되는 시기를 말하여 맑고 깨끗함이라고 한다.
비록 먼저 섞여 더러웠다가 뒤에 맑고 깨끗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바꿔지고 변하여 무상(無常)한 것으로 되는 허물은 아니다.
물 경계 등이 **손티[客塵]를 벗어나는 것처럼
≺공≻의 깨끗한 것도 그러하나니,
성품이 바꿔지고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공≻의 차별에는 다시 열여섯 가지가 있다.
안의 ≺공≻[內空]이요,
바깥의 ≺공≻[外空]이요,
안팎의 ≺공≻[內外空]이요,
큰 ≺공≻[大空]이요,
≺공≻의 ≺공≻[空空]이요,
뛰어난 이치의 ≺공≻[勝義空]이요,
함이 있음의 ≺공≻[有爲空]이요,
함이 없음의 ≺공≻[無爲空]이요,
마지막의 ≺공≻[畢竟空]이요,
가 없음의 ≺공≻[無際空]이요,
흩어짐이 없음의 ≺공≻[無散空]이요,
본래 성품의 ≺공≻[本性空]이요,
모습의 ≺공≻[相空]이요,
온갖 법의 ≺공≻[一切法空]이요,
성품이 없음의 ≺공≻[無性空]이며,
성품이 없는 제 성품의 ≺공≻[無性自性空]이다.
이들의 간략한 뜻을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하면,
게송으로 말한다.
능히 먹음[能食]과 먹을 바[所食]와
이 의지의 몸[依身]과 머무를 데[所住]와
능히 이것을 봄[能見此]과 그대로의 이치[如理]와
구하는 바 두 가지 깨끗함의 ≺공≻[二淨空]이며
언제나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나고 죽음[生死]을 버리지 않기 위하고
착함[善]의 다함이 없기 위하여
그 때문에 이를 살피어 ≺공≻으로 삼는다
종성(種性)의 맑고 깨끗함을 위하고
모든 좋은 모습[相好]을 얻기 위하고
모든 부처님 법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 때문에 보살은 ≺공≻임을 살핀다
≪논≫
‘능히 마음의 ≺공≻’이라 함은,
안의 처소[內處]에 의하여 말하는지라,
곧 이것은 안의 ≺공≻이다.
‘먹을 바 ≺공≻’이라 함은,
바깥 처소[外處]에 의하여 말하는지라,
곧 이것은 바깥의 ≺공≻이다.
‘이 의지의 몸’이라고 함은,
능히 먹음과 먹을 바의 의지하는바 몸인지라,
이 몸이 ≺공≻하기 때문에 안팎의 ≺공≻이라고 한다.
모든 **그릇 누리[器世間]를 말하여 ‘머무를 데’라고 하며,
이 모양은 넓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데,
머무를 데가 ≺공≻하기 때문에 큰 ≺공≻이라고 한다.
‘능히 이것을 봄’이라고 함은,
지혜가 안의 처소 따위의 ≺공≻함을 볼 수 있으며,
≺공≻의 지혜[空智]도 ≺공≻하기 때문에 ≺공≻의 ≺공≻이라고 한다.
‘그대로의 이치’라고 함은,
뛰어난 이치[勝義]를 말하나니,
곧 사실대로의 행[如實行]이며,
살피는 바 진리는 이것이 바로 ≺공≻하기 때문에
뛰어난 이치의 ≺공≻이라고 한다.
보살의 수행은 두 가지 깨끗함을 얻기 위해서이니,
바로 모든 **함이 있음[有爲]과 **함이 없음[無爲]의 착한 법이다.
이 두 가지는 ≺공≻하기 때문에
**함이 있음의 ≺공≻이라고 하고
**함이 없음의 ≺공≻이라고 한다.
유정들에 대하여 언제나 이로움을 지으려 하면서도
≺공≻인 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마지막의 ≺공≻이라고 한다.
나고 죽음은 길고도 멀어서 처음과 끝이 없는지라
이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가없음의 ≺공≻이라고 한다.
≺공≻임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빨리 싫어하며 버리겠지마는
이 나고 죽음을 싫어하며 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가없는 나고 죽음을 자세히 살피어 ≺공≻으로 삼는다.
닦는바 착함이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依般涅槃]의 지위에 이르러서도
흩어서 버리려 함이 없으면서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흩어짐이 없음의 ≺공≻이라고 한다.
모든 성스러운 종성은 제 바탕이 본래 있는 것이요,
익혀서 이루어지는 바가 아님을 말하여 본래 성품이라고 하는데,
보살은 이것을 빨리 맑고 깨끗이 되게 하기 위하면서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본래 성품의 ≺공≻이라고 한다.
보살은 보살[大士]의 좋은 모습을 얻기 위하면서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모습의 ≺공≻이 된다.
보살은 힘[力:十力]과 두려움 없음[無畏:十無畏] 등의 온갖 부처님 법으로 하여금
모두 깨끗할 수 있게 하기 위하면서
이것이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온갖 법의 ≺공≻이라고 한다.
이 열 네 가지 ≺공≻[十四空]은 차별에 따라서 벌려 세운 것이요,
이 중에서 어느 것을 말하여 ≺공≻이라고 하느냐 하면,
게송으로 말한다.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법(法)의
실제 성품[實性]은 다 같이 있음[有]이 아니며
이 없는 성품[無性]이 있는 성품[有性]이므로
따로 두 가지 ≺공≻[二空]을 세운다
≪논≫
보특가라와 법과의 실제 성품은 다 같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품이 없음의 ≺공≻이라고 하며,
이 성품이 없음의 ≺공≻은 제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공≻은 성품이 없음을 제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성품이 없는 제 성품의 ≺공≻이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능히 먹음의 ≺공≻[能食空] 등에 있어서
그 ≺공≻의 모양을 나타내기 위하여 따로 두 가지 ≺공≻을 세우나니,
이는 보특가라와 법과의
더욱 늘음의 고집[增益執]과 ≺공≻의
줄어 없어짐의 고집[損減執]을 막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그 차례대로 뒤의 두 가지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이미 ≺공≻한 성품[空性]의 차별을 나타내었다.
이것이 성립(成立)하는 뜻은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하면,
게송으로 말한다.
이것이 만약 섞여 더러움이 없다면
온갖 것은 저절로 해탈되어야 하고
이것이 만약 맑고 깨끗함이 없다면
**하욤[功用]은 결과가 없어야 하리
≪논≫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아직 다스림[對治]이 생기지 못하였어도
섞여 더러움을 용납함이 없다면
온갖 유정들은 **함에 말미암지 아니하고서 저절로 해탈되어야 한다.
만약 다스림이 이미 생겼어도 역시 맑고 깨끗하지 않다면
해탈하려 하여 부지런히 힘쓴다 하여도
결과는 없어야 한다.
이미 그렇다면 게송으로 말한다.
더러움[染]도 아니고 더럽지 않음[不染]도 아니며
깨끗함[淨]도 아니고 깨끗하지 않음[不淨]도 아니어서
마음의 성품[心性]은 본래 깨끗하지마는
** 손티[客塵]로 말미암아 더럽게 된다
≪논≫
어찌하여 더러움도 아니고 더럽지 않음도 아니냐고 하면,
마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깨끗함도 아니고 깨끗하지 않음도 아니냐고 하면,
**손티에 더럽힘을 받게 되기 때문이니,
이것이 ≺공≻의 차별을 성립하는 뜻[成立空差別義]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앞에서 ≺공≻의 뜻은 통틀어 두 가지가 있었으니,
모양[相]과 **벌려 세움[安立]이다.
모양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없음[無]과 있음[有]이어서
≺공≻한 성품의 있음의 모양[有相]은
있는 것도 여의고
없는 것도 여의고,
동일한 것도 여의고
다른 것도 여읜 그것을
그의 모양으로 삼는다.
빌려 세움은 곧 다른 문[異門] 따위인 줄 알아야 한다.
2. 변장품(變障品)
이미 그 모양을 말하였는지라,
장애[障]를 이제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전체 부분[具分]과 한 부분[一分]과
더욱 왕성함[增盛]과 평등함[平等]과
나고 죽음에 있어서 가지거나 버림[取捨]은
두 가지 종성(種性)을 장애한다고 말한다
≪논≫
전체 부분의 장애[具分障]인데 모든 보살 종성의 법 안에 있어서 골고루 다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한 부분의 장애[二分障]라고 함은 번뇌장을 말하는데 성문(聲聞) 종성 등의 법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더욱 왕성한 장애[增盛障]라고 함은 곧 저 탐냄 따위의 행[貪等行]이며,
평등한 장애[平等障]라고 함은 곧 저 평등한 부분의 행[等分行]을 말한다.
나고 죽음을 가지거나 버림[取捨生死]이라고 함은,
보살 종성으로서 얻게 되는 머묾이 없는 열반[無住涅槃]을 장애한다면
나고 죽음에 있어서 가지거나 버림이 있는 장애라고 하나니,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장애[五障]는
그 알맞은 바에 따라서 보살과 성문★★등의 두 가지 종성을 장애한다고 한다.
다시 다음에 게송으로 말한다.
아홉 가지 번뇌의 모양[煩惱相]이라 함은
사랑함[愛] 따위의 아홉 가지 맺음[九結]★★이니
첫째와 둘째는 싫어함[厭]과 버림[捨]을 장애하고
나머지의 일곱은 참된 소견[眞見]을 장애한다
頌曰:‘九種煩惱相 謂愛等九結 初二障厭捨餘七障眞見。 謂能障身見
『변중변론』 1권(ABC, K0601 v17, p.400b01-b03)
말하자면
몸에 대한 소견[身見]과 그의 일[事]과
사라짐[滅]과 도(道)와 보배[寶]와
이양 공경[利養恭敬] 따위와
멀리 여읨[遠離]과의 두루 앎[徧知]을 장애하기 때문이니라
≪논≫
번뇌장의 모양에는 간략하게 아홉 가지가 있나니,
사랑함 따위의 아홉 가지 **맺음[結]이다.
사랑함의 맺음[愛結]은 싫어함[厭]을 장애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순탄한 경계[順境]에 대하여 싫증 내어 여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냄의 맺음[恚結]은 버림[捨]을 장애하는지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거스르는 경계[遠境]에 대하여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곱 가지 맺음[七結]은 참된 소견[眞見]을 장애하나니,
일곱 가지 두루 앎[七徧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장애하기 때문이다.
**난 체의 맺음[慢結]은 거짓된 몸에 대한 소견[僞身見]의 두루 앎을 장애하나니,
현관(現觀)을 닦을 적에 간단 있게 또는 간단없이
난 체[我慢]함이 일어나므로 이 세력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명의 맺음[無明結]은 몸의 소견에 대한 일[事]의 두루 앎을 장애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저 다섯 가지 쌓임[五取蘊]을 모르기 때문이다.
소견의 맺음[見結]은 사라짐의 진리[滅諦]의 두루 앎을 장애하는지라,
사트카아야[薩迦耶]와 치우친 소견[邊執見]으로 말미암아
사라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삿된 소견[邪見]으로 말미암아 사라짐을 비방하기 때문이다.
**잡음의 맺음[取見]은 도의 진리[道諦]의 두루 앎을 장애하는지라,
다른 법을 취하여 깨끗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의심의 맺음[疑結]은 3보(寶)의 두루 앎을 장애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삼보의 공덕을 믿어 받지 않기 때문이며,
시새움의 맺음[嫉結]은 이끗과 공경 따위의 두루 앎을 장애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저 이의 과실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낌의 맺음[慳結]은 멀리 여읨[遠離]의 두루 앎을 장애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살림을 돕는 도구에 탐내어 집착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장애로서 열 가지 깨끗한 법[淨法]을 장애하는 것이 있나니,
그 모양이 어떤 것이냐 하면 게송으로 말한다.
**행을 더함이 없음[無加行]과 그릇된 곳[非處]과
이치답지 않음[不如理]과 내지 않음[不生]과
바른 생각[正思惟]을 일으키지 아니함과
양식[資糧]이 아직 원만하지 못함이며
종성(種性)과 착한 벗[善友]을 궐(闕)함과
마음이 극히 고달프고 싫증나는 성품과
바른 행[正行]을 궐함과
비루하고 나쁜 이와 함께 사는 것이며
뒤바뀐 거칠고 무거움[倒麤重]과 셋의 나머지와
반야(般若)가 아직 성숙되지 못함과
본래 성품[本性]의 거칠고 무거움과
게으름[怠惰]과 방일(放逸)과의 성품이며
존재[有]에 집착함과 재물[資材]에 집착함과
마음 성품의 낮고 열등함과
믿지 않음[不信]과 훌륭한 알음[勝解]없음과
말대로 하면서 뜻을 생각함[如言而思義]이며
법을 가볍게 하고 명리(名利)를 중히 여김과
유정에게 가엾이 여김이 없음과
들음이 모자람[圚聞]과 들음이 적음[少聞]과
미묘한 선정[妙定]을 닦고 다스리지 않음이다
≪논≫
이와 같은 것을 착함[善] 따위의 법의 장애라고 하는데,
장애를 받는 착함 따위는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착함[善]과 보리(菩提)와 섭수함[攝受]과
지혜 있음[有慧]과 어지러움[亂]도 장애[障]도 없음과
회향함[廻向]과 두려움[怖]도 아낌[慳]도 아님과
자재함[自在]을 착함 따위라고 이름한다
≪논≫
이와 같은 착함 따위의 열 가지 깨끗한 법[十種淨法]의 어느 것이
앞에서 설명한 것의 몇 가지씩 장애를 보유하느냐 하면,
게송으로 말한다.
이와 같은 착함 따위의 열 가지 것은
각각 앞의 세 가지씩 장애를 보유한다
≪논≫
착함에 세 가지 장애가 있나니,
첫째는 행을 더함이 없음[無加行]이요, => 가행이 없음
둘째는 그릇된 곳에 행을 더함[非處加行]이요, => 비처 가행
셋째는 이치답게 않음에 행을 더함[不如理加行]이다. => 이치에 맞지 않은 가행
보리에 세 가지 장애가 잇나니,
첫째는 착한 법을 내지 않음[不生善法]이요,
둘째는 바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不起正思惟]이요,
셋째는 양식이 아직 원만하지 아니함[資糧未圓滿]이다.
보리 마음[菩提心]을 내는 것을 섭수함[攝受]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세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종성을 궐함[闕種性]이요,
둘째는 착한 벗을 궐함[闕善友]이요,
셋째는 마음이 극히 고달프고 싫증나는 성품[心極疲厭]이다.
‘지혜 있음’이라고 함은, 보살을 말하는데
이 성품을 요달하는 데에 세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바른 행을 궐함[闕正行]이요,
둘째는 비루한 이와 같이 머무름[鄙者共住]이요,
셋째는 나쁜 이와 같이 머무름[惡者共住]이다.
이 안에서 비루한 이라고 함은, 어리석은 이들이요,
다른 이를 헐고 무너뜨리기 좋아하는 이를 나쁜 이라고 한다.
어지러움이 없음에 세 가지 장애가 있나니,
첫째는 뒤바뀐 거칠고 무거움[顚倒麤重]이요,
둘째는 번뇌 따위의 세 가지 장애 중에서 그 어느 하나의 남아 있는 성품이요,
셋째는 해탈을 성숙시키는 지혜가 아직 성숙되지 못한 성품이다.
장애가 끊어져 없어짐을 장애가 없다[無障]고 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의 장애가 있다.
첫째는 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있는 거칠고 무거움[俱生麤重]이요,
둘째는 게으름의 성품[懈怠性]이요,
셋째는 방일의 성품[放逸性]이다.
회향에 세 가지 장애가 없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다른 데로 향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無上正等菩提]에 향하지 않게 함이다.
첫째는 모든 존재[諸有]에 탐착함이요,
둘째는 재물[資材]에 탐착함이요,
셋째는 마음의 하열(下劣)한 성품이다.
두려워하지 아니함에 세 가지 장애가 있나니,
첫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를 '믿고 존중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법에 대하여 '**훌륭한 알음[勝解]"이 없음이요,
셋째는 말대로 하면서 뜻을 생각함[思義]이다.
아끼지 아니함에 세 가지 장애가 있나니,
첫째는 바른 법[正法]을 존중히 여기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명예와 이끗과 공경함을 존중히 여김이요,
셋째는 모든 유정에 대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음이다.
자재함에 세 가지 장애가 있어서 자재로울 수 없게 함이니,
첫째는 들음이 모자라서[匱聞] 모자란 법[匱法]을 받는 업을 생장시키기 때문이요,
둘째는 들음이 적음[少聞]이요,
셋째는 훌륭한 사마아디[三摩地]를 '닦거나 다스리지' 아니함이다.
또 다음에 이와 같은 모든 장애는
착함 따위[善等]의 열 가지에 있어서
다른 뜻에 따라 열 가지 능한 작용[能作]이 있나니,
바로 그 뜻에 의하여 이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열 가지 능한 작용이라고 함은,
첫째는 내서 일으킴에 능한 작용[生起作用]이니,
눈[眼] 따위가 눈 알음[眼識]에 대해서와 같음이다.
둘째는 편안히 머무름에 능한 작용[安往能作]이니,
**네 가지 먹기[四食]가 유정들에게 대해서와 같음이다.
셋째는 부지하여 줌에 능한 작용[任持能作]이니,
잘 부지하여 줌이 **그릇 누리[器世間]가 유정세간(有情世間)에 대해서와 같음이다.
넷째는 비추어 알게 함에 능한 작용[照了能作]이니,
광명이 모든 빛깔에 대해서와 같음이다.
다섯째는 변하여 무너뜨림에 능한 작용[變壞能作]이니,
불 따위가 익히는 것 따위에 대해서와 같음이다.
여섯째는 나누어 여의게 함에 능한 작용[分離能作]이니,
낫 따위가 베지는 것 따위에 대해서와 같음이다.
일곱째는 바꾸어 변함에 능한 작용[轉變能作]이니,
금공[金師]들이 금 따위를 바꾸어서 가락지와 팔찌를 만드는 것과 같음이다.
여덟째 믿고 알음에 능한 작용[信解能作]이니,
연기 따위가 ★★불 따위에 대해서와 같음이다.
아홉째는 나타내 알게 함에 능한 작용[顯了能作]이니,
인(因)이 종(宗)에 대해서와 같음이다.
열째는 증득함에 이름의 능한 작용[至得作用]이니,
거룩한 도[聖道] 따위가 열반 등에 대해서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 의지하는지라,
게송으로 말한다.
능한 작용에 열 가지가 있나니
생김[生]과 머무름[住]과 지님[持]과 비춤[照]과
변함[變]과 분리함[分離]과 바꾸어짐[轉變]과
믿고 알음[信解]과 나타냄[顯]과 증득함에 이름[至得]이다
알음[識]의 원인과 먹기[食]와 땅[地]과
등불[燈]과 불[火]과 낫[鎌]의 교묘함과
연기[烟]의 원인과 거룩한 도[道] 따위가
알음[識] 등에 있어서 짓는 바와 같으니라
착함 따위에 있어서의 장애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내서 일으킴에 장애[生起障]이니,
그 착함[善]에 있어서는 모든 착한 법으로서 내서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편안히 머무름에 장애[安住障]이니,
보리에서는 큰 보리[大菩提]로서 움직알★★ 수 없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부지하여 줌에 장애[任持障]이니,
섭수(攝受)에서는 보리 마음으로써 잘 부지하여 주기 때문이요,
넷째는 비추어 알게 함에 장애[照了障]이니
지혜의 있음에서는 지혜 있는 성품으로써 비추어 ★★알게 하여야 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변하여 무너뜨림에 장애[變壞障]이니,
어지러움이 없음에서는 헷갈려 어지러움[迷亂]을 바꾸어 없애는 것을 변하여 무너뜨림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나누어 여의게 함에 장애[分離障]이니,
장애 없음에 있어서는 이 장애에서 얽매임을 여의기 때문이요,
일곱째는 바꾸어 변함에 장애[轉變障]이니,
회향(廻向)에서는 보리 마음으로써 모양을 바꾸어 변하게 하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믿고 알음에 장애[信解障]이니,
두려워하지 아니함에서는 믿고 알음이 없는 이가 두려워함이 있기 때문이요,
아홉째는 나타내 알게 함에 장애[顯了障]이니,
아껴하지 아니함에서는 법에 대하여 아껴함이 없는 이라야 다른 이를 위하여 나타내 알게 하기 때문이요,
열째는 증득한 데 이름에 장애[至得障]이니,
자재함에 있어서는 이것이 바로 자재함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장애되는바 열 가지 법의 차례의 뜻[所障十法次第義]이라고 함은,
위없는 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려 하면 훌륭한 착한 뿌리[善根]을 먼저 내서 일으켜야 하고,
훌륭한 착한 뿌리의 힘에 부지하기 때문에 반드시 위없는 보리에 편안히 머무를 수 있다.
착한 뿌리를 더욱 자라게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큰 보리 마음을 일으켜야 하나니,
이 보리 마음은 보살 성품을 위하여 의지하는 바가 된다.
이와 같은 보살★★은 이미 큰 보리 마음을 일으켰음과 훌륭한 착한 뿌리 힘을 지니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어지러운 뒤바뀜을 끊고 어지러운 뒤바뀜이 없음[無亂倒]을 일으키나니,
如是菩薩,由已發起大菩提心,及勝善根力所持故,斷諸亂倒,起無亂倒。由見道中,無亂倒故。
『변중변론』 1권(ABC, K0601 v17, p.401b18-b21)
견도위(見道位) 중에는 어지러운 뒤바뀜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수도위(修道位)에 있어서 온갖 장애를 끊는다.
이미 장애를 끊고 나면 모든 착한 뿌리를 지녀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에 회향하며,
회향하는 힘에 부지함으로 말미암아 깊고 넓은 법에 대하여 두려워함이 없어진다.
이미 두려움이 없어진지라,
저 법에 있어서 뛰어난 공덕을 보고서 널리 다른 이들을 위하여 펴서 말하고 열어 보일 수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가지가지 공덕의 힘을 지녔기 때문에
빨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하고 온갖 법에 있어서 모두 자재함을 얻나니,
이것을 착함 따위의 열 가지 뜻의 차례라고 한다.
비록 착함 따위 법이
곧 이는 **깨달음 갈래[覺分]와 바라밀다[波羅蜜多]와 모든 자리[諸地]의 공덕이라 손치더라도
모든 것[總]과 따로의 것[別]이 다르나니,
이제 저 **보리 갈래[菩提分] 따위의 모든 장애의 차별을 나타내어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깨달음 갈래와 건넘[度]과 자리[地]에서는
따로[別]의 장애가 있는 줄 알지니라
≪논≫
다시 깨달음의 갈래와 바라밀다와 모든 자리의 공덕에 있어서는 저마다 따로따로의 장애가 있다.
보리 갈래[菩提分:覺分]에 따로의 장애가 있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일에 있어 잘하고 교묘하지 않음과
게으름과 선정에 둘을 줄게 함[定減二]과
심지 아니함과 파리하고 열등한 성품[嬴劣性]과
소견[見]과 거칠고 무거움[麤重]과의 허물이다
≪논≫
4념주(念住)에서는 모든 일[事]에 있어 잘하고 교묘하지 않는 장애[不善巧障]가 있으며,
4정단(正斷)에서는 게으름의 장애[懈怠障]가 있으며,
4신족(神足)에서는 사마아디[三摩地]의 두 가지 일을 줄게 하는 장애[減二事障]가 있다.
첫째는 욕근심관(欲勤心觀)을 원만히 함에 따라서 하나를 줄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덟 가지 끊음의 행[八斷行]을 닦고 익힘에 따라서 하나를 줄게 하기 때문이다.
5근(根)에서는 순해탈분(順解脫分)을 원만하게 하는 훌륭한 착한 뿌리를 심지 아니하는 장애가 있음이요,
5력(力)에서는 파리하고 열등한 성품의 장애가 있나니,
곧 5근이 장애에 뒤섞여짐으로 말미암아 파리하고 열등한 성품이 있음이요,
7등각지(等覺支)에서는 소견에 대한 허물의 장애가 있나니,
이것은 바로 견도위(見道位)에서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요,
여덟 가지 거룩한 도 갈래[八聖道支]에서는 거칠고 무거움에 대한 허물의 장애가 있나니,
이것은 바로 수도위(修道位)에서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저 언덕에 이름[到彼岸]에 있어서 따로 장애가 있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부귀(富貴)와 **착한 갈래[善趣]
모든 유정들을 버리지 아니함과
허물[失]과 덕(德)에 있어 줄어짐과 불음[減增]과
나아가 들게 함[趣入]과 해탈을 장애함과
보시[施] 따위의 모든 선행과
그지없음[無盡]과 끊임없음[無間]과
할 일을 잘 결정함[所作善決定]과
법을 수용하여 성숙케 함을 장애함이다
≪논≫
이것은 열 가지 바라밀다[十種波羅蜜多]로서
얻는바 결과의 장애[所得果障]를 설명함으로써
열 가지 바라밀다의 제 성품의 장애[自性之障]를 나타낸다.
보시(布施) 바라밀다에서는 부귀하고 자재함의 장애를 말함이요,
깨끗한 계율[淨戒] 바라밀다에서는 착한 갈래의 장애를 말함이요,
욕을 참는[安忍] 바라밀다에서는 유정을 버리지 않는 것의 장애를 말함★★이요,
힘써 나아가는[精進] 바라밀다에서는 허물을 줄이고 공덕을 불리는 것의 장애를 말함이요,
디야아나[靜慮] 바라밀다에서는 교화할 이로 하여금 법에 나아가 들게 함의 장애를 말함이요,
반야(般若) 바라밀다에서는 해탈의 장애를 말한다.
방편의 교묘한[方便善巧] 바라밀다에서는 보시 따위 선행의 다함이 없음의 장애를 말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여 보시 따위의 선행으로 하여금 다함이 없게 하기 때문이다.
소원[願] 바라밀다에서는 온갖 생(生) 동안에 선행이 끊임없이 바꾸어짐의 장애이니,
크게 소원하는 힘의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착한 법이 생(生)에 따르기 때문이다.
힘[力] 바라밀다에서는 할 일을 잘 결정하게 됨의 장애를 말하나니,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思擇力]과 닦아 익히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 장애를 조복할 수 있고 그것에게 굴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智] 바라밀다에서는 자기와 다른 이가 법을 수용하여 성숙시킴의 장애를 말하나니,
말을 들은 대로 하면서 뜻을 깨닫지 않기 때문이다.
10지(地)의 공덕에 있어서 따로 장애가 있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두루한 행[徧行]과 가장 훌륭함[最勝]과
훌륭한 종류[勝流]와 포섭함이 없음[無攝]과
서로 잇달아서 차별이 없음[相續無差別]과
섞여 더러움[雜染]도 맑고 깨끗함[淸淨]도 없음이며
가지가지 법의 차별이 없음[種種法無別]과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不增不減]과
아울러 분별함이 없는 따위의
네 가지 자재함의 의지[四自在依]의 이치이니라
이 열 가지 법계[十法界]에서는
물들지 아니하는 무명[無染無明] 이것이
10지의 공덕을 장애함이 있는지라
그러므로 열 가지 장애[十障]라고 하느니라
≪논≫
두루한 행[徧行] 등의 열 가지 법계 중에는
물들지 않는 무지[不染無知]가 10지(地)의 공덕을 장애함이 있나니,
다음과 같이 세운 것이 10지의 장애가 된다.
초지(初地)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所證法界]를 두루한 행의 이치[徧行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다른 이의 평등한 법의 성품을 증득하게 된다.
제2지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를 가장 훌륭함의 이치[最勝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생각하기를,
‘이 때문에 나는 이제 같이 벗어나는 온갖 행상(行相)에 대하여 두루 닦고 다스려야 하겠다’고 한다.
이것이 부지런히 닦아서 서로 응하게 벗어남[勤修相應出離]이 된다.
제3지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를 훌륭한 종류의 이치[勝流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듣게 되는 법은
이것이야말로 깨끗한 법계[淨法界]의 가장 훌륭함의 같은 종류[最勝等流]인 줄 알며,
이 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설령 수량이 3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만큼 많은 불구덩이가 있다 하여도
몸을 던져 가며 취하면서도 어렵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
제4지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를 포섭함이 없음의 이치[無攝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법의 사랑★★[法愛]까지도 모두가 바꾸어 없어지게 된다.
제5지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를 서로 잇달아서 차별이 없음이 이치[相續無差別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열 가지의 평등함에 나아가려는 깨끗한 마음[意樂平等淨心]을 얻게 된다.
제6지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를 섞어 더러움도 없고 맑고 깨끗함도 없는 이치[無雜染無淸淨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인연의 일어나는 법[緣起法]의 더러움이 없고 깨끗함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제7지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를 가지가지 법의 차별이 없음의 이치[種種法無差別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법의 모양 없음[無相]을 알며 계경(契經) 등의 갖가지 법 모양 안에 빠지지 않게 된다.
제8지 안의 증득하는바 법계를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의 이치[不增不減義]라고 한다.
이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생멸없는 법의 지혜[無生法忍]를 원만하게 증득하며,
모든 맑고 깨끗함과 섞여 더러움과의 법안에서 한 가지 법도 늘거나 줄지를 아니한다.
네 가지 자재함이 있나니,
첫째는 분별함이 없음이 자재함[無分別自在]이요,
둘째는 깨끗한 국토가 자재한[淨土自在]이요,
셋째는 지혜가 자재함[智自在]이요,
넷째는 업이 자재함[業自在]이다.
법계는 이 네 가지의 의지할 바[所依]가 되는지라,
네 가지 자재함의 의지할 바 이지[四自在所依止義]라고 한다.
제8지 안에서는 처음과 두 번째의 자재가 의지하는 이치를 통달하며,
제9지 안에서도 역시 지혜가 자재함의 이치에 통달한다.
걸림이 없는 알음[無碍解]을 원만하게 증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10지 안에서는 또 업이 자재함의 이치에도 통달하나니,
하고 싶어 함에 따라서
가지가지로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을
변화로 짓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간략하게 게송으로 말한다.
이미 모든 번뇌장(煩惱障)과
모든 소지장(所知障)을 설명하였나니
이 두 가지가 다하였기 때문에
온갖 장애[一切障]는 해탈되었다 하리라
≪논≫
이 두 가지는 온갖 장애를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다하였을 적에는 온갖 것은 해탈된다고 하리라.
앞의 장애의 온 뜻[總義]에는 열한 가지가 있다.
첫째는 넓고 큼의 장애[廣大障]이니,
전체 부분의 장애[具分障]를 말함이요,
둘째는 좁고 작음의 장애[狹小障]이니,
일 부분의 장애[一分障]를 말함이요,
셋째는 행을 더함의 장애[加行障]이니,
더욱 왕성함의 장애[增盛障]를 말함이요,
넷째는 증득함에 이름의 장애[至得障]이니,
평등의 장애[平等障]를 말함이요,
다섯째는 아주 훌륭함의 장애[隨勝障]이니,
나고 죽음을 취하거나 버림의 장애[取捨生死障]를 말함이요,
여섯째는 바르게 행을 더함의 장애[正加行障]이니,
아홉 가지 번뇌의 장애[九煩惱障]를 말함이요,
일곱째는 원인의 장애[因障]이니,
착함 따위의 열 가지 능한 작용에 대한 장애[十能作障]를 말함이요,
여덟째는 진실함에 듦의 장애[入眞實障]이니,
깨달음 갈래의 장애[覺分障]를 말함이요,
아홉째는 위없는 깨끗함의 장애[無上淨障]를 말함이요,
열째는 이의 차별에 나아감의 장애[差別趣障]이니,
십지의 장애[十地障]를 말함이요,
열한째는 포섭의 장애[攝障]이니,
요약하면 두 가지 장애[二障]를 말한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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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Edith Piaf - Exodus.lrc
● 이해하기 힘든 논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변중변론 상권을 읽어 보았다.
우선 변중변론이란 논서의 뜻을 살펴보자.
辯 (말씀 변/ 두루 미칠 편)
中 (가운데 중)
邊 (가 변)
論 (논할 론 /조리 륜)
이런 글자로 되어 있다.
여기서 邊 (가 변)은 있고 없음의 극단에 치우친 입장[허망분별+집착=망집상태]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양 극단을 떠난 중도에 바탕해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 내용에 대해서 설하는 논서를 변중변론이라고 칭한다.
이 논서에서는 실재의 공함과 있고 없음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수행에 장애되는 여러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게 서술이 되어 있다.
어려운 한자어표현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한자어를 순한글로 번역한 표현들도 이해를 어렵게 한다.
번역시 기존에 한국어에서 사용하던 표현이 있다면 그것으로 번역해도 된다.
그런데 그런 표현이 없는 경우 이것을 새로 한글로 풀어 번역하면
한국어로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이런 경우 해당 한문 원문을 일일히 대조해 살펴본 다음에 그 뜻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차라리 한자어로 표기한 다음 설명을 따로 붙이는 것이 낫다.
이렇게 하면 불교사전을 통해서라도 해당 표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하튼 이 논서는 내용도 어렵고 표현도 어렵다.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고 쉽게 설명할 방안을 찾게 된다.
그래서 일단 사진을 하나 따로 붙여 놓았다.
○ 2016_1008_131854_nik_exc.jpg
현실에서 보는 이런 풍광을 하나 놓고 위 논서 내용을 살펴보면 쉽다.
사진과 같은 곳에서 위와 같은 풍광을 본다고 하자.
여기서 눈을 감아보자. 보이지 않는다.
다시 눈을 뜨면 위와 같은 내용이 보이게 된다.
이처럼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다가 눈을 뜨면 보게 되는 내용을 ○ 이라고 표시하자.
위 사진에서는 위 사진 내용이 ○ 이다.
이것은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다.
감각현실에는 이외에도
귀를 통해 얻는 청각정보,
코를 통해 얻는 후각정보
혀를 통해 얻는 미각정보
몸을 통해 얻는 촉각정보가 있다.
그런데 이들 감각현실은 눈을 통해 얻는 시각정보와 성격이 공통한다.
그래서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 ○ 하나를 살펴서 위 5 가지를 같이 살필 수 있다.
이것은 경전과 논서에서 의타기상이라는 표현과 관련된다.
의타기상은 다른 것[타]에 의존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라는 의미다.
이런 시각정보는 앞 실험과 같이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눈을 뜰때만 얻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감각현실 ○을 외부 세계나 외부 대상 외부물질이라고 잘못 오해한다.
또 이를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모두가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인 것으로 잘못 오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에 얻어지는 마음안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점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이제 논서에서 허망분별이라고 표현하는 분별 내용을 살피자.
눈을 떠서 ○ 과 같은 내용을 얻고 난 다음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옆에서 누가 앞에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 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분별하게 된다.
그는 ○ 과 같은 내용을 얻고, 이를 배경화면으로 놓고
분별 영역에서 이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앞에 꽃이 있다. 나무가 있다.
영희가 있다. 철수가 있다. 그외 여러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몸도 일부가 보인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하게 된다.
이 분별을 ■ 이라고 일단 표시해보자.
경전과 논서에서 변계소집상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이와 관련된다.
변계소집상은 두루두루 헤아려서 집착하게 되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이 상태에서 감각현실 ○ 과 분별내용 ■ 의 차이를 먼저 살펴보자.
위와 같이 분별한 상태에서 눈을 감아보자.
그 상태에서 직전에 보던 감각현실 ○ 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 은 떠올려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전에 앞에 영희가 서 있었다.
꽃이 있었다. 이런 식이다.
이제 그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여전히 떠올린다고 하자.
망집 상태에서는 이 내용이 직전에 눈으로 본 내용과 무언가 비슷한 내용이라고 여기게끔 된다.
그래서 다음 실험을 이어 행해 보아야 한다.
우선 그렇게 떠올리는 생각 가운데 직전에 본 내용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찾아지는가를
스스로 확인해보기로 한다.
확인해 보면 없다.
즉 관념분별■ 에는 직전에 본 감각현실 ○ 이 하나도 얻어지지 않는다. 없다.
이제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면서 위 내용을 다시 확인해보자.
그런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눈을 떠서 얻는 감각현실 ○ 에는 관념분별 내용■이 얻어지지 않는다.
이 관계를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눈을 통해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이 부분 저 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관념분별 ■을 '일으켰다'.
그런데 ○ 에는 ■ 을 얻을 수 없다.
또 ■ 에서는 ○ 을 얻을 수 없다.
이 관계부터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 실재와 관해서 다음 문제를 살펴야 한다.
자신이 눈을 뜨면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그런 감각현실 ○ 을 얻지 못한다.
이제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즉 눈을 뜨면 나무나 꽃 영희 철수모습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데 자신이 눈을 감았다고 해서 이들 내용이 전혀 아무 것도 없게 되는가.
이런 문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다음을 답해야 한다.
자신이 눈을 감거나 뜨는 것과 관계없이
즉 자신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실재라고 표현하기로 하자.
그리고 이를 # 라는 기호로 표시해보기로 하자.
이는 경전과 논서에서 '원성실상', 또는 '원성실성'이라는 표현과 관련된다.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들 내용을 놓고
무엇이 허망분별이고 잘못된 망상분별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있고 없음에 치우쳐서 잘못된 극단적인 견해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 잘못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 나가면 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가.
이런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나가야 한다.
결국 이는 생사현실에서 각 생명(유정)이
생사고통을 극심하고 장구하게 받아나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첫 단계에서 이런 양 극단에 치우친 잘못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고통이 예방이 된다.
즉, 망집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이것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첫 단계에서 이를 예방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에서도 이에 바탕한 업을 제거하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첫 단계에서 제거하는 것이
결과가 발생하는 상태에서 제거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예를 들어 절벽에서 떨어져서 뼈가 부러진 상태가 있다고 하자.
이 상태에서 치료하는 것보다
미리, 절벽을 향해 걸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낫다.
그런데 절벽을 향해 걸어가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걸어가게끔 만드는 허망분별 즉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먼저 살피는 것이다.
실재#를 바탕으로 한 주체가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리고 나서 일정한 관념분별 ■ 을 일으킨다.
앞에서 보았듯 그 상황에 영희가 있다. 없다.
꽃이 생겨난다. 없어진다. 이런 등등의 분별이 그런 내용이다.
그 다음 이들 내용을 바탕으로 그 주체는 분별영역에서
다시 허망분별과 집착을 일으킨다.
즉 이 상황에 영희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망집에 바탕해 있음의 치우친 견해로 나아간다.
즉 그런 내용이 단지 분별영역에 그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 ○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감각현실 일정 부분을 취해서 그 부분이 바로 영희라고 잘못 여긴다.
이것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위 상황에서 그에게 영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고 하자.
또 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즉, 그는 그 상황에서 감각현실 ○ 의 일정부분이 그런 영희나 꽃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그처럼 취해 그런 ■ 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자신과 관련할 때는 ○의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임한다.
이것이 곧 아상이나 신견을 잘못 취하는 현상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일체가 허망한 망상분별이다.
이는 그런 내용 ■ 이 없는 부분을 그런 ■ 으로 잘못 여기고 대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즉 다음과 관련된다.
처음 그는 ○의 일정부분을 대해 일정한 관념분별■ 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는 이 상황을 다음처럼 오해하게 된다.
=>
그 감각현실 ○ 일정부분에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 '있다'
그 감각현실 ○ 일정부분은 곧 그런 관념분별 내용■ '이다'
이처럼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 꽃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 의 일정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처럼 그런 부분을 대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더 나아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 다음과 같은 망집을 증폭시켜 나간다.
예를 들어
그 감각현실 ○ 부분이 그런 모습을 얻게 하는 외부 대상[외경]이라고도 잘못 여긴다. =>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내용이다.
또 그 부분은 외부 세계의 한 내용이라고도 잘못 여긴다. => 그러나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또 그 부분은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마음과는 다른 외부 물질이라고 잘못 여긴다. => 그러나 마음안 내용이다.
또 그 부분은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모두가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여긴다. => 그러나 그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한편, 더 나아가 그런 ■ 내용은 본 바탕인 실재 #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사정 때문에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된 것으로 잘못 여긴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이 그처럼 분별하게끔 된 것으로도 잘못 여긴다.
이런 허망분별은 있음에 치우친 잘못된 견해다.
이는 자신이 분별한 내용 ■을 '실답게' '있는' 내용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다음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우선 자신이 일으킨 분별내용을 바탕으로
감각현실 ○ 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모두 실답게 여기며 대단히 집착하게 된다.
즉 자신이 감각현실 ○의 일정부분을 영희라고 보았다고 하자.
그 부분이 없어지면 영희가 그로 인해 크게 잘못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런 부분 ○ 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외 나머지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들을 실답게 여기며 대단히 집착하게끔 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매 경우 일정한 업을 도저히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래서 감각현실 ○ 일정부분을 취한다.
그리고 그처럼 상에 머물러 일정한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이후 그 바탕에서 그 결과로 일정한 상황에 처하게끔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심한 상황은 3 악도의 생사고통이다.
그런데 이런 생사고통은 앞과 같은 단계에 의한 결과다.
[ 혹[망집번뇌] => 업 => 고 ]
그래서 이를 방지하려면 첫 단계에서부터 망집을 제거하고 예방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실재# 와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사이의 관계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관념분별 ■ 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감각현실○ 과 관념분별■ 은 '있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우선 그 관념분별■ 내용은 실재# 나 감각현실 ○ 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관념분별내용 ■ 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의 꿈과 성격이 같다.
생생하게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더라도 침대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한편, 감각현실도 마찬가지다.
감각현실 ○ 은 그렇게 한 영역에서 얻는다.
그렇지만 본 바탕인 실재#에서도 얻을 수 없다.
또 다른 감각 영역에서도 얻을 수 없다.
눈으로 보는 내용 ○ 은 소리로 듣는 청각정보 ○ 에서도 얻을 수 없다.
청각정보도 마찬가지다.
청각정보는 눈으로 보는 내용에서나 촉각정보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다.
관념분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 감각현실 ○ 내용은 분별 영역에서도 얻을 수 없다.
이런 사정을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꿈의 비유를 통해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각 영역에서 얻는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은 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분별한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도 없다.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무소유]
특히 본 바탕의 실재는 한 주체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공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면
그는 또 자칫 '없음의 치우친 견해'로 나아가게 된다.
먼저 앞에서 제시한 무아 무자성, 공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어떤 영역에서 얻는다.
예를 들어 감각현실 ○ 은 감각영역에서 얻는다.
관념분별 ■ 은 관념영역에서 일으켜 얻는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그런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참된 진짜의 실체도 없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이들 내용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즉 감각현실 ○ 이나 관념분별 ■ 은 모두 실답지 않다.
이는 모두 마치 침대에 누어꾼 바다나 황금꿈가 같다.
그래서 집착하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바탕에서 이후 생사고통에 처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생사고통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방안이다.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상태에서는 이를 해결하기가 곤란하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그 이전 단계에서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가지 않도록 예방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에 처하게 되는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또 그러려면 업을 그렇게 행하게 만드는 망집을 기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취지에서 분별 내용 ■ 이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가 공함을 제시한다. [ 실재의 공함, 불가득, 불이법 ]
또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음을 제시한다.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그런데 이런 무아 공의 내용을 제시하면 이제 현실 내용이 모두 '전혀 없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 # 나, 감각현실 ○ 이나, 관념분별 ■ 이런 것들이
일체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러면 단순히 잘못된 망집을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지나친 극단을 다시 취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잘못된 업을 중지하는 데 그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선업과 수행 자체도 행하지 않는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실재 #의 공함은 있고 없음을 모두 떠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면 우선 그런 상태가 되기 쉽다.
또 이 공함이 생사현실에서 어떤 취지로 제시된 내용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게 되기 쉽다.
즉, 실재의 공한 측면만 붙잡고 생사현실을 대하면 또 그런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어도
생사현실 안에서 얻을 무량한 선법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이 양 극단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파악해서
올바로 수행하고 임해야 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생사현실에서 ○과 같은 감각현실을 그처럼 얻는다.
■ 과 같은 분별도 그처럼 일으킨다.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잘못된 망집을 일으켜서 '
자신이 일으킨 분별 내용 ■ 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집착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부분들이 문제다.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되도록 원인 단계에서 미리 해결해야 한다.
물론 망집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지만, 고통을 직접 받는 단계에서 벗어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쉽고 편하다.
이는 현실을 대할 때 있는 그래도 정체를 파악하고 대해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엉터리 잘못된 분별을 바탕으로 대하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그래야 잘못된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쌓여진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행도 원만히 성취하게 된다.
그래서 생사 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쓰고 나니, 기존에 제시한 내용을 다시 중복서술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경전이나 논서에서 수없이 반복해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laude Francois - Ya Le Printemps Qui Chante.lrc
Claude Francois - Ya Le Printemps Qui Ch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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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사교(化儀四敎). 천태종에서 석존 일대의 교설을 교화하는 법, 곧 교리의 내용에 의하여 4종으로 분류한 것. 장교ㆍ통교ㆍ별교ㆍ원교. ⇒<유사어>장통별원<참조어>장통별원(藏通別圓)ㆍ<유사어>천태사교<참조어>천태사교(天台四敎)
답 후보
● 화법사교(化法四敎)
화엄칠조(華嚴七祖)
확탕지옥(鑊湯地獄)
환상회향(還相廻向)
환희천(歡喜天)
회광반조(廻光返照)
회심(廻心)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변중변론_K0601_T1600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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